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를 위한 청춘의 향연인고
편집1
편집여기는 요정 청일관 二[이]층 ── 요릿상이 한량 없이 빈약하다. 그러나 그것은 일개의 가난한 문학 청년 신성호로서는 아름다운 우정을 위하여 한 달 동안의 생활을 희생하는 호화로운 향연(饗宴)이었다.
「자아 백군, 어서 그 잔을 내게.」
「음, ──」
백 영민은 권하는대로 쭉 들이키면서
「그래 땅개가 한사코 대통령을 노리고 있다는 말인가?」
「음, 붙잡기만 하면 땅개의 어깨 위에 별이 한 개 더 올라 앉는다는 거야. 어때? 그만 했으면 인간무대(人間舞臺)라는 것이 어떻다는 걸 짐작하겠지?」
몇 잔 술에 신 성호의 얼굴이 계집애처럼 빨개졌다.
「그러나 대통령으로선 적지않게 불명옌걸. 땅개에게 상처를 입다니……」
「그게 아직 대통령으로선 인간무대를 모르는 탓이야. 자기도 무기는 가졌지만 설마 동창생 사이에 쏘기야 할라구?── 그렇게 믿었던 것이 도대체 어리석었다는 말이야.」
「음, 그 설마가 빗맞았다는 말이지?」
백 영민의 표정이 갑자기 엄숙해 진다.
「자아, 백군, 어서 술이나 먹세. 그렇게 심각한 얼굴을 해서야 이 호화로운 향연이 보람이 있겠나? 마시구 취하구, 노래하구……」
신 성호는 오늘 밤 이 자리를 한량없이 사랑한다. 아니, 그것은 백 영민도 같았다.
「그런데 대통령이 오긴 올 것인가?」
「암, 오구말구.」
그러면서 신 성호는 팔뚝 시계를 들여다 보았다. 그때 색안경을 끼고 코밑에 수염이 난 젊은 신사 한 사람이 뽀이의 안내를 받아 눈을 털면서 들어 왔다.
「으와, 핫, 핫, 핫」
신사는 배와 어깨를 동시에 들석거리며 두 팔을 쫙 벌리고 호걸풍의 웃음을 한바탕 쏟아 놓았다.
「아, 대통령이 아닌가?」
백 영민과 신 성호는 동시에 그렇게 외치며 장 일수를 맞이하였다.
「여어, 꼬마! 이게 얼마 만인고?」
장 일수는 덤뻑 영민의 손을 잡았다.
「자네, 듣건대 불명예의 부상을 받았다던데 이젠 괜찮은가?」
「으와 하, 하, 하……불명예! 불명예! 땅개한테 물렸으니 불명예가 아닐 수 없지. 하, 하, 하…… 그런데 어떤가? 이만 했으면 땅개의 눈을 쾌히 속이겠나, 응?」
그러면서 수염을 한 번 어루만져 보인다.
「음, 우리두 처음엔 감쪽같이 속았네.」
「그렇겠지, 그렇구 말구.」
그리고는 술상 앞에 펄썩 주저 앉으며
「자네들 벌써 상당히 마셨네그려? 이건 좀 불공평 한걸.」
제 손으로 술병을 두 서너 개 자기 앞으로 다가 놓고 커다란 찻종지에다 좔좔좔좔 붓는다. 그리고는 단숨에 쭉 들이키며
「자아, 백군, 자네도 이걸루 한잔 하게.── 허어?……거 꼬마가 훌륭한 신사가 됐는걸! 애들이란 참 어느 틈에 크는지……장마 끝에 호박순 크듯 하거든.」
「자네 그 쓸데 없는 말은 작작하구……안경이나 벗구, 수염이나 좀 떼 보게나.」
「안돼, 안돼! 기분은 약간 덜 날런지 몰라두 오늘 밤은 이대루 앉아 먹세. 항우장사도 운수가 불길하면 오강(烏江)하나 못건느는 법이야. 거 누구 알겠나? 땅개가 대취하여 이 방을 자기네 방인 줄 알고 문을 딱 열고 들어 오는 날에는……」
2
편집찻종지로 돌린 술이 순식간에 세 젊은이를 감격과 흥분의 세계로 끌고 들어갔다.」
「그래 자넨 변호사가 돼서 대체 누구를 위해서 변홀 할 작정인가, 응?」
「자네가 땅개한테 붙들리게 되면 자넬 변호할 사람이 누군줄 알구?……」
「흥, 잘 안될걸! 땅개가 날 붙들어?……하, 하, 하……그리구 신군은 뭐 소설가가 된다구 ? 거 소설간 잔소리가 많아서 틀렸네. 거 대설가(大說家)는 못될지언정 하필 왜 소설가야? 사내 대장부가 한 번 낳다가 왜 글쎄 잔소릿군으로 일생을 마친다는 말인가? 가세! 나와 함께 중국으로 가세. 거기에는 우리들 젊은이의 불타는 야망이 힘차게 깃들어 있다는 말이야. 조국을 위하여……사내가 한번 낳다가 온돌방에서 죽어서야 될 말인가? 아아! 누구를 위한 이 한 몸인고!……」
그때 신 성호가 장 일수의 말을 받아 처량한 목소리로
「그렇다. 아아, 누구를 위한 이 허무한 향연인고?……아깝다, 붉은 정열이여! 한 잔 푸른 술에 내 청춘을 마음껏 적시리니, 그대 뜻이 있거든 내일 다시 거문고를 품고 찾아 올지어다!」
그말에 백 영민이가 벙글거리는 얼굴로
「콘사이스, 자네 실연을 했는가?」
하고, 물었다. 신 성호도 빙글빙글 웃으며
「그렇네. 내 청춘에다 불을 붙여 놓고 물을 퍼부은 그 다정하고도 싸늘한 여인을 오늘 밤 군에게 소개를 하마.」
「허어, 이거 오늘 밤 재수가 좋은걸!」
하고, 장 일수는 벌개진 얼굴을 번쩍 들었다. 그리고 혼자 남겨두고 온 운옥을 생각하면서
「백군, 실은 나두 군에게 자랑하고 싶은 한 사람의 여인이 있는데…… 자네, 오늘 밤은 우리 집으로 가서 자세. 내 그 여인을 소개 할테니까……」
그 말에 백 영민도 웃음을 띄우고 오 유경을 생각하며
「실은 나두 군들에게 가장 자신 있게 소개 할만한 한 사람의 여인이 있네.」
「하아, 이거 가만 보니 실속들은 다 채렸네그려!……그럼 자네, 본처는 이혼을 했다는 말인가?」
하고, 묻는 장 일수의 말에
「본처?……아, 본처……아니……응……」
백 영민의 대답이 무척 흐리다.
그때 문을 녹크하는 소리가 났다.
「아아, 왔다. 내 청춘에 불을 붙여 놓은 여인이 왔다!」
신 성호의 말이 끝나자, 방싯하니 문이 열리면서 고개를 숙이고 방으로 들어온 것은 춘심이었다. 춘심은 납신 절을 하며
「아이, 눈이 어떻게나 오는지……신 선생, 오랫만입니다.」
춘심의 시선이 먼저 신 성호를 붙들었다.
허어 당신이 신군의 「 , 가슴에다 불을 붙여 놓고 물을 퍼부은 사람이요?」
춘심의 시선이 당황하게 장 일수의 얼굴로 돌려졌다.
「호호, 선생님, 들어오자마자 무슨 말씀이세요?」
춘심은 화려하게 웃어 보인다.
「물을 퍼부을진대 애당초 왜 불은 붙였느냐 말이요.」
「흐흐 불을 붙이는 것두 인생이구……물을 붓는 것두 인생이죠. 그런데 거 무섭구료. 젊은 양반이 수염을 기르구 검은 안경은 하필 또 왜…… 암만해두 술이 아직 모자르신 모양이죠?」
그러면서 술병을 들던 순간 춘심의 시선이 백 영민의 얼굴을 무심중 붙잡다가 그만 후다닥 놀랬다.
「분이가 아니시요?」
술병을 잡은 춘심의 흰 손이 대답을 못하고 바르르 떨린다.
「……영민씨가……영민씨가 아니세요?……」
일단 해말쑥해졌던 춘심의 얼굴이 다음 순간 빨갛게 물이 든다.
「허어, 이거 어떻게 된 셈이야?」
신 성호와 장 일수가 어리벙벙해서 서로 얼굴을 쳐다본다.
「어쩌면 여기서 영민씨를 뵐 줄은……」
「정말 천만 뜻밖입니다. 지금도 신군에게서 말은 들었지만 그것이 분인 줄은 정말 의외였읍니다.」
「동경 가시는 길이세요?」
「네.」
「아버지가 시골 가셨다가 영민씨를 만나셨다구…」
「네, 만났습니다.」
아버지의 말을 들으면 영민이가 집을 쫓겨 났대지를 않는가. 그러나 그런 말을 차마 입에 담아 물을 수는 없었다.
「허어, 이거 그러다 보니 동향 친구로군 그래! 하하하……」
신 성호와 장 일수는 유쾌히 웃는다.
정말 뜻하지 않은 사람을 뜻하지 않은 장소에서 만난 춘심이와 영민이었다.
「키만 크면 어른이나?……한 三[삼]년쯤 더 있다 만나요 네.」
춘심이의 정열이 그렇게 외친 것도 벌써 옛날 일이다. 거치러운 세월이었다.
그러나 백 초시가 민며누리를 들이던 날 분이의 어여쁜 꿈은 좀처럼 사라질 줄 몰랐다.
신 성호의 청춘에다 불을 붙였다가 제 손으로 물을 부은 것도 단지 춘심이 가 하나의 화류계 여자였던 때문만은 아니었을 께다.
「우리는 술이나 먹세. 술이나……」
장 일수가 푸푸하면서 짝 잃은 외기러기 격인 신 성호를 위로하듯이 술잔을 권한다. 그리고는 번뜻 방바닥에 길게 누워 버리면서
「콘사이스!」
「응?」
「쓸쓸한가?」
「음, 한없이 쓸쓸하이!」
신 성호도 장 일수와 나란이 팔꿈치를 베고 누웠다.
「호호, 마치 한쌍의 원앙 같구료.」
춘심이가 영민의 옆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던지는 말이다.
「자아, 영민씨, 제 술 한 잔 드세요. 그리구 나두 한 잔 주세요. 인젠 술자실 줄 아시겠죠?」
춘심은 영민의 무릎에다 자기 무릎을 덧뒤겨 놓을 것처럼 바싹 다가 앉았다.
「대통령!」
「응?」
「자넨, 대통령이래두 이런 경우엔 별수 없는가?」
「응, 꼬마 신랑인 줄만 알았더니 지금 보니 상당하이. 콘사이스!」
「응?」
「울고 싶지 않은가?」
「한없이 서글프이!」
「자네, 아까 뭐라구 그랬지?── 이 누구를 위한 허무한 향연인고?……」
「아깝다, 붉은 정열이여……」
「한 잔 푸른 술에 내 청춘을 마음껏 적시리니…」
「그대 뜻이 있거든 내일 다시 거문고를 품고 찾아 올지어다 ── 자아 대통령, 자세, 자. 나를 꼭 껴안아 주게.」
「응, 응……」
두 사람은 정말 취했다. 신 성호는 장 일수의 품에다 머리를 박고 기운 없이 눈을 감았다.
「미안합니다. 내일 아침 거문고를 품고 찾아올 때까지 눈을 뜨면 안돼요.」
「잘 알았다, 잘 알았어. 마음대로 놀아라! 응, 응……」
장 일수와 신 성호는 마구 붙안고 쿨쿨 코를 구르는 흉내를 낸다.
창 밖엔 눈이 내린다 . 그 보오얗게 눈 내리는 저편 골목밖 전선대 옆에서 그때 이층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섰는 거무튀튀한 사람의 그림자가 하나 움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