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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히테의 言語觀(下)

金 善 琪

四. 三의 演譯에 依한 必然的 結果

『一 民族의 人文的 發達에 言語의 性質이 어떠케 헤아릴 수 없는 影響을 미치는가。 言語는 各 個人이 思惟 及 意慾함에 際하야, 그 情緖의 神秘的 深處에 이르기까지 參與하야, 혹은 이것을 制限하고, 혹은 날개를 주어, 같은 말을 하는 사람의 全體, 自己의 領域 안에 두고, 唯一 共通한 理解서 結合하야, 感覺世界와 世界와의 交流点이 되고, 世界의 두 끝을 密接히 融合하야, 어느 世界에 屬한 것임을 말할 수가 없게 하는 것이니, 만약 甲乙의 關係가 生과 死의 關係라 하면, 그 結果가 얼마나 클 것은 推測하기 어렵지 않다。 生命 잇는 民族과 그러치 아니한 民族의 根本的 差異를 一括하야 말하면, 다음과 같다。』 그가 말한 것을 줄여 적어 보면,

第一 生命 잇는 말을 가진 民族에 잇어서는, 그 精神的 發達이 바루 生命에 作用한다。 反對의 境遇에는 精神的 發達과 生命과 沒交涉이다。…… 이 命題의 意味를 잘게 說明할 必要가 있다。 精神的 發達이 生命에 作用한다 함은, 根源的 生命 및 이 生命 精神的 生命의 原, 곧 神으로 부터 간단없이 흘러나옴, 사람이 제 原形에 같게 自己를 끓임없이 맨들어감, 곧 한 새로운 從來에 없는 生命을 맨듬을 意味함이요, 決코 生命의 狀態를 現狀態대로 維持하고, 그 墮落을 막는 意味가 아니다。 더구나 一般의 發達에 뒤진 特殊한 個人의 救濟를 意味한다고 보아서는 아니 된다。

다음에 精神的 發達이라는 말이 잇는데, 이것을 오로지 哲學으로 解釋할 것이다。 何故뇨 하면, 精神 生命의 永遠한 原形을 科學的으로 押捉하는 것은 곧 哲學인 까닭이다。 이 哲學 및 哲學에 터를 둔 科學은, 生命 잇는 산 말을 가진 民族에 잇어서는, 그 生命의 속에 흘러들어 갈수 잇다는 것이, 우의 命題의 뜻이다。 이와 같이, 산 思想作用은 한 살아 움지기는 言語로써 思惟를 表現하므로 因하야, 두드러지게 쉬워지고, 만약 그 思惟가 相當히 힘차고 깊은 것이면, 다시 必然的인 것이 된다。 산 말은 그 自身이 곧 生命이요, 또한 感覺的의 것이어서, 도리켜 自己 自身의 全 生命을 描寫하고, 抱持하고, 또 이것에 作用한다. 이러한 말을 가진 境遇에는 心靈이 바루 言語를 向하야 말하고, 言語에 自己를 啓示함이, 마치 사람이 사람에게 보임과 같다. 이에 反하야, 죽은 國語는 直接 아무 것도 刺戟하지 못한다。 따라서, 산 哲學을 가지지 못한다。 그러나, 산 말을 가진 民族의 精神 發達은, 이미 思惟者의 生命이다. 그래서, 이 生命은 必然的으로 自己 以外의 生命, 따라서 現存한 一般 生命 속에 흘러 들어가, 이것을 同化 하려고 애를 쓴다。 何故뇨 하면, 그의 思惟가 一種의 生命으로 사람에게 生氣를 주며, 사람은 淨化하여 또한 救濟하는 힘을 보고, 그 思惟者는 衷心으로 快咸을 느낀다。

그런데, 個個의 生命에서 시작하야, 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