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야담 사화 전집 (차상찬)/숭정궁인 굴씨
- 숭정궁인 굴씨(崇禎宮人 屈氏)
숭정(崇禎)이라면 누구나 잘 아시는 바와 같이 옛날 명(明)나라 최후의 황제(皇帝) 의종(毅宗)의 연호이다. 그때 명(明) 나라 궁중(宮中)에는 굴씨(屈氏)라는 궁녀(宮女)가 하나 있었으니 그는 본래 중국 남방의 미인(美人) 많기로 유명한 소주(蘇州) 태생으로 어려서부터 인물(人物)이 곱고 재주가 비상하여 시문서화(詩文書畵)가 모두 능(能)한 중에 특히 비파(琵琶)를 여간 잘 타지 않았다.
그는 인물과 재주가 그렇게 특출 한데다가 자기 가문(家門)으로 말하여도 그 한 소주(蘇州)에서 상당히 행세를 하던 가문이었으니 보통의 경우와 같으면 그렇게 궁녀로 들어갈 처지는 아니었건만 그가 이팔 방년 시대에 불행히도 그는 아버지가 무슨 죄의 연좌(連坐)를 입어 멀리 운남(雲南)땅으로 귀양을 갔다가 죽고 따라서 집안이 모조리 파산하고 몰락하게 되니 할 수 없이 정든 고향(故鄕)을 떠나 그의 어머니와 같이 북경(北京)에 와서 유리(流離)생활을 하다가 어찌 어찌하여 궁중으로 뽑히어 들어가 궁녀 노릇을 하게 되었다.
그가 궁중에 들어간 지는 얼마 되지 않았지마는 원래 인물과 재주가 비상한 까닭에 일찍부터 의종황제(毅宗皇帝)의 총애를 받아 항상 장추전(長秋殿)에 입시(入侍)하게 되니 일반 궁인(宮人)들이 모두 그의 행복스러운 것을 부러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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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얼마 가지 아니하여 그 부귀호화(富貴好華)를 자랑하던 꽃동산에는 모진 폭풍우(暴風雨)가 들이치기 시작하였다.
명나라의 운수(運數)도 그때가 마지막이었던지 숭정(崇禎) 십칠년(十七年) 갑신(甲申)년 봄에 뜻밖에 유적 이자성(流賊 李自成)의 난리가 일어났다.
명나라 조정에서는 그 역당(逆黨)을 쳐없애려고 각처의 관군(官軍)을 지휘(指揮)하여 토벌하였으나 그때만 하여도 벌써 명나라의 국운(國運)이 쇠약해질대로 쇠약해져 관군은 무력(無力)하기 짝이 없는 반면에 도적들의 힘은 심히 강대(强大)한 까닭에 싸우면 싸우는 족족 패(敗)하기만 하고 오직 지과충용(智課忠勇)이 겸전(兼全)한 당대 명장(名將) 요계총독 원숭환(遼薊總督 袁崇煥)의 군사만이 잘 싸워 가끔 승첩을 올려 인하여 겨우 국세(國勢)를 부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얼마 아니하여 숭환(崇煥)도 또한 소인(小人)의 참소를 입어 원통하게 죽게 되니 이자성(李自成)은 다시 아무 꺼리낌도 없이 무인지경(無人之境)과 같이 여러 곳에서 무기력(無氣力)하고 무질서한 관군을 여지없이 쳐 깨뜨리고 갑신년삼월십구일(甲申年 三月 十九日)에는 나라의 수도인 북경(首都[수도])까지 쳐들어 와서 일거에 창의문(彰義門)을 돌파하고 국도(國都)에 불을 지르니 의종황제(毅宗皇帝)는 황후(皇后)와 두 황자(皇子), 공주(公主) 외에 몇몇 궁녀와 시신(侍臣)들만 데리고 급급히 만수산(萬壽山)으로 피난을 가게 되었다. 그때에 의종황제(毅宗皇帝)는 만수산에 올라가 서서 여러 궁전(宮殿)과 관청들이 모조리 적군의 사나운 불길에 타오르는 것을 보고 대세가 이미 그릇된 것을 깨닫고 나라와 사직을 위하여 순절하여 죽기로 결심하고 근신(近臣) 주순신(朱純臣)을 불러서 황태자(皇太子)를 잘 보호(保護)하라고 신신부탁을 하고 또 술을 청하여 최후의 한잔을 들며 황후(皇后)에게 말하되
『나라 일은 이미 다 틀렸은즉 나는 종묘사직을 위하여 죽겠거니와 황후는 아무쪼록 두황자를 잘 보호하며 뒤의 일을 도모하라……』
고 하였다.
황후는 황제의 그 비통한 말을 다 듣고 일장의 대성통곡을 한 후에 두 황자는 근신과 같이 다른 곳으로 피란시키고 자기는 그 자리에서 원귀비(袁貴妃)와 같이 목을 매어 죽으니 황제는 그 광경을 보고 단장의 눈물을 한없이 흘리며 자기의 칼로 옆에 있던 비빈(妃嬪)들을 모조리 쳐죽이고, 또 열다섯 살 먹은 사랑하는 공주를 불러 말하되
『너는 어찌하여 팔자가 그다지도 기구하게 우리 집에 태어났단 말이냐!』
하고 왼손으로는 자기 얼굴을 가리우고 오른손으로 칼을 들어 공주의 오른편 팔을 쳐서 끊어뜨리니 공주는 그대로 죽지 않으매 황제는 또다시 칼을 들려고 하였으나 팔이 떨려서 다시 칼을 들지 못하였다.
그리고 나서 황제는 다시 여러 백관들을 불렀으나 한 사람도 오는 자가 없었으므로 할 수 없이 홀로 남궁수정전(南宮 壽亭殿)으로 가서 손가락을 깨물어 그 피로 유조(遺詔)를 쓰되
『내가 덕(德)이 없는 까닭에 하늘에 죄(罪)를 져서 역적으로 하여금 서울을 침범하게 하였도다. 이것은 모두 여러 신하(臣下)들이 나를 그르쳐 놓은 것이니 내가 무슨 면목(面目)으로 지하(地下)에 가서 여러 조상(祖上)을 뵈랴! 내 스스로 옷갓을 벗고 머리털로 얼굴을 싸매서 도적으로 하여금 마음 대로 나의 시체를 찢어버리도록 하는 것이니 우리 백성들은 한 사람도 상하지 말아라.』
하고 머리를 풀어 헤치고 또한 목을 매어 죽으니 그 유조(遺詔)는 천고비통한 유조로서 몇천년 뒤의 사람이라도 한번 보면 눈에서 피 눈물이 나고 뼈가 저릴 듯하다. 역대 망국지군(忘國之君) 중에 그처럼 비장처절하게 죽은 임금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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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그러한 참혹한 난리 중에 이 굴씨(屈氏)는 후궁(後宮)에 있다가 미처 황제의 일행을 따라갈 여지도 없이 창황한 중에 그냥 거리로 뛰어나와 어떤 민가(民家)로 들어가 숨어서 겨우 그 생명을 보존케 되었다.
그때까지도 그는 물론 황제가 그와 같이 비참하게 돌아가신 줄 모르고 그저 어디로 안전히 피란하였다가 안녕히 지내신뒤에 하루라도 속히 관군이 다시 적군을 쳐서 물리치고 국도를 회복하여 황제가 다시 환궁하시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대세는 점점 더 틀리게 되었다.
그때 관군 중에 산해관(山海關)을 지키던 오삼계(吳三桂)는 뒤의 일은 생각지도 않고 다만 목전(目前)의 난국을 진정시키기 위하여 다년간 명나라를 집어삼키려고 야심발발하고 있던 청나라(淸[청]=今滿洲[금만주])에 구원병을 청하였다.
그것은 집에 있는 도야지(豚[돈])를 잡으려고 산속에 있는 호랑이(虎[호])를 불러 들여 호랑이에게 도리와 화(禍)를 당하는 격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그래서 청세조(淸世祖)는 그 청(請)을 듣기가 무섭게 즉시 대병을 거느리고 명(明)나라의 수도(首都)인 북경(北京)으로 들어와서 자성(自成)을 쳐서 쫓아내고 자기네가 슬며시 북경을 차지하고 말았다.
그리고 보니 명나라 천지(天地)는 그만 청나라 천지가 되고, 민가(民家)에 숨어있던 그 굴씨(屈氏)도 또한 청나라 군사에게 사로 잡힌 바 되어 청나라 청구왕(淸九王)의 진중(陣中)에 있게 되었다.
그때 청나라에서도 그를 상당히 대우는 하였지만 망국(亡國)의 원한을 품은 그는 항상 저절로 눈물이 흐르고 가슴이 아파서 꽃이 피는 봄철이나 달 밝은 밤같은 때에는 자기가 잘 타는 비파(琵琶)를 항상 품안에 안고서 가끔 가끔 애상곡(哀想曲)을 타며 그 안타까운 심회(心懷)를 푸니 청나라 사람들까지도 그의 비파 타는 소리를 들으면 또한 슬퍼하며 동정(同情)의 눈물을 흘렸다.
그러던 차에 마침 우리 나라에는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서 남한산성(南漢山城)에서 성하지맹(城下之盟)을 체결(締結)한 결과로(結果[결과]) 소현세자(昭顯世子)와 봉림대군(鳳林大君=卽[즉] 孝宗大王[효종대왕]) 두 왕자(王子)가 볼모로 잡혀가서 청도 심양(淸道 瀋陽=지금의 봉천 奉天)에 가서 오래동안 계시게 되니, 과부는 동무 과부가 슬퍼하는 격으로 두 왕자는 당신네의 신세가 그 지경에 이른 터에 그 굴씨의 고생하는 것을 보시니 자연 동정심(同情心)이 생겨서 항상 불쌍히 여기시고 또한 특별히 그를 사랑하시다가 그 뒤 그들이 귀국하실 때에 청제(靑帝)에게 특청(特請)하셔서 같이 데리고 오셔셔 인조왕후(仁祖王后= 莊烈王后[장렬왕후]) 조씨(趙氏)가 계시는 만수전(萬壽殿)에 두고 왕후의 시녀로 삼았다.
굴씨는 원래 인물도 잘 생기고 성질(性質)이 온순(溫順)한데다가 비파를 잘 타고, 그외에 새(鳥)와 짐승(獸)을 잘 길들리는 재주가 있어서 무슨 짐승이든지 무슨 새든지 그가 얼마 동안만 가르치고 길드린다면 못하는 것이 없이 다 잘하며, 춤을 추게 하면 능히 춤을 추고, 또 재주를 넘게 하면 땅재주를 넘으며 그외 별별 짓을 다 하게 하니, 왕후께서 특별히 사랑하시고 귀여워 하시며 그 방법을 여러 내인(內人)에게 가르치도록 하시니 그 중에 진춘(進春)이란 여자가 가장 그것을 잘 배웠다.
그리고 또 효종대왕(孝宗大王)께서는 명나라 양반부녀들의 머리 쪽찌는 법(髪制[발제])을 물으셔서 우리나라 부인들에게도 실시하게 하셨으니 지금 우리나라 부인들의 뒤로 비녀쪽 찌르는 법이 그 굴씨에게 배운 것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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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莊烈王后(장렬왕후)가 돌아가신 후 나라에서 성균관(成均館) 근처에다가 그의 집을 지어 주고 사사로 거처하게 하였는데 그는 이따금 궁중(宮中)의 기녀(妓女) 몇 사람씩을 불러다가 집에 앉히우고 자기는 주렴(珠簾) 안에 앉아서 그 독특미묘한 비파 타는 수법(手法)을 가르쳐 주었다.
그의 가졌던 비파 바탕은 자단향으로 만든 것으로서 문의가 번쩍번쩍하며 밤중에도 사람의 얼굴이 비치었던 것인데 그가 죽은 후에는 그것이 어찌 굴러서 가엾게도 남의집 빨래판도 되고 또 어떤 때에는 숯 담는 그릇도 되었더니 마침 음악가 강씨(姜氏) 한 분이 그것을 발견하고 가져다가 다시 수선하고 꾸며서 시험하여본즉 소리가 과연 웅장하고도 청아(淸雅)하여 음조(音調)가 또한 퍽 고르므로 항상 보물(寶物)같이 애지중지 하더니 신자하선생(申紫霞 先生)이 그 사실을 알고 노래를 지어서 세상에 전하게 하였다.
굴씨는 우리나라에 와서 왕궁으로부터 그렇게 특별한 우대를 받았으나 항상 고국(故國)을 생각하며 애수(哀愁)에 찬 눈물을 흘리더니 나이 칠십여세가 되어 죽을 때에는 집사람들더러 유언(遺言)하되 『나는 죽어서도 항상 고국을 잊지 못하겠으니 죽거든 다른 곳에도 묻지 말고 중국(中國)으로 왕래하는 시교(視郊)에다 묻어주어 죽은 고혼이라도 항상 고향을 바라보게, 또 중국으로 내왕하는 사람이라도 보게하여 달라』고 하니 그집 사람들이 그의 유언대로 고양군 대자산(高陽郡 大慈山) 밑에다 묻어 주었다.
그리고 숙종대왕(肅宗大王)때에는 왕의 어명으로 광평전씨(廣平田氏)란 사람을 부르셔서 굴씨(屈氏)의 무덤을 수호하고 또 춘추(春秋)로 절사(節祠)를 지내게 하시며 해마다 나라에서 제수료(祭需料)를 하사하시었으니, 그 전씨(田氏)는 역시 명나라 상서(尙書) 벼슬까지 한 전응양(田鷹揚)의 후손(後孫)으로 명나라가 망한 뒤에 우리나라로 귀화하여 살던 사람이었다.
나는 그전에 우연한 기회에 그 곳을 지나다가 그 굴씨(屈氏)의 무덤이 있다는 말을 듣고 스스로 감회가 나서 변변치 못하나마 한시(漢詩)한 편을 지은 일이 있었으므로 참고삼아 이 끝에 기재하기로 한다.
과숭정궁인굴씨묘(過崇楨宮人屈氏墓)
- 단원일망초천우(斷原一望草芊芋)
- 만리궁인상가련(萬里宮人尙可憐)
- 상여요현수월야(湘女瑤鉉愁月夜)
- 소군옥패냉추연(昭君玉佩冷秋烟)
- 정영기화요양학(精靈己化遼陽鶴)
- 한루란금촉제견(恨淚難禁蜀帝鵑)
- 행유광평전씨자(幸有廣平田氏子)
- 년년한식제향전(年年寒食祭香傳)
申紫霞屈氏琵琶歌有靈化下[신자하굴씨비파가유령화하)(潦陽鶴之句故二聯及之[요양학지구고이연급지])
의역(意譯)
- 풀 우거진 옛 무덤 바라다 보니
- 가엾은 그 궁녀 또 생각난다.
- 처량한 비파소리 간 곳이 없고
- 쟁쟁한 옥패성도 들을 수 없다.
- 영혼도 고국이 항상 그리워
- 한 많은 눈물을 쉴새 없겠지
- 고맙다 광평전씨 자손 있어서
- 해마다 한식날에 제사를 지낸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