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증의 십자로
편집1
편집「여어, 마담, 오랫만입니다.」
홀 안을 한 번 휘이 둘러보며 장 일수는 나미에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왔다.
「마담의 그 요염한 화장, 오늘 밤의 용궁 홀을 한층 더 현란하게 빛 냅니다.」
장 일수는 털썩 마주 앉으며
「요염 무쌍, 천번만태의 능난한 재주를 가지고 뭇 사나이를 발 밑에 호령하시는 마담의 젖가슴 위에 어이하여 또 오늘 밤은 그리도 청초한 한떨기 동백꽃이 피었나요?」
그러나 월령은 하등의 대답이 없이 여급이 들고 온 삐루를 쭈루루 한 잔 부어 장 욱 앞에 은근히 권했다.
「어여쁜 보살이 말없이 권하는 이 한 잔의 생명수, 사랑의 노예 쟝위는 기꺼히 받아 마시렵니다.」
장 욱은 한 잔을 쭉 들이키고 나서 은근한 목소리로
「유에링, 왜 그리도 오늘 밤은 말이 없소?」
그 때 월령은 비로소 입을 열었다.
「말이 필요치 않는 밤은 님에게 향하는 마음이 한층 더 애달퍼요.」
월령도 한 잔을 맛있게 들이키며
「님은 오늘 밤 무엇하려 오셨나요?」
「사랑의 혼정신성(昏定晨省)을 너무나 오랫동안 궐(闕)했었기 때문에……」
「너무나 화려하신 님의 말씀, 오늘은 정작 귀에 거슬립니다.」
그러면서 월령은 허리춤에 찔렀던 봉투 하나를 장욱이 앞에 홱 내던졌다.
「생각컨대 님이 오신 목적이 분명 그것 같으오니 빨랑빨랑 갖구 가세요.」
서주에서 띠운 영민의 암호 서신이었다.
「허어, 이건 꼬마가……」
장 욱은 일종 것잡을 수 없는 놀람을 심중에 느끼면서
「허어. 이건 또 무슨 편진고? 이건 편지가 아니고 무슨 산술 문제가 아닌가?」
장 욱은 일부러 표정을 크게 써 보인다.
그 순간, 월령은
「흥!」
하고, 한 번 코웃음을 띄우면서
「이거 왜 이러는 거야? 이편이 읽을 줄도 모르는 암호문을 저편에서 써보낼 리가 있을까?」
「정말 이건……」
「그만 둬요. 님의 동지들이 항상 쓰는 암호 기호니 어서 읽어 봐요.」
「응? ─」
「놀라긴 또 왜 새삼스럽게……」
「그러나 이건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니요. 학병으로 나간 내 중학 동창이 오랫만에 소식을 전해 온 것인데……」
「학병 탈출 계획이라도 적혀 있지 않음 왜 그런 까다로운 암호를 사용한담?」
그 교묘한 한 마디가 장 욱의 가슴을 찔렀다. 상대편도 이미 이 암호 기호를 해독한 것으로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그 순간 장 욱은 뱃장을 세웠다.
「님도 그만 했으면 상당하오. 이 장 욱을 그만큼 연구하고 이해하여 주시니 감하불이로 소이다 ─ 그럼 한 번 읽어 볼까?」
이미 암호문을 해독할 줄 아는 상대방이라면 구태여 쑥스럽게 감출 필요도 없잖은가.
장 욱은 낮은 음성으로 다음과 같이 읽었다.
나는 본의 「─(1) 아닌 학병으로 출정을 한다. (2)지금 제남을 지나 진포 선을 달리고 있다. (3)용산 제 二十五[이십오]부대에 입영하였던 학병 五○[오공] 명이다(4) 어디로 가는지 목적지는 모른다. (5)나는 탈주를 계획하고 있다. (6)특히 한 가지 말해 둘 것 은 군이 가까이 하는 용궁의 매담 방 월령은 일본군의 스파이 하세가와· 나미에다. ─ 꼬마 ─」
시퍼런 비수로 상대자의 젖가슴을 푹! 하고 찌르는 것 같은, 실로 대담하고도 호탕한 한 마디가 무자비하게 장 일수의 입술을 뚫으고 나왔다.
그렇다. 시퍼런 칼날 위에 장 일수는 마침내 섰다.
건곤일척(乾坤一擲), 먹느냐 먹히느냐의 몸서림치는 투쟁이 바야흐로 전개되려는 무서운 순간이다.
2
편집이유는 모른다. 멀리 격해 있던 백 영민이가 어떻게 그런 사실을 알고 있는지, 그 이유는 물론 알바 없는 장 일수다. 그러나 이미 모든 것이 탄로난 이 순간에 있어서 또 무엇을 사내 답지 못하게 숨길소냐. 그것은 또한 장일수의 구미에도 맞지 않는 일이기도 했다.
이미 짐작은 하였지만 자기의 신분이 이처럼 명백히 청천백일하에 폭로될 줄을 나미에는 정말 몰랐었다. 아니, 그 뿐인가. 그것이 또한 기억조차 희미한 백 영민의 서신 속에 기록되어 있을 줄이야 뉘 알았으랴.
일 순간, 새파랗게 질린 나미에의 얼굴과 바르르 경련을 일으키는 나미에 의 입술이 무참하게도 장 일수의 눈 앞에 있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나미에의 몸가짐과 표정 가짐은 본래의 나미에의 여유 있는 그것으로 돌아 가고 있었다.
「흥, 구두 코를 문질리우면서 성심껏 춤을 가르쳐주었더니, 그래 거기 대한 보수가 그거야? 못 생긴 자식이!… 시굴뚝이가!… 벽창호가!…」
장 일수로서는 좀처럼 알아 들을 수 없는 지나간 날의 기억이 새삼스럽게도 나미에의 심장의 연약한 일부분을 두드리고 지나가는 것이다.
「흥, 모두들 깔끔한걸! 모두들 애국자야! 그래도 그렇고, 그 못 생긴 자식도 그렇고, 모두 나미에의 순정을 진흙 발로 문질러 버렸어!」
쭉 하고 소리가 나도록 나미에는 술잔을 들이키고 나서
「자아!」
하고, 잔을 장 일수 앞에다 탁 내밀었다.
자아 들어요 「 , . 어서 그대도 한 잔 들어요. 오늘밤, 이 술이 약주(藥酒)가 될런지 독주(毒酒)가 될런지, 그건 그대도 모르고 나도 모르는, 오직 신(神)만이 알고 있는 일! 마시다 마시다 취토록 마시다, 흥겨워지거든 약주가 되고 흥이 깨지거든 독주가 될 수 밖에 ─」
그러나 장 일수는 하등의 대꾸도 없이 돌부처처럼 묵묵히 나미에의 독기를 띤 야무진 얼굴을 뚫어지도록 들여다 본다. 무서운 폭풍우가 일 것만 같은 그 어떤 불길한 생각이 문득 장 일수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 갔다.
그는 불연듯 등 뒤를 돌아다 보았다. 자기를 감시하는 그 어떤 날카로운 눈초리가 군중 속에 있는 것같았기 때문이다.
「왜 이리 두리번 거리는 거요? 호랑이의 소굴일 줄 모르고 온 사람 같애.」
「호랑이가 보이지 않는데 ─」
「흥, 능청 맞은 호랑이가 포수 앞에 그리 흘흘히 나타날 것 같애?」
「함정을 놓았나?」
「포수가 무기를 가졌으니……」
장 일수의 손이 불연듯 양복 주머니를 위로 덮었다.
「떠들것 없어! 그만한 준비도 없이 덤벼들 그대도 아닐테니까. 그러나 잘못 하단 빠져 나가기가 약간 귀찮을까 싶은데 ─」
「허 운옥 운운은 역시 미낀(餌[이])가?」
「천만에! 이층에서 님 오시기를 목늘여 기다리고 있는데 ─」
「만나게 해 줘요.」
「고것 뿐이야?」
「무엇이? ─」
「오늘 밤 이 자리에 나타난 목적이 고것 뿐이야?」
「유에링!」
하고, 그대 장 일수는 힘차게 부르며 나미에의 손을 덤썩 잡고 벌떡 일어섰다.
「유에링, 춤을 추자! 모든 것을 망각하고 열심히 춤을 추자. 그대의 정열과 나의 정열을 저울질 해보는 귀중한 밤이다! 자아, 유에링! 내 사랑 유 에링! 그대의 품 안에서 내 정열이 꺼지느냐, 내 품 안에서 그대의 정열이 질식을 하느냐? ─」
장 욱은 나미에의 풍요한 허리에다 손을 주면서 해저(海底)의 수풀인양 어지럽게 흐느적거리는 육체의 물결 속으로 힘차게 들어 갔다.
3
편집「탱고」에 맞추어 춤을 추면서 하는 귓속말이다.
「유에링, 오늘 밤은 어째 그처럼 유에링의 마음에 가시가 돋았소?」
「…………」
나미에는 그순간 사랑의 불타오르는 한떨기 무르익은 장미꽃의 가시를 문득 머리에 그림 그려 보는것이다.
「가시는 아직 돋지 않았나 봐요. 내 가슴에 핀 이 동백꽃처럼 이 순간에 있어서의 유에링의 순정은 곱답니다. 그러나……」
나미에는 한 번
「후우 ─」
하고, 깊은 한숨을 지으며
「그러나 지금 그대의 주머니에 무기가 들어 있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유 에링은 한없이 울고 싶어요.」
「유에링!」
장 일수는 팔목에 힘을 주었다.
「너무 끌어 안지 말아요. 사람들이 숭을 본답니다.」
「유에링!」
「유에링은 인제 고만 두세요. 나미에 ─ 일본의 여간첩 하세가와· 나미에라고 똑똑히 불러 주세요.」
「나미에!」
「나미에의 사모치는 이 마음이 남 모르게 울다가 싫건 싫건 구슬피 울다가 눈물이 마를 때, 쨩위, 내 사랑하는 쨩위! 그때는 정말 나미에의 마음에 가시가 돋는 줄로 알아 주세요. 그러니까…… 그러니까 오늘 밤의 이 춤이 최후의 춤이 될런지 몰라요. 죽엄의 무도(舞蹈)! 애증(愛憎)의 십자로(十字路)에서 미친 듯이 헤매이다가 사랑의 적탄(敵彈)에 이슬처럼 사라진 그 어떤 불쌍한 여간첩은 없었던가요?」
「유에링, 왜 그리 슬픈 이야기만 하오? 오늘 밤 유에링은 술이 좀 지나쳤나 보오.」
「흥, 님은 왜 또 그처럼 술 한 잔도 톡톡히 못 마시우? 유에링이 그처럼 도 무섭던가요? 유에링을 그처럼 못 믿었었나요? 님이여, 대답 좀 해 봐요.」
「…………」
장 일수는 대답이 없다. 아니, 장 일수는 대답을 못했다.
동안 시장 뒷골목에서 「 님이 영웅처럼 뛰처 나와 나를 구해 준 것도 지금 생각하면 한 막의 연극! 그런 줄도 모르고, 진정 그런 줄도 모르고 소녀처럼 가슴을 울렁거리며 님을 모시던 나미에 만이 한없이 가엾어 졌지. 사랑을 위하여, 님을 위하여 조국을 버릴 수도 있은 나미에 이기도 했지만, 그러나……
「그러나……?」
「그러나 스텦을 내짚을 때마다 내 옆구리를 툭툭치는 님의 무기를 감촉하는 순간, 나에게도 조국이 있다는 생리의 부르짖음을 분명히 들었답니다.
님이여, 그런 쓸데 없는 물건을 글쎄 왜 갖구 오시는 거요?」
「유에링, 미안했소.」
「벌써 늦었어요. 유에링의 마음에 가시가 돋는가봐요. 그래두 행여나 하고 오늘 밤, 꿈 많은 소녀들처럼 이런 동백꽃 같은 걸 다 꽂아 봤지만, 흥─ 」
하고, 나미에는 가슴에 달린 동백 꽃을 떼어 스테이지에다 아낌없이 내던져 버렷다. 동백꽃은 사람들의 발길에 채워 이리 저리 굴러 댕기다가 마침내는 그 누구의 발 밑에서 무참히도 짚밟혀 버리고 말았다.
「님도 보셨는가요? 저 동백꽃의 가엾은 최후를.」
「…………」
장 일수는 덤덤히 말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