한국 야담 사화 전집 (차상찬)/해상의 쾌인 안용복

해상(海上)의 쾌인(快人) 안용복(安龍福)

안용복(安龍福)은 숙종대왕(肅宗大王)때 사람이니 경상도 동래(慶尙道東萊)에서 태어났다.

집안이 원래 가난한 탓으로 공부할 기회를 갖지 못하고 해변가에서 어려서부터 배타기에 종사하여 항해술이 능한 까닭에 일찌기 수영주군(水營舟軍)으로 뽑히어서 그곳에 복무하고 있었다.

그는 그렇게 일개 군졸(軍卒)의 천한 자리에 있었지마는 사람의 됨됨이가 대담하며 쾌활하고 적개심(敵愾心)이 강하여 자기의 의리에 틀리는 일이 있으면 비록 당장에 몸을 희생 할지라도 조금도 굴복하지 않고 어디까지든지 싸우며 또 말주변이 능하여 누구와 무슨 변론을 하게 된다면 대개 그를 설복시키고 그 밖에도 일본말(倭語[왜어])에 능통하므로 수영에서 왜놈들과 무슨 교섭이 있을 때면 대개 그를 썼다.

숙종 이십일년 을해(乙亥) 여름이었다. 그는 배를 타고 부산근해(釜山近海)를 항해하다가 뜻밖에 풍랑을 만나서 정처없이 먼 바다로 떠다니다가 우연히 울릉도(鬱陵島)에 표착하게 되었다.

그는 물론 울릉도행이 처음이지만 그곳이 당당한 우리나라 영토인 것은 이미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 가 보았더니 의외에도 일본어선(日本漁船) 일곱척이 와서 제 마음대로 고기를 잡고 있었다.

원래 적개심이 많은 그는 당장에 분한 마음이 솟구쳐서 그들을 보고 나무래 가로되

『외국 사람으로서 우리나라 땅에 들어와서 함부로 고기를 잡는 것은 절대로 허락치 않을 것이니 즉시 퇴거하라.』

고 요구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용복이 다른 사람의 후원없이 혼자인것을 업신여기고 그의 요구를 듣지 않을 뿐 아니라 도리어 그를 잡아 가지고 오랑도(五郞島 ─ 長崎前海[장기전해]에 있는 섬)라는 섬으로 갔다.

보통 사람 같으면 고독한 단신으로 그러한 곳을 가게되니 공포(恐怖)와 위험(危險)을 여간 느낄 것이 아니겠지만 대담 무적한 그는 도리어 생각하기를 내가 국가의 영토권 침해 문제를 가지고 싸울 것이지 무지한 몇 사람의 어부들과 싸우는 것 보다는 이 기회를 타서 위정자(爲政者)를 보고 한번 담판하여 그들도 하여금 다시 우리의 영토를 침해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하면서 오히려 무한히 기뻐하였다.

그리하여 용복은 오랑도에 갇힌 몸이 되어 그들에게 무한한 고초와 능욕을 당하면서도 조금도 괴롭게 생각하지 않고 다만 기회를 타서 한번 도주(島主)와 면회를 하여 자기가 주장하고 싶은 말을 다 하려고 고대(苦待)하고 있었다.

하루는 도주가 용복을 보고 묻기를

『너는 어찌 하여 울릉도에 있는 일본 어부를 쫓아 버리려고 하느냐.』

한즉 용복이 대답하되

『어느 나라를 물론하고 외국 사람을 그 나라 영토에 자유롭게 출입을 못하게 하는 것은 국법에 당연한 일이다. 울릉도는 원래 우산국(于山國)으로 옛날 신라시대(新羅時代)부터 우리나라에 속한 것은 역사상에 확실한 증거가 있을뿐 아니라 또 지리로 말 하더라도 울릉도가 우리나라에서는 하룻길 밖에 아니 되지만 일본과는 닷새가 걸리니 당연히 우리나라에 속할 것은 두말할 것도 없다. 조선 사람으로 내 나라 내 땅에 가는 것이 무슨 관계가 있으며 또 자기 영토안에 침입한 외국인을 가라고 한것이 무슨 잘못이 있느냐.』

고 유창한 일본말로 도도한 항변을 하니 처음에는 그를 굴복시키려고 톡톡히 별르고 있던 도주도 그의 조리있는 말과 강경한 태도에 크게 감복하여 감히 어찌하질 못하고 그만 호송(護送)하여 백기주(伯耆州)로 넘기었다.

용복은 백기주로 가서 그 주의 토주관(土主官)을 보고 더욱 강경한 태도로 일본 어부들의 불법한 행동과 또 오랑도주(五郞島主)가 자기에 대한 무례한 학대를 한 것 등의 여러 가지의 전후 사실을 들어 말을 하니 토주관이 크게 감격하여 용복을 융숭하게 대접하고 그의 분노를 풀어 주고 위로하기 위하여 은(銀)과 기타 여러 가지 선물을 주니 용복은 그것을 다 거절하고 말하되

『내가 원래에 뜻한 바는 이후로부터 영구히 우리 울릉도를 침해하지 않고 두 나라가 서로 국제적 위의(國際的威儀)를 상하지 말도록 하자는 것이지 그까짓 보물같은 것은 내가 바라는 바가 아니오.』

하니 도주가 더욱 그의 의(義)에 감복하여 드디어 관백(關伯)에까지 올려서 울릉도가 일본 땅이 아니라 한국 땅이란 것과 이후에 일본인이 그 땅에 침입하는 것을 엄금하겠다는 약정서(約定書)까지 작성하여 주고 또 용복에게 전후의 잘못된 것을 사과하였다.

일이 이와 같이 잘 진행되고 보니 용복은 자기의 소망을 성취시켰다하는 기쁨을 마음에 가득히 안고 고국으로 돌아 갈려고가을 떠났다.

창파만경(蒼波萬頃)에 외로운 배를 저어 하루 이틀 항해를 하다가 중도에 장기(長崎)에 들리니 장기의 도주는 본래 대마도주(對馬島主)로부터 안용복을 처치해 버리라는 내약이 있었으므로 용복을 잡아 가두고 가진 모욕과 학대를 하며 백기도주로부터 받은 약정서(約定書)까지 강탈하고 잡아서 대마도로 호송하였다. 그리고 강호막부(江戶幕府)에 그 의견을 물으니 막부에서는 다시 약정서를 보내주며 울릉도를 다시 침략치 말고 용복을 본국으로 잘 호송하라고 지령이 내렸다.

그러나 도주는 그 명령을 잘 듣지 않을 뿐 아니라 도리어 그 약정서까지 빼앗고 주지 않고 약 두 달 동안을 가두어 두었다가 다시 동래왜관(東萊倭舘)으로 호송하니 왜관에서는 또 한달반 동안이나 가두어 두었다가 마침내 동래부(東萊府)로 넘기었다.

그때에 동래부사가 만일 상당한 인물이었다면 그를 그저 돌려보낼 것이 아니라 그의 나라에 대한 충성을 극히 찬양하는 동시에 표창하며 또 한편으로는 대마도주와 강호막부에 엄중한 항의를 하였겠지만 동래부사는 원래 비겁한 인간이기 때문에 용복의 이제까지의 경과보고를 듣고는 혹시나 외국이 무슨 난리를 일으킬가 봐 염려하고 전전긍긍 하던 중 또 대마도주로부터 용복을 엄벌하여 달라는 청구가 있고 보니 더구나 무서운 생각이 나서 사실의 여하와 시비곡절의 여하는 묻지 않고 일개 천한 백성으로 대담하게도 나라 일에 간섭하여 외국과 문제를 삼는 것은 만부당한 일이라 하고 소위 범월(犯越)하였다는 죄명(罪名)아래 용복을 엄중한 형벌을 내리고 옥에 가두었다가 이 년 만에 석방하였다.

용복은 울릉도로 인하여 이와 같이 무한한 고초를 당하였지만 처음 먹은 마음을 조금도 변치 않고 기회가 있는 대로 부사와 기타 관원에게 울릉도의 영토원을 확립할 것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일반 관리들은 그것이 대마도주가 중간에서 장난하는 것이 아니라 강호막부에서 그러는 줄 알고 그것을 문제 삼다가 그 보다 더 큰 환란이 날까 염려하고 그저 잠자코만 있으니 용복은 더욱 분통하게 생각하고 그곳을 떠나 울산해변(蔚山海邊)으로 옮겨 가서 어떠한 좋은 기회만 오기를 엿보고 있었다.

하루는 울산 해변에 일본 상선(商船) 한척이 왔으니 그 배의 주인은 승려 뇌헌(僧侶雷憲)이라 하는 사람이었다.

용복은 그 사람을 이용하여 울릉도 문제를 해결하려고 거짓말로 꾀여 말하되 울릉도에는 해채(海菜)가 많은 곳이니 자기와 같이 가면 얼마든지 마음대로 딸 수가 있다고 하니 그 승려가 쾌히 승락하였다.

용복은 그 중과 같이 배를 타고 사흘 만에 울릉도에 다다르니 마침 일본 배가 동쪽으로부터 왔었다.

용복은 여러 사람에게 눈짓을 하여 그 배에 있는 사람을 모조리 묶어 놓아라 하니 여러 사람들이 모두 겁을 내고 감히 덤비지 못하므로 용복은 크게 분개하여 단신으로 그 배에 뛰어 올라서 남의 나라 땅에 함부로 들어 온 것을 책망하고 속히 퇴거하기를 요구하니 그 배는 할 수 없이 송도(卽[즉] 芓山島[자산도])란 섬으로 옮겨 갔다.

용복은 다시 송도까지 쫓아 가서 또 꾸짖어 말하되

『이 섬도 우리나라 땅이니 있을 수 없다.』

하고 장대(杖)로 솟(釜) 그 외 모든 도구를 때려 부시니 뱃사람들이 크게 놀라며 멀리 도망을 쳤다.

용복은 그길로 다시 백기주(伯耆州)에까지 가서 그곳 토주관을 보고 그 진상을 말하고 엄중히 항의하니 토주관이 자기 나라 주민들이 잘못한 것을 사과하고 울릉도에 갔던 사람을 모두 잡아다가 처벌하니 용복은 자칭 울릉도 감세관(監稅官)이라 하고 관청에 올라가서 그 토주관과 대좌하여 대마도주(對馬島主)가 여태까지 모든 일에 대하여 농간질을 한 것에 대하여 말한 후 우리 나라에서 일본 정부에 보내는 여러 가지 물건을 대마도주가 중간에서 협잡질을 하여 쌀 열닷 되(十五斗) 한섬을 일곱 되(七斗) 한 섬으로 하고 포목(布木)은 설흔 척(三十尺) 한 필을 스무 척(二十尺) 한 필로 하고 종이(紙)는 장지 한 축을 잘라서 세 축을 만들어 팔아 먹는 것도 관백(關伯)은 사실도 알지 못하고 있으니 당신은 나를 대신하여 그러한 사실을 관백에게 한번 보고하라 하니 토주관이 허락하였다.

그때 대마도주의 아버지는 강호(江戶)에 있다가 그 소문을 듣고 크게 두려워하여 백기도주에게 애걸하여 말하되

『조정(朝廷)에 만일 그러한 보고가 들어 온다면 나의 자식은 당장에 사형을 당할 터이니 당신이 중간에서 잘 조처하여 이런 화(禍)가 없도록 하여 달라.』

고 하였다. 토주관은 그의 말을 듣고 그 보고를 중지하고 용복에게 말하되

『구태어 그런 보고까지 하지 않더라도 당신의 목적만 달성하면 그만일 터이니 아무 염려 말고 속히 대마도로 가서 도주와 잘 협정을 하시오.』

하니 용복은 그 길로 대마도에 가서 도주와 상의하여 다시는 울릉도를 침범하지 않기로 약속을 하니 그 뒤부터 일본 사람이 다시 울릉도를 범하지 않고 울릉도가 완전히 우리 나라의 영토인 것을 인정하게 되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