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야담 사화 전집 (차상찬)/박색 고개의 전설

박색(薄色) 고개의 전설

『춘향이! 춘향이.』

조선에서 누가 제일 잘나고 누가 제일 이름이 많이 났느냐 하여도 춘향(春香)이처럼 소설로 노래로 또는 연극과 영화로 이름이 널리 전해져서 남녀노소(男女老少) 유식하고 무식하고 할 것 없이 누구나 잘 아는 인물(人物)은 없을 것이다. 다 죽게된 우리나라 사람들을 다시 살린 이충무공(李忠武公)의 이름은 몰라도 춘향의 이름은 모를 사람이 없고 우리나라 사람들의 무식을 깨워 주기 위하여 한글을 창작한 세종대왕(世宗大王)은 몰라도 이 춘향이는 또한 모를 사람이 없을 것이다. 미인(美人)의 힘이란 참으로 위대하고 예술의 생명이란 정말 장원한 것이다. 소설(小說)에 나온 춘향이를 실재에 있느냐 없느냐 의문을 가지는 것도 우스운 일이요, 또 여태까지 세상 사람이 천하 미인이요 열녀(烈女)라고 떠들어대는 춘향이를 지금에 와서 그가 미인이었느냐 아니었느냐 하고 논난하는 것도 역시 실없는 일 같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춘향이를 꼭 실재의 인물로 생각하고 심지어 어떤 사람은 남원(南原) 땅에 가서 고적(古蹟) 조사를 하고, 어느해 여름에는 남원의 기생(妓生)들이 군청에서 광한루(廣寒樓)를 수리하는 기회를 타서 마치 진주(晋州)의 기생들이 의기 논개(義妓論介)의 사당(祠堂)을 지어 놓듯이 춘향각까지 지어놓고 춘추 제향을 지내기까지 하게 된 바에야 이 춘향이를 미인이었느냐 하는 말을 쓰는 것도 과히 실없은 일은 아닐 것 같다. 그것이야 어찌 되었던 아직껏 이 세상에는 누구나 물론하고 춘향이는 그 소설에 써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천하의 미인이요 만고의 열녀로만 안다. 그러나 남원 부근에서는 그와는 정반대되는 한 이상한 전설(傳說)이 지금껏 떠 돌고 있다.

그 전설대로 말한다면 춘향이는 원래가 미인이 아니요 천하의 둘도 없는 박색(薄色)이었다. 시대는 역시 춘향전에 나타난 이조 숙종대왕(李朝肅宗大王) 시대에 틀림이 없고 관기 월매(官妓月梅)의 딸인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얼굴은 춘향전에 있는 춘향과는 아주 반대의 만고 박색이었다. 코는 질병 같고 눈은 비탈에 돌아가는 돼지 눈 같고 머리는 몽당 빗자루 같고 손은 옴두꺼비의 발 같고 목은 자라목 같고 몸은 절구통만 한데다가 그 중에 마마를 몹시 한 탓으로 얽고 찍어매고 하여 박춘재의 곰보타령에 나오는 곰보 모양으로 우박맞은 잿더미도 같고 장마 치른 쇠똥도 같고 대추나무에 앉은 매미 잔등도 같고 맹꽁이의 볼기짝 같아서 누구나 한 번만 치어다 보면 십여년된 학질이 즉시에 떨어지게 무섭게 생긴 추물이었다. 그리고 보니 아무리 나이 스물(二十)이 넘어 설흔 줄에 가까워온들 어떤 사람이 한번 치어다 볼 사람도 만무하고 더구나 통혼 같은 것은 문제도 없었다. 그러나 사람의 본능이란 어찌 할 수 없는 법이라.

하루는 광한루앞 요천강(蓼川江)에서 빨래를 하다가 우연히 그 골 삿도(使道)의 아들 소위 이도령이 광한루에 노리를 왔다가 그 강가로 지나가는 것을 보고 그의 잘난 풍채에 유혹이 되어 그만 정신을 잃어 버리고 그대로 집에 돌아와서는 침식을 전폐하고 머리를 싸고 드러누웠었다. 속담에 있는 말과 같이 님 못보아 생긴 병은 님보기 전에는 못 고친다고 하는 말과 같이 이도령에게 홀리어서 생긴 춘향의 병이야 아무 약을 쓴들 고칠 도리가 있을 리가 만무하였다. 이럭 저럭 수십일이 되고 약이란 약은 쓸대로 써도 도무지 병이 나아가는 기색이 없으며 병은 점점 기울어 가니 그가 잘 났건 못 났건 모성으로서의 사랑이 남과 다를 리가 없는 춘향의 어머니는 항상 걱정에 걱정을 하다가 최후로 춘향에게그 병이 난 원인을 물으니 춘향도 그 경우에 이르러서는 아무 속임 없이 사실 그대로 고백하였다. 그러나 춘향이가 원래 박색이니까 다른 사람도 못할 터인데 더군다나 고을 삿도의 자제하고 말을 걸어 볼 수가 있을 리가 만무하였다.

그러나 원래 화류장에서 백전 노기로 별의 별짓을 다 해본 춘향의 어머니는 문득 한 계책을 생각하였으니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이도령과 제일 가까이 있는 방자(房子)놈을 돈을 주고 이도령을 꾀여서 자기 집으로 놀러 오게 한것이었다. 꾀는 방법은 물론 춘향전에 있는 그대로 이도령을 광한루로 놀러 오게 하고 자기의 부리는 종년 중에 어여쁘고 영리한 향단(香丹)을 말쑥하게 화장을 시켜서 월매의 딸이라고 광한루 근처에서 그네를 뛰게 하여 이도령을 유인한 것이었다. 이도령이 자기의 집으로 온 뒤에는 향단으로 하여금 갖은 아양과 수단을 다 부려서 이도령을 취하도록 술을 잔뜩 먹여서 향단의 방에서 자게 하고 잠자는 밤중을 타서 향단은 살짝 피하여 다른 방으로 가고 그 대신으로 춘향을 그 방으로 바꾸어 들어가게 한 것이었다. 취중에 무비일색(無比一色)이라고 이도령은 술이 취하고 또 어둔 밤중에 어찌 향단과 춘향을 구별을 할 수가 있으며 더구나 향단에게 정신을 홀짝 빼앗긴 이도령은 취중에 나무 등걸이나 이불 뭉치가 있어도 향단으로 알게된 터에 그렇게 자세한 감찰도 할 여유가 없었다. 그리하여 하룻밤 동안을 춘향과 같이 단 꿈을 꾸게 되었다. 그러다가 그 이튿날 아침에 이도령이 깨서 본즉 전날 밤에 보던 어여쁜 향단은 감쪽같이 간데 온데 없고 천만 뜻밖에 평생에 보지 못하던 천하 추녀자 옆에 누워 있었다. 이도령은

『이크! 이게 웬일이냐!』

하며 깜짝 놀라서 혼자 생각하기를

『이것이 귀신이냐, 사람이냐, 내가 어찌하여 이 여자와 같이 한 이부자리에서 자게 되었으며 어제밤 초저녁에 같이 놀다가 자던 향단은 어디로 갔단 말이냐.』

하고 혼자서 중얼 중얼 대더니만

『세상에 별일도 다 있다.』

하고 마치 도깨비에게 홀렸던 사람 모양으로 정신이 얼떨떨하다가 그만 일어나서 몸을 떨치고 밖으로 나가려고 하였다. 마침 이때였다. 춘향이 어머니는 미리 그럴 줄을 알고 문밖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땅에 엎디어 말하되

『여봅쇼 도령님, 죽을 죄를 지었사오니 제발 용서하여 주십시요.』

하고 그 전후의 사실을 다 자백한 후에 또 말하기를 일이 이왕 이렇게 되었사온즉 춘향이를 영구히 사랑하여 주시면 백골난망지은으로 생각하여 죽어서도 결초 보은하겠사오니 만일 그렇지 않으시면 하룻밤을 자도 만리장성(萬里長城)을 쌓는다고 기념으로 무슨 정표라도 하나 주시면 도령님을 평생에 모시고 있는 것같이 그 기념품을 영구히 보존하고 뒷날의 기념을 기다릴까 합니다 하니, 이도령도 처음에는 방자놈과 춘향모에게 속은 것이 괘씸도 하고 분하기도 하여 싸움하고 난 사람처럼 한참 동안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잠자코 있다가 돌이켜 생각한즉 춘향의 사정이 측은도 하려니와 아무리 천하의 추녀라도 자기 때문에 그와 같이 죽을 병이 나고 또 사람의 생명을 위하여 그와 같은 수단까지 쓴 것은 방자나 춘향모에 대하여서도 도리어 동정심이 생기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혼자 생각에 춘향과 영구히 살 수는 없지마는 그까짓 기념품 같은 것이야 남자의 풍정에 못 줄 것이 무엇이 있겠느냐 하고 자기의 소맷 속에 있던 비단수건 하나를 정표로 끊어주고 표연히 돌아갔다. 그런지 얼마 아니하여 삿도가 갈리게 되고 이도령도 그의 아버지를 따라서 서울로 오게 되었다. 춘향이가 만일에 미인이요 이도령이 춘향에게 반한 것 같으면 물론 춘향전에 있는 것 같은 오리정(五里亭)의 작별연 같은 한 막의 비극이 있었겠지마는 이도령과 춘향의 관계는 위에 말한 것과 같이 사실 그렇지 못하였기 때문에 이도령은 그와 같이 무심하게 떠났으나 그의 반면에 있는 춘향이는 외기러기 짝사랑 격으로 그를 사모하여 죽을 병이 들었다가 박쥐의 꿀맛보던 꿈속 같이 이씨를 잠간 만나보고 그의 기념품까지 얻어 가지게 되니 평생의 소원은 잠시 풀었다 할지라도 연연한 마음은 전보다도 더 간절하여 언제나 한번 다시 만나기를 고대하고 있던 중에 뜻밖에 이도령이 서울로 간다는 말을 듣고는 그야말로 낙심 천만하고 또 혼자 생각에도 자기가 만일에 인물이나 남과 같이 미인으로 잘 났으면 비록 일시에 헤어지는 일이 있을지라도 후일에도 그가 자기를 찾던지 또는 자기가 이씨를 찾아 갈 수도 있겠지마는 자기는 불행히 천하 박색으로 생겨 났으니 이씨가 다시 자기를 찾을 리도 없고 더구나 강제로라도 그에게 몸을 가깝게 한 이상은 다른 곳으로 시집도 갈 수 없는 터이니까 차라리 이도령이 떠나가는 날을 기회로 하여 깨끗이 죽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여 이도령이 떠나가던 바로 그날 밤에 광한루에 가서 이도령이 주던 비단 수건으로 목을 매어 애처럽게도 죽으니 자기의 부모들은 물론이요 동네 사람들까지 모두 불쌍히 여겨서 이도령이 가던 임실(任實) 고개 이(고개는 남원에서 서울로 오는 길이다)에서 장사를 지내니 그때부터 세상 사람들이 그 고개를 이름지어 박색고개(薄色峴[박색현])라 하고 그 박색고개는 즉 춘향전에 나오는 박색고개인데 뒤에 이도령이 그 이름을 아름답게 지어 불러서 박색을 박석으로 고친 것이었다.

춘향은 남이 죽인 것이 아니요 단지 조화신(造化神)이 잘못 전시(展示)한 탓으로 남과같이 이 세상의 행복스러운 생활을 하지 못하고 그렇게 세상을 비관 자살한 것이지만 참말로 말한다면 청춘(靑春)의 원한은 동해의 푸른 물결 치는 바다물도 능히 메울 수 있고 육체가 화(化)하여 망부석(望夫石)도 된다고 하는 말과도 같이 그의 애달픈 원한은 마치 지이산(智異山)에 세운 구름덩이 모양으로 항상 흩어지지 아니하여 달 밝은 밤이나 비가 오는 날이면 애혼(哀魂)이 광한루 근처나 또는 그의 무덤이 있는 박색고개 부근에서 구슬프게 곡을 하니 아무리 담력(膽力)이 센 남자라도 그의 귀곡성(鬼哭聲)을 들으면 머리 끝이 쭈뼛 쭈뼛하고 몸에 소름이 끼치었다. 그리고 그 다음날부터 그 고을에 새로 부사(府使)가 오게되면 박색재를 넘다가는 타고 오는 말발굽이 땅에 붙고 험악한 춘향의 모양이 나타나는 바람에 아무 말도 못하고 그냥 경풍을 하여 당장에 죽어버렸다. 이렇게 한번 두번 내지 다섯 여섯 차레나 부사가 부임을 하다가는 그 곳에 와서는 죽고 죽고 하니 남원부는 마치 폐읍(廢邑)이나 다름없이 되고 누구나 그곳에 부사로 가기를 싫어 하여 정부에서도 큰 걱정을 하였다. 이런 소문이 경향으로 차차 퍼지게 되니 이도령인들 어찌 그 소문을 듣지 못하였으며 또 자기로 하여금 그러한 불상사가 생기게 되었으니 마음인들 어찌 불안하지 않았으랴. 언제나 기회만 있으면 자기가 그 곳에 가서 속담에 소위 결자해지로 죽든지 살든지 그런 일이 없게 하도록 하겠다고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어느 해에 그가 과거를 보아 춘향전에 있는 것과 같이 알성급제 도장원을 하고 어명으로 지방관을 제수하게 될 때에 이도령은 자청하여 남원부사가 되기를 원하니 인군께서도 그곳에 좋지 못한 풍문이 있다는 것을 들으시고 그를 아끼어서 처음에는 그런 곳은 가지 말라고 만류를 하였으나 이몽룡(李夢龍)이 굳이 가겠다고 간청하므로 특히 장하게 여기고 보냈다. 이도령은 벼슬보다도 그곳에 가서 춘향의 원혼을 한번 풀어 주려고 가는 것이었다. 그는 그 무엇보다도 자기의 유창한 문장으로 춘향의 전기(傳記)와 (지금의 춘향전이 꼭 그런 것인지는 모르나 하여간 춘향을 실물과 정반대로 천하 미인이라고 찬양한 것이다) 제문(祭文)을 짓고 부임하는 도중에 전주(全州)에 들리어서 당시 전라도에서 제일가는 명창(名唱)으로 유명한 김억석(金億石)을 불러서 자기가 지은 춘향전 노래 곡조에 맞추어서 노래 부르도록 연습을 시켜 가지고 남원으로 향하였다. 그의 일행이 박색재에 당도하니 역시 전과같이 말발굽이 땅에 붙는지라 이 도령은 말에서 내려 공중을 향하여 크게 소리를 지르되

『천하 미인 이요, 만고 열녀 춘향의 남편 이도령이 남원 부사를 하여 오는 길이니 춘향의 영혼(靈魂)이 있거든 내 앞으로 오너라.』

하니 공중에서 별안간에 사랑가 소리가 나며 말발굽이 뚝 떨어졌다. 이도령은 땅에 내린채로 천천히 걸어서 박색고개를 넘어 ─양산도(陽山道)에 천천히 걸어서 박색재를 넘는다는 것은 이때의 광경을 노래하는 뜻이다 ─ 춘향이 무덤 앞에 서서 미리 준비하였던 제물과 제문을 가지고 제사를 잘 지낸 다음에 데리고 간 광대로 춘향가 한편을 목청 좋게 읊으니 그야말로 산명곡응하고 소리가 구름 위에까지 올라가며 지리산 까마귀떼까지 날아와서 춤을 흥겨웁게 추니 춘향이의 원한인들 어찌 풀리지 않을 수 있으랴 이도령은 도임 후에 박색재를 고치어서 박석고개(礡石峴[박석현])라 하고 또 자기가 전날 잘못 놀러 다니던 것을 후회하여 광한루(廣寒樓)는 광한루(狂漢樓) 오작교(烏鵲橋)는 오작교(誤作橋)라 고쳐 부른 일까지 있었다 한다. 이것이 과연 사실인지 모르나 남원 근방에는 늙은이들 사이에 이러한 수수께끼 같은 이야기가 지금껏 남아 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