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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다. 따라서 그 時節의 나의 追憶도 斷片的일 수 밖에 없읍니다.
지금도 눈앞에 선한 그 情답던 모습은 四角帽에 校服을 입은 형님이 아니라, 베바지 베적삼에 밀집모자를 쓰고 황소와 나란히 서 있는 형님입니다.
故鄕에 돌아 오면 그날로 洋服은 벗어 놓고 우리 옷으로 바꾸어 입고는 할아버지와 어머니의 일을 도왔읍니다. 소꼴도 비고, 물도 긷고, 때로는 할머니와 마주 앉어 맷돌도 갈며 寡默하던 그도 유모어를 섞어 가며 서울 이야기를 하던 것입니다.
이러한 生活 속에서도 남몰래 쉬는 한숨을 나는 옆에서 가끔 들은 듯 합니다. 그것은 些少한 일로 傷함을 입는 끓어오르는 詩興과 讀書時間의 아쉬움에서 였을 것입니다.
노여움도 아까움도 微笑로서 흘려 보낼 수 있었던 그는, 차— 2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