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극장/1권/39장

고달픈 인생이여

편집

그지음 이층에서 그러한 절박한 위험이 자기들을 둘러싸고 일촉즉발의 태세를 취하고 있는 줄도 모르는 그들 세 젊은이는 완전히 회복한 중학시절의 감미로운 감정 속에서 다정 다감한 청춘의 하룻밤을 한 잔 술에 흥겨이 적시고 있었던 것이니

「자아 춘심이, 이제 그만 했으면 내 옆으로 좀 와 보겠지.」

장 일수와 붙안고 잠깐 잠이 들었던 신 성호가 일어나면서 춘심이의 손목을 끌었다. 몸이 허약해진 장 일수는 아직도 골아 떨어진 채다.

「아이, 정말 내가 그만 깜박 잊었네. 내 귀여운 동생이 울고 있는걸. 아이, 참 가엾기두 해라.」

춘심은 냉큼 일어나 신 성호의 옆으로 다가와 앉으면서

「울었어? 누나 보고 싶어 울었어?」

춘심은 신 성호의 얼굴을 어루만져 준다.

「음, 누난 미워. 나 하군 안 놀구, 다른 애 하구만 노는걸 뭐. 난 싫어!

난 몰라!」

「아이, 가엾어라. 자아, 눈깔사탕 주께 울지 말아요, 응?」

그러면서 춘심이가 술잔을 들어 신 성호의 입에다 갖다 대려는 바로 그때였다.

「땅그랑!」

하고, 육회를 담은 접시위에 무엇인가가 떨어졌다.

「이게 뭐야?」

「아이, 깜짝 놀랬다!」

신 성호와 춘심이가 호닥닥 일어나 들창 밖을 내다보았다.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이게 무슨 종이 조각이 아닌가?」

그러면서 영민은 빨간 육수 속에 파묻힌 밤알 만한 종이 돌을 집었다. 무엇이 적혀있는 종이 조각으로 조약돌을 싼 것이었다. 거기에는 연필로 다음과 같은 간단한 글월이 적혀 있었다.

「장 일수씨, 빨리 몸을 피하시요. 현관 문은 위험합니다. 다른데로 피하시요!」

영민은 번쩍 머리를 들었다.

「장군, 장군, 빨리 일어나게!」

그렇게 외치면서 장 일수를 흔들었다.

「응?……」

그 소리에 장 일수가 몸을 일으키었다.

「이걸 보게. 누구가 들창으로 던진 것인데……」

장 일수는 조약돌을 싼 종이 조각에 시선을 던지고 나서

「음 ──」

하고, 깊은 신음을 한 후에

「백군, 그리고 신군!」

장 일수는 백 영민과 신 성호의 손을 덥썩 붙잡았다.

「당분간 자네들과도 만나지 못하게 될것 같으네! 그러면……」

장 일수의 눈이 번쩍 빛났다.

「아, 그러면 군은 다시 북쪽으로?……」

영민도 벌떡 일어났다. 장 일수는 빠른 말씨로

「음, 나의 소식이 알구 싶거든 바루 북경(北京), 정양문(正陽門) 앞 거리에 있는 캬바레 ─ 용궁(龍宮)의 매담한테 연락을 취해 주게!」

「아, 잘 알았네! 빨리…… 장군을 뒷문으로……」

「아, 춘심이! 장군을 빨리 뒷문으로 안내를 해!」

하는 신 성호의 당황한 말에

「네, 그럼 빨리 절 따라 나오세요!」

춘심이가 냉큼 앞장을 서서 문을 열었다.

「그럼 꼬마, 콘사이스, 나는 가네!」

「대통령, 부디 몸 조심해서……」

춘심이의 뒤를 따라 휙하고 바람처럼 문 밖으로 사라지는 장 일수의 뒷모양을 영민과 성호는 멍하니 바라보고 섰다.

「아아, 대통령의 고달픈 생활이 또 다시 시작됐다!」

바람처럼 휙 사라진 그 어깨 넓은 뒷모양에서 한 사람의 위대한 영웅의 모습을 두 젊은이는 문득 보았다.

조금 뒤 ── 노크소리와 함께 문이 휙 열리며 선뜻 방안으로 들어선 두 사나이 ── 앞선 것은 권총을 든 최 달근이었고 뒤선 것은 애꾸눈이 박 준길이었다.

문을 열고 선뜻 들어선 두 사나이

「으응?……놈이 벌써 뺐는가?……」

그렇게 외치며 최 달근은 재빠른 눈초리로 방 안을 휘잉 돌아다 본다.

「옛? 뺐다구요?……」

박 준길이다.

「음, 빨리 뒷 문으로 따라 나가라!」

날쎈 사냥개처럼 다시 복도로 뛰쳐 나가는 박 준길이다.

「최군, 이게 얼마 만인가?」

백 영민의 물음이다.

「으음……」

최 달근은 그저 장 일수를 놓친 것만이 통분하다.

「오래간만에 만나는 군이 그와 같은 무기로 우리를 맞이할 줄은 천만 뜻밖이 아닌가?」

신 성호가 주는 술잔을 천천히 들이키면서 하는 영민의 말이다.

「무슨 일인지는 알수 없으나 무기를 거두고 오래간만에 술이나 한 잔 먹어 보는게 어때?…… 자 아 ──」

하고, 영민은 술잔을 권하였다.

그때야 최 달근도 하는 수 없는 듯이 무기를 거두고 인제 방금 장 일수가 앉았던 자리에 천천히 앉으면서

「참 오랫만인걸.── 그런데 술잔은 셋인데 사람은 둘 밖에 없다는 말이겠다! 흐흥……」

하고, 그 음침한 얼굴로 잔을 받아 쭉 마시었다.

둘에다 「 하나를 더하면 셋이 된다는 것은 초등 수학이구……」

「그러니까 고등 수학으론 둘에다 하나를 더해도 둘이 될수 있다는 말인가?」

최 달근도 녹녹지 않다.

「암, 초등 수학은 학교에서 배는 것이구 고등 수학은 세상에서 배는 것이야. 그래 별이 한 개 더 붙을 만한 무슨 커다란 잉어를 한 놈 잡으러 왔는가?」

「음, 검은 수염이 난 잉어, 색 안경을 낀 잉어를 필시 놓쳤나부네.

음……그런데 신군.」

「최군, 왜 그러나?」

「자네, 그만 했으면 수완이 상당하네. 금시 이 자리에 앉아있던 잉어를 어디로 쫓아 버렸나?」

「그놈의 잉어가 헤엄만 치는 줄 알았더니, 토끼처럼 껑충 뛰어 넘을 줄두 안단 말이야.」

「어디로?」

신 성호는 대답 대신 턱으로 열어재친 들창을 가리켰다.

「그래?……」

최 달근은 일어서 들창 밖을 내다보다가 다시 돌아와 앉으며

「춘심은 대체 어딜 갔는가?」

「나 여기 있지 안수?」

어느 사이에 춘심이가 들어서면서 하는 대답이다.

「흐흥, 암만해두 요것이 탈집이야!」

하고, 춘심을 무서운 눈초리로 노려보면서

「그래 뒷문으론 또 어떤 서방을 전송하러 갔댔어? 범인은 익죄(犯人隱匿罪)라는 한 대목이 형법에 씌어 있는 줄을 몰라?」

「이거 왜들 그러는 거요? 이러지들 않구는 못 산답디까?」

춘심은 찍 하고 성냥을 그어 담배를 붙여 문다.

「요것 봐라? 요것이 다 대소설가 신 성호 선생에게 밴 수작이란 말이겠다?」

「그러지들 말아요. 누군 굶어 죽였답디까?」

그때 헐레벌떡 박 준길이가 들어 왔다.

「놓쳤읍니다! 그만 요것 때문에……」

그러면서 춘심을 무섭게 흘긴다.

「오빤 왜 또 그러는 거유? 오빠 안그런다구 부모 밥 굶길 춘심인 아니야요.」

「뭣이 어때?」

「흥, 잘들 났지!」

「흥 잘들 났지! 글쎄 뭣 때문에들 그리 떠드는거요?」

하고, 코웃음으로 비웃어 버리는 춘심에게 주먹을 들고 대들려던 준길의 애꾸눈이 영민의 얼굴을 무심중 붙잡았다.

「흥, 난 또 누군가 했더니……설마 이 애꾸눈이의 내력을 모르진 않겠지?」

그러면서, 너 오늘 잘 만났다는 듯이 최 달근을 향하여

「이 놈들을 그대로 내버려 둬요? 중대 범인을 은익한 죄로 모두 꽁꽁 동여매 갑시다.」

그때 최 달근은 여유있는 태도로 빙글빙글 웃으면서

「자넬랑 좀 가만 있게. 어쨌든 내 구 년 친구야.」

그리고는 영민과 신 성호를 바라보며 천천히 몸을 일으키면서

「오늘 밤은 이만하고 가겠네. 하여튼 군들이 오늘 밤 재수가 좋았던 것만은 알아 두게!」

푸르럭거리는 박 준길을 대동하고 밖으로 나가면서

「그러나 자중해야만 될걸! 이 최 달근의 별명이 뭣이었지?……땅개, 땅개, 하하하…개 꼬리 三[삼]년에 족재비 꼬리 안된다구, 아마 이것은 군들이 나를 두고 하는 말일게라. 하하하……」

자기 인생에 자신을 가지고 하는 한 마디였다.

「하, 하, 하……」

최 달근의, 유쾌한 웃음 소리가 복도 저편으로 천정을 울리며 점점 멀리 사라 진다.

「자신이 만만할걸.」

최 달근이가 사라진 문쪽을 뚫어질 듯이 바라보며 하는 신 성호의 말이다.

「하기야 어차피 자기 인생을 갚지 못하고 살아가는 물거품 같은 인간들」

「몰라. 하하하……땅개가 제법 우리들에게 충고를 한다?……하하하……」

「하, 하, 하……」

백 영민과 신 성호는 말똥말똥하니 앉았는 춘심을 양편에서 서로 껴안아 일으키면서 한바탕 호기있게 웃어 댔다.

자아 춘심이 우리도 「 , , 인제 돌아가 보세. 암만해두 춘심인 행운이야. 한 팔엔 백 영민, 한 팔엔 신 성호 ── 아아, 취했다. 취했어!」

신 성호는 비틀거리는 몸을 춘심의 갸냘픈 어깨위에다 얹으면서

「춘심이.」

「응?」

「백 영민은 단념하는게 좋아.」

「누가 뭐 어쨌나 뭐?」

「인격자 백 영민 선생은 내일 오후 부산행 급행열차로 포르릉 날아가 버릴 파랑새야. 알았어? 파랑새!」

「파랑새엔 행복이 가득 깃들어 있다지 않아요?」

「그건 행복의 그림자야. 행복은 바루 춘심이의 눈앞에 있는 거야.」

「아이, 귀여! 어쩌면 말재주가 그처럼 늘었을까?」

춘심은 신 성호의 볼 위에다 입술을 다만히 갖다 댄다.

영민은 살그머니 먼저 현관으로 피해 내려 오면서 누구한테 들은상 싶은 이야긴데, 하였다.

「아, 유경이의 편지에 그런 말이 씌어 있었다. 어떤 진실한 과학자가 유경이에게 했다는 말 ── 행복은 먼 산넘어 있는 것이 아니고 바로 유경이의 눈 앞에 있다구……」

그순간, 영민은 유경이가 무척 그리워 진다. 아까 낮에 만나본 유경이었건만, 그리고 내일 오후차로 동경으로 함께 들어갈 유경이건만, 그 하루 동안이 갑자기 불안해졌다. 그 진실한 과학자라는 인물이 홀랑 유경을 업어 갈 것만 같았다.

「나 내일 정거장에 나갈께요.」

인력거를 타고 사라지면서 춘심은 영민을 돌아다 보았다.

「이번엔 정말 부산꺼정 배웅을 갈테야요.」

밤이 갈수록 눈은 자꾸만 더 퍼붓는다. 돈화문 앞 넓은 거리를 안국동으로 향하여 술취한 두 젊은이는 창랑한 걸음으로 거닐고 있었다. 신 성호의 하숙방을 찾아가는 두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 종이 돌은 대체 누구가 던졌는고?」

「글쎄, 그것이 이상한데. 아마 장군의 동지겠지.」

신 성호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우연의 일치일른지 「 모르지만 어디서 한 번 본 것 같은 필적인데……」

무척 낯익은 글씨였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생각이 튀어 나오지 않는 영민이었다.

이윽고, 안국동 신 성호의 하숙 대문 앞까지 다달았을 때, 골목 밖까지 따라온 여인이 한 사람 있었다. 운옥이었다.

운옥은 두 사람이 들어간 대문 밖을 미친 사람처럼 삥삥 돌았다. 지나가는 행인들이 수상하다는 듯이 운옥을 힐끗힐끗 돌아다 보았다.

그러다가 운옥이가 청량리 자기 숙소로 돌아온 것은 거의 열 두시가 가까웠을 무렵이었다. 마루 끝에 항상 놓여 있던 장 일수의 구두가 보이지 않는 것을 보니 아직 돌아오지 않은 모양이다. 눈을 털고 텅 비인 방으로 들어섰다. 눈물이 핑 눈자욱을 감돌았다.

그렇게도 보고 싶던 사람과 같은 서울 땅에서 밤을 새우건만, 그리고 불과 지척간에 그이의 모습을 보았건만 말 한 마디, 인사 한 번 못하고 돌아온 자기의 외롭고 쓸쓸한 신세가 더할 수 없이 불쌍해 지는 것이다.

뜨거운 눈물이 주루루 흘러 내렸다. 기운없이 책상 앞에 주저 앉아서 운옥은 엎드려 졌다. 그 엎드려진 허 운옥의 캄캄한 눈자욱 속에 돌연 애꾸눈이 박 준길이의 험상궂은 얼굴이 불쑥 나타났다.

「아, 하마트면……」

운옥은 아직도 가슴이 설렁거려 견딜 수가 없다. 서울 바닥이 갑자기 무서워졌다.

「그런데 장 선생은 어찌 되었을까? 어디로 피신을 했을까?……」

그때 운옥은 엎드려진 자기 팔굼치 밑에서 한 장의 봉투를 발견하였다. 봉투에는 분명히 「허 운옥씨」라고 씌어 있었다. 운옥은 당황히 봉투를 뜯었다.

운옥씨, 나는 다시금 거치러운 생활 속으로 뛰어 들어 가렵니다. 나에게는 안일한 생활이라는 것이 격에 맞지를 않읍니다. 육체적으로는 상처를 받은 몸이었읍니다만 돌아보면 즐거운 한 달 동안이었읍니다. 그리고 그것은 말하자면 괴로운 즐거움이었읍니다. 즐거운 괴로움이기도 하였읍니다.

나는 운옥씨에게 기념물 같은 것을 하나 남겨두고 싶었읍니다만 그것은 결국 운옥씨를 학대하는 결과를 맺을것 같아서 그만 두고 떠납니다.

그러나 나에게는 운옥씨를 생각하지 않으면 아니 될 때가 항상 있을 것 같아서 운옥씨가 저에게 주신 귀중한 선물을 하나 갖고 갑니다. 종이 조각에 싼 조약돌 한개! 이 조그만 조약돌을 들여다 볼 때마다 나는 한 사람의 고귀한 여인의 동지애 (同志愛)를 느끼고 자신을 편달하고자 합니다. 분방하여 김 준혁 박사의 후의에 대하여 따로이 쓰지 못하오니 부디 치사의 말씀을 전해 주십시요.

장 일수 올림추신 ── 혹시 북쪽으로 여행을 오실 때가 계시거든 북경 정양문 앞 거리에 있는 「캬바레 ─」용궁을 찾아주십시요.

「아, 장 선생이, 내 글씨를 알아 보셨구나!」

운옥은 편지를 움켜 쥔 채 가늘게 한 번 몸부림을 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