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를 때리고
1
편집남수(南洙)의 입에서는 '이년' 소리가 나왔다.
자정 가까운 밤에 부부는 싸움을 하고 있다.
그날 밤 열한시가 넘어 준호(俊鎬)와 헤어져서 이상한 흥분에 몸이 뜬 채 집에 와보니 이튿날에나 여행에서 돌아올 줄 알았던 남편이 열시 반 차로 와 있었다.
그는 트렁크를 방 가운데 놓고 양복을 입은 채 아랫목에 앉았다가 정숙(貞淑)이가 문을 열고 들어오는 것을 힐끗 쳐다보곤 아무 말도 안했다. 한참 뒤에 "어데 갔다 오느냐"고 묻는 것을 바른 대로 "준호와 같이 저녁을 먹고 산보한 뒤에 들어오는 길이라"면 좋았을 것을 얼김에 "친정 쪽 언니 집에 갔다 온다"고 속인 것이 잘못이었다.
그 말을 듣고 남수는 불만은 하나 어쩔 수 없는 듯이 "세간은 없어도 집을 그리 비우면 되겠소" 하고 나직이 말한 뒤에 그대로 윗방으로 올라가서 자리에 누웠다.
정숙은 준호와 저녁을 먹고 산보한 것이 감출 만한 것도 안 되는 것을 어째서 자기가 난생 처음 거짓말을 하였는가 하고 곧 후회되었으나 준호와 산보하던 때의 기분으로 보아 준호도 그것을 남수에게 말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고 다시 두말없이 그대로 아랫방에 자리를 깔았다.
그것이 오늘 남수가 저녁을 먹고 나가서 준호와 만났을 때에 탄로가 난 것이다. 하리라고는 생각도 않았던 준호가 무슨 생각으론지 남수에게 그 말을 해버렸다. 참으로 모를 일이다. 물론 준호 역시 말해서 안 될 만한 불순한 행동을 하지는 않았다. 그 역시 그만 일을 숨기느니보다 탁 털어놓고 농담으로 돌리는 것이 마음에 시원했을 것이다. 그는 늘 남수를 우당(愚堂) 선생이라 부른다.
"우당 선생 부재중에 부인과 산보 좀 했으니 그리 아우"쯤 말하고 껄껄 웃었는지 모른다.
아니 준호의 일이니 "내가 핸드백이 된 셈이죠. 어쨌거나 우당 선생 주의하슈. 그만 연세가 꼭 스왈로를 기르고 싶을 시깁니다" 정도의 말은 했을 것이다.
이런 농담을 들을 때 남수는 얼굴에 노기를 그릴 수는 없었으나 마음만은 몹시 불쾌하였을 것이다. 가랫물을 먹은 듯한 찡그린 얼굴로 애써 웃어 보려는 남수의 표정이 생각된다.
원체 자기네들이 남수에게 그날 밤 일을 어떻게 말할까. 다시 말하면 속일까 바른 대로 말할까. 또 말한다면 어느 정도로 고백할 것인가를 협의해 두지 않은 것이 실수였다. 그러나 그런 협의를 해둘 만큼 그들은 남수에게 죄를 짓고 있다고는 생각지 않았다. 그런 죄를 의식하고 그런 협의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면 그들은 적어도 양심의 가책 때문에 산보까지도 중지했을 것이다.
그날 밤의 산보―---그것은 정숙이 혼자만의 생각인지는 몰라도 물론 단순하게 길을 걷고 불이 아름답다느니 얼마 안에 꽃이 피겠느니 하는 것으로 시종된 것은 아니었다. 입으로 나온 말은 그 정도인지 몰라도 정숙이가 가졌던 흥분만은 이상하게 높았던 까닭이다.
어쨌든 그 말이 준호의 입에서 탄로가 나서 그 자리에선 웃고 만 모양이나 밤에 돌아오는 대로 남수는 정숙에게 치근스럽게 트집 비슷한 말을 걸었다. 그것이 벌어져서 드디어 싸움이 되었다.
지금 정숙은 팔을 걷어붙이고 남편에게 대든다.
왜 그랬으면 어떠우, 속였으면 어떠우. 밥 먹고 산보한 건 좋으나 속인 게 불쾌하다구. 밥 먹구 산보만 한 줄 안다면 속였다고 불쾌할 게 뭐유. 그 이상 딴짓을 했으리라는 더러운 생각이 없다면 불쾌할 게 뭐유. 내가 그날 밤 속인 건 털어놓구 말하믄 오도카니 양복을 입은 채 맹초같이 앉아 있는 게 불쌍해서 속인 거유. 그래 어린애가 돼서 옷을 벗기구 자리를 깔아 주어야 되우. 언제 온다는 통지두 없는 걸 허구한 날 당신만 기다리구 있어야 옳소.
사흘 밤이나 기대렸수. 이날일까 저날일까 기대리다 지쳐서 저녁 전에 거리나 한바퀴 돌려구 나갔댔수. 돌아오다 길에서 만나서 준호씨와 저녁 먹은 게 그리 큰 잘못이구려.
왜, 그렇게 채려 놓구 있다 맞아들이는 게 좋거들랑 기대리는 사람 생각두 좀 해보죠. 전보 치고 온다는 걸 내가 일부러 나가고 집을 비워 두었던가.
뭐이 어때요. 그게 속인 변명이 되느냐구. 안 되믄 말어요. 애써 변명허는 건 아니니. 만일 내가 일이 있어서 언니 집에 갔다 온다구 안 했다면 그날 당장에 오늘 같은 싸움판이 벌어졌을걸. 그래 그때 준호씨와 밥 먹구 산보하다 온다구만 말했으면 거, 참, 잘했군 하고 칭찬할 뻔했수. 뭣이. 씨는 무슨 씨냐구 당신의 친구를 대접해서 부르는 거요. 준호 씨 준호 씨 자꾸 씨자를 넣어 부를걸. 그 입에 발린 소리 좀 작작해요. 그날 밤으루 당신이 엉뚱한 시기를 했을 게유. 질투에 불이 붙어 밤잠두 못 잘 게 불쌍해서 속인 겐 줄두 모르구.
왜. 어때. 흥. 너 같은 것에게 질투는 무슨 질투냐구. 그래 지금 하구 있는 당신의 생트집은 질투가 아니구 질투 사춘이유. 당신은 몇 살이구 내 나이두 반칠십에 당신은 내일 모레믄 사십이 아니오. 어제 오늘 길거리나 술집에서 만난 사람들인가.
옳아. 옳아. 내가 아무리 주릿댈 안길 년이믄 그런 어린애들과 치정관계를 맺을라구. 푸. 그만두. 그만두. 그럼 그게 그 소리지 뭔가. 그래 옳아 옳아.
뭣이 어째. 남이 말두 허기 전에 발이 재린 거라구. 저지른 죄가 있어 미리부터 넘겨짚어 본다구. 그래 내가 행실을 망쳤단 말이지. 이 쓸개 빠진 소리 좀 그만두어요. 사나이가 오죽 못났으면 제 여편네가 바람이 날라구. 저두 저 부족한 줄은 아는 게다. 어째서 준호보구는 못 해봤노. 눈앞에 자기 원수를 놓구 왜 아무 말 못 허구 웃기만 했나. 그리구는 지금 와서 나보구 이 야단인가.
흥. 죄는 준호에게 있는 게 아니라구. 속인 것이 죄라구. 그래두 자기 여편네가 남에게 농락되었다는 생각은 갖고 싶지 않은 게지.
뭣이 어째. 이년이라구 이년. 말 잘했다. 반말하는 년 이년이라구 그러믄 어떠냐구. 잘했다. 뭣이 더러운 년.
더러운 걸 볼라믄 거울을 보구 말해. 누가 더러운 놈인가. 제 여편네를 농락했노라구 비웃는 놈을 앞에 놓고 뺨 한 개 못 갈기고 씁쓸히 돌아와서 여편네보구 속인 게 잘못이라구. 왜 준호헌테 내가 반했수. 그랬으면 어떡헐래요. 준호허구 산보할 때 난 행복을 느꼈수. 당신에게 준호에게 있는 게 있수.
더러운 놈허구 누가 살라는가구. 응. 안 살어두 좋다. 차남수 아니면 서방 헐 사람 이 세상에 없는 줄 아는가. 차남수가 하늘 같애서 내가 이 생활을 하고 있는 줄 아는가 차남수가. 나를 호강을 시켜서 내가 그를 떠나면 거지질을 할 줄 아는가. 차남수가 위대한 인물이 돼서 내가 그를 떠나면 금시에 하늘을 잃은 듯이 미친년이 될 줄 아는가.
응. 안다 알어. 네가 어차피 그 말 헐 줄은 벌써부터 알었다. 네가 시굴 있는 년을 이혼허지 않는 것두 그 심보가 어데 있는지 난 벌써부터 알었다. 십 년 전엔 그런 게 문제두 안 됐었다. 그건 너나 내가 가정 안의 적은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그걸 가지구 나를 내어쫓을려는구나.
난 도마에 오른 고기다. 내 밑에 계집애 하나라도 있다믄 이 학대는 안 받었을 게다. 애는 운동에 방해가 된다구 수술을 해서 너는 나를 불구자를 만들었지. 너는 시굴에 큰아들도 있고 딸새끼도 있으니까. 응. 그리구는 나는 병신을 맨들고 첩으로 떨어트리고 애새끼 하나 안 붙여 주고 지금 와서는 나가 달라구.
어디 말 좀 해봐. 무슨 큰 운동을 지금 하고 있나. 어째 나와 속이고는 아이 만내러 시굴은 다녔나. 내가 비럭질해 온 돈으로 나 몰래 학비는 왜 보냈는가. 너이 집은 아직 천석은 한다드라. 그 머리털이 빠질 영감쟁이는 아들도 모로나. 내가 너이 돈 한 닢이나 쓴 줄 아니.
이놈 네 피를 뽑아 풀어 봐라. 그 피가 무엇으로 뛰고 있는가. 누구 때문에 아직도 피가 네 몸에 돌고 있는가.
누가 너를 옥중에서 구해 냈노. 네가 감옥에 있는 동안 육 년이란 허구긴 날 너는 그래도 전보질을 해서 나를 부르드구나. 차입두 날 보구 시키드구나.
네 집에선 그때 돈 한푼 보탠 줄 아냐. 영감두 할미두 네 본계집두 그때만은 아는 척도 안 하드구나.
친정에서 친구들한테서 별별 굴욕을 겪어 가며 너에게 옷을 대고 밥을 대고 책을 대는 동안 네 영감은 아들이 옥에 간 건 그 몹쓸년 탓이라구 물을 떠놓고 빌드라드라. 어서 그년이 죽어야 아들이 화를 면한다구. 그래두 그런 소리두 내겐 내게 우스웠다. 난 너를 구해 내려구 뼈가 가루가 되도록 미친년같이 헤매었다. 그래 지금 와서 그 보수로 나는 너한테 헌신짝같이 버림을 받어야 하느냐.
너한테 십 년 동안 뼈가 가루 되도록 해바친 게 죄가 돼서 이년 소리를 듣구 더러운 욕을 먹어야 되니. 입이 밑구멍에 가 붙어두 그런 말은 못 하는 법이다. 입이 열 개래두 그런 수작은 못 하는 법이다.
감옥에서 나왔어두 벌써 삼 년이 되건만 네가 쌀 한 말을 사왔나, 네 계집 속옷 하라구 융 한 자를 사왔나.
응 허창훈(許昌薰)이. 그렇다. 허변호사 그놈이 미친놈이다. 너를 여태껏 먹여 오는 그놈이 미친 놈이다.
아니 너는 세상에서 뭐라구 하는지나 알구 있니. 허변호사는 영리한 놈이라 차남수가 옛날엔 ○○계 거두니까 돈이나 주어 병정으로 쓰구 제 사회적 지위나 높이려구 한다는 소문이나 너는 알구 있니. 또 차남수는 자기가 이용되는 줄 알면서 그것을 거꾸로 이용하여 생활비를 짜낸다는 소문을 너는 알구나 있니. 그래 그게 청렴한 사람의 소위 청이불문이냐.
응 그놈 허창훈이 놈. 내 오늘에야 이 말을 한다. 너는 그 집에 가서 구구한 말 한마디 하기두 싫어서 돈 관계엔 늘 나를 내세운 걸 알고 있지. 잊히지도 안하는 작년 가을 김장 때이다.
아 나는 이 말만은 안 하려고 했다. 그대로 잊어버리려고 했다.
그러나. 아아 가을비가 마른 오동나무잎을 울리던 것이 아직도 나의 귀에 새롭다. 나는 열린 창 밖으로 불빛이 쏟아져서 그 빛 가운데 빗발이 실발같이 반득거리는 것을 보면서 허변호사가 나오는 걸 기대리구 있었다. 너두 잘 알고 있을 허창훈이의 응접실이다.
나는 이십 분은 기대렸다. 그대로 와버릴까 하고도 생각해 봤다. 더러운 놈들 돈 몇 푼 가지고 사람을 골릴 작정인가 하구 분한 마음도 생겼으나 돈은 급허구 또 어제 오늘 사귄 사람두 아니구 제 편에서 와달라고 사람을 보낸 터이라 나는 분을 누르고 기대렸다. 응접실 문을 벌꺽 열드니 닝글닝글 웃더라. 얼굴이 벌건 게 술을 처먹었드라. 쓱 들어서서 문을 닫고 다시 창문 있는 쪽으로 갈 때에 그의 몸에서 술 썩은 냄새가 쿡 코를 찌르드라. 문을 닫고 창장을 내려덮은 뒤에 그놈이 하는 말이 비 오시는 데 무슨 용무가 계십니까. 그러면서 테이블 맞은편에는 의자도 있고 저편에는 소파도 있건만 그놈은 으슬으슬 내 옆으로 다가들드라. 내가 비닭이 같은 처녀라면 모르거니와 나두 천군만마의 속을 겪어 온 년이 그놈의 눈알이 붉어진 것과 씨근거리는 숨결과 그 말하는 투로 그 지더구하는 몸가짐으로 그놈의 속이 무엇을 탐내고 있는지야 모를 겐가. 이리같이 덤벼들면 나는 사자와 같이 대항하여 그놈을 가리가리 찢어 버릴 만한 기운은 있었다. 그러나 나는 모른 척했다. 애써 그놈의 변한 태도를 모른 척해서 효과를 내일까 했다. 그는 다시 말하드라. 무슨 의논허실 용무가 계시느냐구. 그의 목소리가 떨리고 나의 볼때기에 술 썩은 뜨거운 입김이 휙 스쳐 가면서 나는 갈구리 같은 손이 나의 젖통을 부여뜯는 것을 느꼈다. 나의 손은 번개같이 그놈의 뺨을 갈겼다. 그 잘칵 하는 소리. 그것은 그놈에게두 의외였고 나의 귀에도 뜻밖인 듯했다. 나는 의자를 옮겨 길을 막으며 문 있는 쪽으로 종종걸음을 쳤다. 그러나 한참 동안 그놈은 벙벙하여 어쩔 줄을 모르고 그 자리에 서 있드라. 그 짧은 순간 변호사 허창훈이도 그가 한 행동에 대하여 반성했을 게구 현관으로 뛰어나오며 나도 내가 당하고 또 행동한 것에 대하여 생각했었다. 나는 슬펐다. 눈물이 연거푸 볼편으로 쏟아져 흘렀다.
나는 때렸건만 맞은 때보다도 분하였다. 나는 신을 어떻게 신었는지 모른다.
나는 비를 맞으며 오동나무와 노가지나무와 전나무 사이를 지나 대문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정숙 씨 정숙 씨 하고 부르는 소리가 등뒤에서 나드라. 물론 허창훈이가 뒤쫓아오는 것이다. 그는 나뭇잎이고 나뭇가지고 풀숲이고 분간 없이 비 내리기 시작하는 뜰 안을 뛰어오드라. 그리고 나를 붙들드니 펄석 그 앞에 엎드려 죽을 죄로 용서해 달라고 빌드라. 나는 발길로 찰까 했다. 그러나 잠깐 그것을 내려다보다가 그대로 그를 비껴서 대문을 향하여 걸었다. 그는 다시 쫓아와서 봉투를 내밀드라. 내가 뿌리치매 그는 나에게 꽂듯이 내던지고 총총히 뛰어가 버리드라. 나는 울면서 한참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비는 더 세게 내렸다. 그래 그 봉투를 어떻게 했는지는 네가 잘 알 게다. 배추를 사고 무를 사고 고추를 사고 소금을 샀다. 아니 마늘도 사고 미나리도 사고 굴도 샀다. 젓국도 샀다. 오늘 저녁 짠김치는 너도 먹었고 나도 먹었다.
아 아. 이것이 너의 친구다. 십 년 아니 이십 년이나 너를 돌보아 주는 애비보다 에미보다 낫다는 너의 친구다.
말 좀 해봐. 왜 아무 소리도 없나. 너는 지금 나를 보고 부르짖어야 한다. 이것을 여태 동안 감추고 네 앞에 티끌만치도 그런 빛을 보이지 않은 것두 내가 허창훈이와 치정관계가 있어서이냐. 말해 봐라. 이것은 산보한 걸 속인 것보다두 결코 적지 않은 일일 게다.
또 네가 사나이라면 그 즉시로 칼을 들고 허창훈이를 쫓아가라. 그에게 돈을 던지고 그의 가슴에 칼을 꽂아라.
그놈이 돈을 낸다구 출판사를 하겠다구. 출판사를 하여 문화사업을 한다구. 너두 양심이 있는 놈이면 잡지책이나 내구 신문 소설이나 시나부랭이를 출판하면서 그것이 다른 장사보다 양심적이라는 말은 안 나올 게다. 직업이 필요했지. 그 따위 장사를 하려면 왜 여태껏 눈이 말똥말똥해 앉았었나. 작년에 하지. 아니 재작년에 하지. 문화사업. 이름은 좋다. 우정이 두터운 봉사심이 많은 허창훈이를 파트롱으로 해가지구 문화사업에 착수한다.
흥 사회주의 이름은 좋다. 그 철없는 것들이 웅게중게 모여들어 선생 선생 하니 그게 그리 신이 나던가. 우쭐해서 갈팡질팡. 드럽다 드러워. 제 여편네 젖통 만지는 건 모르구 눈앞에 내놓는 지폐장만 보이나.
징역이나 치른 게 장한 줄 아는가. 거지에게 돈 한푼 준 게 십 년 뒤에두 적선인 줄 아는가.
왜 때려. 왜 때려. 이놈이 내게 손을 걸어. 이놈. 이 도적놈. 이놈아. 이놈아 이놈아. 날 죽여라. 이 도적놈. 날 죽여라.
네가 뭘 잘했기에 나에게 손을 거니. 이놈아. 날 죽여라. 죽여라. 자. 이걸로 날 찔러라. 응 이놈아.
야 사회주의자 참 훌륭허구나. 이십 년간 사회주의나 했기에 그 모양인 줄 안다.
질투심. 시기심. 파벌 심리. 허영심. 굴욕. 허세. 비겁. 인치키(속임수). 브로커. 네 몸을 흐르는 혈관 속에 민중을 위하는 피가 한 방울이래도 남아서 흘러 있다면 내 목을 바치리라.
정치담이나 하구 다니면 사회주읜가. 시국담이나 지껄이고 다니면 사회주읜가. 백 년이 하루같이 밥 한술 못 벌고 십여 년 동안 몸을 바친 제 여편네나 때려야 사상간가. 세월이 좋아서 부는 바람에 우쭐대며 헌수작이나 지껄이다가 감옥에 다녀온 게 하늘 같아서 백 년 가두 그걸루 행셋거릴 삼어야 사회주의자든가.
그런 사회주읜 나두 했다. 난 남의 은혜를 주먹으로 갚지만 못했다. 애 낳는 것까지 두려워 수술을 해가면서두 오늘 이 꼴 당하게 될 생각만 못 가졌다. 미련한 이년은 십 년이 하루 모양으로 남편을 하늘같이 알고 비방과 핍박 속에서 더울세라 추울세라 남편만을 섬겼건만 그날 뒷날 첩으로 되어 쫓겨나게 될 줄만 몰랐다. 두를 걸 못 두르구 먹을 걸 못 먹으면서도 남편에게 의식 걱정시켜서는 안 된다는 미련한 마음만을 먹을 줄 알었다. 남편에게 불만이 있고 가정 안에 울화가 있어도 그걸 누르고 참을 줄만 알았지 어디 대고 한번 떳떳하게 분풀이할 줄은 몰랐다. 그게 죄가 돼서 오늘 너에게 매를 맞고 주먹다짐을 당해야 하는구나.
왜. 왜 나가니. 왜 윗방으루 도망허니. 헐말두 많을 게구 갈길 힘두 많을 게구나. 좀더 때리고 가지 응 응.
흐윽 흐윽 흐윽―---
2
편집힘없이 그는 쓰러진다. 아직도 귀 밖에서 처의 울음 소리가 들리건만 그의 머리는 연기로 가득 찼다. 연기는 무거운 쇳덩어리로 변하고 다시 물 축인 해면같이 엉켜돌다간 구름같이 피어서 와사 모양으로 꽉찬다. 아래로 몰렸던 피가 얼굴로 올라온다. 얼굴빛이 점점 붉어지고 머리칼 속에서 비듬이 따끔따끔 간지럽다. 관자놀이를 망치가 두드린다.
푸 한숨도 제대로 안 나온다. 남수는 담배도 안 피우며 그대로 장판 위에 번듯이 자빠졌다. 십 촉 전등이 물끄러미 그를 내려다보고 있다. 눈을 감아도 천장에 얼굴이 나타난다. 안경 끼고 콧수염 난 점잖은 신사의 얼굴. 남수는 우선 생각한다.
허창훈 군. 네가 내 아내를 어떻게 했나. 내 아내의 젖통을 도적하고 그 다음 너는 내 아내를 어떻게 할 작정이었나. 그 전 순간도 아니요 그 다음 순간도 아니요 바로 그 순간만 너는 내 아내를 약탈할 생각이었나.
네가 내 아내의 젖통을 약탈하고 내 아내의 볼때기에 술 썩은 더운 김을 끼얹고 떨리는 목소리로 무슨 의논할 말이 있느냐고 물으면서 너는 내 아내와 진심으로 무엇을 의논하고 싶었는가.
정숙이는 내 아내다. 내 애인이다. 내 동지다. 창훈이. 누구보다 네가 그건 잘 알 게다. 너는 내 애인과 무엇을 의논하고 싶었는가.
나는 정숙이가 고백하는 이상의 일이 그날이나 또는 내가 이 세상에 없고 내 아내가 혼자 있던 날이나 아니 그 뒤에도 어느 때에도 너와 정숙이 사이에 있었다고는 믿지 않는다. 나는 안 믿으련다. 그 이상의 일이 있은 것을 가령 세상 사람이 모두 알고 세상 사람이 수군거리고 비웃더라도 나는 그것만은 믿지 않으련다. 믿지 않아야 나는 구할 수 있다. 그것을 믿게 되는 날 나는 무엇이 되느냐. 이 더러운 연놈들 하고 나는 칼을 들어 마치 어떤 치정극에 나오는 불쌍한 주인공 모양으로 너희들을 질투와 의분에 불타는 칼로 찔러 버려야 할 것이다. 너희들은 나에게 그런 연극을 시킬 작정이냐. 창훈이. 너는 네가 여태껏 나에게 베푼 수많은 은혜의 보수로 내 칼을 받아야 할 것이냐.
옳다. 나는 너도 또한 사람이던 것을 잊었다. 계집에게서 매력을 느낄 때에 그것이 자기에게 어떤 관계에 서는 계집인 줄을 잊고 성적 충동과 흥분을 느끼게 되는 동물적인, 아니 진실로 인간적인 한 개의 사람이란 것을 잊어버리고 있었다. 혹은 자기와 피를 같이 나눈 누이, 피를 같이 나눈 형이나 동생의 아내 혹은 삼촌댁 혹은 조카며느리 아니 제 애비의 젊은 첩 다시 말하면 자기의 서모다. 엷게 입은 옷 속으로 여태껏 생각도 안 했던 볼룩한 젖가슴을 처음 볼 때 보루루한 솜털 속으로 흰 살이 등골로 흐른 것을 멀거니 볼 때 물기 품은 잼 같은 입술이 쭝긋쭝긋 웃고 있는 것을 눈앞에 직면하여 볼 때 자고 깨나서 기지개를 하는 순간 흘러내린 치마허리로 흰 살이 슬쩍 눈에 뜨일 때 커다란 못 같은 두 눈이 이글이글 타고 있는 것을 숨결로 느낄 때 아 이때에 그 누구더냐, 누가 감히 그 순간 그것이 자기 자신을 동물로 환원해 버리는 것을 느끼지 않을쏘냐.
하물며 제 동지도 아니요 이러저러한 친구의 마누라가 합체 뭐냐. 친구의 마누라쯤이 대체 뭐냐.
그런 일은 나도 있었다. 너도 있었다. 아니 세상의 모든 사나이에게 모두 있었다.
내 아내에게서 그것을 느낀 놈이 비단 허창훈이 하나뿐이랴. 준호도 그걸 느꼈으리라. 아니 준호에게 내 아내가 느꼈는지도 모르나 이건 마찬가지다. 아니 그전 옛날 청년회관에 출입하던 모든 남자, 그 중에서도 정숙이를 먹으려고 하던 몇 사람의 남자. 그들은 밤마다 생각하고 틈 있을 때마다 그것을 느꼈으리라.
내가 없는 동안 남자들이 정숙이에게 어떻게 굴었고 또 정숙이가 사나이들에게서 무엇을 느꼈으며 이것을 누르기에 얼마나 힘을 썼는지는 이 자리의 누가 감히 보증할 수 있을 것이냐.
그러나 옥중에 있는 동안 참말로 말할 수 있다만 나는 그것을 생각해 보고 안타까워하며 몸이 달아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 이것이 웬일이냐. 나는 오히려 세상에 나와서 아내를 내 옆에 놓고 가끔 그것을 느끼니 이것이 대체 어찌 된 일이냐.
오히려 내가 없었을 때 일까지를 상상하고 나는 때때로 몸이 달아한다. 아내는 그전과 조금도 다름없이 굴건만 아니 그전보다도 더 얌전하게 집 안에만 들어 있건만 나는 그전과는 판이하게 그것을 느낀다.
나는 의처병에 걸렸을까.
물론 이런 것은 나도 안다. 아내가 나에게 불만을 가지고 있다는 것 이건 벌써부터 내가 잘 알고 있다. 그것은 오늘 밤 방금 정숙이가 한 말로 증명할 수 있지 않으냐. 사실 나는 그에게 불만이 있다는 것을 느낀 적은 퍽 오래 전부터이다. 그러나 나에 대한 그의 불만이 이렇게 그의 전몸뚱이에 혈관같이 퍼져 있는 줄은 몰랐었다. 그가 말하는 모든 불만, 그가 내게 대들며 삿대질을 하듯이 들씌우는 모든 불평이란 것들이 하나도 거짓은 없고 그것 전부가 사실이라 할지라도 그리고 나 역시 그것을 희미하게나마 생각하고 있었다 할지라도 나는 그것이 정숙이의 몸에 그렇게 뿌리 깊게 적어도 그러한 형태로 퍼져 있는 줄은 상상하지 못하고 있었다. 어디서 옛날의 정숙의 면모를 찾을 수 있느냐. 그의 생각 그의 관찰 그의 비판―---모든 관점이 다른 염집 부인네보다 못하면 못하지 조금도 나을 것이 없다.
나는 울고 싶었다. 나는 때리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생전 처음 그를 갈겼다. 내 주먹은 몇 번 주저하고 또 몇 번은 스스로 억제할 수도 있었으나 드디어 나는 그를 갈겼다. 나는 아무 말도 못 하면서 그를 갈겼다. 아 그것은 나 자신을 때리는 것이었다.
창훈아. 너는 지금 말하여라. 너는 지금도 내 아내를 낚고자 나를 시켜 출판사를 만드느냐. 너는 내가 없을 때마다 정숙이를 찾아와서 돈을 가지고 내 아내를 압박하려느냐. 또 젖통을 부르뜯고 그의 얼굴에 더운 김을 내뿜을 터이냐. 그리고 뻔히 뭣 하러 온 줄을 알면서 닝글닝글 웃으며 무슨 용무가 계십니까 하고 내 아내의 옆으로 다가들 터이냐. 이것을 알면서도 나는 너와 함께 주식회사를 조직하여야 하느냐.
오냐 그런 것을 알면서도 나는 할 것이다. 네가 나에게 정책적으로 논다면 나는 너한테 지지는 않을 게다. 어떻게 했든 나는 눈을 감고 이번에 오만 원은 출재(出財)시키고 말겠다. 네가 눈 가리고 아웅하면 나도 한다. 네가 내 아내에게 그런 행동을 한 이튿날 나는 너와 만났다.
그때 너는 천연스럽더구나. 너는 고민도 안 하였니. 네가 정숙이에게서 느낀 것은 애정이 아니고 성욕이냐. 성욕도 애정도 마찬가진 줄은 안다. 그러나 그 어느 것이냐.
아 이런 건 다 쓸데없는 질문이다. 최정숙이는 나의 아내다. 그러기에 나는 그를 때렸다. 그도 울면서 나에게 대들었다. 지금 그는 아무 말도 안 하고 윗방에 엎드러져 있다. 그는 제가 방금 무슨 말을 하였는지를 비로소 생각할 수 있을 게다. 그는 자기가 한 말에 스스로 놀랄 것이다. 내가 때린 주먹 자리를 지금 만져 볼는지 모른다. 멍울이 졌겠지. 그러나 그도 자기 볼때기를 때리고 머리를 문지른 것이 자기 자신인 것을 깨달을 것이다. 그 증거로 그는 지금 윗방에서 자지도 않으나 울지도 않고 그대로 조용하다. 부슥부슥 부은 눈은 지금 말똥말똥 무엇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을 것이다.
김준호. 나는 너에게도 말할 것이 있다. 너는 좋은 청년이다.
처음 나는 너를 내 처에게 총명한 청년이라고 말했더니 처는 나를 비웃으며 김준호는 경박한 청년이라고 완강히 나에게 반대했다. 글쎄 그만둬요 무슨 김준혼지 뭔지 당신은 어째 그리 감격하길 잘 허우. 사람이란 첫인상만 보구 어찌 그리 내막을 알 수 있수 하고 나를 톡 쏘아붙였다.
그러나 너도 알다시피 지금은 너를 싫어하지 않는다. 너와 저녁을 먹고 너와 산보할 때에 내 처는 행복을 느낀다고 말하였다. 내 처는 너에게 반했다고 말했다. 이렇게 말하는 나의 아내가 진심으로 너에게 애정을 느끼고 참말로 반했는지 그것은 좀더 생각해 볼 여지가 있을 것이다. 감정이 격한 나머지에 일종의 반발로 약을 올릴 양으로 그럴 수도 있으니까. 그러나 너와 산보할 때 행복을 느낀다는 말이 전혀 근거가 없는 말이라고는 나도 생각할 수 없다. 나의 처는 드디어 이렇게까지 질문하지 않았느냐. 준호에게 있는 것이 당신에게 있수.
그렇다. 나는 지금 나에게는 없고 준호 너에게만 있는 것을 생각해 본다. 너는 과연 나에게 없는 어떠한 것을 갖고 있느냐.
천박하다고 경멸하고 냉소하면서도 너를 만나면 기쁘고 너와 같이 걸을 때 행복과 흥분을 갖게 되는 어떠한 것이 너에게는 있느냐. 경박 그 자체가 너의 매력이냐. 그렇지 않으면 여자를 압도하고 그들을 뇌쇄해 버릴 만한 두 살 난 표범 같은 억센 정열이냐.
나는 지금 내가 너를 처음 만나고 또 출판 주식회사의 계획을 함께 하는 동안 너에게서 느낀 솔직한 감상을 분석해 볼 흥미를 가지고 싶지 않다. 그것보다도 나는 지금 뚜렷하게 너와 나의 아내인 정숙이와의 관계를 추궁해 보고 싶다.
처는 아까와 같이 남편에게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세속적인 불만 외에 여러 가지 불만이 함께 엉클어져 있었다. 그것을 그는 명확하게는 인식하지 못하였고 또 그렇게 되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몸에는 이 불만이 흠뻑 젖어서 구석구석까지 침윤되어 있었던 것을 지금 깨달을 수 있다.
너는 그런 때에 우리들 앞에 나타났다. 찬란하나 포착할 수 없고 경쾌하나 걷잡을 수 없고 편협한 듯하면서 자기 행동에는 지극히 관대하고 무겁지 않으나 어디로 흐르는지 알 수 없는 굴신자재(屈伸自在)한 성격―---이것이 정숙이의 눈에 강렬한 자극을 준 것이 사실이다. 그러므로 당장에 그는 반발하였다. 그까짓 경솔하고 천박한 자식. 신문기자란 부랑자가 아닌가. 이렇게 그는 입으로 공언하고 자기 내심에도 타일렀다. 그러므로 그는 너의 말에 내가 찬성하여 허창훈이와 기타 호남지방에 있는 돈 있는 이들을 움직이어 출판사와 인쇄소의 주식회사를 만들려는 것을 속으론 비웃었을 것이다. 그런 놈하고 무슨 사업이냐.
그러나 그는 경멸하고 기피하고 증오하면서도 아니 그렇기 때문에 더욱더욱 너에게서 오는 자극을 일층 강렬하게 받았다.
나는 지금 나 자신에 대하여 끝까지 잔인하면서 이것을 추궁해 본다. 이렇게 하는 것은 나 자신에 대한 모욕이다. 나는 그것을 느낀다. 제 여편네가 나이 어린 젊은 녀석에게서 제 서방에게 없는 매력을 느껴 그것에 끌리어 들어가는 것을 냉혹하게 관찰해 나가는 과정은 준호야. 네게는 아무것도 아닐지 모르나 나에게는 큰 고통이다. 준호야 너는 아마 다른 계집을 대하는 듯이 내 아내에게도 대하였을 것이다.
사실 네가 내 아내의 어느 곳에 매력을 느꼈을는지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네가 여자에게 대하여 취하는 태도를 알고 있다. 그것은 의식하건 안 하건 여자에 대한 너의 비결이다. 너는 그것을 아무 여자에게도 사용한다. 여급 기생 처녀 남의 부인―---더구나 권태기에 빠져 있는 중년 부인에게는 상당히 강렬한 자극이 된다.
언뜻 보면 여자에게 흥미를 가지고 호의를 느끼는 듯이 보이면서 또 그렇지 않게 보이는 것, 다른 사람들은 낯을 붉히고 부자연한 태도를 가지고야 말할 수 있는 것을 대번에 싱글싱글 웃어 가며 참말같이 또는 농말도 같이 말해 버리는 것-―--이런 것이 여자에게 흥미를 던져 준다. 어떤 때는 사랑하는 남자같이 행동하나 또 어떤 때는 전혀 딴사람같이 대해 준다. 누가 자기의 애정을 고백하면 너는 여지없이 그를 환멸의 심연으로 떨어뜨린다. 그러나 그가 완전히 단념해 버리도록 거절도 안 하고 어디에곤 야릿하게 한 줄기의 실오리를 붙여 둔다. 너는 거침없이 표범과 같이 날쌔게 그들의 눈앞에서 정력을 휘두른다.
네가 그 이상 숨어서 이러한 여성들에게 어떤 행동을 취하는지는 나는 알 수 없다. 네가 네 앞에 나타나는 성적 대상에 대하여 생불과 같이 대하지는 않는다고 하여도 적어도 비루한 트릭을 써가지고 그들을 농락하지 않는 것만은 사실일 것 같다.
나와의 십여 년 동안의 생활에서 자극을 잃고 권태에 빠져 있는 나의 아내 최정숙이가 나에게서 찾을 수 없던 포착할 수 없는 매력을 너에게서 느끼기 시작한 것은 결코 이상한 일은 아니다. 나는 퍽 전에 이것을 느꼈다. 무엇보다도 정숙이의 지나치게 심한 너에 대한 과소평가에서 나는 언뜻 그것을 느꼈다.
하루는 정숙이가 저녁녘에 종로를 다녀오더니 이렇게 나보고 말하더라.
백화점에서 나오다가 바로 문 옆에서 준호 씨를 만났는데 웬 양장한 여자와 웃고 지껄이더니 내가 물끄러미 서서 보는 것을 눈치채곤 그대로 인사하고 갈라지지 않겠수.
그래 여자와 갈라지더니 시침을 떼고 내게로 오길래 풍경이 아름답구려 했더니 흥흥 하고 코웃음을 치며 둘이 한번 그런 풍경 만들어 볼까요 하겠지. 그래 내가 어린것이 그게 무슨 버릇없는 소리냐고 했더니 그럼 죄지었으니 차라도 어디서 먹읍시다. 그리곤 어딘지 낮에는 차 팔고 밤에는 술 판다는 무슨 바엔가를 앞서서 갑디다. 가면서 하는 말이 이제 그게 영화배운데 젖통 크기로 유명하우 하면서 싱긋싱긋 나를 보는구려. 그 하는 수작이 너무 천하고 품위가 없어서 욕이라도 해줄까 했으나 원체 버들가지 모양으로 바람이 몰아치면 부러질 사람이유. 그런데 또 찻집에 들어가서 하는 짓이 장관이죠. 당번 여급이 보아하니 활량인데 이걸 턱 옆에다 앉히더니 자 내가 하나 물으니 대답하면 내가 한턱 내구 지면은 너의 제일 귀한 걸 내게 바쳐야 한다. 또 나도 제일 귀한 걸 바치라면 그걸 걸어도 좋지. 이러고는 그 앞에 있는 네모난 흰 종이를 쓱 들더니 자 이게 무슨 그림인가. 여급이 아무리 봐야 백지밖에. 쳐들고 보아도 안 보이고 스쳐 보아도 안 보이니 그 여자의 대답도 걸작이지. 하는 말이 바람을 그렸다. 바람은 눈에 안 보이니까. 준호는 고개를 쭝긋쭝긋하며 그 말도 비슷하나 가작이지 걸작일 수는 없다. 내 해석은 이렇다. 이 그림은 토끼가 거북이를 따라가는 그림이다. 거북은 앞서서 이미 이 종이 밖으로 달려가고 토끼는 늦어서 아직 종이까지 오지 못했다. 계집애도 좋아라고 손뼉을 치니 준호 하는 말이 너도 낙제는 아니니 키스쯤으로 용서한다고 막 야단이겠지. 그래 레이디를 앞에 앉히고 그게 무슨 쌍스러운 장난이오. 당신 동무 참 훌륭합디다. 그게 망나니지 뭡니까. 배라먹을 놈.
이 말을 싱글싱글 웃으며 듣고 있던 나는 마지막 말이 나올 때 언뜻 느꼈다. 정숙이 자신이 준호에게 의식적으로 반발하고 있다는 것을 그때에 눈치챈 때문이다. 의식적으로 애써 그를 밀쳐 버리려는 노력―---그것은 하면 할수록 더욱더욱 그 속으로 밀려 들어가기만 한다.
그리고는 매일에 한두 번은 반드시 내 처가 네 욕을 한다. 까분다. 부랑자다. 행실머리 없다. 이럴 때마다 나는 속으로 지금 제가 저 자신과 싸우고 있구나 하고 생각했다.
오늘 밤 싸움만 해도 물론 이렇게 될 일이 아니었다.
정숙이가 속인 것에서 시기심을 느꼈다든가 너희들이 산보할 때 무엇을 했을까 하는 것을 쓸데없이 상상하고 질투를 느끼고 트집을 건 것은 아니다. 내가 농말 비슷하게 이야기를 했더니 갑자기 낯이 해쓱해지며 쓸데없이 바빠한다. 나는 그때만은 가슴이 찌르르했다. 이것은 분석해 보면 질툰지 모른다. 몇 마디 오고 가고 하는 동안 쓸데없는 싸움인 줄 알면서도 걷잡을 수 없게 되었다.
자 준호 군 어찌 되었든 나는 군을 믿고 일을 계속하세. 군이 내 아내를 어떻게 했겠는가. 내 마누라는 감춘 것을 군은 스스로 고발하지 않았는가. 또 그 이상의 일이 있다 해도 나는 그것에 대해선 생각지 않으려네. 세상 사람의 웃음거리가 되어도.
어쨌든 최정숙은 내 아내다. 오늘 밤 한 말은 아내로서 할 만한 말은 아니었으나 그가 불만을 과장해서 지적하고 나에게 대든 것은 나에게는 좋은 약이 되겠지. 지금은 처가 저렇게 흥분하고 있으나 곧 본정신으로 돌아갈 것이다.
여하튼 출판사는 해야만 한다. 결심한 이상 꼭 해놓고야 말 것이다. 사업이 아니라면 장사라고 불러도 좋다.
주식회사가 되기까지는 허창훈이도 필요하고 김준호도 절대로 필요하다. 허창훈―--- 너는 돈을 가졌고 김준호―--- 나는 너의 기술이 필요하다. 자본가를 끌기 위하여는 김준호―--- 네가 꼭 있어야 한다.
아. 나는 마누라와 밤을 새워 치정싸움을 일삼게 되었구나.
그러나 창훈아 준호야. 아니 누구보다도 정숙아. 나는 너희들과 함께 출판사를 하련다 아니 장사를 하련다.
3
편집일곱시가 되어 햇발이 영창에 퍼졌을 때에 아랫방에서 자던 정숙이는 일어나서 거울을 보았다. 눈알이 충혈이 되어 핏줄이 둥글고 퍼런 눈알에 실꾸리같이 엉키었다. 두어 번 눈을 서먹서먹 해보고 얼굴을 바싹 유리에다 들이대니 갑자기 안계가 캄캄해지고 머리가 아찔하다. 그는 손으로 머리를 짚고 탁 엎드렸다. 코가 근질근질하여 손가락을 콧구멍 속에 넣어 보니 피다.
종이를 비비어 꽂고 그는 부엌으로 내려갔다.
새벽녘에 피로에 지쳐서 간신히 들었던 잠을 윗방에 누웠던 남수도 문소리 때문에 깨버렸다. 머리가 아프다.
그러나 눈이 떠지자 그는 벌떡 일어났다. 그는 어젯밤 일을 생각지 않으려 한다. 아니 자기가 혼자서 생각하던 끝에 얻은 결론만을 회상하려고 한다.
아내가 부엌으로 가서 덜걱거리는 것을 보니 그도 그가 한 말과 남수에게서 맞은 것에 대하여는 생각지 않고 그가 울다 남은 끝에 도달한 건강한 결론만을 지금 마음에 갖고자 하는 것이 분명하다고 남수는 생각한다.
이 방이 있는 집채와 안대문 하나로 사이를 둔 회사원네 집에서는 아이들이 벌써 참새와 같이 재깔댄다. 아버지와 함께 라디오에 맞추어 체조를 하려고 모두 일어나서 자리를 개는 모양이다.
남수도 그들과 같이 체조를 할까 하였다. 그러나 명랑한 결론만을 생각하고 라디오 체조를 할 만큼 단순할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도 그의 명랑해지려는 노력은 밥을 지으려고 부엌에 간 줄 알았던 아내가 금시에 아랫방으로 돌아와서 펄석 앉으며 땅이 꺼져라고 깊게 짚은 긴 한숨에 부딪쳐서 깨지고 말았다.
역시 아내는 어제 일을 깨끗이 잊어버릴 수 없는 모양이다. 그는 자기의 입으로 쏟아진 말에 대하여 생각하고 있는가 그렇지 않으면 남편에게서 맞은 것을 분하게 회상하고 있는가.
한숨―---그것은 분할 때보다도 후회할 때 흔히 나오는 물건이라고 남수는 생각해 본다. 그렇다면 그는 자기가 쏟아 논 말에 새삼스런 두려움을 일으키고 땅에 흩어진 물을 다시 주워담을 수 없는 자의 경지를 헤매고 있는 것이나 아닐까.
남수는 측은한 마음이 생겼다. 아내의 괴로움이 남수 자신의 뼈에 사무치는 것 같아서 아내가 불쌍해졌다.
뭘. 자기는 그만 것을 이해하고 용서해 줄 만한 포용성과 관대한 마음은 가지고 있건만―---이렇게 생각하고 그는 아랫방으로 내려가서 아내의 등을 뚜덕뚜덕 두드려 주며 그를 위로해 주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그러나 샛문을 열어 젖힐 용기는 나지 않는다.
그때에 조간신문이 왔다. 마루 위에 대문 틈으로 들이치는 소리가 싸르르 하더니 턱 한다. 그는 미닫이 여는 소리를 내고 마루로 나가 신문을 집었다. 신문을 왈가닥 소리를 일부러 내며 이리 뒤치고 저리 뒤치고 한다.
아내는 지금 남편이 일어나서 어느 날과 다름없이 기지개를 하고 신문을 뒤적거리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어젯밤 전에 없던 싸움이 벌어졌건만 남편은 아무렇게도 생각지 않는다. 이런 것을 남수는 정숙이에게 보여 주고 싶었다.
남수는 신문을 들이뜨리고 뜰로 내려갔다. 태양을 향하여 낑 하고 기지개를 한 뒤에 칫솔질을 하고 냉수에 세수를 하였다.
정숙이도 다시 부엌으로 나온다. 세수를 하노라고 구부리고 서서 다리 짬으로 남수는 정숙이의 모양을 슬쩍 본다. 뾰루퉁한 듯도 하나 얼굴은 무표정에 가깝다. 늘 하는 버릇으로 낯을 씻기 전에 얼굴을 크림으로 닦는 모양이다.
이제는 되었다. 이해는 성립되고 화해가 되었다. 남수는 방 안에 쭈그리고 앉아서 다시 신문을 본다. 정숙이는 부엌에서 왔다갔다한다.
"우당 선생 기침하셨습니까."
준호의 목소리다. 대문 밖에서 이 소리가 날 때에 일순간 가슴이 덜컥 내려앉고 바빠서 들었던 것을 떨어뜨릴 뻔한 것은 남수뿐만이 아니었다. 부엌에서 솥을 가시던 정숙이도 혈액순환이 정지된 사람 모양으로 한참이나 어찌 된 셈인지를 몰랐다.
준호―---모든 것의 원인을 지은 장본인이 지금 찾아온 것이다.
목소리는 다시금 안대문 밖에서 들려 온다.
"우당 선생 아직 주무시우."
뜰로 뛰어나간 것은 남수나 정숙이나 동시였다. 그러나 남수는 마루 위에서,
"네 나갑니다."
하고 대답만 하고 문은 정숙이가 열었다. 허리를 구부리고 대문을 들어서더니,
"단잠을 깨워서 미안합니다."
하고 두 사람을 번갈아 본다.
"지금이 몇 신데 여적 잘라구."
남수는 손을 내민다. 그에게 악수를 청하는 것이다. 이것으로 모든 문제는 해결되는 듯이 내심에도 기뻤다. 그들은 손을 쥐고 흔들었다. 손을 놓고 나서 얼굴을 돌리고 옆에서 뻔하게 보고 섰는 정숙을 보더니,
"며칠 동안에 상하신 것 같습니다. 머 몸이 편찮습니까."
한다. 정숙은 불시에 얼굴을 만져 보고,
"뭘 상하긴 그렇거니 하니까 그렇죠. 또 나는 봄을 타서."
하고 간신히 웃어 보였다.
"네 봄을 타서요. 좋으십니다. 봄을 타는 건 대단히 좋은 일입니다."
준호는 싱겁게 껄껄 웃는다.
"망칙해, 봄을 타는 게 좋긴 머이."
"그런데 광대뼈 옆에 퍼런 건 무업니까."
준호가 쳐다보는 바람에 정숙이는 얼굴이 발개지는 것을 느끼며 손으로 멍울진 곳을 만져 보았다. 아직도 좀 아프다. 그러나 그는 아픈 것을 참아 가며 몇 번 그것을 손으로 꾹꾹 누르고,
"어느 거 이거 여기 뭐 있어. 아무렇지두 않은걸요. 아마 버짐인 게죠."
하며 얼굴을 좀 돌렸다.
"자 어서 올러오슈 이렇게 뜰 안에서 이럴 게 아니라."
윗방에 둘이 마주앉아서 담배를 붙여 물었다. 뭘 하러 이렇게 어젯 저녁에도 만난 사람이 오늘 새벽에 또 찾아왔는가 하고 궁금도 했으나 어쨌건 그가 찾아 준 것은 아내와의 화해를 위하여 좋은 기회가 되었다고 남수는 기뻐하였다.
한참 담배를 태우면서도 준호는 용건 될 만한 말은 꺼내지 않고 잡담만 한다. 그래서 남수는 말이 좀 끊어졌을 때에,
"그런데 오늘은 머 누가 돈을 새로 내겠다는 사람이나 생겼수. 미상불 좋은 소식을 가진 것 같은데."
하고 준호의 눈치를 보았다.
"머 용건 없이 놀러는 못 올 집이오."
하고 준호는 싱긋이 웃더니 천천히 담뱃불을 끄고 얼굴을 정색한다.
"다른 게 아니라."
이러면서 준호가 이야기한 것은 다음과 같다.
준호는 남수들에게는 비밀히 어느 신문사에 취직운동을 하고 있었는데 오늘 아침에 그것이 결정이 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출판회사 조직에는 금후에도 조력은 아끼지 않겠으나 직접 관계는 끊어야 할 것이며 이삼 일 후부터는 출근을 하게 될 판이므로 자기가 나서서 모아 놓은 것을 인계해 주겠다는 말이다.
"어차피 봉급생활을 할 바엔 신문기자를 몇 해 좀더 해보려고 합니다. 그리구 이번엔 사회부로 가서 총독부 출입을 하라고 하므로 조건도 좀 좋고 또 여러 가지로 배울 것도 있을 것 같애서―---"
원수와 마주 대하여 앉아서도 불쾌한 낯을 나타내지 않을 만한 사교적 세련은 치러 왔건만 이때만은 남수도 웃는 낯으로 장래를 축복한다고 기쁨을 표시할 수는 없었다. 소한테 물렸다는 말이 속담에 있거니와 남수는 이 어린것한테 한 밥 잘 먹히고 만 것이 되고 말았다.
남수는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속이 찌르르 하고 물 끓듯이 가슴이 부글부글 끓어 오른다.
내 마누라를 농락한 놈이 이놈이다, 하는 생각이 새삼스럽게 생겨나며 이놈이 나를 농락하고 말았구나, 하는 분격한 마음이 끓어오른다.
제가 먼저 제안하고 제가 선두에 서서 일을 꾸며 놓고는 그 뒤에 숨어서 그는 취직운동을 하였다. 그리고 일이 막 되어 가려고 할 즈음에 돌연히 뱀장어 모양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무슨 행동이냐.
"또 종잇값이 좀 내릴 것 같드니 오늘 시세도 그만인걸요. 앞으로 내릴 가망은 없는 모양이구려."
준호는 출판사 경영 앞에 암초까지를 암시하고 마치 남의 일을 비방하듯 한다. 남수는 주먹을 부르쥐고 그의 볼때기를 후려갈길까 했다.
그러나 냉정히 주먹을 굳게 쥐고 생각해 보면 제가 미련한 놈이었다. 그는 아무것도 모르고 부엌에서 밥을 짓고 있는 처를 갈기고 싶었다.
"이년 이런 놈하고 산보할 때 너는 행복을 느끼느냐."
이렇게 처를 두드리고 싶었다. 그러나 그 때리고 싶은 마음은 결국 제 자신에게로 돌아오는 불쌍한 심리였다.
준호는 호주머니에서 문서를 꺼내서 우물거리고 있다. 남수는 아무것도 눈붙여 보지 않으며 창문 있는 쪽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다.
라디오 체조의 호령 소리가 갑자기 그의 귀에 어지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