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침교 명명 유래기

세종(世宗) 때에 판사(判事)의 벼슬을 최종으로 다시 관에 오르지 못하고 녹록한 세월을 보내고 있던 윤기무(尹起畝)의 따님이 성종(成宗)의 비(妃)로 책립되어 궁중에 들게 된 후부터 평화로운 궁중에는 때아닌 풍파가 자주 일기 시작하였다.

윤비(尹妃)로 말하면 어제까지 비록 궁항에서 가난한 살림을 하는 빈족은 아니라 할지라도 그다지 혁혁한 문벌가도 아닌 집안의 딸로, 꿈에도 예기할 수 없었을 국모(國母)의 높은 자리에 올랐은즉 마땅히 언행을 삼가며 덕을 닦아 자기 스스로의 행운을 길이 빛나게 할 것이며, 또 하나는 딸의 덕으로 임금의 장인으로서 부원군(府院君)이란 영화스런 자리에 오른 아버지로 하여금 국구(國舅)다운 체례를 지닐 수 있게 하는 것이 당연할 것이 아닌가.

그러나 윤비에게는 불행하게도 그러한 교양이 없었다.

그의 얌전스런 외모와 맵시나는 몸매에도 어딘지 모르게 교양 없는 조야(粗野)한 빛이 흘러 있었다.

반생을 대내에서 늙은 궁녀들은 사람을 알아보기 마치 주머니 속의 물건을 집어내듯 잘 알아서 윤비가 궁중에 들어오는 날 벌써 그들은 낙심하였다.

궁중이란 본디 몇몇 충성스런 착한 인물을 제하고는 열이면 아홉은 세력에 아부하여 자기 한 몸의 영달을 꾀하는 무리, 심하여는 동관을 팔고 남을 중상하여 위의 총애를 받으려는 반목이 무쌍한 무리들이라 비록 맘에 탐탁치 못한 일이 있을지라도 서뿔리 입 밖에 냈다가는 어떤 큰 화를 입을런지 모르는 까닭에, 뉘라 새로 책봉된 중전에 대하여 감히 뒷공론을 하리오마는 제마다 속으로는 탐탁히 여기지 않아서 가끔 부지중에 중전에 대한 신하의 체례를 각근히 지키지 못하는 사건이 생기는 것이었다.

그 어느 때인가 윤비가 궁중에 들어온지 얼마 되지 않아서이다.

대비(大妃)마마가 며느님 자시어 보라고 친히 용안육을 넣어 만들게 한 약식 한 합을 색장 나인에게 들려서 중전에게 보내왔는데 그 약식합을 쟁반에 받쳐 들고 온 나인은 중전 앞에 그것을 갖다가 놓고 전갈을 아뢰고는 곧 돌아서 물러 나왔더니 윤비는 자기가 그 약식합을 열어보고 어떠한 대답 전갈이 있기도 전에 돌아서 나간 것을 방자한 것이라고 크게 노해서 당장에 잡아내려 물볼기를 쳐서 궁에서 내쫓으라는 엄령을 내렸던 것이다.

나인의 행동거지가 법도에 가합한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색장 나인이라 하면 의당 궁중의 법도와 예의를 넉넉히 짐작도 하고 몸에도 배 있어서 그런 실수를 할 이치는 없다.

그러면 왜 그따위 버릇없는 행동을 하였던가 문제는 거기에 있는 것이다.

윤비 자체가 예법과 체례를 지킬 줄 몰라서 가끔 남편 임금에게 대해서 무례한 언행이 있었기 때문에 궁녀 가운데에도 조금 뱃장 센 것들은,

『당신두 법도를 지켜야 남두 예절을 지키지.』

하는 심술로서 부지 중 그런 방자스런 행동이 나오고 마는 것이다.

그런 일로 해서 대비마마와 며느님 사이 ─ 고부 ─ 간의 사이는 날로 떨어져 가고 말았다.

대비마마는 새로 입궁한 중전의 아름다운 점만을 찬양하고 교양 없는 행동에 대해서는 아직 궁중 예법에 익지 못한 탓이라고 될 수 있는 대로 덮어 왔지마는 날이 갈수록 점차로 늘어가는 해괴망측한 언행에 눈살을 찌푸리지 않을 수 없었다.


윤비는 다만 교양이 없다는 그것만이 험이 아니었다. 교양이 적은 위에 편벽된 고집과 심술 그리고 대중이 분수가 없으며 게다가 투기가 극심해서 신변 집사를 거들어 울리는 나인들도 전전긍긍으로 하루 한 때 편할 날이 없을 뿐더러 나중에는 은근히 중전을 미워하며 무슨 큰 실책이나 생겨서 상감마마의 미움이나 받았으면 하는 좋지 못한 기원까지 가지는 것이었다.

이러한 심경에 있는 의뭉스럽고도 능청맞은 나인들에게 어떤 음모가 꾸며지지 않을 수 없다.

윤비가 아무리 영리하다 할지라도 천성이 거칠고 소견이 좁은지라 필경은 나인들의 음모에 빠져 스스로의 무덤을 파고야 마는 것이었다.

쉽게 말하면 성종과 윤비 사이를 이간질하는 것이다.

성종은 천성이 인자하면서도 법도를 지킴에는 추호 소홀함이 없으며 문학을 숭상하는 나머지 매양 여러 학자들과 더불어 때를 보내는 일이 많기 때문에 중궁 침전에도 드시는 일이 적으며 더욱이 건강이 순조롭지 못한 탓도 있어서 여색에 소홀 담담하기 이를 데 없었다.

임금의 이러한 특이한 점을 그들 몇몇 나인은 교묘히 이용하여 중전에게 마치 상감마마가 따로 생각하시는 의중인이 있기 때문에 중전 침전에 드심이 적고 우정 냉담한 태도를 지으시는 양으로 꼬득이었다.

워낙 투기가 유달리 강한 윤비 ── 그리고 허구헌 날 공방만을 지키는 성욕의 불평이 폭발되어 히스테리에 가까운 추태를 연출하고야 마는 것이었다.

상감이 어쩌다 내전에 들기만 하면 이런 트집 저런 트집으로 울고 짜고 하는 것은 물론 필경은 남편인 임금의 얼굴을 할퀴고 쥐어뜯고 하는 것이었다.

어느 때는 상감의 어의를 갈갈이 찢은 일까지 생겼다.

이 해괴망측한 광태에 성종은 참을 수 없는 것을 참아 왔다. 그러한 광태를 당할 때마다 성종은 몸을 피할 뿐이었다.

이것이 더욱 임금의 발을 멀리하는 원인이 되고 그 정비례는 윤비의 투기와 광태는 더욱 늘어가는 것이었다.

뒤에서 중전의 이러한 실태를 보고 득의의 미소를 띄우고 사태의 추이를 엿보고 있는 나인들이 있는 것을 그는 아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사태는 필경 어떠한 종결을 짓지 않을 수 없는 절정에 이르고 말았다.

어느 날 성종은 윤비의 광태 ── 얼굴에 상처가 나서 피가 흘러나리도록의 ── 에 견디다 못하여 대비(貞熹大妃)의 방으로 몸을 피하자 대비는 이 광경을 보고 크게 격분하여 필경 아래와 같은 전교(傳敎)를 내리고야 말았다.

『윤비는 성품이 포악하고 투기가 자심하여 용안에 조흔(손톱 자죽)이 끊일 날이 없으니 국모의 체례를 잃은지라 장차 어이하면 좋을 것이냐.』

하는 뜻의 전교이다.

이것은 분명히 중전의 지위에 그냥 놓아둘 수 없다는 뜻이 표현되는 것이다.

당시의 중신들도 이미 중전의 추태에 대해서는 일일이 공론이 많았지마는 위에서 아무 말이 없는 이상 신하의 몸으로서 경솔히 이런 등사의 말을 낼 수 없었기 때문에 모두가 입맛을 쩍쩍 다시면서도 감히 먼저 입을 벌이는 사람이 없었던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던 중 뜻밖에 대왕대비의 전교가 내리고 보니 이제는 기회가 당도했다고들 생각하였다.

이리하여 정승 윤필상(尹弼商)을 비롯한 이세좌(李世佐), 이극균(李克均), 성준(成俊), 이파(李坡) 등등의 중신들이 연서하여 폐비헌의(廢妃獻議)를 올리게 되었던 것이다.

정부에 있는 중신들이 오직 윤필상이나, 이세좌 등등의 몇 사람에 그칠 리는 없다. 허종(許琮) 허침(許琛) 같은 유명한 형제도 있었지마는 그들은 교묘히 폐비헌의에 빠지고 말았던 것이다.

그들의 생각에는 수십 년 후의 일이 염려되었던 것이다.

현재 윤비와 성종 사이에 하나의 혈육조차 없다면 또 모를 일이지마는 단 한 분의 왕자인 연산(燕山)이 비록 강보(襁褓)에 쌓여 있었다 할지라도 성종 타세 후에 연산이 왕위에 오른다면 당신의 생모인 윤비를 내몰자는 헌의를 한 신하들을 그냥 둘 리 없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물론 폐비헌의에 찬성하여 이를 주장하는 중신들도 그것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마는 어찌 생각하면 연산 왕자가 다음날 임금이 될지라도 대의를 생각하여 그따위 사사로운 보복을 하리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점도 있을 뿐더러 우선 현재에 있어 나라의 체례를 생각하지 않고 그대로 내던져 둔다는 것은 신하로서 비겁한 소위라고도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그 중에도 허종 같은 점잖은 벼슬아치는 이 점에 한해서 수일을 두고 고민하였다.

허종은 자(字)를 종경(宗卿) 호를 상우당(尙友堂)이라고 부르는 사람으로 일찌기 세조(世祖) 때에 이십여 세로 등과하였더니 왕이 당시의 문신을 뽑아서 각기 즐겨하는 과학 기술을 연구케 하기로 되어 허종은 천문학(天文學)을 연구하고 있었는데 공교히 그 해에 일식(日食)의 변이 생기기 때문에 그것에 대한 보고를 왕께 올리게 되었었다.

그런데 허종은 그 보고서 끝에다가 당시의 시폐(時弊)를 논하며,

첫째 언로(言路)를 열어 언론의 자유가 있게 하고.

둘째 연경에 상감이 임어하셔서 학문을 장려 할 것.

셋째 유전(遊畝)을 금할 것.

유전이라고 하는 것은 사냥질을 한 개의 오락으로 삼아서 함부로 짐승을 죽이는 것을 말하는 것이니, 이러한 당시의 폐해를 적어서 하루 속히 그것을 실천하시라고 기록해 올렸던 것이다.

세조는 그 바른말에 적지 아니 탄복하였지마는 그 인물을 좀 더 시험해 보고자 하여 허종을 어전으로 불러 들이어 그 무엄한 언동을 꾸짓고 곁에 놓인 환도를 들어 칼을 조금씩 빼며,

『이 칼날이 자루에서 떨어지기 전에 분명한 대답이 없으면 당장에 참하리라.』

하는 호령을 하였다. 여느 위인 같으면 혼비백산해서 말소리조차 허둥지둥 떨릴 것을 허종은 태연자약하여 성색이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왕은 거의 자루에서 떨어질 칼날을 자루로 탁 끼으며,

『어허 나의 보배 신하가 또 하나 생겼구나.』

하고 탄복하며 그를 어전 가까이 불러 올려서 술을 내리기까지 하였던 것이다.

이것이 출세의 실마리가 되어서 나이 삼십삼 세에 함길도 절도사(咸吉道 節度使)가 되어 북방의 지리와 인정 풍태라든지 외족의 정세에 능통하여 치적이 매우 볼만 하더니, 이 년이 지난 병술(丙戌)년에 모친의 상사를 당하였기 때문에 강효문(康孝文)으로 하여금 절도사의 정무를 대리케 하고 서울로 올라왔다.

그랬더니 미구에 이시애(李施愛)가 반란을 일으키어 도처에 관아를 파괴하고 수령을 살해하는 등 그 기세가 매우 강해서 강효문으로서는 도저히 감당할 길이 없었다.

이리하여 허종이 급히 다시 함길도 절도사로서 적당을 소멸코저 북행했을 때는 이미 시기가 늦어서 적군은 벌써 북청(北靑)으로 침입하여 만령(蔓嶺)이란 높은 재에 진을 치고 처올라 가는 관군을 내려다 보고 쏘는 바람에 무수한 전사자만 날 뿐 도저히 승산이 서지 못하였다.


관군의 막 중에서는 이편 군사의 사기가 저상되어 감에 크게 당황하여 어이 될 바를 몰라 허종에게 일시 퇴군하기를 청하였더니, 허종은 아무 말이 없이 종이 한 조각을 꺼내어서 부하에게 주었다. 그 종이에는 만령재 일대의 지세가 그리어 있고 그 높은 재에서 좀 떨어져 있는 후방에 또 하나 고개가 있는 것을 지적하여 그 지점으로 밤을 도와 비밀히 행군하였다가 때를 보아 야습을 하라는 지시를 하였던 것이다.

결국 이 야습 계획은 틀림없이 들어맞아서 이시애의 반군은 여기서 거의 전멸을 당하다시피 대패를 해서 사산도주하고 말았다.

이 반격이 크게 성공한 즉시에 허종의 부하들은 곧 적군을 추격할 것을 헌의하였더니 허종은

『내버려 두소. 우리는 가만히 앉아서 괴수 목아지 구경을 하게 될 것이니.』

하더니 과연 미구에 이시애의 부하인 이주(李珠)란 위인이 시애를 결박하여 가지고 와서 항복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만한 지략과 용기가 있는 허종이다.

그러면 이런 중신인 허종이 어찌하여 폐비헌의에 빠질 수 있었던가. 거기에는 이러한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었다.

허종의 아우 허침(許琛)은 성정이 지나치게 곧은 사람이어서 폐비헌의를 반대하였기 때문에 필경 각 대신들의 미움을 받아 체직을 당하고 말았지마는 허종은 그럼으로 보아서는 좀 더 능소능대하는 사람인지라 한번 반대는 해 보았지마는 중신의 대부분 ── 더욱이 영상인 윤필상(尹弼商)부터 ── 이 폐비헌의를 강조하는 터이므로 굳세게 반대도 하지 않고 태도를 모호하게 가졌던 것이다.

그러므로 폐비헌의를 주장하는 사람들도 허종만은 끝까지 반대할 사람이 아니하고 타산해 두었던 것이다.

그러던 중 결국 폐비헌의 상소에 마지막으로 몇몇 중신들의 서명을 하게 되는 날 아침, 허종도 필경 예궐하여 정원에 출사하지 않을 수 없어서 나귀를 타고 상노 별배 각각 데리고 집을 나섰다.

당시 허종은 위대 내자동에 살고 있었다.

허종은 오늘도 매일 같이 하는 습관으로 예궐하는 길에 매가(妹家)에 들렸다.

허종의 매씨는 비록 여자일 망정 허종 이상의 지모와 인격이 있어서 존경하고 있는 터이므로 이번 폐비문제가 일어난 후에도 허종은 수차 그 일에 대한 의논을 묻기도 한 사이었다.

그는 허종의 낯을 보자마자

『대감, 오늘이 폐비헌의의 종을 짓는 날이 아니오?』

『헌의 상소에 각자 서명을 하는 날이니 예궐 아니 할 도리가 있읍디까.』

그는 허종의 말에 대답도 아니하고 무엇인가를 눈 하나 깜작이지 아니하고 생각하고 있더니

『대감.』

하고 불렀다.

『……?……』

『그만 두슈.』

『그만 두라니 예궐허지 말란 말요.』

『글쎄 생각해 보슈, 중전마마의 행실이 폐비를 당해야 마땅할 것이야 다시 말할 것도 없고 또 소생 왕자나 없으시다면 다시 고려할 필요도 없겠지마는, 대감 깊이 생각해 보슈, 지금 강보에 쌓여 있는 왕자가 계시지 않소, 더구나 지금 상감마마의 건강이 좋지 못하시니 만일에 금상이 돌아가시고 왕자가 왕위에 오르신 후에 당신 생모를 쫓은 신하들을 곱게 보실 리 없지 않소.』

『다행히 왕자가 유충하시니 그 비밀을 아실 리 없다고 보는데.』

『천만에 세상에 비밀이란 없읍니다. 감추면 감출수록 들어나기 쉬운 법이요.』

허종은 지각이 깊은 누님의 말에 대답할 말이 얼른 나오지 않아서 잠시 머뭇거리었다.

이 눈치를 본 매씨는

『공연히 자손에게 큰 후환을 남겨 놓지 마시우.』

하는 말로 최종의 뜻을 주어 버렸다.

그러나 허종은 경솔히 좌니 우니의 말을 하지 않았다. 나중에는

『사리는 그러허오마는 점잖단 사람으로서 한번 언약한 것을 저버릴 수야 있소.』

하고 매가를 힘없이 나섰던 것이다.

그는 다시 나귀 등에 올랐다. 오르긴 하였지마는 기계적으로 몸을 움직였을 뿐 정신은 폐비헌의에 참가 여부를 결정치 못하여 고민하였다.

후환 ─ 자손들의 수난 ─ 패가 멸족 뿐 ─ 이러한 환상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꺼졌다 하였다.


무심한 나귀는 주인을 등에 싣고 어느듯 청계천 나무 다리에 이르렀다. 다리를 건너서 불과 얼마 가지 않으면 대궐이다.

나귀는 금시 다리 중턱에 이르렀다. 이 순간 어떤 생각이 번개같이 허종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다음 순간 그는,

『앗.』

하는 소리와 함께 청계천 진흙탕 개천으로 내려 떨어졌다.

나귀는 놀라서 우뚝이 서고 별배 상노는 갈팡질팡 하다가 역시 개천에 뛰어내려서 온몸이 흙탕물 투성이가 되고 다리를 잘 가누지 못하는 주인을 업어 올렸다.


이리하여 허종은 낙마하여 다리를 다쳤다는 이유로 폐비헌의에 참가하는 것을 면하였고 당나귀는 아무 죄도 없건마는……

『요놈의 방정맞은 나귀가.』

하는 욕설과 아울러 억울 천만의 몽둥이찜을 톡톡히 받았다.


이러한 고역의 묘계로서 허종은 필경 폐비헌의서에 자기 이름을 서명하는 위기를 피하고 말았던 것이다.

정원 일기를 기록하는 데에는 구태어 허종은 낙마부상으로 말미암아 페비헌의에 참석하지 못하였다고 기록할 필요가 없어서 그냥 허종의 기록을 기록하지 않았을 뿐이다. 그러므로 해석하기에 따라서는 허종은 폐비헌의에 반대하는 사람이라고 볼 수도 있고 또 굳센 반대를 표명한 바는 없을지라도 하여튼 그 헌의에 참가한 증적이 없다는 것만은 확실히 기록에 나타나게 되었던 것이다.


윤비를 폐해서 궁중에서 서인(庶人)으로 내모는 것만은 실행되고 말았다.

그런지 얼마 되지 않아서 폐비 윤씨가 독약을 몰래 대궐에 들여보내서 성종을 시해하려는 음모가 있던 것과 그것이 발각되어서 윤비에게 사약을 내려 죽인 일 등은 여기서 장황하게 말할 것도 없지마는 성종(成宗)이 어수 三八[삼팔]의 젊은 몸으로 이내 돌아가고 연산이 왕위에 오른 후에 생모되는 윤비의 설원을 하기 위한 소위 갑사사화(甲士士禍)가 일어나서 진도(珍島)에 귀양 가서 있는 윤필상(尹弼商)을 비롯하여 성준(成俊) 이세좌(李世佐) 등은 전부 죽음을 당하였고 이미 죽은 한명회(韓明會) 같은 사람은 그 묘를 파서 백골에게 욕을 보이는 등의 복수를 당하였건마는 허종(許琮)만은 폐비헌의에 참가한 문적이 없었기 때문에 아무런 화를 당하지 않았던 것이다.

후일 위대 사람들이 나무 다리가 썩어 위태하다고 해서 동네 사람들의 추렴으로 돌다리를 놓게 되었고 돌다리를 놓게 되니 자연 다리 이름을 짓자 하여 이런 이름 저런 이름을 가리던 중 어느 한 사람이 이 다리에서 허종 대감이 낙마해서 청계천 흙탕물에 빠졌기 때문에 이번 사화에 피해를 면했으니 허종의 종(琮)자를 따다가 종침교(琮沈橋)라고 명명하라고 건의한 것이 만장일치로 가결되어 종침교라는 괴상한 이름이 생겼다고 하는 것이다.

이것이 진설인지 아닌지는 확고한 문빙이 없으나마 전해 내려오는 말이 이러하고 또 허다한 이름에 하필 종(琮)자를 붙여서 지금도 「종교」라는 다리 이름이 남아 있다는 것은 허설이라고만 치우쳐 버릴 수 없는 것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