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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제자를 길러 냈으며, 성종의 각별한 총애를 받아 제자들을 관직에 등용시킴으로써 훈구파와 심한 대립을 일으켰다. 그는 일찍이 「조의제문」을 지었는데, 그가 죽은 후인 연산군 4년에 제자 김일손이 사관으로 있으면서 이것을 사초에 적어 넣은 것이 원인이 되어 '무오사화'가 일어났다. 이로 말미암아 그는 부관참시(관을 부수어 시체의 목을 벰)를 당하고 많은 문집이 소각되었으며, 그의 제자들이 모두 참화를 당하였다. 총재관으로서 『동국여지승람』 55권을 증수하였고 서화에도 뛰어났다. 저서에 『점필재집』 『청구풍아』 『유두유록』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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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필

김종필金鍾泌(1926~ )군인·정치가. 충남 부여 출생. 제 6, 7, 8, 9, 10, 13, 14, 15대 국회의원, 11·12대 국무총리. 현 자유민주연합(자민련) 총재. 1947년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교육학부 2년을 수료하고 1948년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였다. 1961년 5·16 군사정변의 중심인물로 초대 중앙정보부장에 취임하여 활약하였으며, 공화당내분으로 정계를 은퇴하였다. 1971년 공화당 부총재직을 맡고 제8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으며, 같은 해 6월 국무총리에 취임함으로써 정계에 복귀하였다. 1990년 3당합당을 하여 민자당 대표최고의원으로 활동하다가 1995년 탈당하여 자유민주연합을 창당, 총재가 되었다.

김좌명金佐明(1616~1671)조선의 문신. 자는 일정, 호는 귀천, 본관은 청풍이다. 인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대사헌과 병조판서를 지냈다. 아버지 김 육의 건의에 따라 효종이 호남 연해와 산골까지 대동법을 실시하려 하자 자진하여 그 책임자로 나섰고, 현종 때 군율을 바로잡아서 수어사를 겸하게 되었다. 여러 관직을 겸임하여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을 한 끝에 병을 얻어 죽었다. 저서에 『영상 김 육의 비』 『사계 김장생의 비』 등이 있다.

김좌진金佐鎭(1889~1930)독립운동가·장군. 호는 백야, 본관은 안동이며 홍성에서 출생하였다. 15세 때 집안의 종들을 모두 해방시키고 토지를 소작인들에게 나누어주는 등 근대화에 앞장섰으며 호명학교를 설립하였다. 을사조약 체결 후, 기호학회·청년 학우회 등의 간부를 지내고 대한 광복단에 가입하여 독립운동 자금 모집을 위해 활동하다가 체포되어 3년 간 복역하였다. 1917년 만주로 망명하여 서 일 등과 군정부를 조직하고 이를 북로군정서로 개편하여 총사령관에 취임하였다. 1920년 북로군정서의 군대를 동원하여 청산리 전투를 총지휘하여 일본군 제19, 21사단을 상대로 격전을 벌여 독립운동사상 최대의 전과를 올렸다. 그 후 일본의 보복 작전을 피하여, 1921년 군사들을 이끌고 소련의 자유시로 건너가 군관학교를 세우고 훈련하다가 소련군과 충돌하여 다시 북만주로 건너왔다. 1929년 '한족 연합회'를 결성하여 주석이 되고 항일 투쟁과 동포의 단결에 힘쓰다가 부하였던 공산 청년회의 김일성·박상실 등에게 암살당하였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 공로 훈장 중장이 수여되었다.

김주열金朱烈(1943~1960)4·19 혁명 학생. 전북 남원에서 태어났다. 남원 금지중학을 졸업하고 1960년 마산 상업고등학교에 입학하였다. 이 해 마산에서 3·15 부정 선거를 규탄하는 데모에 나섰다가 행방불명되었다. 약 한 달 후에 머리에 최루탄이 박힌 시체로 마산 앞바다에 떠올랐다. 이 참사가 경찰의 소행임이 밝혀지자, 정부에 대한 학생들의 분노가 폭발하여 4·19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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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영

김주영金周榮(1939~ )소설가. 경북 청송 출생. 서라벌예대 졸업. 1971년 『월간문학』에 「휴면기」가 당선되어 등단. 주요 작품으로 「머저리에게 축배를」 「도둑 견습」 「천둥 소리」 「목마 위의 여자」 「과외 수업」 「천궁의 칼」 「붉은 노을」 「객주」 「외촌장 기행」 「겨울생」 등이 있다. 그는 평범한 삶을 민족사의 비극과 관련시켜 보여 주며, 경험된 자기 세계에 대한 동경과 애정을 갖고 집착하는 작가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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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중업의 88올림픽 기념 조형물

김중업金重業(1922~1988)건축가. 호는 오심이고 평양에서 태어났다. 평양고등보통학교와 일본 요코하마 고등공업학교를 마치고, 도쿄 마쓰다 히라다 설계사무소에 근무하였다. 서울공대 조교수를 지냈고, 1952년 이탈리아의 베네치아에서 개최된 유네스코 주최 제1회 국제 예술가회의에 한국 대표로 참석하였다. 프랑스의 파리시 '르 콜뷔제' 건축연구소에서 도시 계획을 연구하며 다수의 작품을 내었다. 1956년 귀국하여 김중업 건축연구소를 열고, 중앙공보관에서 김중업 작품전을 개최하였다. 1959년 미국으로 가 원자력 시설을 시찰했고, 건설 기술자 심사위원·국전 심사위원을 역임했다. 1962년 서울시 문화상, 1965년 프랑스 국가 공로 훈장을 받았다. 작품으로는 헬싱키 교외에 있는 「밀바의 집」, 국회의사당, 88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