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국사 (7차 교육과정)/Ⅲ. 통일 신라와 발해

이 단원에서 배울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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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일된 민족 국가로서 신라가 어떻게 발전하였는지 알아보자.

⋅ 발해의 건국이 가지는 민족사적 의의에 대하여 알아보자.

⋅ 신라와 발해의 멸망 원인을 알아보자.

1. 통일 신라와 발해의 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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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습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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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통일 후 대동강에서 원산만 이남은 신라가 차지하고, 고구려의 옛 땅에는 발해가 건국되어 남북국의 형세를 이루었다. 신라는 무열왕계가 전제 왕권을 확립하면서 확대된 영토를 효율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제도를 정비하였으며, 주변 지역과 활발한 교류를 하였다. 한편, 발해는 적극적인 대외 정책을 펴면서 나라를 정비하여 동북 아시아의 강국으로 떠올랐다.

[1] 신라가 통일 후에 새로 마련한 제도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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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열왕계가 권력을 장악해 가는 과정은 어떠하였나? ⋅ 통일 국가는 어떻게 운영되었나?

무열왕계의 왕위 세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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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는 삼국 통일로 영토와 인구가 많이 늘어났고, 백제, 고구려 유민들과 힘을 합쳐 당 침략군을 몰아 내는 전쟁에서 하나의 민족이라는 의식도 생겨났다. 이렇게 달라진 사정에 따라 여러 면에서 새로운 모습이 나타났다.

통일 과정의 중심 인물이었던 김춘추는 진골 출신으로, 김유신의 도움을 받아 왕위에 오를 수 있었는데, 그가 곧 무열왕이다. 이후 왕위는 무열왕의 직계 후손들이 거의 독점하였다. 무열왕과 그 뒤를 이은 문무왕은 통일 전쟁을 승리로 이끌면서 왕의 권위를 크게 강화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신문왕은 다른 진골 세력들의 반란을 누르고 전제 왕권을 확립해 나갔다.

신라는 이와 같이 무열왕의 직계 자손에 의해 왕권이 크게 강화되자, 이를 바탕으로 정치적 안정이 이루어지고, 문화도 융성해졌다.

새로운 제도의 마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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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 후, 신라는 통일 국가에 걸맞게 여러 제도를 재정비하였다. 중앙의 정치는 왕의 직속 기관인 집사부를 중심으로 운영되었으며, 그 장관인 시중의 권한이 강화되었다. 시중은 왕명을 받들어 행정을 집행하고 국정을 책임지는 역할을 하였다. 집사부의 기능이 강화됨에 따라 화백 회의의 기능이 축소되고, 그 의장인 상대등의 권한도 약화되었다.

삼국 통일로 영토가 크게 넓어짐에 따라 지방 통치 조직도 새롭게 정비하였다. 전국을 9주로 나누고 주 밑에 군과 현을 두었으며, 지방관을 파견하여 다스렸다. 말단 행정 구역인 촌은 토착세력인 촌주로 하여금 관리하게 하였다.

주요 지방에는 특별 행정 구역으로 5개의 소경을 두어 일부 중앙 귀족과 옛 고구려, 백제의 귀족들을 옮겨 살게 하였다. 이것은 수도 금성이 한반도의 남동쪽에 치우쳐 있는 것을 보완하고, 또 지방 세력의 성장을 감시하기 위한 것이었다.

통일 신라는 군사 제도를 정비하여 9서당과 10정을 편성하였다. 중앙군인 9서당은 신라인 외에 고구려인, 백제인, 말갈인도 포함된 부대였다. 지방의 각 주에는 1개의 군단인 정을 배치하였는데, 특히 한주에는 2개의 정을 두어 전국에 모두 10정을 두었다.

통일 신라는 국가의 수입을 늘리고 귀족들의 경제적 기반을 약화시키기 위해 토지 제도를 정비하였다. 통일 후, 신문왕 때에는 문무관료들에게 관료전을 지급하고. 이전에 귀족에게 주었던 녹읍을 없앴다. 그리고 농민들에게도 정전을 주어 경작하게 하고 국가에 조세를 바치게 하였다. 그러나 후에 귀족들의 반발로 녹읍이 부활되었고, 귀족들은 이를 토대로 호사스러운 생활을 누렸다.

도움글

⋅ 신비스러운 피리 만파식적 ⋅

신문왕은 왕권 강화에 걸림돌이 되는 진골 귀족 세력을 철저하게 탄압하여 전제 왕권을 확립해 나갔다. 이와 관련하여 ‘만파식적’이라는 신비스러운 피리에 관한 전설이 ‘삼국유사’에 전해 오고 있다.

“이 피리를 불면, 적의 군사는 물러가고, 병은 낫고, 물결은 평온해진다.”

이 피리는 모든 정치적 불안이 진정되고 평화가 오기를 소망하는 신라인들의 염원을 담고 있다.

관료전

관리들이 관직에 복무하는 대가로 받은 토지였다.

녹읍

귀족들이 받는 녹봉의 일종으로서, 이것을 통해 농민을 지배할 수 있었다.

읽기자료

⋅ 귀족들의 생활상 ⋅

“재상 집에는 녹봉이 끊이지 않으며, 그의 예속인이 3000 명이고, 갑옷과 무기, 소, 말, 돼지의 수도 이와 비슷하였다. 가축은 바다 가운데의 섬에 목축하여 필요할 때 활로 쏘아서 잡아먹었다. 곡식을 남에게 꾸어 주고 갚지 못하면 노비로 삼았다.” ‘신당서’

[2] 통일 신라의 대외 교류는 어떠하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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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일 신라의 대외 교류는 어떻게 전개되었나?

활발한 대외 교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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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의 침략을 물리친 후 통일 신라 사회가 안정되면서 당과의 교류가 활발해졌다. 이에 따라, 공식 사절을 비롯하여 유학생, 승려, 상인 등의 왕래와 문물 교류가 빈번해졌으며, 해상 무역도 번성하였다. 신라는 당과의 교류를 통해 당의 선진 문화와 서역 문화까지 받아들였으며, 당으로부터 ‘군자의 나라’로 칭송을 받았다.

통일 후, 산업의 급속한 발전과 무역량의 비약적인 증가로 신라의 경제 생활에도 큰 변화가 일어났다. 통일 전에는 주된 수출품이 토산 원료품이었으나, 통일 후에는 금⋅은 세공품, 인삼 등으로 바뀌었다. 특히, 신라의 수출품 중에서 ‘신라칼’은 일본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신라는 당에서 진귀한 고급 비단과 옷, 책, 공예품 등을 수입하였는데 대개가 귀족들의 사치품이었다. 아라비아 상인들도 울산항을 통해 진귀한 보석, 모직물, 향료 등의 남방 물산을 들여와 신라 귀족들의 사치심을 조장하였다. 이리하여 흥덕왕 때에는 ‘진귀한 외래품만을 숭상한다.’고 하여 사치를 금지하는 명령을 내린 일도 있었다.

당으로 가는 바닷길로는 통일 전부터 이용하였던 당항성에서 산둥반도로 가는 길과, 울산만에서 출발하여 남해안을 지나 흑산도 부근에서 산둥 반도나 남중국으로 가는 길이 있었다. 그리고 울산항은 당시 국제 무역항으로서 크게 번성하여 아라비아 상인까지도 내왕하였다. 또, 신라인들이 자주 당을 왕래함에 따라 산둥 반도와 화이허강 하류 일대에는 신라인 마을인 신라방과 신라촌이 생겼고, 신라소라는 감독 관청과 신라원이라는 절까지 있었다.

종교나 학문을 배우기 위해서 많은 신라 유학생들이 당에 파견되었다. 의상은 당에서 화엄종의 교리를 배우고 귀국하여 신라 화엄종을 열었다. 그 밖에 원측은 불교 이론을 한 단계 높여서 당의 불교계에 큰 영향을 끼쳤으며, 혜초는 당을 거쳐 인도에 가 순례한 후 ‘왕오천축국전’을 썼다.

유학생들 중에는 당의 교육 기관인 국자감에서 공부하여 당의 과거에 합격한 사람들이 많았는데, 그 중에서도 김운경, 최치원 등이 유명하였다. 최치원은 뛰어난 문장으로 당에서도 이름을 떨쳤으며, ‘계원필경’이라는 문집을 남겼다. 유학생들 중에는 6두품 출신이 많았는데, 이들은 골품제의 모순을 앞장서서 지적하기도 하였다.

신라의 불교는 일본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의상, 원효를 비롯한 신라 승려들이 저술한 책들이 일본 불교계에 널리 읽혔다. 의상과 그를 도운 선묘 이야기가 일본에 그림으로 전하고 있으며, 원효는 일본 불교계에서 크게 존경을 받았다.

왕오천축국전

신라의 승려 혜초가 인도와 부근 여러 나라를 순례하고 그 행적을 적은 여행기이다. 고대 인도의 사정을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신라인들의 진취적 기상을 느끼게 하는 책으로, 현재 파리 국립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당 유학생(숙위 학생)

신라 때 당에 유학하여 국자감에서 공부했던 학생들을 숙위 학생이라고 하였다. 이들은 외국인에게 응시 기회를 준 빈공과라는 과거에 합격하여 당의 관리가 되기도 하였다. 이들이 신라에 돌아와서는 골품제 때문에 대우를 받지 못하여 신라에 등을 돌리는 경우가 많았다.

읽기자료

⋅ 천축국 다섯 나라를 가다 ⋅

“……한 달 뒤에 쿠시나가라에 도착했다. 부처님이 열반에 드신 곳이다. 성은 황페하여 사람이라고는 살지 않는다. 부처님이 열반에 드신 곳에 탑을 세웠는데, 스님 한 분이 그 곳을 깨끗이 청소하고 있다. 매년 8월 8일이 되면 스님과 여승, 도인과 속인이 모두 그리로 모여 대대적으로 볼공을 드린다. 그 때 공중에 깃발이 휘날리는데, 그 수를 헤아릴 수 없다. 많은 사람이 그것을 함께 보고, 이 날을 기하여 불교를 믿으려고 마음먹는 사람이 하나 둘이 아니다.” ‘왕오천축국전’

[3] 발해는 왜 ‘해동성국’이라고 불리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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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조영이 발해를 세운 과정은 어떠하였나?

⋅ 발해는 나라를 어떻게 다스렸나?

대조영의 발해 건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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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가 멸망한 후 고구려 유민들은 여러 갈래로 분산되었다. 일부 귀족들은 당으로 끌려가기도 하였으나, 많은 유민들이 당에 적극적으로 대항하여 당의 군대와 안동 도호부를 요동 지방으로 몰아 냈다.

때마침 당의 가혹한 수탈에 시달리던 거란의 추장이 반란을 일으키자, 요서 지방에 있던 대조영은 이를 틈타 고구려인과 말갈인들을 이끌고 랴오허 강을 건너 동쪽으로 이동하였다. 이에 당은 말갈인부대를 격파하고 고구려 유민들을 뒤쫓았다. 대조영은 추격해 오는 당군을 격파하고, 고구려 유민과 말갈인을 모아 길림성의 동모산 근처에 도읍을 정하고 발해를 세웠다(698).

발해의 주민은 주로 고구려인과 말갈인이었다. 지배층의 핵심은 고구려인이었고, 피지배층은 주로 말갈인이었다.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는 일본에 보낸 외교 문서에 발해를 고구려로, 발해 왕을 고구려왕으로 칭하여 고구려 계승 의식을 분명히 하였다. 발해의 건국으로 우리 역사는 통일 신라와 발해가 양립하는 남북국의 형세를 이루게 되었다.

발해가 일본에 보낸 국서의 내용

“우리는 고구려의 옛 땅을 수복하고, 부여의 전통을 이어받았다.”

해동성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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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 후, 발해는 고구려를 멸망시킨 당과 신라에 대해 적대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발해는 북쪽으로 돌궐과 통하고 바다 건너 일본과 친선 관계를 맺었다.

당은 신라와 말갈을 이용하여 발해를 견제했기 때문에, 발해 무왕은 당의 산둥 지방을 공격하기도 하였다. 그 후, 안정을 회복한 문왕 때에는 대외 정책을 바꾸어 당과 친선 관계를 맺고 당의 발달한 문물 제도를 받아들이는 데 힘을 기울였다.

이 무렵에는 발해와 신라 사이에도 교류가 이루어졌다. 신라가 발해에 사신을 파견하였으며, 신라 국경에서 발해의 동경 용원부까지 역이 설치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아, 두 나라 사이에 어느 정도 교류가 행해졌음을 알 수 있다.

발해가 가장 융성했던 시기는 9세기 전반 선왕 때였다. 이 무렵, 발해는 당에 유학생을 보내어 당의 제도와 문화를 받아들이는 한편, 말갈의 여러 부족을 복속시키고, 서쪽으로는 요동 지방에까지 진출하였다. 이리하여 발해의 영역은 북쪽으로는 헤이룽 강, 동쪽으로는 연해주, 서쪽으로는 요동, 남쪽으로는 영흥 지방에까지 이르렀으며, 고구려의 옛 땅을 대부분 되찾았다.

중국에서는 이러한 발해를 ‘동쪽의 융성한 나라’라는 뜻을 가진 ‘해동성국’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이와 같이 만주에서 세력을 떨치던 발해는 9세기 후반부터 국력이 약화되어 결국 거란족에 의해 멸망하였다(926).

발해의 정치 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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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는 나라의 안정을 되찾은 후, 당의 문물 제도를 받아들여 세련된 제도를 갖추는 데 힘을 기울였다. 발해는 독자적인 연호를 쓸 정도로 왕권이 강화되면서 정치 제도를 정비하였다.

중앙에는 왕 밑에 정당성, 선조성, 중대성의 3성이 있었고, 그 아래에 6부가 있었다. 발해의 3성은 외형상 당의 제도를 모방하였으나, 운영 방식은 독특하였다. 즉, 3성은 정당성을 중심으로 운영하였고, 정당성 아래에 6부를 두어 나라의 일을 나누어 처리하게 하였다. 그리고 국가의 중요한 일은 귀족들이 정당성에 모여서 회의를 열어 결정하였다.

지방 행정 구역은 5경 15부 62주로 조직되었다. 특히, 5경은 상경을 중심으로 하여 5도의 교통망으로 연결되었다. 그리고 말단에 있는 촌락은 토착 세력가에 의해서 다스려졌다. 이것은 고구려 계통의 지배층이 말갈의 전통적인 사회 조직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두 민족 사이의 조화를 꾀한 것이었다.

발해 멸망의 시대적 배경

10세기 초의 동아시아는 중국이 5대 10국의 혼란기였고, 한반도는 후삼국으로 분열되어 있었다. 발해는 이러한 국제정세를 이용하여 성장한 거란족의 공격을 받아 멸망하였다.

발해 6부의 명칭

당의 6부(이, 호, 예, 병, 형, 공)와 달리, 발해는 유교 도덕을 나타내는 ‘충, 인, 의, 지, 예, 신’을 6부의 명칭으로 사용하였다.

도움글

⋅ 발해의 주민 구성 ⋅

발해의 주민 구성에 관해 일본의 ‘유취국사’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발해국은 고구려의 옛 땅이다. …… 그 넓이가 2천 리이고, 주⋅현의 숙소나 역은 없으나 곳곳에 마을이 있는데, 모두 말갈의 마을이다. 그 백성은 말갈인이 많고 원주민이 적다. 모두 원주민을 마을의 우두머리로 삼는데, 큰 촌은 도독이라 하고, 다음은 자사라 하고, (이들 마을의 우두머리를) 그 아래 백성들이 모두 수령이라 부른다.”

이 기록에 의하면, 발해의 백성은 말갈인과 원주민으로 구성되어 있다. 원주민은 옛 고구려인을 말한 것으로 보이므로, 지방 행정에 있어서 상위직은 대부분 고구려인이 차지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학습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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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내용의 요지

가. 통일 신라의 제도 정비

⋅ 통일 후에 화백 회의의 기능이 축소되고 집사부 시중의 역할이 강화되었다.

⋅ 9주 5소경의 행정 구역과 9서당 10정의 군사 제도가 정비되었다.

⋅ 신문왕 때에는 녹읍 제도를 없애고 관료전을 지급하였다.

나. 통일 신라의 대외 교류

⋅ 당과 문화 및 경제 교류가 매우 활발하여 당에 신라인의 활동 근거지들이 세워졌다.

⋅ 당과의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유학과 불교가 발달하였다.

다. 해동성국 발해

⋅ 대조영이 고구려의 유민과 말갈인들을 중심으로 발해를 건국하였다.

⋅ 발해는 고구려 계승 의식이 뚜렷하였으며, 만주의 대부분과 연해주를 지배하였다.

2. 주요 용어

시중 | 녹읍 | 관료전 | 신라방 | 해동성국

최치원 | 원효 | 대조영 | 무왕 | 선왕

3. 탐구 활동

다음은 상대등과 시중에 관한 기록이다. 상대등과 시중의 권한과 역할이 각 시기에 따라 어떻게 변했을까? 다음 기록의 내용과 교과서의 내용을 참고하여 추론해 보자.

⋅ 법흥왕 18년(531) : 이찬 철부를 상대등으로 삼아 나랏일을 총괄하게 하였다.

⋅ 진덕왕 5년(651) : 중시(시중)를 두었다.

⋅ 혜공왕 16년(780) : 2월에 이찬 김지정이 반란을 일으켜 사람들을 모아 궁궐을 포위하였다. 4월에 상대등 김양상이 이찬 김경신과 함께 군대를 동원하여 김지정을 죽였다(김양상은 나중에 선덕왕이 되었고, 김경신은 원성왕이 되었다. ). ‘삼국사기’

2. 신라의 동요와 후삼국의 형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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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습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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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세기 후반 이후 신라는 중앙의 진골 귀족들 사이에 권력다툼이 심해지고, 각 지방에서도 호족 세력이나 해상 세력들이 성장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생활이 극도로 어려워진 농민들이 각지에서 봉기하였다. 이러한 혼란을 이용하여 독자적으로 세력을 확대한 사람들이 나라를 세워 후삼국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1] 신라 말기에 지식인들과 지방 세력은 어떤 움직임을 보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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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라 사회의 혼란은 무엇에서 비롯되었나?

⋅ 새로운 시대를 열어 간 세력은 어떤 계층이었나?

흔들리는 신라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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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 후 번영을 계속하던 신라는 8세기 후반부터 귀족들의 권력다툼에 휘말리게 되었다. 소수의 진골 귀족에게 권력이 집중되면서 왕과 귀족 사이에, 그리고 귀족들 서로 간에 싸움이 자주 일어났다. 귀족들이 농장을 늘리고 자신의 군대를 키워 서로 다투었지만, 국가는 이를 통제하지 못하였다.

이와 같은 권력다툼은 혜공왕 때 시작되었다. 혜공왕이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르면서 귀족들의 다툼이 시작되어 결국 혜공왕은 살해를 당하였다. 이로써 무열왕계의 왕위 세습이 끊어졌다. 이후 신라에서는 왕위다툼이 심해져서 150여 년 동안에 20명의 왕이 바뀌는 큰 혼란이 일어나 왕권이 크게 약화되었다.

이러한 때에 지방에서도 반란이 이어졌다. 9세기 전반에는 웅주(공주) 도독 김헌창이 반란을 일으켰고, 청해진을 지키던 장보고도 중앙 정부에 반기를 들었다. 이 모두가 중앙에서 벌어진 왕위다툼과 관련하여 일어난 것이었다.

김헌창

무열왕의 후손으로서 내물왕의 후손인 원성왕과의 왕위다툼에서 패한 김주원의 아들로, 왕위를 차지하기 위해 반란을 일으켰다.

새로 등장한 지방 세력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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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족들 간의 격심한 왕위다툼은 신라의 전통적인 신분 질서인 골품제를 뒤흔들어 사회의 혼란을 가져왔다. 신라 사회가 혼란에 빠지자, 6두품 세력과 지방의 호족 세력이 사회 변화를 앞장서서 이끌었다.

6두품 세력은 진골 위주의 사회 체제에 특히 반발을 보인 계층이었다. 그들은 중앙 귀족이면서도 관직 승진에 제한을 받았기 때문에 큰 불만을 품고 있었다. 따라서, 이들은 골품제의 모순을 앞장서서 비판하면서 새로운 활로를 찾으려고 하였다. 6두품 출신인 최치원이 정계를 떠나 유랑 생활을 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이들은 새로운 정치 감각을 가지고 새로운 사회 건설을 추구하였다.

한편, 중앙에서 진골 귀족들이 서로 다투는 동안, 지방에서 독자적인 세력을 키워 온 호족들이 진골 귀족 중심 사회를 타도하고자 나섰다. 이들 호족 중에는 촌주 출신이 많았으나, 중앙에서 지방으로 내려온 세력이나 해상 세력, 군사 세력도 있었다.

촌락의 행정을 맡고 있던 촌주들은 일반 농민들보다 많은 토지와 소, 말 등의 가축을 소유하여 경제력을 키울 수 있었다. 호족들은 촌락민을 동원하여 촌락 주위에 성을 쌓고 자신의 군대를 거느리면서 스스로 성주나 장군으로 일컫기도 하였다.

이들은 지방을 직접 다스리면서 관리를 두어 세금을 거두었다. 그리고 농민 세력을 모으는 한편, 선종 승려나 6두품의 지식인을 맞아들이면서 통치력을 길렀다. 그리하여 호족들은 신라 정부에 도전하면서 점차 새로운 사회를 준비해 나갔다.

최치원의 행적

최치원은 6두품 출신으로, 당 유학을 마치고 고국에 돌아온 후, 진성여왕에게 개혁안을 올려 정치 개혁을 요구하기도 하였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래서 혼란한 세상에 뜻을 잃고 전국 각지를 유람하다가 해인사에서 일생을 마쳤다. 그는 유학자인 동시에 불교와 도교에도 조예가 깊은 사상가로서, 고려 건국에 큰 영향을 주었다.

도움글

⋅ 해상 왕국의 꿈을 키운 장보고 ⋅

9세기 초에 ‘바다의 왕자’로 세력을 떨쳤던 장보고는 대표적인 해상 세력 출신이었다. 그는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하고 해외 무역에 종사하여 이름을 크게 떨쳤다.

장보고는 당에 건너가 군인으로 출세하였다. 그러던 중 신라인이 당의 해적들에게 잡혀 와 노비로 팔리는 것을 보고 분개하여 귀국 후 흥덕왕을 뵙는 자리에서 “저에게 청해를 지키는 일을 맡기신다면, 해적들이 우리 나라 사람들을 노비로 끌고 가는 것을 막겠습니다.”라고 요청하였고, 왕은 장보고에게 군사 1만 명을 주어 군대를 조직하고, 청해진을 설치하게 하였다. 청해진은 당에서 흑산도와 남해안을 거쳐 일본의 기타큐슈에 이르는 국제 무역 항로의 중간에 해당하는 곳이었다. 그는 이 곳을 기지로 하여 해적을 소탕하고 황해의 무역로를 보호하면서 황해 일대의 해상권을 장악함으로써 당-신라-일본을 연결하는 국제 무역을 주도하였다.

장보고는 당시 신라인들이 많이 살고 있던 산둥성에 법화원이라는 절을 짓고 이 곳을 무역의 거점으로 삼았으며, 아울러 신라인의 친목과 단결, 안녕을 꾀하는 정신적 위안처로 만들었다. 중국을 순례하던 중에 법화원에서 신세를 진 일본의 승려 엔닌에게 일본으로 돌아갈 배편을 구해 준 적이 있었다. 이 때의 고마운 마음을 전하는 엔닌의 편지를 통해서 그의 명성은 이미 국제적으로 높아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무역을 통해 막대한 부와 명성을 얻게 되었고, 서남 해안 일대의 커다란 해상 세력으로 성장하였다. 그 뒤 왕권다툼에 간여하여 신무왕이 왕위에 오르도록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문성왕 때에 자기 딸을 왕비로 삼으려다가 그의 세력을 두려워한 진골 귀족들이 보낸 자객에게 암살당하였다.

[2] 신라는 왜 후삼국으로 분열되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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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농민 봉기는 왜 전국적으로 일어났는가?

⋅ 신라 말기, 후삼국 시대에 유행하였던 새로운 사상은?

온 나라를 뒤흔든 농민 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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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말의 사회 혼란은 9세기 말 진성여왕 때에 이르러 더욱 심해졌다. 중앙 귀족들은 부패하고 사치와 향락에 젖어 있었다. 나라안의 여러 주⋅군에서 세금이 제대로 걷히지 않아 나라의 창고는 비고 재정이 궁핌해졌다. 이에 왕이 지방에 관리를 보내어 독촉하였으나, 명령이 제대로 시행되지 않았다. 최치원이 진성여왕에게 개혁안을 건의한 것은 이러한 혼란을 수습하려는 의도에서였다.

이러한 때에 흉년이 들고 전염병이 나돌아 농민들의 생활은 더욱 비참하였다. 농민들은 굶주린 끝에 고향을 버리고 떠돌거나 도적 떼에 들어가기도 하였다.

9세기 말, 농민들은 전국 곳곳에서 봉기하였다. 중앙 정부에서 재정 부족을 이유로 관리를 보내어 세금을 독촉하자, 그 동안 억눌려 왔던 농민들의 분노가 폭발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농민들은 조세를 거부하고 떼를 지어 각 지역의 관청을 습격하기에 이르렀다. 이들은 생존을 위해 국가의 통치 질서를 위협하는 반란군으로 변한 것이었다.

상주 지방을 근거로 하여 원종과 애노가 일어났고, 그 밖에 북원(원주)의 양길, 죽주(죽산)의 기훤, 완산주(전주)의 견훤, 그리고 양길의 부하인 궁예 등이 잇달아 일어났다. 지방 호족들 중에는 농민 봉기를 이용하여 세력을 확대하려는 자들도 있었다. 이들은 무기를 갖추고 차츰 힘을 모아 지역의 세력가로 성장하였다.

읽기자료

⋅ 진성여왕 때의 농민 봉기 ⋅

진성여왕 3년(889), 나라 안의 여러 주와 군에서 공물과 부세를 바치지 않아 나라의 창고가 텅 비고 나라의 씀씀이가 궁핍하게 되자 왕이 사자를 보내 독촉하니, 이로 인하여 곳곳에서 도적들이 벌 떼처럼 일어났다. 이 때 원종과 애노 등이 사벌주(상주)를 근거로 하여 반란을 일으키자 왕이 나마 영기에게 명하여 붙잡게 하였다.

진성여왕 10년(896), 도적들이 나라의 수도 서남쪽 방면에서 일어나 붉은색 바지를 입어 스스로 달리 하매, 사람들이 적고적이라 불렀다. 그들은 신라의 주와 현을 무찌르고 서울(경주)의 서쪽 모량리에 이르러 민가를 약탈하였다. ‘삼국사기’

새로운 사상의 유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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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말에는 사회가 변화하면서 사상도 바뀌어 불교의 새로운 종파인 선종이 크게 발전하였다. 교종이 경전과 교리를 중시하여 왕실과 귀족들의 후원을 받으며 발전한 데 비하여, 선종은 교리보다는 각 개인의 마음 속에 있는 불성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며 정신 수양을 통한 해탈을 강조하였다.

그런데 신라 말에 이르러 왕실보다도 지방 호족들이 선종에 큰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것은, 지방의 호족들이 백성들을 포섭해 나가는 데 선종이 큰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다. 선종은 전통적인 권위를 부정하였으므로, 호족과 백성들의 환영을 받아 신라 말에는 9산이 성립되었다.

한편, 이 시기에는 도선에 의하여 풍수지리설이 널리 보급되었고, 최치원 등 유학자들도 선종과 풍수지리설에 관심을 보였다. 그리하여 신라 말에는 선종, 유교, 풍수지리설이 서로 결합되어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는 데 영향을 주었다. 이러한 사상계의 변화는 중앙의 6두품 세력과 지방의 호족 세력에 의하여 주도되었다.

교종과 선종

교종이 신라의 안정기에 크게 발전하였던 것에 비해, 선종은 신라 말기의 혼란기에 성행하였다.

후삼국 시대의 개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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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세기 말, 농민들의 봉기는 신라의 거의 모든 지역을 휩쓸었다. 이러한 혼란을 틈타 세력을 크게 모으고 나라를 세우는 데 성공한 사람은 견훤과 궁예였다.

견훤은 상주 출신으로, 본래 서남 해안을 지키던 군인이었다. 때마침 전국 여러 곳에서 농민들이 봉기하여 나라를 뒤흔들자, 그는 황해안의 해상 세력과 도적 떼 등을 자신의 군사 기반으로 흡수하여 자립하였다. 견훤은 나주를 거쳐 무진주(광주)를 점령한 후 북상하여 완산주에 도읍을 정하고 후백제를 세웠다(900).

궁예는 신라 왕족 출신인데, 중앙의 권력다툼에서 희생되어 신라에 대한 적개심이 강하였다. 궁예는 처음에 양길의 부하로 있었으나, 점차 세력을 키워 자립한 후 강원도, 경기도 일대에 큰 세력을 형성하였다.

그는 이어 송악 지방의 왕건 부자를 포함한 중부 지역의 일부 호족들의 도움을 받아 송악을 근거지로 후고구려를 세우고 왕위에 올랐다(901), 이리하여 신라는 분열되고 후삼국 시대가 열렸다.

읽기자료

⋅ 궁예는 왜 달라졌을까? ⋅

진성여왕 8년(894)에 명주(강릉)에 들어가, 거느린 무리 3500명을 14개 부대로 편성하고 …… 병졸과 더불어 괴로움과 즐거움, 어려움과 편함을 함께 하였고, 관직을 주고 빼앗음에 있어서도 공정하게 하여 사사로움이 없게 하였다. 이로써 뭇 사람들의 마음이 그를 두려워하고 존경하며 사랑하여 장군으로 추대하였다.

신덕왕 4년(915), 궁예의 부인 강씨가 왕이 법을 지키지 않는 일을 많이 행하므로 얼굴색을 바르게 하고 이야기하니, 궁예가 미워하여 “네가 다른 사람들과 간통하니 무슨 일이냐?” 하니, 강씨가 “어찌 그러한 일이 있으리요.” 하였다. 왕이 “내가 신통력으로 보아 안다.” 하고 무쇠 방망이를 불에 달구어 강씨를 쳐 죽이고 두 아들까지도 죽였다. 이후 의심이 많고 화를 잘 내니, 여러 보좌관과 장수, 환리로부터 평민에 이르기까지 죄 없이 죽음을 당하는 일이 자주 있었고, 부양(평강)⋅철원 일대의 사람들이 그 피해와 독을 견디지 못하였다. ‘삼국사기’

학습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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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내용의 요지

가. 신라 말기의 지식인과 지방 세력의 움직임

⋅ 8세기 후반 이후 신라는 중앙 귀족들의 대립으로 나라가 혼란해졌다.

⋅ 신라 말기에는 6두품 세력과 호족 세력이 사회 변화를 이끌었다.

⋅ 장보고는 청해진을 근거로 하여 중앙 정계에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하였다.

나. 후삼국의 형성

⋅ 9세기 말 이후, 고통을 당해 오던 농민들이 각지에서 봉기하였다.

⋅ 사회 혼란을 이용하여 견훤이 후백제를 세우고 궁예가 후고구려를 세웠다.

2. 주요 용어

6두품 | 호족 | 선종 | 풍수지리설

장보고 | 견훤 | 궁예

3. 탐구 활동

1. 다음 내용을 통해 신라 말에 농민들이 봉기한 원인을 말해 보자.

⋅ 원성왕 4년(788) : 가을, 서쪽 지방에서 가뭄과 벌레의 피해로 농사를 망쳐, 이 지역 농민들이 도처에서 일어났다.

⋅ 헌덕왕 7년(815) : 서쪽 변방 지역의 주⋅군에 큰 흉년이 들어 도적이 벌떼처럼 일어났다.

⋅ 진성여왕 3년(889) : 여러 주와 군에서 공물과 조세를 보내 오지 않아 정부가 조세를 독촉하자, 곳곳에서 도적들이 벌 떼처럼 일어났다.

2. 신라 말에 선종 불교, 유교, 풍수지리설이 새로운 사회의 건설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조사하여 정리해 보자.

한 걸음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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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화 과정

발해를 우리 민족의 국가로 보는 이유는?

발해의 역사에 대한 다음 글을 읽어 보자.

가. 백제(부여씨)와 고구려(고씨)가 망하게 되니, 김씨가 그 남쪽 땅을 차지하고 대씨가 그 북쪽 땅을 차지하여 발해라 하였다. 이것을 남북국이라 한다. 대체 대씨는 어떤 사람인가? 바로 고구려 사람이다. 그들이 차지하였던 땅은 어떤 땅인가? 바로 고구려 땅이다. 동쪽, 서쪽, 북쪽을 개척하여 나라를 넓혔을 뿐이다. 김씨가 망하고 대씨가 망하게 되니 왕씨가 그 땅을 거느리고 고려라 하였다. 그 남쪽에 있는 김씨의 땅은 완전한 채로 있었으나, 그 북쪽에 있는 대씨의 땅은 완전하지 못하고 혹은 여진으로 들어가고 혹은 거란으로 들어갔다. ‘발해고’

나. 고구려가 멸망하여 발해가 되고, 백제가 멸망하여 신라에 병합되었으니, 이것은 세 나라가 합하여 두 나라로 된 시대이다. 그 다음에 발해가 멸망하자 압록강 서쪽의 토지는 드디어 거란, 몽골 등의 다른 민족에게 넘어가 우리 단군 조선의 옛 영토의 반은 9백여 년 동안 잃어버렸다. 아, 고려 태조가 우리 나라를 통일하였다고 하며, 또 조선의 개국으로 우리 나라를 다시 통일하였다고 하나, 이것은 반쪽 통일이요, 전체적인 통일은 아니다. ‘독사신론’

탐구 문제

위의 자료를 읽고, 물음에 답해 보자.

1. 위의 두 가지 주장을 비교해 보고, 발해의 역사를 각각 어떻게 보고 있는지 이야기해 보자.

2. ‘가’의 주장에 맞추어 우리 나라 역대 왕조의 변천 과정을 도표로 그려보자.

3. 윗글과 교과서의 내용을 비교하여 발해가 우리 민족의 국가임을 논리적으로 정리해 보자.

단원 종합 수행 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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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삼국 통일’을 어떻게 볼 것인가?

1. 주제

신라의 삼국 통일에 대한 자기 주장 쓰기

2. 목표

⋅ 신라의 삼국 통일이 우리 역사에서 어떠한 의미를 가지는지 논리적으로 정리해 본다.

⋅ 신라의 삼국 통일에 대한 자신의 주장이 무엇에 근거하는지 생각해 본다.

3. 내용

신라의 삼국 통일이 우리 역사에서 가지는 의의를 여러 가지 입장과 각도에서 생각하여 자신의 주장을 정리할 수 있어야 한다.

삼국 통일에 대한 일반적인 평가는 긍정적으로 보는 시각과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으로 크게 양분되어 있다.

긍정적인 시각은 삼국 통일이 한민족 공동체와 단일한 민족 문화 기반을 형성하는 우리 역사상의 대사건이었다는 것이다. 그에 따라 통일의 원동력으로서 화랑도, 김춘추의 외교력, 김유신의 역량 등을 크게 부각시킨다.

반면, 부정적인 시각은 다른 민족인 당을 끌어들여 민족 간의 전쟁을 촉발한 대가로 한민족의 활동 영역 축소와 주민 감소를 가져왔다는 것이다. 즉, 대동강 이남의 통일이라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고구려가 통일했다면 만주가 우리 땅이었을텐데…….’라는 회고적인 시각도 들어 있다.

어느 쪽이든 당시 상황보다는 현재의 시각으로 평가한다는 측면도 있다. 따라서, 여러 자료와 학자들의 견해 등을 바탕으로 7세기 후반에 한반도에서 전개되었던 역사의 민족사적 의의를 보다 깊이 있게 따져 보는 것이 중요하다.

4. 유의 사항

[1] 신라가 당과 손잡은 것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2] 백제와 고구려가 멸망한 후 신라와 당의 대결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3] 통일 후 신라와 발해의 관계는 어떠하였는가?

[4] 오늘날의 관점에서 이 시기의 역사를 평가하는 것은 별 문제가 없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