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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영조 때 관작이 복구되었다. 저서에 『국조 자경편』 『몽화집』 등이 있다.

김창협金昌協(1651~1708)조선의 학자. 자는 화중, 호는 농암, 본관은 안동이다. 영의정 김수항의 아들이다. 현종 때 진사에 급제하였으며 숙종 때 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대사성·청풍 부사에 이르렀다. 기사환국으로 아버지 김수항이 사약을 받고 죽자 벼슬을 내놓고 산중에 들어가서 살았다. 아버지의 억울한 죄명이 풀리자, 대제학·예조판서 등으로 여러 차례 불렸으나 끝내 사양하였다. 저서로 『농암집』 『사단칠정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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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천일의 필적

김천일金千鎰(1537~1593)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자는 사중, 호는 건재, 본관은 언양이다. 임진왜란 때에 나주에서 의병을 일으켜 수원 행산고성을 거쳐 강화성으로 들어갔다. 이듬해 명의 이여송 군대가 개성으로 오고 있을 때, 이들에게 지형과 적의 형편 등을 알리어 작전을 도왔다. 왜군이 남으로 후퇴하기 시작하자, 이를 추격하여 진주성에 주둔하였다. 그 후 왜군이 대군을 이끌고 성벽을 넘어 들이닥쳤으나, 아군은 화살이 떨어지고 창검이 부러져 대나무 창으로 맞서 싸우다가 마침내 성이 함락되었다. 이에 그의 아들 상건과 함께 남강에 투신하여 자살하였다. 저서로 『송천집』 『건재유집』 등이 있다.

김천택金天澤조선 영조 때의 가인. 자는 백함, 호는 남파이며 숙종 때 포도청의 포교를 지냈다. 시조를 잘 지어 57수를 남겼다. 김수장과 더불어 평민 출신의 가객으로 시조의 정리·발달에 이바지하였다. 그가 편찬한 시가집 「청구영언」은 국문학상 중요한 가치를 지니는 귀중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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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춘수

김춘수金春洙(1922~ )시인. 경남 충무 출생. 니혼대학 예술과를 중퇴한 뒤, 경북대학교 교수를 역임하였다. 1946년 시 「애가」를 발표하면서 본격적으로 창작활동을 시작했다. 광복 후 종래의 서정적인 바탕 위에 주지적인 시풍을 이루는 데 힘썼다. 한국 시인협회상, 자유문학상 등을 수상하였다. 시집으로 『구름과 장미』 『부다페스트에서의 소녀의 죽음』 등이 있다.

김춘택金春澤(1670~1717)조선의 문인. 자는 백우, 호는 북헌, 본관은 광산이다. 숙종 때 기사환국으로 서인이 제거되자, 집안이 큰 화를 입었다. 1694년 갑술옥사로 남인이 실각하자 풀려났으나 서인이 다시 노론·소론으로 나누어지자 노론에 속하였다. 그는 소론의 탄핵으로 부안에 유배되었으며, 유배중 세자(후의 경종)를 살해하려 한다는 모함을 받고 제주도로 귀양갔다. 글씨도 잘 썼을 뿐만 아니라 시에 대한 재주가 뛰어나서 명성이 높았으며, 할아버지 김만중이 지은 소설 「구운몽」과 「사씨남정기」를 한문으로 번역하였다. 저서로 『북헌집』과 글씨 「호판 김진귀 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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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취려의 필적

김취려金就礪(?~1234)고려의 장군. 본관은 언양이며 동궁위를 거쳐 장군이 되었다. 고종 때 거란의 왕자가 몽고군에게 쫓겨 쳐들어온 것을 무찌르고 상장군이 되었다. 1218년, 전군 병마사가 되어 충청도 제천까지 침입한 거란군을 격퇴하였으며, 이듬해 강동성을 근거로 하여 저항하는 거란군을 몽고·동진의 군사와 함께 연합하여 무찔렀다. 또, 그 해 한 순·다지 등이 의주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이를 평정하여 판병부사 시중이 되었다. 용맹스러울 뿐 아니라 성품이 곧고 깨끗하여 부하를 골고루 아끼었으며, 싸움에서는 뛰어난 지략으로 큰 공을 세웠다.

김치양金致陽(?~1009)고려 때의 권신. 본관은 동주이며 목종의 어머니 헌애 왕후 황보씨의 외가 친척이다. 성격이 간교하여 승려로 가장하고 헌애 왕후가 사는 천추궁을 드나들며 추문을 만들었다. 목종이 즉위하자, 천추 태후(헌애 왕후)가 불러들여 우복야 겸 삼사사의 벼슬을 주었다. 그는 태후와의 사이에 낳은 아들을 왕으로 세우려고 대량군 순(후의 현종)을 죽이려다가 실패했고, 다시 유일한 혈통인 목종을 해하려 하다 실패했다. 강 조의 정변으로 현종이 즉위하자 김치양은 그의 아들과 함께 처형되었다.

김태길金泰吉(1920~ )수필가·철학자. 호 우송(友松). 충북 중원 출생. 서울대 철학과 및 미국 존스홉킨스대 대학원 졸업. 1955년 『사상계』에 수필 「화단(花壇)」을 발표함으로써 문단에 데뷔했다. 이어 「나비」 「삼남삼녀」 등을 발표했고, 첫번째 수필집 『웃는 갈대』를 간행, 이후 학술논문과 수필들을 다수 발표했다. 수필집으로 『빛이 그리운 생각들』 『검은 마음 흰 마음』 『멋없는 세상 멋있는 사람』 등이 있고, 저서에 『우리의 현실과 서구사상』 『이조소설에 나타난 한국인의 가치관』 등이 있다.

김태현金台鉉(1261~1330)고려의 학자. 자는 불기, 본관은 광산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학문에 힘쓰다, 충렬왕 때 문과에 급제하여 우승지를 지냈다. 밀직부사로 원에 갔을 때, 원 황제가 간쑤성에 가 있으면서 "진공사는 모두 베이징에 머물라"고 하자 "황제가 있는 간쑤성에 가는 것이 우리 왕의 명령이니 어길 수 없다" 하며 간쑤성에 가서 황제를 만났다. 이에 원 황제가 그의 충성심에 탄복하여 낭중이라는 벼슬을 내렸다. 귀국 후 벼슬이 중찬에 이르렀다. 저서로 『동국문감』이 있다.

김통정金通精(?~1273)고려의 장군. 1271년, 삼별초의 난 때 배중손과 함께 원과 연합한 고려군에게 진도에서 패하자, 나머지 군사를 이끌고 제주도로 가서 연안을 지배하였다. 조정에서는 수십 차례 사람을 보내 항복을 권유하였으나, 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