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극장/2권/1장

외로운 청춘도

편집

「하하하하……하하하하……」

하고 웃음을 퍼붓다가 유경이의 그림자가 대문 밖으로 사라지자 춘심은 후딱 웃음을 멈추었다.

아무도 듣는 사람이 없는 춘심의 웃음은 한 줄기 공허감(空虛感)을 춘심이 자신에게 주는 효과 밖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렇다. 춘심은 확실히 유경이의 고 면도칼처럼 날카롭고 송곳처럼 뾰족한 자존심을 진흙 발로 보기 좋게 문질러 주었다.

유경은 지고 춘심은 이겼다. 이겼으니까 춘심은 당연히 통쾌한 승리감을 맛보아야 할 것이어늘 아아, 이 어이한 공허감이며 이 어이한 쓸쓸함이뇨!

있는 말, 없는 말을 되는 대로 섞어서 유경을 여지없이 문질러버렸으니 그래 그게 대체 어쨌다는 말이냐?

「너무 했지, 너무 했어. 비린내 나는 풋내기를 그만 너무 학대를 했어.」

뉘우치는 마음도 동시에 들었다.

춘심은 후딱 술상 앞으로 다가 앉으며 영감이 먹다 남긴 소주병을 들어 찻종지에다 철철 넘도록 부었다. 그것을 단 모금에 냉수처럼 벌컥벌컥 들이키면서

「에따 모르겠다. 될대로 되려므나! 춘심이의 인생이 언제는 이뻤더냐?」

춘심은 또 한 잔을 마셨다. 단 번에 확확 얼굴이 닳아오른다.

춘심은 팔고비를 베고 三[삼]간 대청 한 복판에 반듯 누워 버리며

「참, 최 달근이의 말마따나 세상이란 넓구두 좁은 거야. 영민이가 글쎄 계집이 없어서 하필 왜 오 창윤의 딸이야? 그래 고 새침한 얼굴이 그처럼 이뻐? 못생긴 자식이……」

그러다가 담배 연기를 후우 하고 천정을 향하여 내뿜으며

「아아, 돈 나비를 날리며 눈물짓던 춘심이만이 어리석지, 어리석어! 남깨가 쏟아지게 달콤한 여행을 하구 있는데 글쎄 뭘 할려구 따라는 간담? 어리석은 년 다 보겠어! 미친 년 같으니!」

입을 오무라쳐 가지고 담배 연기로 신이 난듯이 한참동안 동그램이를 허공중에 그리다가

「흥, 어떤 년은 팔자 좋아 대학교를 댕기구, 어떤 년은 팔자가 기구하여 요 꼴이란 말이냐? 동자(童子)야 국화주(菊花酒) 걸러라, 얼근 한 잔 취해 보자.」

춘심은 손을 뻗쳐 소주병을 들고 반듯이 누운채 병나팔을 불고 나서 아아 취했다 취했어 「 , , ! 네 꼴이나 내 꼴이나 다른 것이 무어야? 벌거벗고 맞대 보믄 매 한 가지 아닌가. 잘 났으면 어떻구, 못 났으면 어떻단 말이야? 시집 가구 장가 가면 아이 날줄 모르나? 흥, 이거 왜 그러는 거야?

뭣 때문에 뾰죽 했어? 뭣때문에 잘난 척하는 거야? 무엇이 어쩌구 어쨌어?

제가 저를 모욕했다구?」

유경이가 배앝고 간 여러가지 욕설 가운데서도 이 한 마디가 유독히 춘심이의 가슴을 아프게 하였다.

「암만 해두 고년의 말이 맞은 것 같애!」

그러면서 발딱 몸을 일으키는데 대문이 찌꿍 열리며 우편 배달부가 들어 왔다.

「박 분이씨, 가끼도메(서류 편지)요. 도장 쳐 주시요.」

「가끼도메?」

서류 편지가 올데는 없는데?…… 하면서 춘심은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도장을 들고 나갔다.

「아, 신 성호씨가 아냐?」

춘심은 뜻하지 않은 신 성호의 편지를 저으기 긴장한 얼굴로 들여다 본다.

신 성호는 그동안 될 수 있는 한 춘심을 피했다. 춘심은 오 창윤의 소실로 들어 앉은 후에도 출판사로 전화도 걸고 직접 찾아가기도 하였으나 신 성호는 무슨 구실을 만들어 춘심을 피해왔다.

그것은 결코 춘심이가 갑자기 싫어진 때문이 아니다. 아니, 그와 반대로 춘심을 만나면 저도 모르는 사이에 격렬한 정열에 사로잡히고야 말 자신을 경계하기 때문이었다.

언젠가 「그릴」에서 춘심을 만났을 때

「춘심이, 나를 잊어줘요. 나를 고스란히 잊어버리고 현실 속에서 행복을 찾아줘요.」

하였다.

그 말에 춘심은 샐쭉해서

「왜 내가 오 창윤의 소실로 들어앉은 게 배가 아파서 그러슈? 어째 자꾸만 이야기가 그처럼 비뚤어지는 거요?」

「춘심이, 내 말은 그처럼 단순한 의미에서가 아니야.」

「그럼 또 뭐가 있수? 싫어졌음 싫어졌다고 분명히 말을 해요. 싫어졌다는 사람 나 따라 댕기지 않아요.」

「그러니까 춘심은 단순하다는 거야. 아니, 춘심인 너무 욕심이 많아. 꿈은 꿈대로 가슴에 안고 현실은 현실대로 바로 걸으려니까.」

「그럼 어느 누구가 화류계에 나오면서 처녀 총각으루 시집 장가 들 생각으로 나오는 줄 아시우?」

「그러니까 내가 춘심일 오 창윤에게 곱게 시집을 보내지 않았어?」

「그런 걸 다 알면서 삐뚤어지긴 왜 또 비뚤어지는거요? 누구가 시들어 빠진 영감쟁이에게 정이 들어서 갔나?」

그 말에는 대답을 못했다. 대답을 못하다가

「그러니까 어느 편이던지 한 길을 취해 달라는 말이야.」

「한 길을 취할 수 없는 것이 화류계 여자의 현실이구 이상인 줄을 왜 요렇게 몰라 주시우? 아이, 답답두 해라!」

「그래서 춘심인 마음이 편할지 모르지만……그러나 춘심인 적어도 나에게 있어서는 내 첫사랑을 가져 간 여자야! 춘심은 남자를 많이 알지만 난 여자라곤 춘심이 밖에는 몰라! 내 청춘에 불을 질러논 단 한사람의 여자인 춘심이야!」

「그랬음 됐지, 뭘 그러시우? 그래 날 독차지 해야만 되겠수? 월급두 번번히 못 주는 출판사에 댕기면서 제 입 하나두 감당하지 못하는 위인이 그래 날 기어코 모말 같은 셋방 속에 처넣어서 남비 밥을 끓이게 해야만 맘이 편하겠수?」

「그러니까 제발 내 앞에 나타나지 말라는 말이야. 춘심이도 불만을 품고 이 현실을 살아갈 수 밖에 도리가 없는 것이고 나도 또 나대로 불행을 지니고 이 사바를 헤엄쳐 나갈 수 밖에 별 도리가 없는 것이니까. 그렇지 않어, 춘심이?」

「………」

춘심은 한참동안 대답을 못하다가 그 무엇을 결심한 듯이

「잘 알았어요. 내가 너무 욕심쟁이였어요! 이담부턴 찾아오지 않을 테야요.」

그리하여 헤어져 버린 두 사람이었다.

그러한 신 성호에게서 오늘 편지가 온 것이다.

「무슨 편질까?……」

춘심은 봉함을 뜯었다.

신 성호의 편지는 다음과 같은 내용과 함께 五[오]백원 짜리 은행 위체 가두 장 들어있었다.

춘심이!

춘심이는 자꾸만 나의 감정 세계에 파문을 일으키지 말아요. 춘심일 한사코 잊어버리려는 나의 기억을 자꾸만 새롭히지 말아요.

그동안 춘심이가 잠자코 보내 준 두 장의 위체를 도루 돌려 보내니 받아두시요. 처음엔 어디서 온 위체인가 하고 어리벙벙 했었지만 가만히 생각하니 이 넓은 세상에서 나에게 돈을 보내 줄 사람이 있을리 만무해서 이건 필경 춘심이의 장난일 것이라고, 은행에 가서 발송인을 물어보니 역시 춘심이었소.

춘심인 왜 이런 장난을 나에게다 하오? 진부한 말이지만 애인을 판 돈으로 공부를 하라는 말이요, 먹고 살라는 말이요? 그렇지 않다면 춘심은 나를 그러한 사나이로 취급을 하는 모양이지만 그것은 춘심이의 오해지요. 과연 지나간 날 한두 번 춘심이한테 돈을 얻어 간 적이 있기는 했소. 그러나 그것은 사실을 말하자면 내가 스스로 먹고 쓴 것이 아니고 병중에 신음하는 내 진실한 친구의 치료비로 쓴 것이요. 저번 천일관에서 춘심이가 만났던 사나이, 춘심이의 오빠되는 사람과 최 달근이에게 쫓기어 춘심이의 안내를 받아 천일관 뒷문으로 내뺀 사나이가 바루 그 사람이었소.

내 성격이 굳세지를 못하여 화를 낼 데 눈물을 짓고 슬플 때 사람을 웃기지만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춘심이에게까지 오해를 산다면 그것은 정말 슬픈 일이요.

춘심이! 한 손엔 떡을 쥐고 한손엔 꽃을 따려는 귀엽고도 총명한 약자(弱者)로서의 생활철학인(生活哲學人)인 사랑스런 춘심이! 떡을 쥐면 배가 부르지만 꽃을 쥐면 배가 고프오니 내 어찌 춘심을 원망할 수 있으리오. 다만 하나의 약체(弱體)로서의 나 자신을 원망할 뿐이요. 원컨대 내 이제 세계적 걸작을 써서 몇 만 권 몇 十[십]만 권의 책이 팔리면 그때는 춘심이 더러 꽃을 한 번 따 보자겠소.

그럼 욕심 많은 춘심이, 복 많이 받으오. 그러나 한 가지 주의할 것은 떡을 지나치게 많이 먹다가 체하질랑 말아요.

── 신 성호 ── 춘심은 편지를 구겨쥐고 마루 끝에 기운없이 펄썩 주저 앉으며 맘 대루들 해라 「 . 다들 그만둬라. 모두 잘 났지. 춘심이만 못났고 다들 잘 났지!」

그러면서 편지를 쭉쭉 춘심은 찢다가 그만 대청에 쓰러지듯이 엎디어 흐늑흐늑 느껴 울기 시작하였다.

「다 가버려라. 네 사랑, 내 사랑 다 가버려라! 내 눈 앞에서 싹 다 사라져 버려요! 그래 떡두 먹구 꽃도 따겠어? 미친 년 같으니라구! 으흐흐 으흐흐……」

하고, 한참 느껴 울다가 머리를 후딱 들며

「뭣이 어쨌다구?……떡을 많이 먹구 체하질랑 말라구?……고 년의 말투와 어딘가 비슷한 데가 있잖어? 제가 저를 모욕했다는 말과 비슷하지 않어?……」

분명히 일맥의 공통성을 가진 말임에 틀림 없었다. 그리고 제가 저를 모욕한다는 유경이의 말과 함께 신 성호의 이 맨 마지막 한 마디가 춘심의 가슴 밑을 송곳으로 자꾸만 찔렀다.

춘심은 눈물을 거두고 삼면경 앞에 우뚝 마주 서서 거울을 들여다 보았다.

울지도 않고 웃지도 않는 엄숙한 얼굴을 춘심은 거울 속에서 발견하였다.

춘심이의 인생관이 흔들리기 시작하는 귀중한 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