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奇蹟

그렇다. 지금 응접실 안으로 선뜻 한발을 들여 놓은채 빤히 백진주 선생의 얼굴을 바라다보며 마치 돌부처인 양 움직일줄을 모르는 귀부인 한사람!

그것은 틀림없는 송준호 청년의 어머니인 동시에 중추원 참의 송춘식이의 안해이었고 또한편 송춘식부인인 동시에 순정의 젊은이 이봉룡의 젊고 아름다운 청춘을 불태운채 영원히 가저가버린 항구의 꿈많던 처녀 계옥분 그사람이기도 하였다.

「오오, 옥분이!」

하고 만일, 이 자리에 이 귀부인의 남편되는 사람과 아들되는 청년이 없었던들 백진주 선생은 그런 종류의 깊은 감격과 질식할것 같은 신음으로서 이 귀부인을 맞이하였을런지도 몰랐다.

백진주 선생의 얼굴위에 얼어붙은 듯이 움직일줄 모르는 송춘식 부인의 오들오들 떨고있는 한쌍의 눈동자! 화려하던 얼굴이 종이장처럼 핏기를 잃고 문지두리를 짚었던 부인의 팔이 힘없이 미끄러저 내리는 순간, 백진주 선생은 얼른 몸을 일으키며 부인을 향하여 정중히 허리를 굽혔다.

『아니, 어디 편치 않으우?』

송춘식은 부인을 처다보았다.

『어머니, 얼굴빛이 좋지 못하신데.......』

준호도 달려가며 그렇게 물었을 때, 부인은 머리를 간신히 흔들며

『아—니, 그저...... 그저.......』

하고 안색을 가다듬어 가지고 손님에게 조용히 인사를 하며

『이분이...... 이 선생님이 안계셨던들 지금쯤 우리 집안은 깊은 비탄속에 잠겨 있을것을 생각하니, 공연히...... 공연히 마음이 떨리는구나.』

그리고 이번에는 정면으로 백진주 선생을 향하여

『먼 길에 수고로히 오셨습니다! 선생 덕분에 준호가 이처럼 생명을 유지할수 있은것을 저는 모두...... 모두 신(神)의 가호(加護)라고 믿습니다. 이처럼 선생님께 치사의 말씀을 드릴 기회를 가진것을 저는 끝 없이...... 한 없이 신명께 감사 하옵니다!』

그러면서 또한번 공손히 허리를 굽히는 송춘식 부인에게 백진주 선생은 부인보다도 더한층 창백한 얼굴로

『부인, 별로 신통치도 않은 사소한 행동에 대하여 너무 과분한 칭찬을 듣는것을 도리여 소생은 황송히 생각합니다.』

『아아, 선생과 같으신 분과 교분을 가진 준호는 행복한 사람이 올시다. 모두가...... 그렇습니다! 모두가 신명의 뜻인가 하옵니다.』

그러면서 부인은 끝없는 감사의 빛을 띄우며 그 어여쁜 두 눈동자로 잠깐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순간 창밖을 바라보는 그 새까만 눈섭 밑에 백진주 선생은 한방울 맑은 눈물이 고였다 흩어지는 것을 걸핏 본것 같았다. 아니, 분명히 보았다.

『그러면 백선생, 저는 오늘 피치못할 회의가 중추원에 있어서요. 대단히 미안한 일입니다만 잠깐 실례하지 않으면 안되겠습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부인을 향하여

『당신이 나 대신 백선생을 잘 모서야겠소.』

『네, 다녀 오셔요.』

하고 부인은 부드럽게 대답을 하며 남편을 문밖까지 전송하고 나서

『백선생, 오늘은 저이들과 함께 저녁을 같이하여 주실수 있으시겠지요?』

『고맙습니다. 부인의 후의는 감사하게 생각하오나 저는 아직숙소를 정하지 못하여서요.』

그때 송준호는 어머니를 대신하여

『그러나 백선생님, 상해에서 받은 혜택의 十분지一이라도 보답하고저 하는 저이들을 위하여 누추하나마 하루밤이라도 저이 집에서 누하시도록 하시면 어떻겠습니까?』

『감사합니다. 그러나 내가 상해를 떠나기 사흘전에 사람을 시켜서 숙소를 구해놓도록 준비를 하여 두었습니다. 아마 지금쯤은 저 대문 밖에서 내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을런지도 모르지요.』

그러면서 백진주 선생은 응접실 커—텐을 반마큼 열어 제치며 대문 밖을 내다보았다.

과연 한대의 자동차가 대문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것이 보이였다.

『그러면 후일 다시 한번 저이 집을 찾아 주실수 있을까요?』

하고 부인은 의미 깊은 시선으로 백진주 선생의 얼굴을 처다보았다. 그러나 백진주 선생은 거기는 대답이 없이

『부인, 오늘은 실례가 많었습니다.』

하고 작별의 인사를 간단히 남겨놓고 응접실을 나왔다.

송준호는 대문밖까지 따라나와 자동차를 타는 백진주 선생을 정중히 전송을 하였다.

『숙소도 정해진듯 하니 송군을 제집에 한번 초대를 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그러면 후일 다시.......』

이윽고 자동차가 엔진 소리와 함께 송춘식이의 대문밖을 떠나는 순간 백진주 선생은 지금 막 송춘식 부인과 작별을 하고 나온 응접실 암록색 커—텐을 반만큼 열고 조심성스럽게 밖을 내다보는 흰 얼굴 하나를 분명히 보았다.

준호가 다시 응접실로 들어가니 어머니의 창백한 얼굴이 팔거리 의자에 파묻히 듯이 고요히 앉아 있었다.

『어머니, 어디가 정말 편찮으셔요? 아까도 그랬었지만 얼굴 빛이 정말 나쁜걸요 뭐.』

아들은 어머니 옆으로 다가 앉으면서 근심스럽게 물었다.

『내 얼굴빛이 그처럼 나쁘냐?』

어머니는 아들을 조심성스러운 눈치로 바라보았다.

『정말이예요. 어머니. 괴로우시면 들어가 누실까요?』

『아—니, 괜찮어!』

그리고 또 얼마동안 침묵이 계속된 후

『그런데 남자의 이름이 어째 진줄까?』

하고 어머니는 은근히 물었다.

『어머니, 그건 저...... 저두 그것이 본명인지 가명인지는 몰라두, 진주도라는 섬이 황해바다에 잇대요. 그 섬은 무인도라는데...... 아, 저 신군이 저번 상해로 가는 도중에 진주섬엘 들러서 갔는데 백진주 선생은 그 진주섬의 주인이라구요.』

『진주섬이라구?......』

『네, 진주섬!』

무엇인지는 알수없으나 그어떤 희미한 기억을 더듬는것 같은 어머니의 몽롱한 눈동자를 아들은 보았다.

『어머니, 진주섬을 아세요?』

『아—니, 몰라.』

어머니는 머리를 가만히 흔들었다. 그러나 이 어머니는 그 옛날 태양환의 일등운전사 봉룡의 입으로부터 그런 아름다운 이름을 가진 조그만 섬이 황해바다 한복판에 계딱씨 처럼 떠있다는 말을 여러번 들었던 것이다.

『백진주 선생은 네가 말하는것 처럼 그렇게 돈이 많은 분이냐?』

『정말이예요 어머니. 상해에서두 백진주 선생이라면 일류로 치는 금만가랍니다.』

『그래?』

어머니는 또 잠깐 침묵을 지키다가

『그런데 어머니가 네게 특별히 한가지 묻는것인데...... 백진주 선생이라는 사람은 겉과 속이 똑같이 훌륭한 사람이라고 너는 생각하느냐?』

『네,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만 저 신군의 의견을 들으면 백진주 선생은 마음 놓고 사괴일 인물이 아니라고 그러더군요.』

『음—』

『그러나 어머니. 저는 이렇게 생각하지요. 백진주 선생으로 말하면 그어떤 극도의 불행으로 말미아마 숙명의 낙인(烙印)을 찍힌채 지옥으로 떨어졌다가 이를 악물고 다시 이 사바에 기여나온 의지(意志)의 인간인것 같아요.』

『음—』

『그러나 그런 과거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어머니? 오늘 어머니께서도 만나 보신것과 같이 훌륭한 분이면 그만 아니예요?』

『그렇기두 허지만...... 그런데 그분이 네게는 몇살이나 되여 보이드냐?』

『三十五, 六세쯤 되어 보이지 않어요?』

『三十五, 六세? 그보다야 더 났지.』

어머니는 그러면서 슬그머니 눈을 감고 봉룡의 나이를 마음속으로 세여 본다.

『그래 너는 정말 그분을 좋와 하느냐?』

『네, 신군은 싫어 하지만두, 전 무척 백선생이 좋와요.』

『음...... 그래두 내가 일상 널보구 하는 말이 있지 않느냐? 동무를 새로히 사귈 때는 잘 주의해서 사귀라구.......』

『그러나 어머니, 어머니가 그처럼 걱정 하여 주시는것은 감사하지만...... 백선생은 술두 많이 안 자시구, 노름노리두 안하구, 돈은 진시황처럼 물쓰듯 하고 그러니까 절보구 돈 취해달라는 일은 없을 것이구...... 어머니, 뭘 주의하라는 말씀이세요?』

『아, 참 네말이 맞았다! 나는 공연히 쓸데없는 걱정을 하는 셈이지. 그리구 널 구해준 분이 아닌가!』

『그럼요, 어머니.』

『그래 아버지는 그분을 어떻게 접대하시든?』

『아주 훌륭하게 접대를 하셨답니다. 구년 친구 처럼 반가히 맞으셨어요.』

『음, 그래?......』

어머니는 그러면서 꿈꾸는 사람처럼 감았던 눈을 슬그머니 떴다.

『준호야.』

『네?』

『나 혼자 좀 이방에 두워 주렴.』

『아, 그러세요?』

준호는 몸을 일으키며

『저 어머니가 읽으시던 소설책 갖다 드릴까요?』

『아—니. 거저 혼자 좀 앉아 있구 싶어서.......』

『네, 그럼 전 제방으로 가겠습니다.』

그리고 응접실을 나갈려다가

『아, 어머니.』

『응?』

『백선생이 며칠 후 저를 초대해 주시겠다고 약속을 했었답니다.』

『그래?...... 준호는 참 훌륭한 동무를 가져서 행복이지.』

아들이 나간 후, 송부인은 반만큼 열리어진 커—텐을 내리우고 아까 백진주 선생이 앉았던 팔거리 의자로 천천히 걸어가서 가만히 앉아 보았다. 그리고 입속말로 가만히 중얼거려 보았다.

『그이다! 그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