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이지:글로벌 세계대백과사전 권30.pdf/25

이 페이지는 아직 교정을 보지 않았습니다

과를 졸업하고, 숙명여대 교수로 재직하였다. 여성다운 섬세한 정감의 세계를 세련된 언어 속에 담았다. 제1회 자유문학가 협회상을 수상했다. 저서에 시집 『목숨』 『나무와 바람』 등이 있으며, 수필집 『구원의 연가』 등이 있다.

김내성金來成(1909~1957)작가. 호는 아인으로 평양에서 출생하여 와세다 대학 독문과를 졸업하였다. 1939년 『조선일보』에 「마인」을 발표하며 문단에 데뷔하였다. 「백가면」과 「진주탑」 등 외국 탐정소설을 번안한 일련의 탐정소설을 발표하여 탐정소설가가 되었다. 1949년부터 4년 간에 걸쳐 한국일보에 연재된 「청춘극장」은 그의 대표작이며, 소설의 대중성과 예술성의 통일을 기도한 작품으로 평가된다. 1957년 『경향신문』에 「실락원의 별」을 연재하던 중에 병으로 사망하였다. 내성문학상이 제정되었다.

김 늑金玏(1540~1616)조선의 문신. 자는 희옥, 호는 백암, 본관은 예안이다. 선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대사헌·형조참판에 이르렀다. 영월 군수로 내려갔을 때 단종의 묘를 배알하고 신위를 송부인과 함께 모시게 하여, 신임 군수마다 죽곤 하던 변을 막았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 영남 지방의 백성들을 잘 다스려 우도 관찰사가 되고, 대사헌이 되어 '시무 16조'를 상소하였다. 광해군 때, 김직재를 무고하게 옥에 가둔 죄로 강릉에 유배될 뻔하였다. 저서에 『백암문집』이 있다.

김 담金淡(1416~1468)조선의 정치가. 자는 거원, 호는 무송헌, 본관은 예안이다. 세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이조판서에 이르렀다. 천문에 뛰어나 집현전 정자로 있다가 간의대에서 활약하였다. 세종의 명으로 원의 수시력과 명의 대통력을 참작하여 이순지와 함께 『칠정산 내편』을 엮었으며, 회회력을 얻어 『칠정산 외편』을 편찬하였다. 충주 목사로 있을 때는 백성에게 고통을 주는 도둑을 잘 잡아 민심을 편안하게 함으로써 인망이 두터웠다. 저서에 『금문절공일고』 등이 있다.

이 페이지에 있는 이미지는 자유 저작물이 아니기 때문에 삭제되었습니다.
김대건
이 페이지에 있는 이미지는 자유 저작물이 아니기 때문에 삭제되었습니다.
김대건 동상

김대건金大建(1822~1846)최초의 한국인 천주교 신부. 아명은 재복, 본관은 김해이며 경기도 용인에서 출생하였다. 세례명은 안드레아이며 천주교 신자인 아버지 김제준은 기해박해 때 순교하였다. 우리 나라에 최초로 들어온 프랑스 신부 모방의 주선으로 마카오 외방 전교회의 신학교에 가서 공부하였다. 그 후, 매스트르 신부 밑에서 신학과 신철학을 연구하였다. 천주교 박해가 계속되고 있는 고국에 몰래 들어오려 했으나, 감시가 심하여 실패하였다. 1845년, 페레올·다블뤼 두 신부와 함께 황해를 건너 입국하여 전교에 전력하였다. 이듬해 선교사의 입국과 청에 있는 선교부와의 통신 연락에 필요한 비밀 항로를 개척하기 위하여 황해도 연안을 답사하려다가 등산진서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다. 9월 16일 새남터에서 사형당하여 25세로 순교하였다. 1925년, 로마 교황 비오 11세에 의하여 복자위에 올랐다. 1972년, 한강변에 그의 동상이 세워졌다.

김대문金大問신라 성덕왕 때의 학자. 탁월한 문장가이며 일찍이 당에 유학하였다. 704년 한산주 도독이 되었으며 많은 저서를 냈으나, 현존하지는 않는다. 저서로 『고승전』 『화랑세기』 『계림잡전』 『한산기』 등이 있다.

김대성金大城(700~774)신라의 정치가·건축가. 745년 중시가 되었다가 사퇴하고 경덕왕에게 불국사·석굴암을 세우자고 건의하였다. 그리고 절의 설계 및 모든 것에 관여하였으나, 완공되는 것은 보지 못하고 죽었다.

이 페이지에 있는 이미지는 자유 저작물이 아니기 때문에 삭제되었습니다.
김대중
이 페이지에 있는 이미지는 자유 저작물이 아니기 때문에 삭제되었습니다.
제15대 대통령에 취임하는 김대중 대통령

김대중金大中(1925∼ )정치가. 전남 신안 출생. 제15대 대통령. 1963년 경희대학교 대학원을 수료하였다. 1960년 민의원에 당선된 후 1971년까지 6,7,8대 국회의원을 역임하였으며, 1971년 신민당 대통령 후보로 공화당의 박정희(朴正熙)와 겨루었으나 패배하였다. 그 후 미국, 일본 등지에서 반체제운동을 주도하다가 1973년 국내로 납치(김대중납치사건)되었다. 1976∼1978년 민주구국선언 사건으로 투옥, 1980년 7월 내란음모죄로 사형선고를 받고 복역하던 중 형집행정지로 석방되었다. 1985년 정치활동을 재개하였으며, 1987년·1992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였으나 패배하여 정계를 떠나 연구생활에 몰두하였다. 1995년 정계에 복귀하여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하였으며, 1997년 12월 제15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김대현金大賢(1917∼1985)음악가. 함경남도 흥남 출생으로, 1942년 일본 도쿄 고등 음악학교 작곡과를 졸업하였다. 1945년 함흥 관북 관현악단을 조직했으며, 1948년에는 원산 실내악단을 지휘하였다. 1951년 해군 정훈에 음악대 창설부원으로 일했으며, 1955년 서라벌예술대학 강사가 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