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일년의 알쏭달쏭 수놓은 돗자리

세월이 덧없다고 또 한 번 써나 볼까. 쓰고서 읽어 보니 심심하고 맛없기가 왜 그리 구비하였는지 맹물이나 마셨다 하면 해갈이나 되고 모래를 깨문 것 같다 하면 질금거리는 맛이나 있지, 셋에 석자가 종이 위로 꼬불랑거리며 잘금살살 기어가는 것이 가뜩이나 갑갑한 마음을 검은 실로 얽어놓은 듯할 뿐이다.

그러나 세월은 덧없지! 이성의 눈을 겨우 뜬 척한 사람일지라도 세월은 덧없지! 부엌에서 밥짓는 할멈일지라도 세월은 덧없지요! 막걸리잔을 입에다 대고 수염에 묻은 모주 방울을 쓰다듬는 할아범일지라도 세월은 덧없어! 극도의 신경질로 광대뼈가 쏙 나오고 두 뺨이 강파르게 마른 젊은애라도 세월은 덧없는 것이었다. 반짇고리를 끼고 앉아 월명사창(月明紗窓)에 바느질을 하는 새색시도 세월이 덧없어요! 방갓 쓴 상주가 휘적휘적 길을 가다가 먼 산을 바라보면서도 허어 참 세월은 덧없군! 늙은이가 어린애를 오래간만에 만났을지라도 세월이란 덧없는 것일세!

세월이 덧없다고 종이 위에 써놓고 볼 때에는 그리 신통할 것이 없더니 눈을 감고서 세상에 비친 세월이 덧없다를 생각해 보니 생각을 하면 생각을 할수록 참으로 덧없게도 세월이 덧없도다.

덧없는 지난 일 년이란 세월에 어린 도향아, 어떻게 지냈으며 무엇하려 살았느냐?

너의 지나간 일 년을 열락(悅樂)이란 화환(花環)과 환희(歡喜)라는 「레스」로 꾸미고도 남았느냐. 비애(悲哀)라는 흑포(黑布)와 탄식이란 끈으로 싸고서 동였느냐.

눈물이란 구슬이 너의 가슴에 사무치도록 떨어져 박히더냐? 이별이란 「메스」가 너의 마음을 쓰리도록 쪼개더냐.

사랑의 전상(箭傷)이 너의 연하고 약한 감정을 쓰리게 하더냐. 오뇌와 번민이 너의 피를 불살라대더냐?

비분이 너의 살을 떨리게 하더냐? 원망과 낙담이 너를 끝없는 구렁에 처들이박더냐.

너는 울었느냐, 웃었느냐, 싸우다 이겼느냐, 다투다가 졌느냐. 나는 옛 것이 가고 새 것이 온다는 이 경계선상에서 고함쳐 너에게 물어보려 한다.

너는 정처없이 헤매는 한 개의 부랑자였지? 너를 외면으로 보는 자들은 모두 다 행복자라고 부러워하였지? 너는 양친이 구존(俱存)하고 형제가 많다.

훌륭한 가정에서 아무 부족 없는 교육을 받을 수가 있다. 아버지의 엄훈(嚴訓)과 어머니의 자애가 너의 몸을 반죽하고 주물러서 완전한 인격과 험 없는 감정의 소유자가 될 수 있다. 너에게 무슨 비애와 너에게 무슨 눈물과 너에게 무슨 우울과 너에게 무슨 고통이 있겠느냐고 이 세상에 모든 사람은 세상에 부딪치지 못한 것을 반쯤 조소하듯이 너를 부러워한다.

그러나 돌아간 일 년 동안은 너는 표랑자였다. 집이 없느냐, 유(有)하다. 그러나 어떠한 때에는 외조모님댁의 신세를 끼쳤으며, 먹을 것이 무(無)하냐, 존(存)하다. 그러나 빵을 구하려, 타향에 몸을 던져 고독에 운 일도 있었으며 또다시 고향이 그리워 서울에 돌아왔으나 여전히 고등빈민의 반 걸인생활을 계속하고 있다. 지나간 일 년 동안을 거취가 무상하였으며 침식이 일정치 못하고 서울에 있었으나 시골에 있었으나 발길이 잡아당기는 대로 마음이 내키는 대로 가고 싶은 곳은 가보려 하였으며, 있고 싶은 곳은 있어 보려 하였다. 지나간 일월 어떠한 날 야반 세시에 그 어떤 친구와 장충단 공원에 척설(尺雪)이 쌓인 곳에 몸을 틀어박고 헤매기는 무엇하려 하였으며 앉았다 말고 수구문(水口門)을 나서 광주(廣州)는 무엇하려 갔었느냐.

네가 올 봄에 안동(安東)을 간 것이 참으로 교육자의 멍에를 메고 육영(育英)이라는 무서운 책임을 과연 깨닫고 갔었느냐, 침울한 심사와 비애란 대해(大海)를 너의 심흉(心胸)에서 행여나 없이하여 보려고 소식차로 갔었느냐.

네가 안동을 떠날 때에 요리집 문전에서 다정한 친구들의 팔에 매달려 눈물지어 울기는 왜 울었느냐.

마음 약한 도향아! 울려거든 가지를 말거나 가려거든 울지를 말지, 울고서 가는 너의 심사야 쓰리더냐 아프더냐.

십여 년래에 처음이라는 대설이 너를 싣고 떠나려는 기차 앞을 막을 때에 다정한 친우, 그리운 벗들이 너를 둘러싸고 잘 가거라, 잘 있거라 할 때에 너의 마음은 어떻더냐, 척신단구(隻身短軀)가 있을 곳이 없어 타향으로 추방을 당하는 듯하지 않더냐. 그리운 애인에게 배척을 수(受)하고 머나먼 길로 정처없이 헤매어 나가는 듯하지 않더냐. 너는 그때에 노서아를 생각하였지? 시베리아로 끌려가는 것을 생각하였지? 절대의 사랑, 난치의 병, 너와 같은 빈곤의 소유자임에 썩 많은 공명(共鳴)을 가진 너는 떠나가는 기차 위로 백설이 분분히 떨어질 때 그를 그리워하였지. 네가 친구에게 편지할 때에 무엇이라 하였느냐. 어디까지든지 정적(情的) 생활을 간망(懇望)하는 네가 아니라, 다감하고 다정하다고 자처하는 너는 또다시 톨스토이의 〈부활〉 속에 있는 카츄사를 생각하였지! 그리 넓지 못한 조선 산천을 깨끗한 백설이 흰 옷을 입히고 네가 기차 안에 앉은 것이 또다시 슬픈 정화(情話)의 애끊이는 한 마디를 생각지 않치 못하게 하였었지.

그나마 맑은 눈 풀리기 저어하고 너의 빈우(貧友)에게 보낸 편지는 퍼붓는 흰 눈을 헤치고 달려가는 시커먼 기차가 어린 도향을 싣고 갈 적에 자기 친우에게 떠나기를 아까와하는 석별의 노래였다.

안동에 와서 여러분 선생의 친절하시고 간독(懇篤)하신 애호가 너의 외로운 마음을 적이 위로하셨지. 많은 춘초(春草)가 우거지고 청류(靑柳)가 흩날릴 제나 구비쳐 흐르는 낙동강물이 멀거니 앉아 있는 너의 허리를 휘휘칭칭 감고서 지나 내려갈 때나 반짝거리는 물결이 찰싹 차르락 달 밑에서 춤 출 때나 영호루(暎湖樓) 높은 집에 쾌재(快哉)라, 타풍(吒風)이 너를 부를 때나 영남산상(映南山上)에서 반천 리 서울을 바라볼 때에 어째 너의 얼굴에는 검푸른 그림자가 떠나지를 않았느냐, 웃을 때는 반드시 비소(鼻笑)였으며 말끝은 반드시 시들스런 한숨이었지? 너는 피칠한 동굴 속에서 새어나오는 듯한 자규(子規)의 울음을 달밤에 듣고서 애상(哀傷)의 와중에서 나오지 못하고서 헤매였지. 아침에 앞마당을 지나가는 만가(挽歌)의 여운을 귓속에 남겨 놓고 우리 인생은 모두 다 죽음이 올 줄을 알기는 알면서 그 싫은 죽음을 단념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였지?

너는 거기서 외조모님 별세의 부음 들었지? 너에게는 일대 손실이었다. 외조모님 돌아가셨다는 만하(晩荷) 누님의 엽서가 돌아가신 지 일주일이나 경과하여 너의 손에 떨어졌을 때에 너는 어이가 없어 울지도 못하였지. 할머님 돌아가신 그 글을 볼 때에는 너의 눈에서는 눈물 한 방울도 나지를 않더라마는 지나간 옛날 모든 추억이 너를 심통한 울음에 젖게 하였지.

네가 과연 할머니의 사랑을 아는 자이냐, 너의 할머니가 너의 머리를 쓰다듬을 때 그 손끝손끝과 마디마디에서 솟아나오고 흘러넘치는 자애의 샘물이 너에게 얼마만한 세례를 주었는지 알았느냐.

너는 사랑에 목마른 자이었다. 그러나 너는 너를 애(愛)에 목마른 자라 하지마는 너를 사랑하시는 이는 여러 사람이 계셨다.

그러나 오늘에 그 중에 한 분은 이 세상에서 떠나셨다. 다만 너의 적은 머릿속에 추억의 환영이 되어 계실 뿐이다. 때때로 괴로움과 슬픔과 외로움을 당할 때에 그의 돌아가신 환영을 부여잡고서 너는 추억의 눈물을 흘릴 때가 있을 것이다.

네가 안동 있을 때에는 물결치는 파도와 같던 너의 마음이 얼마간 안정되었었지. 너는 거기서 책을 보았지, 글씨를 썼지, 아침에는 호홉체조를 하고 낮에는 목욕을 다녔지! 그러나 방종한 도향아! 너의 신경은 자극을 당하지 않고는 위안을 받지 못하겠더냐? 보들레르, 베를레느, 포우가 아편을 흡(吸)한 것이 그들의 최대 위안이었다 할 것 같으면 너에게는 그 무엇이 위안이더냐, 강한 독주의 푸른 향내더냐? 요염한 창녀의 깜찍한 자색이더냐?

네가 서울 와서 한 것이 무엇이냐? 너의 장래가 광휘(光輝) 있게 빛남을 보았느냐, 너의 미래에 성공의 개선문을 보았느냐, 너의 장래는 암흑이니라. 너는 모든 일에 자중하여야 하느니라. 그리고 충실하여야 할 것이다.

아아, 회고하면 이십일 세라는 지나간 세월을 어린 도향은 어떻게 지냈는가? 외적 생활의 원조가 없었음이 아니었고 외적 형식의 애호자가 없음이 아니었다.

너의 부모가 너를 사랑하였다 하고 너를 이해하였다 하면 그것은 방임(放任)이었다. 만일 네가 내약(內弱)한 자가 아니고 자제력이 핍(乏)한 자이었더면 두려운 타락에 저 속에서 끝 모르는 심연(深淵) 속을 헤매일 것을 너에게 명명(瞑瞑)한 대공(大空)에 너를 인도하는 구리 기둥과 불기둥이 있다고 할 수 없고 너의 머리속에는 「환영(幻影)의 소멸」을 당한 지가 벌써 오래다.

지나간 나의 세월이 새해라는 고개 마루터기를 두고서 획선(劃線)이나 그어 놓은 듯이 구분이 될 때 너는 또다시 애매한 희망 속에 솟아나 보아라!

그러나 나는 속는 가운데 위안을 구하여 또다시 한번 춤추어 보련다. 이 글을 쓰는 너는 지금 문화사(文化社) 한 간 방에서 그래도 좋다고 큰 웃음을 치는 때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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