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야담 사화 전집 (차상찬)/양봉래 모친
- 양봉래 모친(楊蓬萊 母親)
이조(李朝) 명종(明宗)때에 명필로 유명하던 봉래 양사언(蓬萊 楊士彦)이라면 별로 모를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의 부친 양민(楊旻)은 성종조(成宗朝)에 일찌기 문과(文科)를 하고 전라도 영광(全羅道 靈光) 군수가 되었다. (어떤 기록에는 양민(楊旻)을 인종 때 사람이라 하였으나 그 아들이 인종 이전인 중종(中宗) 십이년 정축(丁丑)년에 낳았으니 연대가 틀린 것이다.)
그당시 영광이란 곳은 호남(湖南)지방에서도 퍽 번화한 고을이었다. 양봉래의 아버지는 풍채 좋기로 당세에 유명한 인물이었다. 풍채 좋은 인물이 번화한 고을로 도임하는 그 호강은 여간 호화찬란하지 않았다.
신임 사또를 맞이하고저 하는 본 고을 관속의 차림에 풍채 있는 군수의 장속을 합하였으니 그야말로 으리으리 하였다.
때는 청명 한식(淸明寒食)이 다 지나고 삼월 중순을 접어 들어 일년 삼백육십일 중 가장 좋은 철이었다.
낡은 꽃떨기는 반 이상 시들어지고 길가에 늘어선 줄버들은 푸른 장막을 내리기 시작하였다.
동작강을 건너서 남태령을 넘은 군수는 서울의 경치 보다 시골의 그것이 한층 시원한 것을 칭찬하였다.
칠백여리 머나먼 길에 천천히 가는 그길은 여간 늘쩡거리지 않았다.
주막 주막마다 쉬면서 술마시기와 경치좋은 곳에 도달하면 일행은 길을 멈추고 글을 읊으기를 한다. 또는 풍류와 흥취에 겨워서 여간하여 그 곳을 떠날 줄을 몰랐다.
그리하여 보통 걸음으로도 빠듯이 치면 이레면 가고, 늦게 잡고도 열흘이면 넉넉할 이수(里數)를 보름 가까이 걸어 갔어도 아직도 백리나 너머 남았으니 얼마나 부임하는데 시간을 소비하였는가를 짐작 할 수가 있었다.
그러는 동안 도임 하기로 정한 날짜는 하루 저녁 밖에 남지 않았다.
이른 새벽에 술국으로 해장만 하고 떠난 그는 중로에서 주막을 만나지 못하여 배가 고프며 힘이 지쳐서 허리가 저절로 굽혀지는 것을 이길 수가 없었다.
주막을 찾으나 주막은 없고 고픈 배는 창자에서 소리가 나기 시작하여 아무리 체면을 보는 군수의 행차라도 체면을 돌아볼 여가가 없이 되었다.
시장기를 못이긴 군수는 관속을 시켜 촌으로 들어가서라도 아침 밥을 먹고 가게 하라고 분부하였다.
이런 분부를 받은 관속은 여간 황송하고 여간 민망하지 않았다.
서울 보다 한철이 이른 전라도 영광은 벌써 한참 바쁜 농사철이 되었다.
늙은이 젊은이 아이 어른 할것 없이 모조리 논이며 밭으로 일하러 나간 관계로 동리는 즐비해도 사람을 구경하지 못하여 아침 식사를 시킬 곳이 없었다.
관속은 이리 헤매고 저리 헤매다 다행히 집을 지키는 열 서너살 되는 처녀를 하나 만났다. 이 소녀를 보고 반긴 관속은
『얘 여기 어디 아침 밥 좀 시킬데 없니?』
하고 물었다. 이 말을 들은 그 소녀는
『그건 왜 물으셔요.』
하고 수집은 태도로 도리어 물었다. 관속은 황급한 말 소리로
『신관 사또 행차가 마침 이리로 지나가시는데 아침 진지를 못드리어서 여간 민망하지 않다. 주막은 없고 여염집에서라도 아침을 시켜서 일행이 먹고 가야 하겠는데 어찌할 도리가 없겠느냐.』
고 간청을 하다시피 말을 하니 그 소녀는 이 말을 듣고 고개를 푹 숙이다가
『이 바쁜 농사 짓는 시기에 겻 밥 때가 지났는데 웬 사람이 있읍니까, 정말 그렇게 딱한 사정이 계시면 저라도 해드리지요.』
하면서 공손히 응락을 하였다.
관속은 껄껄 웃으며
『네가 정말 밥을 잘 짓겠니,반찬에 먼지나 양념 처럼 넣고,밥에 모래나 집어 넣으면 내 볼기짝은 매끝에 피가 날 터이니 네가 그것을 대신 당할 터이냐.』
하였다. 계집애는 얼굴을 반듯이 들고
『저의 솜씨나 보실 일이지, 어리다고 탓을 하시는 것입니까, 제가 나이는 암만 어려도 국 끓이고 밥 짓는 법을 대강 배웠으니 시장 하시거던 아침 진지를 지어 드릴 터이니 우리 집으로 오십시오.』
하고 당돌한 태도를 보였다.
길가에 행차를 멈춘 군수는 멀리 관속과 그 소녀의 수작하는 맵시를 대강 보았다. 군수는 관속을 보고 모든 전말을 들은 후 그 소녀를 한없이 기특히 여겨 그 거동이나 구경 하리라 하고 그 집으로 일행을 이끌고 들어갔다.
오륙간 넓지 않은 집을 미리 깨끗이 치운 그 소녀는 군수를 안방으로 모시고 그외의 책방으로부터 육방 관속과 구종들을 모조리 앉힐대로 앉힌 후 이남박을 들고 토방으로 들어가서 쌀을 꺼내어 깨끗이 일어 앉히고 불을 한참 때는데 재티 하나도 방이나 봉당으로 날아 들어오는 일이 없었다.
밥이 다 끊은 후 질서가 정연하게 여러 상을 벌려 놓고 조금도 싫어 하거나 바쁜 기색이 없이 젓가락 숫가락 소리만 달각 달각 나더니 밥상을 차례로 드리는데 궁벽한 촌이라 산지해착의 별다른 음식은 없으나 깨끗하고 구수한 맛이 누구나 먹기 싫지 않을만 하였다.
군수는 이 밥상을 받고 그 소녀의 영리하고 숙성한 것을 내심으로 여간 귀히 여기지 않았다. 그나 그뿐일까, 물 심부름 상 심부름 하는 맵시가 조금도 촌 색씨의 수줍은 태도도 없고 또는 방정맞거나 건방진 태도도 볼 수 없었다.
『네 나이가 얼마냐?』
하고 물었다.
『열 세살예요.』
나직한 목소리로 소녀는 대답하였다.
『네 아버지는 누구며 네 어머니는 어디 갔니?』
『애비는 본관에 매인 몸이 되어서 벌써 구실치르러 들어갔삽고, 어미는 김매러 갔읍니다.』
군수는 그 소녀의 모든 행동이 하도 신통하여 소매속에서 청선홍선(靑扇紅扇) 두 자루를 꺼내어 주며
『이것은 내가 너에게 채단 대신 주는 것이다.』
하고 농담격으로 일렀다.
소녀는 급히 윗방으로 올라가 장속을 뒤져 조그만 홍보를 내다 놓고 부채를 보에 놓라고 청하였다.
군수는 도리어 의심이 나서
『이 보는 무엇하니?』
하였더니 그 소녀는
『채단은 예폐(禮幣)이요, 예는 폐백 바치는 것이 제일 중한 일이올시다.
어찌 맨손으로 주시고 받을 수 있읍니까.』
하니 그 일행은 모두 놀래었다.
군수는 관속을 시켜 후히 행하한 후 영광읍으로 도임하여 그럭 저럭 수삼 년을 지내는 동안에 그 일은 모두 잊고 있었다.
하루는 본관 하인이 들어와
『장교(將校)의 아무개가 뵙기를 원한다고 합니다.』
고 말을 하니 군수는 그자를 불러
『네가 무슨 까닭으로 나를 보러 왔노.』
하고 물었더니 그 장교는 허리를 굽으려 절하고
『사또께서 어느해 연분에 어느 동리를 지나시다가 아침 진지 잡수시고 오신 일을 기억하십니까?』
하고 물었다.
『어찌 잊겠니, 그때 그 계집애의 영리함을 지금도 못 잊는다.』
『그때 사또께옵서 무슨 선물을 주신 일이 계십니까?』
군수는 이상히 생각하고
『내가 그때 그 계집애를 사랑하여 색선(色扇)으로 상준 일이 있다.』
하였다.
장교는 휘 ─ 한숨을 쉬며
『그 계집애는 소인의 딸이 올시다. 지금 나이 열여섯이온데 어디로 시집을 보내려고 하였더니 딸년이 한사코 시집가기를 싫어하며 이미 폐백을 영광사또에게 받았으니 다른 데는 시집가지 않겠다고 합니다. 소인이 일시의 일로 고집할 것이 무엇이 있겠느냐고 달래며 타 일러도 듣지 않고 한사코 다른 곳으로 안갈려고 고집을 떨고 있사오니, 애비 어미된 사정으로는 여간 딱하고 안타까운 지경이 아니올시다.』
고 말 하였다.
군수는 껄껄 웃으며
『네 딸의 그 뜻을 내가 저버릴 수 있느냐.』
하고 좋은 날을 택하여 혼인을 하여 양첩(良妾)을 삼았다.
그러자 군수의 정실(正室)은 돌아가고 그 소실이 정부인으로 되어 살림 살이의 크고 적은 일을 다 주장하는데 제사를 드리거나 손님들을 접대하는데 여간 능난하지 않아 조금도 서투르고 어색한 점이 없었다.
군수는 임기가 다 차서 서울로 올라왔는데 그 집의 일가 친척과 상하 노복이 모두 그 부인의 숙덕(淑德)에 탄복 하여 칭찬을 하였다.
어느덧 아들 형제를 낳았으니 유명한 봉래양사언(蓬萊 楊士彦)과 양죽재 사기(楊竹齎 士奇)이다.
그때만 하여도 적서(嫡庶) 구분이 너무 심할 때라 친척이나 친구들이 양봉래 형제의 재주와 풍채를 흠모하고 그 지위의 미천함을 한탄하더니 양봉래의 부친이 돌아가니 양봉래의 모친은 습련(襲殮)의 절차를 모조리 보살피어 유감이 없이 하고 성복(成服) 날이 되어서 집안 식구를 불러 놓고
『오늘 성복을 당하여 온 집안이 다 모이고 상제 들이 다 모인 곳에 내가 평생 소원하던 것을 말할 터이니 들어 주겠읍니까?』
하며 울며 물어 보았다.
맏상제 되는 사준(士俊)이
『서모가 우리 집에 들어와 평생 아버님의 뜻을 거슬림이 없고 또 우리들을 키웠으므로 우리가 항상 서모의 숙덕을 탄복하는 터이니 소원을 말씀 하십시요. 저의가 어찌 안 들을리 있겠읍니까.』
하고 허락하였다. 봉래의 어머니는
『첩(妾)이 두 아들이 있고 그것들의 사람됨됨이 용렬하지 않으나, 우리나라 풍속이 서얼을 대하여 써 먹을 곳이 없고 큰 형님들이 아무리 무관하게 사랑하나 나 죽은 뒤에 큰 아드님은 섣달 애복(哀服) 밖에 안 입으 실 터이니 아무리 한들 그것들 형제가 남의 집 서자 소리를 면할 수가 있겠읍니까. 내가 지금 영감의 성복날 목숨을 자르면 복제가 혼동하여 남들은 모를 것이외다. 또 아드님과 집안 사람의 입으로 아무개가 서자란 소리만 안 하면 나는 죽어도 구천(九泉)의 아래서 한이 없겠소이다.』
하고 품속으로부터 감추었던 칼을 꺼내어 목을 찔렀다.
양봉래가 시(詩)와 글씨에 이름이 높고 이조시대에 유명한 인물이 된 것이 그 어머니의 사랑과 정렬(貞烈)에서 이루워진 것이라 한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