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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 혼자 쓰시마 섬에 가서 지도를 그려 왕에게 바쳤다. 작품으로 「칠보대」가 있다.

김인겸金仁謙(1707~?)조선의 문인. 영조 때에 진사로 사신 조 엄을 따라 일본에 다녀온 후, 그 기행을 율문시로 쓴 「일동장유가」를 지었다. 이 기행 가사는 한국 문학사상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김인문金仁問(629~694)신라의 장군·외교가. 자는 인수이며 태종 무열왕의 둘째 아들이다. 진덕 여왕 때에 왕명을 받고 당에 가서 좌령군위장군이 되어서 돌아와 장산성을 쌓고 국방을 튼튼히 하였다. 백제의 거듭되는 공격으로 위급해지자, 다시 당에 가서 나·당 연합군을 조직하는 데 성공하였다. 660년 소정방·김춘추와 함께 백제를 멸망시키고 각간이 되어 당에 머물렀다. 668년 귀국하여 당의 군사와 함께 고구려를 쳐서 정복하였다. 그 후 당에 머물면서 양국의 국교를 조절하다가 그곳에서 병사하였다. 그는 유학의 대가로 이름을 떨쳤으며 음악과 글씨에도 능하였다.

김인후金麟厚(1510~1560)조선의 문신·학자. 자는 후지, 호는 하서, 본관은 울산이다. 김안국의 제자로 성균관에 들어가 이 황과 함께 학문을 닦았다. 중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에 등용되었다. 명종이 즉위하고,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병을 이유로 장성에 돌아가 성리학의 연구에 몰두하였다. 이 황의 이기 일물설에 반대하였으며, 이기는 혼합해 있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천문·지리·의약·산수·율력에 정통하였다. 저서에 「하서집」 「주역관상편」 등이 있다.

김일경金一鏡(1662~1724)조선의 문신. 자는 인감, 호는 야계, 본관은 광산이다. 1702년 과거에 급제하여 세자 시강원 문학·지평을 역임하였다. 숙종 때, 소론으로서 동부 승지가 되었으나 집권층인 노론에 의해 부사과로 전직하였다. 1720년 소론이 뒷받침하던 경종이 즉위하자 동부 승지가 되었다. 이듬해 노론 정권은 집권 연장을 위해 연잉군(후에 영조)을 세제로 책봉하게 한 뒤 경종의 병약함을 이유로 대리청정을 실시하려 하자, 이조참판으로서 소론의 영수 조태구 등과 함께 이를 반대하여 대리청정을 취소하게 하였다. 또 이진유·윤성시 등과 함께 노론 4대신을 탄핵하여 귀양가게 한 다음, 소론 정권을 수립하였다. 1722년 환관 박상검·문유도 등을 시켜 왕세제를 죽이려다 발각되자 이들을 죽여 증거를 없앴다. 그는 또 노론이던 목호룡을 매수하여 목호룡 자신이 백 망·정인중 등과 모의하여 경종을 시해하려 했다고 거짓으로 꾸며 일러바치게 했다. 이로써 신임사화가 일어나 유배중이던 노론의 4대신이 죽음을 당했으며, 수백명이 살해·추방되었다. 1724년 영조가 즉위하자 노론의 재집권으로 유배되었다가 신임사화가 거짓으로 꾸민 것이 드러나 왕의 심문을 받고 참형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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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손의 필적

김일손金馹孫(1464~1498)조선의 학자. 자는 계운, 호는 탁영, 본관은 김해이다. 김종직의 제자로 성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춘추관 기사관이 되어 「성종실록」의 사초(史草)를 썼다. 연산군 때에 훈구파의 이극돈이 사국당상관이 되었는데, 김일손이 쓴 사초 속에 세조의 왕위 찬탈을 풍자한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연산군에게 고하여 무오사화를 일으켰다. 김일손과 김종직을 비롯한 영남학파의 여러 학자들이 처형을 당하였다. 중종 때 도승지에 추증되었으며, 저서에 『탁영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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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자경

김자경金慈璟(1919~1999)여류 성악가. 경기 개성 출생. 1935년 원산 누씨고등여학교를 거쳐 1940년 이화여전 음악과를 졸업하고, 이화여고에서 교편을 잡았다. 1941년 서울 부민관에서 제1회 독창회를 개최하고, 한국 최초로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를 상연하였다. 이화여전 음악과 교수로 있던 중 미국의 줄리어드 음악학교에서 연구를 하고, 1950년 뉴욕 카네기 홀에서 독창회를 열었다. 귀국하여 다시 이화여대 음악과 교수가 되었고, 수차례 독창회를 열었다. 한·이 협회 부회장 겸 감사·이화여대 성악과장·음악협회 감사를 역임하고, 김자경 오페라단을 창립, 단장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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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장생 등을 배향한 돈암서원

김자점金自點(?~1651)조선의 정치가. 자는 성지, 호는 낙서, 본관은 안동이다. 문벌에 의해 등용되어 병조좌랑이 되었으나, 광해군 때 대북파에 의해 쫓겨났다. 1622년 이 귀·김 유·최명길·이 괄 등과 함께 광해군을 축출하고 인조를 추대하였다(인조반정). 그 공으로 1등 정사공신이 되어 도원수가 되었으나, 병자호란 때 토산 싸움에서 참패한 죄로 벼슬을 빼앗겼다. 1640년 인조의 딸 효명 옹주를 손자며느리로 맞게 되자 다시 세력을 잡고 사은사로 청에 다녀왔다. 1646년 소현 세자빈 강씨를 모함하여 죽이고 강씨의 세 아들을 제주도로 귀양보냈다. 그러나 1649년 즉위한 효종에게 파면당하자 앙심을 품고 조선이 북벌을 계획하고 있다고 청에 밀고함으로써 청은 이 사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