師古曰辰謂辰韓也 元封二年 漢使渉何諭右渠 終不肯奉詔 何去至界臨浿水 使馭刺殺送何者朝鮮裨王長 師古曰送何者名也 即渡水 馭入塞遂歸報 天子拜何爲遼東之部都尉 朝鮮㤪何襲攻殺何 天子遣楼船將軍楊僕從齊浮渤海兵五万 尤將軍荀彘岀遼討右渠 右渠發兵距嶮 樓船將軍將齊七千人先到王倹 右渠城守䂓知樓船軍小即出擊樓舡 樓船敗走僕失衆遁山中獲免 左將軍擊朝鮮浿水西軍未能破 |
안사고가 말하기를 진(辰)국은 진한(辰韓)을 말한다. 원봉(元封)[1] 2년(기원전 109년)에 한나라는 섭하(渉何)로 하여금 우거(右渠)를 회유하였으나, 마침내 (우거는) 조서(詔書)을 받들기를 거부하였다. 섭하가 물러나 국경에 이르러 패수(浿水)에 닿자, (섭하는) 마부[2]를 시켜 섭하를 전송하러 온 자인 조선 비왕(裨王)[3] 장(長)안사고가 말하기를 (장(長)은) 전송하러 온 자의 이름이다.을 찔러 죽였다. 이어서, 패수를 건너 말을 달려 요새로 들어가, 드디어 귀국 보고를 하였다. 천자[4]는 섭하를 요동 동부도위(遼東 東部都尉)[5]로 삼았다. 조선은 섭하를 원망하고, 그를 공격하여 죽였다. 천자가 누선장군(樓船將軍)[6] 양복을 파견하여, 옛 제(齊)나라 땅[7]으로부터 보하이 해[8]를 건너니 군사가 5만에 달했다. 좌장군(左將軍) 순체(荀彘)[9]는 우거를 토벌하고자 요동에서 나왔다. 우거는 군사를 풀어 험한 곳에서 막았다. 누선장군은 옛 제나라 땅 출신의 칠천명을 거느리고 먼저 왕검(王倹)에 도달하였다. 우거는 성을 지키다가 누선(장군)의 군사가 적은 것을 알고 꾀를 내어 누선(장군)을 물리치니 누선(장군)은 패하여 달아났다. 양복은 무리를 잃고 산중으로 숨어서, (화를) 면했다. 좌장군은 조선 패수의 서쪽 군을 공격하였으나, 능히 깨뜨리지 못했다.[10] |
天子爲兩將未有利乃使衛山因兵威徃諭右渠 右渠請降遣太子獻馬人衆万餘持兵方渡浿水 使者及左將軍疑其爲變謂太子已服冝 |
천자는 두 장수가 유리하지 않다고 생각하고 이내, 위산(衛山)을 보내어 군대의 위엄으로써 가서 우거를 타일렀다. 우거는 항복을 청하여 태자(太子)[11]를 보내고 말을 바쳤다. 사람들 만여 명이 무기를 들고 패수를 막 건너려 하자, 사자 위산과 좌장군은 변고가 있을 것을 의심하여 태자에게, 이미 항복했으니 |
- ↑ 원봉(元封)은 중국 전한(前漢) 무제(武帝)의 여섯 번째 연호이다. 기원전 110년에서 기원전 105년까지 6년 동안 사용하였다.
- ↑ 원문 馭. 《사기(史記)》 〈卷一百一十五 朝鮮列傳 第五十五〉에는 “馳”로 되어 있다. 문맥상, “馳”가 타당하다.
- ↑ 裨王: 관직명이다.
- ↑ 여기서 천자는 곧 전한 무제를 말한다.
- ↑ 원문 遼東之部都尉.《사기(史記)》 〈卷一百一十五 朝鮮列傳 第五十五〉와 《한서》(漢書) 〈卷九十五 西南夷兩粵朝鮮傳第六十五〉에는 之가 아니라, “東”으로 되어 있다. 문맥상, “東”이 타당하다.
- ↑ 원문은 樓舡. 舡은 船의 오기(誤記)로 보인다. 이하 오기에 대한 지적을 생략한다.
- ↑ 원문은 그저 “齊”라고만 되어 있으나, 이 제나라는 기원전 1046년부터 기원전 221년까지 존속한 나라이므로, 옛 제나라 땅이라고 풀이했다.
- ↑ 보하이 해, 즉 발해는 제나라 땅이던 산동반도와 요동반도 사이에 있는 바다이다. 곧, 산동반도에서 요동반도로 건너갔다는 뜻이 된다.
- ↑ 순체(荀彘)는 좌장군(左將軍)이었던 바, 원문의 “尤”는 “左”의 오자일 가능성이 있다.
- ↑ 사마천(기원전 1세기),《사기》〈권115 조선열전(朝鮮列傳)〉“天子募罪人擊朝鮮。其秋,遣樓船將軍楊仆從齊浮渤海;兵五萬人,左將軍荀彘出遼東:討右渠。右渠發兵距險。左將軍卒正多率遼東兵先縱,敗散,多還走,坐法斬。樓船將軍將齊兵七千人先至王險。右渠城守,窺知樓船軍少,即出城擊樓船,樓船軍敗散走。將軍楊仆失其眾,遁山中十餘日,稍求收散卒,復聚。左將軍擊朝鮮浿水西軍,未能破自前。” (천자는 죄인을 뽑아 조선을 쳤다. 그 해 가을, 누선장군(樓船將軍) 양복(楊僕)을 파견하여, 옛 제(齊)나라 땅으로부터 보하이 해〔渤海〕를 건너니 군사가 5만에 달했다. 좌장군(左將軍) 순체(荀彘)는 우거(右渠)를 토벌하고자 요동(遼東)에서 나왔다. 우거는 군사를 풀어 험한 곳에서 막았다. 좌장군의 졸정(卒正) 다(多)가 요동(遼東)의 병사를 이끌고 먼저 방종(放縱)하다가, 패하여 흩어지고, 다(多)는 달려서 되돌아오니, 법에 따라 참수되었다. 누선장군은 옛 제나라 땅 출신의 병사 칠천명을 거느리고 먼저 왕검(王險)에 도달하였다. 우거는 성(城)을 지키다가 누선장군의 군사가 적은 것을 알고 꾀를 내어 누선장군을 물리치니 누선장군은 패하여 달아났다. 장군 양복은 무리를 잃고 산(山) 속에서 십여일을 숨었다가, 점차, 흩어진 병졸을 구하고 거두니, 다시 갖추어졌다.좌장군은 조선 패수의 서쪽 군을 공격하였으나, 능히 깨뜨리지 못했다.)
- ↑ 서울대규장각본에는 “大”로 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