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역사 그대로의 반영인 조선미술의 윤곽
조선의 미술은 역사적으로 제국주의의 침략정책과 그 인연이 대단히 깊다. 다시 말하면 조선미술의 발생 시대라 하는 사군시대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정벌과 병견(竝肩)하게 그 침입을 번거로이 받았다는 것이다.
사군시대 '낙랑, 현둔, 진번, 임둔'으로부터 신라를 거쳐 현금의 조선에 이르기까지 침략과 학살의 뒤를 이어 미술이 전래되었으며 또 이 전래된 미술이 생장되고 원숙된 것이 곧 조선의 미술이다.
물론 사군시대 이전에는 조선에 미술이 없었던 것은 아닐 것이다. 그 때의 조선 백성(토착 민족)에게도 훌륭한 자기네 미술이 있었을 것은 지금 우리가 넉넉히 상정할 수 있는 것이다. 어째서 그러냐 하면 애급이나 희랍에도 또 더 그 이전에 불란서 서반아(전(前) 석기시대)의 순록민(馴鹿民)에게도 미술이 있었던 것을 우리가 너무 잘 아는 까닭이다.
예술의 기원, 이것을 내가 쓰자는 것은 아니지만 원시인에게는 다만 생활이라는 것만 존재해 있고 이 생활이 필연적 필수적으로 요구하는 것만 존재해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개체와 전군(全群)의 생활에 필요한 미술은 당연히 있었을 것이다. 어쨌든 생활의 필요상 기억의 재현을 쉽게 하고 해석의 편의를 돕게 하려고 또는 기념으로 암호로 작화(作畵)하고 조각하였던 것은 어떠한 원시 종족에게나 다 같이 있었다는 것을 독자나 나나 마찬가지로 똑똑히 알고 있는 것이다.
이만하면 사군시대 이전 위만조선이나 기자조선이나 더 나가서 단군조선 이전의 토착민족에게도 자기네가 가져야만 할 미술은 가졌었으리라는 단안은 넉넉히 내릴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토착민족이 가지고 있던 미술은 제국주의 문화의 침입으로 말미암아 근본적으로 그 작용의 효과가 다르게 되고 말았다. 원시 사회의 생활 상태는 인간 생활사의 과정에 있어 필연적으로 그렇지만 불행하게도 계급 분열이 생기게 되었다. 여기서 조선의 미술은 비로소 착취 계급인 정복자가 피착취 계급인 토착 민족을 마취시키고 노예화시키려는 수단으로 또는 정복 살육의 죄를 무시로 범행한 정복자의 참회 자위에 이용되고 종교화되어 착취 계급에 대한 한 개의 훌륭한 피정복자의 회유의 정책이 되고 만 것이다.
그래서 이 정책화된 미술은 인간 본래의 생활과 하등의 교섭이 없는 현실에서 유리된 예술·미술이 되었으나 제대로 번영되고 실재되어 가지고서 도리어 생활을―현실을―지배하려고 하며 기화(氣化)하려고 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지나 본토에서 정기적으로 밀리어 나오는 제국주의의 침략과 무력의 뒤를 추종하는 문화와 또 토착민족 자체의 내부에서 효생(酵生)된 지배 계습의 향락적 욕망으로 말미암아 자기 확충이 되어서 허망 신기루 상아탑은 점점 그 지반이 굳는 대신에 생활로부터 민중으로부터 거리가 자꾸만 떨어지게 된 것이다. 이것을 그대로 지속하여 가지고서, 이 위에다가 조선의 독자한 패퇴 심정(국가로 있어 지리상 불행한 처지에 있었고 이 위에 번노(繁勞)하게 정벌을 입은 까닭으로 민족의 감정 전체가 무기력하게 퇴피(退疲)하게 되었다. 이외에 기후나 풍토나 지질의 관계도 없지 않지만 주인(主因)을 전자(前者)에 있다고 본다)을 가미하여서 필가묵무(筆歌墨舞)하여 놓은 것이 소위 조선의 미술이라 일컫는 것이다.
조선의 미술은 이와 같은 유복한 역사를, 족보를 갖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현금의 조선 미술은 어떠한가를 점찰(占察)하여 보기로 한다. 그 어느 때인가(이것은 독자가 너무나 잘 아는 것이라 쓰지를 않겠다). 정치적으로 일대 동변이 생기었다. 2천여 년 전 미술사에 있어 발생시대라 하는 사군 통치 시대와 꼭 같은 또는 그보다도 더 급격한 변혁이 일어났다. 이로 말미암아 구미의 문명이 바꾸어 말하면 난숙된 자본주의의 문명이 일본을 거쳐서 새로운 부대(附帶)사명을 띠고 수많은 이민과 같이 몰려 들어오게 되었다.
여기에서 가장 많이 재래의 미술을 성육시키어 주고 완미(玩味)하던 일부의 특권 계급이 몰락하게 된 것이다. 모태를 잃은 조선의 미술은 자신의 영양소를 구하려 전력을 다하였던 것이다. 마치 사군시대 이전 토착민족의 미술이 원시인의 미술이 토착민족이나 원시인에게서 유리하려고 하며 모반하려던 것과 같이 새로운 주인을 맡이하는 데 집념(集念)하였다. 외래의 정복자에 있어서도 자기네의 향락 생활을 영원화 시키고 피정복자를 회유시키고 마취시키자는 전통적 정책으로 예술을, 미술을 이용하려던 것이다. 그래서 이 두 개가 별다른 목적을 갖고서 서로 야합을 하게 되었다. 제각기 색다른 쾌감을 느끼게 되었다. 아첨과 추수(追隨)의 교만을 등분(等分)하게 갖고 있는 현금의 조선미술은 이와 같이 하여 지속되며 배양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시대가 사정이 옛날과 매우 다르다. 그러나 이 연유로 그 전에 보지도 못한 외래 미술의 이민 미술이 발기한 것이다. 조선의 미술은 여기서 새로운 커다란 적수를 만나게 되었다. 왜래 미술, 이민 미술과 대립하지 아니치 못하게 되었다. 정치상 우월한 지위에 있는 이민 미술과 항쟁을 하게 된 것이다.
조선의 자연의 일부는 시일을 거듭하는 데 있어 이민 취미에 적합하도록 개변되어 간다. 자본주의의 문명이 전원에 향촌의 곳곳마다 침윤해 들어온다. 이 덕분에 조선미술의 향토성(혹은 민족성)이 감각(减却)하여 가게 된다. 문제는 여기에 있다.
조선의 미술이 어떤 미술과 대립하며 항쟁하는 데에 가장 많이 그 힘을 의촉(依囑)하고 자부하였던 향토성은 자본주의 문명으로 하여 역선(域線)이 무너지며 이민 취미로 말미암아 개변되어 가는 도정에 서 있다. 조선미술의 유일한 무기는 이와 같이 하여 나날이 좀이 먹어가는 것이다. (향토성의 영원 불변설을 고지(固持)하는 사람도 있도다. 그러나 원숙된 자본주의의 문명으로 인하여 이것이 소멸되어 가는 것을 우리는 누구보다도 가장 많이 보는 것이다. 여기에 자본주의 문명의 공과가 서게 되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여러 번 당한 정벌과 학살로 인하여 또한 조선(祖先) 대대로 이것만을 상속받은 까닭으로 해서 조선 백성 전체의 심금은 특이한 변조를 띠게 되었다. (이것을 나는 패퇴(敗頹)심정이라고 한다) 이 심정만이 가속도로 농도를 증가하고 있다. (자본주의의 원숙되어 가는 것과 정비례를 잃지 않는 속도로 심화되어 가는 것이다) 이 퇴폐심정이 그 농도가 심화하게 된 뒤에 그 퇴적(堆積)이 붕과하는 때에는 조선의 미술이 최후까지 기대하고 명맥으로 여기던 바의 민족성은 근저로부터 소침(消沈)되어 버리는 때이다. 붕괴되어 버린다. 따라서 조선의 미술은 그 존재해 있을 아무러한 이유가 붙지 않게 되는 것이다.
신흥 지배계급에 아첨하는 동시에 또는 정략(政略) 스스로 이용을 당하면서 한편으로는 이민 예술과 대립상(對立上) 항쟁을 하지 아니치 못하게 되었다.
예술상 주장으로보다도 지배계급의 총애의 비율과 이윤의 분배율 때문에 괴로운 대전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토착민족이라는 불행한 처지로 동정을 사며 나날이 녹이 슬어가는 향토성 민족성이라는 무기를 가지고 진두에 나서게 되었다. 이것이 지금 우리의 눈앞에 있는 허구의 신기루인 조선미술의 절박한 사정이다.
옛적 기자로부터 위만으로부터 후한의 무제로부터 수당을 거쳐 명청에 이르기까지 사절과 문화와 교환을 하며 내려 왔었다. 이로 하여 토착 민족의 미술은 생활서부터, 자수 민중으로부터 탈각되어 세련되고 정등(靜燈)되어 소위 퇴폐 심정으로 염채(染彩)한 뒤에 독자한 조선미술의 경지를 그어 놓은 것이다. 신라의 불상, 공민왕, 장사공(張思恭)의 회화, 삼재(三齋)의 호완(豪腕), 단원(檀園) 오원(吾園)의 건필로 지반이 굳게 된 것이다. 여기다가 근세에 와서 심전(心田), 소림(小琳)이 있었고 그 외에도 농채화사(弄彩畵士)의 무리, 허황된 상아탑 속에 농성하여 가지고 민중생활을 감상주의의 박명(薄明)의 면분포(面粉布)로 은복(隱覆)하고 장식(裝飾)하고 있었다.
직면하고 있는 '인간고' '사회악'에 대하여 아무러한 사고가 없었고 반성이 없고, 생활에―실현에―이렇다는 준비도 아무것도 없이 피동적으로 정략적으로 농완희묵(弄腕戱墨)을 하여 내려왔다. 비근한 예를 들면 반·아이크의 벽화가, 미켈란젤로의 작품이 기독교 사원을 예술적으로 장식하고 그 건축의 장엄함을 도우려 함보다도 천국의 영화와 내세의 행복을, 바꾸어 말하면 신자의 환심을―이교도의 무리들을 공갈 유인하고자 하는 데 그 표적이 있었던 것이다.
예술적 가치의 유무는 엉뚱한 별 문제였던 것이다. 예술적 효과를 얻은 것은 제2의적 부산물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원시인에게서 이연(離緣)하고 생활에서 독립하여 가지고 화장한 미술은 생할에서 원리(遠離)되고 탈거(脫去)한 미술은 과거의 미술 현금의 미술은 다 이와 같은 동기에서 정략에서 신앙으로 하여 조형된 것이다. 예술적 가치라는 문제는 염두에도 없었던 것이다. 다만 충실하게 정치에 종교에 특권 계급에 아부하고 노역(勞役)을 감수하고 예술지상성을 믿어 자위하며 이것으로 민중을 마취하여 내려왔고 또한 존재하여 있는 것이다.
현재의 조선미술도 여기에 그 존재 이유가 있다고 한다. 그래서 화단이 형성된 것이며 서화협회가, 고려미술원이, 삼미회(三美會)가, 창미사(創美社)가 조직된 것이다. 다만 번이(番餌)의 분배율 까닭에 서로 결단된 것이다. 예술상에 있어 주장이나, 주의나, 더 나가서 사상상 주견이 다름으로 하여 분립된 것이 아니라 오로지 특권계급의 총애를 전단하려고 질시 반목으로 하여 성립한 것이다.
회화에 있어서 직수입한 소화되지 않은 당송(唐宋)의 유훈(遺訓)을 고지(固持)하는 것은 똑같다. 고전적 이상주의의 역몽(逆夢) 속에 잠이 달게 들어 있다는 꼭 같은 것이다. '사회악'에 대하여 무관심하기도 똑같은 것이다.
나는 이렇게 안다. 자멸기(自滅期)에 서 있는 조선의 미술에는 별다른 생로(生路)가 없고 급속히 자체의 분해 작용을 하여 버리는 것뿐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다만 미술사조에 있어서 점진적으로 고전적 이상주의로부터 현실주의에, 현실주의로부터 주관주의에, 주관주의에서 단두대에 이러한 역로(歷路)를 밟아 달라는 뒤물근 주문은 할 수도 없고 또한 이에 응접할 수 없다는 것이다. 어째 그러냐 하면 생활에 대하여, 사회악에 대하여 인도주의적 이상주의적 태도로 자위에 가까운 고백, 선언, 감상적 이상적인 경고(警告)시대로부터 현실주의에서의 해부하려 하고 또 그나마 조그마한 주관에 비추어 비판을 내리려 하는 이와 같은 시기를 통과하여 회의와 흥분으로 자기 부정, 자기 굴굴(堀堀)의 주관 폭동을 할 때까지를 기다릴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같은 유장한 행정(行程)을 도저히 뒤축 없는 마혜(麻鞋)를 끌면서 앉은뱅이 걸음을 걸을 수가 없다. 절박하였다. 사정이 뛸 수만 있으면 뛰어야 되겠다. 이 까닭으로 현금의 조선화단 내지 조선미술 자체의 분해작용이 하루라도 속히 발견되기를 바란다는 것이다.
예술은 사회의 상부구조라는 것만 알아 주었으면 한다. 그래서 사회의 기초 구조인 생활에 변화가 있게 되면은 경제 조직에, 정치에 계급에 개변이 생기게 되는 때에는 예술 자체도 어찌 할 수 없이 자기 해체를 자신 익사(謚死)를 수행하지 아니치 못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의 조선의 민중은 어떠하냐는 말이다. 조선의 민중은 정복자네의 회유 정책화한 미술, 역사적으로 너무도 많은 사기를 받은 까닭에 미술 자신이 과대히 가지고 있는 교만(驕慢) 이민 미술과 대립하여 가지고서 광조(狂躁)하고 있는 미술에 아무러한 미혹도 유인도 받지 않은 것이다. 생활에서 유리된 미술에, 상고에 원시인이 토착 민족의 생활에서 모반하려는 미술과 절연을 하듯이 아주 미술과 인연을 차절(遮絶)한 지가 오래 되었다.
조선의 민중은 너무나 조선미술의 내용상(內容相)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다리 없는 도깨비 난무를 너무나 관대하게도 응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