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야담 사화 전집 (차상찬)/기담 사제
- 기담사제(奇談四題)
一[일], 최석(崔碩)과 팔마비(八馬碑)
편집옛날부터 명관(名官) 노릇, 더욱 지방의 목민관(牧民官)으로서 이름을 내자면 첫째는 청렴(淸廉)해야 하고, 둘째로는 애민(愛民) 즉 백성을 잘 사랑해야 하는 것이었다. 말이 쉽지 지방관으로 돌아 다닐것 같으면 청렴 애민이란 실로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러므로 자칫 잘못 하다가는 탐관(貪官)으로 이름을 더럽히게 되고 까딱 잘못하면 오리(汚吏)로 봉고파직(封庫罷職)을 당하고 마침내는 생명까지 끊게 되는 것이 옛날의 목민관의 처지였다.
이렇게 무서운 것이었건만 그 많은 목민관들 중에는 탐관오리가 많으면 많았지 청렴한 사람이 흔하지는 않았다.
때는 고려 충렬왕(忠烈王)때 벌써 칠백 여년이 가까운 옛날이었다.
최석(崔碩)이란 이가 승평부(昇平府〓지금의 (開豊[개풍] 地方[지방])) 부사(府使)가 되어 임기 삼년 동안에 애민적자(愛民赤子)로 그야말로 백성을 자기 자식 같이 생각하여 오로지 그들의 기쁨 그들의 행복을 위하여 온갖 무슨 일이고 간에 자기 몸을 희생하여 가며 애를 써서 일하였다. 이런 선정(善政)이 좋은 음덕(陰德)이 되었던지 그는 임기(任期)가 막 끝나자마자 내직(內職)으로 승차하여 비서랑(秘書郞) 벼슬에 올라 송경(松京〓지금의 개성)으로 올라가게 되었다.
백성들은 마치 부모나 이별하는 듯이 부사를 놓아 보내지 않으려고 무수히 애를 썼으나 그 역시 백성들의 힘으로는 못하는 일이었기 때문에 그대로 보내게 되었다.
그런데 이 고을 풍습(風習)이 부사가 갈리면 반드시 갈려 갈 적마다 말(馬) 일곱 필을 부사에게 선사하여 왔었다. 그래서 이번에도 더구나 이렇게 부모 같이 믿고 살던 최부사가 갈려 가게 되니 그곳 백성들은 너도 나도 하면서 앞을 다투어 가졌던 말(馬)을 끌고 와서 부사에게 보이며
『사또, 이 말 가운데서 제일 마음에 드시는 좋은 말 여덟 필만 골라 가지고 가십시요.』
하고 빽빽하게 모여서 야단들을 쳤다. 이것을 본 최석은 웃으며
『그만 두어라, 서울까지만 갔으면 족하지 좋은 것은 골라 무엇하리요. 그리고 이 많은 말들이 나에게는 소용이 없으니 어서 다들 몰고 집으로 돌아 가라.』
하고 그중에서 말 일곱 필만 잡아 두었다가 그 말을 몰고 서울 집으로 올라 온 뒤에는 말 일곱 필을 모조리 승평부로 돌려 보냈다.
그러나 일단 부사에게 선사로 바친 말이니 백성들이 받을 리가 만무하였다.
다시 사람을 시켜서 그 말을 도로 최석의 집으로 돌려 보내니 최석은
『허 딱한 사람들이로군. 내가 너의 고을을 지키고 있을 동안에 내 말이 망아지(駒) 하나 낳은 것을 그대로 데리고 왔더니 그것을 보고 너희들이 나를 탐욕이 있는 사람으로 아는구나─ 그렇지 너의 고을에서 얻은 망아지가 나의 것이 될 수가 있으랴? 그래 이것마저 보낼 터이니 사양 말고 받으라.』
하며 도로 보내온 말 일곱필과 자기 집 망아지 합하여 말 여덟 필을 기어코 승평부로 도로 내려 보냈다.
승평부 백성들은 마침내 하는 수 없이 그 말을 받아 놓고
『어 참 천하에 청렴하신 부사이시로군 이런 분이 또 어디 있을까, 여보게들 이런 어른에게 송덕비(頌德碑)를 아니 세워드리고 누구에게 세워 드리겠나?』
하고 모두 돈을 걷우어 송덕하는 비석을 세우고 그 비석을 팔마비(八馬碑)라고 이름 지었다.
따라서 그 뒤부터 이 고을에서 부사에게 말 여덟 필을 선사하던 악풍은 영영 없어지고 말았다.
二[이], 효자 서릉(孝子徐陵)과 생개고리(生蛙)
편집출천대효(出天大孝)─ 말이 쉽지 미미한 집 자식이 자기 보모에게 남다른 효성을 다 한다 하기로서니 하늘이 어찌 그를 알아 줄 리가 있으랴?
만일 하늘이 그에게 조그마한 일이라도 무엇을 보여 주었다면 그야말로 하늘이 낸 효자라 할 것이다.
고려 (高宗) 고종때 전라도 장성현(長城縣)에 살던 서릉(徐陵)이라는 사람의 이야기가 고려사(高麗史)에 기록되어있다.
서릉은 일찌기 아버지를 사별(死別)하고 형제 없는 단독신(單獨身)으로 늙은 홀 어머니 한분을 모시고 지내었다.
물론 환로(宦路)에 나서 벼슬아치 노릇을 못할 형편도 아니었지만 어머님 한분을 위하여 그는 청운(靑雲)의 큰 뜻을 다 포기하고 오로지 자식으로서의 효도를 다하여 볼려고 하였던 것이다.
어느 해 몹시 추운 겨울─
서릉의 어머니는 우연히 자리에 누워서 앓더니 목에 커다란 부스럼이 나며 병세가 날로 짙어 생명이 위태할 지경에 이르렀다.
서릉은 어느 날 지이산(智異山)에서 왔다는 의원(醫員) 한 사람을 청하여다가 어머니의 병세를 진찰하여 보았더니 의원 말이
『아! 병이 매우 위중 합니다. 생개고리(生蛙) 한 마리를 얻어야 이 병을 근치할 터인데…….』
하고 한탄하는 빛을 보였다. 서릉은 이 말을 듣고
『아니 지금 이 엄동설한에 어디 가서 생개고리를 구합니까? 아마도 하느님이 저에게 불효의 죄를 주시려고 이와 같은 병을 어머니에게 주신 것인듯 하오니 이일을 장차 어떻게 하면 좋을가요.』
하고 그는 그 자리에서 울며 불며 어쩔 줄을 모르고 애통하였다.
진찰을 한 의원도 서릉의 효심(孝心)에 감동 되어
『여보 울지 마시요. 생개고리가 없기로서 약을 못만드는 것은 아니니 그럼 나와 같이 딴 약재(藥材)로 약을 만들어 보기로 합시다.』
하고 의원과 서릉은 집 앞의 느티나무 밑에 조그마한 솥 한 개를 걸어 놓고 가진 소용되는 약재를 구하여 다가 솥 속에 넣고 불을 피어 약을 대리고 있었다.
남의 병을 고칠 책임을 진 의원, 또 자식으로서 어머니의 병을 낳게 해 보려는 효심이 지극한 서릉이니, 잠시도 이 약솥을 떠나지 못하고 정성껏 솥 옆에 앉아서 졸아 들어가는 약솥 속을 들여다 보고 있었다.
약이 거진 졸아들어갈 순간이었다. 잎이 다 떨어져 앙상한 느티나무 가지에서 무엇인가 이상스러운 것이 나무 위에서 떨어지더니 솥속으로 들어갔다. 곁에 앉아서 보던 두 사람은 깜짝놀라 마치 무슨 부정한 것이라도 들어 갔는가 하고 떨어진 그것을 들여다 보았다.
어찌 놀랍지 않으랴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서릉의 눈물을 짜내게한 생개고리(生蛙)였다.
『아! 효심(孝心)은 능히 창천(蒼天)을 감동시키는 구나』
의원은 이런 소리를 부르짖으며
『여보 이것은 당신의 효성에 감동되어 하늘이 주신 천업(天業)이니, 이제는 근심할 것이 없으니 약을 짜서 자친께 올립시다. 이 약이 반드시 그 병을 고치리다.』
하고 남의 일이지만 여간 기뻐하지 아니 하였다.
그 약이 신효스럽게 들어 서릉의 어머니는 병환이 완쾌한 후에도 오래 살다가 나이 구십(九十)에 천수(天壽)를 마치었다.
이러한 사실도 있거니와 사람의 자식으로 태어나서 어찌 부모에게 대한 한 조각의 효심이 없을소냐?
三[삼], 기우객(騎牛客)과 일지화(一枝花)
편집자연과학(自然科學)이 발달된 이때에 썩어진 묵은 이야기를 하는 것부터가 너무나 과학의 궤도(軌道)를 벗어난 듯 싶고 더우기 그중에도 점이니 사주(四柱)니 하는 일종의 미신(迷信) 같은 이야기를 쓰는 것이 상식에 어그러지고, 또 한편으로 미신을 조장하는 듯 싶으나, 이것은 옛사람이 기록해 놓은 글 중에서 좀 재미있다고 생각되는 것을 추려서 써놓고 읽고 그리고 나서 한번 허허 웃어 보자는 것이지 결코 이러니 우리도 운명판단을 이런 점이나
사주에 맡겨 앞일을 알아 보자는 것은 아니다. 이 점을 독자 여러분은 양해해 줄줄 알고 이야기를 기록해 보려고 한다.
이조 광해군(光海君) 때에 홍문관(弘文舘) 교리(校理)까지 지낸 남곡 김치(南谷金緻)는 시문(詩文)에 능하고 또한 추수(推數)에 남다른 재주가 있어 많은 신이(神異)한 일을 남겨 놓았고 또한 그가 인조반정(仁祖反正)의 후막(後幕)에서 적지 않은 도움을 끼치어 그의 여생(餘生)을 한(恨) 없이 마치게 된 것은 또한 그의 처세(處世)가 얼마나 능했다는 것도 짐작하고 남음이 있다 하겠다.
그는 자기 자신으로서도 능히 그의 이름은 후세에 남길만한 일을 많이 하였거니와 그보다도 그는 아들 하나를 잘 두어서 더 한층 후인(後人)에게 알려졌으니 그는 유명한 시인인 백곡 김득신(栢谷 金得臣)의 아버지인 까닭이다.
남곡이 일찌기 연경(燕京)에 갔을 때에 어떤 술사(術士) 하나를 만나 자기의 사주(四柱) 판단을 물었더니 그 술사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 다만
- 화산기우객(花山騎牛客)
- 두재일지화(頭載一枝花)
라는 한시(漢詩) 한 구절을 적어 주었다.
물론 이것을 알기 쉬운 말로 해석을 해 달라고 청했으나 그 술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대로 돌아 갔고 남곡 자신도 끝끝내 그것을 뜻깊게 알아 볼려고도 하지 않았다.
남곡은 그 뒤에 비록 입조(入朝)하여 암주(暗主)인 광해군(光海君) 조정(朝廷)이었을 망정 이벼슬 저벼슬 가진 벼슬을 다 밟아 홍문교리를 지내다가 시세(時勢)를 깨닫고 한강(漢江)가 용산(龍山) 한 모퉁이에서 두문생활(杜門生活)을 몇 해 하였다. 마침 심기원(沈器遠)을 만나 능양군(稜陽君〓後爲仁祖[후위인조])의 사주를 보아드리고 정사훈록(靖社勳錄)에 참예하여 마침내 혼조(昏朝) 때의 잘못을 속(贖)하고 특히 경상감사(慶尙監司)에 초배(招拜) 되었었다.
그는 임지(任地)에 가서 크고 적은 사무를 처결한 뒤에 곧 도내 순시(巡視)의 길을 떠나 경상도 안동(安東)에 다다랐는데 갑자기 학질에 걸려서 때려 부시는 듯한 두통(頭痛)과 사시나무 떨리듯 하는 오한(惡寒) 발열(發熱)에 견딜 수가 없었다.
지금 같으면 주사나 또는 키니네 같은 약을 먹으면 즉시 효력을 볼 수 있겠지만서도 그때만 해도 사백년이 가까운 옛날이니 그리 대수롭지 않은 학질일 망정 쉽게 낳는 약이 없었다. 도백(道伯)이 순역(巡歷) 길에 자기의 고을에 와서 뜻밖에 급한 병으로 신음하는 것을 본 안동 관속(官屬)들은 미안하기 짝이 없어 병을 고치려고 의논을 무수히 하다가 결국 항간에서 하는 치료방법(治療方法)의 하나인 기우료법(騎牛療法)을 해드리기로 하고 곧 검은 소(黑牛) 한 마리를 동헌(東軒) 뜰 안에 끌어다 놓고 김 감사더러 거꾸로 타고 뜰 안을 몇 바퀴 돌면 낳는다고 타기를 권하였다.
그리하여 김감사는 그들이 권하는 대로 그 검은 소를 거꾸로 타고 뜰 안을 대여섯 번 휘돌았다.
그러나 이것으로 병이 날리는 만무하고 아픈 골치와 떨리는 오한은 점점 심하여갈 뿐이었다.
참다 못하여 기운이 지친 김 감사는 겨우 소잔등에서 내려 방 안으로 들어가 누웠다.
이렇게 심하게 앓는 소리가 높아가며 신음을 하고 있을 때 안동 관속은 물론 관기(官妓)까지 모두 모여서 벼개 머리에 앉아서 병을 간호하고 있었다.
이때에 감사 머리맡에 앉아서 정성껏 간호에 열중하고 있는 기생 하나가 있었는데 어느덧 석양이 되었을 때 김감사는 겨우 소생된 정신을 수습하여 가지고 그 기생의 이름을 물어보았다.
『네가 누군데 이렇게 나를 지성껏 간호해 주느냐.』
하니 그 기생이 매우 송그스러운 얼굴로
『제 이름은 일지화(一枝花)온데 삿도의 병환이 매우 중한 것 같아서 미약한 힘이나마 이렇게 옆에 와서 있읍니다.』
고 얼굴을 푹 수그린채 낮으막한 목소리로 대답을 하였다. 그 기생의 이름이 일지화(一枝花)라 함을 들은 김 감사는 그제야 자기 사주의 시(詩)인
『화산기우객(花山騎牛客) 두재일지화(頭載一枝花)』
생각이 얼른 떠 올라서
『아이고 나는 이제 죽는구나.』
탄식하고 곧 육방 아전을 불러 새옷과 새 자리를 가저 오라 하여 운명(隕命)의 준비를 시키었다.
과연 그는 그날 저녁에 마침내 운명을 하고 말았는데 안동(安東)의 옛 읍호(邑號)가 화산(花山)이였으므로 뒷 사람들까지 그 점이 참 기막히게 맞았다고 감탄을 하였다.
四[사], 절세 역사(絶世力士) 권절(權節)
편집이조 단종(端宗) 때에 권절(權節)이란 사람이 있었다.
그의 충절(忠節)도 장하거니와 그의 힘이란 근세 역사 가운데 첫 손가락을 꼽을만치 남에게 뛰어 났었다.
그가 벼슬을 하기는 세종(世宗) 정묘(丁卯)년이니 처음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집현전(集賢殿) 교리(校)가 되었었는데 그는 문장에 재주가 있는 동시에 힘이 세기로도 유명하여 남이(南怡) 장군과 함께 이름 날리었다.
그는 급제(及第)할 때에 세종대왕으로부터
『경은 문무(文武)에 큰 재주가 있으니 궁마(弓馬)를 단련하여 큰 그릇(大器)이 되어라.』
하는 간곡한 말씀을 듣고 항상 천은(天恩)을 잊지 못하고 있다가 그 후에 그만 세조대왕(世祖大王)의 정란대업(靖難大業)이 성취되자 마침내 미친병(狂病)이 걸린 체 하고 세조대왕께서 주시는 벼슬도 받지 않고 이 세상에 숨어 살다가 세상을 마치었다. 이 밖에도 그가 성삼문(成三問) 박팽년(朴彭年)등 단종의 절신(節臣) 들과 다정하게 지내던 사이에 남긴 일화(逸話)가 적지 않으나 이는 그 당시 정치방면(政治方面)의 일면을 말하게 되므로 그만 덮어두고 다만 그의 힘이 얼마나 세었던가 하는 것만 알아보려고 한다.
그가 나이 겨우 열여섯살적 일인데 어느 날 그의 외갓집(外家) 종 계집애가 무슨 심부름을 맡아 가지고 이 집에 와서 그의 어머니에게 무슨 말인가 전하고 있었다.
마침 그 집 종 계집애 곁을 지나던 권소년이 어렸을 적의 장난 하는 심리로 그렇게 했던지는 몰라도 그 종 계집애의 치맛자락 한끝을 끌어다가 중 문간의 기둥을 번쩍 들고는 기둥과 그 주춧돌(礎石) 사이에다 살며시 집어 넣고는 얼른 밤으로 나가 버렸다.
그 종 계집애는 그런 줄은 전연 모르고 주인마님께 여쭐 말씀을 다 한 뒤에 돌아서서 문 밖으로 나가려고 하니 뜻밖에도 치맛자락이 기둥 밑에 들어가 있는 것을 발견 하였다.
『아이구머니, 이를 어째. 마님 어쩌면 좋아요 녜─.』
하며 그 종 계집애는 어쩔 줄 모르고 엉엉 울고만 서있었다.
그것을 내려다 본 그댁 주인마님이
『아이 그녀석이 아까 밖으로 나가던 길에 저런 장난을 하였구나. 얘 아가, 어서 나와 저 아이 치맛자락좀 빼내 주어라.』
하시며 방긋이 웃으신다.
안방에서 나온 처녀가 얼른 중문간으로 내려와 그 기둥을 번쩍 들어서 종 계집애 치맛자락을 빼내 주었다.
이 처녀는 다른 사람이 아니라 권절의 누이 동생이니 겨우 열네 살 된 어린 애였으니 이 집안에는 역사(力士) 남매(男妹)가 있었던 것이었다.
그 밖에 그가 스물두 살 적에 양주 망월사(楊州 望月寺)에 가서 남녀가 어울려서 논 이야기인데, 어느 해 가을에 단풍 구경 겸 몇 친구와 망월사를 올라 갔더니, 때마침 어떤 기골이 장대한 중 하나가 그 절에 많은 중을 둘러 앉히고 힘이 세다는 자랑을 하고 있었다.
권절도 그 곁에 가서 한참 동안 그 중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가
『여보 대사, 그러면 대사의 힘을 우리 속색(俗客)에게 좀 보여 주십시요.』
하고 청하였다.
그랬더니 그 중은
『아 그러십시요.』
하며 쾌락을 하였다.
『그럼 좋은 수가 있오.』
이렇게 말한 권절은 곧 그 절의 중을 시켜 그 절 안에 있는 사기 그릇을 전부 모아 오게 하니 전부가 열 죽(백개)이 넘었다.
그는 그것을 앞에 쌓아 놓고 장사 중을 향하여
『여보 대사 어디 손가락으로 이 사기 그릇을 퉁켜 깨뜨려 보시오.』
하였다.
그 중은 속으로
『실 없은 사람 같으니 이까짓껏.』
하고 달려들어 한개 두개 깨뜰기 시작하여 겨우 두죽(스무개)를 깨뜨린 뒤 에
『아이고 손가락 아퍼라, 소승은 더 못 깨뜨리겠읍니다.』
하고 그만 물러섰다. 권절은 빙그레 웃으며
『그럼 내가 어디 깨뜨려 볼까』
하고 들어서더니 이 얘기 저 얘기 가진 잡담을 하면서 깨뜨리기를 순식간에 나머지 여덟죽을 하나도 남김 없이 다 깨뜨려 버렸다.
그런 중에서도 함부로 부신 것이 아니라 깨여진 조각을 보면 혹 열 서너개는 아미눈섭(娥眉)을 만들기도 하고 또는 열 서너개의 꽃송이 같이도 만들어서 마치 재주 좋은 쟁인 마치가 잘드는 칼로 오려 낸듯 하였다.
이것을 보고난 그 절의 다른 중들은 물론이요 내가 힘이 제일 세다 하면서 힘 자랑을 하던 그 중도 그만 그자리에 엎드려서 절을 하고
『참 서방님은 하늘이 내신 장사(壯士)올시다.』
하고 무수히 칭찬을 올리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