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무대의 기억
연주회의 첫 무대를 밟기는 26년 전 내가 16세 되던 해 크리스마스 축하 음악회에 무반주(無伴奏)의 독주를 한 것이라고 기억된다. 그러나 그때의 일을 지금 회상하면 그것이 나의 처녀 무대에 틀림은 없지마는 그러나 이것 은 연주라기 보다도 그 당시 아무도 듣고 보지 못하던 진기한 악기를 구경 시켰음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고 후부터는, 가끔가끔 이 진악기(珍樂器)를 손에 들고 무대에 오르기는 했지마는, 역시 아무런 감명도 없는 아무런 스 베니아도 찾을 수 없는 일종의 아희(兒戱)에 지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한편으로 공부하며 한편으론 가르치며 하다가 21세 때에 동경으로 건너가 서 동경음악학교(東京音樂學校)에 입학을 하여 정규의 교육을 받은 동시에 가끔가끔 열리는 교내 교외의 연주회에 드나들기 시작한 뒤부터 비로소 음 악 연주란 어떤 것인지 짐작이나 하게 되었다.
모처럼 들어간 동경음악학교도 본과로 진급 되자마자 일신상 사정으로 중 도에 퇴학한 후 집에 돌아와서 일후(一後) 가깝게 놀고 지나다가 다음에 다 시 도동(渡東) 한 때는 대정(大正) 9년 늦은 봄이었다. 그 해에는 폴란드에 대기근(大飢饉)이 있어서 폴랜드 기근 구제에 여러 가지 사업이 이곳 저곳 에서 일어날 때에 마침 동경에 있는 악양회(岳陽會)란 단체의 주최로 ‘폴 란드 고아 구제 대음악회’가 그 해 9월에 신전(神田) 일본 청년 회관에 열 였는데 그때 나는 미주로부터 신귀조(新歸朝) 한 작곡가 석천의일(石川義 一)씨와 무명 작곡가 태전충(太田忠, 지금은 영화 음악 작곡가로 활약 중) 군과 함께 이 연주회에 출연할 광영(光榮)을 얻었다. 이때만 하더라도 동경 천지에 음악홀이라곤 동경 음악 학교 주악당(奏樂堂)과 이 일본 청년회관의 2개처 뿐으로 일본 청년 회관이라면 그 다시 일류 악인(樂人)들의 독단장 (獨壇場)이었던 것이다. 정원 1,300인, 즉 지금의 경성 부민관(府民館)대강 당보다 조금 적었을 것이다. 포스터가 걸리고 프로그램이 발표되고 하니 동 경 음악학교의 동급생들은 모두다 눈이 둥그래져서 부러워했다. 그 중에도 첼로 과 고용길(高勇吉)군은 노상에서 나를 만나자 연방 고개짓을 해가면 “君[군] 偉[위]いね, 學校[학교]む止[지]めてよかった. ぼくも早[조]くそん な處[처]へ出[출]たいね”(자네 훌륭하네, 학교는 그만두길 잘했어. 나도 그 런 곳에 나가고 싶어)하고 부러워했다.
악양회란 모 은행 중역들의 구락부 명이다. 그런만치 그네들의 배경이나 지반을 이용해서라도 1,300명 들어가는 이 회관을 채우기에 용이했던 것 같 았다.
연주회 석상에는 폴랜드 공사를 비롯하여 내외국 신사 숙녀들이 입추의 여 지가 없으리만치 들어찼다. 나는 제1부 제3부와 제2부, 제3부에 두번 다 태 전충(太田忠)군의 반주로 출연했는데 제1부의 독주가 끝나자 3청(請)의 박 수례를 받았고, 연주회가 끝난 후에는 특별히 폴란드 공사로부터 감사하다 는 인사와 함께 악수를 받았다. 말하자면 이것이 내가 음악 공부를 시작한 후 무대다운 무대를 처음 밟은 것이라고 할 수 있으며, 또 그날 밤의 감격 이야말로 지금껏 잊을 수 없는 것이다. 내 솔직한 고백이지마는 나는 이 연 주회에서 얼마나 큰 용기와 자부심을 얻었던지, 그 일이 있은지 미구(未久) 에 일부러 독주회를 하러 조선에까지 돌아왔고, 또 조선 사람으로서의 최초 의 독주회를 그 해 10월에 종로 청년회관에서 열었음도 지금 생각하면 호랑 이 담배 먹던 시절과 같은 격세의 감이 없지 않다. 무지보다 더 두려운 것 이 없다는 말도 있지마는 그때의 프로그램으로 독주회란 서투른 용어를 반 도 악단(半島樂團)에 피로(披露)하던 일을 생각하면 이제는 부끄러울 시절 도 이미 지난 만큼 오직 끝없이 그 시절이 그리웁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