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극장/3권/31장

꽃 집엔 떡이 없고

편집

안국동 모말 같은 방에서 신 성호는 손수건으로 머리를 동여매고 거머리처럼 책상에 붙어 있었다. 책상 위에는 집필한 원고가 약 천 매 가량의 높이를 가지고 쌓이어 있었다. 이것은 잘하면 신 성호의 출세작이 될 장편소설

「흘러 가는 청춘」의 원고였다. 이것은 아직 신인(新人) 축에 드는 신 성호가 사느냐, 죽느냐의 배수의진(背水之陳)을 치고 결사적으로 써 나가는 힘들인 작품이다.

더구나 이「흘러 가는 청춘」은 일본의 패망을 유일한 희망으로 집필되는 작품으로서 만일 전쟁이 일본의 승리로서 끝나는 날에는 영원히 태양을 보지 못할 그러한 종류의 작품이기 때문에

「아이구, 하품만 난다! 당장 팔아 먹을 작품이라두 모르겠는데 이건 어느 고명 년에……」

이런 말을 춘심은 곧잘 하였다.

웃목엔 책장, 아랫목엔 경대 …… 옆으로 춘심이의 화려한 옷이 쭈루루 걸려 있다.

「아아 ─」

성호는 펜을 던지고 책상 앞에 그대로 번듯 나가 자빠지며 담배를 피워 물었다. 밤 아홉 시다. 성호는 어름판에 나가 자빠진 황소처럼 눈만 껌벅거리며

「오늘밤엔 또 어떤 잡놈과 희드닥 거리고 있는고?……」

성호는 물끄러미 네모난 천장을 쳐다보며, 지나간 날 오 창윤이가 하듯이 요정에서 벌어질 괴상망칙한 상상을 하여 보는 것이다.

「아아, 못해 먹을 노릇이다! 못 해 먹을 노릇이야!」

하고 중얼거렸다.

비록 방은 좁았으나 그래도 처음에는 춘심이의 돈도 있고 해서 제법 향그러운 꽃을 따보기도 한 춘심이와 신 성호였다. 매일처럼 저녁은 나가 먹고 밤이면 둘이서 서울 거리를 원앙새처럼 싸돌아 댕겼다.「기생과 소설가」 ─ 그 누구의 홍등야화(紅燈夜話)의 주인공들처럼 성호와 춘심이의 정열은 무르익어 만 갔다. 그 무르익은 애욕의 천국에서 두 사람은 겨웁도록 꽃만 땃다.

그러나 무르익을 줄을 알았던 붉은 정열은 또한 식어 버릴 줄도 알고 있었다. 근 一[일]년 동안의 동서 생활에 춘심은 거의 돈과 정렬을 다같이 소모해 버렸다. 돈 못 벌어 들이는 기생은 노래 못하는 카나리야다. 삼룡이 부처는 매일처럼 딸을 가지고 학대를 하였다. 아비 덕을 모르는 년, 하고 학대를 하였다.

「나 하나 죽어 없어지믄 그만이지, 뭘들 그래요?」

춘심은 이를 바드득 갈면서 삼룡이에게 대들기가 일수였다.

「이 놈의 에미나이가!」

삼룡은 목침을 들어 춘심을 내갈긴다.

「목침으루야 사람이 죽나? 자아, 칼 여기 있으니 찔러 죽여요!」

춘심은 발딱 일어 나서 뒷마루에 놓인 식칼을 삼룡이 앞에 내 던졌다.

「이 놈의 에미나이가! 못 찌를 줄 알구?……」

식칼을 움켜 쥔 삼룡이가 안방에서 뛰쳐 나오면 춘심은 내밀고 맞받아 들어 간다.

「자아, 찔러요! 어서 찔러서 오리오리 찢어 죽여요!」

그러나 삼룡이의 칼은 언제나 춘심이의 이마 위에서 우쭐거리기만 하였다.

그리고 돌아오는 날이면 춘심은 성호의 품안에서 하룻밤을 꼬박 울어 새우곤 하였다.

「춘심아, 울지 말아! 인제 내가 대걸작을 써서 몇 十[십]만 권 책이 팔리면 곰보딱지 삼룡이의 손에서 네 몸을 곱게 빼내 줄께, 울지 마!」

성호도 춘심을 껴안고 좍좍 울었다.

그러나 이때까지 애무(愛撫)의 세계에서만 사용해 온 평양 기생 박 춘심이의 흰 손은 오랜 시일을 두고 단간 방에서 남비밥을 끝끝내 끓일만큼 질기지는 못하였다. 아침 저녁으로 물을 다루기 때문에 번질번질 빛나는 손길을 들여다 볼때마다 춘심은 꺼질것 같은 한숨을 푹 쉬곤 하였다. 그럴 때는 자기에 대한 성호의 애무가 귀여우면서도 한편 또 무척 겨웁기도 하였다.

「언제꺼정 이러구 지내야 돼요?」

원고를 쓰고 있는 성호 옆에 번듯 나가 누워서 춘심은 담배 연기를 허공에 하염없이 내뿜으며 그런 말을 하곤 하였다.

그럴 때 성호는 펜을 놓으며 춘심을 껴안고

「춘심이, 조금만 더 참아요!」

하며 애무의 소나기를 퍼부을 적도 있었고 간흥가다가는 또 펜을 획 내던지고

「에잇, 이러구 있기가 싫으면 마음대로 해! 오 창윤 영감한테 도루 가면 되지 않아?」

하였다. 그럴 때 춘심이는

「아이, 귀여! 그 성난 얼굴, 무척 귀여워요!」

할 적도 있었고

「왜 또 투정이야? 뭣 때문에 투정이야?」

하고 대들기도 하였다. 이렇게 되면 연애 선수인 춘심 아가씨와 애정의 권위자인 소설가 선생은 하루 종일 감정의 화살을 서로서로에게 퍼붓는 것이었다.

오늘 저녁도 춘심은 싸움을 하고 나갔다. 얼마 전부터 다시 요정에 나가게 된 춘심을 데리러 명월관에서 인력거군이 왔을 때

「어떤 잡놈이 또 남의 유부녀를 유인하러 왔어?」

성호는 그러면서 문을 탁 열었다. 물론 절반은 농담이었다.

「헤헤헤……」

인력거군은 겁신 허리를 굽혔다. 성호와도 잘 아는 춘심이의 단골 인력거 군인 박 서방이다.

「유부녀? ─ 남편 구실 못하는 위인의 여편네두 유부년가?」

물론 이것도 절반은 농이다.

「남편 구실 잘하는 남편을 한번 물어 보면 될꺼 아니야?」

「너무 빗꼬지만 말구 남의 맘 작작 태워요.」

「네 마음이 그래 몇 푼어치나 되나?」

「참, 비위 상하네!」

「누구 비위가 상해?」

「당신 비위두 상하겠지만 내 비위가 더 상한단 말이야요.」

「몸 팔아서 남편 먹여 살리니 네 비위두 상하긴 하겠다만 ─」

「누구가 몸을 팔아서?……」

춘심이의 눈에서 횟불이 튄다.

「보기 거북하다! 빨랑빨랑 사라져라!」

「아주 가버림 될꺼 아냐?」

「영원히 가 버려라!」

「가래믄 누가 못 가?」

「어서 가! 빨랑빨랑 내 눈 앞에서 사라져 버려!」

「흥, 열 달 동안 단 물을 다 빼 먹었으니 인제 냄새가 나?」

「냄새두 인젠 시궁창 냄새다!」

정말로 요즈음 와서는 냄새가 나기도 하였다. 처녀가 아니다! 너는 기생이 아니냐? ─ 하는 생각이 차츰차츰 성호의 마음을 녹슬기 시작하였다.

「거머리! 당신은 허울 좋은 거머리야! 소설가? 예술가? 뭐 작품이 어떻구 걸작이 어떻구…… 그래 소설가는 언제든지 남의 단물만 빨아 먹음 그만이야? 소설가는 그래 거머리처럼 남의 생활의 기생충이 되라는 법이 있어? 남들은 여편네가 기생충 말을 듣는데 이건 꺼꾸루 돼 가지구두 큰 소리만 탕탕 하구…… 나 참 소가 웃다가 꾸러미가 터질 노릇이지, 참!」

「큰소리 좀 그만 둬! 네게 단물이 어디 있었어? 이 놈팽이 저 늙은이루 실컨 싸돌아 먹던 것이 단물이 다 뭐야?…… 뭐 기생충? 거머리?…… 얘 구역질 난다! 네 물건 다 가지구 빨랑빨랑 사라져 버려라! 너 없으면 신 성호가 굶어 죽는단 말이냐?」

「가래믄 누가 못 가?……」

춘심은 발딱 일어나면서

「흥, 뜯어먹을 것이 없으니 인젠 가라구…… 가지, 가!」

춘심은 탁 문을 열고 나갔다.

「어서 가라!」

「그래 간다!」

「빨리 못 가?……」

「뜯어먹을 것이 없으니 빨리 가 주마!」

「에이, 더럽다! 너한테 몇 푼어치 뜯어먹는 것 인젠 다 토해 줄테다. 일본이 망할 날이 며칠 없어! 일본이 망하구 내 걸작이 발표되면 五[오]푼 변이 자 붙여서 고스라니 물어줄테다! 에이 더럽다, 더러워!」

문을 탁 닫쳐버린 문 밖에서 춘심은 울음 소리로

「나 하나 죽음 되지 않아!」

「죽어라, 죽어! 인천 월미도 앞바다가 오늘밤도 너를 부른다! 왜 죽으러 나갔던 것이 싱겁게 어정어정 돌아는 와? ─」

언젠가 인천으로 둘이서 놀러갔던 일이 있다. 놀러가서 춘심은 월미도 바위 위에서 푸른 물결을 내려다 보고

「죽을래믄 이런 데서 빠져 죽는 게 제일 편할꺼야.」

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 후에도 춘심은 성호와 싸움 하면 인천 가서 죽는다고 집을 뛰쳐 나가곤 하였다. 처음 한번은 그만 겁이 나서 인천으로 달려가 보았다. 그랬더니 월미도 조탕 옆에 있는 간이식당의 여급이 춘심의 얼굴을 아는지라, 춘심이가 정말로 왔다 갔다는 것이다.

그래 눈이 발개서 하루 종일 찾아 다니다가 서울로 돌아와 보니 춘심이가 사시미 한 접시와 정종 한병을 사다 놓고 성호를 기다리고 있지 않는가.

「아이, 싱겁다! 죽으라던 위인이 찾으려는 왜 댕겨?」

하면서

「자아, 한 잔! 나 정말 죽음 당신과 술추념 못하지 않어?」

하였다. 그런 일이 있었다.

그런 일이 있었던 것을 회상하다가 성호는 무엇을 생각하는지 벌떡 책상 앞에 일어나 앉았다.

춘심이가 갑자기 걱정이 되었다. 요정에서 그 어떤 잡놈과 희드락 거리는 정경 만을 생각하던 성호는 그때

「과연 춘심이가 지금 요정에 있을 것인가?」

를, 의심하기 시작하였다.

「나 하나 죽음되지 않어? ─」

그것은 춘심이가 그리 어렵지 않게 배앝는 한 마디이긴 하지만 오늘 저녁의 그 한 마디에는 춘심이의 울음 소리가 섞여 있었던 것을 성호는 문득 생각 하였다. 춘심이의 성격에는 어딘가 그것을 결행할 수 있는 위험성이 내포되어 있는 것 같았다.

성호는 부리나케 한 벌 밖에 없는 외출복으로 갈아 입고 집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