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가자의 유서
- Alas! I can not stay in the house
- And home has become no home to me……
- -R.Tagore
나가자! 집을 떠나서 내가 나가자! 내 몸과 내 마음아 빨리 나가자. 오늘까지 나의 존재를 지보(支保)하여준 고마운 은혜만 사례해두고 나의 생존을 비롯하러 집을 떠나고 말자. 자족심으로 많은 죄를 지었고, 미봉성(彌縫性)으로 내 양심을 시들게 한 내 몸을 집이란 격리사(隔離舍) 속에 끼이게 함이야말로 우물에 비치는 별과 달을 보라고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를 우물가에다 둠이나 다름이 없다. 이따금 아직은 다죽지 않은 양심의 섬광이 가슴속에서, 머릿속에 번쩍일 때마다 이 파먹은 자취를 오! 나의 생명아! 너는 얼마나 보았느냐! 어서 나가자! 물든 데를 씻고 이즈러진 데를 끊어버리러 내 마음 모두가 고질을 품고 움직일래야 움직일 수 없는 반신불구가 되기 전에 나가자! 나가자! 힘자라는 데까지 나가자!
어떤 시대 무슨 사상으로 보든지 사람의 정으론 집이란 그 집을 없애기와 또 집에서 나를 끌고 나온 다음은 무어라 할 수 없을이만큼 서러운 장면일 것이다. 하지만 이 존재에서 저 생활로 가고 말, 그 과도기를 참으로 지나려는 사람의 밟지 아니치 못할 관문에는 항상 비극이 무엇보담 먼저 그를 시험할 줄 믿는다. 이 시험은 남의 말에서나 내 생각에서나 어떤 짐작만으로는 아무 보람이 없는 것이다. 아니 도리어 아는 척하는 죄만 지을 뿐이다. 오직 참되게 깨친 마음과 정성되게 살 몸뚱이가 서로 어룰려져서 치러보아야 할 것이다. 이것은 모르던 것을 발견함이나 또는 모를 것을 현성(顯惺)함과 같은 그런 자랑이 아니다. 다만 자연을 저버릴 수 없는 사람의 생활을 비롯함뿐이다. 자연은 언제 무엇에게든지 이 비극으로 말미암아 새 생명을 주는 것이다.
나의 반성에서 부끄러움은, 고백을 한다면 나의 집에 조그마한 불안이라도 나기 전에 내가 집은 없애지 못할지라도 나라는 나는 나왔어야 할 것이다. 얼굴 두터운 핑계일지 모르나 이러한 반성을 비롯한 그때는 반성의 지시를 곧 실행할 만한 의지도 뿌리 깊게 박히지 못한 열 여덟 되던 해부터이었지만 그뒤 어제까지도 실행은 못하였다. 짧게 말하자면 모두가 한갓 미련의 두려움 많은 억제엑 과단성을 빼앗긴 때문이었으며 이 행위의 내면에는 나라는 나의 살려던 힘이 그만치 미약하였다는 사실이 숨어 있다.
이러한 사실로 지명(誌銘)된 나의 지난 생명을 읽을 때마다 언제든지 우리에게도 한번은 없어져야만 할 정명(定命)된 집을 구태여 있게스리 애쓰던 미봉성과 또 그러한 속에서 헛꿈을 꾸느니보다 차라리 하루 일찍 미쳐지지 못한 속쓰린 자족심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이면 다 가지게스리 마련이 된 자기의 양심이 없이는 그에게 한 사람이란 개성의 칭호를 줄 리도 받을 수도 없음과 같이, 그러한 개성이 아니고도 집을 차지한다면 그는 집이 아니라 그 집의 범위만치 그 나라에와 그 시대 인류에게 끼치는 것이란 다만 죄악뿐이기 때문에 집이란 한 존재를 가질 수 없다. 아! 그따위 것보담 나의 양심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애써야겠다. 그래서 나의 개성을 내가 가지고 살아야겠다. 양심없는 생명이 무엇을 하며 개성없는 사회를 어디에다 쓰랴. 모든 생각을 한뭉텅이로 만들 새생명은 지난 생황의 터전이던 내 몸의 성격을 반성함에서 비롯할 것이다. 이러한 양심에서 생겨난 반성은 곧 양심혁명을 부름이나 다를 바 없다. 이 길은 피할 수 없는 길이다. 나는 내 몸엑 이 길을 따라만 가자고 빌어야겠다.
사람이란 누구이든 혼자 살 수 없는 것이다. 마단 갳로 보아서만이 아니라 개체가 모든 그 집도 한 집만이 살지 못한다. 그러므로 나에게는 그들을 섬기고 또 내가 섬기어질 그런 관계가 있다. 좀더 가까운 의미로 말하지만 그리하지 않을 수 없는 선천적 의무와 이론적 구권(求權)이 있다.
이 의무를 다하고 이 구권을 가지게 된 그때가 비로서 나이란 한 사람 - 양심을 잃지 않는 한 개인 - 인 사람이 된다. 참으로 사람이 되려면 미봉과 자족으로 개돼지 노릇을 하는 가운데서 모든 기반을 끊고 나와야 한다. 내 몸속에 있는 개돼지의 성격을 무엇보다 먼저 부셔야 한다. 세상에서 내가 가장 사랑하던 내 자신조차 아까움없이 부셔야 할 그 자리에서 무엇 그리 차마 버릴 수 없는 것이 있으랴.
오늘 다시 생각하여도 하늘을 보기 부끄러운 것은 나의 둔각(鈍覺)이었던 것이다. 알게 된 것이 한 자 길이가 되면 그 길이만치는 내가 살아보아야 할 것이다. 그 길이만치 살려면서도 그 앞에 이른바 서러운 장면으 ㅣ뒤에 올 성공을 미리 의아함에서 얻은 나겁(懦怯)으로 말미암아 주저를 하다가 드디어 자족과 미봉으로 지나던 둔각 그것이다. 그 생황에서 이미 살게 되었으면 그 생활대로나 충실하게 살아야 할 것이지만 그리도 못하고 헛되게 시절을 저주하였으며 부질없이 생명을 미워하던 그 둔각이다. 말하자면 자연을 감식할 만한 그런 반성이 없었던 것이다. 개념에서 자낸 자각 - 입술에 발린 자각 - 이 넋 잃은 생활에서 무슨 그리 놀랄 만한 소리를 들려줄 수 있을 것인가?
언제든지 한번 오고는 말 이 기운이 하루 일찍 오늘에라도 오게 된 것을 나는 속마음 깊이 기뻐한다. 사람의 몸으로 다른 성수에 가서 살지 않는 바에야 저버릴 수 없는 자연의 가르치는 말을 듣지 않을 수는 없는 것이며 깨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설움을 지난 뒤의 기쁨'이 양심생명의 하나뿐인 희망이다. 영구의 희열은 자연의 방대한 비극 너머에다 모셔놓았다. 아, 나는 이 비극을 마중가야겠다. 양심과 자족, 미봉과의 싸움이다. 다시 말하면 사람과 개돼지와의 싸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