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픽 상징 조형물, 건국대 도서관, 서강대 본관, 경주 국립 공원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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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김지하金芝河(1941~ )시인. 전남 목포 출생. 본명은 영일(英一)이며 지하(芝河)는 필명. 원주중학교, 중동고등학교 졸업하고 서울대 미술대에 다니던 중 4·19의거에 가담하였다. 1969년 『시인』지(誌)에 「서울길」로 등단하고, 『사상계』에 특권층의 권력형 부정과 부패상을 판소리 가락으로 통렬하게 비판한 담시 「오적」(1970)을 발표하여 반공법 위반 혐의로 체포·투옥되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그의 필명이 세계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 후 인혁당사건과 민청학련사건 혐의를 받고 1974년 내란선동죄 등의 죄목으로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같은 해 7월 무기징역으로 감형되고, 『김지하 시집』(1974)이 일본에서 간행되었다. 작품으로 희곡 「나폴레옹 꼬냑」(1970) 등과 평론 「풍자냐 자살이냐」(1970), 「민족의 노래 민중의 노래」(1970), 시집으로 『향토』(1970), 『타는 목마름으로』(1982), 대설 『남(南)』(1982), 『애린』(1986), 『이 가문 날에 비구름』(1988), 『볕밭을 우러르며』(1989) 등과 산문집 『남녘땅 뱃노래』(1985), 수상록 『살림』(1987) 등이 있다. 1975년 로터스상 특별상을 수상하고 노벨문학상 평화상 후보로 추천되었으며, 1981년에는 세계시인대회가 주는 '위대한 시인상'과 '크라이스키 인권상'을 수상했다.

김진섭金晋燮(1903~?)수필가·독문학자. 경북 안동 출생. 일본 호세이대학 독문과 졸업. 1927년 해외문학 연구회 동인, 1931년 극예술 연구회 동인으로 활약했으며, 해방 뒤 서울대학·성균관대학 교수를 역임했다. 수필가로서 독특한 경지를 개척하여 수필문학에 크게 이바지했으며, 6·25전쟁 때 납북되었다. 수필집에 『인생 예찬』 『생활인의 철학』 등이 있다.

김 질金質(1496~1561)조선의 학자. 자는 문소, 호는 영모당, 본관은 안동이다. 부모를 지성으로 모시어서 사람들이 그의 효도에 감동하였다. 그가 죽은 뒤 고향에 효자 정문을 세워 그의 효성을 기념하였다. 저서로 『영모록』 『육서자책설』 등이 있다.

김 집金集(1574~1656)조선의 문신. 자는 사강, 호는 신독재, 본관은 광산이다. 18세 때 진사에 급제하여 재랑에 이르렀으나, 광해군의 어지러운 정치를 보고 연산으로 돌아가 은거하였다. 인조반정 후에 부여 현감을 거쳐 임피 현령으로 있다가 벼슬을 내놓았다. 효종 즉위 후, 이조판서로 부르자 3번이나 사양해도 허락하지 않자 감격하여 받아들였다. 영의정 김자점이 파면되자, 효종과 함께 북벌을 계획하였다. 이때 김자점이 청에 밀고함에 따라 청의 군사가 압록강까지 몰려와 나라가 어수선해지자 관직을 사임하였다. 학문이 깊어 우수한 제자들을 많이 배출했으며 글씨에도 능하였다. 저서로 『신독재 유고』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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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숙

김창숙金昌淑(1879~1962)유학자·독립운동가. 자는 문우, 호는 심산, 본관은 문소이다. 경북 성주에서 출생하였으며 일찍이 유학을 배워 조예가 깊었다.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스승인 이승희를 따라 서울로 올라와 매국 5적의 처형을 상소하였다. 1909년 매국 5적이 한일합방을 주장하자, 이에 반대하는 성토문을 각 신문사에 보냈으며, 이로 인하여 체포되어 감옥살이를 하였다. 출옥 후 개인의 재산을 털어 성명학교를 세웠으며, 3·1운동이 일어나자 해외로 망명하여 한국 유학자들이 독립을 호소한 '유림단 진정서'를 갖고 상하이로 건너가 파리 만국 평화 회의에 보내는 한편, 중국·일본 및 구미 주요 기관에도 보냈다. 그 해,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이 되었으며, 이듬해 귀국하여 독립 자금을 모금하던 중 체포되었으나 풀려나와 중국으로 건너갔다. 거기서 신채호 등과 독립 기관지 『천고』를 발행하고, 이어 박은식과 함께 『사민일보』를 발간하여 교포들의 독립 정신을 고취시키는 한편, 서로군정서를 조직하여 독립 자금을 마련하였다. 광복이 되자 민주의원 의원을 지냈으며, 성균관대학교를 창립하여 학장에 취임하였다. 6·25전쟁 때 자유당 독재에 반대하여 이시영·김성수·조병옥 등과 함께 투쟁을 하였다. 82세에 노환으로 사망했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 공로 훈장 중장이 수여되었다.

김창업金昌業(1658~1722)조선의 화가·학자. 자는 대유, 호는 노가재, 본관은 안동이다. 영의정 김수항의 아들이며 진사에 급제하여 교관을 지냈다. 시문과 그림에 뛰어났다. 화양 서원에 있는 송시열의 화상은 그가 그린 것을 화공이 그대로 베낀 것이다. 숙종 때 형인 김창협과 베이징에 다녀와서 기행문 「연행록」을 썼다. 저서로 『노가재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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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집

김창집金昌集(1648~1722)조선의 정치가. 노론의 4대신 중의 한 사람. 자는 여성, 호는 몽와, 본관은 안동이다. 영의정 김수항의 아들이며 김창협의 형이다. 숙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병조참의에 이르렀으나, 아버지 김수항이 기사환국 때 진도에 유배되어 사약을 받고 죽자, 벼슬을 내놓고 산중에 들어가 나오지 않았다. 1694년 정국이 바뀌자 영의정에 올랐으며 경종이 즉위하였으나 왕이 병약하고 후사가 없다는 이유로 노론의 대신들과 협의하여 왕세제(후의 영조)의 책봉을 상소하여 이를 실행하게 하였다. 1721년, 왕세제의 대리청정을 상소하여 시행하게 하였으나, 조태억 등의 반대로 취소되자 벼슬에서 물러났다. 이어 김일경 등이 반역을 꾀한다고 고발함으로써 신임사화가 일어나 거제도로 유배되었다가 사약을 받고 죽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