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태조강헌대왕실록/3년

三年 春正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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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月 1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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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창궁에서 황제 있는 곳을 향해 정조를 하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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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辛丑朔/幸壽昌宮, 率群臣賀帝正。

임금이 수창궁에 거둥하여 여러 신하들을 거느리고 황제의 정조(正朝)를 하례하였다.


1月 2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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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창궁의 서쪽 침실을 헐어 2층 전각을 건축토록 명하고, 김사행에게 감독케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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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壬寅/命毁壽昌宮西寢室, 營二層殿, 以金師幸督役。

명하여 수창궁의 서쪽 침실(寢室)을 헐고 2층 궁전을 건축하게 하고, 김사행(金師幸)에게 역사(役事)를 감독하도록 하였다.


1月 4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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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의 괴변을 막기 위해 세자를 자운사에 보내 사대 연성 법회를 열게 하고 구경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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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甲辰/遣世子于慈雲寺, 設四大緣成法席, 以禳星變, 上親幸觀之。

세자(世子)를 자운사(慈雲寺)에 보내어 사대 연성 법석(四大緣成法席)을 베풀고 별의 괴변(怪變)을 빌어 물리치게 하였다. 임금이 친히 거둥하여 이를 구경하였다.


1月 7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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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창궁에서 하례를 받고, 종묘에 가서 감독관에게 공사를 간단히 하도록 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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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丁未/人日。 幸壽昌宮受賀禮, 遂如宗廟之地, 敎監督官曰: “凡事從簡, 毋使民勞。”

인일(人日)이므로, 임금이 수창궁에 거둥하여 하례를 받고, 종묘(宗廟)를 짓는 땅에 가서 감독관(監督官)에게 명령하였다.

"모든 일을 간편한 대로 따라 하고 백성을 수고롭게 하지 말라."


금주령을 내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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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命憲司, 復行禁酒之令。

헌사(憲司)에 명하여 다시 금주(禁酒)의 영을 시행하게 하였다.


1月 11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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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사 지내는 사람에게는 돈을 받고 술을 주도록 사온서에 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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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辛亥/傳旨憲司曰: “凡欲祭祀者, 許令司醞署納價給酒。”

헌사(憲司)에 전지(傳旨)하였다.

"무릇 제사를 지내고자 하는 사람은 사온서(司醞署)로 하여금 술값을 수납하고 술을 주게 하라."


1月 12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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흠차 내사 노타내 등이 자문을 가지고 오니 임금이 선의문 밖에서 맞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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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壬子/欽差內史盧他乃、朴德龍、鄭澄等, 齎左軍都督府咨文來, 上率群臣, 出宣義門迎之。 其咨曰:

洪武二十六年十一月二十日, 據山東都司寧海衛解到高麗劫賊一名崔禿伊到府。 責據本人狀供, 係高麗肅州爐叱洞住人。 於洪武二十六年七月七日, 有高麗王【上諱。】差萬戶金寺彦、千戶車成富ㆍ李富壽ㆍ林原ㆍ林淸彦ㆍ李佛壽ㆍ洪忠彦、百戶鄭隆ㆍ洪原ㆍ林忠彦, 領船七隻, 每船裝人三十七名ㆍ布二綑, 共計人二百五十九名, 布五百六十匹。 假作買賣, 打聽消息, 說道: “若大軍不來時, 我起軍打遼東。” 續後再差船十隻, 每船裝人三十七名, 各帶軍器, 共計人(二)〔三〕百七十名。 又據解千戶金完貴供稱, “有女眞係百戶金光義, 卽金城判官任葛龍義、令史藜均皮力等所爲, 幷不干金完貴事, 各人見在畢屯口子住。” 得此, 本府左都督楊文等官將各人供詞具本, 於奉天門奏奉聖旨: “恁都督府將這緣故行文書去, 敎李【諱。】知道。 這等假造倭賊, 又是他一次生釁, 就敎他將誘女眞的官吏送來。” 欽此。

흠차 내사(欽差內史) 노타내(盧他乃)·박덕룡(朴德龍)·정징(鄭澄) 등이 좌군 도독부(左軍都督府)의 자문(咨文)을 가지고 오니, 임금이 여러 신하들을 거느리고 선의문(宣義門)에 나가서 그들을 맞이하였다. 그 자문은 이러하였다.

"홍무(洪武) 26년(1393) 11월 20일에 산동 도사(山東都司) 영해위(寧海衛)에서 고려(高麗)의 불한당[劫賊] 1명 최독이(崔禿伊)를 잡아 본부(本府)[1]에 이르렀다. 본인(本人)의 장공(狀供)에 의거한다면 고려 숙주(肅州) 노질동(爐叱洞)에 거주하는 사람인데, 홍무 26년 7월 7일에 고려왕 이성계(李成桂)가 만호(萬戶) 김사언(金寺彦)과 천호(千戶) 차성부(車成富)·이부수(李富壽)·임원(林原)·임청언(林淸彦)·이불수(李佛壽)·홍충언(洪忠彦)과 백호(百戶) 정융(鄭隆)·홍원(洪原)·임충언(林忠彦)을 보내어 배 7척을 거느리고 배마다 인원 37명씩과 베[布] 2곤(綑)을 실으니, 합계 인원이 2백 59명이요, 베가 5백 60필이었는데, 매매(賣買)를 가작(假作)하여 소식을 듣게 하고는 말하기를, ‘만약 대군(大軍)이 오지 않을 때는 우리가 군사를 일으켜 요동(遼東)을 공격할 것이다.’라고 했으며, 뒤를 이어 재차 배 10척을 보내는 데, 배마다 인원 37명을 싣게 하고는 각기 군기(軍器)를 가지게 하니, 합계 인원이 2백 70명이 되었다. 또 잡아 보낸 천호(千戶) 김완귀(金完貴)의 공술(供述)에 의거하면, ‘여진(女眞)에 소속된 백호(百戶) 김광의(金光義)는 곧 금성 판관(金城判官) 임갈용의(任葛龍義)과 영사(令史) 여균피력(藜均皮力) 등의 소위(所爲)이므로 모두 김완귀(金完貴)에게는 관계 안 되는 일이다.’ 한다. 각인(各人)이 현재 필둔 구자(畢屯口子)에 거주하고 있는데, 본부(本府)의 좌도독(左都督) 양문(楊文) 등 관원이 각인(各人)의 공사(供詞)를 가지고 봉천문(奉天門)에 본디대로 갖추어 황제에게 아뢰어서 성지(聖旨)를 받았다. ‘이와 같이 도독부(都督府)에서 그 연고(緣故)로써 문서를 보내어 가서 이성계(李成桂)에게 알게 할 것이니, 그들이 왜적(倭賊)을 가조(假造)하고 또 한번 흔단(釁端)을 일으키고, 그들로 하여금 여진(女眞)의 관리를 꾀어서 보내게 한다.’는 사실이다. 이를 삼가 받들 것이다."


중군 군후소를 폐지하여 훈련관에 병합시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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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罷中軍軍候所, 倂於訓鍊觀。

중군 군후소(中軍軍候所)를 폐지하고 훈련관(訓鍊觀)에 병합(倂合)시켰다.


1月 13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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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헌부에서 금주를 과도하게 단속하니 완화하도록 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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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癸丑/憲司禁酒過嚴。 上召掌務雜端金九德, 敎曰: “凡人有疾者, 或以酒飮藥, 槪以犯令加罪可乎? 大抵禁酒, 毋得宴飮沈醉而已。”

헌사(憲司)에서 금주(禁酒)하기를 지나치게 엄하게 하니, 임금이 장무(掌務)인 잡단(雜端) 김구덕(金九德)을 불러 명령하였다.

"무릇 사람으로서 병이 있는 자는 혹 술을 약으로 마시게 되는데, 개괄(槪括)하여 범령(犯令)으로써 죄를 가하는 일이 옳겠는가? 대저 금주(禁酒)는 잔치를 베풀어 술을 마시어 몹시 취하지 못하게 할 뿐인 것이다."


1月 14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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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에 성에가 끼다. 수창궁에 가서 침전의 공사를 살펴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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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甲寅/木稼。 上如壽昌宮, 觀寢殿役。

목가(木稼)하였다. 임금이 수창궁에 가서 침전(寢殿)의 역사(役事)를 시찰하였다.


경기도의 수령들이 성 쌓는 인부들을 거느리고 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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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京畿左右道守令, 領築城役徒以來。

경기좌·우도(京畿左右道)의 수령(守令)들이 성 쌓는 역도(役徒)를 거느리고 왔다.


1月 15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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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에 성에가 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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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乙卯/木稼。

목가(木稼)하였다.


1月 16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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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창궁에 거동하다. 판문하부사 안종원 등이 경사로 가지고 간 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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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丙辰/上如壽昌宮, 遣判門下府事安宗源、中樞院副使李承源, 赴京謝恩。 表曰:

使華荐至, 帝命是宣, 感極涕零, 愧深汗洽。 竊念自古, 殊俗之在遠, 皆知中國之當尊, 故懷惠而畏威, 必効忠而嚮化。 苟或違此, 無以自存, 歷代以來, 明効可驗。 況臣幸遭昭代, 屢奉德音, 俾臣知軍國之權, 許臣更朝鮮之號, 得藉天威之重, 以定衆心之歸。 常懷圖報之末由, 何敢生釁之不已? 今者, 承準左軍都督府咨, 欽奉聖旨一款節該: “更國號一節, 遣人請之。 或祖朝鮮, 已許自爲, 卽合正名。 今旣更號朝鮮, 表文仍稱權知國事, 未審何謀?” 欽此。 國已更號, 臣未正名, 第緣典故之未諳, 實非姦侮之是肆。 譴責深切, 乃天地玉成之心; 誨諭丁寧, 實父母生育之惠。 玆有成命, 謹用欽遵。 玆蓋伏遇皇帝陛下視遠以明, 字小以德, 恕臣迷謬, 許臣自新。 臣謹當嘉與一方之民, 永祝萬年之壽。

임금이 수창궁에 거둥하였다. 판문하부사(判門下府事) 안종원(安宗源)과 중추원 부사(中樞院副使) 이승원(李承源)을 보내어 중국 서울에 가서 사은(謝恩)하게 하였는데, 표문(表文)은 이러하였다.

"사신이 거듭 이르게 하여 제명(帝命)을 선포하시니, 감격이 극도에 달하여 눈물이 나며, 부끄러움이 심하여 땀이 납니다. 그윽이 생각하옵건대, 예로부터 풍속이 다른 나라가 먼 곳에 있으면서도 모두 중국을 마땅히 높여야 될 것을 아는 까닭으로, 은혜를 생각하고 위력(威力)을 두려워하여 반드시 충성을 나타내고 교화(敎化)에 향하게 되니, 진실로 혹 이것을 어긴다면 자존(自存)할 수가 없었습니다. 역대(歷代) 이래로 명백한 효과가 증거되었사온데, 하물며 신(臣)은 다행히 밝은 시대를 만나서 여러 번 덕음(德音)[2]을 받들어, 신에게 군국(軍國)의 권한을 맡게 하시고, 신에게 국호를조선(朝鮮)으로 바꾸게 하시어, 천위(天威)의 중(重)함을 힘입어 중심(衆心)의 귀속(歸屬)을 정하였사오니, 항상 보답하려고 해도 미치지 못할 것을 생각하고 있사온데, 어찌 감히 흔단(釁端)을 일으킴을 마지 않겠습니까? 지금 좌군 도독부(左軍都督府)의 자문(咨文)을 받아 삼가 성지(聖旨)를 받들었사온데, 한 항목에 ‘국호(國號)를 고치는 한 가지 절차는 사람을 보내어 이를 청하므로, 혹은 조선(朝鮮)을 계승하든지, 이미 스스로 결정하도록 허락하였으니, 즉시 이름을 바루어야 할 것인데, 지금 국호를 조선(朝鮮)이라 고치고는 표문(表文)에는 그전대로 권지 국사(權知國事)라 일컬으니 무슨 계획인지 자세히 알 수 없다.’ 하였습니다. 삼가 나라가 이미 국호를 고치고서도 신이 이름을 바루지 못한 것은 다만 전고(典故)를 잘 알지 못한 때문이었으며, 실로 간모(姦侮)를 방사(放肆)한 것은 아닙니다. 견책(譴責)하심이 매우 간절하시니 곧 천지(天地)의 덕이 있는 사람으로 만들려는 마음이옵고, 회유(誨諭)하심이 정녕(丁寧)하시니 실로 부모(父母)의 생육(生育)하는 은혜이옵니다. 이에 성명(成命)이 있으므로 삼가 준수(遵守)하겠습니다. 이것은 대개 황제 폐하께서 먼 곳을 보시기를 총명으로써 하시고, 소민(小民)을 사랑하시기를 덕으로써 하시어, 신이 미혹하여 잘못한 점을 용서하여 신에게 개과천선(改過遷善)할 것을 허가하시니, 신은 삼가 한 지방의 백성과 더불어 만년의 장수(長壽)를 영구히 축원하겠습니다."


각도의 장정을 징발하여 경성의 축조에 조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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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徵發各道丁壯, 助築京城。

각도의 장정(壯丁)을 징발하여 경성(京城)을 쌓는 데 조력하게 하였다.


왕씨의 모의에 연루된 참찬문하부사 박위를 순군옥에 가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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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囚參贊門下府事朴葳于巡軍獄。 初東萊縣令金可行、鹽場官朴仲質等, 以國家安危、王氏命運, 卜於密城盲人李興茂。 事覺, 執興茂來囚巡軍獄, 令省憲、刑曹, 同巡軍萬戶府, 案其事。 興茂伏之曰: “可行、仲質等, 以朴葳言來卜曰: ‘前朝恭讓之命, 與我主上殿下孰優? 且王氏之中, 誰是命貴者?’ 我以南平君王和之命爲貴, 其弟鈴平君王琚次之。” 於是囚葳, 命巡軍執可行、仲質于慶尙道。

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 박위(朴葳)를 순군옥(巡軍獄)에 가두었다. 처음에 동래 현령(東萊縣令) 김가행(金可行)과 염장관(鹽場官) 박중질(朴仲質) 등이 국가의 안위(安危)와 왕씨(王氏)의 명운(命運)으로써 밀성(密城)의 장님[盲人] 이흥무(李興茂)에게 점[卜]을 쳤는데, 일이 발각되자, 흥무(興茂)를 잡아 와서 순군옥(巡軍獄)에 가두고, 성헌(省憲)[3]과 형조(刑曹)로 하여금 순군 만호부(巡軍萬戶府)와 함께 그 일을 조사하게 하니, 흥무가 죄를 자백[伏罪]하였다.

"가행(可行)과 중질(仲質) 등이 박위(朴葳)의 말로써, 와서 점치게 하면서 말하기를, ‘고려 왕조 공양왕의 명운(命運)이 우리 주상 전하(主上殿下)보다 누가 낫겠는가? 또 왕씨(王氏)의 가운데서 누가 명운(命運)이 귀한 사람인가?’ 하므로, 내가 남평군(南平君) 왕화(王和)의 명운이 귀하다 하고, 그 아우 영평군(鈴平君) 왕거(王琚)가 그 다음이 된다고 하였습니다."

이에 박위를 가두고 순군(巡軍)에게 명하여 가행과 중질을 경상도에서 잡아 오게 하였다.


1月 17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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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씨를 거제도로 이배시키고, 왕화·왕거를 안동옥에 가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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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丁巳/遣巡軍鎭撫金永和、千戶柳陽等, 還徙王氏于巨濟島, 又遣大將軍沈孝生, 繫王和、王琚于安東獄。

순군 진무(巡軍鎭撫) 김영화(金永和)와 천호(千戶) 유양(柳陽) 등을 보내어 왕씨(王氏)를 거제도(巨濟島)로 옮기게 하고, 또 대장군 심효생(沈孝生)을 보내어 왕화(王和)와 왕거(王琚)를 안동옥(安東獄)에 가두게 하였다.


1月 18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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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위에게 술을 내려 주고 수갑을 풀어주며 타이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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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戊午/上遣人賜酒于朴葳, 命解鎖, 諭之曰: “如此事, 卿豈爲之? 待仲質、可行等來辨論則出矣。 此事關係社稷, 非余所得私, 命卿就獄。 余於人, 雖大罪, 皆宥之, 況於卿乎? 卿勿動心。”

임금이 사람을 보내어 박위(朴葳)에게 술을 내려 주고, 명하여 수갑을 풀어주게 하고 개유(開諭)하였다.

"이와 같은 일을 경(卿)이 어찌했겠는가? 중질(仲質)과 가행(可行) 등이 오기를 기다려 변론(辯論)한다면 석방되어 나올 수 있을 것이다. 이 일은 사직(社稷)에 관계되기 때문에, 내가 사정(私情)을 쓸 수가 없으므로 경(卿)에게 옥(獄)에 나아가도록 명한 것이다. 내가 사람들에게 비록 큰 죄일지라도 모두 용서하는데, 하물며 경(卿)에게 있어서랴! 경은 동심(動心)하지 말라."


전 밀직 제학 권주의 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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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前密直提學權鑄卒。 鑄, 安東人, 玄復君廉之子, 吉昌君準之孫。 性端慤, 讀書登第, 歷官華要, 皆兼館職。 嘗出牧忠、黃二州, 皆有惠政。 入爲知申事, 試士成均, 人無間言。 官至密直提學。 二子壎、堡, 皆登第。

전 밀직 제학(密直提學) 권주(權鑄)가 졸(卒)하였다. 주(鑄)는 본관이 안동(安東)이니, 현복군(玄復君) 권염(權廉)의 아들이요, 길창군(吉昌君) 권준(權準)의 손자이다. 성품이 바르고 성실하였다. 글을 읽어 과거(科擧)에 올라 화관 요직(華官要職)을 지내고 모두 관직(館職)을 겸무하게 되었다. 일찍이 나가서 충주(忠州)·황주(黃州) 두 주(州)의 목사(牧使)가 되었는데, 모두 혜정(惠政)이 있었다. 들어와서 지신사(知申事)가 되어 성균관(成均館)에서 선비를 시험보는데 사람들이 헐뜯는 말이 없었다. 벼슬은 밀직 제학(密直提學)에 이르렀다. 두 아들은 권훈(權壎)과 권보(權堡)인데 모두 과거(科擧)에 올랐다.


검교직의 녹봉을 본품보다 3등을 낮춰 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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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定檢校各品祿, 降本品科三等。

검교(檢校[4] 각품(各品)의 봉록(俸祿)을 정했는데, 본품(本品)보다 과(科) 3등을 낮게 하였다.


도당에서 공사 어량과 염분을 사재감에, 둔수군의 둔전 번염을 군자에 충당하기를 청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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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都評議使司請以公私魚鹽梁, 盡屬司宰監, 復屯戍軍屯田燔鹽, 以充軍資。

도평의사사에서 공사(公私)의 어염량(魚鹽梁)을 모두 사재감(司宰監)에 소속시키고, 둔수군(屯戍軍)의 둔전 번염(屯田燔鹽)을 회복시켜 군자(軍資)에 충당하기를 청하였다.


경시서에서 판자에다 각 점포의 이름과 물품을 그려서 서로 섞이지 않게 하기를 청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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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京市署請板寫各市名, 幷畫販物其下, 掛於各所, 俾不相雜。

경시서(京市署)에서 각 시장(市場)의 이름을 판자(板子)에 쓰고, 판매하는 물품을 그 아래에 아울러 그려서 각 처소에 걸어 서로 섞이지 않게 하기를 청하였다.


1月 20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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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씨의 모의에 연관된 김가행과 박중질을 잡아 국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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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庚申/執金可行、朴仲質等以來, 鞫之。

김가행과 박중질 등을 잡아서 오니, 그들을 국문(鞫問)하게 하였다.


1月 21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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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에서 박위 등을 같이 국문하도록 청하니 박위는 용서하고 박중질 등은 귀양보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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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辛酉/臺諫、刑曹同章上請曰: “臣等同巡軍萬戶府, 鞫問李興茂、金可行、朴仲質等, 其招辭關係大體, 不可易決。 乞將辭連人等, 一處憑問, 明正其罪。” 上不允。 宥朴葳復職, 乃曰: “葳雖素有異心, 今予授以好爵, 遇之以厚, 何變之敢圖? 人材如朴葳者, 未易得也。” 杖流仲質、可行、興茂等邊郡。

대간(臺諫)과 형조(刑曹)에서 글을 같이 올려 청하였다.

"신들이 순군 만호부(巡軍萬戶府)와 같이 이흥무·김가행·박중질 등을 국문(鞫問)하니, 그 공사(供辭)가 대체(大體)에 관계되므로 쉽사리 판결할 수가 없겠습니다. 원하옵건대, 공사(供辭)에 관련된 사람들은 한 곳에서 증거를 대어 심문하여 밝게 그 죄를 처단하소서."

임금이 윤허하지 아니하고 박위(朴葳)를 용서하여 복직(復職)시키고, 이어 말하였다.

"박위가 비록 본디부터 배반할 마음이 있었더라도, 지금 내가 높은 작위(爵位)를 주어서 대우하기를 후하게 하였으니, 어찌 변고(變故)를 감히 도모했겠는가? 박위와 같은 인재(人材)는 쉽사리 얻을 수가 없다."

박중질·김가행·이흥무 등은 곤장을 쳐서 변방 고을에 귀양보내었다.


삼성에서 왕씨를 제거하자고 청하니 윤허치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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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臺諫、刑曹上書請去王氏, 不允。

대간(臺諫)과 형조(刑曹)에서 글을 올려 왕씨(王氏)를 제거하기를 청하니,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1月 23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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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쌓는 공사를 시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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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癸亥/上觀城役。

임금이 성 쌓는 역사(役事)를 시찰하였다.


1月 25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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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를 받은 군관과 한량인 중에 왕실을 시위하지 않는 자를 점고하여 처벌토록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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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乙丑/上如壽昌宮, 命趙琦點考諸節制使所領軍官及閑良人受田者, 其在外不衛王室者, 罪之。

임금이 수창궁에 갔다. 조기(趙琦)에게 명하여 여러 절제사(節制使)가 거느린 군관(軍官)과 한량인(閑良人)이 전지(田地)를 받은 사람 중에서, 밖에 있어 왕실(王室)을 호위하지 않는 사람을 점고(點考)하여 처벌하게 하였다.


삼성에서 왕강 등을 외방 종편 시키자고 청하였으나 윤허치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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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臺諫、刑曹同章論王康、承寶、承貴、朴葳之罪, 不可居京, 不允。

대간(臺諫)과 형조(刑曹)에서 글을 올려, 왕강(王康)·왕승보(王承寶)·왕승귀(王承貴)·박위(朴葳)의 죄를 논핵(論劾)하여 서울에 살게 할 수 없다고 하였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1月 27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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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의흥삼군부사 정도전과 장수들이 쇠 갑옷을 입고 둑에 제사지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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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丁卯/遣判義興三軍府事鄭道傳, 以太牢祭纛。 道傳及與祭將士, 皆以鐵甲行祭。 祭畢, 千戶兪瑞鳳暴死。

판의흥삼군부사(判義興三軍府事) 정도전(鄭道傳)을 보내어 태뢰(太牢)[5]로써 둑(纛)에 제사지내게 하니, 도전(道傳)과 제사에 참여한 장사(將士)들이 모두 철갑(鐵甲) 차림으로 제사를 지냈다. 제사를 마치고 난 뒤에 천호(千戶) 유서봉(兪瑞鳳)이 갑자기 죽었다.


1月 28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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둑 제사에 참여치 않은 여러 절제사의 장무, 진무에게 곤장을 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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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戊辰/笞諸節制使掌務鎭撫。 以諸節制使不及與祭纛也。

여러 절제사(節制使)들의 장무(掌務)·진무(鎭撫)에게 태형(笞刑)을 집행하였으니, 여러 절제사들이 둑제(纛祭)에 참여하지 못한 때문이었다.


곡산 부사 전이가 곡산 등의 요충지에 병기와 군량을 저장토록 청하니 윤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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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谷山府使田易上書于都評議使司曰:

竊聞鍊兵積穀, 以備不虞, 守國之常典也。 然而兵非據險, 不可以藏我之形, 穀若露積, 適足爲寇之資。 必也積糧於堅城, 置鎭於要害, 然後以逸待勞, 以飽待飢, 而能制敵之命也。 昔唐太宗攻安市城, 延壽、惠眞帥兵救之。 太宗謂將臣曰: “今爲延壽策, 引兵直前, 連城爲壘, 據險食粟, 坐困吾軍, 上策也。” 延壽、惠眞將發, 有對盧者, 年老習事, 謂之曰: “秦王, 命世之才, 擧海內之衆而來, 不可敵也。 爲吾計者, 莫若頓兵不戰, 曠日持久, 分遣奇兵, 斷其運道。 糧食旣盡, 求戰不得, 欲歸無路, 乃可勝也。” 延壽不從, 引兵直前, 大敗而降。 夫對盧之謀, 正太宗所謂上策也。 使延壽從之, 則太宗之班師, 不待草枯氷凍矣。 救兵雖敗於外, 安市一城, 獨堅守不下, 故太宗托以遼左早寒, 耀兵城下而歸。 夫以太宗之英果、李勣之勇智, 擧天下之師, 而不能攻取一城者, 豈非以城險而糧多, 兵精而固守歟! 今我國家創制立法, 纖悉備具, 至於養兵備敵之方, 講之尤詳, 而貯糧之所、鎭戍之地, 大率皆仍其舊。 此愚所以將寡聞淺見, 喋喋然以塵淸聽也。 前年冬, 因踏驗損實, 到州之北村, 觀其形勢, 山川險塞, 中有山城, 可儲資糧, 可藏兵甲。 東距和寧百五十里, 西連成州不過三四息程, 實東西北兩面往來之要衝也。 且吾聞之, 有備無患, 聖訓所傳; 若寇至, 兵家之勝。 萬一有安市之被攻, 當如對盧之策, 然後可以萬全而取勝。 若非畜積之有素, 烏能致此! 愚竊以謂州及伊川、俠溪、遂安、三登、成州、陽巖、樹德等八邑之田, 悉皆屬于軍糧。 每年八九月, 令軍資監員, 親到收稅, 皆入州之山城, 則不三四年而可畜數萬之衆, 數年之食矣。 當其用兵, 選精兵數萬, 藏於山城之下, 仰食其穀, 以待事機, 若有闌入我疆者, 則取路陽巖、樹德, 經由古孟、德州, 銜枚疾趨, 出其不意, 或擊其背, 或絶糧道, 此用兵之一奇也。 其或據險食粟, 以耀兵威, 爲平壤、和寧之聲援, 亦可也。

使司轉聞于上, 上嘉之, 命許施行。

곡산 부사(谷山府使) 전이(田易)가 도평의사사에 상서(上書)하였다.

"가만히 듣건대, 군사를 훈련시키고 곡식을 저장하여 뜻하지 않은 변고에 대비(對備)하는 것은 나라를 지키는 상전(常典)입니다. 그러나 군사가 험지(險地)를 점거하지 않으면 나의 형체(形體)를 감출 수가 없으며, 곡식을 만약 밖에 쌓아 둔[露積]다면 다만 도적의 도움이 될 뿐이니, 반드시 양식을 견고한 성(城)에 쌓아 두고, 진(鎭)을 요해처(要害處)에 설치한 연후에야, 편안히 있는 아군(我軍)으로써 멀리서 온 피로한 적군을 기다리게 되고, 배부른 아군(我軍)으로써 굶주린 적군을 기다리게 되어, 능히 적군의 생명을 제어할 수가 있습니다.

옛날에 당(唐)나라 태종(太宗)이 안시성(安市城)을 공격하매, 연수(延壽)와 혜진(惠眞)[6]이 군사를 거느리고 구원하니, 태종(太宗)이 장신(將臣)에게 이르기를, ‘지금 연수(延壽)를 위한 계책으로는 군사를 거느리고 바로 앞으로 나아가 성(城)을 연(連)하여 보루(堡壘)로 삼고, 험지(險地)에 웅거하여 양식을 먹으면서, 앉아서 우리 군사를 피곤하게 하는 것이 가장 좋은 계책이라.’ 하였습니다. 연수와 혜진이 장차 출발하려 하매, 대로(對盧)[7]란 나이가 많고 일에 익숙한 이가 있었는데, 연수에게 이르기를, ‘진왕(秦王)[8]은 일세(一世)의 뛰어난 인재(人才)로서 천하의 군사를 거느리고 왔으니 대적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계책으로는 군사를 주둔하고 싸우지 아니하며 오랜 세월을 견디어 내고, 기병(奇兵)을 나누어 그 양식 운반하는 길을 끊어서, 양식이 이미 다 되면 싸우려고 해도 되지 않을 것이며, 돌아가고자 해도 길이 없을 것이니, 그제야 이길 수 있습니다.’고 하였으나, 연수가 따르지 아니하고, 군사를 거느리고 바로 앞으로 나갔다가 크게 패하여 항복했으니, 대개 대로(對盧)의 꾀는 바로 태종이 이른 바 가장 좋은 계책인 것입니다. 연수로 하여금 그 꾀를 따랐더라면, 태종의 군사 돌이킨 것이 풀이 마르고 얼음이 얼기를 기다리지 못하게 했을 것입니다. 구원하는 군사가 비록 밖에서 패전했지마는, 안시(安市) 한 성(城)만이 홀로 굳게 지키고 항복하지 않은 까닭으로, 태종이 요좌(遼左)[9]에 추위가 일찍 온다는 이유로써 성 아래에서 군대의 위엄을 과시(誇示)하고 돌아갔으니, 대저 태종의 영명(英明) 과단(果斷)함과 이적(李勣)의 용기와 지혜로써 천하의 군사를 거느리고서도 능히 한 성을 공격해 빼앗지 못한 것은, 어찌 성(城)이 험준하고 양식이 많으며, 군사가 용감하여 굳게 지킨 것이 아니겠습니까?

지금 우리 국가에서 제도를 창설하고 법을 만들어, 자세한 부분을 다 구비하여 군사를 길러 적군에 대비(對備)하는 방법까지 강구(講究)하기를 더욱 상세히 했는데도, 양식을 저장하는 장소와 군대를 주둔시키는 땅은 대개 모두 그전대로 그냥 있으니, 이것이 어리석은 신이 적은 견문(見聞)과 얕은 식견(識見)으로써 수다스럽게 임금의 귀를 더럽히는 것입니다. 지난해 겨울에 손실(損實)을 답험(踏驗)하는 일로 인하여 곡산(谷山) 고을의 북쪽 마을에 가서 그 지세(地勢)를 살펴보니, 산천이 험준하고 막혔으며, 가운데에 산성(山城)이 있는데, 군량을 저장할 만하고, 병기(兵器)를 간수할 만하며, 동쪽으로는 화령(和寧)과의 거리가 1백 50리이며, 서쪽으로는 성주(成州)와 연(連)하기를 3, 4식(息)의 노정(路程)에 불과하니, 실로 동북면·서북면 양면(兩面)을 왕래하는 요충(要衝)인 것입니다. 또 내가 듣건대, 방비가 있으면 근심이 없다는 말은 성인(聖人)의 훈계에 전하는 바이며, 상시 도적이 이르는 것과 같이 함은 병가(兵家)의 승산(勝算)이니, 만일에 안시성(安市城)의 공격당하는 일이 있게 된다면 마땅히 대로(對盧)의 계책과 같게 해야만 만전(萬全)하여 승리할 수 있을 것인데, 만약 평소부터 군량의 저장이 없으면 어찌 능히 이렇게 될 수가 있겠습니까?

어리석은 저는 그윽이 생각하옵건대, 곡산(谷山) 고을과 이천(伊川)·협계(俠溪)·수안(遂安)·삼등(三登)·성주(成州)·양암(陽巖)·수덕(樹德) 등 8읍(邑)의 전지(田地)는 모두 군량(軍糧)에 속하게 하고서, 해마다 8, 9월에 군자감(軍資監)의 관원으로 하여금 친히 와서 수세(收稅)하여, 모두 곡산 고을의 산성(山城)에 들어오게 한다면, 3, 4년이 되지 않아서 수만 명 군사의 수년(數年) 먹을 식량을 저장할 수가 있습니다. 그 군대를 사용[用兵]할 적에는 정병(精兵) 수만 명을 뽑아서 산성(山城) 아래에 감추어 두고, 그 곡식을 먹고 사기(事機)를 기다리게 했다가, 만약 우리 강토에 함부로 침입하는 자가 있으면, 양암(陽巖)·수덕(樹德)에서 길[路]을 취(取)하여 옛날의 맹주(孟州)·덕주(德州)를 경유하여 군사들의 입에다 하무를 물리[銜枚]고 빨리 달려 뜻밖에 나가서, 혹은 그 뒤를 공격하고, 혹은 군량 운반하는 길을 끊게 할 것이니, 이것이 용병(用兵)의 한 가지 기계(奇計)이며, 혹은 험지를 웅거하고 양식을 먹으면서 군대의 위력을 과시(誇示)하여 평양(平壤)과 화령(和寧)을 성원(聲援)하는 것도 또한 옳겠습니다."

도평의사사에서 임금에게 전해 아뢰니, 임금이 이를 가상(嘉尙)하게 여겨 명하여 시행하게 하였다.


1月 29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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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에서 왕강 등을 섬에 안치코자 하니, 윤허하지 않고 석방하여 효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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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己巳/臺諫、刑曹同章啓曰: “願徙王康、王承寶、王承貴、王鬲于海島。” 上召行首掌務, 令勿復言, 對曰: “此輩, 殿下雖待之甚厚, 必不懷恩。 且康智謀過人, 承寶、承貴勇力無敵, 在於京都, 必扇不測之變。 願允臣等之啓, 以防後患。” 上曰: “予豈不知?” 且令速解囚直。 召康等敎曰: “卿等皆可用之材, 故召置京都, 親信無疑。 今者諫官請徙海島, 予已宥之, 卿等宜勿驚懼, 出入如舊。”

대간(臺諫)과 형조(刑曹)에서 글을 같이 올려 아뢰었다.

"원하옵건대, 왕강(王康)·왕승보(王承寶)·왕승귀(王承貴)·왕격(王鬲)을 바닷속의 섬에 옮기소서."

임금이 행수(行首)와 장무(掌務)를 불러 다시 말하지 말게 하니, 대답하기를,

"이 무리들은 전하(殿下)께서 비록 대우하기를 매우 후하게 하시지마는, 반드시 은혜를 생각하지 아니하며, 더구나, 왕강은 지모(智謀)가 남보다 뛰어나고, 왕승보와 왕승귀는 용력(勇力)이 대적할 사람이 없으니, 서울에 있으면 반드시 불측(不測)의 변(變)을 선동할 것입니다. 원하옵건대, 신 등의 아뢰는 말을 윤허하시어 훗날의 근심을 방비하소서."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어찌 알지 못하겠는가? 우선 가둔 것을 속히 풀어주게 하라."

하고서, 바로 왕강 등을 불러서 명령하였다.

"경 등은 모두 쓸 만한 인재(人材)인 까닭으로 불러 와 서울에 두고서 가까이 하고 신임하여 의심함이 없었는데, 지금 간관(諫官)이 바닷속의 섬에 옮기기를 청하지마는, 내가 이미 용서했으니 경 등은 마땅히 놀라고 두려워하지 말고 출입하기를 그전과 같이 하라."


1月 30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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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창궁에 거동하고, 성 쌓는 공사를 시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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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庚午/上幸壽昌宮, 遂巡觀城役。

임금이 수창궁에 거둥하고, 두루 성 쌓는 역사(役事)를 돌아다니면서 시찰하였다.


三年 二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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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月 1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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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에서 왕강 등을 귀양보내기를 청하니 윤허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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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辛未朔/臺諫、刑曹又同章請流王康等, 上不允。

대간과 형조에서 또 글을 같이 올려 왕강(王康) 등을 귀양보내기를 청하니, 임금이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2月 4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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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쌓은 공사를 시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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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甲戌/上巡觀城役。

임금이 성 쌓는 역사(役事)를 돌아다니면서 시찰하였다.


2月 6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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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에 성에가 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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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丙子/木稼。

목가(木稼)하였다.


성균관 동쪽 행랑에 화재가 일어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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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成均館東廊災。

성균관 동쪽 행랑에 화재(火災)가 일어났다.


삼성에서 모반에 연루된 왕화 등을 국문코자 하니, 수원부에 가두어 국문토록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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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臺諫、刑曹同章曰:

臣等竊觀金可行、朴仲質、盲人李興茂招辭, 關係大體。 前者連章, 請明其狀, 殿下布寬大之恩, 分配於外, 臣等爲宗社痛心。 今者, 王和、王琚、僧釋能招辭, 亦關係大體。 與興茂之招, 事同情異, 而潛謀不軌, 王法不赦之罪也。 大抵爲惡者, 必先植黨與, 而後肆焉, 故《春秋》誅亂臣賊子, 必先治其黨與, 而使爲惡者, 孤立無助, 《春秋》之法, 嚴矣。 殿下若以此等人, 不鞫問以昭國人耳目, 則臣等恐奸雄之徒, 接踵而起, 變生不測。 近者, 胥動浮言上國者, 未必不由此輩而然也。 願殿下斷以大義, 卽令臺諫、法官, 執上項人等, 一處鞫問, 明正其罪, 幷治黨與, 以杜禍萌。 臣等所言, 爲千萬世宗社之大計, 伏惟殿下留神深省。

命臺諫法官, 執仲質、王和等, 聚于水原府, 往鞫之。

대간과 형조에서 글을 같이 올리었다.

"신들이 가만히 김가행(金可行)·박중질(朴仲質)과 장님 이흥무(李興茂)의 공사(供辭)를 보니 대체(大體)에 관계되므로, 지난날에 글을 연명(連名)으로 올려 그 정상을 밝히기를 청하였사온데, 전하께서 관대한 은혜를 베푸시어 외방(外方)에 나누어 귀양보내셨으므로, 신 등은 종사(宗社)를 위하여 대단히 상심(傷心)했습니다. 지금은 왕화(王和)·왕거(王琚)와 중[僧] 석능(釋能)의 공사(供辭)도 또한 대체(大體)에 관계되어, 이흥무의 공초(供招)와 더불어 사건은 같고 실정은 다른데도, 몰래 반역을 모의했으니, 왕법(王法)에 용서할 수 없는 죄입니다. 대저 악한 짓을 하는 사람은 반드시 먼저 당여(黨與)를 부식(扶植)하고, 난 후에 방사(放肆)하게 됩니다. 그런 까닭으로 《춘추(春秋)》에서 난신 적자(亂臣賊子)를 처단(處斷)할 적엔 반드시 먼저 그 당여(黨與)를 다스려, 악한 짓을 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고립(孤立)하여 도움이 없게 하였으니, 《춘추(春秋)》의 법이 엄격했습니다. 전하께서 만약 이런 등류의 사람을 국문(鞫問)하여 나라 사람의 이목(耳目)에 밝히지 않는다면, 신 등은 간웅(奸雄)의 무리들이 잇따라 일어나서 변고가 뜻밖에 일어날까 염려됩니다. 요사이 근거 없는 말을 상국(上國)[10]에 일으키는 것도 반드시 이 무리들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원하옵건대, 전하께서 대의(大義)로써 결단하시어 즉시 대간(臺諫)과 법관(法官)으로 하여금 위의 항목의 사람들을 잡아서 한 곳에서 국문(鞫問)하여 그 죄를 밝게 처단하고, 아울러 당여(黨與)까지 죄를 다스려 화단(禍端)을 막게 하소서. 신 등의 말하는 바는 천만세(千萬世) 종사(宗社)의 대계(大計)를 위한 것이오니, 삼가 생각하옵건대, 전하께서는 정신을 두어 깊이 살피소서."

임금이 대간(臺諫)과 법관(法官)에게 명하여 중질(仲質)·왕화(王和) 등을 잡아 수원부(水原府)에 모아 두고 가서 이들을 국문(鞫問)하게 하였다.


삼성에서 봉장을 윤허하지 않는다고 출사하지 않으니, 출사토록 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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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臺諫、刑曹, 以封章不允, 俱不仕。 上召而敎之曰: “不允所言者, 但欲深思, 且宜視事。”

대간과 형조에서 봉장(封章)을 윤허하지 않는 이유로써 모두 출근(出勤)하지 않으니, 임금이 불러서 명령하였다.

"말하는 바를 윤허하지 아니한 것은 다만 깊이 생각하고자 한 것뿐이니, 우선 마땅히 정사(政事)를 보아야 할 것이다."


2月 8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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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현의 신, 구관 교대시 물품의 수량을 정확히 인수 인계한 후 해유토록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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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戊寅/都評議使司上言: “京畿左道都觀察使報: ‘州縣官交代之際, 倉庫錢穀, 未嘗計量其數, 止以文簿相傳, 妄費盜用, 及雨漏地濕, 鼠竊所耗, 不以爲己責。 積年旣久, 雖或按簿驗實, 不知何等官時所損。 其鼠竊雖非人力所及, 亦是用心不至, 其雨漏地濕, 全是不用心所致。 乞自今新舊官量數傳授後, 其妄費盜用則倍徵; 雨漏地濕, 鼠竊所損, 依數追償, 旣訖, 方許解由, 以爲恒式。’ 使司議得: “今後新舊穀, 各置一庫。 雖是一庫, 置隔於中, 出納之際, 先用舊穀。 其妄費盜用者, 倍償; 鼠竊者, 半徵; 雨漏地濕者, 準數改納, 各以律論。” 上從之。

도평의사사에서 상언(上言)하였다.

"경기좌도(京畿左道) 도관찰사(都觀察使)의 보고에, ‘주현관(州縣官)이 교대(交代)할 즈음에 창고의 전곡(錢穀)을 일찍이 그 수량을 헤아리지 아니하고 문부(文簿)로써 서로 전해 주는 데 그치게 되니, 함부로 쓰고 도둑질해 쓴 것과, 빗물이 새거나 땅의 습하거나, 쥐가 파먹어서 소모된 것을 자기의 책임으로 삼지 않는데, 여러 해 동안 이미 오래되면 비록 혹시 문부를 살펴서 사실을 조사하더라도 어느 관원 때에 손실(損失)된 것인지 알지 못하게 되며, 그 쥐가 파먹은 것은 비록 사람의 힘으로서는 미칠 수 없는 바이지만, 또한 이것도 마음을 씀이 주밀하지 못한 때문이며, 그 빗물이 샌 것과 땅의 습기도 전연 마음을 쓰지 않은 데서 그렇게 된 것이니, 원하옵건대, 지금부터는 신관(新官)과 구관(舊官)이 수량을 헤아려서 전해 주고받고 한 후에, 그 함부로 쓴 것과 도둑질해 온 것은 배(倍)로 징수하고, 빗물이 샌 것과 땅의 습기와 쥐가 파먹어서 손실(損失)된 것은 그 수량에 의거하여 소급 상환(償還)하게 하고, 이미 마치고 난 뒤에야 해유(解由)[11]하기를 허가하여, 이를 항식(恒式)으로 삼게 하시오.’ 하니, 도평의사사에서 의논하여 적당하다 인정하였습니다. 지금부터는 새 곡식과 묵은 곡식을 각기 한 창고에 두고, 비록 한 창고일지라도 칸막이를 가운데에 두어, 곡식을 출납(出納)할 즈음에는 먼저 묵은 곡식을 쓰게 하고, 그 함부로 쓴 것과 도둑질해 쓴 것은 배(倍)로 상환(償還)하고, 쥐가 파먹은 것은 반만 징수하고, 빗물이 샌 것과 땅의 습기로 손해난 것은 수량에 준하여 다시 바치게 하고, 각기 율(律)에 따라 논죄(論罪)하게 하소서."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시장의 행랑에 화재가 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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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市行廊火。

대시(大市)의 행랑(行廊)에 화재가 일어났다.


2月 9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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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무리가 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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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己卯/日暈。

햇무리하였다.


2月 11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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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복사에서 문수 법회를 구경하고 정희계의 집에 들렸다가 수창궁으로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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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辛巳/幸演福寺, 觀文殊會, 遂如參贊門下府事鄭熙啓第, 乃幸壽昌宮。

임금이 연복사(演福寺)에 거둥하여 문수 법회(文殊法會)를 구경하고, 드디어 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 정희계(鄭熙啓)의 사제(私第)로 가서 수창궁으로 거둥하였다.


삼성에서 왕화 등을 한 곳에서 대질 심문하기를 청하니 윤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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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臺諫、刑曹狀啓: “乞將王和、王琚、釋能、興茂、可行、仲質等, 一處對問。” 上命臺諫、刑曹、巡軍各一員, 同楊廣道觀察使, 會水原府對問。

대간과 형조에서 장계(狀啓)하였다.

"원하옵건대, 왕화(王和)·왕거(王琚)·석능(釋能)·이흥무(李興茂)·김가행(金可行)·박중질(朴仲質) 등을 한 곳에서 대질 심문하게 하소서."

임금이 대간(臺諫)·형조(刑曹)·순군부(巡軍府)에 각기 1원(員)씩을 명하여 양광도 관찰사(楊廣道觀察使)와 함께 수원부(水原府)에 모여서 대질 심문하게 하였다.


삼성에서 왕씨 일족의 제거와 관련하여 사헌 시사 권문의, 기거주 정귀진 등을 탄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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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司憲侍史權文毅ㆍ尹彰、起居注鄭龜晋、左拾遺崔士剛、監察李復禮等, 被臺諫、刑曹之劾。 蓋三官會議, 欲去恭讓君三父子、王瑀三父子及王康、王承寶、王承貴等曰: “昨以去王氏一事, 連章上請, 未卽蒙允。 今且以去王康、王承寶、王承貴, 上請如何?” 文毅等曰: “若欲去王氏, 必盡除去。 何獨去王康等?” 故劾之。

사헌 시사(司憲侍史) 권문의(權文毅)·윤창(尹彰)과 기거주(起居注) 정귀진(鄭龜晉)·좌습유(左拾遺) 최사강(崔士剛)·감찰(監察) 이복례(李復禮) 등이 대간(臺諫)과 형조(刑曹)의 탄핵을 당하였다. 삼관(三官)이 모여 의논하여 공양왕의 삼부자(三父子)와 왕우(王瑀)의 삼부자(三父子) 및 왕강(王康)·왕승보(王承寶)·왕승귀(王承貴) 등을 제거하고자 하여 말하기를,

"어제 왕씨(王氏)를 제거하는 한 가지 일로써 장소(章疏)에 연명(連名)하여 올려 청했으나 즉시 윤허를 받지 못했으니, 지금 또 왕강·왕승보·왕승귀를 제거하는 일로써 글을 올려 청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니, 문의(文毅) 등이 말하기를,

"만약에 왕씨(王氏)를 제거하고자 한다면 반드시 다 제거할 일이지, 어찌 유독 왕강(王康) 등만 제거하겠는가?"

하였다. 이런 까닭으로 이를 탄핵한 것이었다.


2月 12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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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창궁에 가다. 서소문의 옹성이 무너지려 하자 감역관을 옹진으로 귀양보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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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壬午/上幸壽昌宮, 以西小門甕城將傾, 流監役官于瓮津戍。

임금이 수창궁에 거둥하였다. 서소문(西小門)의 옹성(甕城)[12]이 장차 기울어지려 한다는 이유로 감역관(監役官)을 옹진(甕津)의 수자리[戍]에 귀양보냈다.


각품의 문무관에게 인부를 내게 하여 경성의 축조를 조력케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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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令文武各品出夫有差, 助築京城。

문무(文武)의 각품(各品)에게 역부(役夫)를 차등 있게 내어 경성(京城)을 쌓는 데 조력하게 하였다.


2月 13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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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도 수군 첨절제사 안처선이 왜적 12명을 죽이니 궁온 등을 하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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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癸未/慶尙道水軍僉節制使安處善斬倭十二級, 幷所獲兵器以獻, 上命賜宮醞綺絹。

경상도 수군 첨절제사(水軍僉節制使) 안처선(安處善)이 왜적(倭賊) 12명을 목 베고, 노획한 병기(兵器)까지 모두 바치니, 임금이 명하여 궁온(宮醞)[13]과 무늬 있는 비단[綺]과 명주[絹]를 내려 주었다.


2月 14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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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궁과 함께 연복사에 가서 문수 법회를 구경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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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甲申/上與中宮幸演福寺, 觀文殊會。

임금이 중궁(中宮)과 더불어 연복사(演福寺)에 거둥하여 문수 법회(文殊法會)를 구경하였다.


산직자에게 인부를 내게 하여 경성의 축조를 조력케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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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令散職品官出夫有差, 助築京城。

산직(散職)의 품관(品官)에게 역부(役夫)를 차등 있게 내어 경성(京城)을 쌓는 데 조력하게 하였다.


하윤 등 11인에게 역대 현인들의 비결을 상고하여 요점을 뽑아 바치라고 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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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命領三司事權仲和、檢校門下侍中李茂方、判三司事鄭道傳、門下侍郞贊成事成石璘、大學士閔霽、參贊門下府事南誾、僉書中樞院事鄭摠、檢校太學士權近、中樞院學士李稷、大司憲李懃等十人, 同左道都觀察使河崙, 遍考東國歷代諸賢秘錄, 撮要以進。

영삼사사(領三司事) 권중화(權仲和)·검교 문하 시중(檢校門下侍中) 이무방(李茂方)·판삼사사(判三司事) 정도전(鄭道傳)·문하 시랑찬성사(門下侍郞贊成事) 성석린(成石璘)·대학사(大學士) 민제(閔霽)·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 남은(南誾)·첨서중추원사(僉書中樞院事) 정총(鄭摠)·검교 대학사(檢校大學士) 권근(權近)·중추원 학사(中樞院學士) 이직(李稷)·대사헌 이근(李懃) 등 10인에게 명하여, 좌도 도관찰사(左道都觀察使) 하윤(河崙)과 함께 동국(東國) 역대(歷代) 여러 현인(賢人)들의 비록(秘錄)을 두루 상고하여 요점을 추려서 바치게 하였다.


2月 15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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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사 김인보의 본향인 밀양군을 밀양부로 승격시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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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乙酉/陞密陽郡爲府。 使臣金仁甫以其鄕請之。

밀양군(密陽郡)을 승격시켜 부(府)로 삼았으니, 사신 김인보(金仁甫)가 그의 본향(本鄕)인 이유로 청했기 때문이었다.


경산 부사 이황이 상서로운 영지 버섯을 캐서 바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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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京山府使李滉得異草於河濱縣, 色赤三枝, 體如菌。 以爲瑞, 送于參贊門下府事南誾第, 誾謂靈芝以獻。

경산 부사(京山府使) 이황(李滉)이 하빈현(河濱縣)에서 이상한 풀[異草]을 얻었는데, 빛깔은 붉고 가지가 셋이며, 몸은 버섯과 같았으므로, 상서(祥瑞)라 하여 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 남은(南誾)의 사제(私第)에 보내니, 남은이 영지(靈芝)라 하여 임금에게 바치었다.


서소문을 개축하면서 석장인 중을 효수하여 경계시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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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命改營西小門。 斬石匠僧, 梟首于其上, 以警其餘。

명하여 서소문(西小門)을 고쳐 짓도록 하고, 석장(石匠)인 중[僧]의 머리를 베어 그 위에 매달아 그 나머지 사람들을 경계하였다.


2月 16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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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중화 등이 《비록촬요》를 바치니 하윤·이직에게 진강케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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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丙戌/幸壽昌宮。 領三司事權仲和等進《秘錄撮要》, 上令河崙、李稷進講。

임금이 수창궁에 거둥하였다. 영삼사사(領三司事) 권중화(權仲和) 등이 《비록촬요(秘錄撮要)》를 바치니, 임금이 하윤(河崙)과 이직(李稷)으로 하여금 진강(進講)하게 하였다.


2月 17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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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복사에서 문수 법회를 구경하다. 왕사 자초가 죄수의 사면을 청하니 윤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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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丁亥/上幸演福寺, 觀文殊會。 王師自超請宥罪囚, 從之。

임금이 연복사(演福寺)에 거둥하여 문수 법회(文殊法會)를 구경하였다. 왕사(王師) 자초(自超)가 죄수를 사면(赦免)하기를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산기 상시 이거이 등을 수원부로 보내 왕화 등을 국문케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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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遣散騎常侍李居易、司憲中丞朴信、刑曹正郞田時、巡軍知事成溥等于水原府, 收王和、王琚、僧釋能、金可行、朴仲質、李興茂等, 鞫問。

산기 상시(散騎常侍) 이거이(李居易)·사헌 중승(司憲中丞) 박신(朴信)·형조 정랑(刑曹正郞) 전시(田時)·순군 지사(巡軍知事) 성보(成溥) 등을 수원부(水原府)에 보내어 왕화(王和)·왕거(王琚)·중[僧] 석능(釋能)·김가행(金可行)·박중질(朴仲質)·이흥무(李興茂) 등을 잡아 국문(鞫問)하게 하였다.


2月 18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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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창궁에서 사신에게 잔치를 베풀고 은 등의 물품을 하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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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戊子/幸壽昌宮, 宴使臣, 遺銀各一錠、黑麻苧布各四十匹、鞍子各一面。

임금이 수창궁에 거둥하여 사신에게 잔치를 베풀고, 은(銀) 각 1정(錠), 흑마포(黑麻布)·흑저포(黑苧布) 각각 40필, 안자(鞍子) 각 1면(面)씩을 주었다.


조준, 권중화 등에게 풍수에 관한 비결책을 가지고 무악의 천도지를 살펴보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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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遣左侍中趙浚、領三司事權仲和等十一人, 率書雲觀員吏等, 齎《地理秘錄撮要》, 相遷都之地于毋岳南。

좌시중 조준과 영삼사사 권중화 등 11인을 보내어 서운관(書雲觀)의 원리(員吏) 등을 거느리고 《지리비록촬요(地理秘錄撮要)》를 가지고 가서 천도할 땅을 무악(毋岳) 남쪽에서 살펴보게 하였다.


2月 19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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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전 문제 등 황제가 힐문한 10가지 조항에 대해 해명하는 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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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己丑/朝廷使臣金仁甫、張夫介還。 上撰奏本一道, 就附以進, 率群臣送至宣義門。 其奏曰:

洪武二十六年十二月初八日, 欽差內史金仁甫等至, 承準左軍都督府咨, 欽奉聖旨節該: “奈何高麗李【諱。】, 自生邊釁, 連年不已? 其量不過恃滄海以環疆, 負重山以爲險。 所以數逞兇頑, 視我朝調兵如漢、唐。 且漢、唐之將, 長騎射短舟楫, 故涉海艱辛, 兵行委曲。 朕自平華夏攘胡虜, 水陸通征。 舟師諸將, 豈比漢、唐之爲! 若不必師至三韓, 將前後所誘女眞大小送回, 及將誘引女眞守邊千戶發來。 是後毋造詐謀, 以生邊釁, 使彼國之民妥安, 方可爲東夷之主, 而後嗣亦昌。” 欽此竊惟, 小邦臣事天朝, 至誠無二, 安敢自生邊釁? 壤地褊狹, 人民鮮少, 區區山海, 何足負恃, 以逞兇頑? 前後女眞, 實無誘引。 今來欽奉前因, 兢惶殞越, 措身無地。 念臣先世, 本朝鮮遺種, 至臣二十二代祖翰, 仕新羅爲司空, 及新羅亡, 翰六代孫兢休入高麗。 兢休十三代孫安社仕于前原, 是臣高祖。 自後不受高麗官爵, 及原季兵興, 臣父子春, 率臣等避地東來。 當其時, 適有倭寇作耗, 又有毛原帥、關先生、納哈出相繼入侵。 以臣粗習武才, 置臣行伍, 然臣官未顯達。 自高麗恭愍王薨逝, 至僞姓辛禑十六年間, 權臣李仁任、林堅味、廉興邦等相繼用事, 流毒生民, 罪盈惡稔, 自取誅戮。 以臣素心謹愼, 無有他過, 擧臣爲門下守侍中, 方與國政, 不圖崔瑩反肆狂謀, 與辛禑興兵攻遼。 臣以小國不可侵犯上國之境, 諭衆以大義, 領兵回還, 辛禑知罪, 崔瑩伏誅。 國人以宗室王瑤, 權署國事, 以鄭夢周爲門下侍中。 夢周不誡崔瑩之覆轍, 與王瑤復謀攻遼, 國人以爲不可, 王瑤退歸私邸, 夢周伏誅。 國人以爲王氏之宗, 無有可當輿望者, 軍國之務, 不可一日無統。 於是大小臣僚、閑良、耆老等、以臣有事大之忠, 咸共推戴, 以權軍國, 隨卽奏聞, 欽蒙兪允。 臣本武夫, 實無知見, 且臣先世, 在於高麗, 全無憑藉之勢。 幸賴聖恩, 致有今日, 感戴之誠, 有如天日。 況崔瑩、夢周, 明鑑不遠, 臣若踵其邪謀, 聖恩雖欲恕臣, 國人豈肯恕之? 臣非木石, 何敢枉勞心力, 爲此無益之釁, 自速禍殃! 臣如欺罔, 天地鬼神, 臨之在上。 今將條款情由, 逐一開坐, 謹具奏聞。 一款節該: “朝廷每命將守遼, 彼卽遣人, 以布帛金銀之類, 假以行禮爲由, 意在誘我邊將。” 欽此, 前件事理照得, 小邦凡遣使赴京, 必須經由遼陽前去, 特以朝廷爲重, 或以土産布匹行禮。 此乃出於人情, 豈有相誘之理! 一款節該: “近遣人至齊王處行禮, 所遣之人, 假爲異詞, 自謗彼國, 意在覘王動靜。” 欽此, 前件事理照得, 小邦但凡遣使赴京, 經由齊府前去, 就於齊王殿下行禮。 且如其間或有言辭之失, 蓋是承差員人之過失, 非小國所知。 一款節該: “已前數請願聽, 約束旣久, 去後輒違前約。 暗誘女眞, 帶家小五百餘名, 潛渡鴨綠。 果是願聽約束乎? 罪之大者, 無出此釁。” 欽此, 前件事理照得, 小國軍民, 節續逃往遼東, 投充軍丁者, 或暫居住者, 本無誘引, 懷思鄕土, 還復逃來, 山谷之間潛住。 臣初不知, 近據遼東都司來文, 差人捉獲到小旗李閑你等幷妻子二十三名, 起解遼東都司去。 後洪武二十六年五月十三日, 欽奉手詔, 隨卽於槪管西北面各府州郡縣, 緝獲到原係本國人朴龍等, 帶家小三百八十八名, 幷把截千戶金完貴等, 責差前密直副使曹彦管押。 及將取勘到原居女眞人仇乙土等一百一十六名, 就付差來千戶王脫歡不花管領。 俱於洪武二十六年八月內, (根)〔眼〕同欽差內使黃永奇、崔淵等, 解付遼東都司交割了訖。 一款: “近日遼東來奏: ‘今年七月內, 獲到劫賊一名, 審係高麗海州靑山把截千戶哈都干下民名張葛買。 說稱: 「高麗王將黑布三十筒, 著落哈都干, 撥船一十七隻, 每船軍四十名, 搖櫓人十八名, 百戶一名, 差燕江吳千戶管領, 於七月初五日, 起程。 船上人都做倭賊打扮, 船都刷黑, 詐作買賣, 哨探聲息。 若遇官軍, 只說是倭船, 沿路劫掠, 捉去安置, 火者九名, 殺死一名, 放回六名, 存留二名引路。 於七月二十八夜, 到金州衛島(梢)〔稍〕泊, 吳千戶發放每船留軍一十名看守, 其餘軍人, 自引上岸, 燒劫新市軍屯, 擄去軍人幷家屬共四名, 殺死二名, 殺傷三名。」’” 一款: “又假作倭賊, 撑駕船隻, 於山東、寧海州登岸, 劫殺本州人民。 致被原拏去火者逃回, 說知前情。” 欽此前件事理, 竊念小邦臣事聖朝, 至誠不二, 何敢用遣小民, 撑鴐船隻, 假作倭賊, 往金州、山東等處, 登岸作賊, 殺傷人命? 其張葛買所稱詐作買賣, 哨探聲息, 臣實不知葛買是何等人。 且如作賊刦殺, 人情阻隔, 何緣得探事情? 其爲虛詐, 不辨自明。 前者尹彛、李初逃赴京師, 罔構是非, 欽蒙聖鑑明見萬里, 尹彛、李初已伏其罪。 臣恐張葛買亦係此等不逞之徒, 被捉到官, 却行虛捏。 小國遣使, 如此冤枉, 上有天日, 口難控訴。 伏望聖慈, 欽差朝官, 將見獲刦賊張葛買發來, 與國人辨對, 便見虛實。 一款節該: “表稱入貢, 每以馬至, 令豢馬者調之, 馬皆駑下及乘乏勞倦者。 今次所貢馬內, 瘸病無齒及不馴者居半。 其餘雖無節病, 亦皆駑下, 非至誠之物。 與其以此肆侮構禍, 孰若減少, 物精而意誠!” 欽此, 前件事理照得, 小國所産馬匹, 本來矮小駑下, 凡遇貢獻之時, 儘力選辦進獻, 蓋由道路窵遠, 慮恐瘸病疲弱者有之。 小邦安敢肆侮! 一款節該: “更國號一節, 遣人請旨, 或祖朝鮮, 已許自爲, 卽合正名。 今旣更號朝鮮, 表文仍稱權知國事, 未審何謀? 非但用奸肆謀, 實彼不祥之兆。” 欽此前件事理, 洪武二十六年二月十五日, 陪臣韓尙質回自京師, 齎捧到禮部咨, 欽奉聖旨: “東夷之號, 惟朝鮮之稱美, 且其來遠矣, 可以本其名而祖之。 體天牧民, 永昌後嗣。” 欽此, 國號欽依改稱朝鮮外, 臣愚以爲未蒙頒降國王名爵, 未敢擅便稱王, 實無奸侮之心。 今來承準左軍都督府咨, 欽奉聖旨: “卽合正名。” 欽此, 又準都督府來咨內: “右咨朝鮮國王李。 準此, 除修撰謝恩表箋。” 依上欽遵施行。 一款節該: “旣許更國號, 使者回後, 杳無消息。 先遣人遼王、寧王處行禮, 稱朝鮮國權知國事。 一月之後, 方纔進表謝恩, 尊卑之分, 故意先後。” 欽此, 前件事理照得, 爲更國號謝恩事, 於洪武二十六年三月初九日, 差門下評理李恬, 齎擎表箋禮物, 赴京去後, 聞知遼王、寧王受封到來。 臣以小邦與遼、寧境壤相近, 特以朝廷爲重, 宜當行禮, 於當年四月初六日, 差前密直使朴原、前密直副使柳雲等, 赴遼王、寧王殿下行禮。 上項李恬, 蓋緣京師道路窵遠, 又兼將齎進獻鞍子禮物, 以致遷延到京。 何敢故意先後! 一款節該: “往歲, 請令王昌來朝, 不許, 其後以王瑤任國事, 又請來朝, 亦不許, 遂令瑤之子奭來朝。 及至朝廷遣還, 却稱其父子不道, 遂行弑逆。 觀其數請來朝者, 意恐中國征伐, 故假此以取信耳。” 欽此前件事理, 竊見前代辛昌、王瑤等, 數請親朝, 瑤乃遣子奭, 親覲天朝。 還國, 與其父恣行不道, 至謀叛逆, 國人厭之, 退歸私邸。 國人咸共推戴於臣, 奏達朝廷, 欽蒙聖慈, 灼知其情, 許臣權知國事。 其王瑤父子, 見令團圝完聚, 保養天年。 一款: “更國號謝恩表箋內, 雜以侵侮之辭。 以小事大之誠, 果如是乎?” 欽此, 前件事理照得, 小邦僻處荒遠, 言語不通, 聞見不博, 粗習文字, 僅達事情。 其於製作, 未諳體格, 以致錯誤, 非敢故爲侮慢。

조정(朝廷)[14]의 사신 김인보(金仁甫)·장부개(張夫介)가 돌아가니, 임금이 주본(奏本)[15] 1통(通)을 지어서 부쳐 올리고, 여러 신하들을 거느리고 선의문(宣義門)에 이르러 전송하였다. 그 주문(奏文)은 이러하였다.

"홍무(洪武) 26년(1393) 12월 초8일에 흠차 내사(欽差內史) 김인보(金仁甫) 등이 이르러 좌군 도독부(左軍都督府)의 자문(咨文)을 받아, 삼가 성지(聖旨)를 받자왔는데, 이르기를, ‘어찌해서 고려의 이성계(李成桂)가 스스로 변방의 흔단(釁端)을 일으켜 해마다 그치지 않는가? 그 계량(計量)은, 창해(滄海) 강토(疆土)를 빙 둘러 있고 겹친 산[重山]을 짊어져서 험지(險地)를 삼은 것은 믿는 데 불과하니, 자주 흉완(兇頑)한 짓을 함부로 행하여, 우리 조정에서 군사 징발함을 한(漢)나라·당(唐)나라와 같이 여기고 있다. 또한 한(漢)나라·당(唐)나라 장수들은 기사(騎射)에는 장점이 있고 주즙(舟楫)[16]에는 단점이 있는 까닭으로, 바다를 건너는 데 고생을 하고 군사의 행진이 뜻대로 되지 않았었다. 짐(朕)은 중국을 평정함으로부터 호로(胡虜)를 물리치고 하해(河海)와 육지(陸地)를 통틀어 정벌했으니, 수군(水軍)의 여러 장수들이 어찌 한(漢)나라·당(唐)나라의 한 일에 비할 수 있겠는가? 만약 반드시 군사가 삼한(三韓)에 이르지 않더라도 전후(前後)에 유인(誘引)한 여진(女眞)의 대소(大小) 가족들을 돌려보내고, 유인된 여진(女眞)의 변방을 수비한 천호를 보내어 오고, 이후에는 간사한 꾀를 만들어 변방의 흔단(釁端)을 일으키지 말고 그 나라의 백성으로 하여금 편안하게 한다면, 바야흐로 동이(東夷)의 군주가 되고 후사(後嗣)도 또한 번성하게 될 것이다.’ 하였는데, 삼가 그윽이 생각하옵건대, 소방(小邦)이 천조(天朝)를 섬기기를 지성으로 하고 두 마음이 없으니, 어찌 감히 스스로 변방의 흔단(釁端)을 일으키겠습니까? 국토(國土)는 좁고 인민은 적은데, 보잘것없는 산해(山海)를 무엇이 믿을 것이 있기에, 흉완(兇頑)한 짓을 함부로 행하겠습니까? 전후(前後)에 여진(女眞)을 유인한 적이 진실로 없었는데, 지금 삼가 성지를 받고 전일에 있었다고 함을 알았으니, 두렵고 낭패하여 몸둘 곳이 없습니다.

신(臣)의 선대(先代)는 본디 조선(朝鮮)의 유종(遺種)인데, 신의 22대 조상(祖上) 이한(李翰)에 이르러 신라(新羅)에 벼슬하여 사공(司空)이 되었으며, 신라가 망하자 이한(李翰)의 6대 손(孫)인 이긍휴(李兢休)가 고려에 들어와 벼슬하였으며, 이긍휴(李兢休)의 13대 손(孫)인 이안사(李安社)가 전대의 원(元)나라에 벼슬했으니, 이 분이 신의 고조(高祖)였습니다. 이로부터 뒤에는 고려의 관작은 받지 않았습니다. 원(元)나라 말기에 군사가 일어나매, 신의 아버지 이자춘(李子春)은 신(臣)들을 거느리고 피란하여 동쪽으로 왔습니다. 그 당시에 마침 왜구(倭寇)의 작란(作亂)이 있었으며, 또 모원수(毛原帥)·관선생(關先生)·나하추(納哈出)가 잇달아 들어와서 침구하니, 신이 무재(武才)를 좀 익혔던 이유로써 신을 항오(行伍)에 배치하였지마는, 신의 관직은 현달(顯達)하지 못하였습니다. 고려의 공민왕이 세상을 떠남으로부터 위성(僞姓)인 신우(辛禑)에 이르기까지 16년 동안에, 권신(權臣) 이인임(李仁任)·임견미(林堅味)·염흥방(廉興邦) 등이 잇달아 권세를 마음대로 부려서 백성들에게 해독을 퍼뜨려 죄악이 가득하였으므로, 스스로 주륙(誅戮)을 취(取)하였습니다. 신은 본마음[素心]이 근신(謹愼)하여 다른 과실이 없었으므로, 신을 거용(擧用)하여 문하 수 시중(門下守侍中)으로 삼아 바야흐로 나라의 정사(政事)에 참여하게 했는데, 뜻밖의 최영(崔瑩)이 도리어 광망한 계획을 내어 신우(辛禑)와 더불어 군사를 일으켜 요동(遼東)을 공격하였습니다. 신은 소국(小國)이 상국(上國)의 국경을 침범할 수 없다는 것으로써 여러 사람들에게 대의(大義)로 개유(開諭)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돌아오니, 신우(辛禑)는 그 죄를 알게 되고, 최영은 참형(斬刑)을 당했습니다.

나라 사람들이 종실(宗室) 왕요(王瑤)로써 나라 일을 임시로 서리(署理)하게 하고, 정몽주(鄭夢周)를 문하 시중(門下侍中)으로 삼았는데, 몽주는 최영의 실패한 자취를 경계하지 아니하고 왕요와 더불어 다시 요동(遼東)을 공격하려고 모의하니, 나라 사람들이 옳지 않다고 하므로, 왕요는 물러나 사제(私第)로 돌아가고, 몽주는 참형(斬刑)을 당하였습니다. 나라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왕씨(王氏)의 후손은 세상의 인망(人望)에 맞을 만한 사람이 없고, 군국(軍國)의 정무(政務)는 하루라도 통솔이 없어서는 안 되겠다고 여겨, 이에 대소 신료(大小臣僚)와 한량(閑良)·기로(耆老)들이, 신이 대국(大國)을 섬기는 충성이 있는 이유로써 함께 추대하여 군국(軍國)의 정무(政務)를 임시로 보게 하고, 즉시 주문(奏聞)하여 삼가 윤허(允許)를 얻었습니다. 신은 본디 무부(武夫)이므로 실로 사리(事理)를 아는 능력이 없사오며, 또 신의 선대(先代)는 고려에 있었으므로 전혀 빙자(憑藉)할 세력이 없었는데, 다행히 성은(聖恩)을 힘입어 오늘날이 있게 되었으니, 감사하여 떠받드는 정성은 하늘의 해와 같이 명백합니다. 하물며, 최영·정몽주의 한 일이 밝은 거울처럼 가까이 있었는데, 신이 만약 그 간사한 계획을 계속한다면, 성은(聖恩)은 비록 신을 용서하고자 하더라도 나라 사람들이 어찌 즐거이 용서하겠습니까? 신이 목석(木石)이 아닌데 어찌 감히 심력(心力)을 수고롭게 하면서 이러한 이익이 없는 흔단(釁端)을 만들어 스스로 화(禍)를 초래하겠습니까? 신이 만약 기망(欺罔)한다면 천지 귀신이 위에서 굽어보실 것입니다. 지금 조관(條款)의 정유(情由)를 낱낱이 한조목 한조목씩 열기(列記)하여서 삼가 갖추어 주문(奏聞)합니다.

1관(款)에 ‘조정(朝廷)에서 매양 장수에게 명령하여 요동(遼東)을 지키게 했는데, 저들이 즉시 사람을 보내어 포백(布帛)과 금은(金銀)의 유(類)로써 거짓으로 행례(行禮)한다고 이유로 삼고 있으나, 마음속은 우리의 변장(邊將)을 꾀는 데 있다.’ 하였는데, 전건(前件)의 사리(事理)는 조회(照會)해 보니, 소방(小邦)에서 무릇 사신을 보내어 중국 서울에 갈 적에는 반드시 요양(遼陽)을 경유하여 가게 되는데, 특별히 조정(朝廷)을 중하게 여겨 혹은 토산물인 포백(布帛)으로써 행례(行禮)하게 됩니다. 이것은 곧 인정(人情)에서 나오는 것인데 어찌 서로 꾀려는 이치가 있었겠습니까?

1관은 ‘요사이 사람을 보내어 제왕(齊王)의 처소에 이르러 행례(行禮)하였는데, 보내 온 사람이 거짓으로 이상한 말을 하면서 스스로 그 나라를 비방하고 있으니, 마음속은 왕(王)의 동정(動靜)을 정탐하는 데 있다.’ 하였는데, 전건(前件)의 사리(事理)를 조회(照會)해 보니, 소방(小邦)에서 다만 사신을 보내어 중국 서울에 갈 적엔 제왕부(齊王府)를 경유하여 가게 되므로, 제왕 전하(齊王殿下)에게 나아가서 행례(行禮)한 것이며, 또 그 중간에 혹시 언사(言辭)의 실수가 있었다면, 대개 이것은 명령을 받고 간 원인(員人)의 과실이므로 소국(小國)의 알 바가 아닌 것입니다.

1관은 ‘전부터 자주 청하여 약속을 듣겠다 하고는, 약속한 지가 이미 오래 되매, 가고 난 뒤에는 곧 전일의 약속을 어기고 암암리에 여진(女眞)을 꾀어서 가족 5백여 명을 거느리고 몰래 압록강을 건너게 했으니, 과연 이것이 약속을 듣겠다고 한 것인가? 죄의 큰 것이 이 흔단(釁端)보다 더 할 것이 없다.’ 하였는데, 전건(前件)의 사리(事理)는 조회(照會)해 보니, 소국(小國)의 군민(軍民)이 잇달아 요동(遼東)으로 도망해 가서 군정(軍丁)에 충당된 사람과 혹은 잠시 거주한 사람은 본디부터 유인한 일이 없었는데도, 고향을 생각하여 도로 다시 도망해 와서 산골짜기 사이에 몰래 거주하고 있는데, 신이 처음에는 알지 못했으나, 요사이 요동 도사(遼東都司)에서 온 자문(咨文)에 의거하여, 사람을 보내어 소기(小旗) 이한니(李閑你) 등을 처자(妻子)까지 합쳐 23명을 잡아서 요동 도사에 보냈으며, 홍무(洪武) 26년(1393) 5월 13일에 삼가 수조(手詔)를 받고는 즉시 관할 서북면의 각 부(府)·주(州)·군(郡)·현(縣)에서 본디는 본국인(本國人)에 속했던 박용(朴龍) 등을 가족 3백 88명까지 잡아 오고, 파절 천호(把截千戶) 김완귀(金完貴) 등까지 잡아 와서, 전 밀직 부사(密直副使) 조언(曺彦)을 시켜 압송(押送)한 것과, 취(取)하여 조사한 본래 거주하던 여진인(女眞人) 구을토(仇乙土) 등 1백 16명은 파견해 온 천호(千戶) 왕탈환불화(王脫歡不花)의 관령(管領)에게 부쳐, 모두 홍무(洪武) 26년 8월에 흠차 내사(欽差內史) 황영기(黃永奇)·최연(崔淵) 등과 함께 요동 도사에 보내어 서로 주고받고 했습니다.

1관은 ‘근일에 요동(遼東)에서 와서 아뢰기를, 「금년 7월에 불한당[劫賊] 1명을 잡아 왔는데 살펴보니, 고려 해주(海州) 청산(靑山) 파절 천호(把截千戶) 합도간(哈都干)의 하민(下民)으로서, 이름은 장갈매(張葛買)인데, 그가 말하기를, 고려왕(高麗王)이 흑포(黑布) 30통을 합도간(哈都干)에게 귀착(歸着)시켜 배 17척을 내게 했는데, 배마다 군사 40명, 노젓는 사람[搖櫓人] 18명, 백호(百戶) 1명씩이며, 연강(燕江)의 오 천호(吳千戶)를 시켜 관령(管領)하게 하고는 7월 초5일에 길을 떠났습니다. 배 위의 사람은 모두 왜적(倭賊)처럼 꾸미고, 배도 모두 흑색(黑色)으로 꾸며, 거짓으로 매매(賣買)합니다.」 하면서 소식을 정탐하게 하되, 만약 관군(官軍)을 만나면 다만 이것이 왜선이라고 말하고는, 연로(沿路)에서 겁략(劫掠)하여 잡아가면서 안치(安置)했는데, 화자(火者) 9명 중에서 1명은 죽이고, 6명은 놓아 돌려보내고, 2명을 남겨 두어 길을 인도하게 하여, 7월 28일 밤에 금주(金州)의 위도(衛島)에 도착하여 조금 정박했다가 오 천호(吳千戶)가 매(每) 선척(船隻)에 남은 군사 10명을 내어 간수(看守)하게 하고, 그 나머지 군인들은 자기가 인솔하여 언덕에 올라 신시(新市)의 군둔(軍屯)을 불사르고 겁탈하여, 군인과 가속(家屬)을 합계 4명을 사로잡아 가고, 2명을 죽이고, 3명을 살상(殺傷)하였다.’고 하였으며,

1관은 ‘또 거짓으로 왜적(倭賊)을 꾸며 선척(船隻)을 타고 산동(山東)의 영해주(寧海州)로 가서 언덕에 올라 본주(本州)의 인연을 겁살(劫殺)하였음을, 본디 잡혀 갔던 화자(火者)가 도망해 돌아와서 말하여 그전의 사정을 알게 되었다.’ 하였습니다. 삼가 전건(前件)의 사리(事理)는 가만히 생각하옵건대, 소방(小邦)이 성조(聖朝)를 섬기면서 지성으로 하고 두 마음이 없는데, 어찌 감히 소민(小民)을 보내어 배를 타고 거짓으로 왜적(倭賊)을 꾸며서 금주(金州)와 산동(山東) 등지에 가서 언덕에 올라 도둑질을 하여 인명(人命)을 살상(殺傷)하였겠습니까? 그 장갈매(張葛買)가 일컬은 바 ‘거짓으로 매매(賣買)한다 하면서 소식을 정탐한다는 것’은, 신은 실로 갈매(葛買)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지 못하오며, 더구나 만약 도둑질을 하여 겁살(劫殺)했다고 한다면 인정(人情)이 조격(阻隔)하여졌을 것이니 어떻게 사정을 정탐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것이 거짓인 것은 분변(分辨)하지 않더라도 자명(自明)한 일입니다. 그전에 윤이(尹彝)와 이초(李初)가 도망하여 경사(京師)에 가서 시비(是非)를 거짓 꾸몄으나, 황제께서 살펴 만리 밖의 일을 환하게 아시어, 윤이와 이초가 이미 그 죄에 복종하여 처형(處刑)되었사온데, 신은 아마 장갈매(張葛買)도 역시 이런 등류의 불량(不良)한 무리로서, 잡혀서 관청(官廳)에 이르매, 문득 없는 사실을 꾸며 내었던 것이라 생각됩니다. 소국에서 사신을 보내매 이와 같은 원통하고 억울한 일이 있사오니, 위에 하늘의 해가 있사온데 입으로는 사정을 호소(呼訴)하기가 어렵겠습니다. 삼가 바라옵건대, 성자(聖慈)께서 조관(朝官)을 파견하여 잡힌 겁적(劫賊) 장갈매를 보내시어 나라 사람들과 대변(對辨)한다면 문득 거짓인가 참인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1관(款)은 ‘표문(表文)을 올려 입공(入貢)한다 일컫고는 매양 말[馬]을 가져오면서, 말을 기르는 사람으로 하여금 징발하여 보니, 말이 모두 둔하고 타서 지친 것들 뿐이며, 이번에 바친 말 중에는 다리가 병들고 이[齒]가 없는 것과 길들이지 않은 것이 반이나 되며, 그 나머지는 비록 관절병(關節病)은 없지마는, 또한 모두 둔하여 지성으로 바친 물건이 아니니, 이런 것으로써 업신여기고 화단(禍端)을 만드는 것보다는 어찌 줄여서라도 물건이 좋고 뜻이 성실한 것만 같겠는가?’ 하였는데, 전건(前件)의 사리(事理)는 조회(照會)해 알아보니, 소국에서 생산되는 말이 본래 작고 둔하므로, 무릇 공헌(貢獻)할 때를 당하게 되면 힘을 다하여 가려서 바치게 되는데, 대개 길이 매우 멀기 때문에 다리가 병들고 피곤해 약한 것도 있을 것이오나, 소방(小邦)이 어찌 감히 업신여기겠습니까?

1관(款)은 ‘국호(國號)를 고치는 한 가지 절차는 사람을 보내어 조칙(詔勅)을 청하므로 혹은 조선(朝鮮)을 계승하든지, 이미 자기가 하도록 허가하고 즉시 정명(正名)하게 하였는데, 지금 이미 국호(國號)를 조선(朝鮮)으로 고치고서도 표문(表文)에는 그전대로 권지 국사(權知國事)라 일컫게 되니, 무슨 계획인지 자세히 알 수 없다. 다만 간사한 짓을 서서 계획을 부리는 것뿐만이 아니라, 실은 저들의 상서롭지 못한 징조이다.’ 하였는데, 전건(前件)의 사리(事理)는 홍무(洪武) 26년(1393) 2월 15일에 배신(陪臣) 한상질(韓尙質)이 경사(京師)로부터 돌아오면서 예부(禮部)의 자문(咨文)을 가지고 와서, 삼가 성지(聖旨)를 받았사온데, 그 칙지에, ‘동이(東夷)의 국호(國號)는 다만 조선(朝鮮)의 칭호가 아름답고 또 그 유래(由來)가 오래 되었으니, 그 명칭을 근본으로 삼아서 본받아, 하늘의 뜻을 본받고 백성을 잘 다스려서 후사(後嗣)를 영구히 번성하게 하라.’ 하였는데, 삼가 국호를 조선(朝鮮)이라 고쳐 일컬은 외에, 신은 생각하기를 국왕(國王)의 명작(名爵)을 내리지 않았다고 여겨, 감히 함부로 왕(王)이라 일컫지 못한 것이며, 실로 업신여기려는 마음은 없었습니다. 지금 좌군 도독부(左軍都督府)의 자문(咨文)을 받아 삼가 성지(聖旨)를 받들었는데, ‘즉시 명칭을 바루어야 된다.’ 하였으며, 또 도독부(都督府)에서 온 자문(咨文)에 의거하면, ‘조선 국왕(朝鮮國王) 이(李)에게 자문(咨文)을 보내니 이에 준하여 사은 표전(謝恩表箋)의 수찬(修撰)을 제폐하라.’ 하기에, 삼가 위의 명에 의거하여 시행하였으며,

1관(款)은 ‘이미 국호(國號)를 고치도록 허가했는데 사자(使者)가 돌아간 뒤에 오래 되도록 소식이 없었으며, 먼저 사람을 요왕(遼王)과 영왕(寧王)의 곳에 보내어 행례(行禮)하면서 조선국 권지 국사(朝鮮國權知國事)라 일컫고, 한달 후에야 겨우 표문(表文)을 올려 사은(謝恩)하니, 존비(尊卑)의 구분을 고의(故意)로 먼저 하고 뒤에 하였다.’ 하였는데, 전건(前件)의 사리(事理)는 조회(照會)해 알아보니, 국호(國號)를 고치고 사은(謝恩)하는 일은 홍무(洪武) 26년 3월 초9일에 문하 평리(門下評理) 이염(李恬)을 파견하여 표전(表箋)과 예물(禮物)을 가지고 경사(京師)로 가게 했는데, 간 뒤에 요왕(遼王)과 영왕(寧王)이 봉작(封爵)을 받고 도래(到來)하였다는 것을 들어 알았습니다. 신은 소방(小邦)이 요(遼)·녕(寧)과 경계가 서로 가까우므로 특별히 조정(朝廷)을 중시(重視)함으로써 마땅히 행례(行禮)해야 되겠기에, 그해 4월 초6일에 전 밀직 사(密直使) 박원(朴原)과 전 밀직 부사(密直副使) 유운(柳雲) 등을 파견하여 요왕과 영왕 전하(殿下)에게 가서 행례(行禮)하게 하였는데, 위의 항목의 이염(李恬)은 대개 경사(京師)에 가는 길이 매우 멀고 또 진헌(進獻)할 안자(鞍子)와 예물(禮物)을 가져가기 때문에 시일을 오래 지체하여 서울에 이르게 된 것이니, 어찌 감히 고의로 먼저 가고 뒤에 간 것이겠습니까?

1관(款)은 ‘지난해에 왕창(王昌)으로 하여금 내조(來朝)하기를 청하므로 허가하지 아니하고, 그 뒤에 왕요(王瑤)021) 에게 국사(國事)를 맡겼더니, 또 내조(來朝)하기를 청하므로 역시 허가하지 아니하였는데, 드디어 요(瑤)의 아들 석(奭)으로 하여금 내조(來朝)하게 하고서, 조정(朝廷)에 이르자 도로 돌려보내고는, 그 부자(父子)가 부도(不道)하다고 일컬어 마침내 시역(弑逆)[17]을 행하였으니, 그들이 여러 번 내조(來朝)하기를 청한 것은 마음속으로 중국에서 정벌할까 두려워한 까닭으로, 이 일을 가탁(假託)하여 신용을 얻으려고 한 것이다.’ 하였는데, 전건(前件)의 사리(事理)는 가만히 보건대, 전대(前代)의 신창(辛昌)과 왕요(王瑤) 등이 여러 번 친히 조회하기를 청하였으며, 요(瑤)가 아들 석(奭)을 보내어 친히 천조(天朝)에 조회하고 환국(還國)하여, 그 아버지와 더불어 부도한 짓을 마음대로 행하고 반역을 꾀하기까지 하니, 나라 사람들이 이를 싫어하여 사저(私邸)로 물러가게 하고, 나라 사람들이 모두 신을 왕으로 추대하여 조정(朝廷)에 주달(奏達)하니, 성자(聖慈)께서 그 사정을 환하게 아시고 신에게 권지 국사(權知國事)를 허가하였으니, 그 왕요(王瑤) 부자(父子)는 현재 단란(團欒)하게 모여 살게 하여 타고난 수명(壽命)을 보전하도록 하였으며,

1관(款)은 ‘국호(國號)를 고친 데 대한 사은(謝恩)하는 표전(表箋) 내에 업신여기는 언사(言辭)를 섞었으니, 소국(小國)으로써 대국(大國)을 섬기는 정성이 과연 이와 같을 수가 있겠는가?’ 하였는데, 전건(前件)의 사리(事理)는 조회(照會)해 알아보니, 소방(小邦)이 먼 지방에 궁벽하게 있어서, 언어(言語)도 통하지 못하고 문견(聞見)도 넓지 못하여, 문자(文字)를 대강 익혀서 사정을 겨우 말하게 되므로, 표전(表箋)을 제작(製作)하는 데 있어서 체제와 격식을 잘 알지 못하여 잘못된 것이고, 감히 고의(故意)로 모만(侮慢)한 것은 아닙니다."


2月 20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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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사 자초를 내전에서 공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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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庚寅/飯王師自超於內殿。

왕사(王師) 자초(自超)를 내전(內殿)에서 공양(供養)하였다.


왜적 13명을 죽인 경상도 수군 만호 차준에게 물품을 하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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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慶尙道水軍萬戶車俊捕倭一船, 斬首十三級, 幷所獲兵器以獻。 命賜宮醞綺絹。

경상도 수군 만호(水軍萬戶) 차준(車俊)이 왜적(倭賊)의 배 1척을 잡아서 머리 13급(級)을 베고 노획한 병기까지 합하여 바치니, 명하여 궁온(宮醞)과 무늬 있는 비단과 명주를 내려 주었다.


권중화 등에게 술을 하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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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遣使賜酒于權仲和等。

사자(使者)를 보내어 권중화(權仲和) 등에게 술을 내려 주었다.


2月 21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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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창궁에 거동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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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辛卯/幸壽昌宮。

임금이 수창궁에 거둥하였다.


삼성에서 왕씨 일족을 섬에 안치하여 모반을 방지코자 했으나 윤허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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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臺諫刑曹上言: “竊聞防微杜漸, 《春秋》之義也。 臣等頃以恭讓君三父子, 請加天誅, 未獲兪允, 不勝隕越。 臣等竊謂莨莠不除, 則爲嘉穀之害; 奸雄不去, 則必爲社稷之禍。 殿下於王氏, 有屛諸海島者, 有安置外方者, 有召還京師者。 臣等未知屛諸海島者何辜? 安置與召還者, 獨何幸歟? 古人有言曰: ‘獸窮則搏, 人窮則謀。’ 而況王康、王鬲、承寶、承貴內懷奸險, 謀略過人, 雖殿下賞之以恩, 待之以厚, 其心必不知足, 升沈觀望, 必爲後患。 此朝鮮臣子長慮却顧, 爲殿下寒心者也。 願殿下回日月之明, 體《春秋》之義, 卽令攸司, 將上項人等幷其妻孥弟姪, 徙諸海島, 以防未然, 宗社幸甚。” 上不允。

대간(臺諫)과 형조에서 상언(上言)하였다.

"가만히 듣자옵건대, 일이 커지기 전에 미리 막는 것은 《춘추(春秋)》의 의리입니다. 신 등이 지난번에 공양군(恭讓君) 삼부자(三父子)에게 천주(天誅)를 가하기를 청하였으나, 윤허를 얻지 못하였으니 낭패됨을 견딜 수 없습니다. 신 등은 그윽이 생각하기를, 가라지[莨莠]를 없애지 않는다면 좋은 곡식의 해가 되고, 간웅(奸雄)을 제거하지 않는다면 반드시 사직(社稷)의 화(禍)가 되는 것이라 여기옵니다. 전하께서는 왕씨(王氏)를 해도(海島)에 내쫓은 사람도 있으며, 외방(外方)에 안치(安置)한 사람도 있으며, 서울로 소환(召還)한 사람도 있는데, 신 등은 잘 알 수 없습니다마는 해도에 내쫓은 사람은 무슨 죄이며, 외방에 안치한 사람과 서울로 소환한 사람은 무슨 다행이옵니까? 옛날 사람이 말하기를, ‘짐승이 궁지(窮地)에 이르면 사람을 치고, 사람이 궁지에 이르면 살기를 꾀한다.’고 하였는데, 하물며, 왕강(王康)·왕격(王鬲)·왕승보(王承寶)·왕승귀(王承貴)는 속으로 간사하고 음흉한 마음을 품었고, 지모(智謀)와 계략(計略)은 남보다 뛰어났으니, 비록 전하께서 은혜로써 상을 주고 후하게 대우하더라도, 그들의 마음은 반드시 만족할 줄을 모르고 형세를 따라 관망(觀望)하여 반드시 훗날의 걱정이 될 것입니다. 이것이 조선의 신자(臣子)들이 먼 일을 염려하고 뒤로 돌아보며 전하를 위해서 마음 섬뜩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원하옵건대, 전하께서는 일월(日月) 같은 총명을 돌리시고 《춘추(春秋)》의 대의(大義)를 본받아, 즉시 유사(攸司)로 하여금 위의 항목의 사람들을 그 처자(妻子)와 제질(弟姪)까지 아울러 해도에 옮기게 하여 미연(未然)에 방비한다면 종사(宗社)에 매우 다행하겠습니다."

임금이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2月 22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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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에서 왕씨 일족을 섬에 안치토록 청하자, 연명 상소하지 말도록 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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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壬辰/臺諫、刑曹同狀啓曰:

恭讓君及諸王氏, 宜置海島。

上召三官掌務諭之曰: “前者, 旣命雖有大事, 不宜同狀。 何不從命? 此事旣敎以深慮, 何急遽若是?” 對曰: “雖已奉敎, 然且同狀者, 以事之大也; 敎之深慮而復啓者, 恐有不虞之變也。”

대간(臺諫)과 형조에서 소장(疏狀)을 같이 올려 아뢰었다.

"공양군(恭讓君)과 여러 왕씨를 마땅히 해도(海島)에 안치해야 될 것입니다."

임금이 세 관청의 장무(掌務)를 불러 유시(諭示)하였다.

"지난번에 이미 명령하기를, ‘내 비록 대사(大事)가 있더라도 마땅히 소장(疏狀)을 같이 올리지 못하게 하라.’고 하였는데, 어찌 명령을 따르지 않는가? 이 일은 이미 깊이 생각하라고 명령했는데 어찌 급히 서둘기를 이같이 하는가?"

이에 대답하였다.

"비록 이미 명령을 받았사오나, 그러나 또한 소장(疏狀)을 같이 올린 것은 일이 크기 때문이오며, 깊이 생각하라고 명령하셨는데도 다시 아뢰게 된 것은 뜻밖의 변고가 있을까 두려워한 때문입니다."


삼성에서 성문 공사의 감독을 소홀히 한 조반 등의 죄를 청했으나, 윤허치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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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臺諫、刑曹同章上言趙胖、郭璇等監造城門不能之罪, 上不允。

대간과 형조에서 장소(章疏)를 같이 올려 조반(趙胖)과 곽선(郭璇) 등의 성문(城門) 제조를 감독하면서 잘하지 못한 죄를 말하였으나, 임금이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2月 23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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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에서 왕씨 일족의 죄를 청했으나, 윤허치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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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癸巳/臺諫刑曹同章論前朝王氏及朴葳之罪, 上留中不下。 伏閤力爭之, 上不允。

대간과 형조에서 장소(章疏)를 같이 올려 전조(前朝)의 왕씨(王氏)와 박위(朴葳)의 죄를 논핵(論劾)하니, 임금이 대궐 안에 머물러 두고 내려보내지 않으므로, 대궐 문에 엎드려 힘써 간(諫)했으나 임금이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권중화와 조준이 무악 천도를 반대하고, 하윤만이 찬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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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領三司事權仲和、左侍中趙浚等回自毋岳啓曰: “毋岳南, 地狹不可遷都。” 唯左道都觀察使河崙獨曰: “毋岳明堂, 雖似狹窄, 然以松都康安殿、平壤長樂宮觀之, 則稍爲寬廣。 且於前朝秘錄及中國通行地理之法, 皆合。” 上曰: “予欲親覽以定。”

영삼사사(領三司事) 권중화(權仲和)와 좌시중(左侍中) 조준(趙浚) 등이 무악(毋岳)으로부터 돌아와서 아뢰었다.

"무악(毋岳) 남쪽은 땅이 좁아서 도읍을 옮길 수 없습니다."

좌도 도관찰사(左道都觀察使) 하윤(河崙)만이 홀로 아뢰기를,

"무악(毋岳)의 명당(明堂)이 비록 협착(狹窄)한 듯하지마는, 송도(松都)의 강안전(康安殿)과 평양(平壤)의 장락궁(長樂宮)으로써 이를 관찰한다면 조금 넓은 편이 될 것입니다. 또한 고려 왕조의 비록(秘錄)과 중국에서 통행(通行)하는 지리(地理)의 법에도 모두 부합(符合)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였다.

"내가 친히 보고 정하고자 한다."


2月 24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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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무리가 지다. 의비의 기일이므로 조회와 시장을 정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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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甲午/日暈。 以懿妃(忌晨)〔忌辰〕, 減膳停朝市。

햇무리하였다. 의비(懿妃)의 기신(忌辰)인 이유로써 임금이 감선(減膳)하고 조회와 시장(市場)을 정지하게 하였다.


2月 25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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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에서 왕씨의 모반에 연루된 박위 등을 국문토록 청하니 윤허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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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乙未/臺諫刑曹同章請曰:

嘗聞大逆者不赦, 國之常典。 臣等所以連章不已者, 以此也。 臣等頃以盲人興茂之招, 關涉大體, 連章以聞, 請治其黨, 殿下卽令臺諫法官至水原府按問其狀。 今興茂、仲質招稱: “朴葳潛遣厮人, 卜國安危, 謀立王氏, 以犯大逆。” 願令攸司執送水原府, 與興茂等一處推明, 以杜禍萌。

不允。

대간과 형조에서 장소(章疏)를 같이 올려 청하였다.

"일찍이 듣건대, 대역자(大逆者)는 용서하지 않는 것이 나라의 상전(常典)이오니, 신 등이 장소(章疏)에 연명(連名)하여 청하기를 그치지 않는 것은 이 때문이옵니다. 신 등이 지난번에 장님[盲人] 이흥무(李興茂)의 공초(供招)가 대체(大體)에 관계된 이유로써 장소(章疏)에 연명(連名)하여 아뢰어, 그 무리들을 치죄(治罪)하기를 청하니, 전하께서 즉시 대간(臺諫)과 법관(法官)으로 하여금 수원부(水原府)에 가서 그 죄상(罪狀)을 조사하여 심문하게 하였사온데, 지금 이흥무와 박중질(朴仲質)의 공초(供招)에 ‘박위(朴葳)가 몰래 시인(厮人)[18]을 보내어 나라의 안위(安危)를 점치게 하고는 왕씨(王氏)를 왕으로 세우려고 도모하여 대역(大逆)을 범하였다.’고 하니, 원하옵건대, 유사(攸司)로 하여금 수원부로 잡아 보내어 흥무 등과 더불어 한 곳에서 조사하여 죄상을 밝혀 화(禍)의 발단을 막게 하소서."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2月 26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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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쌓는 것을 시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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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丙申/上觀築城。

임금이 성 쌓는 것을 시찰하였다.


삼성에서 왕씨 일족을 귀양보내도록 연명 상소하니 공주 등지로 유배시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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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臺諫刑曹同章上言:

昨以去王氏一事, 連章上請, 卽未蒙允, 屢瀆聰聞, 不勝隕越。 竊惟至公無私者, 天也; 至愚而神者, 民也。 天道非禍王氏而福殿下, 乃禍無道而福有道也; 民心非惡王氏而愛殿下, 乃惡無道而愛有道也。 殿下應天順人, 革命開國, 誠宜聽於天而順於人也。 臺諫法官請至再三, 而殿下留章未下者, 獨何歟? 夫肆大眚, 《春秋》之戒也; 能愛人能惡人, 先儒之格言也。 今恭讓, 天命人心已絶, 自知不克, 退處于外, 妻孥之完聚, 朝夕之供億自若。 此則殿下昊天之德也。 不以是爲德, 反謀不軌, 自生釁端, 斯乃天討不易之定理也。 除惡而不務其本, 則奸雄豪俠, 其伏也無窮。 彼仲質、可行之卜, 以有恭讓君也。 其他王氏, 或於京師, 或於畿甸, 橫行無節者, 甚可慮也。 而況王康、王鬲謀略過人, 承寶、承貴驍勇出衆, 皆能挾才以倡禍亂者也。 其內懷不測, 以伺其隙者, 未嘗一日忘于懷, 特機不幸耳。 且光武之於劉氏, 南陽庶孽耳; 先主之於中山, 族屬踈遠矣。 奮臂一呼, 而天下響應, 此可謂明鑑矣。 前朝太祖垂戒後昆, 勿用百濟人。 向使後昆, 遵守其訓, 殿下亦安能有今日也! 此臣等所以敢言者也。 古之人主, 優游不斷, 以致禍亂者, 殿下之所嘗聞也。 願殿下念天道之靡常, 慮民心之難保, 斷以大義, 卽令臺諫法官, 就將恭讓三父子, 置之於法; 其王康、王鬲、承寶、承貴幷其同姓弟姪, 屛諸海島; 其江華付處王氏, 亦竄海島, 以絶中外虞疑之心。

上不允。 臺諫刑曹皆不視事。 上召康等曰: “卿等有功於國家, 不置貶例。 今臺諫上疏論之, 而予不從, 臺諫皆不視事, 不得已而從之。 卿等各歸貶所。 予亦不忘卿等之功”, 賜之酒。 乃流康于公州, 鬲于安邊, 承寶于永興, 承貴于合浦, 臺諫、刑曹乃視事。

대간과 형조에서 장소(章疏)를 같이하여 상언(上言)하였다.

"어제 왕씨(王氏)를 제거하자는 한 가지 일로써 장소(章疏)에 연명(連名)하여 올려 청하였으나, 즉시 윤허를 얻지 못하고, 여러 번 전하의 귀를 번거롭게 했사오니 낭패됨을 견딜 수 없습니다. 그윽이 생각하옵건대, 지극히 공평하고 사심이 없는 것은 하늘이고, 지극히 어리석어도 신지(神智)한 것은 백성이니, 천도(天道)는 왕씨(王氏)에게 화(禍)를 주고 전하에게 복을 준 것이 아니라, 곧 무도(無道)한 자에게 화(禍)를 주고 유도(有道)한 사람에게 복(福)을 준 것이며, 민심(民心)은 왕씨를 미워하고 전하를 사랑한 것이 아니라, 곧 무도한 자를 미워하고 유도한 사람을 사랑한 때문입니다. 전하께서 하늘의 뜻에 응하고 사람의 마음에 따라서 천명(天命)을 개혁하여 나라를 세웠으니, 진실로 마땅히 하늘의 명령을 듣고 사람의 마음을 따라야 될 것이온데, 대간(臺諫)과 법관(法官)이 왕씨의 제거를 두세 번이나 청하였는데도 전하께서 장소(章疏)를 머물러 두고 내려보내지 않으시는 것은 무슨 이유입니까? 대저 큰 과오를 석방하는 것은 《춘추(春秋)》에서 경계한 바이며, 사람을 능히 사랑할 수 있으며 사람을 능히 미워할 수 있다는 것은 선유(先儒)의 격언입니다.

지금 공양(恭讓)은 천명(天命)과 인심(人心)이 이미 끊어졌으므로 스스로 감내하지 못함을 알고서 물러가 밖에서 살고 있으며, 처자(妻子)가 한 곳에서 모여 살고 조석(朝夕)의 접대가 그전과 같으니, 이것은 전하의 하늘과 같은 덕이옵니다. 이를 은덕으로 여기지 않고 도리어 반역을 도모하여 자신이 흔단(釁端)을 일으켰으니, 이것은 곧 하늘이 죄 있는 자를 토벌하는 것으로서 변경할 수 없는 정리(定理)입니다. 악(惡)을 제거하면서도 그 근본을 힘쓰지 않는다면 간웅(奸雄)과 호협(豪俠)들의 잠복(潛伏)이 한이 없을 것입니다. 저들 박중질(朴仲質)과 김가행(金可行)이 점친 것은 공양군(恭讓君)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외의 왕씨들이 혹은 서울에서, 혹은 기전(畿甸)에서 거리낌 없이 행동하면서 절도(節度)가 없는 사람은 매우 염려스러운데, 하물며 왕강과 왕격은 지모와 계략이 남보다 뛰어나고, 왕승보와 왕승귀는 사납고 용맹스러움이 남보다 뛰어났으니, 모두 능히 재주를 믿고 화란(禍亂)을 일으킬 만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마음속에 불측(不測)한 생각을 품고 그 틈을 엿보고 있는 사람은 일찍이 하루라도 마음속에서 잊지 않았는데, 다만 기회가 불행하였을 뿐인 것입니다. 더구나, 광무제(光武帝)는 유씨(劉氏)에게 남양(南陽)의 서얼(庶孽)이고, 선주(先主)[19]는 중산왕(中山王)에게 족속(族屬)이 소원(疏遠)하였는데도, 팔을 뽑아내어 한번 부르짖으며 천하 사람이 행동을 같이 취했사오니, 이것은 밝은 전감(前鑑)이라 이를 수 있습니다.

전조(前朝)의 태조(太祖)가 후손(後孫)에게 훈계를 전하면서 백제(百濟) 사람을 쓰지 말라고 했는데, 지난번에 후손들이 그 훈계를 준수했더라면 전주 사람인 전하께서 또한 어찌 오늘날이 있었겠습니까? 이것이 신 등이 감히 말씀 드리는 까닭입니다. 옛날의 인주(人主)가 어물어물하고 속히 결단하지 못하여 화란(禍亂)을 초래한 것은 전하께서 일찍이 들으신 바입니다. 원하옵건대, 전하께서는 천도(天道)의 일정하지 않은 것을 생각하시고 민심(民心)을 보존(保存)하기 어려운 것을 염려하시어 대의(大義)로써 결단하여, 즉시 대간(臺諫)과 법관(法官)으로 하여금 공양(恭讓)의 삼부자(三父子)를 법에 처하고, 그 왕강·왕격·왕승보·왕승귀와 그 동성(同姓)의 아우와 조카까지 모두 해도(海島)로 내쫓고, 강화(江華)에 부처(付處)[20]한 왕씨도 또한 해도로 귀양보내어 중외(中外)의 근심하고 의심하는 마음을 근절하게 하소서."

임금이 윤허하지 아니하니, 대간과 형조에서 모두 정사(政事)를 보지 아니하였다. 임금이 왕강(王康) 등을 불러,

"경들은 국가에 공로가 있으므로 폄적(貶謫)하는 예(例)에 처하지 아니했는데, 지금 대간(臺諫)이 소(疏)를 올려 논핵(論劾)했으나 내가 따르지 아니하니, 대간이 모두 정사를 보지 않으므로 내가 마지못하여 따르게 된다. 경들은 각기 폄소(貶所)로 돌아가라. 나도 또한 경들의 공로를 잊지 않겠다."

하면서 술을 내려 주었다. 이에 왕강은 공주(公州)로, 왕격은 안변(安邊)으로, 왕승보는 영흥(永興)으로, 왕승귀는 합포(合浦)로 귀양보내니, 대간(臺諫)과 형조에서 그제야 정사를 보았다.


왜선 2척을 포획한 수군 만호 차준에게 술을 하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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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慶尙道都節制使報: “水軍萬戶車俊捕倭船二艘。” 遣使賜酒。

경상도 도절제사(都節制使)가 보고하였다.

"수군 만호(水軍萬戶) 차준(車俊)이 왜선(倭船) 2척을 잡았습니다."

사자(使者)를 보내어 술을 내려 주었다.


왕씨의 모반 사건에 대한 이흥무, 왕화, 석능 등의 공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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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居易等復鞫興茂、和、可行、釋能等。 興茂招曰: “去壬申年九月, 逢南平君於義昌貶所。 南平君先卜恭讓君復立可否, 次卜自己命運。 予卜之曰: ‘此命, 君臣慶會, 天地德合之命。 至四十七八歲時運入, 五十以後, 爲將領兵, 必爲大人矣。’ 又有名不知僧在側問卜, 予曰: ‘此爲王師之命。’” 王和招曰: “去壬申年九月, 自義昌貶所, 將入巨濟時, 與三寸叔僧釋能, 問卜於興茂, 卜之曰: ‘是命最好。 入島三年, 然後必出來。 至四十七八歲時, 爲將領兵。 且爲一人之命。’” 釋能招曰: “吾與王琚、王和等, 在義昌貶所, 問卜於興茂。 卜王和之命曰: ‘入島三年, 然後出來。 至四十七八歲時, 將兵, 爲君之命。’” 金可行招曰: “去壬申年十二月, 在東萊縣, 問卜於興茂。 卜之曰: ‘汝命有曰: 「也應金殿玉階行」, 可賀。’ 又前年春, 逢仲質於東萊客舍, 仲質與我言曰: ‘杆城君原子命吉。 吾已書其卜辭, 藏諸囊中矣。’”

이거이(李居易) 등이 다시 이흥무(李興茂)·왕화(王和)·김가행(金可行)·석능(釋能) 등을 국문(鞫問)하니, 흥무(興茂)가 공초(供招)하기를,

"지난 임신년 9월에 남평군(南平君)을 의창(義昌)의 폄소(貶所)에서 만났는데, 남평군이 먼저 공양군(恭讓君)을 다시 왕으로 세우는 일의 가부(可否)를 점치게 하고, 다음에 자기의 명운(命運)을 점치게 하므로, 내가 점쳐서 말하기를, ‘이 명운(命運)은 군신(君臣)이 경회(慶會)하고 천지(天地)가 덕합(德合)하는 명운이므로, 47세나 48세에 이르러 호운(好運)이 들어와서, 50세 이후에는 장수가 되어 군사를 거느리게 되고 반드시 대인(大人)이 될 것입니다.’ 했으며, 또 이름을 알 수 없는 중이 곁에 있다가 길흉(吉凶)을 묻기에, 내가 말하기를, ‘이는 왕사(王師)가 될 명운(命運)이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왕화(王和)는 공초하기를,

"지난 임신년 9월에 의창(義昌)의 폄소(貶所)에서 장차 거제(巨濟)로 들어가려 할 때에, 삼촌숙(三寸叔)인 중 석능(釋能)과 더불어 흥무(興茂)에게 길흉(吉凶)을 물으니, 점쳐서 말하기를, ‘이 명운(命運)은 매우 좋습니다. 섬에 들어간 지 3년 후에는 반드시 나오게 되고, 47세나 48세가 되는 때에 이르면 장수가 되어 군사를 거느리게 되고, 또 일인(一人)[21]이 되는 명운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석능(釋能)은 공초(供招)하기를,

"나는 왕거(王琚)와 왕화(王和) 등과 더불어 의창(義昌)의 폄소(貶所)에 있을 때 흥무(興茂)에게 길흉(吉凶)을 물으니, 왕화의 명운을 점쳐서 말하기를, ‘섬에 들어간 지 3년 후에는 나오게 되고, 47세나 48세가 되는 때에 이르면 군사를 거느리고 군주가 되는 명운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김가행(金可行)은 공초(供招)하기를,

"지난 임신년 12월에 동래현(東萊縣)에 있을 때 흥무에게 길흉을 물으니, 점쳐서 말하기를, ‘그대의 명운(命運)에 당연히 금전(金殿) 옥계(玉階)의 행열(行列)이란 말이 있으니, 하례(賀禮)할 만합니다.’ 하였으며, 또 지난해 봄에 박중질(朴仲質)을 동래(東萊)의 객사(客舍)에서 만났는데, 중질이 나에게 말하기를, ‘간성군(杆城君) 원자(元子)의 명운(命運)이 좋습니다.’ 하므로, 내가 이미 그 복사(卜辭)를 주머니 속에 감추어 두었습니다."

하였다.


2月 27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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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헌부에 명하여 강화도에 있는 왕씨 일족의 거취를 감시토록 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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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丁酉/命憲司, 點視王氏之老弱于江華以聞。

헌사(憲司)에 명하여 왕씨(王氏)의 늙은이와 약한 자를 강화부(江華府)에서 일일이 감시(監視)하여 아뢰게 하였다.


2月 28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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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우가 쳐서 시장의 서쪽 행랑이 무너지고 사람과 말이 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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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戊戌/風雨暴至, 巿邊西廊頹, 人馬多死。

풍우(風雨)가 갑자기 오니 시장(市場) 가의 서쪽 행랑(行廊)이 무너지고, 사람과 말이 많이 죽었다.


상의문하부사 최영지를 안주 등처 병마 도절제사 겸 안주 목사로 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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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以商議門下府事崔永沚爲安州、義州、泥城、江界等處兵馬都節制使兼安州牧使。

상의문하부사(商議門下府事) 최영지(崔永沚)를 안주(安州)·의주(義州)·이성(泥城)·강계(江界) 등처 병마 도절제사 겸 안주 목사(兵馬都節制使兼安州牧使)로 삼았다.


2月 29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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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을 축조하는 인부를 방면하고, 부역하다 죽은 사람의 집에 복호토록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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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己亥/放築城役徒。 敎曰: “前朝之季, 徭役寔繁, 民甚苦之。 予自卽位以來, 思欲安集以期蘇息。 城者, 國家之藩籬, 禦暴保民之所, 不可不備, 故前歲之秋, 徵發京畿、楊廣、西海、交州、江陵之民, 以修都城赴役之後, 或因木石, 或因疾病而殞命者有之, 予甚愍焉。 仰都評議使司, 令所在官司, 限三年復其家, 仍具名以聞。”

성 쌓는 역도(役徒)를 놓아보내고, 교지(敎旨)를 내리었다.

"고려 왕조의 말기에 요역(徭役)이 실로 많았으므로, 백성들이 매우 이를 고통스럽게 여기었다. 내가 즉위한 이래로 편안하게 모여서 휴식(休息)하게 하려고 생각하였다. 성(城)이란 것은 국가의 울타리로서 난폭한 적을 막고 백성을 보호하는 장소이니, 방비(防備)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런 까닭으로, 지난해 가을에 경기도(京畿道)·양광도(楊廣道)·서해도(西海道)·교주도(交州道)·강릉도(江陵道)의 백성들을 징발하여 도성(都城)을 수축(修築)하게 했는데, 부역(賦役)을 치르러 나온 뒤에 혹은 나무와 돌을 운반하거나, 혹은 질병으로 인하여 목숨이 끊어진 사람이 있었으니, 내가 매우 민망하게 여긴다.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에 명하여 소재관(所在官)으로 하여금 3년 동안 그 집의 호역(戶役)을 면세해 주고, 이내 이름을 갖추어 아뢰게 하라."


삼성에서 박위의 죄를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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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臺諫、刑曹同狀上言曰: “參贊門下府事朴葳送人問卜於興茂, 是謀大逆, 罪在不赦。” 上曰: “卿等之言, 似矣, 然此人之才, 不可不惜。 豈可以難信之言, 遽加罪乎?”

대간과 형조에서 소장(疏狀)을 같이하여 상언(上言)하였다.

"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 박위(朴葳)가 사람을 보내어 이흥무(李興茂)에게 길흉(吉凶)을 묻게 했으니, 이것은 대역(大逆)을 도모한 일이오라 죄를 용서할 수 없습니다."

임금이 말하였다.

"경들의 말이 그럴듯하다. 그러나 이 사람의 재주는 아끼지 않을 수가 없으니, 어찌 믿기 어려운 말로써 갑자기 죄를 가할 수 있겠는가?"


각도의 관찰사에게 수령의 치적을 보고토록 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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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命都評議使司, 移牒各道觀察使, 訪問壬寅以來州郡守令政績以聞。

도평의사사에 명하여 각도의 관찰사에게 공문을 보내어 임인년 이래의 주군(州郡) 수령(守令)의 정적(政績)을 조사하여 아뢰게 하였다.


왕씨의 모반 사건에 대한 왕거·박중질·이흥무 등의 공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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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居易等復鞫琚、仲質、興茂等。 琚曰: “去壬申年九月, 在義昌貶所, 和與我言曰: ‘卜吾命於興茂, 曰:「將兵鎭戍之命。」’” 仲質曰: “前年三月, 逢可行於東萊客舍, 出示吾囊中杆城君原子卜命之辭, 且言朴葳欲立原子之事。” 興茂曰: “前年五月, 前知申事李詹先卜自己否泰, 且曰: ‘杆城君在平日, 卜者皆以命吉稱之。 其可復立乎?’ 予對曰: ‘運衰矣。’ 又問: ‘世子命運如何?’ 對曰: ‘本命淺薄。’ 詹曰: ‘原子之命, 何如?’ 對曰: ‘此是晩達之命, 削髮待時爲吉。’ 詹又問曰: ‘南平君之命, 何如?’ 對曰: ‘當時則運衰, 將大達。’”

"지난해 3월에 김가행을 동래(東萊)의 객사(客舍)에서 만나 내 주머니 속에 있는 간성군(杆城君) 원자(元子)의 명운(命運)을 점친 점사(占辭)를 내어 보이고, 또 박위(朴葳)가 원자(元子)를 왕으로 세우고자 했던 일을 말하였습니다."

하였고, 이흥무는 말하였다.

"지난해 5월에 전 지신사(知申事) 이첨(李詹)이 먼저 자기 명운(命運)의 비색(否塞)함과 통태(通泰)함을 점치게 하고, 또 말하기를, ‘간성군(杆城君)은 평일에 점치는 사람들이 모두 명운(命運)이 좋다고 일컬으니, 그를 다시 왕으로 세울 수 있겠는가?’ 하므로, 내가 대답하기를, ‘명운이 쇠진하였습니다.’ 하였으며, 또 ‘세자(世子)의 명운이 어떠한가?’ 묻기에, 대답하기를, ‘본명(本命)이 천박(淺薄)합니다.’고 하였습니다. 이첨이 말하기를, ‘원자(元子)의 명운이 어떠한가?’ 하므로, 대답하기를, ‘이것은 만년(晩年)에 현달(顯達)할 명운(命運)이니 머리를 깎고 시기를 기다림이 좋을 것입니다.’ 하였으며, 이첨이 또 묻기를, ‘남평군(南平君)의 명운은 어떠한가?’ 하므로 대답하기를, ‘당시에는 명운이 쇠진하였지마는 장차는 크게 현달(顯達)할 것입니다.’고 하였습니다."


군제 개정에 관한 판의흥삼군부사 정도전의 상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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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判義興三軍府事鄭道傳等上書曰:

自古爲國者, 文以致治, 武以(勘)〔戡〕亂, 文武兩職, 如人兩臂, 不可偏廢。 故本朝旣有百司庶府, 又有諸衛各領, 所以備文武之職也。 然府兵之制, 大抵承前朝之舊。 前朝盛時, 唯府兵外, 無他軍號。 北有大遼, 東有女眞, 日本, 侵掠於外, 又有草賊往往竊發於中。 小則中郞將以下, 大則遣上將軍、將軍禦之, 至於不得已而後發郡縣兵, 外攻內守, 傳至四百餘年, 當時府兵之盛, 可知。 無事則肄習兵法, 有事出軍則必爲五陣, 當時兵法之習, 亦可知也。 自忠烈王事元以來, 每因中朝宦寺婦女奉使者之請, 官爵汎濫, 皆以所托之人除衛職, 恃勢驕蹇, 莫肯宿衛。 由是府衛始毁, 始置忽只忠勇等愛馬, 姑備宿衛。 及僞朝法制大毁, 凡受府衛之職者, 徒食天祿, 不事其事, 遂至失國, 此殿下之所親見。 今殿下受天景命, 赫然有爲, 宜革舊弊, 重國勢弭天災, 以致維新之治, 然人見聞習熟, 積弊難改。 王者受命, 必變服色易徽號, 所以一視聽, 革弊而鼎新也。 是以宋太宗以美名, 改易禁軍舊號, 作新士氣。 今我殿下, 將東班官名職號, 一皆更定, 循名責實, 百官趨事赴功, 獨於府衛稱號仍舊, 弊亦如前。 臣等職掌三軍, 不可不慮。 謹將府衛合行事件, 條具于後。 一, 義興親軍左衛改義興侍衛司, 右衛改忠佐侍衛司, 鷹揚衛改雄武侍衛司, 金吾衛改神武侍衛司, 每一司各置中左右前後五領, 屬中軍。 左右衛改龍驤巡衛司, 神虎衛改龍騎巡衛司, 興威衛改龍武巡衛司, 每一司亦各置五領, 屬左軍。 備巡衛改虎賁巡衛司, 千牛衛改虎翼巡衛司, 監門衛改虎勇巡衛司, 每一司亦各置五領, 屬右軍。 右侍衛巡衛等十司, 每一司印信一顆鑄給, 都尉使掌之。 一, 上將軍改都尉使, 大將軍改都尉僉事, 都護諸衛將軍改中軍司馬、左軍司馬、右軍司馬。 將軍改司馬, 中郞將改司直, 郞將改副司直, 別將改司正, 散員改副司正, 尉改隊長, 正改隊副。 都府外改中軍, 司直一、副司直一、司正二、副司正三、隊長二十、隊副二十、左軍司直一、副司直一、司正二、副司正三、隊長二十、隊副二十。 右軍上同。 每一司都尉使一、都尉僉事二。 每一領司馬一、司直三、副司直五、司正五、副司正七、隊長二十、隊副四十。 每一道節制使, 宗室省宰。 副節制使, 中樞。 兵馬鈐轄使, 嘉善, 掌州郡兵一百。 兵馬團練使, 正從三品, 掌州郡兵一百。 以至團練判官, 掌兵有差。 中軍屬京畿左右道、東北面, 左軍屬江陵、交州、慶尙、全羅道, 右軍屬楊廣、西海道、西北面。 一, 今將侍衛, 分屬侍衛巡衛等諸司, 蓋法漢朝南北軍之遺制也。 漢南軍掌宮門侍衛, 北軍掌京城巡檢, 此內外相制, 長治久安, 禍亂不生, 已然明驗。 今將義興、忠佐、雄武、神武爲侍衛司屬中軍, 以寅申巳亥, 上、大將軍各率其領將軍以下, 闕門輪番, 以効漢南軍之制; 龍驤、龍騎、龍武及虎賁、虎勇、虎翼爲巡衛司屬左右軍, 上、大將軍使其領將軍以下, 於梁直更, 巡四門把截, 輪番上直巡綽, 以効漢北軍之制。 其當番各司上將軍以下義興三軍府, 以時知委, 毋致違忤。 凡入直, 不許無故出入, 違者, 罪之。 一, 司楯、司衣、司幕、司彝、司饔, 右件愛馬, 乃前朝之季添設, 宜在革去, 而各有差備, 似難卒革。 然都目爲頭者, 受諸領之職, 以本番事務無閑, 不得隨領, 因此以致侍衛虛踈。 今將各領削除祿官之數, 於司楯第一番, 置司直一、副司直一、司正二、副司正二、給事三、副給事三, 其餘三番及各愛馬, 皆用此例, 以都目爲頭員, 將次第遷轉去官。 如此則有其事者食其祿, 食其祿者事其事, 名實相稱, 不相侵亂, 庶乎平矣。 一, 前朝之季, 乳臭子弟及內僚工商雜隷, 充衛領之職, 猥微冗雜, 不堪其任, 或托權勢, 不事其事, 廩祿徒費, 侍衛虛踈。 今承其弊, 不早革之, 非初服貽謀之善也。 宜令本府及兵曹諸衛領見任者, 監身試藝, 其壯有才者, 復其職; 幼弱者、老病者、無才者、雜類者、托故不仕者, 一皆削之, 更將親軍衛屬原從侍衛員人、訓鍊觀習兵法員人、太乙習算員人, 各令所屬官保擧, 如前監身試聞差備。 一, 凡充衛領之職者及分屬衛領各成衆愛馬, 皆置名籍。 又當侍衛巡綽之番, 某司幾員人、某愛馬幾員人, 明書于籍。 有籍而不宿衛者、無籍而入者, 以時糾治。 除當番宿衛巡綽外, 預習兵陣之法, 能者賞之, 不能者罰之。 一, 軍事以嚴爲主。 其不從判旨, 凡於府衛之法, 有所犯者, 令義興三軍府問備, 重者啓聞, 下法司科斷; 其姦頑不革, 沮毁成法, 惑亂衆聽者, 置之邊方, 以充軍役。 一, 將兵者位卑, 則順從上命, 易於役使, 安守其分。 今朝廷雖有都督、指揮、千戶, 而掌兵者百戶也; 前朝雖有中樞、兵曹、上ㆍ大將軍, 而掌兵者將軍也, 此長治久安之策也。 本朝府兵之制, 已有此意, 使將軍掌五員十將六十尉正, 其大將軍以上, 無與焉。 各道州郡之兵, 亦命兵馬使以下掌之, 節制使以時糾察兵馬使之勤慢, 則體統相維, 兵雖聚, 而無不戢之患。 上從之。

판의흥삼군부사(判義興三軍府事) 정도전(鄭道傳) 등이 상서(上書)하였다.

"예로부터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은 문(文)으로써 다스림을 이루게 되고, 무(武)로써 난리를 평정하게 되니, 문무(文武) 양직(兩職)은 사람의 두 팔과 같으므로, 한 쪽만을 두고 한 쪽은 버릴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본조(本朝)에는 이미 백사(百司) 서부(庶府)가 있고, 또 제위(諸衛) 각령(各領)이 있으니, 문무(文武)의 관직을 귀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병(府兵)의 제도는 대개 전조(前朝)의 그전 것을 계승하였는데, 전조의 성시(盛時)에도 다만 부병(府兵) 외에 다른 군호(軍號)는 없었기 때문에, 북쪽에는 큰 요(遼)나라가 있고 동쪽에는 여진(女眞)과 일본(日本)이 있어 밖에서 침략(侵掠)했으며, 또 초적(草賊)이 있어 때때로 나라안에서 도둑질하니, 사건이 작으면 중랑장(中郞將) 이하를 보내고, 사건이 크면 상장군(上將軍)과 장군(將軍)을 보내어 이를 방어하게 하고, 부득이한 경우에 이르게 된 뒤에는 군현(郡縣)의 군사를 징발하여 밖의 적을 공격하고 안의 국토를 지키게 하여 4백여 년이나 전하여 왔으니, 그 당시 부병(府兵)의 강성(强盛)함을 알 수가 있습니다. 사변(事變)이 없으면 병법(兵法)을 익히게 하고, 사변이 있어 군대를 출동시키면 반드시 오진(五陣)으로 하였으니, 그 당시 병법의 익힘도 또한 알 수가 있습니다.

충렬왕(忠烈王)이 원(元)나라를 섬긴 이후로는 매양 중조(中朝)[22]의 환시(宦侍)·부녀(婦女)·봉사자(奉使者)의 청으로 인하여 관작이 제 분수에 넘쳐져서, 모두 청탁하는 사람을 시위(侍衛)하는 관직으로 임명하매, 세력을 믿고 교만하여 숙위(宿衛)하기를 즐겨하지 아니하니, 이로 말미암아 부위(府衛)가 비로소 무너졌으므로, 처음으로 홀지(忽只)·충용(忠勇) 등 애마(愛馬)[23]를 설치하여 우선 숙위(宿衛)에 대비(對備)하게 하였습니다. 위조(僞朝)[24]에 이르러 법제(法制)가 크게 무너져서, 무릇 부위(府衛)의 직책을 받은 사람은 한갓 국록(國祿)만 먹고 그 사무는 일삼지 아니하여 마침내 나라를 잃게 되었으니, 이것은 전하(殿下)께서 친히 보신 바입니다. 지금 전하께서 하늘의 큰 명령을 받고 성대하게 큰 일을 하시니, 마땅히 구폐(舊弊)를 고쳐서 나라의 형세를 무겁게 하고 천재(天災)를 그치게 하여, 혁신(革新)하는 정치를 이루어야 될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보고 들은 데에 익숙해져서 오랫동안 쌓인 폐해를 고치기가 어려우나, 제왕이 천명(天命)을 받으면 반드시 복색(服色)을 변경하고 휘호(徽號)를 고치는 것은, 모든 사람의 시청(視聽)을 한결같이 하여 폐단을 고쳐서 새롭게 하기 때문입니다. 이로써 송(宋)나라 태종(太宗)은 아름다운 명칭으로써 금군(禁軍)의 그전 칭호를 고쳐 사기(士氣)를 진작(振作)시켜 새롭게 했던 것입니다. 지금 우리 전하께서는 동반(東班)의 관명(官名)과 직호(職號)는 일체 모두 개정하여 명칭에 따라 실상을 책임지우니, 백관(百官)이 일에 나아가고 공(功)을 힘쓰게 되는데, 유독 부위(府衛)의 칭호만은 그전대로 그냥 있으며, 폐단도 또한 전과 같습니다. 신 등은 직책이 삼군(三軍)을 관장(管掌)했으니, 염려하지 않을 수 없사와 삼가 부위(府衛)의 당연히 행해야 될 사건(事件)을 조목별로 아래에 갖추어 올립니다.

1. 의흥 친군 좌위(義興親軍左衛)는 의흥 시위사(義興侍衛司)로 고치고, 우위(右衛)는 충좌 시위사(忠佐侍衛司)로 고치고, 응양위(鷹揚衛)는 웅무 시위사(雄武侍衛司)로 고치고, 금오위(金吾衛)는 신무 시위사(神武侍衛司)로 고쳐서, 매 1사(司)마다 각기 중(中)·좌(左)·우(右)·전(前)·후(後)의 5영(領)을 두어 중군(中軍)에 속하게 하고, 좌·우위(左右衛)는 용양 순위사(龍驤巡衛司)로 고치고, 신호위(神虎衛)는 용기 순위사(龍騎巡衛司)로 고치고, 흥위위(興威衛)는 용무 순위사(龍武巡衛司)로 고쳐서 매 1사(司)마다 또한 각기 5영(領)을 두어 좌군(左軍)에 속하게 하고, 비순위(備巡衛)는 호분 순위사(虎賁巡衛司)로 고치고, 천우위(千牛衛)는 호익 순위사(虎翼巡衛司)로 고치고, 감문위(監門衛)는 호용 순위사(虎勇巡衛司)로 고쳐서, 매 1사(司)마다 또한 각기 5영(領)을 두어 우군(右軍)에 속하게 하고, 우시위(右侍衛)·순위(巡衛) 등 10사(司)는 매 1사(司)마다 인신(印信) 1과(顆)를 주조(鑄造)하여 주고, 도위(都尉)로 하여금 이를 맡게 할 것이며,

1. 상장군(上將軍)은 도위사(都尉使)로 고치고, 대장군(大將軍)은 도위첨사(都尉僉事)로 고치고, 제위(諸衛)의 장군(將軍)은 중군 사마(中軍司馬)·좌군 사마(左軍司馬)·우군 사마(右軍司馬)로 고치고, 장군(將軍)은 사마(司馬)로 고치고, 중랑장(中郞將)은 사직(司直)으로 고치고, 낭장(郞將)은 부사직(副司直)으로 고치고, 별장(別將)은 사정(司正)으로 고치고, 산원(散員)은 부사정(副司正)으로 고치고, 위(尉)는 대장(隊長)으로 고치고, 정(正)은 대부(隊副)로 고치고, 도부외(都府外)는 중군(中軍)으로 고쳐서 사직 1명, 부사직 1명, 사정 2명, 부사정 3명, 대장 20명, 대부 20명으로 하고, 좌군(左軍)은 사직 1명, 부사직 1명, 사정 2명, 부사정 3명, 대장 20명, 대부 20명으로 하고, 우군(右軍)은 위와 같으며, 매 1사(司)마다 도위사 1명, 도위첨사 2명으로 하고, 매 1영(領)마다 사마 1명, 사직 3명, 부사직 5명, 사정 5명, 부사정 7명, 대장 20명, 대부 40명으로 하고, 매 1도(道)마다 절제사(節制使)는 종실(宗室)이 맡고, 부절제사(副節制使)는 중추부(中樞府)에서 맡고, 병마 검할사(兵馬鈐轄使)는 가선(嘉善)이 맡는데, 주군(州郡)의 군사 1백 명을 관장(管掌)하고, 병마 단련사(兵馬團練使)는 정3품·종3품이 맡는데, 주군(州郡)의 군사 1백 명을 관장하고, 단련 판관(團練判官)에 이르기까지 군사를 관장함이 차등이 있게 하고, 중군(中軍)은 경기 좌·우도(京畿左右道)와 동북면(東北面)이 속하고, 좌군(左軍)은 강릉도(江陵道)·교주도(交州道)·경상도·전라도가 속하고, 우군(右軍)은 양광도(楊廣道)·서해도(西海道)·서북면(西北面)이 속하게 할 것이며,

1. 시위군(侍衛軍)을 시위(侍衛)·순위(巡衛) 등 여러 사(司)에 나누어 속하게 한 것은 대개 한(漢)나라 남북군(南北軍)의 유제(遺制)를 본받은 것입니다. 한(漢)나라의 남군(南軍)은 궁문(宮門)의 시위(侍衛)를 맡고, 북군(北軍)은 경성(京城)의 순검(巡檢)을 맡았으니, 이것이 내외(內外)가 서로 제어하여 장구히 치안(治安)되어, 화란(禍亂)이 발생하지 아니한 것으로, 이미 그렇게 된 명백한 증거입니다. 지금 의흥(義興)·충좌(忠佐)·웅무(雄武)·신무(神武)를 시위사(侍衛司)로 삼아 중군(中軍)에 속하게 하고, 인일(寅日)·신일(申日)·사일(巳日)·해일(亥日)로써 상장군(上將軍)·대장군이 각기 그 영(領)의 장군(將軍) 이하의 군관(軍官)을 거느리고 대궐 문에 윤번(輪番)으로 시위하게 하여, 한(漢)나라 남군(南軍)의 제도를 본받고, 용양(龍驤)·용기(龍騎)·용무(龍武)와 호분(虎賁)·호용(虎勇)·호익(虎翼)을 순위사(巡衛司)로 삼아 좌군(左軍)과 우군(右軍)에 속하게 하고, 상장군·대장군이 그 영(領)의 장군 이하의 군관을 거느리고 진량(津梁)을 지키고, 교대로 사문(四門)을 돌아다니면서 파수(把守)해 막고, 윤번으로 상직(上直)하여 돌아다니면서 경계하게 해서 한(漢)나라 북군(北軍)의 제도를 본받고, 그 당번(當番) 된 각사(各司) 상장군 이하의 군관(軍官)을 의흥 삼군부(義興三軍府)에서 때때로 명령을 내려 알려 주어서 어기지 못하게 하고, 무릇 입직(入直)하면 아무런 이유 없이 나가고 들어감을 허락하지 아니하고, 이를 어긴 사람은 처벌할 것이며,

1. 사순(司楯)·사의(司衣)·사막(司幕)·사이(司彝)·사옹(司饔)의 상건(上件) 애마(愛馬)는 곧 고려 왕조의 말기에 첨설(添設)한 것이니, 마땅히 개혁해 버려야 될 것이지만, 각기 차비(差備)[25]가 있으니 창졸히 혁파(革罷)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러나 도목(都目)이 우두머리가 된 자는 여러 영(領)의 직책을 받았으나, 본번(本番)의 사무가 한가함이 없는 이유로써 영(領)을 따를 수 없어서, 이로 인하여 시위(侍衛)가 허술하게 될 것입니다. 지금 각영(各領)에서 녹관(祿官)의 수효를 삭제(削除)하고 사순(司楯)의 제1번에 사직(司直) 1명, 부사직(副司直) 1명, 사정(司正) 2명, 부사정(副司正) 2명, 급사(給事) 3명, 부급사(副給事) 3명을 두고, 그 나머지 3번과 각 애마(愛馬)도 모두 이 예(例)를 써서 도목(都目)을 두원(頭員)으로 삼아, 장차 차례대로 옮겨서 거관(去官)하게 할 것이니, 이와 같이 한다면, 그 사무가 있는 사람은 그 녹(祿)을 먹게 되고, 그 녹(祿)을 먹는 사람은 그 사무에 종사하게 되어, 명칭과 실상이 서로 맞아서, 서로 침해하고 문란하지 아니하여 거의 올바르게 될 것이며,

1. 고려 왕조의 말기에는 젖내나는 자제(子弟)와 내료(內僚)·공상(工商)·잡례(雜隷)들이 위영(衛領)의 직책에 충당되었으므로, 외람되고 용잡(冗雜)되어 그 임무를 감내하지 못하여, 혹은 권세에 의탁하여 그 사무를 보지 않고서, 늠록(廩祿)만 한갓 허비할 뿐이고 시위(侍衛)는 허술하게 되었는데, 지금 그 폐단을 계승하고 일찍이 이를 개혁하지 않는다면, 〈전하께서〉 처음 교화를 시행하여 자손에게 계획을 전하는 좋은 일이 아닙니다. 마땅히 본부(本府)[26]와 병조(兵曹)의 제위영(諸衛領)의 현임자(現任者)로 하여금 신체를 살펴보고 재주를 시험하게 하여, 그 건장하고 재주가 있는 사람은 그 직책을 다시 주고, 어리고 약한 사람과 늙고 병든 사람과 재주가 없는 사람과 잡류(雜類)에 속한 사람과 어떤 일을 핑계하고 출근(出勤)하지 아니한 사람은 일제 모두 삭제(削除)하고, 다시 친군위(親軍衛)에 소속된 원종 시위(原從侍衛)의 원인(員人)과 훈련관(訓鍊觀)에서 병법(兵法)을 익힌 원인(員人)과 태을수(太乙數)의 산법(算法)을 익힌 원인(員人)은 각기 소속 관원들로 하여금 보증 천거[保擧]하게 하여, 앞에서와 같이 신체를 살펴보고 재주를 시험하여 아뢰어 차비(差備)하게 할 것이며,

1. 무릇 위영(衛領)의 직책에 충원(充員)된 사람과 위영에 분속(分屬)된 각 성중 애마(成衆愛馬)를 모두 명부에 이름을 기재하게 하고, 또 시위(侍衛)하고 순작(巡綽)할 번(番)을 당하면 아무 사(司)의 몇 원인(員人)과 아무 애마(愛馬)의 몇 원인(員人)을 명부에 명백히 써서, 명부에 있는데도 숙위(宿衛)하지 아니한 사람과 명부에 없는데도 들어온 사람을 때때로 죄를 다스리게 하고, 당번으로 숙위하고 순작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병진(兵陣)의 법을 예습(預習)시켜서, 잘한 사람은 상을 주고, 잘하지 못한 사람은 처벌하게 할 것이며,

1. 군사(軍事)는 엄격함으로써 근본을 삼으니, 그 판지(判旨)를 따르지 아니하여 무릇 부위(府衛)의 법에 범한 자가 있는 사람은 의흥 삼군부(義興三軍府)로 하여금 상세히 심문하게 하여, 중한 사람은 계문(啓聞)하여 법사(法司)에 내려서 과단(科斷)하고, 그 간사하고 완악하여 허물을 고치지 아니하고 성법(成法)을 무너뜨려 여러 사람의 시청(視聽)을 미혹시켜 어지럽게 하는 사람은 변방에 안치하여 군역(軍役)에 충당하게 할 것이며,

1. 군사를 거느린 사람은 직위가 낮으면 윗사람의 명령을 순종하게 되어, 사역(使役)하기가 쉬우며, 그 본분을 편안하게 지키는데, 지금 조정에서 비록 도독(都督)·지휘(指揮)·천호(千戶)가 있지마는, 군사를 맡은 사람은 백호(百戶)이고, 고려 왕조에서 비록 중추부(中樞府)·병조(兵曹)·상장군(上將軍)·대장군(大將軍)이 있었지마는, 군사를 맡은 사람은 장군(將軍)이었으니, 이것은 장구히 치안(治安)을 유지하는 계책이었습니다. 본조(本朝)의 부병(府兵)의 제도도 이미 이 뜻이 있었으니, 장군으로 하여금 오원 십장(五員十將)[27]과 육십 위정(六十尉正)[28]을 맡게 하고, 대장군 이상은 참예하지 못하게 하고, 각도 주군(州郡)의 군사도 또한 병마사(兵馬使) 이하에게 명하여 이를 맡게 하고, 절제사(節制使)는 때때로 병마사의 부지런하고 태만한 것만 규찰(糾察)하게 한다면 체통(體統)이 서로 유지(維持)되므로, 군사가 비록 모이더라도 반란을 그치게 하지 못할 근심은 없을 것입니다."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三年 三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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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月 1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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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창궁에 거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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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庚子朔/幸壽昌宮。

임금이 수창궁에 거둥하였다.


삼성에서 박위의 죄를 청했으나 윤허치 않고, 석방하여 정무를 보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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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臺諫刑曹偕進曰: “朴葳不可宥。” 上曰: “卿等之言雖是, 予亦豈不深慮乎? 令速解囚直。” 召朴葳曰: “視事如舊毋惑。 雖千萬人言之, 予不疑矣。”

대간(臺諫)과 형조에서 함께 나아와서,

"박위(朴葳)는 용서할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경들의 말이 비록 옳지마는 나도 또한 어찌 깊이 생각하지 않겠는가."

하면서, 가둔 것을 풀어주게 하고는 박위를 불러서 말하였다.

"정무(政務)를 보기를 그전과 같이 하고 의혹(疑惑)하지 말라. 비록 천만인(千萬人)이 말하더라도 나는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예조에서 동경과 서경의 구정과 초례를 혁파하고 개경에만 남겨두기를 청하니 윤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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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禮曹狀啓曰: “前朝太祖巡住三京, 故於東西京, 皆設毬庭醮禮, 今更始之初, 不宜因循舊弊。 請除東西京, 只行本京。” 從之。

예조에서 장계(狀啓)하였다.

"전조(前朝)의 태조(太祖)가 삼경(三京)[29]에 순행하여 거주했던 까닭으로, 동경(東京)[30]과 서경(西京)[31]에 모두 구정(毬庭)과 초례(醮禮)038) 를 설치했는데, 지금 정치를 혁신(革新)하는 초기에 마땅히 그전의 폐단을 그대로 따를 수는 없사오니, 청하옵건대, 동경과 서경에는 없애버리고 다만 본경(本京)[32]에만 시행하게 하소서."

그대로 따랐다.


왕씨의 모반 사건에 대한 왕화, 김유의의 공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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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居易、朴信、田時等復鞫王和、金由義等。 和曰: “去壬申年十一月, 定陽君送人于益川君曰: ‘勿以入島爲憂。 吾謀欲復立。’” 由義曰: “去壬申年九月, 見朴葳於峰城田舍。 葳問曰: ‘興茂以吾命爲何如?’ 對曰: ‘厄運。’ 且問以杆城君原子及定陽君之命爲何如, 對曰: ‘皆運衰。’ 葳又謂予曰: ‘更卜右件人等命運以來。’ 予於是年十一月, 還歸密城, 以葳之意告于仲質, 更卜於興茂。 卜之亦曰: ‘運衰。’”

이거이(李居易)·박신(朴信)·전시(田時) 등이 다시 왕화(王和)·김유의(金由義) 등을 국문(鞫問)하니, 왕화가 말하였다.

"지난 임신년 11월에 정양군(定陽君)이 익천군(益川君)에게 사람을 보내어 말하기를, ‘섬에 들어간 것을 근심하지 마시오. 내가 다시 왕으로 세우고자 꾀합니다.’ 하였습니다."

김유의가 말하였다.

"지난 임신년 9월에 박위를 봉성(峰城)의 전사(田舍)에서 만났는데, 박위가 묻기를, ‘이흥무(李興茂)가 나의 명운(命運)을 어떻다 하던가.’ 하니, 대답하기를, ‘액운(厄運)이라.’ 하고, 또 묻기를, ‘간성군(杆城君) 원자(元子)와 정양군(定陽君)의 명운(命運)을 어떻다 하던가.’ 하니, 대답하기를, ‘모두 명운이 쇠진하다.’ 했으며, 박위가 또 나에게 이르기를, ‘다시 위에 말한 사람들의 명운을 점쳐서 오라.’ 하므로, 내가 이해 11월에 밀성(密城)으로 돌아와서 박위의 의사로써 박중질(朴仲質)에게 알려, 다시 이흥무에게 점치게 했더니, 이를 점치고 나서 또한 말하기를, ‘명운(命運)이 쇠진하다.’고 하였습니다."


3月 2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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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위 반란을 고한 김백을 순군옥에 가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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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辛丑/幸壽昌宮留宿。 判事張湛入告曰: “有李仁吉告九百餘人同謀爲亂。” 命巡軍萬戶趙琦, 同張湛問仁吉所從聞, 仁吉曰: “聞於隣人金白。” 遂囚金白于巡軍。

임금이 수창궁에 거둥하여 유숙하니, 판사(判事) 장담(張湛)이 들어 와서 고하였다.

"이인길(李仁吉)이란 사람이 알리기를, ‘9백여 인이 함께 모의하여 난리를 일으키려 한다.’고 합니다."

순군 만호(巡軍萬戶) 조기(趙琦)에게 명하여 장담과 같이 이인길이 누구에게서 들었는가를 묻게 하니, 인길이 말하기를,

"이웃 사람 김백(金白)에게 들었습니다."

하므로 마침내 김백을 순군옥(巡軍獄)에 가두었다.


3月 3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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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시중 조준을 5도 도총제사로, 판삼사사 정도전을 3도 도총제사로 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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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壬寅/上在壽昌宮。 以左侍中趙浚爲交州、江陵、西海、京畿左右五道都摠制使, 判三司事鄭道傳爲慶尙、全羅、楊廣三道都摠制使。

임금이 수창궁에 계시었다. 좌시중(左侍中) 조준(趙浚)을 교주(交州)·강릉(江陵)·서해(西海)·경기좌·우(京畿左右) 5도(道)의 도총제사(都摠制使)로 삼고, 판삼사사(判三司事) 정도전(鄭道傳)을 경상·전라·양광 3도의 도총제사(都摠制使)로 삼았다.


거센 바람과 눈이 내리고 나무에 성에가 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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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風雨雪。 木氷。

큰 바람이 불고 눈이 내려 나무에 얼음이 얼었다.


왕씨의 모반 사건에 연루된 박위에 대해 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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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田時自水原詣闕, 告于上曰: “臣等所鞫可行、仲質等謀逆黨與, 在於京中, 不可不慮。” 上曰: “朴葳之有異心於我, 非今日而始然, 去庚午年恭讓之遷于漢陽也, 曲聽鄭夢周之言, 而有異心於我矣。 然則其懷不測之心, 非一朝一夕, 而尙未能發焉, 至今日遽何爲哉! 且臨敵對陳, 而敵有來投, 則尙納以爲臣。 況葳, 其才有用, 不可輕絶乎! 或其事爲實, 則以其寵利未滿其心而然也。 待之以厚, 則何有異心? 知而預待, 則葳其如予何! 此特可行、仲質等謂葳可憑而爲亂也。”

전시(田時)가 수원(水原)에서 와서 예궐(詣闕)하여 임금에게 고하였다.

"신들이 국문한 김가행·박중질 등의 반역을 모의한 당여(黨與)가 서울 안에 있으니 염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임금이 말하였다.

"박위가 나에게 모반(謀叛)하려는 마음이 있음은 오늘날에 시작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지난 경오년에 공양왕이 한양(漢陽)으로 옮겨 갔을 적에 정몽주의 말을 곡청(曲聽)[33]하고는 나에게 모반하려는 마음이 있었으니, 그렇다면 그가 불측(不測)한 마음을 품고 있는 지가 일조일석(一朝一夕)이 아닌데도 오히려 능히 나타내지 못했는데, 오늘날에 이르러 갑자기 어찌하겠는가? 또 적군(敵軍)과 대진(對陣)하여도 적이 와서 투항(投降)하면 오히려 받아들여 신하로 삼는데, 하물며 박위는 그 재주가 쓸모가 있으니 경솔히 끊을 수가 없음에랴! 혹시 그 일이 사실이라면 그 은총(恩寵)과 이록(利祿)이 그 마음에 만족하지 못해서 그런 것이니, 대우하기를 후하게 한다면 어찌 모반하려는 마음이 있겠는가? 이를 알고 미리 대비한다면 박위가 나에게 어떻게 하겠는가? 이것은 다만 김가행과 박중질이 박위를 빙자하여 난리를 일으킬 수 있다고 한 것일 뿐이다."


3月 4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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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백을 국문하니 반란이 허위임이 드러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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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癸卯/趙琦坐巡軍, 問金白, 白不伏。 召李仁吉, 憑問其事, 乃虛, 命皆放出。 臺諫、刑曹掌務進曰: “今囚巡軍之人, 事關大體, 臣等請按問。” 上曰: “予已審知其虛, 何必更問!”

조기가 순군옥에 앉아 김백을 신문하니, 김백이 복죄(伏罪)하지 않으므로, 이인길(李仁吉)을 불러서 증거로 하여 물으니, 그 일이 그제야 거짓이였으므로, 명하여 모두 석방해 보냈다. 대간과 형조의 장무(掌務)가 나아와서 아뢰었다.

"지금 순군옥(巡軍獄)에 갇힌 사람은 일이 대체(大體)에 관계되오니, 신 등이 조사 심문하기를 청합니다."

임금이 말하였다.

"내가 이미 그 거짓임을 자세히 알았는데 어찌 다시 심문할 필요가 있겠는가."


왜적이 연안부 근처에 침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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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倭寇延安府境。

왜적(倭賊)이 연안부(延安府)의 지경에 침구하였다.


3月 5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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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원을 양광도 도절제사로, 조견을 경상도 도절제사로 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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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甲辰/以李承源爲楊廣道都節制使, 趙狷爲慶尙道都節制使。

이승원(李承源)을 양광도 도절제사로 삼고, 조견(趙狷)을 경상도 도절제사로 삼았다.


3月 6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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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절제사 휘하의 군관 수를 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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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乙巳/都評議使司狀啓曰: “各道都節制使率行軍官, 宜定其數。 兵馬使、知兵馬使、副使各一, 判官、伴黨各三。” 從之。

도평의사사에서 장계(狀啓)하였다.

"각도의 도절제사(都節制使)가 거느리고 다니는 군관(軍官)을 마땅히 그 수효를 정해야 될 것이니, 병마사(兵馬使)·지병마사(知兵馬使)·부사(副使)는 각 1명씩으로 하고, 판관(判官)·반당(伴黨)[34]은 각 3명씩으로 하소서."

그대로 따랐다.


3月 7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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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문하부사 안종원 등이 연산참에 이르렀으나 중국에 들어가지 못하고 돌아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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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丙午/判門下府事安宗源等至連山站, 不得入而還。

판문하부사 안종원(安宗源) 등이 연산참(連山站)에 이르렀으나 중국에 들어가지 못하고 돌아왔다.


왕씨의 모반 사건에 관련된 이첨을 합포로 귀양보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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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前朝知申事李詹以興茂辭連, 流合浦。

전조(前朝)의 지신사(知申事) 이첨(李詹)이 이흥무(李興茂)의 공사(供辭)에 관련되어 합포(合浦)로 귀양갔다.


하양·수성·계성·안덕 등의 군현을 통폐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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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都評議使司具慶尙道都觀察使閔開報, 啓曰: “請以梨旨縣屬新寧, 安心所屬河陽, 守城屬大丘, 桂城屬靈山, 安德屬松生, 靑鳧屬甫城, 永善屬溟珍, 安康還屬雞林, 吉安屬安東。” 從之。

도평의사사에서 경상도 도관찰사 민개(閔開)의 보고를 갖추어 계(啓)하였다.

"청하옵건대, 이지현(梨旨縣)은 신령(新寧)에 속하게 하고, 안심소(安心所)는 하양(河陽)에 속하게 하고, 수성(守城)은 대구(大丘)에 속하게 하고, 계성(桂城)을 영산(靈山)에 속하게 하고, 안덕(安德)을 송생(松生)에 속하게 하고, 청부(靑鳧)는 보성(甫城)에 속하게 하고, 영선(永善)은 명진(溟珍)에 속하게 하고, 안강(安康)은 계림(鷄林)에 도로 속하게 하고, 길안(吉安)은 안동(安東)에 속하게 하소서."

그대로 따랐다.


3月 9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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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좌궁으로 돌아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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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戊申/上還時坐宮。

임금이 시좌궁(時坐宮)으로 돌아왔다.


왜적을 격퇴시킨 창평 현령 신원절과 수군 만호 이지대 등에게 물품을 하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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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全羅道昌平縣令愼原節率軍官, 斬倭七級, 擒一名, 收兵器衣服以獻: 慶尙道水軍萬戶李之帶獲倭一船。 命判校書監事李文和, 齎宮醞綺絹, 往賜之帶、原節。

전라도 창평 현령(昌平縣令) 신원절(愼原節)이 군관(軍官)을 거느리고 왜적(倭賊) 7명을 목베고, 1명을 사로잡고, 병기(兵器)와 의복을 거두어 바쳤으며, 경상도 수군 만호(水軍萬戶) 이지대(李之帶)는 왜적의 배 1척을 잡으니, 판교서감사(判校書監事) 이문화(李文和)에게 명하여 궁온(宮醞)과 무늬 있는 비단과 명주를 가지고 가서 지대와 원절에게 내려 주게 하였다.


3月 10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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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왕의 기일이므로 조회와 시장을 정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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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己酉/皇高祖穆王(忌晨)〔忌辰〕, 減膳停朝市。

황고조(皇高祖) 목왕(穆王)의 기신(忌晨)이므로 감선(減膳)하고, 조회와 시장(市場)을 정지하게 하였다.


3月 11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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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미포에서 《오군진도》대로 군사 훈련을 하다. 정도전과 사냥한 동물의 제향을 논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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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庚戌/幸臨津壽美浦, 命判三司事鄭道傳, 講《五軍陣圖》, 且曰: “明日, 吾將親覽焉。” 〔○〕以僉節制使陳忠貴、大將軍李貴齡爲中軍司馬。 召諸節制使敎曰: “前者, 旣命各習陣圖, 明日如有未習者、違令者, 予將罰之。” 又問鄭道傳曰: “古者蒐狩, 獻禽宗廟。 今予春蒐獲禽, 先獻宗廟何如?” 對曰: “獻禽之禮, 固宜。 大享已過, 請於望祭薦之。” 上以爲然。

임금이 임진(臨津)의 수미포(壽美浦)에 거둥하여 판삼사사 정도전에게 명하여 오군진도(五軍陣圖)[35]를 연습하게 하고는, 또 말하였다.

"내일에 내가 장차 친히 관람할 것이다."

첨절제사(僉節制使) 진충귀(陳忠貴)와 대장군 이귀령(李貴齡)을 중군 사마(中軍司馬)로 삼고, 여러 절제사(節制使)를 불러 명령하였다.

"지난번에 이미 각기 《진도(陣圖)》를 연습하도록 명하였으니, 내일에 만약 연습하지 아니한 사람과 영을 어긴 사람이 있으면 내가 장차 처벌할 것이다."

정도전에게 묻기를,

"옛날에는 봄사냥과 겨울사냥에서 종묘(宗廟)에 짐승을 바쳤는데, 지금 내가 봄사냥에서 짐승을 잡아 먼저 종묘(宗廟)에 바치려고 하니 어떻겠는가?"

대답하기를,

"짐승을 바치는 예(禮)는 진실로 마땅하오나, 대향(大享)[36]이 이미 지났으니 망제(望祭)에 이를 올리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옳게 여기었다.


이원계의 아들인 이조를 상장군으로 삼아 죽은 진안군의 군사를 관장케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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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以前少尹李朝爲上將軍, 掌卒鎭安君所領之軍。 朝, 完山君元桂之子也。

전 소윤(少尹) 이조(李朝)를 상장군(上將軍)으로 삼아 죽은 진안군(鎭安君)이 거느리던 군사를 관장하게 하였다. 이조는 완산군(完山君) 이원계(李元桂)의 아들이다.


3月 12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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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미포로부터 수창궁에 갔다가 시좌소로 돌아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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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辛亥/上至自壽美浦, 各司迎于崇仁門外。 上入壽昌宮, 至暮還時坐所。

임금이 수미포(壽美浦)로부터 돌아오니, 각 관사(官司)에서 숭인문(崇仁門) 밖에서 맞이하였다. 임금이 수창궁에 들렀다가 날이 저물자 시좌소(時坐所)로 돌아왔다.


3月 13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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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창궁에 거동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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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壬子/幸壽昌宮。

임금이 수창궁에 거둥하였다.


모반 사건에 관련된 왕화·왕거·김가행 등을 참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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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丞朴信自水原將各人招辭來啓, 召兩侍中議之。 誅王和、王琚、金可行、朴仲質、金由義、李興茂等; 特宥王瑀、朴葳; 置僧釋能于巨濟島。

중승(中丞) 박신(朴信)이 수원(水原)에서 각 사람들의 공사(供辭)를 가지고 와서 아뢰니, 두 시중(侍中)을 불러서 이를 의논하게 하였다. 왕화·왕거·김가행·박중질·김유의·이흥무 등을 목 베고, 왕우와 박위는 특별히 유사(宥赦)하고, 중 석능(釋能)은 거제도(巨濟島)에 안치(安置)시키었다.


3月 14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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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양군의 3부자를 삼척으로 옮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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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癸丑/移置恭讓君三父子于三陟。

공양군(恭讓君) 삼부자(三父子)를 삼척(三陟)으로 옮겨 안치(安置)시키었다.

왕사 자초의 본향인 삼기 현사를 감무로 승격시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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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陞三歧縣司爲監務, 王師自超鄕也。

삼기 현사(三岐縣司)를 승격시켜 감무(監務)로 삼았으니, 왕사(王師) 자초(自超)의 본향(本鄕)이기 때문이었다.


3月 15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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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관 조순을 기복시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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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甲寅/命宦官曺恂起復。

환관(宦官) 조순(曺恂)을 기복(起復)하도록 명하였다.


3月 16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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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사 노타내 등이 고향에서 돌아오니 잔치를 베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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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乙卯/使臣盧他乃等來自其鄕, 上設宴慰之。

사신 노타내(盧他乃) 등이 그 본향(本鄕)으로부터 오니, 임금이 잔치를 베풀어 그를 위로하였다.


3月 17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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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선 3척을 섬멸한 수군 첨절제사 김빈길 등에게 물품을 하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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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丙辰/全羅道都觀察使安景恭報: “水軍僉節制使金贇吉、萬戶金允劒ㆍ金文發等獲倭三艘, 盡殲之。” 上遣使賜弓矢綺絹銀器有差。

전라도 도관찰사 안경공(安景恭)이 보고하였다.

"수군 첨절제사(水軍僉節制使) 김빈길(金贇吉)과 만호(萬戶) 김윤검(金允劍)·김문발(金文發) 등이 왜적의 배 3척을 잡아서 다 죽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사자(使者)를 보내어 궁시(弓矢)와 무늬 있는 비단과 명주와 은기(銀器)를 차등이 있게 내려 주었다.


3月 18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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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장과 호위를 갖추어 수창궁으로 옮겨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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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丁巳/上備儀衛, 移于壽昌宮。

임금이 의위(儀衛)를 갖추어 수창궁으로 옮기었다.


3月 19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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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사 노타내 등이 경사로 돌아가니 영빈관에 가서 전송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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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戊午/使臣內(使)〔史〕盧他乃等還京師, 上率群臣, 送至迎賓館。

사신인 내사(內史) 노타내(盧他乃) 등이 중국 서울로 돌아가니, 임금이 여러 신하를 거느리고 전송하여 영빈관(迎賓館)까지 이르렀다.


3月 20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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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헌부에서 사헌 잡단 박저생의 부임을 영접하지 않은 감찰 안이녕을 탄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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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己未/司憲雜端朴抵生上臺, 監察安以寧等不迎。 以抵生朴葳之族也。 憲司劾以寧不迎之故。

사헌 잡단(司憲雜端) 박저생(朴抵生)이 사헌부에 오는데 감찰(監察) 안이녕(安以寧) 등이 맞이하지 아니하였으니, 저생이 박위의 종족(宗族)인 까닭이었다. 헌사(憲司)에서 안이녕이 박저생을 맞이하지 아니한 이유로써 탄핵하였다.


3月 22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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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관이 박위를 탄핵하자 장무를 불러 꾸짖고, 박위에게 정사를 보도록 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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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辛酉/諫官劾參贊門下府事朴葳。 上召掌務讓之, 命葳視事。

간관(諫官)이 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 박위(朴葳)를 탄핵하므로, 임금이 장무(掌務)를 불러 꾸짖고, 박위에게 명하여 정사를 보게 하였다.


3月 23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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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선 1척을 섬멸한 전라도 수군 첨절제사 김빈길에게 물품을 하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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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壬戌/全羅道水軍僉節制使金贇吉, 獲倭一艘, 收兵器以獻, 遣使賜醞及綺絹。

전라도 수군 첨절제사가 김빈길(金贇吉)이 왜적의 배 1척을 잡아 병기(兵器)를 거두어 바치니, 임금이 사자(使者)를 보내어 궁온(宮醞)과 무늬 있는 비단과 명주를 내려 주었다


3月 24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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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문하부사 안종원의 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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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癸亥/判門下府事安宗源卒。 宗源字嗣淸, 順興人, 僉議贊成事文貞公軸之子。 早登第, 入藝文爲檢閱供奉, 秩滿當遷, 以同僚沈東老年高讓之, 使先遷。 文貞聞之, 喜曰: “讓, 德之先也。 吾家殆益昌乎!” 後一年乃遷。 累遷至典法正郞, 出爲慶尙道按廉使。 歲辛丑, 以侍御史出按楊廣道。 紅賊陷京, 恭愍王南遷至竹州, 吏民皆散, 宗源罔知所措, 不能供頓。 恭愍怒, 欲誅之, 賴親臣柳淑營救得免。 甲辰, 拜典法摠郞, 辛旽當國, 以不附, 出爲江陵府使, 有惠政, 去後, 民立生祠以祭。 辛亥, 旽敗, 起拜司憲侍史, 歷左司議、右常侍, 拜大司憲, 入密直爲提學, 陞政堂文學, 又兼大司憲。 壬戌, 知貢擧, 取柳亮等三十三人。 官至門下贊成事、判三司事。 宗源性慈祥寡言語, 號所居亭曰雙淸。 接人以恭, 能與世推移, 以全其身。 然拙於應事, 所至無所建。 至國初, 上以其前朝耆老, 擢爲判門下府事。 以病卒, 年七十一。 上輟朝三日, 遣左政丞趙浚, 祭于殯, 官庇葬事。 諡文簡。 子仲溫、景良、景恭, 皆登第。 仲溫、景良, 官至中樞; 景恭與於開國功臣, 封興寧君: 景儉官至工曹典書。

판문하부사(判門下府事) 안종원(安宗源)이 졸(卒)하였다. 종원(宗源)의 자(字)는 사청(嗣淸)이며, 본관은 순흥(順興)이니,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 문정공(文貞公) 안축(安軸)의 아들이다. 젊은 나이에 과거(科擧)에 올라 예문관(藝文館)에 들어가서 검열(檢閱)[37]과 공봉(供奉)[38]이 되었다. 관직의 임기가 차서 천직(遷職)하게 되었는데, 동료(同僚) 심동로(沈東老)가 나이 많은 이유로써 그에게 사양하여, 그로 하여금 먼저 천직하게 하니 문정공이 이 소식을 듣고 기뻐하면서 말하기를,

"사양은 덕의 첫째이니 우리 집안이 더욱 번창하겠구나!"

하더니, 그 후 1년 만에 곧 천직(遷職)되었다. 여러 번 옮겨 전법 정랑(典法正郞)이 되고, 외직(外職)으로 나가서 경상도 안렴사(按廉使)가 되었다. 신축년에 시어사(侍御史)로 외직(外職)으로 나가 양광도 안렴사가 되었는데, 홍건적(紅巾賊)이 서울을 함락시키매, 공민왕이 남쪽으로 파천(播遷)하여 죽주(竹州)에 이르니, 관리와 백성들이 모두 흩어졌다. 종원이 어찌할 바를 몰라서 능히 접대하지 못하니, 공민왕이 노하여 그를 목 베고자 하였으나, 임금에 가까이 있는 신하 유숙(柳淑)이 변명하여 구원해 줌에 힘입어 죽음을 면하게 되었다. 갑진년에 전법 총랑(典法摠郞)에 임명되었으나, 신돈(辛旽)이 국정(國政)을 맡으매, 자기에게 따르지 않는다는 이유로써 밖으로 내보내어 강릉 부사(江陵府使)로 삼았는데, 은덕(恩德)을 베푼 정사가 있었으므로 그가 간 뒤에 백성들이 생사당(生祠堂)[39]을 세워 제사지내었다. 신해년에 신돈(辛旽)이 실패되매 일으켜 사헌 시사(司憲侍史)에 임명하고, 좌사의(左司議)와 우상시(右常侍)를 거쳐 대사헌(大司憲)에 임명되었으며, 밀직사(密直司)에 들어와서 제학(提學)이 되고, 정당 문학(政堂文學)으로 승진되었으며, 또 대사헌을 겸직하게 되었다. 임술년에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유양(柳亮) 등 33인을 뽑았으며, 벼슬이 문하 찬성사 판삼사사(門下贊成事判三司事)까지 이르렀다. 종원은 성품이 자상(慈詳)하고 말이 적었으며, 거처하는 정자(亭子)를 칭호하여 쌍청정(雙淸亭)이라 하였다. 사람을 접대하기를 공손하게 하고, 세상의 형편대로 따라 하여 그 몸을 보전하였다. 그러나 일을 감당하는 데 서툴러 이르는 곳마다 한 일이 없었다. 건국 초기에 이르러 임금께서 고려조의 기로(耆老)인 이유로 발탁하여 판문하부사(判門下府事)로 삼았다. 병으로 졸(卒)하니 나이 71세였다. 임금이 3일 동안 조회를 정지하고, 좌정승(左政丞) 조준(趙浚)을 보내어 빈궁(殯宮)에 제사지내고 장사(葬事)를 다스리게 하였으며, 문간(文簡)이란 시호를 내리었다. 아들 안중온(安仲溫)·안경량(安景良)·안경공(安景恭)은 모두 과거에 올라, 중온과 경량은 벼슬이 중추(中樞)에 이르고, 경공은 개국 공신에 참여하여 흥녕군(興寧君)에 봉해졌으며, 안경검(安景儉)은 벼슬이 공조 전서(工曹典書)에 이르렀다.


3月 26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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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의 사신을 호송하던 요동 군사가 의주 사람 이견실 등을 잡아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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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乙丑/西北面都巡問使報: “朝廷使臣至義州, 其護送遼東軍, 虜我義州人李堅實、姜寶鼎、金龍等以歸。”

서북면 도순문사(都巡問使)가 보고하였다.

"조정(朝廷)의 사신이 의주(義州)에 이르렀는데, 그를 호송(護送)하던 요동(遼東)군사가 우리 나라의 의주(義州) 사람인 이견실(李堅實)·강보정(姜寶鼎)·김용(金龍) 등을 사로잡아 가지고 돌아갔습니다."


3月 27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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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은·남재·조임·정총·하윤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고, 박위를 파직시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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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丙寅/以南誾爲三司右僕射, 南在參贊門下府事, 趙琳知門下府事, 鄭摠政堂文學, 河崙簽書中樞院事, 陳忠貴商議中樞院事兼義州等處都兵馬使, (李龜鑯)〔李龜鐵〕商議中樞院事兼定州等處都兵馬使, 趙英茂商議中樞院事兼江界等處都兵馬使, 曺彦商議中樞院事、兼泥城等處都兵馬使。 朴葳罷。

남은(南誾)을 삼사 우복야(三司右僕射)로, 남재(南在)를 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로, 조임(趙琳)을 지문하부사(知門下府事)로, 정총(鄭摠)을 정당 문학(政堂文學)으로, 하윤을 첨서중추원사(僉書中樞院事)로, 진충귀(陳忠貴)를 상의중추원사(商議中樞院事) 겸 의주 등처 도병마사(義州等處都兵馬使)로, 이귀철(李龜鐵)을 상의중추원사 겸 정주 등처 도병마사(定州等處都兵馬使)로, 조영무(趙英茂)를 상의중추원사 겸 강계 등처 도병마사(江界等處都兵馬使)로, 조언(曺彦)을 상의중추원사 겸 이성 등처 도병마사(泥城等處都兵馬使)로 삼고, 박위(朴葳)는 파면시켰다.


제주에 교수관을 두어 토관의 자제를 교육시키고, 상경시위자에게 천호 등의 관직을 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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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都評議使司上言: “濟州未嘗置學校, 其子弟不入仕於國, 故不識字不知法制, 各所千戶, 率皆愚肆作弊。 乞自今置敎授官, 土官子弟十歲以上, 皆令入學, 養成其材, 許赴國試, 又以赴京侍衛從仕者, 許爲千戶百戶, 以給箚付。” 上從之。

도평의사사에서 상언(上言)하였다.

"제주(濟州)에는 일찍이 학교를 설치하지 아니하고, 그 자제(子弟)들이 나라에 들어와 벼슬하지 아니한 까닭으로, 글자를 알지 못하고 법제(法制)도 알지 못하여, 각소(各所)의 천호(千戶)들이 대개가 모두 어리석고 방사(放肆)하여 폐해를 끼치오니, 원하옵건대, 지금부터는 교수관(敎授官)을 두고 토관(土官)[40]의 자제(子弟) 10세 이상을 모두 입학(入學)시켜, 그 재간을 양성하여 국가의 시험에 응시하게 하고, 또 서울에 와서 시위(侍衛)하고 종사(從仕)하는 사람은 천호(千戶)·백호(百戶)가 되게 하여 차부(箚付)[41]를 주게 하소서."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三年 四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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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月 1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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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리가 내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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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庚午朔/隕霜。

서리가 내리었다.


돌 던지는 놀이꾼들을 모집해 척석군이라 명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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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命募城中擲石戲者, 名擲石軍。

명하여 성중(城中)의 돌 던지는 놀이[擲石戲]를 하는 사람을 모집하여 척석군(擲石軍)이라 이름하였다.


삼성에서 왕씨를 제거토록 청하니, 윤허치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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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臺諫、刑曹同狀, 請去王氏, 上曰: “諸王氏令聚一處完護。 其歸義君王瑀在麻田奉先祖祀, 勿幷論。”

대간과 형조에서 소장(疏狀)을 같이 올려 왕씨(王氏)를 제거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말하였다.

"여러 왕씨들을 한 곳에 모이게 하여 완호(完護)하고 그 귀의군(歸義君) 왕우(王瑀)는 마전군(麻田郡)에 있으면서 선조(先祖)의 제사를 받들고 있으니 함께 논하지 말라."


4月 3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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척석군을 사열하고 조기에게 거느리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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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壬申/上坐東涼廳, 召閱擲石軍, 命中樞趙琦領之。

임금이 동량청(東涼廳)에 앉아 척석군(擲石軍)을 불러 사열하고, 중추(中樞) 조기(趙琦)에게 명하여 이들을 거느리게 하였다.


사슴이 선의문에 들어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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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麞入宣義門。

노루가 선의문(宣義門)에 들어왔다.


봄·가을로 무예를 강습하여 취재하고 훈련관에서 도시를 보아 녹용토록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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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司宰少監宋得師上書曰: “武藝不可不講。 願令中外, 每年春秋講習, 依文科鄕試例取才, 上訓鍊觀都試, 一等超等, 二等次第錄用, 則兵備之計, 得矣。 唐李抱眞爲澤潞節度使, 給民弓矢, 使農隙習射, 至歲暮都試行賞罰。 由是澤潞之兵, 爲諸道最。” 上命施行。

사재 소감(司宰少監) 송득사(宋得師)가 상서(上書)하였다.

"무예(武藝)는 강습하지 않을 수 없사오니 중외(中外)로 하여금 해마다 봄·가을에 강습하게 하고, 문과(文科) 향시(鄕試)의 예(例)에 따라 취재(取才)하여 훈련관(訓鍊觀)에 올려서 도시(都試)[42]를 보아, 1등(等)은 등급을 뛰어 올려 녹용(錄用)하고, 2등은 차례대로 녹용(錄用)하게 한다면, 병비(兵備)의 계책이 성취될 것입니다. 당(唐)나라 이포진(李抱眞)이 택로 절도사(澤潞節度使)가 되어 백성들에게 활과 화살을 주어 농한기(農閒期)에 활쏘기를 익히게 하고, 세말(歲末)에 가서 도시(都試)를 보고 상벌(賞罰)을 시행하니, 이로 인하여 택로(澤潞)의 군사가 여러 도(道)에서 제1이 되었던 것입니다."

임금이 명하여 시행하게 하였다.


4月 4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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흠차 내사가 말 1만필과 환관의 가족들을 보내라는 선유와 자문을 가지고 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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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癸酉/欽差內史崔淵、陳漢龍、金希裕、金禾等, 持左軍都督府咨來, 上率百官迎于宣義門外。 至闕, 淵等傳宣諭, 馬一萬匹、閹人及金完貴家小與將來。 上跪聽訖, 叩頭問聖躬萬福, 叩頭受左軍都督府咨。 其咨曰:

洪武二十七年二月二十四日, 本府左都督楊文等官, 於奉天門, 欽奉聖旨: “近日澉浦等處守禦官軍, 節次解到賊人胡德等五名供: ‘係高麗守把官差來, 沿海刦掠, 打聽消息。’ 恁左軍文書裏, 開寫各人姓名, 差人去, 說與朝鮮國王某知道, 敎照名解來。” 欽此, 本府今將賊人胡德等供出後項人數, 開寫移咨, 欽依一名名解來, 合取賊人二十五名。

上與使臣行禮訖, 設宴。 淵等, 皆本國閹人。

흠차 내사(欽差內史) 최연(崔淵)·진한룡(陳漢龍)·김희유(金希裕)·김화(金禾) 등이 좌군 도독부(左軍都督府)의 자문(咨文)을 가지고 오므로, 임금이 백관(百官)을 거느리고 선의문(宣義門) 밖에서 맞이하여 대궐에 이르니, 최연 등이 선유(宣諭)를 전하였다.

"말 1만 필과 엄인(閹人)[43] 및 김완귀(金完貴)의 가족을 거느리고 오라 합니다."

임금이 꿇어앉아 이를 듣고 나서 머리를 조아리고 황제의 옥체(玉體)가 만복(萬福)하신가를 묻고는, 머리를 조아리면서 좌군 도독부(左軍都督府)의 자문(咨文)을 받았다. 그 자문은 이러하였다.

"홍무(洪武) 27년(1394) 2월 24일에 본부(本部)의 좌도독(左都督) 양문(楊文) 등 관원이 봉천문(奉天門)에서 성지(聖旨)를 받았는데, 칙지에, ‘근일 감포(澉浦) 등지에서 수어(守禦)하는 관군(官軍)이 절차(節次)에 의하여, 잡아 온 적인(賊人) 호덕(胡德) 등 5명이 공술(供述)하기를, 「고려의 수파관(守把官)이 파견하여 연해(沿海) 지방을 겁략(劫掠)하고 소식을 듣게 하였습니다.」 하므로, 이와 같이 좌군(左軍) 문서(文書) 속에 각인의 성명(姓名)을 써서 사람을 보내어 조선 국왕 아무에게 말하여 알게 하니, 이름을 대조하여 잡아 오게 하라.’ 하였으므로, 삼가 본부(本府)에서 지금 적인(賊人) 호덕(胡德) 등이 공술(供述)한 후항(後項)의 사람 수효를 낱낱이 써서 자문(咨文)을 보내니, 삼가 1명의 이름에 의거하여 잡아 온다면 당연히 적인(賊人) 25명을 취(取)하게 될 것입니다."

임금이 사신과 더불어 행례(行禮)를 마치고 난 후에 잔치를 베풀었다. 최연 등은 모두 우리 나라의 엄인(閹人)이었다.


4月 6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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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헌 관마소를 설치하고 관리들에게 차등적으로 말을 바치도록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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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乙亥/置進獻官馬所, 令時散各品出馬有差。

진헌 관마소(進獻官馬所)를 설치하고 시직(時職)[44]·산직(散職) 각품(各品)으로 하여금 말을 차등 있게 내도록 하였다.


4月 9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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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사 진한룡의 본향인 임주를 부로 승격시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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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戊寅/陞林州爲府。 漢龍以鄕請也。

임주(林州)를 승격시켜 부(府)로 삼았으니, 진한룡(陳漢龍)이 본향(本鄕)이라 하여 청하였기 때문이었다.


왜선 3척을 섬멸한 전라 수군 첨절제사 김빈길에게 물품을 하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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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全羅道水軍僉節制使金贇吉獲倭三艘, 遣使賜宮醞、綺絹、銀帶、銀盂。

전라도 수군 첨절제사(水軍僉節制使) 김빈길(金贇吉)이 왜적(倭賊)의 배 3척을 잡으니, 임금이 사자(使者)를 보내어 궁온(宮醞)과 무늬 있는 비단과 명주·은대(銀帶)·은사발[銀盂]를 내려 주었다.


4月 10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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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에서 남은 왕씨 일족을 제거하기를 청하는 상소를 올리니 윤허치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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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己卯/臺諫、刑曹上疏曰:

臣等近以去王氏事, 屢煩聰聽, 未獲兪允, 各自隕越。 竊惟殿下之於王氏, 處之以至公至正, 無一毫嫌猜之心, 雖湯、武之德, 無以加矣, 而王氏乃不顧此, 反以生釁。 向者連章請罪, 支黨伏誅, 餘輩聚居各處, 如有緩急, 恐生不測之患。 《傳》曰: “人窮則謀。” 願殿下深慮之, 斷以大義, 卽令有司執恭讓君父子幷諸王氏, 一皆永絶, 宗社幸甚。

上曰: “三官同狀, 予已禁之, 何得復爾?” 遂留中。

대간과 형조에서 상소하였다.

"신 등이 요사이 왕씨를 제거하자는 일로써 여러 번 총청(聰聽)을 번거롭게 하였사오나, 윤허를 얻지 못하였으므로, 각기 스스로 낭패를 당했사옵니다. 가만히 생각하옵건대, 전하께서 왕씨에게 지극히 공평하고 바른 도리로써 처우(處遇)하여 조금도 싫어하고 시기하는 마음이 없으시니, 비록 탕왕(湯王)과 무왕(武王)의 덕이라도 이보다 더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하온데 왕씨는 이를 돌아보지 않고 도리어 흔단(釁端)을 일으켰습니다. 지난번에 장소(章疏)에 연명(連名)하여 죄주기를 청하여, 지당(支黨)은 참형(斬刑)을 당했사오나, 남은 무리들은 각처에 모여 있으니, 만약에 위급한 일이 있으면 불측(不測)한 환(患)이 발생할까 두렵습니다. 전(傳)에 이르기를, ‘사람이 궁지에 처하면 계획을 세운다.’ 하였으니, 원하옵건대, 전하께서는 깊이 이를 염려하여 대의(大義)로써 결단하여, 즉시 유사(有司)로 하여금 공양군(恭讓君) 부자(父子)와 여러 왕씨를 잡아서 일체 모두 영절(永絶)하신다면 종사(宗社)에 매우 다행하겠습니다."

"세 관청에서 소장(疏狀)을 같이 올리는 것은 내가 이미 금지시켰는데, 어찌 다시 그렇게 하는가?"

임금이 말하고는 드디어 대궐 안에 머물러 두었다.


4月 11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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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당에서 농사를 장려하는 방안을 아뢰니 윤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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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庚辰/都評議使司啓曰: “農者食之本, 軍國所需係焉。 田疇荒蕪, 倉廩虛竭, 則雖有金湯之固、兵革之精, 亦將何用! 乞供上祭祀賓客之用及京外不得已經費外, 祀典不載祭祀及雜汎費用, 一皆禁斷。 且前年早旱晩水, 禾穀大損, 加以築城之役, 民失秋耕。 今春又因其役, 流移失業者頗多, 京城雖所當築, 有妨於農。 乞當農隙, 雙丁則出一丁, 單丁則幷出一丁, 以畢其役。 今後農時則事干叛逆及防倭捕盜外, 如奴婢相爭、宿債追償等, 雜濫不緊之務, 一皆禁斷, 全務農事。 竊聞州縣守令, 不爲用心勸農, 以致公私俱乏。 乞令各道都觀察使以時考察, 游手者歸農, 無食者, 先給義倉之粟, 疾病不能耕種者, 令隣里及族人相助耕種, 勿令失時。 其多占田地, 互相陳荒, 禁他人耕作者, 十負笞一十, 每十負加一等, 罪止杖八十, 許於無田及田少者給耕, 凡可以勸課之事, 一皆擧行。 守令殿最, 以墾田多少, 分爲三等, 以憑黜陟。” 上從之。

도평의사사에서 아뢰었다.

"농사는 식량의 근본이므로 군사(軍事)와 국가의 수용(需用)이 매여 있으니, 전지(田地)가 황무(荒蕪)하고 창고가 텅 비게 된다면, 비록 금성 탕지(金城湯池)[45]의 튼튼함과 무기(武器)·갑주(甲胄)의 예리(銳利)함이 있더라도 또한 장차 어디에 쓰겠습니까? 원하옵건대, 공상(供上)·제사(祭祀)·빈객(賓客)의 용도(用度)와 경외(京外)의 부득이한 경비 이외에는, 사전(祀典)에 기재되지 아니한 제사와 잡범(雜汎)한 비용은 일체 모두 금단(禁斷)하게 하소서. 또 지난해에는 이르게 한재(旱災)가 있고 늦게 수재(水災)가 있어 볏곡이 크게 손실되었으며, 게다가 성을 쌓는 역사로서 백성들이 가을갈이를 실기(失期)했으며, 금년 봄에도 또한 그 역사로 인하여 이리저리 유이(流移)하여 직업을 잃은 사람이 자못 많아졌습니다. 서울의 성은 비록 마땅히 쌓아야만 될 것이지만 농사에 방해가 되오니, 원하옵건대, 농한기(農閒期)에는 장정(壯丁)이 두 사람이면 장정 한 사람을 내보내고, 장정이 한 사람이면 두 사람이 아울러 한 사람을 내보내어 그 역사(役事)를 마치게 할 것이오며, 금후에는 농사철이 되면 일이 반역(叛逆)과 왜적(倭賊)의 방어, 도적을 잡는 데에 관계된 것 외에, 노비(奴婢)의 상쟁(相爭)이나 묵은 부채(負債)의 추상(追償) 등, 잡람(雜濫)하고 긴요하지 아니한 사무는 일체 금단(禁斷)하고 오로지 농사에만 힘쓰게 하소서.

가만히 듣건대, 주현(州縣)의 수령(守令)들이 마음을 써 농사를 권장하지 아니하여 공사(公私)가 모두 궁핍(窮乏)하게 되었다 하오니, 원하옵건대, 각도의 관찰사로 하여금 때때로 고찰(考察)하게 하여, 놀고 있는 사람은 농사에 돌아가게 하고, 식량이 없는 사람은 먼저 의창(義倉)의 곡식을 주고, 병이 나서 경종(耕種)하지 못하는 사람은 이웃 사람[隣里]과 족인(族人)으로 하여금 서로 도와서 경종하게 하여 시기를 잃지 말게 하며, 그 전지(田地)를 많이 차지하여 서로 묵히면서 다른 사람이 경작(耕作)하는 것을 금하는 사람은 10부(負)에 태형(笞刑) 10대를 집행하고, 매 10부(負)마다 1등을 가하여 죄가 장형(杖刑) 80대에 그치게 하되, 전지가 없는 사람과 전지가 적은 사람에게 주어 경작하게 하고, 무릇 백성에게 농사를 권장하는 일은 일체 모두 거행하고, 수령(守令)의 전최(殿最)는 전지의 개간이 많고 적은 것으로써 3등으로 나누어, 무능한 사람을 물리치고 유능한 사람을 등용시키는 데 빙고(憑考)하게 하소서."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4月 14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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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씨 일족을 제거하기 위해 관원들을 삼척, 강화, 거제도에 보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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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癸未/臺諫、刑曹進曰: “臣等願允前日之請。” 上曰: “三官同章, 已曾禁之, 不從何耶?” 初臺諫、刑曹雖屢上疏請去王氏, 上心不忍, 不允其請。 至是, 伏閤力爭者累日, 上敎都評議使司曰: “去王氏, 予所不忍。 宜集大小各司、閑良、耆老, 各陳可否, 實封進呈。” 都評議使司會百司、耆老於壽昌宮, 告之曰: “前朝王氏, 天命已去, 人心已離, 自速天討。 殿下以好生之德, 保全性命, 恩德至重, 而王氏等反生疑貳, 潛謀不軌, 於法不容。 其區處王氏者, 實封啓聞。” 於是, 兩府、各司、耆老等皆以爲: “盡去王氏, 以防後患。” 惟書雲、典醫、料物庫員等數十人言: “宜流海島。” 命使司更議以聞。 使司啓曰: “宜從衆議。” 上從之。 傳旨曰: “王氏區處, 一依各司實封, 以王瑀三父子奉祀先祖, 特宥之。” 遣中樞院副使鄭南晋、刑曹議郞咸傅霖于三陟, 刑曹典書尹邦慶、大將軍吳蒙乙于江華, 刑曹典書孫興宗、僉節制使沈孝生于巨濟島。

대간과 형조에서 나아와 아뢰었다.

"신 등은 전일의 청한 일을 윤허하시기를 원하옵니다."

임금이 말하였다.

"세 관청에서 장소(章疏)를 같이 올리는 것을 이미 일찍이 금했는데, 따르지 않는 것은 무슨 이유인가?"

처음에 대간과 형조에서 비록 여러 번 소(疏)를 올려 왕씨(王氏)를 제거하기를 청하였으나, 임금이 마음으로 차마 할 수 없어서 그 청을 윤허하지 아니했더니, 이때에 이르러 대궐 문앞에 엎드려 힘써 간(諫)한 지가 여러 날이 되었다. 임금이 도평의사사에 명하였다.

"왕씨를 제거하는 일은 내가 차마 할 수 없는 바이니, 마땅히 대소(大小) 각 관사(官司)와 한량(閑良)·기로(耆老)를 모아서 각기 가부(可否)를 진술하게 하여 단단히 봉하여 바치게 하라."

도평의사사에서 모든 관사와 기로들을 수창궁에 모아서 알리기를,

"전조(前朝)의 왕씨는 천명(天命)이 이미 가버리고 인심이 이미 떠나서, 스스로 하늘이 하는 주벌(誅伐)을 초래하였는데, 전하께서는 호생지덕(好生之德)으로써 생명을 보전해 주었으니 은덕이 지극히 중하온데도, 왕씨들은 도리어 의심을 내어 몰래 반역을 도모했으니 법에 용납될 수가 없다. 그 왕씨를 구처(區處)할 일을 단단히 봉하여 계문(啓聞)하라."

하니, 이에 양부(兩府) 각 관사와 기로들이 모두 말하기를,

"왕씨를 모두 제거하여 후일의 근심을 막게 하소서."

하였는데, 다만 서운관(書雲觀)·전의(典醫)·요물고(料物庫)의 관원 수십 인만이 마땅히 해도(海島)에 귀양보내야 된다고 하므로, 도평의사사에 명하여 다시 의논하여 아뢰게 하였다. 도평의사사에서,

"마땅히 여러 사람의 의논에 따라야 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라 전지(傳旨)하였다.

"왕씨를 구처할 일은 한결같이 각 관사(官司)의 봉해 올린 글에 의거하게 하나, 왕우(王瑀)의 삼부자(三父子)는 선조(先祖)를 봉사(奉祀)하는 이유로써 특별히 사유(赦宥)한다."

중추원 부사(中樞院副使) 정남진(鄭南晉)과 형조 의랑(刑曹議郞) 함부림(咸傅霖)을 삼척(三陟)에 보내고, 형조 전서(刑曹典書) 윤방경(尹邦慶)과 대장군 오몽을(吳蒙乙)을 강화(江華)에 보내고, 형조 전서(刑曹典書) 손흥종(孫興宗)과 첨절제사(僉節制使) 심효생(沈孝生)을 거제도(巨濟島)에 보내었다.


왜선 1척을 섬멸한 경상도 수군 첨절제사 안처선에게 물품을 하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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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慶尙道水軍僉節制使安處善捕倭一艘, 遣使賜宮醞綺絹。

경상도 수군 첨절제사 안처선(安處善)이 왜적의 배 1척을 잡으니, 사자(使者)를 보내어 궁온(宮醞)과 무늬 있는 비단과 명주를 내려 주었다.


내사 최연 등이 근친하기 위해 고향으로 내려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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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使臣崔淵等歸覲其鄕。

사신 최연(崔淵) 등이 그 본향(本鄕)에 돌아가서 어버이를 뵈었다.


4月 15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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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방경 등이 강화에 있던 왕씨 일족을 강화 나루에 빠뜨려 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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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甲申/尹邦慶等投王氏于江華渡。

윤방경(尹邦慶) 등이 왕씨(王氏)를 강화 나루[江華渡]에 던졌다.


도당에서 호조 급전사의 전제에 의거하여 아뢰니 윤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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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都評議使司具戶曹給田司田制, 狀申, 上允之。

도평의사사에서 호조 급전사(戶曹給田司)의 전제(田制)를 갖추어 장계(狀啓)로 아뢰니, 임금이 그대로 윤허하였다.


4月 16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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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수군 절제사 이희충을 좌도에, 최칠석을 우도에 보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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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乙酉/遣京畿水軍節制使李希忠于左道, 崔七夕于右道。

경기 수군 절제사(水軍節制使) 이희충(李希忠)을 좌도(左道)에 보내고, 최칠석(崔七夕)을 우도(右道)에 보내었다.


4月 17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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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박이 내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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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丙戌/雨雹。

우박이 내리었다.


전 충주 절제사 황군서를 제주에 보내 선위케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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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遣前忠州節制使黃君瑞, 宣慰濟州。

전 충주 절제사(忠州節制使) 황군서(黃君瑞)를 보내어 제주(濟州)에 가서 선위(宣慰)하게 하였다.


삼척의 공양군에게 교지를 전하고, 그와 두 아들을 교살시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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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鄭南晋等至三陟, 傳旨於恭讓君曰:

臣民推戴, 以予爲君, 實惟天數。 令君就居關東, 其餘同姓, 各歸便處, 保安生業。 今東萊縣令金可行、鹽場官朴仲質等欲圖不軌, 以君及親屬之命, 卜於盲人李興茂, 事覺伏罪。 君雖不知, 事至如此, 臺諫法官, 連章上請, 至于十二次, 累日固爭, 大小臣僚又上書爭之, 予不獲已, 勉從其請, 君其知悉。

遂絞之, 及其二子。

정남진 등이 삼척(三陟)에 이르러 공양군(恭讓君)에게 전지하였다.

"신민(臣民)이 추대하여 나를 임금으로 삼았으니 실로 하늘의 운수이요. 군(君)을 관동(關東)에 가서 있게 하고, 그 나머지 동성(同姓)들도 각기 편리한 곳에 가서 생업(生業)을 보안(保安)하게 하였는데, 지금 동래 현령(東萊縣令) 김가행(金可行)과 염장관(鹽場官) 박중질(朴仲質) 등이 반역을 도모하고자 하여, 군(君)과 친속(親屬)의 명운(命運)을 장님 이흥무(李興茂)에게 점쳤다가, 일이 발각되어 복죄(伏罪)하였는데, 군(君)은 비록 알지 못하지만, 일이 이 같은 지경에 이르러, 대간(臺諫)과 법관(法官)이 장소(章疏)에 연명(連名)하여 청하기를 12번이나 하였으되, 여러 날 동안 굳이 다투[固爭]고, 대소 신료(大小臣僚)들이 또 글을 올려 간(諫)하므로, 내가 마지못하여 억지로 그 청을 따르게 되니, 군(君)은 이 사실을 잘 아시오."

마침내 그를 교살(絞殺)하고 그 두 아들까지 교살하였다.


4月 19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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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부국 강병의 방법과 임적 응변의 계책을 상고하여 보고토록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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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戊子/命藝文館、成均館、校書監, 考諸歷代經史所載富國强兵之術, 與夫臨敵應變之策, 開寫以聞。

예문관·성균관·교서감(校書監)에 명하여 역대(歷代) 경사(經史)에 기재된 부국 강병(富國强兵)의 방법과 임적 응변(臨敵應變)의 계책을 상고하여 써서 아뢰게 하였다.


4月 20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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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흥종 등이 거제도에 있던 왕씨 일족을 바다에 빠뜨려 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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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己丑/孫興宗等投王氏于巨濟之海。

손흥종(孫興宗) 등이 왕씨(王氏)를 거제(巨濟) 바다에 던졌다.


중앙과 지방에 왕씨의 남은 일족을 찾아 모두 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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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令中外大索王氏餘孼, 盡誅之。

중앙과 지방에 명령하여 왕씨(王氏)의 남은 자손을 대대적으로 수색하여 이들을 모두 목 베었다.


감무를 두었던 삼기현을 군으로 승격시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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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陞三歧監務爲郡。

삼기 감무(三岐監務)를 승격시켜 군(郡)으로 삼았다.


4月 21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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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묘의 공사를 중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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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庚寅/罷宗廟之役。

종묘(宗廟)의 역사(役事)를 그만두었다.


4月 22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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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당에서 예조의 무관이 접견하는 예도에 의거하여 아뢰니 윤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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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辛卯/都評議使司具禮曹詳定諸衛上將軍至尉正相接禮度以聞, 上從之。

도평의사사에서, 예조에서 상정(詳定)한 제위(諸衛)의 상장군(上將軍)에서 위정(尉正)에 이르기까지의 서로 접견하는 예도(禮度)를 갖추어 아뢰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정도전이 임금에게 매일 장상들을 불러 군국의 일을 의논하기를 청하니 윤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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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判三司事鄭道傳上言: “昔在成周, 人心忠厚, 然武王有疾, 而周公以謂其勿穆卜, 身欲代死, 蓋恐新造之邦, 人心搖動也。 今殿下不出聽政, 臣庶以爲疾病彌留。 願殿下每早朝, 必坐正殿, 召諸將相, 共議軍國之事。” 上嘉納之。

판삼사사(判三司事) 정도전(鄭道傳)이 상언(上言)하였다.

"옛날 성주(成周)[46] 시대에는 인심이 충후(忠厚)하였지마는, 그러나 무왕이 병환이 났는데, 주공(周公)이 말하기를, ‘삼가 점치지 말라.’ 하고는, 자신이 무왕을 대신하여 죽고자 하였으니, 대개 새로 건국된 나라에 인심(人心)이 요동할까 두려워한 때문입니다. 지금 전하께서 나와 정사(政事)를 청단(聽斷)하지 않으시니, 신민(臣民)들은 병환이 오래 낫지 아니하여 위독하다고 여길 것입니다. 원하옵건대, 전하께서는 매양 이른 아침에 반드시 정전(正殿)에 앉아서 여러 장상(將相)들을 불러 군국(軍國)의 일을 함께 의논하소서."

임금이 옳게 여겨 이 말을 받아들였다.


4月 25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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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방을 침입한 사람들을 압송하라는 좌군 도독부의 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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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甲午/欽差內史黃永奇等三人齎左軍都督府咨以來, 設綵棚儺禮, 上率百官, 出宣義門, 迎入壽昌宮。 其咨曰:

洪武二十七年三月二十日, 本府僉都督李增枝等官, 於奉天門欽奉聖旨: “近日澉浦等處守禦官軍, 節次解到賊人胡德等五名, 供: ‘係高麗各處守把官差來, 沿海刦掠, 打聽消息。’ 恁左軍文書裏, 將續供出來的人幷前日去的人姓名, 開寫去, 敎【上諱。】長男或次男, 親自解來。” 欽此, 本府除欽遵外, 今將後項合取人數開坐, 移咨照驗, 欽依照名解來。 一合取四十二名, 先次供出人二十五名, 今次續供出人一十七名。 總兵雲、萬戶原成、東寧誘引女眞人三名, 俱係西北面土城碧屯口子住, 百戶金成、品官林擧輪、外郞李君必、千戶金完貴家小一十三名。

右永奇等三人, 皆我國所遣閹人也。

흠차 내사(欽差內史) 황영기(黃永奇) 등 3인이 좌군 도독부(左軍都督府)의 자문(咨文)을 가지고 오니, 채붕(綵棚)과 나례(儺禮)를 설치하고, 임금이 백관(百官)을 거느리고 선의문(宣義門)에 나가서 맞이하여 수창궁에 들어왔다. 그 자문은 이러하였다.

"홍무(洪武) 27년 3월 20일에 본부(本府)의 첨도독(僉都督) 이증지(李增枝) 등 관원이 봉천문(奉天門)에서 성지(聖旨)를 받았는데, ‘근일에 감포(澉浦) 등지에서 수어(守禦)하는 관군(官軍)이 절차(節次)에 의하여 잡아 온 적인(賊人) 호덕(胡德) 등 5명이 공술(供述)하기를, 「고려 각처의 수파관(守把官)이 보내어 연해(沿海)지방을 겁략(劫掠)하고 소식을 듣게 하였습니다.」 하므로, 이와 같이 좌군(左軍) 문서(文書) 속에 공출(供出)해 온 사람과 전일에 간 사람의 성명(姓名)까지 써서 가지고 가서, 이성계(李成桂)의 장남(長男)이나 혹은 차남(次男)을 시켜서 친히 잡아 가지고 오게 하라.’ 하였습니다. 본부(本府)에서 준행(遵行)할 것을 제외하고도 지금 후항(後項)에 당연히 취(取)해야 될 사람의 수효를 낱낱이 열기(列記)하여 자문(咨文)을 보내어 조회하니, 조회한 이름에 의거하여 잡아 올 것입니다. 모두 합해 42명, 먼젓번에 공출(供出)할 25명, 이번에 잇달아 공출할 사람 17명, 총병(總兵) 운(雲)과 만호(萬戶) 원성(原成)이 동녕(東寧)에서 유인한 여진인(女眞人) 3명이 모두 서북면(西北面) 토성 벽둔 구자(土城碧屯口子)에 거주한 것과, 백호(百戶) 김성(金成)·품관(品官) 임거륜(林擧輪)·외랑(外郞) 이군필(李君必)·천호(千戶) 김완귀(金完貴)의 가족 13명입니다."

위의 황영기 등 3인은 모두 우리 나라에서 보낸 엄인(閹人)이었다.


4月 26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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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씨의 성을 쓰지 못하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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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乙未/令前朝賜姓王氏者, 皆從本姓。 凡姓王者, 雖非前朝之裔, 亦從母姓。

고려 왕조에서 왕씨(王氏)로 사성(賜姓)이 된 사람에게는 모두 본성(本姓)을 따르게 하고, 무릇 왕씨의 성을 가진 사람은 비록 고려 왕조의 후손이 아니더라도 또한 어머니의 성(姓)을 따르게 하였다.


4月 28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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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흥군에 우박이 내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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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丁酉/雨雹驪興郡。

여흥군(驪興郡)에 우박이 내렸다.


내사 황영기 등이 근친하기 위해 고향에 내려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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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黃永奇等三人歸覲其鄕。

황영기(黃永奇) 등 3인이 그 본향(本鄕)에 돌아가서 어버이를 뵈었다.


정윤 이영의 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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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正尹英卒, 停朝巿三日。 英, 上庶弟也。 群臣會弔。

정윤(正尹) 영(英)이 졸(卒)하니, 3일 동안 조회와 저자[市]를 정지하였다. 영(英)은 임금의 서제(庶弟)이다. 여러 신하들이 모여서 조문(弔問)하였다.


4月 29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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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왕의 기일이므로 왕비와 함께 경천사에 가서 재를 올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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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戊戌/桓王(忌晨)〔忌辰〕。 上與中宮, 幸敬天寺, 安桓王眞, 仍設齋, 講《華嚴三昧懺》。

환왕(桓王)의 기신(忌晨)이므로, 임금이 중궁(中宮)과 더불어 경천사(敬天寺)에 거둥하여 환왕(桓王)의 어진(御眞)을 봉안(奉安)하고, 이내 재(齋)를 베풀고 《화엄삼매참(華嚴三昧懺)》을 강(講)하게 하였다.


三年 五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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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月 1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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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비와 함께 경천사에서 돌아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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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己亥朔/上與中宮, 至自敬天寺。

임금이 중궁과 더불어 경천사에서 돌아왔다.


5月 3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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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 새끼를 후원에서 기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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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辛丑/有獻熊兒者, 令畜後苑。

곰새끼를 바치는 사람이 있으므로 후원(後苑)에 기르게 하였다.


5月 5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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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량청에 앉아 척석희를 구경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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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癸卯/上坐東涼廳, 觀擲石戲。

임금이 동량청(東涼廳)에 앉아서 척석희(擲石戲)를 구경하였다.


5月 6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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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뭄으로 종묘와 사직에 기우제를 지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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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甲辰/以旱禱雨于宗廟、社稷。

한재(旱災) 때문에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에 비 오기를 빌었다.


5月 8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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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뭄으로 절과 신사에 기우제를 지내고, 시장을 옮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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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丙午/以旱徧禱于佛宇、神祠, 徙巿。

한재(旱災) 때문에 불우(佛宇)와 신사(神祠)에 두루 빌고, 저자[市]를 옮기었다.


5月 9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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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뭄으로 죄인을 사유시키다. 왕사를 청해 기우하고, 소격전에서 초제를 지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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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丁未/以旱宥二罪以下囚。 上請王師祈雨, 醮太一于昭格殿, 祈雨。

한재(旱災) 때문에 이죄(二罪) 이하의 죄수를 사유(赦宥)하였다. 임금이 왕사(王師)를 청하여 비 오기를 빌게 하고, 태일성(太一星)을 소격전(昭格殿)에서 초제(醮祭)하여 비 오기를 빌었다.


5月 11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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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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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己酉/雨。

비가 왔다.


5月 12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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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비가 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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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庚戌/大雨。

큰비가 왔다.


5月 14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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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대 공급지인 조은도를 재상에게 절급한 급전사 장무를 순군옥에 가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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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壬子/命繕工監, 造涼廳補簷。 繕工啓曰: “古者, 助隱島屬監, 每秋刈薍, 以供國用。 今給田司屬之科田, 給參贊門下府事鄭熙啓, 涼廳遮陽, 難以薍蓋。” 上曰: “前朝恭讓以此地, 私與其子, 非美事也; 今給田司因屬科田, 不顧國用, 求媚宰相, 非義也。” 卽下給田司掌務李載于巡軍, 使繕工監丞朴子良踏驗。

선공감(繕工監)에 명하여 양청(涼廳)의 보첨(補簷)을 짓게 하니, 선공감에서 아뢰었다.

"옛날에는 조은도(助隱島)가 선공감에 소속되었으므로, 매년 가을에 갈대를 베어서 국가의 용도에 공급하였사오나, 지금은 급전사(給田司)에서 과전(科田)에 이를 소속시켜 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 정희계(鄭熙啓)에게 주었으니, 양청(涼廳)의 차양(遮陽)은 갈대로써 덮기는 어렵겠습니다."

임금이 말하기를,

"고려 왕조의 공양군(恭讓君)이 이 토지를 사사로이 그 아들에게 주었으니 좋은 일이 아닌데, 지금 급전사(給田司)에서 그대로 과전(科田)에 소속시켜서 국가의 용도는 돌보지도 않고 재상(宰相)에게 아첨을 구하니 옳은 일이 아니다."

하고는, 즉시 급전사 장무(掌務) 이재(李載)를 순군옥(巡軍獄)에 내려 가두고, 선공감 승(繕工監丞) 박자량(朴子良)으로 하여금 답험(踏驗)하게 하였다.


5月 15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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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비의 기일이므로 감선하고 조회와 시장을 정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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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癸丑/以皇曾祖妣孝妃(忌晨)〔忌辰〕, 減膳停朝巿。

황증조비(皇曾祖妣) 효비(孝妃)의 기신(忌晨)인 이유로 감선(減膳)하고, 조회와 저자를 정지하였다.


5月 16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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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를 사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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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甲寅/宥李載。

이재(李載)를 사유(赦宥)하였다.


5月 20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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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나라 내사가 돌아가다. 본국 출신의 내사 진한룡이 행패부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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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戊午/使臣崔淵、陳漢龍等還, 獻閹人五名于帝。 上率群臣送至宣義門外, 都評議使司餞于西普通樓。 漢龍醉而發狂, 乃曰: “前來使臣, 待之以厚, 今待我以薄, 何歟?” 遂裂衣踏之曰: “衣此麤衣, 入見於帝, 寧死於此”, 欲自刺, 諸相皆避。 接伴使金立堅進執其臂曰: “天使何爲至此?” 漢龍欲肆毒, 以立堅力强言恭, 乃止。 上遣中樞院事陳忠貴, 齎衣與之。 時帝遣使皆用我國閹人。 使臣到國傳命訖, 卽歸其鄕, 狂悖類此, 州郡苦之。

사신 최연(崔淵)·진한룡(陳漢龍) 등이 중국으로 돌아가니, 엄인(閹人) 5명을 황제에게 바치었다. 임금이 여러 신하들을 거느리고 전송하여 선의문(宣義門) 밖에까지 이르고, 도평의사사에서 서보통루(西普通樓)에서 전송하였다. 한룡(漢龍)이 술에 취해서 발광(發狂)하여 말하기를,

"그전에 온 사신은 대접하기를 후하게 하였는데, 지금 나를 대접하기를 박하게 하는 것은 무슨 이유인가?"

하고, 드디어 옷을 찢어 밟아버리고는,

"이런 누추한 옷을 입고 들어가서 황제를 뵈옵기보다는 차라리 이곳에서 죽겠다."

하면서, 자기의 목을 찌르려고 하니, 여러 재상들이 모두 피하였다. 접반사(接伴使) 김입견(金立堅)이 나아가 그 팔을 잡고서,

"천자의 사신이 어찌 이 지경에 이를 수 있겠습니까?"

하니, 한룡이 독(毒)을 부리려고 하였으나, 입견이 힘이 세고 말이 공순함으로써 그만 그치었다. 임금이 중추원 사(中樞院事) 진충귀(陳忠貴)를 보내어 옷을 가지고 가서 그에게 주게 하였다. 이때 황제가 사신을 보내되 모두 우리 나라 출신의 엄인(閹人)을 쓰게 되니, 사신이 우리 나라에 이르러 명령을 전달하기를 마치고 나면 즉시 그 본향(本鄕)으로 돌아가게 되고, 광패(狂悖)하기가 이와 같으므로 주군(州郡)에서 이를 괴롭게 여기었다.


요동 도사가 잡아간 사람들을 돌려달라는 주문을 보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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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遣司水監宋希靖, 管押金完貴家小赴京具奏曰:

洪武二十七年二月初七日, 有馬軍一十餘名, 到來鴨綠江邊馬山下。 義州萬戶呂稱謂是上國使臣到來, 卽遣州人金伯顔等三名, 過江迎接, 上項馬軍, 却將伯顔等捉去。 又於當年三月二十一日, 有欽差內史四員, 幷遼東百戶軍人三十名, 到來婆娑府江邊, 義州萬戶呂稱過江迎接, 上項護送軍, 却將通事金龍、鎭撫金寶鼎、千戶李堅實等三名捉去。 切念小邦, 臣事聖朝, 略無疑貳, 與遼東都司, 境壤連接, 只隔一江, 凡遇朝廷欽差使命及遼東差使到來, 義州官吏必先過江迎接。 今後邊境百姓, 於使命到來, 心生疑懼, 違忤迎接, 以致得罪。 伏望聖慈, 令遼東都司, 將前項二次捉去金伯顔、李堅實等, 推究放還, 以安小邦邊境民心。

사수 감(司水監) 송희정(宋希靖)을 보내어 김완귀(金完貴)의 가족을 거느리고 중국 서울에 가게 하였다. 주문(奏文)은 이러하였다.

"홍무 27년 2월 초7일에 마군(馬軍) 10여 명이 압록강 가의 마산(馬山) 아래에 이르므로, 의주 만호(義州萬戶) 여칭(呂稱)이 이것을, ‘상국(上國) 사신이 왔다.’고 일컫고는, 즉시 고을 사람 김백안(金伯顔) 등 3명을 보내어 압록강을 건너가서 영접하게 했더니, 위의 마군(馬軍)이 문득 김백안 등을 잡아갔으며, 또 그해 3월 21일 흠차 내사(欽差內史) 4원(員)이 요동 백호(遼東百戶) 군인 30명을 거느리고 파사부(婆娑府) 강가에 도착했으므로, 의주 만호(義州萬戶) 여칭(呂稱)이 강을 건너가서 영접하니, 위의 호송군(護送軍)이 문득 통사(通事) 김용(金龍)·진무(鎭撫) 김보정(金寶鼎)·천호(千戶) 이견실(李堅實) 등 3명을 잡아갔습니다. 간절히 생각하옵건대, 소방(少邦)이 성조(聖朝)를 섬기면서 조금도 의심과 다른 마음이 없었으며, 요동 도사(遼東都司)와는 국경이 연접해 있고 다만 한 강이 막혀 있을 뿐이므로, 무릇 조정(朝廷)에서 파견한 사신과 요동(遼東)에서 파견한 사자(使者)가 도착하면, 의주(義州)의 관리가 반드시 먼저 압록강을 건너가서 영접하였는데, 금후로는 변경의 백성들이 사신이 도착함에 마음속으로 의심과 두려움이 생겨, 영접하는 일에 어김이 있어 죄를 얻게 될 것입니다. 삼가 바라옵건대, 황제께서는 요동 도사(遼東都司)로 하여금 전항(前項)의 두 차례에 잡아간 김백안·이견실 등을 조사해서 돌려보내게 하시어 소방(小邦) 변경(邊境)의 민심(民心)을 편안하게 하소서."


5月 23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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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적이 풍주에 침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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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辛酉/倭寇豐州。

왜적(倭賊)이 풍주(豊州)에 침구하였다.


궁중의 어린 내시들에게 《대학》을 읽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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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使宮中小宦等, 讀《大學》書。

궁중(宮中)의 소환(小宦) 등에게 《대학(大學)》을 읽게 하였다.


경기우도 수군 절제사 최칠석의 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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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京畿右道水軍節制使崔七夕病卒于軍。 七夕, 完山人。 身長大, 時人無與竝者。 每受命騎船, 以備倭寇, 未有獻功, 亦不至敗。 官至密直副使。 子億龍、萬龍。

경기우도 수군 절제사(京畿右道水軍節制使) 최칠석(崔七夕)이 병으로 군중(軍中)에서 졸(卒)하였다. 칠석(七夕)의 본관은 완산(完山)이다. 신체가 장대(長大)하여 그때 사람으로서는 같은 사람이 없었다. 매양 명령을 받아 배를 타고서 왜구(倭寇)를 방비했는데, 공을 바[獻功]친 적도 없었으며 또한 패전하는 데 이르지도 않았다. 벼슬은 밀직 부사(密直副使)에 이르렀다. 아들은 최억룡(崔億龍)과 최만룡(崔萬龍)이다.


5月 28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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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회례사 김거원이 포로되었던 569명을 데리고 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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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丙寅/日本回禮使金巨原與僧梵明, 領被擄本國人五百六十九名以來。

일본 회례사(日本回禮使) 김거원(金巨原)이 중 범명(梵明)과 더불어 사로잡혀 갔던 본국인(本國人) 5백 69명을 거느리고 왔다.


5月 30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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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전이 《조선경국전》을 저술하여 바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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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戊辰/判三司事鄭道傳撰進《朝鮮經國典》, 上觀覽嘆美, 賜廐馬、綺絹、白銀。

판삼사사 정도전이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47]을 지어서 바치니, 임금이 이를 관람하고 감탄하여 칭찬하면서 구마(廐馬)와 무늬 있는 비단과 명주·백은(白銀)을 내려 주었다.


三年 夏六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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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月 1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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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평의사사에서 의복 기구 패물 등의 검소화에 대해 건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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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己巳朔/都評議使司上言:

今當卽位創始之初, 凡工作服飾器玩, 務從儉約, 垂法萬世。 紗羅、綾綺, 各色眞彩, 異方難繼之物, 金銀又每歲進貢上國, 尤爲難繼, 而乃上下通用, 人無定志, 況見利之徒, 因謀貿易, 潛行越境, 以生釁端, 其害不淺。 願自今紗羅、綾綺及金銀粧飾之物, 進上服用及各官品帶外, 兩府以下至於庶人, 一皆禁止; 公私家舍及寺院, 勿用眞彩; 承旨以上外, 不許用金玉纓子; 其油蜜果、絲花鳳、金銀著、彩花草, 上國使臣燕享外, 亦皆禁斷。

上曰: “紗羅、綾綺、金銀、珠玉, 各品官服鞍轡等級, 更議申聞。 其潛行越境興利者, 勿論錢物多少, 首從皆誅。”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에서 상언(上言)하였다.

"이제 임금이 되신 초두에 있어서, 의복과 기구와 패물 등을 만들어 쓰는데 검소하고 간략하도록 힘써서 자손 만대에 본을 보여야 될 것입니다. 사(紗)·나(羅)·능(綾)·기(綺) 등 각색 무늬 있는 비단과 진채(眞彩)는 남의 나라의 물건으로 대 쓰기 어려우며, 금과 은은 또 해마다 공물(貢物)로 바치게 되어 대기 어려운 것인데, 윗사람이나 아랫사람이 다 통용하여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으며, 이익만 아는 무리들은 무역(貿易)을 모의하여 남몰래 국경을 넘어가서 말썽을 일으키게 되니, 그 폐해가 적지 않습니다. 원컨대 이제부터는 사·나·능·기와 금은으로 만든 패물 같은 것은 〈궁중에〉 진상하는 것과 관원들의 품대(品帶)에 소용되는 것 이외에는 의정부와 중추부 이하 시민에 이르기까지 일체로 금지하고, 공사(公私)의 가옥이나 사원(寺院)에는 진채를 쓰지 못하게 하며, 승지 이상 이외에는 금이나 옥으로 만든 갓끈을 달지 못하게 하고, 유밀과(油蜜菓)와 사화봉(絲花鳳)·금은저(金銀箸)·채화초(彩花草)는 중국 사신을 접대하는 연회 이외에는 모두 금단하게 하소서."

이에 임금이 말하였다.

"사·나·능·기와 금·은·주·옥은 각 품관(品官)들의 의복과 말안장과 고삐에 쓰는 등급을 다시 의논해서 보고하고, 비밀히 국경을 넘어가서 무역을 하는 자들은 돈이나 물건이 많고 적음을 불문하고 주범이나 공범을 모두 참형하게 하라."


김영렬을 경기우도 수군 첨절제사로 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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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以前典書金英烈爲京畿右道水軍僉節制使。

전 전서(典書) 김영렬(金英烈)로 경기우도 수군 첨절제사(水軍僉節制使)를 삼았다.


종친 상장군 이조가 간통죄를 범하여 그 처벌을 남은이 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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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將軍李朝夜至前漢陽判官朴德彛家, 執奸其女。 上大怒, 命囚朝于巡軍。 朝逃, 令巡軍大索中外, 令曰: “有敢匿者, 罪之。” 右僕射南誾進曰: “今殿下大索李朝, 朝若出, 則殿下將若之何?” 上曰: “罪之以律。” 誾曰: “殿下若罪朝, 則親親之恩傷矣; 不罪朝, 則法令廢矣。 朝不出, 殿下親親之恩全, 而法令不廢矣。 何索之太甚耶?”

상장군(上將軍) 이조(李朝)가 밤에 전 한양 판관(漢陽判官) 박덕이(朴德彛)의 집에 가서 그의 딸을 잡고 간통했다. 임금이 크게 성을 내어 조를 순군(巡軍)에 잡아 가두었더니, 조가 달아났다. 임금이 순군을 시켜서 서울과 외방에 수색하도록 하고 이에 분부하였다.

"조를 숨기는 자가 있으면 죄를 주리라."

우복야(右僕射) 남은(南誾)이 나아가 아뢰었다.

"지금 전하께서 이조를 찾아내라 하시니, 조가 만약에 나온다면 전하께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임금이 말하였다.

"법대로 죄를 주리라."

은이 다시 말하였다.

"전하께서 만약 조에게 죄를 준다면 가까운 친족의 은의(恩義)가 상할 것이요, 조에게 죄를 주지 않는다면 법령이 폐(廢)하여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조가 나오지 않으면 전하의 친족에 대한 은의가 온전할 것이며, 법령도 해이(解弛)하지 않을 것이온데 어찌 그리 심히 찾습니까?"


고려조 왕비와 족친들의 공상은 폐지하고 월봉을 주도록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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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憲司上言: “前朝之妃與母及族, 封爲宮主、翁主、國大夫人, 或供上或月俸, 請皆停罷。” 上曰: “除供上, 竝給月俸。”

헌사에서 상언(上言)하였다.

"고려조의 왕비와 왕비의 어머니 및 가까운 족친들을 궁주(宮主)·옹주(翁主)·국대부인(國大夫人)에 봉하여, 혹은 공상(供上)하고 혹은 월봉을 주었으나, 모두 정지해서 없애기를 청합니다."

임금이 말하였다.

"공상(供上)은 폐지하고 모두 월봉을 주도록 하라."


정안군이 명나라에 입조하겠다 하니 남재가 따라가기를 자청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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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謂殿下曰: “天子若有所問, 非汝莫能對。” 殿下對曰: “臣爲宗社大計, 豈敢辭避!” 太祖揮淚曰: “汝體質羸瘦, 萬里之路, 其能保其無恙乎!” 朝臣皆爲殿下危之。 南在曰: “靖安君有萬里之行, 吾輩安可枕枕死於此乎!” 請自行。

태조(太祖)께서 정안군(靖安君)에게 일렀다.

"명나라 황제가 만일 묻는 일이 있다면 네가 아니면 대답할 사람이 없다."

정안군이 대답하였다.

"종묘와 사직의 크나큰 일을 위해서 어찌 감히 사양하겠습니까?"

이에 태조가 눈물을 글썽거리면서 말하였다.

"너의 체질이 파리하고 허약해서 만리의 먼 길을 탈 없이 갔다가 올 수 있겠는가?"

조정 신하들이 모두 정안군이 위험하다고 하니, 남재(南在)가 말하였다.

"정안군이 만리의 길을 떠나는데 우리들이 어찌 베개를 베고 여기에서 죽겠습니까?"

하고서 스스로 따라가기를 청하였다.


6月 7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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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호 및 왕의 호칭 문제에 대한 표문을 정안군과 지중추원사 조반이 명나라에 가지고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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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乙亥/上遂命我殿下及知中樞院事趙胖進表, 參贊門下府事南在進箋。 表曰:

欽差內史黃永奇等至, 承準左軍都督府咨, 欽奉聖旨節該: “將解到賊人胡德等供, 出來的人姓名開寫去, 敎某知道, 長男或次男親自解來。” 欽此。 誡命有嚴於自天, 述職莫親於遣子。 玆將卑懇, 庸瀆聰聞。 切念臣蒙上至恩, 致身今日。 謹修蕃宣之職貢, 每通行李之往來。 於洪武二十六年, 節次遣陪臣金立堅, 齎擎表箋, 謝賜馬價; 陪臣尹思德齎擎表文, 進賀聖節, 俱蒙遼東都司稱有聖旨, 阻當回還。 欽此, 卽遣陪臣李至, 請通道路, 又遣陪臣朴永忠進賀千秋, 陪臣慶儀進賀二十七年正朝, 俱到遼東, 仍蒙都司如前阻當回還。 欽此, 一國臣民兢惶無奈間, 當年十二月初八日, 欽差內史金仁甫等來至, 承準左軍都督府咨, 欽奉聖旨。 內一款, “朝鮮已許自爲, 卽合正名。 今更號朝鮮, 表文仍稱權知國事, 未審何謀?” 欽此。 臣愚以爲國號, 則旣已欽依明降, 更號朝鮮, 王爵則未蒙頒降, 國王名爵, 不敢稱王。 今來欽奉聖旨, “卽合正名。” 欽此。 又承準左軍都督府咨內, “右咨朝鮮國王。” 準此, 欽遵施行, 修撰表箋, 遣陪臣安宗源等赴京謝恩, 到遼東, 如前蒙都司阻當回還。 臣與國人, 尤增隕越, 仰皇天而永號, 冀聖心之克灼, 尙慮路阻, 未達旒聰。 何圖睿恩之忽霑, 許令賤息以入覲! 如窮子之投母, 若行者之赴家, 感與喜幷, 涕從言出。 所據劉肚兒等, 究求本邦之人氏, 竝無此等之姓名。 唯任葛龍義之爲林擧輪與藜均皮力之爲李君必, 或因職役之相似, 或因聲韻之偶同, 推類以求, 發解已去, 豈於劉肚兒等, 獨自占吝, 故令勒留! 臣又以爲胡德等所供打聽消息, 尤爲誣妄。 日月中天, 凡有耳目者, 莫不知見; 聖神御極, 凡有血氣者, 莫不尊親。 顧我小邦, 臣事聖代, 久諳人民甲兵之富, 深服禮樂刑政之修。 何至待小兒之行, 然後知中國之事! 況本無疑貳之心, 又安有覘窺之謀? 如此事情, 已曾具本奏達去訖。 伏望皇帝陛下, 推字小之仁, 擴包荒之量, 憐臣抱屈而無訴, 許臣効忠而自新。 臣謹當永爲蕃翰於一邦, 恒祝康寧於萬世。

태조께서 정안군과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 조반(趙胖)에게 분부하여 표문을 올리게 하고, 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 남재(南在)로 하여금 전문(箋文)을 올리게 하였는데, 그 표문에 이러하였다.

"흠차 내사(欽差內史) 황영기(黃永奇) 등이 좌군 도독부(左軍都督府)에서 준청(准請)한 자문(咨文)을 가지고 왔사온데, 삼가 성지를 받자오니 이르기를, ‘붙잡아 온 적인(賊人) 호덕(胡德) 등의 공초에 나오는 사람들의 성명을 등본해 가지고 가서 조선 국왕 아무개로 하여금 장남이나, 또는 차남을 보내서 친히 잡아 오게 하라.’ 하였으니, 천명보다 엄한 이 명령을 받고 신하의 직분으로 자식을 보내지 아니할 수 없어, 이제 신의 간곡한 마음을 기록하여 성총(聖聰)을 번거롭게 하나이다. 그윽이 생각하건대, 신이 성상의 지극한 은혜를 입사와 오늘의 지위에 이르렀고, 삼가 번신(蕃臣)의 직책을 닦아 해마다 사신의 왕래를 이루었습니다. 즉 홍무(洪武) 26년에 배신(陪臣) 김입견(金立堅)을 보내어 표전(表箋)을 가지고 가서 말값[馬價]을 하사한 데 대하여 사례하게 하고, 배신 윤사덕(尹思德)은 표문을 가지고 성절(聖節)을 진하(進賀)하게 하였더니, 모두 다 요동 도사(遼東都司)로부터 황제의 분부라 하고 가지 못하게 하므로 돌아왔습니니다. 이번에도 삼가 배신 이지(李至)를 보내서 도로의 내왕을 주청케 하였으며, 또 배신 박영충(朴永忠)을 보내서 천추절(千秋節)을 진하하게 하고, 배신 경의(慶儀)로는 27년 정조(正朝)를 진하하게 하였더니, 모두 요동까지 가서 도사(都司)로부터 전날과 같은 저지를 당하고 돌아왔습니다.

삼가 이로써 일국 신민들이 전전긍긍 황공하던 차에, 금년 12월 초8일에 칙사로 보낸 내사(內史) 김인보(金仁甫) 등이 도착하여 좌군 도독부의 자문을 받아 보니, 성상의 분부하신 일관(一款) 가운데, ‘조선은 이미 자주권을 허락하였으니 곧 정당한 조선 국왕(朝鮮國王)이란 명칭을 사용해야 한다. 그런데 지금 국호는 조선으로 고치고 표문에는 아직도 권지 국사(權知國事)라 하였으니 무슨 까닭인지 알지 못하겠노라.’ 하였으니, 이것을 받자와 신의 어리석은 생각에는 국호는 명확히 내리신 바 있으므로 고쳤거니와 조선왕의 작호(爵號)는 아직 내리신 처분이 없으므로 감히 왕이라고 일컫지 못한 것입니다. 이번에 〈조선 국왕의〉 칭호를 바루라는 성지를 받잡고, 또 좌군 도독부 자문 속에, ‘이상을 조선 국왕에게 자문하니 이에 따라 시행하라.’ 하였으므로, 표전을 수찬(修撰)하여 배신 안종원(安宗源) 등을 경사(京師)[48]에 보내서 은총을 사례하게 했더니, 요동에 이르러 또한 전과 같이 길을 막으므로 가지 못하고 돌아왔습니다.

신은 온 나라 백성들과 함께 더욱 간장이 떨어지는 듯하여 황천을 우러러 호소도 하고 성상의 마음이 돌아서기를 바랐으나, 여태껏 길이 막혀서 성청(聖聽)에 사무치지 못할까 염려하였더니, 어찌 뜻하였으리오, 홀연히 성은을 입사와 미천한 자식이 들어가 뵙게 될 줄이야! 마치 곤궁한 자식이 어미의 품안에 안긴 것 같고 길가던 사람이 집에 당도한 것과 같아서, 감격과 기쁨이 겹쳐 말을 하려니 눈물이 흐릅니다. 말씀하신 바 유두아(劉肚兒) 등은 저의 나라 백성들 가운데 아무리 찾아보아도 이러한 성명을 가진 사람은 없고, 오직 임갈용의(任葛龍義)를 임거륜(林擧輪)이라 하고 여균피력(藜均皮力)을 이군필(李君必)이라 한 것은, 혹은 직역(職役)이 비슷하고, 혹은 음(音)이 비슷하므로 추리하여 잡아 보내는 것이니, 어찌 유두아 등만 아껴서 강제로 유치(留置)시키겠습니까? 신은 또 호덕 등이 공초한 소식을 정탐하기 위하여 왔다는 것은 더욱 거짓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일월(日月)이 중천에 밝아 있고 이목(耳目)이 있는 자로서 보고 듣지 않을 사람이 없으며, 성상이 지존에 계시니 무릇 혈기 있는 자들이 어버이로 높이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저의 작은 나라가 성대(聖代)를 섬기어 오래 전부터 인민과 군병의 수가 많은 것을 알고, 예악과 형정(刑政)이 잘 되어가는 것도 깊이 알고 있는 터에, 어찌 어린애 같은 자들을 보낸 뒤에 중국의 일을 알겠습니까? 이러한 사정은 이미 표문에 갖추어서 주달하였사오니, 바라옵건대, 황제께서는 어린 것을 사랑하는 인자한 마음으로 미루고 하늘과 땅을 감싸는 도량을 넓히시와, 신의 원통함을 하소할 곳이 없는 것을 불쌍히 여기시고 신으로 하여금 충성을 다해서 새로운 출발을 하게 해 주시면, 영원히 변방의 한 나라가 되어 언제나 〈폐하의〉 만수 강령(萬壽康寧)하기를 빌겠습니다."


6月 11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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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평의사사에서 개성부의 규율을 엄중히 할 것을 건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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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己卯/都評議使司上言:

開城府依漢、唐京兆府例, 專掌肅淸王都。 前朝之季, 法令廢弛, 群小之徒, 不孝於親, 不睦於族, 隣里不相助, 擅徵宿債, 抑買市物, 或有疾病不救, 死亡不藏, 人倫風俗, 甚爲不美。 今後開城府, 嚴加考察, 掛榜通曉禁止, 如前犯令者, 切隣及坊里色掌, 各告其部, 傳報開城府, 以行痛懲, 其不進告者, 以其罪罪之, 府及五部令不受治者, 依律論罪。” 上從之。

도평의사사에서 상언(上言)하였다.

"개성부(開城府)는 옛날 한(漢)나라·당(唐)나라 경조부(京兆府)의 전례에 의거하여 오로지 왕도(王都)를 숙청하는 일을 맡아 보게 하소서. 고려조의 말기에 이르러 법령이 해이해지자 군소배(群小輩)들이 어버이에게 효도할 줄 모르고 일족들에게 화목할 줄도 모르며, 이웃끼리 서로 도와줄 줄도 모르고 묵은 빚을 제멋대로 받고 저자에 있는 물건을 강제로 사며, 혹 질병이 있어도 구호해 주지 않고 사람이 죽어도 묻어 주지 않아서, 인륜과 풍속이 심히 아름답지 못하게 되었으니, 이제부터는 개성부에서 엄중히 보살피고 방(榜)을 걸어 널리 알려서 금지하되, 전과 같이 법령을 범하는 자가 있으면 가까운 이웃이나 방(坊)·이(里)의 색장(色掌)들이 각각 그 〈소속〉 부(部)에 알리고, 또 그 부는 개성부에 보고하여서 깊이 징계하고, 그런 일을 알고도 보고하지 않은 자들에게는 그 죄로 벌을 주게 할 것입니다. 그리고 개성부나 〈동·서·남·북·중〉 5부령(五部令)으로 죄인을 받아서 죄를 다스리지 않은 자도 법률에 의거하여 죄를 의논하게 하소서."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6月 16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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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의 선대 종계를 변무하고 정탐군을 보낸 적이 없음을 말한 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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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甲申/使臣黃永奇等還, 上撰奏本一道, 就附以進, 送至迎賓館。 奏曰:

洪武二十七年四月二十五日, 欽差內史黃永奇等至, 欽奉到告祭海岳山川等神祝文內節該: “爲昔高麗陪臣李仁任之嗣某今名某者, 或明遣人覘視, 或暗行窺伺, 誘我邊戍, 殺掠沿海居民, 及誘引爲非。 如此構禍, 卽欲興師問罪, 然大兵入境, 傷生必衆, 所以未敢輕擧。 且高麗, 三環海一負山, 地方數千里, 周回險阻, 天造地設, 其間主生民者, 非帝命不可。 今觀李某所爲, 似非奉帝命主生民者。 予欲昭告上帝, 又恐輕易, 有煩帝聽。 今遣人先告于神, 惟神察其所以, 達于上帝。 彼若肆侮不已, 問罪之師, 在所必擧。” 欽此, 臣不勝隕越。 切念臣先世, 本朝鮮遺種。 至臣二十二代祖翰仕新羅爲司空, 及新羅亡, 翰六代孫兢休入高麗, 兢休十三代孫安社仕于前元, 是臣高祖。 自後世不受高麗官爵。 及元季兵興, 臣父子春, 率臣等避地東來, 以臣粗習武才, 置身行伍, 然臣官未顯達。 自高麗恭愍王薨逝, 至僞姓辛禑十六年, 權臣李仁任、林堅味、廉興邦等, 相繼用事, 流毒生民, 罪盈惡稔, 自取誅戮。 以臣素心謹愼, 無有他過, 擧臣爲門下侍中, 方與國政。 前件事理, 臣已曾具本, 奏達去訖。 臣於仁任, 本非一李。 自臣與聞國政, 將仁任所爲不法, 一皆正之, 反爲其黨所惡, 至有尹彛、李初逃赴上國, 妄構是非, 尙賴陛下之明, 已伏厥罪。 然其黨與, 潛伏中外, 忌臣所爲, 至今紛紛不已。 臣又切念天人上下, 一理洞達, 陛下之心, 卽上帝之心。 臣蒙陛下之德, 爲陛下之臣, 而明遣窺覘, 暗行窺伺, 誘引邊戍, 殺掠居民, 罪莫大焉, 而曰無有, 則是罔上也。 爲臣之罪, 莫大於罔上, 無以生於聲敎之中矣。 苟如罔上, 是欺天也。 爲人之罪, 莫大於欺天, 無以容於覆燾之下矣。 山川鬼神, 森列左右, 若苟有欺天罔上之罪, 豈不以臣之罪, 告于上帝, 降禍於臣身? 臣不勝惶懼震越之至。 謹冒昧以言, 伏望聖慈俯加哀矜。

사신 황영기(黃永奇) 등이 돌아갔다. 왕이 주본(奏本) 한 통을 지어서 부치고 영빈관(迎賓館)까지 나가 전별하였는데, 그 주본에 말하였다.

"홍무(洪武) 27년 4월 25일에 칙사로 보낸 내사(內史) 황영기 등이 와서 삼가 해악산천(海岳山川) 등의 신령에게 고제(告祭)하는 축문을 받들어 보니, 그 안에, ‘옛날 고려 배신 이인임(李仁任)의 후사 이성계(李成桂)의 지금 이름 이단(李旦)이 혹은 공공연하게 사람을 보내서 정탐하기도 하고, 혹은 비밀히 사람을 보내서 탐정하여 우리들의 변방 장수를 유인도 하고 바닷가의 백성을 죽이고 약탈하기도 하며, 또 유인하여 나쁜 일을 하게 한다. 이와 같이 화(禍)를 만들고 있으므로 즉시 군사를 일으켜 죄를 묻고자 하나, 큰 군사가 국경에 들어가면 살상이 많을 것이므로 아직 경솔히 행동하지 않는 것이다. 또 고려는 3면이 바다로 둘러싸이고 한쪽만 산을 지고 있어 지방이 수천 리나 되고 주위가 험하고 막혀서 하늘과 땅이 만들어낸 요새지이다. 그 속에서 백성을 다스리는 자는 황제의 명령이 아니면 할 수 없는 것인데, 이번에 이단의 하는 것을 보니, 황제의 명령을 받들어서 백성들을 다스릴 자가 못되는 것 같다. 내가 상제에게 분명히 고하고자 하나 쓸데없이 상제의 들음만 번거롭게 할 것 같아서, 이제 사람을 보내서 먼저 신(神)에게 고하노니, 오직 신령은 그 까닭을 살피고 상제에게 고하라. 그래도 저들이 멋대로 모멸(侮蔑)하여 그만두지 않으면 정토군을 일으키지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다.’ 하였으니, 신은 억울해 견딜 수 없습니다.

그윽이 생각하건대, 신의 선대는 본래 조선의 후예이며, 신의 22대조 이한(李翰)은 신라 시대에 사공(司空) 벼슬을 했고, 신라가 망한 뒤에는 한의 6대손인 이긍휴(李兢休)는 고려 조정에 들어왔고, 긍휴의 13대손 이안사(李安社)는 이전 원(元)나라에 벼슬을 했습니다. 이가 신의 고조부로서 그 뒤로부터는 고려의 관작을 받지 못하였고, 원나라 말기에 와서 전쟁이 일어나자 신의 아비 이자춘(李子春)이 신 등을 거느리고 동쪽으로 피난왔습니다. 신이 무재(武才)를 약간 배웠다 해서 군대에 몸을 두었으나 신은 벼슬이 아직 현달하지 못했고, 고려 공민왕(恭愍王)이 죽은 뒤로부터 가짜 왕씨인 신우(辛禑)에 이르기까지 16년 간에 권신 이인임(李仁任)·임견미(林堅味)·염흥방(廉興邦) 등이 서로 이어가면서 권력을 잡아, 백성들에게 해독을 끼치고 죄와 악이 꽉 차서 스스로 사형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신은 본마음이 근신하고 다른 허물이 없으므로, 신을 문하 시중(門下侍中)으로 거용한 것입니다. 〈신이〉 국정에 간여할 때 앞 사건의 사리에 대하여 이미 주본을 갖추어서 주달한 바로서 신과 인임은 본래 같은 이씨가 아닙니다. 신이 국정을 맡은 뒤부터 인임이 저지른 불법을 모두 다 바루려 하다가, 도리어 그 당류의 미움을 받아서 윤이(尹彝)와 이초(李初)가 귀국에 도망하여 함부로 거짓말을 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윤이와 이초는〉 폐하의 명찰하심을 힘입어 이미 처형되었으나, 그래도 그 당류들이 도성과 외방에 잠복하여 신의 하는 바를 시기하며 지금까지 떠들어 말지 않는 것입니다. 신은 또 생각하건대, 하늘이나 사람이나 윗사람이나 아랫사람들이나 다 한가지 이치로 통달하게 되며, 폐하의 마음이 곧 상제의 마음인 것입니다. 신은 폐하의 은덕을 입고 폐하의 신하가 되었는데 공공연하게 사람을 보내서 정탐하거나 혹은 비밀히 정찰하여, 변방 장수를 유인하며 주민을 죽이고 약탈하는 것은 죄가 매우 큰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일이 없다고 하면 이것은 임금을 속이는 것이며, 신하의 죄는 임금을 속이는 것보다 더 큰 것이 없으니, 문명한 세상에 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참으로 임금을 속였다면 이는 하늘을 속이는 것이며, 사람의 죄는 하늘을 속이는 것보다 더 큰 것이 없으니 천지간에 용납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산천귀신이 좌우에 벌려 있는데 만약에 하늘을 속이고 임금을 속이는 죄가 있다면, 어찌 신의 죄를 상제에게 고하고 신의 몸에 화(禍)를 내리지 않았겠습니까? 신은 황공하고 떨리는 마음을 이길 수 없어 삼가 죽기를 무릅쓰고 말씀드리오니, 성스럽고 사랑스런 마음으로 아랫사람을 애긍(哀矜)히 여기소서."


판봉상시사 김을상이 진헌마 오백필을 요동에서 교부하고 돌아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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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以崔淵所傳宣諭, 遣判奉常寺事金乙祥, 押進獻馬五百匹, 至遼東交割而還。

최연(崔淵)이 전한 선유(宣諭)로 판봉상시사(判奉常寺事) 김을상(金乙祥)을 보내서 진헌마(進獻馬) 5백 필을 요동까지 끌고 가 교할하고 돌아오게 하였다.


6月 18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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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의 녹봉을 받아 썼다 탄로난 겸 상서 녹사 변혼이 달아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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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丙戌/兼尙瑞錄事卞渾逃。 先是, 渾私薦二人, 俾受尉正, 受祿自用, 至是事覺, 憲司劾之。

겸 상서 녹사(兼尙瑞錄事) 변혼(卞渾)이 달아났다. 이보다 앞서 혼이 사사로이 두 사람을 천거하여 위정(尉正) 벼슬을 주고 녹봉은 받아서 제가 써버렸는데, 이번에 일이 탄로되어 헌사(憲司)에서 탄핵한 까닭이었다.


6月 19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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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문하부사 조임을 보내 성절 축하 표문을 올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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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丁亥/遣知門下府事趙琳, 表賀聖節。

지문하부사(知門下府事) 조임(趙琳)을 보내서 표문(表文)을 올려 성절(聖節)을 축하하게 하였다.


6月 20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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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탄의 물이 붉게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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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戊子/歧灘水赤。

기탄(岐灘)의 물이 붉었다.


6月 21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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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중추원사 황보임의 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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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己丑/知中樞院事皇甫琳卒。 琳, 永州人, 晋州牧使安之子。 在前朝, 從舅平章事安祐, 屢更攻戰, 初授別將, 累遷至工部侍郞。 祐敗, 居閑數年。 恭愍王謂琳從祐久, 識達軍務, 起爲宗簿令, 遷判宗簿寺事, 從判三司事崔瑩伐濟州。 至僞朝, 陞典法判書、密直副使, 再爲全羅道都巡問使。 歲戊辰, 從上至威化島, 與議回軍, 功在一等。 出爲楊廣、慶尙、全羅道都體察使, 擊倭寇于南原。 及還, 又出爲西北面都節制使、平壤尹。 上卽位, 召拜知中樞院事, 至是病卒, 年六十二。 致賻以禮。 二子: 琠、仁。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 황보임(皇甫琳)이 졸(卒)하였다. 임은 영주(永州)가 본이며, 진주 목사 황보안(皇甫安)의 아들이다. 고려조에 그 장인 평장사(平章事) 안우(安祐)를 따라서 여러 번 전쟁에 나가, 처음에 별장이 되었다가 여러 번 천직하여 공부 시랑(工部侍郞)에 이르렀다. 안우가 실각한 뒤 수년 동안 한가히 지냈는데, 공민왕은 임이 우를 따라 다닌 지 오래 되어 군사일을 잘 알 것이라 생각하여 종부 영(宗簿令)으로 기용하였다가 판종부시사(判宗簿寺事)로 올리고, 판삼사사(判三司事) 최영(崔瑩)을 따라서 제주를 토벌하게 되었다. 신우의 위조(僞朝)에 이르러 전법 판서(典法判書)·밀직 부사(密直副使)로 오르고, 두 번이나 전라도 도순문사(都巡問使)를 지냈다. 우왕(禑王) 14년(1388)에 태조를 따라 위화도에 갔다가 회군(回軍)하자는 의논에 참여하여 일등 공신이 되고, 외직으로 양광(楊廣)·경상·전라도 도체찰사(都體察使)가 되어 왜구(倭寇)를 남원에서 공격했다. 〈조정에〉 돌아와서는 또 서북면 도절제사(西北面都節制使)와 평양 부윤으로 나갔다. 태조가 즉위한 뒤 불러서 지중추원사에 임명하였는데, 이때에 병으로 죽으니 향년이 62세였다. 이에 예로써 부의를 보내었다. 아들이 둘이니, 황보전(皇甫琠)과 황보인(皇甫仁)이다.


6月 23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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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를 좌우도로 나누고, 양광도·강릉 교주도·서해도를 개칭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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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辛卯/都評議使司請以京畿州縣殘盛廣狹, 改定左右道。 長湍、坡平、見州、沙川、抱州、豐壤、瑞原、幸州、深岳、漢陽、富原、果州、鐵原、永平、僧嶺、朔寧、赤城、臨江、麻田、松林、漣州、高峯、交河、衿州、陽川、南陽、安山、仁州、兔山、安峽屬左道, 開城、江陰、海豐、白州、延安府、平州、載寧、江華、鎭江、河陰、喬桐、瑞興、牛峯、新恩、俠溪、遂安、谷州、富平、童城、通津、守安、金浦、德水屬右道。 改楊廣道爲忠淸道, 江陵、交州道爲江原道, 西海道爲豐海道。

도평의사사에서 경기도 각 고을의 쇠하고 성한 것과 넓고 좁은 것에 따라 좌우도(左右道)로 고치자고 청하니, 장단(長湍)·파평(坡平)·현주(見州)·사천(沙川)·포주(抱州)·풍양(豊壤)·서원(瑞原)·행주(幸州)·심악(深岳)·한양(漢陽)·부원(富原)·과주(果州)·철원(鐵原)·영평(永平)·승령(僧嶺)·삭녕(朔寧)·적성(赤城)·임강(臨江)·마전(麻田)·송림(松林)·연주(漣州)·고봉(高峯)·교하(交河)·금주(衿州)·양천(陽川)·남양(南陽)·안산(安山)·인주(仁州)·토산(兔山)·안협(安峽)을 좌도에, 개성(開城)·강음(江陰)·해풍(海豊)·배주(白州)·연안부(延安府)·평주(平州)·재령(載寧)·강화(江華)·진강(鎭江)·하음(河陰)·교동(喬桐)·서흥(瑞興)·우봉(牛峯)·신은(新恩)·협계(俠溪)·수안(遂安)·곡주(谷州)·부평(富平)·동성(童城)·통진(通津)·수안(守安)·김포(金浦)·덕수(德水)를 우도에 소속시키고서, 양광도(楊廣道)를 충청도로, 강릉 교주도(江陵交州道)를 강원도로 고치고, 서해도(西海道)를 풍해도(豊海道)로 고치었다.


6月 24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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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하들의 보필을 당부하고 관찰사를 천거하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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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壬辰/命都承旨韓尙敬, 傳旨于都評議使司曰:

王氏絶祀, 天乃俾予肇造邦家, 實爲斯民也。 若不敬天勤民, 天之降殃必矣。 自古以來, 世之所以未治者, 君臣未得相遇也。 予雖否德, 每謂卿等應時而出, 爲我股肱, 以創大業, 宜與夙夜礪精, 以答天意。 古人云: “未聞以千里畏人者也。” 我國地方二三千里, 苟明政令, 何畏於人! 予因老病, 倦於聽斷, 但保卿等耳。 願治之心, 豈敢忘於須臾! 卿等宜各盡心, 以補不逮。 觀察使必須愼簡。 得其人, 則一方受其賜; 不得其人, 則一方受其弊。 宜各擧所知, 具名以聞。

侍中趙浚、金士衡等感泣而對曰: “臣等俱以庸愚, 獲遭聖上, 敢不盡竭心力, 以補萬一! 擇遣觀察使, 誠如上敎。 請令臺諫薦擧。” 又曰: “今侍衛軍士, 夙夜効勞, 多未霑祿食; 近侍忠勇及諸衛受職者, 多不稱任。 願令侍衛軍士, 遞受其職。 其餘事理, 隨卽申聞。” 尙敬復命, 卽召臺省掌務曰: “承旨、典書以上可當觀察之任者, 不拘時散, 具名以聞。”

도승지 한상경(韓尙敬)에게 분부하여 도평의사사에 전교(傳敎)하였다.

"왕씨의 후손이 끊어지고 하늘이 나로 하여금 이 나라를 다스리게 한 것은 실은 이 백성을 위한 것이다. 만약에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들을 돌보아 주지 않으면 하늘이 기필코 재앙을 내리리라. 예로부터 세상이 잘 다스려지지 않는 것은 임금과 신하가 잘 만나지 못한 까닭이라. 내 비록 덕은 없으나 항상 생각하기를, 경 등이 때를 타고 나서 나의 팔다리가 되어 대업(大業)을 창조하였으니, 마땅히 밤낮으로 마음을 가다듬어서 하늘의 뜻을 보답하게 하라. 옛사람의 말에, ‘천리나 되는 국토를 가지고 남을 두려워한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고 한다. 우리 나라는 지방이 2, 3천 리나 되니, 진실로 정사와 법령을 밝히면 어찌 남을 두려워하겠는가? 내가 늙고 병들어서 정무를 게을리 하고 단지 경 등만 믿으나, 다스려 보려는 마음을 어찌 잠시인들 잊겠는가? 경 등은 모두 마음을 다해서 나의 부족을 도우라. 관찰사는 반드시 신중하게 골라야 한다. 적당한 인물이면 한 지방이 그 혜택을 받고 부적당한 사람이면 한 지방이 그 폐해를 입으니, 마땅히 각각 아는 사람을 천거하여 이름을 써서 알리게 하라."

이에 시중 조준(趙浚)과 김사형(金士衡) 등이 감격의 눈물을 흘리면서 대답하였다.

"신 등이 모두 어리석고 못난 자들로서 성상(聖上)을 만나게 되었으니, 어찌 심력을 다해서 만분의 일이라도 돕지 않겠습니까? 관찰사를 골라서 보내는 것은 실로 분부하신 바와 같으니, 대간(臺諫)으로 하여금 천거하게 하소서."

또 말하였다.

"지금 시위하고 있는 군인들이 밤낮으로 근로하면서 거의 녹을 받지 못하고 있는데, 가까이 모시고 있는 충용위(忠勇衛)와 기타 여러 위로서 관직을 받은 자들이 대개 합당한 사람이 아니니, 원컨대, 시위 군사들로 하여금 그 직책을 갈아 받도록 하소서. 그밖의 모든 사리는 사실대로 곧 아뢰겠습니다."

상경이 복명(復命)하니, 즉시 대성(臺省)의 장무(掌務)를 불러서 분부하였다.

"승지나 전서(典書) 이상으로 관찰사의 임무에 합당한 자가 있거든 현직이나 퇴직을 막론하고 그 이름을 써서 알리라."


사헌부 이근 등이 금주령 해제를 철회할 것을 건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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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司憲府李懃等上言: “前者禁酒之令, 限以豐年, 今二十三日, 命罷禁令。 當創業之初, 凡有法令, 不可輕改。 願自今京外公私宴飮迎餞, 限豐年禁之。” 兪允。

사헌부의 이근(李懃) 등이 상언하였다.

"지난번에 금주령(禁酒令)을 풍년이 들기까지 기한하였는데 이제 23일부터 금령을 해제한다 하니, 나라를 창건하는 초두에 있어서 모든 법령은 경솔히 개정할 수 없는 것입니다. 원하옵건대, 이제부터는 서울과 지방의 연회나 환영 및 전별할 때에 술은 풍년들 때까지 기한하여 금지하게 하소서."

그대로 허락하였다.


정도전이 부병 시위 제도에 관한 저술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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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判三司事鄭道傳撰歷代府兵侍衛之制, 論府衛之弊與今府兵沿革事宜, 爲圖以獻。

판삼사사 정도전(鄭道傳)이 역대 부병(府兵)의 시위하는 제도를 엮었는데, 부병들의 시위하는 폐단과 지금 시행하는 부병들의 연혁(沿革) 및 해야 할 일들을 논하고, 도(圖)를 만들어서 올리었다.


6月 25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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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간에서 천거한 사람들을 각도의 도관찰출척사로 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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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癸巳/以臺諫所薦, 除各道都觀察黜陟使。 崔有慶于慶尙, 洪吉旼于豐海, 吳思忠于江原, 金希善于京畿右道。

대간에서 천거한 사람으로 각도의 도관찰출척사(都觀察黜陟使)를 임명하였는데, 최유경(崔有慶)을 경상도에, 홍길민(洪吉旼)을 풍해도에, 오사충(吳思忠)을 강원도에, 김희선(金希善)을 경기우도에 임명하였다.


전 삼사 우복야 윤사덕의 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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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前三司右僕射尹師德卒。 師德, 雞林杞溪人, 性醇厚無忤於人。 病卒。 無子。

전 삼사 우복야 윤사덕(尹師德)이 졸(卒)하였다. 사덕은 계림(鷄林) 기계(杞溪) 사람으로 성질이 순후하여 남에게 거슬리는 일이 없었다. 병으로 죽고 아들이 없었다.


6月 26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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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평의사사에서 직품에 따라 금·은·옥 등의 사용을 제한할 것을 건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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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甲午/都評議使司具禮曹詳定狀啓曰: “進上儀物外, 臣下毋得用金; 兩府外, 毋得服紗羅綾綺、玉纓子、環子; 嘉善以下六品以上, 酒器外, 毋得用銀; 七品以下, 酒器亦不許用銀。 品帶及臺省員頂子, 不在此限。 庶人及工商賤隷, 雖有職者, 毋得用銀絹斜皮; 婚姻者亦依職品, 毋得僭用。” 從之。

도평의사사에서 예조가 상정(詳定)한 장계(狀啓)를 갖추어 아뢰었다.

"진상하는 의식 용품 이외에는 신하들은 금을 쓰지 못하고, 의정부와 중추원 이외에는 명주와 비단과 옥영자(玉纓子)·옥환자(玉環子)를 쓰지 못하며, 가선 대부(嘉善大夫) 이하 6품 이상은 술잔 외에 은을 쓰지 못하고, 7품 이하도 술잔을 은으로 쓰지 못하게 하되, 품대(品帶)와 대성(臺省) 관원들의 정자(頂子)는 여기에 구애되지 말 것입니다. 서민이나 공업자·상업자들과 하인들은 비록 직품이 있더라도 은과 명주며 사피(斜皮)는 쓰지 못하게 하고, 혼인하는 사람들이라도 역시 직품에 의거하여 참람되게 쓰지 못하도록 하소서."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명나라에 압송되었던 임거륜과 이군필이 돌아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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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林擧輪、李君必來。 初以五軍都督府咨, 責取人姓名相近解送, 帝遣還。

임거륜(林擧輪)과 이군필(李君必)이 돌아왔다. 당초에 오군 도독부(五軍都督府)가 자문을 보내서 독촉하므로 성명이 근사한 사람을 잡아서 보냈는데, 황제가 돌려보낸 것이다.


6月 27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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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나라에서 이견실·강보정·김용 등이 돌아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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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乙未/李堅實、康寶鼎、金龍等來。 堅實等至, 帝引見問我邊境事, 還遣。

이견실(李堅實)과 강보정(康寶鼎)·김용(金龍) 등이 돌아왔다. 이견실 등이 명나라에 가니, 황제가 인견하고 우리 나라 변방 일을 물어 보고 돌려보낸 것이다.


서운관 관원이 무악이 수도로 좋지 않다고 하니, 다른 곳을 물색하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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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敎都評議使司曰: “毋岳新都之地, 前旣命十餘宰相觀之, 今旣一定, 而書雲觀員劉旱雨、李陽達等乃曰: ‘以臣所學觀之, 非定都之地也。’ 國之大事, 莫重於此。 或可或否, 宜會前日往觀宰相與書雲觀員, 問其是非, 擬議以聞。” 領三司事權仲和、右侍中金士衡與諸宰相, 具書雲觀所言以進曰: “皆不可。” 上曰: “令此輩更相吉地。”

임금이 도평의사사에 교유(敎諭)하였다.

"무악(毋岳) 신도(新都)의 땅은 앞서 10여 재상들에게 명하여 이것을 보고 지금은 이미 결정하였는데, 서운 관원(書雲觀員) 유한우(劉旱雨)와 이양달(李陽達) 등이 말하기를, ‘신의 배운 바로 보아서는 도읍으로 정할 곳이 아닙니다.’ 하니, 나라의 큰 일이 이보다 중한 것이 없는데, 혹은 좋다 하고 혹은 좋지 않다 하니, 전일에 가 본 재상 및 서운관 관원과 더불어 그 옳고 그른 것을 논의해서 알리라."

영삼사사 권중화(權仲和)와 우시중 김사형(金士衡)이 여러 재상들과 더불어 서운관의 말한 바를 기록하여 아뢰었다.

"다 옳지 못하다 합니다."

임금이 말하였다.

"이들로 하여금 다시 좋은 곳을 물색하게 하라."


6月 29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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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제를 동북면에 보내어 4대 능소에 제향을 올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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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丁酉/遣藝文春秋館太學士閔霽于東北面, 祭四代山陵。

예문춘추관 태학사(藝文春秋館太學士) 민제(閔霽)를 동북면에 보내서 4대(代) 능소에 제향을 올리게 하였다.


三年 七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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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月 2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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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운관 관원이 새 도읍 후보지로 불일사와 선고개를 아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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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己亥/書雲觀員進啓可都之地曰: “佛日寺爲首, 鐥岾次之。”

서운 관원이 와서 도읍될 만한 곳을 아뢰었다.

"불일사(佛日寺)가 제일이고 선고개[鐥岾]가 다음은 됩니다."


이견실 등을 석방시켜 준 것에 감사하는 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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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以李堅實放回事, 具奏本謝恩于帝, 令節日使趙琳齎進。 其奏曰:

洪武二十七年三月二十一日, 遼東都司差人到鴨綠江, 千戶李堅實、鎭撫康寶鼎、通事金龍等三名過江迎接, 致被捉去。 邊境居民, 驚恐無奈, 具本奏達間, 洪武二十七年六月二十八日, 前項李堅實等三名前赴京師, 欽蒙宣諭放回, 具言重蒙聖恩, 賞賜回還。 臣與國人欣感罔極。

이견실을 놓아보낸 일로 주본(奏本)을 만들어서 황제에게 사례하였는데, 절일사(節日使) 조임(趙琳)으로 하여금 가지고 가게 하였다. 그 주문에는 이러하였다.

"홍무 27년 3월 21일에 요동 도사에서 보낸 사람이 압록강까지 왔기로, 천호(千戶) 이견실(李堅實)과 진무(鎭撫) 강보정(康寶鼎) 및 통사(通事) 김용(金龍) 등 세 사람이 강을 건너서 영접하다가 잡혀가게 되니, 변경에 살던 사람들이 놀라고 두려워서 어찌할 줄 모르므로 주본을 갖추어서 주달하던 차, 홍무 27년 6월 28일에 앞에 말한 이견실 등 3인이 경사(京師)에 가서 효유하신 말씀을 듣고 석방되어 돌아와 말하기를, ‘거듭 성은을 입고 상을 받고서 돌아왔습니다.’고 하니, 신은 국인(國人)과 함께 기쁘기 한량 없습니다."


7月 3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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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지밀직사사 안숙로의 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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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庚子/前知密直司事安叔老卒。 叔老, 順興人, 竹城君克仁之子。 性端謹, 稍讀書, 有志於事功, 以病卒。 子望之、敬之。

전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 안숙로(安叔老)가 졸(卒)하였다. 숙로는 순흥 사람으로 죽성군(竹城君) 안극인(安克仁)의 아들이다. 천성이 단정하고 근신하며, 약간 글을 읽어 사업과 공훈에 뜻이 있었으나 병으로 돌아갔다. 아들이 있으니 안망지(安望之)와 안경지(安敬之)이다.


7月 4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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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고개가 천도지로 마땅치 않다 하여 남은이 서운관 관원을 꾸짖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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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辛丑/都評議使司相遷都之地于鐥岾, 其地不可。 右僕射南誾罵李陽達曰: “汝等挾地理之術, 屢以不稱之地爲可都, 以冒上聰, 宜痛懲戒後。”

도평의사사에서 선고개[鐥岾]에 가 천도할 땅을 보니, 그곳이 좋지 못했다. 이에 우복야 남은(南誾)은 이양달을 꾸짖었다.

"너희들이 지리의 술법을 안다는 것으로써 여러 번 맞지 않은 곳을 도읍할 만하다고 하여 상총(上聰)을 번거롭게 하니, 마땅히 호되게 징계하여 뒷날을 경계해야겠다."


7月 5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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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일사가 천도할 곳으로 마땅치 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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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壬寅/都評議使司, 相遷都之地于佛日寺, 其地亦不可。

도평의사사가 불일사에 가서 천도할 곳을 보니, 그곳도 역시 좋지 못하였다.


귀국하던 섬라곡 사신이 일본에서 겁탈당하고 되돌아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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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暹羅斛使人張思道等回來曰: “前年十二月, 與回禮使裵厚到日本, 被賊刦掠, 禮物資粧, 燒盡無餘。 乞許更粧船子, 待今年冬發還本國。” 乃獻刀甲、銅器、黑厮二人。 上視朝, 命禮曹引暹羅斛人就班。

섬라곡(暹羅斛)의 사절 장사도(張思道) 등이 돌아와서 말하였다.

"작년 12월에 회례사(回禮使) 배후(裵厚)와 함께 일본에 이르렀다가, 도적에게 약탈당하여 예물과 행장을 다 태워버렸습니다. 다시 배 한 척을 꾸며 주시면 금년 겨울을 기다려서 본국에 돌아가겠습니다."

그리고 칼과 갑옷과 구리그릇과 흑인 두 사람을 바쳤다. 왕이 정사를 보고 있었는데, 예조에 명령하여 섬라곡 사람을 인도해서 반열(班列)에 나오게 하였다.


연안과 배주에 황충이 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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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延安、白州蝗。

연안(延安)과 배주(白州)에 황충(蝗蟲)이 일었다.


성 안에 까마귀가 많이 모여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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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城中多烏。

성 안에 까마귀가 많이 모여들었다.


7月 7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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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인 고봉례 등이 말 백 필을 바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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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甲辰/濟州人高鳳禮等來獻馬百匹, 賜米百斛。

제주도 사람 고봉례(高鳳禮) 등이 말 1백 필을 바치니, 쌀 1백 섬을 하사하였다.


7月 11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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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사올을 사금, 동산색을 상림원으로 고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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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戊申/改車沙兀爲司禁, 東山色爲上林園。

차사올(車沙兀)을 사금(司禁)으로, 동산색(東山色)을 상림원(上林園)으로 고치었다.


도평의사사에서 음양 산정 도감의 설치를 건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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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都評議使司啓曰: “地理之學未明, 人人各執所見, 互相同異, 眞僞難辨。 前朝相傳秘錄, 亦有同異, 邪正難定。 請置陰陽刪定都監, 勘校一定。” 上從之。

도평의사사에서 아뢰었다.

"지리의 학설이 분명치 못하므로 사람마다 각각 자기의 의견을 내세워, 서로 같기도 하고 다르기도 하니, 어느 것이 참말이며 거짓인지를 분별하기가 어렵습니다. 고려조에서 전해 오는 비록(秘錄)도 역시 같기도 하고 다르기도 하여, 사(邪)와 정(正)을 정하기 어려우니, 청하옵건대 음양 산정 도감(陰陽刪定都監)을 두어 일정하게 교정하소서."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7月 12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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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양 산정 도감을 설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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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己酉/置陰陽刪定都監。 令領三司事權仲和、判三司事鄭道傳、門下侍郞贊成事成石璘、三司右僕射南誾、政堂文學鄭摠、僉書中樞院事河崙、中樞院學士李稷、大司憲李懃、平原君李舒與書雲觀員, 集地理圖讖諸書, 參考刪定。

음양 산정 도감을 두었다. 영삼사사(領三司事) 권중화(權仲和)와 판삼사사 정도전, 문하 시랑찬성사(門下侍郞贊成事) 성석린(成石璘)·삼사 우복야 남은(南誾)·정당 문학(政堂文學) 정총(鄭摠)·첨서중추원사(僉書中樞院事) 하륜(河崙)·중추원 학사 이직(李稷)·대사헌 이근(李懃)·평원군(平原君) 이서(李舒)로 하여금 서운 관원과 함께 지리와 도참(圖讖)에 관한 여러 책을 모아서 참고하여 교정하게 하였다.


7月 13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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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구주 절도사가 왜구에게 잡혀갔던 659명을 돌려보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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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庚戌/日本國九州節度使源了俊使者, 與我所遣僧梵明來, 歸我被擄男女六百五十九人。 梵明持猿子以獻, 命置司僕寺。

일본국 구주 절도사(九州節度使) 원요준(源了俊)의 사자가 우리 나라에서 보낸 중 범명(梵明)과 함께 와서 〈왜구에게〉 잡혀갔던 남녀 659명을 돌려보냈다. 또 범명이 원숭이를 바치니, 사복시에 두게 하였다.


중국과 틈이 생기게 한다 하여 중들의 서북면 왕래를 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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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敎都評議使司曰: “予聞遼陽人謂我曰: ‘朝鮮所以生釁者, 僧徒爲之遊說耳。’ 自今僧徒往來西北面者, 令皆誅之。”

도평의사사에 교유(敎諭)하였다.

"내 들으니 요양(遼陽) 사람들이 우리들에게 말하기를, ‘조선이 중국과 틈이 생기게 된 것은 중들이 다니면서 말을 한 까닭이다.’고 하니, 지금부터 중으로 서북면에 왕래하는 자는 다 목을 베도록 하라."


7月 14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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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구가 해주에 침입하여 병선 1척을 빼앗아 달아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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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辛亥/倭寇突入海州, 奪我兵船一艘以歸。 僉節制使金贇吉追之不獲。

왜구가 갑자기 해주(海州)에 들어와 우리 병선(兵船) 한 척을 빼앗아 가지고 돌아가므로, 첨절제사 김빈길(金贇吉)이 추적하였으나 잡지 못했다.


7月 15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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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나라 사신에 의탁하여 폐단 끼치는 무리를 징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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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壬子/憲司啓曰: “近者, 姦兇之徒, 依托使臣, 作弊中外。 宜考迎接都監所錄, 一一痛懲。” 從之。

헌사에서 아뢰었다.

"근래 간흉한 무리들이 〈명나라〉 사신에게 의탁하여 중외(中外)에 폐단을 끼치니, 영접 도감(迎接都監)의 기록을 참고하여 일일이 호되게 징계하도록 하소서."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7月 17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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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씨들의 복을 빌기 위해 금으로 《법화경》을 쓰고 읽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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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甲寅/上以薦王氏, 命前禮儀判書韓理、前右尹鄭矩、奉常卿曹庶、前獻納權弘、前司僕注簿卞渾等, 金書《法華經》四部, 分置各寺, 以時披讀。 先時, 渾犯罪在逃, 上以渾善書, 幷命之。

임금이 왕씨(王氏)의 복을 빌기 위하여 전 예의 판서(禮儀判書) 한이(韓理)와 전 우윤(右尹) 정구(鄭矩), 봉상 경(奉常卿) 조서(曺庶), 전 헌납(獻納) 권홍(權弘), 전 사복 주부(司僕注簿) 변혼(卞渾) 등에게 명하여 금(金)으로 《법화경(法華經)》 4부(部)를 써서 각 절에 나누어 두고 때때로 읽도록 하였다. 이보다 앞서 혼이 죄를 범하여 도망해 있었는데, 혼이 글씨를 잘 쓰므로 임금께서 같이 쓰게 하였다.


백관들에게 무쇠를 내게 하여 무기를 만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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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令百官各品, 出鐵有差, 納軍器監, 以造兵器。

백관 각품에게 무쇠를 차등이 있게 내도록 명령하여 군기감(軍器監)에 바쳐서 병기를 만들게 하였다.


7月 18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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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헌부에서 명나라 사신에게 의탁하여 작폐한 자를 문초하고 아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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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乙卯/憲司劾問依托使臣作弊者, 開具姓名罪狀以聞。 上曰: “尤甚者, 置極刑; 欲受官職者, 皆充水軍。 黃永奇向國忠厚, 請亦不多, 其托永奇者, 勿竝論。”

헌사에서 사신에게 의탁하며 작폐한 자를 문초하고 성명과 죄상을 갖추어서 올리니, 임금이 말하였다.

"심한 자는 극형에 처하고, 관직을 얻으려 한 자들은 모두 수군에 충당하되, 황영기(黃永奇)는 나라를 위하여 충후하고 청한 것도 많지 않으니, 영기에게 부탁한 자는 모두 논하지 말라."


호조 전서 이민도가 전폐 사용을 청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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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戶曹典書李敏道請行錢幣。

호조 전서 이민도(李敏道)가 전폐(錢幣)를 사용하기를 청하였다.


7月 19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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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마철이며 농번기라 무악에 도읍 정하는 시기를 늦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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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丙辰/上欲觀毋岳之地, 將以爲都。 門下府郞舍上書:

時尙炎霾, 動勞未便。 且農民亦未得暇, 待八月旣望, 亦未晩也。

從之。

임금이 장차 무악의 터를 보고 도읍을 정하려 하는데, 문하부 낭사(郞舍)가 상서(上書)하였다.

"시기가 아직 덥고 흙비가 끼어 동가(動駕)하기 불편하며, 또 농민들은 여가가 없으니, 8월 보름이 지나기를 기다려 해도 늦지 않습니다."

그대로 따랐다.


7月 21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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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위군 위령의 기강 확립에 대한 의흥 삼군부의 장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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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戊午/義興三軍府狀啓曰:

前朝之季, 府兵大毁。 今當更始之初, 釐革舊弊, 擧行成法。 嚴宿衛備非常, 尊主威重國勢, 關係甚重, 各宜盡心遵守。 其中無識之徒, 受衛領之職, 不思國家設官之義, 只以不便於己, 交口訕謗, 沮毁成法, 其爲不忠甚矣。 願自今有如前沮毁者, 令憲司啓聞論罪, 除名不敍, 其衛領掌務, 知情不告者, 與同罪。

從之。

의흥 삼군부(義興三軍府)에서 장계(狀啓)하였다.

"고려조 말기에 부병(府兵)의 제도가 크게 무너졌습니다. 지금 다시 나라를 여는 초기에 있어서, 옛날의 폐단을 없애고 법을 거행해야 할 것입니다. 숙위(宿衛)를 엄하게 하여 비상에 대비하고, 임금의 위신을 높여서 국세(國勢)를 중하게 하는 것은 관계가 심히 중한 것이므로, 각각 마음을 다하여 준수해야 하는 것인데, 그 중에 무식한 무리들이 위령(衛領)의 직책을 받아, 나라에서 관직을 설치한 뜻은 생각지도 않고, 단지 자기에게 불편한 것만 가지고 입을 모아 비방하며 법을 파괴시키니, 대단히 충성되지 못한 것입니다. 원하옵건대, 이제부터는 전과 같이 〈법을〉 파괴하는 자가 있으면 헌사로 하여금 보고하게 하여 죄를 주고, 이름을 〈사판(仕版)에서〉 삭제하여 다시 허용하지 말 것이며, 그 위령(衛領)의 장무(掌務)가 그 실정을 알고도 고하지 않는 자도 같은 죄를 주도록 하소서."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도성 축조 부역의 기피에 대한 도평의사사의 장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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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都評議使司狀啓曰: “往者築城之役, 令坊里之人赴之, 壯實者百計窺免, 殘疾之戶, 乃出兒女, 甚爲非理。 自今凡有家者皆出壯丁, 大戶出二名, 中戶一名, 小戶幷三一名, 如有闕役者及兒女赴役者, 戶主論罪。” 從之。

도평의사사에서 장계하였다.

"전에 성을 쌓는 공사에 방리(坊里)의 사람으로 하여금 부역하게 했더니, 장실(壯實)한 자는 여러가지 꾀를 부려 부역을 면하고, 빈한한 호(戶)에서는 아이나 여자를 내보내니, 심히 온당치 못한 일입니다. 지금부터는 누구든지 집 있는 자는 다 장정을 내어 보내되, 대호(大戶)는 2명, 중호(中戶)는 1명, 소호(小戶)는 세 집이 합하여 1명씩 나오게 하고, 만약에 부역을 궐하거나 아동이나 여자를 내어 보내는 자는 호주를 논죄하도록 하소서."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경비의 기신(忌辰)이므로 감선하고 조회와 저자를 정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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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以皇祖妣敬妃(忌晨)〔忌辰〕, 減膳停朝市。

황조비(皇祖妣) 경비(敬妃)[49]의 기신(忌辰)으로 감선(減膳)하고 조회와 저자를 정지하였다.


7月 24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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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왕의 기신제를 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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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辛酉/皇祖度王(忌晨)〔忌辰〕, 如前例。

황조(皇祖) 도왕(度王)의 기신제(忌辰祭)를 전례대로 행하였다.


7月 25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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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중추원사 황희석이 병이 드니 왕이 부처에게 기도하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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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壬戌/知中樞院事黃希碩疾病, 上爲之禱佛。

지중추원사 황희석(黃希碩)이 병이 드니, 왕이 부처에게 기도하게 하였다.


7月 28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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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바람에 곡식이 해를 입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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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乙丑/大風害穀。

바람이 크게 불어 곡식을 해치었다.


7月 30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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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성 축조에 동원된 지방인을 두 번으로 나누기를 아뢰니 속히 마치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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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丁卯/憲司狀啓曰: “京城修築, 外方之人, 分爲二番, 以寬民力。” 上曰: “與其分而久役, 何如合而速畢! 資糧難繼者, 量宜給之。”

헌사에서 장계하였다.

"서울의 성을 쌓는 지방 사람들을 두 번으로 나누어서 백성들의 힘을 수월하게 하소서."

이에 임금이 말하였다.

"나누어서 오래 하는 것보다 한꺼번에 속히 마치는 것이 어떤가? 식량을 이어 대지 못하는 자는 적당히 주도록 하라."


경기도 해변의 경비 강화에 대한 도평의사사의 건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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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都評議使司上言: “京畿各浦守禦, 尤不可不重。 今後以大船分泊要路, 以備不虞; 以快船分載精銳, 窮搜諸島追捕。 節制使有故, 申聞取旨, 方許下陸, 違者論罪。 其節制使及萬戶千戶能否, 都觀察使無時考察糾理, 嘉靖以上, 申聞論罪。” 從之。

도평의사사에서 상언(上言)하였다.

"경기도 각 해변의 포구(浦口)를 지키는 것을 더욱 중하게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금후로는 큰 배를 중요한 곳에 나누어서 정박(碇泊)하도록 하여 불의의 사변에 대비하고, 빠른 배로 정예병을 싣고 여러 섬을 수색하고 적을 쫓아가 잡도록 할 것이며, 절제사가 사고가 있으면 조정에 보고하여 분부를 받은 뒤 육지에 내려오게 하되, 법을 어긴 자는 죄를 논하고, 절제사와 만호·천호의 잘하고 못하는 것은 도관찰사가 수시로 고찰하여 그 죄를 다스릴 것입니다. 단 가정(嘉靖)[50] 이상은 임금께 보고하여 논죄하게 하소서."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三年 八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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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月 1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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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부의 호수를 조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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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戊辰朔/開城府檢括京中大小戶數。

개성부에서 서울 안의 대소 호수(戶數)를 모두 조사하였다.


8月 2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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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이 구언하니, 전백영 등이 역사·병정 징발·노비 변정 등에 대해 상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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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己巳/諫官全伯英等上疏曰:

竊惟殿下, 以神武之資, 代王氏五百年之業, 坐受神器, 此豈人謀之所及哉! 前朝至恭愍王而無嗣, 此天所以有意於殿下也。 當時權臣妄以辛禑爲恭愍後, 禑乃多行不法, 妄興師旅, 欲犯上國之境, 殿下以大義諭諸將, 返旆而還, 奸雄自服, 國人擧悅, 此天又使殿下, 易王氏之機也。 殿下乃以曺敏修等之言, 立禑子昌, 昌暗弱尸位, 乃謀於國人, 立恭讓爲君, 則殿下之忠於王氏, 蓋亦至矣。 第以恭讓昏迷多忌, 將相離貳, 天命有歸, 乃有今日。 夫天之去王氏, 非惡王氏也, 惡無道也; 命殿下, 非愛殿下, 愛有德也。 若民不見德, 非皇天眷命之意也。 殿下卽位之初, 廣布德音, 以賜中外, 今又以治安之道, 講問於都評議使司, 此斯民之大幸, 而可以答上天之意也。 臣等感激之至, 敢陳卑抱, 以謝殿下求言之美意, 儻蒙兪允, 萬萬幸甚。 一, 《書》曰: “如保赤子。” 《記》曰: “用民之力, 歲不過三日。” 蓋其愛民之心切, 故用民之力少, 此聖人不忍人之政也。 《書》曰: “天聽自我民聽, 天視自我民視。” 近者, 乾象示變, 群烏翔集, 皆可爲恐懼者也。 今兩都之役, 一時而興, 則事重力分, 不止勞民, 恐工役之未易訖也。 伏望殿下, 審其緩急, 以省民力, 則民悅天喜而休徵至矣。 一, 《論語》曰: “節用而愛人。” 《易》曰: “節以制度, 不傷財不害民。”合觀此之, 愛人則不至於傷財, 傷財則必至於害民。 昔堯茅茨土階, 禹卑宮室, 漢文帝惜百金於露臺, 天下古今, 咸服其德。 願殿下以此爲法, 宮室之制, 務從儉約, 冗食者可省則省, 可幷則幷, 以贍國用。 一, 古者, 兵出井田, 周衰法廢, 至唐府衛之法, 稍近於古今。 內立三軍府, 外置侍衛各牌, 以屬於府, 分番上下, 此則府衛遺法也。 然以前朝之季, 戶籍不明, 徵發爲軍者, 勞逸不均, 一家之內, 或侍衛或船兵, 隨口爲軍, 役重難堪, 稍稍亡匿。 夫兵貴精不務多。 願令各道, 精選士卒, 改成軍額, 馬兵則五丁出一軍, 步卒則三丁出一軍, 以此爲制, 則行者免負戴之勞, 居者有治生之資, 如有緩急, 則居者亦當充軍矣。 方其無事, 兵散於農, 每於農隙, 各令管牌, 檢其兵具, 肄習武才, 以備都點, 及其有事, 命將統率, 則兵無不精, 而食無不足矣。 若居常宿衛之兵, 則將三軍各領各愛馬, 商略定制, 簡其驍勇者, 充其祿官, 更相遞受, 不許外人雜受, 又受田羸老有疾者, 亦令年壯子壻弟姪代之。 一, 前朝之季, 田制旣紊, 豪强兼幷, 戶籍亦廢, 良賤混淆, 詞訟日繁, 骨肉相毁。 或牢籠山野, 奪人土田, 或假勢枉法, 奪人臧獲, 以至壓良爲賤, 人怨神怒, 竟致滅亡。 殿下在潛邸, 慨然有念, 旣正田制, 其弊自息。 唯奴婢一事, 爭訟尙煩, 殿下命置都監, 擇定公正官吏, 嚴立斷例, 限年決折, 考其元卷, 各給公文一通, 而其原卷, 依田制例, 一皆燒毁, 以杜爭端。 一, 《傳》曰: “光武投戈, 講藝息馬, 論道其急。” 文治如此, 後世稱其盛德。 今殿下受命開國, 運値昇平, 宜敞經筵, 討論經史, 何者可法, 何者可戒, 事必師古, 以資治道。 夫朝鮮, 箕子之所封, 今上國復賜爲號。 《洪範》一篇, 箕子之所陳, 而帝王之所範, 乞於經筵首講, 以明其敎。 一, 人主聽斷, 日有萬機, 不可不勤。 願殿下御正殿, 各司啓事, 面加可否, 事之大者, 必與輔臣, 謀議施行。 一, 官爵, 人主之大柄, 不可不公。 今錄軍士久勞, 賞之以官, 然亦有無寸功而濫受者。 乞自今, 軍民官實有功績者, 不次擢用, 以增士風, 其無功徼倖者, 追奪告身, 痛懲戒後。 一, 《書》曰: “舜好察邇言。” 又曰: “禹拜昌言。” 舜、禹, 天下之大聖也。 智無不周, 理無不明, 然且若是者, 聖不自聖, 而廣聰明也。 唐德宗到民家, 得趙光奇敢言, 始知民瘼, 以其左右無正直, 而下情不達也。 今殿下訪群臣, 以求治道, 此則舜、禹之心也。 願殿下推此心, 下至芻蕘, 俾陳無隱, 可者用之, 其不可者, 亦不加罪。 一, 自古國祚之長短、治道之汚隆, 實原於始祖之一心, 譬如作舍者, 必正其基, 種樹者必培其根。 開國而不謹其初, 則何異於作舍種樹者之不用心於根基也? 伏願殿下, 念玆在玆, 親近正直, 恒聞善道, 政尙寬恤, 惠先困窮, 無嗜細玩而崇大儉, 無信不經而謹庸行, 勤儉以爲之基, 仁義以養其根, 則邦基益固, 本支百世矣。 一, 從諫納誨, 人主之德; 陳善閉邪, 人臣之職。 如以利害爲忌而不盡其職者, 徒取寵祿, 以欺君上而已。 臣等俱以不才, 叨蒙異渥, 職在言責, 何敢緘默, 以負殿下初政求治之美意乎? 昔賈誼痛哭於漢, 而有文帝之盛; 魏徵極言於唐, 而有貞觀之治。 伏惟殿下, 俯採臣等所上條件, 一皆施行, 萬世幸甚。

간관 전백영(全伯英) 등이 상소하였다.

"그윽이 생각하건대, 전하께서는 뛰어난 무덕(武德)의 자질로 왕씨 5백 년의 사업을 대신하여 앉아서 왕위를 받으니, 이 어찌 사람의 계책으로 되는 것이겠습니까? 고려조는 공민왕에 이르러 뒤를 이을 자손이 없었으니, 이것은 하늘이 전하에게 뜻이 있었던 것입니다. 당시의 권력을 잡고 있던 신하들이 망령되게 신우(辛禑)를 공민의 아들이라 하고, 우가 또한 불법한 행동을 많이 하고, 경솔하게 군사를 일으켜 명나라 국경을 침범하려 했으나, 전하께서 대의(大義)로써 여러 장수들을 효유하여 깃대를 돌려서 돌아오니, 간사한 무리들이 스스로 복종하고, 온 나라 백성들이 기뻐하였던 것입니다. 이것도 또한 하늘이 전하로 하여금 왕씨와 바꾸게 한 계기를 만든 것입니다. 전하께서 조민수(曹敏修) 등의 말을 들어 우의 아들 창(昌)을 세웠으나, 창은 아무 것도 몰라 시동(尸童)과 같이 위에 있으므로, 국인(國人)과 상의하여 공양(恭讓)을 임금으로 세우니, 전하께서의 왕씨에 대한 충성은 할 대로 다한 것입니다. 그러나 공양도 혼미(昏迷)하고 시기심이 많아서, 장수와 정승들이 떨어져 나가고 천명(天命)이 돌아서 이에 오늘이 있게 된 것입니다. 대저 하늘이 왕씨를 버린 것은 왕씨를 미워해서가 아니요, 〈왕씨의〉 무도(無道)함을 미워한 것이며, 전하에게 명을 주는 것도 전하를 사랑해서가 아니라 전하의 덕이 있는 것을 사랑한 때문이니, 만일 백성이 덕을 입지 못하면 황천(皇天)이 〈임금이 되라는〉 명을 준 뜻이 아닐 것입니다. 전하께서 즉위할 당초에 널리 덕을 베푼다는 말씀을 반포해서 중외에 영을 내리시고, 이제 또 백성을 평안하게 다스릴 방법을 도평의사사에 문의하니, 이것은 곧 백성들의 큰 다행이며 하늘의 뜻에 보답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신 등은 감격한 나머지 보잘 것 없는 회포를 진술하여 전하께서 구언(求言)하시는 아름다운 뜻에 보답하고자 하오니, 만일에 들어주신다면 대단히 다행일까 하옵니다.

1. 《서전(書傳)》에 이르기를, ‘어린애 보호하듯 하라.’고 하였고, 《예기(禮記)》에는, ‘백성의 힘을 쓰는 것은 3일을 지나지 말라.’고 하였으니, 대개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이 간절하므로 백성의 힘을 적게 쓰려는 것이니, 이것이 성인(聖人)의 남에게 차마 못하는 정사일 것입니다. 《서전》에 이르기를, ‘하늘이 듣는다는 것은 우리 백성들로부터 듣는 것이며, 하늘이 본다는 것은 우리 백성이 보는 것으로부터 본다.’고 하였습니다. 근래에 천문이 변괴(變怪)를 보이고, 뭇까마귀가 날아서 모여드니 모두 두려운 일입니다. 지금 두 도성의 역사를 일시에 일으켜 일은 벅차고 힘은 갈리니, 백성을 괴롭힐 뿐만 아니라, 역사도 또한 쉽게 마치지 못할 것 같습니다.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급하고 급하지 아니한 것을 살피시어 백성의 힘을 덜어 주시면, 백성이 기뻐하고 하늘도 좋아하여 아름다운 징조가 이를 것입니다.

1. 《논어(論語)》에 이르기를, ‘물건을 아껴 쓰고 백성을 사랑하라.’ 하였고, 《주역(周易)》에는, ‘제도를 잘 운용하여 재물도 상하게 하지 말고 백성도 해롭히지 말라.’ 하였으니, 이 두 가지를 합쳐서 보면, 백성을 사랑하면 재물을 상하는 데 이르지 않고, 재물을 상하게 되면 반드시 백성에게 해를 끼치게 되는 것입니다. 옛날 요(堯)임금은 띠[茅]로 집을 잇고 흙으로 축을 쌓았으며, 우(禹)임금은 궁궐을 낮게 지었고, 한(漢)나라 문제(文帝)는 노대(露臺)를 지으려다가 백금(百金)을 아껴서 짓지 아니하여, 천하 고금에서 모두 그 덕을 감복하였습니다. 원컨대, 전하는 이를 본받아서 궁궐의 제도는 될 수 있는 대로 검소하고 간략하게 하고, 쓸데없이 녹만 먹고 있는 관원은 덜 만한 것은 덜고 합칠 만한 것은 합쳐서 국가의 재정을 넉넉하게 하소서. 1. 옛날에는 병정이 정전(井田)에 의거하여 나왔는데, 주(周)나라가 쇠하자 법이 없어지고, 당나라에 이르러 부위(府衛)의 법이 제정되어 옛날과 비슷해졌습니다. 지금 서울에 삼군부(三軍部)를 설치하고, 지방에 시위(侍衛) 각패(各牌)를 두어서 삼군부에 소속시키고 번(番)을 나누어서 드나들게 하니, 이것은 부위의 유법(遺法)입니다. 그러나 전조 말기에 호적이 분명치 못함으로 말미암아 군정으로 징발되어 수고하는 것도 고르지 못하여, 한 집안에서 혹은 시위군으로, 혹은 선병(船兵)으로, 장정이 있는 대로 다 병정에 나가 병역을 감당하기 어려우므로 점점 숨어버렸던 것입니다. 대저 병정이란 정예로운 것이 중요한 것이요, 많음에 힘쓸 것이 아닙니다. 원컨대, 각도로 하여금 사졸(士卒)을 정선하고 군액을 개편하되, 마병은 다섯 군정에 한 군정을 뽑고 보병은 세 군정에 하나를 나오게 하여, 이것으로 제도를 삼는다면 길가는 사람은 지고 이고 하는 수고로움을 면할 것이요, 집에 있는 사람은 생활할 밑천을 장만할 것이니, 급한 때를 당하면 집에 있는 자도 역시 병정에 충당할 수 있습니다. 무사할 때에 병정을 흩어서 농사를 짓게 하고, 농한기(農閑期)에 각각 그 관할하는 패(牌)로 하여금 병기를 검사하고 무예를 배우게 하여 도점(都點)에 대비하고, 사변이 일어났을 때에는 장수로 하여금 통솔하게 하면, 병정은 정예롭지 않음이 없고 먹을 것도 부족함이 없을 것입니다. 항상 근무하는 숙위병은 3군 각영(各領)과 각 애마(愛馬)를 적당히 제정하여 숙위병 가운데 날쌔고 용감한 자를 뽑아서 그 녹관(祿官)에 충당하되, 서로 교대해 가면서 〈녹관을〉 받게 하고, 외부 사람이 난잡하게 받도록 허락하지 말 것이며, 또 토지를 받은 늙고 병든 자들도 또한 장년의 아들이나 사위나 동생이나 조카들로 대신하게 할 것입니다.

1. 전조 말기에 토지의 제도가 문란하여 세력있는 족속들이 토지를 독차지하고, 호적도 역시 폐지되어 양민과 천인이 뒤섞여서 송사가 날로 일어나고, 일족끼리 서로 헐뜯으며, 혹은 산과 들을 통틀어서 남의 토지를 빼앗고, 혹은 세도를 빌려서 법을 어기고 남의 노복을 빼앗으며 양민을 억눌러서 노복을 삼는 데까지 이르러서, 백성이 원망하고 신령이 성을 내어 마침내 나라가 망하게 되었습니다. 전하께서 잠저(潛邸)에 계실 때 통탄히 생각하여 이미 전제(田制)를 고쳐서 그 폐해가 자연히 없어졌으나, 다만 노비(奴婢)에 관한 한 가지 일만은 아직도 송사가 분분합니다. 전하께서는 도감을 설치하고 공정한 관리를 골라서 임명하여, 판결하는 규정을 엄중하게 세우고 기한을 정하여 결말을 내게 하여, 원노비 문서를 상고하여 각각 공문 한 통씩을 주도록 하였으나, 그 원 문권(文券)은 전제(田制)의 예에 의하여 모두 불살라 버려서 서로 다투는 꼬투리를 없게 할 것입니다.

1. 옛날 책[傳]에 이르기를, ‘광무제가 창을 던지고 문예를 강론하였으며, 말타기를 멈추고 도를 논하였다.’ 합니다. 이와 같이 문치(文治)를 서둘렀으므로 후세에 그 성덕을 칭송하였습니다. 지금 전하께서 천명을 받아서 나라를 이룩하고 태평시대를 이루었으니, 마땅히 경연을 열어서 경전과 사기를 토론하여 어느 것이 배울 만하고 어느 것이 경계할 만하며, 옛일을 스승으로 삼아 정치에 참고하소서. 대저 조선은 기자(箕子)의 봉한 나라로 이번에 명나라에서 다시 국호를 주었으니, 〈《서경》〉 홍범(洪範) 한 권은 기자가 말한 것으로 제왕들이 모범으로 하는 것입니다. 비옵건대, 경연에서 먼저 이것을 강의하여 그 가르침을 밝히소서.

1. 임금의 듣고 판단하는 것은 하루에도 만 가지나 되니, 부지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원컨대, 전하께서는 정전(正殿)에 나가 각사에서 올린 일에 대하여 직접 옳고 그른 것을 말씀하시고, 일이 큰 것은 반드시 보필하는 대신들과 의논하여 시행하소서.

1. 관직이란 것은 임금의 큰 권한이니 공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제 군사들의 오래 근무한 공로를 기록하여 관직으로 상을 주고 있으나, 역시 한푼어치의 공도 없이 외람되게 받는 자도 있습니다. 비옵건대, 지금부터는 군이나 민간이나 관리로서 실제로 공적이 있는 자는 차서 없이 발탁하여 사기를 돋우고, 공도 없이 요행만 바란 자는 고신(告身)을 추탈하고서 엄히 징계하여 뒷사람을 경계하소서.

1. 《상서(尙書)》에 말하기를, ‘순(舜)은 비근한 말을 살피기를 좋아하였다.’ 하였고, 또 이르기를, ‘우(禹)는 훌륭한 말을 들으면 절을 하였다.’고 했습니다. 순과 우는 천하의 큰 성인(聖人)으로 지혜가 미치지 아니하는 데가 없고 이치에 밝지 않음이 없었으나, 그러나 이렇게 하는 것은 성인도 스스로 성인으로 여기지 않고 총명을 넓히려는 것입니다. 당나라 덕종(德宗)이 백성의 집에 가서 조광기(趙光奇)의 감히 하는 말을 듣고서 처음으로 백성들의 괴로움을 알았다 하니, 그것은 좌우에 정직한 사람이 없으므로 아랫사람들의 실정이 올라가지 못한 까닭입니다. 지금 전하께서 여러 신하를 찾아서 잘 다스리려는 방법을 물으니, 이것은 즉 순이나 우의 마음입니다. 원컨대, 전하는 이런 마음을 미루어서 아래로는 나무하는 농부에 이르기까지도 숨김없이 말하게 하여, 옳은 말은 쓰고 옳지못한 말이라도 죄를 주지 마소서.

1. 예로부터 나라의 복조(福祚)가 길고 짧은 것과 정사가 잘되고 못되는 것은 실로 시조의 한 마음에 있는 것입니다. 마치 집을 짓는 자가 먼저 그 기초를 잘 닦아야 하고, 나무를 심는 자가 반드시 그 뿌리를 잘 북돋우어 주는 것과 같습니다. 나라를 세우는데 처음 정치를 조심하지 않으면, 어찌 집짓고 나무 심는 사람이 그 기초와 뿌리에 주의하지 않는 것과 다름이 있겠습니까? 엎드려 바라옵건대 전하게서는 이를 생각하고 살피시어 정직한 사람을 친근히 하고 항상 착한 도를 들어서, 정사에는 백성을 너그럽게 구휼하되 먼저 곤궁한 사람에게 은혜를 베풀고 사소한 노리개 같은 것을 좋아하지 말고서 검소함을 숭상하고, 신(信)이 아니면 함부로 행하지 마시며, 부지런하고 검소한 것으로 기초를 삼아 인과 의로 그 근본을 기르게 하면, 나라의 터전이 더욱 굳어지고 백대라도 유지될 것입니다.

1. 간하는 말을 따르고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것은 임금의 덕이요, 착한 일을 베풀고 사특한 일을 못하게 하는 것은 인신(人臣)의 직분입니다. 만약 이해를 꺼려서 그 직분을 다하지 못하는 자는 한갓 은총과 녹봉만 취하고 임금을 속일 뿐입니다. 신 등은 모두 아무 재주도 없이 외람되게 남다른 은총을 받아서 직분이 말하는 책임을 맡고 있으니, 어찌 입을 다물고 전하의 첫 정사의 좋은 정책을 구하는 거룩한 뜻을 저버리겠습니까? 옛날 가의(賈誼)가 한(漢)나라에서 통곡하여 문제의 융성한 시대가 있게 되었고, 위징(魏徵)이 당나라에서 지극한 말을 하여 정관(貞觀)의 치세(治世)가 있었습니다. 삼가 생각하옵건대, 전하께서 신 등의 상소한 조목을 채용하여 그대로 시행하신다면, 만세에 심히 다행한 것입니다."


내구(內廐)를 홀적방동에 짓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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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命判內侍府事金師幸, 作內廐于忽赤房洞。

판내시부사(判內侍府事) 김사행(金師幸)에게 명하여 내구(內廐)를 홀적방동(忽赤房洞)에 짓게 하였다.


8月 3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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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중추원사 평해군 황희석의 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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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庚午/知中樞院事平海君黃希碩卒。 希碩, 平海人。 自上潛邸, 常掌麾下兵有勞, 遂與開國功臣之列。 及寢疾, 上使國醫治之, 不離其側, 遣使問疾相續, 及卒, 上痛悼輟朝, 命義安伯和, 往祭柩前。 贈門下侍郞贊成事, 諡襄武。 官庇葬事, 賻以厚。 子象。

지중추원사 평해군(平海君) 황희석(黃希碩)이 졸(卒)하였다. 희석은 평해 사람이다. 왕이 잠저(潛邸)에 있을 때부터 항상 휘하병(麾下兵)을 맡아 보아 공로가 있으므로 개국 공신에 참여하게 되었다. 병이 들자 왕이 어의(御醫)를 보내서 약을 쓰게 하고 그 곁을 떠나지 못하게 하였으며, 사신을 보내서 문병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돌아가자 왕이 대단히 슬퍼하여 조회도 중지하고 의안백(義安伯) 이화(李和)를 보내서 관 앞에서 제사를 지내게 하고 문하 시랑찬성사(門下侍郞贊成事)로 증직하고서, 양무(襄武)의 시호를 내리었다. 그리고 관(官)에서 장사 비용을 대게 하고 부의(賻儀)를 후하게 내리었다. 아들이 있으니 황상(黃象)이다.


군기감 행랑채에 불이 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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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軍器監廊火。

군기감 행랑이 화재를 당하였다.


8月 6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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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간원 장무에게 용관자(冗官者) 등의 명단을 올리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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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癸酉/召掌務補闕裵規曰: “前日上言冗食者、一家軍役竝行者、無功受職者, 錄名以聞。”

〈사간원의〉 장무(掌務)인 보궐(補闕) 배규(裵規)를 불러서 분부하였다.

"전일 상언에 놀고서 녹을 먹는 자와 한 집에서 여럿이 군역에 나간 자와 아무 공도 없이 직명을 받은 자의 이름을 기록하여 보고하라."


전백영 등이 정사에 부지런할 것을 상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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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全伯英等上疏曰:

臣等猥以庸愚, 幸際昌辰, 濫承言責, 不敢囁嚅, 昨以管見, 仰瀆天聰, 幸蒙垂察, 許令臣等更以條聞, 意欲施行, 此殿下求治之切, 而從諫之美意也。 臣等不勝感激, 謹取所及知者, 錄後以聞, 伏惟殿下推察焉, 幷餘條隨卽施行, 則朝鮮社稷之福也。 夫舜, 天下之大聖; 丹朱, 天下之不肖也。 禹戒舜曰: “無若丹朱傲。 惟慢遊是好, 傲虐是作。” 以禹之大明, 豈不知舜之大聖, 必不至於丹朱之傲乎? 忠誠之至, 猶恐其崇高之位, 一念之不謹, 或至於差, 故其儆戒如此。 殿下自潛邸, 游涉經史, 潛心於歷代之盛衰, 出入中外, 痛心於生民之疾苦, 豈假陳聞而後知乎? 然今日之獻言, 唐、虞君臣相戒之意耳。 伏惟殿下矜察焉。

전백영(全伯英) 등이 상소하였다.

"신 등은 보잘것 없는 자질로 다행히 성대를 만나서 외람되게도 말하는 직책을 맡아 가만히 있을 수 없으므로 어제 좁은 소견으로 천총(天聰)을 번거롭게 하였더니, 다행히 살피시고 신 등으로 하여금 다시 〈자세한〉 조목을 올리게 하여 시행하려고 하시니, 이것은 전하께서 정치를 잘하려는 마음이 간절하고 간하는 말을 좇는 아름다운 뜻입니다. 신 등은 감격을 이기지 못하여 삼가 아는 바를 다음에 기록하여 올리니, 전하께서 이를 살피시고 나머지 〈다른〉 조목도 곧 시행해 주시면 조선 사직의 복이 될 것입니다. 무릇 순임금은 천하의 큰 성인이요, 〈요의 아들〉 단주(丹朱)는 천하의 불초한 자입니다. 〈그 신하〉 우가 순에게 경계하기를, ‘단주와 같이 거만하고 놀기만 좋아하며 못된 짓만 하지 마소서.’ 했으니, 우와 같은 대단히 밝은 분으로서 어찌 순과 같은 큰 성인이 단주와 같이 거만하지 아니할 것을 모르리까마는, 충성이 지극한 나머지 오히려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이 한 번 생각을 잘못하여 혹시나 과오에 빠지지 않을까 하여, 그와 같이 경계한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잠저에 계실 때부터 경전과 사기를 모두 보시어 역대의 성하고 쇠한 것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중외에 출입하여 백성들의 괴로움을 마음 아프게 생각하시니, 어찌 〈일일이〉 알려 드린 뒤에 아시리까마는, 오늘날의 드린 말씀은 당(唐)·우(虞) 시대의 임금과 신하가 서로 경계한 뜻이니, 전하께서는 기쁘게 여기시고 살피소서."


8月 7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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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승지 한상경에게 《대학연의》를 강의하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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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甲戌/召都承旨韓尙敬於淸心亭, 講《大學衍義》。

도승지 한상경(韓尙敬)을 청심정(淸心亭)에 불러서 《대학연의(大學衍義)》를 강의하였다.


섬라곡 사람 장사도를 예빈 경, 진언상을 서운 부정으로 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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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拜暹羅斛張思道爲禮賓卿, 陳彦祥爲書雲副正。

섬라곡 사람 장사도(張思道)를 예빈 경(禮賓卿)으로 삼고, 진언상(陳彦祥)을 서운 부정(書雲副正)에 임명하였다.


8月 8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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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개와 천둥이 치고 우박이 내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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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乙亥/震雷雨雹。

번개와 천둥이 치고 우박이 내리었다.


명나라가 도로를 통하게 해 준 것에 사례하는 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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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遣開城尹李茂, 謝許通道路。 表曰:

臣言。 屢次遣陪臣金立堅、尹思德、李至、朴永忠、慶儀、安宗源等, 齎擎表箋, 前赴京師, 到遼東, 俱蒙都司阻當回還, 驚惶隕越間, 欽蒙聖慈令臣男【今上諱。】及陪臣南在、趙胖、趙琳等赴京, 臣與國人, 不勝感激者。 大聖之德, 惟在包荒, 遠人之心, 擧忻通路, 感深銘骨, 涕出交頤。 伏念臣叨守弊封, 幸逢昭代, 悠悠數載, 雖無補於絲毫, 耿耿孤忠, 庶罔愆於職貢, 故當歲時之朝聘, 必有行李之往來。 頃因貝錦之言, 遂阻梯杭之路, 罔知所以, 無可奈何。 今者, 賤息入覲於闕庭, 陪臣稱慶於聖節, 天不違於咫尺, 臣倍喜於尋常。 玆蓋伏遇皇帝陛下, 端拱九重之中, 明見萬里之外, 諒臣抱冤而無訴, 憐臣納款而靡他, 復令海邦, 獲瞻天日。 臣謹當之屛之翰, 修侯度而益虔; 載寢載興, 祝皇齡於有永。

仍獻良馬十六匹。

개성 윤(開城尹) 이무(李茂)를 명나라에 보내서 도로를 통하게 한 것을 사례하게 하였는데, 그 표문(表文)에는 이러하였다.

"신은 말씀드리나이다. 앞서 여러 번 배신(陪臣) 김입견·윤사덕·이지·박영충·경의·안종원 등을 보내서 표전(表箋)을 받들고 경사(京師)에 다다르기 전에, 요동에 이르러 모두 도사의 막음을 당하고 돌아오게 되어 놀랍고 황송하여 몸둘 곳을 모르던 차에, 삼가 거룩하신 사랑을 받아 신의 아들 이방원(李芳遠)과 배신(陪臣) 남재(南在)·조반(趙胖)·조임(趙琳) 등이 경사(京師)에 가게 되었으니, 신은 온 국민과 더불어 감격해 마지 않는 바입니다. 대성인의 덕은 넓게 포섭하는 데 있고, 먼나라 사람들은 모두 도로의 통하는 것을 기뻐하여 감격이 깊게 뼈에 사무쳐 눈물이 턱까지 흐릅니다. 삼가 생각하건대, 신은 외람되게 이 나라 강토를 맡음에 있어 다행히 성대를 만나 어느덧 수년을 지냈는데 털끝만한 도움도 없었지마는, 한결같은 충성으로 조공(朝貢)하는 직책을 잊지 아니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해마다 신년 조하(朝賀)에 반드시 행리(行李)의 왕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근래에 모함하는 자의 말로 인하여 뱃길조차 막히게 되어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하고 있던 차, 이번에 미천한 자식이 궐정에 들어가 문안하고, 배신들이 성절(聖節)을 경하하여 폐하를 지척에서 뵙게 되니 신은 보통 때보다 갑절이나 기쁩니다. 이제 폐하께서 가만히 구중궁궐에 앉아 있으면서 만리 밖을 밝게 살피시고, 신의 원통함을 품고도 아뢸 곳이 없음을 양찰(諒察)하시며 신의 외교에 다른 뜻이 없음을 어여삐 여기시어, 다시 바다 건너의 나라로 하여금 태양을 얻어 보게 하니, 신은 더욱 경건하게 문후(問候)를 닦아 자나깨나 폐하의 만수무강을 비나이다."

좋은 말 16필을 바치었다.


안주에 성을 쌓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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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城安州。

안주(安州)에 성을 쌓았다.


임금이 직접 천도할 무악 땅을 돌아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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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欲親覽毋岳遷都之地, 率都評議使司及臺省刑曹各一員、親軍衛以行。

임금이 친히 무악(毋岳)의 천도(遷都)할 땅을 보려고 도평의사사와 대성(臺省)·형조의 관원 각각 한 사람씩과 친군위(親軍衛)를 데리고 갔다.


달이 심성을 범하니 유배한 사람을 용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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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書雲觀啓曰: “月犯心星。” 宥流貶人等。

서운관에서 달이 심성(心星)을 범했다고 보고하니, 유배한 사람들을 용서해 주었다.


8月 11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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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이 무악을 둘러보고 유숙하다. 천도할 장소에 대한 분분한 의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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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戊寅/上至毋岳, 相定都之地。 判書雲觀事尹莘達、書雲副正劉旱雨等進曰: “以地理之法觀之, 此地不可爲都。” 上曰: “汝等妄相是非。 此地若有不可, 則考諸本文以聞。” 莘達等退, 相與論議。 上召旱雨問之曰: “此地竟不可乎?” 對曰: “以臣所見, 實爲不可。” 上曰: “此地旣不可, 何地爲可?” 旱雨對曰: “臣不知。” 上怒曰: “汝爲書雲觀, 謂之不知, 欺誰歟? 松都地氣衰旺之說, 汝不聞乎?” 旱雨對曰: “此圖讖所說。 臣但學地理, 未知圖讖。” 上曰: “古人圖讖, 亦因地理而言, 豈憑虛無據而言之? 且言汝心所可者。” 旱雨對曰: “前朝太祖相松山明堂, 作宮闕, 而中葉已後, 明堂久廢, 君王屢徙離宮。 臣疑明堂, 地德不衰, 宜復作闕, 仍都松京。” 上曰: “予將決意遷都。 若曰近境之內, 更無吉地, 則三國所都, 亦爲吉地, 宜合議以聞。” 乃謂左侍中趙浚、右侍中金士衡曰: “書雲觀在前朝之季, 謂松都地德已衰, 數上書請遷漢陽, 近以雞龍爲可都, 動衆興役, 勞擾生民, 今又以此地爲可都, 及其來觀, 則旱雨等曰: 不可, 反以松都明堂爲可, 互相爭論, 以誣國家, 是曾無所懲故也。 卿等趣令書雲員吏, 各陳可都之地以聞。” 兼判書雲觀事崔融及尹莘達、劉旱雨等上書以爲: “一國之內, 扶蘇明堂爲上, 南京次之。” 是夕, 上次于毋岳下。

임금이 무악(毋岳)에 이르러서 도읍을 정할 땅을 물색하는데, 판서운관사 윤신달(尹莘達)과 서운 부정 유한우(劉旱雨) 등이 임금 앞에 나와서 말하였다.

"지리의 법으로 보면 여기는 도읍이 될 수 없습니다."

이에 임금이 말하였다.

"너희들이 함부로 옳거니 그르거니 하는데, 여기가 만일 좋지 못한 점이 있으면 문서에 있는 것을 가지고 말해 보아라."

신달 등이 물러가서 서로 의논하였는데, 임금이 한우를 불러서 물었다.

"이곳이 끝내 좋지 못하냐?"

한우가 대답하였다.

"신의 보는 바로는 실로 좋지 못합니다."

임금이 또 말하였다.

"여기가 좋지 못하면 어디가 좋으냐?"

한우가 대답하였다.

"신은 알지 못하겠습니다."

임금이 노하여 말하였다.

"네가 서운관이 되어서 모른다고 하니, 누구를 속이려는 것인가? 송도(松都)의 지기(地氣)가 쇠하였다는 말을 너는 듣지 못하였느냐?"

한우가 대답하였다.

"이것은 도참(圖讖)으로 말한 바이며, 신은 단지 지리만 배워서 도참은 모릅니다."

임금이 말하였다.

"옛사람의 도참도 역시 지리로 인해서 말한 것이지, 어찌 터무니없이 근거 없는 말을 했겠느냐? 그러면 너의 마음에 쓸만한 곳을 말해 보아라."

한우가 대답하였다.

"고려 태조가 송산(松山) 명당(明堂)에 터를 잡아 궁궐을 지었는데, 중엽 이후에 오랫동안 명당을 폐지하고 임금들이 여러 번 이궁(離宮)으로 옮겼습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명당의 지덕(地德)이 아직 쇠하지 않은 듯하니, 다시 궁궐을 지어서 그대로 송경(松京)에 도읍을 정하는 것이 좋을까 합니다."

임금이 말하였다.

"내가 장차 도읍을 옮기기로 결정했는데, 만약 가까운 지경에 다시 길지(吉地)가 없다면, 삼국 시대의 도읍도 또한 길지가 됨직하니 합의해서 알리라."

하고, 좌시중 조준(趙浚)·우시중 김사형(金士衡)에게 일렀다.

"서운관이 전조 말기에 송도의 지덕이 이미 쇠했다 하고 여러 번 상서하여 한양(漢陽)으로 도읍을 옮기자고 하였었다. 근래에는 계룡산이 도읍할 만한 땅이라고 하므로 민중을 동원하여 공사를 일으키고 백성들을 괴롭혔는데, 이제 또 여기가 도읍할 만한 곳이라 하여 와서 보니, 한우 등의 말이 좋지 못하다 하고, 도리어 송도 명당이 좋다고 하면서 서로 논쟁을 하여 국가를 속이니, 이것은 일찍이 징계하지 않은 까닭이다. 경 등이 서운관 관리로 하여금 각각 도읍될 만한 곳을 말해서 알리게 하라."

이에 겸판서운관사 최융(崔融)과 윤신달·유한우 등이 상서하였다.

"우리 나라 내에서는 부소(扶蘇) 명당이 첫째요, 남경(南京)이 다음입니다."

이날 저녁에 임금이 무악 밑에서 유숙하였다.


8月 12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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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이 도읍터를 잡기 위해 왕사 자초를 부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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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己卯/上飯王師自超於帳殿。 初, 上欲來相宅, 先遣人邀之。

임금이 왕사(王師) 자초(自超)를 장막 안으로 불러들여 밥을 먹이었다. 처음에 임금이 여기 와서 터를 잡으려고 할 때 먼저 사람을 보내서 맞아온 것이다.


도읍터에 관한 논의에 판삼사사 정도전이 국가 치란은 사람에 달려 있음을 역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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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命諸宰相, 各上書議遷都之地。 判三司事鄭道傳曰:

一, 此地居國之中, 漕運所通。 所恨介於一洞之間, 內而宮寢, 外而朝市宗社之位, 無所容焉, 非王者居重御輕之所也。 一, 臣不學陰陽術數之說, 而今者衆多之論, 皆不出陰陽術數之外, 臣固不知所言。 孟子曰: “幼而學之, 壯而欲行之。” 請以平日所學言之。 武[成]王定鼎于郟鄏, 卽關中也。 卜年八百, 傳祚三十。 至十一代孫平王, 乃周興四百四十九年, 遷于洛陽, 而秦人都于西周舊地; 周至三十代赧王乃亡, 秦人代之。 由是觀之, 所謂三十代八百年周家之數, 無係於地也。 漢高祖與項羽同伐秦, 韓生勸羽留都關中, 羽見宮室焚燒、人民屠殺, 不樂。 有人以術數說羽曰: “隔壁揚鈴, 喜聽其聲, 不見其形, 曰是祖宗山川, 思欲見之。” 羽信之, 東還彭城; 漢高用劉敬之言, 卽日西都關中, 羽乃滅亡, 漢德配天。 自是宇文周、楊隋相繼都關中, 唐亦因之, 德與漢配。 由是言之, 人有治亂, 地無盛衰, 可知矣。 一, 中國之爲天子多矣。 所都之地, 西則關中, 如臣所言; 東則金陵, 而晋、宋、齊、梁、陳, 以次都之; 中則洛陽, 梁、唐、晋、漢、周繼都此地, 宋又因之, 而大宋之德, 不下漢、唐; 北則燕京, 而大遼、大金、大元皆都之。 且以天下之大, 歷代所都, 不過數四處, 其當一代之興, 豈無明術者乎? 誠以帝王都會之地, 自有定處, 非可以術數計度得之也。 一, 東方三韓舊都, 東有雞林, 南有完山, 北有平壤, 中有松京。 然雞林、完山, 僻處一隅, 豈可使王業偏安於此乎? 平壤逼近北方, 臣恐非所宜都也。 一, 殿下初卽位, 承前朝毁廢之餘, 生民未蘇, 邦本未固, 是宜鎭靜, 休養民力。 仰察天時, 俯察人事, 相地之宜, 待時而動, 則庶乎萬全。 朝鮮之業, 垂於無窮, 而臣之子孫, 亦與有永矣。 一, 今之言地氣盛衰者, 非其心自有覺處, 皆傳聞古人之說也, 臣之所言, 亦皆古人已驗之說也。 豈在術數者爲可信, 而在儒者爲不可信乎? 伏望殿下留意量度, 參之以人事。 人事盡, 然後稽之卜筮, 動罔不吉。

임금이 여러 재상들에게 분부하여 각각 도읍을 옮길 만한 터를 글월로 올리게 하니, 판삼사사(判三司事) 정도전(鄭道傳)이 말하였다.

"1. 이곳이 나라 중앙에 위치하여 조운(漕運)이 통하는 것은 좋으나 한스러운 것은 한 골짜기에 끼어 있어서, 안으로 궁침(宮寢)과 밖으로 조시(朝市)와 종사(宗社)를 세울 만한 자리가 없으니 왕자의 거처로서 편리한 곳이 아닙니다.

1. 신은 음양술수(陰陽術數)의 학설을 배우지 못하였는데, 이제 여러 사람의 의논이 모두 음양술수를 벗어나지 못하니, 신은 실로 말씀드릴 바를 모르겠습니다. 맹자의 말씀에, ‘어릴 때에 배우는 것은 장년이 되어서 행하기 위함이라.’ 하였으니, 청하옵건대, 평일에 배운 바로써 말하겠습니다. 〈주나라〉 성왕(成王)이 겹욕(郟鄏)에 도읍을 정하니, 곧 관중(關中)으로 30대 8백 년을 전하였습니다. 11대손인 평왕(平王) 때에 이르러 주나라가 일어난 지 4백 49년 만에 낙양(洛陽)으로 천도하고, 진(秦)나라 사람이 서주(西周) 옛땅에 도읍을 정하였는데, 주나라는 30대 난왕(赧王)에 이르러 망하고 진나라 사람들이 이를 대신하였습니다. 이로써 보면 30대 8백 년이라 하는 주나라의 운수는 지리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한나라 고조(高祖)가 항우(項羽)와 함께 진(秦)나라를 칠 때, 한생(韓生)이 항우에게 관중(關中)에 도읍할 것을 권했으나, 항우가 궁궐이 다 타버리고 사람이 많이 죽은 것을 보고 좋아하지 아니하니, 어느 사람이 술수로 항우를 달래되, ‘벽(壁)을 사이에 두고 방울을 흔들면 그 소리는 듣기 좋아도 보이지 않는 것이니, 부귀(富貴)해진 뒤에는 고향 산천(山川)으로 돌아가야 됩니다.’ 하니, 항우가 그 말을 믿고 동쪽 팽성(彭城)으로 돌아가고 한 고조는 유경(劉敬)의 말에 의하여 그날로 서쪽 관중에 도읍을 정하였는데, 항우는 멸망했으나 한 나라의 덕은 하늘과 같았습니다. 이후로 우문씨(宇文氏)의 주(周)나라와 양견(楊堅)의 수(隋)나라가 서로 이어가면서 관중에 도읍하고, 당나라도 역시 도읍하여 덕이 한나라와 같았으니, 이것으로 말하면 〈국가의〉 잘 다스려짐과 어지러움은 사람에게 있는 것이지 지리의 성쇠(盛衰)에 있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1. 중국에서 천자가 된 사람이 많되 도읍하는 곳은, 서쪽은 관중으로 신이 말한 바와 같고, 동쪽은 금릉(金陵)으로 진(晉)나라·송(宋)나라·제(齊)나라·양(梁)나라·진(陳)나라가 차례로 도읍하여 중앙에는 낙양(洛陽)으로 양나라·당나라·진(晉)나라·한나라·주나라가 계속 이곳에 도읍하였으며, 송나라도 인해 도읍을 하였는데 대송(大宋)의 덕이 한 나라·당 나라에 못지 않았으며, 북쪽에는 연경(燕京)으로서 대요(大遼)·대금(大金)·대원(大元)이 다 도읍을 하였습니다. 〈중국과 같은〉 천하의 큰 나라로서도 역대의 도읍한 곳이 수사처(數四處)에 지나지 못하니, 한 나라가 일어날 때, 어찌 술법에 밝은 사람이 없었겠습니까? 진실로 제왕의 도읍한 곳은 자연히 정해 좋은 곳이 있고, 술수로 헤아려서 얻는 것이 아닙니다.

1. 우리 나라는 삼한(三韓) 이래의 구도(舊都)로서, 동쪽에는 계림(鷄林)이 있고 남쪽에는 완산(完山)이 있으며, 북쪽에는 평양(平壤)이 있고 중앙에는 송경(松京)이 있는데, 계림과 완산은 한쪽 구석에 있으니, 어찌 왕업을 편벽한 곳에 둘 수 있습니까? 평양은 북쪽이 너무 가까우니, 신은 도읍할 곳이 못된다고 생각합니다.

1. 전하께서 〈기강이〉 무너진 전조의 뒤를 이어 처음으로 즉위하여 백성들이 소생되지 못하고 나라의 터전이 아직 굳지 못하였으니, 마땅히 〈모든 것을〉 진정시키고 민력(民力)을 휴양하여, 위로 천시(天時)를 살피시고 아래로 인사(人事)를 보아 적당한 때를 기다려서 도읍터를 보는 것이 만전(萬全)한 계책이며, 조선의 왕업이 무궁하고 신(臣)의 자손도 함께 영원할 것입니다.

1. 지금 지기(地氣)의 성쇠를 말하는 자들은 마음속으로 깨달은 것이 아니라, 다 옛사람들의 말을 전해 듣고서 하는 말이며, 신이 말한 바도 또한 옛날사람들이 이미 징험한 말입니다. 어찌 술수한 자만 믿을 수 있고 선비의 말은 믿을 수 없겠습니까? 삼가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깊이 생각하여 인사를 참고해 보시고, 인사가 다한 뒤에 점을 상고하시어 자칫 불길함이 없도록 하소서."


부소를 도읍으로 하자는 문하 시랑 찬성사 성석린의 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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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門下侍郞贊成事成石璘曰: “此地山水之會, 漕運之通則可謂吉矣。 然明堂傾窄, 後山低微, 規局不合王者之都。 夫以天下之大, 帝王之所都, 不過數處。 況於一國之內, 豈易多得? 扶蘇山水, 或有逆處, 故先賢有左右蘇巡住之說。 乞於近處卜地, 爲巡住之所, 以扶蘇明堂爲本闕, 則幸甚。 安有扶蘇獨爲王氏出, 而不可爲後王之都之理乎? 且休養民力, 以待數年, 然後議之, 未晩也。”

문하 시랑찬성사(門下侍郞贊成事) 성석린(成石璘)이 말하였다.

"이곳은 산과 물이 모여들고 조운(漕運)이 통할 수 있어 길지(吉地)라 할 수 있으나, 명당이 기울어지고 좁으며, 뒷산이 약하고 낮아서, 규모가 왕자의 도읍에 맞지 않습니다. 대저 천하의 큰 나라도 제왕의 도읍은 몇 곳에 불과한데, 하물며 한 나라 안에서 어찌 흔하게 얻을 수 있겠습니까? 부소(扶蘇)의 산수(山水)는 혹 거슬려 놓인 데가 있으므로 선현들이 좌소(左蘇)와 우소(右蘇)에 돌아가면서 거주하자는 말이 있으나, 그 근처에 터를 잡아서 순주(巡住)하는 곳을 삼고, 부소 명당으로 본 궁궐을 지으면 심히 다행일까 합니다. 어찌 부소 명당이 왕씨만을 위하여서 생겼고 뒷임금의 도읍이 되지 않을 이치가 있겠습니까? 또 민력을 휴양하여 두어 해 기다린 뒤에 의논하는 것도 늦지 않을까 합니다."


부소를 도읍으로 하자는 정당 문학 정총의 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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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政堂文學鄭摠曰: “定都之所, 自古爲難。 且以天下之大, 曰關中、曰汴梁、曰金陵數地而已, 豈我小邦處處有之? 周都關中, 秦代之, 仍都關中, 秦亡漢代之, 亦都其地。 汴梁, 五代都之, 金陵則六朝所都。 道詵謂: ‘若都扶蘇, 統有三土。’ 前朝自始祖王建已前, 三國鼎峙, 統三以後, 只都開京。 王氏之終於五百年, 以其運數, 而不必係於地德。 若以周、秦、漢相繼而都一地觀之, 雖開京似無害也。 苟舍是而他求, 則更使廣覓之, 斯可矣。 毋岳之地, 明堂甚狹, 主山陷溺, 水口無關鏁。 夫豈吉地而古人不用之乎?”

정당 문학(政堂文學) 정총(鄭摠)이 말하였다.

"도읍을 정하는 것은 옛날부터 어려운 일입니다. 천하의 큰나라 〈중국 〉도 관중(關中)이니 변량(汴梁)이니 금릉(金陵)이니 하는 두어 곳 뿐인데, 어찌 우리 작은 나라로서 곳곳에 있겠습니까? 주나라가 관중(關中)에 도읍하였고, 진(秦)나라가 대신하여 관중(關中)에 도읍하였으며, 진 나라가 망하고 한 나라가 대신해도 역시 거기에 도읍하였으며, 변량은 5대(代)가 도읍하고 금릉은 6조(朝)가 도읍한 곳입니다. 도선(道詵)이 말하기를, ‘만약 부소에 도읍하면 세 나라 강토를 통일해 가질 수 있다.’고 했습니다. 전조는 시조 왕건(王建) 이전 3국이 정립할 때부터 3국을 통일한 이후에 단지 개성에 도읍하였는데, 왕씨가 5백 년에 끝나는 것은 운수(運數)이며 지리에 관련시킬 것이 아닙니다. 만약에 주 나라·진 나라·한 나라가 서로 계속해 가면서 한 곳에 도읍한 것을 보면, 비록 개성이라도 해가 없을 것 같습니다. 구태여 여기를 버리고 다른 곳을 구하려면, 다시 널리 찾아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무악의 터는 명당이 심히 좁고 뒷 주룡(主龍)이 낮으며, 수구(水口)가 쌓이지 않았으니, 길지(吉地)라면 어찌 옛사람이 쓰지 않았겠습니까?"


비기로 볼 때 도읍지로 무악이 좋다는 첨서중추원사 하윤의 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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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僉書中樞院事河崙曰: “東方古都享國長久者, 雞林、平壤而已。 毋岳, 形勢雖卑狹, 比之雞林、平壤, 宮闕之基, 實爲寬廣, 加以居國之中, 漕運所通, 表裏山河, 又有可憑, 東方前賢密說, 亦多相契。 又中國地理諸家, 山水朝聚之說, 擧皆相近, 故於前日對問具陳。 伏惟王者之興, 自有天命, 定都之事, 不可輕議。 若欲順一時人心, 以除民弊, 宜且安於松都, 若欲用前賢之說, 以立萬世之基, 無過於此。”

첨서중추원사(僉書中樞院事) 하윤(河崙)이 말하였다.

"우리 나라 옛 도읍으로 국가를 오래 유지한 것은 계림과 평양 뿐입니다. 무악의 국세(局勢)가 비록 낮고 좁다 하더라도, 계림과 평양에 비하여 궁궐의 터가 실로 넓고, 더구나 나라의 중앙에 있어 조운이 통하며, 안팎으로 둘러싸인 산과 물이 또한 증빙할 만하여, 우리 나라 전현(前賢)의 비기(秘記)에 대부분 서로 부합되는 것입니다. 또 중국의 지리에 대한 제가(諸家)들의 산과 물이 안으로 모여든다는 설과도 서로 가까우므로, 전일 면대하여 물으실 때에 자세히 말씀드렸습니다. 삼가 생각하옵건대, 임금이 일어남에는 스스로 천명(天命)을 갖고 있는 것이나, 도읍을 정하는 일은 경솔하게 논의할 수 없는 것입니다. 만약 한때의 인심에 순응하여 민폐를 덜려면 송도에 그대로 있을 것이요, 전현(前賢)의 말씀에 의하여 만세의 터전을 세우려면 이보다 나은 곳이 없습니다."


무악이 좁기는 하나 비결에서 말한 곳이라는 것을 구체적으로 열거한 중추원 학사 이직의 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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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樞院學士李稷曰: “遷都立國之地, 考之地理書, 其大槪曰: ‘萬水千山, 俱朝一神, 大山大水處, 爲王都帝闕之地。’ 此以氣脈所聚、漕運所通爲言也。 又曰: ‘方千里而王者, 四方各五百里; 方五百里而王者, 四方各五十里。’ 此以道里所均爲言也。 又東方密說曰: ‘三角南面。’ 又曰: ‘臨漢江。’ 又曰: ‘毋山。’ 此地所以擧論也。 大抵卜地遷都, 至爲重事, 非一二人所見能定也, 必應天順人, 而後可爲也。 是故《書》曰: ‘龜從, 筮從, 卿士從, 庶民從。’ 不如是則不可決也。 今之遷不遷, 自有時數, 臣安敢輕議! 殿下出自天心, 又視人心所向, 卽順天也。 毋岳明堂, 臣亦以爲狹矣。”

중추원 학사 이직(李稷)이 말하였다.

"도읍을 옮기고 나라를 세우는 곳에 대하여 지리책을 상고해 보니, 대개 말하기를, ‘만갈래의 물과 천봉의 산이 한 곳으로 향한 큰 산과 큰 물이 있는 곳에 왕도와 궁궐을 정할 수 있는 땅이라.’ 하였습니다. 이것은 산의 기맥이 모이고 조운이 통하는 곳을 말한 것입니다. 또 이르기를, ‘지방 천리로써 임금이 된 사람은 〈수도를〉 4방 5백 리로 하고, 지방 5백 리로 임금이 된 자는 〈수도를〉 4방 각 50리로 한다’ 하였으니 이것은 〈4방〉 도로의 거리를 고르게 하기 위하여 말한 것이며, 우리 나라 비결에도 이르기를, ‘삼각산 남쪽으로 하라.’ 했고, ‘한강에 임하라.’ 했으며, 또, ‘무산(毋山)이라.’ 했으니, 이곳을 들어서 말한 것입니다. 대저 터를 잡아서 도읍을 옮기는 것은 지극히 중요한 일로서 한두 사람의 소견으로 정할 것이 아니며, 반드시 천명에 순응하고 인심을 따른 뒤에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서전》에 말하기를, ‘거북점도 따르고 시초점도 따르며 공경(公卿)과 사대부도 따르고 서민도 따라야 한다.’ 했으니, 이와 같이 하지 않으면 결정할 수 없는 것입니다. 지금 〈도읍을〉 옮기고 안 옮김은 때와 운수가 있는 것이니, 신이 어찌 쉽게 의논하겠습니까? 전하께서 〈천도하려는 것은〉 천심에서 나오고 또 인심의 향하는 바를 살피시니, 곧 하늘에 순응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무악의 명당은 신도 역시 좁다고 생각합니다."


천도에 대한 재상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한양으로 행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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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以諸宰相所上議論, 多以遷都爲不可, 故有不豫色曰: “予將還都, 決疑於昭格殿。” 旣而次于南京。

임금이 여러 재상들의 제시한 의논이 대개 천도(遷都)를 옳지 않다고 한 까닭에 언짢은 기색으로 말하였다.

"내가 개성으로 돌아가 소격전(昭格殿)에서 의심을 해결하리라."

이에 남경으로 행차하였다.


8月 13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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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사 자초와 여러 신하들의 의견을 들어 한양을 도읍으로 정하다. 적성 광실원이 좋다는 의견도 나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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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庚辰/上相宅于舊闕之基, 觀望山勢, 問尹莘達等曰: “此地何如?” 對曰: “我國境內, 松京爲上, 此地爲次。 所可恨者, 乾方低下, 水泉枯涸而已。” 上悅曰: “松京亦豈無不足處乎? 今觀此地形勢, 可爲王都。 況漕運通道里均, 於人事亦有所便乎?” 上問王師自超: “此地如何?” 超對曰: “此地, 四面高秀, 中央平衍, 宜爲城邑。 然從衆議乃定。” 上令諸宰相議之, 僉曰: “必欲遷都, 此處爲可。” 河崙獨曰: “山勢雖似可觀, 然以地法論之則不可。” 上以衆人之言, 定都漢陽。 前典書楊元植進曰: “臣之所藏密書, 前者承命已進。 積城廣實院東有山, 問其居人, 名曰雞足。 相其地, 密書所說, 似相近也。” 上曰: “漕運不通, 安敢爲都會之處乎?” 元植對曰: “自臨津至長湍, 水深可以行舟。” 上遂上輦, 相營宗廟之地, 次于盧原驛郊。

임금이 남경의 옛 궁궐터에 집터를 살피었는데, 산세를 관망(觀望)하다가 윤신달 등에게 물었다.

"여기가 어떠냐?"

그가 대답하였다.

"우리 나라 경내에서는 송경이 제일 좋고 여기가 다음가나, 한되는 바는 건방(乾方)[51]이 낮아서 물과 샘물이 마른 것뿐입니다."

임금이 기뻐하면서 말하였다.

"송경 인들 어찌 부족한 점이 없겠는가? 이제 이곳의 형세를 보니, 왕도가 될 만한 곳이다. 더욱이 조운하는 배가 통하고 사방의 이수도 고르니, 백성들에게도 편리할 것이다."

임금이 또 왕사(王師) 자초(自超)에게 물었다.

"어떠냐?"

자초가 대답하였다.

"여기는 사면이 높고 수려(秀麗)하며 중앙이 평평하니, 성을 쌓아 도읍을 정할 만합니다. 그러나 여러 사람의 의견을 따라서 결정하소서."

임금이 여러 재상들에게 분부하여 의논하게 하니, 모두 말하였다.

"꼭 도읍을 옮기려면 이곳이 좋습니다."

하윤이 홀로 말하였다.

"산세는 비록 볼 만한 것 같으나, 지리의 술법으로 말하면 좋지 못합니다."

임금이 여러 사람의 말로써 한양(漢陽)을 도읍으로 결정하였다. 그런데 전 전서 양원식(楊元植)이 나와서 말하였다.

"신이 가지고 있던 비결은 앞서 이미 명령을 받아서 올렸거니와, 적성(積城) 광실원(廣實院) 동쪽에 산이 있어 거기에 사는 사람들에게 물으니, 계족산(雞足山)이라 하는데, 그 곳을 보니 비결에 쓰여 있는 것과 근사합니다."

이에 임금이 말하였다.

"조운할 배가 통할 수 없는데, 어찌 도읍 터가 되겠는가?"

원식(元植)이 대답하였다.

"임진강에서 장단까지는 물이 깊어서 배가 다닐 수 있습니다."

임금은 그만 연(輦)을 타고 종묘 지을 터를 보고서 노원역(盧原驛) 들판에 이르러 유숙하였다.


민정을 징발하여 옛 서울의 성 쌓는 공사를 마치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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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命都評議使司, 徵發慶尙、全羅、忠淸、江原、豐海、京畿左右道民丁, 以畢舊京築城之役。

도평의사사에 명하여 경상·전라·충청·강원·풍해·경기좌·우도의 민정(民丁)을 징발하여 옛 서울의 성 쌓는 공사를 마치게 하였다.


8月 15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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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 무지개가 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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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壬午/白虹見。

흰 무지개가 보이었다.


회암사에 거둥하고 풍천 서쪽에서 유숙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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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幸檜巖寺, 飯僧, 次于楓川西邊。 左侍中趙浚有疾, 賜肩輿, 命先還京。

회암사(檜巖寺)에 거둥하여 중들에게 밥을 먹이고, 풍천(楓川) 서쪽에 이르러 유숙하였다. 좌시중 조준이 앓으니, 견여(肩輿)를 주어서 먼저 송경(松京)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왜구가 충청도 안성에 침입하다. 수군 만호 장용검이 배 9척을 노획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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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倭寇忠淸道。 安城水軍萬戶張龍劒, 獲倭船九艘。

왜구(倭寇)가 충청도 안성에 침입하였는데, 수군 만호 장용검(張龍劍)이 왜선 9척을 노획하였다.


8月 16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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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 무지개가 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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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癸未/白虹見。

흰 무지개가 보이었다.


광실원을 둘러 본 후 장단에서 다락배를 타고 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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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至廣實院東, 相楊元植所言可都之地, 僉曰不可乃止。 至長湍渡, 乘樓船, 宰相耆老皆獻壽。 酒酣, 檢校侍中南乙蕃起舞, 上顧謂南誾曰: “卿父母俱存, 而身爲宰相。 我雖今日貴爲一國之君, 奚及於卿!” 因泣下。 順流而下, 次于下灘邊。

임금이 광실원(廣實院) 동쪽에 이르러 양원식이 말한 도읍할 만하다는 곳을 보았는데 모두 좋지 못하다고 말하여 그만두고, 장단 나루에 이르러 다락배를 타고 노니, 재상들과 노인들이 모두 헌수(獻壽)하였다. 술이 거나하게 취하자, 검교 시중 남을번(南乙蕃)이 일어나 덩실덩실 춤을 추니, 임금이 남은을 돌아보고 말하기를,

"경은 부모가 모두 계시고 몸이 재상이 되었는데, 나는 비록 오늘날 일국의 임금으로 귀하게 되었다 해도 어찌 경에게 미치겠는가?"

하고서 흐느끼며 눈물을 흘렸다. 물을 따라 내려와 아래 여울 가에서 유숙하였다.


8月 17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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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 무지개가 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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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甲申/白虹見。

흰 무지개가 보이었다.


고려조의 신경(新京) 터를 둘러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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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次于臨津縣北, 觀前朝新京之地。

임진현 북쪽에서 유숙하고, 전조(前朝)의 신경(新京) 터를 보았다.


8月 18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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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리가 말한 도라산 터를 둘러 보고, 송경으로 돌아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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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乙酉/以閔中理所言, 相都羅山。 上曰: “此汚濕之地, 何以爲都?” 遂還松京。 王世子謁于道, 各司迎于天水寺前。

민중리(閔中理)의 말한 바에 의하여 도라산(都羅山) 터를 둘러보고서 임금이 말하였다.

"이렇게 더럽고 습한 곳이 어찌 도읍이 될 수 있단 말인가?"

드디어 송경으로 돌아오니, 왕세자는 도중에 나와서 배알하고 각사 〈관원들은〉 천수사(天水寺) 앞에서 맞이하였다.


8月 21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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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수감 송희정이 말 천 필을 요동에서 교부하고 돌아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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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戊子/遣司水監宋希靖, 獻馬一千匹, 至遼東交割而還。

사수감(司水監) 송희정(宋希靖)을 보내서 말 1천 필을 바치게 하였는데, 요동에 이르러 교부하고 돌아왔다.


원구단의 제사는 폐지하지 않고 이름만 원단으로 고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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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禮曹啓曰: “吾東方自三國以來, 祀天于圓丘, 祈穀祈雨, 行之已久, 不可輕廢。 請載祀典, 以復其舊, 改號圓壇。” 上從之。

예조에서 아뢰었다.

"우리 나라에서는 삼국 시대 이래로 원구단(圜丘壇)에서 하늘에 제사를 올리고 기곡(祈穀)과 기우(祈雨)를 행한 지 이미 오래 되었으니, 경솔하게 폐할 수 없습니다. 사전(祀典)에 기록하여 옛날 제도를 회복하되 이름을 원단(圜壇)이라 고쳐 부르기 바랍니다."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백관에게 품계에 따라 말을 바치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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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令百官各品, 出馬有差。

백관 각 품계에 따라서 차등이 있게 각각 말[馬]을 내게 하였다.


8月 22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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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구가 영광군에 침입하다. 염전의 인부들이 힘껏 싸워 쫓아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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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己丑/倭寇靈光郡, 倭船十餘艘。 鹽夫三十餘人, 力戰斬三級, 寇敗走。

왜구가 영광군(靈光郡)에 침입하였는데 왜선이 10여 척이었다. 소금 굽는 인부 30여 인이 힘껏 싸워서 세 사람을 목 베이니, 왜구들이 쫓겨갔다.


도량고와 내제석원을 혁파하고 복흥고를 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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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罷道場庫、內帝釋院, 置福興庫。

도량고(道場庫)와 내제석원(內帝釋院)을 파하고 복흥고(福興庫)를 두었다.


8月 24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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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승지 한상경에게 《대학연의》를 강의하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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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辛卯/上坐淸心亭, 命都承旨韓尙敬, 講《大學衍義》。

임금이 청심정(淸心亭)에 거둥하여 도승지 한상경으로 하여금 《대학연의(大學衍義)》를 강의하게 하였다.


도평의사사에서 한양으로 도읍 정할 것을 아뢰니 가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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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都評議使司所申: “左政丞趙浚、右政丞金士衡等竊惟, 自古王者受命而興, 莫不定都, 以宅其民。 故堯都平陽, 夏都安邑, 商都亳, 周都豐鎬, 漢都咸陽, 唐都長安。 或因初起之地, 或擇形勢之便, 無非所以重根本而鎭四方也。 惟我東方, 檀君以來, 或合或分, 各有所都, 及前朝王氏統合之後, 都于松嶽, 子孫相傳, 殆五百年, 運祚旣終, 自底于亡。 恭惟殿下, 以盛德神功, 受天之命, 奄有一國, 旣更制度, 以建萬世之統, 宜定厥都, 以立萬世之基。 竊觀漢陽, 表裏山河, 形勢之勝, 自古所稱, 四方道里之均, 舟車所通。 定都于玆, 以永于後, 允合天人之意。” 王旨依申。

도평의사사에서 상신(上申)하였다.

"좌정승 조준·우정승 김사형 등은 생각하건대, 옛날부터 임금이 천명을 받고 일어나면 도읍을 정하여 백성을 안주시키지 않음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요(堯)는 평양(平陽)에 도읍하고, 하(夏)나라는 안읍(安邑)에 도읍하였으며, 상(商)나라는 박(亳)에, 주(周)나라는 풍호(豊鎬)에, 한(漢)나라는 함양(咸陽)에, 당나라는 장안(長安)에 도읍하였는데, 혹은 처음 일어난 땅에 정하기도 하고, 혹은 지세(地勢)의 편리한 곳을 골랐으나, 모두 근본되는 곳을 소중히 여기고 사방을 지정하려는 것이 아님이 없었습니다. 우리 나라는 단군 이래로 혹은 합하고 혹은 나누어져서 각각 도읍을 정했으나, 전조 왕씨가 통일한 이후 송악에 도읍을 정하고, 자손이 서로 계승해 온 지 거의 5백 년에 천운이 끝이 나서 자연히 망하게 되었습니다. 삼가 생각하옵건대, 전하께서는 큰 덕과 신성한 공으로 천명을 받아 한 나라를 차지하시어 이미 또 제도를 고쳐서 만대의 국통(國統)을 세웠으니, 마땅히 도읍을 정하여 만세의 기초를 잡아야 할 것입니다. 그윽이 한양을 보건대, 안팎 산수의 형세가 훌륭한 것은 옛날부터 이름난 것이요, 사방으로 통하는 도로의 거리가 고르며 배와 수레도 통할 수 있으니, 여기에 영구히 도읍을 정하는 것이 하늘과 백성의 뜻에 맞을까 합니다."

왕지(王旨)로 아뢴 대로 하도록 하였다.


三年 九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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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月 1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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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도 궁궐 조성 도감을 설치하고 담당 관리를 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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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戊戌朔/置新都宮闕造成都監。 以靑城伯沈德符、左僕射金湊、前政堂文學李恬、中樞院學士李稷爲判事。

신도 궁궐 조성 도감(新都宮闕造成都監)을 설치하고, 청성백(靑城伯) 심덕부(沈德符)와 좌복야(左僕射) 김주(金湊), 전 정당 문학 이염(李恬), 중추원 학사 이직(李稷)을 판사(判事)로 임명하였다.


9月 2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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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음이 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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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己亥/氷。

얼음이 얼었다.


9月 4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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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의중추원사 정남진을 천추사로 보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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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辛丑/遣商議中樞院事鄭南晋, 賀千秋節。

상의중추원사(商議中樞院事) 정남진(鄭南晉)을 명나라에 보내어 천추절을 축하하게 하였다.


9月 5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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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공조 전서 임수가 말 5백 필을 요동에서 교부하고 돌아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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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壬寅/遣前工曹典書任壽, 獻馬五百匹, 至遼東交割而還。

전 공조 전서(工曹典書) 임수(任壽)를 명나라에 보내서 말[馬] 5백 필을 바치게 하였는데, 요동에 가서 교부하고 돌아왔다.


9月 6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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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고 전민사를 각도에 보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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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癸卯/分遣倉庫田民使于各道。

창고 전민사(倉庫田民使)를 각도에 나누어 보내었다.


9月 8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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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근·한이·이천우·황성·강계권·이서에게 새 관직을 제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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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乙巳/以權近爲僉書中樞院事, 韓理藝文春秋館學士, 李天祐、黃誠、康季權商議中樞院事, 李舒司憲府大司憲。 誠, 永奇之父。 永奇奉使而還, 稍恭謹不如諸宦橫暴, 故官其父。

권근(權近)을 첨서중추원사로 삼고, 한이(韓理)를 예문춘추관 학사로, 이천우(李天祐)·황성(黃誠)·강계권(康季權)을 상의중추원사로, 이서(李舒)를 사헌부 대사헌에 임명하였다. 황성은 황영기(黃永奇)의 부친이다. 영기가 사신의 명을 띠고 돌아와서 약간 공순하고 근신하여 다른 환관들과 같이 횡포하지 아니하므로, 그 아비에게 벼슬을 준 것이었다.


천태승 조구를 국사로 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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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以天台宗僧祖丘爲國師。

천태종(天台宗)의 중 조구(祖丘)로 국사(國師)를 삼았다.


9月 9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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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구국 중산왕이 망명한 산남왕의 아들을 보내 달라고 청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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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丙午/琉球國中山王察度遣使奉箋獻禮物, 發還被擄男女十二名, 請發回在逃山南王子承察度。 其國世子武寧, 亦於王世子, 奉書獻禮物。

유구국(琉球國)의 중산왕(中山王) 찰도(察度)가 사신을 보내서 전문(箋文)과 예물을 바치고, 피로되었던 남녀 12명을 돌려보내고서, 망명한 산남왕(山南王)의 아들 승찰도(承察度)를 돌려보내 달라고 청하였다. 그 나라 세자 무녕(武寧)도 왕세자에게 글월을 올리고 예물을 바치었다.


정도전 등에게 한양의 종묘·사직·궁궐·시장 등의 터를 정하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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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遣判門下府事權仲和、判三司事鄭道傳、靑城伯沈德符、參贊門下府事金湊、左僕射南誾、中樞院學士李稷等如漢陽, 定廟社宮闕朝市道路之基。 仲和等以前朝肅王時所營宮闕舊址狹隘, 更相其南亥山爲主壬座丙向, 平衍廣闊, 群龍朝揖, 乃得面勢之宜, 又相其東數里之地, 得坎山爲主壬座丙向, 以爲宗廟之基, 皆作圖以獻。

판문하부사 권중화(權仲和)·판삼사사 정도전·청성백 심덕부·참찬 문하부사 김주·좌복야 남은·중추원 학사 이직 등을 한양에 보내서 종묘·사직·궁궐·시장·도로의 터를 정하게 하였다. 권중화 등은 전조 숙왕(肅王) 시대에 경영했던 궁궐 옛터가 너무 좁다 하고, 다시 그 남쪽에 해방(亥方)의 산을 주맥으로 하고 임좌병향(壬座丙向)이 평탄하고 넓으며, 여러 산맥이 굽어 들어와서 지세가 좋으므로 〈여기를 궁궐터로 정하고〉, 또 그 동편 2리쯤 되는 곳에 감방(坎方)의 산을 주맥으로 하고 임좌병향에 종묘의 터를 정하고서 도면을 그려서 바치었다.


9月 10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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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참찬문하부사 박위를 서북면 도순문사로 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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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丁未/以前參贊門下府事朴葳, 爲西北面都巡問使。

전 참찬문하부사 박위(朴葳)로 서북면 도순문사를 삼았다.


9月 11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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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이 조회를 보다. 일본과 유구 사신들이 행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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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戊申/上視朝。 日本及琉球國使人隨班行禮。

왕이 조회에 나갔다. 일본 및 유구국의 사신들이 수반하여 행례하였다.


9月 12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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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이 여귀성과 적시성을 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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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己酉/火犯輿鬼積尸。

화성(火星)이 여귀(輿鬼)와 적시성(積尸星)을 범하였다.


9月 15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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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에서 금으로 쓴 《법화경》을 강의하니 왕과 중궁이 듣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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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壬子/講金字《法華經》于時座宮, 上與中宮聽講。

금자로 쓴 《법화경(法華經)》을 시좌궁(時座宮)에서 강의하였는데, 왕이 중궁(中宮)과 함께 강의를 들었다.


성변(星變) 때문에 죄수를 용서하고 재상들에게 정사의 잘잘못을 말하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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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以星變宥二罪以下, 仍令宰相, 各陳時政得失、民間利害。

성변(星變)으로 인하여 이죄(二罪) 이하의 죄수를 용서하고, 재상들로 하여금 각각 현재 행하고 있는 정치의 잘하고 못하는 것과 백성들의 이롭고 해되는 것을 말하게 하였다.


9月 16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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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군의 둑기를 강무당에 옮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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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癸丑/移置中軍纛于講武堂, 軍士甲刃侍衛。

중군(中軍)의 둑[纛]을 강무당(講武堂)에 옮겼는데, 군사들이 갑옷을 입고 칼을 들고서 시위하였다.


9月 17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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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함을 만들어 왜구를 막은 고 판개성부사 정지의 집을 정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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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甲寅/全羅道都觀察使趙璞報都評議使司曰: “到境來聞父老之言, 卒判開城府事鄭地, 始造戰艦, 能制倭寇, 長浦之捷、南原之勝, 功著一時, 卽今沿海之民, 復業如舊。 乞令旌表門閭, 以勸後世。” 使司轉聞, 允之。

전라도 도관찰사 조박(趙璞)이 도평의사사에서 보고하였다.

"전라도 경내에 들어와서 노인들의 말을 들으니, 죽은 판개성부사 정지(鄭地)가 처음으로 전함(戰艦)을 만들어서 능히 왜구를 막아내었으되 장포(長浦)의 승리와 남원(南原)의 승첩에 그 공이 커서 한때 유명하였고, 그 덕택으로 지금 바닷가에 있는 백성들이 옛날과 같이 생업을 회복하였다 하오니, 그 집을 정표(旌表)하여 후세를 권장하소서."

사사에서 임금에게 아뢰니, 그대로 윤허하였다.


9月 18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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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관을 거느리고 성절을 하례한 뒤, 성 쌓는 공사를 돌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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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乙卯/率百官賀聖節, 遂巡觀城役。

백관을 거느리고 〈명나라 황제의〉 성절(聖節)을 하례하고서, 성 쌓는 공사를 돌아보았다.


9月 19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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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가행과 박중질의 옥사에 관련된 서북면 도순문사 박위를 파직시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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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丙辰/罷西北面都巡問使朴葳。 憲司以葳嘗連可行、仲質獄辭, 請罷之。

서북면 도순문사 박위(朴葳)를 파직하였다. 헌사에서 위(葳)가 일찍이 김가행(金可行)과 박중질(朴仲質)의 옥사(獄辭)에 관련되었다고 파직을 청하였기 때문이었다.


안경량을 서북면 도순문사로 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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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以安景良爲西北面都巡問使。

안경량(安景良)으로 서북면 도순문사를 삼았다.


동북면도 서북면처럼 일경(日耕)으로 답험하여 세곡을 받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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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都評議使司啓曰: “東北面, 曾以大中小戶收租。 請依西北面例, 以日耕踏驗收租。” 從之。

도평의사사에서 아뢰었다.

"동북면은 전부터 대·중·소호(大中小戶)로 세곡을 받았으나, 서북면의 예에 의하여 일경(日耕)으로써 답험(踏驗)하여 세곡을 받게 하소서."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9月 20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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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루가 숭인문으로 들어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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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丁巳/鹿入崇仁門。

노루가 숭인문(崇仁門)으로 들어왔다.


성 쌓는 공사를 돌아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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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巡觀築城之役。

성 쌓는 공사를 돌아보았다.


9月 21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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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추원부사 손흥종을 명나라에 보내어 종마 50필을 바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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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戊午/遣中樞院副使孫興宗如京師, 獻種馬五十匹。

중추원 부사 손흥종(孫興宗)을 명나라에 보내서 종마(種馬) 50필을 바치었다.


9月 22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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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관청 관원에게 도읍 옮기는 시기를 의논하게 하니 금년이 좋다고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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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己未/命都評議使司, 集各司議遷都遲速, 皆曰: “今年可。”

도평의사사에 명령하여 각 관청의 관원을 모아서 도읍을 빨리 옮기느냐 늦추느냐에 대하여 의논하게 하니, 모두 금년이 좋다고 말하였다.


9月 23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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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에서 정도전 등은 돌아오고, 심덕부와 김주는 남아 관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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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庚申/判三司事鄭道傳等, 回自漢陽, 靑城伯沈德符、參贊門下府事金湊留管經營。

판삼사사 정도전 등은 한양으로부터 돌아왔으나, 청성백(靑城伯) 심덕부(沈德符)와 참찬문하부사 김주(金湊)는 남아서 〈궁궐과 기타 도시의〉 경영을 관리하였다.


9月 25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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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구성이 땅에 떨어졌는데 소리가 우레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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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壬戌/天狗墮地, 聲如雷。

천구(天狗)[52]가 땅에 떨어졌는데 소리가 우레와 같았다.


9月 27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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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주에 진눈깨비가 내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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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甲子/雨雪于平州。

평주(平州)[53]에 진눈깨비가 내리었다.


죄수들의 죄상을 기록하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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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慮囚。

죄수들의 죄상(罪狀)을 기록하게 하였다.


9月 28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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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하·고봉 등의 군현을 통폐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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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乙丑/幷深岳、交河、石泉鄕, 號交河監務; 高峯、幸州、黃調鄕, 號高峯監務。

심악(深岳)·교하(交河)·석천(石泉)의 〈세〉 향(鄕)을 합하여 교하 감무(交河監務)라 하고, 고봉(高峯)·행주(幸州)·황조(黃調)의 향을 합하여 고봉 감무(高峯監務)로 칭하였다.


9月 29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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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쌓는 인부들을 돌려보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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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丙寅/放築城夫。

성 쌓는 인부들을 돌려보냈다.


三年 冬十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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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月 3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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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에 거둥하여 서교에서 사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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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己巳/夙駕, 獵于西郊。

새벽에 거둥하여 서교(西郊)에서 사냥하였다.


유사에게 종묘 제사를 섭행하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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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命有司攝事于宗廟。

유사로 하여금 종묘의 제사를 섭행(攝行)하게 하였다.


10月 4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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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사헌 이서 등이 자주 법령을 고치거나 죄인을 놓아주지 말 것을 상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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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庚午/司憲府大司憲李舒等上疏, 請勿輕改法令, 數宥罪人。

사헌부 대사헌 이서(李舒) 등이 상소하였다.

"경솔하게 법령을 고치시고 자주 죄인을 놓아주지 마소서."


10月 5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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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평소를 잘 부는 사람이 가족과 함께 투화해 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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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辛未/西北面都節制使崔永沚, 執送挈家來投人一名, 善吹簫, 曰大平簫。

서북면 도절제사 최영지(崔永沚)가 가족을 인솔하고 투화(投化)해 온 사람 한 명을 잡아서 보내 왔다. 퉁소를 잘 불었으므로 ‘대평소(大平簫)’라 하였다.


금·은·채단의 금령을 더욱 엄하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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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憲司申嚴金銀彩段之禁。

사헌부에서 금은(金銀)·채단(彩段)의 금령을 더욱 엄하게 하였다.


10月 6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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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에 나아가다. 천변 때문에 풍악을 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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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壬申/視朝, 以天變撤樂。

조회에 나갔는데 천변(天變)으로 인하여 풍악은 폐하였다.


집 비둘기 세 쌍을 일본 구주 절도사에게 보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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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送鵓鴿三雙于日本國九州節度使源了俊。 從其請也。

임금이 집 비둘기 세 쌍을 일본 구주 절도사 원요준(源了俊)에게 보내었다. 이는 그의 청구에 따른 것이었다.


10月 8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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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단 옷을 입은 이지숭을 파면시키고 김천구를 순군옥에 가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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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甲戌/罷將軍李之崇職, 囚前典書金千具于巡軍。 憲司劾衣彩段也。

장군 이지숭(李之崇)의 벼슬을 파면하고, 전 전서(典書) 김천구(金千具)를 순군(巡軍)에 가두었다. 이는 사헌부에서 채단 옷을 입었다고 탄핵한 까닭이었다.


10月 9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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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당 문학 민제와 중추원 부사 유원지를 하정사로 보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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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乙亥/遣政堂文學閔霽、中樞院副使柳源之, 如京師賀明年正。

정당 문학 민제(閔霽)와 중추원 부사 유원지(柳源之)를 경사(京師)에 보내서 명년의 정조(正朝)를 축하하게 하였다.


10月 10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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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중을 정승으로 고치다. 성격이 강직한 대사헌 이서를 파직시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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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丙子/改侍中爲政丞。 罷大司憲李舒爲安平君, 以前和寧尹朴經代之。 舒慷慨有志節, 必欲直言, 被召入對, 略無諛辭。 方罷職, 鄭道傳力救不得。

시중(侍中)을 정승(政丞)으로 고치었다. 대사헌 이서를 파직하여 안평군(安平君)으로 봉하고, 전 화령 윤(和寧尹) 박경(朴經)으로 대체하였다. 이서는 의기와 지조가 있어 언제든지 바른말을 하였다. 부름을 받고 〈궁중에〉 들어가 임금과 면대하여 거의 아첨하는 일이 없었다. 파직하려고 할 때, 정도전이 애써서 구해내려고 했으나 되지 않았다.


10月 11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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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탄신이므로 죄수들을 용서하고, 이행 이인임 등의 직첩을 돌려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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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丁丑/上以誕晨, 講《法華經》于殿內, 宥中外罪囚。 特宥李行ㆍ李詹流罪、李仁任ㆍ曺敏修禁錮, 皆還職貼。

임금의 탄신(誕辰)이므로 《법화경》을 전내(殿內)에서 강(講)하고 중외(中外)의 죄수들을 사유하였다. 특히 이행(李行)·이첨(李詹)의 유배와 이인임(李仁任)·조민수(曹敏修)의 금고(禁錮)를 풀어주고서 직첩을 모두 돌려 주었다.


일본 구주 절도사에게 포로를 보내 준 것에 사례하고 협력을 요청하는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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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遣前工曹典書崔龍蘇于日本, 使都堂致書九州節度使源了俊。 其書曰:

朝鮮國門下政丞趙浚等奉復日本國節度使源公座下。 賤介之還, 得奉芳翰, 就審動履康裕, 爲慰。 玆者, 被擄人七百名, 俱蒙發遣, 獲還鄕里, 爲惠已極。 且云: “未得還者, 漸聚送之。” 又欲禁賊, 期於兩國永無間隙, 通好之誠, 至爲深篤, 喜感何涯! 比來, 本國水軍將帥累擒海賊, 請以舟師, 往捕餘黨, 朝議將許之, 適承來諭乃寢。 儻如尊敎, 嚴明號令, 討除兇盜, 永絶邊患, 豈不美哉! 珍貺之惠, 益以爲感。 今遣工曹典書崔龍蘇, 往修報禮。 不腆土宜, 具如別幅, 惟冀領納。

전 공조 전서 최용소(崔龍蘇)를 일본에 보내고, 도당(都堂)으로 하여금 구주 절도사(九州節度使) 원요준(源了俊)에게 글월을 보내게 하였는데, 그 글은 이러하였다.

"조선국 문하 정승(門下政丞) 조준(趙浚) 등은 일본국 절도사 원공(源公) 좌하(座下)에 회답합니다. 우리 사신이 돌아오는데 〈좌하의〉 귀중한 글월을 받아서 동정(動靜)이 평안하다 하니, 위안이 됩니다. 이번에 피로인(被擄人) 7백 명을 돌려보내어 모두 고향에 돌아오게 되니, 그 은혜가 지극하오. 더욱이 아직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을 차차 모아서 보낸다 하고, 또 왜구를 금지하여 두 나라 사이에 영원히 틈이 생기지 않도록 할 것을 기약하며, 서로 좋게 지내려는 성심이 지극히 깊고 두터우니, 대단히 기쁘고 감사한 일입니다. 근래에 본국의 수군 장수(將帥)들이 여러 번 왜구를 사로잡고 주사(舟師)[54]를 보내 잔당을 쳐서 잡자고 하므로, 조정의 공론이 장차 허락하려던 차에 마침 좌하의 사연을 보고 중지했으니, 만일 보내 온 글뜻과 같이 호령을 엄하게 하고, 흉악한 해적들을 토벌해 없애서 영구히 변방의 걱정을 없게 한다면 어찌 좋은 일이 아니리오. 진기한 예물은 더욱 감격스럽게 생각하여 이제 공조 전서 최용소를 보내서 보답하는 것인데, 변변치 못한 토산품을 별지와 같이 보내니, 받아 주기 바라오."


10月 12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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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개가 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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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戊寅/虹見西方。

무지개가 서쪽에 보이었다.


10月 15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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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헌부에서 이인임 조민수의 죄를 용서할 수 없다 하니 윤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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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辛巳/憲司上疏論李仁任、曺敏修罪在不宥, 允之。

사헌부에서 상서하여 이인임과 조민수의 죄를 용서할 수 없다고 하니, 그대로 윤허하였다.


10月 16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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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조 전서 심효생의 딸을 세자빈으로 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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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壬午/以吏曹典書沈孝生女爲世子嬪。

이조 전서(吏曹典書) 심효생(沈孝生)의 딸로 세자빈(世子嬪)을 삼았다.


못으로 팠던 이인임의 집을 메우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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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召司憲雜端曺致命, 塡李仁任瀦宅。

사헌 잡단(司憲雜端) 조치명(曹致命)을 불러서 못으로 팠던 이인임의 집을 메우게 하였다.


10月 17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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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이틀 무지개가 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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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癸未/虹見西方, 甲申亦如之。

무지개가 서쪽에 보이었다. 18일에도 마찬가지였다.


10月 19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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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음굴에 거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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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乙酉/幸觀音堀。

관음굴(觀音堀)에 거둥하였다.


10月 21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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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전에서 중들에게 밥을 먹이고 국사의 봉숭례를 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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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丁亥/飯僧百八于內殿; 行國師封崇禮, 仍賜鞍馬。

내전에서 1백 8명의 중에게 밥을 먹이어 국사(國師)의 봉숭례(封崇禮)를 행하여, 안장 갖춘 말을 하사하였다.


10月 25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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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으로 서울을 옮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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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辛卯/遷都漢陽, 留各司二員于松京。 以門下侍郞贊成事崔永沚、商議門下府事禹仁烈等, 爲分都評議使司。

한양으로 서울을 옮기었다. 각 관청의 관원 2명씩은 송경에 머물러 있게 하고, 문하 시랑찬성사 최영지(崔永沚)와 상의문하부사 우인열(禹仁烈) 등으로 분도평의사사(分都評議使司)를 삼았다.


10月 28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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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한양부의 객사를 이궁으로 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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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甲午/至新都, 以舊漢陽府客舍爲離宮。

새 서울에 이르러 옛 한양부의 객사(客舍)를 이궁(離宮)으로 삼았다.


三年 十一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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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月 2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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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평의사사와 서운관 서리들을 이끌고 종묘와 사직의 터를 살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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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戊戌/上率都評議使司及書雲觀員吏, 相營宗廟、社稷之地。

임금이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와 서운관(書雲觀)의 서리들을 인솔하고, 종묘와 사직의 터를 살피었다.


11月 3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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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으로 공작국을 설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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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己亥/始置工作局。

처음으로 공작국(工作局)을 설치하였다.


도평의사사에서 종묘와 궁궐과 성곽 공사를 독촉할 것을 장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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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都評議使司狀申:

寢廟所以奉祖宗而崇孝敬, 宮闕所以示尊嚴而出政令, 城郭所以嚴內外而固邦國, 此皆有國家者所當先也。 恭惟殿下, 受命啓統, 俯從輿望, 以定都于漢陽, 萬世無疆之業, 實基於此。 然而寢廟未成, 宮室未作, 城郭未築, 殆非所以尊京師而重根本也。 殿下雖重民力, 不欲興工, 然此三者, 皆不可不作。 宜命攸司, 董治其役, 以營寢廟, 作宮室, 築都城, 申孝敬於祖宗, 示尊嚴於臣民, 且使國勢永固, 然後一國之規模始備, 而萬世之貽謀, 益遠矣。 伏惟殿下施行焉。

王旨依申。

도평의사사에서 장신(狀申)하였다.

"종묘는 조종(祖宗)을 봉안하여 효성과 공경을 높이는 것이요, 궁궐은 〈국가의〉 존엄성을 보이고 정령(政令)을 내는 것이며, 성곽(城郭)은 안팎을 엄하게 하고 나라를 굳게 지키려는 것으로, 이 〈세 가지는〉 모두 나라를 가진 사람들이 제일 먼저 해야 하는 것입니다. 삼가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천명(天命)을 받아 국통(國統)을 개시하고 여론을 따라 한양으로 서울을 정하였으니, 만세에 한없는 왕업의 기초는 실로 여기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 종묘를 세우지 못하고 궁궐을 짓지 못했으며 성곽도 쌓지 못하였으니, 이것은 서울을 존중하고 나라의 근본을 무겁게 한 것이 아니라 하겠습니다. 전하께서 비록 백성들을 소중히 여기고 공사를 일으키려고 하지 않으나, 이 세 가지는 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니, 담당한 관청에 명령하여 공사를 독촉하여서 종묘와 궁궐을 짓고 성곽을 쌓아서 효성과 공경을 조종에게 바치고, 신하와 백성들에게 존엄성을 보이며, 또 국가의 세력을 길이 굳건하도록 해야 한 나라의 규모가 짜여지고 만세에 길이 전할 계책이 서게 될 것입니다. 삼가 아뢰옵건대, 전하께서는 이를 행하시도록 하소서."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11月 4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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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동에 거둥하여 능터를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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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庚子/如木寺洞, 相壽陵之地。

목사동(木寺洞)에 거둥하여 자기의 능터[陵地]를 보았다.


병권과 정권 장악한 조준·정도전을 비판한 변중량 등을 국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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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囚殿中卿卞仲良于巡軍獄, 命大司憲朴經、巡軍萬戶李稷等鞫之。 初仲良與兵曹正郞李薈曰: “自古政權兵權, 不可兼任一人。 兵權宜在宗室, 政權宜在宰輔。 今趙浚、鄭道傳、南誾等, 旣掌兵權, 又掌政權, 實爲不可。” 仲良以此言於義安伯和, 和告于上。 上召仲良問之, 仲良對以實, 且曰: “朴苞亦謂殿下失爲國之體, 屢致星變。” 上怒曰: “此數人, 皆我股肱之臣, 終始一心者也。 如或可疑, 則誰可信者! 爲此言者, 必有以也。” 卽命鞫仲良及苞、薈。 苞、薈與仲良相詰, 謀欲自免。

전중 경(殿中卿) 변중량(卞仲良)을 순군옥에 가두고, 대사헌 박경(朴經)과 순군 만호 이직(李稷) 등으로 하여금 국문하게 하였다. 당초에 중량이 병조 정랑 이회(李薈)와 말하였다.

"예로부터 정권(政權)과 병권(兵權)을 한 사람이 겸임을 못하는 법이라, 병권은 종친에게 있어야 하고 정권은 재상에게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조준·정도전·남은 등이 병권을 장악하고 또 정권을 장악하니 실로 좋지 못하다."

〈그후〉 중량이 또 이 말을 의안백(義安伯) 이화(李和)에게 말했다. 화가 임금에게 고하니, 임금이 중량을 불러서 물은즉, 중량이 사실대로 대답하고 또 말하였다.

"박포(朴苞)도 또한 전하께서 국정을 잘못하여 여러 번 별의 변고가 일어난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에 임금이 성이 나서 말하였다.

"이들은 모두 나의 수족과 같은 신하들로 끝끝내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다. 이들을 의심한다면 믿을 사람이 누구냐? 이런 말을 하는 자들은 까닭이 있을 것이다."

즉시 중량과 포와 회를 국문하게 하니, 포와 회가 중량과 더불어 서로 따지면서 자기만 모면하려고 하였다.


11月 5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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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관을 거느리고 천추절을 하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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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辛丑/上率群臣賀千秋。

임금이 백관을 거느리고 명나라 천추절(千秋節)의 하례를 행하였다.


11月 6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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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중량 등을 유배시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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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壬寅/流仲良于寧海, 薈于順天, 皆削職。 置苞于竹州。

변중량을 영해(寧海), 이회를 순천(順天)에 유배하고 모두 삭직하였으며, 박포는 죽주(竹州)에 안치(安置)하였다.


11月 8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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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가 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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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甲辰/霧。

안개가 끼었다.


11月 10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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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자가 종친과 대신들에게 연회를 베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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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丙午/世子宴宗室大臣于其邸。

세자가 종친과 대신들에게 그의 저택에서 연회를 베풀었다.


용산강에 거둥하여 종묘의 재목을 살펴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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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如龍山江, 觀宗廟材。

임금이 용산강(龍山江)에 거둥하여 종묘(宗廟)의 재목을 살펴보았다.


11月 11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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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에 성에가 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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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丁未/木稼。

목가(木稼)하였다.


11月 12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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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진 감무를 설치하고 동성과 수안을 합속시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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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戊申/置通津監務, 以童城、守安合之。

통진 감무(通津監務)를 설치하고, 동성(童城)과 수안(守安)을 합속시키었다.


11月 15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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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게 바람이 불고 천둥 치며 비가 내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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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辛亥/大風雷雨。

바람이 크게 불고 천둥치며 비가 내리었다.


11月 16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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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자 세곡을 재어 바치는 법을 엄중히 시행하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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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壬子/申嚴納稅自量之令。

각자 적당한 세곡을 바치는 법을 엄중히 시행하게 하였다.


11月 17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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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국사 구리부처가 땀을 흘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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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癸丑/興國寺銅佛汗。

흥국사(興國寺)의 구리부처가 땀을 흘리었다.


11月 19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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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둥 치고 무지개가 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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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乙卯/雷虹見。

천둥치고 무지개가 보이었다.


태종이 명나라 황제의 우대를 받고 돌아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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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我殿下回自京師, 南在、趙胖隨至。 殿下至京, 帝引見再三, 殿下敷奏詳明, 帝優禮遣還。 初殿下之行也, 贊成事成石璘, 作詩以送殿下曰: “知子知臣睿鑑明, 畏天誠意爲生成。 皆言萬世朝鮮慶, 在此炎霖跋涉行。” 上國士人見殿下, 皆稱朝鮮世子, 甚敬之。 殿下過燕府, 燕王【卽太宗皇帝。】親見之, 旁無衛士, 唯一人侍立。 溫言禮接甚厚, 因使侍立者饋酒食, 極豐潔。 殿下離燕在道上, 燕王乘安轝朝京師, 驅馬疾行, 殿下下馬見於路側, 燕王停駕, 亟手開轝帷, 溫言良久乃過行。 後殿下見欽差內官黃儼, 問: “昔見帝于燕府之日, 侍立者爲誰?” 儼曰: “慶大人, 溫良人也。 帝最親信者, 今已亡矣。”

태종이 명나라 서울에서 돌아왔다. 남재와 조반도 같이 왔다. 태종이 명나라 서울에 이르니, 황제가 두세 번 인견하였는데, 태종이 소상하게 〈사신 통행에 대하여〉 주문(奏聞)하니, 황제가 우대하고 돌려 보냈다. 처음에 태종이 떠날 때 찬성사 성석린(成石璘)이 시를 지어 태종을 전송하였다.

"자식을 알고 신하를 아는 예감(睿鑑)이 밝고, 하늘을 두려워하는 성의(誠意)는 백성을 살리기 위함이라. 모두 말하기를 만세의 조선 경사는, 이 더위와 장마에 산을 넘고 물을 건너 가는 데 있다 하더라."

명나라 선비들이 태종을 보고 모두 조선 세자라 하면서 대단히 존경하였으며, 태종이 연부(燕府)를 지날 때는 연왕(燕王) 【즉 성조 황제.】 이 친히 대해 보았는데, 곁에 시위하는 군사가 없고 다만 한 사람이 모시고 서 있었다. 온순한 말과 예절로 후하게 대접하고, 모시고 선 사람을 시켜서 술과 음식을 내오게 하였는데, 극히 풍성하고 깨끗하였다. 태종이 연부를 떠나서 도중에 있을 때, 연왕이 서울 〈금릉〉에 조회하기 위하여 편안한 연(轝)을 타고 말을 몰아서 빨리 달려갔다. 태종이 말 위에서 내려 길가에서 인사하니, 연왕이 수레를 멈추고 재빨리 연의 휘장을 열고서 오래도록 온순한 말로 서로 이야기하다가 지나갔다. 뒤에 태종이 흠차 내관(欽差內官) 황엄(黃儼)을 보고 물었다.

"옛날 태종 황제를 연부에서 볼 때에 모시고 섰던 사람이 누구냐?"

엄이 대답하였다.

"경 대인(慶大人)인데, 온순하고 선량한 사람으로 황제가 제일 신임하던 사람이나, 지금은 죽고 없습니다."


사역원 제조 설장수가 사역원의 시험 자격과 선발 액수 등에 대해 올린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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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司譯院提調偰長壽等上書言:

臣等竊聞, 治國以人才爲本, 而人才以敎養爲先, 故學校之設, 乃爲政之要也。 我國家世事中國, 言語文字, 不可不習。 是以殿下肇國之初, 特設本院, 置祿官及敎官, 敎授生徒, 俾習中國言語、音訓、文字、體式, 上以盡事大之誠, 下以期易俗之効。 臣等今將擬議到習業、考試等項合行事務, 開寫于後。 一, 額設敎授三員內, 漢文二員、蒙古一員, 優給祿俸。 生徒額數, 分肄習業, 考其勤慢, 以憑賞罰, 幷及敎授之官。 一, 習業生徒, 鮮有自願來者。 令在京五部及各道界首府州, 擇良家子弟十五歲以下天資明敏者, 歲貢一人。 一, 每三年一次考試, 勿論是(無)〔否〕本院生徒, 七品以下人, 但能通曉四書、《小學》、吏文、漢ㆍ蒙語者, 俱得赴試。 習漢語者, 以四書、《小學》、吏文、漢語皆通者, 爲第一科, 與正七品出身; 通四書之半及《小學》、漢語者爲第二科, 與正八品出身。 止通《小學》漢語者爲第三科, 與正九品出身。 習蒙語者, 能譯文字, 能寫字樣, 兼寫偉兀字者爲第一科; 只能書寫偉兀文字, 幷通蒙語者爲第二科, 出身品級同前。 其原有官品者, 第一科升二等, 第二科三科各升一等。 漢語第一科一人, 第二科三人, 第三科八人; 蒙語第一科一人, 第二科二人, 通取一十五人, 以爲定額。 若無堪中第一科者, 只取第二科三科, 又無堪中第二科者, 只取第三科, 不拘定數。 一, 每年都目各望, 幷錄三人, 以漢語精通者爲頭。 雖差年、到數多餘, 亦不許錄於語音精通人員之上, 若三人俱通者, 聽以差年、到數爲頭。 一, (隷)〔肄〕業三年, 不能通曉漢、蒙語者, 斥遣充軍。 一, 考試中選者, 人給紅牌。 一, 通上寫“司譯院敬奉王旨, 某人可賜通事第幾科幾人出身者。” 年月上, 行使本院印信, 提調以下具銜署名。 下都評議使司, 擬議施行。

사역원 제조(司譯院提調) 설장수(偰長壽) 등이 글월을 올려서 말하였다.

"신 등은 그윽이 듣건대, 나라를 다스리는 데에는 인재를 근본으로 삼고, 인재는 교양을 먼저 실행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학교를 설립하는 것이 곧 정치의 요점입니다. 우리 나라가 대대로 중국을 섬겨 언어와 문자를 익히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까닭에 전하께서 국가를 창건할 당초부터 특히 본원을 설치하고 녹관(祿官)과 교관을 두어 생도를 가르치고, 중국의 언어와 문자의 음과 뜻이며 글 짓는 법식까지 익히게 하여, 위로는 대국을 섬기는 성의를 다하고 아래로는 풍속을 바꾸는 실효를 얻게 하시니, 신 등은 그 과업을 익히고 시험을 보는 데 꼭 필요한 사항을 만들어서 다음에 열거합니다.

1. 교수의 정원은 3인으로 하되, 그 가운데 한어를 2명으로 하고, 몽고어를 1명으로 하여 후하게 봉급을 줄 것입니다. 생도의 정수는 한어와 몽고어를 나누어서 공부하게 하고 그 성적을 고사하여 상과 벌을 주게 하되, 상벌은 교수들에게도 미치게 할 것.

1. 이것을 배울 생도는 자원하는 자가 드무니, 서울의 부와 각도의 계수관(界首官)으로 하여금 양민의 자제 중 15세 이하의 자질이 명민한 자를 해마다 한 사람씩 뽑아서 올리게 할 것.

1. 3년마다 한 번씩 시험을 보이는데, 〈시험 자격은〉 본원에 생도로 재학했든 안 했든 그것은 논하지 말고, 7품 이하의 사람으로서 《사서(四書)》와 《소학》·이문(吏文)·한어·몽고어에 통하는 사람은 다 응시하게 하고, 한어를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사서》·《소학》·이문·한어에 다 통하는 자를 제1과(科)로 하여 정7품 출신의 〈교지를〉 주고, 《사서》의 반쯤과 《소학》 및 한어를 통하는 자를 제2과로 하여 정8품 출신과 같게 하고, 《소학》과 한어만 능통하는 자를 제3과로 하여 정9품 출신과 같게 하며, 몽고어를 공부하는 자로서 문자를 번역하고 글자를 쓸 줄 알되 겸하여 위글[偉兀] 문자를 쓰는 자를 제1과로 하고, 위글 문자만을 쓸 줄 알고 몽고어에 통하는 자를 제2과로 하며, 출신의 품급은 전과 같이 한다. 그런데 본래 관품이 있는 자는 제1과는 두 등급을 올리고, 제2과·제3과도 각각 한 등급씩 올린다. 〈선발 액수는〉 한어는 제1과 1인, 제2과 3인, 제3과 8인을 뽑고, 몽고어는 제1과 1인, 제2과 2인을 뽑아 모두 합하여 15인을 정액으로 하되, 만일 제1과에 합격되는 자가 없으면 제2과·제3과만 뽑고, 또 제2과에 합격하는 자가 없으면 제3과만 뽑되 정액에 구애되지 말 것.

1. 매년 도목정(都目政)[55] 때 각 〈관직의〉 망(望)[56]에 3인을 기록하되, 한어에 정통한 자를 수망(首望)으로 하고, 비록 이 업을 배운 연수의 차이가 많다 할지라도 발음이 정통한 사람 위에 기록하지 말 것이며, 만일 3인이 다 정통하면 그 연수의 다소를 보아서 많은 자를 수망으로 할 것.

1. 3년 동안 공부하여도 한어나 몽고어에 통하지 못한 자는 퇴학시켜서 군정에 충당할 것.

1. 시험에 합격한 사람에게는 각각 홍패(紅牌) 한 장을 주되, 〈홍패〉 위에, ‘사역원에서 삼가 임금의 분부를 받들어 아무에게 통사(通事) 제 몇째 과(科) 몇 사람째의 출신을 준다.’고 쓰고, 연월(年月) 위에 본원의 인신을 찍고, 제조(提調) 이하 모든 관원이 직함을 갖추어서 서명하게 하소서."

도평의사사에 내려보내서 의논하여 시행하게 하였다.


11月 25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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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관에게 무악 천도를 의논하게 하다. 모두 좁다 하니 그만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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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辛酉/命都評議使司, 會百官于毋岳, 更相宅都之地, 僉曰狹隘, 乃止。

도평의사사에 명령을 내려, 백관을 무악(毋岳)에 모아서 다시 무악 천도를 의논하게 하니, 여러 사람이 모두 좁다 하므로 그만두었다.


11月 26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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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설직을 받은 사람들에게 말을 징발하고 직첩을 거두어 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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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壬戌/徵馬于超資受職者有差, 收其職牒。 先是, 添設職無定數, 多有冒濫者, 故都評議使司請令各道都觀察使, 考覈徵之。

계급을 뛰어서 직첩을 받은 사람들에게 말[馬]을 차등 있게 징발하고 그 직첩을 거두어 들이었다. 전에 〈명예직으로 가외로 설치한〉 첨설직(添設職)의 정한 수가 없어서 직첩을 남발한 일이 있었다. 그러므로 도평의사사에서 각도의 관찰사로 하여금 사실을 조사하여 말을 받기로 청하였던 것이었다.


三年 十二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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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月 3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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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도 공사의 시작에 앞서 황천 후토와 산천의 신에게 고한 고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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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戊辰/上齋宿。 命判三司事鄭道傳, 祭于皇天后土之神, 以告興役之事。 其文曰:

朝鮮國王臣【上諱。】率門下左政丞趙浚、右政丞金士衡、判三司事鄭道傳等, 一心齋沐, 敢明告于皇天后土。 伏以乾覆坤載, 遂萬物之生成; 革古鼎新, 作四方之都會。 竊念臣【上諱。】, 猥以庸愚之質, 獲荷陰騭之休, 値高麗將亡之時, 受朝鮮維新之命。 顧以付畀之甚重, 常懷危懼而未寧, 永圖厥終, 不得其要。 日官告曰: “松都之地, 氣久而向衰; 華山之陽, 形勝而協吉, 宜就是處, 庸建新都。” 臣【上諱。】詢諸臣僚, 請于宗廟, 乃以十月二十五日, 遷于漢陽。 有司又告曰: “寢廟, 所以奉祖考而安其神; 宮室, 所以莅臣民而聽其政。 皆非獲已, 在所當營。” 爰命有司, 於今月初四日起役, 恐大役之方興, 致斯民之攸困。 仰惟皇鑑, 俯亮臣心, 雨暘以時, 功役効力, 于以作大邑, 于以奠厥居, 上配天命於無窮, 下庇民生於有永, 則臣【上諱】謹當對越奔走, 將禋祀而益虔, 戒勑時幾, 修政事而不懈, 與諸臣庶, 共享太平。

又遣參贊門下府事金立堅, 告于山川之神。 其文曰:

王若曰, 咨爾白岳ㆍ木覓之神、諸山之神、漢江ㆍ楊津之神、諸水之神! 蓋聞古之定都者, 必封山以爲鎭, 表水以爲紀。 故名山大川之在境內者, 載諸常祀之典, 所以祈神佑而答靈貺也。 顧惟不穀, 迫於臣民推戴之心, 卽朝鮮國王位, 兢業圖理, 于今三年。 迺者, 用日官之言, 定都漢陽, 將營于宗廟、宮室, 已定日矣, 尙慮大役之興, 民力不無所傷, 雨暘燠寒, 或失其時, 有妨工作。 玆率門下左政丞趙浚、右政丞金士衡、判三司鄭道傳等, 齋沐一心, 以今月初三日, 遣參贊門下府事金立堅, 用禮幣奠物, 告爾諸神。 今玆興作, 非欲求一己之安, 其自是祀神, 人民以迓天命於無窮。 惟爾有神, 諒予至懷, 俾陰陽不愆, 疾疫不興, 變故不作, 以底成大役而定大業, 則予不穀, 亦不敢自暇自逸, 洎于後世, 以修時祀, 神亦永有所享食矣。 故玆敎示。

임금이 하룻밤을 재계(齋戒)하고, 판삼사사 정도전에게 명하여 황천(皇天)과 후토(后土)의 신(神)에게 제사를 올려 〈왕도의〉 공사를 시작하는 사유를 고하게 하였는데, 그 고유문(告由文)은 이러하였다.

"조선 국왕 신 이단(李旦)은 문하 좌정승 조준과 우정승 김사형 및 판삼사사 정도전 등을 거느리고서 한마음으로 재계와 목욕을 하고, 감히 밝게 황천 후토에 고하나이다. 엎드려 아뢰건대, 하늘이 덮어 주고 땅이 실어 주어 만물이 생성(生成)하고, 옛것을 개혁하고 새것을 이루어서 사방의 도회(都會)를 만드는 것입니다. 그윽이 생각하니, 신 단(旦)은 외람되게도 어리석고 못난 자질로서 음즐(陰騭)의 기쁨을 얻어, 고려가 장차 망하는 때를 당하여 조선(朝鮮) 유신(維新)의 명을 받은 것입니다. 돌아보건대, 너무나 무거운 임무를 짊어지게 되어 항상 두려운 마음을 품고 편히 지내지 못하고, 영원히 아름다운 마무리를 도모하려고 하였으나 그 요령을 얻지 못했더니, 일관(日官)이 고하기를, ‘송도의 터는 지기(地氣)가 오래 되어 쇠해 가고, 화산(華山)의 남쪽은 지세(地勢)가 좋고 모든 술법에 맞으니, 이곳에 나가서 새 도읍을 정하라.’ 하므로, 신 단(旦)이 여러 신하들에게 묻고 종묘에 고유하여 10월 25일에 한양으로 천도한 것인데, 유사(有司)가 또 고하기를, ‘종묘는 선왕의 신령을 봉안하는 곳이요, 궁궐은 신민의 정사를 듣는 곳이니, 모두 안 지을 수 없는 것이라.’ 하므로, 유사에게 분부하여 이달 초4일에 기공하게 하였습니다. 크나큰 역사를 일으키매, 이 백성의 괴로움이 많을 것이 염려되니, 우러러 아뢰옵건대, 황천께서는 신의 마음을 굽어 보살피사, 비 오고 개는 날을 때 맞추어 주시고 공사가 잘되게 하여, 큰 도읍을 만들고 편안히 살게 해서, 위로 천명(天命)을 무궁하게 도우시고 아래로는 민생을 길이 보호해 주시면, 신 단은 황천을 정성껏 받들어서 제사를 더욱 경건히 올릴 것이며, 때와 기회를 경계하여 정사를 게을리 하지 않고, 신하와 백성과 더불어 함께 태평을 누리겠나이다."

또 참찬문하부사 김입견(金立堅)을 보내서 산천(山川)의 신(神)에게 고유하게 하였는데, 그 고유문은 이러하였다.

"왕은 이르노라! 그대 백악(白岳)과 목멱산(木覓山)의 신령과 한강과 양진(楊津) 신령이며 여러 물귀신이여! 대개 옛날부터 도읍을 정하는 자는 반드시 산(山)을 봉하여 진(鎭)이라 하고, 물[水]을 표(表)하여 기(紀)라 하였다. 그러므로, 명산(名山) 대천(大川)으로 경내(境內)에 있는 것은 상시로 제사를 지내는 법전에 등록한 것이니, 그것은 신령의 도움을 빌고 신령의 도움에 보답하기 때문이다. 돌이켜 보건대, 변변치 못한 내가 신민의 추대에 부대끼어 조선 국왕의 자리에 앉아, 사업을 삼가면서 이 나라를 다스린 지 이미 3년이라. 이번에 일관의 말에 따라 한양에 도읍을 정하고, 종묘와 궁궐을 경영하기 위하여 이미 날짜를 정했으나, 크나큰 공사를 일으키는 데 백성들의 힘이 상하지나 아니할까, 또는 비와 추위와 더위가 혹시나 그 때를 잃어버려 공사에 방해가 있을까 염려하여, 이제 문하 좌정승 조준과 우정승 김사형과 판삼사사 정도전 등을 거느리고 한마음으로 재계하고 목욕하여, 이달 초3일에 참찬문하부사 김입견을 보내서 폐백과 전물(奠物)을 갖추어 여러 신령에게 고하노니, 이번에 이 공사를 일으킨 것은 내 한 몸의 안일(安逸)을 구하려는 것이 아니요, 이 제사를 지내서 백성들이 천명을 한없이 맞아들이자는 것이니, 그대들 신령이 있거든 나의 지극한 회포를 알아주어, 음양(陰陽)을 탈 없이 하고 병이 생기지 않게 하며, 변고가 일지 않게 하여, 큰 공사를 성취하고 큰 업적을 정하도록 하면, 내 변변치 못한 사람이라도 감히 나 혼자만 편안히 지내지 않고 후세에 이르기까지 때를 따라서 제사를 지낼 것이니, 신도 또한 영원히 먹을 것을 가지리라. 그러므로 이에 알리는 바이다."


12月 4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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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묘와 궁궐 터의 오방신에게 제사지내고, 중들을 모아 공사하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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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己巳/遣中樞院副使崔遠于營宗廟之地, 又遣僉書中樞院事權近于營宮室之所, 致祭五方地祇, 以開厥基。 不欲勞民, 募集諸山僧徒, 官支衣廩, 俾趨工役。 上觀太廟開基。

중추원 부사 최원(崔遠)을 종묘를 세우려는 터에 보내고, 또 첨서중추원사 권근(權近)을 궁궐 지을 터에 보내서 오방(五方)의 지기(地祇)에게 제사지내고서 그 터를 개척하였는데, 백성들을 괴롭히지 않기 위하여, 여러 절의 중들을 모집하여 관청에서 옷과 먹을 것을 주어서 공사장에 나가게 하였다. 임금이 종묘의 터를 처음 닦은 광경을 보았다.


밤에 지진이 일어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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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夜, 地震。

밤에 지진이 일었다.


12月 5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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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에 성에가 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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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庚午/木稼。

목가(木稼)하였다.


12月 9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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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부에서 각 관청의 터를 분배해 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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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甲戌/開城府始量給各司之基有差。

개성부에서 처음으로 각 관청의 터를 차등 있게 분배해 주었다.


12月 10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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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백성이 낮에 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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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乙亥/太白晝見。

태백성(太白星)이 낮에 보이었다.


중국 황제의 선유(宣諭)에 사은하는 표문을 밀직 제학 이직의 편에 보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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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遣密直提學李稷, 赴京謝恩。 表曰:

臣男【今上諱。】等, 回自京師, 欽奉宣諭聖旨, 誨誡切至, 臣不勝感激者。 聖訓昭明, 睿恩優渥, 撫躬知感, 擧國與榮。 臣於今年六月間, 欽奉聖旨, 遣臣男【今上諱。】、陪臣南在、趙胖等赴京。 幸瞻天日之光, 特奉絲綸之旨。 誨臣以民生之恤, 勑臣以天命之嚴。 聽受以還, 佩服無已。 玆蓋伏遇皇帝陛下仁敦字小, 度廓包荒, 遂令僻遠之邦, 獲被懷綏之德。 臣謹當永堅忠義之志, 倍祝壽考之祺。

밀직 제학(密直提學) 이직(李稷)을 보내어 경사(京師)에 가서 사은(謝恩)하게 하였는데, 그 표문(表文)은 이러하였다.

"신의 아들 이방원 등이 경사(京師)에서 돌아와 삼가 선유(宣諭)를 받자오니, 폐하의 가르치심과 경계하심이 절실하고 지극하여 감격해 마지 않는 바이매, 거룩하신 훈계가 밝으시고 갸륵하신 은혜가 넓으시니, 몸을 어루만져 감격함을 알고, 온 나라 백성이 영광스럽게 여깁니다. 신이 금년 6월에 삼가 성지(聖旨)를 받들어, 신의 자식 이방원과 배신(陪臣) 남재와 조반 등을 경사에 보내서, 다행하게도 폐하를 면대하는 영광을 얻고, 특히 신에게 민생을 구휼하고 천명을 경계하라는 조칙을 받아 가지고 돌아오니, 감복하여 마지 않는 바입니다. 이제 황제 폐하의 민생을 불쌍히 여기시는 인자한 마음과 먼 사람을 포섭하시는 넓은 도량을 만나, 한구석 멀리 있는 나라로 하여금 편안히 살게 하는 덕을 입게 하오니, 신은 길이 충의(忠義)의 뜻을 굳게 가지고, 〈황제의〉 만수무강을 빌겠나이다."


도평의사사에서 태일산을 강습하고 고찰하며 시험도 보일 것을 건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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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都評議使司啓曰: “太一算, 兵家要務, 宜置局講習, 隷於訓鍊觀, 以時考察, 成才者, 武科內竝試擢用。” 上從之。

도평의사사에서 아뢰었다.

"태일산(太一算)은 병가(兵家)의 중요한 것이오니, 국(局)을 설치하여 강습하게 하고, 훈련관(訓鍊觀)에 소속시켜 때때로 고찰(考察)하게 하여, 재주가 있는 자는 무과(武科)를 보일 때에 함께 시험 보여서 뽑아 쓰게 하소서."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12月 11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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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도 군관의 매사냥을 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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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丙子/禁各道軍官放鷹。

각도 군관(軍官)의 매사냥하는 것을 금지하였다.


부역인 중 연한이 찬 사람은 놓아 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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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徒役之人, 年限已滿者, 放之。

도역인(徒役人)으로서 연한(年限)이 찬 사람은 놓아보내었다.


12月 14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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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완인과 오도리인이 방물을 바치니 만호 직첩을 주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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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己卯/多完人夫彦、吾都里人所吾等來獻方物。 上各賜衣一襲, 令中樞院給牒爲萬戶。

다완인(多完人) 부언(夫彦)과 오도리(吾都里) 사람 소오(所吾) 등이 와서 방물을 바치니, 임금이 각각 의복 한 벌씩을 주고, 중추원에 분부하여 만호(萬戶)의 직첩을 주게 하였다.


12月 15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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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서사에 분부하여 순자법에 따라 벼슬을 제수하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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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庚辰/命尙瑞司, 行循資除授。

상서사(尙瑞司)에 분부하여 순자법(循資法)에 따라서 벼슬을 제수하게 하였다.


승려들이 담선하는 법의 복구를 청했으나 도평의사사에서 금단하도록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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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曹溪宗僧徒請復談禪之法, 上下于都評議使司擬議。 使司啓曰: “前朝談禪之法, 爲松都地理而設之。 今殿下旣遷新邑, 何用松都古事! 願殿下一切禁斷, 與民更始, 新其視聽, 一其心志。” 從之。

조계종(曹溪宗) 승도들이 다시 담선(談禪)을 하는 법을 청하니, 임금이 도평의사사에 내려서 의논하게 하였다. 이에 사사에서 아뢰었다.

"전조(前朝)에서 담선하는 법은 송도의 지리를 위해서 설치하던 것이온데, 지금은 전하께서 이미 새 도읍으로 옮겼으니, 어찌 송도의 옛일을 쓰겠습니까? 원컨대, 전하께서는 일체 이것을 금단하고, 백성들과 함께 새로운 정치를 하여 견문을 새롭게 하고 마음과 뜻을 한결같게 하소서."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간관이 남의 집터를 뺏은 판개성부사 이거인을 탄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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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諫官劾判開城府事李居仁奪人家基。

간관이 판개성부사 이거인(李居仁)이 남의 집터를 빼앗은 것을 탄핵하였다.


12月 16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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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교 시중 이숭의 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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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辛巳/檢校侍中李崇卒。 官庇葬事, 諡安靖。 崇, 固城人, 門下侍中巖之子, 性淳厚。 恭愍朝, 以善射稱。 子敏、峙、屹。

검교 시중(檢校侍中) 이숭(李崇)이 졸(卒)하니, 관에서 장사를 도와주고, 시호(諡號)를 안정(安靖)이라 하였다. 숭(崇)은 고성(固城) 사람으로 문하 시중 이암(李巖)의 아들이다. 천성이 순후하고, 공민왕 때에 활 잘 쏘기로 이름이 있었다. 아들은 이민(李敏)·이치(李峙)·이흘(李屹)이 있다.


12月 19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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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음을 타고 능터를 보러 과주에 행차하려다 장지화의 간언으로 중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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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甲申/上將幸果州, 觀壽陵之地, 諫官張至和等進曰: “大駕雖乘船, 尙且慮危。 況今氷未堅, 安可涉乎?” 乃止。

임금이 장차 과주(果州)에 행차하여 능터를 보려고 하니, 간관(諫官) 장지화(張至和) 등이 나와서 말하였다.

"행차가 배를 타고 간다 해도 위험하온데, 더구나 얼음이 아직 굳지 않았으니, 어찌 건너겠습니까?"

임금이 그만 중지하였다.


12月 20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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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울을 건너 과주에 행차하려다 이숙번의 간언으로 중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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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乙酉/霧。 上又欲涉灘幸果州, 乘輿已駕, 左拾遺李叔蕃啓曰: “前日上欲涉氷, 臣等昧死以聞, 獲蒙兪允, 不勝感激, 今乃欲涉灘。 當此冱寒, 灘水深廣, 馬或一蹶, 恐非萬全。 況乎僕從之人, 豈無赤身入水者乎? 願殿下垂察。” 上乃止。

안개가 끼었다. 임금이 또 여울물을 건너서 과주에 행차하려고 이미 수레에 올라타고 말에 멍에를 메웠다. 좌습유(左拾遺) 이숙번(李叔蕃)이 아뢰었다.

"어제 전하께서 얼음을 타고 건너가려고 할 때, 신 등이 죽기를 무릅쓰고 말려서 윤허를 받자와 감격한 터인데, 이제 또 여울물을 건너가려고 하시니, 이러한 엄동 추위에 여울물이 깊고 넓사온데, 말이 혹시나 실족하면 만전(萬全)한 계책이 아닐 뿐더러, 모시고 가는 군사들이 어찌 알몸으로 물에 들어가야 할 일이 없겠습니까? 원하옵건대 전하께서 굽어살피소서."

임금이 중지하였다.


12月 21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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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인에게 정무를 보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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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丙戌/上令李居仁視事。

임금이 이거인에게 정무를 보게 하였다.


나라에서 흰 닭과 개와 말을 기르지 못하게 한다는 소문이 떠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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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民間訛言: “國禁畜白色雞犬馬。”

민간에 나라에서 흰 빛깔의 닭과 개와 말을 기르지 못하게 한다는 말이 떠돌아다녔다.


12月 23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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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헌부에서 지형조사 최긍을 탄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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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戊子/憲司劾知刑曹事崔兢。 初都官正郞朴仁乙將訟人文契, 陰改字樣, 兢劾仁乙。 仁乙憤, 詣兢家, 兢方聽訟, 仁乙辱之。 憲司劾仁乙, 竝劾兢。

헌사에서 지형조사(知刑曹事) 최긍(崔兢)을 탄핵하였다. 처음에 도관 정랑(都官正郞) 박인을(朴仁乙)이 남과 소송할 때 몰래 문서의 글자를 고쳤으므로, 긍이 인을을 탄핵하니, 인을이 화가 나서 긍의 집에 가서 긍이 송사를 듣고 있는데 인을이 욕설을 퍼부었으므로, 헌사에서 인을을 탄핵하고 긍도 함께 탄핵한 것이었다.


12月 24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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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간의 도리 옥관자를 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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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己丑/命去臺諫員頂玉。

대간의 도리 옥관자(玉貫子)를 못하게 하였다.


12月 26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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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조 전서 심효생이 임금을 접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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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辛卯/吏曹典書沈孝生享上。

이조 전서(吏曹典書) 심효생(沈孝生)이 임금을 접대하였다.


대사헌 박경 등이 첨설직 제수 방안에 대해 올린 상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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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司憲朴經等上疏曰:

官職公器, 宜先德望, 不可假濫。 國家因前朝之舊, 乃用循資之格, 苟非才德出衆, 固無超資之理。 殿下顧念宿衛之士, 有未霑恩命者, 以其功勞多少, 第其資級高卑, 授以添設官職。 諸將軍、節制使錄其職名以進, 其中奸黠者, 詐增前級, 躐取高官者, 蓋多有之。 此人心所同惡, 而國法所當懲也。 今已下令諸道, 搜索此輩, 徵之以馬, 仍收職牒。 臣等竊謂與其懲之於後, 曷若審之於初! 伏望自今, 嘉善已下四品已上受添職者, 皆於敎命, 錄其前職, 以防僞濫, 其敎命, 皆下本府, 考其前職之牒, 方許出給, 則人絶冒進之心, 國無濫賞之弊。

上允之。

대사헌 박경(朴經) 등이 상소하였다.

"관직은 공기(公器)이니 마땅히 덕망을 먼저 보아야 하고, 함부로 임명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국가에서 고려의 옛제도에 의하여 순자(循資)의 법을 쓰고 있는데, 진실로 재질과 덕망이 출중하지 않으면 계급을 뛰어 올릴 이치가 없는 것입니다. 전하께서 숙위(宿衛)하는 군사들 가운데 포상을 받지 못한 자가 있을까 하여, 그 공로의 다소로 계급의 등급을 매겨서 〈명예직으로 설치한〉 첨설관(添設官)의 직을 주고자 하매, 여러 장군과 절제사로 하여금 그 이름을 기록해 올리게 한 것인데, 그 중에는 간사하고 교활한 자가 거짓으로 전의 계급을 올려서 높은 벼슬을 취한 자도 많이 있습니다. 이것은 인심이 다같이 미워하는 것이며, 국법으로 징계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제 이미 여러 도에 영을 내려서, 이런 무리들을 찾아내어 말을 징발하고 직첩을 거두게 하였으나, 신 등은 그윽이 생각하옵건대, 뒤에 징계하는 것이 어찌 당초에 살피는 것과 같겠습니까? 바라옵건대, 지금부터는 가선(嘉善) 이하 4품 이상의 첨설직을 받는 자는 모두 교명(敎明)065) 에 그 전직을 기록하여 거짓이 없게 하고, 그 교명은 다 사헌부로 내려보내서 전 직첩을 조사해 본 뒤에 발령하게 하면, 사람들이 무턱대고 승진하려 하는 마음이 없어질 것이요, 나라에서도 함부로 상을 주는 폐단이 없을 것입니다."

임금이 그대로 윤허하였다.


일본국 진서 절도사 원요준이 사신을 보내어 《대장경》을 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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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是月, 日本國鎭西節度使源了俊使人求《大藏經》。

이달에 일본국 진서 절도사(鎭西節度使) 원요준(源了俊)이 사신을 보내어 《대장경(大藏經)》을 청구하였다.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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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도독부(都督府)
  2. 황제의 말씀
  3. 문하성의 낭사(郞舍)와 사헌부를 지칭
  4. 정원(定員) 이상으로 벼슬자리를 임시 늘이거나, 공사(公事)를 맡기지 않고 이름만 가지게 할 경우, 그 벼슬 이름 앞에 붙이던 말. 예:검교 문하 시중(檢校門下侍中)·검교 정승(檢校政丞) 등.
  5. 나라 제사에 소를 통째로 제물로 바치는 일
  6. 고구려의 장수인 고연수(高延壽)와 고혜진(高惠眞)
  7. 고구려의 관직 이름인데, 여기서는 대로(對盧) 고정의(高正義)를 이른 것임
  8. 당 태종(唐太宗)
  9. 요동(遼東)
  10. 중국
  11. 관원들이 전직(轉職)할 때 재직중(在職中)의 회계(會計)나 물품 출납에 대한 책임을 해제 받던 일. 즉 전임관(前任官)이 전곡(錢穀)과 물품의 수납·지출에 관한 장부를 써서 부임하는 관원에게 인계할 경우, 이 사실을 호조(戶曹)에 보고하면, 호조는 이를 조사하고 모자라는 것이 없으면 이조(吏曹)에 통지하여 해유의 증명서를 주게 하였음.
  12. 큰 성문(城門) 밖의 작은 성(城). 성문 밖에 부설하여 성문을 보호하고 성을 든든히 지키기 위하여 만듦.
  13. 임금이 내려 주는 술
  14. 중국
  15. 황제에게 올리는 문서
  16. 배를 운행하는 일. 곧 수전(水戰).
  17. 신하가 임금을 죽이는 일
  18. 심부름하는 종
  19. 유비(劉備)
  20. 어느 곳을 지명하여 머물러 있게 하는 형벌의 하나
  21. 군주
  22. 원나라
  23. 성중관(成衆官)
  24. 신우(辛禑)
  25. 특별한 사무를 맡은 것을 이름.
  26. 의흥 삼군부(義興三軍府)
  27. 십위(十衛) 각영(各領)의 산원(散員) 5명을 오원(五員), 낭장(郞將) 5명과 별장(別將) 5명을 십장(十將)이라 함.
  28. 십위(十衛) 각영(各領)의 위(尉) 20명과 정(正) 40명을 합쳐 육십(六十)이라고 지칭함
  29. 중경(中京)·서경(西京)·동경(東京)
  30. 경주(慶州)
  31. 평양(平壤)
  32. 개경(開京)
  33. 자기 의사를 굽혀 남의 말을 들음.
  34. 종친·공신·당상관들에게 지급한 일종의 호위병. 이후에는 농장 관리인 등의 역할을 하기도 하였음.
  35. 전(前)·후(後)·좌(左)·우(右)·중(中)의 오군(五軍)의 진도(陣圖)
  36. 종묘(宗廟)에서 사맹월(四孟月)의 상순(上旬)과 납일(臘日)에 지내는 제사와, 사직(社稷)에서 정월 첫 신일(辛日)에 풍년을 빌며 지내는 제사, 또는 중춘(仲春)·중추(仲秋)의 첫 무일(戊日)과 납일(臘日)에 지내는 제사
  37. 고려 때 예문관의 정9품 벼슬
  38. 고려 때 예문관의 정7품 벼슬
  39. 감사(監司)나 수령(守令)의 선정(善政)을 찬양하는 표시로, 백성들이 그 사람이 살아 있는 때부터 받들어 제사지내는 사당
  40. 평안도·함경도 등의 부(府)·목(牧)·도호부(都護府)에 따로 둔 벼슬인데, 그 지방 사람만으로 시킴.
  41. 공문서
  42. 중앙에서는 병조(兵曹)와 훈련 도감(訓鍊都監)의 당상관(堂上官), 지방은 관찰사(觀察使)와 각 진영(鎭營)의 병마 절도사(兵馬節度使)가 매년 봄과 가을에 무사(武士)를 선발하는 제도.
  43. 환관(宦官)
  44. 현직
  45. 매우 튼튼하고 잘된 성지(城池)
  46. 주(周)나라의 수도가 낙읍(洛邑)에 있었을 때의 칭호. 곧 주나라의 국운이 융성하였던 시기를 말함.
  47. 개국의 기본 강령(綱領)을 논한 규범 체계서(規範體系書). 내용은 정보위(正寶位)·국호(國號)·안국본(安國本)·세계(世系)·교서(敎書) 등으로 나누어 국가 형성의 기본을 논했고, 뒤이어 동양의 전통적인 관제(官制)를 따라서 육전(六典)의 관할 사무를 규정하였음
  48. 금릉(金陵)
  49. 도조(度祖)의 비(妃)
  50. 종 2품의 관계(官階)
  51. 북쪽
  52. 재해(災害)의 징조로 나타난다고 하는 별. 혜성이나 큰 유성을 이른다.
  53. 지금의 평산.
  54. 수군(水軍)
  55. 해마다 음력 6월과 12월에 벼슬아치의 성적이 좋고 나쁨에 따라서 벼슬자리를 떼어 버리거나 좋은 데로 올리거나 하는 것.
  56. 추천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