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였다. 특히 삼국 통일의 기사에 『자치통감』을 그대로 옮긴 데가 있으며, 사대주의 사상 및 오류 등이 있어서 그를 비난하는 이도 있다. 1147년 낙랑군 개국후에 책봉되었다. 저서로 『삼국사기』 『김문열 공집』 『봉사어록』 등이 있다.

김상옥金相玉(1890~1923)독립운동가. 서울에서 출생하였으며 고학으로 배운 뒤 야학을 세워 가르치다가 일화(日貨) 배척을 목적으로 말총모자를 발명하여 공장을 세운 후 국산품 장려에 진력하였다. 1919년, 영국인 피어슨 여사의 집에서 '혁신단'을 조직하였으며 『혁신공보』를 발간하여 구국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듬해 상하이로 망명하여 의열단에 가입하고 일본 요인들을 암살할 목적으로 폭탄을 가지고 들어와, 1923년 종로 경찰서에 폭탄을 던져 일본 형사부장 등 수십 명의 일본 경찰관이 죽었다. 포위 경찰대와 접전하였으나, 최후 일발로 자살하였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 공로 훈장 복장이 수여되었다.

김상옥金相沃(1920~ )시조 시인. 호는 초정이며 경남 충무에서 출생. 1939년 시조 「봉선화」를 『문장』지에 발표함으로써, 문단에 등장하였다. 1941년에는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조 「낙엽」이 뽑혔다. 그는 시조 외에 동시·시 등 여러 분야에 뛰어난 재질을 발휘하였다. 섬세하고 영롱한 언어 구사가 특징이다. 시조집으로 『고원의 곡』, 시집으로 『이단의 시』 『의상』, 동시집으로 『석류꽃』 『꽃 속에 묻힌 집』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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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용

김상용金尙容(1561~1637)조선의 정치가. 자는 경택, 호는 선원, 본관은 안동이다. 영의정 김상헌의 형으로 선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검열이 되었다. 권 율을 따라 호남·영남 지방을 왕래했으며, 1598년 승지가 되어 사신으로 명에 다녀왔다. 광해군 때 도승지·대사헌·형조판서를 지냈으나 '폐모론'에는 관여하지 않았으며, 인조 때 우의정이 되었다. 병자호란 때 왕족을 모시고 강화도에 건너갔으나 적병이 강화성으로 쳐들어와 함락당하게 되자, 화약에 불을 질러 자살하였다. 문장에 뛰어났으며 명신으로 알려져 있다. 저서에 『선원유고』 등이 있다.

김상헌金尙憲(1570~1652)조선의 정치가·학자. 자는 숙도, 호는 청음, 본관은 안동이다. 선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수찬·교리를 지냈다. 인조 때에는 예조판서를 지냈으며, 효종 초에는 좌의정에 이르렀다. 병자호란 때 판서로서 비변사 당상을 겸하였다. 당시 청과의 화의를 극력 반대하여 작성중인 국서를 찢고 통곡하였다. 화의가 성립되자 청의 선양에 잡혀가 심문을 받았으나, 뜻을 굽히지 않으므로 그의 충절에 감동하여 돌려보냈다. 그는 명필로도 이름이 높았는데 동기창체를 잘 썼다. 그의 유적이 있는 곳마다 서원을 세워 그를 제향하였다. 저서에 「야인담록」 「청음집」 등이 있다.

김 생金生(711~791)신라의 명필. 어려서부터 글씨에 매우 뛰어났으며, 일생 동안 필법을 닦아, 예서·행서·초서는 그를 따를 사람이 없었다. 고려 사신 홍 관이 송에 가서 김 생의 글씨를 내보이자 송에서는 왕희지에 비할 만큼 천하의 명필이라고 극찬하였다. 그 후부터 중국 사신은 김 생의 필적을 보배로 알고 구해 갔다 하며 '행동서성'으로 불렸다. 그가 직접 쓴 글씨는 남아 있지 않고 「이차돈 비」 「백련사액」 등의 비문과 액자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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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

김성수金性洙(1891~1955)정치가·교육자. 호는 인촌이고 본관은 울산이다. 전북 고창에서 출생했으며, 1908년 일본 와세다 대학 정경학부에 입학하였다. 졸업 후 귀국하여 운영난에 빠진 중앙중학교를 인수하여 교장에 취임하였다. 1919년, 경성 방직회사를 창설하여 경제 자립과 민족 자본 육성에 노력하는 한편, 이듬해에 『동아일보』를 창간하고 제2대 사장에 취임하였다. 1932년, 보성전문학교(고려대학교)를 인수하여 교장에 취임하였으며, 1935년 모든 공직에서 물러나 손진태와 함께 골동품을 수집하며 외국 유출을 막았다. 광복 후에는 미군정청 수석 고문관을 지냈으며, 1950년 제2대 부통령에 당선되어 취임했다가 이승만 정권의 독재를 반대하여 이듬해 사임했다. 1952년, 민주 국민당 고문이 되어 야당인으로 활약하다가 병사하여 국민장으로 장례되었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 공로 훈장 복장이 수여되었다.

김성일金誠一(1538~1593)조선의 명신. 자는 사순, 호는 학봉, 본관은 의성이다. 이 황의 제자로 선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호당·부제학을 지냈다. 1591년에는 통신 부사가 되어 황윤길과 함께 일본에 다녀왔다. 황윤길은 반드시 일본의 침략이 있을 것이라고 하였으나, 김성일은 그와 상반되는 의견을 조정에 보고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는 처벌을 명하였으나 유성룡의 변호로 용서되어 초유사로 종군하여 진주성을 지키다 순직하였다. 저서에 『학봉집』 『상례고증』 등이 있다.

김성태金星泰(1884~1962)민속 예술인. 경기도 양주에서 출생하였으며, 아버지로부터 산대춤을 배웠고 왜장녀역과 배춤에 능하였다. 1958년 전국 민속 예능 경연대회에서 공로상을 받았으며, 양주 산대놀이가 무형 문화재로 선정되자, 무형 문화재 제1급 보유자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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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태

김성태金聖泰(1910~ )작곡가. 서울에서 출생하였으며, 연희전문학교를 마친 후 일본에 유학하여 도쿄 고등음악학원 작곡과를 마쳤다. 1939년 경성보육학교 음악 주임을 지낸 후에 경성 중앙방송국 합창단을 지휘하였다. 예술원 회원·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