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글픈 대화
편집1
편집영민이가 트렁크 하나를 들고 아침차로 경성역에 내린 것은 한 주일 후의 일이었다.
눈은 점점 더 잘 보이고 다리는 가까운 데는 피로를 느끼지 않았으나 동리 사람들에게는 공부도 할겸 치료를 받으러 상경한다는 말을 하였기 때문에 나무 다리를 그냥 짚고 온 영민이었다.
역에서 먼저 관철동 손 학규(孫學奎) 변호사 사무실에 전화를 걸어 자기의 상경을 알린 후에 영민은 아현동 오 창윤씨 댁을 찾고저 전차를 탔다.
손 학규 변호사는 조대 선배로서 형사소송(刑事訴訟)의 권위자였다. 재학 시대에 동경서 이미 변호사 시보(試補)를 치른 영민이었다. 그러나 사무실을 가질만한 경제적 여유도 없으려니와 손 변호사와 같은 권위자 옆에서 당분간 실무 견습을 하여 두는 것이 장래를 위하여 좋을 것 같아서 한 주일 전에 서신으로 사전 연락을 취해 두었던 것이다.
영민이가 아현동에 도착하였을 때, 현관으로 마중 나온 것은 옥순이었다.
옥순은 영민을 한 눈에 바라보자
「서방님이…… 탑골동 서방님이 오셨어요!」
하고 고함을 치면서 도로 뛰어 들어 갔다.
「누구가 왔어?……」
식모와 함께 조반 상을 치우고 있던 어머니가 눈이 둥그래서 옥순을 쳐다보았다.
「아이, 마님두, 탑골동 서방님 말이예요.」
「응? 그래? ─」
어머니는 놀래 분주스레 업고 있던 금동이를 식모에게 업혀 준다. 옥순은 다람쥐처럼 이층으로 뛰어 올라 가면서
「아가씨, 아가씨! 탑골동 서방님이 오셨어요, 탑골동 서방님이……」
조반을 먹고 유경은 이층 자기 서재에 올라가 있었다.
그러는데 오 창윤이가 사랑방에서 나오며 현관으로 성큼성큼 걸어 갔다.
「오오, 백군!」
「선생님, 안녕하십니까?」
영민은 허리를 굽혀 절을 하였다.
「어서 올라 오시요. 대강한 이야기는 유경에게서 들었소.」
영민은 오 창윤을 따라 사랑방으로 들어가 마주 앉았다.
「그래 다리는 아직 자유롭지 못하오?」
「괜찮습니다. 먼 길엔 약간 피곤을 느끼지만요.」
「눈은?」
「눈도 거의 평상시와 같아져 갑니다.」
「다행이요! 천행이요!」
그러면서 오 창윤은 안방을 향하여
「여보, 백군이 왔소.」
하고 고함을 쳤다. 자기의 고함소리를 이층에 있는 유경이에게도 들려 줄 셈인 것처럼……
「아이유, 얼마나 고생을 하셨소?」
영민은 방으로 들어서는 어머니에게 공손히 절을 하였다.
「아이유, 하마트면 큰 일을 저질을 뻔했었구먼! 생각해두 치가 떨리유.」
「쓸데없는 근심 걱정을 드려서 죄송스럽습니다.」
영민은 머리를 숙였다.
「집에 있는 사람이야 무엇이 고생일꼬? 사지판을 깨댕기구 왔는데……」
「어서 당신은 조반상이나 보아 오시요.」
어머니가 나간 후에
「최군에게서 대강한 이야기는 들었소.」
「선생님, 감사합니다. 일부러 사람을 보내 주셔서……, 덕택에 가친은 무사하였읍니다. 그리고 선생님이 주신 혜서도 분명히 받아 보았읍니다.」
2
편집술상겸 조반상이 들어 왔다. 영민은 권하는 대로 한두 잔 들은 다음 조반상을 물리고 당분간 손 변호사 사무실에 있기로 된 이야기를 한 후에 운옥이에 대한 자기의 심경과 유경이에 대한 자기의 심중을 솔직하게 말했을 때 잠자코 듣고 있던 오 창윤이가
「잘 알겠소. 백군의 심경을 잘 알겠소. 현실적 입장에서 본다면 유경은 두말 할 필요도 없이 백군의 아내요. 그러나 유경이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그러한 현실적 책임같은 것을 백군에게 지우고 싶지는 않소. 유경이의 말과 같이 문제는 유경에게 대한 백군의 애정일 것이요.」
「선생님, 잠깐 ─」
영민은 수그렸던 머리를 들면서
「지금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유경씨에 대한 제 애정에 일시적인 동요는 있었읍니다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동요일 따름이고 영구적인 애정의 분열은 결코 아니었읍니다. 유경씨도 이 점을 섭섭히 생각하고 있을 것입니다만 그러나 마음의 동요는 이미 멎었읍니다.」
「그러면 됐어. 문제는 간단해!」
저으기 긴장했던 오 창윤의 마음이 탁 풀리기 시작하였다.
「백군이 자진해서 난봉을 피웠다면 모르지만두, 그러한 환경에 서게 되면 마음의 동요를 느끼게 되는 것이 인간의 상도야.」
「선생님, 유경씨를 좀 만나고 싶습니다.」
「응.」
그리고 오 창윤은
「여보.」
하고 아내를 불렀다.
「네? ─」
「유경일 좀 불러 주.」
「네에.」
그 동안 벌써 몇 차례나 이층엘 오르 내린 어머니였다. 어머니는 수심 띤 얼굴을 하고 이층으로 올라가서
「유경아.」
서재 문 밖에서 딸을 불렀다.
「………」
그러나 방안에서 대답이 없다.
「유경이 없니?」
「………」
「얘가 어디루 나갔나?」
그러면서 어머니는 손잡이를 잡고 문을 열려고 했으나 문은 안으로부터 잠겨져 있었다.
어머니의 안색이 변하며
「유경아, 좀 내려 오렴. 아버지가 부르시는데……」
「………」
「유경이 너 잠 들었니?」
그러는데 유경이의 목소리가 들려 나왔다.
「어머니, 나 지금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아요.」
어머니의 안색이 또 한번 가볍게 놀라며
「그래두 어디 그렇니? 일껀 마음이 돌아 서서 너를 만나러 왔는데……」
「내려 가서 그러세요. ─ 이리 돌았다, 저리 돌았다 하는 사람과 만날 필요 조금도 없다고 내려 가서 그러세요.」
「글쎄 얘야, 그래두 어디 그럴 수야 있느냐? 잠깐만 내려 왔다 가렴.」
어머니는 거의 애원하다시피 한다.
「어머니, 정말 그럼 나 대답 안 할테야요!」
뺑하는 소리가 방안에서 튀어 나왔다.
「그래두 너 아버지 낯을 봐야하지 않느냐?」
「아버지가 대신 만나서 낯 많이 내시래구료.」
「유경아, 네가 글쎄 왜 또 말썽이냐?」
「몰라, 몰라, 몰라!」
유경의 최후의 말소리였다. 어머니가 아무리 애원을 해도 방안에선 대답이 없다.
3
편집어머니는 풀끼없이 아래로 내려 와 사랑방 문을 열고
「저 잠깐 보시우.」
하고 오 창윤을 복도로 불러 낸다.
한참만에 오 창윤은 다시 방으로 들어 와 앉으며
「백군이 좀 올라가 보시요.」
했다. 영민은 머리를 후딱 들며 표정으로 상대편의 말 뜻을 물었다.
「원체 성품이 모가 난 애라……」
오창윤의 말 끝이 무척 흐리다.
영민은 그대로 잠자코 한참동안을 앉아 있었다. 돌부처처럼 말없이 앉아 있었다. 오 창윤은 공연한 담배만 퍽퍽 피우면서
「올라 가 보시요.」
하고 한번 더 권했다.
영민은 일어 서서 사랑방을 나섰다.
「옥순아, 아가씨 방으로 서방님을 좀 모셔다 드려라.」
안방에서 어머니의 목소리가 났다.
「네.」
바르르 옥순이가 뛰어 나와 이층으로 올라 가면서
「서방님, 이리 올라 오세요.」
영민은 묵묵히 옥순의 뒤를 따라 올라 갔다.
「아가씨, 문 열어 주세요. 탑골동 성방님이 오셨어요!」
옥순은 손잡이를 잡고 이리 돌렸다 저리 돌렸다해 보았으나 잠근 문이 열릴 리가 없다.
「아이, 어쩌면 아가씨두!」
문을 두드리며
「아가씨, 문 열어 주세요!」
「………」
옥순은 어리벙벙해서 문 두드리기를 단념하고 영민의 얼굴을 핼끗 쳐다보았다.
「옥순인 내려 가 봐도 좋아.」
영민은 옥순을 물리쳤다. 옥순은 그러나 자기의 임무를 다하지 못한 것을 불만히 여기며
「아이, 아가씨두 변덕이야! 밤낮으로 보구 싶다구 운 건 누군데?……」
옥순이는 그러면서 바르르 아래로 내려 갔다.
영민은 오랫동안 복도에 그대로 서 있었다. 주위가 고요하다. 자즈러들 것 같은 정적이 정원 일대에 깃들어 있었다. 그 정적을 깨뜨리며 가만히 녹크를 하면서
「유경씨!」
하고 불렀다.
그러나 대답 대신 고요한 복도로 조용히 흘러 나온 것은 유경의 희미한 느낌 소리였다. 유경은 울고 있는 것이다.
「유경씨, 문좀 열어 주시오.」
「………」
「유경씨!」
그때 유경의 한 마디가 가느다란 느낌을 지니고 조용히 굴러 나왔다.
「돌아 가세요. 저를 더…… 울리지 말고…… 돌아 가세요.」
「한번만, 한번만 유경씨를 만나 보구 가겠소.」
「만남 더…… 울음만 나와요. 저 역시…… 허 운옥씨를…… 아니, 금순 언니를…… 잊을래야 잊을 수 없어요. 그렇지만, 그렇지만……」
느껴 우는 소리가 점점 더 커졌다.
「……그렇지만, 영민씨의 마음 한편 구석에…… 항상, 그이의 환영이 항상 …… 도사리고 있는 한… 영민씨는 늘 마음이 괴로울 것이구…… 저 역시 행복되지는 못할 것이구…… 영민씨가 그 이의 환영을 청산할 수 없는 이상……」
「유경이, 나는 그이를 완전히 청산할 수 있는 것같소. 그것은 애정이라기 보다도 좀더 넓은 의미에 있어서의 인간성의 발로이니까요. 유경이, 문을 여시요!」
영민은 조급히 문을 두드렸다.
「아냐요. 그이가 지금 영민씨의 눈 앞에 보이지 않으니까 하시는 말이지.
그이가 또다시 영민씨의 눈 앞에 나타나게 될 때는…… 영민씨의 마음 나 잘 알 것 같아요. 영민씨의 그 착한 마음씨, 그 다사롭고 어진 마음씨, 잘 알 것 같아요. 그리고 영민씨두 제 생각을 잘 이해하실 것 같아요. 그러나 그렇지만 그이가 여전히 불행한 삶을 계속하는 한, 영민씨의 마음은 여전히 괴로울 것이구…… 저 역시 마음이 편안할 것 같지는 않아요. 사람이 살아 나가는데 환경이라든가 운명이라든가 조금도 계산에 넣지 않고 어디까지나 순수하게 생각했던게 눈 앞에 그것이 닥쳐왔어요. 이처럼도 저희들 두 사람이 서로 사모하고 이해하건만 환경이 그것을 도와주지 않는 한……」
「………」
영민은 유경이의 이 긴 회포에 대해서 단 한 마디의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러나 영민씨를 영영 만나지 않는 한이 있을지라도 제 일생에 있어서 영민씨는 영원한 이상의 남편이예요!」
「유경이!」
「돌아 가세요. 만나구 안 만나는 것이 문제가 아닐 것 같아요. 만나면 공연히 환경의 비애만 더 느낄 것 같아요. 고독하지만 제가 참다참다 진정 참지 못할 때는……」
유경은 말을 계속하지 못하고 흐늑흐늑 느껴 운다.
영민은 오랫동안 덤덤히 서 있다가 다음과 같은 한 마디를 남겨놓고 문 앞을 떠났다.
유경이의 말 잘 「 , 알 것 같소. 나 역시 오 유경은 단 하나인 이상의 아내요! 이대로 헤어져 영영 보지 못할 운명일지라도 오 유경 외에 영민의 아내가 될 사람이 이 세상에 다시는 있을 수 없소! 그러면 유경이, 몸 조심하시요. 나는 다만 다만 만날 수 있는 운명이 우리들 앞에 오기를 바랄 뿐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