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자어류/권1 리기상 理氣上
太極天地上 태극천지 상
1:1 問: “太極不是未有天地之先有箇渾成之物, 是天地萬物之理總名否?”
질문: 태극은 천지가 있기 전에 있었던 뒤섞인 물건[1]이 아니요 천지만물의 리의 총칭 아닙니까?
曰: “太極只是天地萬物之理. 在天地言, 則天地中有太極; 在萬物言, 則萬物中各有太極. 未有天地之先, 畢竟是先有此理. 動而生陽, 亦只是理; 靜而生陰, 亦只是理.”
답: 태극은 천지만물의 리일 뿐이다. 천지의 차원에서 말하자면 천지 가운데 태극이 있다. 만물의 차원에서 말하자면 만물 각각에게 태극이 있다. 천지가 있기 전에도 필경 먼저 이 리가 있었을 것이다. 움직여 양을 낳는 것도 리이고 고요하게 멈춰서 음을 낳는 것도 리이다.
問: “太極解何以先動而後靜, 先用而後體, 先感而後寂?”
질문: 태극해(太極解)[2] 에서는 왜 움직임이 고요함에 선행하고 작용이 본체에 선행하고 감지함(感)이 적막함(寂)에 선행합니까?[3]
曰: “在陰陽言, 則用在陽而體在陰, 然動靜無端, 陰陽無始, 不可分先後. 今只就起處言之, 畢竟動前又是靜, 用前又是體, 感前又是寂, 陽前又是陰, 而寂前又是感, 靜前又是動, 將何者爲先後? 不可只道今日動便爲始, 而昨日靜更不說也. 如鼻息, 言呼吸則辭順, 不可道吸呼. 畢竟呼前又是吸, 吸前又是呼.” 淳(61·70때).
답: 음양의 차원에서 말하자면 작용은 양에, 본체는 음에 속한다.[4] 하지만 움직임과 고요함에는 중단점(端)[5]이 없고 음과 양에는 시작점[6]이 없으니 선행하고 후행하고를 나눌 수 없다. 여기서는 기점(起處)[7]을 기준으로 말한 것뿐이다. 움직임 전에는 또 필경 고요함일 것이고 작용 전에는 또 필경 본체일 것이고 감지함 전에는 또 필경 적막함일 것이고 양 전에는 또 필경 음일 것이고 적막함 전에는 또 필경 감지함일 것이고 고요함 전에는 또 필경 움직임일 것이다. 무엇을 가지고 선행한다 후행한다 정할 것인가? 오늘 움직인 것을 시작이라고만 말하고 어제 고요했던 것에 대해서 침묵하면 안 된다. 예컨대 숨쉬기에 대해서 '호흡'이라고 표현하고 '흡호'라고 하지 않는 것은 그 편이 말이 순조로워서 그런 것일 뿐이다. '호' 전에는 또 필경 '흡'일 것이요 '흡' 전에는 또 필경 '호'일 것이다.
순(淳)의 기록.[8] (61세 혹은 70세 때)[9]
1:2 問: “昨謂未有天地之先, 畢竟是先有理, 如何?”
질문: 어제 '천지가 있기 전에도 필경 먼저 리가 있었을 것'이라고 하신 말씀은 무슨 의미입니까?
曰: “未有天地之先, 畢竟也只是理. 有此理, 便有此天地; 若無此理, 便亦無天地, 無人無物, 都無該載了! 有理, 便有氣流行, 發育萬物.”
답: 천지가 있기 전에는 필경 리만 있을 것이다. 리가 있고서 이 천지가 있다. 이 리가 없으면 천지도 없고 사람도 없고 사물도 없고 실어줄(該載)[10] 것이 하나도 없었을 것이다. 리가 있으면 기가 있어 두루 흘러(流行)[11] 만물을 틔우고 키워준다.
曰: “發育是理發育之否?”
질문: 틔우고 키워준다는 것은 리가 틔워주고 리가 키워준다는 것입니까?
曰: “有此理, 便有此氣流行發育. 理無形體.”
답: 리가 있으면 기가 있어 두루 흘러 틔워주고 키워준다. 리는 형체가 없다.
曰: “所謂體者, 是强名否?”
질문: 이른바 본체라는 것은 억지로 이름 붙인 것입니까?
曰: “是.”
답: 그렇다.
曰: “理無極, 氣有極否?”
질문: 리는 극이 없고(無極)[12] 기는 극이 있는 것 아닙니까[13]?
曰: “論其極, 將那處做極?” 淳(61·70때).
답: 극을 논하자면 어느 지점을 가지고 극이라고 할까?
1:3 若無太極, 便不飜了天地! 方子(59이후).
태극이 없었다면 천지는 열리지 못했을 것이다. [14]
1:4 太極只是一箇“理”字. 人傑(51이후).
태극은 리(理) 한 글자일 뿐이다.
1:5 有是理後生是氣, 自“一陰一陽之謂道”推來. 此性自有仁義. 德明(44이후).
리가 있고서 기가 생긴다는 것은 "음했다 양했다 하는 것을 도라고 한다"는 말에서 추론한 것이다.[15] 이 성에는 그 자체로 인과 의가 있다.[16]
1:6 天下未有無理之氣, 亦未有無氣之理. 氣以成形, 而理亦賦焉. 銖(67이후).
천하에 리 없는 기도 없고 기 없는 리도 없다. 기를 가지고 형태가 만들어지고 리도 거기에 부여된다.
1:7 先有箇天理了, 卻有氣. 氣積爲質, 而性具焉. 敬仲(62때).
먼저 천리가 있고서 기가 있다. 기가 쌓여 질이 되고 본성이 거기 갖추어져 있다.
1:8 問理與氣. 曰: “伊川說得好, 曰: ‘理一分殊.’ 合天地萬物而言, 只是一箇理; 及在人, 則又各自有一箇理.” 蘷孫(68이후).
리와 기에 관하여 물었다.
답: 이천이 잘 말하였다. '리는 하나이나 개별 케이스로 나누어진다(理一分殊)'. 천지만물을 합하여 말하자면 하나의 리가 있을 뿐이다. 사람으로 말하자면 각자가 리를 하나씩 가지고 있다.
1:9 問理與氣.
리와 기에 관하여 물었다.
曰: “有是理便有是氣, 但理是本, 而今且從理上說氣. 如云: ‘太極動而生陽, 動極而靜, 靜而生陰.’ 不成動已前便無靜. 程子曰: ‘動靜無端.’ 蓋此亦是且自那動處說起. 若論著動以前又有靜, 靜以前又有動, 如云: ‘一陰一陽之謂道, 繼之者善也.’ 這‘繼’字便是動之端. 若只一開一闔而無繼, 便是闔殺了.”
답: 리가 있고서 기가 있다. 다만 리가 근본이므로 지금은 일단 리로부터 기를 설명하는 것이다. '태극이 움직여 양을 낳고 움직임이 극에 이르러 고요해지고, 고요함이 음을 낳는다.' 같은 경우, 움직임 이전에 고요함이 없었다는 말이 아니다. 정자(程子)는 '움직임과 고요함에 중단점[17]이 없다고 하였는데 이것 역시 아마 저 움직임 부분에서부터 말을 시작해서 그런 것이다. 따지고 보면 움직임 이전에는 또 고요함이 있고 고요함 이전에는 또 움직임이 있다. '음했다 양했다 하는 것을 도라고 한다. 그것을 이어서 계속하는 것이 선이다' 같은 경우, 이 '이어서 계속하다'는 것이 움직임의 단서(시작점)이다. 만약 한 번 열렸다 닫혔다 하고서 그 뒤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그냥 닫히고 끝나버린다.
又問: “繼是動靜之間否?”
재질문: 이어서 계속한다는 부분은 움직임과 고요함의 중간지점 아닙니까?
曰: “是靜之終, 動之始也. 且如四時, 到得冬月, 萬物都歸窠了; 若不生, 來年便都息了. 蓋是貞復生元, 無窮如此.”
답: 고요함의 끝, 움직임의 시작이다. 사계절로 말하자면 겨울철에 이르러 만물은 모두 보금자리로 돌아가버린다. 만약 다시 생겨나지 않으면 내년에는 (세계의 순환이) 모두 종식되어버릴 것이다. 대개 정에서 원이 다시 태어나니[18] 이처럼 끝이 없다.
又問: “元亨利貞是備箇動靜陰陽之理, 而易只是乾有之?”
재질문: 원/형/이/정은 동정음양의 리를 갖추고 있는데 주역에서는 어째서 건괘만 (이 네 덕목을 빠짐 없이) 가지고 있는 건가요?[19]
曰: “若論文王易, 本是作‘大亨利貞’, 只作兩字說. 孔子見這四字好, 便挑開說了. 所以某嘗說, 易難看, 便是如此. 伏羲自是伏羲易, 文王自是文王易, 孔子因文王底說, 又卻出入乎其間也.”
대답: 논해보자면 문왕역은 본래 '크게 형통하고 올곧음이 이롭다'라고 두 단락으로 끊어지게 쓴 것이다.[20] 공자는 이 네 글자가 좋다고 보아 하나하나 나누어 해설한 것이다.[21] 그래서 내가 전에 주역은 읽기 어렵다고 한 이유가 이와 같다. 복희에게는 복희역이 있고 문왕에게는 문왕역이 있는데 공자는 문왕의 설에 의거하면서도 또 그 사이에 넣고 뺀 것이 있다.[22]
又問: “有是理而後有是氣. 未有人時, 此理何在?”
재질문: 리가 있고서 기가 있다고 하셨는데, 사람이 생기기 전에는 이 리가 어디에 있었습니까?
曰: “也只在這裏. 如一海水, 或取得一杓, 或取得一擔, 或取得一碗, 都是這海水. 但是他爲主, 我爲客; 他較長久, 我得之不久耳.” 蘷孫(68이후). 義剛錄同.
대답: 역시 여기 있었다. 바닷물로 비유하자면 누군가는 한 숟갈 떠가고 누군가는 한 짐 지고가고 누군가는 한 사발 퍼가지만 결국 다 같은 바닷물이다. 다만 저쪽(바닷물)이 주인이고 내가 손님이며 저쪽은 비교적 오래가고 내가 떠온 것은 오래가지 않을 뿐이다.
1:10 問: “先有理, 抑先有氣?”
질문: 리가 먼저 있습니까 아니면 기가 먼저 있습니까?
曰: “理未嘗離乎氣. 然理形而上者, 氣形而下者. 自形而上下言, 豈無先後! 理無形, 氣便粗, 有渣滓.” 淳(61·70때).
대답: 리는 기를 떠난 적이 없다. 하지만 리는 형이상자요 기는 형이하자다. 형이상과 형이하로 말하자면 어찌 선후가 없겠나? 리는 형체가 없으나 기는 거칠어[23] 찌꺼기(渣滓)[24]가 있다.
1:11 或問: “必有是理, 然後有是氣, 如何?”
누군가의 질문: 반드시 리가 있고 나서 기가 있다고 하면 어떻습니까?
曰: “此本無先後之可言. 然必欲推其所從來, 則須說先有是理. 然理又非別爲一物, 卽存乎是氣之中; 無是氣, 則是理亦無掛搭處. 氣則爲金木水火, 理則爲仁義禮智.” 人傑(51이후).
대답: 이건 본래 선후를 말할 수 없다. 그러나 (세계가) 어디서 나왔는지 기어코 추론하고자 한다면야 반드시 리가 먼저 있어야 한다. 하지만 리는 또 별개의 사물이 아니요 기 속에 존재한다. 기가 없으면 리 또한 붙어있을 곳이 없다. 기는 금, 목, 수, 화요 리는 인, 의, 예, 지 이다.
1:12 或問“理在先, 氣在後”.
누군가의 질문: 리가 먼저 있고 기는 나중에 있습니다.
曰: “理與氣本無先後之可言. 但推上去時, 卻如理在先, 氣在後相似.”
대답: 리와 기는 본래 선후를 말할 수 없다. 그러나 (시간을 거슬러 근원을) 추론해 보면 리가 먼저 있고 기가 나중에 있는 듯하다.
又問: “理在氣中發見處如何?”
재질문: 기 가운데 리가 발현되는 곳은요?
曰: “如陰陽五行錯綜不失條緖, 便是理. 若氣不結聚時, 理亦無所附著. 故康節云: ‘性者, 道之形體; 心者, 性之郛郭; 身者, 心之區宇; 物者, 身之舟車.’”
대답: 예컨대 음양오행이 복잡하게 교차하고 섞이면서도 질서를 잃지 않는 것이 바로 리이다. 기가 모이고 응결하지 않으면 리도 붙을 곳이 없다. 그래서 강절이 말하기를 '본성이란 도의 형체요[25] 마음이란 본성의 성곽이며[26] 신체란 마음의 집(區宇)이요[27] 사물은 신체(를 태워주는) 배와 수레이다'[28]라 하였다.
問道之體用.
도의 본체와 작용에 관한 질문
曰: “假如耳便是體, 聽便是用; 目是體, 見是用.” 祖道(68때).
대답: 예컨대 귀가 본체라면 들음(hearing)은 작용이다. 눈이 본체라면 봄(seeing)은 작용이다.
1:13 或問先有理後有氣之說.
어떤 이가 '리가 먼저 있고 기가 뒤에 있다'라는 설에 관하여 물었다.
曰: “不消如此說. 而今知得他合下是先有理, 後有氣邪; 後有理, 先有氣邪? 皆不可得而推究. 然以意度之, 則疑此氣是依傍這理行. 及此氣之聚, 則理亦在焉. 蓋氣則能凝結造作, 理卻無情意, 無計度, 無造作. 只此氣凝聚處, 理便在其中. 且如天地間人物草木禽獸, 其生也, 莫不有種, 定不會無種子白地生出一箇物事, 這箇都是氣. 若理, 則只是箇淨潔空闊底世界, 無形跡, 他卻不會造作; 氣則能醞釀凝聚生物也. 但有此氣, 則理便在其中.” 僩(69이후).
대답: 그렇게 말할 필요는 없다. 원래(合下) 먼저 리가 있고 뒤에 기가 있는지, 아니면 뒤에 리가 있고 먼저 리가 있는지 지금 알 수 있을까(知得他)? 이건 모두 추론하고 연구할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아마 이 기는 이 리에 의지하여 운행할 것이다. 기가 모이면 리 역시 거기 있다. 대개 기는 응결하고 조작하는 것이 가능하지만 리의 경우는 정의도 계탁도 조작도 없다. 리는 그저 이 기가 모인 곳에 존재하고 있을 뿐이다. 예컨대 하늘과 땅 사이에 사람과 사물과 금수와 초목이 태어날 적에는 반드시 종자가 있게 마련이다. 종자 없이 무언가가 느닷없이 태어나는 일은 결코 불가능하다. 이것들은 모두 기의 차원이다. 리의 경우는 그저 정결공활(潔空闊底)한 세계이니, 형체도 흔적도 없고 조작도 할 수 없다. 기는 숙성되고 응결하여 만물을 만들어낼 수 있다. 단, 이 기가 있으면 그 안에는 리가 있다.
1:14 問: “有是理便有是氣, 似不可分先後?”
질문: 리가 있고서 기가 있다고 하는데 선후를 나눌 수 없을 것 같습니다.
曰: “要之, 也先有理. 只不可說是今日有是理, 明日卻有是氣; 也須有先後. 且如萬一山河大地都陷了, 畢竟理卻只在這裏.” 胡泳(69때).
대답: 역시 리가 먼저 있다는 것이 요점이다. 단지 오늘 리가 있고 내일 기가 있다는 식으로 말해서는 안 될 뿐, 선후는 꼭 있어야 한다. 이제 예를 들어 만일 산하대지가 모두 붕괴한다고 해도 리는 틀림없이 여기 (그대로) 있을 것이다.
1:15 徐問: “天地未判時, 下面許多都已有否?”
서우(徐寓)[29]의 질문: 천지가 갈라지기 전에도 그 아래쪽의 허다한 것들을 모두 이미 있지 않았습니까?
曰: “只是都有此理, 天地生物千萬年, 古今只不離許多物.” 淳(61·70때).
대답: (허다한 것들) 모두 (허다한 것들의)리를 가지고 있었다.[30] 천지가 만물을 낳은지 천만년이 되도록 (허다한 것들의 리는) 언제나 허다한 것들을 떠난 적이 없다.[31]
<天地.> (여기서부터는) 천지에 관한 것들.[32]
1:16 問: “天地之心亦靈否? 還只是漠然無爲?”
질문: 천지의 마음에도 인지기능이[33]있습니까? 아니면 그저 멍하니[34] 아무 것도 하지 않습니까?[35]
曰: “天地之心不可道是不靈, 但不如人恁地思慮. 伊川曰: ‘天地無心而成化, 聖人有心而無爲.’” 淳(61·70때).
대답: 천지의 마음에 인지기능이 없다고 할 순 없지만 사람처럼 사려하는 것은 아니다. 이천은 '천지는 무심하나 (세계의) 변화를 만들어가고 성인은 유심하나 개입하여 일을 벌이지 않는다.'라고 했다.[36]
1:17 問: “天地之心, 天地之理. 理是道理, 心是主宰底意否?”
질문: '천지의 마음, 천지의 리' 라고 할 때 리는 도리, 마음은 주재한다[37]는 뜻 아닙니까?
曰: “心固是主宰底意, 然所謂主宰者, 卽是理也, 不是心外別有箇理, 理外別有箇心.”
대답: '마음'에는 실제로 주재한다는 뜻이 있다. 하지만 이른바 주재자는 곧 리이다. 마음 밖에 별개로 리가 있고 리 밖에 별개로 마음이 있는 것이 아니다.
又問: “此‘心’字與‘帝’字相似否?”
재질문: 이 '심(心)'이라는 글자는 '제(帝)'[38]라는 글자와 비슷한 것입니까?
曰: “‘人’字似‘天’字, ‘心’字似‘帝’字.” 蘷孫(68이후). 義剛同.
대답: '인(人)'자와 '천(天)'자가 비슷하고 '심'자와 '제'자가 비슷하다.[39]
1:18 道夫言: “向者先生敎思量天地有心無心. 近思之, 竊謂天地無心, 仁便是天地之心. 若使其有心, 必有思慮, 有營爲. 天地曷嘗有思慮來! 然其所以‘四時行, 百物生’者, 蓋以其合當如此便如此, 不待思維, 此所以爲天地之道.”
도부: 저번에 선생님께서 천지에 마음이 있는지 없는지 생각해보라고 하셨습니다. 요즘 생각해보니 천지에는 (다른) 마음이 없고 인(仁)이 곧 천지의 마음 같습니다. 만약 마음이 있다고 한다면 반드시 사려[40]가 있고 영위함[41]이 있을 터인데 천지에 언제 한 번이라도 그런 사려가 있었겠습니까? 하지만 '사계절이 진행되고 만물이 창생하는' 이유는 대개 당연히 이러해야 하므로 이러한 것이지 (천지가 이런 방면으로) 사유한다는 전제 하에 이렇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천지의 도가 되는 것입니다.
曰: “如此, 則易所謂‘復其見天地之心’, ‘正大而天地之情可見’, 又如何? 如公所說, 祇說得他無心處爾. 若果無心, 則須牛生出馬, 桃樹上發李花, 他又卻自定. 程子曰: ‘以主宰謂之帝, 以性情謂之乾.’ 他這名義自定, 心便是他箇主宰處, 所以謂天地以生物爲心. 中間欽夫以爲某不合如此說. 某謂天地別無勾當, 只是以生物爲心. 一元之氣, 運轉流通, 略無停間, 只是生出許多萬物而已.”
대답: 그렇다면 주역에서 이른바 '복(復)에서 천지의 마음(心)을 본다'[42]는 것과 '바르고 크니(正大) 천지의 실정(情)을 볼 수 있다'[43]는 건 또 어떻게 되는가? 그대의 말과 같다면 천지의 '마음 없는(무심)' 측면만 말한 것일 뿐이다. 과연 정말로 무심하다면 반드시 소가 말을 낳고 복숭아나무에 배꽃이 필 것인데 천지의 작동은 (그렇지 않고) 오히려 일정하게 정해져 있다. 정자가 말하기를 '주재의 측면에서 말하자면 '제'이고 성질(性情)의 측면에서 말하자면 '건'이다.'[44]고 하였는데, 이 명의(名義)는 확정적이다. 마음은 천지의 주재자로서의 측면이다. 그래서 '천지는 만물을 낳는 것을 자기 마음으로 삼는다'고 한 것이다. 흠부[45]는 중간에 '자네는 이렇게 말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는데 나는 '천지는 달리 담당(勾當)하는 것이 없고 그저 만물을 낳는 것을 자기 마음으로 삼는다'고 하였다. 하나의 근원에서 나온 기(一元之氣)가 잠시도 멈추지 않고 두루 흘러 만물을 산출해낼 뿐이다.
問: “程子謂: ‘天地無心而成化, 聖人有心而無爲.’”
질문: 정자가 말한 '천지는 무심하나 (세계의) 변화를 만들어가고 성인은 유심하나 개입하여 일을 벌이지 않는다.'는요?
曰: “這是說天地無心處. 且如‘四時行, 百物生’, 天地何所容心? 至於聖人, 則順理而已, 復何爲哉! 所以明道云: ‘天地之常, 以其心普萬物而無心; 聖人之常, 以其情順萬事而無情.’ 說得最好.”
대답: 이는 천지의 마음 없는(무심) 측면을 말한 것이다. 예컨대 '사계절이 진행되고 만물이 창생하는' 데에 천지가 어디 마음 쓸 틈이 있겠는가? 성인의 경우는 리(이치)에 순응할 뿐이니 다시 무슨 개입을 하겠는가? 그래서 명도가 '천지가 항상한 것은[46] 자신의 마음이 만물에 두루 미치면서도 무심(마음 없는)하기 때문이요,[47] 성인이 항상한 것은 자신의 감정이 만사에 순응하면서도 무정(감정 없는)하기 때문이다.'고 하였는데, 아주 잘 말했다.
問: “普萬物, 莫是以心周遍而無私否?”
질문: 만물에 두루 미친다는 것은 마음이 두루 미치되 사심/사의(私)는 없다는 것 아닙니까?
曰: “天地以此心普及萬物, 人得之遂爲人之心, 物得之遂爲物之心, 草木禽獸接著遂爲草木禽獸之心, 只是一箇天地之心爾. 今須要知得他有心處, 又要見得他無心處, 只恁定說不得.” 道夫(60이후).
대답: 천지가 이 마음으로 만물에 두루 미치는데 사람이 이것을 얻으면 사람의 마음이 되고 사물이 이것을 얻으면 사물의 마음이 되고 금수초목이 이것에 접하면 금수초목의 마음이 되지만 결국 다 천지의 마음일 뿐이다. 이제 천지의 '마음 있는(유심)' 측면을 알아야 하고 또 '마음 없는(무심)' 측면도 알아야 한다. 그저 (자네가 처음 한 말처럼 유심과 무심 가운데 한쪽으로) 정해서 말할 수 없다.[48]
1:19 萬物生長, 是天地無心時; 枯槁欲生, 是天地有心時. 方(41때).
만물의 생장은 천지가 무심한 경우이다. 시든 것이 되살아나려 하는 것은 천지가 유심한 경우이다.
1:20 問: “‘上帝降衷于民.’ ‘天將降大任於人.’ ‘天祐民, 作之君.’ ‘天生物, 因其才而篤.’ ‘作善, 降百祥; 作不善, 降百殃.’ '天將降非常之禍於此世, 必預出非常之人以擬之.' 凡此等類, 是蒼蒼在上者眞有主宰如是邪? 抑天無心, 只是推原其理如此?”
질문: '상제가 백성들에게 충(衷)[49]을 내려주셨다'[50], '하늘이 어떤 사람에게 큰 임무를 내려줄 적에는...'[51], '하늘이 백성을 도우사 임금을 세우고'[52], '하늘이 만물을 낳을 적에 반드시 각자의 재능에 맞게 독려한다.'[53], '선행에는 많은 복을 내리고 악행에는 많은 화를 내린다.'[54] 하늘이 이 세상에 특별한 재앙을 내리려 할 적에 반드시 먼저 특별한 사람을 내어서 대비하게 한다.'[55] 이런 말들은 정말로 저 위쪽의 푸른 것[56]이 이렇게 주재(=컨트롤)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하늘은 무심하고 그저 그 리를 따져보니 이와 같을 뿐이라는 것입니까?
曰: “此三段只一意. 這箇也只是理如此. 氣運從來一盛了又一衰, 一衰了又一盛, 只管恁地循環去, 無有衰而不盛者. 所以降非常之禍於世, 定是生出非常之人. 邵堯夫經世吟云: ‘義軒堯舜, 湯武桓文, 皇王帝霸, 父子君臣. 四者之道, 理限于秦, 降及兩漢, 又歷三分. 東西俶擾, 南北紛紜, 五胡·十姓, 天紀幾棼. 非唐不濟, 非宋不存, 千世萬世, 中原有人!’ 蓋一治必又一亂, 一亂必又一治. 夷狄只是夷狄, 須是還他中原.” 淳(61·70때).
대답: 이 세 단락[57]은 그 뜻이 동일하다. 이는 그저 리(理)가 그렇다는 말이다. 기의 운행은 원래 성하면 또 쇠하고 쇠하면 또 성한다. 그저 이렇게 순환해 갈 뿐이니 쇠하고서 성하지 않는 경우가 없다. 그러므로 특별한 재앙을 세상에 내릴 때 반드시 특별한 사람이 태어나는 것이다. 소요부(邵堯夫)의 경세음(經世吟)[58]에서 '복희, 헌원, 요, 순, 탕, 무, 제환공, 진문공은 황,[59] 왕,[60] 제,[61] 패[62]에 해당한다. 군/신/부/자, 이 네 가지 도리[63]는 진(秦)나라의 통일과 함께 끝났고[64] 양한(兩漢)에 이르러서는 다시 삼분할[65]을 겪었다. 동서로 남북으로 어지럽게 난리가 났다. 다섯 오랑캐[66]와 열개의 성씨[67]로 인하여 하늘의 기강이 매우 문란했으니 당나라가 아니면 구제하지 못하고 송나라가 아니면 보존하지 못한다. 천세만세토록 중원에 사람이 있구나!'라고 하였다. 대개 치하면 꼭 다시 란하고 란하면 꼭 다시 치한다.[68] 오랑캐는 오랑캐일 뿐이다. 반드시 중원을 수복해야 한다.
1:21 帝是理爲主. 淳(61·70때).
제는 리가 주재라는 것이다.[69]
1:22 蒼蒼之謂天. 運轉周流不已, 便是那箇. 而今說天有箇人在那裏批判罪惡, 固不可; 說道全無主之者, 又不可. 這裏要人見得. 僩(69이후).
저 푸른 것을 하늘이라고 한다. 끝없이 운행하고 두루 통하기를 그치지 않는 저것이 바로 그것이다. 지금처럼 하늘에 무슨 사람이 있어서 그 속에서 인간의 죄악을 심판한다고 말하는 것은 물론 안 되지만 주재(=컨트롤)함이 전혀 없다고 말하는 것도 안 된다. 사람들이 이 점을 잘 살펴봐야 한다.
<又僩問經傳中“天”字. 曰: “要人自看得分曉, 也有說蒼蒼者, 也有說主宰者, 也有單訓理時.”>
한(僩)이 또 경전 속에 나오는 '천'자에 대해 묻자 대답하기를 "각자 스스로 분명하게 알아야 한다. 푸른 것을 말한 경우도 있고 주재를 말한 경우도 있고 단순히 법칙(리)으로 풀이하는 경우도 있다.[70]
1:23 天地初間只是陰陽之氣. 這一箇氣運行, 磨來磨去, 磨得急了, 便拶許多渣滓; 裏面無處出, 便結成箇地在中央. 氣之淸者便爲天, 爲日月, 爲星辰, 只在外, 常周環運轉. 地便只在中央不動, 不是在下. 淳(61·70때).
천지는 처음에 그저 음기와 양기일 뿐이었다. 이 기가 운행하여 상호 마찰하는데, 마찰 속도가 빨라지면 (압력으로) 수많은 찌꺼기를 쥐어짜 배출한다.[71] (하지만) 안쪽으로는 짜서 배출할 곳이 없으므로 한가운데에 뭉쳐서 땅이 된다. 맑은 기는 하늘이 되고 해와 달이 되고 별들이 된다. 이들은 그저 바깥쪽에 위치하여 늘 회전한다. 땅은 한가운데 있으면서 움직이지 않는다. (땅이 하늘의) 아래쪽에 있는 것이 아니다.[72]
1:24 淸剛者爲天, 重濁者爲地. 道夫(60이후).
맑고 굳센[73] 것은 하늘이 되고 무겁고 탁한 것은 땅이 된다.
1:25 天運不息, 晝夜輾轉, 故地搉在中間. 使天有一息之停, 則地須陷下. 惟天運轉之急, 故凝結得許多渣滓在中間. 地者, 氣之渣滓也, 所以道“輕淸者爲天, 重濁者爲地”. 道夫(60이후).
하늘의 운행은 쉬지 않아서 밤과 낮이 번갈아 온다. 그러므로 땅은 단단히(搉)[74] 그 가운데 있다. 만약 하늘이 한 번이라도 쉬어버린다면 땅은 반드시 떨어질 것이다. 오직 하늘이 빠르게 운행하기 때문에 (기가) 응결하여 저 많은 찌꺼기(渣滓) 덩어리들이 그 가운데 있을 수 있는 것이다. 땅은 기의 찌꺼기 덩어리이다. 그래서 "가볍고 맑은 것은 하늘이 되고 무겁고 탁한 것은 땅이 된다"고 말한다.
1:26 天以氣而依地之形, 地以形而附天之氣. 天包乎地, 地特天中之一物爾. 天以氣而運乎外, 故地搉在中間, 隤然不動. 使天之運有一息停, 則地須陷下. 道夫(60이후).
하늘의 기는 땅의 형체에 기대고 땅의 형체는 하늘의 기에 붙어있다. 하늘은 땅을 포괄하니 땅은 하늘 가운데 한 물건일 뿐이다. 하늘의 기가 바깥에서 운행하므로 땅은 단단히[75] 그 가운데 있으면서 가만히(隤然)[76] 움직이지 않는다. 만약 하늘의 운행이 한 번이라도 중단된다면 땅은 떨어질 것이다.
1:27 天包乎地, 天之氣又行乎地之中, 故橫渠云: ‘地對天不過.’ 振(미상).
하늘은 땅을 포괄한다. 하늘의 기는 땅 속에서도 운행한다. 그래서 횡거[77]가 말하길 "땅은 하늘의 짝이 되지 못한다."[78]고 하였다.
1:28 地卻是有空闕處. 天卻四方上下都周匝無空闕, 逼塞滿皆是天. 地之四向底下卻靠著那天. 天包地, 其氣無不通. 恁地看來, 渾只是天了. 氣卻從地中迸出, 又見地廣處. 淵(64때).
땅은 빈 데가 있지만 하늘은 상하사방 모두 두루 차서 빈 데가 없다. 가득 찬 것이 모두 하늘이다. 땅의 네 모퉁이와 아래쪽 부분은 하늘에 의지한다.[79] 하늘은 땅을 포함하며 그 기가 통하지 않는 곳이 없다. 이렇게 보면 모두 하늘일 뿐이다. (하늘의) 기가 오히려 땅 속에서 솟아나오는 데서 또 땅의 광활함을 볼 수 있다.[80]
1:29 季通云: “地上便是天.” 端蒙(50이후).
계통[81]이 말했다. "하늘 위가 곧 땅이다."
1:30 天只是一箇大底物, 須是大著心腸看他, 始得. 以天運言之, 一日固是轉一匝; 然又有大轉底時候, 不可如此偏滯求也. 僩(69이후).
하늘은 큰 물건이라서 마음을 크게 열고 보아야 이해가 된다. 하늘의 운행으로 말할 것 같으면 물론 하루에 한 번 회전한다. 하지만 크게 회전하는 때도 있으므로[82] 이렇게 (하루에 1회전이라는) 편견에 사로잡힌 채 탐구해서는 안 된다.
1:31 天明, 則日月不明. 天無明. 夜半黑淬淬地, 天之正色. 僩(69이후).
하늘이 밝으면 해와 달은 밝지 않을 것이다. 하늘은 밝지 않다. 한밤중의 캄캄한 어둠이 하늘의 본래 색깔이다.
1:32 山河大地初生時, 須尙軟在.
산하대지가 처음 생길 때에는 분명 여전히 물렁했을 것이다.[83]
<氣質.> 方子(59이후).
여기서부터 기질에 관한 내용이다.[84]
1:33 “天地始初混沌未分時, 想只有水火二者. 水之滓脚便成地. 今登高而望, 群山皆爲波浪之狀, 便是水泛如此. 只不知因甚麽時凝了. 初間極軟, 後來方凝得硬.”
태초에 하늘과 땅이 아직 나뉘지 않아 한덩어리였을 적에는 내 생각에 그저 물과 불만 있었을 것 같다. 물(이 응고한) 찌꺼기 덩어리가 땅이 된다. 이제 높은 곳에 올라가 둘러보면 뭇 산들이 모두 파도치는 모양새이니, 물이 넘실거리는 것이 이와 같다. 다만 언제 (물이) 응고되었는지 (=땅이 되었는지) 알 수 없을 뿐이다. 처음에는 지극히 물렁했을 것이나 후에 바야흐로 응결하여 딱딱해졌을 것이다.
問: “想得如潮水湧起沙相似?”
질문: 제 생각에 조수(潮水)가 모래를 밀어 올리는 것과 비슷합니다.
曰: “然. 水之極濁便成地, 火之極淸便成風霆雷電日星之屬.” 僩(69이후).
대답: 그렇다. 물이 지극히 탁해지면 땅이 된다. 불이 지극히 맑아지면 바람과 천둥과 번개와 해와 별 따위가 된다.
1:34 西北地至高. 地之高處, 又不在天之中. 義剛(64이후).
서북지방은 땅이 매우 높다. 땅이 높은 곳은 하늘의 중앙지점에 있지 않다.
1:35 唐太宗用兵至極北處, 夜亦不曾太暗, 少頃卽天明. 謂在地尖處, 去天地上下不相遠, 掩日光不甚得. 揚(54-6때).
당태종이 병력을 이끌고 북쪽 끝에 이르렀는데 밤에도 딱히 어둡지 않았고 잠시 기다리면 날이 다시 밝아졌다. 땅 끝 지역은 하늘과 땅 사이의 거리가 멀지 않아서 햇빛을 잘 가리지 못해서이다.[85]
1:36 地有絶處. 唐太宗收至骨利幹, 置堅昆都督府. 其地夜易曉, 夜亦不甚暗, 蓋當地絶處, 日影所射也. 其人髮皆赤. 揚(54-6때).
땅에는 끝나는 지점이 있다. 당태종이 골리간[86]을 거두고 견곤도독부(堅昆都督府)[87]를 설치하였다. 이 지역은 밤이 짧아 금방 샜고 밤중에도 그다지 어둡지 않았다. 아마 땅이 끝나는 곳에 있어서 햇빛에 쏘여서 그랬을 것이다.[88] 이 지역 사람들은 모두 머리카락이 붉다.
1:37 通鑑說, 有人適外國, 夜熟一羊脾而天明. 此是地之角尖處. 日入地下, 而此處無所遮蔽, 故常光明; 及從東出而爲曉, 其所經遮蔽處亦不多耳. 義剛(64이후).
통감의 어느 부분에서 어떤 사람이 외국에 갔는데 밤에 양다리 하나를 삶는 사이에 날이 밝았다고 한다. 이는 땅이 끝나는 지점이다. 해가 땅 아래로 들어가도 이 곳은 차폐물이 없어서 늘 밝다. 동쪽에서 해가 나와 새벽이 될 때에도 거쳐가는 차폐물이 또한 많지 않다.
1:38 問: “康節論六合之外, 恐無外否?”
질문: 강절이 육합[89]의 바깥을 논했는데, 바깥이 없지 않습니까?
曰: “理無內外, 六合之形須有內外. 日從東畔升, 西畔沉, 明日又從東畔升. 這上面許多, 下面亦許多, 豈不是六合之內! 曆家算氣, 只算得到日月星辰運行處, 上去更算不得. 安得是無內外!” 淳(61·70때).
대답: 리에는 안과 밖이 없다. 하지만 육합은 형체가 있으니 분명 안과 밖이 있을 것이다. 해는 동쪽 끝에서 뜨고 서쪽 끝으로 지며 다음날 또 동쪽 끝에서 뜬다. 이 위에도 많은 것들이 있고 이 밑에도 많은 것들이 있지만 어찌 모두 육합 안쪽이 아니겠나? 역가(曆家)들이 기를 계산할 때에도 그저 해/달/별들의 운행을 계산할 수 있을 뿐 그 이상은 계산하지 못한다. 어찌 안과 밖이 없다고 하겠는가?
1:39 問: “自開闢以來, 至今未萬年, 不知已前如何?”
질문: 천지개벽 이래로 지금까지 만년이 채 되지 않았습니다. 개벽 이전에는 어땠을까요?
曰: “已前亦須如此一番明白來.”
대답: 이전에도 분명 이렇게 한 차례 개벽[90]했었을 것이다.
又問: “天地會壞否?”
재질문: 천지도 붕괴할 수 있습니까?
曰: “不會壞. 只是相將人無道極了, 便一齊打合, 混沌一番, 人物都盡, 又重新起.”
대답: 붕괴할 수 없다. 다만 점차(相將)[91] 사람들의 무도함이 극에 달하면 일제히 융합하여 한 차례 뒤섞여서 사람과 만물이 모두 소멸하고 또 다시 새로 시작할 것이다.
問: “生第一箇人時如何?”
질문: 첫 번째 사람은 어떻게 생겨납니까?
曰: “以氣化. 二五之精合而成形, 釋家謂之化生. 如今物之化生甚多, 如虱然.” 揚(54-6때).
대답: 기화(氣化)로 생겨난다.[92] 음양과 오행의 정수가 모여서 형체를 이루는데 불교에서는 이를 화생(化生)이라고 한다. 지금 만물 가운데 화생하는 것들이 매우 많은데 이(虱)같은 것들이 그렇다.
1:40 “天地不恕”, 謂肅殺之類. 振(미상).
천지가 너그럽지 않다(不恕)하다는 것은 가을날의 엄혹한 기운(肅殺) 따위를 말하는 것이다.[93]
1:41 可幾問: “大鈞播物, 還是一去便休, 也還有去而復來之理?” 曰: “一去便休耳, 豈有散而復聚之氣!” 道夫(60이후).
노가기가 물었다. "천지가 만물을 화생할 때[94] 한 번 가버리면 그만입니까 아니면 한 번 가고 나서 다시 돌아오는 이치(理)가 있는 것입니까?"
선생님이 답했다. "한 번 가버리면 그만일 뿐이다. 어떻게 흩어진 다음 다시 모이는 기가 있더냐?" - 양도부의 기록
<氣.>
이 아래로 기에 관한 조목.
1:42 造化之運如磨, 上面常轉而不止. 萬物之生, 似磨中撒出, 有粗有細, 自是不齊. 又曰: “天地之形, 如人以兩盌相合, 貯水於內. 以手常常掉開, 則水在內不出; 稍住手, 則水漏矣.” 過(65이후).
"조화의 과정은 마치 맷돌의 윗면이 돌아가는 것처럼 멈추지 않는다. 만물의 생성은 맷돌 안에서 내용물이 흩어져 나올 때 거친 것이 있고 미세한 것도 있는 것처럼 본래부터 일정하지 않다."
다시 말했다. "천지의 형태는 마치 사람이 밥그릇 두 개를 서로 합치고서 물을 그 안에 담아두는 것과 같다. 이 상태에서는 손으로 멈추지 않고 회전시키면 물은 안에 있으면서 빠져나오지 않는다.[95] 하지만 잠시라도 손을 멈추면 물이 새어 나온다." - 왕과의 기록
1:43 問氣之伸屈. 曰: “譬如將水放鍋裏煮, 水旣乾, 那泉水依前又來, 不到得將已乾之水去做它.” 蘷孫(68이후).
기의 굴신(伸屈)[96]에 대하여 물어보았다.
답했다. "이는 솥 안에 물을 넣고 끓이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 물이 증발하고 나면 저 샘물을 다시 가지고 와서 붓는다. 이미 증발해버린 물을 가지고 와서 끓일 수 없다." - 임기손의 기록
1:44 人呼氣時, 腹卻脹; 吸氣時, 腹卻厭. 論來, 呼而腹厭, 吸而腹脹, 乃是. 今若此者, 蓋呼氣時, 此一口氣雖出, 第二口氣復生, 故其腹脹; 及吸氣時, 其所生之氣又從裏趕出, 故其腹卻厭. 大凡人生至死, 其氣只管出, 出盡便死. 如吸氣時, 非是吸外氣而入, 只是住得一霎時, 第二口氣又出, 若無得出時便死. 老子曰: “天地之間, 其猶橐籥乎, 動而不屈, 虛而愈出.” 橐籥只是今之鞴扇耳. 廣(65이후).
사람이 (공)기를 내쉴 때에 복부는 오히려 팽창하고 (공)기를 들이쉴 때에 복부는 오히려 수축한다. 따져보면 내쉴 때 복부가 수축하고 들이쉴 때 복부가 팽창해야 맞을 것 같은데도 지금 이렇게 반대인 까닭은 무엇인가. 기를 내쉴 때에 비록 이 기 한 모금은 나가지만[97] 그 다음(第二) 기 한 모금이 다시 생겨나기 때문에[98]복부가 팽창하는 것이요 기를 들이쉴 때에는 (내쉴 적에) 속에서 생성되었던 바로 그 기가 다시 안쪽으로 나가버리기 때문에 복부가 오히려 수축하는 것이다. 대개 사람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자신이 가진 기가 유출되기만 하는데 다 나가면 죽는다. 기를 들이쉬는 경우에도 바깥의 기를 안쪽으로 들이마시는 것이 아니다. (들이마신 기가) 그저 한 순간 안쪽에 머무는 동안 안쪽에서 그 다음(第二) 모금의 기가 또 나가버린다. 만약 (이때) 기가 나가지 못하면 죽고 만다. 노자가 말하기를 "하늘과 땅 사이는 마치 탁약(풀무)과 같구나. 움직이지만 수축하지 않고 비어있지만 더욱 내보낸다."고 하였다[99]. 탁약은 오늘날 풀무(鞴扇)이다.
1:45 數只是算氣之節候. 大率只是一箇氣. 陰陽播而爲五行, 五行中各有陰陽. 甲乙木, 丙丁火; 春屬木, 夏屬火. 年月日時無有非五行之氣, 甲乙丙丁又屬陰屬陽, 只是二五之氣. 人之生, 適遇其氣, 有得淸者, 有得濁者, 貴賤壽夭皆然, 故有參錯不齊如此. 聖賢在上, 則其氣中和; 不然, 則其氣偏行. 故有得其氣淸, 聰明而無福祿者; 亦有得其氣濁, 有福祿而無知者, 皆其氣數使然. 堯舜禹皐文武周召得其正, 孔孟夷齊得其偏者也. 至如極亂之後, 五代之時, 又卻生許多聖賢, 如祖宗諸臣者, 是極而復者也. <揚錄云: “碩果不食之理.”> 如大睡一覺, 及醒時卻有精神. <揚錄此下云: “今卻詭詐玩弄, 未有醒時. 非積亂之甚五六十年, 卽定氣息未蘇了, 是大可憂也!” >
기수(氣數)[100]는 그저 기의 절기를 계산하는 것이다. 크게 보면 하나의 기일 뿐이다.[101] 음양이 흩어져 오행이 되는데 그 오행 안에는 또 각각 음과 양이 있다. (10간 가운데)갑과 을은 (오행 가운데)목(木)에 해당하고 병과 정은 화(火)에 해당한다. (사계절 가운데) 봄은 (오행 가운데) 목에 속하고 여름은 화에 속한다. 년, 월, 일, 시마다 (거기에 해당하는) 오행이 없는 경우가 없다. 갑/을/병/정은 또 음과 양에 속한다.[102] (그러니 이 모든 것들이) 음양과 오행의 기에 불과하다. 사람이 태어나면 자기 기와 만나게 된다.[103] 맑은 기를 얻는 자도 있고 탁한 기를 얻는 자도 있다. 귀해지고 천해지고 장수하고 요절하는 것이 모두 이러하다.[104] 그러므로 이렇게 들쑥날쑥 균질하지 않고 서로 다른 것이다. 성인과 현인이 윗자리에 있으면 세상의 기가 적절하고 조화롭다(中和). 반대의 경우는 세상의 기가 치우쳐진다. 그러므로 맑은 기를 얻었는데 총명하지만 복록이 없는 자가 있고, 탁한 기를 얻었는데 복록은 있지만 무지한 자가 있다. 이는 모두 기수(氣數)가 그렇게 만든 것이다. 요/순/우/고요/문왕/무왕/주공/소공은 바른 기를 얻었고 공자/맹자/백이/숙제는 치우친 기를 얻은 경우이다.[105] 오대십국 시기처럼 지극한 난세 이후에 본조의 군주와 신하들의 경우처럼 다시 많은 성인과 현인이 세상에 출현하는 것은 (기수가) 한쪽 극단까지 갔다가 다시 되돌아온 경우이다. <포양(揚)의 기록: '나무 꼭대기 과일은 따먹지 않는다는 이치이다>[106] 크게 한 숨 잠들었다 깨어나면 힘이 있는 것과 같다.<포양(揚)의 기록에서는 이 아래에 덧붙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오늘날은 서로 속이고 희롱하기만 하여 깨어있을 때가 없다. 극심한 혼란이 5~60년 누적되지 않으면 결코 기운이 소생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것이 큰 걱정이다.">[107]
1:46 天地統是一箇大陰陽. 一年又有一年之陰陽, 一月又有一月之陰陽, 一日一時皆然. 端蒙(50이후).
천지 전체가 하나의 큰 음양이다. 한 해에는 또 한 해의 음양이 있다. 한 달에는 또 한 달의 음양이 있다. 한 날도 한 시도 모두 그렇다.
<陰陽五行.>
<여기서부터 음양오행에 관한 이야기.>
1:47 陰陽五行之理, 須常常看得在目前, 則自然牢固矣. 人傑(51이후).
음양오행의 리[108]는 마치 눈 앞에 둔 것처럼 늘 생각해야 한다.[109] 그렇게 하면 자연스럽게 (식견/인식이) 견고해진다.
1:48 陰陽是氣, 五行是質. 有這質, 所以做得物事出來. 五行雖是質, 他又有五行之氣做這物事, 方得. 然卻是陰陽二氣截做這五箇, 不是陰陽外別有五行. 如十干甲乙, 甲便是陽, 乙便是陰. 高(65때). 淵同.
음양은 기, 오행은 질이다.[110] 질이 있기 때문에 사물을 만들어낼 수 있다. 오행이 비록 질이지만 또 거기에 오행의 기가 있어야만 사물을 만들 수 있다. 하지만 음/양 두 기가 나뉘어 오행이 되는 것이지 음양 외에 별개로 오행이 있다는 말이 아니다. 예컨대 열 개의 천간 가운데 갑은 양이고 을은 음이다.
1:49 問: “前日先生答書云: ‘陰陽五行之爲性, 各是一氣所稟, 而性則一也.’ 兩‘性’字同否?”
질문: 예전 선생님께서 보내주신 답서[111]에서 '음양오행의 본성은 각각의 기가 (개별적으로) 받은 것이지만,[112] 그 본성은 (결국) 동일하다.'라고 하셨습니다. 앞쪽의 '본성'과 뒤쪽의 '본성'이 같은 단어입니까?[113]
曰: “一般.”
답: 같다.
又曰: “同者理也, 不同者氣也.”
다시 답변: 같은 것은 리이고 같지 않은 것은 기이다.[114]
又曰: “他所以道‘五行之生各一其性.’”
다시 답변: 그래서 그가 '오행이 생겨나면서 각자 자기 본성을 갖는다'고 한 것이다.[115]
節復問: “這箇莫是木自是木, 火自是火, 而其理則一?”
감절의 재질문: 목은 목이고 화는 화인데 그 리는 같습니까?
先生應而曰: “且如這箇光, 也有在硯蓋上底, 也有在墨上底, 其光則一也.” 節(64이후).
선생의 대답: 예컨대 저 빛은 벼루뚜껑 위에도 있고 먹 위에도 있지만 그 빛은 결국 하나이다.
1:50 五行相爲陰陽, 又各自爲陰陽. 端蒙(50이후).
오행은 서로 음/양으로 나뉘어 배속될 수 있지만[116] 또 각자가 자기 안에 음/양을 가지고 있다.[117]
1:51 氣之精英者爲神. 金木水火土非神, 所以爲金木水火土者是神. 在人則爲理, 所以爲仁義禮智信者是也. 植(64때).
매우 빼어난 기가 신(神)이다. 금목수화토는 신이 아니다. 금목수화토를 만들어내는 것이 신이다. 인간에게 있어서는 (신이) 리이다. 인의예지신을 만들어내는 것이 리이다.[118]
1:52 金木水火土雖曰‘五行各一其性’, 然一物又各具五行之理, 不可不知. 康節卻細推出來. 僩(69이후).
금목수화토에 관하여 비록 '오행이 각자 자기 본성을 가진다'고 하였지만 한 물건에 또 오행 모두의 리가 갖추어져 있음을 몰라서는 안 된다. 강절이 이점을 세심히 추론해냈다.
1:53 天一自是生水, 地二自是生火. 生水只是合下便具得濕底意思. 木便是生得一箇軟底, 金便是生出得一箇硬底. 五行之說, 正蒙中說得好.
하늘의 숫자인 1은[119] 자연히 수를 낳고[120] 땅의 숫자인 2는 자연히 화를 낳는다. 수를 낳는다는 것은 원래 습윤한 성질을 포함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목의 경우는[121] 부드러운 것을 낳을 수 있다는 의미이고 금의 경우는[122] 딱딱한 것을 낳을 수 있다는 의미이다. 오행에 관해서는 장재의 정몽이 잘 설명했다.
又曰: “木者, 土之精華也.”
다시 말함: 목은 토의 정수(精華)이다.
又記曰: “水火不出於土, 正蒙一段說得最好, 不胡亂下一字.” 節(64이후).
다시 기억해내서 말함: 수와 화는 토에서 나오지 않는다. 정몽의 이 부분 설명이 아주 좋다. 한 글자도 허투루 쓰지 않았다.
1:54 問: “黃寺丞云: ‘金木水火體質屬土.’”
질문: 황시승이 '금/목/수/화의 체질[123]은 토에 속한다'고 합니다.
曰: “正蒙有一說好, 只說金與木之體質屬土, 水與火卻不屬土.”
정몽에 좋은 구절이 있다. 금과 목의 체질은 토에 속하고 수와 화는 토에 속하지 않는다.
問: “火附木而生, 莫亦屬土否?”
질문: 화는 목에 붙어서 탄생하니 역시 토에 속하는 것 아닙니까?
曰: “火自是箇虛空中物事.”
대답: 화는 (목에 붙어있는 게 아니라) 허공에 있는 것이다.
問: “只溫熱(一作煖)之氣便是火否?”
질문: 따뜻한(溫熱, 다른 판본에서는 煖자를 썼다.) 기(氣)가 곧 화 아닙니까?
曰: “然.” 胡泳(69때). 僩同.
대답: 그렇다.
1:55 水火淸, 金木濁, 土又濁. 可學(62때).
수와 화는 맑고 금과 목은 탁하다. 토는 더욱 탁하다.
1:56 論陰陽五行, 曰: “康節說得法密, 橫渠說得理透. 邵伯溫載伊川言曰: ‘向惟見周茂叔語及此, 然不及先生之有條理也.’ 欽夫以爲伊川未必有此語, 蓋伯溫妄載. 某則以爲此語恐誠有之.” 方子(59이후).
음양오행에 관하여 논하다 말씀하셨다: 강절의 설명은 엄밀하고 장재의 설명은 이치가 투철하다. 소백온이 이천의 말을 기재하기를 '지금까지는 주무숙이 이것을 언급하는 것을 보았을 뿐입니다. 하지만 (그 수준이) 선생님의 조리있는 말씀에는 미치지 못했습니다.'라고 하였다.[124] 흠부는 이천이 이런 말을 했으리란 법이 없으며 아마도 소백온이 멋대로 지어냈을 거라고 생각했다. 나는 실제로 이런 말이 있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1:57 土無定位, 故今曆家以四季之月十八日爲土, 分得七十二日. 若說播五行於四時, 以十干推之, 亦得七十二日. 方子(59이후). 高同.
토에는 정해진 위치가 없다. 그러므로 요즘 역가(曆家)[125]각 계절 마지막 달의 열여덟 날을 토에 주어 (모두) 72일을 배분해준다.[126] 오행을 네 계절에 골고루 배분할 경우 십간으로 미루어 보아도 또한 72일이 된다.[127]
1:58 問: “四時取火, 何爲季夏又取一番?”
질문: 계절마다 한번씩 새롭게 불씨를 취하는데 어째서 늦여름에는 한 번 더 불씨를 취합니까?[128]
曰: “土旺於未, 故再取之. 土寄旺四季, 每季皆十八日, 四箇十八日, 計七十二日. 其他四行分四時, 亦各得七十二日. 五箇七十二日, 共湊成三百六十日也.” 僩(69이후).
대답:토는 미월(음력 6월)에 왕성하다. 그러므로 한 번 더 취하는 것이다. 토는 사계절에 기숙하여 왕성하다. 계절마다 18일씩, 계절이 넷이니 4*18=72일이 된다. 나머지 4행(목/화/금/수)을 사계절에 분배하면 역시 각자 72일씩 얻는다. 72일씩 다섯 개이므로 모두 합하여 360일이 된다.[129]
1:59 問: “古者取火, 四時不同. 不知所取之木旣別, 則火亦異否?”
질문: 고대에 불씨를 취할 때 계절마다 다르게 했습니다. 취한 나무가 달라지면 거기 붙어있는 불도 달라지는 겁니까?
曰: “是如此.” 胡泳(69때).
대답: 그렇다.
1:60 火中有黑, 陽中陰也; 水外黑洞洞地, 而中卻明者, 陰中之陽也. 故水謂之陽, 火謂之陰, 亦得. 伯羽(61때).
화(불) 속에 검은 부분이 있으니 양 속에 있는 음이다. 수(물)의 외면은 새까맣지만 그 속은 오히려 밝으니 음 속의 양이다. 그러므로 수를 양이라고 하고 화를 음이라고 해도 된다.
1:61 陰以陽爲質, 陽以陰爲質. 水內明而外暗, 火內暗而外明. 橫渠曰“陰陽之精, 互藏其宅”, 正此意也. <坎·離.> 道夫(60이후).
음은 양을 자신의 기본베이스(質)로 삼고 양은 음을 자신의 기본베이스(質)로 삼는다. 수는 안쪽이 밝고 바깥쪽은 어둡다. 화는 안쪽이 어둡고 바깥쪽이 밝다. 횡거가 '음양의 정수는 서로 상대방 집에 숨는다'고 한 것이 바로 이런 의미이다.
<坎·離.> 道夫(60이후).
이 아래로 감(坎)괘와 리(離)괘에 관한 조목.
1:62 淸明內影, 濁明外影; 淸明金水, 濁明火日. 僩(69이후).
맑고 밝은 것은 안으로 비추고 탁하고 밝은 것은 바깥으로 비춘다. 맑고 밝은 것은 금/수이고 탁하고 밝은 것은 화/태양(日)이다.
1:63 天有春夏秋冬, 地有金木水火, 人有仁義禮智, 皆以四者相爲用也. 季札(47·66때).
하늘에는 춘하추동이 있고 땅에는 금목수화가 있고 사람에게는 인의예지가 있다. 각각의 경우 네 가지는 상호작용한다.
1:64 春爲感, 夏爲應; 秋爲感, 冬爲應. 若統論, 春夏爲感, 秋冬爲應; 明歲春夏又爲感. 可學(62때).
봄이 감지함[130]이고 여름이 반응함이다. 가을이 감지함이고 겨울이 반응함이다. 총괄하여 논하자면 봄과 여름이 감지함이고 가을과 겨울이 반응함이다. 이듬해 봄과 여름은 또다시 감지함이다.
<四時.>
이 아래로 사계절에 관한 조목.
1:65 問學者云: “古人排十二時是如何?”
학인들에게 질문: 고대에 12시를 어떻게 배치하였는가?
諸生思未得. 先生云: “‘志’是從‘之’, 從‘心’, 乃是心之所之. 古‘時’字從‘之’, 從‘日’, 亦是日之所至. 蓋日至於午, 則謂之午時; 至未, 則謂之未時. 十二時皆如此推. 古者訓‘日’字, 實也; ‘月’字, 缺也. 月則有缺時, 日常實, 是如此. 如天行亦有差, 月星行又遲, 趕它不上. 惟日, 鐵定如此.”
모두들 생각해보아도 알 수 없었다. 선생의 발언: 지(志)자는 지(之: 가다)와 심(心: 마음)으로 이루어졌으니 곧 '마음이 가는 곳'이라는 뜻이다.[131] 고대의 시(時)자는 지(之: 가다)와 일(日: 태양)으로 이루어졌으니 역시 '태양이 이르는 곳'이라는 뜻이다. 대개 태양이 (12방위 가운데) 오(午) 방위[132]에 이르는 때를 오시(午時)[133]라고 한다. 미(未) 방위에 이르는 때를 미시(未時)[134]라고 한다. 12시가 모두 이렇게 미루어 나온 것이다. 고대에 일(日)자를 실하다(實)고 풀이했고 월(月)자를 이지러졌다(缺)고 풀이했다. 달은 이지러질 때가 있고 해는 늘 실함이 이와 같다. 예컨대 천구의 운행 같은 경우에도 오차가 있다.[135] 달과 행성의 운행은 또 느려서[136] (하늘을) 따라잡지 못한다. 오직 태양만이 이처럼 확정적이다. [137]
又云: “看北斗, 可以見天之行.” 蘷孫(68이후).
다시 말함: 북극성을 보면 천구의 운행을 이해할 수 있다.
- ↑ 만물을 이루고 있는 기가 여러 개체로 분화되지 않고 똘똘 뭉친 형태.
- ↑ 주희가 지은 책이다. 주돈이의 태극도설에 대한 코멘터리이다.
- ↑ 적연부동&감이수통을 알아야 이 부분을 이해할 수 있다. 적연부동은 적막하고 고요한 상태로 움직이지 않는 모습, 감이수통은 사물이나 사태와 접촉/감지하여 적절히 반응함을 말한다. 거미줄을 쳐놓고 죽은듯 대기하는 거미를 떠올려보자. 대기중인 거미는 적연부동, 먹이가 걸려 거미줄이 진동하는 걸 느끼면 '감', 잽싸게 달려가 먹이를 잡아 돌돌 말면 '통'이다. 혹은 배드민턴이나 탁구를 칠 적에 상대방의 서비스를 기다리며 고요히 정신을 집중하고 있는 사람의 모습을 떠올려도 좋다. 대기중일 때는 적연부동, 서비스를 인지하면 '감', 잽싸게 달려가 공을 받아치면 '통'이다.
- ↑ 본체(體)와 작용(用)은 주희 고유의 것이라고는 결코 말할 수 없지만 그가 매우 자주 사용하는 개념어이다. 이 개념쌍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는 고등학교 때 배웠던 '체언'과 '용언'이라는 문법용어를 되짚어보시기를 권한다. 나, 너, 소, 말 등 정지된 형태로 구체적인 이미지를 그려볼 수 있는 물체들을 지시하는 말이 체언이다. 그렇게 그려낸 물체의 작동을 서술하는 '서술부'에 넣을 만한 말들이 '용언'이다. 예를 들어 '자전거가 움직인다'라는 문장이 있으면 '자전거'가 체, '움직인다'가 용이다.
- ↑ 중단점이 없다는 것은 '단(端)이 없다'는 말을 초월번역한 것이다. 전통적인 한문 번역서에서 '단(端)'은 보통 '단서(端緖)'라고 옮긴다. 문자 그대로 '실 끝'이라는 뜻이다. 실타래를 보자. 실을 풀어가다가 느닷없이 실이 끊어져서 더이상 이어지지 않는 지점, 그곳이 '단'이다. 그러므로 '단서'는 시작점과 끝점을 말하며 사태가 불연속적으로 끊기는 지점을 유비한다. 하지만 현대 한국어에서 단서는 명탐정이 범인을 찾아내는 클루(clue)의 의미가 너무 강해서 오히려 독자를 헷갈리게 만든다. '움직임과 고요함에 단서가 없다'라고 번역해버리면 이는 마치 이 전체 과정이 클루리스(clueless)하다는 말처럼 들릴 것이다. 이러한 오해를 피하기 위해서라도 '중단점' 혹은 '불연속점' 정도로 옮기도록 하겠다.
- ↑ 이 또한 마찬가지이다. 음과 양 사이를 나누는 확실한 경계선은 없다. 여기까지가 음이고 저기서부터 양이 시작된다고 말할 수 없다.
- ↑ 세계는 불연속적일 수가 없고 언제나 연속적이라는 말을 해놓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엇이 먼저인지 말해야 하므로 주희 입장에선 단어 선택을 바꾸어야 했다. 앞에서는 시(始)가 없다고 해놓고 여기서는 그럼에도 기(起)는 있는 것처럼 말한다. 일견 모순적이지만 전자를 시간적 선후, 후자를 논리적 선후라고 선해해주면 그럭저럭 말이 통한다
- ↑ 해당 조목의 기록자이다. 주자어류는 본래 여러 제자들이 각자 제작한 노트를 주제별로 재분류하여 편찬한 것이다. 편찬 당시 편집자가 본래 누가 기록한 것인지 이렇게 표시해두었다. 물론 기록자 표시가 없는 조목도 있다. 순(淳)은 북계(北溪)라는 호를 쓰는 진순(陳淳)이다. 어류에 등장하는 인물 정보는 부록으로 제공하도록 하겠다.
- ↑ 상당수 제자들의 경우 그들이 언제 스승을 찾아가 함께 지내며 사사했는지 재구성할 수 있다. 예컨대 진순의 경우 주희가 61세 때 한 번, 70세 때 한 번 찾아가 수개월간 가르침을 받은 바 있다. 이 조목이 진순의 기록이라면 이 발언이 이루어진 시점이 주희가 61세 혹은 70세 때 임을 이로써 알 수 있다. 이러한 정보는 여러 선배 학자의 노고를 통해 정리된 것이다. 본고는 박성규 선생이 입력한 것을 옮긴 것이고, 박성규 선생은 중화서국판 주자어류(1986)에서 정리한 내용을 근거로 이와 같이 표기한 것이다.
- ↑ '재'는 수레가 물건을 실어주고 적재해준다는 뜻이다. 땅은 만물을 실어준다. 리가 없으면 만물이 없으니 실어줄 물건이 하나도 없는 셈이다.
- ↑ 유행은 물론 trend라는 뜻은 아니다. 유동체가 두루 흘러 순환하는 이미지를 떠올려보라
- ↑ 극은 한쪽 경향의 극한점, 시작과 끝 지점 등을 말한다. 주희는 리를 태극(위대한 극한)이라고 하는데, (주돈이의 태극도설을 인용하여) 태극은 또 무극(극한없음)이라고 한다. 태극이 무극이라는 말은 그것이 형이하의 세계와는 존재론적으로 차원을 달리하는 형이상자라는 뜻이다.
- ↑ 리는 형이상자여서 극한점이 없는 반면 기는 형이하자이므로 극한점이 있다. 기에는 극이 있다는 표현이 낯설게 느껴진다면 배터리를 생각해보자. 전'기'에는 음'극'과 양'극'이 있지 않은가? 자연과학 용어의 번역에 있어 이기론이 남긴 유산이다.
- ↑ 일역판에서는 이 부분을 "만약 태극이 없었다면 천지가 뒤집어질 수밖에 없었다"와 같이 번역했다. 그러나 청계판과 소나무판의 경우 공통적으로 飜자를 개벽의 의미로 새겼다. 청계판에서는 주자어류고문해의의 풀이를 그 근거로 제시하였다.
- ↑ 주희에게 있어 음양은 기이고 음양순환이라는 현상을 만들어내는 원리(소이연)는 도이다. 그래서 음양이 도가 아니라 일음일양이 도라고 한 것이다. 물론 이 구절의 원출처인 주역 계사전의 저자가 그렇게 생각했는지는 알 수 없다. 본문은 주자어류니까 일단 주희가 그렇게 해석했다는 사실이 중요하겠다. 아무튼 계사전의 이 구절을 이렇게 해석하고 나면 운동변화하는 세계 위에 변화의 원리로서의 리(혹은 도)가 먼저(논리적으로, 혹은 시간적으로도?) 존재하게 된다. 따라서 "리가 있고서 기가 생긴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 ↑ 주역 계사전을 계속 보면 "일음일양지위도" 뒤에 "계지자선야, 성지자성야(繼之者善也, 成之者性也)."가 이어진다. 일음일양의 순환변화를 계속 이어가는 것이 '좋음'이고 이 변화를 완성하려는 것이 만물의 본성이라는 것. 원출처에서도 일음일양 뒤에 본성 이야기가 나오므로 본문에서도 화제가 자연스레 본성으로 옮아간 것이다.
- ↑ 단서를 중단점으로 초월번역한 이유는 앞서 설명했다
- ↑ 정은 겨울의 덕이고 원은 봄의 덕이다. 여기서 덕은 인품이 좋다는 의미의 그 덕이 아니라 속성(quality) 정도의 뜻이다.
- ↑ 주역 64괘는 모두 원형이정 가운데 몇 가지 덕목을 추려서 가지고 있는데 오직 제 1괘인 건괘만 네 덕목을 모두 가지고 있다.
- ↑ 문왕역은 주역에서 문왕이 쓴 것으로 알려진 부분을 말한다. 각 괘의 괘사 등이 여기 해당한다. 건괘의 괘사는 '元亨利貞'인데 전통적으로는 건괘 문언전 등의 해석을 따라 '원하고 형하고 리하고 정하다'로 풀이한다. 이렇게 풀이하면 건괘에 네 가지 덕목이 다 있다 정도의 말이 된다. 그런데 주희는 '원'을 크다, '리'를 ~하면 이롭다 라고 풀이해버린다. 이 경우 '원형'은 크게 형통하다, '리정'은 '올곧음(정)이 이롭다'가 된다. 주희가 '두 단락으로 끊어진다'라고 말한 건 이러한 자신의 해석을 말하는 것이다.
- ↑ 건괘 문언전은 보통 공자가 지었다고 믿었다
- ↑ 주역 64괘를 처음 그린 것이 복희, 괘에 괘사(간단한 해설)를 붙인 것이 문왕, 거기에 10익(열 개의 날개)이라는 형태로 코멘터리를 붙인 것이 공자라고 한다(물론 전통적인 견해이다). 이처럼 여러 저자가 누적적으로 만든 텍스트이기 때문에 주역 독파가 어렵다는 뜻
- ↑ 질감이 있다는 뜻이다
- ↑ 요즘 표현으로 슬러지(sludge) 같은 것이다. 기가 특정 시공간을 점유하고 있는 물리적 실체라는 뜻이다
- ↑ 도가 구체화된 것이 본성이라는 뜻
- ↑ 본성을 에워싸고 있는 것이 마음이란 뜻
- ↑ 일역본은 구우를 '그릇'이라고 풀었다. 틀렸다고는 못하겠지만 구우는 아무래도 영토나 궁궐 같은 뜻이 더 강한 듯하다. 어느쪽이 되었든 신체는 마음을 수용하는 더 큰 단위의 공간이라는 뜻이다
- ↑ 리와 기의 의존관계와 흡사한 관계성을 나열하여 유비한 것이다
- ↑ 청계판의 각주를 따랐다
- ↑ 천지가 갈라지기 전, 즉 세계가 실제로 생성되기 전이므로 모든 것은 potentially 존재할 뿐 actually 존재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허다한 것이 있어서는 안 되고 허다한 것의 리가 있었다고만 해야 한다.
- ↑ 이론적으로야 나눠서 말하지만 현실상에서는 분리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 ↑ 원 기록자인 진순의 코멘트이다.
- ↑ 원문의 '영'은 보통 인간에게서 기대할 수 있는 정신능력(말하자면 대상을 인지하고 타인과 소통하는 능력)을 말한다. 사람 말을 잘 알아 듣는 짐승이 있으면 '영물'이라고 부르고 죽어서 기체같은 것이 되었지만 여전히 산 사람의 말을 듣고 무언가 해줄 수 있는 존재를 '영혼'이라고 부른다는 사실을 상기해보자.
- ↑ 원문의 '막연'은 너무 넓어서 전후좌우 분간이 안 되는 텅 빈 공간, 혹은 그런 공간을 마주하고 멍해진 사람의 마음을 형용하는 말이다. 또, 대상에 대한 냉담하고 무심한 태도를 의미하기도 한다.
- ↑ '무위'는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일을 벌이지 않는다는 뜻이다
- ↑ '무위'에 대한 해석이다
- ↑ 원문인 '주재'는 마치 회사의 사장님이나 모임의 좌장처럼 어떤 전체를 통제/통솔하는 핵심부분이라는 뜻이다. 영어로는 대개 'master'로 번역하는데, 현대한국어로 가장 어울리는 말은 아마도 '주인님'일 거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왼 팔을 움직이기로 마음먹으면 왼 팔이 움직이고 오른다리를 움직이기로 마음먹으면 오른다리가 움직인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 마음은 우리 몸의 주재자, 주인님, 컨트롤타워이고 천지의 마음은 천지의 주인님이요 컨트롤타워이다.
- ↑ 여기서는 우주의 주재자인 상제 정도를 의미한다. 같은 글자를 지상의 주재자에게도 사용한다는 점을 생각해보자(황제).
- ↑ 천을 주재하는 컨트롤타워가 제, 한 사람을 주재하는 컨트롤타워는 그 사람의 마음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 ↑ 인지기능을 말한다
- ↑ 의도를 가지고 개입하여 일을 만드는 것을 말한다
- ↑ 주역 복괘
- ↑ 주역 대장괘
- ↑ 하늘(天)에 대한 해설이다. '천'은 하늘을 형체의 측면에서 말한 것이고 하늘의 주재(=컨트롤타워로서의 기능)의 측면에서 말하자면 '제'이다. 그리고 하늘의 강건하고 멈춤 없는 성질의 측면은 '건'이라고 한다. 이천역전의 '건괘' 항목을 보라.
- ↑ 주희의 친구 장식
- ↑ 항상함(常)은 변함없이 영원한 성질을 말한다. 그런데 변함없이 영원한 것을 우리는 정상(正常)이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이 항상성은 가치중립적(value-free)인 현상이면서도 또한 바람직한(normative) 현상이기도 하다.
- ↑ '무심'하지 않으면 어떠한 의도를 가지고 개입하게 되고, 이러한 개입으로 작동하는 시스템은 항상성이 없다. 그러므로 명도에게 있어 천지의 '무심'은 천지의 항상성의 필요조건이다. 동시에 천지가 만물을 사랑하지 않으면 천지가 운행할 동력이 없다. 그러므로 '마음이 두루 미치'는 것 역시 천지의 항상성의 필요조건이다.
- ↑ 이 조목에서 주희는 마음(心)을 기능적 측면(인지하고 사려함)에서도 논하고 정서적(사심으로 개입한다든가, 무심히 관망한다든가) 측면에서도 논한다. 영역할 경우 전자의 측면은 mind, 후자의 측면은 heart로 번역하는데, 심(心)의 이 두 측면이 문맥을 통해 언제나 분명하게 구분되는 것이 아니므로 'heart-mind'라고 번역하는 경우가 대다수이다. 심이라는 한 글자의 이러한 이중적 성격을 세심하게 구분하지 않고 말하다 보니 주희는 천지가 무심하다고도 할 수 없고 유심하다고도 할 수 없어서 '무심한 측면과 유심한 측면이 있다' 정도로 정리하려고 한다. 별개로, 천지와 세상 사이의 이와 같은 애매한 관계성은 주희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황제관과 닮아있다. 황제는 자신의 국가에 대하여 천지가 세상을 대하듯 하면 된다. 국가 운영의 항상성과 예측가능성은 황제의 임의적 개입에 의해 깨질 수 있다. 그러므로 '무심'해야 한다. 다만 이러한 정상적 패턴을 유지시켜주는 동력을 끝없이 공급해줄 필요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유심'해야 한다.
- ↑ 이 글자의 뜻은 오늘날 충(忠)자와 유사하다. 공영달은 선(善)이라고 해석했고 채침(주희의 제자)은 중(中)이라고 해석했다. 주희에 의하면 마음이 치우침 없는(곧, 中) 상태를 평온하게 유지하면 선한 본성이 여지없이 드러난다. 그러므로 채침의 中이나 공영달의 善이나 결과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다. 상제가 사람들에게 선한 마음, 선한 본성을 내려주었다는 뜻이다.
- ↑ 상서 탕고편을 보라
- ↑ 맹자 고자(하)를 보라. 하늘이 누군가에게 큰 일을 맡길 적에는 우선 열심히 괴롭혀서 단련시킨다는 내용이다.
- ↑ 상서 태서편을 보라.
- ↑ 중용 17장을 보라.
- ↑ 상서 이훈편을 보라
- ↑ 이 인용은 전거가 없다. 문체로 보아 고전에서 인용한 것은 아니고 당시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하는 말인 듯하다. 일역본에서는 사기 권117 사마상여전을 전거로 제시하지만 그 논조가 흡사할지언정 문자는 사뭇 다르다.
- ↑ 하늘을 물리적인 수준에서 말한 것이다
- ↑ 어째서 세 단락인지 알 수 없다. 일역본은 상대방의 질문들 모두를 지시하는 대략적인 숫자, 곧 '네가 말한 그 몇가지는...' 정도로 풀이하거나 혹은 '푸른 물리적 하늘, 주재하는 하늘, 일반법칙(리)으로서의 하늘'의 세 측면을 가리킨 것으로 보거나 할 수 있다고 제안한다. 소나무판과 청계판에서는 질문자가 인용한 서목이 크게 보면 상서, 중용, 맹자이므로 '저 세 문헌'을 가리킨 것으로 본다.
- ↑ 소옹의 이천격양집 권17에 수록된 시이다
- ↑ 복희와 헌원
- ↑ 요와 순
- ↑ 탕과 무
- ↑ 제환공과 진문공
- ↑ 소나무판에서는 '네 가지 도리'를 황/왕/제/패 인 것으로 보았고 청계판과 일역판은 군/신/부/자인 것으로 보았다.
- ↑ 네 글자씩 끊어지므로 축자역을 하자면 '네 경우의 도는 그 리가 진에서 끝났다'라고 해야 한다. 그런데 이건 어차피 소옹이 쓴 시임을 명심하자. 운문의 특성상 글자수를 맞추려고 굳이 도와 리를 나눈 것일 뿐이지 여기에 어떤 대단한 형이상학적 입장이 있는 것이 아니다. 한국어 독해 편의를 위해 그냥 '도리'라고 붙여서 번역했다.
- ↑ 위/촉/오를 말한다
- ↑ 5호16국
- ↑ 5대10국
- ↑ 치는 천하의 거버넌스가 잘 잡힌 평화로운 시기를, 란은 동란의 시기를 말한다.
- ↑ 1:17, 1:20과 관련하여 보라. 고전 속에서 하늘이 자기의 의지를 가지고 인간사에 개입하는 존재로 묘사될 때에는 하늘이라기 보다는 '상제' 혹은 '제'라고 불린다. 위 구절에서 제자 진순의 질문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머리 위에 떠 있는 물리적 하늘에 불과한 것이 어째서 고전 속에서는 의지와 인격을 가지고 사람들에게 이런 저런 것들을 내려주고 개입하는 존재인 '제'로 묘사될 수 있는지, 다른 하나는 그렇게 개입을 일삼는 인격적 하늘과 역사의 일반법칙(=리)으로서의 하늘 사이의 간극에 대해서였다. 이에 대해 주희는 '제=리'라고 답했는데, 사실 진순의 두 번째 질문에만 답한 셈이요 첫 번째 질문 (제와 물리적 하늘 사이의 간극)에 대해서는 넘어간 것이다. 이번 구절에서도 주희의 입장은 동일하다. 의지를 가지고 개입하는 컨트롤타워(=제)라고 고전 속에서 묘사되는 건 사실 역사의 일반법칙(=리)이라는 것이다.
- ↑ 이 부분은 주석이다.
- ↑ 주희는 98:5에서 이러한 천지생성 메커니즘을 맷돌로 비유한 바 있다. 맷돌 틈에 콩이나 깨를 넣고 회전시키면 마찰에 의해 기름도 나오고 깻묵(기름을 짜고 난 찌꺼기)도 나온다. 이처럼 처음에는 한덩어리로 뒤섞여있던 기가 빙빙 돌며 상호 마찰하면 한편으로는 가볍고 맑은 기가 배출되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안쪽에 응어리진 깻묵 같은 찌꺼기도 남는다. 이것이 말하자면 각각 천과 지라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청계판의 주석을 참조하라.
- ↑ 당시 우주관으로 개천설과 혼천설이 있다. 청계판에서 제시한 도면과 미우라 구니오의 주자어류선집 258쪽의 설명이 자세하다. 더 자세한 설명은 야마다 케이지가 쓴 주자의 자연학 제 2장을 보라. 요약하자면 개천설은 땅 위에 하늘이 뚜껑(개)처럼 덮여있다는 주장, 혼천설은 마치 달걀의 흰자가 노른자를 감싸고 있는 것처럼 하늘이 땅을 360도 감싸고 있다는 주장이다. 주희가 '아래쪽에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한 것은 개천설을 부정하고 혼천설을 긍정한 것이다.
- ↑ 하늘의 속성에 대해서는 굳세다(剛) 보다는 가볍다(輕)라고 해야 주희의 평소 말씨에 더 부합한다. 본문만 보아도 땅이 '무겁고 탁하다'고 했으면 하늘은 '가볍고 맑다'라고 하는 편이 더 자연스럽다. 바로 아래 1:25도 이렇게 대비시켰다. 어쩌면 기록의 오류일지 싶다.
- ↑ 두드릴 각(搉)으로 해석하자면 뾰족한 수가 없다. 일역판은 야마다 케이지의 번역을 참조하여 '점거하다' 내지 '점유하다' 정도로 풀이했다. 하지만 아무리 보아도 본 구문에서 동사는 '있다(在)'이고 각(搉)은 부사여야 하므로 '점유하다'라고 풀이하기 어렵다. 소나무판은 일역판과 흡사하고 청계판은 동사로 보아 '매달다'라고 했으나 역시 어색하다. '각'은 심지어 주자어류 전체에서 세 차례밖에 등장하지 않는, 매우 드문 글자이다. 어쩌면 굳을 확(確)의 오기일 듯하다. 첫째로 뜻이 훨씬 잘 통한다. 둘째로 품사가 부사(단단히-)이므로 문법적으로도 잘 맞다. 셋째로 69:107 등을 보면 땅의 성질이 견확(堅確)하다는 등의 언급이 있다. 넷째로 두 글자는 모두 que의 4성이므로 음이 같아서 기록자가 혼동했을 만한 여지가 있다.
- ↑ 1:25를 참조하라
- ↑ 유순하고 나긋나긋하다는 뜻으로, 주역에서 곤괘(땅을 상징함)의 성질을 해설할 때 사용한 표현이다. 일역판에서는 '묵직하게'라고 했는데 나쁘지 않다. 청계판은 '태연하게' 소나무판은 '유유히'라고 번역했는데 역시 큰 뜻에서 일치한다.
- ↑ 북송시대의 장재이다.
- ↑ 이 부분은 현존하는 장재의 저작에서 찾을 수 없다. 소나무판과 청계판은 땅이 하늘보다 크기가 작다는 뜻으로 읽었다. 일역판은 '하늘에 미치지 못한다'라고 풀었는데, 아마도 하늘과 동등한 레벨이 아니다, 하늘보다 티어가 하나 낮다 정도의 의미인 듯하다. 완역성리대전 5권 351쪽에서도 일역판과 같이 해석했다.
- ↑ 청계판, 소나무판, 성리대전판(5권351쪽)은 모두 땅의 네 모퉁이의 아래쪽이라고 풀었고 일역판은 네모퉁이와 아래쪽이라고 풀었다. 여기선 일역판을 따른다.
- ↑ 청계, 소나무, 성리대전쪽은 이것을 주희의 관찰경험인 것처럼 서술했다. 땅이 넓은 곳에 가면 기가 땅 속에서 솟아나오는 것을 직접 관찰할 수 있다는 식이다. 일역판은 74:151과 152에 기술된 유사한 내용을 참조하여 (땅 속 텅 빈 공간에 가득찬 하늘의 기가 땅을 뚫고 솟아난다는 사실로부터) 땅이 광활하다는 점 역시 알 수 있다고 번역했다. 일역판 쪽이 더 타당해 보인다.
- ↑ 주희의 제자 채원정.
- ↑ 주자어류고문해의에 따르면 원/회/운/세 같은 큰 주기일 때가 이렇게 크게 회전할 때라고 한다. 1원은 12만9천년이다.
- ↑ 在는 동작상태가 계속된다는 표현이다. 일역판의 주석을 참고하라.
- ↑ 본문의 주석이다.
- ↑ 이 이야기는 구당서 권 35에 실려있다. 아래쪽 1:36과 37을 참조하라.
- ↑ 오늘날 바이칼호 이북지역이다.
- ↑ 안북도호부 소속의 통치기구. 당태종이 정복한 영토 최북단을 담당했다.
- ↑ 주희는 태양빛을 가려줄 차폐물이 두껍지 않으면 태양빛이 통과해서 들어온다고 생각한 듯하다. 혹은 밤중에(밤에는 태양이 땅의 밑쪽을 이동하고 있는데) 아래쪽에서 태양이 쏜 빛이 땅의 가장자리를 거쳐서 하늘로 투사되고 있으므로 땅의 가장자리에 있는 사람에게는 밤하늘이 밝게 보이는 것도 당연하다고 생각했을 수 있다.
- ↑ 상하사방. 곧 우주를 말한다.
- ↑ 원문의 明白은 번역하기 어렵다. 미우라 구니오(262쪽)는 '그 전에는 분명히 지금처럼 확실하게 구분되어 있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번역했으나 타당치 못하다. 주석에서 '개벽 이전에도 이미 지금과 같은 세계가 존재했던 것은 명백하다'라는 또다른 해석을 제안하지만 이렇게 되면 '한 번(一番)'이 붕 떠버린다. 명백하면 명백한 거지 '한 번 명백하다'는 이상하기 때문이다. 일역본에서는 '뚜렷한 것'이라고 했는데 이렇게 풀이하려면 '一番明白來'가 아니라 '一般明白的'이었어야 한다. 소나무판도 '명백'을 부사로 보아 '분명히'라고 했는데 역시 타당하지 못하다. 청계판에서 명백을 '개벽했다'고 풀이한 것은 분명 초월번역이다. 세계가 열리는 사건을 '밝아졌다'라고 표현할 수 있다는 문헌적 근거가 없다. 다만 이렇게 초월번역하는 것이 그나마 주희의 평소 우주론에 부합하며 문법적으로 보아도 적절하므로 이쪽을 따른다.
- ↑ 상장은 '다함께' '앞서거니 뒷서거니' 같은 뜻도 있지만 여기서는 미우라 구니오(263쪽)의 의견에 따라 '점차'로 풀었다.
- ↑ 요즘 농담에 초파리는 자연발생한다는 말이 있다. 마찬가지로, 음, 양, 수, 화, 목, 금, 토 등 여러 기가 이런저런 조건 하에 적당한 비율로 응결하여 자연발생하는 것이 '기화'이다.
- ↑ 전통적으로 초목을 말려 죽이는 가을의 기세를 '숙살'이라고 표현한다. 서(恕)는 타자에게 미치는 너그럽고 애틋하고 용서하는 마음이다.
- ↑ 한나라 가의의 복조부의 한 구절이다. 균(鈞)은 도자기 만들 적에 빙글빙글 회전하는 원판을 말한다. 진흙을 그 원판 위에 올려놓고 빙빙 돌리면 원심력으로 인해 사방으로 진흙이 튈 것이다. 천지가 운행하여 만물을 만들어내는 모습을 이와 같이 상상한 것이다.
- ↑ 이 부분만 놓고 보면 어떻게 두 밥그릇을 합쳤는지, 그 안에 물은 왜 넣었는지, 왜 돌리면 물이 빠져나오지 않고 그 안에 있는지 명확하지 않다. 주희가 이와 유사한 비유를 든 다른 구절(예컨대 68:94)을 보면 오늘날의 접시돌리기 정도를 생각한 듯하다. 곡예사가 장대 위에 접시를 놓고 회전시키면 그 회전력이 유지되는 한 접시는 떨어지지 않는다. 손을 멈춰서 회전력의 공급이 끊어지면 접시는 추락한다.
- ↑ 확장과 수축이라는 뜻이다.
- ↑ 왕효농의 2014년판 영역본은 '구(口)'를 수량사로 보았다. 많은 다른 번역본은 '구멍'으로 보았는데 아무래도 수량사인 편이 독해가 순조로운 듯하여 왕효농2014 쪽을 따라본다.
- ↑ 배속에서 기를 만들어냈다 거두어들였다 하는 가상의 무언가를 가정한 듯하다. 소나무판에서는 '단전'이라고 했는데 어떤 근거가 있는지 확실치 않다.
- ↑ 이 부분은 주희의 인용오류이다. 통행본 도덕경 제 5장을 보면 '동'자와 '허'자의 위치가 다르다. 도덕경 쪽은 '비어있으나 수축하지 않고 움직일 수록 더욱 (바람이) 뿜어져나온다 虛而不屈, 動而愈出'이다. 주희의 인용오류가 의도된 것이었다고 선해해줄 경우 인간 호흡운동의 역설적 측면\을 강조하려는 것이었다고 봐줄 수 있겠다
- ↑ 2기 5행 10간 12지 24절기 등 기의 위치/시점/분량/속성 등을 표시하는 단위를 말한다. 그런데 그때마다 변화하는 기수 가운데 어느 때에 태어나서 어떤 세상을 살아가느냐는 순전히 우연적인 것이라 개개인의 입장에서 보면 자신이 타고난 기수는 곧 자신의 운명, 운수(運數)이다. 오늘날 사전에서 '기수'를 검색하면 종종 '운수'나 '운명'이라고 나오는 까닭이다.
- ↑ 하지만 나누어 보면 각종 단위로 딱딱 끊어진다는 말을 하기 위한 밑밥이다.
- ↑ 갑은 양, 을은 음, 병은 양, 정은 음이다. 무, 기, 경, 신, 임, 계도 이 패턴대로 음/양에 각각 배속된다.
- ↑ 우(遇)는 어떤 우연적인 만남의 뉘앙스가 있다. 영어로는 encounter에 가깝다. 누가 자신의 운명을 미리 약속 잡아두고 만나겠는가? 마주치고 보니 운명인 것이다.
- ↑ 어떤 기를 얻느냐에 달려있다는 뜻이다.
- ↑ 이 부분은 공자 개인이 치우친 기를 얻은 것인지 혹은 공자가 태어난 당시 사회의 기운 전체가 치우친 것인지를 놓고 해석이 달라질 수 있다. 다만 4:96과 같은 유사구절에서 공자 개인의 기가 치우쳐졌다고 말하는 것을 참조하여 여기서도 개인의 문제인 것으로 해석하였다.
- ↑ 주역 박괘 상구효에 보인다. 여섯 효 가운데 최상단만 양효가 남아있고 아래쪽은 모두 음효인 것이 마치 좋은 사람이 나쁜 사람에게 밀려 죄다 깎여나가고 마지막 한 사람만 나무 꼭대기에 매달린 과일 하나 처럼 남아있는 꼴이다. 그러나 모든 일은 한쪽 극으로 가면 다른 쪽으로 돌아오므로 박괘와 같은 상황에 이르면 그 다음엔 온 세상이 음인데 가장 아래쪽에서 양 하나가 피어오르는 복괘의 첫번째 효 같은 상황이 찾아온다. 그래서 박괘 다음이 복괘인 것이다.
- ↑ 포양이 기록한 부분에 대한 해석은 청계판, 소나무판, 일역판이 모두 미흡하다. 왕효농2014의 영역 쪽이 가장 무난하기에 참조하여 번역했다.
- ↑ 앞에서도 종종 나왔지만 리는 늘 반복되기 때문에 항시 관찰 가능한 일반법칙이라는 의미가 있다. 해가 매일 동쪽에서 뜨는 리, 달이 차고 기우는 리 등등이 그렇다. 음양오행이 늘 이러이러한 패턴에 맞게 움직이는 것을 관찰을 통해 발견해냈다면 '음양오행에 이러이러한 리가 있다'라고 말할 수 있다.
- ↑ 이 부분은 왕효능2014의 영역이 자연스럽다. 음양오행의 리를 정말로 문자 그대로 눈 앞에 두고 본다고 해석해서는 곤란하다.
- ↑ 기는 형체를 특정하기 어려운 기체 같은 것을 말한다(사실 氣體라는 말에 벌써 '기'가 있다). 질은 시각을 통해 형체를 특정할 수 있고 촉각을 통해 감지할 수 있는 고체나 액체 등의 물질을 말한다 (사실 物質이라는 말에 벌써 '질'이 있다).
- ↑ 주희의 문집 권 61에 수록된 '답엄시형'에 이 부분이 실려있다. 일역판은 이 조목이 '감절'의 기록인 데 주희의 문집에 수록된 감절과의 왕복서한에 이 구절이 없다고 하였다. 이 조목이 실제로 감절의 기록이 아니라 엄시형의 기록인 것인지, 아니면 여기서 감절이 언급한 '보내주신 답서'라는 구절이 실은 주희가 감절 자신에게 보내준 답서가 아니라 주희가 엄시형에게 보낸 답서를 감절이 사전에 검토하고 그 내용에 대해 토론하고자 했던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 ↑ 一氣所稟을 대부분의 번역서는 '일기를 품부받은 바'라고 풀이하였다. 헌데 '소품' 앞에 나오는 명사구는 주어로 처리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예를 들어 '인물소품(人物所稟)'은 사람과 사물이 하늘로부터 품부받은 내용이라고 풀어야지 '인물을 품부받은 바'라고 풀어서는 안 된다. 내용상으로 보아도 음양오행은 기이다. 기가 무언가를 품부받아서 그걸 자신의 본성삼았다고 하려면 '본성을 받았다'라고 해야지 '기를 받았다'라고 해서는 안 된다. 이 부분은 알려진 번역본 가운데 곽신환이 번역한 태극해의(53쪽)만 이렇게 보았는데 매우 타당하다.
- ↑ 앞쪽에서는 음양오행이 각자 본성이 있다고 말했는데 뒤에서는 그 모든 본성이 동일하다고 하니까 이렇게 물은 것이다. 엄시형은 주희에게 보낸 질의서에서 앞쪽의 성을 기질지성(오행 각각의 개성)으로, 뒤쪽의 성을 본연지성(오행 모두가 공유하는 보편적 법칙)으로 구분했다.
- ↑ 예컨대 나도 사람의 리가 있고 남에게도 사람의 리가 있지만 양자는 동일한 사람의 리이다. 기의 측면에서 나와 남은 다르다 (최소한 서로 다른 공간을 점유하고 있지 않은가). 리의 측면에서는 같다.
- ↑ 주돈이의 태극도설에 나온다.
- ↑ 예를 들어 수는 음, 화는 양이다.
- ↑ 음수와 양수가 있을 수 있고 음화와 양화가 있을 수 있다.
- ↑ 이 부분은 주희의 다른 언설들과 잘 어울리지 않는다. 신은 기인데 또 신은 리라고 한다면 기가 리라고 하는 셈이다. 이는 주희의 형이상학 체계에서 받아들이기 어려운 결론이다.
- ↑ 하늘의 수는 1, 땅은 2, 하늘은 3, 땅은 4... 하늘은 9, 땅은 10에 해당한다고 한다. 주역 계사상을 참조하라. 또한 예기 월령편에 대한 공영달의 소를 참조하라.
- ↑ 이 부분은 하도(河圖)에서 제시한 우주생성 메커니즘을 설명한 것이다. 링크의 그림을 보면 아래쪽에 흰 동그라미 하나와 검은 동그라미 여섯개가 보인다. 흰 원 하나가 '하늘 1'이고 검은 원 여섯이 '땅 6'이다. 하나인 하늘로부터 오행 중 하나인 수(水)가 탄생(生)하면 여섯인 땅이 그것을 넘겨 받아서 완성(成)시킨다. 주자어류 94:83을 참조하라.
- ↑ 하늘의 숫자인 3이 목을 낳는다는 것의 의미에 대한 해설이다.
- ↑ 땅의 숫자인 4는 금을 낳는다.
- ↑ 형체와 질감을 만들어주는 요소, 곧 오늘날 말로 질료(matter)나 물질(material)에 가장 가까운 듯하다. 금목수화토가 각자 다르긴 하지만 그것들의 바디(body)를 구성해주는 질료가 토 아니냐는 질문이다.
- ↑ 소백온의 역학변혹에 나온다.
- ↑ 과거 천문지리를 계산하고 음양과 길흉을 논하던 전문가. 일종의 천문학/점성술 전문가이다. 역술가, 역산가, 일가 등등 여러 표현이 있다.
- ↑ 1년을 360일로 보면 4계절은 각각 90일씩 가져간다. 봄은 목, 여름은 화, 가을은 금, 겨울은 수의 계절이다. 토의 경우는 각 계절로부터 18일씩을 받아서 자신의 계절로 삼는다. 봄의 마지막 18일, 여름의 마지막 18일, 가을의 마지막 18일, 겨울의 마지막 18일을 모으면 18*4=72가 된다. 이렇게 되면 오행이 각각 72일씩 골고루 나눠가지게 된다. 다 모으면 여전히 360일이다.
- ↑ 전통시대는 하루하루 60갑자가 배당되어 있다. 예를 들어 현종 5년 2월 11일을 갑진일이고, 자연스레 2월 12일은 을사일이다. 13일은 병오일, 14일은 정미일, 15일은 무신, 16일은 기유일이다. 갑과 을은 오행 중 '목'에 해당하므로 현종 5년 2월 11일과 12일은 오행 중에 '목'에 해당한다. 마찬가지로 13일과 14일은 '화'에 해당하고 15일과 16일은 '토'에 해당한다. 이렇게 배당하면 1년 360일은 60갑자가 정확히 여섯 번 순환하며, 이중 목('갑x'과 '을x')에 해당하는 날을 다 더하면 72일이다.
- ↑ 불씨를 붙여서 보관하는 나무를 계절마다 바꿔 쓰는데 여름의 말미(음력 6월)에는 한 번 더 바꾸는 풍습이 있다. 왜 그렇게 하는지 묻는 것이다. 참고로 이 부분에 대해서는 논어 양화편 21번째 조목에 대한 주희의 집주가 자세하다.
- ↑ 더 자세한 설명은 1:57을 보라.
- ↑ 1:1의 주석을 참조하라
- ↑ 설문해자를 보라.
- ↑ 정남향이다.
- ↑ 오전11시부터 오후1시까지이다. 중간값인 낮 12시를 그래서 정오(正午)라고 한다.
- ↑ 오후 1시부터 3시까지이다.
- ↑ 천구는 하루에 한바퀴 회전하지 않는다. 지구가 23.9345시간마다 1바퀴 회전하기 때문에 지구 입장에서 보면 천구가 하루보다 약간 빠른 속도로 1회전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 오차를 주희시대 천문학에서는 1도라고 했다.
- ↑ 달의 경우 1회전 속도가 천구에 비해 13도 느리다.
- ↑ 지구 기준에서는 태양이 한 바퀴 돌아서 다시 제자리로 돌아올 때 까지 걸리는 시간을 24시간으로 정한 것이기 때문에 당연히 태양만이 아무런 오차 없이 정확히 하루에 한 바퀴 도는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