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의 마당
편집1
편집이튿날 운옥은 먼 동이 훤하니 트기 시작할 무렵부터 부엌으로 나가서 유경일 위하여 흰미음을 끓여다 권하면서 병인의 이마를 손으로 짚어 보았다.
열이 조금도 내리지 「 않았어요. 의사 선생의 말씀은 아침이면 좀 내릴 꺼라고 하시던데……」
그 말에는 대답을 않고
「언니, 어서 나가 보세요. 시간 늦음 어떻걸려구……」
「그럼 나 잠깐 나갔다 올께, 바람 쐬지 말구 가만누어 있어요.」
「나 죽는 거 조금도 무섭지 않으니까 괜찮아요.」
「또 쓸데없는 소리만…… 혜경인 너무 마음이 꼬옹해서 못쓰겠어! 뻔히 어머니랑 애 아버지랑 다살아 있는 줄 내가 다 짐작하구 있는데, 어쩌면 거기 대해선 한 마디두 말은 없구 혼잣 속으로만 꽁꽁 앓구 있는지 몰라?」
「말 함 뭘 해요? 아이, 창피해! 그런 말 언니보구 했다가 주책없는 맹꽁이라는 말 들을께 무서워요.」
「아무리 내가 그럴라구……?」
「어서 가 보세요.」
「음, 그럼 내 곧 돌아 올께요.」
「그처럼 사람 많은데 가두 괜찮겠수?…그 애꾸눈이……」
「괜찮아요. 그인 오늘 거기에 나오진 않을꺼야요.」
윤 선생의 말을 들으면 오늘 신부 잔치를 한다지 않는가.
「그럼 금동아, 내 이내 다녀 올께, 엄마 애 태지말구 가만히 자요.」
운옥은 콜콜 잠든 어린애의 얼굴을 한 번 들여다보면서 일어 섰다.
「언니, 그 부대가 어디루 가는지 알아 보구 와요.」
운옥이가 방을 나가려는데 유경은 그런 말을 했다. 그러나 운옥은 그것이 자기를 위해서 하는 말인 줄만 알고
「알아 보지 않아도 나가믄 알걸요, 뭐.」
혹시 누구의 눈에 띠일까 염려하여 목도리로 얼굴 절반을 가리우면서 운옥은 집을 나섰다.
이른 아침이다. 집을 나서자 운옥의 발길은 절반은 달리다시피 하여 허둥지둥 삼선교로 걸어 왔다.
「── 간호원 모집 ──」
어저께 본 적십자 병원의 간호원 모집 광고가 다릿목에서 다시금 운옥의 걸음을 멈추었다.
「현지 파견! 기일은 내달 十五[십오]일까지!」
운옥은 광고판 앞에 우뚝 마주서서 간호원 모집에 응모를 해서든지, 그렇지 않으면 자기 혼자서라도 북지면 북지, 남양이면 남양으로 영민의 뒤를 따라갈 것을 결정적으로 마음에 결심하였다.
「그이를 따라서……그이를 따라서……」
영민을 따라서 북지던 남양이던 운옥은 가야만 했다. 나어린 영민을 六 [육]년 동안이나 모셔온 운옥이가 아니었던가. 그리고 그러한 운옥이가 오늘날 왜인의 강권을 거부할 바 없어 소새끼나 돼지새끼들처럼 도살장으로 끌리어 나가는 가엾은 영민의 신세를 생각할 때, 운옥의 생리로서는 가만히 앉아서 바라다만 볼 수는 도저히 없었다.
「이 권총에는 세 알의 탄환이 들어 있다. 하나는 네 몸을 위하여, 하나는 네 남편을 위하여, 그리고 하나는 네 조국을 위하여 사용하여라!」
아버지의 거룩하신 유언이 이 순간처럼 절실히 운옥에게 느껴진 때는 없었다.
「그렇다. 때는 마침내 왔다! 조국을 위하여, 그리고 그분을 위하여 이 조그만 몸 하나를 바쳐도 좋은 때는 마침내 온 것이다!」
그 순간, 그 어떤 비장한 전율이 운옥의 전신을 오주주하니 습격해 왔다.
이윽고 운옥은 전차를 탔다.
유경은 그 즈음 거의 四十[사십]도에 가까운 신열을 가진 몸으로 누웠던 잠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앉았다.
「그이가 만일 용산 부대에 입영을 하였다면?……」
어제 밤부터 하는 영민의 생각이 다시금 유경의 가슴을 무섭게 쳤다. 열에 뜬 유경의 쇠약한 신경에 거머리처럼 달려 붙어서 떨어지지 않는 것은 오로지 그 일념 뿐이었다.
「이번 떠나면 영영 돌아오지 못할 사람이 될런지도 모를 그이가 아닌가!
거즛으로라도 나를 사랑해 준 사람, 불신의 피로라도 나에게 씨를 뿌려준 사람 ── 그 사람이 죽는다? 아니, 죽을지도 모른다!」
유경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방 한 가운데 우뚝섰다. 흩으러진 머리카락, 열에 뜬 벌건 눈동자 ── 일어서는 순간, 다리에 힘을 잃은 유경이의 가냘픈 몸이 휘친하고 쓰러지면서 도로 펄썩 방바닥에 주저앉았다.
주저 앉으면서 유경은 미친 사람처럼 달려들어 잠들어 있는 어린애를 와락 끌어 안았다. 어린애가 호닥닥 놀래어
「으악 ──」
하고 울었다. 울어대는 어린애의 말랑말랑한 볼을 자기 얼굴에 수 없이 부벼보며, 유경이는 흐늑흐늑 느껴 울기 시작하였다.
금동아 아빠가 죽을지도 「 , 모른다! 너는 영영 아빠를 보지 못할지도 모른다!」
온갖 허세와 온갖 자존심이 운무처럼 사라지는 순간, 그렇다, 거즛이라도 좋았다! 푹풍처럼 유경이의 심신을 휩쓸어 버린 것은 한 사나이 백 영민에게 바쳤던 처녀 오 유경이의 사랑의 불꽃이었다.
「영민씨, 영민씨! 당신은 지금 어디 있소?……」
좀더 미리 영민을 찾아 보지 못한 것이 유경에게는 천추의 원한이었다.
「금동아, 아빠가, 아빠가……」
어린애를 안은채 유경은 다시금 벌떡 몸을 일으키다가 다시금 쓸어지고 말았다.
2
편집비극의 날, 一九四四[일구사사]년 一[일]월 二十[이십]일은 마침내 온 것이다.
이날 아침, 날씨는 매우 차고 하늘은 찌푸듯이 푸르러 있었다. 고요한 효명(曉明) 속에서 본의 아닌 만세성과 함께 밝아진 구슬픈 아침이다. 五[오] 천 명의 학도병과 그들의 수 많은 가족이 하룻밤을 꼬빡 울어 새운 억울한 아침이다.
수천 군중이 비장한 감정의 연(鉛) 덩어리가 되어 버린채 정거장 「포옴」
안에 물결처럼 넘쳐 흐르고 있었다.
이 구석 저 구석에서 발악을 하듯이 들려오는
「반자이, 반자이!」
의, 우렁찬 환호의 목소리 ── 그것은 과연 누구를 위한 만세성이며 무엇을 위한 환호의 부르짖음인고? 기쁘다는 말이냐, 슬프다는 말이냐? ── 기쁘면 기쁘다고 기쁘다는 얼굴을 지어 주려므나. 슬프면 슬프다고 슬프다는 얼굴을 가져 주려므나. 군중이여, 그대들의 얼굴은 기쁨과 슬픔을 동시에 표현할 수 있는 백면상(白面相)이더란 말이냐?……
우렁찬 만세성과 물결 치는 깃발은 정녕 그것은, 정녕 그것은 기쁨을 표현하는 언어동작이건만 그대들의 마음은 어이하여 그처럼도 구슬픈 눈물을 흘리고 있느냐?……
기쁘면 기쁜대로 소리 높여 웃음을 웃으며 네 활계를 활짝 펴고 춤이라도 추어다고! 슬프면 슬픈대로 정거장이 떠나갈 듯이 목을 놓아 울어라도 주려므나!
웃음도 웃지 않았도다 . 정거장도 떠나가지 않았도다. 오오, 그대 가엾은 백면상이에, 사랑스러운 피에로여!
울고 있는 것은 오로지 학병들 자신이었고 학병을 가진 가족들 뿐이었다.
명실공이 내선 일체가 된 이 영광에 찬 기쁜 날을 왜 눈물로 맞이 하느냐고, 총칼을 내 대고 눈물을 제지하지 않는 관헌의 태도가 수상도 스럽다.
아주 관대하구나.
「오빠, 오빠!」
하고 달려들어 「다스끼」를 메인 오빠의 품 안에 안겨 하늘이 무너질 듯이 발버둥을 치면서 울어대는 나 어린 동생들 ── 하룻밤이 새도록 울고 난 거쉬인 목소리로
「야아, ○○아 야아, ○○아!」
하고 계산이 처럼 고함을 치며 손주의 손목을 와락 부여잡는 할아버지 ──
「어머니의 사진을 꼭 품에 품고 있거라. 총알은 무심하지 않으니 이 어미를 봐서라도 꼭 너를 피해 줄꺼다. ──」
아들의 옷깃에 손질을 하며 아들의 모자를 바로 씌워 주시는 간절한 애원 ── 사흘 전에 부랴부랴 혼인식을 지낸 나 어린 신부. 수집은 듯이 남편의 새끼 손가락 하나를 다정히 매만지며
「제 걱정 조금두 마시고… 부디부디 몸, 몸 조심 하시여……」
말 끝을 채 맺지 못하고 입을 삐쭉거리며 주욱주욱 울어대는 안타깝게 서러운 아내 ──
「오오, 님이여, 편히 가시라!」
설사 정거장이 떠나가게 목을 놓아 울지는 못했을망정, 설사 학도병을 갖지 않은 사람일망정 이 날이 아침을 맞이 하는 이 비극의 마당에서 이 한마디를 마음 속 한편 구석에서 중얼거리지 않은 자가 있다면, 정녕 그런 자가 있다면 오오, 그대야 말로 三[삼]천만 민중의 죄인일 수 밖에 별 도리가 없지 않느냐!
「사랑하는 내 님이여! 편히 가시라!」
마디마디 저린 뼈, 뻐개져 오는 가슴속 ── 이 한 마디야 말로 三[삼]천만 민중의 거짓없는 마음이었다. 아니, 거짓없는 마음이여야만 했었다.
「반자이!」
「반자이!」
「반자이!」
미친 듯이 휘날리는 일본제국의 깃발의 물결, 물결, 물결!
정거장이 떠나갈 듯이 불러주는 이 왜말로 된 구슬픈 만세 소리!
대체 무엇을 어떻게 , 하라는 이 우렁찬 만세성이뇨? ── 불러 주는 사람도 그것을 몰랐고 불리우는 사람도 그 뜻을 몰랐다. 다만 그들은 입이 있으니 불렀을 따름이요, 귀가 있으니 들었을 뿐이다. 그러다 다못 하나 분명히 알고 있는 것은 보내는 사람이나 떠나는 사람의 마음과 마음을 다사롭게 맺어주는 성스러운 친화력(親和力)이었다.
오오, 권력(權力)의 마당이여, 비극의 무대(舞臺)여!
그들은 이 절대적인 권력의 마당에서 울며 춤을 추는 가엾은 피에로! 이 거대한 비극의 무대 위에서 폭풍의 역사를 눈물로써 아로새기는 가엾은 피에로!
묻노라, 그대 궤변론자(詭辯論者)여! 입이 있거든 항변을 하여라. 그대가 가진 훌륭한 논리도 이 마당에선 한낱 티끌일 뿐, 그대가 품은 위대한 경륜(經綸)도 이 무대에선 허무한 물거품일 따름이 아닌가.
「반자이!」
「반자이!」
「오오, 또 다시 들려 오는구나, 피에로의 짓궂인 대사(臺詞)여!」
억센 한일 자로 힘차게 입을 다물고 차체에 빗비슴이 몸을 기대면서 영민은 감개무량한 듯이 가만이 눈을 감았을 때
「오오, 꼬마!」
하고 외치면서 헐레벌떡 뛰어 온 것은 신 성호였다.
「오오, 콘사이스!」
영민은 눈을 번적 뜨며 신 성호의 손을 와락 부여잡았다.
「영민씨!」
그때 또 하나의 어여쁜 목소리가 옆에서 톡 떨어졌다.
춘심이었다. 아니, 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