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이지:선전원수책 (1947년 제10-12호).pd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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南朝鮮에 있어서도 米軍이 上陸하기前에 人民委員會가 坊坊谷谷에 組織되어 秩序있게 自治를 하여나갔다。그러나 南朝鮮에 上陸한 米軍은 軍政을 實施하면서 「아직 朝鮮人民에게는 主權이 있을수없고 南朝鮮에는 唯一한 政府로 米軍政이 있다」고하여 人民委員會들을 解散시키기 始作하였다。

最初 이러한 米고의 政策에 적지않은 疑心을 하면서도 朝鮮人民은 朝鮮問題가 쏘米兩軍의協定을 圓滿히 解決될것을 期待하면서 建國草創事業을 進行하여왔다。

一九四五年十二月 朝鮮의民主獨立을 閩際的으로 堡障한 모쓰크바三相會議決定이 發表되자 朝鮮人民의 絕對多數는 이를 絕對支持하면서 그實現을爲하여 鬪爭하였다。北擲鮮에서는 統一政府樹立을 促進시킬 目的으로 北朝鮮臨時人民委員會가 組纖되었으며 朝鮮民主化의 첫 改革事業으로 土地改革이 實施되었다。오직 少數의 親日分子 民族叛道者들만이 이決定을 反對하며 그實現을 妨害하였다。

一九四六年三月 쏘米共委가 開翟되자 朝鮮人民은 모쓰크바決定이 實現될것을 期特하면서 쏘米共委事業을 積極協助하였다。

그러나 여기에서 米國은 朝鮮에對한 侵略的 企圖를 明白히 表示하기 始作하였다。

그들은 朝鮮臨時政府樹立問願보다는 自己네의 市場을 擴張하기爲하여 南北經濟統一을 主張하였으며 모쓰크바決定을 骸骨的으로 反對하여 「反詡」 分子들을 擁護하면서 結局 쏘米共委를 破淀시켰다。

米國代表團과 親日分子 民族叛逆者들의 策動으로 말미암아 全朝鮮人民이 舉族的으로 期待하던 쏘米共委가 休會되자 北朝鮮人民들은 租國의 運命을 解決하기 爲하여 모쓰크바決定을 迅速히 實現할 目的으로 諸般民主改革을 實施하였다。

勞動法令、男女平等權法令 日帝와 民族叛逆者들의 產業機關의 國有化等을 걸쳐 半萬年에 처음인 民主選擧를 實施하여 各級人民委員會를 固定化하였다。

한便 날로 暴惡하여가는 米軍政의 彈壓政策에 抗拒하여 南朝鮮에서는 總罷業人民抗爭들이 일어나 朝鮮人民의 民主力量을 團結 示威하였다。

朝鮮에서 처음인 人民經濟復興發展을為한 一九四七年度 人民經濟計劃이 勝利的으로 遂行되어가는 가운데서 今年五月二十一日 쏘聯의 正當한 主張과 朝鮮人民의 要求에 依하여 다시 쏘米共委가 再開되었다。

그러나 再開된 쏘米共委에 있어서 米國은 참말로 外交史上에서 일즉이 例를 볼수없는 가진 鎚想를 다부려가면서 쏘米共委를 破腕시키려고 策動하였다。

「世界 어느辭典에도 社會團體에 對하여 明確한 規定은 없다」하여 不過三、四人의 觀陸會、바독俱樂部까지 政府組織에 參加시키여야한다는「어지」와 醜惡한 策動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