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이지:글로벌 세계대백과사전 권30.pdf/13

이 페이지는 아직 교정을 보지 않았습니다

재배를 장려하였고, 『감저보』를 저술하여 그 재배법을 일반에게 지도, 보급하였다.

강홍립姜弘立(1560~1627)조선의 정치가. 자는 군신, 호는 내암, 본관은 진주이다. 강사상의 손자이며 참판 강 신의 아들이다. 선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서장관으로 명에 다녀왔다. 1618년 명이 랴오둥 반도를 침범한 청을 토벌할 때 조선에 원병을 청하자, 그는 군사를 거느리고 나가 싸우다가 포로가 되어 청에 끌려갔다가 정묘호란 때 풀려나 귀국하였다. 그 동안 조정에서는 그가 청나라의 앞잡이라는 설과 10년 간 절개를 지킨 자라는 등의 시비가 많았다. 그 후 반역죄로 몰려 모든 벼슬을 빼앗기고 말았으나, 죽은 후에 벼슬이 다시 내려졌다.

강희맹姜希孟(1424~1483)조선의 정치가. 자는 경순, 호는 사숙재, 시호는 문량, 본관은 진주이다. 세종 29년(1447)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예종 때 남 이를 죽인 공으로 익대공신이 되었다. 성종 때에는 이조판서·좌찬성 등을 지냈다. 그는 서화와 문장이 뛰어났으며, 그가 죽은 뒤 서거정에 의하여 유고가 편찬되었다. 저서로 『사숙재집』 『촌담해이』 등이 있다.

이 페이지에 있는 이미지는 자유 저작물이 아니기 때문에 삭제되었습니다.
강희안의 「고사관수도」

강희안姜希顔(1419~1463)조선의 명신이며 서예가. 자는 경우, 호는 인재, 본관은 진주이다. 세종 23년(1441) 문과에 급제하여 집현전 직제학 등을 지냈으며, 그림에 능했을 뿐 아니라 글씨도 잘 썼다. 세종이 옥새의 글씨를 맡길 정도로 당시에 그를 따를 만한 사람이 없었다. 세조 때에는 사육신 사건에 관련되어 혹독한 고문을 당하기도 하였으나, 성삼문이 그의 뛰어난 재능을 아낀 나머지 변호해 주어 목숨만은 건졌다. 그는 집현전에서 성삼문·정인지 등과 함께 훈민정음에 대한 해석을 붙이는 일에 직접 참여하였으며 「용비어천가」에 대한 주석을 붙이는 일에도 참여하였다. 그는 시·글씨·그림의 3절로서 이름이 높았다. 대표작으로 「고사관수도」가 있으며, 저서로 『청천양화소록』이 있다.

개로왕蓋鹵王(?~475)백제 제21대 왕(재위 455~475). 휘는 경사이며 비유왕의 맏아들이다. 472년 위나라에 고구려 토벌의 원조군을 청했으나 실패하고, 고구려의 첩자인 도림의 계략에 말려들어 토목공사를 벌이는 등 국고를 탕진하였다. 475년 고구려 장수왕의 공격을 받고 도망치다가 붙잡혀 죽었다.

개루왕蓋婁王(?~166)백제의 제4대 왕(재위 128~166). 기루왕의 아들로서 132년 북한산성을 쌓았으며, 신라의 반역자인 아찬 길 선이 백제에 망명을 요청하자 이를 받아들여 신라와 반목하였다.

거칠부居漆夫(?~579)6세기 중엽 신라의 학자·장군. 성은 김씨이며 내물왕의 5대손이다. 처음에는 승려가 되어 사방으로 유랑하다가, 고구려로 가서 혜량에게 불경을 전하였다. 다시 신라로 돌아와 왕명을 받고 『국사』를 편찬하였다. 진흥왕 12년, 고구려의 수도인 평양을 점령하고 공을 세워 상대등이 되었다.

거타지居陀知9세기경 신라의 궁사. 진성 여왕 때 왕자인 양패가 당에 사신으로 가게 되었다. 진성 여왕은 백제의 해적을 염려하여 활 잘 쏘는 사람 50명을 함께 보냈는데, 거타지도 그중 한 사람으로 뽑혔다. 배가 한 섬에 이르렀을 때 풍랑을 만나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않자, 섬에서 하룻밤을 머물렀다. 그 날 밤, 양패의 꿈에 한 노인이 나타나 활 잘 쏘는 사람 1명을 섬에 남겨두고 가면 풍랑이 가라앉을 것이라는 말을 하였다. 이에 거타지가 혼자 남아 있었는데, 한 노인이 나타나 자기 아들을 죽인 중을 죽여달라고 부탁했다. 거타지가 중을 처치하자, 노인은 자기 딸과 결혼해 주기를 바랐다. 노인은 딸을 꽃으로 변하게 하여 거타지의 품속에 넣어주었다. 거타지는 당으로 가서 양패 일행을 만나 무사히 귀국하였다. 그는 품고 온 꽃을 여자로 변하게 하여 함께 살았다고 한다.

검모잠劍牟岑7세기경 고구려의 장군. 642년에 고구려가 당에 의해 멸망되자, 고구려 유민을 모아 당에 대항하고 많은 당의 관리와 승려를 죽였다. 보장왕의 서자인 안 승을 받들어 왕이 되게 하였으나, 안 승과 알력이 생겨 죽임을 당하였다.

이 페이지에 있는 이미지는 자유 저작물이 아니기 때문에 삭제되었습니다.
견훤이 신검에 의해 감금되었던 금산사 (사진은 당간지주)

견 훤甄萱(?~936)후백제의 시조(재위 900~935). 아자개의 아들로 상주에서 출생하였다. 진성여왕 때 신라가 혼란한 틈을 타 여러 성을 점령한 후, 무진주(광주)에서 독자적인 기반을 닦았으며 완산주(전주)에 입성, 스스로 후백제 왕이라 칭하였다. 견훤은 중국에도 사신을 보내어 국교를 맺으면서 궁예의 후고구려와 자주 충돌하여 세력을 확장하였다. 그 후 왕 건이 세운 고려와도 서로 영토를 다투었으며 군사적인 우위를 유지하였다. 926년 신라 수도 경주를 침범하여 경애왕을 죽게 한 후, 경순왕을 세우고 철수하여 신라인의 원성을 샀다. 929년 고창에서 왕 건에게 패한 후 차차 형세가 기울어지자 유능한 부하들이 왕 건에게 투항하였다. 왕위 계승 문제로 맏아들 신검에 의하여 금산사에 감금되었다가 탈출하여 왕 건에게 투항하였다. 왕 건은 견훤에게 양주를 식읍으로 주었다. 936년 견훤은 왕 건에게 신검의 토벌을 요청하여 후백제를 멸망하게 하였다. 얼마 후 그는 황산사에서 등창으로 죽었다.

경대승慶大升(1154~1183)고려의 장군. 본관은 청주이며 아버지가 부정하게 모은 재산을 모두 군대에 바치고 청렴하게 지냈다. 당시는 무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