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야담 사화 전집 (차상찬)/김총각의 기연

김총각(金總角)의 기연(奇緣)

세조대왕(世祖大王)의 일찌기 따님 한 분을 두었으니 그는 어려서부터 덕성(德性)이 갸륵하도 시비곡직을 판단하는 두뇌가 매우 명석하엿다.

세조가 수양대군(首陽大君)으로 있을 때에 우리나라 삼천리 강산을 독차지하고 싶은 정치적 욕망을 가지고 아무 죄과도 없이 정승 김종서(政丞金宗瑞) 부자와 황보인(皇甫仁)등을 죽이고, 이어서는 또 그 조카인 단종대왕(端宗大王)과 그를 옹호하는 여러 대군(大君), 그의 육신일파(六臣一派)를 여지없이 무참하게 죽이고, 자기가 왕위(王位)에 오로게 되니 그 따님도 따라서 일국의 공주(公主)라는 고귀한 지위를 얻게 되었다.

그러나 그 공주는 그런 지위(地位)를 조금도 영광스럽게 생각하지 않고 그 아버지께서 인정(人情)도 의리(義理)도 불구하고, 단지 정치적인 욕망을 가지고 골육지친(骨肉之親)과 교목의 제신들을 함부로 죽이는데 마음이 애처러워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음식을 전폐하다 싶이하여, 항상 지성(至誠)으로 간(諫)하더니 그후 세조가 다시 단종의 모후(母后) 권씨(權氏)의 묻히신 소능(昭陵)을 파헤쳐 백골을 강물에 띄어버리는 지경을 당하여는 공주는 온종일 느껴 울며 말하되

『상감마마께서는 왜 이렇게까지 무참한 일을 하십니까. 다 썩은 백골이 무슨 죄가 있어 그러하십니까.』

하였다.

세조의 진노함이 공주의 이런 말씀에 조금도 돌려지기는 커녕 부녀(父女)의 지극한 사랑까지 끊게 되어 조카인 단종에게 쓰던 수단이 공주에게 미치려 하였다.

세조의 중궁(中宮)이시고 공주의 어머님인 정희왕후(貞熹王后)는 이 틈에 끼어서 형용못할 고통이 여간 아니었다. 세조의 무서운 위엄을 돌릴 수도 없고, 사랑하는 따님의 화를 입고 죽는 꼴을 참아 볼 수도 없었다.

세조의 서두름은 여간 급하지 않고 박두한 공주의 화색(禍色)은 구원할 바가 없어 차라리 모녀의 사랑을 끊을지라도 목전에서 죽는 꼴이야 볼수 있으랴! 공주의 유모(乳母)를 불러 일이 대단히 위태로운 지경에 이른 것을 말하고 가벼운 보물(寶物)을 주어 망명(亡命)케 하고 세조에게는 슬픈 낯으로

『급히 죽었다.』

고 속이어 아뢰었다.

자식의 사랑이란 부모가 다 일반이지만 애타고 살 깊기는 어머니가 더한 것이다.

궁살림이 대궐로 옮겨지고 머지않아 부마(駙馬)도 맞이하고 도위궁(都尉宮)을 작만하여 모든 재미를 다 보려는 왕후가 모녀간에 인생으로 막다른 생리별의 지경을 당하니 살을 베이는 쓰라림도 이에서 지나지는 못하였으리라!

바다속 같이 깊은 궁중에서 자라나 몇발자욱 걸음을 모르든 공주가 졸지에 부모의 따뜻한 품을 떠나 갈 곳 없는 발길을 디디게 되니 온종일 다리가 떨어지도록 걸어도 단 십리 가기가 쉽지 않었다.

으슥지 않은 서울 근처에서 자취를 감추고저 하나 탄로될가 두려워 십리 이십리 하로 이틀을 지나 충청도 보은(忠淸道報恩) 속리산 근처까지 이르렀다.

약한 다리에 사백리길을 걷고 여자의 몸으로 수십일 길을 헤매이니 배도 고프고 몸도 파리하여 더 갈힘이 없었다.

유모와 공주는 이젠 더 갈 힘도 없어 오도 가도 못하고 길가에 주저앉아 쉬게 되었는데 저문날 산기슭으로 날아드는 새소리가 형역에 시달린 두 여성의 마음을 산란케 할 뿐이었다.

마침 저 건너편으로 쌀을 지고 가던 총각하나가 발을 멈추고 건너다보며 유모에게 묻는다.

『여보시유 마나님과 저 어여뿐 새색씨의 모양을 보니 시골 사람은 아니신가 본데 무슨 일로 이처럼 길에 앉아 계시요?』

유모는 심산궁곡에 들어와 오도가도 못하게 되었으니 자기 한몸 같으면 오히려 걱정이 덜되련만 태산같이 받고 온 정희왕후(貞熹王后)의 부탁을 받아 금지옥엽(金枝玉葉)같은 공주를 모시고서 이런 곤경에 방침이 없다가 낯모를 총각이나마 그의 다정한 물음은 여간 반갑지 않았다.

머리를 돌이켜 묻는 총각의 모습을 살펴 보았다.

얼굴은 때묻고 파리했으며 의복은 갈기갈기 해어졌으나 준수한 모양이 시골뜨기는 아니었다.

『총각은 왜 물으슈. 우리는 서울 사람으로 집안 난리를 만나 도망하여 여기까지 왔는데 노독(路毒)은 심하고 갈 곳은 없어 이처럼 주저하는 중이요.』

하고 대답하니, 이 대답을 들은 총각은 마음 속에 무슨 충동되는 바가 극한지 아무말이 없이에 무슨 충동되는 바가 극한지 아무 말이 없이 눈물만 흘리다가 유모를 보고

『마님의 사정도 참 난처합니다. 나도 서울 사부집 자식으로 가화(家禍)를 피해 이리로 도망온지 벌써 돐이 되었읍니다.』

하고 은근히 대답한다.

유모는 그 대답이 더욱 반가워 무인지경에 갈 곳없는 몸으로 사람을 만났으니 여간 다행한 일이 아닌데, 더구나 같은 서울 사람이요 또 가화(家禍)로 망명한 사부집 자제라고 하는데 오래간만에 친정집 식구 만난 것보다 못지않았다.

『여보 그러면 우리도 총각을 따라 얼마간 같이 지냈으면 어떻겠소.』

하고 유모는 다시 청하였다.

총각은 조금도 주저없이 허락하고 동행하여 두어마장 더 걸어 토굴 속으로 거적을 열고 들어가 쉬게 되었다.

이 총각은 과연 누구인가?

계해년(端宗元年[단종원년])겨울 달밤에 세조의 철퇴에 부자가 무참히도 다 죽고 온 집안 식구가 어육(魚肉)이 되다 싶이한 김종서(金宗瑞)의 손자인, 승규(承圭)의 아들이었다.

자기의 조부와 부친이 더 형용할 수 없는 참혹한 죽엄을 당하고 온 가족이 다 없어지는 판국에 자기 혼자 힘으로 아버지와 조부의 원수를 갚을 수도 없고 다 기울어진 조정의 일을 붙들 수도 없을 뿐만아니라 공연히 어름 어름하다가는 자기의 일신상에도 어떠한 해가 올지 모르겠으니 차라리 머나먼 곳으로 종적을 감추어 김씨의 혈육이나 끊치지 않게 하고 원통히 돌아간 아버지와 조부의 향화(香火)나 받들겠다 하여 천리를 머다 않고 발이 닿는 곳까지 가다가 보은(報恩) 속리산 근방에 이르러 나무도 하고 품도 팔아 그 토굴 속에서 오늘 내일의 목숨을 이어가는 중이라 그날도 쌀을 팔아 돌아오는 길이었다.

호랑이에게 물려 본 사람이 호랑이 무서운 줄을 참으로 안다는 것이 누구나가 다 아는 상정(常情)이다.

자기가 불의의 난리를 당해 그처럼 떠난 후 자기 조부와 같이 어린 단종을 보호하던 전조(前朝)의 재상이 모조리 죽고 도망한다는 소문이 뒤를 이어 들리던 차에 이 처녀와 노파의 말을 들으니 아지못하는 중에

『저 사람도 나와 같은 처지를 당했나 보다. 관비(官婢)가 되기 싫어 저렇게 나왔나 보다.』

하는 생각이 절로 난 것이다.

처지가 같은 중에도 더욱 여자의 약질이라!

하는 가련한 동정이 앞을 서서 총각은 우선 저들의 시장끼나 먼저 면해 주겠다는 마음으로 손수 밥을 지어 먹이고 아무리 창황한 지경이라도 한 토굴 속에서 총각과 처녀가 잘 수 없어 자기는 이웃집으로 가서 자고 공주와 유모는 토굴 속에서 수일을 지나게 되었다.

길가에서 헤매던 유모와 공주는 토굴 속이나마 며칠을 쉬게 되니 여간 다행히 아니지만 총각 혼자 사는 살림에 두 식구가 더 늘게 되니 양식의 군졸(窘拙)이 또한 덜미를 눌른다. 유모는 부득이 정희왕후로부터 받아가지고 온 보물 몇개를 총각에게 주며 팔아 오게 하였다.

지난 날에는 정승의 손자로 있던 총각이 궁중의 보물을 모를 리가 있으랴!

깜짝 놀라며

『이것이 대궐 안 것인데 어디서 얻었오.』

하고 유모에게 물었다.

유모는

『출처는 알 것 없이 팔아만 오십시요.』

하고 부탁할 뿐이니 총각은 종래 그말대로 팔러 가지 않었으니 혹 들키면 무서운 화(禍)를 입을 까봐 겁을 낸 까닭이다.

공주와 유모와 김종서의 손자 총각 세 사람이 옹색한 생활이나마 한 곳에서 일년 넘어를 계속해 살았다.

혼기를 당한 처녀와 과년한 총각이 서로 침식을 오래 같이 하니 자연 정이 서로 기울어지지 않을 수 없으므로 주단거래(柱單去來)와 납채 납폐(納采納幣) 육례(六禮)를 갖출 사이 없이 부부의 인연을 맺게 되었다.

그때야 총각은 공주에게 피난 온 까닭을 물으매 공주는 부왕(父王)을 간(諫)하다가 화가 시시 각각으로 밀려오므로 위기 일발에서 이와 같이 도망쳐 온 사실 이야기를 자세히 말하니 총각은 깜짝 놀라며 소리쳐 울었다.

이 광경을 본 공주와 유모는 도리어 어이없이

『우리 처지도 가엾지만 당신은 왜 이다지도 슬퍼 하십니까.』

하고 위로하였다.

총각은 울음을 그치며

『나는 다른 사람이 아니라 김정승의 손자인데 우리 왕고(王考)와 선친이 갑술년에 참화를 당하고 전가족이 도륙이 되는 판에 나홀로 피난하여 이 고생을 겪거니와 공주는 어린 처지에 어떻게 이런 대의(大義)를 판단할 줄 알았읍니까.』

하고 크게 탄복하였다.

상정으로 말하면 김정승(金政丞)의 손자와 세조의 공주는 하늘을 같이 하지 못할 원수의 자손이라 부부의 정의는 고사하고 서로 대면도 안할 터이지만 공주의 당당한 처의(處義)에는 김정승의 손자도 저절로 그 원수임을 잊어버리고 사랑과 공경하는 생각이 하루 하루 짙어져 가지 않을 수 없었다.

원수와 원수가 의외의 인연으로 서로 부부가 되어 달이 가고 해가 바뀌는 사이에 서로 처지의 불쌍함과 고독감을 위로하며 지내니 그 조용하고 다정스러움이 부마궁(駙馬宮)에서 뒤떠들고 지내는 것보다 오히려 낳을 뿐 아니라 산 보람이 있었다.

어어간 단종 때 신(?)들이 죽고 망하고 하여 그럭저럭 풍파가 가라앉고 세조의 마음도 차차 풀어져서 한명회(韓明澮) 정인지(鄭麟趾) 등의 무리의 기찰도 덜해지니 김서방은 그제야 공주가 가지고 온 보물을 슬금슬금 팔아 속리산 밑에 집도 짓고 밭대기와 논마지기도 작만해 평화롭고 안락한 살림을 해가며 아들 딸도 삼남매나 기르게 되었다.

세조대왕은 만년에 전일의 일을 후회하고 두루 찾아 다니며 부처(佛[불])에게 빌어 후생에 죄벌(罪罰)이나 면하려고 그 거동길이 속리산 법주사(法住寺)에 이르게 되었다.

공교롭게도 거동행차가 공주가 사는 마을로 지나가는데 공주의 어린애들이 마침 길가에서 놀다가 세조의 눈에 띄이게 됐을 때 얼굴 모양이 세조와 흡사하다 하여 세조는 이상하게 여기어 배종한 신하를 시켜서 그 애들을 가까이 불러놓고 어루만지는 동안이었다.

이때 공주의 마음 속으로는 아무리 부왕께서 엄한 죄를 내리실까봐 무서워서 그처럼 도망하여 종적을 숨기고 지낼지언정 부녀간의 천륜(天倫)의 사랑이야 끊을 수 있을 소냐!

번연히 울타리 밖에 부왕의 거동행차가 지나건만 무슨 죄가 있을까 두려워 나가지도 못하고 울타리 틈으로라도 부왕의 천안(天顔)이나 뵈옵겠다고 하여 울타리에 기대어 구경을 하다가 자기 아들을 보고 이상하게 여기는 부왕을 뵈오니 두려운 생각보다도 반가움이 앞서 울음이 터져나옴을 억제치 못하였다.

핏줄의 딸림이란 인력으로 막지 못하는 것이라 울타리 안의 울음소리에 세조의 마음은 까닭없이 움직여

『이 무슨 울음소린고?』

하고 근시에게 물었다.

앞에 있던 아이가

『우리 어머니 울음 소리야요.』

하고 얼른 대답하였다.

세조는 이에 배종하는 신하를 물리치고 아이를 따라 울음 소리 나는 집으로 옥보(玉步)를 옮기니 어떤 부인이 아무 말 없이 땅에 엎드려 대성통곡만 할 뿐이었다.

번연히 부녀간에 서로 만났건만 떠난지가 십수년이 되고 죽은 줄만 알았던 자기 딸이 그곳에 살아 있을줄이야 뜻하셨으랴! 세조는 깜짝 놀라며

『네가 누구냐?』

물으시었다.

공주는 울음을 그치고

『불초 여식이옵니다. 그때에 준엄하신 꾸지람을 받자오매 자전(慈殿)께옵서 무거운 벌이 신에게 미칠가봐 두려우사 유모를 분부하시와 대내(大內)을 떠나게 하시고로 멀리 도망하여 이곳에 이르러 죽지 못하고 오늘까지 구차히 살았읍니다.』

하고 여쭈었다.

세조 역시 눈물을 흘리며

『나는 네가 죽은 줄만 알었더니 어찌 살았을 줄이야 뜻하였으랴.』

하시고 다시 말을 이어

『그러면 너의 남편은 누구이며 지금 어디 있느냐?』

물으신다.

공주는 머리를 숙이고

『고(故)정승 김종서(政丞金宗瑞)의 손자인데 그 역시 피란하여 이곳에 와 있다가 우연히 길가에서 만나 부부가 되었사온데 대가(大駕)가 이리 지나심을 듣고 무슨 죄나 있을가봐 두려워 피하고 없읍니다.』

하고 대답하니 세조도「휘 ─ 」한숨을 내쉬며

『김종서인들 무슨 죄가 있느냐, 내일 교자와 말을 보낼 터이니 너의 부부가 함께 서울로 올라와 늙은 나의 슬하에서 지내도록 하라. 너의 부부들에게도 벼슬자리를 줄 터이다.』

하고 떠나신 후에 김서방은 밤에야 돌아왔다.

공주는 자기 남편에게 부왕께 만나뵌 것을 말하고 서울로 가는 것이 어떠냐 하고 물었다.

김서방 생각에도 서울로 올라갔으면 부마(駙馬)의 부귀도 누릴 터이지만 아직까지 소위 공신의 무리가 조정에 자리잡고 있으니 장래의 일이 어찌 될 줄 모르겠고, 심산궁곡에서 손수 나무하고 밭갈아 구차한 생활을 할지언정 대면키 싫은 장인의 앞에 몸을 바치기는 싫었다.

『여기 있다가는 서울로 안 갈 수도 없고 간 후의 일이 어찌 될 줄 모르겠으니 여기서 다시 도망하자.』

하고 공주에게 권하였다.

공주도 자기 남편의 말을 쫓아 그 밤으로 남부여대하고 도망하였는데 서울서 데리려 온 승지(承旨)는 헛탕만 치고 말았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