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장 없는 꽃
편집1
편집흥 바루 이 방에서 「 , 저 대통령이라는 청년과 땅개라는 두 젊은 곡예사(曲藝師)가 정열의 <써 ── 커스>를 연출하였다는 말이지!」
젊은 외과의 김 준혁 박사는 아현동 오 창윤씨의 화려한 응접실 팔거리 의자에 깊이 파묻혀 시종이 들고 들어온 향기로운 홍차를 마시면서 의미 깊은 눈동자로 방안을 둘러보았다.
조금 아까 은인 오 창윤씨로부터 조용히 이야기 할말이 있으니 과히 바쁘지 않거든 좀 와 달라는 전화를 받은 김 준혁이었다.
돌아가신 준혁의 선친에게 적지 않은 은고(恩顧)를 힘입은 오 창윤은 그 보답으로서 김 준혁 모자를 살뜰히 돌보아 주었다. 그러던 것이 준혁의 어머니 마저 세상을 떠나자 오 창윤은 김 준혁을 최고학부까지 마치게 하고 작년 봄에는 개업의 준비까지 하여 주었다.
그러한 오창윤의 말인지라 천리 밖에서라도 뛰어 오지 않으면 아니될 김준혁 이어늘, 오늘따라 「과히 바쁘지 않거든」 ── 이라는 한 마디를 넣어서 자기를 부른 것을 생각할 때 「조용히 이야기 할 말」 ── 이라는 것이 적지 않게 마음에 걸렸다.
그래 이리로 오는 도중에도 이것저것 여러 가지로 생각하여 보았으나 결국 이번 협박 사건에 대한 무슨 대책 같은 것을 자기에게 조용히 이야기하여 볼 심산이 아닌가고 생각하였다.
이 사건에 대해서는 저번에 협박을 받은 바로 그 이튿날 아침, 오 창윤이가 잠깐 병원에 들렸을 때, 준혁에게 사연을 간단히 이야기 한 후에
「거 미친놈 다 보았네. 허허허……」
하고 호탕하게 웃어 버리면서
「헌병대에서는 즉시로 시내 각 병원 ── 특히 외과 병원과 긴밀한 연락을 취했다는데, 여기두 그런 무슨 통고가 오지 않았나?」
「왔읍니다.」
「참 미친놈이야! 허허허……」
하고 가버린 오 창윤이었다.
그 후에도 한 두 번 유경이를 보러 병원엘 들렸으나 거기 대한 이야기는 별반 없고
「그래 군은 이 시국을 어떻게 보는가?」
하고 이편의 의견을 묻는 것 같아서
「결국 시국이라던가 전국이라던가는 별반 문제가 될것 같지가 않습니다.」
하고 은인의 처세술에는 동감할 수 없다는 의사를 표시하려고 하면 이편 말에는 도무지 귀도 기울이지 않고
「그래두 일본놈들이 녹녹하게 손을 들지는 않을 걸. 허허허……」
하고 자기 혼자서 결론을 지어버리고 돌아 갔다.
준혁의 아버지가 살아 계시던 칠팔 년 전만 해도 오씨의 처세는 별반 사회의 비난을 받을만 한 점은 없었다.
그러던 것이 운이 티워 총독부의 산금정책에 순응하여 금광에 손을 댄 것이 탈이어서, 일확 천금을 하고 보니 어깨가 저절로 으쓱했고 저도 모르는 사이에 장안의 명사가 되고 보니 과거에 있어서 모모하는 이름 있는 애국자들도 발을 벗고 나서서 시국에 협력하는 판이라, 신문사의 권유에 못 이기는 척하고 모모하는 애국자들과 신문지상에서 어깨를 나란히 하고 몇 마디 외쳐 봄으로서 명실공히 명사가 되어 보려던 것이 도대체 잘못이었다.
신문사에서는 맛을 들여 조선 사람으로서는 말하기 거북한 시국 협력담을 자꾸만 오 창윤에게 가져왔고, 그러는 동안에 오씨는 훌륭한 명사가 된 것이다.
「명사가 사람을 잡는다.」
준혁은 그렇게 생각하여 왔었다.
2
편집「만일 내가 그 수상한 청년의 다리에 받은 총상을 수술하고, 뿐만 아니라 파출부까지 파견하여 지금도 청년의 뒤를 보아 준다는 사실을 오 선생이 안다면?……」
준혁은 빙그레 웃으면서 그런 생각을 하였다.
김 준혁이가 학교를 졸업하고 대학병원 연구실에서 학위 논물을 쓰는 한편 임상을 맡아보고 있을 때, 치료실에서 관절염을 앓고 있는 신 성호에게 동생과 같은 우애를 가지고 치료하여 준 것은 지금으로 부터 三[삼]년 전 일이었다.
향학(向學)에 불타오르는 갈망을 품고 낯설은 타관에서 직업을 구하려 싸돌아 다니던 신 성호에게 있어서는 이 컴컴한 치료실에서 느낀 김 준혁의 친절을 얼마나 고맙게 여겼던고! 그후 다행히 직업을 얻은 신성호가 얼마 안되는 월급 봉투를 들고 한 잔 술을 나누고자 제일 먼저 찾은 것은 김 준혁이었다. 그렇게 해서 사귀게 된 두 젊은이의 친분이었으며 그렇게 해서 총상을 받은 위험 인물을 메고 간 신 성호였으며 또한 그러한 신 성호의 간청을 들은 김 준혁이었던 것이다.
그때 이집 주인 오 창윤이가 기름끼 도는 얼굴과 턱 밑에 턱이 또 하나 지려는 것같은 굵다란 목을 가지고 응접실로 들어왔다.
「선생님, 안녕하십니까?」
「바쁜데 불러서……」
「아니 올시다.」
「그래 유경인 경과가 아주 좋다지?」
오 창윤은 팔거리 의자에 털석 몸을 던지면서 좋아하는 해태를 한 대 피워 문다.
「네, 아주 양호합니다. 지금은 지팽이를 짚고 변소 출입도 하게 되었으니까요. 한 이삼 일만 더 있다간 퇴원시킬 작정입니다.」
「음 ──」
하고 식후의 한목음 담배를 맛나게 후하고 내뿜는다.
「그런데 선생님께서 자주 와 보시지 않는다고 유경씬 아주 불평이랍니다.」
「하, 하, 핫……」
하고 오 창윤은 자기의 생활을 즐길 수 있는 사람만이 웃을 수 있는, 밑 배에서 부터 우러나오는 통쾌한 웃음을 한바탕 웃은 후에
「언제까지나 어리광만 부리구……보기는 한가해 봬두, 하하하……나두 어지간히 바쁜 몸이야 하하하……」
그 순간 오 창윤은 병상에 누운 무남독녀 외딸 유경의 얼굴을 연상하는 대신
「아버지, 나 눈깔사탕 사 먹게 돈 좀 주세요? 네?」
하면서 자기의 손등을 꼬집어 뜯는 명월관 아랫목에 앉은 또 하나의 딸 박 춘심이의, 고 안타깝게 귀여운 동그스럼한 얼굴을 연상하는 것이다. 아, 글쎄 고년이 사람의 간장을 다 녹여!
그런데 그후 협박사건에 「 관해서는 아직 아무런 단서도 못 잡았읍니까?」
「글쎄, 최 달근이가 지금 그놈을 잡으면 별이 한개 더 붙는다구, 눈알이 시뻘개서 찾아 댕기지만……벌써 내 뺐지, 내 뺐어.」
그 순간 김 준혁은 후우 하고 안도의 숨을 내쉬며
「선생님두 인젠 좀 근신하셔야 겠읍니다.」
「근신?……아 근신! 아, 하구 말구. 그러나 조선의 모모하는 지사들두 다발을 벗구 나셨는데, 뭐 오 창윤 쯤이야 문제가 아니지 않나? 핫 핫 핫……」
하고 또 한바탕 웃어댄 후에
「실은 오늘 군을 보잔 것은 그런 이야기가 아니구……」
「………」
3
편집오 창윤씨가 오늘 자기를 부른 것이 협박 사건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면 대체 무엇일까? 준혁은 얼굴을 가다듬고 오씨를 바라보았다.
「실은 유경이에게 관한 이야긴데 ── 우리 부모된 사람의 눈에는 아직 어린애로서 밖에는 더 보이지 않지만……또 한편 가만이 생각하면 그만 했으면 먹을 나이는 다 먹은것 같기도 하구……과년한 처녀가 공부를 합네 하고 현해탄을 왔다갔다 하다가 또 무슨 실수를 할런지 알겠나? 그래서 그애 어머니 하구두 여러 번 상의하여 보았지만……」
그리고는 잠깐 말을 끊고 담배를 두어 목음 후우하고 내뿜더니
「이건 뭐 무슨 돌아가신 군의 선친하고 그 어떤 확고한 언약이 있었다는 건 아니지만, 아다시피 군의 선친하고 나 하고는 막역한 사이어서, 술좌석 같은 데선 일수 농담 비슷한 말을 잘 했었거든. 군의 선친은 술이 한 잔 얼근하면 그때 서너 너덧 살 밖에 안된 군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날더러 하는 말이, 자네, 어서 얌전한 딸을 하나 낳게. 내 며누리를 삼으리 ── 그런 말을 일수 잘 했었어. 물론 농담이지만……하, 하, 하……」
오 창윤은 그러면서 준혁의 얼굴을 물끄럼이 바라보았다.
「………」
「물론 아무리 부모의 의사가 그러하다고 해도 문제는 당자에 있는 것이니까 ── 유경이에게 대한 군의 의견과 군에게 대한 유경이의 생각을 존중해야만 될 것은 나로서도 모르는 배는 아니지만…… 보와하니 군도 다행히 유경을 과히 허수러이 보는 것 같지 않고, 또 유경이도 군을 매우 따르는 것 같이 보이기에 하는 말이네. 물론 부모된 우리가 잘못 보았는지는 또 모르지만두…… 솔직하게 말하면 유경의 남편으로서는 군은 좀 과분해. 좀더 이렇다 하는 좋은 혼처가 있어서 군의 배필을 두어준다면 군의 선친에게도 뵐 면목이 서겠지만……」
「선생님, 무슨 말씀을……」
그것이야 말로 과분한 말이었다. 아무리 은고를 힘 입었다 해도 배은 하기가 일수인 이 세상에서 최고학부까지 교육을 시켜준 것만 해도 감사하거늘, 오늘날 이처럼 자신을 극도로 낮추어 대해주는 오 창윤의 은근한 애정이 한없이 기쁜 김 준혁이었다.
더구나 유경으로 말하면 오랫동안 자기가 은근히 사모하여 온 화원에 향기롭게 핀 꽃이 아니었던고!
그 아름다운 꽃을 자기에게 따라는 오 창윤씨였다. 아니, 따서는 아니될 금단(禁斷)의 꽃일지라도 조만간 딸 수 밖에 없었던 김 준혁의 정열이었다.
더구나 어여쁜 꽃에 넘나드는 뭇 봉첩(蜂蝶)의 희롱으로 말미암아 자기가 아껴 안 따더라도 조만간 때워 버릴 무장(武裝) 없는 한떨기 청아(淸雅)한 꽃 오유경!
「공부를 합네 하고 현해탄을 건너 다니다가 실수 하기 전에……」
따 버리라는 오 창윤씨의 이 한 마디가 더한층 김 준혁을 초조케 하였다.
아니, 봉첩은 벌써 현해탄을 건너 다니는 사이에 넘나든 것이나. 저번 유경이가 귀국하는 날, 경성 역에서 三[삼]등 차를 같이 타고 오다가 헤여진 사각모를 쓴 학생의 기억이 새삼스럽게 새로운 준혁이다.
「하여튼 그쯤 알고 될 수 있으면 이번 동경으로 가기 전에 약혼식 만이라도 거행하였으면 하는데……」
「선생님, 고맙습니다! 선생님과 사모님의 뜻이 그러 하시다면 저는 그 뜻을 배반하지 않도록 노력하겠읍니다.」
「음, 나두 기쁘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