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그만생명

편집

경직이가 집에 다닐러 온뒤에 인숙의 거처는 안정이되였 다. 삭을세 든 사람을 내보내고 누의를 행낭방에서 불러올 렸다.

"동기라고는 너하나밖에 없는걸 나두 어렵지만 어떡허느냐.

힘차라는대루 많지않은 학비니 대여주마"

하고 경직은 윤가집의 태도에 몹시 분개한 나머지에 누의 의 처지를 동정하였다. 비록 천냥만냥판에를 따러 다니는 사람이었만 술만 취하지않으면 빈말이래도 점잖게 하였다.

사실 경직이도 나이를 듬쑥히 먹었거니와 세상의 거치른 물 결에 부닥겨나서 달떳든 마음을 잡고 정신을 밧작 차린 것 이다.

인숙은 파산했든 살님을 다시 시작한것처럼 학교에 다니는 것이 신산하였다. 그러나 모든 것을 꽁꽁 참고 싀집이고 남 편의일이고 생각지 말자하고 학교에만 다녀오면 서툴러진 복습을 하기에만 정신은 쏟았다.

그러는 한편으로 오라비에게 월사금이나 학용품은 겨우타 집에서 야단이 날가보아 쓰지만 재봉이니 자수니 그밖에 무 슨 회비며 무어시며 객쩍은돈이 매삭 수월치 않게 들었다.

그래서 인숙은 생각다못해 그저 병원에 있으면서 밤이면 몰 래 나 다니는 복순의 주선으로 헌 재봉틀 하나를 월부로 얻 어다놓고 '내재봉소'라는 종이쪽지를 대문에 내붙이고 바누 질품을 팔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아모리 어려서부터 안목이 높고 솜씨가 좋고 일새 가 빨른 인숙이라도 하로종일 부터앉어 하는일이 아니요, 학교에 다녀와 대강복습을 하고나서 사람을 안두고 지내는 터이라 뚝섬집과같이 저녁을 지어먹은 뒤에야 시작을 하는 것이라 그 수입이 변변할수 없었다.

그러나 동내 사람들이 한두번 인숙의 바누질 솜씨를 보고는 (어쩌면 이런 재주를 가지구 왜 싀집사리를 않언단말요?) 하고 박어내고 꼬매낼 사이가 없이 연줄 연줄로 가을옷 의 복감까지 들어밀었다.

인숙은 학교에 다니는것보다 재봉사노릇을 하는 것이 본업 이 되다싶이 해서 홀로앉어서 짜른 밤을 꼬박이 새우고 두 눈이 빡빡한 것을 그대로 학교로 가는때 도많었다.

그동안 봉희는 여러번이나 찾어왔다. 맨첫번은 시골서 첫 날 저녁을 치르고 올라오든 이튼날 동부인을 해서 누구보다 먼저 찾어와서

"새언이 우리 살님허는 구경갑시다. 스끼야끼 남비까지 샀 는데 저녁이나 먹으며 놉시다"

하고 정식으로 만찬회에 초대를 하였다. 그러나 인숙은 혼 인전에 의복까지 갔다가 말러주었고 봉희의 내외를 눈물을 흘려가며 반기면서도

"이담에 가보는 날이 있지요. 내가 왜 자근아씨 살림살이를 가보고 싶지가 않겠우"

하고 혹시나 싀집사람이 왔다가 마주칠가보아 구지 사양을 하였다.

그눈치를 챈 봉희는 그뒤에도 종종와서는

"우리집에선 누구하나 발그림자두 않어우. 난 아주 죽어나 간 셈만치시는데......"

하고 별별소리를 다허다가 귓속하듯이

"그러지 않어도 어머니는 아버지 몰래 인력거를 타구왔다 가섰다우. 그래두 인사가 그렇지않고 내가 먼저 '불초의 여 식을 용서해줍시사'고 미리 편지를했었지. 어머니는 날붓들 고 울며 불며 '이렇게 불성 모양으로 어떻게 사느냐'구 걱정 을 허시다가 얼만지도 몰으지만 돈을 끄내시는걸 그이가 '부 지깽이 하나라두 댁의 물질을 받을 까닭이없다'고 마주대고 불쾌허게 말을해서 무색해 가섰다우. 행낭계집애는 가끔 팔 랑거리구 오지만......"

하면서 가치 가자고 사뭇 졸러대어도 인숙은

"글세 버젓이 찾어갈날이 있다니까 그러는구려"

하고 싀집이야기를 한마디라도 들어서 갓득이나한 심사를 어지러트리지 않으려 하였다.

봉희도 동무들까지 감쪽같이 속이고 학교를 계속해 다녔 다. 어른도 뫼시지않어 솟곱질같은 살림이라 양복입은 남편 의 옷뒤를 거두는것도 아니요 손님접대를 분주히 하는것도 아닌데, 홀몸으로 있을 때 교원면허장 하나는 마터두어야한 다고 남편이-즉 세철이가 들어앉지를 못하게하였든 것이다.

그러나 봉희는 밤이면 옷을 갈어입고 간장 담그는법 고초 장 담그는법까지 물어보려 인숙에게를 다녔다.

그러자 인숙은 학교에 다닌지 한달뒤쯤부터 몸에 이상이 있는 것을 차츰차츰 깨달았다.

여자만 다달이 당하는 구찮은일이 봉환에게 그짓을 당하는 달부터 조금씩 비치다 말다 하여서 (아마 그병을 알은 까닭인가보다) 하고 신지무의하고 지냈다. 기왕 홀로 지내는바야 (영영 끈처버렸으면) 하는 생각까지 들었든 것이다.

그러나 요사이와서는 식성이 변해가는 것이 확실하였다.

복송아나 미깡같은 산성(酸性)의 실 과가 먹고싶고 철아닌 통김치 생각까지 나는데 조금도 중 독성이 아닌 음식을 먹것만 구역이 심하게났다. 상학시간에 도 속이 메시꼬운 것을 참다못해서 변소에가서 창자가 끌어 올르도록 한참씩 돌르고 나와서 하로종일 굶을때도 있었다.

(이게대체 왼일일가?) 하면서도 인숙은 아직 한번도 경험은 없것만 (혹시 내가 아이를 밴것이나 아닐가) 하는 의중이 더럭났다. 그와 동시에 (이게 정말 아니면 어떡허나) 하고 몸서리를 첬다. 마음으로는 아모니 임신인 것을 부인 하려고하나 나날이 달러가는 모든 증세가 다른병이 아닌것 만은 확실한것갔다.

가슴이 답답하고 현기증이 난것처럼 어찔어찔하기도 하고 어떤 음식은 냄새만 마터도 구역이 더 심해가는것과 이달에 도 있을때가 지냈는데 조금씩 비치든것조차 똑 끈친것이라 든지 입덧이 나서 아조 굼다싶이하고 지내는데도 알엣배가 조금씩 이상스러히 불러오는 것 같은 것을 종합해 보면 다 른 여자들이 첫 번 임신을 하였을때의 증세와 조금도 다를 것이 없다.

더군다나 봉환에게 강제로 그런일을 당하든 날짜를 꼽아보 니 석달하고도 한 열흘 남짓하다.

인숙은 다시금 몸서리를 첫다. 이번에는 (이것이 다른병이나 됩시사) 하고 빌어도 보았다.

(그럴 리가 없지. 그뒤에 그렇게 몹시 알었는데 설사 아이 가 들었었드래도 벌서 떨어지고 말었겠지 인제야......) 하면서도 아이를 둘이나 난 뚝섬집에게 빗대어놓고 임신초 기의 증세를 물어도 보았다. 눈치빠른 뚝섬집은

"내-게 나보기에두 달릅니다. 그럼 아기를 서는 것이 확실 허지 뭐요"

하고 저의 경험을 좍 이야기하면 인숙을 놀리기까지 하였다.

그뒤로 인숙은 재봉틀을 둘르며 앉어서 밤을 새우면서 다 시금 고민을 하기시작하였다.

(건강한 내남편과 마음에있는 결합으로 임신을 하였다면 얼마나 기쁠까? 내가 속으로는 남처럼 내혈속이나 하나 나 어보기를 얼마나 기다리고 바랐었든가. 그러치만 아 아........) 하고 인숙은 입살을 깨물며 울었다. 슬픈것보다도 분하고 분한 것 보다도 앞일이 겁이났다.

(그 불순한 동기, 그 못된병을 알는 사람의 씨 그것은 신성 한 사랑의 씨가 아니라 금수같은 남성의 성욕의 씨요, 화류 병을 알은 증거품이 될것이 아닌가. 아직은 꼼지락거리지도 못하는 조그만 생명이 그 병균의 결정체(結晶體)가 아니고 무엇일가) 날이 갈사록 인숙의 정신상 고통은 육체의 변화 이상으로 커갔다.

인숙은 어느날 학교에 다녀나오는길에 허의사를 찾어갔다.

첫째는 확실한 일이래도 의사의 진찰을 받어서 혹시 임신 이 아니라는 말을 요행으로 들을가 함이요, 둘째는 임신한 것이 틀님없다 하드래도 병신 자식을 나홀바에야 차라리 달 수가 차가기 전에 특별이 조처할 어떠한 수단이 없을가하고 별르고 별르다가 의형제까지 하자는 숙친한 허의사를 찾어 가볼 용기를 내었든 것이다.

인숙이가 병원에 들어서자 허의사는 마침 왕진을 나갔다가 들어와 가방을들고 인력거에서 나리며 인숙을 반겼다.

허의사는 인숙의 말을 자세히듣고 반쯤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이더니

"어디 봅시다"

하고 인숙을 눕히고 몇군대를 대강 진찰해 보고나서

"아기를 서는게 확실허구면. 석달남짓헌듯헌데 첫아들을 낫 켓군 미리 한턱 내야지"

하고 인숙을 놀린다.

"아 정말요..........?"

인숙은 새삼스러히 놀랐다. 경험많은 의사의 진단이 틀림 없으리라고 믿어질사록 제가 임신한 사실을 믿고 십지가 않 었다. 차라리 다른병처럼 몇 달이고 앓다가 낫는병이었으면 하였다. '첫아들을 낳겠다'는 말한마디야말로 시집간 여자에 게 있어서 얼마나 반갑고 기쁜 말일가. 그러나 인숙은 대나 제 방짱을 친속에 들어앉인것처럼 눈앞이 캄캄하였다.

"그럼 임신이구 아닌걸 내가 몰을라구. 임신헌 동기를 잘 아니까 혹시 자궁외 임신이나 아닌가 허구 의심을 했는데 그렇다면 서너달만에 파렬이돼서 알에새가 지독허게 아프구 피를많이 쏟아서 피부가 창백해지면서 제정신을 잃고는 맥 이 가늘어 지다가 나종엔 호흡까지 급해저서 대개는 아주 위험상태에 빠지는법이요. 그렇다면야 배를 갈르구 태아를 끄내는 큰 수술을 하는수밖에 없지만 우리아우는 조금두 그 런 증세는 없으니 안심해두 좋와요. 안직같어선 보통으로 임신을 헌게니까......."

인숙은 개복수술을 한다는말이 끔찍해서 눈쌀을 찡그렸다.

"그렇지만........단번에 그렇게....... 더군다나 그뒤에 몹시 앓기까지 했는데요.......?"

"그러길래 운명의 작란이란 심술굿거든. 내외가 노상 동침 을 해야만 애를 배는줄아우? 어쩌다 빌러서 그런일이 있으 면 역난없이 표가 나는법이야요. 왜 신문에두 가끔 나지않 우. 공원 같은데서 여학생이 폭력으로 그런일을 당해서 어 느놈의 씬지두 몰으는걸 배구는 고민 끝에 독약을 마셨다구"

인숙은 의사의 말을 들을사록 점점 더 불안해젔다.

"그럼 어린애헌테까지 병독이 올맛으면 어떡해요?"

"림질은 유전이 안된다지만 전염이 되기는 첩경 쉽지. 병신 자식을 낳는건 그아비가 '알콜'중독자나 화류병환자인 경우 가 많으니까......."

그말을 듣자 인숙은 경련을 일으킨 듯이 불안과 공포에 온 몸이 떨렸다.

"선생님! 이를 어쩌면 좋와요? 난 죽으면 죽었지 병신자식 은 낳기 싫여요! 아시다싶이 남편이란 사람허구는 남남간처 럼 됐는데 더군다나 자식을 나면 병신 자식을 나면........"

하고 말끝을 마치지 못하고 느껴울며 허의사의 수술복 자 락을 잡고는

"선생님 어떻게든지 애를 안낳도록 해주서요! 눈먼 자식이 나 사지를 못쓰는걸라서 길르는것버덤은 얼는꺼내 버리는 것이 낳지 않겠어요? 네, 선생님! 나는 죽는대야 조끔두 원 통헐게 없으니 죄선허시는 셈만 치시고 제배를 갈러주세요!

어린걸 끄내주서요!"

하고 안타까히 애원 하는것을보고 곁에섰든 간호부까지 눈 물이 나서 돌아섰다.

허의사는 안경속의 두눈을 꽉 감고 한참이나 무엇을 생각 해보다가 간호부가 밖으로 나가는 것을 보고서야

"좋은 수는 한가지가 있지만 내손으로는 헐수가 없오. 산모 의 체질이 몹시 약하거나 생산을 헐 수 없는 병이있어서 둘 이 다 죽을 념려가있는 부득이한 경우밖에는 락태를 시기지 못허는 법이니까...... 그뿐아니라 원인은 어찌되였든 뱃속에 서 꼬물거리는 조고만 생명을 인공으로 뗀다는건 자연의 법 측의 위반이되는 일종의 죄악이 아니겠오? 넘우 미리부터 걱정을 허지말고서 심신을 안정시기고 기다려보우. 수태한 동기가 낫벗다고 반드시 성치못헌 아이를 낳는다고는 의사 도 보증헐 수 없는 노릇이니 맘턱놓구서 가끔 찾어와요. 내 잘봐주께"

하고 안심을 시기는데 환자가 두었이나 와서 인숙은 햇쑥 한 얼굴로 진찰실을 나왔다.

의사에게서도 시원한 소리를 듣지못한 인숙은 나지면 낮 밤이면 밤을 머릿속이 지글지글 끌는듯한 고민 가운대에 지 냈다. 그러면서도 (아주 들어눕게 되는날까지는 하루도 빠지지 않을걸) 하고 학교에는 머리악을쓰고 다녔다.

그러나 인숙은 점점 몸꼴이 나갈사록 그 고민은 배속에 자 라는 어린애와같이 커갈뿐이다.

(아무리 조그만 핏덩이에지나지 못하지만 어째서 자식이라 는 생각이 들지 않을가) 하고 저스스로 제 마음을 의심하였다. 밤새도록 재봉틀하 고 씨름을 하다가 반드시 들어누어서 꼿꼿한 허리를 잠시 펴면 어린애가 배속에서 꼼틀꼼틀 노는것같다.

인숙은 가만히 배우에 손을 언지며 어머니의 젖가슴에 안 겨서 우유빛같이 히고토실토실한 사지를 바둥거리며 얼러주 는대로 방싯 방싯웃는 남의집의 옥동자를 눈앞에 그려보랴 면 비로소

"이게 내 자식인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눈도 코도 보지못한 피덩이에게 대한 모성애 비슷한 애착심도 생기는 듯

"아아 건강하고 의초 좋은남편과 정당한 결합으로 생기는 사랑의 결정이라면 얼마나 기쁠가 얼마나 자랑스러울가) 하고 몇번이나 같은생각을 되풀이 하랴면 저도 모르는 겨 를에 눈물이 눈두덩을 뜨끈하고 배여 나왔다.

(어떡허면 좋을가. 남편하고는 절연상태에 있는데 이지경이 되었으니 성한 자식을 낳는대도 사생자와 다름이 없지 않은 가) 하매 것잡을수 없이 섧고 원통하였다.

(어떻겠든지 아이 아버지된 사람에게 알려는 주어야지 아 무리 환장이 되었기로 나종에 딴소리야 하지않겠지만 아무 튼지 윤가의 씨니까) 하여도 보나 인제와서 '아이를배었읍네'하고 제발로 찾어가 서 배를 내밀기는 자존심이 허락을 하지않었다. 그래도 혹 시나 봉환이가 찾어나 온다면 그런말을 하게될는지 몰나도 집안식구까지 발을 똑 끊고 지낸지가 벌서 몇 달이라고 죄 지은것없시 이쪽에서 먼저 머리를 숙이고 들어갈 까닭은 조 금도없다고 고집을 세울사록 문제는 점점 해결하기가 어렵 게만 되어간다.

(어린애가 귀한 집안 이니까 고슴도치도 제 색기가 함함한 줄 안다는데 손자하나 얻는바람에 감지덕지해서 맞어 들일 지도 몰으지) 하다가도 제가 그런 생각을 하는것부터 비열한 것 같어서 (그러면 나는 정말자식이나 나어바치든 기계가 되구말게) 하고 머리를 좌우로 흔들었다. 봉환이도 자식 귀여워 할나 이가 되었으니까 어린것의 고사리같은 손이 어미아비의 얼 크러진 사랑의 줄을 갈러쥐고 매어달려서 천리만치 떠러진 거리(距離)를 단간방속에 옥으려 넌것만치나 가까히 끌어 달 여 줄는지도 몰으리라고 공상도 하여보다가 (그게 정말 부부간의 사랑인가? 제 자식에게 젖을많이 빨 리랴고 해주는 고기반찬을 얻어먹는 유모와 맛찬가지지 뭐 야) 하고 인숙은 부부간의 사랑을 회복하고 위해서 어린 것을 그도구(道具)로 리용하랴는 공상부터 순결치 못한 것 같었다.

더구나 인숙이가 임신한눈치래도 채인사람은 뚝섬집 하나 뿐이오 허의사가 알고 있을뿐. 비밀이 될 수없는일을 비밀 로 직히지않을수 없는 것이 인숙에게는 더욱 분하고 설었다.

그러다가 또 얼마 지낸뒤에 인숙은 생각다못해서

"나종엔 어떻게 되든지 아비될 사람에게 한번 알려주지 않 을수 없어"

하고 봉환을 조용히 만나볼기회를 만들 궁리를 하다가 어 느날 저녁때 학교에서 도라오는 길에 처음으로 봉희가 살림 하는 집을 찾었다. 위선 최근의 봉환의 동정을 알어보랴만 아무리 끊고 지난다 하드라도 친정과 내왕이 있을듯한 봉희 에게 넌짓이 물어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것이었다.

"아이고 새언니 오늘은 바람이 어디로 불었수?"

행주치마를 둘르고 툇마루에서 밀가루 반죽을 하고 앉었든 봉희는 깡충 뛰어 올를 듯이 반색을 하고 인숙의 두손을 붙 들고 방으로 마저 들였다.

"찾어오는 날이 있다구 그러지 않었수? 요샌 한번두 안오 길래 무슨 연고나 있나 허구 궁금해서....."

하고 인숙은 방안을 둘러본다. 방은 도배를 새로해서 깨끗 하나 세간이라고는 전에 본일이 있는 세철의 책상하나와 헌 고리짝이며 웃목에 알룩 알룩한 노랑종이로 배접을한 의걸 이 하나와 조그만 경대가 한구석에 놓였고 고물상에서 사들 인듯한 찬장이 놓였을뿐, 윤자작의 고명딸로 한참판의 맛며 누리가 될번한 봉희의 세간사리로는 지나치게 검소하다.

인숙은 속으로만 (남의집 단간방에서 너저분하게 벌려놓지 않고 사는게 되 려 간촐해보이는군) 하고 살님한번 나보지못한 것을 생각하니 봉희가 슬그머니 부럽기도 하였다.

인숙은 툇마루에 놓고 들어온 책보에서 엿과 석냥을 끄내 보며

"엿처럼 늘어나구 불처럼 활활 일어납시다"

하고 웃으운 소리를 하면서도 진심으로 살님이 늘기를 축 복해 주었다. 봉희는

"이런걸 뭘다 사왔수? 우리집에 달은건 없어도 석냥 한가 지는 흖허다우"

하고는

"외무대신이 들어오면 같이 먹어야지"

하고 콩하나도 반쪽씩 논아먹는 내외간의 의초좋은 것을 자랑하듯하며 엿을 벽장속에다 넣는다.

"참 외무대신은 늦게야 들어오우?"

"일이 바뻐서 날마두 어둬야 들어온다우. 아 접때는 같이 일허는 사람들이 들끓어와서 마침 돈두 떨어지고 그릇 한가 지 변변헌게 없는데 혼자 밥해먹이느라고 아주 혼이 났었 수. 그날저녁에 술을다먹고는 취해서 '귀족의 령양'이니 '문 열이헌테도 가라'느니 허구 주정을 허길래 한바탕 박아지를 박박긁어줬드니 꿈쩍두못 허겠지. 남의 비위를 극적거리는 버릇을 못놓겠나봐"

하고 생글 생글웃더니

"잔재미는 하나두 없는줄 알었지만 점점 뚱딴지가 돼가요 글세에. 저녁에 와서두 발매금지된 책만 얻어다보구 앉었다 우. 또 붙잡혀 갈려구 그러는지"

하고는 쓸쓸이 웃고만 앉인 인숙의 얼굴을 그제야 빤히 처 다보더니

"그런데 왜 새언니 얼굴이 저렇게 못됐수? 핏기가 하나두 없구려. 또 어딜 앓었수?"

한다.

"별두 아픈텐 없어두 너무고단해 그런가봐"

"학교에 댕기는것만해두 요샌 여간 고달프지가 않은데 바 누질을 허느라고 짜른밤을 새다시피허니 견딜노릇이요?"

"그래두 맘이나 편하면 견디지만......."

인숙의 얼굴에는수심이 끼었다. 인숙은 그눈치를 봉희에게 보이지 않으려고 (이따가 조용히 얘기를 하리라) 하고

"밀가루 반죽은 해서 뭘허우?"

하고 화제를 돌렸다.

"가끔 별식을 해먹는다우 반찬두 없이 맨쌀만 삶어먹으니 까 인젠 밥이 물렸어"

하고 웃어보이더니 경대설합에서 조그만 지갑을 끄내들고

"잠깐만 기다려주우. 응"

하고 붙들 사이도없이 밖그로 나간다. 인숙은 (반찬거리를 사러 나가나보다) 하고 미안적게 역이여 부엌으로 나려가 보았다. 합실 아궁 이에는 물을데어쓸 솔하나도 걸리지 않었는데 풍로에 조그 만 왜솔하나가 동그마니 올러앉었을뿐이다.

뒷주대신 새우젖독 이 한구통이에 놓인 것을 열어보니 쌀 은 겨우 한웅큼쯤 밑바닥에 깔렸다. 둘이 간신히 끓여먹을 만한 월급을 서너달치나 미리 썼기 때문에 신혼초부터 착실 히 군색한 모양이다. 그런데도 봉희가 어려운 눈치는 조금 도 보이지 않고 무엇을 사러간 것이 여간 안스럽지가 않어 서 인숙은 손을씻고 툇마루로 가서 봉희가 반죽하든 밀가루 덩어리를 담은 양 재기를 닥어놓고 앉는데, 봉희의 말마따나 이집의 외무대신 이, 기계 기름이 묻은로동복에 자전거를 끌고 들어오더니

"오섰세요?"

하고 깍듯이 인사를 한다.

조금뒤에 봉희는 고기를 사가지고 들어왔다. 그것을 본 세 철은

"이왕 만찬회를 열랴면 손님을 더 청해와야지"

하고 자전거를 끌고 나갔다.

"또 복순씨를 데릴러가는군"

하고 봉희는 남편의 뒤를 따러 나가며 무어라고 귀속을하 고 들어왔다.

세철은 무슨 음식끗만 보면 번번히 병원으로 복순을 불르 러가거나 전화를 걸었다. 둘이서 함께 자취를 할 때에 고생 하든 생각을 하고 제힘껏은 대접을 하는것이었다.

"접때두 밤에 몰래왔것만 가는길에 문앞에서 아는 형사를 만났대요. '인제는 놀려 단닐만 허냐구 얄궂게 웃으면서 갔 다는데 압만해도 또 붙들려갈가 보다고 노상 걱정이라우 이 때까지는 허의사가 좀더 치료를 받어야 한다구 내놓지를 않 는 덕택에 그저 병원에 있긴 허지만"

봉희는 저의 남편의 신변에 또다시 위험한 일이 닥칠가 보 아서 복순에게를 넘우 자주찾어다니는 것을 재미없게 역이 는 눈치다.

"나두 퍽 오래 못봤는데 제-발 어디로 다러나 났으면 좋겠 어. 요새야 겨우 산사람같은걸 또 들어가면 어떻건단 말이 요?"

하고 둘이서 한걱정을 하면서 주인집에서 다드미 방망이를 얻어다가 인숙은 반죽한 것을 밀어서 썰고 봉희는 부엌에서 밀국수에 넣을 양념을 만드는데 세철이가 복순을 앞장세우 고 들어왔다.

"이집에 귀빈이 오섰군. 여길 오니까 만나겠구려"

"어서 오서요"

"요샌 좀 더 나요. 왜삼청동엔 발을 끊고 지냈오"

인숙은 마당으로 뛰어나리며 복순을 영접해 들였다.

"도적질허드키 나단니것만 가끔 들켜서 어째 오늘낼 하는 것 같어요"

하고 복순은 부엌편으로 대고 코를 쫑긋하더니

"에-키, 맛난 냄새가 나는군. 난 이집에 와야 소복을 하거 든"

하고 그 넘데데한 얼굴에 연방 표정을 해가면서 익살스러 히 떠드는 품이 어지간히 건강이 회복된 모양이다.

네사람은 참 정말 가족적으로 둘러 앉어서 지난이야기와 옷은말도 해가며 밀국수를 맛있게 먹는데 돌연히 머리우에 서 삐-ㄱ하는 소리와함께 '피아노'소리가 지장우의 '라듸오' 통에서 울어나왔다. 어린이 시간의 귀엾고 활발한 아이들의 독창과 합창은 방안의 화기를 한층더 돋았다. 이 가정의 유 일한 오락기구로 세철이가 가개에서 헌 기계를 들여다가 제 손으로 맞추어논 것이다.

봉희는 자못 유쾌하고 자미있는 듯이 '라듸오'에서 나오는 창가에 맞추어 콧노래를 불르며'땐스'를 하듯이 발을 띠워놓 으며 방으로 부엌으로 드나들면서 시중을 든다.

인숙이도 먹었으면 하든 밀국수 한그릇을 여간 맛있게 먹 지 않었다.

"국물 더 있수?"

하고 투정을 해가며 생후처음 인 듯이 유쾌한 기분에 쌓여 서 두 그릇이나 먹었다.

"원님덕에 나팔을 분다더니 손님덕에 내가 잘먹었군"

하고 세철이가 싱글싱글 웃으며 배를 두드리는데 봉희가

"궁상 떨지 말어요"

하고 톡쏘며 남편을 살짝 흘겨본다.

"흥 몰으는 말이지 대장부는 냉수를 먹구두 이를 쑤시는 법이라우"

하고 이죽거려서 방안이 보다 간간대소를 하였다.

그러나 인숙은 남의운에 딸려 웃으면서도 저홀로 외롭고 쓸쓸한 생각이 들어서 다른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는 눈물이 몇번이나 소리없이 마음속을 흘렀다.

세철이가 다시 나가서 사가지고 들어온 수밀도를 벗겨먹으 며 네사람은 '라듸오'가 천기예보를 할 때까지 감회깊은 지 난이야기를 하다가 일어섰다.

인숙은 문깐에서 봉희의 귀에다가

"일간 틈이있건 놀러오우. 얘기두 좀헐께있으니"

하고 넌짓이 일르고 대문깐을 나서는데 추녀밑에선 난데없 는 시껌언 그림자가 앞서나가는 복순의 앞을 가로막었다.

네사람의 등어리는 일시에 냉수를 끼얹인 듯 선뜩하였다.

모처럼 유쾌했든 기분이 무참히도 흩어저 버렸다.

복순의 앞을 가로막은 시껌언 그림자는 가개앞 전등아래 정체를 들어내며

"재미들 좋군요"

하고 대문밖으로 전송을 나온 인숙과 세철의 내외의 아래 우를 곁눈으로 훑어본다. 그자는 세철이도 잘 아는 조선말 잘하는 ××서의 고등계 형사였다.

복순은 조만간 당할일이 오히려 늦게 닥처온 듯이 태연히 걸으며

"그러잖어두 혼자 가기가 호젓하더니 잘 만났소. 날좀 병원 까지 바래다 주구려"

하고 병원편짝으로 발을 띠어 놓는데

"아니, 오늘저녁엔 나허구같이 가야해"

하고 형사는 복순의 소매를 잡는다.

"가긴 어딜가잔말이야. 밤중에 누가 도망을 갈줄 알어?"

"그만큼 사정을 보아주었으면 고마운줄 알어야지. 재판소의 명령이 있는지 주임이 꼭 보자구해서 초저녁부터 찾아 다녔 는데"

주임의 명령까지 있다는말에 복순은 뻗딩겨도 소용이 없을 줄 알고

"그럼 잘들있어요!"

하고 뒤를 돌려다 보며 손을 든다.

세철은 뚜벅뚜벅 걸어와 형사의곁으로 붙어서 걸으며

"아직 병두 다 낫지않은 사람을 웨그렇게 급하단 말이요?"

하고 질문을 하는데 뒤에 숨어서 따러오든 다른형사가 중 대범인을 빼앗어나 가는 듯이 달려들며

"무슨 참견야. 저리가!"

하고 소리를 꽥질르며 앞서가는 형사와 세철의 사이를 떼 어놓는다.

"따러오면 뭐해. 들어가 어서"

하고 복순은 기왕 이렇게 된바에야 여러말하는 것이 도로 혀 재미적다는 눈치를 보인다.

세철은 그런말을 듣는체 마는체하고 복순을 호위하고 걸으

"들어가우. 따러 오면 뭐허우? 인숙씨두 바루 올라가시구요"

하고 오고가는 행인들사이에 섞여서 집을비여놓고 고무신 짝을 끌며 쫓아오는 봉희와 인숙을 돌려다본다. 그래도 봉 희는 발을 멈추지 않다가

"그럼 잘 다녀 나오서요. 부-디 몸 조심하서요"

하고 코메인 목소리로 작별의 인사를 하였다. 복순은 돌처 서서

"그동안 옥동자나 하나 나우. 내 잘있다 나와서 안어주께"

하고 봉희의 어깨를 두드려준다. 봉희는 말대답도 못하고 입술을 깨물며 돌아섰다.

인숙은 급한 병에 죽은 동지의 상여뒤를 따러가듯이 머리 를 떠러트리고 길거리의 불빛에 빗기는 복순의 그림자를 밟 으며 걸었다.

(복순은 내병을 고처주려고 나왔다가 제몸의 병은 다 고치 지도 못하고 또 끌려 가는구나. 나는 한가지도 그를위해서 해준일이 없는데.......) 하니 복순에게 대해서 미안과 감사와 무한히 가엾은 생각 에 참어도 참어도 눈물이 앞을 가리는 것을 억제할수 없다.

경찰서 붉은 전등 밑까지 오자 세철은 복순의 손을굳게 잡 으며 저력있는 목소리로

"누님! 아무 걱정말구 몸성히 다녀 나오세요. 우리들이 누 님의 등뒤에 있으니 인젠 아무 념려말우!"

하고 잡은 손을 놓지못한다. 복순은 한팔을 세철의 어깨에 얹이며

"오냐 나두 등뒤가 든든하다. 이번엔 여행을 간셈만치고 기 다려 다우!"

하고는 붉은 전등불밑에 소매로 얼굴을 가리고 돌아선 인 숙에게로 달려가서 두손을 잡으며

"인숙씨! 그동안에 아주깨끗하게 자유로운 몸이 되어주우!

난 그밖에 더부탁할 말이 없어요"

하는데 형사들은

"무슨 여러말이야"

하고 좌우에서 복순의 등을 밀었다. 인숙은 복순의 등뒤에 다가 대고 떨리는 목소리로

"잘 다녀나우!"

한마디를 간신히 하였다. 눈앞이 어른거려서 경찰서의 우 중충한 넓은마당을 지나들어가는 복순이가 똑똑히 보이지를 않었다.

이튼날 저녁때에 봉희는 약속한대로 인숙을 찾아갔다.

학교에서 바로와서 교복을입은 봉희는, 지난밤에 주부노릇 을 할 때와는 딴사람인듯한 느낌을 인숙에게 주었다. 인숙 도 학교에서 나온지가 얼마 아니되어서 옷도 가러입지 않고 있었다. 인사가 곳난뒤에

"자근 아씨는 시집을 가구 복순이 마저 또 붙잡혀가고나니 난 참정말 외톨로 굴러 댕기는것같구려. 엇저녁에 세철씨가 집에까지 바래다 주지 않었드면 바루 한강 철교로 나갈번 했수"

인숙은 집에와서도 잠을자지 못해서 눈이 매어달리고 입술 이 다 탓다.

"엇저녁엔 새루 두시가 돼서 들어왔다우. 여기까지 올라왔 다가는 어찌나 가슴이 답답헌지 집에 들어올 생각이 없어서 그때까지 길거리로 쏘댕겼대. 복순씨두 참정말 가엾지만 이 달에 타는 식비를 가지구 감옥에 사식을 차입해 주자구 그 리니 큰일났수"

"그렇지만 어떡허우. 난 미결로 있을때까지 옷이나 들여 보 내줄가 허는데......"

하고 인숙의 얼굴에는 다시금 구름이 낀다. 그러나 저의몸 에 이상이 있다는것도 말하기가 싫고 더구나 봉환의 소식을 먼저 묻기도 무엇해서

"참 요새 집의 소식이나 들우"

하고 뿌리만 땄다.

"그저껜가 뜻밖에 행랑계집애가 잠간 다녀 갔는데 별당 할 머니가 병환이 대단허시대. 나 때문에 한가집 사람헌테 평 생첨 창피를 당허시구는 분해서 펄펄 뛰시다가 몸저 누서서 약두 안잡숫는다나 어쨋던 혼인까닭에 그렇게 됐으니깐 돌 아가시기 전에 한번가 뵙긴 해야겠는데, 나를 보시면 되려 덧들리실가바 갈수도 없고......"

하고 입맛을 다시더니 잠자코 앉인 인숙의 핏기없는 얼굴 을 쳐다보며 (이런말을 헐가 말가)하고 망사리는 듯 하다가

"다른편에 들으니깐 오빤 ××여학교에 도화교사로 취직을 했답니다. 먼저 다니든 선생이 여선생허구 연애를 허다가 둘이다 쫓겨났다나. 그래서 오빠가 시간교사로 들어갔대요.

오빠두 또 그런짓을 허다가 쫓겨 날는지는 몰라두......"

"아무튼 취직을 했으니 잘됐구료"

인숙은 한숨섞어 남의 말을 하듯하면서 봉희의 말끝을 자 어낸다.

"참 오빠는 인제 병이 나었길래 나댕길텐데 여긴 한번두 안옵디까?"

"여길 뭣허러 오우? 난 길에서래두 만날가봐 걱정인데"

"글세 어쩌면 그렇게 매정스럽단 말요. 아마 무슨다른 까닭 이 있나바. 접대두 어머니더러 새언니가 무슨 죄가 있길래 쫓아버리군 모른체 허시느냐구 엿줘봤드니 '난 모른다'허시 구 입두 벌리지 못허게 허시겠지 무슨 일은 단단이 있는눈 친데 당최 누가 내귀에 두말을 해줘야 알지않우?"

하고 매우 답답해 하면서 오라비와 어른들을 여지없이 꾸 짖는다.

"그 까닭은 여태 나두 잘모르지만, 팔이 들이 곱지 내곱는 법 없다구 어른들두 오빠편을 들으실게 아니요? 아무튼 그 덕택에 따루나와서 학교엘 다니니까 나를위해선 다행헌 심 이지"

하고 인숙은 쓸쓸히 웃다가 눈을 나려깔고 한참이나 무엇 을 생각해본 뒤에

"저어 자근아씨, 내 특청하나 들어줄요"

하고 어렵게 입을 열었다.

"무슨 청?"

"그렇게 어려운 청은 아니지만...... 저어 오빠허구 잠간만 조용히 만나게 해줄수가 없겠수? 꼭 몇마디만 헐말이 있는 데......"

봉희는

"글세"

하고 귓머리를 긁다가

"그뒤에 오빠허구는 한번두 안만났는데..... 그이는 오빠더 러 사람의 사촌두 못되는 자식이라구 사뭇 욕을허니까 우리 집에선 만나게 할 수가 없구.... 어떻거면 졸가?"

하고 손톱녀물을 썰다가

"아무튼 며칠만 기다려주. 내 어떻게든지 만나도록 해볼게"

하고 조금더 앉었다가

"참 가서 저녁을 지어야지"

하고 일어섰다.

봉희는 학교로 오라비를 찾어갔다. 그일 때문에 집으로 찾 어갈수도 없고 밀회를 하는것처럼 길목을 지키고 있을수도 없는데, 편지를 한 대도 답장을 해줄상 싶지가 않어서 마츰 토요일이라 학교로 찾어가면 말몇마디는 전할수 있을듯하였다.

(내 오빠를 집에서 버젓이 맛나지를 못하고.......) 하고 모순(矛盾)을 느끼면서 봉희는 ××여학교의 문을 들 어섰다.

학교는 벌써 파한 듯 운동장에는 테니스를 치는 학생들이 한 십여명 코오트를 둘러싸고 떠들뿐 사무실 유리창에는 벌 써 흰 휘장을 내렸다.

(벌써 나갔나 보다) 하고 봉희는 사무실 축대 밑에 풀을 뽑고 있는 교지기더러

"저 윤 봉환선생 나가셨나요?"

하고 물어보았다. 늙은 교지기는

"새루 들어오신 도화선생 말씀입죠?"

하고 들어갔다 나오더니

"윤선생님 자리에 모자하구 단장은 그저 있는데 저 뒤 음 악실에나 계신지요"

하고 뒷채에 따로 떨어진 교실을 가리킨다.

(도화선생이 음악실엔 뭣하러 가 있을까) 하고 봉희는 피아노 소리가 동당거리고 나는 음악교실로 찾아들어갔다.

음악교실은 사진관의 하늘로 뚫린 유리천장처럼 '커어틴'을 쳐서 광선을 막았는데 풍금과 피아노가 열을지어 놓인 한구 퉁에 과연 봉환이가 있었다.

망사로 얽은 '나이트캪'을 비스듬히 쓰고 '캔버스'를 버티어 놓고 섰는데 그 앞에는 초록색 화초무늬를 혼란하게 놓은 ' 조세트'치마를 길게 늘인 여선생이 피아노를 타는 자세를 하 고 앉았다. 봉환은 그의 초상화를 그려 주는 모양이다. 그 여선생은 동경서 음악학교를 졸업하고 나왔다는 '강 보배'라 는 '모던걸'인데 봉희는 그 여자의 이름은 몰랐어도 말쑥하 게 양장을 하고 되뚝거리고 다니는 것은 길에서나 전차 속 에서나 여러 번 보았었다.

('모델'이 또 하나 새루 생겼군) 하고 봉희는 살그머니 열은 문을 일부러 소리를 내어 닫으

"오빠"

하고 불렀다. 봉환은 화필을 든채 힐끗 돌아다보더니 그림 을 그리는데 방해나 되는 듯이 눈살을 찌푸리고 뜻밖에 찾 아온 누이 앞으로 다가온다.

"뭣 하러 왔니?"

대뜸 꾸지람을 하는 어조다.

지난일이야 어찌되었든 간에 그것이 혼인한 뒤로 처음 만 나는 친누이에게 대하는 오라비의 태도다.

봉희 역시 성미가 깔깔하고 괴퍅한 오라비가 전 일은 다 잊어버리고 '그래 재미 좋으냐' 한 마디라도 해주기를 바란 것은 아니언만 너무나 뜻밖에 그 태도가 냉정한데 말도 못 하고 섰다가

"방해를 해서 안됐군요"

하고 비꼬아 던졌다.

"글세 무슨 일야? 집으룬 못오니?"

봉환은 모처럼 단 둘이 불어앉아 속삭이면서 그림을 그리 는데 훼방을 놓은 것만이 여간 불쾌하지 않은 눈치다.

"나두 오구싶어서 오진 않었어요. 새 언니가 꼭 오빠하구만 긴급히 할 말이 있다구 어디서든지 조용히 만났으면 하길래 그 말을 전하러 왔어요."

봉환은 그 말을 듣자 눈살을 한 층 더 삐푸리며 등 뒤의 여자의 귀에까지 그 말이 들리지나 않았나 하는 듯이 돌아 다보고는

"널더러 그런 심부름 댕기랬니. 만날 필요 없다"

하고 팩 쏘고는 돌아서려 한다. 그 눈치를 본 봉희는

"아 남편이 자기의 아내를 만날 필요가 없단 말씀얘요?"

하고 남매의 기색을 살피고 앉은 강 보배의 귀에까지 들리 라고 일부러 목소리를 높였다.

"아내는 누가 내 아내냐? 쓸데 없는 소리 하지 말구 가거 라."

봉환이 역시 등 뒤의 여자더러 들으라는 듯이 저에게는 아 내로 인정할 사람이 없다는 변명을 한다.

봉희는 오라비가 너무나 밉고 비열한데 분개해서 얼굴에 핏대를 올리며

"그럼 이 인숙이가 윤 봉환의 아내가 아니구 뭐야요? 언제 이혼했읍디까?"

하고 쏘가리 쏘듯 하고는

"난 그말만 전하러 왔으니깐 만나든지 말든지 생각대로 하 세요."

한 마디를 남기고 돌아서 '도아'를 탁 닫고 나와 버렸다.

봉희는 바로 삼청동으로 올라가려고 나섰다가 집이 궁금해

(무슨 반가운 소식이라고 내일이나 가보지) 하고 안국동 네거리에서 돌쳐겄다. 이튿날은 공일이라 남 편의 속옷등속을 빨다가 점심 뒤에 삼청동으로 가려고 옷을 갈아입고 대문 밖을 나서는데 친정의 행랑아범이 헐떡거리 고 오더니 '오늘 아침에 별당마님께서 급작히 돌아가셨다'는 놀라운 기별을 전하고 갔다.

연만한 노인네라 원체 엄엄했었지만 봉희는 저의 혼인 동 니가 나서 할머니가 희생이 된 것 같아서 어떡해야 좋을지 몰랐다. 눈물이 펑펑 쏟아지도록 서러울 것은 없으면서도 저를 특별히 귀여워하시던 생각을 하니 곧 뛰어가 돌아가신 얼굴이라도 한 번 다시 뵙고 싶었다.

집에 큰 일이 있으니 오라는 것도 아니요, 먼 천 일가에게 부고를 전하듯하고 간 것이언만 거북하다고 안 갈 수가 없 어서 봉희는 상점으로 가서 공일날도 놀지 못하는 세철에게 그 연유를 말하고 도망을 나온 뒤에 처음으로 친정에를 갔다.

어머니가 붙들고 말없이 울고 오라비댁들이

"작은 아씨 왔구려"

하고 마지못해 아는체를 할뿐 아버지와 오라비는 때려서 내쫓지 않는 것만 다행으로 여기라는 듯이 못본체를 한다.

그러나 봉희는 별당으로 올라가 홑이불을 덮어 놓은 할머 니의 시체 앞에서 이 설움 저 설움에 실컷 울고 그날밤을 부산한 틈에서 새우고는 이튿날 저녁 때에야 온다간다는 말 없이 빠져나와 집으로 돌아왔다. 장사날까지는 있어야 도리 에 옳겠지만 집안식구의 눈총을 한 몸에 맞으며 있기가 여 간 거북살스럽지가 않고 그런 등사에는 더구나 생소한 제가 분주히 일하는 사람들 틈에 끼어서 어정버정하기가 어찌나 열적은지 몰랐던 것이다.

봉희가 제 집에 돌아와 낮잠을 자려고 뒤집어쓰고 누웠는

"작은 아씨, 오늘은 학교에 안갔구려?"

하고 인숙이가 미닫이를 살그머니 열고 들어왔다. 제가 부 탁한 일의 하회가 궁금해서 사흘씩이나 기다리다 못해 찾아 온 것이다.

"어저께 할머니가 돌아가셨다우"

하는 말을 듣자 인숙도 눈이 붉어지도록 울었다. 십년동안 이나 '할머님'이라고 부르고 시중을 들던 노인이 돌아갔건만 저에게는 그런 통지도 해주지 않은 것이 더욱 서러웠던 것 이다.

"그러니 큰 일을 누가 치뤄낸단 말요?"

하고 그래도 혼상간 대사에 누구보다도 이력이많은 제가 가서 시집의 일을 보아 줘야만 할 무슨 의무를 느꼈다.

(이런 때는 내 생각들을 할걸) 하고 뒤죽박죽으로 들성거릴 궁 안을 눈 앞에 노려보다가 (그런 생각을 하는 나버텀 어리석지 그 집의 구듭도칠 만 큼 쳤으니까) 하고는

"그래 오빠한테 그 말은 못했구려?"

하고 물었다. 봉희는 토요일 날 학교로 찾아가서 오라비를 만났다는 말과 요부 같은 음악교사의 초상화를 그려주고 앉 았던 정경이며 저에게 한 말까지 그대로 옮겼다.

인숙은 입을 꼭 다물고 듣기만 하다가 여러 해 전에 산정 후원에서 제가 '모델'이 되어 그림을 그리던 줄거웠던 시절 과, 사요꼬 때문에 속이 무진 썩던 때와 또는 '만날 필요가 없다'고 원수치부를 하는 오늘날의 변화를 생각하고는

"아아 초상화!"

하고 방바닥의 먼지가 날으도록 한숨을 길게 내쉬고

"나 때문에 창피만 당했구려. 다른 여자한테 또 정신이 빠 진 사람을 만나선 뭘 하겠우"

하고 몸을 무거이 일으켰다.

"우리 저녁이나 같이 해먹읍시다"

하고 봉희가 붙잡는 것을 인숙은

"아아무 생각두 없우"

하고 굳이 사양을 한다.

"그럼 어떡하료? 바루 올라갈테요?"

"글세, 가보긴 해야 내 도리에 옳겠는데...... 잠깐 다녀라도 가야 할까보"

하고는 한길로 나서서 쇠잔한 석양을 등 뒤에 받고 맥이 풀려서 ××궁 편 쪽으로 타박타박 걸어가는 인숙의 뒷모양 을 봉희는 대문간에 기대어 언제까지나 바라다 보고 섰었다.

十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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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줏간으로 끌려들어가는 암소의 걸음걸이라 할까 인숙은 커다란 발등걸이가 달리고 문간에 하인들이 공석을 펴고 둘 러앉은 뒷문으로 들어갔다.

"아이고 셋째 아씨 오시네."

계집하인이 내달아 반기다가 누가 별안간 입을 틀어막는 듯이 뭇침하고 돌아선다.

인숙은 안마당에서 왔다 갔다하며 아는체도 못하는 아랫 것들의 흘낏흘낏 곁눈질을 하는 시선을 벌겋게 상기된 얼굴 에 느끼며 대방으로 들어갔다. 댓돌을 한층씩 딛고 올라서 는 발은 커다란 납덩이가 매어달린 듯이 무거웠다.

대청에서 인숙이가 들어오는 것을 본 큰 동서와 작은 동서 는 그야말로 천년 묵은 여우가 인두겁을 쓰고 대낮에 들어 오는 줄 아는지 눈이 잠깐 마주치자 뿔불이 제방으로 들어 가 숨어 버린다.

인숙은 떨리는 손으로 대방의 장지를 열었다. 성복전이라 반백이 더 된 머리를 풀고 누웠던 시어머니는 이게 생시인 가 하는 듯이 물끄러미 인숙을 쳐다보더니 두 눈을 커다랗 게 뜨고 놀라서 몸을 일으킨다.

인숙은 오금이 떨어지자 않는 것을 간신히 절을 하고 일어 섰다.

"네가 누구냐. 네가 뭣 하러 왔니?"

시어머니는 체머리를 흔들며 서슬이 퍼래진다.

"할머님께서 돌아가셔서"

인숙은 입 속으로 하는 말 끝조차 여물리지를 못하는데

"우리집에 무슨 일이 있든지 네가 올 까닭도 없고 너같은 사람은 받자할 수도 없다. 대감께서 아시고 야단이 나기 전 에 냉큼 나가거라."

그 말은 전에 없이 날카롭다. 이제까지 쫓겨난 까닭을 똑 똑히 모르는 인숙으로서는 너무나 뜻 밖이라 무어라고 대답 도 못하고 그저 죽여 줍시사하는 듯이 고개를 떨어뜨리고 섰을 뿐...... 제가 다시 제 맘대로 학교에를 또 다닌다는 것 과 더더군다나 편지질을 하던 남자의 자식까지 배었다는 소 문이 누구의 입을 통해선지 시집 식구의 귀로 들어간 줄은 그 당자가 꿈에라도 알 리가 없었다.

시어머니는 마주 보기도 싫어하는 듯이

"네가 안나가면 내가 나가겠다"

하고 일어서 기엄기엄 마루로 나간다. 인숙은 (무슨 죄를 지었는지 거적대죄를 하고라도 알고야 말리라) 하고 벼르는데 봉환이가 허리춤에 손을 찌르고 들어선다.

"뭣 하러 왔어?"

전에 없던 반말지거리다.

"왜 못올 델 왔어요."

인숙은 눈을 똑바로 뜨고 오래간만에 대하는 남편의 독이 오른 얼굴이 뚫어지도록 쳐다보았다.

"무슨 낯짝을 쳐들구 우리집엘 왔느냐 말야? 끌어내기 전 에 어서 나가!"

봉환은 인숙에게 손까지 대려는 형세를 보인다.

인숙은 참고 참았던 감정이 그만 폭발이 되었다. 분을 참 느라고 숨을 몰아쉬다가 달려들어 봉환의 팔에 매어달리며

"왜 내가 이 집엘 못와요. 무슨 죄를 졌길래 얼굴을 쳐들지 못해요. 어째서 이 집식구들이 나 하나를죽일년 다루듯 하 는거야요. 말을 좀 해봐요. 어서요 어서. 그 까닭을 알기 전 엔 난 이 집에서 죽을테야요!"

하고 폭백을 하며 몸부림을 쳤다.

봉환은 뜻 밖에 인숙이가 너무나 다부지게 달려드는데 겁 이 슬그머니 났다.

흠잡을 말이 없는 것은 아니언만 이 이상 덧들였다가는 당 장에 생죽음이 날까보아 눈이 둥그래졌다.

인숙의 물퍼붓듯하는 폭백은 그칠줄 모른다. 안채가 발칵 뒤집혀서 시어머니가 다시 디룩거리고 들어왔다.

사랑에 누워서 조상도 받지 못하는 대감이 알면 정말 분통 이 터져서 이번에는 세 초상이 한꺼번에 날까보아 벌벌 떨 면서 연방 아들의 옆구리를 꾹꾹 찌르며 어루만져 보내라고 눈짓을 한다.

봉환은 얼굴이 샛노래 가지고 헐떡거리고 섰다가

"이러지말우 이러지말어, 할머니 장사나 지내구 나면 내 찾 어가서 얘기를 하리다. 피차에 오해가 있는게니까"

하고 진정으로 비는체를 하였다.

"이 얘야 남 볼쌍사납게 이게 무슨 짓이냐. 할머님 시체를 뻗쳐 놓고"

시어머니까지 빌고 달래지 않고는 당장을 수습할 수 가 없 었다.

인숙은 시어머니 앞에서는 입을 다물고 봉환의 소매를 놓 고 떨어져 두 손길을 마주잡고 예법을 차리는 습관이 남았 던 것이다. 다른 때만 같으면 죽든 살든 담판씨름을 하고야 말 것이지만 (끝까지 내 체면은 차리리라) 하고 죽을 힘을 들여 흥분을 가라앉히고 일어섰다.

十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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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오해가 있는게니 한 번 찾어가서 해변을 하겠다-) 고 남편이 빌다시피하는 말까지 들은 바에야 인숙은 그 자 리에서 일어설 수 밖에 없었다. 거짓말이 입에 발린 사람이 라 그 말을 통으로 믿지는 않으면서도 어른 앞에서 그 이상 더 대들어 종주목을 대고 심지어 남편의 허리띠 끈에 목을 맨댔자 제 꼴만 사납고 창피할 것을 깨달었던 것이다.

또 한편으로 언뜻 생각이 난 것은 뱃속의 어린 것이다.

"몹시 흥분하는 일이 있거나 몸을 험허게 가지면 태아한테 해롭소. 임신 중에는 마음과 몸의 안정을 잃지 말 것을 주 의해야 하우"

하고 만날 때마다 당부를 하던 허의사의 고마운 말이 생각 이 났던 것이다.

(뱃속에 어린 것한테야 무슨 죄가 있나. 이러다 낙태나 하 면......) 하고 마음 속으로 저의 뱃속을 어루만지며 일어섰다.

봉환은 어느 틈에 슬그머니 나가버렸다.

"그래 꼭 올테야요?"

하고 쫓아나가서 한 번 다지고 싶건만 (아직도 양심이 남었으면 한 입으루 두 말은 안하겠지) 하고 시어머니의 앞에 우두커니 섰기가 민망해서 머리를 푹 수그리고 뒷채로 건너갔다.

나중 일은 어찌 되었든지 간에 잠시 마음을 진정하려고 옷 매무새라도 고쳐 입으려고 대방을 피해나온 것이다.

그러나 싀집온뒤에 십년이나 기거를 하든 저의방은 '이게 뉘방인가'할만치 사뭇 달러젔다. 삼층장과 의거리며 머릿장 은 이리저리 자리를 바꾸어 놓고 방바닥에는 그저 이부자리 를 개지않은채로 있는데 각장장판에 장?을 옴겨논 자죽이 허옇게 들어 났다. 버리지도 않은 잿떨이며 '스케취'판과 '칸 바쓰'같은 그림제구가 이구석 저구석에 아무렇게나 흩으러젔다.

"내가 죽어 나갔드래도 이지경으로 흐트러놓지는 않겠지"

하고 한심스러히 방안을 둘러 보는 눈이, 봉환이가 누어자 든 머리맡에 이르자, 인숙은 깜짝놀라며 한거름 뒤로 문칫 하고 물러섰다.

벽화같이 큰 여자의 초상화가 눈앞을 가로막었든 것이다.

피아노 앞에 반쯤 돌아앉어서 건반을 눌으는체하고 요염한 눈초리로 비웃는 듯이 인숙을 똑바로 노려보는 여자는 당장 에 살어 나올것갔다.

"저게 강보배로군!"

하고 인숙은 입속으로 불으짖고는 더 마주볼 용기가 없어 서 고개를 돌렸다.

이번에는 유리시게가 놓였든 사방탁자우에서 전에 못보든 황금빛으로 번쩍어리는 사진들이 인숙의 눈을 빼아섰다. 가 까히 가서 들여다보니 양장을 하고 서서 은행껍줄같이 얄다 란 눈두덩을 반쯤 나려깔고 실우습을 치는 것은 초상화와 똑같은 얼굴이다.

그림과 사진은 저를 새중간에 넣고 덤벼들며 말없이 핍박 하는 듯, 인숙은 눈을 감고 방한복판에가 한참이나 섰었다.

그러나 인숙은 제방을 두구퉁이씩이나 차지하고 들어앉인 여자에게 대해서 질투라든지 강짜라든지 하는 감정은 일어 나지 않었다. 그러한 점잖지못한감정을 일으키기에는 그 상 대자가 카페-의 계집과같이 저급하고 천작해 보였든 것이다.

(기왕 이방의 주인이 바뀐 다음에야 더 서있는 것이 치사 스럽다) 하고 창피한 생각이 들어서 인숙은 나가려다 말고 (옷가지는 그대로 있나?) 하고 아츰저녁으로 기름걸레질을 처서 길을 들이든 삼층자 개장문을 열어보았다. 장속은 불한당이 처간것같지 않은가.

차곡차곡 개여두었든 반반한 옷가지는 말끔 뭉처다가 잡혀 먹은 모양이다. 그돈으로 그림제구를 사서 강보배의 초상화 를 그리고 밀회를 하는 비용으로 이바지 한 것이 틀림없지 않은가.

인숙은 그방에서 그집에서 잠시도 더 머물러 섰을수가 없 었다. 별당으로 올러가 곡이나 실컨 하리라 하다가 어쩐지 두눈이 뽀송뽀송해저서 행낭계집애더러 신을 가저오라한후 아무도 몰으게 후원뒷문으로 빠저 나왔다.

삼청동어구에 당도할때까지 인숙은 눈에 보이는것도 없고 귀에들리는것도 없어, 완전히 얼어빠진 사람같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