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류/제4장
'……생애는 방안지라!'
편집조금치라도 관계나 관심을 가진 사람은 시장(市場)이라고 부르고, 속한(俗漢)은 미두장이라고 부르고, 그리고 간판은 '군산미곡취인소(群山米穀取引所)'라고 써붙인 ××도박장(賭博場).
집이야 낡은 목제의 이층으로 헙수룩하니 보잘것없어도 이곳이 군산의 심장임에는 갈데없다.
여기는 치외법권이 있는 도박꾼의 공동조계(共同租界)요 인색한 몬테카를로다. 그러나 몬테카를로 같은 곳에서는, 노름을 하다가 돈을 몽땅 잃어버리면 제 대가리에다 대고 한방 탕― 쏘는 육혈포 소리로 저승에의 삼천 미터 출발신호를 삼는 사람이 많다는데, 미두장에서는 아무리 약삭빠른 전재산을 톨톨 털어 바쳤어도 누구 목 한번 매고 늘어지는 법은 없으니, 그런 것을 조선 사람은 점잖아서 그런다고 자랑한다든지!
군산 미두장에서 피를 구경하기는 꼭 한 번, 그것도 자살은 아니다.
에피소드는 이렇다.
연전에 아랫녘〔全南〕어디서라던지, 집을 잡히고 논을 팔고 한 돈을 만 원 가량 뭉뚱그려 전대에 넣어 허리에 차고, 허위단심 군산 미두장을 찾아온 영감님 하나가 있었다.
영감님은 미두란 어떻게 하는 것인지 통히 몰랐고, 그저 미두를 하면 돈을 딴다니까, 그래 미두를 해서 돈을 따려고 그렇게 왔던 것이다.
영감님은 그 돈 만 원을 송두리째 어느 중매점에다 맡겨 놓고, 미두 공부를 기역 니은(미두학 ABC)부터 배워 가면서 일변 미두를 했다.
손바닥이 엎어졌다 젖혀졌다 하고, 방안지의 계선이 올라갔다 내려왔다 하는 동안에 돈 만 원은 어느 귀신이 잡아간 줄도 모르게 다 죽어 버렸다.
영감님은 여관의 밥값은 밀렸고, 고향으로 돌아갈 (면목은 몰라도) 찻삯이 없었다.
중매점에서 보기에 딱했던지, 여비나 하라고 돈 삼십 원을 주었다. 영감님은 그 돈 삼십 원을 받아 쥐었다. 받아 쥐고는 물끄러미 내려다보면서 후유― 한숨을 쉬더니 한숨 끝에 피를 토하고 쓰러졌다. 쓰러지면서 죽었다.
이것이 군산 미두장을 피로써 적신 '귀중한' 재료다.
그랬지, 아무리 돈을 잃어 바가지를 차게 되었어도 겨우 선창께로 어슬렁어슬렁 걸어나가서 강물에다가 눈물이나 몇 방울 떨어뜨리는 게 고작이다. 금강은 백제가 망하는 날부터 숙명적으로 눈물을 받아 먹으란 팔자던 모양이다.
미상불 미두장이가 울기들은 잘한다.
옛날에 축현역(杻峴驛 : 시방은 상인천역) 앞에 있던 연못은 미두장이의 눈물로 물이 고였다고 이르는 말이 있었다.
망건 쓰고 귀 안 뺀 촌 샌님들이 도무지 어쩐 영문인 줄 모르게 살림이 요모로 조모로 오그라들라치면 초조한 끝에 허욕이 난다. 허욕 끝에는 요새로 친다면 백백교(白白敎), 들이켜서는 보천교(普天敎) 같은 협잡패에 귀의해서 마지막 남은 전장을 올려 바치든지, 좀 똑똑하다는 축이 일확천금의 큰 뜻을 품고 인천으로 쫓아온다. 와서는 개개 밑천을 홀라당 불어 버리고 맨손으로 돌아선다.
그들이야 항우 같은 장사가 아닌지라, 강동(江東) 아닌 고향으로 돌아갈 면목은 있지만 오강(烏江) 아닌 축현역에 당도하면 그래도 비회가 솟아난다. 그래 찻시간도 기다릴 겸 연못가로 나와 앉아 눈물을 흘린다. 한 사람이 그래, 두 사람이 그래, 열 사람 백 사람 천 사람이 몇 해를 두고 그렇게 눈물을 뿌리니까, 연못의 물은 벙벙하게 찼다는 김삿갓 같은 이야기다.
오늘이 오월로 들어서 둘째 번 월요일이라, 이번 주일의 첫 장이다. 그러므로 웬만하면 입회가 다소간 긴장이 되겠지만 절기가 그럴 절기라 놔서, 볼썽 없이 쓸쓸하다.
그중 큰 매매라는 것이 기지개를 써서 오백 석 아니면 천 석짜리요, 모두가 백 석 이백 석짜리 '마바라(잔챙이 미두꾼)'들만 엉켜붙어서 옴닥옴닥한다.
옛날 말이지, 시방은 쌀값을 최고 최저 가격을 통제해서 꽉 잡아 비끄러매 놓기 때문에 아무리 날고 뛰어도 별반 뾰죽한 수가 없고, 다직해서 여름의 농황(農況)을 좌우하는 천기시세〔天氣相場〕때와 그 밖에 이백십일(二百十日)이나, 특별한 정변(政變)이나, 연전의 동경대진재 같은 천변지이(天變地異)나, 이러한 때라야 그래도 폭넓은 진동(大幅振動)이 있고 해서 매매도 활기가 있지, 여느때는 구멍가게의 반찬거리 흥정을 하는 푼수밖에 안 된다.
그러니까 투기사(投機師)는 ××××가 살인강도나, 옛날 같으면 권총사건 같은 것이 생기기를 바라듯이 김만평야의 익은 볏목에 우박이 쏟아지기를 바라고, ××이나 ××이 지함(地陷)으로 돌아 빠지기를 기다린다.
후장삼절(後場三節)…….
아래층의 '홀'로 된 '바다지석〔場立席〕'에는 각기 중매점으로부터 온 두 사람씩의 '바다지(場立 : 중매점의 시장 대리인)'들과 '죠쓰게(場附)'라고 역시 중매점에서 한 사람씩 온 서두리꾼들까지, 한 사십 명이나 마침 대기하듯 모여 섰다.
같은 아래층을 목책으로 바다지석과 사이를 막은 '갸쿠다마리'에는 손님들이 한 백 명 가량이나 되게 기다리고 있다.
이 사람들이, 그 중에는 구경꾼이나 하바꾼들도 섞이기는 했지만, 거지반 미두 손님들이다.
일부러 골라다 놓은 듯이 형형색색이다. 조선옷, 양복, 콩소매 달린 옷, 늙은이, 젊은이, 큰 키, 작은 키, 수염 난 사람, 이발 안 한 사람, 잘생긴 얼굴, 못생긴 얼굴, 이러하되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이 제가끔 한 사람 몫의 한 사람씩인 '저'들이요, 제가끔 김가, 이가, 나카무라, 최가 등속인 노름꾼들이다.
그러나, 본래 '오오테(大手)'라고, 몇천 석 몇만 석씩 크게 하는 축들은 제 집에다 전화를 매놓고 앉아 시세를 연신 알아보아 가면서 오천 석을 방해라, 만 석을 사라, 이렇게 해먹지 그들 자신이 미두장에 나오는 법이 없다.
해서, 으레 미두장의 갸쿠다마리에 주욱 모여 서는 건 하바꾼과 구경꾼과 백 석 이백 석을 붙여 놓고 일 정(一丁 : 일 전) 이 정의 고하를 눈 뒤집어쓰고서 밝히는 '마바라'들이다.
하지만, 또 이 마바라들이야말로 하바꾼들과 한가지로 미두전장(米豆戰場)의 백전노졸들인 것이다.
그들은 대개가 십 년 이십 년, 시세표(市勢表)의 고하를 그리는 괘선(罫線)을 따라 방안지의 생애를 걸어오는 동안, 수만 금 수십만 금 잡았다가 놓쳤다가 하여서 무수한 번복을 거쳐, 필경은 오늘날의 한심한 마바라나 그보다 더 못한 하바꾼으로 영락한 무리들이다.
그런만큼 그들은 미두장이의 골이 박혀 시세를 보는 눈이 날카롭고 담보는 크건만, 돈 떨어지자 입맛 난다는 푼수로, 부러진 창대를 가지고는 백전노졸도 큰 싸움에는 나서는 재주가 없다.
후장삼절을 알리느라고 '갤러리'로 된 이층의 '다카바(高場 : 서기)'에서 따악 따악 따악 딱다기 소리가 나더니 '당한(當限)'이라고 쓴 패가 나와 붙는다.
이것이 소집 나팔이다.
딱딱이 소리에 응하여 바다지들은 반사적으로 일제히 다카바를 올려다보고는 그 길로 장내를 휘휘 돌려다본다. 그들은 직업적으로 약간 긴장하는 둥 마는 둥하다가 도로 타기만만하다.
갸쿠다마리에서는 적이 긴장이 되어 모두들 바다지한테로 시선을 보내나 바다지들 사이에는 종시 매매가 생기지 않는다. 또 손님들 편에서도 아무 동요가 일어나지 않는다.
바다지석과 갸쿠다마리 사이의 목책 위에 놓인 각 중매점의 전화들만 끊일 새 없이 쟁그럽게 울고 그것을 받아 내느라고 죠쓰게들만 분주하다.
갤러리의 한편 구석으로 자리를 잡고 있는 통신사(通信社) 사람들은 전화통에 목을 매달고 각처에서 들어오는 시세를 받느라고, 또 한편으로 그놈을 흑판에다가 분글씨로 써서 내거느라고 여념이 없다.
다카바에는 딱딱이꾼 외에 두 사람의 다카바가 테이블을 차고 앉아 마침 기록을 하려고 바다지들을 내려다보고 있다.
당한에는 바다지들의 아무런 제스처 즉 매매의 도전(賣買挑戰)이 없어, 소위 '데기모(出來不申)'라고, 매매가 없다고 만다.
다카바에서는 다시 딱딱이가 울고 '중한(中限)'패로 갈려 붙는다.
이에 응하여 선뜻 한 사람의 바다지가 손을 번쩍 쳐들면서,
"셍고쿠 야로―"
소리를 친다. 대체 이 사람이 쳐든 손은, 언뜻 아무렇게나 쳐든 것 같아도 실상인즉 대단히 기묘복잡함이 있다.
엄지손가락과 식지는 접어 두고 중지와 무명지와 새끼손가락 세 개만 펴서 손바닥은 바깥으로 둘렀다.
하고 보니, 벙어리가 에스페란토를 지껄인 것이랄까, 그것을 번역하면 이렇다.
끝엣손가락 세 개를 편 것은 삼(三)이라는 뜻으로 삼 전(三錢)이란 말이고, 손바닥을 바깥으로 두른 것은 팔겠다는 말이고, 그리고,
"셍고쿠 야로."
는,
"쌀 천 석 팔겠다."
는 말이다. 그러니까 즉,
"쌀 천 석을 삼 전(三錢 : 삼십 원 삼 전)씩에 팔겠다."
이런 뜻이다.
이 매매가 성립이 되자면 누구나 사고 싶은 다른 바다지가 응하고 나서야 한다.
장내는 조금 동요가 되다가 다시 조용하고 갸쿠다마리에서는 담배 연기만 풀씬풀씬 올라온다.
삼십 원 삼 전이라는 시세에 바다지나 손님들이나 다 같이,
"흥! 누가 그걸……."
하는 듯이 맨숭맨숭하다.
그래서 '시테나시(仕手無)'라는 걸로 중한도 매매가 성립되지 못한다.
본시 한산한 시기에는 당한과 중한에는 매매가 별반 없는 법인데, 더구나 시세가 저조(低調)여서 '매방(買方)'이 경계를 하는 판이라 전절(前節 : 이절)보다 일 전이 비싼 삼십 원 삼 전에 팔겠다는 걸, 그놈에 응할 사람이 없을 것도 당연한 일이다.
세 번째 딱딱이가 울고 '선한(先限)'패로 갈려 붙는다. 그러자 마침 기다리고 있던 듯이 갸쿠다마리에서 손님 하나가 바다지 한 사람을 끼웃끼웃 찾아 불러내다가는 목책 너머로 소곤소곤 귓속말을 한다.
바다지는 연신 고개를 까닥까닥하면서 말을 듣는 한편, 손에 들고 있는 금절표(金切表)를 활활 넘기고 들여다본다.
이윽고 바다지는 돌아서면서, 엄지손가락 식지 중지 세 손가락을 펴서 손바닥을 밖으로 쳐들고,
"고햐쿠 야로―"
소리를 친다. 이것은 팔 전(八錢 : 이십구 원 구십팔 전)에 오백 석을 팔겠다는 뜻인데, 그 소리가 떨어지자 장내는 더럭 흥분이 된다.
일 초를 지체하지 않고 저편으로부터 다른 바다지가 팔을 쳐들어 안으로 두르고,
"돗다―"
소리를 지른다. 그놈을 사겠다는 말이다.
이어서 여기저기서 '얏다', '돗다' 소리와 동시에 팔이 쑥쑥 올라오고, 소리는 한데 엉켜 왕왕거리는 아우성 소리로 변한다. 치켜 올린 바다지들의 손과 손들은 공중에서 서로 잡혀진다. 커다란 혼잡이다.
바다지석은 훤화 속에서 뒤끓는다. 다카바들은 눈을 매눈같이 휘두르면서 손을 재게 놀려 기록을 한다.
바다지와 다카바는 매매를 하느라고 흥분이 되고, 이편 갸쿠다마리는 시세 때문에 흥분이다.
그도 그럼직한 일이다.
오늘 아침 '전장요리쓰케(前場寄付)' 삼십 원 십이 전으로 장이 서 가지고는 '전장도메(前場止)' 홑 구 전, '후장요리쓰케(後場寄付)' 홑 칠이 이절에 가서 오 정(五丁 : 오 전)이 더 떨어져 홑 이 전으로 되더니, 삼절에는 마침내 그처럼 삼십 원대를 무너뜨리고 팔 전―---이십구 원 구십팔 전으로 또다시 사 정이 떨어졌던 것이다.
현물이 품귀(品貴)요, 정미도 값이 생해서 기미(期米)도 일반으로 오르게만 된 형세건만, 도리어 이렇게 떨어지기만 해놔서, '쓰요키(强派)'들한테는 여간 큰 타격이 아니다.
만일 이대로 떨어져 가기로 들면 '후장도메'까지에는 다시 사오 정은 더 떨어지고 말 것이고, 한다면 도통 이십 정이 오늘 하루에 떨어지는 셈이다.
표준미가(標準米價) 이후 하루 동안에 백 정이니 이삼백 정이니 하는 등락은 이미 옛날의 꿈이요, 진폭이 빈약한 오늘날, 더구나 한산한 이 시기에 하루 이십 정의 변동은 넉넉히 흥분거리가 될 수 없는 게 아니던 것이다.
갸쿠다마리의 얼굴들은 대번 금을 그은 듯이 두 갈래로 갈려 버린다.
판 사람들은 턱을 내밀고서 만족하고 산 사람들은 턱을 오므리고서 시치름하고, 이것은 천하에도 두 가지밖에는 더 없는 노름꾼의 표정이다.
이처럼 시세가 내리쏟기자 태수의 친구요 중매점 마루강(丸江)의 바다지인 곱사 형보는 팽팽한 이맛살을 자주 찌푸리면서 손에 쥔 금절표를 활활 넘겨본다.
사각 안에다가 영서로 K자를 넣은 것이 태수의 마크다.
육십 원 증금(證金)으로 육백 원에 천 석을 산 것인데, 인제 앞으로 십 정만 더 떨어져서 이십구 원 팔십팔 전까지만 가면 증금으로 들여논 육백 원은 수수료까지 쳐서 한 푼 남지 않고 '아시(證金不足)'이다.
형보는 잠깐 망설이다가 곱사등을 내두르고 아기작아기작 전화통 앞으로 가더니 옆엣사람들의 눈치를 슬슬 살펴 가면서 ××은행 군산지점의 전화를 부른다. 태수한테 기별을 해주려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한낱 행원으로 미두를 한다는 소문이 퍼지게 되고 보면, 더구나 모범행원이라는 고태수로, 그런 눈치를 은행에서 알게 되는 날이면 일이 재미가 적고 한 터라, 이러한 전화는 걸고 받고 하기에 서로 조심을 한다.
××은행 군산지점 당좌계의 창구멍〔窓口〕안에 앉은 고태수, 그는 어젯밤을 새워 먹은 작취로 골머리가 띵하니 아프고, 속이 메스꺼운 것을 겨우 참고 시간 되기만 기다린다.
세시 전이니 아직도 한 시간이 더 남았다.
그래, 팔걸이 시계를 연신 들여다보고는 하품을 씹어 삼키고 하는 참인데 마침 급사아이가 와서 전화가 왔다고 알려 준다.
태수가 전화통 옆으로 가서,
"하이(네에)."
나른하게 대답을 하는데,
"낼세, 내야."
하는 게 묻지 않아도 형보다. 태수는 혹시 시세가 올랐다는 기별이었으면 하고 은근히 가슴이 두근거린다.
"왜 그래?"
"뻐게졌네, 뻐게졌어!"
삼십 원대가 무너졌다는 말이다.
태수는 맥이 탁 풀려 그대로 주저앉을 것 같았다.
"음―"
태수는 분명치 않은 소리만 낼 뿐, 무어라고 형편을 물어 보고 싶어도 옆에서 상관이며 동료들이 듣는 데라, 그야말로 벙어리 냉가슴 앓는 조다.
"팔 전인데, 여보게?"
형보는 딱바라진 음성으로 이기죽이기죽 이야기를 씹는다.
"……팔 전인데, 끊어 버리세?"
"글쎄……."
"글쎄구 개×이구 이대루 십 정만 더 떨어지면 아시야 아시! 알어 들어?…… 왜 정신을 못 채리구 이래?"
"그렇지만 인제 와서야 머……."
태수는 지금 그것을 끊는대도 돈이라야 오십 원밖에 남지 않는 것을, 그러구저러구 하기가 도무지 마음에 내키지를 않던 것이다.
애초에 돈 천 원이나 먹을까 하고, 그래서 발등에 당장 내리는 불이나 끌까 하고, 시세가 마침 좋은 것 같아서 쌀을 붙였던 것인데 천 원을 먹기는 고사하고 본전 육백 원이 다 달아난 판이니 깨끗이 밑창을 보게 두어 둘 것이지, 그까짓 것 꼬랑지로 처진 오십 원쯤 시방 이 살판에 대수가 아니다.
"그리지 말게!…… 소바(投機 : 미두)란 그렇게 하는 법이 아니란 말야…… 그러니 내가 시키는 대루……."
형보가 이렇게 타이르는 말을 태수는 성가신 듯, 버럭 것질러,
"긴 소리 듣기 싫여!…… 그만 해두구, 내가 어제 맡긴 것 있지?"
"있지."
형보는 어제 저녁때 태수한테서 액면 이백 원짜리 소절수 한 장을 맡았었다. 진출인은 백석(白石)이라고 하는 고리대금업자요, 은행은 태수가 있는 ××은행 군산지점이다. 형보는 가끔 태수한테서 이러한 부탁을 받는다.
"그걸 오늘 지금 좀, 그렇게 해주게."
"내일 해달라더니?"
"아냐, 오늘루."
태수는 전화를 끊고 도로 제 자리로 돌아와서 털씬 걸터앉는다. 인제는 마지막 여망이 그쳐 버리고 어찌할 도리가 없이 되었다.
바로 십여 일 전 일이었었다.
그날 태수는 형보가 있는 중매점 마루강에다가 육십 원 증금으로 육백 원을 내고 쌀 천 석을 '나리유키(成行)'로 붙였다.
그날이 마침 토요일인데 전장요리쓰케 삼십 원 십칠 전으로 장이 서 가지고는 이절에 이십구 전, 삼절에 삼십육 전, 사절에 사십 전 이렇게 폭폭 솟아 올라갔다.
이 기별을 받은 태수는 마침 기회가 좋은 듯싶어 다음 오절에 사달라고 일렀다. 전화를 걸어 주던 형보는 위태하다고 말렸으나, 태수의 생각에는 그놈이 그대로 일 원대를 무찌르고도 앞으로 백 정은 무난하리라는 자신이 들었었다. 그때에 날이 마침 가물었기 때문에 모낼 시기를 앞두고 그것이 다소 강재(强材)가 아닌 것은 아니었으나, 매우 속된 관찰이요, 더욱이 백 정이 오를 것을 예상한 것은 터무니없는 제 욕심이었었다.
태수는 그날도 은행 전화라 자세하게 이야긴 할 수도 없거니와 또 그럴 필요도 없어, 그냥 시키는 대로나 해달라고 형보를 지천을 했었다.
한 삼십 분 지나서 형보가 다시 전화를 걸었다.
"오절에 사십오 전에 샀더니 육절에 또 사 정이 올라 사십구 전일세…… 그렇지만 나는 모르니 알아채려서 하게!"
형보는 여전히 뒤를 내던 것이다.
그날 한시까지 은행일을 마치고 나와서 알아보니까, 그놈 육절에 사십구 전을 절정으로 시세는 도로 떨어져 전장도메 사십육 전이었었다. 그래도 태수는 약간의 반동이거니 하고 안심을 했었다.
그러나 그 뒤로 시세는 태수를 조롱하듯이 조촘조촘 떨어지다가, 오늘 와서는 마침내 삼십 원대를 무너뜨리고 아시란 말까지 나오게 되었던 것이다.
은행 시간이 거진 촉하게 되어서, 웬 낯모를 사람이 아까 형보와 이야기하던 소절수를 가지고 돈을 찾으러 왔다. 형보는 태수의 이 심부름을 가끔 해주기는 해도 제 몸을 사리느라고 언제든지 한 다리를 더 놓지, 제가 직접 오는 법이 없다.
태수는 들이미는 대로 소절수를 받아 장부에 기입을 하고 현금계로 넘긴다. 필적이며 그 밖에 조사 대조해 볼 것을 조사 대조해 볼 것도 없이, 그것은 태수 제 손으로 만들어 낸 백석이의 소절수인 것이다.
이어 시간이 다 되자, 태수는 사무상 앞을 걷어치우고 은행을 나섰다. 그는 걱정에 애를 못 삭여 짜증이 났다. 누가 보면 어디 몸이 아프냐고 놀랄 만큼 이맛살을 잔뜩 찌푸리고 몸에 풀기가 없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이요 기색은 도로 평탄해진다. 그는 무엇이고 오래 두고는 생각하거나 걱정을 하질 않는다. 또 그랬자 별수가 없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다.
"걱정하면 소용 있나? 약차하거던 죽어 버리면 고만이지!"
그는 혼자말로 씹어 뱉는 것이다.
그는 일을 저지른 후로 요즈음 와서는 늘 이런 막가는 마음을 먹는다. 그러고 나면 걱정이 되고 속 답답하던 것이 후련해지곤 하던 것이다.
일을 저질렀다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항용 있는 재정의 파탈로, 남의 돈에 손을 댄 것이다.
그는 작년 봄 경성에 있는 본점으로부터 이곳 군산지점으로 전근해 오면서부터 주색에 침혹하기를 시작했다.
그는 얼굴 생긴 것도 우선 매초롬한 게 그렇거니와, 은연중에 그가 서울서 전문학교를 졸업했고, 집안은 천여 석 하는 과부의 외아들이고, 놀기 심심하니까 은행에를 들어갔던 것이 이곳 지점에까지 전근이 되어 내려온 것이라고, 이러한 소문이 떠돌았었고, 그런데 미상불 그러한 집 자제로 그러한 사람임직하게 그의 노는 본새도 흐벅지고, 돈 아까운 줄은 모르는 것 같았다.
그러던 결과, 반년 남짓해서 육십 원의 월급으로는 엄두도 나지 않게 빚이 모가지까지 찼다.
이러한 억색한 경우를 임시로 메꾸기에, 태수의 컨디션은 안팎으로 좋았다. 지점장의 신임은 두텁고, 은행 내정에는 통달했는데 앉은 자리가 당좌계다.
그래서 작년 겨울 백석이라는 대금업자의 소절수를 만들어 쓰는 것으로부터 그는 '사기'와 '횡령'이라는 것의 첫출발을 삼았다.
큰 대금업자랄지, 그 밖에 예금한 금액이 많고 은행으로 들이고 내고 하기를 자주 하는 예금주들은, 그러하기 때문에 액면이 많지 않은 위조 소절수가 자기네 모르게 몇 장 은행으로 들어가서 '조지리(帳尻 : 총계 대조)'가 맞지 않더라도 좀처럼 눈에 띄지를 않는다. 그러므로 그러한 위조 소절수가 은행에 들어오더라도 그게 위조인지 아닌지를 밝혀야 할 당좌계에서 그냥 씻어서 넘기기만 하면 일은 우선 무사하다. 태수는 그 묘리를 알았던 것이다.
그는 은행에서 소절수첩을 빼내 오고, 백석이의 도장을 그대로 새기고 글씨를 본받아 백석이 자신이 발행한 소절수와 언뜻 달라 보이지 않는 것을 만들기에 그리 힘들지 않았다.
그놈을, 믿는 친구라는 형보더러 찾아 달라고 맡기고, 그럴라치면 형보는 다시 다른 사람을 시켜 은행으로 찾으러 보낸다. 은행에서는 태수가 그것을 어엿이 받아 장부에 기입을 해서 현금계로 넘기고, 현금계에서는 아무 의심도 없이 돈을 내주고, 그 돈이 조금 후에는 형보의 손을 거쳐 태수에게로 돌아 들어오고, 이것이다.
그가 처음 그렇게 소절수 위조를 해서 쓸 때에는, 손이 떨리고 며칠 동안은 가슴이 두근거리고 했으나, 차차 맛을 들이고 단련이 되면서부터는 돈이 아쉰 때면 제법 제 소절수를 발행하듯이 척척 써먹었다.
또 범위도 넓혀, 역시 예금이 많고 거래가 잦은 '농산흥업회사'와 '마루나'라고 하는 큰 중매점까지 세 군데 치를 두고 그 짓을 계속했다. 한 것이, 작년 세안부터 지금까지 반년 동안 백석이 것이 일천팔백 원, 농산흥업회사 치가 칠백 원, 마루나 중매점 치가 이번 것까지 팔백 원, 도합하면 삼천삼백 원이다.
이 삼천삼백 원은 형보가 심부름을 해줄 때마다 얼마씩 떼어 쓴 사오백 원과, 요릿집과 기생한테 준 행화와 미두 밑천으로 다 먹혀 버린 것이다.
이 짓을 해놓았으니, 늘 살얼음을 밟는 것같이 마음이 위태위태한 판인데, 지나간 사월 초생부터 그 백석이와 은행 사이에 사소한 일로 등갈이 나가지고, 백석이가 다른 은행으로 거래를 옮기리 어쩌리 하는 소문이 들렸다. 만약 그러는 날이면 예금한 것을 한꺼번에 모조리 찾아갈 것이요, 따라서 태수가 손댄 일천팔백 원이 비는 게 드러날 것이다. 동시에 그날이 태수는 끝장을 보는 날이다.
태수는 어디로 도망을 가거나, 또 늘 입버릇같이 되던 자살을 하거나, 두 가지 외에는 별수가 없다.
소문대로 그가 천여 석 추수를 하는 과부의 외아들이기만 하다면야 모면할 도리가 없지도 않다. 그러나 그것은 백줴 낭설이다.
그의 편모(偏母)는 지금 서울 아현(阿峴) 구석의 남의 집 단칸 셋방에서 아들 태수가 십오 원씩 보내 주는 것으로 연명을 해가고 있다.
태수의 모친은 중년 과부로 남의 집 안잠을 살고 바느질품 빨래품을 팔아 가면서 소중한 외아들 태수를 근근이 보통학교까지만은 졸업을 시켰었다.
샘 같아서는 그 이상 더 높은 학교라도 들여보냈겠지만 늙어 가는 과부의 맨손으로는 힘이 자랄 수가 없고, 그래 태수는 보통학교를 마치던 길로 ××은행의 급사로 뽑혀 들어갔다.
그는 낮으로는 은행에서 심부름을 하고, 밤으로는 다른 부지런한 동무들이 하듯이 야학을 다녀, 을종 상업학교 하나를 졸업했다.
아이가 우선 외모가 똑똑하고, 하는 짓이 영리하고, 그런데다가 을종이나마 학교의 이력과 여러 해 은행에서 치어난 경력과, 또 소속한 과장의 눈에 고인 덕으로, 스물한 살 되던 해엔 승차해서 행원이 되었다.
본점에서 꼬박 이 년 동안 지냈다. 그 동안 태수를 총애하던 과장(그는 男×家이었었다)은 태수가 소위 '급사아가리(使童出身)'라서 아무래도 다른 동무들한테 한풀 꺾이는 것을 액색히 생각해서 기회를 보다가 계제를 만나, 작년 봄에 이 군산지점으로 전근을 시켜 주었다.
태수도 서울 본점에 있을 동안은 탈잡을 데 없는 모범행원이었었다. 사무에는 능숙하고, 사람됨이 영리하고, 젊은 사람답지 않게 주색을 삼가고.
그러나 주색을 삼가한 것은 그가 급사로 지내던 타성으로 조심이 되어 그런 것이지, 삼가고 싶어 그런 것은 아니다.
그랬길래 그가 이 군산지점으로 내려와서 기를 탁 펴고 지내게 되자, 지금까지는 금해졌던 흥미의 대상인 유흥과 계집이 상해(上海)와 같이 개방되어 있는 그 속으로 맨먼저 끌려 들어간 것이다. 그는 마치 아이들이 못 보던 사탕을 손에 닿는 대로 쥐어 먹듯이 방탕의 행락을 거듬거듬 집어먹었다.
믿는 외아들 태수가 이 지경이 된 줄 모르고, 그의 모친은 그가 인제는 어서 바삐 장가나 들어 살림이나 시작하면 그를 따라와서 얼마 남지 않은 여생을 편안히 보내려니, 지금도 매일같이 그것만 기다리고 있지, 천석거리 과부란 당치도 않은 소리다.
태수는 지난 사월에 그처럼 사세가 절박해 오자 두루 생각한 끝에 마루나의 육백 원 소절수를 또 만들어 그 돈으로 미두를 해본 것이다.
전에도 가끔 오백 석이고 삼백 석이고 미두를 했고, 그래서 번번이 손을 보았지만, 천 석은 처음이다.
그는 그놈에게 돈 천 원이나 먹으면 어떻게 백석이 것 일천팔백 원을 채워 가지고 백석이한텔 가서 무릎을 꿇고 사정을 하든지, 본점에 있는 그 과장이라도 청해다가 백석이를 위무해서 일을 모면하려던 그런 계획이었다.
그러나 그 돈 천 원이 생기기는 고사하고 밑천 육백 원까지 물고 달아났으니 게도 잡지 못하고 구럭까지 놓친 셈이다.
오직 그 동안, 백석이가 말썽부리던 것이 너끔하고, 그래 다른 은행으로 거래를 옮기는 눈치가 보이지 않는 것이 천만다행이다. 그러나 그것도 우선 위급을 면한 것이지, 아무래도 받아 논 밥상인 것을 언제 어느 구석에서 일이 뒤집혀 날지 하루 한시인들 앞일을 안심할 수가 없다. 그래서 그는 육장 입버릇같이,
"죽어 버리면 고만이지."
이 소리를 하고, 할라치면 순간순간은 아무것이고 무섭지도 않고 근심도 놓이고 하던 것이다.
태수는 거리로 나와서, 어디로 갈까 하고 잠깐 망설인다.
이런 때는 어떤 조용한 데, 가령 서울 같으면 찻집 같은 데로 가서, 혼자 우두커니 시간 가는 줄 모르게 앉아 있었으면 좋을 것 같았다. 그렇게 생각하니 서울서는 별반 다녀 보지도 못한 찻집이 불현듯이 그리웠다.
그러나 이곳에는 그런 기분이 가라앉는 순수한 찻집이 없으니 소용없는 말이고, 그냥 선창이나 공원으로 거닐까 생각해 보았으나 그것은 어제 밤을 새워 술을 먹은 몸이 고단해서 내키지를 않는다. 그러다가 문득, 제중당으로 초봉이나 만나 보러 갈까 해본다. 어제 낮에 들렀더니 요전번 전화할 때의 말대로 알기는 알겠는지, 얼굴이 발개가지고 대응하는 게 달랐고, 그것이 태수한테는 퍽 유쾌했다.
태수는 초봉이를 두고 생각하면 할수록 절로 입이 벙싯벙싯 벌어진다. 그는 초봉이가 이 세상에 있다는 것 그것 하나만도 견딜 수 없이 기쁘다.
그는 어떻게 해서든지 초봉이와 결혼이나 해서 단 하루나 이틀이라도 좋으니 재미를 보기가 마지막 소원이요, 그런 다음에는 세상 아무것에 대해서도 미련이 없을 것 같았던 것이다.
태수는 발길이 절로 정거장 쪽으로 떼어 놓여진다.
그러나 바로 어제 들러서 인단이야 포마드야를 더금더금 사왔는데, 오늘 또 채신머리없이 가고 보면 초봉이라도 속을 들여다보고 추근추근하다고 불쾌하게 여길 듯싶어 재미가 덜할 것 같았다.
태수는 섭섭하나마 가던 발길을 돌려 개복동으로 들어선다.
개복동 초입에 있는 행화의 집은 아무라도 오라는 듯이 대문이 활짝 열려 있다. 태수는 대문간으로 들어서면서, 지금 초봉이한테를 이렇게 임의롭게 다닌다면 작히나 좋으려니 싶었다.
안방에서는 행화가 흥얼거리는 목소리로 부르던 육자배기를,
"해느은 지이이이고오……."
하면서 귀곡성을 질러 올렸다가,
"……저문 날인데, 편지 일장이 도온절이로구나아 헤."
없는 시름이라도 절로 솟아나게 끝을 다뿍 하염없이 흐린다.
"좋다."
형보의 소리다.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던 것이다. 두 사람은 별로 장소를 달리 정하지 않았으면 요새는 여기서 만날 줄 알고 있다.
신발 소리에 행화가 꺄웃하고 내다보다가 웃으면서, 흐르는 옷허리를 걷어잡고 마루로 나선다.
태수가 방으로 들어서니까, 형보는 아랫목 보료 위에 사방침을 얕게 베고 누운 채 고개만 드는 시늉 하면서,
"인제 오나?"
"날이 좋은데!…… 은적사(恩積寺)나 나갈까 부다."
태수는 모자를 쓴 채로 방 가운데 털씬 주저앉으면서 혼자말같이 두런거린다. 그는 조금 아까부터 그 생각이다. 우선 날이 좋으니 절에라도 나가서 펑청거려 가면서 놂직도 하고, 또 그 밖에는 이 쭈루투룸한 심사를 어찌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거 조오치!"
형보가 맞장구를 친다. 태수는 그러나, 이어 딴생각을 하느라고 그냥 우두커니 앉았다가 '몇 전 도메'냐고 묻는다. 단념은 했어도, 그래도 조금 남은 미련이 있어, 그놈이 잊자고 해도 강박관념같이 주의를 끌던 것이다.
"구 전…… 육 전까지 갔다가 구 전 도메."
태수는 다시 말이 없다. 형보는 귀밑까지 째진 입에 담배 꽂은 상아 빨쭈리를 옆으로 물고 누워 태수의 숙인 이마를 곰곰이 올려다본다. 그의 퀭하니 광채 있는 눈은 크기도 간장 종지 한 개만큼씩은 하다.
이 사람을 목간통에서 보면 더욱 기괴하다.
고릴라의 뒷다린 듯싶게 오금이 굽고 발끝이 밖으로 벌어진 두 다리 위에, 그놈 등뒤로 혹이 달린 짧은 동체(胴體)가 붙어 있고, 다시 그 위로 모가지는 있는 둥 마는 둥, 중대가리로 박박 깎은 박통만한 큰 머리가 괴상한 얼굴을 해가지고는 척 올라앉은 양은, 하릴없이 세계 풍속사진 같은 데 있는 아메리카 인디언의 '토템'이다.
그는 체격과 얼굴이 그렇기 때문에 나이는 지금 삼십이로되 사십도 더 넘어 보인다. 부모 처자도 없고 인천이며, 서울이며, 안동현이며, 이런 투기시장으로 굴러다니다가 태수보다 조금 앞서 군산으로 왔었다. 두 사람이 알기는 서울서부터지만 이렇게 단짝이 되기는 태수가 군산으로 내려와서 외입판에 첫발을 들여놓을 때에 병정을 서주면서부터다.
그러나 태수는 형보를 미덥고 절친한 친구로 여기지, 결코 병정으로 알지는 않는다. 그래서 그는 의리를 지킬 각오까지도 있다. 형보도 표면으로만은 그러하다. 그래서 노상 태수의 일을 걱정하고 충고를 하는 체한다.
남녀 세 사람은 형보와 행화까지 태수의 침울해지려는 기분에 섭쓸려 한동안 말이 없다가, 형보가 이윽고 긴하게,
"그런데 여보게 태수?"
하더니 발딱 일어나서 도사리고 앉는다.
"……좋은 수가 있기는 하나 있는데, 자네 내가 시키는 대루 할려나?"
"수?…… 글쎄……."
은행의 돈 점포낸 그 일에 대한 것인 줄 태수는 알아듣고도, 뭐 그저 수라께 강낭옥수수겠지 하는 생각에 그다지 내켜하지도 않는다.
"자네, 대체 어쩔 셈으루 이리나?"
형보는 태수가 당겨하지를 않으니까, 이번에는 짐짓 걱정조로 캐자고 나선다.
"아무 도리두 없지 머……."
태수는 두 팔을 뒤로 짚고 퍼근히 다리를 뻗고 앉아서 담배만 풀씬풀씬 피운다.
"그러면 잔말 말구, 어쨌든지 나 하라는 대루 하게, 응?"
"어떻게?"
"지금 백석이까지……."
말을 꺼내는데 태수가 눈을 끔적끔적한다. 형보는 알아차리고서 행화를 돌려다본다.
"행화, 미안하지만 건넌방으루 잠깐만 가서 있게그려나, 응?"
경대 앞에서 심심파적으로 눈썹을 다스리고 있던 행화가 세수 수건을 집어 들고 일어선다.
"난두 세수하러 나갈라던 참이요…… 와? 무슨 수가 생기오?"
"응, 단단히 수가 생기네."
"하아, 오래간만에 장주사 덕분에 술 한잔 얻어묵나 부다…… 인제 수 생기거던 아예 내 모가치 잊지 마소, 예?"
"아무렴!…… 또 내가 잊어버리더래두 다아 이 고주사가 있잖나!"
"아무레나 나는 모르겠다. 수나 드북하니 잡소, 들……."
행화는 웃음 섞어 이런 소리를 하면서 마루로 나간다.
"그래, 세 군데니 말이야……."
형보는 행화가 다 나가기를 기다려 소곤소곤 이야기를 다시 내놓는다.
"……세 군데서 삼천 환씩 한 만 환 가량만 뽑아 내면 일은 되는데……?"
태수는 벌써 고개를 흔들고 시원찮아하다가,
"만 원을 가지구 어떡허게?"
"응, 그놈 만 원을 가지구서 나하구 둘이서 서울루 가거던…… 자네 혼자 가기가 적적하거들랑 저 애 행화나 데리구."
"흥!"
"하아따! 지레 그리지 말구 끝까지 들어 봐요…… 그렇게 서울루 가서, 자넬라컨 문 밖에 아무 데나 깊숙이 들어앉어 있으란 말야, 삼 년 아니면 다직해야 사 년……."
"공금 횡령해 가지구 도망갔다가 잽히잖는 놈 못 봤네…… 제기, 상해나 북경 같은 데루 뛰었다두 잽혀와서 콩밥을 먹는데, 황차 서울!"
"그야 저 하기 나름이지. 조심을 안 하니깐 붙잽히지, 죽은 드끼 들어앉어만 있으면 십 년 가두 일 없어요."
태수는 말이 없이 혼자서 고개만 가로 흔든다. 그는 잡히고 안 잡히고 간에, 하루 이틀도 아니요 삼사 년을 그처럼 답답하게 처박혀서 숨어 지낸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진저리가 날 일이다.
돈을 마음대로 쓰고, 돌아다니면서 즐겁게 노는 그런 움직이는 생활이 아니고는 차라리 죽음만도 못한 것이다. 그러니까 그는 일이 탄로나는 마당에 이르러서도, 자살로써 감옥 가기를 피하려는 각오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속도 모르고 형보는 연신 제 계획 설명이다.
"그러니깐 아무 염려 말구, 한 삼 년 그렇게 참구 있으면, 그 동안 나는 그놈 만 환을 가지구 앉어서 쓱 돈장사를 한단 말야! 응? 돈장사."
"돈장사라니?"
"응, 돈장사!…… 수형 할인 띠어먹는 것 말인데, 자세한 것은 종차 이야기하겠지만, 그렇게 만 환을 가지구 종로바닥에 앉어서 재빠르게만 납디면 삼사 년 안에 한 사오만 환찜은 넉넉 잡네!"
"허황한 소리!"
"이건 속두 모르구 이래! 해만 보아요…… 아, 그래서 한 사오만 환 잽히거들랑 그때는 자네가 자포낸 본전 일만삼천 환을 가지구 도루 와서, 자아 돈을 가져왔으니 용서해 주시오, 한단 말야. 비는 장수 목 벨 수 없다구, 그렇게 돈을 물어내 놓구 빌면 징역은 면할 테니깐…… 그리구 나서는 그 돈 나머질 가지구 자네허구 나허구 다시 장사를 하면 버엿하잖어? 어때?"
"글쎄…… 그것두 자네가 친구를 생각하는 맘으루 그러는 것이니 고맙기는 고마워이. 그러니 종차 생각해 보세마는……."
"자네가 그렇게 내 속을 알어주니 말이지, 그게 내한테두 여간만 위태한 일이 아닐세! 잘못하다가는 나두 콩밥이 아닌가?…… 그렇지만 하두 자네가 사정이 딱하니깐 친구루 앉어서 그냥 보구 있을 수가 없구 해서 그리는 것이지. 그러니깐 자네두 생각하려니와 내 일을 내가 생각해서라두 여간한 조심할 배가 아니어든……."
그러나 형보는 태수를 위해서 그런다는 것은 생판 입에 발린 소리요, 또 그렇게 만 원을 빼준대도 지금 이야기한 대로 행할 배짱은 아니다.
형보는 늘 두 가지의 엉뚱한 계획을 품고 지낸다.
첫째, 그는 제가 제 손수 무슨 농간을 부리든지, 혹은 누구를 등골을 쳐서든지, 좌우간 군산을 떠나 북쪽으로 국경을 벗어날 그 시간 동안만 무사할 돈이면, 돈 만 원이고 이삼만 원이고 상말로 왕후가 망건 사러 가는 돈이라도 덮어놓고 들고 뛸 작정이다.
뛰어서는, 북경으로 가서 당대 세월 좋은 금제품 밀수(禁制品密輸)를 해먹든지, 훨씬 더 내려앉아 상해로 가서 계집장사나, 술장사나, 또 두 가지를 겸쳐 해먹든지 하자는 것이다.
그는 재작년 겨울, 이 군산으로 옮기기 전에 한 반년 동안이나 상해로 북경으로 돌아다닌 일이 있었고, 이 '영업목록'은 그때에 얻은 '현지지식(現地知識)'이다.
그래서 그는 어떻게 하면 돈 만 원이나 올가미를 씌울까, 육장 궁리가 그 궁리인 것이다.
또 한 가지는 그처럼 형무소가 덜미를 쫓아다니는 위태한 것이 아니라 썩 합법적인 수단인데, 눈치를 보아 어수룩한 미두 손님 하나를 친하든지, 엎어 삶든지 해서 계제를 보아 쌀을 한 오백 석이고 천 석이고 붙여 달라고 한다. 아직도 미두장 인심이란 어수룩한 데가 있어서 그게 노상 그럴 수 없으란 법은 없다.
그렇게 쌀을 붙여 주면 그놈을 시세를 보아 가면서 눈치 빠르게 요리조리 되작거린다.
만일 운이 트이기만 하려 들면 한 일이 년 그렇게 주무르는 동안에 돈이나 한 오륙천 원 만들기는 그다지 어려운 노릇이 아니다.
그놈이 그처럼 여의해서 이삼 년 내에 오륙천 원이 되거들랑 그때는 미두장에서 손을 싹싹 씻고 서울로 올라간다. 올라가서 그놈을 밑천삼아 일이백 원, 이삼백 원, 기껏 커야 사오백 원짜리로, 이렇게 잔머리만 골라 '수형할인'을 떼어먹는다. 이것도 착실히만 하면, 한 십 년 후에 가서 몇만 원 잡을 수가 있다. 몇만 원 가졌으면 족히 평생이다.
그래야지, 만일 미두장에서만 어물어물하고 있다가는 피천 한푼 못 잡고, 근처의 수두룩한 하바꾼 신세가 되기 마침이다―---는 것이다.
이렇게 그는 투기사답지 않게 염량을 차리고, 그러한 두 가지 계획을 품고서 늘 기회를 엿보던 차에, 언덕이야시피 다들린 게 태수의 일이다.
그는 태수가 만일 말을 들어, 돈을 만 원이고 둘러 빼만 주면, 태수야 어떻게 되거나 말거나, 저 혼자서 그 돈을 쥐고 간다 보아라, 북경 상해 등지로 내뺄 뱃심이다.
그래, 사뭇 침이 넘어가게 구미가 당기는 판이라, 벼르고 있다가 실끔 말을 내던진 것인데, 의외로 이건 도무지 맹숭맹숭, 좋은 말로 어물쩍하려고 하니 시방 속으로는 태수가 까죽이고 싶게 미워서 견딜 수가 없다.
'요놈의 새끼, 네가 영영 내 말을 안 들어만 보아라. 아무 때고 한번 골탕을 먹여 줄 테니.'
형보는 마침내 이런 앙심을 먹고 말았다.
이야기가 흐지부지해서 둘이는 시무룩하고 앉았는데, 행화가,
"천냥 만냥 다아 했소?"
하고 얼굴을 씻으면서 방으로 들어온다.
형보는 속이 좋잖은 끝이라,
"다아 했다네."
"어찌 미잉밍한 게 술 얻어묵을 것 같잖다!"
행화는 경대 앞으로 앉아 단장을 시작한다.
"어디 지휘 받았나?"
"아―니."
"그런데 웬 세수를 벌써?"
"나두 영업인데…… 이렇게 마침 채리고 있다가 인력거가 오거든 힝하니 쫓아가야지!…… 그래야 한푼이라두 더 벌지 않능기요!"
"치를 떠는구나."
하다가 형보가 그 말끝에 생각이 나서 태수게로 대고,
"그런데 여보게 이 사람! 저것은 어떡헐려나?"
쌀 붙인 것 말이다.
"내버려두지, 머!"
태수는 담배만 피우고 앉았다가 겨우, 봉했던 입같이 떨어진다.
"내버려두다니? 오륙십 원은 돈 아닌가?…… 그러느니 차라리 날 주게?…… 잘 되작거려서 담뱃값이나 뜯어쓰게시니."
"쯧! 제발 그러게그려!"
태수는 성가신 듯이 얼핏 승낙을 한다. 그는 꺼림칙하게 꼬리를 물려 놓고서, 아주 끊어 버리기도 싫고 그런 것을 형보가 이렇다거니 저렇다거니 조르는 게, 그만 머릿살이 아프게 귀찮았던 것이다.
그러나 태수나 형보나 다 같이 그 끄트머리가 그 이튿날부터 크게 조화를 부릴 줄은 꿈에도 생각을 못 한 것은 물론이다.
"고마워이!"
형보는 태수의 승낙을 받고 싱글벙글 좋아한다. 어쩌면 내일로 닥쳐오는 그 쌀 천 석의 운명을 미리 짐작하고서 좋아하는 것같이도 되었다.
아닌게아니라, 그러니까 노름이란 도깨비살림이라지만, 그놈이 바로 그 다음날 가서 형보가 미처 끊을 겨를도 없이 한목 이십 정이 푹 올라간 것이며, 그것을 계제 좋다고 잡아 끊었다가, 그놈으로 들거리를 삼아, 다시 쌀을 몇백 석 붙여 놓고 요리조리 되작거려서 반년 후에는 돈 천 원이나 잡은 것이며, 다시 일년 남짓해서는 형보의 곡진한 포부대로 오륙천의 밑천을 장만한 것이며, 이러한 것은 태수는 물론 형보도 그 당장에야 상상도 못 했던 일이다.
형보는 그 이튿날 당장 시세가 그처럼 이십 정이나 올라서 우선 이백 원 가까운 이익을 보았다는 것이며, 그 뒤로도 부엉이 살림같이 차차로 늘어 간다는 것을 꽉 숨겨 버렸었다.
그러나 아무튼 그것은 그날이 밝는 그 다음날부터의 일이지, 이 당장에서 형보가 그것을 미리 짐작하고 그래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 혹시 귀신이 씌어 대었다는 말이나 거기에 맞을는지, 그래서 형보는 저도 모르고 좋아한 것인지는 몰라도,
"제엔장…… 세사는 여반장이요, 생애는 방안지라(世事如反掌, 生涯方眼紙)!"
형보는 끙! 하고 일어나 쪼글트리고 앉으면서, 미두꾼들이 좋은 때고 언짢은 때고 두루 쓰는 이 타령을 한바탕 외다가 갑자기,
"아차! 내가 깜박 잊었군!"
하더니, 추욱 처진 조끼 호주머니에서 불룩한 하도롱봉투 하나를 꺼내어 태수게로 던진다. 아까 은행에서 찾아온 돈 이백 원이다.
"……거기 그대루 다아 있네."
실상, 잊었던 것이 아니라 그대로 저한테 두어 두고 눈치를 보아 몇십 원 꺼낸 뒤에 태수를 주려고 했던 것이지만, 인제는 미두하던 끄트머리를 얻어 가졌으니 이 돈에까지 손을 댈 염치는 없었던 것이다.
태수는 형보가 미리서 손을 대지 않고 그대로 고스란히 두었다가 주는 것이 도리어 이상했으나 말없이 받아 봉투를 찢는다.
"보이소 고주사, 예?"
돌아앉아서 단장을 하던 행화가 태수가 너무 말이 없이 시춤하고만 있으니까, 그렇다고 그게 무슨 걱정이 되는 건 아니지만 그저 심심삼아 말을 청하던 것이다.
"응?"
태수는 행화한테 주려고 돈 백 원을 따로 세면서 건성으로 대답을 한다. 그는 한 일주일 전에 오입을 하고 이내 다니면서 아직 인사를 치르지 못했었다.
"글쎄 고주사아!"
"왜 그래?"
"와 그렇게 코가 쑤욱 빠졌소? 예?…… 물 건너 첩 장인 죽었소?"
"망할 것!"
"아니, 첩 장인이면……."
형보가 거들고 내달으면서,
"……첩 장인이면 행화 아버지?"
"우리 아배는 발써, 옛날에―--- 옛날에 천당 갔소!"
"기생 아범두 천당 가나?"
"모르제! 그래도 갔길래 펜지가 왔제?"
"그건 지옥에서 온 걸 잘못 본 걸다!"
"아니, 천당이락 했던데? 아이고 몇 번지락 했더라?…… 번지두 쓰고 천당 하나님 방(方)이락 했던데?"
"아냐, 그건 지옥에서 문초 받으러 잠깐 불려갔던 길일세!"
"여보게 행화?"
별안간 태수가 졸연찮게 행화에게로 버썩 돌아앉으면서,
"……자네 그럼 나하구 천당 좀 갈려나?"
"천당요?…… 갑시다!"
"정말?"
"이 사람 그러다가는 천당으루 못 가구 지옥으루 따러가네!"
형보가 쐐기를 박는데, 행화는 그대로 시치미를 따고 앉아서,
"정말 아니고? 금세라두 갑시다."
행화나 형보나 다 농담이다. 농담 아니기는 태수다.
태수는 행화의 얼굴을 끄윽 들여다본다. 여느때도 독해 보이는 그의 눈자는 매섭고 광채가 난다. 그는 시방 들여다보고 있는 행화의 얼굴에서 행화의 얼굴을 보는 게 아니라 초봉이의 얼굴을 보고 있는 것이다.
그는 계집과 둘이서 천당을 간다는 말에서 '정사(情死)'라는 것을 암시를 받았고, 그놈이 다시,
'초봉이와의 정사!'
라는 데까지 번져 나갔던 것이다.
문득 생각한 것이나 그는 무릎이라도 탁 치고 싶게 신기했고, 장차 그리할 것이 통쾌했다.
태수는 이윽고 혼자서 싱긋 웃더니 갑자기,
"에라 모르겠다!"
소리를 치면서 벌떡 일어선다. 형보와 행화는 질겁하게 놀라서 한꺼번에 태수를 올려다본다.
"……자아, 일어들 나게. 자동차 불러 타구 소풍삼어 은적사루 놀러 가세."
"은적사 조오치!"
형보는 선뜻 맞장구를 치고 좋아하고, 태수는 손에 여태 쥐고 있던 돈 백 원이 그제야 생각이 나서, 행화의 치마폭에다가 떨어뜨려 준다.
"어서 얼핏, 옷 갈아입엇!"
"아이갸! 이리 급해서!"
행화는 돈에는 주의도 하지 않고 입술에다가 루즈칠만 한다.
"빨리 빨리!"
"서두는 게 오늘 밤에 또 울어 뒀다, 고주사."
"미쳤나! 내가 울긴 왜 울어?"
"말두 마이소. 대체 그 초봉이락 하능 기 뉘꼬?…… 예? 장주사는 알지요?"
"알기는 아는데 나두 상판대기는 아직 못 봤네."
행화는 제중당에 있는 그 여자가 초봉인 줄은 모른다. 모르고 어느 기생으로만 알고 있다.
"오늘 좀 불러 봤으면 좋겠다!…… 대체 어느 기생이길래 고주사가 그리 미망이 져서 울고불고 그 야단을 하노?"
"허허허허."
형보는 행화가 초봉이를 이름이 그럴듯하니까 기생인 줄만 알고 그러는 것이 우습대서 껄껄거리고 웃는다. 태수도 쓰디쓰게 웃고 섰다.
"예? 고주사…… 난두 기생이니 오입쟁이로 내 혼자만 차지하자꼬마는, 그러니 강짜를 하는 게 아니라아 고주사가 구만 하두우 미망이 져서 날로 붙잡고 초봉이, 초봉이 카문서 우니 말이오."
"잔말 말앗!"
"앙이다! 그라지 말고오, 오늘은 어데 어떻기 생긴 기생인지 좀 구경이나 합시다, 예?"
"까불지 말래두 그래!"
"하아! 내 이십 평생에 까분단 말이사 첨 듣소…… 예? 고주사, 오늘 데리구 같이 갑시다. 어느 권반이오?"
"기생 아니야! 괜히 그런 소리 하다가는……."
"하아! 기생 아니고, 그럼 신흥동(新興洞 : 유곽) 갈보라요?"
"이 자식!"
태수가 때릴 듯이 엄포를 하고, 행화는 까알깔 웃으면서 방구석으로 피해 달아난다.
"잘한다! 잘한다!"
형보가 아랫목에서 제풀에 곱사춤을 춘다.
형보의 몫으로 기생 하나를 더 불러, 네 남녀가 탄 자동차는 길로 먼지를 하나 가득 풍기면서 공원 밑 터널을 빠져 '불이촌(不二村)' 앞을 달린다.
바른편으로는 바다에 가까운 하구의 벅찬 강물에 돛단배들이 담숭담숭 떠 있고, 강 건너 충청도 땅의 암암한 연산(連山)들 봉우리 너머로는 오월의 창공이 맑게 기울어져 있다.
곱게 내리는 햇볕에 강 위의 배들이고 들판의 사람들이고, 모두 움직이건만 조는 것 같다.
태수는 그러한 풍광보다는 이 길이 공동묘지로도 가는 길이니라 생각하면, 나도 오래지 않아 죽어서 시체만 영구차(靈柩車)에 실리어 이 길을 이렇게 달리겠거니, 그리고 오늘처럼 돌아오지 못하고 빈 영구차만이 이 길을 돌아오겠거니 생각하는 동안, 저도 모르게 눈가가 매워 왔다.
그러나 그 슬픔에는 초봉이로 더불어 죽어 더불어 묻히고, 더불어 돌아오지 못하니 차라리 즐겁다는 기쁨이 없지도 않았다.
일행은 은적사로 나가서 술 섞어 저녁을 먹고 훨씬 저문 뒤에 시내로 들어왔다. 시내로 들어와서는 다시 요릿집에 들어앉아 자정 후 두시가 지나도록 술을 먹고서야 파하고 헤어졌다.
태수는 술을 많이 먹느라고 먹었어도 종시 취하지를 못하고, 몸만 솜 피듯 피로했지, 취하자던 정신은 끝끝내 초랑초랑했다.
그는 자동차를 타고 오다가 개복동 어귀 행화집 앞에서 행화와 갈렸다. 행화는 기왕 늦었으니 제 집으로 들어가자고 권했고, 태수도 그리하고는 싶었으나 좋게 물리쳤다. 너무 여러 날 바깥 잠만 자고 제 방을 비워 두어서는 안 될 '의무' 한 가지가 있던 것이다.
태수는 바깥주인 탑삭부리 한참봉이 차라리 첩의 집에 가지 않고 큰집에서 자고 있기나 했으면 되레 다행이겠다고 생각하면서, 지쳐만 둔 대문을 살그머니 여닫고, 마당을 무사히 지나 뜰아랫방인 제 방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마악 양복 저고리를 벗었을 때에, 신발 끄는 소리와 연달아 방문이 열리면서, 안주인 김씨가 눈이 샐쭉해 가지고 말없이 들어서더니, 다짜고짜로 와락 달려들어 태수의 팔을 덥석 물고 늘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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