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극장/1권/2장

청춘 삼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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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동안 교실 안에는 웃음 단지가 터졌다. 대통령은 한번 시무럭하고 웃다가 다시 입을 다문 야마모도 선생의 얼굴을 빙글빙글 바라보다가

「하, 하, 핫…… 하, 하, 핫……」

하고 호걸처럼 웃고 나서

「제군, 웃고 헤어지자. 웃는 곳엔 평화가 있고 노하는 곳엔 소화불량이 있는 법이다.」

「소화불량?……하하핫」

「하, 하, 핫……」

선생들이 더한층 웃어 댔다. 난처한 야마모도씨를 구해 내기에는 실로 좋은 찬스였기 때문이다.

「과연 대통령이야!」

하고 그때 제일 곤란한 입장에 섰던 단 한 사람의 조선인 선생인 박 선생이 나서며

「자아, 인젠 시간도 늦었으니 대통령의 말대로 웃고 헤어지세.」

「네, 자아, 야마모도 선생, 우습니다. 같이 우습시다.」

하고, 대통령은 그의 호걸풍인 품격을 아낌없이 발휘하며

「핫, 핫, 핫, 핫, 하하하하……」

하고 웃어댔다. 그때야 야마모도씨도 빙그레 웃으면서

「나의 교육방침이 혹시 그릇 되었다면 나는 이 자리에서 그것을 제군 앞에 솔직히 사과를 한다. 동시에 나는 오늘 실로 좋은 경험을 하였다고 생각한다. 자아, 제군, 웃고 헤어지자. 과거는 과거, 장래는 장래다. 나는 지금 참다운 마음으로 제군의 앞날에 행복이 있기를 바란다.」

그것이 과연 야마모도의 참된 뉘우침인지, 그렇지 않으면 난폭한 학생들의 주먹매를 피하기 위한 교활한 외교사(外交辭)인지를 몰랐다.

그러나 하여튼 참이건 거짓이건 간에 과거 五[오]년 동안 그처럼 학생들을 못살게 굴던 야마모도의 입으로부터 적어도 자기의 잘못을 깨닫는다는 이 한 마디가 흘러나온 것은 감격하기 쉬운 학생들에게 확실히 정의(正義)의 승리감을 품게 하였다.

오랫동안 풀릴 줄을 모르고 마음 속 한편 구석에 도사리고 있던 탁류가 망망 대해를 향하여 쫘악하고 쏟아져 내려가는 것 같은 상쾌한 감정의 세계였다.

그것은 실로 단순한 소년들의 세계요 중학생의 세계였다.

졸업장을 한 장씩 움켜쥐고 감격과 동경과 광명의 세계를 한 아름씩 안고 교문이 터질듯이 밀려 나오는 그들 앞에는 벌써 야마모도 선생도 없고 땅개도 없었다 다만 . 하나 망망한 대해(大海), 만경 창파가 흐느적거리는 바다.. 탁류와 청류를 다 함께 마셔대는 불안에 찬 희망의 바다가 있을 뿐이다.

「잘 가게!」

「또 보세!」

「서울엔 언제 가나?」

「동경엔 언제 떠나나?」

작별의 인사는 비록 짧았으나 동무를 아끼고 우정을 나누는 감격에 찬 대화가 여기저기서 벌어졌다.

만수대(萬壽臺) 언덕 위에 황혼이 스며든다.

「추청각(秋晴閣)아, 잘 있거라.」

교실을 나서면서 백 영민은 아끼는 듯이 조그만 정자를 돌아다 보았다.

五[오]년 동안 백 영민의 고요한 명상을 길러준 학교 뒷산 언덕 위에 서 있는 추청각이 찬란한 저녁 노을을 등지고 소녀화보(小女畵報)의 삽화인 양 어여쁜 「실루엩」(陰畵[음화])을 그림 그리고 있었다.

「여, 꼬마·신랑, 같이 가세.」

교문을 나섰을 때, 대통령과 콘사이스가 뒤를 따라 나오면서 그렇게 불렀다. 「꼬마·신랑」이란 백 영민의 별명이다.

「자아 꼬마, 내 하숙으로 가세. 한잔 약주가 없어서야 어찌 이별가를 부를 수 있으랴! 으와, 핫핫핫……」

유쾌히 웃어 대면서 대통령은 행길가 가게로 들어가서 소주 한 병에다 오징어 세 마리를 샀다.

세 개의 젊은 그림자가 달빛 어린 청류벽(淸流壁) 아래를 창량(..)히 거닐고 있었다.

술은 비록 먹을 줄 모르는 그들이로되 마셔서 넘어가지 않는 술은 아니었다.

절반이나 남은 소주병을 들고 흥에 겨워 하숙을 뛰쳐 나온 대통령, 콘사이스, 꼬마·신랑의 청춘 삼총사(靑春三銃士)!

「아버지, 당신의 지각있는 아들이 오늘 밤 술을 마셨읍니다!」

백 영민은 대동강 한복판을 향하여 돌연 하소연하듯이 커다란 목소리로 외쳤다.

「이건 또 무슨 센치야?」

대통령은 병 나팔을 불면서

「꼬마는 어서 집으로 돌아가서 어여쁜 아가씨와 결혼식이나 지내게. 육 년 동안이나 눈이 빠지도록 님을 기다리는 어여쁜 아가씨!」

그 말에 콘사이스도 신이 나는 듯이

「오오, 어여쁜 아가씨! 이 누구를 위한 청춘의 정열인고?…… 어여쁜 아가씨, 어여쁜 아가씨! 꼬마, 자네는 행운일세.」

그러나 백 영민은 대답이 없다. 행운아라는 말과는 정반대의 깊은 우수(憂愁)가 영민의 마음을 긁어쥐기 때문이다.

전금문(轉錦門)을 끼어 세 사람은 이윽고 부벽루(浮碧樓)로 올라갔다.

대통령은 비틀거리는 발걸음을 멈추고 달빛 어린 능라도(陵羅島)를 눈 아래 멀리 내려다 보며

「장성일면 용용수요(長城一面溶溶水), 대야동두 점점산이라(大野東頭嶄嶄山)..」

영웅적 기상이 넘쳐 흐르는 웅장한 목소리로 그렇게 읊어 댔을 바로 그때였다.

「대동강변 부벽루 산보하는 이 수일과 심 순애의 양인이로다 ..」

二十[이십]여 년 전에 유행하던 낡은 노래 소리가 돌연 등 뒤에서 들려왔다.

「아, 저게 땅개의 목소리가 아닌가?……」

돌아다 보니, 그것은 분명히 땅개의 거쉰 목소리였다. 을밀대(乙密臺)에서 이편으로 내려 오는 네 개의 그림자가 달빛 속에서 점점 가까와 온다.

이윽고 앞장을 선 땅개가 낯설은 청년 세 사람을 동반하고 내려오다가 부벽루 앞 마당에서 콘사이스네 패와 딱 마주쳤다.

「아, 자네 최 달근(崔達根)이가 아닌가?」

콘사이스가 먼저 말을 건넸다.

「왜 새삼스레 최 달근이야? 자네들이 지어준 명예스러운 이름이 나에게는 있지 않은가?」

침착하면서도 무척 반항적인 어투였다. 그것은 과거 五[오]년 동안의 중학 생활에서는 한번도 보지 못한 땅개의 돌연한 변모(變貌)였다.

「자네, 어째 오늘은 이처럼 깔끔한가?」

그러면서 콘사이스는 옆에 섰는 세 청년들의 부락부락한 얼굴들을 한 번삥 둘러보았다. 분명히 그것은 땅개의 보호병임에 틀림없었다.

「흥, 그만하면 알 법두 하네. 자네, 우리의 뒤를 따라온게 아닌가?」

「그런건 물을 필요가 없구……」

그때 키가 짝달막한 그 중 날쌔게 생긴 청년 하나가 불쑥 얼굴을 내 밀며

「농이야, 쌈이야? 쌈이면 빨리빨리 해 치워!」

하는 것을 땅개는 막으며

「자네들이 나에게 지어준 그 명예스러운 이름이 뭐랬지?」

「…………」

콘사이스는 말이 막혀 대답을 못하고 백 영민과 대통령을 쳐다 볼 수 밖에 없었다.

판국은 글렀다. 백 영민은 허리띠를 졸라매고 대통령은 콘사이스의 손으로부터 벗나무 단장을 슬그머니 뺏어 쥐였다.

「왜 대답이 없어? 자네들이 五[오]년 동안 불러준 그 명예스러운 이름이 뭐랬지?」

「…………」

「여어, 정의파(正義派)! 학교 안에서는 정의가 이길지 몰라두, 이 사회에서는 그것 만으론 잘 안될껄.」

그 말에 콘사이스는

「그래 그밖에 또 무엇이 있단 말인가?」

「정의, 정의! 흥, 사회에 있어서의 정의는 권력의 시복(侍僕)일 따름이다.」

「음, 그만 했으면 알겠네. 우리들의 세 사람이 자네들의 세 사람 보다 약하단 말이지?」

「물론 그런 의미도 있겠지 .. 그래 내 별명이 뭐랬지?」

「…………」

콘사이스는 또 대답이 없다. 완력에는 조금도 자신이 없는 몸이다.

「콘사이스, 빨리 빨리대답해 치워!」

대통령의 목소리가 돌연 등 뒤에서 떨어졌다. 그때야 비로소 힘을 얻은 듯이

「음 그렇게도 알고 싶거든 대답을 하마. 땅개 .. 다리가 짧고 귀가 축 늘어진

그 발발이같은 일본 개를 몰라? 흰 바지 저고리를 입은 조선 사람에게는 한사코 박박 달려붙는 고 땅개를……」

「이 자식이!」

콘사이스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땅개의 주먹이 콘사이스의 턱 밑을 따악! 하고 내 갈겼다. 열세 관이 될락말락한 콘사이스의 몸뚱이가 지프라기로 만든 인형처럼 픽하고 땅 위에 쓰러지는 순간, 기다리고 있던 땅개의 보호병이 욱하고 대통령을 향하여 달려 들었다.

「꼬마, 자네는 땅개 하나만 담당하면 된다!」

그렇게 외치면서 대통령은 벗나무 단장을 회초리처럼 휘두르며 달려드는 세 명의 보호병 속으로 뛰어 들었다. 검도 二[이]단의 실력을 실사회에서 처음으로 시험하는 순간이다.

갑자기 사방이 캄캄해 졌다. 달이 구름 속으로 얼굴을 감춘 때문이다.

이리하여 때 아닌 난투극이 캄캄한 어둠속에서 무섭게 벌어졌던 것이니, 그것은 실로 정열과 정열이 인생관과 인생관이 부딪치는 청춘의 아름다운 불꽃이었으며 청춘의 씩씩한 향연(饗宴)이기도 하였다.

「앗!」

하고 그때, 백 영민의 외치는 소리가 어둠의 장막을 찢으며 굴러 왔다.

「아, 꼬마, 다쳤는가?」

대통령이 묻는 목소리다.

「음, 음……염려 말어!」

영민의 목소리가 신음하듯이 들려왔다.

달은 아직 구름속에서 빠져 나오질 못하고 어물거리고 있다. 발동선 소리가 멀리 주암산(酒岩山)기슭에서 통통통통 한가스레 들리는 밤이다.

「앗!」

하고, 이번에는 대통령의 부르짖는 소리가 들리었다.

「아! 대통령, 어떻게 됐어?」

하고 백 영민은 물었으나 대통령은 통 대답이 없다.

다만 영민의 귀에 들리는 것은 어지럽게 얽히어지는 발자국 소리와 함께 툭탁툭탁 부딪치는 힘과 힘, 살과 살, 정열과 정열이 난무하는 희미한 음향뿐이다.

「대통령!」

「…………」

「대통령?」

「…………」

어찌된 셈인지 대통령은 통 대답이 없다.

그러나 다음 순간

「으와, 핫, 핫, 핫……」

하고 웃어대는 대통령의 목소리가 어둠을 뚫고 유쾌히 날아왔다.

「아, 대통령, 무사한가?」

「음, 한 놈은 뻗었고 두 놈은 삼십육계를 놨네. 핫 핫 핫……」

그러면서 대통령은 영민의 옆으로 걸어오며

「자네, 아직 멀었는가?」

「음, 나두 거의 됐네.」

어둠을 헤치고 들여다 보니, 땅 위에 이리 딩굴고 저리 딩구는 두 개의 몸뚱이가 희끄무레하니 내려다 보였다. 영민의 팔목이 땅개의 모가지를 잘라 맨 채 놓아주지를 않는다. 피꺽피꺽 숨 넘어가는 소리가 땅개의 입에서 흘러나온다.

「숨을 아주 넘겨서는 안되네.」

「음, 적당히 하지.」

이윽고 땅개는 손으로 땅바닥을 쳤다. 항복한다는 신호다. 그때야 영민은 팔을 풀고 몸을 일으키었다.

「땅개, 정의는 권력의 시복일지 모르나 그것은 일시적이다. 권력은 짧고 정의는 길다는 것을 귀 담아 들어라!」

「으음 ..」

땅개는 목덜미를 쓰다듬으며 부시시 땅 위에서 일어났다.

「음, 어디 두고보자!」

「두고보자는 놈 무섭지 않다. 가거라 가!」

그리고 백 영민과 대통령은 유쾌한 듯이

「하, 하, 하, 핫……」

하고 웃어댔다. 그 유쾌히 흘러나오는 두 사람의 웃음 소리를 등 뒤에 들으며 땅개는 뻗어 넘어졌던 보호병과 함께 어둠속으로 총총히 사라졌다.

그러나 땅개가 배앝은 이 한 마디가 후일에 이르러 자기네들의 평화를 교란하고 생활을 위협하는 하나의 암(癌)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던 것이다.

「그런데 콘사이스는 어디 있어? .. 어이, 콘사이스!」

대통령이 커다란 목소리로 그렇게 불렀을 때 저편 주춧돌 옆에서

「으음, 나, 나 여기 있네.」

하고 죽어가는 소리를 콘사이스는 냈다.

그때까지 구름속에서 어물거렸던 달이 화안하니 얼굴을 나타냈다. 보니, 콘사이스가 손으로 턱 아래를 어루만지며 주첨주첨 걸어온다.

「나는 꼭 아래 턱이 떨어져 나간 줄만 알았는데 아직껏 붙어있는 것이 신기하이.」

「이 약골아, 그게 무슨 추태야?」

대통령이 콘사이스의 어깨를 한번 흔들어 댔다.

「흥, 콧구멍에서 먹물을 흘리는건 추태가 아닌가?」

「뭐, 먹물?……」

대통령은 얼른 자기 코 밑을 만져보았다. 코피다. 달밤에 보는 코피는 흡사 먹물과 같았다.

「아, 아까 그 짝달막한 자식의 대가리가 번개같이 날아 오더니……」

그래서 대통령은 「앗!」 소리를 쳤던 것이다.

「그리구 이마에 주먹만한 혹을 붙인건 추태가 아닌가?」

백 영민은 문득 자기 이마에 손을 대 보았다. 어린애의 주먹만은 확실하였다.

「아, 하, 하, 핫……」

대통령과 콘사이스가 유쾌히 웃었다.

「땅개가 차돌맹이루 갈긴 자리야.」

그래서 「앗!」 소리를 지른 영민이었다.

「콘사이스, 꼬마, 하여튼 유쾌하이! 떨어져 나간 줄 알았던 턱이 붙어 있는 것두 신기한 일이요, 콧구멍에서 먹물이 흘러나온다는 말두 표현이 좋았고 황소처럼 이마에서 뿔이 돋아나온 것두 일생을 통하여 잊지 못할 오늘밤의 기념품일세! 핫 핫 핫……」

「핫 핫 핫……」

「핫 핫 핫……」

그리고 세 젊은이는 고무풍선처럼 힘껏 부풀어 오른 풍만한 감정을 한 아름씩 품고 부벽루를 내려 오면서, 아까 땅개가 부르던 낡은 유행가 「대동강변 부벽루」를 소리 높이 불렀다.

달빛 속의 청류벽이 묵화를 친 병풍처럼 눈 아래 몽롱하다. 술이 깨이는 모양이다. 밤바람이 몹시 몸에 거칠다.

때는 一九三九[일구삼구]년 二[이]월 하순, 노구교(蘆溝橋) 사건이 벌어진 지 이태만의 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