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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출되었고, 2002년 12월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하여, 2003년 2월 제16대 대통령으로 취임하였다.

노백린盧伯麟(1875~1926)독립운동가. 호는 계원이며 황해도 풍천에서 출생하였다.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후 귀국하여 관립 무관학교의 교장 등을 역임하였다. 1907년, 안창호 등과 '신민회'를 조직하여 활약하였으며 군대가 해산당하자 고향에 내려가 광산·피혁상 등을 경영하였다. 1914년, 하와이로 건너가 박용만 등과 '국민군단'을 창설하여 군사 훈련을 실시하였다. 1920년 캘리포니아로 가서 비행사 양성소를 설립하여 비행사를 양성하였고, 그 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항일 운동에 종사하다가 상하이에서 병사하였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 공로훈장 복장이 수여되었다.

노사신盧思愼(1427∼1498)조선의 문신·학자. 자는 자반, 호는 보진재, 본관은 파주이다. 단종 때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세조 때 도승지를 거쳐 호조판서로 있을 때 왕명으로 『경국대전』 중 「호전」을 맡아 편찬하였다. 1498년 무오사화 때 훈구파의 중신으로서 유자광 등과 함께 김종직을 규탄하는 데 동조했다. 그러나 사림파 전부를 몰아내는 것에는 반대하여 많은 선비를 구했다. 『삼국사절요』 『여지승람』을 편찬하였으며, 서거정과 함께 『향약집성방』을 번역하였다.

노수신盧守愼(1515∼1590)조선의 문신·학자. 자는 과회, 호는 소재, 본관은 광주이다. 중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전적·시강원 사서가 되었다. 명종이 왕위에 올랐을 때 을사사화를 일으켰다고 하여 순천으로 유배되었다. 여기에 또다른 사건이 겹쳐 진도로 다시 쫓겨가 19년 동안이나 귀양살이를 하였다. 그 동안 이 황·김인후 등과 서신으로 학문을 토론하고 이 황과 논쟁하여 「인심도심변」을 저술하기도 하였다. 1567년 선조가 즉위하자 풀려나와 영의정까지 지냈으나, 1588년 사임하고 영중추 부사가 되었다. 이듬해 정여립을 천거했던 관계로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 문장과 서예에도 능했다. 저서로 『시강록』 『소재 문집』 등이 있다.

노중례盧重禮조선 중기의 의학자. 한의학에 권위가 있었으며 특히 부인과에 밝았다. 세종 때 유호통과 함께 정리한 최초의 약용 식물학 서적인 『향약 채집월령』을 지었는데, 식물 이름을 한글로 적어 쉽게 약으로 쓸 수 있도록 하였다. 전의감정이 되어 명에 왕래하면서 유호통·박윤덕 등과 더불어 『신증 향약집성방』 84권을 편찬하여 한약계에 크게 공헌하였다. 저서로 『의방유취』 『태산요록』 등이 있다.

노천명盧天命(1913∼1957)여류시인. 아명은 기선이며, 황해도 장연에서 출생하였고, 이화여자전문학교 문과를 졸업하였다. 재학 때부터 시를 발표하였다. 이때의 대표작으로 「옥수수」가 있다. 『중앙일보』 『여성지』의 기자로 근무하고 『시원』의 동인으로 활약하였다. 괴로움과 가난 속에서 결혼도 하지 않고 일생을 보냈으며, 빠지기 쉬운 감상을 제어하고 향토색이 짙은 시를 썼다. 시집으로 『산호림』 『창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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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태우

노태우盧泰愚(1932∼ )군인·정치가·제13대 대통령. 경북 달성에서 출생하였으며, 1955년 육군사관학교를 제11기로 졸업하였다. 그 후, 미국 특수전학교를 유학하고 돌아와, 수도경비사 사령관·보안사 사령관 등을 지냈다. 1981년 대장으로 예편하고, 이듬해 초대 체육부 장관을 거쳐 내무부 장관을 역임하였다. 1983년에는 서울 올림픽 조직위원장이 되었고, 이듬해에는 대한체육회 회장 겸 대한올림픽 위원장이 되었다.

1985년, 제12대 국회의원(전국구)이 되었고, 1987년에는 민정당 총재로 선출된 후 민정당 대통령 후보로 지명되었다. 민주화 조치의 단행, 대통령 직선제의 수용 등을 내용으로 한 6·29선언으로 과열된 학생 데모와 정국 불안을 안정시키고 여·야 합의하에 대통령 직선제 개헌안을 국민투표에 붙여 통과시켰다.
같은 해 12월 실시된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하여, 1988년 2월 제13대 대통령으로 취임하였다. 퇴임 후, 1995년 재임기간 중 마련한 비자금 문제와 관련 서울구치소에 수감되었다가 1997년 12월 사면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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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개의 사당 의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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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기 논개문

논개論介(?∼1593)조선의 의기. 성은 주이며 전북 장수에서 출생하였다. 진주의 관기로 병마절도사 최경회의 사랑을 받았다. 1593년, 진주성이 왜군에게 함락되고 왜장들이 촉석루에서 축하 잔치를 벌였을 때, 술에 취한 왜장 게타니를 끼고 벽류 속에 있는 바위로 유인해서 남강에 함께 뛰어들어 죽었다. 후세에 그녀의 정렬을 찬양하여 그 바위를 의암이라 부르고, 비를 세우고 강 위에 사당을 세워 나라에서 제를 지냈다.

눌지왕訥祇王(?∼457)신라의 제19대 왕(재위 417∼457). 내물왕의 아들이며 왕호는 마립간이다. 실성왕이 자신을 죽일 계획을 알고 먼저 실성왕을 죽인 후 즉위하였다. 418년, 박제상을 시켜 고구려에 볼모로 가 있던 동생 복호와 일본에 볼모로 가 있던 동생 미사흔을 데리고 오도록 하였다. 455년, 고구려가 백제로 쳐들어왔을 때, 응원군을 보내 고구려를 막았다. 한편 눌지왕 때 묵호자가 불교를 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