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편집1
편집부대 안은 밤이 새도록 뒤숭숭 하였다. 그러나 날이 밝도록 탈주병을 체포하였다는 소식은 들리지 않았다. 낮 같으면 기마병이 추격도 할 수 있었으나 밤이니 어쩌는 도리가 없었다. 계획대로만 갔으면 그날 밤으로 신황하를 건너서 아침녘엔 추가구에 도착했을 것이다. 영민은 그들의 안전한 탈출을 하늘에 빌었다.
가와노 반장은 영민이가 탈주병 속에 끼지 않은 사실을 도리어 수상하게 여기는 눈치였으나 소대장의 명령으로 말에 손질을 하고 있다가 그만 소등 시간을 넘겨 버렸다는 말을 듣자 추호이 의심도 없이 영민의 말을 믿었다.
탈추병을 내인 가와노 반장과 황 칠성의 三[삼]반 반장이 야마모도 소대장에게 불리워 가서 호되게 욕을 보았다. 당연히 영창에 들어갈 것을 중대장의 각별한 조치로 견책처분을 받은 것이라고 하였다.
그 후부터 조선인 학도병에 대한 중대 전체의 감정이 이그러지기 시작하였다. 조금만 잘못하면 탈주병 후보자로서 취급을 받았다. 애매하니 욕을 보는 것은 야스다와 데이하라와 구니모도 들이었다.
복도나 변소나 영정에서 영민은 가끔 야마모도 선생을 만난다. 그런 때의 태도는 이전 보다도 더 쌀쌀하였다. 반드시 한두 마디의 다사로운 말을 던지고 지나 가던 야마모도 선생의 친절은 이젠 없어지고 말았다.
그러는 동안에 일본군의 소위 하남작전(河南作戰)이 시작되었다. 일본군은 오랫동안 신황하를 사이에 끼고 중국군과 마주 서 있었기 때문에 중국은 연방 반격의 기세를 보였을 뿐 아니라 실상 거기 대한 상당한 준비를 하고 있다는 정보가 들렸다. 만일 이대로 가만히 있다가는 정말로 중군군의 일대 반격을 당할지도 모를 형편이었으므로 이편에서 먼저 기선을 제할 목적으로 소위 하남작전을 전개하였다. 만주와 산서성으로부터 많은 원군이 왔다는 소문도 들렸다.
하남작전이 시작되자 회양 부대도 출동 준비를 하였다. 무기를 정리하고 마구에 기름을 치고 복장을 챙기고 말굽을 갈고 하였다. 그러나 네 명의 조선인 학도병은 출동에 참가하지 않기로 되었다. 믿을 수 없는 병사이기 때문이었다. 이윽고 회양 부대는 출동하고 병영에 남은 것은 야마모도 소대의 약 四十[사십]명 가량이었다.
그런데 협쳐성에 남은 이 잔류부대(殘溜部隊)는 인원이 부족하여 영내나 성벽의 경비가 무척 완화되어 있었기 때문에 재탈주의 기회를 엿보고 있던 영민으로서는 절호의 기회가 아닐 수 없었다. 성문에도 일본인 보초는 서지 않았다. 영민은 열심히 재탈주의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야마모도 선생만 눈 감아 준다면……」
그렇다. 잔류부대장인 야마모도 소대장이 한번 더 눈만 감아 준다면 문제는 만사 해결이다. 그러나 그리도 용이하게 눈을 또 한번 감을 야마모도 소대장인 듯싶지도 않았다.
그러는 동안에 이 잔류부대도 이동 준비를 시작하였다. 그것은 이번 하남 작전에 있어서 일본군이 승세하여 정현(鄭縣)을 함락시키고 전군이 협서 성(陜西省) 서안(西安)을 향하여 물밀듯이 쳐 들어가고 있었기 때문에 회양에 남은 잔류 부대도 그 뒤를 따라 서안 전지 이동한다는 것이었다.
본부대가 출동하여 탈주는 비교적 용이하게 되었지만 잔류부대가 서안까지 이동한다는 말을 듣고 영민은 회양에서의 탈주를 단념하였다. 부대와 함께서안까지 가서 탈주하는 편이 더 이로웠기 때문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영민은 부대의 이동만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던 어떤 날 저녁 무렵이었다. 돌연 비상 소집의 나팔이 드넓은 영정을 울렸다. 영민은 무슨 영문인가고 눈이 둥그래서 영정으로 뛰쳐 나가 집합을 하였다. 잔류부대장인 야마모도 소위가 긴장한 얼굴로 일동의 전면에 나타났다.
「지금 약 四[사]만의 적군이 회양을 향하여 돌격중이라는 정보가 들어 왔다. 잔류부대는 인원이 부족하니까 각자가 충분한 각오를 하고 방전(防戰)의 준비를 하라!」
총알처럼 튀여 나오는 야마모도 부대장의 긴장한 명령이었다.
2
편집「올 때가 마침내 왔구나!」
탄환과 수류탄을 정리 하면서 영민은 황혼이 깃드린 어둑어둑한 하늘을 노리는 듯이 우러러 보았다 . 별은 밝건만 달은 없다. 아버지를 생각했다. 유경을 생각하고 운옥을 생각했다.
「죽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무섭지는 조금도 않았다. 다만 가치없는 죽음을 한탄할 따름이었다. 그리운 사람들을 한번 더 만나 보지 못하고 죽는 것이 무섭게 알끈했다. 아무런 육체적 타격이 없는데 가슴은 쪼개지도록 아팠다.
「유경은 지금 어디서 무얼 하고 있을까?……어린애는 영영 아버지의 얼굴을 보지 못한채 일생을 고독하게 보낼 것이 아닌가.」
모든 그리운 장면과 모든 그리운 물체와 모든 그리운 인간이 조수처럼 일제히 욱하고 밀려든다. 그 모든 그리운 것들과 영원한 작별을 영민에게 강요한 힘의 소유자인 일본이 한없이 저주 되었다.
인간을 가르켜 만물의 어른이라 하였다. 그러나 오늘에 있어서의 백 영민은 일 개 고양이 새끼나 개 새끼만도 못한 비겁한 동물이 되고 말았다. 개나 고양이는 자기가 원하지 않는 행동의 강요를 받을때, 그들은 그것을 거절할 줄을 안다. 죽엄으로써 그것에 항거할 줄을 안다.
「그러나 백 영민은 아직도 그것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아아, 인간이란 끝없이 약해질 수 있는 유일한 동물이다!」
三[삼]천만 조선 민중이, 정녕 그것이 인간이 아니고 돼지 새끼나. 개 새끼 같은 동물이었던들 오늘 날의 이 굴욕을 받기 전에 그 강권에의 항거를 죽음으로써 감행했을 것이 아닌가. 고금 동서를 통한 모든 독재주의자들이 마음을 놓고 강권을 행사할 수 있는 것은 요행히도 그들의 대상이 개나 고양이가 아니고 끝없이 약해질 수 있는 유일한 동물인 인간이기 때문이었다.
「백 영민이여, 그대도 오늘 날 끝없이 약해지려는고?……」
잔류부대는 다섯 패로 나누어 네 패는 동서 남북 네 개의 성문에 배치되고 한 패는 부대장과 함께 영내 본부를 수비하기로 되었다. 야스다, 데이하라, 구니모도는 모두성벽으로 배치되었는데 어떻게 된셈인지 영민은 본부에 남기로 되어 있었다. 우연이 아니라면 그것은 분명 야마모도 부대장의 배념이었을 것이다.
보안대와 경관들도 총동원 되어 모두 성벽으로 배치되어 갔다. 그러나 보안대라는 것은 믿을 수가 없었다. 일본군이 우세할 때 일본군에 협력을 하지만 그렇지 않을 때 총뿌리를 돌려 대었다. 수일 전에도 보안대원의 반란으로 말미암아 전멸 당한 부대가 있었다는 보도가 들어 왔었다.
한 시간 후에는 회양 성내에 거주하는 거류민들이 전부 동원 되어 왔다.
대부분은 조선 사람이었다. 일본인도 약간명 섞여 있었다. 양복 바지에 각 반을 치고 그들은 소총 쏘는 법과 수류탄 던지는 법을 배웠다. 그들도 곧 성벽 각 분대에 배치되어 갔다.
거류민 중에는 여자가 한 二十[이십]여 명 가까이 있었다. 모두가 조선 여성이었다. 안색이 모두 누에처럼 신멀툭 했고 푸릿푸릿하였다. 일선으로 따라 다니면서 병사들을 위안하는 글자 그대로의 정신부대(挺身部隊)였다. 그들은 주방으로 들어 가서 주먹 밥을 만들기 시작하였다.
전쟁이 시작된다. 사람들은 모두 분주했고 활줄같이 긴장들 했다.
영민은 총을 메고 영정을 순찰하는 임무를 맡았다. 컴컴한 드넓은 영정을 걸으면서 그 신멀툭한 푸릿푸릿한 얼굴들을 생각하고 슬펐다. 한없이 영민은 슬펐다.
밤 열 시 쯤에서 성문으로부터 부대장실에 전화로 연락이 왔다.
「북문의 가와노입니다! 성문 박 약 八[팔]백 메터 ─ 전면 보리 밭에 수효 미상의 적군이 출동하고 있음을 발견하였읍니다! 보고 끝 ─」
그와 같은 연락은 남문, 서문, 동문에서도 왔다.
「회양성은 포위를 당하였다!」
잔류부대는 전멸을 당할지도 모른다.
3
편집「외잉 ─」
마침내 총알이 병영 안으로 날아 들어 왔다. 뒤이어
「따다다닥, 따다다닥 ─」
맹렬한 사격 소리가 사방 성벽 주위에서 일제히 들려 왔다.
「따다다닥, 따다다닥……」
총소리는 점점 가까와 졌다. 제일 심한 데가 북문쪽이었다. 동문, 서문, 남문 쪽에서도 총소리는 콩볶듯 했다. 그러나 그때까지도 일분군은 아직 총을 쏘지 않고 있었다.
부대장실에는 정보가 연달아 들어왔다. 중국인 정보원들이 쉴 새없이 병영에 드나들었다.
「전쟁은 그예 벌어지고 말았다!」
영민은 머리 위를 날아오는 총알 소리를 들어 넘기면서 위병소로 가서 정보를 알아 보았다. 쳐들어 오는 중국군은 약 七[칠]만이라고 한다. 성벽을 기어 오르기 위해서 농민을 동원시켜 사다리를 만들고 있다는 것이었다.
「회양성의 운명도 오늘 밤이 마지막이다!」
영민은 부르르 몸을 떨었다 . 그러나 회양성의 운명과 자기의 운명을 같이 할 수는 도저히 없는 일이 아닌가. 영민은 끝끝내 총알 쏘지 않고 있다가 중국군의 폭로가 되리라 생각하였다. 후일 다행히도 황칠성이나 가 나즈가 나타나서 자기를 변명하여 줄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무사히 탈주에 성공한 두 동료를 영민은 이 순간처럼 골돌히 부러워 한 적은 없었다.
그순간, 영민은 마구간 뒤에 있는 뒷문 수채구멍을 문득 생각하고 서너 걸음 그리로 달려가다가 그만 발을 멈추었다. 저번 탈주병 사건이 있은 직후, 수채구멍을 견고하게 막아 놓은 사실을 깜박 잊어 먹었던 것이다.
야밤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중국군은 밤 새도록 사격만 계속 할 뿐이지, 성벽으로 공격해 오는 기색은 통 보이지 않았다. 그날 밤.
결국 그러다가 그들은 후퇴하여 버리고 말았다. 일본군은 한 방의 총도 쏘지 않았다. 비를 흠뻑 맞으면서 여자들은 주먹 밥을 성벽으로 날랐다.
그러나 그 이튿날 밤 열 시 경에 중국군은 또다시 사격을 시작하여 왔다.
어제 보다는 극히 적극성을 가진 공격인 듯싶었다.
「따다다닷, 따다다닷……」
기관총 소리가 어젯밤 보다도 좀더 가까와 졌다. 어젯밤의 사격은 일종의 정찰을 의미하는 그것이었다.
「탕, 탕 ─」
수류탄도 터졌다. 중국군은 성벽 밑까지 접근하여 왔다.
「쿵 ─ 쿵 ─」
멀리서 박격포 소리도 났다. 병영내 비인 마굿간 하나가 박격포탄에 흠뻑 녹아 버리고 말았다. 본부대 이동시에 야포대도 함께 이동했기 때문에 마구간은 비어 있었다.
「사격 개시(射擊開始)! 부대 본부는 북문으로 이동!」
야마모도 부대장은 그때야 비로소 전화로 각 분대장에게 사격 개시를 명령하였다. 그리고 중국군의 공격이 제일로 욱심한 북문으로 부대 본부를 이동하여 부대장 자신이 일선에 서지 않으면 아니 될만큼 사태는 극히 긴박하여졌다. 영내에서 영문 보초 한 사람과 위병소에 연락병 한 사람을 남겨 놓았을 뿐, 주먹 밥을 장만하고 있는 신멀툭한 조선 여성 二十[이십]여 명이 주방에서 콩튀듯이 껑충껑충 뛰고 있었다.
영민은 다른 五[오], 六[육]명의 병사와 함께 부대장을 따라 북문으로 달려갔다.
남부여대한 지방민들의 아우성 소리가 어지럽게 흩어져 있는 어두운 밤 길이다.
「외잉 ─ 외잉 ─」
총알이 끊임없이 날아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