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국사(상) (6차 교육과정)/Ⅲ. 중앙 집권 국가의 형성
중앙 집권 국가의 형성
편집초기의 여러 나라를 통합하여 이룩된 삼국은, 강력한 왕권과 엄격한 신분 제도를 확립하였으며, 불교의 수용과 활발한 정복 사업을 통하여 중앙 집권 국가로 발전하였다. 낙동강 유역에서 일어난 가야는 연맹 왕국을 이루었으나, 중앙 집권 국가로는 성장하지 못하였다.
삼국은 국가 체제를 정비하면서 각기 나름대로 발전하여 갔다. 고구려는 중국 세력의 침략을 막아 내는 역할을 하였고, 백제는 고구려를 견제하면서 중국의 요서, 산둥 지방에 진출하였다. 한편, 신라는 한강 유역을 차지한 이후 삼국 통일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삼국은 각기 독특한 문화를 이룩하면서 발전하여 갔는데, 신라의 삼국 통일로 삼국의 문화적 전통은 하나의 민족 문화로 융합되었다.
1. 왕권의 확립
편집학습 개요
편집삼국은 각기 발달된 정치 제도와 왕을 중심으로 하는 중앙 집권 국가를 이룩하였다. 따라서, 모든 정치와 문화는 왕과 귀족이 주도하였고, 사회의 유지를 위해 신라의 골품 제도와 같은 엄격한 신분 제도를 갖추었다.
한편, 삼국은 각기 국가 체제를 유지하기 위하여 중앙에 여러 관청을 설치하였고, 전국을 몇 개의 행정 구역으로 나누어 다스렸다.
삼국이 각기 국가 조직을 정비해 나가고 있을 무렵에, 낙동강 유역에서 일어난 가야는 철의 생산과 해상 교역을 통하여 연맹 왕국으로 발전하였다.
학습 문제
편집- 삼국이 중앙 집권 국가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공통점은 무엇인가?
- 신라의 화랑도는 어떠한 역할을 하였는가?
- 가야가 연맹 왕국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 배경은 무엇인가?
왕권의 강화
편집초기의 여러 나라 중에서 보다 발전된 정치 사회의 모습을 갖춘 것은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이었다. 이들 삼국은 점차 중앙 집권 국가로 발전하였다.
그리하여 종래의 군장을 비롯한 지배자들은 점차 독립성을 잃어버리고 중앙 정부의 귀족이나 관료로 흡수되었고, 왕위도 부자 상속의 형태로 세습되면서 국왕의 권력은 크게 강화되었다.
이에 따라 삼국은 안으로는 왕권을 뒷받침하는 관등 조직과 행정 조직을 마련하였고, 밖으로는 활발한 정복 전쟁을 벌여 영토를 넓혔다.
또, 삼국은 불교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왕권 강화와 호국 사상으로 활용하였다. 이 시기의 불교는 왕실의 권위를 높이고, 나라의 정신적 바탕을 튼튼히 하는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삼국은 중국의 문화를 받아들여 각기 실정에 맞게 발전시켜 나가면서 민족 문화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하여 삼국은 4세기 이후부터 크게 발전할 수 있었다.
고구려의 발전
편집고구려는 삼국 중에서 가장 먼저 나라의 모습을 갖추었다. 고구려는 왕족인 계루부를 비롯하여 5부족의 귀족들이 최고의 지배층으로서 왕과 연합하여 정치를 주도하였다. 이 중 왕족인 고씨는 계루부 출신으로서 대대로 왕위를 계승하였으며, 절노부에서는 왕비를 배출하였다. 태조왕 때부터 나라의 체제가 갖추어졌으며, 광개토 대왕과 장수왕 때에는 더욱 비약적으로 발전하였다.
중앙의 정치는 왕 아래에 수상의 역할을 맡은 대대로를 비롯하여 10여 등급의 관리들이 나라의 일을 나누어 맡아 보았으며, 행정 구역은 수도와 전국을 각각 5부로 나누어 다스리고, 각지에 성을 쌓아 외적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지방 장관은 중앙으로부터 파견되었는데, 행정과 군사를 함께 맡았다.
그리고 수상의 위치에 있는 대대로는 귀족들에 의해 선출되었고, 또 귀족 대표자 회의인 제가 회의가 있어서 여기서 나라의 중요한 일을 의논하여 결정하였다.
한편, 소수림왕 때에는 국가 체제의 개혁을 위해 불교를 받아들이고 율령을 반포하였다. 불교의 수용이 국가의 정신적 통일에 기여하였다면, 율령의 반포는 바로 국가 조직의 정비를 뜻하는 것이었다.
백제의 성장
편집백제는 한강 유역의 위례성에서 고구려 계통의 유민인 온조에 의해 세워졌다(기원전 18). 한강 유역은 일찍부터 철기 문화와 농경 문화가 크게 발전한 곳이었기 때문에 나라의 발전이 비교적 빨랐다.
백제에서는 왕족인 부여씨와 8개의 귀족 가문이 중심이 되어 정치를 주도하였다. 초기에는 왕족인 부여씨와 왕비족인 진씨, 해씨가 정치를 주도하였으나, 후기에는 사씨, 연씨 등의 세력이 커져서 정치의 주도권을 잡고 귀족 중심의 정치를 하였다. 이들은 정사암에 모여서 재상을 선출하였는데, 이는 귀족 회의의 전통을 보여 주는 것이었다.
백제는 고이왕 때부터 나라의 체제가 갖추어졌으며, 근초고왕과 성왕 때에 이르러 크게 발전하였다.
중앙에는 왕 아래에 좌평을 비롯한 16등급의 관리가 있어 나라의 일을 맡아 보았는데, 그 중에서 상좌평이 최고 책임자였다. 사비로 천도한 이후에는 6좌평 외에 새로 22부의 실무 관청을 두어 행정을 분담하였다. 그 후, 수도는 5부로, 지방은 5방으로 각각 나누어 중앙의 관리를 보내 행정과 군사의 일을 맡아 보게 하였으며, 지방의 요지에는 한때 22개의 담로를 두어 왕족으로 하여금 다스리게 하였다.
백제에서도 율령을 반포하여 나라의 질서 유지에 힘썼는데, 반역자는 사형에 처하고 그 가족은 노비로 삼았으며, 남의 물건을 훔친 사람은 유형에 처하는 한편, 훔친 물건의 2배로 배상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침류왕 때에는 동진으로부터 불교를 받아들여 왕실의 권위를 높이고 국민 사상을 통일시키고자 하였다.
신라의 성장
편집신라는 경주 평야에서 박혁거세에 의해 진한의 한 나라인 사로국을 중심으로 세워졌다(기원전 57). 그러나 신라는 지리적인 여건과 각 부족의 전통 등으로 인하여 삼국 중에서 가장 늦게 나라의 모습을 갖추었다.
신라는 박, 석, 김씨의 3성이 최고의 귀족으로서 정치를 주도하였다. 초기에는 이들 3성이 번갈아 가면서 왕위를 계승하였으나, 내물왕 이후에는 김씨 왕족이 왕위를 세습함에 따라 왕권이 안정되었다. 이 때부터 신라의 왕은 대군장을 뜻하는 마립간이라는 명칭을 가지게 되었는데, 이는 왕의 지위가 크게 강화되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김씨 왕족은 왕권을 강화하면서 골품 제도와 같은 엄격한 신분 제도를 마련하여 정치⋅사회적인 특권을 유지하였다. 왕위는 처음에는 성골에서 차지하였으나, 무열왕부터는 진골 출신이 왕이 되었다.
신라는 왕 아래에 이벌찬 이하 17등급의 관리가 있었다. 행정 조직은 나라가 발전하는 과정에서 오랜 시일을 두고 정비되었다. 법흥왕 때에 상대등과 병부가 설치되고, 진덕 여왕 때에 집사부와 창부가 설치되었다. 그 후 왕권이 강화되면서부터 집사부의 중시가 행정을 총괄하였다. 행정 구역은 수도를 6부, 지방을 5주로 나누어 다스렸다.
그리고 귀족 대표자가 모여 국가의 중요한 일을 만장 일치로 결정하는 화백 회의가 있었는데, 상대등이 의장 역할을 하였다.
또, 유능한 청소년을 양성하는 단체로서 화랑도가 있었다. 화랑도는 옛 씨족 사회의 청소년 집단에서 비롯된 것으로, 진흥왕 때 국가적 조직으로 개편되어 많은 인재를 양성하였다. 이들은 원광의 가르침인 세속 5계를 지키며, 무술과 도의를 닦고, 전쟁시에는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바쳐 싸웠다. 따라서, 화랑도는 신라의 삼국 통일에 크게 기여하였다.
한편, 법흥왕 때에는 율령을 반포하여 중앙 집권 국가의 발달된 모습을 갖추었고, 불교를 공인하여 국민의 사상 통일을 꾀하였다.
가야 연맹
편집낙동강의 하류 유역인 변한 땅에서 가야의 여러 나라들이 일어났다. 삼국이 각기 중앙 집권 국가로서 국가 조직의 정비에 힘을 기울이고 있을 무렵에 가야는 연맹 왕국을 이루고 있었다. 초기에는 김해의 금관 가야가, 후기에는 고령의 대가야가 가야 연맹을 주도하였다.
가야 연맹에서는 발달된 철제 농기구를 사용하여 농업 생산력이 크게 증대되었고, 또 풍부한 철을 중국과 일본 등지에까지 수출하였다. 김해의 대성동 고분 등에서 나온 많은 유물은 당시 가야의 국력과 왕권이 어느 정도 성장하였음을 보여 준다. 5세기 후반에 대가야의 국왕은 가야 연맹의 맹주로서 중국 남조에 사신을 보내기도 하였다. 그러나 가야는 삼국과 같은 중앙 집권 국가로 발전하지 못하고, 연맹 왕국의 단계에 머물렀다.
사회 생활
편집삼국의 정치를 주도한 지배 세력은 왕과 귀족이었다. 왕족을 비롯한 귀족들은 정치 권력을 독점하고 토지와 노비 등 재산을 소유하며, 사회적인 여러 가지의 특권을 누렸다. 이러한 귀족 중심의 정치는 자연히 골품 제도와 같은 특수한 사회 제도를 남겼다.
신라의 골품 제도는 엄격한 신분 제도였다. 신라인의 사회 활동과 정치 활동은 골품에 의하여 결정되었다. 골품에는 성골⋅진골, 그리고 6⋅5⋅4두품이 있었다. 진골은 최고 귀족으로서 중요한 관직을 독점하였고, 6두품은 정치적 진출에 일정한 제한을 받았으므로, 학문과 종교면에서 주로 활동하였다.
한편, 삼국 시대에는 산업이 발달하고 사회가 분화되어 가면서 사회 활동이 다양해졌다. 산악 지대에 살던 고구려 사람들은 사냥을 좋아하고, 무예를 숭상하였다. 특히, 매년 3월에는 사냥 대회를 열어 무술을 닦고, 하늘에 제사를 지냈으며, 인재를 발탁하기도 하였다.
또, 신라에서는 두 왕녀를 중심으로 온 나라 부녀자들이 두 패로 나뉘어 길쌈 대회를 열어, 한가윗날에 그 승부를 가렸는데, 진 편에서는 회소곡을 부르며 이긴 편에게 음식을 대접하는 놀이를 하였다.
경제 생활
편집삼국 시대에는 농지 개간과 수리 시설의 확장으로 농업이 발달하였다. 평야가 많은 백제와 신라에서는 벼농사를 많이 지었고, 산악 지대가 많은 고구려에서는 밭농사를 많이 지었으며, 주로 조를 재배하였다.
농업이 발달함에 따라 상업도 성하게 되어, 큰 도시에는 시장이 열리고 특산물이 매매되었으며, 중국과의 무역도 성행하였다.
산업의 발달로 귀족들은 여유 있는 생활을 하였지만, 백성들은 궁핍한 생활을 하였다. 고구려에서는 가난한 백성을 구제하기 위해서 진대법을 실시하기도 하였다.
도움글
편집고구려와 백제의 건국 전설
편집고구려와 백제의 건국 전설은, 만주의 부여에 살고 있던 무리들이 살기 좋은 곳을 찾아 남하하는 과정과 그들이 새로운 곳에 정착하여 새 나라를 이룩한 사실을 나타내고 있다.
고구려의 건국 전설은 북부여로부터 이주해 온 유이민 세력이 압록강 지류인 동가강 유역에서 먼저 살고 있던 토착민들과 연합하여 주몽을 국왕으로 추대하고 새로운 국가를 이룩한 사실을 보여 주고 있다. 건국자 주몽을 신성화하기 위하여 그의 출생 사실을 고대 사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태양 숭배 사상과 알에서 출생했다는 난생 설화로 꾸몄다. 또, 주몽을 하늘의 신인 천신과 물의 신인 하백 사이에서 태어나 자연의 특별한 가호를 받는 존귀한 존재로 부각시켰다.
한편, 백제의 건국 전설은 졸본 부여의 한 갈래인 비류 세력과 온조 세력이 고구려에서 남하하여 자연 조건이 좋은 한강 하류 유역에 정착하고 각기 새로운 나라를 세웠으나, 후에 위례성의 온조 세력이 미추홀의 비류 세력을 아우르면서 마침내 백제로 발전하는 과정을 나타내고 있다.
삼국의 귀족 대표자 회의
편집삼국 시대는 왕권이 강하였으나, 씨족 사회나 부속 사회의 흔적이 계속 남아 있었다. 씨족 사회에서는 씨족원이 모여서 중요한 일을 결정하였고, 씨족장을 추대하였다. 신라의 화백이나 고구려의 제가 회의, 백제의 정사암 제도 등은 이러한 전통을 이어받은 것이다.
특히, 신라의 화백 제도는 귀족 대표자 회의로서, 왕위 세습이 어려울 경우에 경주 부근의 신성한 곳인 청송산, 오지산, 피전, 소금강산에서 만장 일치로 왕을 선출하였다. 이 때 상대등이 의장 역할을 하였다. 또, 화백 회의는 진골 중심의 귀족 세력과 왕권 사이에서 권력을 조절하는 기능이 있었다. 그러나 왕권이 강했던 시기에는 그 역할이 거의 없었다.
학습 정리
편집- 삼국은 왕권을 강화하고 영토를 넓혀 나갔으며, 율령을 반포하고 불교를 수용하였다.
- 화랑도는 유능한 청소년을 양성하여 삼국 통일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 가야는 농업의 발달, 철의 생산과 수출을 바탕으로 연맹 왕국으로 발전하였다.
2. 영토의 확장
편집학습 개요
편집삼국은 안으로 정치 제도를 정비하는 한편, 밖으로 주변 세력을 정복하고 영토를 확장하면서 중앙 집권 국가를 건설하였다.
고구려는 중국 세력과 싸우면서 발전하였다. 태조왕 때에 중앙 집권 체제의 기틀을 닦은 후, 소수림왕 때에 내정을 정비하였고, 이어 광개토 대왕, 장수왕 때에는 전성기를 이루면서 동북 아시아의 강대국으로 성장하였다.
백제는 한강 유역의 지리적 이점을 활용하여 일찍부터 중국과 교류하면서 국가 체제를 갖추었다. 근초고왕 때에는 마한을 정복하고 중국에 진출하는 등 크게 융성하였으나, 이후 쇠퇴하여 고구려, 신라와의 경쟁에서 뒤지고 말았다.
신라는 사회 발전이 다소 늦었으나, 지증왕, 법흥왕, 진흥왕 때를 거치면서 국력이 크게 신장되었다. 특히, 진흥왕 때에는 한강 유역을 장악하여 삼국 통일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학습 문제
편집- 고구려가 전성 시대에 지배한 영토는 어떠하였는가?
- 백제가 진출한 해외 지역은 어느 곳이었는가?
- 삼국이 다투어 한강 유역을 차지하려 했던 이유는 무엇인가?
고구려의 팽창
편집압록강의 중류 유역에서 일어난 고구려는 불리한 지리적 환경을 극복하고 중국 세력을 물리치면서 발전해 나갔다.
3세기 동천왕 때에 고구려는 중국과 낙랑군을 연결하는 서안평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오히려 위나라의 반격을 받아, 한때 수도인 국내성까지 함락되는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다.
4세기 초 미천왕 때에는 낙랑군을 공격하여 중국 세력을 완전히 몰아 내고, 고조선의 옛 땅을 되찾았다(313). 그러나 고국원왕 때에는 서쪽으로부터 전연, 남쪽으로부터 백제의 침략을 받아 큰 타격을 받기도 하였다.
이에 4세기 후반 소수림왕 때에는 나라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전진과 평화적인 외교 관계를 맺고 체제 정비에 힘썼다.
이를 바탕으로 하여 광개토 대왕은 영토를 크게 넓혀 고구려의 전성 시대를 열었다. 그의 업적은 만주의 집안에 남아 있는 광개토 대왕릉비에 기록되어 있다. 이 때 고구려는 요동 지방을 포함한 만주 대부분의 땅을 차지하였으며, 남쪽으로는 백제를 정벌하여 한강 이북의 땅을 점령하였다. 또, 5만의 군사를 신라에 보내어, 침입한 왜군을 낙동강 유역에서 물리쳤다.
광개토 대왕의 뒤를 이은 장수왕은 중국의 남북조를 견제하는 한편, 수도를 평양성으로 옮겨(427) 고구려의 발전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였다.
장수왕의 평양 천도는 왕권 강화뿐만 아니라 남진 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기 위한 조치였다. 이어 장수왕은 백제를 쳐서 한강 유역을 차지함으로써 삼국 간의 항쟁에서 주도권을 잡게 되었다.
이 때의 고구려 세력은 한반도 중부 이남에까지 미쳤는데, 이러한 사실은 중원 고구려비를 통해서 알 수 있다. 이 무렵의 고구려는 동북 아시아의 최강국으로서, 우리 민족을 중국 세력의 침입으로부터 막아 주는 방파제의 역할을 하였다.
백제의 발전
편집백제는 처음 마한의 한 소국에 불과했지만, 점차 마한 세력을 통합하면서 그 중심 세력이 되었다. 백제도 고구려처럼 중국 세력의 간섭과 침략을 물리치면서 성장하였다.
3세기 고이왕 때에는 한강 유역에 있는 여러 세력을 통합하고, 안으로 국가 제도를 정비하여 나라의 기틀을 확립하였다.
그 후, 4세기 근초고왕 때에 이르러 백제는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게 되었다. 마한의 나머지 땅을 정복하여 남해안에까지 진출하였고, 북쪽으로는 고구려를 쳐서 고국원왕을 전사하게 하였다. 아울러 낙동강 유역에까지 진출하여 가야의 여러 나라에 대해서도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이 때 중국의 동진, 그리고 왜와 교섭을 하였는데, 이를 계기로 백제는 중국의 요서, 산둥 지방 및 일본의 규슈 지방에까지 진출하여 해상 활동의 무대를 넓혔다.
그러나 백제는 5세기 후반 고구려의 남진 정책에 밀려서 그 중심 지역인 한강 유역을 빼앗기고 말았다. 그리하여 문주왕은 수도를 금강 유역의 웅진성으로 옮겼다(475).
그 후 백제는 한동안 신라와 연합하여 고구려에 대항하였으나, 계속되는 중앙 귀족의 권력 다툼으로 국력이 약화되었다.
그러나 동성왕 때에는 신라와 혼인 관계를 맺고 고구려에 대항하는 한편, 신진 세력을 등용하여 귀족 간의 갈등을 수습하였다. 그리하여 백제는 6세기 전반에 이르러 사회가 안정되고 국력이 다시 회복되었다.
무령왕 때에는 왕족을 지방에 파견하여 지방 통제를 강화하고, 고구려에 대한 적극적인 공세를 펴서 국력을 점차 회복하였다.
이어 성왕은 수도를 사비성으로 옮기고, 행정 구역을 정비하면서 왕권 강화를 꾀하였다. 그리고 불교를 장려하고, 또 중국의 남조와 문물을 교류하면서 국력을 크게 신장시켰다. 이를 바탕으로 성왕은 신라와 힘을 합하여 고구려를 쳐서, 잃었던 한강 유역을 한때 되찾는 등 나라의 중흥을 이루고자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신라의 비약
편집신라가 나라의 기틀을 갖추기 시작한 것은 4세기 후반 내물왕 때였다.
신라는 한때 국가의 발전을 위해 고구려의 도움을 많이 받았으나, 눌지왕 이후부터는 백제와 동맹을 맺어(433) 고구려의 내정 간섭과 남진 정책을 견제하였고, 국력을 길러 자주적 국가 발전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이리하여 신라는 6세기 지증왕을 거쳐 법흥왕, 진흥왕에 이르면서 비약적으로 발전하여 삼국을 통일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였다.
지증왕 때에는 관개⋅수리 사업과 가축을 이용한 농사 기술을 보급시켜 농업 생산력을 높였다. 그리고 나라 이름을 ‘신라’로 확정하였고, 왕호를 마립간에서 ‘왕’으로 고쳤다.
법흥왕 때에는 불교를 공인하여 국가의 지도 이념으로 삼았으며, 율령을 만들어 나라의 지배 체제를 갖추었다. 또, 김해의 금관 가야를 합쳐 낙동강 유역의 가야 지역으로 진출하는 발판을 마련하였다.
이어 진흥왕 때에는 화랑도를 개편하여 국가의 기반을 확고히 하는 한편, 고구려와 가야를 공략하여 영토를 크게 넓혔다. 진흥왕은 백제와 연합하여 고구려를 쳐서 한강 상류 지역을 점령하고, 다시 백제가 되찾은 한강 하류 지역까지 차지하여 한강 유역을 신라의 영토로 만들었다. 이어서 가야 연맹의 맹주였던 대가야를 정복하여 낙동강 유역을 장악하였고, 또 동해안을 따라 원산만 일대에까지 진출하여 동예의 옛 땅을 차지하였다. 이 무렵에 새로이 개척한 영토를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것이 단양 적성비와 4개의 진흥왕 순수비이다.
신라는 한강 유역의 점령을 계기로 고구려와 백제의 연결을 차단할 수 있었고, 또 중국과 직접 교류하여 국제적 지위를 높일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이 지역의 경제력을 장악하고, 한반도의 주도권을 잡게 됨에 따라 장차 삼국 통일의 기틀을 마련할 수 있었다.
도움글
편집삼국과 한강 유역
편집한강 유역은 농경에 적합하고, 여러 지역의 문화가 합쳐지며, 또 중국과 교류하기에 적합한 지리적 이점을 가지고 있었다. 삼국은 안으로 국가 체제를 정비하고 밖으로 영토 확장을 위한 싸움을 벌이는 가운데 한강 유역을 다투어 차지하려 하였다.
한강을 중심으로 발전한 백제는 황해를 통해 중국과 교류하면서 문화를 발전시켰다. 그 후 백제는 고구려에 한강 유역을 빼앗기고 점차 쇠퇴하였다. 고구려는 광개토 대왕과 장수왕의 남진 정책으로 한강 유역을 차지하면서 번영을 누렸으나, 신라에게 한강 유역을 빼앗김으로써 한반도의 주도권을 잃었다.
신라는 진흥왕 때에 한강 유역을 확보하여 고구려와 백제의 연결을 끊었고, 중국과의 교통로를 개척하였다. 이로써 신라는 인적⋅물적 자원이 크게 증가하게 되었고, 황해를 거쳐 중국과 직접 교통할 수 있는 문호를 열게 되었으며, 이에 신라는 삼국 통일의 기틀을 마련할 수 있었다.
학습 정리
편집- 고구려는 광개토 대왕과 장수왕 때에 만주의 대부분과 한반도의 중부 이북 지방을 차지하였다.
- 백제는 근초고왕 때 중국의 요서, 산둥 지방 및 일본의 규슈 지방에 진출하는 등 해상 세력을 형성하였다.
- 한강 유역은 평야가 넓고, 육상⋅수상 교통이 편리하며, 인구가 많아 국력 증강에 크게 이로웠으므로 삼국이 서로 차지하려 하였다.
3. 삼국의 문화
편집학습 개요
편집삼국의 문화는 귀족 생활과 불교 신앙을 중심으로 발달하였다. 특히, 불교는 삼국의 발전과 국민의 정신적 통일에 이바지하였고, 학문과 예술의 발달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삼국의 문화는 회화, 조각, 공예, 건축 등 미술 분야에서 뛰어났는데, 각각 특색 있는 문화적 전통을 이루었다. 고구려의 예술품은 힘찬 기상이 서려 있고, 백제의 예술품은 우아하고 세련되었으며, 신라의 예술품은 소박하면서도 조화의 미를 지니고 있다.
또, 삼국 시대에는 야금술, 천문학, 수학 등 과학 기술이 발달하여 훌륭한 문화 유산을 남겼다.
이러한 삼국 문화는 일본으로 전해져, 일본 고대 문화의 형성과 발전에 큰 영향을 주었다.
학습 문제
편집- 불교의 전래는 삼국의 문화 발전에 어떠한 영향을 주었는가?
- 삼국의 과학 기술 중에서 천문학, 역법 등이 발전하였던 이유는 무엇인가?
- 삼국의 문화는 어떠한 분야를 중심으로 발달하였는가?
- 삼국의 미술은 각기 어떠한 특색을 가지고 있는가?
종교
편집삼국 시대에 민간에서는 천신을 비롯한 여러 자연신을 섬기는 무속, 점술 등의 토속 신앙이 널리 유행하였다. 국왕은 시조에 대한 제사를 받들면서 천신의 후손으로 자처함으로써 자신의 권위를 높이려 하였다.
그러나 중앙 집권 국가로 발돋움하면서 이러한 여러 신앙을 가지고서는 확대된 사회를 이끌어 갈 수 없었다. 이에 삼국은 새로운 종교인 불교를 받아들여 국민의 정신적 통일을 꾀하게 되었다.
고구려는 소수림왕 때에 전진으로부터, 백제는 침류왕 때에 동진으로부터 불교를 받아들였다. 신라에는 이보다 늦은 눌지왕 때에 고구려로부터 불교가 전해졌으나, 뿌리 깊은 고유 신앙과 귀족의 반발로 받아들여지지 못하다가, 법흥왕 때에 이르러 이차돈의 순교가 있은 후에야 비로소 공인되었다(527). 이후, 불교는 국가를 수호하는 데에 유익한 종교라고 생각되어 왕실의 보호를 받으면서 국가적 신앙으로 발전하였다. 신라에서는 불교식 왕명을 사용하여 부처의 가족으로 자처하면서 왕의 권위를 높이려 하였다.
또, 삼국은 황룡사, 미륵사 등과 같은 거대한 절을 짓고, 대규모의 불교 집회를 열어 국가의 평안과 발전을 빌기도 하였다. 자장의 건의로 세워진 황룡사 9층탑은 9개국을 정복하려는 신라인의 염원이 담긴 상징물이었다. 그리고 원광은 세속 5계를 통해 사회 윤리와 호국 사상을 심어주기도 하였다.
불교는 학문과 예술의 발전에도 큰 역할을 하였다. 삼국은 불교를 통하여 음악, 미술, 과학 기술 등을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이 과정에서 중국과 서역의 문화가 우리 나라에 전해져서 민족 문화 발전의 기틀을 마련하는 데에 이바지하였다.
한편, 삼국 사회에는 도교 신앙도 널리 퍼져 있었다. 이는 고구려 고분 벽화에 보이는 사신도나 백제의 산수무늬 벽돌, 금동 용봉 봉래산 향로 등에서 그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고구려 말기에는 불교 세력을 억압하는 데에 도교 세력을 이용하기도 하였다.
학문과 과학 기술
편집우리 나라에 한자가 전래된 것은 고조선 시대부터였지만, 삼국 시대에 들어와서 한자가 널리 사용되면서 학문이 크게 발전하게 되었다. 한자는 주로 귀족층에서 사용하였는데, 설총은 그것이 어렵기 때문에 한자의 음과 훈을 따서 우리말을 표기하는 이두를 정리하였다.
고구려에서는 소수림왕 때에 수도에 태학을 세워 유학을 가르쳤고, 그 후 지방에는 경당을 세워 청소년들에게 한학과 무술을 가르쳤다. 광개토 대왕릉 비문을 살펴보면, 고구려에서는 한학이 매우 발달하였음을 알 수 있다.
백제에서는 의박사, 역박사, 오경 박사 등의 박사 제도를 두어 여러 분야의 학문과 기술을 진흥시켰으며, 논어와 천자문 등을 일본에 전해 줄 정도로 한학의 수준이 높았다. 세련된 문장으로 쓰여진 부여 출토의 사택지적 비문은 당시 백제의 한학 수준을 알려 주고 있다. 그리고 신라의 진흥왕 순수비를 통해서 당시 신라의 한학 수준을 살펴볼 수 있다.
왕권이 강화되고 한학이 발달함에 따라, 자기 나라의 역사를 정리하려는 의식이 싹텄다. 고구려에는 일찍이 유기 100권이 전해져 왔었는데, 영양왕 때 이문진이 이를 간추려 신집 5권을 편찬하였다. 백제에서는 근초고왕 때 고흥이 서기를, 신라에서는 진흥왕 때 거칠부가 국사를 편찬하였다.
한편, 한학이 널리 보급되면서 천문학, 의학, 수학 등 과학 연구도 활발하였고, 건축, 토목, 공예 등 기술 분야에서도 큰 발전을 보였다.
삼국 시대에는 주요 산업인 농업의 발전과 관련하여 천문학, 역법 등이 발달하였다. 경주의 첨성대는 신라의 발달된 천문학 수준을 반영한 것이며, 현재까지 남아 있는 가장 오래 된 천문대로서, 우리 민족의 우수한 창조물이다. 삼국인들은 수시로 일식, 월식, 혜성, 지진 등 천문 기상을 세밀하게 관측하였고, 천체 현상의 이변을 정치적으로 해석하기도 하였다.
삼국 시대에는 국가 운영에 필요한 토지 측량, 조세 징수 등 행정 실무와 고분, 성곽, 궁궐을 만드는 일에 수학 지식을 활용하였다. 그리고 금, 은, 구리, 철을 소재로 하는 제련술, 용접술, 주조술이 발달하여 우수한 무기, 장신구, 그릇 등이 만들어졌다.
고분 벽화
편집삼국 시대에는 귀족 중심의 미술이 발달하였으며, 특히 고분 미술과 불교 미술이 뛰어났다.
고구려의 미술은 힘과 정열이 넘쳤고, 백제의 미술은 우아하고 세련되었으며, 신라의 미술은 소박한 가운데 조화 있는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었다. 이와 같이 삼국의 미술은 그 국가의 성격에 따라 각기 차이가 있었으나,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점차 많은 공통성을 지니게 되어, 후에 민족 문화 발전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삼국은 고분을 통하여 많은 예술품을 남겼는데, 고분은 단순한 무덤이 아니라, 고대인들의 정신과 지혜가 담긴 예술의 보고이다.
고구려의 미술은 옛 수도였던 국내성과 평양성 부근에 있는 고분을 통해 알 수 있다. 고구려 고분은 초기에는 돌을 쌓아올린 돌무지무덤이 만들어졌는데, 대표적인 것이 만주 집안에 있는 장군총이다.
후기에는 흙으로 덮은 봉토 내부에 돌방이 있는 굴식 돌방무덤이 주류를 이루었다. 굴식 돌방무덤의 일부 돌방 안에는 벽화가 그려져 있는데, 쌍영총, 무용총, 강서 고분 등이 유명하다. 여기에는 풍속도, 수렵도, 무용도, 사신도 등이 그려져 있어, 고구려인의 씩씩한 생활 모습을 엿볼 수 있다. 특히, 강서 고분의 돌방에 그려진 사신도는 고구려 고분 벽화 중에서도 높은 회화 수준을 보여 주는 것으로, 힘과 패기가 넘쳐 흐르고 있다.
백제의 고분은 서울, 공주, 부여에 많이 남아 있다. 서울 석촌동에 있는 백제 고분은 고구려 초기의 고분과 비슷한 돌무지무덤이다. 이를 통하여 백제 왕실이 고구려와 깊은 관련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공주의 무령왕릉은 봉토 안의 방을 벽돌로 쌓아올린 무덤인데, 중국 남조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여기에서는 무령왕에 대한 기록인 지석과 함께 금제 관식, 무기, 그릇, 구리 거울 등 많은 껴묻거리가 발견되어 당시의 발달된 공예 기술을 엿보게 해 준다.
백제의 고분에도 고구려의 고분과 같이 벽화를 그린 것이 있는데, 부여 능산리 고분의 사신도는 매우 세련된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한편, 신라의 고분은 수도인 경주 부근에 많이 남아 있다. 신라의 고분은 4세기 이후 거대한 돌무지 덧널무덤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이 고분에서는 금관을 비롯하여 금제 장신구, 유리 제품, 생활 도구 등 많은 껴묻거리가 발견되어 신라 공예품의 보고가 되고 있다. 특히, 금관총, 천마총 등지에서는 금관이 출토되었고, 천마총에서는 천마도가 발견되어 신라 미술의 높은 수준을 보여 주고 있다.
불교 미술
편집삼국은 중국에서 불교를 받아들여 그 문화의 폭을 넓히는 동시에, 큰 절과 탑을 세우고 불상을 만드는 등 불교 미술을 크게 발전시켰다. 따라서, 불교 미술은 고분 미술과 함께 삼국 시대 미술의 중요한 부분이 되고 있다.
삼국의 건축물 중 대표적인 것은 탑으로서, 처음에는 목탑이 많이 세워졌으나, 후에는 주로 석탑이 만들어졌다. 백제의 석탑으로는 목탑의 건축 양식을 따른 익산의 미륵사지 석탑과 부여의 정림사지 5층 석탑이 유명하다. 특히, 정림사지 5층 석탑은 균형이 잘 잡히고 아름답게 만들어진 걸작품이다. 신라의 탑으로는 전탑의 형식을 따른 분황사 모전 석탑이 남아 있으며, 황룡사 9층탑은 국력을 기울여 세운 것이었으나, 고려 때 몽고의 침입으로 불타 없어졌다.
삼국의 불상으로는 신라의 금동 미륵보살 반가 사유상이 가장 대표적이다. 그 밖의 불상으로는 독특한 개성을 보여 주는 고구려의 연가 7년명 금동 여래 입상, 친근감 있는 미소를 머금고 있는 백제의 서산 마애 삼존불상이 유명하다.
한편, 최근 부여의 백제 절터에서 발견된 금동 용봉 봉래산 향로는 백제 문화의 우수성과 독창성이 한층 돋보이는 걸작품으로, 백제의 사상과 공예 기술의 참맛을 보여 주고 있다.
시가와 음악
편집우리 민족은 예부터 노래와 춤을 좋아했는데, 음악은 삼국 시대에 이르러서 중국 음악과 불교 음악의 영향을 받아 더욱 발달하였다.
고구려의 시가로는 유리왕이 지었다는 황조가와 을지문덕이 지은 5언시가 전해지고, 백제의 시가로는 정읍사와 지리산가 등이 전해지며, 신라의 시가로는 혜성가, 서동요 등의 향가가 전해진다.
한편, 삼국에서는 여러 가지의 악기가 만들어졌고, 노래도 지어져 음악이 크게 발달하였다. 고구려에는 관악기, 현악기, 타악기 등 많은 악기가 있었고, 왕산악은 7현금을 개량하여 거문고를 만들고 100여 곡을 작곡하였다. 백제의 음악은 고구려와 비슷하였으며, 일본에 전해져서 고대 일본 음악에 큰 영향을 끼쳤다.
신라의 악기로는 거문고, 가야금, 비파, 피리 등이 있었다. 옥보고는 거문고를 잘 타서 신라 음악에 맞는 30여 곡을 지었으며, 백결 선생은 방아타령을 남겼다. 또, 대가야 출신의 우륵은 진흥왕 때 가야금을 만들고 12곡을 작곡, 보급하였다.
도움글
편집금동 용봉 봉래산 향로
편집이 향로는 부여 능산리 고분 근처에 위치한 절터에서 발견되었다. 전체 높이가 64cm로, 동북 아시아에서 출토된 향로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이다.
향로는 4개 부분으로 되어 있다. 뚜껑 부분은 봉황이 여의주를 목에 끼고 날개를 활짝 펴서 날아가려는 모습을 하고 있다. 그 아래에는 5명이 음악을 연주하는 연주상, 크고 작은 산, 인물상, 동물상, 기마상, 불꽃무늬 등 화려한 무늬가 조각되어 있다. 몸통에는 연꽃, 물고기, 동물상 등 여러 가지 무늬가 새겨져 있다. 밑에는 용이 살아 움직이는 듯한 모습으로 몸통을 입으로 받들고 있고, 또 구름과 인동무늬가 소용돌이치는 모습으로 꾸며져 있다.
이 향로는 백제 문화의 우수성과 독창성이 한층 돋보이는 작품이다.
학습 정리
편집- 불교는 국민의 정신적 통일에 이바지하였고, 학문과 예술의 발달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 삼국 시대에는 주요 산업인 농업과 관련되는 천문학과 역법이 발달하였다.
- 삼국의 문화는 귀족 생활과 불교 신앙을 중심으로 발전하였는데, 특히 고분 미술과 불교 미술이 뛰어났다.
- 고구려의 미술은 힘찬 기상을 지녔고, 백제의 미술은 우아하고 세련되었으며, 신라의 미술은 소박하면서 조화의 미를 지녔다.
4. 삼국의 대외 활동
편집학습 개요
편집삼국은 안으로는 서로 대립하거나 연맹 관계를 맺고, 밖으로는 중국 세력과 평화적 교섭이나 전쟁을 치르면서 통일의 길로 나아갔다.
6세기 말 이후, 중국을 통일한 수⋅당이 침입해 오자, 고구려는 이들을 격퇴하여 중국 세력으로부터 한반도를 보호하였다.
백제는 중국의 남조와 긴밀한 외교 관계를 맺어 고구려를 견제하였고, 중국의 분열을 틈타 해상 세력권을 이루기도 하였다.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보다 발전이 늦었으나, 한강 유역을 확보한 6세기 후반부터 수⋅당 등 중국 세력을 적절히 이용하면서 통일의 기반을 마련하여 갔다.
학습 문제
편집- 고구려의 중국 세력에 대한 싸움은 어떠한 의미를 지니는가?
- 6세기 후반 동북 아시아의 국제 관계는 어떠하였는가?
- 고구려는 수⋅당의 침입을 어떻게 격퇴하였는가?
- 삼국의 문화는 일본에 어떠한 영향을 주었는가?
삼국의 대외 관계
편집삼국은 국가 발전 과정에서 각기 처해 있는 입장에 따라 서로 대립하거나 연맹 관계를 맺기도 하였다.
삼국의 대외 관계는 삼국뿐만 아니라 당시 중국을 비롯한 동북 아시아의 국제 정세와도 긴밀히 관련되어 있었다. 이에 따라 삼국은 평화적인 교섭을 통하여 중국 세력뿐만 아니라 북방 민족, 왜 등을 외교적으로 이용하였다. 그리고 자신의 발전에 필요한 중국의 선진 문물을 적극 받아들여 정치적, 문화적인 이익을 얻기도 하였다.
삼국 중에서도 고구려는 빈번히 중국 세력과 항쟁을 벌이면서 한반도를 중국 세력의 침략으로부터 보호하는 방파제 역할을 하였다. 삼국 초기에 고구려는 중국 세력과의 투쟁 속에서 성장하였고, 한때 위, 전연 등의 침입을 받아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다. 그러나 중국이 5호 16국의 혼란을 겪는 동안 요동 지방으로 진출하였고, 이어 광개토 대왕과 장수왕 때에는 전성기를 맞아 동북 아시아의 대제국을 건설하였다. 특히, 장수왕 때에는 분열되어 있는 중국의 남북조 및 북방 민족과 외교 관계를 맺어 이들 세력을 견제하면서 고구려의 국제적 지위를 높이기도 하였다.
한편, 백제는 근초고왕 때에 중국의 남조인 동진과 외교 관계를 맺어 고구려를 견제하였고, 백제의 이주민들이 많이 거주한 규슈의 왜와 외교 관계를 맺기도 하였다. 이를 계기로 하여 백제는 중국의 요서, 산둥 지역과 일본의 규슈 지역을 연결하는 세력권을 형성하여 해상 무역 활동을 활발히 펴 나갔다. 그 후, 백제는 중국의 남조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였고, 때로는 왜의 세력을 한반도에 끌어들여 삼국 항쟁에 이용하기도 하였다.
삼국 중 뒤늦게 발전한 신라는 한동안 고구려나 백제의 도움을 받아 중국과 외교 관계를 맺었다. 내물왕 때에는 고구려의 안내로 전진에 사신을 파견한 적이 있었고, 법흥왕 때에는 백제의 도움으로 남조인 양나라와 외교 관계를 맺기도 하였다. 그러나 신라가 중국과 독자적인 외교 관계를 맺게 된 것은 한강 유역을 완전히 확보하게 되는 진흥왕 때의 일이었다.
6세기 후반부터 삼국은 각기 중국 세력을 적절하게 이용하면서 통일을 위해 치열한 항쟁을 벌이게 되었다.
살수 대첩
편집신라는 한강 유역을 차지하였으나, 고구려와 백제의 협공으로 고립되었다. 이 무렵 오랜 분열과 혼란을 거듭해 온 중국이 수나라에 의해 통일이 되자, 신라는 수에 도움을 청하게 되었다. 수나라의 등장으로 위협을 느낀 고구려는 유목 민족인 돌궐과 공동으로 이에 대항하였다.
이리하여 6세기 말 동북 아시아의 국제 정세는 고구려, 백제, 일본, 돌궐을 연결하는 남북 세력과 신라, 수(당)를 연결하는 동서 세력 간의 다툼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고구려는 먼저 전략적 요충지인 요서 지방을 공격하였다. 이에 수 문제가 침공해 왔으나, 고구려는 이를 물리쳤다. 그 후, 수 양제는 113만 대군으로 고구려를 침공해 왔다. 고구려의 강력한 항전에 부딪혀 초조해진 수 양제는 30여만의 별동대를 투입하였으나, 을지문덕의 유도 작전에 말려들어 살수에서 고구려군에게 거의 전멸당하였다. 이 싸움이 유명한 살수 대첩이다(612).
그 뒤에도 고구려는 수나라의 공격을 몇 차례 더 물리쳐 나라의 위기를 극복하였다. 수나라는 무리한 전쟁으로 인한 국력 소모와 내란으로 곧 망하고 말았다.
안시성의 승리
편집수의 뒤를 이은 당은 겉으로는 고구려와의 화친을 꾀하였으나, 실제로는 세계 제국을 건설하려는 야심을 가지고 주위의 여러 나라를 침략하는 한편, 고구려에도 압력을 가해 왔다. 이에 불안을 느낀 고구려는 요하 주위의 국경선에 천리 장성을 쌓고 당의 공격에 대비하였다.
이 때, 고구려에서는 연개소문이 등장하여 정권을 장악하고, 당과 신라에 강경 정책을 폈다. 이에 당은 연개소문의 정변을 구실삼아 고구려에 쳐들어왔다. 당 태종은 대군을 거느리고 요하를 건너 요동성을 함락시킨 후, 안시성을 공격하였다. 안시성에서는 고구려인 모두가 굳세게 저항하면서 성을 끝까지 지켜 끝내 당군을 물리칠 수 있었다(645). 그 후에도 고구려는 당의 침략을 몇 차례 받았으나, 이를 모두 물리쳤다.
문화 전파와 교역
편집삼국 시대에는 문물 교류와 교역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삼국은 대륙으로부터 중국 문화를 받아들여 독자적인 문화를 이룩하였으며, 발달된 삼국 문화는 일본으로 전해져서 일본의 고대 문화 발달에 큰 영향을 끼쳤다.
백제는 일본과 정치적으로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였기 때문에 삼국 중에서 일본 문화에 가장 큰 영향을 주었다. 근초고왕 때 아직기와 왕인은 일본에 건너가 한문, 논어, 천자문을 전해 주었고, 무령왕 때 단양이와 고안무 등은 한학과 유학을 전해 주어 일본에 정치 사상과 충효 사상을 보급시켜 주었다. 이어 성왕 때에는 불교를 전해 주었고, 그 밖에 천문, 지리, 역법 등의 과학 기술도 전해 주었다.
고구려도 많은 문화를 일본에 전해 주었다. 고구려의 승려 혜자는 일본 쇼토쿠 태자의 스승이 되었고, 담징은 종이, 먹, 벼루를 만드는 기술을 가르쳐 주었으며, 호류 사의 금당 벽화도 그의 작품으로 알려지고 있다. 다카마쓰 고분의 벽화는 고구려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신라는 배를 만드는 기술 및 제방과 성곽을 쌓는 기술을, 가야는 토기를 만드는 기술을 일본에 전해 주었다.
이와 같이, 삼국은 발달된 문화를 일본에 전해 주어, 일본 고대의 아스카 문화를 이룩하는 데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한편, 삼국의 국제 무역은 4세기 이후 크게 발달하였다. 농업이 발달함에 따라 상업도 성하게 되어, 큰 도시에는 시장이 열리고 특산물이 매매되었으며, 중국과의 무역도 성행하였다.
고구려는 중국의 남북조 및 북방 민족과 무역을 하였고, 백제는 해상 세력권을 활용하여 남중국 및 일본과 무역을 활발히 하였다. 신라는 한강 유역을 차지하면서부터 중국과 독자적으로 무역을 할 수 있었다.
당시 삼국의 수출품으로는 금⋅은 세공품, 마직물, 인삼 등이 있었고, 수입품으로는 비단, 장식품, 책, 약재 등이 있었다.
도움글
편집백제의 해상 세력권
편집백제의 중국 진출에 관한 기록은 중국측 문헌인 송서, 양서 등의 백제전에 전하고 있다. 이에 의하면, 4세기 이후 백제는 고구려의 요동 진출에 자극받아 이를 배후에서 견제하기 위하여 요서 지방의 요서군, 진평군을 점령하고 이 곳에 백제군을 설치한 것으로 되어 있다.
백제는 중국이 5호 16국으로 혼란을 겪게 되자, 한나라 이래로 개설되어 있던 전통적인 해상로와 상업로를 장악하여 해외 진출의 길에 나서게 되었다.
이로써 백제는 중국의 요서, 산둥 지방과 일본의 규슈 지방을 연결하는 해상 세력권을 형성하여 대외 활동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학습 정리
편집- 고구려는 중국 세력으로부터 한반도를 보호하는 방파제의 역할을 하였다.
- 6세기 후반 이후 동북 아시아의 국제 관계는 고구려, 백제의 남북 세력과 수(당), 신라의 동서 세력 간의 대립으로 나타났다.
- 고구려는 수⋅당의 침입을 받았으나, 살수 대첩, 안시성 싸움에서 굳센 단결력으로 큰 승리를 거두었다.
- 삼국의 문화는 일본에 전파되어 일본 고대의 아스카 문화를 이룩하는 데에 크게 이바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