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국사(상) (6차 교육과정)/Ⅴ. 귀족 사회의 변천

귀족 사회의 변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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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는 유교를 정치 이념으로 하여 중앙 집권 체제를 정비하고, 새로운 문벌 귀족 사회를 형성하였다. 또, 유교 사상을 바탕으로 한 생활 양식과 가치관을 보급시켜 갔다.

고려 왕조는 관리들의 생활을 뒷받침하기 위하여 전시과 제도를 마련하였다. 전시과에 의하여 관리들에게는 농토와 임야를 지급하였으며, 따로 녹봉도 주었다.

국가적 신앙으로 불교가 신봉되어 불교 문화가 융성하였고, 공예 미술을 중심으로 한 귀족 문화가 발달하였다.

그러나 귀족 사회의 폐단으로 이자겸의 난,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이 일어났으며, 마침내 무신 정변으로 고려 전기의 문벌 귀족 사회는 무너지게 되었다.

1. 문벌 귀족 사회의 전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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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습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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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는 성종 때에 유교를 정치 이념으로 내세우고 여러 가지 제도를 정비하여 중앙 집권 체제의 기반을 다졌다. 정치⋅군사 조직을 비롯하여 고등 교육 기관으로서 국자감을 정비하고, 과거 제도를 정착시켜 유교적 지식과 윤리관을 지닌 관리를 등용하였다.

국가는 관리들에 대한 경제적 뒷받침을 위하여 전시과를 정비하고 농토와 임야를 지급하였다. 또, 농민의 생활 안정을 위하여 여러 가지 사회 시설을 마련하였다. 그리고 정치와 사회를 유지하기 위하여 법률을 제정하고, 유교 윤리를 규범화하였다.

고려 시대에는 불교와 관련된 여러 가지 행사가 많았으며, 유교나 토속 신앙과 결부된 각종 의식도 널리 행하여졌다.

학습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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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고려의 정치 제도가 지니는 성격은 무엇이며, 어떠한 세력을 중심으로 운영되었는가?
  2. 고려의 문벌 귀족 세력을 강화시켜 주는 구실을 한 두 가지 제도는 무엇인가?
  3. 고려 시대의 농민 생활은 어떠하였는가?
  4. 고려 사회에서 행해졌던 행사와 풍속에는 어떠한 것들이 있는가?

귀족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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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에서는 국가 체제가 정비되면서 새로운 지배층이 형성되어 갔다. 이들은 지방 호족 출신으로 중앙 관료가 된 인물들과 신라 6두품 계통의 유학자들이었다. 처음에는 호족 출신이 중앙 관리로 많이 진출하였으나, 점차 신라 6두품 계통에 속하는 유학자들이 정치를 주도하였다. 이에 따라 호족들은 종래의 독립적 지위를 잃고 지방에서 향리가 되거나 중앙으로 진출하여 관리가 되었다.

특히, 성종의 숭유 정책에 따라 6두품 계통의 유학자들이 정치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함으로써, 고려는 귀족 정치에 바탕을 둔 유교 정치를 실현할 수 있게 되었다.

이들은 성종 이후 점차 그 기반을 닦아 새로운 지배 계층으로 성장하였다. 그들은 자신뿐만 아니라 자손들도 대대로 정치에 참여하여, 이른바 문벌 귀족 사회를 이루게 되었다.

정치 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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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에서 중앙 집권적 정치 제도를 정비한 것은 성종 때였다. 성종은 최승로의 건의를 받아들여, 유교사상을 고려의 정치를 이끄는 근본 이념으로 삼았다.

중앙 정치 기구의 중심이 된 것은 3성과 6부였다. 3성은 중서성(내사성), 문하성, 상서성이지만, 실제로는 중서 문하성과 상서성의 2성으로 운영되었다. 중서 문하성은 정책을 심의, 결정했을 뿐만 아니라 국정 전반을 관장하였다. 상서성 밑에는 이, 병, 호, 형, 예, 공의 6부를 두어 실제 행정을 맡게 하였다.

이 밖에 중추원, 어사대, 삼사 등의 관청이 있었다. 중추원은 왕명의 전달과 군사 기밀을 맡고 궁궐 안의 숙위를 담당하였다. 어사대는 감찰과 풍기 단속을 담당하고, 삼사는 회계를 맡았다.

한편, 도병마사라는 회의 기구를 두었는데, 여기에서는 중서 문하성과 중추원의 고관들이 모여 국방 문제와 같은 국가의 중요한 정책을 의논하였다.

지방 행정은 처음에는 호족들의 자치에 맡겼으나, 성종 때에 12목이 설치되고 지방관이 파견되면서부터 행정 조직이 정비되기 시작하였다. 현종 때에는 3경, 4도호부, 8목을 두었으나, 그 뒤에 전국을 5도와 양 계로 나누었다. 도에는 안찰사가 파견되고, 그 밑에 주, 군, 현을 두었다. 그리고 군, 현 아래에는 향, 소, 부곡이라는 특수 행정 구역도 있었다.

그러나 모든 군, 현에 관리가 파견된 것은 아니었다. 그 중 중요한 지방에만 지방관이 파견되었으며, 나머지 지역에서는 그 지방의 향리들이 행정을 맡았다. 병마사가 파견된 북방 변경 지대의 양 계는 군사적으로 중요한 행정 구역으로서, 그 밑에는 진을 두었다.

군대는 중앙의 2군 6위와 지방의 주현군으로 편성되었다. 2군은 왕궁을 지키는 임무를 담당하였으며, 6위는 개경과 국경의 방어 임무를 맡았다.

2군 6위의 지휘관인 상장군과 대장군은 중방에서 군사 문제를 논의하였다. 지방의 주현군은 치안 업무와 잡역을 맡았고, 양 계의 상비군은 변경 지역의 방비를 맡았다.

교육과 과거 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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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는 성종 때에 유교 사상을 정치 이념으로 삼고, 이에 따른 교육 제도를 갖추었다. 태조 때에 이미 서경에 학교를 세웠고, 성종 때에는 개경에 있는 국자감을 정비하였다.

국자감에는 유학의 경서와 문예를 가르치는 국자학, 태학, 사문학과, 행정 실무를 가르치는 율학, 서학, 산학 등이 있었다. 한편, 고려는 초기부터 향교를 설치하여 지방 교육에 힘썼다.

문관을 뽑는 과거 시험에는 시문과 정책을 시험하는 제술과와 유교 경서를 시험하는 명경과가 있었는데, 이는 유교적 지식과 윤리관을 가진 사람을 관리로 등용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 밖에 기술관을 뽑는 잡과, 승직자를 뽑기 위한 승과가 있었다.

과거 이외에 관리를 등용하는 방법으로 음서 제도가 있었다. 음서 제도는 고관의 자손이 과거를 치르지 않고 관리로 채용되는 제도로서, 고려 시대에 널리 시행되었다. 이 제도는 고려 문벌 귀족 세력을 강화시켜 주는 역할을 하였다.

토지 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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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시대의 토지 제도는 전시과를 기본으로 하였다. 경종 때에 처음 마련된 전시과는 목종 때에 개정되고 문종 때에 완성되었다. 전시과는 관리의 지위를 18등급으로 나누고, 그 등급에 따라 일정한 농토와 임야를 나누어 주는 제도였다.

관리들이 국가로부터 나누어 받은 토지는 농민들에 의해 경작되었는데, 관리들은 이들 농민에게서 수확의 일부를 조로 받았다. 이러한 고려의 토지 제도는, 귀족과 관리들이 조세와 특산물은 물론 노동력까지 부담시켰던 신라의 녹읍 제도에 비하면 귀족들의 특권을 크게 약화시킨 것이었다.

그리고 과전 외에 고급 관리에게 주는 공음전이 있었는데, 이 토지는 자손에게 상속할 수 있었다. 공음전은 조상의 음덕으로 관리로 임용되는 음서제와 함께 고려의 문벌 귀족 세력을 강화시켜 준 특징적인 제도였다. 이 밖에, 왕실의 살림을 위한 내장전, 관청의 경비를 마련하기 위한 공해전이 있었으며, 사원에 속한 사원전도 있었다.

한편, 전시과와 별개로 일반 농민의 토지인 민전이 있었다. 민전은 농민의 사유지로서, 민전의 소유자인 농민은 수확량의 10분의 1을 조세로 나라에 바쳤다. 민전은 전시과와 더불어 고려 시대 토지 제도의 중심을 이루었다.

법률 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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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률 제도는 당률을 바탕으로 성종 때부터 정비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고려의 실정에 맞는 독자적인 법률이 시행되기도 하였고, 전문적인 법관도 양성되었다. 형벌의 종류에는 태, 장, 도, 유, 사 등이 있었다.

특히, 유교의 윤리를 존중하여 왕실에 대한 모반죄와 부모에 대한 불효죄는 엄중히 다스렸으며, 관리들에게는 부모를 위한 여러 가지 휴가제가 마련되어 있었다. 그러나 일상 생활에 관계되는 것은 대개 관습법을 따랐다.

신분 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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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최고 신분은 왕족과 귀족이었다. 귀족이 되면, 음서의 혜택이나 공음전의 급여 등 여러 가지 특권을 누렸다. 또, 좋은 가문과 혼인을 맺어 그들의 신분을 더욱 높이려고 하였다. 특히, 귀족들은 왕실과 혼인을 함으로써 권력을 독점하여 가문의 세력을 크게 확대하는 경우도 있었다.

귀족 이외에 궁중이나 관청에서 실무를 맡아 보는 남반과 서리, 지방 행정을 맡아 보는 향리와 하급 장교들도 국가로부터 일정한 경제적 대우를 받았다.

평민으로는 농민, 상인, 수공업자 등이 있었는데, 이들 중에서도 국민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농민은 생산에 종사하면서 조세, 공납, 역의 의무를 지고 있었다.

천민으로는 노비, 화척, 재인(광대), 진척(뱃사공), 역정(마부) 등이 있었다. 노비는 관청에 소속된 공노비와 개인에 소속된 사노비가 있었다. 이 밖에, 향⋅소⋅부곡에 사는 사람도 천민으로 취급되었다.

이와 같이, 고려의 신분 제도는 여러 계층으로 나뉘어 있었으나, 경우에 따라 신분이 높아질 수 있는 길이 열려 있었다.

농민의 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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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시대에는 농업 생산량에 비하여 조세, 공납, 역의 부담이 무거웠기 때문에 농민의 생활은 대체로 어려웠다.

사유지인 민전의 경우에는 수확량의 10분의 1을 조세로 부담하고 있었는데, 국가나 타인의 토지를 경작할 때에는 이보다 더 많은 조세를 부담해야만 하였다. 더욱이 관리들이 불법적으로 거두어들이는 경우도 있었을 뿐 아니라, 때로는 권세가들에 의해 토지를 빼앗기는 경우도 많았다.

이에 농민들은 자기의 사유지를 잃고 남의 토지를 경작하는 소작농으로 떨어지거나, 농토에서 떠나 각지로 떠돌아다니는 유민이 되기도 하였다.

상공업과 화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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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에서는 농업이 주된 산업이었지만, 수공업과 상업도 점차로 발달하였다. 수공업품으로는 각종 무기, 장신구, 직물, 종이 및 도자기 등이 있었다.

농업과 수공업의 생산력이 증가함에 따라 상업 활동이 점차 활발해졌으며, 개경을 비롯한 교통의 요지에는 시장과 상점이 생겼다.

상업이 발달함에 따라 화폐도 만들어졌다. 성종 때에는 건원중보라는 철전을 만들어 사용하였고, 숙종 때에는 우리 나라의 지형을 본뜬 은병을 만들어, 이를 활구라 하여 화폐로 사용하였다. 그리고 해동통보, 삼한통보, 동국통보 등이 만들어졌으나, 널리 사용되지는 않았고, 실제에는 곡물이나 베가 교환 수단으로 쓰였다. 이렇게 화폐의 사용이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한 것은, 주로 농업 생산에 의존하는 자급자족적인 경제 구조로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국내의 상업이 성장함에 따라 외국과의 무역도 활발해졌다.

송과의 교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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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건국 당시에 중국은 분열되어 있었으나, 그 후 송에 의해 통일되었다. 이 무렵 북방에서는 거란이 일어나 발해를 멸망시킨 후, 그 힘이 더욱 강성해졌다.

고려는 친송 정책을 펴 나갔으므로, 고려와 송 사이에는 문물의 교류가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이 때 고려의 대송 외교는 송으로부터 발달된 문물을 받아들이는 데에 중점을 두었다.

한편, 송의 고려에 대한 외교는 정치적, 군사적인 데에 목적이 있었다. 즉, 송은 고려의 군사력을 이용하여 거란과 여진을 견제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고려는 중립의 태도를 취하여 이에 휘말려들지 않고, 문화적, 경제적 교류에 치중하여 송의 선진 문화를 받아들이는 데 힘썼다. 이에 따라 고려의 사신, 학생, 승려들이 송에 건너가 발달된 불교, 유학, 예술 등을 배워 왔다.

고려와 송 사이에 교류가 이루어지면서 상인의 내왕도 활발하였다. 이 때 고려의 수출품은 금, 은, 나전 칠기, 화문석 등이었고, 수입품은 비단, 책, 약재, 자기 등이었다.

예성강 입구의 벽란도에는 송나라 상인은 물론 아라비아 상인까지 와서 국제적 무역 항구로 번영을 누렸다. 특히, 아라비아 상인들은 수은, 향료 등의 물자를 들여 와서 고려의 토산품과 바꾸어 갔는데, 그들에 의하여 고려(Corea)라는 이름이 서양에 알려지게 되었다.

사회 시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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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민의 생산에 크게 의존하고 있던 고려 사회는, 이들의 생활을 안정시키기 위하여 의창, 상평창, 제위보 등의 사회 시설을 마련하였다.

의창에서는 곡식을 비축해 두었다가 흉년이나 춘궁기에 가난한 사람에게 빌려 주었고, 상평창에서는 곡식이 쌀 때에 사 두었다가 비쌀 때에 팔아 물가를 조절하였다.

보는 일정한 기금을 마련하여 그 이자로 공공 사업을 하는 일종의 재단으로서, 학보, 경보, 팔관보, 제위보 등이 있었다. 특히, 제위보는 빈민 구제를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한편, 빈민을 위한 의료 시설로서 개경에 동⋅서 대비원을 설치하여 치료와 구휼을 담당하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혜민국을 설치하여 빈민에게 약을 나누어 주는 일을 하도록 하였다.

신앙과 의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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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시대에는 불교를 국가적으로 신봉하여 자연히 불교에 관한 행사가 많았다. 그 중에서 연등회와 팔관회가 대표적이었다. 특히, 팔관회는 토속 신앙과 불교가 융합된 것으로, 연등회와 같이 국가와 왕실의 태평을 비는 불교 의식이었다.

한편, 유교를 정치 사상으로 한 고려 사회에서는 부모에 대한 제사나 상례 등을 중요시하였다.

농사에 힘쓰기 위한 의식도 행해졌다. 즉, 왕이 정월에 풍년을 기원하는 예를 행하고, 친히 논을 갈아 농사의 모범을 보이기도 하였으며, 사직단을 세워 신에게 제사를 지내기도 하였다. 그리고 민간에서는 5월 단오에 격구나 그네, 씨름 등을 즐겼고, 6월 유두에는 동쪽으로 흐르는 냇물에 머리를 감았다. 8월 한가위도 큰 명절이었다.

학습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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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고려는 유교에 바탕을 둔 중앙 집권 정치 제도를 갖추었으며, 문벌 귀족들의 합의에 의하여 정치를 운영하였다.
  2. 음서와 공음전은 고려의 문벌 귀족 세력을 강화시켜 준 특징적인 제도였다.
  3. 농민은 민전이나 귀족의 토지 등을 경작하였는데, 조세, 공납, 역의 부담이 무거워 생활이 어려웠다.
  4. 고려 시대에는 연등회, 팔관회 등의 불교 행사와 더불어 유교 의식이 행해졌으며, 여러 가지 토속적인 풍속도 있었다.

2. 귀족 문화의 발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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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습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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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말에 선종이 널리 보급되면서 고려 초의 불교계는 교종과 선종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의천은 교종과 선종을 조화시키려는 통합 운동을 일으켰다. 한편, 불교가 발전함에 따라 불교 사상의 정리를 위해 대장경의 조판이 여러 차례 이루어졌다.

유교는 국가의 정치 이념으로 확립되어 교육과 과거에서도 중시되었다. 이 밖에 풍수 지리설과 도참설도 정치와 사회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문학에서는 향가가 쇠퇴하고 한문학이 발전하였다. 역사서로는 김부식이 쓴 삼국사기가 유명하다. 귀족 사회가 발전하면서 귀족들의 생활과 관련된 예술 분야가 특히 발달하였다.

학습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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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려 전기에 불교가 융성하게 된 이유는 무엇이며, 불교의 통합은 어떻게 이루어졌는가?

2. 유교, 불교, 풍수 도참 사상은 고려 사회에 각각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가?

3. 고려 전기 문화의 특색은 무엇인가?

불교의 발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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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는 고려 초부터 국가의 보호를 받으면서 크게 발달하였다. 태조 이래 개경에는 10개의 큰 사원이 세워지고, 그 후 문종 때에는 2800칸이 넘는 흥왕사가 건립되어 불교 왕국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었다.

과거 제도에서는 관리를 선발하는 문과와 함께 승려들에게 법계를 주는 승과가 마련되었다. 명망이 높은 승려는 국사나 왕사의 높은 지위에 올라 국왕의 고문 역할을 하였다. 그리하여 고려 시대에는 일반 민중은 물론 왕족이나 귀족의 자제들도 승려가 되고자 하였다.

고려 초기의 불교계는 교종과 선종이 대립 상태에 있었다. 광종은 왕권의 안정을 위하여 여러 가지 정책을 추진하면서, 분열된 불교 교단을 통합하려 하였다. 불교계의 통합 운동은 대각국사 의천에 이르러서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었다.

문종의 아들인 의천은 일찍이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는데, 불교의 여러 경전은 물론 유교의 경전까지도 정통할 정도였다. 그는 송나라에 가서 불교를 연구하고 돌아와, 먼저 교종의 여러 종파를 종합하고, 또 해동 천태종을 개창하여 이를 중심으로 교종과 대립하고 있던 선종을 융합시키려 하였다.

대장경의 조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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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가 융성함에 따라 대장경이 여러 차례 조판되었다. 대장경은 불교 경전을 총칭하는 말인데, 불교를 숭상한 고려는 국가적인 사업으로 대장경의 조판 사업을 추진하였다.

현종 때에 거란의 침입을 받게 되자, 부처의 힘을 빌려 적을 막고자 하는 염원에서 대장경을 만들었는데, 이를 초조 대장경이라 한다. 그 후, 의천이 송, 요, 일본 등지에서 구해 온 불교 서적들을 모아 초조 대장경을 보완하여 속장경을 조판하였다. 이들 판목은 대구 부인사에 보존되어 있었으나, 몽고의 침입으로 불타 버렸다. 그러나 그 판본의 일부가 남아 있어 그 모습을 짐작하게 한다.

유학의 발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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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를 정치 이념으로 삼은 것은 성종 때의 일이었다. 당시에 최승로는, 불교는 내세의 복을 비는 종교이기 때문에 현세를 다스리기 위해서는 유교의 가르침에 따라 정치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따라 유교는 정치 사상으로 채택되고, 학문적으로도 크게 발달하였다.

유학이 발달함에 따라 관학은 물론 사학의 설립도 활발하였다. 당시의 사립 학교로는 해동 공자라고 불린 최충이 세운 문헌공도를 비롯하여 12개의 학교가 있어서 이를 12도라 불렀다. 사학은 나라에서 세운 국자감보다 수준 높은 교육을 하였다.

사학이 발달하자 상대적으로 국자감이 쇠퇴하였다. 이에 예종 때에는 국자감을 육성하기 위하여 7재라는 전문 강좌를 두어 관학의 진흥을 꾀하고, 양현고라는 장학 기금도 마련하였다.

한편, 궁궐 안에 청연각과 보문각이라는 학문 연구소를 설치하여 유학의 발전을 촉진시켰다. 국왕은 학자들의 강의를 듣고, 학자들과 학문을 토론하기도 하였다.

풍수 지리설과 도참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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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수 지리설은 산세나 지형이 인간의 길흉 화복에 많은 영향을 끼친다는 사상이다. 이것은 신라 말에 중국으로부터 전래되어, 고려 시대에 와서 크게 유행하였다.

특히, 서경은 풍수 지리설에 의하면 지맥의 근본이 된다고 하여 뒤에 묘청에 의해 서경 천도 운동에 이용되기도 하였다.

한편, 도참 사상도 유행하였는데, 이는 길흉 화복을 예언이나 징조를 통해 알 수 있다는 것으로, 신비적, 미신적 성격이 짙었다. 이것은 풍수 지리설과 결부되어 풍수 도참 사상으로 발전하여, 정치, 사회는 물론 일상 생활에 이르기까지 매우 큰 영향을 끼쳤다. 풍수 도참 사상은 특히 도읍지나 궁궐 터와 같은 중요한 터를 정하는 데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

문학과 역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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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에서는 신라 시대부터 내려오던 향가가 점차 쇠퇴하고, 그 대신 한문학이 크게 발달하였다. 그러나 고려 초기까지는 향가가 이어져서 균여 대사가 지은 향가 11수가 전하고 있다. 한문학이 발달함에 따라 뛰어난 시인, 문장가가 나타났고, 문신 월과법이라 하여 달마다 시를 지어 국왕에게 바치도록 하는 제도도 있었다.

한편, 고려 시대에도 일찍부터 국가에서 역사서를 편찬하였다. 현종 때에 거란의 침입으로 역사 기록이 많이 없어지자, 태조로부터 목종 때까지의 7대에 걸친 왕조 실록을 편찬하였으나, 오늘날 전해지지 않고 있다.

지금까지 전해 오는 가장 오랜 역사서는 인종 때에 김부식이 지은 삼국사기이다. 삼국사기는 유교 사관에 바탕을 두고 쓰여진 역사서로, 후에 나온 삼국유사와 더불어 우리 나라 고대사를 연구하는 데에 중요한 자료이다.

삼국사기는 사대적 성격을 드러내고 있다는 비판도 있으나, 김부식은 이 책의 서문에서 당시 고려의 귀족 관리들이 중국의 역사에는 정통하면서도 우리 나라의 역사에 대해서는 모르고 있는 것을 일깨워 주기 위해서 쓴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예술의 발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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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족 사회가 발전하고 불교가 융성함에 따라 귀족의 취향을 반영한 예술과 불교 예술이 크게 발달하였다.

고려의 예술을 대표하는 것으로는 청자를 들 수 있는데, 이것은 고려 사람들의 예술적 재능과 창의력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 청자의 뛰어난 점은 형태가 지니는 선의 흐름, 아름다운 색깔, 그리고 상감법에 있다.

청자의 형태는 병, 항아리, 주전자, 접시, 필통, 향로 등 다양하였다. 그리고 색깔은 황록색, 황갈색의 것도 있으나, 비색으로 된 것이 가장 아름답다. 무늬는 양각이나 음각으로 새겼으나, 뒤에 이르러서는 상감법을 써서 고려인의 독특한 솜씨를 발휘하였다.

불상으로는 관촉사의 석조 미륵 보살 입상과 부석사의 소조 아미타여래 좌상 등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고려 시대의 불상은 공예 분야와는 달리, 통일 신라 시대에 비하여 예술적 솜씨가 뒤떨어졌다.

석탑으로는 현화사의 7층 석탑과 월정사의 팔각 9층 석탑이 유명하고, 부도로는 정토사의 홍법국사 실상탑과 법천사의 지광국사 현묘탑이 대표적이다.

한편, 고려에서는 일찍부터 궁중에 도화원을 두어 화가를 양성하였다. 인종 때의 이령은 예성강도를 그려 송나라 휘종의 찬사를 받았고, 그의 아들 이광필은 산수화를 잘 그렸다.

글씨로는 유신, 탄연이 특히 능하여 고려 후기의 최우, 신라의 김생과 함께 신품 4현으로 손꼽히고 있다.

도움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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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청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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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청자는 중국 송대의 청자 제작 기술이 전해져 더욱 발전한 것이다. 아무런 장식이 없이 푸른 빛깔을 띤 고려 청자는 식물이나 동물의 모양을 본뜬 것과 중국 옛 청동기의 모양을 본뜬 것 등 모양이 다양하였다.

인종 무렵부터는 점차 고려의 독자적인 기법과 독특한 빛깔의 상감 청자가 개발되었다. 상감 청자에서 사용된 상감 기법은 그릇 바탕에 칼로 무늬를 파내고, 이 음각 무늬에 흰 흙이나 붉은 흙을 메워 유약을 발라 구워 내는 것으로, 불에 구우면 흰 흙은 흰색으로, 붉은 흙은 검은색으로 변색되어 무늬를 더욱 아름답게 하였다.

상감 기법은 이미 예부터 사용되던 것으로, 금속의 표면에 무늬를 파고 은이나 금을 넣어 장식하는 은입사 기법이나 나무 표면을 파내고 그 곳에 자개를 장식하여 옻칠을 하는 나전 칠기 기법 등을 청자에 적용한 것이었다. 이처럼 청자에 무늬를 넣는 상감 기법은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고려의 독창적인 기술이었다. 또, 세계에서 최초로 구리를 주성분으로 하는 안료를 사용하여 자기에 붉은색을 내는 기법도 창안하여 사용하였다.

중국 청자가 색이 진하고 유약이 불투명하여 무거운 느낌을 주는 데 비하여, 고려 청자는 은은하면서도 맑은 비색의 빛깔과 운치가 있는 상감 무늬 등이 그 특색이었다. 고려 청자의 생산지로는 강진, 부안, 송화, 강화 등이 유명하였다.

학습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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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고려 시대의 불교는 국가의 후원을 받아 크게 발전하였고, 의천에 의해 천태종이 성립되어 교⋅선 양종의 통합이 추구되었다.
  2. 고려 시대의 유교는 정치 사상으로 자리잡았고, 불교는 신앙 생활을 주도하였으며, 풍수 도참 사상도 정치⋅사회 생활에 영향을 끼쳤다.
  3. 고려 전기의 문화는 귀족 생활과 불교 신앙을 바탕으로 하여 발전하였다.

3. 귀족 사회의 동요와 무신 정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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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습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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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중기에 와서 문벌 귀족 사회가 변질되면서 여러 가지 문제점이 나타났다. 이로 인하여 이자겸의 난,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이 일어났다. 그리고 문신 중심의 문벌 귀족 사회의 모순이 쌓이는 가운데 마침내 무신 정변이 일어났다.

무신 정변 이후, 무신 상호간의 정권 다툼과 민중의 저항 운동 속에서 최충헌이 권력을 쥐게 되었고, 이후 4대 60여 년에 걸쳐 최씨 무신 정권이 계속되었다.

무신 정권은 몽고 침략에 대항하여 끝까지 항쟁함으로써 우리 민족의 자주성을 지키려 하였다.

학습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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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고려 중기에 이르러서 귀족 사회가 크게 동요한 원인은 무엇인가?
  2. 귀족 사회를 크게 동요시킨 중요 사건은 무엇인가?
  3. 최씨 무신 정권은 그 권력 기반을 어떻게 강화하였는가?

문벌 귀족 사회의 모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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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문벌 귀족들은 중서 문하성과 중추원을 중심으로 고위 관직을 차지하여 권력을 독점하였다. 그리고 전시과에 따른 과전은 물론, 공음전 등 막대한 농토와 임야를 차지하고 현물로 녹봉까지 받아 경제적으로 부를 누렸으며, 사회적으로도 여러 가지 특권을 누렸다.

문벌 귀족의 자제들은 과거에 합격하거나 음서에 의하여 관리로 임명될 수 있는 특권을 가지고 있었다. 음서제는 공음전과 더불어 고려 귀족 사회를 지탱해 주는 중요한 기반이었다. 고려의 대표적인 귀족 가문에는 경원 이씨, 해주 최씨, 경주 김씨 등이 있었다. 이들 문벌 귀족들은 자신들의 특권을 유지하기 위하여 배타적이고 보수적이었다. 문벌 귀족들은 서로 간에 또는 왕실과 혼인하여 자신들의 문벌을 높이고 세력을 키웠다. 그들이 권력을 독점하면서, 새로이 진출하는 세력들은 고위 관직에 나아가기가 어려웠다.

이자겸의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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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벌 귀족들은 관직을 독점하고 정치 권력을 차지하였을 뿐만 아니라, 때로는 국왕이 내리는 사전을 받고, 불법으로 토지를 빼앗기도 하였다. 이러한 정치 권력과 정제적 특권의 확대는, 이를 둘러싸고 지배층 내부의 분열을 가져왔다.

당시 대표적인 문벌이었던 경원 이씨는 오랫동안 왕실의 외척이 되어 국가의 요직을 차지하고 정권을 휘둘렀다. 경원 이씨 세력은 이자겸 때에 와서 절정을 이루었다. 마침내 그는 인종을 몰아 내고 왕이 되려는 야심을 품고 난을 일으켰다(1126). 그러나 인종이 척준경을 시켜 이자겸을 제거함으로써 경원 이씨는 몰락하였다. 이로써 고려 문벌 귀족 사회는 동요되어 갔다.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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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자겸의 난에 이어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이 일어났다(1135). 이것은 개경의 문벌 귀족에 대한 지방 세력의 반항 운동이었다. 이자겸의 난으로 궁궐이 불타 개경이 어수선해지고, 밖으로부터 금의 압력이 가해져 왔다. 이러한 국내외의 정세를 이용하여 묘청 등의 서경 세력이 대두하였다.

묘청 일파는 풍수 지리설을 이용하여 서경 천도를 내세웠다. 즉, 개경은 지덕이 쇠하고 서경은 지덕이 왕성하므로, 서경으로 수도를 옮기면 금나라를 비롯한 여러 나라가 굴복해 올 것이라고 하였다. 이에 인종은, 서경에 대화궁을 짓도록 하고, 장차 수도를 서경으로 옮기려 하였다.

이러한 묘청 일파의 주장에는, 개경의 귀족 세력을 제거하고 서경 중심의 지방 세력가들이 정권을 잡으려는 야심이 숨어 있었다.

그러나 서경 천도 운동은 김부식을 중심으로 한 개경파 귀족의 반대로 실패하였다. 이에 묘청은, 나라 이름을 대위라 하고 서경에서 반란을 일으켰으나, 정부군에 의해서 평정되었다.

무신 정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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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자겸의 난,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 이후, 고려의 귀족 사회는 다시 평온을 되찾은 듯하였다. 그러나 문신들로부터 차별 대우를 받고 있던 무신과 토지를 빼앗기고 곤궁에 빠져 있던 농민들의 불만은 계속 고조되고 있었다.

무신들은 문신 중심의 문벌 귀족 사회에서 크게 차별을 받고 있었다. 정치 권력은 물론 군사 지휘권도 문신들에게 빼앗기고, 토지 분배에서도 문신에 비해 불리한 대우를 받아 불만이 많았다.

마침내 무신들은 의종 때 정중부를 중심으로 정변을 일으켜 문신들을 몰아 내고 정권을 잡는 데 성공하였다(1170). 권력을 장악한 무신들은 그들 사이의 권력 다툼으로 그 집권자가 정중부, 경대승, 이의민 등으로 바뀌었으나, 최충헌 때에 와서 정권이 안정되었다.

사회의 동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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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신이 정권을 잡은 뒤, 농민과 천민의 봉기가 각지에서 일어났다.

농민들은 이전부터 귀족에게 토지를 빼앗기고, 과중한 수취로 유민이 되거나 때로는 도적이 되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집권 세력인 무신들의 지나친 수탈로 인하여 생활이 더욱 어려워졌다. 이에 농민들은 저항 운동을 일으켰다. 농민들의 저항 운동으로는 경상도 운문의 김사미와 초전의 효심이 일으킨 항쟁이 대표적이었다. 이들은 서로 연합하여 그 세력이 경상도 전역으로 확대되었다.

또, 사회적인 부당한 대우와 천한 신분에서 벗어나려는 천민들의 신분 해방 운동도 일어났다. 이러한 농민과 천민의 저항은 무신 정권 수립 직후부터 약 30년 간 전국적으로 계속되었다.

특히 남부 지역이 심해서, 공주 명학소에서는 망이, 망소이가 봉기하였으며, 전주에서는 공노비들이 일어났다. 또, 개경에서는 최충헌의 노비인 만적이 “삼한에서 천민을 없애자.”고 외치며 노비의 해방을 꾀하였다.

이들 민중의 항쟁은 무력에 의해서 평정되어 갔고, 정부도 그들의 요구 중 일부를 받아들이는 정책을 써서 이들을 회유하였다.

최씨 무신 정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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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의민을 숙청하고 정권을 잡은 최충헌은 강력한 독재 정치로 정권을 안정시켰다. 그는 지방에서 일어나고 있던 오랜 민란을 진압하고, 문신들과 연결된 사원 세력의 저항을 물리쳤다. 이와 같이 최충헌이 무신 정권의 안정을 다짐으로써 최씨 무신 정권은 4대 60여 년 간 계속될 수 있었다.

무신 정권이 수립된 후에도 공식적인 통치 기구는 2성 6부였으나, 무신 정권 초기에는 본래 무신들의 최고 회의 기관이었던 중방이 최고 권력 기구가 되었다. 그러나 최충헌이 정권을 잡은 후에는 교정도감을 설치하여 국정을 주관하였고, 최우는 자기 집에 정방을 두어 정부의 모든 인사 행정을 처리하였다.

한편, 무신 집권자는 사병을 조직하여 정권을 유지하고자 하였다. 경대승 집권 시기에 설치된 도방은 최씨 정권이 수립되면서 더욱 확장되었다. 또, 최씨 정권은 도방과 함께 삼별초를 그들의 군사적 기반으로 삼았다.

도움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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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적의 노비 해방 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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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는 귀족과 평민, 그리고 천민 사이에 엄격한 신분 질서가 강조되는 사회였다. 특히, 노비는 천민 신분으로서 다른 신분과 엄격히 구별되었으며, 사회적 처지도 가장 열악하였다.

그러나 무신 정변 이후 천민 출신의 인물들이 고위 관직에 오르는 등 출세하는 사례가 나타나면서, 이에 영향을 받아 곳곳에서 천민들의 신분 해방 운동이 일어났다.

신종 원년(1198) 5월에 개경 송악산에서 나무를 하던 최충헌의 노비인 만적이 동료 노비들을 불러모아 “무신 정변 이후 나라의 공경 대부가 천민에서 많이 나왔다. 어찌 왕후 장상의 씨가 따로 있겠는가? 때가 오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 노비만 어찌 모진 채찍 밑에서 곤욕을 당할 수 있느냐?”고 선동하니 모두가 그렇게 여겼다.

그들은 노란 종이 수천 장을 잘라 정(丁) 자를 새겨 표지로 삼고 흥국사에 모여 봉기를 일으켜 먼저 최충헌을 죽인 다음, 각기 자기 주인을 죽이고 노비의 호적을 불사르기로 하였다. 그러나 봉기 계획이 사전에 누설되어 만적 등 100여 명이 죽음을 당하고 거사는 실패하고 말았다. 만적 등의 봉기는 비록 실패로 끝났지만, 무신 집권기에 신분 해방을 위한 그들의 강렬한 의지를 유감 없이 드러낸 것이었다.

학습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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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중기에 이르러 일부의 문벌 귀족들이 권력을 독점함으로써 사회 모순이 커졌다. 고려 귀족 사회는 이자겸의 난,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 무신 정변으로 크게 동요되었다. 최씨 무신 정권은 교정도감이라는 권력 기구를 두었으며, 도방과 삼별초 같은 군사 기구를 두어 권력 기반을 강화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