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숙(英淑)은 그의 최상의 자랑이요 그의 생명보다 중요하게 생각하던 월궁(月宮)의 선녀가 여왕의 잔치에 참석하러 갈 제 입는 듯한 모든 비단 의복과 모든 화장품을 자기 방바닥에 흐트러놓고 방창(房窓)을 의지하여 갓 뿌린 물김이 화초밭 공기를 적시고 그윽한 향내가 가는 바람과 함께 서양(西洋) 사창장(紗窓帳)을 흔들며 들어오는 것을 맡으며 수심에 싸인 눈으로 다만 저 건너 연돌(煙突)에서 가는 연기가 공중으로 올라가 슬그머니 사라지는 것만 바라본다.

조금 있다가 그의 두 눈에는 구슬 같은 눈물이 떨어지며 그의 입술은 떨린다. 그는 다만 창장(窓帳)으로 그의 눈물을 씻으며 무엇을 생각하듯 저쪽 공중만 물끄러미 쳐다본다.

아아, 그의 가슴속에는 무엇이 있관데 하염없는 눈물을 자아낼까? 그것은 인생으론 누구든지 차지한 정(精)이란 그것 까닭이다. 지금 자기 학교에서 출학(黜學)의 명령을 받은 이 어린 소녀의 쓰린 가슴속에 넘치어 흐르는 원한의 끓는 피를 알지 못하는 자는 그의 시비도 알지 못할 것이다.

그는 다시 방 한 귀퉁이에 놓인 책상을 의지하고, 붓을 들고 종이를 펴 무엇인지 쓰기를 시작한다. 그 쓰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자기의 회상기(回想記)이다. 이 회상기는 무엇하러 쓰는 것일까. 이는 자기 심중의 일체를 자기의 약혼자인 이병철(李炳哲)을 위하여 쓰는 것이다. 이 회상기가 과연 허위가 없다 하면 이것으로 이영숙의 퇴학당한 사실을 알 수 있겠는지라, 이에 그 회상기를 소개하려 한다.

그리운 병철 씨, 지금 병철 씨는 어느 곳에 계십니까? 저 망망한 대해를 건너 보이지도 않는 곳입니까? 울울한 삼림 속에 헤매시며 계십니까? 어찌하여 불러도 대답이 없으세요. 나의 힘껏 부르는 소리는 이편에서 저 산을 울리어 그의 반향이 들리던데요. 그 반향의 소리가 이 우주에 가득 찬 공기를 울리며 그리운 병철 씨의 묘하게 생긴 귓구멍으로 어찌하여 들어가지를 않았어요, 아아, 나의 가슴속에 모든 피가 다 식어 냉수가 되어 버릴 때까지 병철 씨는 돌아오지 않으려십니까. 나의 몸이 가루가 되고, 산골짜기를 흐르는 시내의 물이 되고, 그 물이 다시 공중으로 올라가 구름이 되어 병철 씨의 머리 위로 떠다니며, 병철 씨 잘못하였습니다, 할 때에도 그와 같이 무정하시렵니까?

아아, 그러하나 저는 병철 씨를 원망할 수는 없어요. 제 아무리 지금 마음을 돌리어 다시 병철 씨를 애모한다 하더라도 나는 병철 씨를 원망할 수는 없어요.

나는 지금도 생각합니다. 저 봄에 목동의 피리 소리 들리고 여름에 녹음이 서늘하며 가을에 밝은 달이 시냇물에 비치어 어룽어룽하고 겨울에 흰 눈은 우주를 햇솜을 입힐 때 우리 두 사람은 넓고 넓은 벌판 잔디 위에 졸졸졸졸 흐르는 시내 사이로 다만 지나가는 날과 새는 밤을 기꺼운 중에서 지낼 뿐이었지요. 우리는 그때에 천당 속에 살고 낙원에서 지내었지요. 그래 나의 나이 열 네 살 되던 가을 어떠한 날이었나이다. 병철 씨와 나와 둘이 해변 바위 위에 걸터앉아 움직이는 파도와 지나가는 돛단배와 저 건너 수평선 상에 뭉게뭉게 피어올라오는 구름을 바라보며 우리 두 사람은 가슴속에 말하기 어려운 이상한 정미(情味)를 맛보았지요. 그때 마침 바다로부터 찬바람이 불어오니 병철 씨는 나를 추울까 하여 병철 씨의 따뜻한 몸으로 끼어 안고 「우리는 어느 때까지 이렇게…」하시며 말을 다 마치지 못하셨지요. 그때 나의 부끄럽고도 기꺼운 마음이 가슴에 팽배하였으나 차마 그대로 안기어 있기는 부끄러워 이 붓대를 잡은 힘없는 손으로 병철 씨의 가슴을 떼어 밀었지요. 아아, 그때 나와 병철 씨 사이에는 이 세상 무엇보다도 귀하다는 애정이란 것을 깨닫게 되었었나이다. 그래 해는 서산으로 들고 해오라기 저녁 바다 금파(金波) 위에 날 제, 우리 두 사람은 그 바위— 우리 두 사람에게는 기념의 바위를 떠나 각각 집에 돌아왔었지요. 그때부터 우리는 만나면 어찌 가슴속에 부끄러운 생각이 나고 만나지 못하면 섭섭하여 잠을 이루지 못하게 되었었나이다.

아아. 병철 씨, 만약 우리가 그와 같은 향촌(鄕村)에서 우리 생애를 다 보내었다면 제가 오늘 이 글을 쓸 리가 없었겠지요. 그러하나 운명의 농신(弄神)은 왜 우리까지 못살게 굴었어요. 저는 그때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를 쫓아서 서울로 오게 되었지요. 메뚜기 밭 사이 좁은 길 위에서 춤추고 개울 속에 개구리 한가하게 노래할 제 아침 안개를 헤치고 떠오르는 아침 해는 풀끝에 해롱대는 이슬방울을 비치어 반사될 때 나귀 위에 나를 앉히시고 서울로 향해 오시는 우리 부모는 그때 작별하러 나온 병철 씨를 보시고, 「잘 있거라. 우리 아기 서울 가서 글 많이 배워 가지고 올 터이니 몸 성히 잘 있다 반가이 만나 보라…」고 하시니까 병철 씨는 다만 아무 소리 없이 두 눈에 눈물을 괴고 물끄러미 나만 쳐다보셨지요. 아아, 그때 나의 가슴속은 병철 씨도 알아 주셨을 것이지요. 나귀 방울 소리와 함께 원대한 희망을 가지고 서울로 오는 이 영숙의 마음은 한갓 희망의 위로가 있겠지만 섭섭한 것 밖에 차지하시지 못한 병철 씨야 황혼에 바위를 치는 물결 옆에서 몇 번이나 애끓이는 생각을 하셨을까요? 그때 내가 동구 밖을 나서며 다시 뒤를 돌아다보니까 병철 씨는 옷고름으로 눈물을 씻으며 나의 뒷그림자만 바라보셨지요. 나귀는 걸어 병철 씨가 보이지 않을 때에 먼 동산 풀밭에서 풀을 뜯는 황소의 매— 하고 부르짖는 소리가 얼마나 떠나가는 나의 가슴을 아프게 하였을까요?

아아, 병철 씨, 어디 계십니까? 어느 곳에서 나를 원망하시며 눈물을 흘리고 계십니까? 이 세상 가운데입니까? 그렇지 않으면 구름 같은 이 세상을 버리시고 멀고 먼 저 세상을 가셨습니까? 만일 이 세상에 계시거든 얼른얼른 돌아와 저의 사죄(謝罪)를 들어 주세요. 또 이 세상에 계시지 않으시거든 제가 죽은 후 어떠한 산골짜기 조그마한 무덤에 묻히어 있든지 그 무덤 위에 떠나지 않고 떠 있는 구름이 되셔서 사시장절(四時長節) 그 무덤 위를 적시어 주세요. 그래 그 무덤에 나는 잔디를 어느 때든지 파릇파릇하게 하여 주세요. 아아, 나의 가슴은 터집니다. 나의 피는 다 마르는 듯해요. 제가 그때 저— 우리 학교 기념식 때 어찌하여 그와 같은 일을 하였는지 지금 저를 오히려 의심합니다.

올 어떠한 봄날이었어요. 저는 어떠한 동무들하고 ○○에 산보를 간 일이 있었어요. 그 사람을 곤(困)하게 하는 춘기(春氣), 사람을 취하게 하는 연풍(軟風), 왜 나의 가슴속에 잊고 있는 모든 정염(情炎)을 도외(度外)에 더 타게 합니까? 나는 그때 꿈속같이 그 하루를 지내었어요. 물론 병철 씨의 생각은 조금도 가슴속에 없었나이다. 그때 마침 나의 동무 중의 한 사람의 오라버니 한 분을 만났어요. 나는 그때 처음으로 그이와 인사를 하였으나 그 다음에 알아보니까 그이가 나를 사모하여 나의 뒤를 쫓아다녔대요. 그러하나 그런 줄 모르는 나는 그때 그곳에서 새로 나는 잔디 위로 어깨를 나란히 하여 걸어가며 이 이야기 저 이야기 할 때 그의 옷에서 나는 향내와 그의 고운 얼굴에 뜨는 미소는 이 정에 약한 나를 자꾸 잡아당겼어요. 그래 이것은 조금도 공교한 듯하나 그때 나와 같이 왔던 동무는 다 어디로 가고 다만 그이와 나와 둘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래 그때 병철 씨에게 대한 죄인이 되고 말았어요. 그 후부터 날이 가고 달이 갈수록 나를 즐겁게 하고 나의 생애를 기쁘게 하는 것은 그이의 주는 애정과 그이에 주는 모든 화미(華美)이었어요. 나는 그때부터 화장이란 것을 알게 되고 애교라는 것을 흉내 내게 되었어요. 그래 나의 머릿속에는 어느 때든지 파리의 유탕(遊蕩)을 낙원의 행사로 인정하고 고루거각(高樓巨閣)에 안락한 생활을 인생의 진생활(眞生活)로 알게 되었어요. 그래 그이와 나 사이에 교제는 도를 가하게 되어 갈수록 나의 가슴을 태우는 것은 그이와 손을 마주잡고 저 양행(洋行)하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루는 나의 마음속에 있는 담(膽)과 용력(勇力)을 다하여 그의 앞에 저 양행을 원하였어요. 그는 쾌락하였나이다. 물론 그는 경성(京城)에 굴지(屈指)하는 재산가의 자식이니까 나는 그것을 꼭 믿고 가슴속의 기꺼움을 못 이기어 며칠 사이는 침식을 폐지하다시피 하고 가까워 하였나이다. 몰론 가정에도 비밀이지요.

나는 그날 저녁—병철 씨와 만나던—이 만나자 하는 날인 고로 나의 할 수 있는 데까지에 모양을 내고 그이가 만나자 하던 곳으로 갔었나이다. 달빛은 환하게 밝아서 나의 가슴속에 모든 희망을 다— 월궁의 생활로 환하게 하는 듯하였어요. 정각은 지났었나이다. 그러하나 기다리는 사람은 오지를 않아요. 의심을 모르는 이 영숙은 그때도 오히려 믿는 마음에 밤 열시까지 기다렸나이다.

그러나 달은 점점 검은 구름 속으로 들어가 우주는 검은 막을 덮는 듯하고 사면은 점점 고요하여졌나이다. 그때 나는 무서운 생각이 갑자기 나서 마침 집으로 돌아오려 할 때 누구인지 뒤에서 「잠깐만 기다리시요」하고 머무르기를 청하는 이가 있겠지요. 깜짝 놀라는 중에도 반가운 마음이 나서 선뜻 돌아보니 아아, 그는 여기서 만나자 하던 그이가 아니라 한 번 보지도 못하던 완강한 남자이었어요. 나는 깜짝 놀랐으나 벌써 손목을 잡힌 나는 조금도 어찌할 줄을 몰랐어요. 그 남자는 냉소를 띠고 「흥, 정윤모(鄭允模)를 기다리느라고 퍽 애썼지? 자, 정 대신으로 내가 왔으니까 아무 염려 말어─」 그때 사정은 병철 씨도 짐작하여 주실 줄 압니다. 나는 두 번이나 죄를 짓는 몸이 될 뿐 아니라 누구 하나 의뢰할 사람이 없게 되었나이다.

아아, 남자는 하나도 믿을 사람이 없지요. 그날 저는 참 병철 씨에게 죄를 지었어요. 제가 몇 만 번 고깃덩이를 더럽혔다 할지라도 그때 병철 씨에게 행한 죄는 그것에 비할 수 없어요. 그러하나 육체의 죄를 지을 그때에는 오히려 두려웁고 부끄러운 생각이 있었으나 그때 병철 씨가 반기어 인사를 하시려 할 때 정윤모 씨와 같이 섰으므로 인하여 답례는 그만두고, 당신이 누구십니까, 하고 할 그때에는 아무 주저와 부끄러움이 없이 대담히 하였습니다.

아아 병철 씨, 병철 씨는 이 세상 모든 여자를 다 저주하시겠지요. 나를 독사로 아시겠지요. 저는 오늘 학교에서 출학이란 최후의 명령을 받았습니다. 저는 부모나 친척이나 이 세상 모든 사람을 볼 낯도 없어요. 그러하나 병철 씨 나는 병철 씨가 어디 계신지도 모릅니다. 어디 계신지도 모르는 병철 씨 한 분만 나의 죄를 사하여 주시겠지요. 가슴이 찢어져 원망의 끓는 피가 넘쳐흐르실 줄 나도 짐작합니다. 나는 병철 씨에게 사죄하려 하나 그 사죄를 받으실 병철 씨는 지금 어디 계십니까. 저는 지금부터 되는 대로 지내려 합니다. 바람에 끌리어 산악에 부딪혀 죽든지 물결에 씻기어 암초에 다닥쳐 깨어지든지 아무렇게나 지내려 하오나 다만 저의 가슴속에 알맹이인 진애(眞愛)로 바라는 것은 어떠한 별 아래에 어떠한 때에든지 이 최후의 영숙의 글을 읽으시거든 더러웁던 영숙이 다시 정(精)하여졌구나 한 마디만 하여 주세요. 머릿속에 있는 말은 길고 종이와 붓은 짧은데, 다만 두어 자로 저의 진정을 쓴 것인 줄 알아 주시면 만족할까 하나이다.

영숙 서

떨어지는 눈물로 종이를 적시며 그 글을 쓰던 이영숙은 다시 그 화장품과 비단 옷을 접어 장 안에 넣고, 문을 닫고 바깥으로 나아갔으니 어디로 갔으며 무엇하러 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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