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나 自身 [자신]에 關[관]한 이야기도 아니요, 또 「人生[인생]의 香氣[향기]」도 아닐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 一部分[일부분]은 내가 目擊[목격]한 一部分[일부분]일 뿐더러, 내 一生[일생]의 經驗中[경험중]에서 罪[죄]에 關[관]한 가장 深刻[심각]한 印象[인상]을 준 것으로 잊혀지지 않는 實話[실화]다.

양반들이 사는 어느 洞里[동리]에, 이 洞里[동리]에는 비록 시골이지마는, 예로부터 進士大科[진사대과]도 많이 나고, 隣近邑[인근 읍]뿐 아니라 서울에까지도 多少[다소] 소문이 난 兩班行勢[양반 행세]하는 部落[부락]이다.

이 洞里[동리]에 學者 [학자] 한 분이 있었다. 그는 언제나 소매 긴 行衣 [행의]를 입고, 집에서도 반드시 갓을 쓰고 舍廊[사랑]에 가만히 꿇어 앉아 있었다. 弟子[제자]가 있는 것도 아니고, 뛰어난 德行[덕행]이 있는 것도 아니언마는, 洞里[동리]에서는 學者 [학자]님이라고 그를 불렀다. 이 學者 [학자]님은 六十[육십]이 가깝도록 아들이 없어서 일가와 친구들이 妾[첩]을 얻기를 勸[권]하였으나, 그것은 禮 [예]와 人情[인정]에 어그러진다 하여 拒絶[거절]하고 늙은 婦人[부인]과 단둘이 寂寞[적막]한살림을 하고 있었다. 그 婦人[부인]은 대단히 賢淑[현숙]한 婦人[부인]이어서 子息[자식] 못 낳은 것을 매양 한탄하고, 男便[남편]에게 대하여 큰 罪[죄]나 지은 것처럼 恒常[항상] 悚懼[송구]하게 지내면서, 여러 번 젊은 妾[첩]을 얻어 子孫[자손]보기를 勸[권]하였다. 그러나 學者 [학자]님은 頑强[완강]하게 듣지 아니 하므로, 婦人[부인]은 할 수 없이 지내다가 하루는, 아들 못 낳는 내가 살아 서 祖上[조상]의 香火[향화]를 끊게 하느니보다는 차라리 내가 죽어서 아들 낳을 젊은 아내를 남편에게 오게 하는 것이 옳다는 뜻으로 遺書[유서]를 써 놓고, 밤중에 뒷山[산]에 올라 가 밤나무 가지에 목을 매달아 죽었다.

이 때문에 학자님은 再娶[재취]하게 되었다. 학자님의 後室[후실]로 되어 온 女子[여자]는 그리 門閥[문벌]이 좋지 못한 집 딸로서, 그러나 얼굴이 대단히 아름답고 또 甚[심]히 怜悧[영리]하였다. 이 婦人[부인]은 金氏[김씨]라고 하는데, 金氏[김씨]가 十七歲[십칠세]에, 시집 온 지 이태만에 아들 하나를 낳고, 학자님은 그 貴[귀]한 晩得子[만득자]가 걸어 다니는 양도 보지 못하고 죽어 버렸다.

남편이 죽은 뒤 金氏[김씨] 婦人[부인]은 遺腹子[유복자]나 다름 없는 어( ) 것을 데리고 크나큰 집을 지키고 있었다. 그 집이 洞里[동리]에서 ( )로 떨어져서 있기 때문에 일가 사람들이 그 사랑에 모여서 밤이면은 이야기책도 보고 노름도 하였다. 金氏[김씨] 婦人[부인]은 이것을 고맙게 여겨 밤참 도 차려 내고 술상도 보아 내는 것이 거의 習慣[습관]이 되다시피 하였다.

이러는 동안에 아들의 나이 十五歲[십오세]가 되어 며느리를 맞고 孫子[손자]나기를 기다리는 것이 金氏[김씨] 婦人[부인]의 唯一[유일]한 樂[낙]이었다. 처음에는 일가에서도 門閥[문벌]이 좋지 못한 金氏[김씨]의 일이라, 반드시 改嫁[개가]를 하거나, 무슨 醜聞[추문]을 남기어 家門[가문]에 陋名 [누명]을 끼치리라고 수군거렸으나, 十年[십년]이 넘도록 깨끗하게 守節 [수 절]하는 것을 보고는 다들金氏[김씨] 婦人[부인]을 烈女 [열녀]라고 稱讚 [칭찬]하고 眞心[진심]으로 尊敬[존경]하게 되었다.

그러나 며느리를 얻은 뒤에도 金氏[김씨] 婦人[부인]의 나이는 아직도 三十四[삼십사],五歲[오세], 家勢[가세]가 넉넉하여 고생이 없고, 또 寡婦[과부]로서 子女 [자녀] 生育[생육]을 아니한 때문인지, 三十歲[삼십세] 以內 [ 이내]인 듯한 젊음과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었다. 이것이 마침내 큰 悲劇 [비극]의 原因[원인]이 된 것이었다.

사랑에 드나드는 일가 중에는 允七[윤칠]이라는 노름군이 있었다. 그는 門中[문중]에서 行列[항렬]이 높기 때문에 노름군이면서도 尊敬[존경]을 받고 있었고, 또 風彩[풍채]가 좋고, 말솜씨 있고, 서글서글한 남아다운 爲人[위인]이었다. 그 父[부] 與祖[여조]는 科擧[과거]도 하고, 守令[수령]도 다녀서 家産[가산]이 넉넉하였지마는, 允七[윤칠]은 그 財産[재산]을 酒色[주색]과 雜技[잡기]에다 蕩盡[탕진]해 버리고, 祠堂[사당]을 모신 집까지 팔아 버렸는데, 그 집이 바로 金氏[김씨] 婦人[부인]이 들어 있는 이 집이었다.

洞里[동리]에 允七[윤칠]과 金氏[김씨] 婦人[부인]과가 너무 가까이 한다는 소문이 나기 시작하였다. 金氏[김씨] 婦人[부인]은 아들을 장가 들인 뒤로부터는 寡婦[과부] 어머니가 흔히 經驗[경험]하는 寂寞[적막]을 깨달아서 그 아들과 며느리를 미워하게까지 되었다. 이러한 마음의 空虛[공허]를 타서 誘惑[유혹]의 손을 내어 민 것이 능란한 允七[윤칠]이었다.

하루는 允七[윤칠]과 金氏[김씨] 婦人[부인]이 同時[동시]에 동네에서 스러지고 말았다. 동네에서는 둘이 배가 맞아 달아난 것으로 단정하고 웃음 거리를 삼았다. 한 달이 가도 소식이 없고, 일년이 가도 소식이 없었다.

어린 아들 내외는 동네의 비웃음을 참을 수 없어서, 그곳에서 百里[백리]쯤 떨어져 있는 妻家[처가]집 있는 데로 이사해 가고 말았다. 그뿐 아니라, 金氏[김씨] 婦人[부인]이 달아날 때에 從來[종래]의 信用[신용]을 利用[이 용]하여 高利貸金業者[고리대금업자]에게 돈 數千圓[수천원]을 꾸어 가지고 갔기 때문에 二,三百石[이, 삼백석] 하던 土地[토지]도 債權者[채권자]의 손에 넘어가 버리고, 어린 夫婦[부부]는 집 한간 없는 몸이 되어 버렸다.

한 三年後[삼년 후]에 어떤 일가 사람이 아랫녘 어느 地方[지방]에를 갔다가 偶然[우연]히 允七[윤칠]을 만났다. 允七[윤칠]은 이 不意[불의]에 일가를 만나서 낯이 흙빛이 되었으나 避[피]할 길이 없음을 알고, 自己[자기] 집으로 일가 사람을 끌어 들여서 自初至終[자초지종]을 全部 [전부] 實言[실 언]하였다. 그 집에는 勿論[물론] 金氏[김씨] 婦人[부인]과 걸음발 타는 사내아이 하나가 있었다. 두 사람은 甚[심]히 부끄러운 듯이 일가 사람에게 대하여 수없이 죽을 罪[죄]로 잘못하였다는 말을 하고, 어찌하다가 개 혼이 씌어서 관계를 맺고는 아이를 배기 때문에 할 수 없이 避亡[피망]하여 왔노라는 말을 하고, 故鄕[고향]에 돌아 가더라도 自己[자기]네가 이곳에서 산다는 말은 입밖에 내지 말아 달라고 눈물을 흘려 가며 哀乞[애걸]하였다.

그 일가 사람은 눈이 뒤집히게 憤慨[분개]하였으나, 거기서는 아무 내색도 보이지 아니하고, 며칠을 묵어서 故鄕[고향]으로 돌아 왔다. 允七[윤칠]과 金氏[김씨] 婦人[부인]이 사는 곳은 族譜[족보]를 할 때에 서로 알게 된 일 가 村落[촌락]이었다.

그 일가 사람이 故鄕[고향]에 돌아 와서 允七[윤칠]과 金氏[김씨]가 어디서 子息[자식]을 낳고 살더라는 말을 發說[발설]하매, 한참 잊어 버리고 있던 門中[문중]에서는 다시 憤慨[분개]하고 强笑[강소]하는 이야깃거리가 되었다. 門長[문장]이라는 老人[노인]이 甚[심]히 嚴格[엄격]한 人物 [인물] 이어서, 이 말을 듣고는 도저히 容恕[용서]할 수 없다 하여, 允七[윤칠]과 金氏[김씨]가 사는 곳 일가에게 두 사람의 罪惡[죄악]을 論[논]한 편지를 보내었다. 그 편지를 받은 일가는 允七[윤칠]을 불러서 그 편지를 보이고, 이러한 罪人[죄인]을 일가로 대접할 수 없으니, 빨리 이곳을 떠나라고 命令[명령]하였다.

允七[윤칠]은 할 수 없이 세 살 된 것을 업고, 金氏[김씨] 婦人[부인]은 滿朔[만삭]된 배를 안고, 이곳을 떠나서 차라리 先塋[선영] 墳墓[분묘] 앞에 가서 罪[죄]를 自服[자복]하고 죽어 버리자 하고, 故鄕[고향]을 向[향] 하고 떠났다. 그러다가 우대 어느 고을에 이르러 金氏[김씨] 婦人[부인]이 解産[해산]을 하게 됨으로 인해 그 자리에 머물러, 또 다행히 벌이를 얻어서 살게 되었다. 允七[윤칠]이가 본디 글도 有識[유식]하고 사람도 서글서글한 데다가 金氏[김씨] 婦人[부인]도 사람이 怜悧[영리]할 뿐더러 針線紡績[침선방적]에 재주가 있기 때문에, 비록 他鄕[타향]이지마는, 곧 生活[생활]의 基礎[기초]를 얻어 과히 窘塞[군색]지 않게 살게 되었다. 한해 두해 지나갈수록 良心[양심]의 苛責[가책]도 많이 緩和[완화]하여지고, 아이들이 자라나는 것과 財産[재산]이 늘어 나가는 것을 樂[낙]으로 여겨, 아무 걱정 없이 十數年[십수년]을 살았다.

그러나 罪[죄]의 因[인]은 決[결]코 果[과] 없이 스러지지 아니하였다. 하루는 무엇에 感得[감득]이 되었는지, 當時[당시]十八歲[십팔세]의 아들이 書堂[서당]에서 돌아 오는 길로 그 어머니인 金氏[김씨]를 向[향]하여 故鄕 [고향]이 어디며, 先祖[선조]가 누구인 것을 말하라고 졸랐다. 金氏[김씨]는 가슴 속에 아픈 자리를 다친 것과 같이 놀라고 괴로왔으나, 아들이 하도 보채므로, 마침내 故鄕[고향]이 어딘 것을 말하고, 또 아들을 慰勞[위로]할 目的[목적]으로 故鄕[고향]에는 일가가 많은 것과, 일가는 다 兩班[양반]으로 勢力[세력] 있게 산다는 말을 덧붙여 하였다.

아들은 그 말을 듣고는,

『인제는 먹을 만한 천 냥도 생겼으니, 他鄕[타향]에서 賤待[천대]받지 말고 故鄕[고향]으로 돌아 가자.』

고 星火[성화]같이 졸랐다. 金氏[김씨]는 마침내 故鄕[고향]으로 돌아 갈 수 없는 事情[사정]이 있다는 것과 故鄕[고향]을 떠나던 理由[이유]가 무엇인 것을 낱낱이 말하고, 눈물을 흘리면서 아들에게 罪[죄]를 謝[사]하였다.

남만 못하지 아니하게 생긴 아들은 이 말을 들을 때에 하늘이 무너지는 듯 하였다. 書堂[서당]에서 四書[사서]·三經[삼경]을 다 배우고, 나이보다는 夙成[숙성]하였다고 할 만한 이 아들은 어머니 말을 들은 때에 앞이 캄캄하 여지듯이 슬펐다. 그 슬픔은 곧 憤怒[분노]로 變[변]하여, 늙은 그 아버지 가 마침 밖으로서 들어 오는 것을 보고는,

『그런 禽獸[금수]의 行動[행동]이 어디 있느냐.』

고 叱責[질책]하고 自己[자기]는 하늘 아래에서 살 수 없는 몸이니 죽어 버린다고 말하고, 慟哭[통곡]하였다. 아버지 允七[윤칠]은 아들에게 이 論罪 [논죄]를 듣고는, 고개를 숙이고 아무 말이 없다가 그만 집을 나와서 다시 돌아 오지 아니하였다. 允七[윤칠]은 다시는 아들딸을 만날 面目[면목]이 없다 하여, 이번에야말로 일가 사람들과 祖上[조상]의 祠堂[사당]과 墳墓 [분묘] 앞에 제 罪[죄]를 自服[자복]하고, 이 괴로운 목숨을 끊어 버리리라 決心[결심]하고, 혼자서 비슬비슬 故鄕[고향]으로 돌아 왔다.

차마 낮에는 동네에 들어 올 수가 없어서 수풀 속에 몸을 숨겼다가, 밤이 들매 동네에 들어 와 그의 조카의 집을 찾았다.

조카는 그래도 伯父[백부]라고 차내어 쫓지도 못하고 집에 받아 들였다.

允七[윤칠]이가 일가 사람들 앞에 제 罪[죄]를 自服[자복]하고 죽으려고 한다는 결심 決心[ ]을 듣고는, 크게 놀래어서 굳세게 反對[반대]하였다. 그것은 伯父[백부]가 죽는 것에 對[대]하여 反對[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 이 다 잊어 버린 부끄러운 일을 이제 새삼스럽게 도로 들추어 내어 조카들까지 망신시킬 것이 무엇이냐 함이었다. 그래서 允七[윤칠]은 이도저도 못 하고 얼빠진 사람 모양으로 하루 이틀 지내는 동안, 한 달이나 조카의 집에 숨어 있었다. 六十[육십]이 넘은 늙은 몸이 실상 어디로 갈래야 갈 수도 없 는 것이었다.

允七[윤칠]이가 들어 와 조카의 집에 숨어 있다는 말이 한 입 건너 두 입 건너 동네에 퍼지게 되어서, 동네 젊은 사람들이 允七[윤칠]이 숨어 있는 집에 가끔 슬슬 도는 일이 있게 되었다.

이 소문이 어떻게 굴러 갔던지, 百里[백리] 밖에 사는 학자님의 아들― 金氏[김씨] 婦人[부인]이 버리고 간 아들의 귀에 들어갔다.

아들은 어머니 잃어 버린 자식으로 세상에 고개를 들지 못할 身勢[신세]가 되어, 술만 먹고 浮浪者[부랑자]의 生活[생활]을 하다시피 하고 있었다. 怨讐[원수] 允七[윤칠]이 本村[본촌]에 들어 왔다는 말을 듣고는 방망이를 깎아 차고 달려 와서, 允七[윤칠]의 조카의 집으로 막 달려 들어가 뒷방에 숨어 앉았던 늙은 允七[윤칠]을 수없이 때려서 그 자리에서 죽게 하고, 그리고는 곧 門長[문장]을 찾아 가서 允七[윤칠]을 죽인 事緣[사연]을 말하고, 自己[자기]는 殺人罪人[살인죄인]이니 官[관]에 넘겨 달라고 泰然[태연]하게 말하였다.

因緣[인연]이 異常[ 이상]하여 아비의 뒤를 따라 온 允七[윤칠]의 아들이 故鄕[고향]에 다다른 것은 그 늙은 아비 允七[윤칠]이가 제 同腹兄[동복형]에게 맞아 죽은 날이었다.

이 十八歲[십팔세] 되는 表表[표표]한 少年[소년]은 아비가 죽었다는 말을 듣고 땅에 엎드려 통곡하였으나, 아비의 屍體[시체]를 보기도 전에 아비를 때려 죽이고 동네집 舍廊[사랑]에 監禁[감금]이 되어 있는 同腹兄[동복형]을 찾았다.

다른 일가 사람의 紹介[소개]로 알기 전에, 얼굴을 마주 바라볼 때에 서로 누가 누구인지를 알 수가 있었다. 두 사람은 異常[ 이상]하게도 어머니 金氏 [김씨]의 모습을 고대로 닮은 것이었다. 두 사람은 말 없이 한참 동안 서로 바라보았다. 한 어머니 뱃속에서 나온 두 怨讐[원수]. 아우는 兄[형]의 손을 붙들고 慟哭[통곡]하였다. 兄[형]도 慟哭[통곡]하였다. 아우는 품에 품었던 칼을 내어 빼어 들면서,

『나는 이 칼로 어머니와 동생들을 죽이고, 아버지를 마저 죽이려고 이 칼을 품고 왔으나 인제는, 죄의 씨로 남은 이 몸 하나를 죽이면 고만이로 다.』

하고, 그는 다시 칼을 돌려 잡아 제 가슴을 찔렀다. 兄[형]은 아우의 가슴에 박힌 칼을 뽑아,

『낸들 인제 더 살아 무엇하리.』

하고는, 제 가슴을 찌르고 엎드러졌다. 두 兄弟[형제]요, 두 怨讐[원수]의 屍體[시체]는 官[관]에서 檢屍[검시]가 나올 때까지 한 房[방] 안에 가지런히 누워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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