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렴풋이 잠들었던 승호는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나며 이젠 시간이 되지 않았나? 하고 문을 열고 내다보았다.

그리 번화하던 이 거리도 어느덧 고요하고 전등불만이 가로수사이로 두어줄의 긴 빛을 던지고있었다. 그는 눈을 두어번 부비고나서 밖으로 뛰여나왔다.

한참이나 나오던 그는 싸늘한 볼을 어루만지며 자기 머리에 모자가 없음을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그래서 곧 돌아와서 모자를 눌러쓰고 총총히 걸었다.

그가 목적지인 S공원까지 왔을 때, 하늘을 찌를듯이 올라간 백양나무숲을 바라보면서, 희숙이가 와서 기다린지가 오래지나 않았나 하는 불안과 어떤 감격으로 발길이 허둥허둥해졌다. 그러나 그가 S공원안으로 들어와서 정자까지 왔을 때, 희숙이가 아직 안와있으므로 다행하면서도 섭섭하였다.

그는 정자 란간에 비껴앉아 어디로부터 희숙이가 나타날지 몰라 두리번두리번 살펴보았다. 그리고 누가 이 공원에 놀러나오지 않았나 하는 불안도 일어났다.

마침 싸늘한 바람이 소루루 정자안으로 밀려들어오며 나무잎을 데구르르 굴린다. 그는 웬일인지 소름이 오싹 끼치며 무시무시한 생각까지 든다.

벌써 이곳은 완전한 가을이였다. 내지 같으면 아직도 홑옷을 입을터인데 두툼한 고꾸라 양복을 입었는데도 이렇게 온몸이 싸늘하게 얼어들어온다. 그는 팔짱을 끼며, 아직 시간이 멀었는가, 어째 안와 하고 무심히 손목을 굽어볼 때, 일년전에 전당포에 들어간 시계 생각이 문득 났다.

일년전 바로 이때, 학교에 검거가 일어났을 때 다수한 그의 동무들이 령사관으로 잡혀들어가게 되였다. 그런데 날은 추워오고 그들이 홑옷을 입고 들어갔으니 어떻게서라도 솜옷을 만들려고 두루 애쓰다가, 마침내 동무들에게 약간 얻은 돈과 시계를 잡혀 솜옷을 지어 차입해주었던것이다.

그는 이러한 생각을 하며 지금까지도 나오지 못한 동무들을 생각하였다. 그 어두운 감옥에서, 지금쯤은 잠을 자고있을가? 혹은 우리들을 생각하며 그나마 잠도 이루지 못하고있을것인가? 하는 생각과 함께 무어라고 형용 못할 불길이 가슴이 벅차도록 올라온다.

그는 한숨을 푹 쉬며 무심히 정자아래를 굽어보았다. 정자아래로 깔린 련못에는 달빛이 떨어져 유리알같이 빛났다. 그는 나오는줄 모르게 《달밤이구나!》하며 머리를 들었다.

어두컴컴한 수림속으로 약간씩 보이는 저 전등불은 마치 그의 동무들이 이 Y시에 섞여있는듯이 그렇게 드물었다. 그러나 저 불이 마침내 이 공원을 정복할 때가 멀지 않은것 같았다. 어째 안올가 하고 그는 가만히 일어나 정자안을 거닐었다.

멀리 이십오세(마차 이름)가 지나는 말굽소리가 툭탁툭탁 들리며 지르릉지르릉 울리는 종소리가 가늘게 들려온다. 종소리가 끊어진후에, 자박자박 신발소리가 나므로 승호는 얼핏 몸을 숨기며 바라보았다. 저편 수림속으로 아장아장 걸어오는 사람은 확실히 희숙인듯하였다. 그는 맘을 놓고 앞으로 나갔다.

희숙이는 멈칫 섰다가 승호의 기침소리를 듣고야 이편으로 걸어왔다.

《기다리셨어요.》

《네.》

곁으로 오는 희숙의 가는 숨결소리를 들으며 승호는 맘이 푹 놓였다. 그들은 가지런히 란간에 걸터앉았다.

《동무를 나오라고 한것은…》

희숙이는 머리를 번쩍 들며 승호를 똑똑히 바라본다.

《이번 ××회 주최로 열리는 축구대회에 우리 학교도 참가하는것이 좋을듯한데 동무의 의견은 어떠합니까.》

희숙이는 잠잠히 무엇을 생각하는듯하더니

《동무! 표면만이 ××회 주최이지 그 실은 이 Y시안의 온갖 ×들이 주최하는것입니다.》

승호는 말끝을 얼른 받았다.

《네, 잘 압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그들틈에 섞여서 뛰논다더라도 과오만 범치 않으면 됩니다. 그런데 특히 이번에 나가야할 필요를 말하겠습니다… 우리 학교가 작년 검거사건이래 너무나 죽은듯한감이였었습니다. 그래서 이번 출전하는것은 하필 승리를 거두어보겠다는것보다도 우리들의 꺾이지 않은 존재를 대중에게 알려주고자함이외다!》

승호는 기침을 칵 하였다. 그리고 계속하였다.

《지금과 같은 반동기에 있어서는 지배계급의 적극적탄압에 대중이 락망을 하고 비관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의 활동이 어느 면으로나 더욱 게으르지 않아야 합니다.》

희숙이는 작년 이때 검거가 일어났을 때 동무들을 숨겨주느라 밤중에 돌아다니던 기억이 얼핏 떠오르며 그때에 몹시도 얄밉던 저 달이 또 솟았구나! 하고 흘끔 쳐다보았다. 그리고 웬일인지 주위가 그날 밤 같아 휘휘 돌아보았다.

《출전하려면 다소의 경비가 들터인데 그것은 어떻게 할 예정입니까.》

《글쎄요… 그것이 난처합니다. 뻔히 아는바라, 학교에서 날 곳은 없고… 아무래도 동무들이 힘써야지요… 우선 우리들은 이렇게 생각해보았습니다. 우리 동무들 몇몇은 지금 길회설 철도공사 인부로 들어가서 며칠 일하기루요!》

희숙이는 어떤 감격으로 조그만 가슴이 터질듯하였다. 그리고 우리들이 돈 벌것은 없을가 하고 이리저리 생각하다가

《우리들도 좀 어떻게 했으면 좋겠는데요.》

《글쎄요. 저… 이것 해보시렵니까. 이번 축구대회가 열리는 동시에 경마대회까지 열린답니다. 축구장서 바라보이는 바루 정거장 앞벌입니다.》

《네.》

희숙이는 무슨 좋은 벌이자리가 나는가 하여 바짝 곁으로 온다.

《그런데 그곳서 림시녀급을 채용하겠다고 거리에다 광고를 붙였더구먼요. 혹 동무도 보았는지요?》

희숙의 머리에는 경마장이 얼핏 떠오르며 부끄러운 생각이 눈가로 사르르 지나치는것을 느꼈다. 그러나 남동무들이 길회선 철도공사 인부로 나가겠다던 승호의 말을 다시금 생각하였을 때, 오냐 무엇인들 못할것이 뭐냐! 하고 맘을 푹 가라앉히며 승호를 쳐다보았다.

《똑똑히 보셨나요… 참이라면 우리들은 그곳에 운동해보겠습니다! 대체 녀급이란 뭘 어떻게 하는겐지요? 호호.》

이제 자기들이 그 사람 많은 곳에서 녀급으로 행세할것이 우습기도 하고 어찌 생각하면 눈물겨운 장면 같았다.

승호는 희숙의 손이라도 콱 붙들고싶게 고맙고도 다정해보였다. 그리고 그의 몸 전체에서 발산하는 냄새는 확실히 이성을 초월한 동지로서의 믿음직한 냄새였다.

《별게 있겠습니까. 그저 차물이나 부어놓고 혹은 그곳에 오는 손님들에게 길안내 같은것을 하겠지요… 그러면 래일 학우회에서 출전여하문제는 정식으로 결정합시다.》

승호는 말을 마치며 가만히 일어났다. 량 어깨가 딱 바라진 승호를 쳐다보는 희숙이는 새삼스럽게 그의 담력이 뚜렷이 보이는듯했다.

《몇시나 되였을가.》

이렇게 혼자 하는 말처럼 중얼거리며 희숙이도 따라 일어났다.

《아마 퍽이나 오래 되였으리다.》

그들은 정자안을 벗어나 나무그늘로 들어섰다.


며칠후 희숙이와 그의 동무들은 드디여 경마장의 림시녀급으로 채용이 되여 경마장 우편 바라크속에서 경마권증을 팔며 혹은 사람들에게 차물을 날랐다.

용기를 내여 여기에 들어는 왔으나 차완을 들고 손님들앞에 서게 될 때는 차마 얼굴을 들지 못하리만큼 두볼이 화끈거렸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자기들에게만 집중된듯하였다. 그러나 좀 안심되는것은 이 바라크가 사면이 꼭꼭 막혀서 경마장은 보이지 아니함이였다. 그러므로 이 안에 들어오는 손님들만 대할뿐이다.

날씨가 이 북국에서는 얻기 어려운 따뜻한 날씨였다. 밖으로부터 약간의 말똥내를 섞은 먼지가 사람들의 발길에 채여 후끈후끈 들어온다. 그리고 얼마나 사람들이 모였는지 여러 사람의 말소리가 한뭉치가 되여 와와 하고 떠들었다. 그 틈으로 어린애 울음소리만은 버들피리 부는것 같았다.

벨이 즈릉즈릉 운다. 경마권 파는 입구에는 사람들이 들이몰리어 제각기 표를 사려고 덤볐다.

희숙이와 그의 동무들은 차완을 들고 이리 가고 저리 가면서도 마음만은 축구장으로 쉴새없이 달아났다. 이젠 운동이 시작되였나? 우리 선수들이 어느 학교 팀과 시합이 되였나 혹은 되지 않았나? 벌써 골을 먹지 않았나? 하는 불안과 초조로 발길이 허둥거렸다.

밖에서는 사람들이 뛰여가고 뛰여오는 소리가 요란스레 난다. 그때마다 그들은 저 소리가 선수들이 뽈을 다 놓쳐 뛰여오는 신발소리 같다. 가슴이 선뜻해서 한참 멍하니 바라크 벽을 바라보곤 하였다.

그리고 낯선 손님이 들어오면 웬일인지 반가웠다. 막연하게나마 축구장을 거쳐오지 않았는가, 그래서 그가 축구장에 대한 말을 하지 않는가 하여 한참이나 그들을 주시해보곤 하였다. 그러나 그 많은 사람이 들어오고 나가고 하건마는 축구장의 이야기는 한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경마권 파는 입구에는 벌써 지화가 들이몰리여 사무원이 미처 손놀리기가 바쁜 모양이다. 그들은 저 지화를 바라보며 이때까지 느껴보지 못한 어떤 욕심을 부쩍 느꼈다. 저것을 가지면 선수들이 신고싶어하는 축구화도 살수 있고 쌀밥도 해서 배가 부르도록 먹일터인데. 그러면 이번에는 꼭 승리를 할터이지 하며 아침에 조밥을 먹고 출전한 동무들의 그 모양이 애처롭게 떠오른다. 글쎄 조밥을 먹고야 어찌 이긴담! 그 해진 지까다비를 신고야 어찌 뽈을 찬담!

방금 동무들의 발끝에 채여 돌아가는 뽈은 축구화를 신은 적에게 무참히도 빼앗겨 기가 말라 쫓아가는 동무들의 모양이 뚜렷이 보인다. 그들은 가슴이 송구해졌다. 그래서 다시 한번 돈뭉치를 들고 달아나고싶었다. 그러나 그것은 쓸데없는 맘뿐임을 깨달으며 가볍게 한숨을 몰아쉬였다.

벨이 또다시 운다. 경기장에서는 말발굽소리와 함께 사람들의 환호소리가 우뢰같이 일어난다. 그들은 이 소리가 저편 축구장에서 오는 동무들의 힘찬 응원소리 같아서 기운이 버쩍 나는것을 등허리에서 땀이 나도록 느꼈다.

《아이 어쩌면!》

동무 하나가 거의 울듯이 중얼거린다. 그들은 일시에 시선을 마주치고 헤여졌다. 그들의 눈에는 어느덧 눈물이 글썽글썽했다.

이호다! 이호다! 웨치는 소리를 따라 발자취소리가 벼락치듯 난다. 그리고 이십원! 이십원 배당! 하고 목이 말라 고함치는 소리가 이 바라크를 잡아흔드는것 같았다. 저편 배당구에서는 십원짜리 지화가 훨훨 내달아간다. 그들은 물끄러미 이 모양을 바라보며 증오의 불길이 확 일어남을 느꼈다.

오늘 저 축구장에는 세상이 다 죽은것으로 알았던 자기들의 동무가 씩씩한 웅자로 나타나서 맘껏 뽈을 차는데, 그 뽈은 이 Y시 하늘우에 까맣게 높이 떴을터인데, 그 축구장을 지나쳐온 저들! 그 볼을 무심히 바라본 저들! 아아 저들은 과연 자기들과는 딴 인종 같았다. 아니 딴 인종이다!

이렇게 가슴을 졸이며 하루의 사무를 지루하게 마친 그들은 축구장으로 달렸다. 마침 어떤 부인이 마주 오는것을 보자, 그들은 그새가 바빠서

《D학교가 어떻게 되였습니까?》

부인은 그들을 한참이나 돌아보다가

《졌소꼬마! 뽈은 잘 차더구먼도 왜 퍽퍽 꺼꾸러지기를 잘해. 아마 먹지를 잘 못했는지! 아이 그게야 애처로워서 어디 보겠더라구… 저편 선수들은 무엇을 잘 먹이는 모양이두먼. 그냥 운동장에서까지 뭘 자꾸 먹이두먼 그래. 그런데 이편은 랭수만 들이키어. 아이 볼수 없어. 다리를 채어 피가 흐르고 한 학생은 골이 터져서…》

부인은 눈살을 찌푸리며 머리를 흔든다. 그리고 눈에는 눈물이 그득 고인다.

그들은 졌다는 말에 그만 온 전신이 하사분해서 다시 두말도 못하고 멍하니 서있었다.

《학교에 아마 친척이 다니나보우… 나는 친척도 아무것도 다니는것 없으나…》

말끝을 흐리며 머리를 돌리는 부인의 눈에는 선수들의 피나는 다리와 골머리가 확실히 보이는 모양이다.

《어서 가보우. 그리고 위로나 잘해주우.》

그들은 울음이 북받쳐 어쩔줄을 모르다가 부인이 앞을 떠나감을 알았을 때 휘끈 돌아보니 아주 람루한 옷을 입은 부인임을 새삼스럽게 발견하였다.

그들은 순간에 어떤 힘을 불쑥 느끼며 축구장으로 달려왔다. 벌써 동무들은 행렬을 지어 한끝은 시가로 향하였다. 행진곡이 쾅쾅 울린다. 얼핏 바라보니 승호가 기발을 쥐고 앞장섰다. 행진! 그뒤로는 군중이 물밀듯 따라섰다. 마저 넘어가는 해빛에 D학교의 기발은 피같이 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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