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대한역사/제2편 중고
제1장 신라
편집제1절 박혁거세
편집新羅의始祖、朴赫居世ᄂᆞᆫ辰韓人이라爲人이英特、夙成ᄒᆞ거ᄂᆞᆯ六部의人民이立ᄒᆞ야君을삼으니時에年이十三이라國號ᄅᆞᆯ徐羅伐後改新羅이라ᄒᆞ고在位五年에閼英을納ᄒᆞ야妃ᄅᆞᆯ삼으니妃가賢行이有ᄒᆞ야內輔ᄒᆞᄂᆞᆫ지라時人이二聖이라稱ᄒᆞ다時에倭國今、日本이邊境을侵ᄒᆞ다가王이神德이有ᄒᆞ심을聞ᄒᆞ고退還ᄒᆞ니라
신라(新羅)의 시조 박혁거세는 진한(辰韓) 사람이다. 사람됨이 영특하고 조숙하여 6부(六部)의 백성이 추대하여 왕으로 삼으니 그때의 나이가 13세이다. 나라 이름을 서라벌(徐羅伐)【후에 신라로 고침】이라 하고 재위 5년에 알영(閼英)을 맞이하여 왕비로 삼으니 왕비가 어진 행실로 내조하였기 때문에 그 당시 사람들이 ‘두 성인[二聖]’이라 칭하였다. 그때에 왜국(倭國)【지금의 일본(日本)】이 변경을 침략하였다가 왕이 신성한 덕[神德]이 있다는 것을 듣고 물러나 돌아갔다.
제2절 박, 석, 김 3성
편집赫居世의子、南解가王位에在ᄒᆞᆯ時에子、儒理와壻昔脫解에게遺言호ᄃᆡ我가死ᄒᆞᆫ後에朴、昔、兩姓이年長으로써嗣ᄒᆞ라ᄒᆞᆫ故로其後에儒理가位ᄅᆞᆯ脫解에게傳ᄒᆞ얏다가昔助賁에게至ᄒᆞ야其、壻、金味鄒에게傳ᄒᆞ니라
박혁거세(朴赫居世)의 아들 남해(南解)가 왕위에 있을 때에 그의 아들 유리(儒理)와 사위 석탈해(昔脫解)에게 유언을 남겼는데 “내가 죽은 뒤에 박, 석 두 성씨 중 나이가 많은 사람으로 하여금 왕위를 잇도록 하라.”고 하였다. 그러한 까닭에 그 이후로 유리가 왕위를 탈해에게 전하였다가 석조분(昔助賁)에 이르러서 그의 사위 김미추(金味鄒)에게 전하였다.
제3절 처음 연호를 세우다
편집脫解王、時에國號ᄅᆞᆯ鷄林이라ᄒᆞ고智證王、時에新羅라ᄒᆞ고法興王、時에年號ᄅᆞᆯ始建ᄒᆞ야建元이라ᄒᆞ니라
탈해왕(脫解王) 때에 나라 이름을 계림(鷄林)이라 하고 지증왕(智證王) 때에 신라(新羅)라 하고, 법흥왕(法興王) 때에 처음 연호를 세워 건원(建元)이라 하였다.
제4절 박제상이 일본에 들어가다
편집訥祇王、元年에王이日本에爲質ᄒᆞᆫ弟、未斯欣을思ᄒᆞ야朴堤上을日本에遣ᄒᆞ니堤上이詐히叛者가되야日本에入ᄒᆞ야未斯欣을潛還케ᄒᆞ니未斯欣이曰엇지君을捨ᄒᆞ고獨還ᄒᆞ리오堤上이曰王의情을慰安코자ᄒᆞᆯ진ᄃᆡ我ㅣ엇지一命을愛ᄒᆞ리오ᄒᆞ다
눌지왕(訥祗王) 원년(417)에 왕이 일본에 인질로 간 동생 미사흔(未斯欣)을 그리워하여 박제상을 일본으로 보냈다. 박제상이 거짓으로 신라를 배반하고 일본에 들어가 미사흔을 몰래 돌아가게 하였다. 이때 미사흔이 “어찌 자네를 버리고 홀로 돌아가겠는가?”라고 말하니 박제상이 “왕의 심정(心情)을 위안하고자 하는데 제가 어찌 이 한목숨을 아끼겠습니까?”라고 대답하였다.
제5절 계림의 신하이다
편집旣而오日本이未斯欣의亡歸ᄒᆞᆷ을知ᄒᆞ고堤上을鞫問ᄒᆞ니堤上이曰我ᄂᆞᆫ鷄林臣이라吾君의志ᄅᆞᆯ成코자ᄒᆞᆷ이니何必多問고ᄒᆞᆫᄃᆡ日主가怒曰汝가我臣이되얏거ᄂᆞᆯ엇지鷄林의臣이라ᄒᆞ나뇨汝ㅣ日本의臣이되면重祿을賞賜ᄒᆞ리라
마침내 일본(日本)이 미사흔(未斯欣)이 도망하여 돌아간 것을 알고 박제상(朴堤上)을 신문하니 박제상이 “나는 계림의 신하이다. 우리 왕의 뜻을 이루고자 한 것이니 더 이상 묻지 마라.”고 말하였다. 일본 왕이 화를 내며 “네가 우리의 신하가 되었는데 어찌 계림의 신하라고 하는가? 네가 일본의 신하가 되면 후한 녹봉을 상으로 내릴 것이다.”라고 하였다.
제6절 자른 갈대 위를 걷고 달군 쇠덩이 위에 서다
편집堤上이曰吾ㅣ鷄林의犬豕가寧爲언정日本의臣子ᄂᆞᆫ不爲ᄒᆞ며鷄林의箠楚ᄅᆞᆯ寧受언정日本의爵祿은不受ㅣ라ᄒᆞ니日主가益怒ᄒᆞ야堤上의脚을剝ᄒᆞ고蒹葭ᄅᆞᆯ刈ᄒᆞ야其上에趨ᄒᆞ라ᄒᆞ고ᄯᅩ熱鐵上에扶立ᄒᆞ고問호ᄃᆡ鷄林의臣이라ᄒᆞ니日、主가不屈을知ᄒᆞ고燒殺ᄒᆞ다
박제상(朴堤上)이 “내가 계림(鷄林)의 개, 돼지가 될지언정 일본(日本)의 신하는 될 수 없으며 계림으로부터 채찍과 회초리[菙楚]를 받을지언정 일본의 작위와 녹봉은 받을 수 없다.”라고 말하였다. 일본 왕이 더욱 화를 내며 “박제상의 발바닥 가죽을 벗기고 갈대를 베어 그 위를 걷도록 하라.”고 하고, 또한 달군 쇠덩이 위에 세워 놓고서 물었는데도 “계림의 신하이다.”라고 하니 일본 왕이 더 이상 굴복시키지 못할 것을 알고 불태워 죽였다.
제7절 죽죽이 절개를 지키며 죽다
편집善德王、時에百濟兵이新羅ᄅᆞᆯ攻陷ᄒᆞ거ᄂᆞᆯ幢下舍知竹竹이自誓호ᄃᆡ吾父가我ᄅᆞᆯ竹竹이라名ᄒᆞᆷ은我로ᄒᆞ야금歲寒이라도不凋ᄒᆞ라ᄒᆞᆷ이니엇지畏ᄒᆞ야生降ᄒᆞ리오ᄒᆞ고力戰ᄒᆞ야死ᄒᆞ니라
선덕왕(善德王) 때에 백제(百濟)의 병사가 신라를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왕 휘하의 사지(舍知) 벼슬을 하던 죽죽이 스스로 맹세하여 말하기를, “나의 아버지가 나를 ‘죽죽’이라 이름 지으신 것은 내가 한겨울에도 시들지 말라고 한 것이니 어찌 죽기를 두려워하여 살아 항복하겠는가?” 하고 힘껏 싸우다가 죽었다.
제8절 김유신이 백제를 공격하다
편집眞德王、時에百濟가西鄙ᄅᆞᆯ攻陷ᄒᆞ고玉門谷에至ᄒᆞ거ᄂᆞᆯ王이金庾信을遣ᄒᆞ야百濟ᄅᆞᆯ伐ᄒᆞ야二十二城을屠ᄒᆞ고斬首ᄒᆞᆫ者ㅣ二萬餘、級이오捕虜ᄒᆞᆫ者ㅣ九千餘、人이더라
진덕왕(眞德王) 때에 백제(百濟)가 서쪽 마을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옥문곡(玉門谷)에 이르렀다. 왕이 김유신을 보내 백제를 공격하여 22성을 함락시켰다. 목을 벤 자가 2만여 명이고 포로로 잡은 자가 9천여 명이었다.
제9절 소정방이 사죄하다
편집其時에王이唐、支那國에救兵을請ᄒᆞ니唐、帝가將軍蘇定方을命ᄒᆞ야二十萬、軍을率ᄒᆞ고百濟ᄅᆞᆯ共伐ᄒᆞᆯ새蘇定方이兵力을恃ᄒᆞ고金庾信에게無禮ᄒᆞ거ᄂᆞᆯ庾信이怒ᄒᆞ야槍을仗ᄒᆞ고軍門에出立ᄒᆞ니怒髮이上指ᄒᆞ고腰劍이自動ᄒᆞ야定方을擊코자ᄒᆞ거ᄂᆞᆯ定方이大驚ᄒᆞ야庾信의前에跪ᄒᆞ야謝罪ᄒᆞ니庾信이定方으로더부러百濟ᄅᆞᆯ平ᄒᆞ고高句麗ᄅᆞᆯ滅ᄒᆞ야功業이天下에第一이되다後에追封ᄒᆞ야興武大王이라ᄒᆞ다
그때에 왕이 당(唐)나라【지나(支那)】에 구원병을 요청하니 당나라의 황제가 장군 소정방에게 명령하여 20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백제(百濟)를 함께 공격하게 하였다. 이때에 소정방이 병력을 믿고 김유신(金庾信)에게 무례하게 하였다. 이에 김유신이 화를 내며 창을 부여잡고 군문(軍門)에 나와 서니, 진노하여 머리카락이 위로 치솟고 허리에 찬 검이 스스로 움직여서 소정방을 치려고 하였다. 소정방이 크게 놀라서 김유신의 앞에 무릎을 꿇고 사죄하니, 김유신이 소정방과 함께 백제를 평정하고 고구려(高句麗)를 멸망시켜 그의 공적이 천하제일이 되었다. 이후에 추봉(追封)되어 흥무 대왕(興武大王)이라 하였다.
제10절 신라가 통일하다
편집文武王이卽位、八年에高句麗、王의外孫、安勝을冊封ᄒᆞ야高句麗王을삼고其地ᄅᆞᆯ取ᄒᆞ며十年에百濟의土地ᄅᆞᆯ取ᄒᆞ야三國을統一ᄒᆞ고十五年에王이唐將、薛仁貴로더부러二十餘戰에다勝捷ᄒᆞ고四十餘級을斬ᄒᆞ니自此로唐兵이復至치못ᄒᆞ더라王이其、祖廟에獻俘ᄒᆞ며功臣을爵賞ᄒᆞ며國內에大赦ᄒᆞ니라
문무왕(文武王) 즉위 8년(668)에 고구려(高句麗) 왕의 외손 안승(安勝)을 책봉하여 고구려 왕으로 삼고 그 땅을 취하였다. 문무왕 10년(670)에 백제(百濟)의 영토를 취하여 삼국을 통일하였다. 문무왕 15년(675)에 왕이 당(唐)나라 장수 설인귀(薛仁貴)와 함께 20여 차례 전투를 벌여 승리하고 40여 명의 목을 베었으므로 이때부터 당나라 군대가 다시 이르지 못하였다. 왕이 선대 왕의 묘당[祖廟]에 승리를 고하고 공신들에게 벼슬과 상을 내렸으며, 나라 안의 죄수들을 특별 사면하였다.
제11절 국학을 세우고 공자상을 모시다
편집神文王、元年에國學을立ᄒᆞ야禮部에屬ᄒᆞ다聖德王、十五年、秋九月에王子、守忠이唐으로부터回ᄒᆞ야文宣王十哲、七十二弟子、의畫像을上ᄒᆞᆫᄃᆡ命ᄒᆞ야太學에奉ᄒᆞ다
신문왕(神文王) 원년(681)에 국학을 세워서 예부(禮部)에 두었다. 성덕왕(聖德王) 15년(716) 가을 9월에 왕자 수충(守忠)이 당(唐)나라에서 돌아와 문선왕(文宣王) 10철(十哲) 72제자의 화상(畵像)을 바치니, 왕이 명령하여 태학(太學)에 모시도록 하였다.
제12절 설총에게 기이한 이야기를 청하다
편집神文王、十一年에王이燕居ᄒᆞᆯ새薛聰을引ᄒᆞ야謂曰、今日에宿雨가初歇ᄒᆞ고薰風이微凉ᄒᆞ니談謔으로舒鬱ᄒᆞᆷ이可ᄒᆞ니子ᄂᆞᆫ我ᄅᆞᆯ爲ᄒᆞ야異聞을陳ᄒᆞ라
신문왕(神文王) 11년(691)에 왕이 한가로이 계실 때에 설총을 불러서 이르기를, “오늘에야 여러 날을 계속해서 내리던 비가 개이고 훈훈하던 바람도 약간 서늘하니, 재미있는 농담으로 답답함을 펴고자 한다. 그대가 나를 위해 기이한 이야기를 해 보라.”라고 하였다.
제13절 꽃의 왕 당춘
편집聰이對曰臣은聞호니花王이三春을當ᄒᆞ야發艶ᄒᆞᆷᄋᆡ百花ᄅᆞᆯ凌ᄒᆞ야獨出ᄒᆞ거ᄂᆞᆯ艶艶의靈과夭夭의英이奔走、上謁ᄒᆞᆯ새一、佳人이有ᄒᆞ니名曰薔薇라朱顔、鮮糚으로伶俜히來ᄒᆞ며綽約히前ᄒᆞ야曰妾이雪白의沙汀을履ᄒᆞ며鏡淸의江海ᄅᆞᆯ對ᄒᆞ더니王의令德을聞ᄒᆞ고香帷에薦키ᄅᆞᆯ願ᄒᆞ노이다
설총(薛聰)이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신이 들으니 꽃의 왕이 세 번의 봄을 맞이하여 곱게 꽃을 피웠는데 온갖 꽃을 능가하여 홀로 돋보이니 아름다운 정령과 어린 꽃들이 바삐 꽃의 왕을 찾아가 뵈었습니다. 그때 한 아리따운 여인이 있었는데 이름을 장미라 하였습니다. 붉은 얼굴을 곱게 꾸미고 요염하게 걸어와 가냘프고 아름답게 다가오며 ‘소첩이 눈처럼 하얀 바닷가의 모래밭을 밟으며 거울같이 맑은 바다를 바라보았는데 왕의 아름다운 덕을 듣고는 향기로운 휘장에서 모시기를 원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제14절 백두옹
편집一丈夫가有ᄒᆞ니名曰白頭翁이라布衣、韋帶로龍鍾히步ᄒᆞ며傴僂히來ᄒᆞ야曰蒼茫ᄒᆞᆫ野景을臨ᄒᆞ고嵯峨ᄒᆞᆫ山色을倚ᄒᆞ더니竊謂호ᄃᆡ左右의供給은膏梁이足ᄒᆞ나巾衍의貯藏은良藥이須有ᄒᆞ니王은有意ᄒᆞ시니잇가
한 남자가 있었는데 이름이 백두옹입니다. 베옷에 가죽띠를 하고 피곤한 걸음으로 걸으며 등을 구부리고 다가와서는 ‘넓고도 먼 아득한 들판을 바라보고 높고도 험한 산세에 기대었더니, 생각해 보건데 좌우에서 제공하는 고량진미(膏粱珍味)는 만족스럽지만, 농과 상자 속에 보관된 것 중에는 좋은 약이 반드시 있을 것이니 왕께서는 어떠하십니까?’라고 하였습니다.
제15절 노성을 가까이하다
편집花王이曰大丈夫의言이有理ᄒᆞ나佳人을得키難ᄒᆞ도다丈夫曰自古로人君이老成을親近ᄒᆞ야興ᄒᆞ고夭艶을昵比ᄒᆞ야亡ᄒᆞᄂᆞ니吾、其、柰何오花王이謝曰吾가過誤로다ᄒᆞ얏나이다ᄒᆞᆫᄃᆡ王이愀然曰子의寓言이深切ᄒᆞ다ᄒᆞ고聰을擢ᄒᆞ야高秩官을삼다聰의字ᄂᆞᆫ聰智니明銳ᄒᆞ고博學ᄒᆞ야方言으로써九經을解釋ᄒᆞ고俚語로吏讀를製ᄒᆞ니라
꽃의 왕이 ‘그 남자의 말에 일리가 있으나 아름다운 여인을 얻는 것도 어렵도다.’라고 말하였습니다. 그 사내가 대답하기를 ‘예부터 왕이 노성을 가까이하면 흥하고 요염을 가까이하여 좇으면 망하였으니 제가 어찌해야 하겠습니까?’라고 하니 꽃의 왕이 사죄하면서 ‘내가 잘못하였다.’라고 하였습니다.” [설총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 왕이 근심하며 “그대의 풍자[寓言]는 매우 간절하다.”라고 말하고 설총(薛聰)을 발탁하여 높은 관직을 주었다. 설총의 자(字)는 총지(聰智)이니, 명석하고 분명하며 박학(博學)해서 우리나라 말[方言]로 9경(九經)을 해석하고, 일상의 언어[俚言]로 이두(吏讀)를 만들었다.
제16절 처음 출신과를 제정하다
편집元聖王、三年、春에讀書、出身科ᄅᆞᆯ始定ᄒᆞ다先是에射로써人을選ᄒᆞ더니至是ᄒᆞ야五經과三史等으로써選ᄒᆞ다
원성왕(元聖王) 3년(787) 봄에 독서출신과(讀書出身科)를 처음 제정하였다. 이전에는 활 쏘는 것으로 인재를 선발하였으나, 이때에 와서 5경(五經)과 3사(三史) 등으로 선발하였다.
제17절 녹진이 병을 치료하다
편집憲德王、十三年、春에王이無嗣ᄒᆞ야母弟、秀宗으로太弟ᄅᆞᆯ삼다時에上大等、忠恭이內外官을擬注ᄒᆞᆯ새請托이還至ᄒᆞ거ᄂᆞᆯ忠恭이憂疑、感疾ᄒᆞ얏더니執事侍郞、祿眞이請見、曰公의病은砭石을不須ᄒᆞ고오작一言으로써醫病코자ᄒᆞ노라
헌덕왕(憲德王) 13년(821) 봄에 왕이 후사가 없어서 친동생 수종(秀宗)을 태제(太弟)로 삼았다. 이때에 상대등(上大等) 충공(忠恭)이 내외 관직을 왕에게 추천할 때에 청탁이 쇄도하여서 충공이 근심하고 의심하여 병이 생겼다. 그러자 집사 시랑(執事侍郞) 녹진이 찾아와서 말하기를, “공의 병은 돌침[砭石]으로는 치료할 수 없고 오직 한마디 말로써 병을 치료하고자 합니다.”라고 하였다.
제18절 뇌물을 막고 청탁을 끊다
편집大抵、貨賂의門을杜ᄒᆞ고請托의路ᄅᆞᆯ絶ᄒᆞ야黜陟과予奪을愛憎으로써아니ᄒᆞ면開閤ᄒᆞ고談笑ᄒᆞ야도可ᄒᆞ거ᄂᆞᆯ엇지區區히藥餌ᄅᆞᆯ服ᄒᆞ리오忠恭이悅ᄒᆞ야王ᄭᅴ入陳ᄒᆞᆫᄃᆡ太弟、聞ᄒᆞ고入賀ᄒᆞ야曰君明ᄒᆞ면臣直ᄒᆞ나니此ᄂᆞᆫ國家의美事로소이다ᄒᆞ더라
“대체로 뇌물이 들어오는 문을 막고 청탁하는 길을 끊어 버려서, 등용하고 내치는 것과 관직을 주고 빼앗는 것을 사랑과 미움으로 하지 않으면 문을 활짝 열고 웃으며 이야기해도 좋을 것인데, 어찌 구차스럽게 약물만을 복용하십니까?”라고 하니 충공(忠恭)이 기뻐하며 왕에게 크게 깨친 것을 아뢰었다. 이때 태제(太弟)가 이를 듣고 치하하여 말하기를, “왕이 현명하면 신하가 정직하니 이는 국가의 아름다운 일입니다.”라고 하였다.
제19절 응렴이 착한 사람 3명을 만나다
편집憲安王、三年、秋에王이群臣으로宴ᄒᆞᆯ새王族、膺廉의年이十五라王이問曰汝가遊學ᄒᆞᆷᄋᆡ善人을得見ᄒᆞ얏ᄂᆞᆫ야對曰臣이三人을見ᄒᆞ니一은勳閥의子弟로ᄃᆡ人에게讓ᄒᆞ야自下ᄒᆞ고一은家富호ᄃᆡ被服이不侈ᄒᆞ고一은勢榮호ᄃᆡ驕氣가不形ᄒᆞ더이다王이王后다려語ᄒᆞ야曰朕이閱人이多호ᄃᆡ膺廉과如ᄒᆞᆫ者ㅣ無ᄒᆞ다ᄒᆞ더니後에景文王이되니라
헌안왕(憲安王) 3년(859) 가을에 왕이 신하들과 함께 잔치를 열었다. 그때 왕족 응렴의 나이가 15세였다. 왕이 묻기를, “네가 각지를 돌아다니며 배울 적에 착한 사람을 만나보았는가?”라고 하였다. 대답하여 말하기를, “신이 세 사람을 만났는데 한 사람은 공훈이 있는 귀족의 자제임에도 남에게 겸손하여 스스로를 낮추고, 또 한 사람은 집안이 부유함에도 옷을 사치스럽지 않게 입고, 한 사람은 세력이 강한데도 교만한 기운이 나타나지 않습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왕후에게 말하기를, “짐이 많은 사람을 보아 왔으나 응렴과 같은 자가 없었다.”라고 하였다. 나중에 응렴은 경문왕(景文王)이 되었다.
제20절 최치원이 유학하다
편집憲康王、時에崔致遠이年十二에海舶을隨ᄒᆞ야唐에遊學ᄒᆞ다가十八에登第ᄒᆞ야侍御史가되얏더니時에黃巢가叛ᄒᆞ거ᄂᆞᆯ高騈의從事가되야巢ᄅᆞᆯ討ᄒᆞᄂᆞᆫ檄文을作ᄒᆞ니曰不惟、天下之人이皆思顯戮이라抑亦、地中之鬼가已議陰誅라ᄒᆞ니라
헌강왕(憲康王) 때에 최치원이 12세에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당(唐)나라에 유학하였다가 18세에 과거에 급제하여 시어사(侍御史)가 되었다. 그때에 황소(黃巢)가 반란을 일으켰는데, 고병(高騈)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어 황소를 토벌하는 격문(檄文)을 지어서 말하기를, “천하의 사람들이 모두 너를 죽이려 생각할 뿐 아니라, 문득 땅속의 귀신도 이미 몰래 너를 죽이기로 의논하였다.”라고 하였다.
제21절 격문을 보고 평상에서 떨어지다
편집巢가檄文을見ᄒᆞ고牀에下ᄒᆞᆷ을不覺ᄒᆞ니自此로其名이天下에振ᄒᆞᆫ지라至是에還ᄒᆞ니年이二十八이라王이侍讀、兼翰林學士ᄅᆞᆯ삼으니致遠이所蘊을展코자ᄒᆞ되衰季에疑忌가多ᄒᆞᆷ으로出ᄒᆞ야太山、富城、等郡、太守가되니라
황소(黃巢)가 격문(檄文)을 보고는 자기도 모르게 평상에서 떨어졌다. 그때부터 최치원(崔致遠)의 이름이 천하에 널리 알려졌다. 이때에 이르러 신라(新羅)로 돌아오니 나이가 28세였다. 왕이 시독 겸 한림학사(侍讀兼翰林學士)로 삼았다. 최치원은 그동안 쌓아 온 것을 펼치고자 하였으나, 나라가 쇠퇴한 시기에 의심과 시기가 많았으므로 외지로 나아가 태산(泰山), 부성(富城) 등지 군(郡)의 태수(太守)가 되었다.
제22절 산수에서 생을 마치다
편집定康王、七年에致遠이時務策、十餘條ᄅᆞᆯ進ᄒᆞᆫᄃᆡ王이嘉納ᄒᆞ고阿飡을삼으니致遠이亂世ᄅᆞᆯ自傷ᄒᆞ야山水間에放浪ᄒᆞ니라孝恭王時에致遠이王建의作興ᄒᆞᆷ을聞ᄒᆞ고書ᄅᆞᆯ致ᄒᆞ고家ᄅᆞᆯ絜ᄒᆞ야伽倻山、海印寺에隱ᄒᆞ야終老ᄒᆞᆯ새四六集과桂苑筆耕等書ᄅᆞᆯ著有ᄒᆞ니라
진성왕(眞聖王) 8년(894)에 최치원(崔致遠)이 시무책(時務策) 10여 조를 올렸다. 왕이 기쁘게 받아들이고 아찬(阿飡)으로 삼았으나, 최치원이 어지러운 세상을 자학하여 산수를 벗하며 방랑하였다. 효공왕(孝恭王) 때에 최치원이 왕건(王建)의 시세(時勢)가 일어나는 것을 듣고 글을 보내고서는 가족을 데리고 가야산(伽倻山) 해인사(海印寺)에 은둔하여 생을 마쳤다. 『사륙집(四六集)』과 『계원필경(桂苑筆耕)』 등의 책을 남겼다.
제23절 신라가 고립되어 위기를 맞다
편집眞聖王、四年에梁吉은北原今、原州에셔叛ᄒᆞ고弓裔憲安王、庶子ᄂᆞᆫ叛ᄒᆞ야梁吉에게附ᄒᆞ고箕萱은竹州今竹山에셔叛ᄒᆞ고五年에甄萱은叛ᄒᆞ야完山에據ᄒᆞ다
진성왕(眞聖王) 4년(890)에 양길(梁吉)은 북원(北元)【지금의 원주(原州)】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궁예(弓裔)【헌안왕(憲安王)의 서자】 또한 반란을 일으켜 양길에게 붙었고, 기훤(箕萱)은 죽주(竹州)【지금의 죽산(竹山)】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진성왕 5년(891)에 견훤(甄萱)이 반란을 일으켜 완산(完山)에 웅거하였다.
제24절 송악에 성을 쌓다
편집孝恭王、元年에弓裔가松嶽城을修築ᄒᆞ고王建으로精騎大將軍을삼다八年에甑城今、甑山에赤衣、黃衣、賊等이弓裔에게降ᄒᆞ다十四年에弓裔가國號ᄅᆞᆯ泰封이라ᄒᆞ다景明王、元年에泰封의諸將이弓裔의暴虐無道ᄒᆞᆷ을見ᄒᆞ고王建을立ᄒᆞ야高麗王을삼으니弓裔가走ᄒᆞ야死ᄒᆞ니라敬順王、八年、冬十月에王이國勢의孤弱ᄒᆞᆷ을見ᄒᆞ고曰孤危ᄒᆞᆷ이如此ᄒᆞ니吾ᄂᆞᆫ無辜ᄒᆞᆫ民으로ᄒᆞ야금肝腦、塗地ᄒᆞᆷ을不忍ᄒᆞ노라ᄒᆞ고高麗에降ᄒᆞ니라
효공왕(孝恭王) 원년(897)에 궁예(弓裔)가 송악성(松嶽城)을 고쳐 쌓고 왕건(王建)을 정기대장군(精騎大將軍)으로 삼았다. 효공왕 8년(904)에 증성(甑城)【지금의 증산(甑山)】의 적의적(赤衣賊), 황의적(黃衣賊) 등이 궁예에게 항복하였다. 효공왕 14년(910)에 궁예가 나라 이름을 태봉(泰封)이라고 하였다. 경명왕(景明王) 원년(917)에 태봉의 모든 장수가 궁예의 포학무도함을 보고 왕건을 옹립하여 고려(高麗) 왕으로 삼으니 궁예가 쫓겨나 죽었다. 경순왕(敬順王) 8년(934) 겨울 10월에 왕이 나라의 형세가 외롭고 약해졌음을 알고 말하기를, “고립되고 위태로움이 이와 같으니, 나는 무고한 백성이 나라를 위해 죽음을 맞이하도록 할 수가 없다.”고 하고 고려에 항복하였다.
제25절 나라가 보존되고 멸망하는 것은 천명이다
편집王子失名ㅣ諫ᄒᆞ야曰國의存亡은天命이自有ᄒᆞ니맛당이忠臣과義士로더부러以死自守ᄒᆞ다가力盡ᄒᆞᆫ後에已ᄒᆞᄀᆡᆺ거ᄂᆞᆯ엇지一千年、社稷으로써一朝에輕히與人ᄒᆞ리오王이不聽ᄒᆞ니王子ㅣ痛哭ᄒᆞ야王ᄭᅴ永辭ᄒᆞ고金剛山에入ᄒᆞ야巖을倚ᄒᆞ야屋을搆ᄒᆞ고麻衣、草食으로써其身을終ᄒᆞ니라
왕자【이름을 알 수 없다.】가 간언하기를, “나라의 존망은 분명 천명이 있겠으나, 충직한 신하와 의로운 선비들과 함께 죽음으로써 스스로 지키다가 힘이 다한 후에야 그만두어야 합니다. 그런데 어찌 1천년 사직(社稷)을 하루아침에 가벼이 남에게 주겠습니까?”라고 하였으나 왕이 듣지 않았다. 왕자가 통곡하며 왕에게 영원히 이별할 것을 고하고 금강산(金剛山)에 들어가서 바위에 의지하여 집을 얽어 만들고 삼베옷과 나물 음식으로 살다가 생을 마감하였다.
제26절 신라가 왕업을 누린 햇수
편집高麗王이王을封ᄒᆞ야樂浪王、政丞을삼으니新羅가遂亡ᄒᆞ다新羅가五十六世ᄅᆞᆯ傳ᄒᆞ니朴氏十王이오昔氏八王이오金氏三十七王이며三國이鼎立ᄒᆞᆯ時에二十九王이繼承ᄒᆞ고三國을統一ᄒᆞᆫ後에二十七王이繼統ᄒᆞ야共歷年이九百九十二年이더라
고려(高麗) 왕이 [경순왕을] 왕으로 봉해서 낙랑왕(樂浪王) 정승(政丞)으로 삼으니 신라(新羅)가 마침내 망했다. 신라는 56대를 이어 왔는데 박씨가 10왕이고 석씨가 8왕이요 김씨가 37왕이다. 삼국이 정립할 때에 29왕이 계승하고 삼국을 통일한 후에 27왕을 계승하여 모두 왕업을 누린 햇수가 992년이었다.
제2장 고구려
편집제1절 동명왕
편집高句麗、始祖、高朱蒙은北扶餘의王、解夫婁의孫이오金蛙의子ㅣ니곳檀君의遺種이라骨表가英偉ᄒᆞ고年이七歲에弓矢ᄅᆞᆯ自作ᄒᆞ야百發百中ᄒᆞ니兄弟、七人이其能을忌ᄒᆞ야殺코자ᄒᆞᄂᆞᆫ지라
고구려(高句麗) 시조 고주몽(高朱蒙)은 북부여(北扶餘)의 왕 해부루(解夫婁)의 손자이고 금와(金蛙)의 아들이니 곧 단군(檀君)의 후손이다. 골격과 풍채가 영특하고 위대하며 나이 7세에 활과 화살을 직접 만들어서 백발백중(百發百中)하니 형제 7명이 그의 재능을 시기하여 죽이려고 하였다.
제2절 고주몽이 부여의 왕위를 계승하다
편집朱蒙이難을逃ᄒᆞ야卒本、扶餘今、鴨綠北에至ᄒᆞ니時年이二十이라扶餘王이無子ᄒᆞ야朱蒙을見ᄒᆞ고女로써妻ᄒᆞ얏다가扶餘王이薨ᄒᆞᆷ애朱蒙이嗣位ᄒᆞ니是가東明王이라
고주몽이 난을 피하여 졸본부여(卒本扶餘)【지금의 압록강(鴨綠江) 북쪽】에 이르니 그때 나이가 20세였다. 부여 왕이 아들이 없어서 주몽을 맞이하여 딸을 시집보냈다. 부여 왕이 돌아가시자[薨] 주몽이 왕위를 이으니 그가 바로 동명왕(東明王)이다.
제3절 유리왕이 처음 고구려를 칭하다
편집王의子琉璃王時에漢의高句麗縣을襲取ᄒᆞ야國號ᄅᆞᆯ高句麗라ᄒᆞ고因ᄒᆞ야高로써姓ᄒᆞ고國境을廣拓ᄒᆞ니北은扶餘와眞蕃과玄菟오南으로貝南과漢北을占踞ᄒᆞ고後에平壤에移都ᄒᆞ야揖讓의禮가有ᄒᆞ며衣冠은白色을崇尙ᄒᆞ더라
동명왕(東明王)의 아들 유리왕 때에 한(漢)나라의 고구려현(高句麗縣)을 습격하여 점령하고 나라 이름을 고구려라 하고 그에 따라 성씨를 고(高)로 하였다. 국경을 넓게 개척하여 북쪽으로는 부여(扶餘)와 진번(眞藩), 현도(玄菟)를 복속시키고, 남쪽으로는 패수(貝水)의 남쪽과 한강(漢江)의 북쪽을 점령하고, 이후 평양(平壤)으로 도읍을 옮겼다. 겸손하게 사양하는 예가 있으며 의관(衣冠)은 흰색을 숭상하였다.
제4절 광개토왕
편집廣開土、王、五年에燕을伐ᄒᆞ야遼東城을取ᄒᆞ고十一年에將을遣ᄒᆞ야燕을攻ᄒᆞ야遼東과玄菟의地ᄅᆞᆯ盡有ᄒᆞ니東西가數千里러라
광개토왕 5년(395)에 연(燕)나라를 정벌하여 요동성(遼東城)을 얻었다. 광개토왕 11년(401)에 장수를 보내 연나라를 공격하여 요동과 현도(玄菟)의 땅을 모두 점령하니 동서가 수천 리(里)였다.
제5절 을지문덕
편집嬰陽王、時에隋、支那帝楊廣이大兵을率ᄒᆞ고來攻ᄒᆞ거ᄂᆞᆯ王이乙支文德을遣ᄒᆞ야迎擊、大破ᄒᆞ니隋帝가天下兵、一百二十萬을發ᄒᆞ야九道로出ᄒᆞ야平壤에總集코자ᄒᆞᆯ새旌旗ᄂᆞᆫ九百六十里에亘ᄒᆞ고鼓角、喊聲이相聞ᄒᆞ더라
영양왕(嬰陽王) 때에 수(隋)나라【지나(支那)】 황제 양광(楊廣)이 대군을 이끌고 와서 공격하니 왕이 을지문덕을 보내 맞서 싸우게 하여 크게 무찔렀다. 수나라 황제가 휘하의 병사 120만을 소집하여 아홉 갈래의 길로 출정시켜 평양(平壤)에 총 집결하고자 할 때에 깃발이 960리에 이어졌고 북과 나팔, 함성이 마주 들렸다고 하였다.
제6절 반쯤 건너자 후미를 공격하다
편집乙支文德이隋兵을疲케ᄒᆞ고자ᄒᆞ야每、交戰에문득退走ᄒᆞ니隋兵이一日에驟勝ᄒᆞ야東으로薩水ᄅᆞᆯ濟ᄒᆞ야平壤으로去ᄒᆞᆯ새軍이半渡에文德이尾擊大破ᄒᆞ니將卒이戰死、潰散ᄒᆞ야一日、一夜에鴨綠江에至ᄒᆞ니里數가四百五十里라隋軍이來時에一百二十萬이라ᄒᆞ더니生還ᄒᆞᆫ者ㅣ二千七百人이더라
을지문덕(乙支文德)이 수(隋)나라 병사를 지치게 하기 위해 매일 전투를 벌이다 문득 퇴각하자, 하루는 수나라 병사가 승리를 거듭하며 동쪽으로 살수(薩水)를 건너 평양(平壤)으로 가려고 하였다. 이때 군대가 절반 정도 건너가자 을지문덕이 후미를 공격하여 크게 무찔렀다. 장수와 병졸들이 전사하거나 흩어져서 하루 낮, 하루 밤에 압록강(鴨綠江)에 도달하니 그 거리가 450리였다. 수나라 군대가 올 때는 120만이었는데 살아서 돌아간 자가 2천 7백 명이었다.
제7절 당나라가 안시성을 포위하다
편집寶藏王、時에唐帝、李世民이三十萬軍을率ᄒᆞ고高句麗、安市城【在、遼東】을攻ᄒᆞᆯ새定州에至ᄒᆞ야侍臣다려謂호ᄃᆡ隋氏가四次ᄅᆞᆯ高句麗에出師호ᄃᆡ다大敗ᄒᆞ얏스니朕이今에其讎ᄅᆞᆯ報雪ᄒᆞ리라ᄒᆞ고弓矢ᄅᆞᆯ親히佩ᄒᆞ고雨衣ᄅᆞᆯ鞍後에結ᄒᆞ고遼水에歸橋ᄅᆞᆯ斷ᄒᆞ야必死ᄒᆞᆯ心을示ᄒᆞ고安市城을攻圍ᄒᆞ다
보장왕(寶藏王) 때에 당나라 황제 이세민(李世民)이 30만 군사를 이끌고 고구려(高句麗) 안시성【요동(遼東)에 있다.】을 공격할 때 정주(定州)에 이르러서 곁의 신하에게 말하기를, “수(隋)나라가 네 차례나 고구려에 출정하였으나 크게 패하였으니, 짐이 지금 그 원수를 갚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직접 화살을 차고 우비를 안장 뒤편에 매달고 요수(遼水)로 돌아갈 다리를 끊어 죽음을 각오한 마음을 보이고 안시성을 포위하여 공격하였다.
제8절 양만춘(楊萬春)이 이세민(李世民)을 화살로 쏘다
편집安市城主楊萬春이城門을堅閉ᄒᆞ고弓箭手로ᄒᆞ야금世民의目을射ᄒᆞ야中ᄒᆞ니世民이傷目ᄒᆞ고臥牀、回軍ᄒᆞᆯ새嘆曰、魏徵이若在ᄒᆞ면吾ㅣ엇지此行이有ᄒᆞ리오ᄒᆞ더라
안시성(安市城) 성주(城主) 양만춘이 성문을 견고하게 막고 궁수들에게 이세민의 눈을 쏘게 하여 명중시켰다. 이에 이세민이 눈에 부상을 입고 평상에 누워 군사를 돌이킬 때에 한탄하여 말하기를, “만약 위징(魏徵)이 있었다면 내가 어찌 이와 같은 원정을 감행했겠는가?”라고 하였다.
제9절 골품으로 인재를 등용하여 설계두를 잃다
편집新羅人薛罽頭가常曰我國의用人ᄒᆞᆷ이骨品을論ᄒᆞ야其族이아니면비록鴻才、傑功이有ᄒᆞ야도能히振發치못ᄒᆞ니我ㅣ他國에遊ᄒᆞ야不世의雄略을奮ᄒᆞ고非常ᄒᆞᆫ功業을立ᄒᆞ리라ᄒᆞ더니世民에게自薦ᄒᆞ야臨陣先鬪ᄒᆞ다
신라(新羅) 사람 설계두가 항상 말하기를, “우리나라의 인재 등용이 골품을 따져서 그 족속이 아니면 비록 큰 재주와 뛰어난 공이 있어도 떨쳐 나아가지 못하니 내가 다른 나라에 가서 세상에 없는 웅대한 지략을 떨치고 비상한 공적을 세울 것이다.”라고 하였다. 결국 이세민(李世民)에게 자신을 천거하여 전쟁터에 나아가 앞장서서 싸웠다.
제10절 문벌로 인재를 등용하여 설인귀를 잃다
편집薛仁貴ᄂᆞᆫ遼東人이라驍勇으로써世上에聞ᄒᆞ더니밋麗人이門地로써用人ᄒᆞᆷ애見用치못ᄒᆞᆷ을忿歎ᄒᆞ야唐에入ᄒᆞ야世民에게信任ᄒᆞᆫ바ㅣ되야畢竟에麗軍을破ᄒᆞ니라
설인귀는 요동(遼東) 사람이다. 날쌔고 용맹하기로 세상에 소문이 났었는데 고구려(高句麗) 사람들이 문벌로써 사람을 등용하였기 때문에 등용되지 못하여 분노하고 한탄하였다. 당(唐)나라에 들어가 이세민(李世民)에게 신임을 얻어 마침내 고구려군을 무찔렀다.
제11절 고구려 왕이 포로로 잡히다
편집寶藏王、二十六年、秋九月에新羅王이唐兵을合ᄒᆞ야平壤城을攻拔ᄒᆞ고王이唐將에게被執ᄒᆞ니高句麗가遂亡ᄒᆞᆫ지라二十八世ᄅᆞᆯ傳ᄒᆞ고七百五年을歷ᄒᆞ니라
보장왕(寶藏王) 27년(668) 가을 9월에 신라(新羅) 왕이 당(唐)나라 군대와 연합하여 평양성(平壤城)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고구려(高句麗) 왕이 당나라 장수에게 포로로 잡히니 고구려가 마침내 멸망하였다. 고구려는 28대의 왕업을 전하였고 705년을 이어 왔다.
제3장 백제
편집제1절 온조왕
편집百濟、始祖、高溫祚ㅣ立ᄒᆞ니是가溫祚王이라高句麗、始祖、東明王이卒本扶餘로逃難ᄒᆞ야扶餘主의第二女ᄅᆞᆯ娶ᄒᆞ고其王位ᄅᆞᆯ繼ᄒᆞ야二子ᄅᆞᆯ生ᄒᆞ니長은沸流오次ᄂᆞᆫ溫祚ㅣ라
백제(百濟) 시조 고온조(高溫祚)가 왕위에 오르니 그가 온조왕이다. 고구려(高句麗) 시조 동명왕(東明王)이 졸본부여(卒本扶餘)로 난을 피해 와서 부여 왕의 둘째 딸을 아내로 맞이하고, 왕위를 계승하여 아들 둘을 낳으니 첫째가 비류(沸流)고 둘째가 온조다.
제2절 비류 형제가 남쪽으로 도망치다
편집先是에東明王이東扶餘에在ᄒᆞᆯ時에禮氏ᄅᆞᆯ娶ᄒᆞ야類利ᄅᆞᆯ生ᄒᆞ얏더니後에類利가卒本에至ᄒᆞᆫᄃᆡ王이大喜ᄒᆞ야太子ᄅᆞᆯ삼으니沸流、兄弟가太子에게不容ᄒᆞᆯ가恐ᄒᆞ야烏干、等十人을다리고南遁ᄒᆞ야沸流ᄂᆞᆫ彌鄒今、仁川에居ᄒᆞ고溫祚ᄂᆞᆫ慰禮城今、稷山에定都ᄒᆞ다
이에 앞서 동명왕(東明王)이 동부여(東扶餘)에 있을 때에 예씨(禮氏)를 아내로 맞이하여 유리(類利)를 낳았다. 나중에 유리가 졸본부여(卒本扶餘)에 이르자 왕이 크게 기뻐하여 태자로 삼았다. 비류 형제가 태자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을까 두려워하여 오간(烏干) 등 10명을 데리고 남쪽을 돌아다니다가, 비류는 미추(彌鄒)【지금의 인천(仁川)】에 정착하고, 온조(溫祚)는 위례성(慰禮城)【지금의 직산(稷山)】에 도읍을 정하였다.
제3절 십제를 백제로 고쳐 부르다
편집溫祚가十臣으로써國을輔ᄒᆞ야國號ᄅᆞᆯ十濟라ᄒᆞ더니沸流가彌鄒의土濕、水醎ᄒᆞᆷ으로安居치못ᄒᆞ고慰禮에來ᄒᆞ야都邑과人民의安定ᄒᆞᆷ을見ᄒᆞ고恚忿ᄒᆞ야死ᄒᆞ니其臣民이慰禮城으로皆、歸ᄒᆞ거ᄂᆞᆯ國號ᄅᆞᆯ百濟라改、稱ᄒᆞ고其、系가高句麗로더부러扶餘에셔同出ᄒᆞᆫ故로扶餘氏라稱ᄒᆞ니라
온조(溫祚)가 10명의 신하에게 나라를 돕도록 하여 나라 이름을 십제라고 하였다. 비류(沸流)가 미추(彌鄒)의 땅이 습하고 물이 짜서 편안하게 지내지 못할 것으로 여겨 위례(慰禮)로 왔는데, 도읍과 백성이 편안하게 지내는 것을 보고 화를 참지 못하고 죽었다. 그의 신하와 백성이 위례성으로 모두 귀의하니 나라 이름을 백제(百濟)라 고쳐 부르고, 그 가계(家系)가 고구려(高句麗)와 함께 부여에서 함께 나왔으므로 부여씨(扶餘氏)라고 칭하였다.
제4절 마한을 습격하여 얻다
편집溫祚王二十六年、秋에王이諸將과議論ᄒᆞ야曰、馬韓이漸漸疲弱ᄒᆞ야上下、離心ᄒᆞ니만일他人의倂呑ᄒᆞᆫ바ㅣ되면唇亡、齒寒이라後悔、莫及ᄒᆞ리니我ㅣ先取ᄒᆞᆷ이可타ᄒᆞ고冬十月에出獵ᄒᆞᆫ다稱ᄒᆞ고潛師、掩襲ᄒᆞ야其國을遂、倂ᄒᆞ다
온조왕(溫祚王) 26년(8) 가을에 왕이 모든 장수와 의논하여 말하기를, “마한(馬韓)이 점점 약해져서 왕과 신하가 서로 딴 마음을 품고 있다. 만일 다른 사람이 병합하게 되면 순망치한(脣亡齒寒)이라 후회해도 소용없을 것이니 우리가 먼저 얻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다. 겨울 10월에 사냥을 떠난다고 말하고 몰래 군사를 보내 습격하여 그 나라를 마침내 병합하였다.
제5절 왕인이 학문을 일본에 전하다
편집古爾王、時에王仁이論語와千字文을齎ᄒᆞ고日本에往ᄒᆞ니日本主가喜ᄒᆞ야太子師ᄅᆞᆯ삼다先是에王子、阿直岐가經傳을能通ᄒᆞ더니日本에往ᄒᆞᆷ애日本、主가其子、稚郞으로學케ᄒᆞ고因、問曰子、國에博士가子에셔賢ᄒᆞᆫ者가又有ᄒᆞᆫ가對曰、王仁이有ᄒᆞ야一國에秀라ᄒᆞᆫᄃᆡ日主가王仁을請ᄒᆞᆷ으로往ᄒᆞ니日本에文字가始有ᄒᆞ다
고이왕(古爾王) 때에 왕인이 『논어(論語)』와 『천자문(千字文)』을 가지고 일본에 가니 일본 왕[日本主]이 기뻐하여 태자의 스승으로 삼았다. 이에 앞서, 백제(百濟)의 왕자 아직기(阿直岐)가 경전(經傳)에 능통하였는데 일본에 가니 일본 왕이 그의 아들 치랑(稚郞)으로 하여금 배우도록 하였다. 그리고 “너희 나라의 박사(博士) 중에 너보다 현명한 자가 또 있는가?”라고 물으니, 대답하여 말하기를, “왕인이 있어 우리나라에서 으뜸이다.”라고 하였다. 왕인이 일본 왕의 초청을 받아 가니 일본에 문자가 비로소 있게 되었다.
제6절 불경과 예학을 일본에 보내다
편집聖王이金銅、佛과佛經을日本에送ᄒᆞ고其後에僧尼와寺、工과天文、書와曆、法과樂、人과陶、匠과瓦匠과鞍、工과釀酒、人과醫、博士、等을日本에送ᄒᆞ니日本이諸法을仿行ᄒᆞ야其國의學術과技藝가自此發達ᄒᆞ니라
성왕(聖王)이 금동불과 불경을 일본(日本)에 보내고 그 이후에 승려와 절 짓는 기술자, 천문서(天文書)와 역법(曆法), 악공(樂工), 옹기장이와 기와장이, 말안장 기술자와 술 빚는 사람, 의박사(醫博士) 등을 일본에 보냈다. 일본이 모든 방법을 따라 행해서 그 나라의 학술과 기예(技藝)가 이때부터 발달하였다.
제7절 신라를 공격하여 40개의 성을 얻다
편집義慈王、元年에新羅、西方을攻ᄒᆞ야四十城을取ᄒᆞ고將軍、允忠이大耶城、今、陜川을攻陷ᄒᆞ고新羅、都督金品釋이戰死ᄒᆞ니新羅臣、金春秋가金庾信으로더부러百濟ᄅᆞᆯ滅ᄒᆞᆯ志ᄅᆞᆯ行ᄒᆞ더라
의자왕(義慈王) 원년(641)에 신라(新羅) 서쪽 지역을 공격해서 40개의 성을 얻고 장군 윤충(允忠)이 대야성(大耶城)【지금의 합천(陜川)】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신라 도독(都督) 김품석(金品釋)이 전사하니 신라의 신하 김춘추(金春秋)가 김유신(金庾信)과 함께 백제(百濟)를 멸망시킬 뜻을 가졌다.
제8절 연합해서 신라를 공격하다
편집義慈王、三十四年에王이高句麗와相應ᄒᆞ야靺鞨로더부러連兵ᄒᆞ야新羅、北境、三十三城을取ᄒᆞ니羅王이唐에遣使ᄒᆞ야救援을請ᄒᆞ니라
의자왕(義慈王) 3년(643)에 왕이 고구려(高句麗)와 서로 호응하여 말갈(靺鞨)과 함께 신라(新羅)를 공격하였다. 신라 북쪽 변경[北境]의 33성을 빼앗으니 신라 왕이 당(唐)나라에 사신을 파견하여 구원을 청하였다.
제9절 의자왕이 당나라에 항복하다
편집義慈王이諫臣成忠을殺ᄒᆞ고淫酗、耽樂ᄒᆞ더니羅唐兵이都城을拔ᄒᆞ거ᄂᆞᆯ王이嘆曰、吾가成忠의言을不聽ᄒᆞ야至此라ᄒᆞ고出降ᄒᆞ다宗室、豊이立ᄒᆞ니是爲、後王이라羅王이金庾信으로더부러唐將을合ᄒᆞ야周留城을圍ᄒᆞ니王이脫身、逃走ᄒᆞᆷ애百濟、遂、亡ᄒᆞ다百濟가三十一世ᄅᆞᆯ傳ᄒᆞ얏스니歷年은六百八十一年이더라
의자왕이 간언하던 신하[諫臣] 성충(成忠)을 죽이고 음탕과 향락에 빠지니 나당연합군이 도성을 함락시켰다. 왕이 탄식하며, “내가 성충의 말을 듣지 않아서 이 지경에 이르렀다.” 하고, 나아가 항복하였다. 종실 풍(豊)을 세우니 그가 후왕(後王)이다. 신라(新羅) 왕이 김유신(金庾信)과 함께 당(唐)나라 장수와 연합하여 주류성(周留城)을 포위하니 왕이 탈출하여 도망갔다. 백제(百濟)가 마침내 멸망하였다. 백제가 31대 왕업을 전하였으니 이어 온 햇수가 681년이었다.
제4장 5국
편집제1절 김수로가 가락을 건국하다
편집駕洛國、始祖ᄂᆞᆫ首露王이니初에駕洛의部落이九가有ᄒᆞ야各其、酋長을立ᄒᆞ야山野에居ᄒᆞ고君臣位號가無ᄒᆞ더니伽倻山今、高靈의正見母主가二子ᄅᆞᆯ生ᄒᆞ니曰惱室朱日과曰惱室靑裔라靑裔가特히英傑ᄒᆞ야身長이九尺이오龍顔、重瞳이라衆이推ᄒᆞ야君을삼으니是가首露王이라國號ᄅᆞᆯ駕洛이라ᄒᆞ고王이自稱、金天氏의後라ᄒᆞ야金으로姓ᄒᆞ고朱日은大伽倻國主가되다
가락국(駕洛國)의 시조는 수로왕이니 처음 가락의 부락이 아홉이 있어서 각 부족마다 추장(酋長)을 세워 산야에 정착하였다. 이때 임금과 신하의 위치와 이름이 없었는데, 가야산(伽倻山)【지금의 고령(高靈)】의 정견모주(正見母主)가 두 아들을 낳으니 뇌실주일(惱室朱日)과 뇌실청예(惱室靑裔)라 불렀다. 뇌실청예는 특히 영웅호걸다워서 신장이 9척이고 얼굴에 겹으로 된 눈동자가 있었는데 무리가 추대하여 왕으로 삼으니 그가 수로왕이다. 나라 이름을 가락이라 하고 왕이 스스로 김천(金天)씨의 후예라 칭하여 성씨를 ‘김’으로 하였다. 뇌실주일은 대가야(大伽倻)의 왕이 되었다.
제2절 왕비를 맞이하여 아들을 낳다
편집王이許氏ᄅᆞᆯ納ᄒᆞ야妃ᄅᆞᆯ삼으니是ᄂᆞᆫ普照太后라名은黃玉이오九子ᄅᆞᆯ生ᄒᆞ니二子ᄂᆞᆫ母姓을從ᄒᆞ다王이薨ᄒᆞ니壽가一百五十八歲러라王의世에黎民이大化ᄒᆞᆷ애四方이則ᄒᆞ야淳厖의治라ᄒᆞ더니밋薨ᄒᆞᆷ애國人이悲慟ᄒᆞ더라
왕이 허씨(許氏)를 아내로 맞이하여 왕비로 삼으니 그가 보조태후(普照太后)이다. 이름은 황옥(黃玉)이고 아들 아홉을 낳았으니, 둘째 아들은 어머니의 성씨를 따랐다. 왕이 돌아가시니 나이가 158세였다. 왕이 다스리는 시대에 백성이 크게 교화되어 사방에서 이를 본받아 ‘순방(淳厖)의 치(治)’라 하였는데 왕이 돌아가시니 백성이 슬퍼하여 크게 울부짖었다.
제3절 아내와 자식을 거느리고 신라에 항복하다
편집仇亥王에至ᄒᆞ야王妃와三子ᄅᆞᆯ率ᄒᆞ고國帑寶物로써新羅에降ᄒᆞ니凡十五王을傳ᄒᆞ고四百九十一年을歷ᄒᆞ다金庾信은곳仇亥王의曾孫이니라
구해왕(仇亥王)에 이르러서 왕비와 세 아들을 데리고 국고(國庫)의 보물과 함께 신라(新羅)에 항복하니 모두 15왕을 전하고 491년을 이어 왔다. 김유신(金庾信)은 바로 구해왕의 증손자이다.
제4절 뇌실주일이 가야를 건국하다
편집伊珍阿豉、王、惱室朱日이大伽倻에建國ᄒᆞ다後王嘉室이十二絃、琴을製ᄒᆞ야十二月을象ᄒᆞ고名을伽倻琴이라ᄒᆞ다後王、道設智에게至ᄒᆞ야新羅에降ᄒᆞ니十六世ᄅᆞᆯ傳ᄒᆞ고歷年은五百七十二年이더라
이진아시왕(伊珍阿豉王) 뇌실주일이 대가야(大伽倻)를 건국하였다. 후대 왕 가실(嘉室)이 12현금(絃琴)을 만들어서 12개월을 형상화하고 이름을 가야금(伽倻琴)이라 하였다. 후대 왕 도설지(道設智)에 이르러 신라(新羅)에 항복하니 16대 왕업을 전하고 572년을 이어 왔다.
제5절 대조영이 발해를 건국하다
편집高句麗의遺種、大祚榮이遼水ᄅᆞᆯ渡ᄒᆞ야太白山今、白頭山을據ᄒᆞ고國을建ᄒᆞ니是ᄂᆞᆫ渤海國、高祖라五京과十六府ᄅᆞᆯ寘ᄒᆞ고地方이五千里에至ᄒᆞ야海東에盛國이라稱ᄒᆞ더니後에契丹에게滅ᄒᆞᆫ바ㅣ되니라
고구려(高句麗)의 유민 대조영이 요수(遼水)를 건너서 태백산(太白山)【지금의 백두산(白頭山)】에 정착하여 나라를 세우니, 그가 발해국의 고조(高祖)이다. 5경(京)과 15부(府)1)를 두고, 지방이 5천 리에 이르러서 해동성국(海東盛國)이라 칭하였는데 후에 거란[契丹]에게 멸망당하였다.
제6절 김궁예가 태봉을 건국하다
편집新羅、憲安王의子、金弓裔가父에게被出ᄒᆞ야僧이더얏더니新羅의政綱이紊亂ᄒᆞ고盜賊이蜂起ᄒᆞᆷ을乘ᄒᆞ야北原에셔兵을起ᄒᆞ야鐵原에都ᄒᆞ고國號ᄅᆞᆯ泰封이라ᄒᆞ더니暴虐ᄒᆞ야道가無ᄒᆞᆷ으로其元勳、諸將이弓裔ᄅᆞᆯ廢ᄒᆞ고王建을推戴ᄒᆞ야王을삼으니是ㅣ高麗太祖시니라
신라(新羅) 헌안왕(憲安王)의 아들 김궁예가 아버지에게 쫓겨나서 승려가 되었는데, 신라의 정치와 기강이 문란하고 도적이 봉기한 틈을 타서 북원(北原)에서 병사를 일으켜 철원(鐵原)에 도읍하고 나라 이름을 태봉이라 하였다. 그러나 포학하고 무도하였기 때문에 건국에 공훈이 있던 모든 장수가 궁예를 폐위시키고 왕건(王建)을 추대하여 왕으로 삼으니 그가 고려(高麗) 태조(太祖)이다.
제7절 견훤이 후백제를 건국하다
편집甄萱은尙州人이라智略이多ᄒᆞ고異志ᄅᆞᆯ懷ᄒᆞ더니新羅의衰ᄒᆞᆷ을乘ᄒᆞ야亡命黨을聚ᄒᆞ야州郡을刧掠ᄒᆞ고完山에都ᄒᆞ야國號ᄅᆞᆯ後百濟라ᄒᆞ고新羅에猝入ᄒᆞ야王을弑ᄒᆞ고子女、珍寶ᄅᆞᆯ盡取ᄒᆞ야歸ᄒᆞ니라
견훤은 상주(尙州) 사람이다. 지략이 많고 다른 뜻을 품고 있었는데, 신라(新羅)가 쇠락한 틈을 타서 정치적 탄압을 받던 무리를 모아 주군(州郡)을 무력으로 점령하여 빼앗았다. 완산(完山)에 도읍하여 나라 이름을 후백제라 하고, 신라에 갑자기 들어가서 왕을 살해하고 자녀와 진귀한 보물을 모두 탈취하여 돌아갔다.
제8절 외모가 비슷한 사람으로 왕을 대신하다
편집高麗太祖가親히精騎五千을率ᄒᆞ고甄萱을公山今、公州에셔邀擊ᄒᆞ다가萱兵에게被圍ᄒᆞᆷ이甚急ᄒᆞ거ᄂᆞᆯ大將、申崇謙이貌가太祖와類ᄒᆞᆫ지라太祖ᄅᆞᆯ林藪中에匿ᄒᆞ고其車ᄅᆞᆯ代乘ᄒᆞ고將軍、金樂으로더부러力戰ᄒᆞ다가死ᄒᆞ니太祖가此時ᄅᆞᆯ乘ᄒᆞ야得脫ᄒᆞ다
고려(高麗) 태조(太祖)가 직접 정예 기병 5천을 이끌고 견훤(甄萱)을 공산(公山)【지금의 공주(公州)】에서 맞아 싸우다가 견훤의 병사에게 포위당하여 매우 위급하였다. 대장 신숭겸(申崇謙)이 외모가 태조와 비슷하였기 때문에 태조를 나무 덤불 속에 숨기고, 그 마차를 대신 타고 장군 김낙(金樂)과 함께 힘을 다해 싸우다가 전사하니 태조가 이 틈을 타서 탈출하였다.
제9절 핍박을 받고 고려에 투항하다
편집後에萱이其子神劍의逼迫ᄒᆞᆫ바ㅣ되야高麗에降ᄒᆞ다第은本、農家、子로셔一時에崛起ᄒᆞ야氣勢가天下에萱一이라ᄒᆞ니라
후에 견훤(甄萱)이 그의 아들 신검(神劍)의 핍박을 받게 되어 고려에 투항하였다. 그는 본래 농가의 아들로서 한때 우뚝 솟아 일어나니 그 기세가 천하에서 으뜸이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