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국사(상) (6차 교육과정)/Ⅷ. 사림 세력의 집권

사림 세력의 집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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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이 건국된 지 100여 년이 지나면서 집권 세력의 내부에 변화가 나타났다. 사림 세력이 등장하면서 훈구 세력과의 다툼으로 사화가 일어난 것이다. 그 후, 사림들의 활동으로 주자가례에 의한 유교적 질서가 향촌 사회에까지 자리잡혀 갔다.

사림 세력이 정계에서 주도권을 장악한 이후에는 사림 내부에서 분열이 일어나 붕당 정치가 시작되었다. 이것은 정치를 활성화시키기도 하였으나, 사회 분열의 폐단을 낳기도 하였다.

한편, 16세기 이후의 조선 사회는 농업 및 상공업이 점차 발달하였으나, 왜란과 호란 등 잇따른 외침으로 큰 타격을 입게 되었다.

1. 사림의 진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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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습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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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림은 15세기 말 성종 때부터 정치 무대에 등장하기 시작하여 그 세력이 점차 커져서 홍문관, 사헌부, 사간원 등의 언관직을 장악하고, 훈구 세력의 횡포를 비판하였다.

이에, 훈구 세력은 사화를 거듭 일으켜 정치적으로 사림에게 타격을 주었다. 그러나 사림은 향촌에서 서원과 향약을 기반으로 세력을 키워 가면서 학문을 연구하고 후진 양성에도 힘을 기울였다.

이로써 조선의 성리학이 크게 융성하였는데, 그 후 조선의 성리학은 주리론, 주기론의 두 계통으로 나누어졌다. 한편, 사림은 유교적 질서의 확립을 위해 예학과 보학을 중요시하였다.

학습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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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15세기 말에 정치 세력으로 등장한 사림의 주장은 무엇인가?
  2. 사림은 조선 시대의 정치, 문화에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가?
  3. 조선 시대 성리학의 특징은 무엇이고, 대표적인 학자는 누구인가?
  4. 조선 시대의 유교적 사회 생활에서 중요시된 학문은 무엇인가?

사림의 정계 진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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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세기 말 성종 때에는 조선 왕조의 새로운 정치 세력이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이들을 흔히 사림이라고 한다. 이들 사림은 본래 길재의 학풍을 이은 영남 지방 출신들로 처음에는 향촌에서 학문 연구와 후진 양성에 노력하였다. 그러나 김종직이 중앙으로 진출하면서부터 영남 사림들이 하나의 정치 세력을 형성하여 갔다.

이들 사림은, 정치적으로는 언론과 학문을 중요시하는 왕도 정치를, 경제적으로는 지주 전호제를, 사회적으로는 향약과 사창제를 실시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부국 강병보다는 의리와 도덕을 중요시하는 사회의 건설을 표방하였다.

사림은 훈구 세력과 대립하였다. 훈구 세력은 조선의 건국과 세조의 집권에 협력한 공로로 막대한 토지와 많은 노비를 소유하고 권세를 부렸다. 이러한 훈구 세력에 대하여, 주요 언관직을 장악한 사림 세력은 그 시정을 요구하면서 공격하였다. 이에 두 세력은 날카롭게 대립해 갔다. 마침 이 시기에 사림을 옹호하던 성종이 죽고 연산군이 즉위하자, 훈구 세력의 사림에 대한 반감이 폭발하여 사화가 일어났다. 이 때, 사림들은 많은 피해를 입었지만, 다시 힘을 길러 중앙 정치 무대에 등장하였다.

특히, 중종 때 조광조 등은 의욕적으로 사림의 정치 이상을 실현시키고자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네 차례의 사화로 사림은 그 때마다 큰 타격을 받았지만, 완전히 몰락한 것은 아니었다. 사림은 향촌에서 서원과 향약을 기반으로 하여 계속 성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사림은 16세기 후반에 이르러 정치의 주도권을 잡았다.

성리학의 발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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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세기 말 이후, 사림들은 정계 진출을 꾀하면서 한편으로는 향촌에서 학문 연구와 후진 양성에 노력하였다. 조선의 성리학이 크게 발달한 것은 사림들이 학문에 힘쓴 결과였다.

조선의 성리학은 크게 주리론과 주기론의 두 계통으로 나뉘어 발달하였다. 주리론은 도덕적 원리를 중시하는 학설이고, 주기론은 경험적 세계를 중시하는 학설이었다. 주리론은 이언적에서 시작하여 이황이 대성하였고, 주기론은 서경덕이 처음 주장하고 이이가 이를 크게 발전시켰다.

이황은 주로 고향에서 은거 생활을 하면서 학문으로 여생을 마쳤는데, 주자의 학설에 충실하였기 때문에 흔히 ‘동방의 주자’라고 불렸다. 한편, 이이는 정치, 경제, 국방 등 현실 문제에도 많은 관심을 가지고 개혁을 주장하면서 정치에도 참여하였다.

예학⋅보학의 발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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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에는 사회 생활에서 유교적 예절이 존중되었다. 그리하여 예학과 보학이 발달하였다.

예학은 상장 제례에 관하여 연구하는 학문이다. 예학의 발달로 예의범절이 중요시되었다. 양반은 주자가례에 의하여 집 안에 가묘를 세우고 조상에 제사를 지냈다.

보학은 가족과 친족의 혈통 관계를 다루는 학문이다. 족보를 암기하는 것은 양반이 갖추어야 할 필수적인 교양이었다. 따라서, 양반들은 친족의 역사를 모르는 것을 큰 수치로 여겼다.

한편, 나라에서는 국가에 충성을 바친 충신, 부모에게 효도를 극진히 한 효자, 그리고 지아비에게 정절을 지킨 열녀 등을 찾아내어 이를 표창하고, 그 숭고한 뜻을 기렸다.

도움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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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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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보는 동족의 계통을 기록한 역사로서 이를 통하여 시조로부터 족보 편찬 당시까지의 자손의 계보를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족보는 조상을 숭배하고, 가계를 계승하며, 동족의 단결을 강화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우리 나라에서는 고려 시대부터 족보가 등장하였으나, 한 동족 또는 한 분파 전체를 포함하는 족보는 15세기에 이르러 비로소 출현하였다. 우리 나라 최초의 족보는 1423년(세종 5)에 간행된 문화 유씨의 영락보이며, 현재 남아 있는 가장 오래 된 족보는 1476년에 발간된 안동 권씨 세보로 알려져 있다.

족보는 한 성씨의 역사와 가계의 연속성을 나타내는 기록이므로, 이를 통해 자기 조상의 업적을 기리고, 동족 간의 협동과 상호 부조를 배우며, 나아가 후손들을 교화시키는 구실도 하였다. 그러나 과거의 조상을 미화하거나 없는 조상을 일부러 만들어 넣는 등의 폐해도 없지 않았다.

학습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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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사림은 언론과 학문을 존중하고, 지주 전호제의 필요성을 강조하였으며, 향촌 사회의 안정과 도덕 정치의 실시를 주장하였다.
  2. 사림은 훈구 세력과 대립하여 사화를 겪었으나, 서원과 향약을 기반으로 그 세력을 키웠으며, 성리학의 발달에 이바지하였다.
  3. 조선의 성리학은 주리론과 주기론의 두 계통으로 발달하였고, 이황과 이이는 각각 이를 크게 발전시켰다.
  4. 상장 제례에 관한 예학과 친족의 혈통에 관한 보학은 양반의 사회 생활에서 필수적 교양이었다.

2. 붕당의 성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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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습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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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림들은 몇 차례의 사화로 큰 타격을 입었으나, 향촌으로 내려가 서원과 향약을 중심으로 지방의 농민들을 지배하고, 나아가 자신들의 세력 기반을 확장하여 갔다.

서원은 지방에서 학문 연구의 중심 역할을 하였고, 향약은 향촌의 자치 규약으로서, 사림들의 정치적, 사회적 기반이었다. 그리고 사림들이 집권한 16세기 후반부터 붕당이 형성되어 정치적 주도권 싸움이 일어나게 되었다.

붕당의 성립은 정치를 활성화시키고 사림들의 정치 참여의 기회를 확대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뒤에는 붕당 간의 지나친 대립으로 폐단이 나타나기도 하였다.

학습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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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조선 시대의 서원은 어떠한 역할을 하였는가?
  2. 향약에서 내세운 실천 덕목은 무엇인가?
  3. 붕당 정치는 조선 사회에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가?

서원의 설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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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 정계에 진출하여 훈구 세력과 대립하였던 사림 세력은 몇 차례의 사화로 큰 타격을 입었다. 그러나 사림은 향촌으로 내려가 서원과 향약을 중심으로 다시 그 세력을 확장해 갔다.

서원은 옛 학자를 받들어 제사 지내고, 그 덕을 따르고자 세운 것으로, 이 곳에서는 지방 선비들이 모여 독서와 학문 연구에 힘썼다. 또, 지방 선비들은 서원을 중심으로 후진을 교육하여 그들의 학통을 이어 나갔다.

서원은, 중종 때 주세붕이 세운 백운동 서원이 그 시작이었다. 그 후 이황이 나라에 건의하여 국왕 친필의 소수 서원이라는 현판을 하사받았다. 이후 여러 곳에 사액 서원이 생겨나 지방 문화의 발전에 이바지하였다.

이처럼, 서원이 성리학의 전파와 지방 문화를 발달시키는 데 크게 공헌하게 되자, 국가에서는 관심을 가지고 서원의 이름을 지어 주거나 서적, 토지, 노비 등을 지급하여 육성하였다. 그리하여 지방 각지에는 많은 서원이 설립되었다.

향약의 보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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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원과 함께 지방에서 사림 세력의 지위를 굳혀준 것은 향약이었다.

원래 향촌에서는 예부터 마을 단위로 공동체를 이루어, 재난이나 어려움이 있을 때에는 서로 단합하여 도와 주고, 좋은 일은 서로 권하는 풍속이 전해 내려오고 있었다. 이와 같은 전통 위에, 유교에서 꼭 지켜야 할 윤리를 가미하여 향촌 교화를 목적으로 만든 자치적 규약이 향약이었다.

처음에는 중국 향약의 영향을 받기도 했으나, 뒤에는 우리 나라의 실정에 맞게 고쳐서 실시되었다. 향약에서는 좋은 일은 서로 권하고, 과실은 서로 꾸짖으며, 예의와 풍속을 서로 나누고, 재난과 어려움은 서로 도와 주는 것을 강조하였다. 이와 같은 향약은 중종 때에 실시하려 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다가, 16세기 후반에 이르러 이황과 이이 등의 노력으로 전국적으로 보급되었다.

붕당의 성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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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 후반에는 사림 내부에서 붕당이 형성되고, 정치적 주도권을 잡으려는 싸움이 일어났다. 정치에 참여하려는 양반의 수는 점차 늘어나고 정부의 관직 수는 한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자연히 벼슬 자리를 놓고 치열한 경쟁과 반목, 대립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붕당은 인사권을 행사할 수 있는 이조 전랑의 자리를 놓고 사림이 동인과 서인으로 크게 나누어지면서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붕당은 처음에는 합리적으로 정책을 내세우고 그들의 입장을 분명하게 밝히면서 정치를 건전하게 이끌고자 하여 그 폐단이 별로 크지 않았다. 그러나 정치 기강이 문란해지고 왕권이 약화되면서 붕당의 대립은 더욱 심해져 갔다.

학습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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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서원은 지방의 사림이 세운 학교로서 학문 연구에 이바지하였고, 향약과 함께 사림의 세력 기반이 되었다.
  2. 향약은 향촌의 자치적 규약으로서, 네 가지 덕목은, 좋은 일은 서로 권하고, 잘못은 서로 꾸짖으며, 예의와 풍속을 서로 나누고, 재난과 어려움은 서로 도와 준다는 등의 내용이었다.
  3. 붕당 정치는 처음에는 정치의 활성화에 이바지하였으나, 뒤에는 붕당 간의 대립이 심해져 큰 폐해를 끼치게 되었다.

3. 왜란과 호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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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습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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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 말, 중국에서는 여진족의 통합 움직임이 활발하여 주위의 다른 나라들을 긴장시키고 있었으며, 일본에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하여 통일 국가가 성립되었다.

마침내 1592년에 왜군이 조선을 침략하여 조선은 전란에 빠져들었다. 그러나 조선 수군의 승리와 전국 각 지방에서 일어난 의병의 활약으로, 7년 만에 왜군을 이 땅에서 몰아 낼 수 있었다.

왜란의 상처가 미처 아물기도 전에 북쪽으로부터 여진족의 침략을 받게 되었다. 왜란과 호란은 조선뿐만 아니라 동아시아의 정세를 크게 변화시켰다.

학습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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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조선이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던 원인은 무엇인가?
  2. 광해군과 인조의 외교 정책은 어떠한 차이점이 있었는가?
  3. 왜란과 호란이 우리 민족에게 준 역사적 교훈은 무엇인가?

임진왜란의 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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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 말, 조선은 양반 사회의 분열로 사회적 혼란이 심해지고 국력도 약화되어 갔다.

이 때, 일본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하여, 100여 년 동안 계속되어 온 혼란이 수습되고 통일 국가를 이루었다. 국내 통일에 성공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부하 장군들의 관심을 해외로 쏠리게 함으로써 국내의 불평 세력을 무마하고, 아울러 그의 대륙에 대한 침략적 야욕을 펴고자 조선을 침략하였다. 이것이 임진왜란이다(1592).

부산진과 동래성에서는 상륙하는 왜군을 맞아 정발과 송상현이 힘껏 싸웠으나 끝내 방어에 실패하였고, 얼마 안 가서 충주의 방어선도 무너져 버렸다. 미처 전쟁 준비 태세도 갖추지 못하고 있던 조선으로서는 조총으로 잘 훈련된 왜군을 막을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한양이 함락되고, 왕은 의주까지 피난길을 떠나야 하였다. 왜군은 평양과 함경도 지방에까지 계속 북상하여 한반도 전역을 그들의 손아귀에 넣으려고 하였다.

수군의 활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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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군은 육지에서의 참패와 달리, 해전에서는 도처에서 왜군을 섬멸하였다.

당시 왜군의 작전은, 북상하는 육군을 지원하기 위하여 수군을 남해와 서해로 북상시켜서 전쟁 물자를 조달하고 육군과 합세하여 공격하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일본 수군은 경상도 해안을 약탈하면서 전라도 해안으로 접근하여 왔다.

당시 전라도의 해안 경비를 맡은 이는 이순신이었다. 그는 전쟁 1년 전에 부임하여 장차 있을지도 모를 왜군의 침입에 대비하여 거북선을 만들고, 전함과 무기를 정비하며, 수군을 훈련시키고 군량을 저장하는 등 사전에 만전을 기하였다.

이와 같은 준비를 갖춘 이순신은 왜의 함대를 맞아 남해안 각처에서 이를 격파하였다. 조선 수군은 옥포 해전에서 첫 승리를 거둔 후, 이어 당포, 당항포, 한산도, 부산포 등에서 계속 큰 전과를 올렸다. 특히, 한산도 대첩은 조선 수군이 거둔 최대의 승리로서, 임진왜란 당시 큰 전과를 올린 3대첩의 하나로 꼽히고 있다.

이와 같이 이순신의 활약으로 조선군은 제해권을 장악함으로써 왜군의 본국 연락로를 차단하고, 전라도와 서해안을 왜의 침입으로부터 보호할 수 있었다.

의병의 활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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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전에서 계속 승리를 거두고 있을 때 육지에서도 전세가 달라져 갔다. 전국 각 지방에서는 유생, 농민, 승려 등이 의병을 조직하여 도처에서 왜군을 무찌르고 괴롭혔다. 의병은 자발적으로 일어나 자기의 가족과 재산, 그리고 마을을 지키는 한편, 국가를 수호하기 위하여 왜군과 맞서 싸웠던 것이다.

의병은 자기 고장의 지리에 밝았으므로 지형을 잘 이용할 줄 알았을 뿐만 아니라, 자연 조건에 알맞은 무기와 전술을 활용하였기 때문에 적은 희생으로 적에게 큰 피해를 주었다.

당시 대표적인 의병장으로는 곽재우, 조헌, 고경명, 휴정, 유정 등을 꼽을 수 있다.

왜란의 극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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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병의 활동이 전국적으로 활발해지고, 수군의 계속적인 승리로 전세가 조선측에 유리해져 가고 있을 때, 명나라의 군대까지 합세하여 반격을 가하였다. 이 때, 김시민은 진주성에서, 권율은 행주 산성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다. 이에 왜군은 조선군에 대한 공격을 늦추고, 전열을 가다듬기 위하여 휴전을 제의하였다

그러나 화의의 교섭이 결렬되면서 왜군이 다시 침입해 왔다. 이에 한때 물러났다가 재등용된 이순신은 왜군을 명량으로 유인하여 큰 타격을 입히고 승리를 거두었다. 또, 육지에서도 전세를 가다듬어 왜군의 북상을 저지시키는 등 큰 전과를 올렸다. 이에 왜군은 전의를 잃고 도망가기에 바빴는데,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의 수군은 도망치는 왜의 선박 수백 척을 노량 앞바다에서 크게 격파하여 최후의 승리를 장식하였다.

왜란의 영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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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년간의 전란으로 조선이 입은 피해는 컸다. 인구가 크게 감소하고 국토가 심하게 황폐해졌다. 경지 면적이 종전의 3분의 1이하로 줄게 되어 식량 문제가 심각하게 되었고, 여기에 흉년과 질병까지 겹쳐서 농민들의 참상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조세의 징수에 활용되던 호구 대장과 토지 대장이 불타 버려 나라의 재정도 어렵게 되었다.

한편, 전란 후 사회적으로도 많은 변화가 나타났다. 가장 큰 변화로는 신분 제도가 동요되기 시작한 것이다. 노비 문서가 불타 버렸고, 납속책의 시행으로 관직을 팔고 사는 것이 인정되어 상민이 양반이 되기도 하고, 노비가 상민으로 상승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그 밖에 문화재의 피해도 컸다. 경복궁이 불타 버리고, 실록을 보관한 사고가 소실되었다.

일본은 조선으로부터 활자, 서적, 그림 등의 문화재를 약탈해 갔고, 또 도자기 기술자와 학자들을 납치해 갔다. 이는 일본의 문화 발전에 크게 도움을 주었다.

임진왜란은 또 북쪽의 여진족에게도 영향을 끼치게 하였으니, 조선과 명이 전쟁에 시달리는 동안 여진족은 힘을 비축하여 급속히 성장하였다.

통신사의 파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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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후, 일본의 도쿠가와 막부는 조선의 선진 문화를 받아들이고자, 쓰시마 도주를 통하여 교섭을 허락해 줄 것을 조선에 간청하여 왔다. 조선은 이를 수락하고, 제한된 범위 안에서 다시 통교할 것을 허용함으로써 양국 간의 국교가 재개되었다(1609).

부산포에 왜관이 다시 설치되고 이 곳에서 일본인들은 쌀, 무명, 인삼 등을 수입해 갔다. 뿐만 아니라, 일본은 정치적 목적으로 조선에 사절을 파견해 줄 것을 요구해 왔고, 조선에서는 이 요구에 응하여 10여 차례에 걸쳐서 통신사를 일본에 파견하였다.

통신사는 그 일행이 한 번에 400명 정도로 편성되었는데, 학자, 예술인, 기술자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따라서, 통신사는 외교 사절로서 뿐만 아니라 우리의 선진 학문과 기술을 전해 주는 문화 사절의 구실도 함께 하여 일본의 문화 발전에 크게 도움을 주었다.

병자호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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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란 후, 조선 왕조에서는 선조의 뒤를 이어 광해군이 즉위하였다. 광해군은 전후의 복구 사업에 노력하는 한편, 대외 정책에서는 명과 여진족에 대하여 중립 외교 정책을 썼다. 그것은, 중국 대륙의 명이 점차 쇠퇴해지고 만주 지방의 여진족이 크게 강성해지는 상황에서, 그들 간의 싸움에 말려들지 않으려 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인조 반정에 의하여 광해군이 물러나고 인조가 즉위하면서부터는 외교 정책의 방향이 바뀌었다. 인조는 명에 대하여 친선 정책을 폈으나, 여진족이 세운 후금을 배척하여 그들을 자극하였다. 이에, 후금 군대가 압록강을 건너 황해도 지역까지 침략하였다가 곧 물러갔는데, 이를 정묘호란이라 한다(1627).

그 후 후금은 세력이 더욱 커지면서 나라 이름을 청으로 고치고, 조선 왕조에 대하여 군신의 예를 요구하면서 다시 침입해 와 한양을 점령하였다.

이에 인조는 신하들과 함께 남한산성으로 옮겨 45일간 항전을 폈으나, 끝내 청의 요구를 받아들여 강화를 맺고 말았다. 이 전쟁을 병자호란이라 한다(1636).

북벌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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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은 왜란에 이어 다시 북으로부터 두 차례에 걸친 침략을 받아 큰 피해를 당하게 되자, 청에 대한 적개심이 컸다. 당시 우리 민족은 여진족에 대하여 문화적 우월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반감은 더욱 컸다. 이러한 상황에서 청을 치자는 북벌 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그리하여 효종은 송시열, 이완 등과 함께 남한산성 및 북한산성을 수축하고 군대를 양성하는 등 여러 가지 계획을 세웠으나, 끝내 북벌을 실천에 옮기지 못하고 말았다.

그 후 청이 만주와 중국 본토에서 정치적, 군사적으로 막강한 나라로 성장하고, 문화적으로도 발달하자, 조선 후기에는 그들의 문물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북학 운동이 나타났다.

이에 앞서 청은 러시아의 세력이 흑룡강 부근으로 압박해 오자, 조선에 원병을 요청하였다. 당시 러시아는 동방 침략의 꿈을 가지고 이 방면으로 꾸준히 세력을 펴 오고 있었다.

이에, 조선에서는 잘 훈련된 조총 부대를 두 차례에 걸쳐 출동시켜 큰 전과를 올리고 돌아왔다. 이를 나선 정벌이라고 한다.

도움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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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의 난중일기(亂中日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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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27일……맑고 바람조차 없음.

일찍 아침을 먹고 포구로 나가 쇠사슬 건너매는 것을 감독하며 하루 종일 기둥 세우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거북선에서 대포 쏘는 것도 시험하였다.

4월 11일……계속 흐리다가 늦게야 갬.

군관 남한이 순찰사의 편지와 별록을 가져왔다. 베를 가지고 거북선의 돛을 만들었다.

4월 12일……맑음.

식사를 한 뒤에 배를 타고 거북선에서 지자포와 현자포를 쏘아 보았다. 정오에는 동헌에 나가 활 10순을 쏘았다.

4월 13일……맑음.

동헌에 나가 공무를 본 다음, 활 10순을 쏘았다.

학습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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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임진왜란 때 조선은 관군과 의병 등 온 국민이 힘을 모아 싸움으로써 왜군을 물리칠 수 있었다.
  2. 광해군은 명과 후금에 대하여 중립적인 자세를 취하였으나, 인조는 친명 배금 정책을 폈다.
  3. 왜란과 호란을 극복한 후, 조선 정부는 현실에 대한 반성을 토대로 하여 민생의 안정과 부국 강병의 길을 모색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