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정종대왕실록/2년

二年 春正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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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月 1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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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복으로 군신을 거느리고 신정을 하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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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丙寅〕朔/冕服率群臣賀正。 群臣請獻壽, 上以太上王未還, 不許。

면복(冕服)으로 군신을 거느리고 신정(新正)을 하례하였다. 군신이 헌수(獻壽)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태상왕이 돌아오지 않았다고 하여 허락하지 않았다.


임금이 백관을 거느리고 태상전에 나아가 헌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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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太上王至自觀音窟, 上率百官, 詣太上殿上壽。

태상왕이 관음굴(觀音窟)에서 이르니, 임금이 백관을 거느리고 태상전에 나아가 헌수(獻壽)하였다.


도평의사사가 근정전에서 헌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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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都評議使司獻壽於勤政殿。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가 근정전(勤政殿)에서 헌수하였다.


경연에서 권근이 《통감촬요》를 진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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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始御經筵。 知經筵事權近進講《通鑑撮要》曰: “人主之學, 不但讀其書而已, 必先正其心。 是以傅說對高宗曰: ‘惟學遜志。’ 遜者, 虛心之謂也。 心有所蔽, 則一言一事之應, 必不得其正。” 上然之。

비로소 경연(經筵)에 나아갔다. 지경연사(知經筵事) 권근(權近)이 《통감촬요(通鑑撮要)》를 진강(進講)하였다.

"인주(人主)의 학문은 글만을 읽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먼저 그 마음을 바르게 하여야 합니다. 그러므로, 부열(傅說)이 은(殷)나라 고종(高宗)을 대하여 말하기를, ‘오직 학문은 뜻을 공손히 하여야 한다.’ 하였는데, 공손[遜]이라는 것은 마음을 비게 한다는 말입니다. 마음에 가린 것이 있으면, 한마디 말이나 한가지 일의 응(應)함이 반드시 그 바른 것을 얻지 못할 것입니다."

임금이 옳게 여겼다.


1月 10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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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무리가 겹으로 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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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乙亥/日有兩珥, 上冠。

해에 양이(兩珥)와 상관(上冠)이 있었다.


경연에서 《통감촬요》를 강하다가 불교 및 유교에 대해 하윤과 문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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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御經筵, 講《撮要》。 至西域有神, 其名曰佛, 良久乃曰: “佛, 謂之神則非也。” 知經筵事河崙對曰: “五帝三王之時, 未有佛, 至漢明帝時, 其書始播。 其道以寂滅爲宗, 與鬼神無以異也。” 上曰: “鬼神之道, 不可謂之虛也。 寡人昔仕僞朝爲代言, 從僞主次長湍, 有妓五六人, 俱發腹病, 卽用酒肉享, 紺嶽以禱, 俄有神降于一妓, 顚倒踴躍, 不知羞赧。 若此者, 不可謂之虛也。 且佛氏以慈悲不殺爲道, 儒者之道, 亦有好生惡殺之理, 此則近似也。” 崙對曰: “儒者之道, 非好濫殺, 上以供宗廟, 下以侑賓客耳。 大抵西域之人, 皆暴戾無道, 故釋氏以慈悲不殺誘之, 以輪回報應刼之, 非人主所宜信也。” 上曰: “然。” 曰: “釋氏右脅誕生, 聖人何不書? 人死歸于地獄, 亦非歟?” 崙對曰: “此甚無理之言也。 豈有人生自脅者? 是以聖人不書。 且人受陰陽五行之氣以生, 死則陰陽散而魂升魄降, 復有何物歸地獄者哉? 此佛氏以未來未見, 誘惑愚民, 非人主所宜信。” 上然之。

경연(經筵)에 나아가서 《촬요(撮要)》를 강하다가, ‘서역(西域)에 신(神)이 있으니 그 이름은 부처[佛]라’고 한 데에 이르러서, 한참 있다가 말하기를,

"부처를 신(神)이라고 하는 것은 잘못이다."

하였다. 지경연사(知經筵事) 하윤(河崙)이 대답하기를,

"오제(五帝)·삼왕(三王) 때에는 부처가 없었고, 한(漢)나라 명제(明帝) 때에 이르러 그 경서(經書)가 비로소 전파되었는데, 그 도(道)가 적멸(寂滅)을 종지(宗旨)로 삼아서 귀신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귀신의 도는 허(虛)라고 말할 수 없다. 과인(寡人)이 옛날에 위조(僞朝)에 벼슬하여 대언(代言)이 되어, 위주(僞主)[1]를 따라 장단(長湍)에 머물렀는데, 기생 5, 6명이 한꺼번에 복통(腹痛)이 났었다. 곧 술과 고기를 가지고 감악산(紺嶽山)에 제향하여 기도하였는데, 조금 있다가 신(神)이 한 기생에게 내려 전지도지(顚之倒之)하고 펄펄 뛰면서 부끄러운 것을 알지 못하였으니, 이런 것은 헛된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 또 불씨(佛氏)는 자비 불살(慈悲不殺)로 도를 삼는데, 유자(儒者)의 도에도 또한 살리기를 좋아하고 죽이기를 싫어하는 이치가 있으니, 이것은 비슷하다."

하였다. 하윤이 대답하기를,

"유자의 도는 함부로 죽이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위로 종묘(宗廟)에 이바지하고 아래로 빈객을 권하는 것뿐입니다. 대저 서역(西域) 사람들이 모두 포악하고 무도하였기 때문에, 석씨(釋氏)가 자비 불살(慈悲不殺)로 달래고, 윤회 보응(輪回報應)으로 겁준 것이니, 인주(人主)의 믿을 바가 아닙니다."

하니, 임금이

"그렇다."

하고, 말하기를,

"석씨(釋氏)가 우협(右脅)에서 탄생하였다는데, 성인(聖人)이 어찌하여 쓰[書]지 않았는가? 사람이 죽으면 지옥(地獄)에 돌아간다는 것도 거짓인가?"

하였다. 하윤이 대답하기를,

"이것은 매우 이치 없는 말입니다. 어찌 사람으로서 옆구리에서 난 자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성인이 쓰지 않은 것입니다. 또 사람은 음양 오행(陰陽五行)의 기운을 받아서 태어나고, 죽으면 음양이 흩어져서 혼(魂)은 올라가고 백(魄)은 내려가는 것이니, 다시 무슨 물건이 있어 지옥으로 돌아가겠습니까? 이것은 불씨가 미래(未來)와 보지 못한 것으로 어리석은 백성을 유혹한 것이니, 인주가 믿을 것이 못됩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집현전을 고쳐 보문각이라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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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改集賢殿爲寶文閣。

집현전(集賢殿)을 고쳐 보문각(寶文閣)이라 하였다.


전 예문춘추관 태학사 한상질의 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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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前藝文春秋館太學士韓尙質卒。 尙質, 淸州人, 高麗相脩之子。 登庚申第, 性聰敏, 歷揚中外, 皆有成績。 國初, 奉命請國號, 受朝鮮之名。 訃聞, 命攸司禮葬, 贈諡文烈。 子起。

전 예문춘추관 태학사(藝文春秋館太學士) 한상질(韓尙質)이 졸(卒)하였다. 한상질은 청주(淸州)사람인데, 고려(高麗)의 상신(相臣) 한수(韓脩)의 아들이었다. 경신년의 과거에 올랐는데, 성품이 총명하고 민첩하여, 중외(中外)의 벼슬을 두루 지냈으나 모두 성적이 좋았었다. 국초에 어명을 받들고 사신으로 가서, 국호(國號)를 청하여 조선(朝鮮)이란 이름을 받았었다. 부음(訃音)이 들리니, 유사(攸司)에 명하여 예장(禮葬)하게 하고 시호를 문열(文烈)이라 하였다. 아들은 한기(韓起)이다.


경연에서 한나라 때의 삼로, 오경과 불교의 길흉화복, 사뢰 등에 대해 배중륜·하윤과 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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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御經筵, 問漢三老、五更之事, 侍講官裵仲倫對曰: “昔明帝尊三老、五更, 猶我朝尊國師王師也。” 知經筵事河崙曰: “殿下漸有惑佛之弊。” 上曰: “寡人之好佛, 非若他人之惑也。 然佛氏以禍福示人者, 非歟?” 崙對曰: “佛氏皆以未見未來, 眩惑人心, 不敢以坦然事應言之, 此聖人惡其似是而非也。 若以禍福言之, 則昔釋氏在世時, 有盜殺其一族甚衆, 釋氏何不預言, 俾免其禍乎? 禍福之設之非, 於此可見。” 上曰: “舍利, 何自而生?” 崙對曰: “此精氣所畜也。 人修練精神, 則皆有舍利。 海中大蚌有寶珠, 蛇有明月珠。 蛇與蚌, 豈物之善, 而獨有此乎? 但精氣所畜耳。” 上笑之。

경연(經筵)에 나아가서 한(漢)나라의 삼로(三老)·오경(五更)[2]의 일을 물으니, 시강관(侍講官) 배중륜(裵仲倫)이 대답하기를,

"옛적에 명제(明帝)가 삼로·오경을 높였는데, 마치 우리 국조에서 국사(國師)·왕사(王師)를 높이는 것과 같았습니다."

하였다. 지경연사(知經筵事) 하윤(河崙)이 말하기를,

"전하가 점점 부처에게 혹하는 폐단이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과인이 부처를 좋아하는 것은 다른 사람이 미혹되는 것과는 같지 않다. 그러나, 불씨(佛氏)가 화복(禍福)으로 사람에게 보인 것은 잘못이다."

하였다. 하윤(河崙)이 대답하기를,

"불씨(佛氏)가 모두 미견(未見)과 미래(未來)를 가지고 인심을 현혹(眩惑)시키기 때문에, 감히 평탄한 사응(事應)을 가지고 말하지 못하였으니, 이것이, 성인이 그 옳은 것 같으면서도 그른 것을 미워한 것입니다. 만일 화복을 가지고 말한다면, 옛적에 석씨가 세상에 있을 때에, 도적이 그 일족(一族)을 심히 많이 죽이었는데, 석씨(釋氏)가 어찌하여 미리 말해서 그 화를 면하게 하지 않았겠습니까? 화복의 말이 그른 것을 여기에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사리(舍利)는 어디에서 생기는 것인가?"

하니, 하윤이 대답하기를,

"이것은 정기(精氣)가 뭉친 것입니다. 사람이 정신을 수련(修鍊)하면, 모두 사리(舍利)가 있는 것입니다. 바다 가운데 큰 조개가 보주(寶珠)가 있고, 뱀이 명월주(明月珠)가 있으니, 뱀과 조개가 어찌 물건의 착한 것이어서 홀로 이것이 있는 것이겠습니까? 다만 정기가 뭉친 것뿐입니다."

하니, 임금이 웃었다.


풍해도에서 배에 머물러 있던 왜인이 몰래 그들의 섬으로 돌아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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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豐海道留船之倭, 將四艘潛還其島。

풍해도(豐海道)에서 배에 머물러 있던 왜인이 배 4척을 가지고 몰래 그들의 섬으로 돌아갔다.


문하 시랑찬성사 이거이가 사직하니 윤허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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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門下侍郞贊成事李居易辭, 不允。

문하 시랑찬성사(門下侍郞贊成事) 이거이(李居易)가 사직하니, 윤허하지 않았다.


1月 20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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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국사의 금부처가 땀을 흘려 중추원 사 최유경을 보내 기양 도량을 베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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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乙酉/興國寺金人出汗。 翌日, 遣中樞院使崔有慶, 設七日道場以禳之。

흥국사(興國寺)의 금인(金人)이 땀을 흘렸다. 이튿날 중추원 사(中樞院使) 최유경(崔有慶)을 보내어 칠일 도량(七日道場)을 베풀고 기양(祈禳)하였다.


문하부에서 각품의 고신은 반드시 대성에서 서경하기를 청하니 윤허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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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門下府上疏, 請各品告身, 必署經臺省, 不允。 疏略曰:

告身之法, 署經臺省者, 所以勵廉恥激士風也。 近當草創之時, 急於用人, 始爲官敎之法, 是一時之權也。 然躐等而冒受者, 比比有之。 庶司員吏, 官至四品, 卽受官敎, 略無謹愼, 瘝官廢職, 廉恥不興。 士風不美者, 蓋由此也。 今當國家已定, 當以激勵士風, 肅淸朝廷爲重。 伏惟特令一品以下告身, 皆署經臺省, 以勵士風。

문하부(門下府)에서 상소하여, 각품(各品)의 고신(告身)은 반드시 대성(臺省)에서 서경(署經)하기를 청하니,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소(疏)는 대략 이러하였다.

"고신(告身)의 법에 대성에서 서경(署經)하는 것은 염치를 권하고 사풍(士風)을 격려하자는 것입니다. 요사이 초창(草創)한 때를 당하여 사람 쓰기에 급해서 비로소 관교(官敎)의 법을 행하였으니, 이것은 일시의 권도입니다. 그러나, 등급을 건너뛰어 모람(冒濫)되게 받는 자가 자주 있고, 서사(庶司)의 원리(員吏)가 벼슬이 4품(品)에 이르면 곧 관교(官敎)를 받아서, 조금도 근신하는 바가 없습니다. 관(官)을 병들게 하고 직사를 폐하여서, 염치가 일어나지 못하고 사풍(士風)이 아름답지 못한 것이 대개 이 때문입니다. 지금 국가가 이미 정해졌사오니, 마땅히 사풍(士風)을 격려하고 조정을 숙청하는 것으로 중심을 삼아야 합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특별히 1품(品) 이하의 고신(告身)은 모두 대성(臺省)에서 서경(署經)하게 하여, 선비의 기풍을 격려하게 하소서."


1月 23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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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쪽·북쪽·동쪽에 붉은 기운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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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戊子/西北東有赤氣。

서쪽·북쪽·동쪽에 붉은 기운이 있었다.


1月 24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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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무리가 서고 서쪽, 북쪽에 붉은 기운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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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己丑/日冠。 西北有赤氣。

일관(日冠)의 현상이 나타나고, 서쪽·북쪽에 붉은 기운이 있었다.


경연에서 전백영이 진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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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御經筵。 同知經筵事全伯英講畢, 啓曰: “今者冬煖春寒, 宜小心敬愼。” 嘉納之。

경연(經筵)에 나아갔다. 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 전백영(全伯英)이 강론을 끝마치고 아뢰기를,

"지금 겨울이 따뜻하고 봄이 추우니, 마땅히 조심하여 공경하고 삼가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가납(嘉納)하였다.


서운관 등에서 재이를 불교의 힘으로 막을 수 없음을 아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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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書雲觀上言: “災異之讉, 非禱於佛神而可弭。 願夙夜敬畏, 以答天變。” 知經筵事河崙曰: “佛者, 西域之胡神。 昔西土之人, 橫逆無道, 釋迦生於周康王時, 廣張禍福之說, 誑誘人民, 及漢明帝時, 其法流入中國, 自後人率崇信。 夫佛法, 非治國安民之道, 全以因果禍福爲說。 人之死生壽夭, 悉關於命, 佛氏豈能長短之哉? 況佛法未入中國之時, 文、武、周公, 年幾百歲, 其法入中國以後, 人多夭折, 佛法之無益, 良可知矣。 釋氏云: ‘生生不滅。’ 信如其言, 釋迦豈止七旬有九而死哉? 釋迦之從兄弟, 有爲盜所害者, 釋迦曰: ‘前因難避。’ 若實知前因, 則何不預說, 俾免其禍乎? 若前因難避, 則雖佛亦末如之何矣。 乃謂前因, 而坐視骨肉之患, 尙且不救。 況今千載之後, 君臣之禍福, 其能爲之乎? 祈禱佛神, 無益於國, 章章明矣。” 上曰: “然。 吾亦不盡心祈禱。” 又曰: “釋氏之道, 天下之人皆信之者, 是必以爲眞也。” 知經筵事權近曰: “人之受形以生者, 以有五行之理也。 五行之理, 在心爲五常。 五行盛衰, 以之知命, 五行失常, 以之知病, 此現然之明驗也。 釋家乃以地水火風, 受形以生爲說者, 妄矣。” 上然之。

서운관(書雲觀)에서 상언(上言)하였다.

"재이(災異)의 견고(譴告)는 불신(佛神)에게 빌어서 그치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원하건대, 밤낮으로 공경하고 두려워하여 천변에 대답하소서."

지경연사(知經筵事) 하윤(河崙)이 말하였다.

"부처라는 것은 서역(西域)의 오랑캐 신[胡神]인데, 옛날에 서토(西土) 사람이 횡역(橫逆) 무도(無道)하므로, 석가(釋迦)가 주(周)나라 강왕(康王) 때에 나와 널리 화복(禍福)의 설을 떠벌려서 인민을 속이고 달래었습니다. 한(漢)나라 명제(明帝) 때에 미쳐 그 법이 중국에 흘러 들어왔는데, 그 뒤부터 사람들이 대개 숭상하고 믿었습니다. 대개 불법은 나라를 다스리고 백성을 편안히 하는 도(道)가 아니고, 온전히 인과(因果) 화복(禍福)으로 말을 합니다. 사람의 생사(生死) 수요(壽夭)가 모두 명수(命數)에 관계되니, 불씨(佛氏)가 어찌 능히 목숨을 길게 하고 짧게 하겠습니까? 하물며, 불법이 중국에 들어오지 않았을 때에는 문왕(文王)·무왕(武王)·주공(周公)이 나이 거의 1백 세이었는데, 그 법이 중국에 들어온 이후에는 사람이 일찍 죽은 사람이 많았으니, 불법이 소용이 없는 것을 잘 알 수 있었습니다. 석씨(釋氏)가 말하기를, ‘낳고 낳아서 멸하지 않는다.’ 하였으니, 진실로 그 말과 같다면, 석가가 어찌하여 79세만 살고 죽었겠습니까? 석가의 종형제로서 도적에게 해(害)를 당한 자가 있었는데, 석가가 말하기를, ‘전인(前因)은 피하기 어렵다.’ 하였으니, 만일 실지로 전인(前因)을 알았다면, 어찌하여 미리 말해서 그 화를 면하게 하지 않았습니까? 만일 전인(前因)을 피하기 어렵다면, 비록 부처라도 또한 어찌할 수 없는 것입니다. 전인이라고 말하면서 골육(骨肉)의 환란을 앉아서 보고, 오히려 구원하지 못했는데, 하물며, 지금 천년 뒤에 군신(君臣)의 화복을 능히 할 수 있겠습니까? 불신(佛神)에게 기도하는 것이 나라에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은 참으로 분명합니다."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다. 나도 또한 마음을 다하여 기도하지 않는다."

하고, 또 말하기를,

"석씨(釋氏)의 도를 천하 사람이 모두 믿는 것은 반드시 참[眞]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니, 지경연사(知經筵事) 권근(權近)이 말하였다.

"사람이 형상을 받아서 태어나는 것은 오행(五行)[3]의 이치가 있기 때문입니다. 오행(五行)의 이치가 마음에 있어서 오상(五常)[4]이 되고, 오행의 성쇠(盛衰)로 명(命)을 알고 오행의 실상(失常)으로 병(病)을 아니, 이것은 현연(現然)한 밝은 징험입니다. 석가(釋家)에서 지(地)·수(水)·화(火)·풍(風)으로 형상을 받아 태어난다고 말하는 것은 무식한 것입니다."

임금이 옳게 여겼다.


대간이 상소하여, 각품의 고신을 대간에서 서경하는 법을 세울 것을 청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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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臺諫上疏, 復請各品告身, 署經臺省之法。 門下府疏曰:

道有升降, 政由俗革, 故有國家者, 必因時立法, 以救其弊, 此三代聖王議禮制度, 不能無沿革之異也。 我朝出謝之法, 必署經臺省, 實精選人材之要道也, 今五品以下, 只令本府署出, 四品以上, 直受官敎。 用人一也, 而告身之法, 岐而二之, 恐非盛代經久之典也。 臺省, 人主耳目之官, 公論所在, 故凡依貼諡誄口傳等事, 必令臺省察之。 況除拜庶官, 實國家之所重, 四品以上, 位益高而責愈重, 豈可使耳目之官, 不加察哉? 臣等請條其不可。 庶官, 人主所與共天職者也。 四品以上, 直受官敎, 自謂公論所不及, 怠於職事者, 頗多有之, 事功何自而興乎? 其不可者一也。 守令近民, 尤不可不選。 今也僥倖之徒, 曾不更事, 夤緣雜職, 秩過四品, 則直受官敎, 挈家以行。 國家何知行實賢否, 家道善惡哉? 及其之任, 則不遵條令, 恣行貪汚, 貽害於民, 歸怨於上, 其不可者二也。 士出於農, 而工商不與焉, 今官敎之法一行, 而工商賤隷, 尙有冒進之意。 若因仍不革, 則必至於混雜朝廷矣, 其不可者三也。 凡在官者, 不畏公論, 則易陷於不義, 署經臺省, 實使人謹愼之至術也。 若不禁於未然, 則人不遷善, 而必至於犯義矣, 其不可者四也。 殿下以繼世之主, 當隆平之時, 宜以勵士風正朝廷爲務, 其施爲之法, 不可與草創之日同也。 伏惟殿下, 革官敎之法, 特令臺省, 署出一品以下告身, 以正百官。

司憲府疏曰:

設官分職, 所以熙庶政; 繩違糾慝, 所以正百官。 夫爵人於朝, 而苟以一人之所薦, 置諸朝廷之上, 不使臺諫考察, 則非所以勵士風正百官也。 古者, 詔勑用人, 如有不便者, 中書門下, 皆應論執駁正之。 是以官得其人, 而政無失擧。 前朝爵人, 必署經臺諫者, 用是道也。 恭惟太上殿下, 當開國經營之時, 人心離合之際, 卽用官敎之法, 以待勳勞之士, 斯乃取便一時, 非所以垂憲萬世也。 殿下當守成之運, 草創權宜之法, 在所當改。 苟以爲太上之制, 不敢輕改, 則其爲弊, 將有不可勝言者矣。 凡士飭身修行, 不敢縱肆者, 誠畏臺諫之議其後也。 若官敎之制行, 而署合之法廢, 則慢於官而怠於行者, 無所忌憚, 萬事以之而墮, 士風以之而不振矣。 況殿下維新之治, 苟有讜言, 所當採納, 以廣言路? 頃者, 諫臣以此列上, 殿下不卽兪允, 臣等竊爲殿下惜之。 願革一時之權制, 取前朝告身之法, 皆令署經臺諫, 然後各就其職, 則士風益勵, 庶績咸熙, 治平之化, 庶可期也。

上乃下二章于都評議使司, 擬議以聞。 使司啓曰: “臺諫狀申, 於理允當。” 上許之。

대간(臺諫)이 상소(上疏)하여, 다시 각품(各品)의 고신(告身)을 대성에서 서경(署經)하는 법을 청하였다. 문하부(門下府)의 소(疏)는 이러하였다.

"도(道)는 오르고 내리는 것이 있고, 정치는 풍속(風俗)으로 말미암아 고쳐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국가를 차지한 자가 반드시 시대에 따라서 법을 세워 그 폐단을 구제합니다. 이것은 삼대(三代) 성왕(聖王)이 예제(禮制)를 의논하고 법도를 제정하여 연혁(沿革)의 다름이 있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 국조의 출사(出謝)[5]하는 법이 반드시 대성(臺省)에서 서경(署經)하는 것은 실로 인재(人材)를 엄정하게 선발하는 요도(要道)입니다. 지금 5품(品) 이하만 본부(本府)로 하여금 서출(署出)하게 하고, 4품(品) 이상은 직접 관교(官敎)를 받으니, 인재를 쓰는 것은 한가지인데, 고신(告身)의 법은 나누어져 둘이니, 성대(盛代)의 오래갈 수 있는 법전이 아닌가 합니다. 대성은 인주(人主)의 이목(耳目)과 같은 기관이요, 공론(公論)이 있는 곳이므로, 무릇 의첩(依貼)[6]·시뢰(諡誄)[7]·구전(口傳) 등의 일을 반드시 대성으로 하여금 살피게 하는데, 하물며, 여러 관원을 제수하는 것은 실로 국가의 중한 일이요, 4품(品) 이상은 벼슬이 더욱 높고 책임이 더욱 중하니, 어찌 이목(耳目)의 관원으로 하여금 살피게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신 등은 청하건대, 그 불가한 것을 조목조목 말하겠습니다.

여러 관원은 인주(人主)가 더불어 천직(天職)을 같이하는 자들인데, 4품(品) 이상은 직접 관교(官敎)를 받으므로 스스로 생각하기를, ‘공론이 미치지 못하는 바라’ 하여 직사에 태만한 자가 매우 많이 있으니, 사공(事功)이 어디에서 일어나겠습니까? 그 불가한 것의 한 가지입니다.

수령(守令)은 백성을 가까이 하니 더욱 선택하지 않을 수 없는데, 지금 요행을 바라는 무리가 일찍이 일을 경험하지 않고, 잡직(雜職)을 인연하여 직질(職秩)이 4품(品)만 지나면, 곧 관교(官敎)를 받아 가족을 거느리고 부임하니, 국가에서 어떻게 행실의 어질고 어질지 않은 것과 가도(家道)의 착하고 악한 것을 알겠습니까? 임소(任所)에 가서는 조령(條令)을 준수하지 않고 방자하게 탐오(貪汚)를 행하여, 해(害)를 백성에게 끼치고 원망을 윗사람에게 돌리니, 그 불가한 것의 두 가지입니다.

사(士)는 농(農)에서 나오고 공(工)과 상(商)은 참여하지 못하는 것인데, 지금 관교의 법이 한번 행하여지니, 공상(工商)·천례(賤隷)도 오히려 모람(冒濫)하게 사진(仕進)하는 뜻이 있습니다. 만일 그대로 인습하여 고치지 않으면 반드시 조정이 혼잡하게 될 것이니, 그 불가한 것의 세 가지입니다.

무릇 관직에 있는 자가 공론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불의(不義)에 빠지기가 쉬우니, 대성(臺省)에서 서경(署經)하는 것은 실로 사람으로 하여금 근신하게 하는 지극한 술책입니다. 만일 미연(未然)에 금지하지 않으면, 사람들이 착한 데 힘쓰지 않아서 반드시 의(義)를 범하는 데에 이를 것이니, 그 불가한 것의 네 가지입니다.

전하께서 대(代)를 이은 임금으로 태평한 때를 당하였으니, 마땅히 사풍(士風)을 격려하고 조정을 바로잡는 것으로 일을 삼을 것이요, 그 시행하는 법은 초창기(草創期)와 같이 할 것이 아닙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관교의 법을 고쳐 특별히 대성으로 하여금 1품 이하의 고신(告身)을 서출(署出)하게 하여, 백관을 바루소서."

사헌부(司憲府)의 소(疏)는 이러하였다.

"관사(官司)를 설치하고 직임(職任)을 나누는 것은 여러 정사를 빛나게 하자는 것이요, 어기는 것을 다스리고 간특한 것을 규찰하는 것은 백관을 바루자는 것입니다. 대저 사람을 조정에 벼슬시킬 때에, 만일 한 사람의 천거에 의하여 조정 위에 두고 대간으로 하여금 고찰하게 하지 않으면, 사풍을 격려하고 백관을 바루는 소이가 아닙니다. 옛날에 조칙(詔勅)으로 사람을 썼는데, 만일 온당하지 않은 것이 있으면, 중서성(中書省)·문하성(門下省)에서 모두 한결같이 논집(論執)하여 박정(駁正)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관직에는 적당한 사람을 얻고 정사에는 잘못된 거조(擧措)가 없었습니다. 고려 때 사람을 벼슬시킬 때에 반드시 대간에서 서경(署經)한 것은 이 방법를 쓴 것입니다. 생각건대, 태상(太上) 전하께서 개국하여 경영(經營)하실 때는 인심(人心)이 이합(離合)하는 즈음이었으므로, 곧 관교(官敎)의 법을 써서 훈로(勳勞)가 있는 인사를 대접하였습니다. 이것은 한때에 편의한 것을 취한 것이요, 만세에 법을 남기자는 소이는 아닙니다.

전하께서는 수성(守成)하는 운수를 당하여 초창기(草創期)의 권의(權宜)의 법을 마땅히 고쳐야 합니다. 만일 태상왕의 제도를 감히 경솔히 고칠 수 없다고 한다면, 그 폐단이 장차 말할 수 없는 것이 있을 것입니다. 무릇 선비가 몸을 경계하고 행실을 닦아 감히 방자하지 못하는 것은, 진실로 대간이 그 뒤를 의논하는 것을 두려워함입니다. 만일 관교의 제도가 행하여지고 서합(署合)의 법이 폐지되면, 관직에 태만하고 행실에 게으른 자가 거리낄 것이 없어서, 만사가 이로 인하여 무너지고, 사풍(士風)이 이로 인하여 진작되지 못할 것입니다. 하물며, 전하의 유신(維新)의 정치에 만일 곧은 말을 하는 사람이 있으면, 마땅히 받아들여서 언로를 넓혀야 합니다. 지난번에 간신(諫臣)이 이것을 가지고 열거하여 올렸는데, 전하께서 즉시 유윤하지 않으시니, 신 등은 간절히 전하를 위하여 애석하게 여깁니다. 원하건대, 한때 권의(權宜)의 제도를 고치고 고려의 고신(告身)의 법을 취하여, 모두 대간에서 서경(署經)한 연후에 각각 그 직사에 나가게 하시면, 사풍이 더욱 권장되고 모든 공적이 모두 빛나서, 치평(治平)의 교화를 거의 기약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임금이 두 소장(疏章)을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에 내려 상량하고 의논하여 아뢰도록 하니, 사사(使司)에서 아뢰기를,

"대간이 장신(狀申)한 것이 사리에 윤당합니다."

하니, 임금이 이를 허락하였다.


문하부에서 봉상시 소경 김첨을 탄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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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門下府劾奉常少卿金瞻。 瞻建議: “本朝國學, 遇春秋二丁, 祭文宣王, 僭用太牢, 未合於禮。 乞依至正條格, 諸郡縣品式, 只用羊三。” 然本朝用太牢久矣, 瞻欲輕改, 故劾之。

문하부(門下府)에서 봉상 소경(奉常少卿) 김첨(金瞻)을 탄핵하였다. 김첨이 건의하였었다.

"본조(本朝) 국학(國學)에서 봄·가을 두 정일(丁日)을 당하여 문선왕(文宣王)을 제사하는 데에 참람하게 대뢰(大牢)[8]를 쓰니, 예에 합당하지 못합니다. 빌건대, 《지정조격(至正條格)》[9] 제군현(諸郡縣)의 품식(品式)에 의하여 양(羊) 셋만 쓰소서."

그러나 본조에서 대뢰(大牢)를 쓴 지가 오래인데, 김첨이 경솔히 고치고자 하였으므로, 탄핵한 것이다.


1月 28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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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일까지 누른 안개가 사방에 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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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甲午/至乙未, 黃霧四塞。

29일[을미]까지 누른 안개가 사방에 끼었다.


남재가 정안공을 세워 세자를 삼자고 하자 정안공이 듣고 크게 노하여 꾸짖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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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卽位後, 南在於闕庭大言曰: “卽今當立靖安公爲世子, 玆事不可緩也。” 靖安公聞之大怒, 叱責之。 上無嗣, 時人皆心擬靖安公爲世子。

임금이 즉위(卽位)한 뒤에 남재(南在)가 대궐 뜰에서 크게 말하기를,

"지금 곧 마땅히 정안공(靖安公)을 세워 세자(世子)로 삼아야 한다. 이 일은 늦출 수가 없다."

하였으므로, 정안공이 듣고 크게 노하여 꾸짖었었다. 임금이 적사(嫡嗣)가 없었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모두 마음속으로 정안공이 세자가 되리라 생각하였다.


제2차 왕자의 난. 이방간을 토산에 추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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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放懷安公芳幹于兔山。 芳毅、芳幹及靖安公, 皆上之母弟也。 上無嫡嗣, 母弟當爲後。 益安性醇謹無他, 芳幹謂己以次當立, 然不學狂癡, 靖安公英睿夙成, 通經達理, 開國定社, 皆其功也, 故國人咸歸心焉。 芳幹深忌之, 謂妻姪判校書監事李來曰: “靖安公有猜於我, 我豈若匹夫徒死於人手乎?” 來驚曰: “公聽小人之讒, 欲害骨肉, 何可忍聞! 況靖安公有大勳於王室, 開國定社, 誰之力耶? 公之富貴, 亦由是耳。 公必欲如是, 則必得大惡之名, 而事且不成矣。” 芳幹忿然不悅曰: “助我者, 言不若此矣。” 宦者姜仁富, 芳幹妻之養父也。 跪而挼手曰: “公何爲發此言耶? 請勿復也。” 來, 禹玄寶之門生也。 詣玄寶第, 具道其言, 芳幹欲以是月晦日擧事。 且曰: “靖安公亦公之門生也, 宜速密諭。” 玄寶使其子洪富, 告于靖安公。 是夜, 靖安公與河崙、李茂等, 密議應變之策。 先是, 芳幹畜異謀, 邀公于第, 公欲往, 忽有疾不果。 異日, 芳幹與公, 偕詣闕謁上, 竝馬而回, 芳幹一不與語。 時三軍府令諸公侯, 獵禽以供纛祭, 靖安公將以明日出獵, 先令趙英茂, 領驅軍曉出于野。 芳幹子義寧君孟宗, 詣靖安公邸, 問獵所, 因曰: “我父, 今日亦出獵。” 靖安公遣人芳幹第, 偵其獵所, 芳幹軍士, 皆甲而奔集, 靖安公乃知有變。 於是, 義安公和、完山君天祐等十餘人, 皆會靖安公邸。 公欲以軍士自衛不出, 和、天祐直入寢室, 力請擧兵應之。 靖安公涕泣固拒之曰: “骨肉相殘, 非義之甚, 我以何顔應之乎?” 和、天祐等泣請不已, 亦不從, 卽使人於芳幹, 諭以大義, 請釋憾相見, 芳幹怒曰: “吾志已定, 何可更回!” 和白靖安公曰: “芳幹凶險已極, 事勢至此, 豈可守小節, 不顧宗社大計乎?” 公猶固拒不出, 和力挽公出于外廳, 公不得已, 呼奴小斤, 令出甲分與諸將。 公入內, 夫人卽提甲被之, 加以單衣, 據大義勸令擧兵, 公乃出。 和、天祐等, 擁逼上馬, 公使禮曹典書辛克禮, 聞于上曰: “宜命固守闕門, 以備非常。” 上未信。 俄而, 芳幹使其麾下上將軍吳用權啓曰: “靖安公謀欲害我, 我不得已起兵攻之, 請上勿驚。” 上大怒, 使都承旨李文和, 往諭芳幹曰: “爾惑聽亂言, 謀戕同氣, 狂悖甚矣。 爾其釋兵, 單騎赴闕, 予將保全之。” 文和未至, 芳幹已爲姻親閔原功、騎士李成奇等所激, 率孟宗及麾下數百人, 擐甲執兵, 道過太上殿, 使人啓曰: “靖安將害臣, 臣不可空死, 故發兵應變。” 太上王大怒曰: “汝於靖安, 異父乎? 異母乎? 彼如牛人, 何乃至此耶!” 芳幹行兵向內城東大門, 文和遇於善竹橋邊, 稱有旨, 芳幹下馬, 文和宣旨, 芳幹不從, 遂上馬陳兵于可祚街。 靖安公使盧閈, 告益安公曰: “兄病矣, 請嚴兵自衛毋動。” 又使李膺閉內城東大門。 承旨李叔蕃欲從公出獵, 行至白金反街, 閔無咎使人曰: “速具兵甲來。” 叔蕃乃奔詣公邸, 未至, 公已整兵而出, 過屎反橋駐馬, 諸軍士奔集馬前, 闌街不行。 叔蕃令軍士各歸本牌, 部伍旣定, 告公曰: “我先赴敵, 誓不奔北, 公宜速來。” 乃率武士數人先馳, 公曰: “我軍屯聚一處, 彼若射之, 則無一矢虛發矣。 嘗觀石戰, 忽有一二人, 從旁小洞, 叫呼突出, 則敵皆驚潰。 今小洞伏兵, 甚可畏也。” 乃命李之蘭, 分軍入闊洞上南山。 行至太廟洞口, 令和領軍上南山, 又把子反、注乙井、妙覺等諸洞, 皆遣兵備之。 叔蕃到善竹路上, 韓珪、金宇等所騎馬, 中箭退走。 叔蕃謂韓珪曰: “汝馬將死, 宜卽易乘。” 謂金宇曰: “汝馬不傷, 宜速還戰。” 叔蕃馳入兩軍間, 徐貴龍亦先入, 呼叔蕃曰: “欲立一處而射。” 叔蕃答曰: “此等時不宜呼名。 我欲立川中射之。” 公與韓珪馬, 令還赴。 上又遣大將軍李之實, 諭芳幹止之, 矢下如雨, 不得入而還。 芳幹自善竹到可祚街駐兵, 兩軍交戰, 芳幹步卒四十餘人, 立於馬井洞內, 又騎兵二十餘人, 出典牧洞口。 公麾下睦仁海面中箭, 金法生中箭卽死。 於是, 芳幹軍士爭射叔蕃, 叔蕃發十餘矢, 皆不中, 兩軍相對。 上聞芳幹拒命, 益怒, 且恐其見害, 乃嘆曰: “芳幹雖狂悖, 非其本心, 必爲奸人所賣耳。 不意骨肉乃爾!” 參贊門下府事河崙啓曰: “賜敎書以誘之, 可解也。” 卽命崙製敎書曰:

予以否德, 托于臣民之上, 庶賴宗室勳舊大小之臣, 同心戮力, 以致豐平。 不意母弟懷安公芳幹, 惑於無賴之徒讒間之言, 謀害骨肉, 予甚痛焉。 祇欲兩全, 以安宗社。 芳幹宜卽放散軍士, 歸於私第, 可全性命。 予不食言, 有如天日。 其一行軍士, 下旨之後, 不卽解散者, 予不敢宥, 竝以軍法處之。

命左承旨鄭矩, 齎赴軍前。 未至, 上黨侯李佇率所領慶尙道侍衛軍, 歷黔洞源。 過妙蓮岾, 公駐兵黔洞前路, 數使人戒前驅曰: “若見我兄, 勿發矢。 違者, 斬。” 和等登南山, 佇至妙蓮岾之陰, 竝吹角。 叔蕃射中騎士一人, 應弦而倒, 乃芳幹爪牙李成奇也。 孟宗素善射, 是日, 彎弓不彀不能射。 大軍吹角, 芳幹軍皆奔潰, 徐益、馬天牧、李柔等, 爲先鋒追之。 芳幹軍三人, 執槍叢立, 天牧擊殺二人, 又將殺一人, 公見之曰: “彼無罪, 勿殺之。” 益執槍追芳幹, 芳幹勢窮北走, 公呼小斤曰: “予恐無知人或害兄, 汝走疾呼, 勿令致害。” 小斤與高臣傅、李光得、權希達等, 走馬追之。 芳幹獨馳入妙蓮北洞, 小斤等不及見, 直馳過成均館, 遇自炭峴門來者問之, 皆曰: “無。” 小斤還馳上輔國西峴望之, 芳幹自妙蓮北洞出麻前岐路, 入輔國洞, 有帶鞍小騮馬隨來。 小斤等追之, 芳幹過輔國北岾, 入成均館西洞, 到古積慶園基, 下馬解甲, 棄弓矢而臥。 見希達等追至, 謂曰: “汝等爲殺我來耶?” 希達等曰: “是何言耶! 公勿懼。” 於是, 芳幹以甲與臣傅, 弓矢與希達, 環刀與光得。 謂小斤曰: “我更無所持之物, 故無以與汝。 我若得生, 則後必重報。” 希達等扶持芳幹, 騎小騮馬, 擁至成均館門外東峯下馬。 芳幹涕泣謂希達等曰: “我聽人言, 以至於此。” 鄭矩至, 宣讀敎書, 納諸芳幹懷中。 芳幹拜曰: “感上至恩。 臣初無不軌之心, 但怨靖安耳。 今敎書如此, 上豈紿我哉? 願丐餘生。” 時睦仁海所騎靖安公邸馬, 中箭逸走, 自來入廐, 夫人意必戰敗, 欲自赴戰場, 與公同死, 徒步而往, 侍女金氏等五人, 諫之不能得,【金氏, 卽敬寧之母也。】奴韓奇等遮路止之。 初亂方作, 和、天祐扶靖安上馬, 夫人召巫女鞦轡房、鍮房等, 問勝否, 皆曰: “必勝, 無憂。” 隣居號淨祀婆者名加也之亦至, 夫人謂婆曰: “昨夜之曉夢, 我在新敎舊宅, 見太陽在空。 兒莫同【今上兒諱】 正坐日輪之中, 是何兆也?” 婆判曰: “公當爲王, 常抱此兒之應也。” 夫人曰: “是何言也? 此事安可冀望也?” 婆遂歸其家。 至是, 婆聞捷聲來告, 夫人乃還。 公收兵駐馬于麻前岐路川邊塢上, 放聲痛泣, 大小軍士皆泣。 公召叔蕃曰: “兄性本愚直, 予意謂必惑人言而爲之, 果然。 汝往見兄, 問亂之由。” 叔蕃馳問芳幹, 芳幹不答。 叔蕃更問曰: “公已與希達言之, 何以不言? 公若不言, 國家必問之, 終能隱乎?” 芳幹不得已答曰: “前年冬至, 朴苞到吾家言曰: ‘今日大雨, 公知其應乎? 古人云: 「冬雨損道, 兵交於巿。」’ 我答曰: ‘如此之時, 安有交兵之事乎?’ 苞曰: ‘靖安公視公之眼, 有異矣。 必將生變, 公宜先手。’ 我聞之, 以謂不可空死於他人之手, 乃先發耳。” 叔蕃還告, 公遂還邸。 上遣右承旨李淑, 往謂芳幹曰: “汝以白晝, 動兵京都, 罪在不宥。 然骨肉至情, 不忍加誅, 從汝所願, 外方安置。” 芳幹請歸兔山村庄, 上命大護軍金重寶、巡軍千戶韓珪, 押芳幹父子, 安置兔山。 苞本是靖安公助戰節制使也。 其日稱疾不出, 中立觀變, 命下巡軍, 又下芳幹都鎭撫崔龍蘇及助戰節制使李沃ㆍ張湛ㆍ朴蔓等十餘人。 時, 益安公緣宿疾, 闔門不出, 聞變痛哭流涕曰: “上有明君, 下有令弟, 芳幹何爲乃爾!” 卽還上節制之印幷軍籍於三軍府。 先是, 書雲觀啓曰: “昨昏, 赤祲見于西北, 宗室中當有猛將出。” 士大夫皆屬目靖安公, 八日而亂作。

회안공(懷安公) 이방간(李芳幹)을 토산(兎山)에 추방하였다. 방의(芳毅)·이방간(李芳幹)과 정안공(靖安公)은 모두 임금의 동복 아우였다. 임금이 적사(嫡嗣)가 없으니, 동복 아우가 마땅히 후사(後嗣)가 될 터인데, 익안공(益安公)은 성품이 순후(醇厚)하고 근신하여 다른 생각이 없었고, 방간은 자기가 차례로서 마땅히 후사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였으나, 배우지 못하여 광망하고 어리석었으며, 정안공은 영예(英睿)하고 숙성(夙成)하며 경서(經書)와 이치에 통달하여, 개국(開國)과 정사(定社)가 모두 그의 공이었다. 그러므로, 나라 사람들이 모두 마음으로 귀부(歸附)하였다. 방간이 깊이 꺼리어서 처질(妻姪) 판교서감사(判校書監事) 이내(李來)에게 말하기를,

"정안공이 나를 시기하고 있으니, 내가 어찌 필부(匹夫)처럼 남의 손에 개죽음하겠는가!"

하니, 이내가 깜짝 놀라 말하였다.

"공(公)이 소인의 참소를 듣고 골육(骨肉)을 해치고자 하니, 어찌 차마 들을 수가 있겠습니까? 하물며, 정안공은 왕실(王室)에 큰 훈로가 있습니다. 개국과 정사가 누구의 힘입니까? 공(公)의 부귀(富貴)도 또한 그 때문입니다. 공(公)이 반드시 그렇게 하시면, 반드시 대악(大惡)의 이름을 얻을 것이고, 일도 또한 이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방간이 불끈 성을 내어 좋아하지 않으면서,

"나를 도울 사람이면 말이 이와 같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환자(宦者) 강인부(姜仁富)는 방간의 처의 양부(養父)인데, 꿇어앉아서 손을 비비며 말하기를,

"공은 왜 이런 말을 하십니까? 다시는 하지 마십시오."

하였다. 이내(李來)는 우현보(禹玄寶)의 문생(門生)이었으므로, 우현보의 집에 가서 그 말을 자세히 하고, 방간이 이달 그믐날에 거사(擧事)하려 한다 하고, 또 말하기를,

"정안공도 또한 공의 문생이니, 빨리 비밀히 일러야 합니다."

하였다. 우현보가 그 아들 우홍부(禹洪富)를 시켜 정안공에게 고하였다. 이날 밤에 정안공이 하윤(河崙)·이무(李茂) 등과 더불어 응변(應變)할 계책을 비밀히 의논하였다. 이 앞서 방간이 다른 음모를 꾸며 가지고 정안공을 그의 집으로 청하였는데, 정안공이 가려고 하다가 갑자기 병이 나서 가지 못하였다. 다른날 방간이 정안공과 더불어 함께 대궐에 나가 임금을 뵙고 말[馬]을 나란히 하여 돌아오는데, 방간이 한번도 같이 말하지 아니하였다. 그때에 삼군부(三軍府)에서 여러 공후(公侯)로 하여금 사냥을 하게 하여 둑제(纛祭)[10]에 쓰게 하였다. 정안공이 다음날 사냥을 나가려고 하여, 먼저 조영무(趙英茂)를 시켜 모릿꾼[驅軍]을 거느리고 새벽에 들에 나가게 하였다. 방간의 아들 의령군(義寧君) 이맹종(李孟宗)이 정안공의 저택(邸宅)에 와서 사냥하는 곳을 묻고, 인하여 말하기를,

"우리 아버지도 오늘 또한 사냥을 나갑니다."

하므로, 정안공이 사람을 방간의 집에 보내어 그 사냥하는 곳을 정탐하였는데, 방간의 군사는 모두 갑옷을 입고 분주히 모였었다. 정안공이 이에 변이 있는 것을 알았다. 이때에 의안공(義安公) 이화(李和)·완산군(完山君) 이천우(李天祐) 등 10인이 모두 정안공의 집에 모이었다. 정안공이 군사로 스스로 호위하고 나가지 않으려 하니, 이화와 이천우가 곧 침실로 들어가 군사를 내어 대응할 것을 극력 청하였다. 정안공이 눈물을 흘리며 굳이 거절하기를,

"골육(骨肉)을 서로 해치는 것은 불의가 심한 것이다. 내가 무슨 얼굴로 응전하겠는가?"

하였다. 이화와 이천우 등이 울며 청하여 마지않았으나 또한 따르지 아니하고, 곧 사람을 방간에게 보내어 대의(大義)로 이르고, 감정을 풀고 서로 만나기를 청하였다.

방간이 노하여 말하기를,

"내 뜻이 이미 정하여졌으니, 어찌 다시 돌이킬 수 있겠는가?"

하였다. 이화가 정안공에게 사뢰기를,

"방간의 흉험한 것이 이미 극진하여 사세가 여기에 이르렀으니, 어찌 작은 절조를 지키고 종사(宗社)의 대계(大計)를 돌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였으나, 정안공이 오히려 굳이 거절하고 나오지 않았다. 이화가 정안공을 힘껏 끌어 외청(外廳)으로 나왔다. 정안공이 부득이 종 소근(小斤)을 불러 갑옷을 내어 여러 장수에게 나누어 주게 하고, 안으로 들어가니, 부인이 곧 갑옷을 꺼내 입히고 단의(單衣)를 더하고, 대의(大義)에 의거하여 권하여 군사를 움직이게 하였다. 정안공이 이에 나오니, 이화·이천우 등이 껴안아서 말에 오르게 하였다. 정안공이 예조 전서(禮曹典書) 신극례(辛克禮)를 시켜 임금에게 아뢰기를,

"대궐문을 단단히 지켜 비상(非常)에 대비하도록 명하심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믿지 않았다. 조금 뒤에 방간이 그 휘하 상장군(上將軍) 오용권(吳用權)을 시켜 아뢰기를,

"정안공이 나를 해치고자 하므로, 내가 부득이 군사를 일으켜 공격합니다. 청하건대, 주상은 놀라지 마십시오."

하니, 임금이 크게 노하여, 도승지(都承旨) 이문화(李文和)를 시켜 방간에게 가서 타이르기를,

"네가 난언(亂言)을 혹(惑)하여 듣고 동기(同氣)를 해치고자 꾀하니, 미치고 패악하기가 심하다. 네가 군사를 버리고 단기(單騎)로 대궐에 나오면, 내가 장차 보전하겠다."

하였다. 이문화가 이르기 전에 방간이 이미 인친(姻親) 민원공(閔原功)·기사(騎士) 이성기(李成奇) 등의 부추김을 받아, 이맹종(李孟宗)과 휘하 수백 인을 거느리고 갑옷을 입고 무기를 잡고 태상전(太上殿)을 지나다가, 사람을 시켜 아뢰기를,

"정안(靖安)이 장차 신을 해치려 하니, 신이 속절없이 죽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군사를 발하여 응변(應變)합니다."

하였다. 태상왕이 크게 노하여 말하기를,

"네가 정안(靖安)과 아비가 다르냐? 어미가 다르냐? 저 소 같은 위인이 어찌 이에 이르렀는가?"

하였다. 방간이 군사를 행(行)하여 내성(內城) 동대문(東大門)으로 향하였다. 이문화(李文和)가 선죽교(善竹橋)가에서 만나서,

"교지(敎旨)가 있다."

하니, 방간이 말에서 내렸다. 이문화가 교지를 전하니, 방간이 듣지 아니하고, 드디어 말에 올라서 군사들을 가조가(可祚街)에 포진하였다. 정안공이 노한(盧閈)을 시켜 익안공(益安公)에게 고하기를,

"형은 병들었으니, 청하건대, 군사를 엄하게 하여 스스로 호위하고 움직이지 마십시오."

하고, 또 이응(李膺)을 시켜 내성(內城) 동대문을 닫았다. 승지(承旨) 이숙번(李叔蕃)이 정안공을 따라 사냥을 나가려고 하여, 가다가 백금반가(白金反街)에 이르렀는데, 민무구(閔無咎)가 사람을 보내 말하기를,

"빨리 병갑(兵甲)을 갖추고 오라!"

하였다. 이숙번이 이에 달려서 정안공의 저택(邸宅)에 갔으나, 그가 이르기 전에 정안공이 이미 군사를 정돈하여 나와, 시반교(屎反橋)를 지나 말을 멈추고, 여러 군사들이 달려와 말 앞에 모여서 거리를 막고 행(行)하지 않았다. 이숙번이 군사들로 하여금 각각 본패(本牌)에 돌아가게 하여 부오(部伍)가 정해지니, 정안공에게 고하기를,

"제가 먼저 적(敵)에게 나가겠습니다. 맹세코, 패하여 달아나지는 않을 것입니다. 공은 빨리 오십시오."

하고, 무사(武士) 두어 사람을 거느리고 먼저 달려갔다. 정안공이 말하기를,

"우리 군사가 한 곳에 모여 있다가 저쪽에서 만일 쏘면, 한 화살도 헛되게 나가는 것이 없을 것이다. 일찍이 석전(石戰)을 보니, 갑자기 한두 사람이 작은 옆 골목에서 소리를 지르며 뛰쳐 나오니까, 적들이 모두 놀라서 무너졌었다. 지금 작은 골목의 복병(伏兵)이 심히 두려운 것이다."

하고, 이지란(李之蘭)에게 명하여 군사를 나누어 가지고 활동(闊洞)으로 들어가 남산(南山)을 타고 행(行)하여 태묘(太廟) 동구(洞口)에 이르게 하고, 이화(李和)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남산에 오르게 하고, 또 파자반(把子反)·주을정(注乙井)·묘각(妙覺) 등 여러 골목에 모두 군사를 보내어 방비하였다. 이숙번이 선죽(善竹) 노상(路上)에 이르니, 한규(韓珪)·김우(金宇) 등의 탄 말이 화살에 맞아 퇴각하여 달아났다. 이숙번이 한규에게 이르기를,

"네 말이 죽게 되었으니, 곧 바꿔 타라."

하고, 김우(金宇)에게 이르기를,

"네 말은 상하지 않았으니, 빨리 되돌아가서 싸우라."

하고, 이숙번이 달려서 양군(兩軍) 사이로 들어가니, 서귀룡(徐貴龍)이 또한 먼저 들어가서 이숙번을 부르면서 말하기를,

"한 곳에 서서 쏩시다."

하니, 이숙번이 대답하기를,

"이런 때는 이름을 부르는 게 아니다. 나는 내[川] 가운데 서서 쏘겠다."

하였다. 정안공이 한규에게 말을 주어 도로 나가 싸우게 하였다. 임금이 또 대장군(大將軍) 이지실(李之實)을 보내어 방간에게 일러 중지하게 하려 하였으나, 화살이 비오듯이 쏟아져서 들어가지 못하고 돌아왔다. 방간이 선죽(善竹)으로부터 가조가에 이르러 군사를 멈추고, 양군이 교전하였는데, 방간의 보졸(步卒) 40여 인은 마정동(馬井洞) 안에 서고, 기병 20여 인은 전목 동구(典牧洞口)에서 나왔다. 정안공의 휘하 목인해(睦仁海)가 얼굴에 화살을 맞고, 김법생(金法生)이 화살에 맞아 즉사하였다. 이에 방간의 군사가 다투어 이숙번을 쏘았다. 이숙번이 10여 살을 쏘았으나 모두 맞지 않았다. 양군(兩軍)이 서로 대치하였다. 임금은 방간이 명령을 거역하였다는 말을 듣고 더욱 노하고, 또 해를 당할까 두려워하여 탄식하여 말하기를,

"방간이 비록 광패(狂悖)하나, 그 본심이 아니다. 반드시 간인(奸人)에게 매수된 것이다. 골육(骨肉)이 이렇게 될 줄은 생각지 못하였다."

하니, 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 하윤(河崙)이 아뢰기를,

"교서(敎書)를 내려 달래면 풀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곧 하윤에게 명하여 교서를 짓게 하였다.

"내가 부덕한 몸으로 신민(臣民)의 위에 자리하여, 종실(宗室)·훈구(勳舊)·대소 신하의 마음을 같이하고 힘을 다함에 힘입어서 태평에 이를까 하였더니, 뜻밖에 동복 아우 회안공(懷安公) 방간이 무뢰(無賴)한 무리의 참소하고 이간하는 말에 유혹되어, 골육을 해치기를 꾀하니, 내가 심히 애통하게 여긴다. 다만 양쪽을 온전하게 하여 종사(宗社)를 편안하게 하려 하니, 방간이 곧 군사를 놓아 해산하고 사제(私第)로 돌아가면, 성명(性命)을 보전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식언(食言)하지 않기를 하늘의 해를 두고 맹세한다. 그 한 줄의 군사라도 교지를 내린 뒤에 곧 해산하지 않는 자들은 내가 용서하지 아니하고 아울러 군법으로 처단하겠다."

좌승지(左承旨) 정구(鄭矩)에게 명하여 교서를 가지고 군전(軍前)에 가게 하였는데, 이르기 전에 상당후(上黨侯) 이저(李佇)가 소속인 경상도(慶尙道) 시위군(侍衛軍)을 거느리고 검동원(黔洞源)을 거쳐 묘련점(妙蓮岾)을 통과하였다. 정안공이 검동(黔洞)앞 길에 군사를 머무르고 자주 사람을 시켜 전구(前驅)를 경계하기를,

"만일 우리 형을 보거든 화살을 쏘지 말라. 어기는 자는 베겠다."

하였다. 이화 등은 남산(南山)에 오르고, 이저(李佇)는 묘련점(妙蓮岾) 응달에 이르러 함께 각(角)을 불었다. 숙번이 기사(騎士) 한 사람을 쏘아 맞혔는데, 시위 소리에 응하여 꺼꾸러지니, 곧 방간의 조아(爪牙) 이성기(李成奇)였다. 이맹종(李孟宗)은 본래 활을 잘 쏘았는데, 이날은 활을 당기어도 잘 벌어지지 않아서 능히 쏘지 못하였다. 대군(大軍)이 각(角)을 부니, 방간의 군사가 모두 무너져 달아났다. 서익(徐益)·마천목(馬天牧)·이유(李柔) 등이 선봉(先鋒)이 되어 쫓으니, 방간의 군사 세 사람이 창을 잡고 한 데 서 있었다. 마천목이 두 사람을 쳐 죽이고 또 한 사람을 죽이려 하니, 정안공이 보고 말하기를,

"저들은 죄가 없으니 죽이지 말라."

하였다. 서익(徐益)이 창을 잡고 방간을 쫓으니, 방간이 형세가 궁하여 북쪽으로 달아났다. 정안공이 소근(小斤)[11]을 불러 말하기를,

"무지(無知)한 사람이 혹 형(兄)을 해칠까 두렵다. 네가 달려가서 빨리 소리쳐 해치지 말게 하라."

하였다. 소근이 고신부(高臣傅)·이광득(李光得)·권희달(權希達) 등과 더불어 말을 달려 쫓으니, 방간이 혼자서 달려 묘련(妙蓮) 북동(北洞)으로 들어갔다. 소근 등이 미처 보지 못하고 곧장 달려 성균관(成均館)을 지났다. 탄현문(炭峴門)으로부터 오는 자를 만나서 물으니, 모두

"보지 못하였다."

고 말하였다. 소근이 도로 달려 보국(輔國) 서쪽 고개에 올라가서 바라보니, 방간이 묘련 북동에서 마전(麻前) 갈림길로 나와서 보국동(輔國洞)으로 들어가는데, 안장을 띤 작은 유마(騮馬)가 뒤따라 갔다. 소근 등이 뒤쫓으니, 방간이 보국 북점(北岾)을 지나 성균관 서동(西洞)으로 들어서서 예전 적경원(積慶園) 터에 도착하여, 말에서 내려 갑옷을 벗고 활과 화살을 버리고 누웠다. 권희달 등이 쫓아 이르는 것을 보고 말하기를,

"너희들이 나를 죽이려 오는구나."

하니, 권희달 등이 말하기를,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공은 두려워하지 마시오."

하였다. 이에 방간이 갑옷을 고신부에게 주고, 궁시(弓矢)를 권희달에게 주고, 환도(環刀)를 이광득에게 주고, 소근에게 말하기를,

"내가 더 가진 물건이 없기 때문에, 네게는 줄 것이 없구나. 내가 살아만 나면 뒤에 반드시 후하게 갚겠다."

하였다. 권희달 등이 방간을 부축하여 작은 유마(騮馬)에 태우고, 옹위하여 성균관 문 바깥 동봉(東峯)에 이르러 말에서 내렸다. 방간이 울며 권희달 등에게 이르기를,

"내가 남의 말을 들어서 이 지경이 되었다."

하였다. 정구(鄭矩)가 이르러 교서(敎書)를 펴서 읽고 방간의 품속에 넣어주니, 방간이 절하고 말하였다.

"주상의 지극한 은혜에 감사합니다. 신은 처음부터 불궤(不軌)한 마음이 없었습니다. 다만 정안(靖安)을 원망한 것뿐입니다. 지금 교서가 이와 같으니, 주상께서 어찌 나를 속이겠습니까? 원하건대, 여생(餘生)을 빕니다."

이때에 목인해(睦仁海)가 탔던 정안공 집의 말이 화살을 맞고 도망해 와서 스스로 제 집 마구간으로 들어갔다. 부인은 반드시 싸움에 패한 것이라 생각하고, 스스로 싸움터에 가서 공과 함께 죽으려 하여 걸어서 가니, 시녀 김씨(金氏) 등 다섯 사람이 만류하였으나 그만두게 할 수 없었다. 【 김씨(金氏)는 곧 경녕군(敬寧君)의 어머니이다.】 종 한기(韓奇) 등이 길을 가로 막아서 그만두게 하였다. 처음에 난이 바야흐로 일어날 즈음에 이화(李和)와 이천우(李天祐)가 정안공(靖安公)을 붙들어서 말에 오르게 하니, 부인이 무녀(巫女) 추비방(鞦轡房)·유방(鍮房) 등을 불러 승부를 물었다. 모두 말하기를,

"반드시 이길 것이니 근심할 것 없습니다."

하였다. 이웃에 정사파(淨祀婆)라는 자가 사는데, 그 이름은 가야지(加也之)이다. 역시 그가 왔기에 부인이 이르기를,

"어제 밤 새벽녘 꿈에, 내가 신교(新敎)의 옛집에 있다가 보니, 태양(太陽)이 공중에 있었는데, 아기 막동(莫同)이가【 금상(今上)[12]의 아이 때의 휘(諱).】 해 바퀴 가운데에 앉아 있었으니, 이것이 무슨 징조인가?"

하니, 정사파가 판단하기를,

"공(公)이 마땅히 왕이 되어서 항상 이 아기를 안아 줄 징조입니다."

하였다. 부인이 말하기를,

"그게 무슨 말인가? 그러한 일을 어찌 바랄 수 있겠는가?"

하니, 정사파는 마침내 제 집으로 돌아갔었다. 이때에 이르러 정사파가 이겼다는 소문을 듣고 와서 고하니, 부인이 그제서야 돌아왔다. 정안공이 군사를 거두어 마전(麻前)갈림길의 냇가 언덕 위에 말을 멈추고, 소리를 놓아 크게 우니, 대소 군사가 모두 울었다. 정안공이 이숙번을 불러 말하기를,

"형의 성품이 본래 우직하므로, 내가 생각하건대, 반드시 남의 말에 혹하여 이런 일을 저질렀으리라 여겼더니, 과연 그렇다. 네가 가서 형을 보고 난(亂)의 이유를 물어보라."

하였다. 이숙번이 달려가서 방간에게 물으니, 방간이 대답하지 아니하였다. 이숙번이 다시 묻기를,

"공이 이미 권희달에게 말을 하고서 왜 말을 하지 않습니까? 공이 만일 말하지 않으면 국가에서 반드시 물을 것인데, 끝내 숨길 수 있겠습니까?"

하니, 방간이 부득이 대답하였다.

"지난해 동지(冬至)에 박포(朴苞)가 내 집에 와서 말하기를, ‘오늘의 큰비[大雨]에 대해 공은 그 응험을 아는가? 예전 사람이 이르기를, 「겨울 비가 도(道)를 손상하면 군대가 저자에서 교전한다.」 하였다.’ 하기에, 내가 대답하기를, ‘이 같은 때에 어찌 군사가 교전하는 일이 있겠는가?’ 하니, 박포가 말하기를, ‘정안공(靖安公)이 공을 보는 눈초리가 이상하니, 반드시 장차 변이 날 것이다. 공은 마땅히 선수를 써야 할 것이다.’ 하였다. 내가 그 말을 듣고 생각하기를, ‘공연히 타인의 손에 죽을 수는 없다.’ 하여, 이에 먼저 군사를 발한 것이다."

하였다. 이숙번이 돌아와서 고하니, 정안공이 드디어 저사(邸舍)로 돌아갔다. 임금이 우승지(右承旨) 이숙(李淑)을 보내어 가서 방간에게 이르기를,

"네가 백주(白晝)에 서울에서 군사를 움직였으니, 죄를 용서할 수 없다. 그러나, 골육지정(骨肉至情)으로 차마 주살(誅殺)을 가하지 못하니, 너의 소원에 따라서 외방에 안치(安置)하겠다."

하였다. 방간이 토산(兎山) 촌장(村庄)으로 돌아가기를 청하니, 임금이 대호군(大護軍) 김중보(金重寶)·순군 천호(巡軍千戶) 한규(韓珪)에게 명하여 방간 부자를 압령해서 토산에 안치하게 하였다. 박포(朴苞)는 본래 정안공의 조전 절제사(助戰節制使)였는데, 그날 병을 칭탁하여 나오지 않고 중립을 지키며 변을 관망하고 있었으나, 명하여 순군옥(巡軍獄)에 내리고, 또 방간의 도진무(都鎭撫) 최용소(崔龍蘇)와 조전 절제사 이옥(李沃)·장담(張湛)·박만(朴蔓) 등 10여 인을 가두었다. 그때에 익안공(益安公)은 오랜 병으로 인하여 문을 닫고 나오지 않았었는데, 변을 듣고 통곡하며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기를,

"위에는 밝은 임금이 있고, 아래에는 훌륭한 아우가 있는데, 방간이 어찌하여 이런 짓을 하였는가?"

하고, 곧 절제(節制)의 인(印)과 군적(軍籍)을 삼군부(三軍府)에 도로 바쳤다. 이 앞서 서운관(書雲觀)에서 아뢰기를,

"어제 어두울 때에 붉은 요기(妖氣)가 서북쪽에 보였으니, 종실(宗室) 가운데서 마땅히 맹장(猛將)이 나올 것입니다."

하였으므로, 사대부들이 모두 정안공을 지목하였는데, 8일 만에 난이 일어났다.


二年 二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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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月 1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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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윤 등이 정안공을 세자로 세우기를 청하니, 세자로 삼는다는 전지를 내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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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丙申朔/參贊門下府事河崙等請曰: “夢周之亂, 若無靖安公, 大事幾不成; 道傳之亂, 若無靖安公, 亦安有今日乎? 且以昨日之事觀之, 天意人心, 亦可知也。 請立靖安公爲世子。” 上曰: “卿等之言甚善。” 遂命都承旨李文和, 傳旨都堂曰:

大抵國本定, 然後衆志定。 今者之亂, 正以國本未定故也。 予有稱孼子, 考其生之日月, 未協於期, 曖昧難知, 且又昏弱, 置之于外久矣。 向者, 偶入宮內, 今還黜外。 且古之聖王, 雖有嫡嗣, 亦擇賢而傳之。 母弟靖安公諱, 開國之初, 有大勳勞, 又於定社之際, 吾兄弟四五人, 得保性命, 皆其功也。 今命爲世子, 且令都督內外諸軍事。

右政丞成石璘聞命率庶司陳賀。 上命都承旨, 以立世子聞于太上王, 太上王曰: “長遠之計, 謀諸執政大臣而爲之可也。”

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 하윤(河崙) 등이 청하였다.

"정몽주(鄭夢周)의 난에 만일 정안공(靖安公)이 없었다면, 큰 일이 거의 이루어지지 못하였을 것이고, 정도전(鄭道傳)의 난에 만일 정안공이 없었다면, 또한 어찌 오늘이 있었겠습니까? 또 어제 일로 보더라도 천의(天意)와 인심(人心)을 또한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청하건대, 정안공을 세워 세자(世子)를 삼으소서."

임금이 말하기를,

"경(卿) 등의 말이 심히 옳다."

하고, 드디어 도승지 이문화(李文和)에게 명하여 도당(都堂)에 전지(傳旨)하였다.

"대저 나라의 근본이 정해진 연후에 민중의 뜻이 정하여지는 것이다. 이번의 변란은 정히 나라의 근본이 정하여지지 못한 까닭이다. 나에게 얼자(孽子)라 하는 것이 있으나, 그 난 날짜를 짚어 보면, 시기에 맞지 않아 애매하여 알기 어렵고, 또 혼미(昏迷)하고 유약하여 외방에 둔 지가 오래다. 지난번에 우연히 궁내에 들어왔지만, 지금 도로 밖으로 내보내었다. 또 예전 성왕(聖王)이 비록 적사(嫡嗣)가 있더라도 또한 어진이를 택하여[擇賢] 전위하였다. 동복 아우 정안공(靖安公) 【휘(諱).】 은 개국하는 초(初)에 큰 공로가 있었고, 또 정사(定社)하던 즈음에 우리 형제 4, 5인이 성명(性命)을 보전한 것이 모두 그의 공이었다. 이제 명하여 세자를 삼고, 또 내외(內外)의 여러 군사(軍事)를 도독(都督)하게 한다."

우정승 성석린(成石璘)이 명령을 듣고, 서사(庶司)를 거느리고 하례하였다. 임금이 도승지에게 명하여 세자를 세우는 일을 태상왕께 아뢰니, 태상왕이 말하기를,

"장구한 계책은 집정 대신(執政大臣)과 모의하는 것이 가하다."

하였다.


삼성(三省)에서 방간을 복주하기를 청하다. 박포를 국문하고, 연루자를 모두 처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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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省交章請誅芳幹, 上命河崙與臺諫刑曹交坐, 鞫問朴苞。 苞云: “去年冬至, 抵芳幹第爲博戲, 是日適有雨, 告之曰: ‘時令不和, 宜愼之。’ 至今年正月二十三日初昏, 天氣赤於西北, 明日又至芳幹第告曰: ‘天有妖氣, 宜愼處之。’ 芳幹曰: ‘何以處之?’ 苞曰: ‘不典兵謹出入, 整衣冠重行止, 如前朝諸王之例, 斯乃上策。’ 芳幹問其次, 苞曰: ‘逃入蠻荊, 如太伯、仲雍, 其次也。’ 又問其次, 苞曰: ‘靖安公兵强衆附, 且以上黨之弟爲壻。 公之兵弱, 危若朝露, 不如先擊以去之。’” 於是杖苞, 問其構煽之由, 苞曰: “我雖從靖安公, 共成定社之功, 然未幾貶我於外。 今雖用苞, 豈可保哉? 若立功於芳幹, 則可與長享富貴也。” 三省上疏曰:

君親無將, 將而必誅, 此《春秋》之大法也。 今芳幹以母弟至親, 爲宗室藩屛, 殿下以爲心腹, 授之兵柄。 芳幹誠宜盡忠竭力, 扶輔王室, 不此之顧, 私動軍兵, 以禦侮之寄, 爲傷恩之用。 儻不應卒, 則安知有不測之變哉? 宜將芳幹, 置之於法, 殿下只令安置私第。 此雖殿下友愛之意, 其於宗社大計何? 願殿下斷以大義, 以正大法。 自古亂臣賊子, 必有儻與, 今日之變, 豈無主謀而煽亂者乎? 伏望下令攸司, 將其連涉, 鞫問主謀者, 明正其罪, 以慰衆心。

上覽之慟泣。 中樞院副使李忱亡命, 自詣于獄。 三省會於演福寺, 召三省掌務, 宣旨曰: “昨日三省所上, 雖合於法, 予豈忍以骨肉之親, 置於刑戮哉? 今聞三省一會, 意其更請, 此事禁於未然, 其悉知之。” 掌務啓曰: “芳幹私自動兵, 欲害骨肉, 上初遣都承旨禁之, 不聽, 又遣李之實禁之, 亦不從, 以至發兵, 罪莫重焉, 宜置大法。” 上又諭之曰: “我寧被害, 豈忍使同母弟就戮哉? 更勿擧論。”

削朴苞職, 杖一百, 流之靑海; 流朴蔓、李沃于邊郡。 三省具芳幹儻與罪狀輕重以聞, 下旨曰:

朴苞, 今已削職杖流矣。 且兩度功臣, 不宜更加極刑, 只令籍沒家舍, 禁錮子孫。 前少尹閔原功說大語, 依律處斬; 檢校參贊門下府事崔龍蘇, 削職杖六十; 中樞院使李忱、前判事桓愉、前典書薛崇, 各笞五十; 護軍元胤, 杖六十; 朴寅吉、郭凡、金寶海, 各杖七十, 竝於遠方付處。 內官姜仁富、元尹伯溫、前典書任天年、右軍將軍金旰、將軍李蘭ㆍ李巨賢ㆍ黃載、前殿中卿姜昇平、宣略將軍李允良, 竝外方付處。 又將在逃吳用權、郭承祐、閔公生、閔道生、鄭承吉、鄭倫、金月下、金貴南、閔校、李君弼、金國珍, 分流遠方, 聽其自現, 各至貶所。 同知中樞院事張湛, 兩度功臣, 只令罷職; 承旨趙卿, 不干儻與, 特令放罪。

康有信、張思美、李君實、鄭升吉, 皆盡力於芳幹者也, 及公卽位, 皆任用焉。

삼성(三省)이 교장(交章)하여 방간을 복주(伏誅)하기를 청하였다. 임금이 하윤(河崙)에게 명하여 대간(臺諫)과 형조(刑曹)와 더불어 교좌(交坐)하여 박포(朴苞)를 국문하게 하니, 박포가 말하였다.

"지난해 동짓날 방간의 집에 가서 장기를 두었는데, 그날 마침 비가 왔으므로, 고하기를, ‘시령(時令)이 온화하지 못하니 마땅히 조심하여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금년 정월 23일 해질녘에 천기(天氣)가 서북쪽으로 붉었으므로, 이튿날 또 방간의 집에 가서 고하기를, ‘하늘에 요기(妖氣)가 있으니, 삼가서 처신함이 마땅하다.’고 하였더니, 방간이 말하기를, ‘어떻게 처신할꼬?’ 하기에, 포가 대답하기를, ‘군사를 맡지 말고 출입을 삼가며, 의관(衣冠)을 정제하고 행동거지를 무겁게 하기를 고려 때의 제왕(諸王)의 예(例)와 같이 하는 것이 상책(上策)이다.’고 하였습니다. 방간이 그 다음을 묻기에, 포가 대답하기를, ‘도망하여 만형(蠻荊)[13]으로 들어가기를 태백(太伯)[14] ·중옹(仲雍)[15]과 같이 하는 것이 그 다음이다.’고 하였습니다. 또 그 다음을 묻기에, 포가 대답하기를, ‘정안공은 군사가 강하고 중인(衆人)이 붙쫓으며, 또 상당후(上黨侯)의 아우[16]로 사위를 삼았는데, 공의 군사는 약하여 위태하기가 아침이슬과 같으니, 먼저 쳐서 제거하는 것만 같지 못하다.’고 하였습니다."

이에 박포에게 장(杖)을 때리고, 그 날조하여 선동한 이유를 물으니, 박포가 말하였다.

"내가 비록 정안공을 따라서 함께 정사(定社)의 공을 이루었으나, 얼마 아니되어 나를 외방으로 폄척(貶斥)하였으니, 지금 비록 써 주더라도 어찌 보증할 수가 있겠습니까? 만일 방간에게 공을 세우면, 더불어 길이 부귀를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삼성(三省)에서 상소(上疏)하였다.

"임금의 지친(至親)에게는 장래가 없으니, 장래가 있으면 반드시 베는 것입니다. 이것은 《춘추(春秋)》의 큰 법입니다. 지금 방간이 동복 아우인 지친으로서 종실(宗室) 번병(藩屛)이 되어, 전하께서 심복(心腹)으로 여기고 군사의 권세를 주었습니다. 방간이 진실로 마땅히 충성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왕실을 보필할 것인데, 이것은 돌아보지 않고 사사로이 군사를 움직여 어모(禦侮)의 부탁을 상은(傷恩)하는 데 썼으니, 만일 급히 응변(應變)하지 않았다면, 불측한 변(變)이 있었을지 어찌 알겠습니까? 마땅히 방간을 법대로 처치해야 할 것인데, 전하께서 다만 사제(私第)에 안치(安置)하게 하시니, 이것이 비록 전하의 우애의 뜻이나, 그것이 종사(宗社) 대계에 어찌되겠습니까? 원하건대, 전하는 대의(大義)로 결단하여 큰 법을 바로잡으소서. 옛부터 난신(亂臣) 적자(賊子)는 반드시 당여(黨與)가 있는 것이니, 오늘의 변(變)이 어찌 주모하여 난을 선동한 자가 없겠습니까? 엎드려 바라건대, 유사(攸司)에 명령을 내려 연루된 자 가운데 주모자를 국문하게 하고, 그 죄를 밝게 바루어서 대중의 마음을 위로하소서."

임금이 소를 보고서 통곡하여 울었다. 중추원 부사(中樞院副使) 이침(李忱)이 망명하였다가 스스로 옥으로 나왔다. 삼성(三省)이 연복사(演福寺)에 모였는데, 삼성의 장무(掌務)를 불러서 선지(宣旨)하였다.

"어제 삼성(三省)에서 올린 소(疏)가 비록 법에 합하나, 내가 어찌 차마 골육지친(骨肉之親)을 형륙(刑戮)에 처하겠는가? 지금 들으니, 삼성이 함께 모였다 하니, 이 일을 다시 청하려는 것으로 생각된다. 미연(未然)에 금지하니, 모두 그리 알라!"

장무(掌務)가 아뢰었다.

"방간이 사사로이 군사를 움직여 골육을 해치려고 하므로, 주상께서 처음에 도승지(都承旨)를 보내어 금하였는데 듣지 않고, 또 이지실(李之實)을 보내어 금하였는데도 또한 좇지 않고, 군사를 발(發)하기에 이르렀으니, 죄가 더 막중합니다. 마땅히 큰 법에 처해야 합니다."

임금이 또 이르기를,

"내가 차라리 해를 당할지언정, 어찌 차마 동모제(同母弟)로 하여금 죽음에 이르게 하겠는가? 다시는 거론하지 말라."

하였다. 박포는 관직을 삭탈하여 장 1백 대에 청해(靑海)로 귀양보내고, 박만(朴蔓)·이옥(李沃)은 변방 고을에 귀양보냈다. 삼성에서 방간의 당여(黨與)의 죄상의 경중(輕重)을 갖추어 아뢰니, 명령을 내리었다.

"박포는 이제 벌써 삭직하여 장형(杖刑)에 처하여 귀양보냈고, 또 양차(兩次)의 공신이니, 다시 극형을 가할 수는 없다. 다만 가사(家舍)를 적몰(籍沒)하고, 자손을 금고(禁錮)하게 하라. 전 소윤(少尹) 민원공(閔原功)은 큰 말을 하였으니 율에 의하여 처참(處斬)하고, 검교 참찬문하부사(檢校參贊門下府事) 최용소(崔龍蘇)는 삭직하여 장(杖) 60대에 처하고, 중추원 사(中樞院使) 이침(李忱)·전 판사(判事) 환유(桓愉)·전 전서(典書) 설숭(薛崇)은 각각 태(苔) 50대에 처하고, 호군(護軍) 원윤(元胤)은 장 60대에 처하고, 박인길(朴寅吉)·곽범(郭凡)·김보해(金寶海)는 각각 장 70대에 처하여 아울러 먼 지방에 부처(付處)하고, 내관(內官) 강인부(姜仁富)·원윤(元尹) 이백온(李伯溫)·전 전서(典書) 임천년(任天年)·우군 장군(右軍將軍) 김간(金旰), 장군(將軍) 이난(李蘭)·이거현(李巨賢)·황재(黃載), 전 전중 경(殿中卿) 강승평(姜昇平)·선략 장군(宣略將軍) 이윤량(李允良)은 아울러 외방에 부처(付處)하고, 또 도망 중에 있는 오용권(吳用權)·곽승우(郭承祐)·민공생(閔公生)·민도생(閔道生)·정승길(鄭承吉)·정윤(鄭倫)·김월하(金月下)·김귀남(金貴南)·민교(閔校)·이군필(李君弼)·김국진(金國珍)은 나누어 원방에 유배(流配)하되, 그 자현(自現)하는 것을 들어주어 각각 배소(配所)에 이르게 하고,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 장담(張湛)은 양차(兩次)의 공신이므로 다만 파직만 시키고, 승지(承旨) 조경(趙卿)은 당여(黨與)에 간여하지 않았으니, 특별히 죄를 방면하게 하라."

강유신(康有信)·장사미(張思美)·이군실(李君實)·정승길(鄭升吉)은 모두 방간에게 힘을 다한 자들인데, 정안공이 즉위한 뒤에 모두 임용하였다.


도망 중에 있던 이맹종이 대궐에 나오니 그 아비를 돌보도록 보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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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是日, 孟宗在逃詣闕, 召見泣曰: “爾父失心, 汝可歸侍。” 遂遣之。

이날에 이맹종(李孟宗)이 도망 중에 있다가 대궐에 나아오니, 임금이 불러 보고 울며 말하기를,

"네 아비가 실심(失心)하였으니, 네가 돌아가 모시어라."

하고, 드디어 보내었다.


2月 2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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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성이 건성을 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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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丁酉/土星犯建星。

토성(土星)이 건성(建星)을 범하였다.


신도의 문묘 대성전이 불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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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都文廟大成殿災。

신도(新都)의 문묘(文廟) 대성전(大成殿)이 불탔다.


참찬문하부사 조영무·상의중추원사 윤방경·전 완산 부윤 최원에게 관직을 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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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以參贊門下府事趙英茂爲都督中外諸軍事都鎭撫, 商議中樞院事尹方慶、前完山府尹崔遠爲上鎭撫。

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 조영무(趙英茂)로 도독 중외 제군사 도진무(都督中外諸軍事都鎭撫)를 삼고, 상의중추원사(商議中樞院事) 윤방경(尹方慶)·전 완산 부윤(完山府尹) 최원(崔遠)으로 상진무(上鎭撫)를 삼았다.


삼사좌복야 이서를 보내어 종묘에 세자를 책봉하는 것을 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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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遣三司左僕射李舒, 告封世子于宗廟。

삼사 좌복야(三司左僕射) 이서(李舒)를 보내어 종묘(宗廟)에 세자(世子)를 책봉하는 것을 고하였다.


2月 4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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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안공을 왕세자로 책립하여 군국의 일을 맡기다. 전국의 죄수들을 사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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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己亥/冊立弟靖安公【諱】爲王世子, 句當軍國重事:

王若曰, 建儲貳, 所以正國本; 崇位號, 所以定人心。 玆遵典章, 庸擧冊禮。 惟爾靖安公【諱】, 資全文武, 德備英明。 當太上開國之初, 克倡大義; 及寡兄定社之日, 特立膚功。 矧謳謌之有歸, 宜監撫之是任。 用命爾爲王世子。 於戲! 知人不易, 爲子亦難。 以親以賢, 旣處承祧之位; 惟忠惟孝, 用裨爲政之方。 故玆敎示, 想宜知悉。

仍宥境內:

王若曰, 自古王者之建儲, 所以尊宗祀, 而重國本也。 稽諸禮文, 有立嫡子同母弟之說, 或世或及, 惟其至當而已。 予以寡昧, 嗣守景緖, 嚴恭思治, 于玆二年, 顧無嫡嗣, 只有庶孽, 昏弱不慧, 夙夜兢惕, 罔敢遑寧。 惟念同氣之親, 庸篤友于之義, 不期芳幹, 崇信奸回, 妄生疑忌, 稱兵構亂, 禍在不測。 幸賴天地宗社之佑, 旋卽戡定, 不日淸明。 尙憐象憂之情, 不忍管辟之致, 已將芳幹, 安置私莊, 儻與人等, 各以輕重處決。 蓋緣國本之未定、人心之易搖, 禍亂斯生, 以至此極。 興言及玆, 深用惻然。 宜建母弟之賢, 以端國本之固。 靖安公諱, 氣挺英明, 資全勇智。 文武之略, 秉自生知; 孝悌之誠, 發于至性。 佩服詩書之訓, 識達政敎之方。 左右太上, 以建開國之功; 捍衛寡躬, 以成定社之烈。 宗社之所永賴, 臣民之所共知。 勳德旣隆, 謳歌悉歸。 是用冊命爲王世子, 以慰輿望。 載惟儲副之任, 必兼監撫之權, 仍命句當軍國重事。 咨爾宗親耆老宰輔臣僚中外人民! 咸體予懷, 各(共)〔供〕爾職, 祗順元良之德, 以補予德。 玆行冊命, 宜布寬條。 自建文二年二月初四日昧爽以前, 除謀叛大逆、殺(父祖母父母)〔祖父母父母〕、妻妾殺夫、奴婢殺主、蠱毒魘魅、但犯强盜、謀故殺人、芳幹儻與人外, 已發覺未發覺、已結正未結正, 罪無輕重, 咸宥除之, 敢以宥旨前事相告言者, 以其罪罪之。 於戲! 爲父與子, 益敦慈孝之心; 由邇及遐, 共享隆平之樂。

時大臣獻議者以爲: “自古帝王立母弟, 則皆封皇太弟, 未有以爲世子者也。 請立爲王太弟。” 上曰: “今予則直以此弟爲子。” 以李佇判三軍府事、左軍都節制使, 李居易中軍節制使, 趙英茂右軍節制使, 趙溫知中軍節制使, 李天祐知右軍節制使, 李叔蕃爲中樞院副使、同知左軍節制使, 李原爲右副承旨。 自是一品以下, 皆復署經臺省。

임금의 아우 정안공(靖安公) 【휘(諱)】을 책립(冊立)하여 왕세자(王世子)로 삼아 군국(軍國)의 중사(重事)를 맡게 하였다. 왕은 이렇게 말하였다.

"저이(儲貳)[17]를 세우는 것은 국본(國本)을 정하는 것이요, 위호(位號)를 높이는 것은 인심을 정하는 것이다. 이에 전장(典章)에 따라서 책례(冊禮)를 거행한다. 너 정안공 【휘(諱).】 은 자질이 문무(文武)를 겸하고, 덕이 영명(英明)한 것을 갖추었다. 태상(太上)께서 개국(開國)하던 처음을 당하여 능히 대의(大義)를 주장하였고, 과형(寡兄)이 정사(定社)하던 날에 미치어 특히 큰 공을 세웠다. 하물며, 구가(謳歌)의 돌아가는 것이 있으니, 마땅히 감무(監撫)를 맡겨야 하겠다. 이로써 너에게 명하여 왕세자로 삼는다. 아아! 사람 알아보기가 쉽지 않고, 자식노릇하기도 또한 어렵다. 지친(至親)으로 택현(擇賢)으로 이미 대통(大統)을 잇는 자리에 처하였으니, 오직 충성하고 오직 효도하여 이로써 정사하는 방도를 도우라. 그러므로, 이에 교시(敎示)하는 바이니, 마땅히 다 알아야 할 것이라 생각한다."

인하여 경내(境內)에 사유(赦宥)하였는데, 왕은 이렇게 말하였다.

"옛날부터 왕노릇하는 자가 저이(儲貳)를 세우는 것은 종사(宗祀)를 높이고 국본(國本)을 중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예문(禮文)을 상고하면, 적자(嫡子)와 동모제(同母弟)를 세운다는 말이 있는데, 혹은 세대(世代)로 하든지 혹은 차제(次弟)로 하든지 오직 지당하게 할 뿐이었다. 내가 덕이 적고 우매한 몸으로 큰 통서(統緖)를 이어받아, 공경하고 근신하여 다스리기를 생각한 지가 이제 2년이 되었다. 돌아보건대, 적사(嫡嗣)가 없고 다만 서얼(庶孽)이 있는데, 혼매하고 유약하여 지혜스럽지 못하니, 밤낮으로 조심하고 두려워하여 감히 편안할 겨를이 없었다. 오직 동기(同氣)의 지친을 생각하여 우우(友于)[18]의 의를 두터이 하였더니, 생각지도 않게 방간이 간교하고 사곡한 말을 곧이 믿고, 망령되게 의심하고 꺼리는 마음을 품어 군사를 내어 난을 꾸며서, 화가 불측한 데에 있었는데, 다행히 천지 종사(宗社)의 도움에 힘입어서, 이내 곧 평정되어 하루도 못되어 청명하여졌다. 오히려 상우(象憂)[19]의 정을 불쌍히 여기고 관벽(管辟)[20]에 이르도록 차마 하지 못하여, 이미 방간을 사사 전장(田莊)에 안치하고, 당여(黨與) 사람들은 각각 죄의 경중에 따라 처결하였다.

대개 국본(國本)이 정해지지 못하고 인심이 흔들리기 쉬움으로 인하여, 화란이 발생하여 이처럼 지극함에 이르렀다. 말이 여기에 미치니, 깊이 슬프도다. 마땅히 어진 모제(母弟)를 세워 굳건한 국본을 정해야만 하겠다. 정안공 【휘(諱).】 은 기운이 영명(英明)하게 빼어나고, 자질은 용맹과 지혜를 온전히 하였다. 문무(文武)의 도략(圖略)은 생지(生知)로부터 가졌고, 효제(孝悌)의 정성은 지성(至性)에서 나왔다. 시서(詩書)의 교훈을 마음에 새기고, 정교(政敎)의 방법을 통달하였다. 태상왕을 보좌하여 개국의 공을 세웠고, 과인의 몸을 호위하여 정사(定社)의 공을 이루었다. 종사에서 길이 힘입은 것은 신민(臣民)이 함께 아는 바이다. 공과 덕이 이미 높으니, 구가(謳歌)하는 것이 모두 돌아간다. 그러므로, 책명하여 왕세자를 삼아서 여망(輿望)을 위로한다. 생각하건대, 저부(儲副)의 임무는 반드시 감무(監撫)의 권한을 겸하므로, 이에 군국(軍國)의 중사(重事)를 맡도록 명한다.

아아! 너희 종친(宗親)·기로(耆老)·재보(宰輔)·신료(臣僚)와 중외 인민(中外人民)은 모두 내 뜻을 몸받아서 각각 너희 직책에 이바지하고, 원량(元良)의 덕에 공경하고 순종하여, 내 덕을 도우라. 이에 책명을 행하니, 마땅히 너그러운 법전을 반포하여야 하겠다. 건문(建文) 2년 2월 초4일 새벽 이전에 모반(謀叛)하고 대역(大逆)한 것, 조부모·부모를 죽인 것, 처첩이 남편을 죽인 것, 노비가 주인을 죽인 것, 고독(蠱毒)[21]하고 염매(魘魅)[22]한 것, 강도를 범한 것, 고의로 살인(殺人)을 꾀한 것과, 방간(芳幹)의 당여(黨與)의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이미 발각되었거나 발각되지 않았거나, 이미 결정되었거나 결정되지 않았거나, 죄의 경중이 없이 모두 용서하여 면제하라. 감히 유지(宥旨) 전의 일을 가지고 서로 고하여 말하는 자는 그 죄로 죄를 주겠다. 아아! 아비와 자식이 되었으니, 더욱 자효(慈孝)의 마음을 두텁게 하고, 가까운 데로부터 먼 데에 미치기까지 함께 태평의 낙을 누리리라."

이때에 대신으로서 헌의하는 자가 말하기를,

"옛날부터 제왕이 동모제(同母弟)를 세우면 모두 황태제(皇太弟)를 봉하였고, 세자를 삼은 일은 없었습니다. 청하건대, 왕태제(王太弟)를 삼으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지금 나는 직접 이 아우로 아들을 삼겠다."

하였다. 이저(李佇)로 판삼군부사(判三軍府事) 좌군 도절제사(左軍都節制使)를, 이거이(李居易)로 중군 절제사(中軍節制使)를, 조영무(趙英茂)로 우군 절제사(右軍節制使)를 조온(趙溫)으로 지중군절제사(知中軍節制使)를, 이천우(李天祐)로 지우군절제사(知右軍節制使)를 삼고, 이숙번(李叔蕃)으로 중추원 부사(中樞院副使) 동지좌군절제사(同知左軍節制使)를, 이원(李原)으로 우부승지(右副承旨)를 삼았다. 이때부터 1품(品)이하를 모두 대성(臺省)에서 다시 서경(署經)하였다.


세자가 태상전에 나아가 사은하니 태상왕이 임금노릇하는 도리를 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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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世子詣太上殿謝恩, 太上王賜宴, 因論爲君之道, 無所不至。 且曰: “汝身所繫至重, 宜自愼也。 今芳幹愚陋無知, 妄興師旅, 以至於此。 三韓多貴家大族, 必皆笑矣, 予亦恥之。 然汝旣爲世子, 宜布至公之道, 治國保民可也。 老父所言, 惟止此耳。” 世子獻壽, 極歡乃出。 太上王謂李佇曰: “朴苞死有餘罪, 歸語汝主, 須擧法以懲後來。”

세자(世子)가 태상전(太上殿)에 나아가 사은(謝恩)하니, 태상왕이 사연(賜宴)하고, 인하여 임금노릇하는 도리를 논하여 이르지 않은 데가 없었다. 또 말하기를,

"네 몸이 관계된 바가 지극히 중하니, 마땅히 스스로 삼가도록 하라. 지금 방간이 어리석고 우둔하여 아는 것이 없어서 함부로 군사를 일으켜 이 지경이 되었다. 삼한(三韓)에 귀가(貴家)·대족(大族)이 많으니, 반드시 모두 비웃을 것이다. 나도 부끄럽게 여긴다. 그러나, 네가 이미 세자가 되었으니, 마땅히 지극히 공정한 도리를 펴서 나라를 다스리고 백성을 보전하는 것이 가할 것이다. 늙은 아비가 말하는 것은 여기에서 그친다."

하였다. 세자가 헌수(獻壽)하고 지극히 즐기다가 곧 나왔다. 태상왕이 이저(李佇)에게 이르기를,

"박포(朴苞)는 죽고도 남는 죄가 있다. 돌아가 네 임금에게 말하여 반드시 법을 들어서 후래(後來)를 징계하도록 하라."

하였다.


도당에서 전을 올려 세자 책봉한 것을 하례하고 세자의 저사에 나아가 숙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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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都堂率庶司上箋賀封世子, 又進世子邸肅拜。 典書已上, 世子皆答拜。

도당(都堂)에서 서사(庶司)를 거느리고 전(箋)을 올려 세자 책봉한 것을 하례하고, 또 세자의 저사(邸舍)에 나아가 숙배(肅拜)하였다. 전서(典書) 이상은 세자가 모두 답배하였다.


삼성이 교장하여 다시 박포·이침·강인부·이백온의 죄를 청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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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省交章, 再請朴苞及李忱、姜仁富、李伯溫之罪。 疏上, 下使司擬議。 使司啓云: “攸司所言, 深合於理, 惟功臣, 取殿下裁斷。” 乃命收朴苞功臣錄券, 削忱職, 加杖六十, 削仁富、伯溫職。

삼성(三省)이 교장(交章)하여 다시 박포(朴苞)·이침(李忱)·강인부(姜仁富)·이백온(李伯溫)의 죄를 청하였다. 소를 올리니, 사사(使司)에 내려 의논하게 하였다. 사사에서 아뢰기를,

"유사(攸司)의 말한 바가 깊이 도리에 합합니다. 오직 공신들은 전하의 재단(裁斷)을 바랍니다."

하였다. 이에 명하여 박포의 공신 녹권(功臣錄券)을 회수하고, 이침은 삭직하여 장(杖) 60대를 가(加)하고, 강인부·이백온은 삭직하였다.


사헌부에서 판문하부사 조준을 탄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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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司憲府劾判門下府事趙浚。 浚以上相, 國有急難, 與其弟三司右僕射狷、壻前中樞院副使鄭鎭, 皆杜門不出。 三省同議欲劾之, 右散騎尹思修, 浚所薦拔者, 洩其議。 三省劾思修罷之, 遂交章論浚之罪曰:

臣等竊謂, 國之大臣, 不顧宗社安危, 貪寵冒祿, 爲一身計者, 當治其罪, 以戒臣隣。 今判門下府事趙浚, 外示正直, 內懷奸險, 久執國柄, 廣樹黨與, 爪牙腹心, 布列中外, 威福生殺, 在其掌握。 今拜判門下, 位雖極而無權, 怏怏鬱鬱, 日夜思所以復相。 臣等姑以顯著五事, 縷陳如左。 當國初廢嫡立庶之際, 浚方爲上相, 力陳大義, 以回天意, 以正天倫, 則戊寅之變, 何自而生乎? 慮不出此, 阿意曲從, 與道傳、南誾, 遂立庶孽, 勢將覆國。 又當定社之日, 今我世子, 使大將軍無疾, 就第招來, 而乃徘佪猶豫, 占筮吉凶, 以觀其變。 無疾等知其不出, 還告世子, 世子欲親往, 浚不得已而出, 遇世子於途, 始肯赴難。 幸蒙殿下寬厚之恩, 得與定社功臣之列, 獨保首領, 以至今日, 中外臣民, 罔不腐心, 此其一也。 太上王以好生之德, 當開國之初, 有罪者或杖或貶, 皆不至死。 浚潛遣黨與, 擅殺數人, 欺君亂法, 以報私怨, 此其二也。 浚位極人臣, 富貴無比, 固當安分盡忠, 以奉王室, 妄生非分之心, 卜其吉凶, 妓妾菊花漏洩其言, 國家下吏問之。 爲浚計者, 當自驚懼, 上達殿下, 下告朝廷, 力辨是非, 使國人昭然知其眞僞可也。 顧乃潛謀殺之, 以滅其口, 此其三也。 當國家遷都之時, 浚營構私第, 極其壯麗。 監察金扶過門而歎, 浚聞而大怒, 巧言飾非, 冒蔽上聰, 置諸極刑, 朝野莫不痛心。 其恃功專恣, 罔上害人, 罪不容誅, 此其四也。 今者, 芳幹擧兵作亂, 謀傾社稷, 殿下命將討罪, 宰輔臣僚, 莫不奔走赴難, 以衛王室, 而浚爲廟堂之首, 初無詣闕赴難之心, 至於廟堂使吏往告, 猶罔聞知, 與其弟狷, 杜門觀變, 遣女壻鄭鎭, 率數騎欲赴助亂, 爲官軍阻當而還。 亂旣定翌日, 公然立於百寮之上, 若無與於亂者, 其奸詐反覆無君之心, 益以昭著, 此其五也。 其他淫靡無道, 廣占田宅, 奪人臧獲, 筆所不盡, 此所謂大奸似忠, 大詐似信, 大貪若廉。 若論其罪, 則王法所必誅而不宥者也。 殿下若以開國爲功, 則道傳、南誾, 皆以一等功臣而就戮, 功不掩罪故也。 且開國之功, 一時之所或有, 無君之心, 萬世之所不容。 若殿下釋此不誅, 竊恐亂臣賊子, 接踵而起矣。 伏惟斷以大義, 令攸司收其職牒, 鞫問其罪, 依律處決, 以杜亂賊之萌, 幷將狷與鎭, 削職論罪, 竄之遠方, 以戒後來。

乃遣吏圍守三家, 使不得出。 上覽疏曰: “所論罪目, 皆違於寡人所知, 宜勿復言。”

사헌부(司憲府)에서 판문하부사(判門下府事) 조준(趙浚)을 탄핵하였다. 조준은 상상(上相)으로서 나라에 급하고 어려운 일이 있는데도 아우 삼사 우복야(三司右僕射) 조견(趙狷)과 사위 전 중추원 부사(中樞院副使) 정진(鄭鎭)과 더불어 모두 두문불출(杜門不出)하였다. 삼성(三省)에서 함께 의논하고서 탄핵하고자 하였는데, 우산기(右散騎) 윤사수(尹思修)는 조준이 천거하여 발탁한 자이므로, 그 의논을 누설하였다. 삼성에서 윤사수를 탄핵하여 파직하고, 드디어 교장(交章)하여 조준의 죄를 논하였다.

"신 등은 가만히 생각건대, 나라의 대신이 종사의 안위(安危)를 돌아보지 않고 은총을 탐하고 녹을 마구 받아서 한 몸의 계책만 위하는 자는 마땅히 그 죄를 다스려서 신하들을 경계하여야 합니다. 지금 판문하부사 조준(趙浚)이 밖으로는 정직한 것을 보이고, 안으로는 간사하고 음험한 생각을 품어서, 오래 나라의 권세를 잡고 널리 당여(黨與)를 심어, 조아(爪牙)와 심복(心腹)들이 안팎에 널려 있으므로, 위복(威福) 생살(生殺)이 그 손아귀 속에 있습니다. 지금 판문하(判門下)를 제수하니, 지위는 비록 지극하나 실권이 없어서 앙앙(怏怏) 울울(鬱鬱)하여 밤낮으로 다시 정승이 될 것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신 등은 우선 나타난 다섯 가지 일을 가지고 다음과 같이 길게 진달합니다.

국초에 적자(嫡子)를 폐하고 서얼(庶孽)을 세우던 즈음을 당하여, 조준이 바야흐로 상상(上相)이 되었는데, 힘써 대의(大義)를 진달하여 천의(天意)를 돌이키고 천륜(天倫)을 바로잡았다면, 무인(戊寅)의 변란이 어디에서 생겼겠습니까? 생각을 이러한 데에 두지 않고, 임금의 뜻에 아첨하고 곡종(曲從)하여 정도전(鄭道傳)·남은(南誾)과 더불어 서얼을 세워서 형세가 장차 나라를 뒤집을 뻔하였습니다. 또 정사(定社)하던 날을 당하여 지금의 세자께서 대장군(大將軍) 민무질(閔無疾)로 하여금 집에 가서 불러오게 하였으나, 배회하며 이럴까 저럴까 망설이며 길흉(吉凶)을 점치면서 변을 방관하였습니다. 민무질 등이 그가 나오지 않을 것을 알고 돌아와 세자에게 고하니, 세자가 친히 가려고 하였습니다. 조준이 부득이 나와서 세자를 길에서 만나 비로소 난에 나아갔습니다. 다행히 전하의 관후(寬厚)한 은혜를 입어서 정사 공신(定社功臣)의 반열에 참예하여 홀로 머리를 보전해 오늘에 이르렀으니, 중외의 신민들이 부심(腐心)하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 이것이 그 한 가지입니다.

태상왕께서 살리기를 좋아하시는 덕으로 개국하던 초(初)를 당해, 죄가 있는 자는 혹은 장형(杖刑)에 처하고, 혹은 폄척(貶斥)하여 모두 죽음에는 이르지 않았는데, 조준이 가만히 당여(黨與)를 보내어 임의로 몇 사람을 죽여, 임금을 속이고 법을 어지럽히면서 사사 원망을 갚았으니, 이것이 그 두 가지입니다.

조준이 지위가 극진하여 신하로서는 부귀가 견줄 데 없으니, 진실로 마땅히 자기 분수를 지키고 충성을 다하여 왕실을 받들어야 할 것인데, 망령되게 분수 아닌 마음을 내어 그 길흉을 점쳤습니다. 기생첩 국화(菊花)가 그 말을 누설하였으므로, 국가에서 형리(刑吏)에게 내려 문초하였습니다. 조준의 계책으로서는 마땅히 스스로 놀라고 두려워하여, 위로 전하(殿下)께 진달하고 아래로 조정에 고하여 힘써 시비(是非)를 분변해서, 나라 사람으로 하여금 소연(昭然)히 그 진위(眞僞)를 알게 하는 것이 가한데, 도리어 남몰래 모의하여 죽여서 그 입을 멸하였으니, 이것이 그 세 가지입니다.

국가에서 천도(遷都)할 때에 조준이 사사집을 짓기를 극히 장려(壯麗)하게 하였으므로, 감찰(監察) 김부(金扶)가 문을 지나다가 탄식하였는데, 조준이 듣고 크게 노하여 교묘한 말로 허물을 꾸며 임금의 총명을 가려서 김부를 극형에 처하였으니, 조야가 마음 아파하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 그 공을 믿고 전횡(專橫) 방자하여 임금을 속이고 사람을 해친 것은 죄가 주살(誅殺)하여도 용서할 수 없으니, 이것이 그 네 가지입니다.

이번에 방간이 군대를 내어 난을 일으켜 사직을 위태롭게 하기를 꾀하므로, 전하께서 장수에게 명하여 죄인을 토벌하시니, 재보(宰輔)와 신료가 분주하게 난에 나아가서 왕실을 호위하지 않는 이가 없었습니다. 조준이 묘당(廟堂)의 우두머리가 되어서 처음부터 대궐에 나와 난에 나아갈 마음이 없었습니다. 묘당(廟堂)에서 서리(胥吏)를 시켜 가서 고하였는데도 오히려 못 들은 체하며, 그 아우 조견(趙狷)과 더불어 문을 닫고 변을 방관하고, 사위 정진(鄭鎭)을 보내어 기병(騎兵) 두어 명을 거느리고 가서 난을 돕고자 하다가, 관군(官軍)에게 저지당하여 되돌아갔습니다. 난이 이미 평정되니, 이튿날 공공연하게 백료(百僚) 위에 서서 난에 참여하지 아니한 것 같이 하였습니다. 그 간사하고 반복하여 임금을 업신 여긴 마음이 더욱 분명하게 나타났으니, 이것이 그 다섯 가지입니다.

그 밖에 음란하고 사치하고 무도(無道)하여 전택(田宅)을 널리 점령하고, 남의 노비[臧獲]를 빼앗은 것은 붓으로 다 기록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이른바 ‘크게 간악한 자는 충성스러운 것 같고, 크게 속이는 자는 믿음직스러운 것 같고, 크게 탐하는 자는 청렴한 것 같다.’는 것입니다. 만일 그 죄를 논(論)한다면, 왕법(王法)에는 반드시 주살(誅殺)하여 용서하지 못할 자입니다. 전하께서 만일 개국으로 공을 삼는다면, 정도전(鄭道傳)과 남은(南誾)이 모두 일등 공신으로 주륙(誅戮)되었으니, 그 공이 죄를 가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또 개국의 공은 한때에 혹 있을 수 있는 것이요, 임금을 업신여기는 마음은 만세에 용납할 수 없는 것입니다. 만일 전하께서 이것을 용서하고 주살하지 않는다면, 난신(亂臣) 적자(賊子)가 연달아 일어날까 두렵습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대의로 결단하여 유사(攸司)로 하여금 직첩을 거두게 하고, 그 죄를 국문하여 율에 따라 처결해서 난적의 싹을 막고, 아울러 조견(趙狷)과 정진(鄭鎭)을 삭직(削職)하고 논죄하여 먼 외방에 귀양보내 후래를 경계하소서."

서리(胥吏)를 보내어 세 집을 둘러싸고 지키게 하여 나오지 못하게 하였다. 임금이 소(疏)를 보고 말하였다.

"논한 죄목이 모두 과인이 아는 것과 틀리니, 다시 말하지 말라."


삼성(三省)에서 박포, 강인부의 죄를 다시 청하니 이산으로 귀양보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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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省再請朴苞、(姜仁府)〔姜仁富〕之罪, 上曰: “朴苞雖有罪, 功臣也, 不可置之極刑。 (仁府)〔仁富〕, 嘗守顯妃陵, 故以太上王之志, 從末減焉。” 乃流于尼山。

삼성(三省)에서 박포(朴苞)·강인부(姜仁富)의 죄를 다시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박포는 비록 죄가 있으나, 공신이니 극형에 처할 수 없다. 강인부는 일찍이 현비(顯妃)[23]의 능을 지켰기 때문에 태상왕의 뜻으로 말감(末減)에 좇은 것이다."

하고, 이산(尼山)으로 귀양보내었다.


사헌부에서 다시 상서하여 조준 등의 죄를 청하니 허락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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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憲司更上書請趙浚等罪, 不許。 上謂居易曰: “以浚之性, 必痛恨於此矣。”

헌사(憲司)에서 다시 상서(上書)하여 조준(趙浚) 등의 죄를 청하니,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임금이 이거이(李居易)에게 이르기를,

"조준의 성품으로 반드시 이것을 통한(痛恨)할 것이다."

하였다.


명하여 세자부를 설치하고 인수부라고 이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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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合設世子府, 號曰仁壽。

명하여 세자부(世子府)를 설치하고, ‘인수부(仁壽府)’라고 이름하였다.


장담의 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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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張湛死。 湛嘗爲僧, 長髮娶太上王庶兄元桂之女。 芳幹構亂, 過其門, 遂脅與之俱。 亂平, 繫獄訊之, 因杖而死。 贈諡良安。

장담(張湛)이 죽었다. 장담은 일찍이 중이 되었다가 머리를 기르고 태상왕의 서형(庶兄) 이원계(李元桂)의 딸에게 장가들었었다. 방간이 난을 일으키고 그 집 문을 지나다가 드디어 협박하여 함께 데려갔었다. 난이 평정되니 옥에 가두고 신문하였는데, 장형(杖刑)으로 인하여 죽었다. 시호를 양안(良安)이라고 하였다.


조준·조견·정진 등을 용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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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宥趙浚、趙狷、鄭鎭等。 三省固爭, 浚上箋辭, 不允。 上曰: “是非浚之罪, 豈可以此枉害忠良? 卿等若固爭, 則當坐以枉害忠良之罪。” 上之宥浚, 因居易、李茂之論救也。

조준(趙浚)·조견(趙狷)·정진(鄭鎭) 등을 용서하였다. 삼성(三省)에서 굳이 간쟁(諫諍)하니, 조준이 전(箋)을 올려 사직하였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것은 조준의 죄가 아니다. 어찌 이것으로 충량(忠良)한 사람을 잘못 해치려고 하는가? 경 등이 만일 굳이 간쟁한다면, 마땅히 충량(忠良)을 잘못 해치는 죄로 연좌(連坐)시키겠다."

하였다. 임금이 조준을 용서한 것은 이거이(李居易)·이무(李茂)의 논구(論救)로 인한 것이었다.


도평의사사의 건의로 각도 고을과 역참의 용관을 감원시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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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使司啓宜汰各道州縣及驛冗官, 從之。 啓曰: “今各道各州縣, 不遠程途, 多設守令。 雖一二驛, 亦各置丞, 故多給廩田, 軍糧耗費。 且以有限人吏, 差煩冗事務, 其弊不纖。 是冗官之可汰者也。 宜令各道觀察使, 酌量各州縣、各驛程途遠近, 將原定新定知官縣令監務驛丞, 革某州縣守令某驛丞, 當合某州縣某驛, 可幷者幷之, 可減者減之, 永使無弊。”

上令使司行移。

사사(使司)에서 각도의 주현(州縣)과 역(驛)의 용관(冗官)을 마땅히 줄여야 한다고 아뢰니, 그대로 따랐다. 계본(啓本)은 이러하였다.

"지금 각도 각 주현(州縣)은 도정(途程)이 멀지 않은데, 수령을 너무 많이 설치하고, 비록 한두 역(驛)이라도 또한 각각 승(丞)을 두었기 때문에, 늠전(廩田)을 많이 주어서 군량이 소비되고, 또 한도가 있는 인리(人吏)를 가지고 번잡한 사무를 시키니, 그 폐단이 적지 않습니다. 이것이 용관(冗官)을 태거(汰去)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마땅히 각도 관찰사로 하여금 각 주현·각역의 거리의 멀고 가까운 것을 참작 요량하여, 원래 정했거나 새로 정한 지관(知官)·현령(縣令)·감무(監務)·역승(驛丞)을 가지고, 아무 주현의 수령과 아무 역의 승(丞)을 혁파하여 아무 주현과 아무 역에 합하여야 한다는 것을 조사하게 하여, 합병할 것은 합병하고 감할 것은 감하여 영구히 폐단이 없게 하소서."

임금이 사사(使司)에 명하여 행문 이첩(行文移牒)하게 하였다.


2月 13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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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성이 건성 남쪽을 범하니 간격이 두 자쯤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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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戊申/土星犯建星南, 隔二尺。

토성(土星)이 건성(建星) 남쪽을 범하니, 간격이 두 자쯤 되었다.


세자가 제릉에 조알하고 전헌례를 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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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世子朝齊陵, 行奠獻禮。

세자(世子)가 제릉(齊陵)에 조알(朝謁)하고 전헌례(奠獻禮)를 행하였다.


유관으로 강원도 도관찰출척사를 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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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以柳觀爲江原道都觀察黜陟使。

유관(柳觀)으로 강원도 도관찰출척사(都觀察黜陟使)를 삼았다.


조준·우인렬 등에게 관직을 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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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復以趙浚判門下府事, 賜丹陽伯禹玄寶推忠輔祚功臣之號。 以禹仁烈、趙仁瓊爲三司左右僕射, 李天祐判中樞院事, 右僕射趙狷、判中樞鄭洪免。 洪, 鎭之父也。

다시 조준(趙浚)으로 판문하부사(判門下府事)를 삼고, 단양백(丹陽伯) 우현보(禹玄寶)에게 추충 보조 공신(推忠輔祚功臣)의 호를 내려 주고, 우인렬(禹仁烈)·조인경(趙仁瓊)으로 삼사 좌복야(三司左僕射)·삼사 우복야를 삼고, 이천우(李天祐)로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를 삼았다. 우복야(右僕射) 조견(趙狷)과 판중추(判中樞) 정홍(鄭洪)은 파면하였으니, 정홍은 정진(鄭鎭)의 아버지였다.


방간을 안산군에 옮겨 안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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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移置芳幹于安山郡。 遣靑原君沈淙、禮曹典書成石因于兔山, 傳旨于芳幹曰: “兔山, 東北面往來之地, 且爾舊所領軍士所居。 爾若久留, 後必有言, 宜往安山。 爾所受田, 移給其郡, 又賜食邑五十戶, 爾其隨宜任使, 以終天年。 如値元日, 單騎入京, 以申懷思之情。” 芳幹免冠, 叩頭痛哭。

방간(芳幹)을 안산군(安山郡)에 옮겨 안치하였다. 청원군(靑原君) 심종(沈淙)·예조 전서(禮曹典書) 성석인(成石因)을 토산(兎山)에 보내어 방간에게 전지(傳旨)하였다.

"토산(兎山)은 동북면(東北面)에 왕래하는 땅이고, 또 네가 전에 영솔하였던 군사들이 사는 곳이니, 네가 만일 오래 머물면 뒤에 반드시 말이 있을 것이다. 안산으로 가는 것이 좋겠다. 네가 받은 땅은 그 고을에 옮겨 주고, 또 식읍(食邑)[24] 50호(戶)를 주는 것이니, 네가 편의한 대로 땅을 맡기고 사람을 부려서 천년(天年)을 마치도록 하라. 만일 정월 초하루를 당하거든 단기(單騎)로 서울에 들어와서 서로 생각하는 정을 펴도록 하라."

방간이 갓을 벗고 머리를 두드리면서 통곡하였다.


2月 25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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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백성이 낮에 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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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庚申/太白晝見。

태백성(太白星)이 낮에 보였다.


경연에서 부처를 좋아함이 그르다는 것에 관해 신하들과 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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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御經筵。 讀《撮要》至襄楷上表言漢桓帝好佛之甚, 謂同知經筵事全伯英曰: “卿等何故言好佛非耶?” 伯英對曰: “孔子曰: ‘攻乎異端, 斯害也已。’ 聖人之道, 以仁義爲重, 釋氏以無父無君爲宗, 故臣等以爲佛氏之道, 非人君所宜好也。 自古人君好佛者, 未有不亡者也。” 上曰: “然。 貪慾莫甚於僧人。 與之則喜, 不與則怨之。”

경연(經筵)에 나아가 《촬요(撮要)》를 읽다가, 양해(襄楷)가 표(表)를 올려 한(漢)나라 환제(桓帝)가 부처를 좋아함이 심하였던 것을 말한 데에 이르러, 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 전백영(全伯英)에게 이르기를,

"경들이 무슨 까닭으로 부처를 좋아하는 것을 그르다고 말하는가?"

하였다. 전백영이 대답하였다.

"공자(孔子)가 말하기를, ‘이단(異端)을 깊이 연구하면 해만 될 뿐이라.’고 하였습니다. 성인(聖人)의 도는 인의(仁義)를 중하게 삼는데, 석씨(釋氏)는 아비도 없고 임금도 없는 것으로 종지(宗旨)를 삼기 때문에, 신 등이 불씨(佛氏)의 도를 인군이 좋아할 바가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옛부터 인군으로서 부처를 좋아한 이는 망하지 않은 이가 없었습니다."

임금이 말하였다.

"그렇다. 탐하고 욕심내는 데는 중보다 더 심한 것이 없다. 사람들이 주면 좋아하고 주지 않으면 원망한다."


대간이 박포를 주살하기를 청하니 그대로 따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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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臺諫交章請誅朴苞, 從之。 三省掌務嘗請苞罪, 上曰: “苞雖有罪, 功臣也, 吾不忍殺。” 又上疏曰:

兄弟之親, 聖人所重; 亂賊之黨, 王法必誅。 此所以厚人倫明大法, 而爲宗社萬世之計也。 今朴苞懷奸挾詐, 造言搆釁, 離間宗親, 謀傾社稷, 王法必誅之罪也。 頃者, 臣等再瀆天聰, 未獲兪允, 中外臣民, 罔不缺望。 且爲功臣者, 當以王室安危爲慮, 盡忠勵節, 終始不渝可也, 先自背盟, 遽生異圖, 謀亂王室, 是自毁其功也。 殿下不念宗社大計, 兄弟至親, 議功輕宥, 其於兄弟至親之意, 王法必誅之義何? 伏惟斷以大義, 明置極刑, 以正大法。

苞在咸州, 見憲府刑曹之吏, 嘆曰: “上仁厚, 吾得延生, 已踰月矣。 死亦何恨!” 遂伏誅。 先是, 太上王謂世子曰: “何不誅苞?” 世子對曰: “以功臣故, 從末減耳。” 太上王曰: “苞雖功臣, 身犯重罪, 其可不誅乎?” 世子曰: “近臺諫請誅, 故臣欲白王誅之矣。” 太上王曰: “臺諫之請, 誠是矣。 國有臺諫, 不亦重乎!”

대간(臺諫)이 교장(交章)하여 박포(朴苞)를 주살(誅殺)하기를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삼성(三省)의 장무(掌務)가 일찍이 박포의 죄를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박포가 비록 죄가 있으나, 공신이니 내가 차마 죽일 수가 없다."

하였으나, 또 상소하였다.

"형제의 지친은 성인이 중하게 여긴 바이요, 난적(亂賊)의 당은 왕법에 반드시 복주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륜을 두텁게 하고 큰 법을 밝혀 종사(宗社) 만세(萬世)의 계책으로 하는 것입니다. 지금 박포가 간사한 뜻을 품고 거짓말에 넘어가 말을 만들고 틈을 얽어서 종친을 이간하고, 사직을 위태롭게 하기를 꾀하였으니, 왕법에는 반드시 주살할 죄입니다. 지난번에 신 등이 두 번이나 천총(天聰)을 더럽혔으나, 유윤(兪允)을 받지 못하였으므로, 중외에서 실망하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 또 공신이 된 자가 마땅히 왕실의 안위(安危)를 생각하여 충성을 다하고 절개를 닦아서 시종(始終) 변하지 않는 것이 가한데, 먼저 스스로 맹세를 배반하고 갑자기 다른 생각을 내어 왕실을 어지럽히기를 꾀하였으니, 이것은 스스로 그 공을 허물어뜨린 것입니다. 전하께서 종사(宗祀)의 대계(大計)와 형제의 지친(至親)을 생각지 않고, 공(功)을 의논하여 가볍게 용서하였으니, 형제는 지친이라는 뜻과 왕법에 반드시 주살한다는 의리에 있어 어떠하겠습니까? 엎드려 바라건대, 대의로 결단하여 밝게 극형에 처해서 큰 법을 바로잡으소서."

박포(朴苞)가 함주(咸州)에 있었는데, 헌부(憲府)·형조(刑曹)의 아전을 보고 탄식하기를,

"주상께서 어질고 후하시어 내가 생명을 연장한 지가 이미 달포가 넘었다. 죽어도 또한 무슨 한이 있겠는가!"

하고, 드디어 복주(伏誅)당하였다. 이보다 앞서 태상왕이 세자에게 이르기를,

"왜 박포를 주살하지 않는가?"

하였다. 세자가 대답하기를,

"공신이기 때문에 말감(末減)에 따른 것입니다."

하였다. 태상왕이 말하기를,

"박포가 비록 공신이라도 자신이 중한 죄를 범하였으니, 주살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하였다. 세자가 말하기를,

"근일에 대간(臺諫)에서 주살하기를 청하였기 때문에, 신이 왕에게 사뢰어 주살하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태상왕이 말하였다.

"대간의 청이 참으로 옳다. 나라에 대간이 있는 것이 또한 중하지 아니하냐!"


二年 三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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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月 1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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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식하니 임금이 소복차림으로 군신을 거느리고 북을 치며 구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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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丙寅朔/日有食之, 上素服率群臣, 伐鼓救之。

일식(日食)하니, 임금이 소복(素服) 차림으로 군신(群臣)을 거느리고 북을 치며 구원하였다.


3月 3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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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백성이 낮에 나타나 하늘을 지나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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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戊辰/太白晝見經天。

태백성(太白星)이 낮에 나타나 하늘을 지나갔다.


좌정승 심덕부가 늙었다고 하여 전을 올려 사직하니 그대로 따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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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左政丞沈德符以老耄上箋辭, 從之。

좌정승 심덕부(沈德符)가 늙었다고 하여 전(箋)을 올려 사직하니, 그대로 따랐다.


3月 4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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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씨를 봉하여 세자 정빈으로 삼다. 책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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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己巳/封閔氏爲世子貞嬪。 冊曰:

重配匹, 所以厚人倫; 崇位號, 所以正名分。 玆遵盛典, 庸建徽稱。 咨爾閔氏, 生於世家, 配于君子。 夙著柔嘉之則, 常存靜一之心。 無非無儀, 在中饋而貞吉; 必儆必戒, 殫內助以肅雍。 旣敦風化之源, 宜奉宗祧之祀。 是用冊爾, 爲王世子貞嬪。 於戲! 每進《雞鳴》之戒, 德音莫違; 永應《麟趾》之祥, 福祿是荷。 惟予以懌, 其乃之休。

민씨(閔氏)를 봉하여 세자 정빈(貞嬪)으로 삼았다. 책문(冊文)은 이러하였다.

"배필(配匹)을 중하게 하는 것은 인륜(人倫)을 두텁게 하는 것이요, 위호(位號)를 높이는 것은 명분(名分)을 바르게 하는 것이다. 이에 성한 예전(禮典)에 따라서 아름다운 칭호를 세우노라. 아! 그대 민씨는 세가(世家)에 나서 군자(君子)의 배필이 되어, 일찍부터 부드럽고 아름다운 의측(儀則)을 나타내었고, 항상 고요하고 한결같은 마음을 가졌었다. 그른 것도 없고 마땅치 않는 것도 없이 중궤(中饋)[25]를 주장하여 바르고 길(吉)하였으며, 반드시 경계하고 반드시 조심하여 내조(內助)를 다해서 삼가고 화합하였도다. 이미 풍화(風化)의 근원을 두텁게 하였으니, 마땅히 종묘(宗廟)의 제사를 받들어야 하겠으므로, 그대를 책봉하여 왕세자(王世子) 정빈(貞嬪)으로 삼노라. 아아! 매양 계명(鷄鳴)[26]의 경계를 바쳐 덕음(德音)을 어기지 말고, 길이 인지(麟趾)[27]의 상서에 응하여 복록을 받을지어다. 나도 이로써 그대의 아름다움을 기뻐하노라."


처음으로 선잠에 제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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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初祀先蚕。

처음으로 선잠(先蠶)에 제사하였다.


왕세자와 더불어 제릉에 배알하고 호곶에서 사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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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與王世子謁齊陵, 遂畋于壺串。

왕세자와 더불어 제릉(齊陵)에 배알(拜謁)하고 드디어 호곶(壼串)에서 사냥하였다.


다야점에서 사냥하고 도평의사사에서 막차에 나아가 연향을 베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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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畋于多也岾, 使司進幕次設享, 極懽夜罷。 上與諸宰相聯句, 賜石璘良馬一匹, 解通天神鹿科犀帶一腰, 賜門下贊成事李居易。 諸宰相皆出, 上與世子及李居易、李佇、李茂入夜盡懽, 世子起舞, 上亦起舞。 翌日, 中酒不能起, 日昃還宮。 內官朴英文進曰: “前日殿下之起舞, 非禮也。 若在太上王前則可矣, 安有人君與世子及諸臣對舞之禮乎?” 上曰: “予醉不知所爲。”

다야점(多也岾)에서 사냥하였다. 사사(使司)에서 막차(幕次)에 나아가 연향(宴享)을 베푸니, 지극히 즐거워하다가 밤에야 파하였다. 임금이 여러 재상(宰相)과 더불어 연귀(聯句)를 짓고, 성석린(成石璘)에게 좋은 말 1필을 하사하고, 통천신록과서대(通天神鹿科犀帶) 1요(腰)를 풀어서 문하 찬성사(門下贊成事) 이거이(李居易)에게 하사하였다. 여러 재상이 모두 나가고, 임금이 세자와 이거이(李居易)·이저(李佇)·이무(李茂)와 더불어 밤이 될 때까지 지극히 즐기었다. 세자가 일어나 춤을 추니, 임금도 일어나 춤을 추었다. 이튿날 임금이 술에 취하여 일어나지 못하였으므로 해가 기운 뒤에야 환궁하였다. 내관(內官) 박영문(朴英文)이 말하기를,

"전일에 전하께서 일어나 춤춘 것은 예가 아닙니다. 만일 태상왕의 앞에 있었다면 가합니다. 어디 인군이 세자와 여러 신하와 더불어 대무(對舞)하는 예가 있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였다.

"내가 취하여서 한 일을 알지 못하겠다."


3月 8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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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3일부터 이날까지 엿새 동안 낮에 태백성이 나타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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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癸酉/太白晝見。 自戊辰至是凡六日。

태백성(太白星)이 낮에 나타났는데, 초3일[무진]부터 이날까지 무릇 엿새 동안이었다.


내탕의 재물을 내어 석가와 오백 나한상을 만들어 화장사에 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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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出內帑, 造釋迦及五百羅漢像, 安于華藏寺。

내탕(內帑)의 재물을 내어 석가(釋迦)와 오백 나한상(五百羅漢像)을 만들어서 화장사(華藏寺)에 두었다.


정전에서 세자에게 연향하고 중궁도 정빈에게 연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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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御正殿享世子, 公侯宰相皆侍宴。 上入內殿, 召世子及李和、李居易、李佇、沈淙、李良祐, 極懽乃罷。 中宮亦享貞嬪。

정전(正殿)에 나아가서 세자에게 연향(宴享)하였는데, 공후(公侯)와 재상(宰相)이 모두 시연(侍宴)하였다. 임금이 내전(內殿)에 들어가 세자와 이화(李和)·이거이(李居易)·이저(李佇)·심종(沈淙)·이양우(李良祐)를 불러 지극히 즐거워하다가 파하였다. 중궁(中宮)도 정빈(貞嬪)에게 연향하였다.


판문하 조준이 전을 올려 사면하기를 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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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判門下趙浚上箋乞免。

판문하(判門下) 조준(趙浚)이 전(箋)을 올려 사면하기를 빌었다.


경연에서 하륜이 군자와 소신을 잘 분별하여 인재를 채용할 것을 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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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御經筵。 知事河崙進曰: “君子得位, 則小人退而國興; 小人得勢, 則君子退而國亡。 在人君審於用捨之間。” 深納之。 崙又曰: “春溫而漸至夏熱, 秋涼而馴致冬寒。 小人用事, 則乘間抵隙, 漸害君子, 禍亂將至。 所貴在辨之於早。” 上曰: “孰不知是非之分! 但行之不及耳。”

경연(經筵)에 나아갔다. 지사(知事) 하륜(河崙)이 말하기를,

"군자(君子)가 지위를 얻으면, 소인이 물러가고 나라가 흥하며, 소인이 세력을 얻으면, 군자가 물러가고 나라가 망하는 것입니다. 쓰고 버리는 사이에 인군의 살핌이 있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깊이 받아들였다. 하륜이 또 말하였다.

"봄이 따스하면 점차 여름의 열기(熱氣)가 이르고, 가을이 서늘하면 점차 겨울의 한기(寒氣)가 이르는 것입니다. 소인이 일을 하게 되면, 그 틈을 타서 점차 군자를 해쳐 환란이 장차 이르게 되니, 귀한 것은 일찍 변별하는 데에 있습니다."

임금이 말하였다.

"누가 시비의 분변을 알지 못할까마는, 다만 행하는 것이 미치지 못한다."


헌사의 건의를 사련소에서 소와 말을 미리 길러서 국용에 대비하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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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憲司請令司臠所預養牛馬, 以備國用, 毋得奪諸民間, 從之。

헌사(憲司)에서 사련소(司臠所)[28]로 하여금 소와 말을 미리 길러서 국용(國用)에 대비하게 하고, 민간의 것을 빼앗지 말도록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남의 땅을 공전이라 속여 사취한 예조 의랑 권비의 직임을 파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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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罷禮曹議郞權裨職。 前軍器少監李思彦喪父在外, 裨誣謂思彦所受田爲公田, 冒受於給田司。 思彦終制, 來京請還, 裨不許, 憲司劾罷之。

예조 의랑(禮曹議郞) 권비(權裨)의 직임을 파면하였다. 전 군기 소감(軍器少監) 이사언(李思彦)이 아비의 상(喪)을 당하여 외방에 있었는데, 권비가 속여 말하기를, ‘이사언이 받은 땅이 공전(公田)이라’ 하고, 급전사(給田司)에서 속여 받았었다. 사언이 상(喪)을 마치고 서울에 와서 돌려주기를 청하니, 권비가 허락하지 않으므로, 헌사(憲司)에서 탄핵하여 파직하였다.


3月 15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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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백성이 낮에 나타나 기양 7일 동안 현성사에서 도량을 베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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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庚辰/太白晝見。 設祈禳文豆屢道場于賢聖寺七日。

태백성(太白星)이 낮에 나타났으므로, 기양 문두루 도량(祈禳文豆屢道場)을 7일 동안 현성사(賢聖寺)에서 베풀었다.


조준·성석린·민제·권근에게 관직을 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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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以趙浚復爲判門下事, 成石璘爲左政丞, 閔霽爲右政丞, 權近爲政堂文學兼大司憲。

조준(趙浚)으로 다시 판문하사(判門下事)를 삼고, 성석린(成石璘)으로 좌정승을, 민제(閔霽)로 우정승을 삼고, 권근(權近)으로 정당 문학(正堂文學) 겸 대사헌(兼大司憲)을 삼았다.


왕세자가 신도에 가서 종묘에 배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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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王世子如新都, 謁宗廟。

왕세자가 신도(新都)에 가서 종묘에 배알(拜謁)하였다.


중상동 옛집에 거둥하여 활을 쏘며 날을 보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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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幸中常洞古第, 射侯終日。

중상동(中常洞) 옛집에 거둥하여 사후(射侯)[29]하면서 날을 보냈다.


3月 18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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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오고, 천둥하고, 번개 치니 변괴의 징조인가를 왕이 하륜에게 묻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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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癸未/雨震電。 翌日, 問參贊門下府事河崙曰: “昨日雨震電, 是何如?” 崙進曰: “春雷非妖。 震動萬物, 惟其時矣。”

비가 오고, 천둥이 치고, 번개도 쳤다. 이튿날 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 하윤(河崙)에게 묻기를,

"어제 비 오고 천둥 치고 번개가 친 것은 어떠한가?"

하니, 하윤(河崙)이 말하였다.

"봄의 우레는 요괴(妖怪)가 아닙니다. 만물이 진동하는 것이 바로 이러한 때입니다."

하였다.


권근이 사헌부의 직을 겸임하고, 전백영이 여묘살이 중에 상의중추의 직을 맡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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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御經筵。 同知事權近進曰: “以臣不才, 兼任憲司。 臣不知所爲, 惶悚而已。” 上謂伯英曰: “聞卿以居廬未終爲恨, 改憲長授以商議中樞。” 伯英對曰: “殿下不以臣爲不才, 授大任於廬墓之中, 故臣卽亟來。” 時人譏伯英聞命不讓, 亟來就職, 故伯英陳之以此。

경연(經筵)에 나아가니, 동지사(同知事) 권근(權近)이 말하였다.

"신이 재주가 없는데도 헌사(憲司)를 겸임하게 하시니, 신이 할 바를 알지 못하여 황송하기만 할 뿐입니다."

임금이 전백영(全伯英)에게 이르기를,

"경이 여묘(廬墓)살이 하는 것을 마치지 못해 한(恨)스럽게 여긴다는 말을 듣고, 헌장(憲長)을 고쳐 상의중추(商議中樞)를 제수한 것이다."

하였다. 전백영이 대답하기를,

"전하께서 신을 재주가 없다 하지 않으시고, 대임(大任)을 여묘(廬墓)살이 하는 중에 주셨으므로, 신이 곧 급히 온 것입니다."

하였다. 이때에 사람들이, 전백영이 명령을 듣고 사양하지 아니하고 급히 와서 직사에 나왔음을 비웃었기 때문에, 전백영이 이러한 말로 진달한 것이다.


3月 19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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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산의 큰 돌이 무너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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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甲申/華藏山大石崩。

화장산(華藏山)의 큰 돌이 무너졌다.


도사와 중들로 하여금 내전에서 경을 읽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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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使道流及僧徒, 讀經于內殿。

도류(道流)와 승도(僧徒)로 하여금 내전(內殿)에서 경(經)을 읽게 하였다.


대사헌의 직을 제수받은 권근이 경연에서 임금에게 사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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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御經筵。 大司憲權近進曰: “臣本昏愚, 少不更事, 踈於吏治。 殿下不以臣爲鄙陋, 濫長憲司, 誠惶誠喜, 尙恐貽笑中外。 然愚者一得, 豈無可陳事條! 願殿下俯察寬恤, 儻有上言不害於理, 特賜兪允。” 上曰: “予本昏昧, 不明治體, 簡拔忠良, 皆明哲也。 卿等輔弼寡躬, 以臻至治, 予將虛心聽察。”

경연(經筵)에 나아가니, 대사헌(大司憲) 권근(權近)이 말하였다.

"신이 본래 혼미하고 우직하며, 젊었을 때에 일을 경험하지 못하여 이치(吏治)에 서투릅니다. 전하께서 신을 비루(鄙陋)하게 여기지 않으시고, 외람하게 헌사(憲司)의 장이 되게 하시니, 진실로 황공하고 진실로 기쁘나, 중외(中外)에 웃음을 남길까 두렵습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자도 한 가지 얻는 것이 있으니, 어찌 진달할 사항(事項)이 없겠습니까? 원하건대, 전하께서 굽어 실피시고 관대히 긍휼(矜恤)하시어, 혹시 올리는 말이 있더라도 이치에 해롭지 않거든 특별히 유윤(兪允)을 내려 주소서."

임금이 말하였다.

"내가 본래 혼미해서 다스리는 사체(事體)에 밝지 못하여 충량(忠良)한 사람을 가려 뽑았는데, 모두 명철하다. 경 등은 과인을 보필하여 지극한 다스림에 이르게 하라. 내가 장차 허심탄회하게 들어서 살피겠다."


세자가 신도에서 이르니 잔치를 베풀어 매우 즐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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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世子至自新都。 上及世子, 御涼廳觀射(候)〔侯〕, 因設宴極懽。 上起舞, 世子醉甚, 扶上腰, 上曰: “此汝之眞情也。” 入夜乃罷。

세자가 신도(新都)에서 이르니, 임금과 세자가 양청(涼廳)에 나아가서 사후(射侯)하는 것을 구경하고, 인하여 잔치를 베풀어 지극히 즐기었다. 임금이 일어나서 춤을 추니, 세자가 취한 것이 심하여 임금의 허리를 붙잡았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것이 너의 진정(眞情)이로구나!"

하였다. 밤이 되어서 파하였다.


참찬문하부사 조영무를 해주에 보내 항복한 왜적을 서북면에 나누어 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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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遣參贊門下府事趙英茂于海州。 分處降倭於西北面諸州也。

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 조영무(趙英茂)를 해주(海州)에 보내어, 항복한 왜적을 서북면(西北面) 제주(諸州)에 나누어 두었다.


二年 夏四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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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月 1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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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사로 하여금 아일(衙日)마다 아뢸 사항이 있으면 진달하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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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丙申〕/初下敎, 令各司每衙日, 有所啓則陳之。

하교(下敎)하여 각사(各司)로 하여금 아일(衙日)마다 계사(啓事)가 있으면 진달하게 하였다.


대사헌 권근이 풍문공사가 불가피하게 있음을 논하고 관직을 함부로 주지 말기를 건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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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司憲權近啓曰: “憲司名曰風憲官, 凡正風俗等事, 皆風聞彈劾。 往者, 旣命毋行風聞公事, 然不風聞, 則何以正人心乎? 願自今風聞之事, 如得其實, 則悉皆糾理。 且刑者, 禁民爲非, 輔治之具也。 有罪者, 不可輕宥。 自今罪狀現著者, 必令本府推鞫懲之。” 上曰: “然。 但風聞公事, 太上王之所禁, 不可輕改。 今欲行之, 則宜更立法。” 近又進曰: “當今兩府已上諸相, 數過四十。 皆坐都評議使司, 議國家之事, 其中各品商議, 似爲冗官。 且名器, 人君之大寶, 不可紊也。 邇者除授之法, 不論實職, 或以添設典書, 陞爲檢校中樞, 或以檢校中樞, 超拜省宰, 甚爲未便。 願自今, 受實典書者, 乃陞檢校中樞, 受實中樞者陞爲省宰, 則差除有序, 而官品秩然矣。” 上然之。

대사헌(大司憲) 권근(權近)이 아뢰었다.

"헌사(憲司)는 이름이 풍헌관(風憲官)이므로, 무릇 풍속을 바로잡는 등의 일을 모두 풍문(風聞)으로 탄핵합니다. 지난번에 풍문 공사(風聞公事)[30]를 행하지 말라고 이미 명령하였습니다. 그러나 풍문을 하지 않으면 어떻게 인심(人心)을 바로잡을 수 있겠습니까? 원하건대, 이제부터 풍문의 일에 만일 그 실상을 얻는다면, 모두 다 규찰하게 하소서. 또 형벌이라는 것은 백성이 그른 일을 하는 것을 금하는 것이니, 정치를 돕는 도구입니다. 죄가 있는 자는 가볍게 용서할 수 없습니다. 이제부터 죄상(罪狀)이 현저한 자는 반드시 본부(本府)로 하여금 추국(推鞫)하여 징치하게 하소서."

임금이 말하였다.

"그렇다. 다만 풍문 공사(風聞公事)는 태상왕께서 금하신 것이니, 가볍게 고칠 수 없다. 지금 행하고자 하면, 다시 입법을 하여야 한다."

권근이 또 말하였다.

"지금 양부(兩府) 이상 여러 재상의 수가 40인을 넘는데, 모두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에 앉아서 국가의 일을 의논합니다. 그 중 각품(各品)의 상의(商議)는 쓸 데 없는 관원 같습니다. 또 명기(名器)는 인군의 큰 보배이므로 문란하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근자에 제수(除授)하는 법이 실직(實職)을 논하지 않으므로, 혹은 첨설 전서(添設典書)를 승진시켜 검교 중추(檢校中樞)로 삼고, 혹은 검교 중추를 초자(超資)하여 성재(省宰)로 제수하니, 심히 온당치 못합니다. 원하건대, 지금부터 실제 전서(典書)를 제수받은 사람을 검교 중추에 승진시키고, 실제 중추(中樞)를 받은 사람을 승진하여 성재(省宰)로 삼으면, 제수하는 것이 차서(次序)가 있고 관(官)의 품등(品等)이 문란하지 않을 것입니다."

임금이 그렇게 여겼다.


대마도 왜인이 말 16필을 바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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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對馬島倭獻馬十六匹。

대마도(對馬島) 왜인이 말 16필을 바쳤다.


사헌부에서 오래 날이 가물어 연음(宴飮)을 금하기를 청하니 그대로 따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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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司憲府以久旱, 請禁公私宴飮, 從之。

사헌부(司憲府)에서 오래 가문다고 하여 공사(公私)의 연음(宴飮)을 금하기를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조영무가 항복한 왜인을 풍해도의 여러 고을에 나누어 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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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趙英茂分置倭於豐海道諸州。 英茂至海州, 使人傳令于倭曰: “汝若欲戰速戰, 不然, 宜速降”, 以兵脅之, 倭人氣沮皆降。

조영무(趙英茂)가 항복한 왜인을 풍해도(豐海道)의 제주(諸州)에 나누어 두었다. 조영무가 해주(海州)에 이르러 사람을 시켜 왜적에게 명령을 전하기를,

"너희가 만일 싸우고자 하거든 속히 싸우고, 그렇지 않거든 빨리 항복하라."

하고, 군사로 위협하니, 왜인들이 사기가 죽어서 모두 항복하였다.


세자가 예궐하여 연향을 베푸니 의안공 이화와 이숙번 등이 시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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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世子詣闕設享, 義安公和、李叔蕃等侍宴。 公侯宰相以次起舞, 上亦起舞。 世子醉倒, 上親使人扶起, 世子乃還。

세자가 예궐(詣闕)하여 연향(宴享)을 베푸니, 의안공(義安公) 이화(李和)와 이숙번(李叔蕃) 등이 시연(侍宴)하였다. 공후(公侯)와 재상(宰相)이 차례로 일어나 춤추고, 임금도 또한 일어나 춤추었다. 세자가 취하여 쓰러지니, 임금이 친히 사람을 시켜 부축하여 일으켜, 세자가 돌아갔다.


4月 4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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짙은 안개가 끼고 서리가 오다. 토성이 건성의 제2성을 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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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己亥/沈霧隕霜。 土星犯建第二星。

짙은 안개가 끼고 서리가 왔다. 토성(土星)이 건성(建星)의 제2성(第二星)을 범하였다.


4月 5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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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리가 내려 풀이 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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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庚子/隕霜殺草。

서리가 내려 풀이 죽었다.


날이 가물자 금주령을 내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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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下禁酒令。 大司憲權近曰: “今年春旱, 恐是禾稼不登之占。 臣以言官, 不敢默默。 伏望殿下, 憂恤惕慮, 更下禁酒之令, 以節國用。” 從之。

금주령(禁酒令)을 내렸다. 대사헌 권근(權近)이 말하기를,

"금년에 봄이 가무니, 화곡(禾穀)이 풍등(豐登)하지 못할 징조인가 두렵습니다. 신이 언관(言官)으로서 감히 말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근심하고 두렵게 생각하여, 다시 금주령을 내려 국가의 비용을 절약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4月 6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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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리가 내리고 큰 바람이 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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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辛丑/隕霜大風。

서리가 내리고 큰 바람이 불었다.


임금이 태상전에 나아가 헌수하려 하니 태상왕이 가뭄으로 인해 정지시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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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欲詣太上殿獻壽, 太上王止之。 太上王使宦者傳命曰: “近者旱氣太甚, 不可宴樂。” 上聞命遂止。

임금이 태상전에 나아가 헌수(獻壽)하려 하니, 태상왕이 정지시키고, 태상왕이 환자(宦者)를 시켜 명령을 전하기를,

"근자에 가뭄이 너무 심하니, 잔치하여 즐길 수 없다."

하였다. 임금이 명령을 듣고 드디어 그만두었다.


경군관 12패를 만들어 번갈아 숙직하게 하고 선배들의 패는 특별히 면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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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作京軍官十二牌, 更日直宿, 特除儒牌入直。

경군관(京軍官)[31]12패(牌)를 만들어 날을 번갈아 숙직하게 하고, 유패(儒牌)[32]의 입직(入直)하는 것을 특별히 면제하여 주었다.


대간과 형조에서 노비 송사를 결단하는 일이 없도록 문하부에서 건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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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門下府上疏請除臺諫刑曹決訟。 疏曰:

設官分職, 所以代天工, 各有所職, 不可紊也。 頃者, 殿下慮辨定都監誤決, 冤滯未伸, 令憲司納狀, 分付各司本府及憲司、刑曹, 以辨邪正。 竊謂諫官內廷侍臣, 憲司彈糾百官, 刑曹專掌刑決, 各有所職。 而奴婢詞訟, 專是都官之任。 如有誤決, 憲司察之, 至於詞訟繁多, 主掌官或未能速決, 則別立都監以決正之。 今以奴婢辨正之事, 分付臺省、刑曹, 實有乖於設官分職之義。 願殿下命設都監, 將其所呈六百六十六道, 速令改決, 以伸冤抑, 幸甚。

上只令憲司、刑曹決正, 門下府則如其所啓。 謂大司憲權近曰: “奴婢決正事, 何以一定! 昨日門下府上言: ‘臣等職掌諫諍, 未聞諫官聽訟決事。’ 其言甚是, 予卽允許。 初我太上王深慮奴婢爭訟之不息, 特設都監, 簡拔良士, 限月決正。 然謂誤決之徒, 非一二也。 夫人之情欲無窮, 雖自知非, 强言誤決。 如此之徒, 有司嚴加考察, 誤決事跡未見, 則痛懲, 昭示中外。 自今已後, 奴婢爭訟, 一歸主掌都官。” 近對曰: “上敎誠然。”

문하부(門下府)에서 상소하여 대간(臺諫)과 형조(刑曹)에서 송사 결단하는 것을 없애도록 청하였다. 소(疏)는 이러하였다.

"관사(官司)를 설치하고 직사를 나눈 것은 천공(天工)[33]을 대신하는 것이니, 각각 직책이 있어서 문란하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지난번에 전하께서 변정 도감(辨定都監)에서 오결(誤決)하여 원통하고 지체(遲滯)되는 것이 펴지지 못할까 염려하여, 헌사(憲司)로 하여금 소장(訴狀)을 받아들이게 해서, 각사(各司)와 본부(本府) 및 헌사(憲司)와 형조에 나누어 주어서 사정(邪正)을 변별하게 하였습니다. 그윽이 생각하건대, 간관은 내정(內廷)의 시신(侍臣)이고, 헌사(憲司)는 백관을 규탄(糾彈)하고, 형조는 형(刑)의 결정을 전장(專掌)하여, 각각 직책이 있으며, 노비(奴婢)의 소송은 오로지 도관(都官)의 임무입니다. 만일 오결(誤決)이 있으면 헌사(憲司)에서 살피고, 소송이 번다하여 주장관(主掌官)이 간혹 속히 결단하지 못하는 데에 이르면, 따로 도감(都監)을 세워서 결정하여야 할 것입니다. 지금 노비 변정(奴婢辨正)의 일을 대성(臺省)·형조에 나누어 붙이는 것은 실로 벼슬을 설치하고 직사를 나누는 뜻에 어긋남이 있습니다.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명하여 도감을 설치하게 하고, 정소(呈訴)한 바 6백 66건을 속히 판결하게 하여, 원통하고 억울한 것을 펴게 하시면 심히 다행하겠습니다."

임금이 다만 헌사(憲司)와 형조로 하여금 결정하게 하고, 문하부(門下府)는 아뢴 대로 하게 하였다.

대사헌(大司憲) 권근(權近)에게 일렀다.

"노비(奴婢)를 결정하는 일을 어떻게 하면 일정하게 할 수 있을까? 어제 문하부에서 상언하기를, ‘신 등은 직책이 간쟁(諫諍)을 맡고 있사온데, 간관(諫官)이 송사(訟事)를 듣고 송사를 판결한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습니다.’ 하였는데, 그말이 심히 옳기에, 내가 곧 윤허하였다. 처음에 우리 태상왕께서 노비의 쟁송(爭訟)이 그치지 않는 것을 깊이 염려하시어, 특별히 도감(都監)을 설치하고 훌륭한 인사(人士)를 발탁해서, 달수를 한정하여 결정하게 하였다. 그러나, 오결(誤決)하였다고 말하는 무리가 하나 둘이 아니었다. 대개 사람의 정욕(情欲)이라는 것은 한이 없어서, 비록 스스로 그른 것을 알면서도 억지로 오결(誤決)이라고 말한다. 이 같은 무리는 유사(有司)가 엄하게 고찰(考察)하여, 오결(誤決)한 사적(事跡)이 나타나지 않으면, 엄격히 징치하여 중외(中外)에 밝게 보이고, 이제부터 이후로는 노비의 소송을 일체 도관(都官)에게 되돌려서 주장하게 하라."

권근이 대답하였다.

"주상의 말씀이 참으로 옳습니다."


문하부에서 상소하여 초파일에 연등의 설치를 정지하도록 청하니 회답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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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門下府上疏, 請止八日燃燈之設, 不報。

문하부(門下府)에서 상소하여 초파일에 연등(燃燈)의 설치를 정지하도록 청하니, 회답하지 아니하였다.


사헌부의 건의로 사냥을 정지하다. 태상왕이 신도 행차를 그만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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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司憲府請止田獵, 從之。 太上王欲幸新都, 上欲出餞郊外, 因以觀獵。 司憲府大司憲權近等上疏曰:

臣等竊聞, 太上殿下巡幸新都, 殿下欲與世子, 拜餞郊外, 信宿而還。 臣等竊謂, 孝當盡誠, 禮貴得中。 太上王之行, 親率百官, 拜送于郊, 卽日還宮, 得禮之中, 孝亦至矣。 不必遠幸郊外, 留連數日, 然後爲盡其孝誠也。 前冬, 太上王嘗幸新都, 毋令殿下出城拜送, 蓋不欲煩殿下, 亦不欲煩民也。 今若遠駕, 以煩師衆, 太上之心, 亦不自安, 豈以爲孝哉? 又況今春以來, 淒風不雨, 及至夏初, 且有繁霜, 天時失節, 陰陽不調。 此正殿下恐懼修省, 不敢遑寧, 畏天䘏民, 以消災沴之時也。 乃出于郊, 馳騁田獵, 非所以畏天也; 農務方興, 吏民奔走於趨從, 一麥方長, 軍士躪踐其田畝, 非所以䘏民也。 臣等爲殿下惜之。 伏望出餞于郊, 卽日還宮, 毋敢止宿遊畋, 上慰親心, 下副輿望, 不勝幸甚。

旣而, 太上王亦不行。

사헌부(司憲府)에서 사냥을 정지하도록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태상왕이 신도(新都)에 거둥하고자 하니, 임금이 교외에 나가서 전송하고, 인하여 사냥하는 것을 구경하였다. 대사헌 권근(權近) 등이 상소하였다.

"신 등은 그윽이 들으니, 태상 전하께서 신도(新都)에 순행(巡幸)하시는데, 전하가 세자와 더불어 교외에서 절하여 전송하고, 이틀 동안 유숙하고 돌아오신다 합니다. 신 등은 그윽이 생각하건대, 효도는 마땅히 정성을 다하여야 하고, 예의는 중도(中道)를 얻는 것이 귀(貴)합니다. 태상왕의 행행(行幸)에 친히 백관을 거느리고 교외에서 절하여 전송하고, 즉일로 환궁하는 것이 예(禮)의 중도를 얻는 것이요, 효도도 또한 지극한 것입니다. 반드시 멀리 교외에 순행하여 수일을 유련(留連)한 연후에 효성을 다하는 것이 되지는 않습니다. 지난 겨울에 태상왕께서 신도에 순행하실 때에, 전하로 하여금 성(城)을 나와서 배송(拜送)하지 말게 하시었는데, 대개 전하를 번거롭게 하지 않으려는 것이고, 또한 백성을 번거롭게 하지 않으려는 것입니다. 지금 만일에 멀리 거가(車駕)를 움직여서 군사를 번거롭게 하시면, 태상왕의 마음도 또한 스스로 편안하지 못할 것이니, 어찌 효도가 되겠습니까? 또 더구나 금년 봄 이래로 찬 바람만 불고 비가 오지 않았으며, 초여름에 이르러서도 서리가 자주 내려, 천시(天時)가 절기를 잃고 음양(陰陽)이 고르지 못합니다. 이것은 정녕 전하께서 삼가고 수성(修省)하여 감히 편안할 겨를이 없이 하늘을 두려워하고 백성을 근심하여, 재앙을 없게 할 때입니다. 그러므로, 교외에 나가서 말을 달리고 사냥하는 것은 하늘을 두려워하는 소이(所以)가 아닙니다. 농삿일이 한참 바쁜데, 아전과 백성들이 추종(趨從)하는 데 분주하고, 모맥(麰麥)이 한창 자라고 있는데, 군사들이 밭이랑을 짓밟으니, 백성을 근심하는 소이(所以)가 아닙니다. 신 등은 전하를 위하여 애석하게 여깁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교외에 나가 전송하고 즉일로 환궁하여, 감히 머물러 자거나 사냥하지 말아서, 위로 어버이의 마음을 위로하고 아래로 여망(輿望)에 부합하게 하시면, 다행함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조금 뒤에 태상왕도 또한 행차하지 아니하였다.


문하부에서 상소하여 용관을 태거하도록 청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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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門下府上疏, 請汰冗官。 疏曰:

謹按周官, 三公論道, 六卿分職。 官不必備, 惟其人。 天官冢宰以下, 各屬六十, 而六卿之屬, 三百六十, 猶能任賢使能, 以臻泰和之治。 唐之太宗, 定爲三百六十七員而曰: “吾以此, 待天下之賢才足矣。” 雖以天下之大, 官爵之設, 不過如此。 我朝東班, 自判門下、領三司至九品, 五百二十餘員, 西班自上、大將軍, 至隊長隊副, 四千一百七十餘人, 文武官吏之數, 固三倍於中朝之制矣。 加以成衆官、上林園、圖畫院、司楯、司衣、司幕、司饔、忠勇、近侍、內侍府、掖庭、典樂ㆍ雅樂署, 各有祿官, 而檢校、散秩, 則亦增其數, 祿俸之不周, 實由此也。 前朝舊制, 自中書令至知門下凡十員, 自判樞密至學士凡九員, 自尙書令至左右員外郞每各品一員。 開城府尹陞於吏曹典書之上, 不得與於兩府, 而下官各品, 各置二員。 六部則吏部工部, 自尙書以下每品各一員, 戶部以下每品各二員, 六寺七監, 判事以下各品各一員。 大槪如此。 西班上護軍八人、大護軍十六人、親從三人。 每一領護軍一人、中郞將以下五員十將, 凡四十二領。 其餘衙門員吏之數, 亦不煩冗, 使之不廢職事, 而國治民安, 維持四百餘年。 至于近代, 兩府之數, 少加於古, 而恭愍王始毁古制, 六曹、六寺、七監, 每品各增二員, 西班之職, 亦加於古。 甲寅之後, 權臣擅政, 視名器爲己私物, 布列枝黨, 增添兩府, 猶爲不足, 又設商議, 多至十數, 而掌經濟者, 不過侍中二人, 此皆殿下所見聞也。 我太上殿下, 應天開國, 立經陳紀, 欲革冗官, 第因草創, 以待勤勞, 而未得盡革, 以至于今, 每年頒祿, 常不周足。 夫糧餉之畜, 有國之大計。 今以軍資, 充其祿俸, 甚非爲國之道也。 我國在海外, 折長補短, 猶不過千里, 山川險阻, 土地磽薄, 租稅之法, 不可與中國比也。 諸倉庫、宮司、各品科田、各司公廨田、院館、津、驛所受, 軍資所屬外官三百餘員廩給外, 京官之祿, 幾於十萬石。 祿俸常患於不足, 軍資未見其積畜者, 豈非冗官之未汰, 散秩之尙多也? 《傳》曰: “無君子, 莫治野人, 無野人, 莫養君子。 治人者食於人, 治於人者食人。” 君子小人, 雖有尊卑之等, 而實相資也。 豈可無事而坐食, 享民之利乎? 檢校之職, 增益其數, 多至數十, 不仕於官, 在家食祿, 是乃無事而享民之食者也。 伏惟殿下, 深思廣慮, 兩府一依前朝舊制, 而商議則一切汰去。 漢城府掌土之官, 不可列於兩府。 今無所事, 而坐於廟堂, 非所以尊朝廷重名實也。 請革判事, 只置一尹, 以復舊制, 而陞於吏曹典書之上。 六曹各減典書一員, 餘皆仍之。 六寺七監判事卿監, 各減一員, 四品已下仍舊。 西班請依前朝四十二都府之制, 每一領各五員十將, 隊長隊副, 皆仍其額。 其他不緊京官、新設成衆愛馬祿官、上林院、圖畫院、尙衣院祿官等及外方州縣, 特命都堂擬議, 可汰者汰之, 可幷者幷之。 年老勳舊, 不可授職七十已上者, 請循前朝之制, 仍令致仕, 俾不失祿, 檢校散秩, 一皆革之。 公侯宗室功臣外無功者, 不許封君祿俸。 以原額之多少, 計數頒賜, 毋得貸軍資而充之。 如此則朝廷尊, 而官爵貴, 冗員省而祿俸足, 民弛漕輓之勞, 國有畜積之資。

疏啓, 上曰: “州府郡縣, 或幷或除事, 吾已下令矣。 兩府百司減省員數事, 今當草創之時, 不可遽行。”

문하부(門下府)에서 상소하여 용관(冗官)을 태거(汰去)하도록 청하였다. 소(疏)는 이러하였다.

"삼가 주관(周官)을 상고하니, 삼공(三公)은 도(道)를 의논하고, 육경(六卿)[34]은 직사(職事)를 분장(分掌)하여, 관(官)을 반드시 갖추지 아니하고 오직 적합한 사람을 썼습니다. 천관(天官) 총재(冢宰) 이하의 각 소속(所屬)이 60이므로, 육경(六卿)의 소속이 3백 60인데, 오히려 능히 어진 이를 쓰고 능한 이를 부리어 태화(泰和)의 정치를 가져왔습니다. 당(唐)나라 태종(太宗)은 3백 67인의 관원을 정하고 말하기를, ‘내가 이것으로 천하의 현재(賢才)를 대접하면 족하다.’ 하였습니다. 비록 천하가 크지만도 관작(官爵)의 설치한 것이 이와 같은 데에 불과하였습니다. 우리 조정은 동반(東班)이 판문하(判門下)·영삼사(領三司)에서 9품(品)까지가 5백 20여 원(員)이고, 서반(西班)이 상장군(上將軍)·대장군(大將軍)에서 대장(隊長)·대부(隊副)까지가 4천 1백 70여 인이니, 문무(文武) 관리의 수효가 진실로 중국 조정의 제도에 3배나 됩니다. 게다가, 성중관(成衆官)·상림원(上林園)·도화원(圖畫院)·사순(司楯)·사의(司衣)·사막(司幕)·사옹(司饔)·충용(忠勇)·근시부(近侍府)·내시부(內侍府)·액정서(掖庭署)·전악서(典樂署)·아악서(雅樂署)에 각각 녹관(祿官)이 있고, 검교(檢校)·산질(散秩)이 또한 그 수를 더하니, 녹봉의 부족한 것은 실로 이 때문입니다. 고려의 옛 제도에 중서령(中書令)에서 지문하(知門下)에 이르기까지가 모두 10원(員)이고, 판추밀(判樞密)에서 학사(學士)에 이르기까지가 모두 9원(員)이고, 상서령(尙書令)에서 좌·우원외랑(左右員外郞)에 이르기까지가 각품(各品)마다 1원(員)이었고, 개성부 윤(開城府尹)은 직질이 이조 전서(吏曹典書) 위에 오르나 양부(兩府)에는 참여하지 못하고, 그 하관(下官)은 각품(各品)에 각각 2원(員)씩 두었고, 육부(六部)에는, 이부(吏部)·공부(工部)가 상서(尙書) 이하 매 품(品)에 각각 1원(員)씩이고, 호부(戶部) 이하가 매 품에 각각 2원(員)씩이었고, 6시(六寺)[35]·7감(七監)[36]에는 판사(判事) 이하가 각품에 각각 1원(員)이었으니, 대개 이와 같았습니다. 서반(西班)에서는 상호군(上護軍)이 8인이고, 대호군(大護軍)이 16인이고, 친종(親從)이 3인이었고, 매 1영(一領)에 호군(護軍)이 1인이고, 중랑장(中郞將) 이하가 5원(員) 10장(將)[37]인데, 모두 42영(領)이었습니다. 그 나머지 아문(衙門)의 원리(員吏)의 수효도 또한 번다하지 않았으나, 직사를 폐(廢)하지 않게 하여서, 나라가 다스려지고 백성이 편안하여 4백여 년을 유지하였습니다.

근대(近代)에 이르러서 양부(兩府)의 수가 조금 옛날보다 증가하였으니, 공민왕(恭愍王)이 비로소 옛 제도를 무너뜨리고 육조(六曹)와 6시(六寺)·7감(七監)의 매 품에 각각 2원을 증원하였습니다. 서반(西班)의 직도 또한 옛날보다 증가하였습니다. 갑인년[38] 이후로 권신(權臣)이 정사를 마음대로 하여, 명기(名器)를 자기 사물(私物)로 보아 제 도당들을 죽 늘어놓으니, 양부(兩府)에 관직을 증설하고도 오히려 부족하여 또 상의(商議)를 설치하였습니다. 수가 많아서 십수명에 이르렀으나 경제(經濟)를 맡은 자는 시중(侍中) 2인(人)에 불과하였습니다. 이것은 모두 전하가 보고 들은 바입니다. 우리 태상(太上) 전하께서는 천운(天雲)에 응하여 개국하여서 법을 세우고 기강(紀綱)을 베풀어 용관(冗官)을 혁파하고자 하였으나, 다만 초창기(草創期)임으로 인하여 근로(勤勞)한 사람을 대접하는 것 때문에 다 고치지 못하고 오늘에 이르러서, 매년 녹(祿)을 나누어 줄 때에 항상 넉넉지 못한 것입니다. 대저 식량의 저축은 나라의 큰 계책인데, 지금 군량으로 녹봉(祿俸)에 충당하니, 심히 나라를 위하는 방도가 아닙니다. 우리 나라가 바다 밖에 있어서 절장보단(折長補短)하면 불과 천 리에 지나지 못하는데, 산천이 험조(險阻)하고 토지가 척박하여 조세(租稅)의 법을 중국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여러 창고(倉庫), 궁사(宮司), 각품(各品)의 과전(科田), 각사(各司)의 공해전(公廨田), 원(院)·관(館)·진(津)·역(驛)의 수전(受田), 군자(軍資)의 소속, 외관(外官) 3백여 원(員)의 늠급(廩給) 외에, 경관(京官)의 녹이 거의 10만 석이나 됩니다. 녹봉이 항상 부족한 것을 걱정하게 되고 군자(軍資)가 저축되지 못하는 것이, 어찌 용관(冗官)이 태거(汰去)되지 않고 산질(散秩)이 오히려 많은 까닭이 아니겠습니까? 전(傳)에 말하기를, ‘군자(君子)가 없으면 야인(野人)을 다스릴 수 없고, 야인이 없으면 군자를 봉양할 수 없다.’ 하였습니다. 남을 다스리는 자는 남으로부터 얻어 먹고, 남에게 다스림을 받는 자는 남을 먹여 살리는 것이니, 군자(君子)와 소인(小人)이 비록 존비(尊卑)의 등급은 있으나, 실상 서로 돕는 것입니다. 어찌 일 없이 앉아 먹기만 하여 백성의 이익을 누릴 수 있겠습니까? 검교(檢校)의 직은 그 수효를 증가하여 많기가 수십 인에 이르는데, 관(官)에 사진(仕進)하지 않고 집에 있으면서 녹을 먹으니, 이것은 바로 일 없이 백성의 봉양하는 것을 누리는 것입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깊이 생각하고 널리 염려하여, 양부(兩府)는 일체 고려의 옛 제도에 의하고, 상의(商議)는 모두 없애소서. 한성부(漢城府)는 땅[土]을 맡은 관원이므로 양부(兩府)에 참렬(參列)할 수 없는데, 지금 하는 일 없이 묘당(廟堂)에 앉아 있으니, 조정을 높이고 명실(名實)을 중하게 하는 소이(所以)가 아닙니다. 청하건대, 판사(判事)를 혁파하고 다만 1윤(尹)만 두어서 옛 제도를 회복하고, 품질은 이조 전서(吏曹典書)의 위에 오르게 하며, 육조(六曹)는 각각 전서(典書) 1원(員)을 감하고, 나머지는 모두 그대로 두며, 6시(六寺)·7감(七監)은 판사(判事)와 경(卿)·감(監)을 각각 1원(員)씩 감하고, 4품(品) 이하는 예전대로 하소서. 서반(西班)은 고려의 42도부(都府)의 제도에 의하여, 매양 1영(領)에 각각 5원(員) 10장(將)을 두고, 대장(隊長)·대부(隊副)는 모두 그 액수 그대로 하고, 기타 긴요하지 않은 경관(京官)과 신설한 성중 애마(成衆愛馬)의 녹관(祿官), 상림원(上林園)·도화원(圖畫院)·상의원(尙衣院)의 녹관 등과 외방의 주현(州縣)은 특별히 도당(都堂)에 명하여 상량 의논해서 없앨 것은 없애고, 합병할 것은 합병하며, 나이 늙은 훈구(勳舊)로서 수직(授職)할 수 없는 70세 이상의 사람은, 청하건대, 고려의 제도에 의하여 그대로 치사(致仕)하게 해서 녹을 허비하지 않게 하며, 검교(檢校)·산질(散秩)은 일절 모두 혁파하여, 공후(公侯)·종실(宗室)·공신(功臣) 외에 공이 없는 자는 봉군(封君)을 허락지 말고, 녹봉은 원액(原額)의 다소에 따라 수량을 계산하여 나누어 주어서, 군자(軍資)를 꾸어서 충당하는 일이 없게 할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면, 조정이 높아지고 관작이 귀하여지며, 용원(冗員)이 줄어들고 녹봉이 넉넉하여져서, 백성은 수운(輸運)하는 수고가 덜리고 나라에는 축적하는 물자가 있을 것입니다."

소를 계달(啓達)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주(州)·부(府)·군(郡)·현(縣)의 혹 합병하고 혹 없애는 일은 내가 이미 영(令)을 내렸고, 양부(兩府) 백사(百司)의 원수(員數)를 줄이는 일은 지금 초창(草創) 시기를 당하여 갑자기 시행할 수 없다."

하였다.


경연에서 인군의 학문에 대해 중추원 사 전백영이 아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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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御經筵。 中樞院事全伯英言於上曰: “人君之學, 莫如《尙書》。 然《五誥》、《盤庚》、《禹貢》等篇, 有佶屈難讀處, 不必進講也。 若《大學》一部, 格致誠正絜矩之道, 實帝王爲治之法也。” 上然之。

경연(經筵)에 나아갔다. 중추원 사(中樞院事) 전백영(全伯英)이 임금에게 말하기를,

"인군의 학문은 《상서(尙書)》[39] 같은 것이 없으나, 오고(五誥)와 반경(盤庚)·우공(禹貢) 등의 글이 난삽(難澁)하여 읽기 어려운 곳이 있으니, 반드시 진강(進講)할 것이 없습니다. 《대학(大學)》 일부(一部)의 격치(格致)·성정(誠正)·혈구(絜矩)의 도 같은 것은 실로 제왕의 다스림을 영위하는 법입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사병을 혁파하니, 병권을 잃은 자들의 불만이 노출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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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罷私兵。 司憲府兼大司憲權近、門下府左散騎金若采等交章上疏曰:

兵權, 國家之大柄, 當有統屬, 不可散主。 散主無統, 是猶太阿倒持, 授人以柄, 難可以制。 故典兵者衆, 各樹徒黨, 其心必異, 其勢必分, 交相猜貳, 以成禍亂。 同氣之相殘, 功臣之不保, 恒由於此, 古今之通患也。 故孔子曰: “古者家不藏甲”, 言無私兵也; 《禮記》曰: “兵革藏於私家, 非禮也。 是謂脅君”, 言人臣而有私兵, 則必至於强僭, 以脅其君也。 聖人立法垂訓, 以防後患, 可謂至矣。 昔宋太祖卽位之初, 從容談笑, 能解功臣兵權, 使得保全, 可謂後世之法矣。 魯之三家, 晋之六卿, 漢末之群雄竝起, 唐季之藩鎭跋扈, 皆蓄私兵, 以構其亂, 亦可爲後世之戒矣。 惟我太上王, 開國之初, 特置義興三軍府, 專掌兵權, 規模宏遠, 而時議者以爲: “革命之初, 人心未定, 當備不虞之變。 宜令勳親, 各典私兵, 以應倉卒。” 由是私兵未能盡除, 而典兵者反謀扇亂, 禍在不測, 幸賴上天啓佑殿下, 靖亂定社。 式至今日, 私兵之置, 尙復如古, 因循未除。 臺諫已嘗上章請罷, 殿下以宗親勳臣, 可保無他, 使復典之, 未幾, 蕭墻之禍, 發於至親。 由是觀之, 私兵之置, 徒以生亂, 未見其益, 臺諫之言, 今已驗矣。 然私門之兵, 今亦未罷, 將來之禍, 誠不可不慮也。 又況外方各道軍馬, 分屬諸節制使, 或稱侍衛, 或稱別牌及私伴儻, 番上之煩, 徵發之擾, 其弊甚多, 陪從之衆, 田獵之數, 其勞亦極。 人飢馬困, 暴露雨雪, 直宿私門, 衆心怨咨, 甚可憫也。 方今巨弊, 莫甚於此。 願自今, 悉罷各道留京諸節制使, 以京外軍馬, 盡屬三軍府, 以爲公家之兵, 以立體統, 以重國柄, 以攝人心。 除兩殿宿衛外, 私門直宿, 一皆禁斷; 朝路毋令私伴, 持兵根隨, 以應古者家不藏兵之意, 以防後日交猜搆亂之端, 國家幸甚。

疏上, 上與世子議之, 卽令施行。 是日, 放諸節制使所領軍馬, 悉還其家。 李佇獵于平州未還, 三軍府遣人于佇, 使之速還。 居易父子與失兵權者皆怏怏, 日夜會聚, 多憤怨。

사병(私兵)을 혁파하였다. 사헌부 겸 대사헌(兼大司憲) 권근(權近)과 문하부(門下府) 좌산기(左散騎) 김약채(金若采) 등이 교장(交章)하여 상소하였다.

"병권(兵權)은 국가의 큰 권세이니, 마땅히 통속(統屬)함이 있어야 하고, 흩어서 주장할 수 없는 것입니다. 흩어서 주장하고 통속함이 없으면, 이것은 태아(太阿)[40]를 거꾸로 쥐고 남에게 자루를 주는 것과 같이 제어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군사를 맡은 자가 많으면, 각각 도당을 심어서 그 마음이 반드시 달라지고, 그 형세가 반드시 나뉘어져서, 서로서로 시기하고 의심하여 화란(禍亂)을 이루게 됩니다. 동기(同氣) 간에 서로 해치고 공신(功臣)이 보전하지 못하는 것이 항상 여기에서 비롯되니, 이것이 고금의 공통된 근심입니다. 그러므로, 공자(孔子)가 말하기를, ‘예전에는 집에 병기(兵器)를 감추지 않았다.’ 하였으니, 사병(私兵)이 없었다는 것을 말한 것이요, 《예기(禮記)》에 말하기를, ‘병혁(兵革)을 사가(私家)에 감추는 것은 예(禮)가 아니다. 이것이 인군을 협박하는 것이라 이른다.’ 하였으니, 인신(人臣)이 사병(私兵)이 있으면, 반드시 강포(强暴)하고 참람(僭濫)하여져 임금을 위협하는 데 이르는 것입니다. 성인(聖人)이 법을 세우고 교훈을 남기어 후환(後患)을 막은 것이 지극하다 하겠습니다. 옛날 송(宋)나라 태조(太祖)가 즉위하던 처음에, 조용히 담소(談笑)하면서 능히 공신의 병권을 해제하여 그들로 하여금 보전(保全)할 수 있게 하였으니, 후세의 규범이 될 수 있다 하겠습니다. 노(魯)나라의 삼가(三家)[41]와 진(晉)나라의 육경(六卿)[42]과 한(漢)나라 말년에 군웅(群雄)이 함께 일어난 것과 당(唐)나라 말년에 번진(藩鎭)이 발호(跋扈)한 것이 모두 사병을 길러서 난을 꾸민 때문이었으니, 또한 후세의 경계가 될 만합니다.

우리 태상왕(太上王)께서 개국하던 처음에 특별히 의흥 삼군부(義興三軍府)[43]를 설치하여 오로지 병권을 맡게 하니, 규모가 굉원(宏遠)하였습니다. 그때에 의논하는 자들이 말하기를, ‘혁명(革命)하는 초기에 인심이 정하여지지 않았으니, 마땅히 불우(不虞)의 변(變)을 방비해야 합니다. 훈신(勳臣)·종친(宗親)으로 하여금 각각 사병(私兵)을 맡게 하여 창졸(倉卒)의 일에 대응하여야 합니다.’ 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사병을 다 없애지 못하였는데, 군사를 맡은 자가 도리어 난(亂)을 선동하기를 꾀하여 화가 불측한 지경에 있었으나, 다행히 하늘이 전하를 인도하고 도와주어 난을 평정하고 사직을 안정시켰습니다. 오늘날에 이르러서도 사병을 두는 것을 오히려 전과 같이 하고 인순(因循)하여 해제하지 않으므로, 대간(臺諫)이 이미 일찍이 글장을 올려 파하기를 청하였습니다. 전하께서는 종친과 훈신은 다른 마음이 없는 것을 보증할 수 있다 하여, 다시 군사를 맡기게 하였는데, 얼마 되지 않아서 소장(蕭墻)의 화가 지친(至親)에서 발생하였습니다. 이것으로 본다면, 사병을 두는 것은 한갓 난(亂)만 일으키고 그 이익은 보지 못하는 것이니, 대간(臺諫)의 말이 이제 이미 들어맞았습니다. 그러나, 사문(私門)의 군사를 지금도 역시 파하지 않으니, 장래의 화를 참으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 더구나 외방 각도의 군마(軍馬)를 여러 절제사(節制使)에게 나누어 소속시켜, 혹은 시위(侍衛)라 칭하고, 혹은 별패(別牌), 사사 반당(伴儻)이라 칭하여, 번거롭게 번상(番上)하고 소란하게 징발(徵發)해서 그 폐단이 심히 많으며, 배종(陪從)이 많고 전렵(田獵)이 잦아서 그 수고로움이 또한 지극합니다. 사람은 굶주리고 말은 지쳤으며, 비와 눈을 마구 맞아가며 사문(私門)에 숙직하므로, 군중의 마음이 원망하고 탄식하니, 심히 민망한 일입니다. 지금의 큰 폐단이 이것보다 더 심한 것이 없습니다. 원하건대, 이제부터 서울에 머물러 있는 각도의 여러 절제사(節制使)를 모조리 혁파하고, 서울과 외방의 군마를 모두 삼군부(三軍府)에 붙이어 공가(公家)의 군사를 삼아서, 체통(體統)을 세우고 국권을 무겁게 하고, 인심을 편안케 할 것입니다. 양전(兩殿)의 숙위(宿衛)를 제외하고는, 사문(私門)의 숙직은 일절 모두 금단(禁斷)하고, 조회하는 길에도 사사 반당(伴儻)으로 하여금 병기를 가지고 근수(根隨)하는 일이 없게 하여, 예전의 집에 병기를 감추지 않는다는 뜻에 응하고, 후일에 서로 의심하여 난을 꾸미는 폐단을 막으면, 국가에 심히 다행하겠습니다."

소(疏)가 올라가니, 임금이 세자와 더불어 의논하고, 곧 시행하게 하였다. 이날 여러 절제사가 거느리던 군마를 해산하여 모두 그 집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이저(李佇)가 평주(平州)에서 사냥하다가 아직 돌아오지 않으니, 삼군부(三軍府)에서 이저에게 사람을 보내어 빨리 돌아오게 하였다. 이거이(李居易) 부자와 병권을 잃은 자들은 모두 앙앙(怏怏)하여, 밤낮으로 같이 모여서 격분하고 원망함이 많았다.


문하 시랑찬성사 하윤에게 명하여 관제를 다시 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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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命門下侍郞贊成事河崙, 更定官制。 改都評議使司爲議政府, 改中樞院爲三軍府。 職掌三軍者, 專仕三軍, 不得坐議政府。 改左右僕射爲左右使, 復(致)〔置〕藝文館太學士一員、學士二員。 改中樞院承旨爲承政院承旨, 改都評議使司錄事爲議政府錄事, 中樞院堂後爲承政院堂後。 以趙浚爲平壤伯, 李和領三司事判議政府事, 李居易判(門下府)議政府事, 成石璘判議政府事, 閔霽判議政府事。 改石璘功臣號爲同德贊化, 霽同德佐命, 竝加錄軍國重事。 鄭擢藝文春秋館太學士。 都摠制以下, 不得兼議政府事。 鄭矩承政院都承旨。 先是, 臺省復上交章曰:

兵權不可散而無統, 亦不可偏而獨專。 散而無統, 則其威分, 偏而獨專, 則其權移。 威分於人, 權移於下, 其生亂一也。 臣等前日上章, 請罷私兵, 屬三軍府, 以防威分之弊, 卽蒙兪允, 衆心欣慶。 然以重兵歸之一府, 則偏專權移之患, 不可不預爲之防也。 臣等謹按, 古者兵法之設, 有發命發兵掌兵之差。 發命者, 宰相也; 發兵者, 居中摠制也; 掌兵者, 受命以行者也。 宰相非稟君上之命, 不得發命; 摠制非有宰相之命, 不得發遣; 掌兵者非有摠制之命, 不得以行。 上下相維, 體統不亂, 雖欲爲變, 莫能自動, 此定法也。 前朝舊制, 取法唐、宋, 省宰掌邦治, 軍國之事, 無所不統, 卽發命者也; 中樞掌軍機, 卽摠制發兵者也; 諸衛上、大將軍已下, 專掌府兵, 以當宿衛, 有變小則遣郞中郞將, 大則遣將軍已上, 出而應敵, 未嘗敗衄, 此則掌兵者也。 事元以後, 國家多務, 省宰中樞, 會而議事, 謂之兩府合坐, 因置都評議使司。 忠烈已後, 府兵漸毁, 始遣宰相, 領兵應敵, 非古制也。 惟我太祖開國之初, 兩府合坐, 沿襲不革, 置義興三軍府, 專掌軍務。 由是宰相, 不得聞軍政, 中樞不得掌軍機, 有乖古法。 中樞之官, 實爲虛器, 員多位高, 徒受祿俸而已。 願自今罷中樞, 以三軍府爲祿官, 省宰已上可兼者, 卽兼節制, 其祿官則依中樞例, 知三軍、同知三軍、簽書、學士各一員, 皆以或文或武, 善謀能斷者爲之, 帶使司銜合坐, 與議軍國之政。 凡有軍事, 使司承稟上命, 移三軍府, 以應宰相發命之法。 諸節制使, 除省宰兼外, 三軍各一爲祿官。 雖曾經中樞, 位在知同知之上, 然只爲一軍節制, 非統三軍之比, 不許帶使司銜, 直坐本府, 以治京外軍務, 以尊摠制之職。 諸衛上、大將軍, 合屬三軍府, 以供其事; 諸節制使與上、大將軍以下, 分番宿衛, 以備不虞, 以供掌兵之任, 有變則節制以下, 受命而行。 如此則旣有統屬而威不分, 亦難獨專而權不移, 名實相孚, 體統尊嚴, 實可爲子孫萬世之令典也。

嘉納之。

문하 시랑찬성사(門下侍郞贊成事) 하윤(河崙)에게 명하여 관제(官制)를 다시 정하게 하였다.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를 고쳐 의정부(議政府)로 하고, 중추원(中樞院)을 고쳐 삼군부(三軍府)로 하여, 직임이 삼군(三軍)을 맡은 자(者)는 삼군에만 전적으로 나가게 하고, 의정부에는 참예하지 못하게 하고, 좌복야(左僕射)·우복야(右僕射)를 고쳐 좌사(左使)·우사(右使)로 하고, 다시 예문관(藝文館)의 태학사(太學士) 1원(員)·학사(學士) 2원(員)을 두고, 중추원 승지(中樞院承旨)를 고쳐 승정원 승지(承政院承旨)로 하고, 도평의사사 녹사(都評議使司錄事)를 고쳐 의정부 녹사(議政府錄事)로 하고, 중추원 당후(中樞院堂後)를 승정원 당후(承政院堂後)로 하였다. 조준(趙浚)으로 평양백(平壤伯)을 삼고, 이화(李和)로 영삼사사(領三司事) 판의정부사(判議政府事)를 삼고, 이거이(李居易)로 판문화부 의정부사(議政府事)를 삼고, 성식린(成石璘)으로 판의정부사(判議政府事)를 삼고, 민제(閔霽)로 판의정부사를 삼고, 성석린의 공신호를 고쳐 동덕 찬화(同德贊化)라 하고, 민제를 동덕 좌명(同德佐命)이라 하고, 아울러 녹군국중사(錄軍國重事)를 가(加)하고, 정탁(鄭擢)으로 예문춘추관(藝文春秋館) 태학사(太學士)를 삼고, 도총제(都摠制) 이하는 의정부사(議政府事)를 겸하지 못하게 하고, 정구(鄭矩)를 승정원(承政院) 도승지(都承旨)로 삼았다.

이보다 앞서 대성(臺省)에서 다시 교장(交章)을 올려 말하였다.

"병권은 흩어서 통속이 없게 할 수 없고, 또한 치우쳐서 혼자 전장(專掌)하게 할 수가 없습니다. 흩어져서 통속이 없으면 그 위엄이 나누어지고, 치우쳐서 혼자 전장하면 그 권세가 옮겨지니, 위엄이 사람에게 나뉘어지거나 권세가 아래에 옮겨지면, 난(亂)을 일으키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신 등이 전일에 글장을 올려 사병(私兵)을 혁파해서 삼군부(三軍府)에 붙여 위엄이 나뉘어지는 폐단을 막기를 청하였는데, 곧 유윤(兪允)을 받았으므로 여러 사람이 마음으로 기뻐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군사를 한 부(府)에 돌린다면, 치우쳐서 맡게 하거나 권세가 옮겨지는 근심을 미리 막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신 등이 삼가 상고하건대, 예전에 병법의 설치에는 명령을 발하고 군사를 발하고 군사를 맡는 차등이 있었습니다. 명령을 발하는 자는 재상이요, 군사를 발하는 자는 중간에 있는 총제(摠制)이요, 군사를 맡는 자는 명령을 받아서 행하는 자였습니다. 재상은 임금의 명령을 품(稟)한 것이 아니면 명령을 발하지 못하고, 총제는 재상의 명령이 있는 때가 아니면 군사를 발하지 못하고, 군사를 맡은 자는 총제의 명령이 있는 때가 아니면 행(行)할 수가 없었습니다. 상하(上下)가 서로 유지(維持)하여 체통이 문란하지 않았으므로, 비록 변을 꾸미고자 하더라도 능히 스스로 움직일 수가 없었습니다. 이것이 정해진 법이었습니다. 고려의 옛 제도는 당(唐)나라·송(宋)나라를 본받았는데, 성재(省宰)는 나라의 정치와 군국(軍國)의 일을 맡아서 통속하지 않은 바가 없었으므로 곧 명령을 발하는 자이요, 중추(中樞)는 군기(軍機)를 맡았으므로 곧 총제(摠制)하여 군사를 발하는 자이요, 여러 위(衛)의 상장군(上將軍)·대장군(大將軍) 이하는 부병(府兵)을 전장(專掌)하여 숙위(宿衛)를 맡아서, 변이 있을 때 작으면 낭중(郞中)·낭장(郞將)을 보내고, 크면 장군(將軍) 이상을 보내어 적(敵)에 대응케 해서 일찍이 패배한 적이 없었으니, 이것이 군사를 맡는 자입니다. 원(元)나라를 섬긴 이후로 국가에 일이 많아서 성재(省宰)와 중추(中樞)가 모여 일을 의논하였는데, 이것을 양부 합좌(兩府合坐)[44]라 하였고, 인하여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를 두었습니다. 충렬왕(忠烈王) 이후에 부병(府兵)이 점점 무너져서, 비로소 재상을 보내어 군사를 거느리고 적에 대응하였으니, 옛 제도가 아닙니다. 우리 태조(太祖)께서 개국한 처음에 양부 합좌하는 것을 인습하여 고치지 않고서, 의흥 삼군부(義興三軍府)를 두어 군무(軍務)를 전장(專掌)하게 하였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재상은 군정(軍政)을 듣지 못하고, 중추(中樞)는 군기(軍機)를 맡지 못하니, 옛 법에 어그러지는 것입니다. 중추(中樞)의 벼슬이 실상 허직(虛職)이 되어, 인원은 많고 위계(位階)는 높아서 한갖 녹봉만 받을 뿐입니다.

원하건대, 이제부터 중추(中樞)를 혁파하고 삼군부(三軍府)로 녹관(祿官)을 삼아서, 성재(省宰) 이상으로서 겸직할 수 있는 자는 곧 절제(節制)를 겸직하고, 녹관은 중추(中樞)의 예에 의하여 지삼군(知三軍)·동지 삼군(同知三軍)·첨서(簽書)·학사(學士) 각각 1원(員)으로 하되, 모두 문관이나 혹은 무관 중에서 잘 모획(謀畫)하고 능하게 판단하는 자로 시켜서, 사사(使司)의 직함을 띠고 합좌(合坐)하여 군국(軍國)의 정사를 더불어 의논하게 할 것입니다. 무릇 군(軍)에 관한 일이 있으면 사사(使司)에서 임금의 명령을 품(稟)하여 받아서 삼군부(三軍府)에 옮겨, 재상이 명령을 발하는 법에 응하게 할 것입니다. 여러 절제사(節制使)는 성재(省宰)가 겸직하는 것을 제외하고, 삼군(三軍)에 각각 1인을 녹관(祿官)으로 하여, 비록 중추(中樞)를 지내어 위차(位次)가 지(知)·동지(同知)의 위에 있더라도 다만 1군(軍)만 절제(節制)하게 하고, 삼군(三軍)을 통솔할 만한 정도는 아니오니, 사사(使司)의 직함을 띠는 것을 허락하지 말고, 직접 본부(本府)에 앉아 서울과 외방의 군무(軍務)를 다스리게 하여, 총제(摠制)의 직책을 존중하게 할 것입니다. 여러 위(衛)의 상장군(上將軍)·대장군(大將軍)은 합하여 삼군부(三軍府)에 붙이어 그 일에 이바지하게 할 것입니다. 여러 절제사와 상장군·대장군 이하는 번(番)을 나누어 숙위(宿衛)하여 불우(不虞)의 변에 대비하고, 군사를 맡는 직임에 이바지하게 하되, 변이 있으면 절제(節制) 이하가 명령을 받아서 나가게 할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이미 통속이 있어서 위엄이 나뉘어지지 않고, 또한 혼자 전장(專掌)하기 어려워져서 권세가 옮겨지지 않으므로, 이름과 실상이 서로 부합하고, 체통(體統)이 존엄하여져서, 실로 자손 만대의 아름다운 법이 될 것입니다."

임금이 가납(嘉納)하였다.


노한으로 공조 의랑을 삼고, 전이로 사헌부 시사를 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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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以盧閈爲工曹議郞, 田理爲司憲侍史。 初, 閈爲侍史, 理爲議郞, 世子復于上曰: “霽爲政丞, 以其壻閈爲憲官, 於義不便。” 從之, 換其職。

노한(盧閈)으로 공조 의랑(工曹議郞)을 삼고, 전이(田理)로 사헌 시사(司憲侍史)를 삼았다. 처음에 노한이 시사가 되고 전이가 의랑이 되었는데, 세자(世子)가 임금에게 여쭈기를,

"민제(閔霽)가 정승이 되었는데, 그 사위 노한으로 헌관(憲官)을 삼으니 사리에 불편합니다."

하니, 그대로 따라서 그 직(職)을 바꾸었다.


4月 17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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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게 우박이 내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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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壬子/大雨雹。

크게 우박이 내렸다.


4月 18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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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산의 돌이 무너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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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癸丑/華藏山石崩。

화장산(華藏山)의 돌이 무너졌다.


판문하부사 이거이로 판상서사사를 겸임시키고 일부 직제를 개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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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以判門下府事李居易, 兼判尙瑞司事。 藝文春秋館太學士學士三軍摠制, 皆兼議政府。 居易以門下侍郞, 超遷判門下, 猶以不得爲政丞, 殊怏怏, 謂人曰: “吾年歲未暮, 雖陞判門下, 如戴釜入深淵。” 其兄居仁聞之歎息, 宣言於人曰: “居易不度其才德, 但以功臣及其子之寵, 嘗有心於政丞, 故其言如此。”

판문하부사(判門下府事) 이거이(李居易)로 판상서사사(判尙瑞司事)를 겸하게 하고, 예문 춘추관(藝文春秋館) 태학사(太學士)·학사(學士)와 삼군 총제(三軍摠制)가 모두 의정부를 겸하게 하였다. 이거이가 문하 시랑(門下侍郞)으로 판문하에 뛰어 승천하였는데, 오히려 정승이 되지 못한 것을 불만스럽게 여기어, 다른 사람에게 말하기를,

"내가 나이 아직 늙지 않았다. 비록 판문하(判門下)에 승진하였으나, 솥[釜]을 이고 깊은 연못에 들어가는 것 같다."

하였다. 그 형 이거인(李居仁)이 듣고 탄식하여 사람들에게 두루 말하였다.

"이거이가 제 재주와 덕을 헤아리지 않고, 다만 공신인 것과 그 아들이 임금에게 사랑 받는 것으로써 정승에 마음이 있기 때문에, 그 말이 이와 같다."


사병 혁파에 불만을 표시한 참판삼군부사 조영무를 황주에 귀양보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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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流參判三軍府事趙英茂于黃州。 初臺諫劾英茂及參贊門下府事趙溫、知三軍府事李天祐等, 遣吏守其家。 交章上言曰:

兵權不可散主, 當有體統, 故頃者, 臣等交章請罷私兵, 殿下兪允施行, 以京外軍馬, 盡屬三軍府, 臣民罔不欣慶。 此實慮患防危, 爲宗社萬世之大計也。 今趙英茂, 當三軍府收取兵器之時, 不卽輸納, 歐傷三軍府使令, 其軍官牌記, 累日不送, 多匿私伴。 又於世子以革兵之故, 輕發不遜之言, (頡頑)〔頡頏〕致問, 聚會陰謀, 欲扇禍亂。 天祐、趙溫等, 亦皆不卽輸納牌記, 累日淹延, 擅減軍目, 聚謀不道。 右英茂等, 俱爲功臣, 當以國家大體爲慮, 下旨之日, 所有軍目軍器, 卽還公家, 慮不及此, 反懷怏鬱, 不從王旨, 私蓄軍兵, 爲謀不測。 若不早圖, 安知有尾大不掉之患哉? 其無君陰詭之罪, 不可不治。 伏惟殿下, 深思長慮, 卽賜兪允, 將英茂、天祐、溫, 收其告身, 鞫問其罪, 依律施行, 以杜亂源。

不從。 是日, 臺諫再上疏曰:

臣等以英茂、天祐、溫等, 革私兵之後, 私匿軍兵, 聚會陰謀, 具疏以聞, 殿下不卽兪允, 臣等不勝隕越。 竊以爲君令臣行, 禮之大者。 苟無禮焉, 何以爲君臣, 何以爲國家! 殿下以國家大計, 革私兵, 悉屬三軍府。 今英茂等, 不思殿下經遠之計, 以失兵權爲憾, 乃懷憤怨之心, 不從王旨, 軍目兵器, 不卽輸納, 擅抶三軍府持牒使令, 聚會陰謀, 其漸難測。 況以不遜之言, 抗於世子, 其犯禮陵僭之狀, 亦已明矣。 人臣而至於此, 得蒙寬恕, 臣等竊恐堅氷之患將至, 而跋扈之心, 無所懲矣。 伏惟殿下, 一依前疏所聞罪狀條件, 斷以大義。

上以功臣, 又不從。 是日, 臺諫又上疏曰:

臣等以英茂等所犯之事, 關於大體, 請治其罪, 殿下以功臣之故, 不卽兪允, 臣等惶恐隕越, 不能自已, 再瀆天聰。 賞罰不明, 則爲善者無所勸, 爲惡者無所懲, 故善爲國者, 必以賞罰爲重。 殿下以英茂等, 有功王室, 報以厚賞而富貴之, 賞則大矣, 今恃功陵僭, 遂干不臣之罪, 而罰乃不加。 殿下雖以功臣, 可保無他, 至誠相與, 而不虞之變, 每出於功臣之手。 若議功輕宥, 則人人益生專恣, 無所畏懼, 不唯不得保全其身, 而國家將亦必有禍亂矣。 伏惟殿下, 依前疏所聞, 削職鞫問, 依律論罪, 以杜亂源。

上曰: “英茂所犯爲重, 可流外方。 天祐、溫, 其勿復論。”

참판삼군부사(參判三軍府事) 조영무(趙英茂)를 황주(黃州)에 귀양보냈다. 처음에 대간(臺諫)에서 조영무와 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 조온(趙溫)·지삼군부사(知三軍府事) 이천우(李天祐) 등을 탄핵하여, 서리를 보내어 그 집을 지키게 하고, 교장(交章)하여 상언(上言)하였다.

"병권은 흩어서 주장할 수 없고, 마땅히 체통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지난번에 신 등이 사병(私兵)을 혁파하기를 청하였는데, 전하가 유윤하시고 시행하여 서울과 외방의 군마를 모두 삼군부(三軍府)에 붙였으니, 신민(臣民)들이 기뻐하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 이것이 환란을 염려하고 위태한 것을 막는 것이므로, 종사(宗社) 만세의 큰 계책이 되는 것입니다. 지금 조영무(趙英茂)가 삼군부(三軍府)에서 병기(兵器)를 거둬들일 때를 당하여 즉시 수납(輸納)하지 않고, 삼군부 사령(使令)을 구타하여 상하게 하고, 그 군관(軍官)의 패기(牌記)[45]를 여러 날 동안 보내지 않고, 많은 사사 반당(伴儻)을 숨기었습니다. 또 세자(世子)에게 군사를 혁파하는 까닭으로 하여 경솔하게 불손한 말을 하면서 옥신각신 힐난하고, 서로 모여서 음모하여 화란(禍亂)을 선동하려 하였습니다. 이천우·조온 등도 또한 모두 패기(牌記)를 곧 수납하지 않고 여러 날을 끌면서 임의로 군목(軍目)을 감하고, 모이어 부도한 일을 꾀하였습니다. 위의 조영무 등은 모두 공신이니, 마땅히 국가의 대체(大體)를 생각하여 교지(敎旨)를 내리던 날에 가지고 있던 군목(軍目)·군기(軍器)를 즉시 공가(公家)에 돌려야 할 터인데, 생각이 여기에 미치지 않고 도리어 불평 불만을 품어 왕지(王旨)를 좇지 않고, 사사로 군병(軍兵)을 감추고 있으니, 도모하는 바가 불측합니다. 만일 일찍 도모하지 않으면, 꼬리가 커져 흔들지 못하는 근심이 있을지 어찌 알겠습니까? 그 임금을 무시하고 음흉 간사한 죄를 다스리지 않을 수 없으니, 엎드려 바라건대, 전하께서 깊이 생각하고 멀리 염려하여 곧 유윤(兪允)을 내리시고, 조영무·이천우·조온은 그 고신(告身)을 거두고 그 죄를 국문하여, 율에 따라 시행해서 난의 근원을 막으소서."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

이날에 대간(臺諫)이 다시 상소하였다.

"신 등이, 조영무·이천우·조온 등이 사병(私兵)을 혁파한 뒤에 사사로 군병을 숨기고, 모여서 음모한 사실을 소(疏)로 갖추어 아뢰었사온데, 전하께서 즉시 유윤(兪允)하지 않으시니, 신 등은 간절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가만히 생각하건대, 임금이 명령하면 신하가 행하는 것이 예(禮)의 큰 것이니, 만일 예가 없으면 어떻게 군신(君臣)이 될 수 있으며, 어떻게 국가가 될 수 있겠습니까? 전하가 국가의 대계(大計)로 사병(私兵)을 혁파하여 모두 삼군부(三軍府)에 붙이었는데, 지금 조영무 등이 전하의 원대한 계책을 생각지 않고 병권을 잃는 것을 한스럽게 여겨, 분하고 원망하는 마음을 품어서 왕지(王旨)에 따르지 않고, 군목(軍目)과 병기(兵器)를 곧 수납(輸納)하지 않고, 마음대로 삼군부(三軍府)의 공문[牒]을 가지고 간 사령(使令)을 때리고, 서로 모여서 음모하였으니, 그 조짐을 측량하기 어렵습니다. 하물며, 불손한 말로 세자(世子)에게 반항하였으니, 그 예(禮)를 범하고 능멸하고 참람한 죄상이 또한 이미 밝게 나타났습니다. 신하로서 이 지경에 이르는데 너그럽게 용서함을 얻는다면, 신 등은 두렵건대, 견빙(堅氷)의 근심이 장차 이르고, 발호(跋扈)하는 마음을 징계할 바가 없을 것입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한결같이 전의 상소에서 아뢴 바 죄상 조건에 의하여 대의(大義)로 결단하소서."

임금이 공신이라 하여 또 들어주지 아니하였다.

이날에 대간이 또 상소하였다.

"신 등은 조영무 등이 범한 일이 대체(大體)에 관계되므로 그 죄를 다스리기를 청하였사온데, 전하께서 그들이 공신이라 하여 유윤하지 않으시니, 신 등이 황공하고 간절함을 스스로 그치지 못하여 다시 천총(天聰)을 더럽힙니다. 상벌이 밝지 않으면, 착한 일을 하는 자를 권면할 바가 없고, 악한 짓을 하는 자를 징계할 바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나라를 잘 다스리는 이는 반드시 상벌을 중(重)하게 하였습니다. 전하께서 조영무 등이 왕실에 공이 있다 하여 후한 상으로 보답해서 부귀하게 하시니, 상은 큽니다. 지금 공을 믿고 능멸하고 참람하여 신하로서 하지 못할 죄를 범했는데, 벌을 가하지 않으시니, 전하가 비록 공신(功臣)은 다른 마음이 없는 것을 보증할 수 있다 하여, 지성으로 돕고 허여(許與)하시나, 불우(不虞)의 변은 매양 공신의 손에서 나옵니다. 만일 공(功)을 논하여 가볍게 용서하시면, 사람사람이 더욱 전횡(專橫) 방자한 마음을 내어 두려워하는 것이 없을 것이니, 제 몸을 보전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국가에도 장차 반드시 화란이 있을 것입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전의 상소에서 아뢴 바에 의하여 삭직(削職)하고 국문해서, 율에 따라 논죄하여 난의 근원을 막으소서."

임금이 말하였다.

"조영무는 범한 것이 중하니 외방에 귀양보낼 만하고, 이천우와 조온은 다시 의논하지 말라."


사병 혁파에 불만을 표시한 지삼군부사 이천우와 참찬문하부사 조온을 파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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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罷知三軍府事李天祐、參贊門下府事趙溫職。 臺諫又上疏請英茂、天祐、溫等罪至于再, 上皆不允。 於是, 臺諫俱進闕庭固請, 上亦不從, 臺諫皆以不得言責呈辭。 上見之, 驚曰: “臺省何至此耶?” 卽召世子問曰: “臺省以予不從其言, 皆辭職而退。 處之如何?” 世子曰: “諫官之言, 不可不從。” 上意乃決, 遂召臺省, 令都承旨鄭矩傳旨曰: “向者卿等所啓, 不爲不是, 但以二人勳親之故, 不忍遽決。 予當從之, 卿等亦當就職。” 遂還其狀, 乃免天祐、溫官。 世子謂諫議徐愈曰: “近日英茂、趙溫、天祐之事, 處決無乃難乎? 言官等上疏以爲: ‘英茂、天祐等, 陰謀聚會。’ 果如其言, 鞫問戒後, 事理當然, 但其陰謀與否, 不可灼知。 上以故不獲已, 姑從輕典, 止罷其職, 以保功臣。” 愈對曰: “臣等職在諫諍, 不敢緘默。 近日殿下之處決, 乃聖人之權道也。”

지삼군부사(知三軍府事) 이천우(李天祐)와 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 조온(趙溫)을 파면하였다. 대간(臺諫)이 또 상소하여 조영무·이천우·조온 등의 죄를 청하여 두번에 이르렀으나, 임금이 모두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이에 대간이 함께 대궐 뜰에 나아가 굳이 청하였으나, 임금이 또 좇지 않으니, 대간이 모두 언관의 책임을 다할 수 없다 하여 사직서를 올렸다. 임금이 보고 놀라서 말하기를,

"대성(臺省)이 어찌 이렇게까지 하는가!"

하고, 곧 세자를 불러 묻기를,

"대성이 내가 그 말을 들어주지 않는다고 하여 모두 사직하고 물러갔으니, 어떻게 처리할꼬?"

하였다. 세자가 말하기를,

"간관의 말을 좇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였다. 임금의 뜻이 이에 결정되어, 드디어 대성(臺省)을 부르고 도승지(都承旨) 정구(鄭矩)를 시켜 전지(傳旨)하기를,

"지난번에 경들의 아뢴 바가 옳지 않은 것은 아니나, 다만 두 사람이 훈신(勳臣) 친척(親戚)인 때문에 차마 갑자기 결단하지 못하였다. 내가 마땅히 따르겠으니, 경들도 마땅히 직사에 나와야 한다."

하고, 드디어 그 사직서를 돌려주고, 이어서 이천우와 조온의 관직을 파면하였다. 세자가 간의(諫議) 서유(徐愈)에게 이르기를,

"근일에 조영무·조온·이천우의 일은 처결하기가 어렵지 않은가? 언관(言官)들이 상소하여 말하기를, ‘조영무·이천우 등이 음모하고 모였다.’ 하니, 과연 그 말과 같다면 국문(鞫問)하여 후일을 경계하는 것이 사리에 당연하나, 다만 그 음모한 여부를 정확히 알 수 없다. 주상께서 이러한 까닭으로 부득이 가벼운 법전(法典)에 따라서 파직(罷職)만 하여 공신(功臣)을 보전한 것이다."

하였다. 서유가 대답하였다.

"신 등은 직책이 간쟁(諫諍)에 있으므로 감히 입을 다물고 있지 못한 것입니다. 근일 전하의 처결은 곧 성인의 권도(權道)입니다."


태상왕이 정릉사 탑전에서 7일 동안 불사를 베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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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太上王設佛事於貞陵社塔殿凡七日, 舍利四枚分身, 太上王作佛堂於楡洞, 以安舍利。

태상왕이 정릉사(貞陵社) 탑전(塔殿)에서 7일 동안 불사(佛事)를 베풀었다. 사리(舍利) 4매(枚)가 분신(分身)[46]하니, 태상왕이 유동(楡洞)에 불당을 짓고서 사리를 안치하였다.


조영무가 적소에 도착전 서북면 도순문사 겸 평양 윤으로 임명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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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以趙英茂爲西北面都巡問使兼平壤尹。 英茂未至貶所, 而受此命。

조영무(趙英茂)로 서북면(西北面) 도순문사(都巡問使) 겸 평양 윤(兼平壤尹)을 삼았다. 조영무가 적소(謫所)에 이르기 전에 이 명령을 받았다.


대사헌 권근이 재능이 없다고 하여 사면하기를 비니 윤허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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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司憲權近上箋, 以不才乞辭, 不允。

대사헌(大司憲) 권근(權近)이 전(箋)을 올려 재능(才能)이 없다고 하여 사면하기를 비니,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기년 대공의 친족을 모두 군에 봉하고 직사를 맡기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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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期大功之親, 皆封君。 大司憲權近、左散騎金若采等, 上交章曰:

王者之德, 莫先於睦親, 睦親之道, 在乎富貴而全安之耳。 古之帝王, 封建同姓, 尊之以列爵, 貴之也, 食之以土地, 富之也, 而不任王朝之職, 所以安全之也。 蓋任之以職, 則必責之以事, 有過不聞, 則廢王法, 治之則廢私恩。 二者皆未合理, 故欲全其親愛之心, 必不委以職事也。 前朝之時, 所以待宗室者, 甚得其道。 封君以貴之, 厚祿以富之, 位在百僚群臣之上, 未嘗任以職事也。 出入之時, 必備儀衛, 儀衛不備, 不敢輕出。 其位尊嚴, 其勢安固, 共享安富尊榮之福, 垂五百年, 豈不美哉! 惟我國家, 創業之初, 法制未備, 宗親駙馬, 以功以才, 或拜朝官, 或任兵權, 因循未革, 迄至于今, 大則擁兵搆禍, 小則犯法被劾, 全安之道, 有乖乎古。 且周之宗盟, 異姓爲後, 所以尊同姓也。 今以同姓之貴, 混處朝班, 以列於群臣之中, 非所以重金枝也。 願自今保全宗親之道, 一依前朝之舊, 宗親駙馬, 皆以公侯就第, 不責軍國職事, 其支庶族屬, 或封諸君, 或拜元尹正尹, 皆厚其祿, 以致富貴, 使得優游, 永享尊榮。 又稽前朝舊式, 定其儀衛, 出入必備儀衛而行, 其有不備儀衛, 而敢輕出者, 憲司糾理, 以尊公族, 以別異姓, 以防犯罪之源, 以全睦族之道。

上曰: “期大功之親, 不任以事, 皆令封君, 餘皆勿論, 其儀衛, 禮曹議之。 但寡人無駙馬, 故駙馬儀衛及任事與否, 其勿議焉。”

기년(朞年) 대공(大功)의 친족을 모두 군(君)에 봉하였다. 대사헌 권근(權近)과 좌산기(左散騎) 김약채(金若采) 등이 교장(交章)을 올려 말하였다.

"왕자(王者)의 덕은 친족에 화목하는 것보다 앞서는 것이 없고, 친족에 화목하는 도는 부귀하고 안전하게 하는 데에 있습니다. 옛 제왕(帝王)이 동성(同姓)을 봉건 제후(封建諸侯)로 삼아 열작(列爵)으로 높인 것은 귀하게 하는 것이요, 토지로 먹고 살게 하는 것은 부(富)하게 하는 것이요, 왕조(王朝)의 벼슬을 맡기지 않는 것은 안전하게 하는 것입니다. 대개 벼슬을 맡기면, 반드시 일을 책임지우게 됩니다. 허물이 있는데 묻지 않으면, 왕법(王法)을 폐하는 것이요, 다스리면 사은(私恩)을 폐하는 것이니, 두 가지가 모두 도리에 합하지 않기 때문에, 그 친애하는 마음을 온전히 하고자 하여, 반드시 직사(職事)를 맡기지 않는 것입니다. 고려 때에 종실(宗室)을 대접한 것이 매우 그 도리를 얻어서, 군(君)을 봉하여 귀하게 하고, 녹(祿)을 후하게 하여 부(富)하게 하고, 지위는 백료(百僚) 군신의 위에 있었으나, 일찍이 직사(職事)를 맡기지 않았으며, 출입할 때에는 반드시 의위(儀衛)를 갖추고, 의위가 갖춰지지 않으면 감히 가볍게 나가지 않아서, 그 지위가 존엄하고 그 형세가 안전하여, 함께 안부(安富)와 존영(尊榮)의 복(福)을 누리어 백년을 내려왔으니, 어찌 아름답지 않습니까? 우리 국가가 창업하던 처음에 법제가 갖춰지지 못하여, 종친과 부마(駙馬)를 공(功)으로 재주로 혹은 조관(朝官)을 제수하고, 혹은 병권(兵權)을 맡기어, 이를 인습해 고치지 못하고 오늘에 이르렀는데, 크게는 군사를 끼고 화란을 꾸미고, 작게는 법을 범하여 탄핵을 당하니, 온전하고 편안하게 하는 도(道)가 옛날에 어그러집니다. 또 주(周)나라의 종맹(宗盟)[47]에 이성(異姓)을 뒤로 한 것은 동성(同姓)을 높인 것인데, 지금은 귀한 동성으로서 조반(朝班)에 잡처(雜處)하여 여러 신하 가운데에 서니, 금지(金枝)를 중하게 하는 바가 아닙니다.

원하건대, 이제부터 종친을 보전하는 도를 한결같이 고려의 옛것에 의하여, 종친과 부마는 모두 공(公)과 후(侯)로 사제(私第)에 있어 군국(軍國)의 직사를 맡지 못하게 하고, 그 지서(支庶)의 족속(族屬)은 혹은 군(君)을 봉하고 혹은 원윤(元尹)·정윤(正尹)을 제수하여 모두 녹(祿)을 후하게 해서 부귀에 이르게 하고, 한가롭게 놀면서 길이 존영(尊榮)을 누리게 할 것입니다. 또 고려의 옛 법식을 상고하여 의위(儀衛)를 정해서, 출입할 때에는 반드시 의위를 갖추어 행(行)하게 하고, 의위를 갖추지 않고 감히 가볍게 나가는 자가 있거든 헌사(憲司)에서 규리(糾理)하여, 공족(公族)을 높이고 이성(異姓)을 구별해서, 범죄의 근원을 막고 친족을 화목하게 하는 도를 온전히 하게 하소서."

임금이 말하였다.

"기년(朞年) 대공(大功)의 친족들은 직사를 맡기지 말고 모두 군(君)을 봉(封)하도록 하고, 나머지는 모두 의논하지 말라. 그 의위(儀衛)에 대한 것은 예조(禮曹)에서 의논하라. 단 과인(寡人)은 부마(駙馬)가 없으니, 부마의 의위(儀衛)와 일을 맡기는 여부는 의논하지 말라."


대마도수 형부 소보 종정무와 사미 영감이 해적을 금지하겠다는 뜻을 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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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對馬島守刑部少輔宗貞茂, 使人獻馬十匹, 其父沙彌靈鑑亦獻馬六匹, 皆告誠心禁賊之意。

대마도 수(對馬島守) 형부 소보(刑部少輔) 종정무(宗貞茂)가 사람을 시켜 말 10필을 바치고, 그 아비 사미 영감(沙彌靈鑑)도 말 6필을 바쳤는데, 모두 성심으로 도적을 금지하겠다는 뜻을 고하였다.


二年 五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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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月 1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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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근·김약채 등의 상소로 종친과 부마로 하여금 직사를 맡지 못하도록 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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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乙丑〕/令宗親、駙馬不任以事。 大司憲權近、左散騎金若采等, 復交章上言曰:

前日臣等交章, 請依前朝舊制, 以立宗親、駙馬富貴安全之道, 與其出入儀衛之制, 敬奉王旨, 以爲: “寡人無駙馬。” 臣等竊稽古典, 駙馬者, 諸臣之子, 得尙宗女之通稱, 非止謂當代帝王親女下嫁之人而已。 況臣等前日所申, 蓋謂宗親宗女, 均是祖宗之子孫, 當與王者, 共享富貴, 而安全之者也。 苟欲寵之, 任以事權, 而或犯法難逃譴責, 其所以寵之者, 乃所以禍之也。 故請極其富貴, 而不任事權, 以享安全之福。 此非爲一時之權宜, 實欲永爲萬世保全宗親之令典也。 願自今, 諸臣得尙親女及親姊妹者, 封爵例秩, 竝同宗親, 貴以封侯, 富以厚祿, 不責以軍國之事, 以保其安全之福, 則殿下有睦親之德, 宗親享尊榮, 而與國咸休, 永世無患, 豈不美哉? 出入儀衛, 亦不可與諸臣無別, 當有第儀, 以彰其貴。 願令禮官, 參酌古今, 詳定其儀。

疏凡三上。 時李佇以太上駙馬, 爲判三軍府事, 總軍政橫甚, 故臺諫極論之。 上曰: “駙馬不可與同姓宗親例論。 且其儀衛, 後當擧行, 今姑停之。” 是日, 臺諫復交章曰:

臣等累次交章, 上請宗親、駙馬, 長享尊榮, 保全無患之道。 歷代以來, 自有成規, 太上王開國之初, 法制未備, 其所以待宗親駙馬之道, 未盡得宜, 故自戊寅以來, 不能保全之端, 已再驗矣。 臣等念此, 每切痛心, 乃知古先哲王, 立法定制, 所以使宗親駙馬, 享有富貴, 而不任以事, 永保尊榮, 其慮遠矣。 伏惟遠法古先哲王之意, 近戒戊寅以來之事, 務令宗親駙馬, 安享富貴, 不煩以事, 優游以樂, 永世無患, 以保尊榮之極, 以篤保全之道。 其出入儀衛, 亦依前章所申, 以立制度, 以爲成憲。

上可其疏, 儀衛之制, 勿復論。

종친과 부마로 하여금 직사(職事)를 맡지 못하도록 명령하였다. 대사헌 권근(權近)과 좌산기(左散騎) 김약채(金若采) 등이 다시 교장(交章)하여 상언(上言)하였다.

"전일에 신 등이 교장하여 고려의 옛 제도에 따라서 종친(宗親) 부마(駙馬)의 부귀하고 안전한 도리와 출입할 때의 의위(儀衛)의 제도를 청하였는데, 과인은 부마가 없다고 하신 왕지(王旨)를 공경히 받자왔습니다. 신 등이 가만히 고전(古典)을 상고하여 보니, 부마(駙馬)라는 것은 여러 신하의 아들이 종실의 딸에게 장가든 자의 통칭(通稱)이요, 당대(當代) 제왕(帝王)의 친딸이 하가(下嫁)한 사람만을 이르는 데 그친 것은 아닙니다. 하물며, 신 등이 전일에 아뢴 것은 대개 종친(宗親)·종녀(宗女)도 고루 다 조종(祖宗)의 자손이니, 마땅히 왕자(王者)와 더불어 함께 부귀를 누려 안전하게 하여야 한다는 것을 말한 것입니다. 만일 영광스럽게 하고자 하여 일과 권세를 맡기었다가 혹 법을 범하여 견책(譴責)을 면하기 어렵게 된다면, 그 총애하는 것이 도리어 화를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부귀를 극진하게 하고, 일과 그 권세를 맡기지 아니하여, 안전한 복(福)을 누리게 하기를 청한 것입니다. 이것은 일시의 권의(權宜)를 위한 것이 아니라, 실상은 만세(萬歲)의 종친을 보전하는 아름다운 법전을 만들고자 한 것입니다. 원하옵건대, 이제부터 여러 신하 중에 임금의 친딸이나 친자매에게 장가든 자는 작(爵)을 봉(封)하기를 차서(次序)대로 하고, 아울러 종친과 똑같이 하여 후(侯)를 봉해서 귀하게 하고, 녹(祿)을 후하게 하여 부(富)하게 하되, 군국(軍國)의 일을 책임지우지 말아서 안전(安全)한 복(福)을 보전하게 하시면, 전하는 친척을 화목하게 하는 덕이 있고, 종친은 존영(尊榮)을 누리게 되어, 나라와 더불어 즐거움을 같이하여 영구히 근심이 없을 것이니, 어찌 아름답지 않겠습니까? 출입하는 의위(儀衛)도 여러 신하와 분별이 없을 수 없으니, 마땅히 제택(第宅)과 의위가 있어 그 귀함을 나타내어야 합니다. 원하건대, 예관으로 하여금 고금(古今)을 참작하여 그 의위를 상정(詳定)하게 하소서."

소(疏)를 무릇 세 번이나 올리었는데, 이때에 이저(李佇)가 태상왕(太上王)의 부마로서 판삼군부사(判三軍府事)가 되어 군정(軍政)을 총할(總轄)해서 횡포가 심했기 때문에, 대간(臺諫)이 극론(極論)한 것이었다. 임금이 말하기를,

"부마는 동성 종친(同姓宗親)의 예와 같이 논할 수 없고, 또 그 의위도 뒤에 마땅히 거행하겠으니, 지금 우선 정지하라."

하였다. 이날에 대간이 다시 교장(交章)하여 말하였다.

"신 등이 여러 차례 교장(交章)하여 종친과 부마가 길이 존영(尊榮)을 누리고 보전되어 근심이 없는 도를 청하였습니다. 역대 이래 스스로 이루어진 법규가 있는데, 태상왕이 개국하시던 처음에 법제가 갖춰지지 못하여 종친 부마를 대접하는 도가 다 적의(適宜)함을 얻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무인년 이래로 능히 보전하지 못한 사단(事端)을 이미 두 번이나 경험하였습니다. 신 등이 이를 생각하면, 매양 마음 아픈 것이 간절합니다. 이제서야 옛날 어진 왕(王)들이 법을 세우고 제도를 정하여 종친·부마로 하여금 부귀를 누리게 하고, 일을 맡기지 않아서 길이 존영을 보전하게 한 것이, 그 생각이 원대한 것을 알겠습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멀리 예전 어진 왕들의 뜻을 본받고, 가까이 무인년 이래의 일을 경계하여, 되도록 종친·부마로 하여금 편안히 부귀를 누리게 하고, 일 때문에 번거롭게 하지 마시어 한가롭게 놀고 즐기어서 길이 근심이 없게 하여, 존영의 극진함을 보전하고, 보전의 도를 두텁게 할 것입니다. 출입하는 의위(儀衛)도 지난번에 교장(交章)에서 아뢴 바에 의하여 제도를 세워서 성헌(成憲)을 만드소서."

임금이 그 소(疏)를 옳게 여겼으나, 의위의 제도는 다시 논하지 말게 하였다.


임금이 태상전에 나아가 헌수하고자 하다가 몸이 편찮아 실행하지 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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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欲詣太上殿獻壽, 因體氣違和, 不果。

임금이 태상전(太上殿)에 나아가 헌수(獻壽)하고자 하다가, 몸이 편찮음으로 인하여 실행하지 못하였다.


수창궁 후원 청심정에서 척석놀이를 구경하고 다음날도 또한 그와 같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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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御壽昌宮後苑淸心亭, 觀擲石戲。 明日亦如之。 世子獻壽于上, 上御西亭受宴。 貞嬪亦詣中宮侍宴, 義安公和、寧安侯良祐、上黨侯李佇、參判三軍府事李茂、前參贊門下府事趙溫、前知三軍府事李天祐、三司左使李稷、同知摠制李叔蕃ㆍ趙卿等侍坐, 以次獻壽極懽, 至夜乃罷。

수창궁(壽昌宮) 후원(後苑) 청심정(淸心亭)에 나아가서 척석(擲石)놀이를 구경하고, 다음날도 또한 그와 같이 하였다. 세자가 임금에게 헌수하니, 임금이 서정(西亭)에 나아가서 잔치를 받고, 정빈(貞嬪)이 또한 중궁(中宮)에 나아가서 시연(侍宴)하였다. 의안공(義安公) 이화(李和)·영안후(寧安侯) 이양우(李良祐)·상당후(上黨侯) 이저(李佇)·참판삼군부사(參判三軍府事) 이무(李茂)·전 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 조온(趙溫)·전 지삼군부사(知三軍府事) 이천우(李天祐)·삼사 좌사(三司左使) 이직(李稷)·동지총제(同知摠制) 이숙번(李叔蕃)·조경(趙卿) 등이 모시고 앉아서 차례로 헌수하여 지극히 즐기었다. 밤이 되어서 파하였다.


5月 7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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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백성이 낮에 나타나서 하늘을 지나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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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辛未/太白晝見經天。

태백성(太白星)이 낮에 나타나서 하늘을 지나갔다.


경연에 나아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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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御經筵。

경연(經筵)에 나아갔다.


5月 8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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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백성이 낮에 나타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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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壬申/太白晝見。

태백성(太白星)이 낮에 나타났다.


봉상시 승 김권이 기생 효도의 인사청탁에 의한 부정으로 우봉현에 귀양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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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流奉常寺丞金綣于牛峯縣。 時, 綣兼尙瑞注簿, 愛妓孝道, 欲官其娚吳天, 托以宰臣金需之請, 授天散員職, 門下府上疏請罪。

봉상시(奉常寺) 승(丞) 김권(金綣)을 우봉현(牛峰縣)에 귀양보냈다. 이때에 김권이 상서 주부(尙瑞注簿)를 겸하였는데, 애기(愛妓) 효도(孝道)가 제 조카 오천(吳天)을 벼슬시키고자 하니, 재신(宰臣) 김수(金需)의 청이라고 칭탁하여 오천에게 산원(散員) 직임을 주었다. 문하부(門下府)에서 상소하여 죄를 청한 것이었다.


대간에서 사병혁파에 불평한 이거이·이저·이천우의 처벌을 청하니 윤허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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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臺諫上疏, 請置李居易及佇、李天祐于外, 不允。 疏曰:

曩者, 臣等交章, 請罷私兵, 欲爲親勳, 得保富貴, 永享尊榮, 卽蒙兪允, 中外欣慶, 而判門下府事李居易、上黨侯李佇等, 不體殿下保全之意, 吝釋兵權, 潛懷憤怨, 將其私兵牌記, 遷延不卽送納于三軍府, 趙英茂等, 相聚怨謗。 其時, 臣等以其連姻宗室, 不卽論執, 只請英茂等罪。 是宜慙悔自新, 思保安榮, 尙未悛改, 以畜憤恨, 相與言曰: “一二人者, 如一塊肉”, 欲快其憤。 夫以人臣, 不卽釋兵, 且以私憾, 比人于肉, 敢欲爲亂。 又況居易, 往者謀害平原君趙璞, 情狀已露, 至於囚其兄于巡軍, 詰問其事, 所供皆實。 初欲害其甥壻, 後以流其親兄, 其於人倫何如, 乃以姻親之故, 置而不問。 此人之心, 難可以保, 固殿下之所明知也。 蓋緣暴貴恃勢, 長其驕悍之氣, 以至于此。 使其恃勢之心, 久蓄釋兵之憾, 儻或一朝, 不勝驕悍, 以逞其欲, 則禍亂之作, 不知其極。 據法論罪, 所當鞫問, 然以勳親, 在於八議。 願將居易、佇及同心結黨天祐等, 安置于外, 使銷驕悍之氣, 以生悔悟之心, 然後使還于朝, 復其封邑, 則禍釁不作, 長保富貴, 殿下有保全之德, 彼亦享安榮之福。

上以宗親功臣, 令皆勿問。 是日, 臺諫復上交章曰:

臣等以李居易、李佇、李天祐等安置于外之事, 具疏論啓, 蓋以宗親功臣之故, 不敢以法論執, 姑使處外, 消沮驕氣, 改心易慮, 以歸于善, 然後召還復爵, 俾享富貴。 此實爲之防其驕恣不法之萌, 永爲安享尊榮之計, 殿下不忍斥遣, 勿使復論。 然此只是一時之恩, 臣等所申, 實爲宗親功臣, 圖其久遠之計, 伏惟殿下依允施行。

上不允曰: “禁風聞公事, 已有常典, 臺諫何以至此?”

是日又上疏曰:

臣等竊謂, 風聞公事, 指謂閨門(瞹眛)〔曖昧〕, 風俗汚染等事耳, 前章所申, 實關國家禍亂之機。 耳目之官, 得聞此事, 以爲風聞, 不敢論執, 必待其事已發, 然後論之, 則臣等實恐無及於亂矣, 況今臣等, 非敢以此爲罪而治之也。 驕悍如此, 苟不防制, 後患難測。 若使處外, 以消驕悍之心, 就安全之地, 則今日斥遣之事, 實爲後日安全之本。 伏惟殿下斷以大義, 依允施行。

臺諫復交章言:

臣等竊聞, 人君所以待勳親之道, 要當恩義之兼全, 不宜寵愛之偏係。 恩義兼, 則永蒙其福, 寵愛偏, 則終受其禍, 此古今必然之理也。 昔鄭莊公弟叔段, 不義驕縱, 莊公不早爲其所, 縱使失道, 以至於亂, 然後討之, 《春秋》譏莊公養成其惡; 齊僖公寵愛其弟仲年, 不以公子之道待之, 施及其子, 猶與嫡等, 恃寵而當國, 卒成禍亂, 故《春秋》亦譏其有寵愛之私, 非友于之義。 夫弟且不可偏於寵愛。 況宗親功臣乎? 由是觀之, 功臣所當待以其道, 不使驕縱以稔其惡, 然後爲得也。 苟溺寵愛, 縱使失道, 養成其禍, 則其所以愛之, 適所以害之也。 今不預防, 而俾罹後患, 是豈宗社之福, 國家之美耶? 臣等實恐萬世之下, 溺愛不斷, 養成其罪之譏, 將有累於聖明之世, 竊爲殿下惜之。 又恐居易等恃勢驕恣, 愈無忌憚, 盛滿之禍, 將生於後, 而不知戒, 臣等實亦爲彼惜之。 能因臣等今日之言, 退居于外, 有所懲艾, 修心改行, 以復于朝, 則必以勳親之故, 克享保全之福, 終身富貴, 優游無患矣。 臣等今日所言, 實爲居易等治病之藥, 安身之術。 居易等苟能反躬而思之, 亦必以臣等之言, 爲箴規之益, 非所憤恨。 伏惟殿下, 特垂明斷, 務從大義, 毋溺寵愛之私, 爲圖永遠之計。

上不得已命放居易于淸州, 佇于漢陽私第, 天祐前已罷職, 其勿復問。 旣而悔之, 乃召臺諫官, 傳旨曰: “雖已可卿等之疏, 然反覆思之, 實難忍也。 姑置勿論。” 大司憲權近以下, 同辭而對曰: “臣等之言, 但爲宗社, 不爲私也, 不敢奉敎。” 上乃召居易及佇, 親自問之曰: “向者卿父子所言, 果如臺諫所劾乎?” 二人揮淚指天, 各言無罪。 佇又言: “大抵臺諫所上之章, 與劾問之辭爲一, 然後人服其罪。 今臺諫劾問臣父子以軍官牌記軍器不卽輸納, 至於所上之章, 則謂有不忠之言, 安有是理哉! 不忠之言, 臣等所不說也。 臣若不能辨明, 則雖死不辭。 臣忝戚屬, 未有毫髮之負, 請與臺諫辨明。” 上憐之, 又傳旨臺諫曰: “二人之罪, 難以的知。 且勳親也, 置之勿論, 如何?” 近等對曰: “臣等請功臣駙馬之罪, 豈敢以疑事爲之乎? 深知熟議, 不得已而發之, 臣等固不敢奉敎。” 因引鄭莊公養成段惡之說, 極言居易父子不忠之罪。 上怒, 命臺諫各歸私第, 毋得視事。 又命居易父子歸私第, 禁其出入。 旣而, 召大司憲權近等就職。 上悔前日之怒, 召近等曰: “佇至親, 且有勳勞, 故不敢輕貶。 當從卿等所言。”

臺諫交章上言:

臣等於今月十日詣闕聞命之時, 李佇密遣私伴三人, 潛入奉書局, 窺覘事變, 及昏越窓逃出, 爲守門者所執。 其遣人窺覘之心, 陰詭難測。 右佇等, 自革兵之後, 怏鬱憤怨, 敢欲爲亂。 據法言之, 所當論執, 第以宗親功臣之故, 臣等只請安置于外, 得蒙兪允。 事未施行, 殿下召致臣等, 問佇等亂言之所由生, 其狀已見, 果如臣等所申。 宜貶外以懲其惡, 殿下不忍斥遣, 置而不論。 其在佇等, 固宜慙悔自新, 乃不是思, 反懷陰詭, 潛令私伴, 乘暗入闕, 窺覘事變。 其驕悍自恣, 不畏邦憲如此, 將來之患, 甚可畏焉。 伏惟殿下, 深思防患之道, 將居易、佇、天祐等, 安置于外, 以銷憤怨之氣, 以杜禍亂之萌。 其所遣私伴, 特令鞫問所由, 明正其罪。

不允。

대간(臺諫)에서 상소하여 이거이(李居易)와 이저(李佇)·이천우(李天祐)를 외방에 안치하기를 청하니,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상소는 이러하였다.

"지난번에 신 등이 교장(交章)하여 사병(私兵)을 혁파하기를 청한 것은, 종친과 훈신을 위하여 부귀를 보전하게 하고 길이 존영(尊榮)을 누리게 하려 함이었는데, 곧 유윤(兪允)을 받았으니, 중외(中外)가 기뻐합니다. 그러나, 판문하부사 이거이(李居易)·상당후 이저(李佇) 등이 전하의 보전하는 뜻을 생각지 못하고, 병권을 놓기가 아까와서 속으로 분노와 원망을 품어, 그 사병(私兵)의 패기(牌記)를 가지고 시일을 끌면서 곧 삼군부(三軍府)에 바치지 않았습니다. 조영무(趙英茂) 등은 서로 모여서 원망하고 비방하였습니다. 그때에 신 등이 그가 종실의 연인(連姻)임으로 곧 논집(論執)하지 않고 다만 조영무 등의 죄만 청하였습니다. 마땅히 부끄러워하고 뉘우치어 스스로 새로워져서 편안하고 영화스러운 것을 보전하기를 생각하여야 할 터인데, 오히려 개전(改悛)하지 않고 분한(憤恨)을 품고서, 서로 더불어 말하기를, ‘한두 놈이 한 덩어리 고기와 같다.’ 하여, 그 분한을 풀려고 하였습니다. 대저 신하로서 곧 군사를 내놓지 않고, 또 사감(私憾)으로 사람을 고기에 비유하여 감히 난을 꾸미려 하였습니다. 또 더군다나, 이거이(李居易)는 지난날에 평원군(平原君) 조박(趙璞)을 모해하여 정상이 이미 드러났으며, 심지어 그의 형을 순군옥(巡軍獄)에 가두고 그 일을 힐문하였으니, 공술한 것이 모두 사실이었습니다. 처음에는 그 조카사위를 해치려 하였고, 뒤에는 그 친형을 귀양보내었으니, 인륜에 있어서 어떠합니까? 인친(姻親)인 까닭으로 내버려두고 묻지 않았으나, 이 사람의 마음이 보증하기 어려운 것은 전하께서 밝게 아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갑자기 귀하게 되어 그 세력을 믿고 교만방자한 기운이 커져서 여기에 이른 것입니다. 그 세력을 믿는 마음으로 하여금 군사를 내놓은 감정을 오랫동안 품게 해서, 만일 하루 아침에 교만하고 사나운 성질을 이기지 못해 그 욕심을 부리게 되면, 화란(禍亂)의 발생(發生)이 그 극(極)을 헤아릴 수 없을 것입니다. 법에 의거하여 죄를 논하면 마땅히 국문하여야 하겠으나, 훈친(勳親)으로서 팔의(八議)[48]에 있으니, 원하건대, 이거이(李居易)·이저(李佇)와, 같은 마음으로 결당한 이천우(李天祐) 등을 외방에 안치하여, 교만하고 사나운 마음이 없어지게 할 것이며, 뉘우치고 깨닫는 마음이 생긴 연후에 조정에 돌아오게 하여 그 봉읍(封邑)을 회복하게 하면, 화란의 흔단(釁端)이 생기지 않고, 길이 부귀를 보전하게 되므로, 전하께서는 보전하는 덕이 있고 저들도 안영(安榮)의 복을 누릴 것입니다."

임금이 종친과 공신이라 하여 모두 문죄하지 말게 하였다. 이날 대간(臺諫)에서 다시 교장(交章)을 올리었다.

"신 등이 이거이(李居易)·이저(李佇)·이천우(李天祐) 등을 외방에 안치하자는 일로 소(疏)를 갖추어 논계(論啓)하였사온데, 종친과 공신인 까닭으로 감히 법으로 논집(論執)하지 못하고, 우선 외방에 처하게 하여 교만한 기운을 막아 없애서 마음을 고치고 생각을 바꾸어 선(善)에 돌아오게 한 연후에, 소환하고 복작(復爵)하여 부귀를 누리게 하자는 것이니, 이것이 실로 그들을 위하여 교만 방자하고 불법한 싹을 막고, 길이 존영(尊榮)을 편안히 누릴 수 있는 계책이 되는 것입니다. 전하가 차마 물리쳐 보내지 못하고 다시 의논하지 말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다만 한때의 은혜이요, 신 등이 아뢰는 것은 실로 종친과 공신을 위하여 구원(久遠)한 계책을 도모하는 것이니, 엎드려 바라건대, 전하는 의윤(依允)하여 시행하소서."

임금이 윤허하지 아니하고, 말하기를,

"풍문 공사(風聞公事)를 금하는 것이 이미 정한 법이 있는데, 대간(臺諫)에서 어찌 이렇게까지 하는가?"

하였다. 이날 또 상소하였다.

"신 등은 생각하건대, 풍문 공사라는 것은 규문(閨門)의 애매한 일과 풍속을 더럽히는 따위의 일을 가리켜 말하는 것입니다. 전 소장(疏章)에 아뢴 것은 실로 국가 화란(禍亂)의 기틀에 관한 것인데, 이목(耳目)의 관원이 이 일을 듣고도 풍문이라 하여 감히 논집하지 못하고, 반드시 그 일이 발단되는 것을 기다린 연후에 의논한다면, 신 등은 실로 난(亂)을 막는 데에 미칠 수 없을까 두려워합니다. 하물며, 지금 신 등이 감히 이것으로 죄를 삼아서 다스리자는 것이 아닙니다. 교만 흉포한 것이 이와 같으니, 만일 막아서 제지하지 않으면, 후환을 헤아리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만일 외방에 처하게 하여 교만 흉포한 마음을 없애서 안전한 곳에 나가게 하면, 오늘 물리쳐 보내는 일이 실로 후일의 안전한 근본이 될 것입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대의로 결단하여 의윤(依允)해 시행하소서."

대간이 다시 교장(交章)하여 말하였다.

"신 등이 가만히 듣건대, 인군이 훈친(勳親)을 대접하는 도는 마땅히 은혜와 의리를 겸해 온전히 하여야 하고, 총애를 편벽하게 하여서는 아니 됩니다. 은(恩)과 의(義)가 겸하면 길이 그 복을 받고, 총애가 치우치면 마침내는 그 화를 받으니, 이것은 고금의 필연한 이치입니다. 옛날에 정(鄭)나라 장공(莊公)의 아우 숙단(叔段)이 불의(不義)하여 교만 방종하였는데, 장공이 일찍 제어하지 않고 놓아두어 도를 잃게 하여, 난에 이른 연후에 쳤는데, 《춘추(春秋)》에서 장공이 그 죄악을 양성하였다고 비방하였습니다. 제(齊)나라 희공(僖公)이 그 아우 중년(仲年)을 사랑하여 공자(公子)의 도(道)로 대접하지 않고, 은혜를 그 아들에게까지 미쳐 오히려 적사(嫡嗣)와 대등하게 하니, 총애를 믿고 국권을 잡아서 마침내 화란을 이루었습니다. 그러므로, 《춘추(春秋)》에서 또한 사사로운 총애가 있는 것이 의(義)로운 우애가 아닌 것을 기롱(譏弄)하였습니다. 대저 아우도 편벽되게 총애할 수가 없는데, 하물며 종친과 공신이겠습니까? 이것으로 본다면, 공신은 마땅히 그 도리로 대접하고, 교만 방종하여 그 악한 것을 쌓지 않게 한 연후에 잘한 것이 됩니다. 만일 총애에 빠져서 놓아두어 도(道)를 잃게 하여 그 화를 양성하면, 그 사랑한 것이 도리어 해치는 것이 됩니다. 지금 미리 방지하지 않고 후환을 남기게 한다면, 이것이 어찌 종사(宗社)의 복이며, 국가의 아름다운 것이겠습니까? 신 등은 실로 만세(萬歲)의 뒤에 사랑에 빠져서 결단하지 못하여 그 죄악을 양성하였다는 기롱(譏弄)이 장차 성명(聖明)의 세상에 누(累)가 될까 두렵습니다. 전하를 위하여 애석하게 생각합니다. 또 이거이(李居易)의 무리가 세력을 믿고 교만 방자하여 더욱 거리낌이 없어서, 성만(盛滿)의 화(禍)가 장차 뒤에 생겨도 경계할 줄을 알지 못할까 두렵습니다. 신 등은 실로 또한 저들을 위하여 애석하게 여깁니다. 신 등의 오늘의 간언(諫言)으로 인하여, 외방에 물러가 있게 하여 징계되는 바가 있어, 마음을 닦고 행실을 고쳐 조정에 돌아오면, 반드시 훈친(勳親)의 연고로 능히 보전의 복을 누려 종신토록 부귀하고, 한가로이 놀아서 근심이 없을 것입니다. 신 등이 오늘 말하는 것은 실상은 이거이(李居易) 등의 병을 고치는 약과 몸을 편안히 하는 방도가 되는 것입니다. 이거이 등이 진실로 능히 몸을 돌이키고 생각한다면, 또한 반드시 신 등의 말을 도움되는 잠규(箴規)로 여길 것이요, 분하고 한할 것이 아닙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특별히 명단(明斷)을 내려 힘써 대의(大義)를 따르고 사사로운 총애(寵愛)에 빠지지 말아서, 영원한 계책을 도모하소서."

임금이 부득이하여 이거이를 청주(淸州)에, 이저를 한양(漢陽) 사제(私第)에 내치도록 명하고, 이천우는 이미 파직하였으므로 다시 묻지 말게 하였다. 조금 뒤에 후회하여 대간(臺諫)의 관원을 불러 전지(傳旨)하기를,

"비록 이미 경 등의 소(疏)를 가(可)하다고 하였으나, 반복하여 생각하니, 실로 차마 하기가 어렵다. 아직 두고 논하지 말라."

하였다. 대사헌 권근(權近) 이하가 같은 말로 대답하기를,

"신 등의 말은 다만 종사(宗社)를 위한 것이요, 사사(私私)를 위한 것이 아닙니다. 감히 하교(下敎)를 받들지 못하겠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이에 이거이와 이저를 불러 친히 묻기를,

"지난번에 경(卿)의 부자(父子)의 말한 것이 과연 대간이 탄핵한 것과 같은가?"

하니, 두 사람이 눈물을 흘리면서 하늘을 가리키며 각각 무죄함을 말하였다. 이저가 또 말하기를,

"대저 대간이 올린 소장(疏章)과 핵문(劾問)하는 말이 일치된 연후에야 누구나 그 죄를 시인하는 것입니다. 지금 대간이 신의 부자에게 군관 패기(軍官牌記)와 군기(軍器)를 즉시 수납(輸納)하지 않았다고 핵문(劾問)하고, 심지어 올린 소장에는 불충(不忠)한 말이 있었다고 하니, 어찌 이런 도리가 있겠습니까? 불충한 말은 신 등이 하지 않았습니다. 신이 만일 능히 변명(辨明)하지 못하면, 비록 죽더라도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신이 척속(戚屬)을 욕되게 하고 있으나, 털끝만큼도 저버린 것이 없습니다. 대간과 더불어 변명하기를 청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불쌍히 여겨 또 대간에게 전지(傳旨)하기를,

"두 사람의 죄를 정확히 알기가 어렵고, 또 훈친(勳親)이니 내버려 두고 논핵하지 마는 것이 어떠한가?"

하였다. 권근 등이 대답하기를,

"신 등이 공신(功臣)·부마(駙馬)의 죄를 청하는 데 어찌 감히 의심나는 일로 하겠습니까? 깊이 알고 숙의(熟議)하여 부득이 발설한 것입니다. 신 등은 감히 교지(敎旨)를 받들지 못하겠습니다."

하고, 인하여 정(鄭)나라 장공(莊公)이 숙단(叔段)의 죄악을 양성한 말을 끌어다가 이거이 부자의 불충한 죄를 극력 말하였다. 임금이 노하여 대간에게 각기 사제(私第)로 돌아가 일을 보지 말라고 명령하고, 또 이거이 부자도 사제(私第)로 돌아가라고 명령하고, 그 출입을 금지하였다. 조금 뒤에 대사헌 권근(權近) 등을 불러 직사에 나오게 하고, 임금이 전일에 노한 것을 후회하여 권근 등을 불러 말하기를,

"이저는 지친(至親)이고 또 훈로(勳勞)가 있으므로 가볍게 폄척(貶斥)하지 못하였는데, 마땅히 경 등의 말을 따르겠다."

하였다. 대간이 교장(交章)하여 상언(上言)하였다.

"신 등이 이달 10일에 예궐(詣闕)하여 명령을 들을 때에, 이저가 비밀히 사반(私伴) 세 사람을 보내어 봉서국(奉書局)에 숨어 들어와서 일의 변동을 엿보게 하여, 어두워서 창(窓)을 넘어 도망하여 나가다가 궐문(闕門)을 지키는 자에게 붙잡혔습니다. 그가 사람을 보내어 엿본 마음씨가 음흉하고 간사하여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이저 등이 군사를 혁파한 뒤부터 스스로 불평을 품고 분원(憤怨)해 하여, 감히 난(亂)을 꾸미고자 하였습니다. 법에 의거하여 말하면 마땅히 논집(論執)하여야만 하겠으나, 다만 종친(宗親) 공신(功臣)인 까닭으로 하여, 신 등이 다만 외방에 안치하기를 청하여 유윤(兪允)을 얻었던 것입니다. 일이 시행되기도 전에 전하가 신 등을 불러서 이저 등의 난언(亂言)의 소자출(所自出)을 물었습니다. 그 죄상이 이미 드러나서 과연 신 등의 아뢴 것과 같았으니, 마땅히 외방에 폄척하여 그 악(惡)을 징계하여야 할 것입니다. 전하가 차마 물리쳐 보내지 못하고 그대로 두고 논하지 않으니, 이저 등에게 있어서는 진실로 부끄러워하고 뉘우쳐서 스스로 새로워져야 할 것인데, 이것은 생각하지 않고 도리어 음흉하고 간사한 마음을 품어서, 가만히 사반(私伴)을 시켜 어둠을 틈타서 대궐에 들어와 일의 변하는 것을 엿보았으니, 그 교만하고 사납고 스스로 방자(放恣)하여, 나라의 법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이와 같으니, 장래의 환(患)이 심히 두렵습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전하는 환(患)을 막는 도리를 깊이 생각하여 이거이·이저·이천우 등을 외방에 안치해서, 분해 하고 원망하는 기운을 없애고 화란(禍亂)의 싹을 막으소서. 그리고, 그들이 보낸 사반(私伴)은 특별히 그 이유를 국문(鞫問)하게 하여, 밝게 그 죄를 바루소서."

임금이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내갑사 중에 동북면 출신이 아닌 자 50인을 가려 파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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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簡內甲士非係東北面人者, 罷之, 凡五十餘人。 以忽赤、忠勇衛代之。

내갑사(內甲士)[49] 중에 동북면(東北面) 출신이 아닌 자를 가려서 파면하니, 모두 50여인이었다. 홀치(忽赤)·충용위(忠勇衛)로 대신하게 하였다.


경연에서 지경연사 하윤이 경연의 중요성을 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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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御經筵。 知經筵事河崙曰: “前朝辛氏之初卽位也, 聰明過人, 又設書筵, 擢置儒士, 日就於學, 當時卿相皆曰: ‘明君出矣。’ 厥後憸小之徒, 誘之曰: ‘馳馬試劍, 自壯歲學之爲最。’ 以故廢學, 好遊畋溺聲色, 以至於亡。” 上曰: “然。 予其時爲書筵侍讀官, 王厭之, 授我以將軍之任, 日與侍中堅味之子林緻等二三人, 習畋獵。 予老矣, 無及於學。 人主當春秋鼎盛之時, 日與儒臣, 講論治道, 豈無所益乎?”

경연(經筵)에 나아갔다. 지경연사(知經筵事) 하윤(河崙)이 말하였다.

"고려 신씨(辛氏)가 처음 즉위하여서는 총명이 남보다 뛰어나고, 또 서연(書筵)을 설치하여 유사(儒士)를 뽑아 두고 날마다 배움에 나가니, 당시의 경상(卿相) 등이 모두 말하기를, ‘명군(明君)이 나왔다.’고 하였습니다. 그 뒤에 간사한 소인의 무리가 꼬이기를, ‘말을 달리고 칼을 쓰는 일은 젊었을 때부터 배우는 것이 제일입니다.’고 하였습니다. 그 때문에 학문을 폐하고 사냥하기를 좋아하며 성색(聲色)에 빠져 망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임금이 말하였다.

"그렇다. 내가 그때에 서연 시독관(書筵侍讀官)이 되었는데, 왕이 싫어하여 나에게 장군(將軍)의 직임(職任)을 주고, 날마다 시중(侍中) 임견미(林堅味)의 아들 임치(林緻) 등 두세 사람과 더불어 사냥하는 것을 익혔었다. 나는 늙었으니 배울 수 없지마는, 인주(人主)는 나이 젊었을 때를 당하여 날마다 유신(儒臣)과 더불어 치도(治道)를 강론하면 어찌 도움이 없겠는가?"


정당 문학 겸 대사헌 권근이 전을 올려 사직하니 윤허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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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政堂文學兼大司憲權近上箋辭, 不允。

정당 문학 겸 대사헌(政堂文學 兼大司憲) 권근(權近)이 전(箋)을 올려 사직하니,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이천우를 완산후로 봉하고, 이지란·우인렬·하윤·조온·이거이·이저·이무 등의 관직을 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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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封天祐爲完山侯, 李之蘭門下侍郞贊成事, 禹仁烈判三司事, 河崙判三軍府事, 復以趙溫爲參贊門下府事, 貶李居易領雞林府尹, 李佇領完山府尹, 以李茂爲東北面都巡問察理使兼永興府尹。 初, 茂子承祚謂其父曰: “竊聞上黨侯欲殺父公。” 茂大懼托疾, 率其子衎等四五人, 三夜避宿。 佇之麾下金允仁聞之, 以告佇, 佇卽至茂家曰: “不圖今者, 有如此言。 吾之才德, 不及君遠矣。 且以朝鮮社稷, 豈負君哉?” 遂結盟而退。 世子聞之, 召佇、茂和解, 慰諭之。 至是, 茂請辭職爲外任, 蓋佇等出外, 茂在內, 則恐佇益疑, 令出外以避嫌也。

이천우(李天祐)를 봉하여 완산후(完山侯)를 삼고, 이지란(李之蘭)으로 문하 시랑찬성사(門下侍郞贊成事)를, 우인렬(禹仁烈)로 판삼사사(判三司事)를, 하윤(河崙)으로 판삼군부사(判三軍府事)를 삼고, 다시 조온(趙溫)으로 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를 삼고, 이거이(李居易)를 영계림부윤(領雞林府尹)으로, 이저(李佇)를 영완산부윤(領完山府尹)으로 폄척(貶斥)시키고, 이무(李茂)로 동북면(東北面) 도순문찰리사(都巡問察理使) 겸 영흥 부윤(永興府尹)을 삼았다. 처음에 이무(李茂)의 아들 이승조(李承祚)가 그 아비에게 말하기를,

"가만히 들으니, 상당후(上黨侯)가 아버지를 죽이려고 한답니다."

하였다. 이무가 크게 두려워하여 병이라 칭탁하고 그 아들 이간(李衎) 등 4, 5인을 거느리고 사흘 밤을 피신하여 잤다. 이저(李佇)의 휘하 김윤인(金允仁)이 그 말을 듣고 이저에게 고하였다. 이저가 곧 이무의 집에 가서 말하기를,

"지금 이러한 말이 있는 줄은 생각지도 못하였습니다. 나의 재주와 덕이 그대에게 미치지 못하는 것이 많습니다. 또 조선(朝鮮) 사직(社稷)으로서 어찌 당신을 저버리겠습니까?"

하고, 드디어 맹세를 맺고 물러갔다. 세자(世子)가 듣고 이저와 이무를 불러 화해시키고, 위로하여 타일렀다. 이때에 이르러 이무가 사직하고 외임(外任)이 되기를 청하였는데, 대개 이저 등이 외방으로 나가고 이무가 서울에 있으면, 이저가 더욱 의심할까 두려워하여, 지금 외방으로 나가서 혐의를 피한 것이다.


좌군 동지총제 이숙번이 사직하니 안성군을 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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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左軍同知摠制李叔蕃辭, 封安城君。

좌군 동지총제(左軍同知摠制) 이숙번(李叔蕃)이 사직하니, 안성군(安城君)을 봉하였다.


이무가 조사하고 동북면으로 가니 내구마 1필을 하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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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茂朝辭, 赴東北面, 賜廐馬一匹。

이무(李茂)가 조사(朝辭)하고 동북면(東北面)으로 가니, 내구마(內廐馬) 1필을 하사하였다.


세자의 생신이므로 가벼운 죄를 용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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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以世子生辰, 宥輕罪。

세자(世子)의 생신(生辰)이므로 가벼운 죄를 용서하였다.


이거이와 이저가 조사하고 폄척되어 임소로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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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居易、李佇朝辭, 出赴貶所, 上各賜夏衣鞍馬。 仍賜定社功臣及承旨鄭矩、李原馬各一匹。 居易私語人曰: “此馬何物也? 初超等爲判門下, 今又貶外, 雖賜萬匹, 何喜之有!” 佇告辭於太上王, 太上王曰: “有如此之故, 何不早告於我?” 佇對曰: “臣亦未知其故, 一朝出之, 所以不能進告。” 太上王曰: “必汝等之所自致也。”

이거이(李居易)와 이저(李佇)가 조사(朝辭)하고 폄소(貶所)로 가니, 임금이 각각 여름옷과 안마(鞍馬)를 하사하고, 인하여 정사 공신(定社功臣)과 승지(承旨) 정구(鄭矩)·이원(李原)에게 말을 각각 1필씩을 하사하였다. 이거이가 사사로 사람에게 말하였다.

"이까짓 말이 무엇하는 물건이냐? 처음에는 등급을 뛰어 판문하(判門下)를 시키고, 지금은 또 외방으로 내쫓으니, 1만 필을 준들 무얼 기뻐할 것이 있겠는가!"

이저가 태상왕(太上王)에게 하직을 고하니, 태상왕이 말하기를,

"이런 연고가 있었다면 왜 내게 일찍 고하지 않았느냐?"

하였다. 이저가 대답하기를,

"신도 또한 그 연고를 알지 못하였습니다. 하루 아침에 내보내니, 나와서 고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니, 태상왕이 말하였다.

"반드시 너희들이 자취(自取)한 것이리라."


5月 17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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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백성이 낮에 나타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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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辛巳/太白晝見。

태백성(太白星)이 낮에 나타났다.


경연에서 《통감촬요》를 강론하다가 권근과 요동의 정세를 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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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御經筵, 講《撮要》。 至 “吳孫權遣于禁, 求降於魏, 魏主欲許之, 劉曄諫之, 同知經筵事全伯英問於上曰: “魏主與劉曄孰是?” 上曰: “曄之諫是矣。 魏主不從其諫, 而許吳之詐降, 甚非也。” 伯英曰: “今燕王擧兵, 而中國亂矣。 設有定遼衛求降於我, 則許之否乎?” 上曰: “此正所深慮也。 然不若不受之爲愈也。” 知經筵事權近曰: “魏主之失, 唯在不從曄諫, 而許詐降而已, 受定遼之降, 有大不可者。 若燕王定亂而有天下, 則必問罪於我矣。 其時何以對之? 上言甚合於義。” 上曰: “卿言是也。”

경연(經筵)에 나아가서 《촬요(撮要)》를 강론하다가, ‘오(吳)나라 손권(孫權)이 우금(于禁)[50]을 보내어 위(魏)나라에 항복하기를 구하니, 위나라 임금은 허락하고자 하는데, 유엽(劉曄)[51]이 간하였다’는 데에 이르러서, 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 전백영(全伯英)이 임금에게 묻기를,

"위주(魏主)와 유엽(劉曄) 중에 누가 옳았습니까?"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유엽의 간한 것이 옳았다. 위주(魏主)가 간하는 것을 좇지 않고 오나라의 거짓 항복하는 것을 허락한 것은 대단히 잘못이었다."

하였다. 전백영이 말하기를,

"지금 연왕(燕王)이 군사를 일으켜 중국이 어지러워졌는데, 설혹 정료위(定遼衛)[52]가 우리에게 항복하기를 구하면 허락하시겠습니까? 아니하시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것은 정히 깊이 생각하여야 할 문제다. 그러나, 받지 않는 것이 가장 낫다."

하였다. 지경연사(知經筵事) 권근(權近)이 말하기를,

"위주(魏主)의 잘못은 오직 유엽의 간하는 것을 따르지 않고 거짓 항복하는 것을 허락한 데에 있었을 뿐입니다. 정료위(定遼衛)의 항복을 받는 것은 크게 불가한 것이 있습니다. 만일 연왕(燕王)이 난(亂)을 평정하고 천하를 차지하면 반드시 우리에게 문죄(問罪)할 것이니, 그때에는 어떻게 대답하겠습니까? 성상의 말씀이 심히 의리에 합당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였다.

"경의 말이 옳다."


화자(火者) 강인부를 외방에 귀양보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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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流火者姜仁富于外方。 憲司上言: “仁富當芳幹作亂之時, 與聞其故, 容隱不言。 前者府與門下府交章上疏, 請依律論, 殿下只許外方付處, 罪重罰輕。 今聞殿下以脅從人一例, 京外從便。 如此則亂臣之儻, 懲戒無門, 尤有乖於典律。 伏惟殿下, 勿許從便。” 從之。

화자(火者) 강인부(姜仁富)를 외방에 귀양보냈다. 헌사(憲司)에서 상언(上言)하였다.

"강인부는 방간(芳幹)이 난(亂)을 일으킬 때를 당하여, 그 일에 참여하여 듣고도 숨기고서 말하지 않았습니다. 전자에 헌부(憲府)와 문하부(門下府)에서 교장(交章) 상소(上疏)하여 율에 따라 논죄하기를 청하였으나, 전하께서 다만 외방에 부처(付處)하는 것을 허락하였으니, 죄는 중하고 벌은 경하였습니다. 지금 들으니, 전하께서 위협당해 따른[脅從] 사람과 같은 예(例)로 경외 종편(京外從便)하게 한다 하니, 이와 같이 하면, 난신(亂臣)의 무리를 징계할 길이 없어져 더욱 법률에 어그러짐이 있을 것입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종편(從便)하는 것을 허락지 마소서."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세자가 빈객 이서와 더불어 《주역》과 역사를 강론하다가 국방문제를 언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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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世子與賓客, 講《易》及史學。 左賓客李舒謂世子曰: “古人云朋亡。 夫朋亡者, 絶人情也。 爲人上者, 立法定制, 犯法則雖宗親勿宥。” 世子曰: “絶人情甚難。” 舒又曰: “二年以來, 倭寇稍息, 邊境甫安, 然不虞之變, 未可知也。 備亂之術, 山城爲最, 當於農隙修築, 以備不虞。” 世子曰: “曩者, 民困於土木之役, 迨今休息二三年矣。 久息則用民何害! 且人言日本國爭亂, 其漸甚可畏也。” 少監金科曰: “山城兵甲, 雖備不虞, 然農事爲急。 孟子曰: ‘天時不如地利, 地利不如人和。’” 世子與賓客鄭擢, 論漢、唐人主爲學之效, 行事之跡, 至唐太宗代隋之事, 嗟嘆良久曰: “眞英主也。”

세자가 빈객(賓客)과 더불어 《주역(周易)》과 사학(史學)을 강론하였는데, 좌빈객(左賓客) 이서(李舒)가 세자에게 말하였다.

"예전 사람이 붕망(朋亡)이라고 말하였으니, 대저 붕망(朋亡)이라는 것은 인정(人情)을 끊는 것입니다. 남의 윗사람이 된 자가 법을 세우고 제도를 정하였으니, 법을 범하면 비록 종친이라도 용서하지 말아야 합니다."

세자가 말하기를,

"인정은 끊기가 대단히 어렵다."

하였다. 이서가 또 말하였다.

"2년 이래로 왜구가 조금 잠잠하고 변경이 아직 편안하나, 불우(不虞)의 변을 알 수가 없습니다. 난을 방비하는 방도는 산성(山城)이 제일이니, 마땅히 농사짓는 여가에 수축(修築)하여 불우(不虞)의 변에 대비하여야 합니다."

세자가 말하였다.

"그전에는 백성들이 토목(土木)의 역사에 곤고(困苦)하였지만, 지금까지 2, 3년 동안 휴식하였다. 오래 쉬었으니, 백성을 쓴들 무엇이 해롭겠는가? 또 사람들이 말하기를, ‘일본국(日本國)이 쟁란(爭亂)한다.’ 하니, 그 징조가 심히 두렵다."

소감(少監) 김과(金科)가 말하였다.

"산성(山城)과 병갑(兵甲)이 비록 불우(不虞)의 변을 방비하지마는, 농사가 급한 것입니다. 맹자(孟子)가 말하기를, ‘천시(天時)가 지리(地利)만 같지 못하고, 지리가 인화(人和)만 같지 못하다.’ 하였습니다."

세자가 빈객(賓客) 정탁(鄭擢)과 더불어 한(漢)나라·당(唐)나라 임금들이 학문을 한 효과와 일을 행한 자취를 논(論)하다가, 당나라 태종(太宗)이 수(隋)나라를 대신한 일에 이르러서, 오랫동안 차탄(嗟嘆)하면서 말하였다.

"참으로 영걸한 임금이로다!"


올량합족이 경원 만호 이청을 살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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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兀良哈殺慶源萬戶李淸。

올량합(兀良哈)이 경원 만호(慶源萬戶) 이청(李淸)을 살해하였다.


세자가 정사 공신을 삼군부에서 연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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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世子享定社功臣于三軍府。

세자(世子)가 정사 공신(定社功臣)을 삼군부(三軍府)에서 연향(宴享)하였다.


5月 29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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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박이 내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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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癸巳/雨雹。

우박이 내렸다.


세자가 태상전에 조회하며 부(府)를 설치하자고 건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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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世子朝太上殿。 世子告以建宮立府之意, 太上王曰: “寡人自戊寅年封太上王, 不建府今已三載矣, 殊無遺闕, 何必更立府爲!”

세자가 태상전(太上殿)에 조회하였다. 세자가 궁(宮)을 짓고 부(府)를 세울 뜻을 고하니, 태상왕이 말하였다.

"과인이 무인년에 태상왕으로 봉해진 뒤부터 부(府)를 세우지 않은 지가 이제 이미 3년이나, 조금도 빠뜨리거나 궐하는 것이 없었으니, 무얼 반드시 다시 부(府)를 세우겠느냐?"


이달에 가뭄과 역질로 백성들이 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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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是月, 旱, 中外多疫, 民夭(扎)〔札〕。

이달에 가물고 중외(中外)에 역질(疫疾)이 많아서 백성들이 죽었다.


二年 六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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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月 1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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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상왕의 궁을 세워 덕수궁이라 하고 부를 세워 승녕부라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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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甲午〕/建太上宮號曰德壽, 府曰承寧。 世子詣太上殿, 更請建府, 太上王曰: “前朝恭愍王之母洪氏, 雖婦人而立府曰崇敬, 庶事盡備, 古法不可廢也。 然今三年不立府, 服飾膳羞, 亦無闕乏。 今更建府, 於我何益!” 是日, 號太上宮曰德壽, 立府曰承寧, 班次三司之下。 以禹仁烈爲判事, 孫興宗、鄭龍壽爲尹, 備置少尹、判官、丞、注簿各二員。 仁烈等詣太上殿謝恩, 太上王怒稍解。

태상궁(太上宮)의 호(號)를 세워 ‘덕수궁(德壽宮)’이라 하고, 부(府)를 ‘승녕부(承寧府)’라 하였다. 세자가 태상전(太上殿)에 나아가 다시 부(府)를 세우기를 청하니, 태상왕이 말하였다.

"고려 공민왕(恭愍王)의 어머니 홍씨(洪氏)는 비록 부인이더라도 부(府)를 세워 숭경부(崇敬府)라 하고, 여러 가지 일을 다 갖추었으니, 예전 법을 폐지할 수는 없다. 그러나, 지금 3년이 되도록 부(府)를 세우지 않았어도 복식(服飾)과 선수(膳羞)가 또한 궐하고 떨어지는 것이 없었다. 지금 다시 부를 세우더라도 내게 무슨 보탬이 있겠는가?"

이날 태상궁을 덕수궁(德壽宮)이라 이름하고, 부를 세워 승녕부(承寧府)라 하고, 반차(班次)를 삼사(三司)의 아래에 두고, 우인렬(禹仁烈)로 판사(判事)를 삼고, 손흥종(孫興宗)·정용수(鄭龍壽)로 윤(尹)을 삼고, 소윤(少尹)·판관(判官)·승(丞)·주부(注簿) 각각 2원(員)을 비치하였다. 우인렬 등이 태상전(太上殿)에 나아가 사은(謝恩)하니, 태상왕의 노여움이 조금 풀렸다.


공신이 아닌데도 군에 봉했던 것은 모두 없애고, 권중화·이거인 등을 모두 치사하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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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非功臣而封君者皆罷。 以權仲和爲判門下府事致仕, 李居仁、權禧、韓蕆、崔永沚、慶補皆爲判三司事致仕。

공신이 아닌데도 군(君)에 봉해진 자는 모두 파하고, 권중화(權仲和)로 판문하부사(判門下府事)를 삼아 치사(致仕)하게 하고, 이거인(李居仁)·권희(權禧)·한천(韓蕆)·최영지(崔永沚)·경보(慶補)를 모두 판삼사사(判三司事)를 삼아 치사(致仕)하게 하였다.


환왕의 진전을 계성전이라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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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號桓王眞殿, 爲啓聖殿。

환왕(桓王)의 진전(眞殿)을 이름하여 계성전(啓聖殿)이라 하였다.


좌정승 성석린, 우정승 민제에게 금대를 각각 1요씩 하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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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賜左政丞成石璘、右政丞閔霽金帶各一腰。

좌정승 성석린(成石璘)·우정승 민제(閔霽)에게 금대(金帶)를 각각 1요(腰)씩 하사하였다.


대간에서 이거이와 이저의 휘하에 있는 마필의 수를 제한하자고 건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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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臺諫請定李居易及佇伴人馬匹之數。 大司憲權近、左散騎朴訔等交章上言:

政令不信, 黜陟不明, 此國家之弊政也。 前者, 臣等交章, 請罷私兵, 又請宗親不任以事, 欲使勳親, 永保富貴, 殿下兪允, 定以爲法, 雖至萬世, 所當謹守而無墜者也。

領雞林府事李居易、領完山府事李佇等, 恃寵驕蹇, 恨釋兵權, 群聚謗議, 敢發不道之言。 有是心, 故有是言, 久畜不泄, 必動於惡, 禍亂之生, 不可不慮, 故臣等又請安置于外, 使其悔悟自新, 以獲保全, 殿下明斷, 亦依所申。 居易等苟知人臣之義, 所當汗慄請罪, 自退于外, 以竢上命可也, 乃敢偃然, 傲上從康, 不卽發行, 掩匿己罪, 欲與臺諫辨明。 殿下寬仁, 不忍輕絶, 乃召臣等于庭, 詰問其由。 及至罪狀明著, 當得重譴, 殿下屈法伸恩, 授以藩屛重任。 彼乃驕悍自若, 不知辭避, 多率私兵鷹犬以行, 所過州郡驛路, 支費甚繁。 況其所住雞林、完山, 將何以堪之哉! 居易又將上妓重千金者, 擅自率行, 絃管之具, 靡不持載。 其驕恣無恥, 不畏公法, 至如此極, 豈有奉法修職尊主庇民之心哉? 到官之後, 聲色之娛, 畋獵之行, 軍官僕從之費, 鷹犬馬匹之養, 凡所以爲民害者, 豈可勝言! 及今不制, 至其弊積罪著, 不審殿下, 將何以處之? 前者殿下, 旣定宗親不任以事之法, 不日之間, 乃授外寄, 政令不信, 無甚於此。 居易、佇等, 初違上命, 不欲釋兵, 又發狂言, 以被彈劾, 請置于外, 殿下旣允之後, 敢欲辨明, 其事益著, 不能復辨, 欺罔之罪, 亦所難逃。 且當詰問臺諫之時, 潛令私伴, 遣入闕內, 至夜不出, 窺伺動靜, 其心難測。 如斯罪愆, 皆置勿問, 反授巨鎭, 黜陟不明, 無甚於此。 伏惟殿下, 上爲國家, 示其法令之明信, 下爲居易等, 慮其富貴之安保, 收還外寄, 安置私莊, 使其懲艾自新, 永無犯法之患, 則彼得優游自逸, 與國咸休, 而殿下保全宗親之道, 亦永終而無虧矣。

命除他事, 伴人馬匹數, 一依在前府尹之例, 鷹犬幷禁。 又臺諫交章上言: “李居易以判門下, 斥守雞林, 率上妓重千金赴任, 於法不當。 請居易、佇等罷任, 安置私莊, 重千金還定其役。” 不允。 臺諫交章上言:

臣等累次交章, 請解居易、佇外任之事, 蓋謂法已定者, 不可以變, 罪已彰者, 不可以任。 二者皆是毁法亂紀之事。 國勢衰替, 職此之由。 臣等職在言責, 不敢不陳, 殿下乃以勳親之故, 不忍遽釋其任, 臣等復稽古實, 仰瀆聰聞。 昔舜封其弟象於有庳, 使吏治之, 象不得有爲。 論者以爲封之有庳, 富貴之也; 使吏治之, 不得有爲者, 是不任以事, 而保全之也。 故舜之處象, 仁之至而義之盡, 萬世之所當法也。 鄭莊公封其弟叔段於大邑, 縱使失道, 以至於亂, 然後討之。 論者譏其不早爲之所, 養成段惡, 萬世之所當戒也。 殿下苟以佇之爲親, 不忍置之私莊, 宜以大舜爲法, 莊公爲戒, 仍以爲領完山府事, 以食其俸, 毋令煩以府事, 而委判官, 專治府事, 則合於大舜處象之道矣。 又按宋朝宰相呂惠卿, 以太尉責授建寧節度, 本州安置, 不得簽書公事。 蓋大臣被譴, 不欲廢黜, 又不宜任之以事, 故有此命。 雖出一時之權宜, 亦可爲後世之法。 殿下於居易, 亦以勳貴, 不忍置之私莊, 宜法宋朝呂惠卿故事, 仍以居易領雞林府事, 安置其府, 不治其事, 使其判官, 專治府事, 則不失殿下優待勳親, 不忍廢黜, 授以爵位之恩, 亦不失國家欲保勳親, 不任以事, 已定之法。 且犯法者, 不得以寵而幸免; 挾貴者, 不得以勢而自肆。 當時之弊, 不及於其民, 後日之患, 永絶於其身, 一擧而數美幷焉。 伏惟殿下兪允焉。

申判: “依所申私莊安置。”

대간(臺諫)에서 이거이(李居易)와 이저(李佇)의 반인(伴人)들의 마필(馬匹) 수를 한정하도록 청하였다. 대사헌 권근(權近)과 좌산기(左散騎) 박은(朴訔) 등이 교장(交章)하여 상언(上言)하였다.

"정령(政令)이 미덥지 못하고 출척(黜陟)이 밝지 못하면, 이것이 국가의 폐정(弊政)입니다. 전자에 신 등이 교장(交章)하여 사병(私兵)을 혁파하기를 청하고, 또 종친에게 일을 맡기지 말기를 청하여, 공신과 종친으로 하여금 길이 부귀를 보전하게 하였는데, 전하께서 유윤하시고 정(定)하여 법으로 삼았으니, 비록 만세에 이르더라도 마땅히 삼가 지키고 없애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영계림부사(領雞林府事) 이거이(李居易)와 영완산부사(領完山府事) 이저(李佇) 등이 총애를 믿고 교만을 부리고 병권을 놓는 것을 한하여, 여러 사람이 모여서 비방하고 의논하여 감히 부도(不道)한 말을 발하였으니, 이런 마음이 있기 때문에 이런 말을 한 것입니다. 오래 쌓이고 내보내지 못하면, 반드시 악에 동(動)하는 것이니, 화란이 생길 것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신 등이 또 외방에 안치하기를 청하여 뉘우치고 깨달아 스스로 새로워져서 보전을 얻게 하였는데, 전하가 밝게 결단하시어 또한 아뢴 것을 의윤(依允)하였습니다. 이거이 등이 진실로 신하의 도리를 안다면, 마땅히 벌벌 떨고 두려워하여, 죄를 청하여 스스로 외방으로 물러가서 임금의 명령을 기다리는 것이 옳은데, 감히 거만하게도 임금을 업신여겨 종편(從便)하라는데도 즉시 출발하지 않고, 자기 죄를 가리우고 숨겨 대간(臺諫)과 변명을 하고자 하였습니다. 전하가 너그럽고 어지시어 차마 가볍게 끊지 못하고, 이에 신 등을 뜰에 불러서 그 이유를 힐문(詰問)하시었습니다. 죄상(罪狀)이 밝게 나타나서 중한 견책(譴責)을 당하기에 이르러, 전하가 법을 굽히고 은혜를 베풀어 번병(藩屛)의 중임(重任)을 제수하셨습니다. 저들이 교만하고 흉포한 것이 전과 다름 없어서 사양하고 피할 줄을 알지 못하고, 사병(私兵)과 응견(鷹犬)을 많이 거느리고 행(行)하여, 지나는 주군(州郡)의 역로(驛路)에서 지급(支給)하는 비용이 심히 많았으니, 하물며, 그들이 머무르는 계림(雞林)·완산(完山)이 장차 어떻게 견디겠습니까? 이거이가 또 상기(上妓) 중천금(重千金)이란 자를 임의로 데리고 행(行)하여 관현(管絃)의 악기들을 가지거나 싣지 않은 것이 없었습니다. 그 교만 방자하고 부끄러움이 없고 공법(公法)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이렇게 극도에 이르렀으니, 어찌 법을 받들고 직책을 닦아 임금을 높이고 백성을 덮어줄 마음이 있겠습니까? 관(官)에 도착한 뒤에도 성색(聲色)을 즐기는 것과 전렵(畋獵)을 행하는 것과 군관(軍官)·복종(僕從)의 비용과 응견(鷹犬)·마필(馬匹)의 먹이 등, 무릇 백성의 해가 되는 것을 어찌 다 말하겠습니까?

지금에 이르러 제어하지 않아, 폐해(弊害)가 쌓이고 죄악이 나타남에 이르면, 알지 못하거니와 전하가 장차 어떻게 조처하시겠습니까? 전자에 전하가 이미 종친에게 이를 맡기지 않는 법을 정하시고, 며칠이 못 되는 사이에 외임[外寄]을 제수하시니, 정령(政令)이 미덥지 못한 것이 이보다 심할 수가 없습니다. 이거이·이저 등이 처음에 성상의 명령을 어기고 군사를 내놓으려 하지 않다가, 또 미친 말을 발(發)하여 탄핵을 당하였습니다. 외방에 안치하도록 청하여 전하가 이미 윤허하신 뒤에도, 감히 변명을 하고자 하다가 그 일이 더욱 드러나서 다시 변명을 하지 못하였으니, 기망(欺罔)한 죄를 또한 피하기 어렵습니다. 또 대간을 힐문(詰問)할 때를 당하여, 가만히 사반(私伴)을 궐내(闕內)에 들여보내어 밤이 되도록 나가지 않고 동정(動靜)을 엿보게 하였으니, 그 마음을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이와 같은 죄과를 모두 내버려두어 묻지 않고, 도리어 거진(巨鎭)에 제수하였으니, 출척(黜陟)이 밝지 않은 것이 이보다 심한 것이 없습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전하는 위로 국가를 위하여 법령의 밝고 미더움을 보이고, 아래로 이거이 등을 위하여 그 부귀(富貴)를 안전하게 보전할 것을 생각하여, 외임[外寄]의 직책을 거두어 들이고 사사 전장(田莊)에 안치해서, 허물을 징계하게 하고 스스로 새로워져서 길이 법을 범하는 근심이 없게 하면, 저들은 한가롭게 놀 수 있어 스스로 편안하여 나라와 더불어 즐거움을 함께 할 것이요, 전하가 종친을 보전하는 도리도 또한 길이 다하여져서 결함이 없을 것입니다."

임금이 명령하여 다른 일은 그만두게 하고, 반인(伴人)과 마필(馬匹)의 수는 한결같이 종전에 있었던 부윤(府尹)의 예에 의하고, 응견(鷹犬)은 모두 금하도록 하였다. 또 대간이 교장(交章)하여 상언(上言)하였다.

"이거이가 판문하부사(判門下府事)에서 폄척(貶斥)되어 계림 부사로 가는데, 상기(上妓) 중천금(重千金)을 데리고 부임하였으니, 법에 부당한 일입니다. 청하건대, 이거이·이저 등은 직임을 파면하여 사사 전장(田莊)에 안치하고, 중천금은 도로 그 역(役)에 정(定)하소서."

임금이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대간이 교장(交章)하여 상언(上言)하였다.

"신 등이 여러 차례 교장(交章)하여 이거이와 이저의 외임(外任)의 직사를 해면(解免)하기를 청하였습니다. 대개 법이 이미 정하여진 것은 변할 수가 없고, 죄가 이미 나타난 것은 일을 맡길 수가 없다고 합니다. 두 가지가 모두 법을 무너뜨리고 기강을 어지럽히는 일이므로, 국세(國勢)가 쇠(衰)하여 없어지는 것이 곧 이 때문입니다. 신 등이 직사가 언책(言責)에 있으니, 감히 진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전하가 이에 훈친(勳親)인 연고로 갑자기 그 직임을 해면시키지 못하시니, 신 등이 다시 옛 사실을 상고하여 우러러 총문(聰聞)을 더럽힙니다. 옛날 순(舜)임금이 그 아우 상(象)을 유비(有庳)에 봉하고, 관리를 시켜 다스려서 상(象)은 하는 일이 없게 하였는데, 논하는 자가 말하기를, ‘유비(有庳)에 봉한 것은 부귀하게 한 것이요, 관리를 시켜 다스리어 하는 일이 없게 한 것은, 이것은 일을 맡기지 아니하여 보전하게 한 것이다.’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순(舜)임금이 상(象)을 조처한 것은 인(仁)을 지극히 한 것이고, 의(義)를 곡진히 한 것이니, 만세에 마땅히 본받을 일입니다. 정(鄭)나라 장공(莊公)이 그 아우 숙단(叔段)을 큰 고을에 봉하여 놓아두어 도를 잃게 하여서 난에 이른 연후에 쳤으니, 의논하는 자가 장공이 일찍 조처하지 않고 숙단의 죄악을 양성한 것을 기롱하였으니, 만세에 마땅히 경계하여야 할 일입니다. 전하가 진실로 이저가 친척인 때문에 차마 사사 전장(田莊)에 안치하지 못하신다면, 마땅히 대순(大舜)으로 법을 삼고 장공(莊公)으로 경계를 삼아, 그대로 영완산부사(領完山府事)를 시켜 그 봉록을 먹게 하고, 부(府)의 일을 맡기지 말고 판관(判官)에게 위임하여 오로지 부의 일을 다스리게 하면, 대순(大舜)이 상을 조처한 도에 합할 것입니다. 또 상고하건대, 송(宋)나라 조정의 재상 여혜경(呂惠卿)[53]이 태위(太尉)로서 견책을 당하여 건녕 절도(建寧節度)에 제수되었는데, 본주(本州)에 안치하고 공사(公事)를 첨서(簽書)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대개 대신이 견책을 당하면 폐출(廢黜)할 수가 없고, 또 일을 맡기는 것이 마땅치 않기 때문에, 이러한 명령이 있은 것입니다. 비록 일시의 권의(權宜)에서 나온 것이나, 또한 후세의 법이 될 만합니다. 전하가 이거이에 대하여 또한 훈신(勳臣)인 때문에 차마 사사 전장(田莊)에 안치하지 못하신다면, 마땅히 송조(宋朝) 여혜경(呂惠卿)의 고사(故事)를 본받아서, 그대로 이거이를 영계림부사(領雞林府事)로 삼아서 그 부(府)에 안치하고, 일을 다스리지 못하게 하여 판관(判官)으로 하여금 부의 일을 전적으로 다스리게 한다면, 전하가 훈친(勳親)을 우대하여 차마 폐출하지 못하고 작위(爵位)를 주는 은혜를 잃지 않을 것이요, 또한 국가에서 훈친을 보전하고자 하여 일을 맡기지 않는다는 이미 정해진 법을 잃지 않을 것입니다. 또 법을 범한 자가 총애로 요행히 법을 면할 수 없고, 권귀(權貴)를 낀 자가 세력을 가지고 스스로 방자하지 못한다면, 당시(當時)의 폐해(弊害)가 백성들에게 미치지 않고, 후일의 환(患)이 영원히 그 몸에서 없어질 것입니다. 한 가지 일을 하여서 여러 가지 아름다운 일을 아울러 보게 될 것입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유윤(兪允)하소서."

신판(申判)[54]에서 아뢴 바에 의하여 사사 전장(田莊)에 안치하도록 하였다.


6月 2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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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석린이 극심한 가뭄에 책임을 지고 사면하길 청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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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乙未/小雨。 時方旱甚, 石璘言於上曰: “天久旱不雨, 臣未能燮理愆伏之罪也。 請免官謝之。” 上善其言。

비가 조금 내렸다. 이때에 바야흐로 가뭄이 심하였으므로, 성석린(成石璘)이 임금에게 말하기를,

"하늘이 오래 가물고 비가 내리지 않으니, 신이 섭리(爕理)를 잘 하지 못하여 음양(陰陽)이 조화하지 못한 죄입니다. 벼슬을 사면하여 사죄하기를 청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 말을 착하게 여겼다.


사헌부에서 장사길·장사정 등의 비행을 열거, 죄를 청했으나 윤허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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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司憲府上言請張思吉、思靖等罪, 不允。 疏曰:

花山君張思吉及其弟思靖等, 生長邊鄙, 習於武事, 不識義理, 性且奸黠, 其心難保。 思靖尤爲殘暴, 以其父烈防禦之功, 父子兄弟, 相繼爲萬戶。 戊辰回軍之時, 太上殿下以爲, 不可全付邊境於奸黠難保之人, 率思吉、思靖而來京, 授職厚待。 思吉等當開國之時, 同心翊戴, 得與勳盟, 位至宰相。 思靖恃寵驕恣, 打殺無辜, 罪惡深重, 乃以功臣, 止流外方, 俄而從便, 還歸義州。 思吉當懷安作亂之時, 潛懷異心, 中立觀變, 情狀現露, 亦以功臣, 止令付處, 未幾宣喚復職。 聖恩深重, 宜益謹愼侍衛, 反懷憤怨, 妄托母疾而歸。 今當罷私兵之時, 思吉與思靖, 多聚奸猾之人, 稱爲伴儻, 成群畋獵, 擅行威福, 凌辱守令, 役使良民, 一如(奴肄)〔奴隷〕, 一方人民, 擧皆服從, 多行賄賂, 其罪一也。 外方禁酒, 已有條令, 旁近守令及軍民人等, 畏其威勢, 爭持酒肉, 設宴縱飮, 其罪二也。 聽妖僧地動誑誘, 破人家産, 多行不法, 其罪三也。 率軍馬越江畋獵, 累日留宿, 因此往來, 人命溺死, 其罪四也。 當農月率其妻妾, 往返溫井, 車騎從徒, 擬於車駕, 所過民戶, 皆被侵擾, 道旁禾穀, 盡行踏損, 其罪五也。 思吉等狼子野心, 實所難保, 不顧國家之恩, 俾居隣境巨鎭, 將來之患, 不可不慮。 請收思吉、思靖等職牒, 其作弊所犯及信惑妖僧譎謀事狀鞫問, 依律論罪。 將其母妻一族等, 移置下道, 其副萬戶之任, 擇有材智朝官, 依上萬戶例差遣。

申判: “待上京更議, 姑勿擧論。”

사헌부에서 상언(上言)하여 장사길(張思吉)·장사정(張思靖) 등의 죄를 청하니,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소(疏)는 이러하였다.

"화산군(花山君) 장사길(張思吉)과 그 아우 장사정(張思靖) 등은 변방에서 생장하여 무사(武事)에만 익혀 의리를 알지 못하고, 성질이 또 간악하여 그 마음을 보증하기 어려운데, 장사정이 더욱 잔인하고 포악합니다. 그 아비 장열(張烈)이 북방을 방어한 공으로, 부자 형제가 서로 이어 만호(萬戶)가 되었습니다. 무진년에 회군(回軍)할 때에 태상 전하께서 생각하시기를, ‘간악하여 보증하기 어려운 사람에게 변경(邊境)을 온전히 맡길 수 없다.’고 하여, 장사길·장사정을 거느리고 서울에 와서 관직을 주어 후대하였습니다. 장사길 등이 개국(開國)할 때를 당하여 마음을 같이하여 돕고 추대하여서, 훈맹(勳盟)에 참여하여 지위가 재상에 이르렀습니다. 장사정이 총애를 믿고 교만 방자하여 죄 없는 사람을 때려 죽이어 죄악이 매우 중한데, 공신이라 하여 다만 외방에 귀양보내고, 조금 뒤에 종편(從便)하여 의주(義州)에 돌아가게 하였습니다. 장사길은 회안군(懷安君)이 난을 일으킬 때를 당하여, 속으로 다른 마음을 품고 중립을 지키고 변을 관망하다가 정상이 드러났는데, 또한 공신이라 하여 다만 부처(付處)하게 하였습니다. 얼마 아니 되어 소환(召喚)해 복직(復職)시켰으니, 성은(聖恩)이 깊고 중(重)하였습니다. 마땅히 더욱 근신하여 시위하여야 할 터인데, 도리어 분노와 원망을 품고 어미의 병을 거짓으로 칭탁하고 돌아갔습니다. 지금 사병(私兵)을 혁파할 때를 당하여, 장사길·장사정이 간사하고 교활한 사람을 많이 모아 반당(伴儻)이라 일컫고, 떼를 지어 사냥하면서 마음대로 위복(威福)을 자행하여, 수령(守令)을 능욕하고 양민(良民)을 사역시키기를 한결같이 노예처럼 하였으므로, 한 지방의 인민들이 모두 복종하여 뇌물을 많이 바쳤으니, 그 죄가 한 가지요, 외방에서 금주(禁酒)하는 것은 이미 조령(條令)이 있는데, 근방의 수령과 군민(軍民)들이 그 위세를 두려워하여, 다투어 술과 고기를 가지고 연회를 베풀어 마음껏 마시었으니, 그 죄가 두 가지요, 요승(妖僧)의 지진이 일어난다는 허튼소리에 이끌려 남의 가산(家産)을 부수고 불법한 일을 많이 행하였으니, 그 죄가 세 가지요, 군사를 거느리고 강(江)을 건너가 사냥하여 여러 날을 유숙하였는데, 이러한 왕래로 인하여 사람을 물에 빠져 죽게 하였으니, 그 죄가 네 가지요, 농삿달을 당하여 처첩(妻妾)을 거느리고 온정(溫井)에 왕복하였는데, 수레와 말과 수행하는 무리가 거가(車駕)와 비슷하여, 지나는 곳의 민호(民戶)가 모두 침요(侵擾)를 당하고, 길 옆의 화곡(禾穀)을 모두 짓밟아 손상시켰으니, 그 죄가 다섯 가지입니다. 장사길 등의 이리 같은 야심은 실상 보증하기 어려우며, 국가의 은혜를 돌아보지 않는데, 인경(隣境)의 거진(巨鎭)에 있게 하는 것은 장래의 환(患)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청하건대, 장사길·장사정 등의 직첩(職牒)을 회수하고, 그 작폐(作弊)하여 범한 것과 요승(妖僧)의 간사한 음모를 혹신(惑信)한 사상(事狀)을 국문(鞫問)하여, 율에 의하여 논죄하고, 그 어미와 처(妻) 일족은 하도(下道)에 옮겨 두고, 부만호(副萬戶)의 직임은 재주와 지략이 있는 조관(朝官)을 택하여, 상만호(上萬戶)의 예에 의하여 임명하여 보내소서."

신판(申判)에서 서울에 올라오는 것을 기다려서 다시 의논하고 아직은 거론하지 말도록 하였다.


사헌부에서 삼군 총제 김영렬이 규정을 어겼다고 죄를 청했으나 용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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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司憲府請三軍摠制金英烈罪, 原之。 見任官歸寧掃墳, 必皆辭職, 然後出外, 《六典》所載。 英烈欲如黃州, 娶柳曼殊之女, 托以治病溫井, 不辭職而行, 竟不得柳氏而還, 憲司劾之。 上書請罪, 世子曾知其故, 以聞于上, 免其罪。

사헌부에서 삼군 총제(三軍摠制) 김영렬(金英烈)의 죄를 청하니, 용서하였다. 현임관으로서 부모를 뵈러 가든지 성묘를 갈 때에는, 반드시 모두 사직(辭職)한 연후에 외방에 나가도록 《육전(六典)》에 실려 있는데, 김영렬이 황주(黃州)에 가서 유만수(柳曼殊)의 딸에게 장가들고자 하여, 온정(溫井)에 가서 병을 치료한다고 칭탁하고 사직하지 않고 갔다가, 필경은 유씨(柳氏)를 얻지 못하고 돌아왔었다. 헌사에서 탄핵하여 상서(上書)하고 죄주기를 청하였는데, 세자가 일찍이 그 연고를 알았으므로 임금에게 아뢰어 그 죄를 면하게 하였다.


까마귀떼가 5월부터 6월까지 백록산에 모여 지저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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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群烏自五月至六月, 聚噪白鹿山。

뭇 까마귀가 5월부터 6월까지 백록산(白鹿山)에 모여서 지저귀었다.


경연에서 임금이 탄일에 각도 방물전을 없애고자 하다. 문관에게 중시를 보이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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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御經筵。 禮曹上誕日各道進獻方物狀, 上曰: “誕日各道方物箋, 無補於治。 況盛農時, 其弊甚多, 欲除之。” 知經筵事河崙進曰: “誕日方物箋, 自古有之, 不可廢也。” 都承旨鄭矩, 亦以崙意啓, 從之。 河崙、李詹等, 進講《通鑑綱目》。 訖, 崙因言於上曰: “大抵儒者登科, 則棄卷不講, 及試文官, 則多不稱職。 自今各年及第, 悉令重試, 以備擢用。” 上然之。

경연(經筵)에 나아갔다. 예조에서 탄일(誕日)에 각도에서 진헌(進獻)한 방물장(方物狀)을 올리니, 임금이 말하기를,

"탄일의 각도 방물전(方物箋)은 정치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 없다. 하물며, 한참 바쁜 농사 때에 그 폐단이 심히 많으니, 이를 없애고자 한다."

하였다. 지경연사(知經筵事) 하윤(河崙)이 말하기를,

"탄일의 방물전은 옛날부터 있은 것이니, 폐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도승지(都承旨) 정구(鄭矩)가 또한 하윤의 뜻으로 아뢰니, 그대로 따랐다. 하윤·이첨(李詹) 등이 《통감강목(通鑑綱目)》을 진강(進講)하여 끝마치고, 하윤이 인하여 임금에게 말하였다.

"대저 유자(儒者)가 과거에 오르면 책을 버리고 강론하지 않습니다. 문관(文官)을 시험하여 보면, 직책에 마땅치 않은 이가 많습니다. 이제부터 각 해에 급제한 사람을 모두 중시(重試)를 보게 하여, 탁용(擢用)에 대비하소서."

임금이 옳게 여겼다.


오랜 가뭄 끝에 전라도에 큰 비가 내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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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時, 久旱太甚, 全羅道境內大雨。

이때에 오랜 가뭄이 너무 심하였는데, 전라도 경내에는 큰 비가 내렸다.


경연에서 지경연사 하윤이 《위기》를 진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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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御經筵。 知經筵事河崙進講《魏紀》, 至循名責實之言, 曰: “孔明此言, 蓋慮用人之不易也。 大抵爲大臣則盡其道, 爲史官則盡其職, 以至日用之間, 凡事莫不皆然。 觀孔明臨絶薦人, 不過公琰、文偉, 則當時之循名責實, 從可知也。”

경연(經筵)에 나아갔다. 지경연사(知經筵事) 하윤(河崙)이 《위기(魏紀)》를 진강(進講)하다가 순명 책실(循名責實)[55]이라는 말에 이르러서 말하였다.

"공명(孔明)[56]의 이 말은 대개 사람 쓰기가 쉽지 않은 것을 말한 것입니다. 대저 대신이 되면 그 도리를 다하고, 사관(史官)이 되면 그 직책을 다하여서, 일용(日用)의 사이에 이르기까지 범사(凡事)에 모두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공명(孔明)이 죽을 때에 임하여 사람을 천거한 것이 공염(公琰)[57]·문위(文偉)[58]에 불과한 것을 보면, 당시의 순명 책실(循名責實)한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임금이 하루 종일 반성하고 근신하니 비가 억수같이 내려 사흘 만에 그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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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左政丞成石璘、右政丞閔霽, 入便殿進戒, 上聞之, 省愼竟日, 雨作沛然, 三日乃止。 石璘等啓曰: “古者輔相之臣, 如有水旱不虞之變, 辭位以禳之。 今旱氣雖未至太甚, 其漸可畏也。 臣等顧無絲毫之補, 濫居宰輔之首, 恐未合於天心。 願擇才德全備者代之。” 又曰: “方今四方無虞, 土木不興, 庶民安業。 然而雨暘不時, 誠由臣等之無良, 深以爲懼。 且臣等優荷聖恩, 常飽酒食。 今當農月, 恒暘不雨, 恐失西成之利。 請下禁酒之令, 以省經費。” 又曰: “方今四方鉅弊, 獨奴婢一事。 太上王深知其弊, 設奴婢辨定都監, 盡令平決, 以絶爭訟。 今殿下又令司憲府, 受辨定都監誤決所志, 分付刑曹及都官決之。 臣等以爲如此, 則雖至二三年, 不能盡決, 冤抑未伸, 恐傷和氣。” 又曰: “古之王者, 每當災異, 必減膳徹樂, 恐懼修省。 願殿下於燕安之時、起居之際, 必加戒愼, 無或怠忽, 以答天意。” 上拱手斂容曰: “卿等敎我之道、愛我之誠至矣。 戒愼之事, 寡人氣質本懶, 不能勉强, 以應天心。 然卿等以赤心警予, 予豈敢不勉! 若誤決奴婢決絶事, 更議申聞。” 是日, 自朝竟夕, 恐懼修省, 未嘗少懈, 當夜雨作。

좌정승 성석린(成石璘)·우정승 민제(閔霽)가 편전(便殿)에 들어가서 진계(進戒)하였는데, 임금이 듣고서 하루 종일 반성하고 근신하니, 비가 억수같이 내려 사흘 만에 그치었다. 성석린 등이 아뢰기를,

"예전에 보상(輔相)의 신하가, 만일 수재(水災)나 한재(旱災)의 불우(不虞)의 변이 있으면, 벼슬을 사면하여 재앙이 사라지기를 빌었습니다. 지금 한기(旱氣)가 비록 극심한 지경에는 이르지 않았으나, 그 징조가 두렵습니다. 신 등이 털끝만한 조그만 도움도 없이 외람되게 재보(宰輔)의 우두머리에 있으니, 천심(天心)에 합하지 못하는가 두렵습니다. 원하건대, 재덕(才德)이 온전히 갖춰진 사람을 택하여 대신하게 하소서."

하고, 또 말하기를,

"방금 사방에 근심이 없고 토목(土木)을 일으키지 않아 백성들이 생업에 편안합니다. 그러나, 비 오고 볕이 나는 것이 제 시기를 잃으니, 진실로 신 등이 어질지 못한 까닭으로 깊이 두렵습니다. 또 신 등이 후하게 성은(聖恩)을 입어서 항상 주식(酒食)에 배부른데, 지금 농삿달을 당하여 볕만 나고 비가 오지 않아서 추성(秋成)의 이익을 잃을까 두렵습니다. 청하건대, 금주령(禁酒令)을 내려 경비를 절약하게 하소서."

하고, 또 말하기를,

"방금 사방의 큰 폐단은 오로지 노비(奴婢) 한 가지 일입니다. 태상왕께서 깊이 그 폐단을 아시고, 노비 변정 도감(奴婢辨定都監)을 설치하여 모두 공평하게 판결해서 쟁송(爭訟)이 없어지게 하였습니다. 지금 전하께서 사헌부로 하여금 변정 도감의 오결(誤決)한 소지(所志)를 받아서 형조와 도관(都官)에게 나누어 붙여 판결하게 하였습니다. 신 등은 생각하건대, 이렇게 하면, 비록 2, 3년이 되더라도 다 결단하지 못하여 원통하고 억울한 사정이 펴지지 못해서 화기(和氣)를 상할까 두렵습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예전의 왕노릇 하던 이는 매양 재이(災異)를 당하면 반드시 감선(減膳)[59]하고 철악(徹樂)[60]하고 공구(恐懼) 수성(修省)하였습니다.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조용하고 한가할 때나 기거(起居)하는 즈음에 반드시 경계하고 조심하기를 더하고, 혹시 태만하거나 소홀함이 없도록 하여 하늘의 뜻에 보답하소서."

하니, 임금이 두 손을 마주잡고 용의를 단정히 하여 말하였다.

"경 등이 나를 가르치는 도(道)와 나를 사랑하는 정성이 지극하다. 계신(戒愼)하는 일은, 과인이 기질이 본래 나태하므로 능히 면강(勉强)하여 천심(天心)에 응하지 못하지마는, 그러나, 경 등이 충심으로 나를 일깨우니, 내가 어찌 감히 힘쓰지 않겠는가! 오결(誤決)한 노비(奴婢)를 결단하는 일은 다시 의논하여 아뢰도록 하라."

이날 아침부터 저녁까지 공구(恐懼) 수성(修省)하여 조금도 게을리 하지 않으니, 밤이 되어서 비가 내렸다.


세자가 빈객 정탁과 더불어 충효의 도리를 강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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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世子與賓客鄭擢講忠孝之道。 世子與擢, 論陰陽之理、性學之要, 與夫皇王禪授之事, 漢、唐人主行事之跡, 撫掌咨嗟。 至講忠誠不二之言, 曰: “臣之爲主, 不二其心者, 在所褒奬。 往者懷安之亂, 其麾下三四人, 不顧死生, 竭力捍禦, 予甚嘉之。 予之麾下曰: ‘此人抵罪爲可。’ 予曰: ‘此非罪人, 忠臣也。 我若遭變, 麾下人不盡力以救, 可謂忠乎?’ 皆默然。” 擢對曰: “邸下此言, 可爲龜鑑。 桀犬吠堯, 非其主也。” 世子曰: “陰陽之不和, 古人以爲君臣行事之所致。” 擢對曰: “《洪範》曰: ‘王省惟歲, 卿士惟月, 庶民惟星。’ 其應雖殊, 必然之理也。” 世子曰: “人之死生有命, 非人所爲。 歲丁丑, 朴子安不克防倭, 太上王大怒, 命遣人斬之。 其子實, 吾之麾下也。 欲救其父, 哭泣來告。 予欲救之無路, 遂如南誾家議之。 誾曰: ‘使者已行矣, 奈何?’ 實於誾前大聲號哭, 予愈悲之。 還陪殿下及義安公, 啓于太上王, 幸而得生。 人子如實, 可謂孝矣。”

세자가 빈객(賓客) 정탁(鄭擢)과 더불어 충효의 도리를 강론하였다. 세자가 정탁과 더불어 음양(陰陽)의 이치와 성학(性學)의 대요(大要), 그리고 황왕(皇王)이 선위(禪位)한 일과 한(漢)나라·당(唐)나라 인주(人主)의 행사(行事)한 사적을 의논하다가 손바닥을 비비면서 차탄(嗟嘆)하였다. ‘충성하여 두 마음을 갖지 않는다’는 말을 강론하다가 말하기를,

"신하로서 임금을 위하여 그 마음을 둘로 갖지 않는 자는 포장하여야 한다. 지난번 회안군(懷安君)의 난(亂)에 그 휘하(麾下) 3, 4인이 사생(死生)을 돌아보지 않고 힘을 다하여 막아 호위하였는데, 내가 심히 아름답게 여겼다. 나의 휘하가 말하기를, ‘이 사람들은 죄를 주는 것이 가하다.’ 하였으나, 내가 말하기를, ‘이들은 죄인이 아니고 충신이다. 내가 만일 변을 만났는데 휘하 사람이 힘을 다하여 구원하지 않는다면, 충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하였더니, 모두 말이 없었다."

하니, 정탁이 대답하기를,

"저하(邸下)의 이 말씀은 귀감(龜鑑)이 될 만합니다. 걸(桀)임금의 개가 요(堯)임금에게 짖은 것은 자기 주인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하였다. 세자가 말하기를,

"음양이 조화되지 못하는 것은, 옛사람이, ‘임금과 신하의 행사(行事)가 잘못된 소치이다.’라고 하였다."

하니, 정탁이 대답하기를,

"홍범(洪範)에 말하기를, ‘왕의 잘잘못은 해[歲]로 가고, 경사(卿士)는 달[月]로 가고, 서민(庶民)은 날[星]로 간다.’ 하였으니, 그 응험이 비록 다르기는 하나 반드시 온다는 이치입니다."

하였다. 세자가 말하였다.

"사람의 죽고 사는 것은 명(命)에 있고,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정축년에 박자안(朴子安)이 왜적을 막지 못하였으므로, 태상왕께서 크게 노하시어 사람을 보내어 목을 베라고 명하시었다. 그 아들 박실(朴實)은 나의 휘하였는데, 그 아비를 구원하고자 하여 울며불며 와서 고하였다. 내가 구원하고자 하였으나, 길이 없었다. 드디어 남은(南誾)의 집에 가서 상의하니, 남은이 말하기를, ‘사자(使者)가 이미 떠났으니, 어찌하겠는가?’ 하였다. 박실이 남은의 앞에서 대성통곡 하였으므로, 내가 더욱 슬프게 여겨 돌아와 전하(殿下)와 의안공(義安公)을 모시고 태상왕께 아뢰어 요행히 살아났다. 남의 자식이 되어 박실과 같으면 효자라고 할 수 있다."


의정부에 명하여 태상전에 옥책과 금보를 갖추어 바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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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命議政府, 備進太上殿玉冊金寶。 太上王語宦者李得芬曰: “今已建我府矣, 何不成印章乎? 吾嘗見恭愍王封其母洪氏爲太后, 鑄印章, 使兩侍中, 具朝服以獻。 古禮豈可廢也?” 上聞之, 有是命。

의정부(議政府)에 명하여 태상전(太上殿)에 옥책(玉冊)과 금보(金寶)를 갖추어 바쳤다. 태상왕이 환자(宦者) 이득분(李得芬)에게 말하였다.

"지금 이미 내 부(府)를 세웠으니, 왜 인장(印章)을 만들지 않는가? 내가 일찍이 보니, 공민왕(恭愍王)이 그 어머니 홍씨(洪氏)를 태후(太后)로 봉하고, 인장을 만들어서 양(兩) 시중(侍中)으로 하여금 조복을 갖추고 바쳤었다. 옛 예(禮)인데, 어찌 폐지할 수 있겠는가?"

임금이 듣고 이러한 명령이 있었다.


권근의 건의로 다시 노비 변정 도감을 설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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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復置奴婢辨定都監。 大司憲權近等上疏言: “府所受辨定都監奴婢誤決所志, 請更立都監, 速令平決, 以伸冤抑。” 於是置都監, 分爲十五房, 以六曹、開城留後司、閣門及寺監之事簡者, 任之。

다시 노비 변정 도감(奴婢辨定都監)을 설치하였다. 대사헌 권근(權近) 등이 상소하여 말하였다.

"사헌부에서 받은 바 변정 도감이 노비(奴婢)를 오결(誤決)한 소지(所志)를, 다시 도감을 세워 속히 처결하게 하여 원통하고 억울한 사정을 펴게 하기를 청합니다."

이에 도감(都監)을 설치하여, 나누어 15방(房)을 만들고, 육조(六曹)·개성유후사(開城留後司)·각문(閣門)과 시(寺)·감(監)의 일이 간략한 자에게 맡기었다.


전라도 수군 절제사 김빈길에게 옷, 갓, 신을 하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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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賜全羅道水軍節制使金贇吉衣及笠靴。

전라도 수군 절제사(全羅道 水軍節制使) 김빈길(金贇吉)에게 옷과 갓·신을 하사하였다.


임금의 고모부 개령군 문원좌의 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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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開寧君文原佐卒。 原佐, 上之姑夫也。

개령군(開寧君) 문원좌(文原佐)가 졸(卒)하였다. 원좌는 임금의 고모부였다.


내상 하윤·조온·이직·정남진·조진·이숙번에게 양죽립과 사피화를 하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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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賜內相河崙、趙溫、李稷、鄭南晋、趙珍、李叔蕃涼竹笠、斜皮靴各一。

내상(內相) 하윤(河崙)·조온(趙溫)·이직(李稷)·정남진(鄭南晉)·조진(趙珍)·이숙번(李叔蕃)에게 양죽립(涼竹笠)과 사피화(斜皮靴)를 각각 하나씩 하사하였다.


6月 16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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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낭장 최선이 벼락을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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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己酉/震前郞將崔選。

전 낭장(郞將) 최선(崔選)이 벼락을 맞았다.


세자가 빈객 정탁과 더불어 사냥하는 일을 의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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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世子與賓客鄭擢, 論田狩之事。 世子曰: “我國家壤地褊小, 田狩之處, 皆農場也。 自鐵原以北, 漢陽以東, 擧無閑曠之地, 蒐狩則必損禾稼。 唯平州之南, 有閑曠之地百餘里, 以爲蒐狩之囿, 禁人樵採, 每歲秋冬, 蒐狩其地, 訓鍊武藝。 他處田獵, 一皆禁斷, 無乃可乎?”

세자(世子)가 빈객 정탁(鄭擢)과 더불어 사냥하는 일을 의논하다가, 세자가 말하였다.

"우리 나라는 땅이 좁아서 사냥하는 곳이 모두 농장이다. 철원(鐵原) 이북에서부터 한양(漢陽) 이동에 대개 경작하지 않는 빈 땅이 없어서, 사냥을 하면 반드시 화곡(禾穀)을 손상하게 된다. 오직 평주(平州) 남쪽에 놀고 있는 빈 땅이 1백여 리나 있으니, 그것으로 사냥하는 동산을 만들어서 사람들의 나무하고 벌채하는 것을 금하고, 매년 가을·겨울에 그곳에서 사냥을 하여 무예(武藝)를 훈련하고, 다른 곳에서 사냥하는 것을 일절 금지하는 것이 가하지 않겠는가?"


태상왕의 존호를 올리기 위해 봉숭 도감을 설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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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設封崇都監。 將以上太上王尊號也。 以政丞成石璘ㆍ閔霽、判三軍府事河崙爲提調。

봉숭 도감(封崇都監)을 설치하였으니, 장차 태상왕의 존호(尊號)를 올리려 함이었다. 정승(政丞) 성석린(成石璘)·민제(閔霽)·판삼군부사(判三軍府事) 하윤(河崙)으로 제조(提調)를 삼았다.


문하부에서 도량과 학식있는 조사 중에서 순군의 관원을 보충하기를 건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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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門下府上言請擇朝士, 以充巡軍之官。 左散騎常侍朴訔等上疏言:

竊惟巡軍, 掌巡綽捕禁, 而兼治刑獄。 一杖一訊之下, 人之死生決焉; 一言數字之間, 罪之輕重辨焉。 其任至重, 可不愼哉! 往往世系不明之人, 一字不學之輩, 僥倖冒干, 而得側於官員之列, 故雖在縲紲之中, 亦侮笑而不服。 於是訊之以難對之言, 施之以慘酷之刑, 殘虐無辜, 以傷和氣, 甚可痛也。 願自今, 巡軍官員, 必擇朝士之有器度學識者, 以差其任, 其世系不明, 一字不學之人, 請令憲司劾黜, 其法外慘酷之刑, 亦令痛禁, 以重其任, 以愼其獄。

上然之。

문하부(門下府)에서 상언(上言)하여 조사(朝士)를 택해서 순군(巡軍)의 관원으로 보충하기를 청하였다. 좌산기 상시(左散騎常侍) 박은(朴訔) 등이 상소하여 말하였다.

"가만히 생각하건대, 순군(巡軍)은 순작(巡綽)하고 포박(捕縛)하며 금지하는 것을 맡고, 겸하여 형옥(刑獄)을 다스리는데, 한번 때리고 한번 신문하는 데서 사람의 죽고 사는 것이 결정되고, 한가지 말과 몇글자 사이에 죄의 경중이 분변되므로, 그 책임이 중하니, 삼가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가끔 세계(世系)가 분명하지 못한 사람과 글자 한 자도 배우지 못한 무리가 요행으로 속여서 관원의 열에 끼기 때문에, 비록 죄인이 묶여 있는 가운데에 있더라도 또한 무시하고 비웃으면서 항복하지 않습니다. 이에 대답하기 곤란한 말로 심문하고 참혹한 형벌을 베풀어서, 죄 없는 사람을 잔혹하게 학대하므로 화기를 상하게 하니, 심히 통탄할 일입니다. 원하건대, 이제부터 순군 관원(巡軍官員)을 반드시 조사(朝士) 중에 도량과 학식이 있는 자를 뽑아서 그 책임을 맡기고, 세계(世系)가 분명치 못하거나 글자 한 자도 배우지 못한 사람은 헌사(憲司)로 하여금 핵실하여 내쫓고, 법 외의 참혹한 형벌을 또한 엄금하게 하여 그 책임을 중하게 하고, 옥사를 신중히 하게 하소서."

임금이 옳게 여겼다.


6月 19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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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의 돌에 벼락이 떨어지고, 삼각산의 큰 돌이 무너져서 무착사를 덮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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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壬子/大雨震電。 震男山石, 三角山大石崩, 壓無著寺。

비가 크게 오고 천둥하고 번개가 쳐서, 남산(男山)의 돌에 벼락이 떨어졌다. 삼각산(三角山)의 큰 돌이 무너져서 무착사(無着寺)를 덮쳤다.


6月 20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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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물이 져서 성안의 사람과 말이 많이 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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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癸丑/大水, 城中人馬漂溺甚衆。

큰 물이 져서 성안의 인마(人馬) 가운데 표류하고 빠져 죽은 것이 심히 많았다.


방간의 휘하였던 진무소 갑사 3백 인을 혁파하고, 군기와 갑옷을 모두 삼군부로 보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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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成均樂正鄭以吾上書。 略曰:

侵官之罪, 無所逃; 芻蕘之言, 有所取。 伏惟殿下, 勿以爲迂遠而不切。 夫草創與守成, 其法不同。 惟我太上王, 當前朝衰亂之季, (極)〔拯〕民塗炭, 措國盤石, 天命人心, 有不容釋。 然草創未久, 特置義興三軍府, 而宮中多養甲士, 至使勳戚, 分掌各道之兵, 如李濟、道傳、南誾者, 陰結憸利, 幾覆社稷。 殿下擧義削平之日, 宮中甲士, 倒戈而應。 由是觀之, 社稷安危, 非兵力之所能維持, 殿下之所親覩也。 且壬申之開國, 戊寅之定社, 其功烈之盛, 孰有加於殿下與東宮也哉! 芳幹不此之顧, 潛圖不軌, 禍在不測, 殿下乃命芳幹, 安置于外, 是則大舜處象之心, 又命東宮, 立爲儲副, 委以監撫之任, 此則計安國家之遠慮也。 然芳幹之黨與, 尙列中外, 至有屬甲士者, 良可慮也。 況(肄)〔隷〕于宮甲者, 非巿井無賴之徒, 必嚚悍不逞之人乎? 今也芳幹, 密邇京邑, 設有如前日之煽亂, 彼爲甲士者, 不識大義, 其足賴乎? 老子曰: “佳兵, 不祥之器, 其事好還。” 於《傳》亦曰: “兵猶火也。 不戢, 將自焚。” 此皆所鑑也。 殿下旣任東宮以撫軍, 乃於宮中, 別置三軍府鎭撫, 而多養宮甲, 東宮監撫之意安在? 願殿下, 罷宮甲之養, 周廬、陛楯, 環以司楯、成衆愛馬, 日接賢士大夫, 朝夕與居, 强於政治, 以永國祚, 幸甚。

時, 甲士多芳幹麾下人, 世子出入, 常懷戰慄, 故以吾上此書。 上見之, 謂趙溫曰: “以吾之言如何?” 溫對曰: “豈可以一儒之言, 輕罷宮甲哉!” 上曰: “以吾之言, 甚合予志。” 卽罷鎭撫所甲士三百, 軍器鎧仗, 皆送三軍府, 只留潛邸麾下百人。

성균 악정(成均樂正) 정이오(鄭以吾)가 상서(上書)하였는데, 대략은 이러하였다.

"관직을 침노한 죄는 도망할 수 없으나, 나무꾼의 말도 취할 것이 있습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오활(迂闊)하고 절실하지 않다고 여기지 마옵소서. 대저 초창(草創)과 수성(守成)이 그 법이 같지 않습니다. 우리 태상왕께서 고려의 쇠란(衰亂)한 말엽을 당하여 백성을 도탄에서 구제하고, 나라를 반석 위에 두었으니, 천명(天命)과 인심(人心)이 그만둘래야 그만둘 수 없게 되었지마는, 그러나, 초창(草創)한 지가 오래지 않았기 때문에 특별히 의흥 삼군부(義興三軍府)를 두고 궁중에 갑사(甲士)를 많이 양성하며, 훈척(勳戚)으로 하여금 각도의 군사를 나누어 맡게까지 하였습니다. 이제(李濟)·정도전(鄭道傳)·남은(南誾) 같은 자가 몰래 간사한 소인과 결탁하여, 거의 사직을 전복시킬 뻔하였습니다. 전하께서 의(義)를 토평(討平)하시던 날에, 궁중의 갑사(甲士)가 창을 거꾸로 하여 응하였습니다. 이것으로 본다면, 사직(社稷)의 안위(安危)가 병력으로 능히 유지되는 바가 아닌 것을 전하가 친히 보신 것입니다.

또 임신년의 개국(開國)과 무인년의 정사(定社)에 그 공렬(功烈)의 큰 것으로서 누가 전하와 동궁(東宮)보다 더한 이가 있겠습니까? 방간(芳幹)이 이것을 생각지 않고 몰래 불궤(不軌)한 짓을 도모하여, 화(禍)가 불측한 지경에 있었습니다. 전하가 명하여 방간(芳幹)을 외방에 안치하시니, 이것은 대순(大舜)이 상(象)을 조처한 마음씨입니다. 또 명하여 동궁(東宮)을 세워 저부(儲副)를 삼고 감무(監撫)의 책임을 맡기시니, 이것은 국가를 편안히 하는 원대한 생각이십니다. 그러나, 방간의 당여(黨與)가 아직도 중외(中外)에 자리잡고 있어 갑사(甲士)에 속하여 있는 자까지 있으니, 참으로 염려됩니다. 더군다나, 궁갑(宮甲)에 예속된 자가 시정(市井)의 무뢰배(無賴輩)가 아니면 반드시 어리석고 사나운 불령인(不逞人)입니다. 지금 방간이 서울에 매우 가깝게 있으니, 설혹 전날의 난을 선동한 것과 같은 일이 있으면, 저 갑사(甲士)로 있는 자들이 대의를 알지 못하니, 족히 믿을 수 있겠습니까? 노자(老子)가 말하기를, ‘날카로운 병기(兵器)는 상사롭지 못한 기구인데, 그 일이 되돌아오기를 좋아한다.’ 하였고, 《좌전(左傳)》에 또한 말하기를, ‘군사는 불과 같아서 그치지 않으면 장차 스스로 불탈 것이다.’ 하였으니, 이것이 모두 본받을 만한 말입니다. 전하께서 이미 동궁(東宮)에게 무군(撫軍)의 일을 맡기시고, 이에 궁중에 삼군부(三軍府) 진무(鎭撫)를 따로 두고 많은 궁갑(宮甲)을 양성하니, 동궁의 감무(監撫)하는 뜻이 어디 있습니까?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궁갑의 양성을 혁파하고 주려(周廬)[61]의 폐순(陛楯)[62]을 사순(司楯)·성중 애마(成衆愛馬)로 배치하시고, 날마다 어진 사대부(士大夫)를 접하여 조석으로 함께 있어 정치에 힘쓰시어 나라의 운수를 영구하게 하시면, 심히 다행하겠습니다."

이때에 갑사가 방간(芳幹)의 휘하 사람이 많아서, 세자가 출입할 때에 항상 전율(戰慄)을 느끼었기 때문에, 정이오가 이러한 글을 올린 것이었다. 임금이 보고 조온(趙溫)에게 이르기를,

"정이오의 말이 어떠한가?"

하니, 조온이 대답하기를,

"어찌 선비 한 사람의 말로 가볍게 궁갑(宮甲)을 혁파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정이오의 말이 심히 내 뜻에 합한다."

하고, 곧 진무소(鎭撫所) 갑사(甲士) 3백 인을 혁파하고, 군기(軍器) 개장(鎧仗)을 모두 삼군부로 보냈다. 다만 잠저(潛邸) 때의 휘하 1백 인만 머무르게 하였다.


예조에서 태상왕의 존호를 계운신무태상왕이라 올리니 그대로 따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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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禮曹進太上王尊號。 禮曹上言:

伏準議政府關, 令本曹擬議太上王尊號, 啓聞施行。 臣等竊謂, 前朝之季, 兵革競起, 民受其殃。 惟我太上殿下, 以神武之資, 摠戎中外, 削平積亂, 四方以寧, 民遂其生, 上順天命, 下得人心。 勉循勸進之誠, 肇啓熙明之運, 傳歸殿下, 式至今休。 宜上尊號曰啓運神武太上王, 以彰盛烈, 昭示永世, 具狀以聞。

王旨依申。

예조에서 태상왕의 존호(尊號)를 올렸다. 예조에서 상언(上言)하였다.

"엎드려 의정부(議政府) 관령(關令)[63]에 준(准)해서 본조에서 태상왕의 존호를 의의(擬議)하여 시행하기를 계문(啓聞)합니다. 신 등은 간절히 생각하건대, 고려 말년에 병란이 사방에서 일어나서 백성들이 그 앙화(殃禍)를 받았는데, 우리 태상 전하께서 신무(神武)하신 자품(資品)으로 중외(中外)의 군사를 통솔하여 오랜 난리를 평정해서, 사방이 평안하여지고 백성들이 잘 살게 되었습니다. 위로 천명(天命)에 순응하고 아래로 인심을 얻으시어, 왕위에 오르라고 권하는 정성을 면강(勉强)하여 좇아서, 빛나고 밝은 운수를 처음으로 열어, 전하에게 전(傳)해서 오늘의 아름다움에 이르렀습니다. 마땅히 존호를 올리기를 ‘계운 신무 태상왕(啓運神武太上王)’이라 하여, 성한 공렬(功烈)을 나타내어 밝게 영원한 세대에 보이는 것이 마땅하므로, 소장(疏狀)을 갖추어 아룁니다."

왕지(王旨)로 아뢴 대로 하도록 하였다.


하윤의 제의로 종묘 제사에 쓸 향을 받아 갈 때 행하는 예를 고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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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改宗廟祭受香禮。 判義興三軍府事河崙啓曰: “宰臣將詣宗廟受香之時, 殿下雖不能備禮親傳, 請正衣冠焚香, 致敬傳授。” 自此上正衣冠, 出寢門外, 焚香跪授, 拱立竢宰臣出門, 還入內。

종묘(宗廟) 제사에 향을 받는 예[受香禮]를 고쳤다. 판의흥삼군부사(判義興三軍府事) 하윤(河崙)이 아뢰었다.

"재신(宰臣)이 장차 종묘에 나가려 하여 향(香)을 받을 때에, 전하가 비록 예를 갖추어 친히 전(傳)하지는 못하더라도, 청하건대, 의관(衣冠)을 정제하고 분향(焚香)하여 공경을 다해 전수(傳授)하소서."

이 뒤부터 임금이 의관을 정제하고 침문(寢門) 밖에 나가서 분향(焚香)하고 꿇어앉아주고, 두 손을 맞잡고 서서 재신이 문으로 나가는 것을 기다려서 도로 입내(入內)하였다.


세자가 대학연의를 읽다가 좌보덕 서유와 더불어 사병 혁파와 관련한 문제를 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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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世子讀《大學衍義》。 與左輔德徐愈, 論握兵之弊, 至玄宗、肅宗之事, 嘆曰: “肅宗之畏李輔國, 但以輔國握兵也。 兵權之不可散在, 殷鑑如此。 且以我家之事言之, 太上王以握兵之故, 當高麗之季, 能化家爲國。 至於戊寅南、鄭之亂, 吾兄弟若不握兵, 豈能應機制變也哉? 朴苞之說懷安, 亦由其有兵權故也。 近日, 功臣三四人, 以解兵權, 怏悒不已, 臺諫請罪, 放流于外。 往日, 吾以兵權不可散在事, 諄諄面諭, 皆莫能悟。 今者唯趙英茂在平壤, 謂恨不悟世子之敎。” 徐愈對曰: “昔宋太祖平定天下, 宴將相于內。 將相曰: ‘天下平定, 宜樂也。’ 太祖曰: ‘吾則不樂也。’ 將相曰: ‘天下已定, 陛下胡不樂也?’ 太祖曰: ‘始卿等握兵, 能尊朕爲天子。 吾恐卿之麾下將士, 推卿爲天子, 亦猶卿之尊朕也。’ 功臣將相叩頭拜謝, 卽日上印綬解兵權。 今世子之言, 與宋祖一也。 但功臣將相, 不及宋祖之時矣。”

세자가 《대학연의(大學衍義)》를 읽다가 좌보덕(左輔德) 서유(徐愈)와 더불어 병권을 잡는 폐단을 논하였다. 당나라 현종(玄宗)·숙종(肅宗)의 일에 이르러 탄식하였다.

"숙종이 이보국(李輔國)[64]을 두려워한 것은, 다만 이보국이 병권을 잡았었기 때문이었다. 병권이 흩어져 있게 할 수 없는 것이 감계(鑑戒)가 이와 같다. 또 우리 집 일로 말하더라도 태상왕께서 병권을 잡았기 때문에, 고려(高麗)의 말년을 당하여 능히 화가위국(化家爲國) 할 수 있었던 것이고, 무인년 남은(南誾)·정도전(鄭道傳)의 난에 이르러서도 우리 형제가 만일 군사를 가지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사기(事機)에 응하여 변을 제어할 수 있었겠는가? 박포(朴苞)가 회안군(懷安君)을 꾄 것도 또한 병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근일에 공신 3, 4인이 병권을 내놓게 된 것을 불평 불만하여 마지않았으므로, 대간(臺諫)이 죄주기를 청하여 외방에 귀양보내었다. 지난날에 병권은 흩어져 있을 수 없다는 일 때문에 내가 면대하여 간절하게 일렀건마는, 모두 능히 깨닫는 이가 없었다. 지금에 와서 오직 조영무(趙英茂)가 평양(平壤)에 있으면서 말하기를, ‘세자의 가르침을 깨닫지 못한 것이 한이다.’고 한다."

서유가 대답하였다.

"옛날에 송(宋)나라 태조(太祖)가 천하를 평정하고 궁내에서 장상(將相)에게 잔치하였는데, 장상(將相)들이 말하기를, ‘천하가 평정되었으니 즐기심이 마땅합니다.’ 하니, 태조가 말하기를, ‘나는 즐겁지 않다.’ 하였습니다. 장상들이 말하기를, ‘천하가 이미 정(定)하여졌는데, 폐하께서는 왜 즐겁지 않으십니까?’ 하니, 태조가 말하기를, ‘처음에 경들이 병권을 쥐었기 때문에 능히 나를 추대하여 천자를 삼았으니,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경의 휘하 장사(將士)들이 경을 추대하여 천자를 삼기를, 또한 경이 짐(朕)을 추대한 것 같이 할 것이다.’ 하였습니다. 공신·장상이 머리를 조아리고 절하여 사례하고, 즉일로 인수(印綬)를 올리고 병권을 내놓았습니다. 지금 세자의 말씀이 송나라 태조와 같습니다. 다만 공신(功臣)과 장상(將相)이 송나라 태조 때에 미치지 못합니다."


김영렬의 고신 서경과 관련하여 사헌 잡단 김질 등 10여 명이 귀양·파직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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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流司憲雜端金晊于忠州, 監察宋興、成揜、柳思訥于外方, 罷監察徐宗俊等十人職。 初, 雜端尹向, 署出三軍摠制金英烈告身, 兼大司憲權近、中丞安省、雜端金晊議曰: “英烈告身, 論議不均, 向署出之, 當劾問。” 厥後晊先仕本府劾向。 門下府以獨行(殫劾)〔彈劾〕爲罪, 反劾晊, 而不問近與省。 監察興、思訥、揜等十二人議曰: “權近、安省, 與晊同議劾向, 而晊獨被劾於門下府, 於義未便。” 方本府齊坐之日, 於近與省不行祗迎禮, 上聞之怒, 令門下府劾問其故。 門下府劾興等, 上疏以爲: “大司憲權近, 孚於衆望者也。 今興等欲誣陷之, 請將興、思訥、揜等及雜端金晊等收職牒, 鞫問竄黜。 其餘宗俊等少不更事者, 但收職牒遠流。” 從之。 晊ㆍ興等四人, 私莊付處; 宗俊等, 皆罷職。

사헌 잡단(司憲雜端) 김질(金晊)을 충주(忠州)에 귀양보내고, 감찰(監察) 송흥(宋興)·성엄(成揜)·유사눌(柳思訥)을 외방에 귀양보내고, 감찰(監察) 서종준(徐宗俊) 등 10인을 파직시켰다. 처음에 잡단(雜端) 윤향(尹向)이 삼군 총제(三軍摠制) 김영렬(金英烈)의 고신(告身)을 서출(署出)하였는데, 겸 대사헌(兼大司憲) 권근(權近)·중승(中丞) 안성(安省)·잡단 김질(金晊)이 의논하기를,

"김영렬의 고신은 의논이 균일하지 않았는데, 윤향이 서출(署出)하였으니, 마땅히 탄핵하여 물어야 한다."

하였다. 그 뒤에 김질이 먼저 본부(本府)에 사진(仕進)하여 윤향을 탄핵하였다. 문하부(門下府)에서 단독으로 탄핵을 행한 것을 죄를 삼아 도리어 김질을 탄핵하고, 권근과 안성은 묻지 않았다. 감찰 송흥·유사눌·성엄 등 12인이 의논하기를,

"권근·안성이 김질과 더불어 윤향을 탄핵하기를 함께 의논하였는데, 김질만 홀로 문하부에 탄핵을 당하니, 의리에 온당치 않다."

하고, 바야흐로 본부(本府)에서 제좌(齊坐)[65]하는 날에 권근과 안성에게 지영례(祇迎禮)[66]를 행하지 않았다. 임금이 듣고 노하여 문하부로 하여금 그 까닭을 핵문(劾問)하게 하니, 문하부에서 송흥 등을 탄핵하여 상소하였다.

"대사헌 권근은 여러 사람의 여망에 부합한 사람입니다. 지금 송흥의 무리가 무함하고자 하였습니다. 청하건대, 송흥·유사눌·성엄 등과 잡단 김질 등을 직첩을 회수하여 국문(鞫問)해 귀양보내고, 그 나머지 서종준 등, 조금도 일의 경험이 없는 사람은 다만 직첩만 거두고 멀리 귀양보내소서."

임금이 그대로 따라서 김질·송흥 등 4인은 사사 전장(田莊)에 부처(付處)하고, 서종준 등은 모두 파직하였다.


二年 秋七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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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月 1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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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이 동북방 사이로 떨어졌는데 크기가 물동이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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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甲子朔/流星落東北間, 大如盆。

유성(流星)이 동북방(東北方) 사이로 떨어졌는데, 크기가 물동이만 하였다.


탄일이므로 하례를 받는데 일본의 사신도 또한 9품 말미에 들어와 행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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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以誕日受賀, 日本使亦入, 九品班末行禮。 舊制, 誕日必宴群臣, 是時, 風雨失時, 變怪屢作, 故止之。 惟世子與義安公和、寧安侯良祐、左政丞成石璘以下諸大臣, 入詣便殿, 從容論事, 仍獻壽。 酒酣, 宗親宰相以次起舞, 上與世子亦起舞, 至夜乃罷。

탄일(誕日)이므로 하례를 받았다. 일본(日本)의 사신도 또한 9품 말미에 들어와 행례하였다. 옛 제도에는 탄일에 반드시 여러 신하들에게 잔치를 하였는데, 이때는 풍우가 때를 잃고, 변괴가 여러 번 있었으므로 정지하고, 오직 세자와 의안공(義安公) 이화(李和)·영안후(寧安侯) 이양우(李良祐)·좌정승 성석린(成石璘) 이하 여러 대신이 편전(便殿)에 들어가서 조용히 일을 의논하고, 인하여 헌수(獻壽)하였다. 술이 취하니, 종친과 재상이 일어나 춤추고, 임금과 세자도 또한 일어나 춤추었다. 밤이 되어서 파하였다.


7月 2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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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에 북방에 붉은 기운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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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乙丑/曉, 北方有赤氣。

새벽에 북방에 붉은 기운이 있었다.


동북면·서북면·풍해도에 크게 황충이 일어 관리를 보내 이를 잡도록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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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ㆍ西北面、豐海道大蝗, 監司以聞, 遣使捕之。 右政丞閔霽, 方在廟堂, 戲言閔繼生任安岳時(勑)捕蝗之事, 略無憂色。

동북면(東北面)·서북면(西北面)·풍해도(豐海道)에 크게 황충이 일어, 감사(監司)가 아뢰니, 사신을 보내어 이를 잡도록 하였다. 우정승 민제(閔霽)가 마침 묘당(廟堂)에 있었는데, 민계생(閔繼生)이 안악(安岳)의 원으로 있을 때 황충을 잡던 일을 농담으로 말하며 조금도 근심하는 빛이 없었다.


세자가 존호 올리는 것을 고하기 위해 덕수궁에 조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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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世子朝德壽宮。 以告上尊號也。

세자가 덕수궁(德壽宮)에 조알(朝謁)하였으니 존호(尊號)를 올리는 것을 고하기 위함이었다.


태상왕에게 잘못 보인 참찬문하부사 조온을 완산부에 귀양보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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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流參贊門下府事趙溫于完山府。 前此, 世子朝德壽宮, 太上王謂世子曰: “汝等以予爲父, 欲加尊號, 是誠可嘉, 然予有言, 汝其聽之。 趙溫, 本吾麾下人也。 予嘗拔擢, 位至宰輔, 自我遜位以來, 未嘗一來見, 人之背恩, 孰甚焉! 戊寅秋, 率領甲士, 宿衛于內, 聞有外變, 遂率兵出應, 反復不忠, 無可比者。 汝等但以從汝阿諛爲德, 而不思大義乎! 人臣之有二心者, 自古罪在不宥。” 世子還, 以告于上而貶之。

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 조온(趙溫)을 완산부(完山府)에 귀양보냈다. 이보다 앞서 세자가 덕수궁에 조알(朝謁)하니, 태상왕이 세자에게 이르기를,

"너희들이 나를 아비라고 하여 존호를 가(加)하고자 하니 참으로 가상하다. 그러나, 내가 할 말이 있으니, 너희는 들어라! 조온(趙溫)은 본래 내 휘하 사람이다. 내가 일찍이 발탁하여 지위가 재보(宰輔)에 이르렀는데, 내가 손위(遜位)한 이래로 한번도 와서 보지 않으니, 사람이 은혜를 배반하는 것이 이보다 더 심할 수 있겠는가! 무인년 가을에 갑사(甲士)를 거느리고 안에서 숙위(宿衛)하다가 밖에 변이 있다는 말을 듣고, 드디어 군사를 거느리고 나가 응하였으니, 반복하고 충성치 못함이 비길 데 없다. 너희들은 다만 너희를 따르고 아첨하는 것만 덕스럽게 여기고, 대의(大義)는 생각하지 않느냐? 신하로서 두 마음이 있는 자는 예전부터 죄가 용서할 수 없는 것이다."

세자가 돌아와 임금에게 고하여 귀양보냈다.


임금이 세자와 덕수궁에 조알하고 계운신무태상왕이란 존호를 올리다. 책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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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率世子及百官, 朝于德壽宮, 奉玉冊金寶, 上尊號曰啓運神武太上王。 冊文曰:

維建文二年歲次庚辰七月朔甲子越六日己巳, 國王臣諱, 稽首再拜, 謹奉冊上言。 應千齡而作之君, 肇開景運; 以一國而傳之子, 宜極尊稱。 玆率典章, 庶申誠孝。 恭惟太上王殿下, 勇智天錫, 聖敬日躋。 武烈偉於濟時, 寬仁溥於育物。 斯迫輿情之推戴, 以建王業之興隆。 方百度之惟新, 遽萬機之是倦。 庸釋大位, 傳付眇躬。 遂黽勉以恭承, 每祗勤而惕厲。 欲彰盛德之至, 惟在徽號之崇。 率籲臣僚, 擧行冊禮。 臣諱不勝大願, 謹奉冊寶, 上尊號曰啓運神武。 伏惟太上王殿下, 廓包容之度, 推覆育之慈。 體一大之曰天, 勿嫌强名之道; 莅萬姓而爲父, 永享多壽之期。 臣諱誠懽誠抃, 稽首再拜上言。

上奉冊畢, 因獻壽。 上與世子諸公, 起舞極歡, 至暮乃罷。 太上王賜左政丞成石璘、右政丞閔霽、判三軍府事河崙各廐馬一匹、段綃各一匹, 賜三司左使李稷、參判三軍府事崔有慶、簽書李文和、典書韓尙敬等段綃各一匹。 皆執事於封崇之禮者。

임금이 세자와 백관을 거느리고 덕수궁(德壽宮)에 조알하고, 옥책(玉冊)과 금보(金寶)를 받들어 존호(尊號)를 올리기를 ‘계운 신무 태상왕(啓運神武太上王)’이라 하였다. 책문(冊文)은 이러하였다.

"유(維) 건문(建文) 2년 세차(歲次) 경진 7월 초하루 갑자 월 6일(越六日) 기사(己巳)에 국왕(國王) 신(臣)[67]은 계수 재배(稽首再拜)하고 삼가 책(冊)을 받들어 상언(上言)합니다. 천령(千齡)에 응하여 임금이 되어 비로소 큰 운수를 열었고, 한 나라를 아들에게 전하였으니, 마땅히 존칭(尊稱)을 극진히 하여야 하겠습니다. 이에 전장(典章)에 따라서 성효(誠孝)를 펼까 합니다. 공손히 생각하건대, 태상왕 전하께서는 용맹과 지혜를 하늘에서 주었고, 성경(聖敬)을 날로 더하였습니다. 무열(武烈)은 시대를 구제하는 데에 위대하였고, 관인(寬仁)은 만물을 무육(撫育)하는 데에 미쳤습니다. 이에 여정(輿情)의 추대(推戴)함에 좇아서 흥륭(興隆)한 왕업(王業)을 세웠습니다. 바야흐로 온갖 법도(法度)가 새로워지는데 갑자기 만기(萬機)를 싫어하시어 이에 대위(大位)를 내놓아 묘궁(眇躬)에게 전하여 주시었으니, 드디어 힘써 받들고 이어서 매양 삼가고 부지런하여 두려워합니다. 지극한 성덕(盛德)을 나타내고자 하는 데는 오직 휘호(徽號)를 높임에 있으므로, 신료(臣僚)를 거느리고 책례(冊禮)를 거행합니다. 신은 큰 소원을 이기지 못하여 삼가 책·보(冊寶)를 받들어 존호를 올리기를 ‘계운 신무(啓運神武)’라 합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태상왕 전하께서는 포용(包容)의 도량을 넓히시고 부육(覆育)의 자애를 미루소서. 일대(一大)를 몸받는 것은 하늘[天]이니 억지로 이름한 도를 혐의하지 마시고, 만성(萬姓)에 임하여 아버지가 되셨으니, 길이 장수의 기약을 누리소서. 신은 진실로 기뻐하고 진실로 뛰면서 계수 재배(稽首再拜)하여 상언(上言)합니다."

임금이 책(冊)을 받들어 올리기를 끝내고, 인하여 헌수하였다. 임금과 세자와 제공(諸公)이 일어나 춤추어 지극히 즐기다가 저물어서 파하였다. 태상왕이 좌정승 성석린(成石璘)·우정승 민제(閔霽)·판삼군부사 하윤(河崙)에게 각각 구마(廐馬) 1필, 단초(段綃) 각각 1필을 하사하고, 삼사 좌사(三司左使) 이직(李稷)·참판삼군부사(參判三軍府事) 최유경(崔有慶)·첨서(簽書) 이문화(李文和)·전서(典書) 한상경(韓尙敬) 등에게 단초 각각 1필을 하사하였으니, 모두 봉숭(封崇)하는 예(禮)에 집사(執事)한 사람들이었다.


세자가 불러들여 고려 주서 길재가 서울에 이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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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麗注書吉再至京。 世子嘗以再經明行修, 下令三軍府, 移牒徵之。

고려(高麗) 주서(注書) 길재(吉再)가 서울에 이르렀다. 세자가, 일찍이 길재가 경의(經義)에 밝고 행실을 닦았다고 하여 삼군부(三軍府)에 영을 내려 이첩(移牒)해서 이를 불렀었다.


세자가 덕수궁에 조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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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世子朝德壽宮。

세자가 덕수궁에 조알하였다.


태상왕이 세자에게 나쁘다고 말하여 이무와 조영무를 강릉부와 곡산부에 각각 귀양보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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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流東北面都巡問使永興尹李茂于江陵府, 西北面都巡問使平壤尹趙英茂于谷山府。 是日, 世子朝德壽宮, 太上王復謂世子曰: “趙溫姊夫之子, 趙英茂番上之軍。 予哀其微賤, 或賜衣冠, 或除官爵, 入相出將, 靡不從之, 遂爲開國功臣, 位至卿相, 皆我之賜。 溫與英茂, 皆掌禁兵, 直宿內殿, 當戊寅寡人不豫之時, 不顧昔日愛護之恩, 率軍內應, 背恩忘德, 無可比者。 李茂雖非溫與英茂之比, 亦依寡人, 得列於原從功臣。 茂素與南誾、道傳等善, 常相作謀, 欲傾汝輩, 戊寅之變, 往來行間, 中立觀變, 惟勝者是從, 會汝得勝, 故來附耳。 此非觀變不忠之人乎, 而皆置於定社功臣之列。 儻有急難, 則豈不効戊寅背寡人之事乎? 汝等若以予爲父, 則罪此三人, 以圖社稷長久之計, 以戒後世不忠之黨。” 世子還告于上, 上不得已流之。

동북면 도순문사 영흥 윤(東北面都巡問使 永興 尹) 이무(李茂)를 강릉부(江陵府)에, 서북면 도순문사 평양 윤(西北面都巡問使 平壤尹) 조영무(趙英茂)를 곡산부(谷山府)에 귀양보냈다. 이날 세자가 덕수궁에 조알하니, 태상왕이 다시 세자에게 일렀다.

"조온(趙溫)은 자부(姊夫)의 아들이고, 조영무(趙英茂)는 번상(番上)하는 군사인데, 내가 그 미천한 것을 불쌍히 여겨 혹은 의관(衣冠)도 주고, 혹은 관작도 제수하여, 입상(入相) 출장(出將)할 때에 따라다니지 않은 적이 없어 드디어 개국 공신이 되고, 지위가 경(卿)·상(相)에 이르렀으니, 모두 나의 덕이다. 조온과 조영무가 모두 금병(禁兵)을 맡아 내전(內殿)에 숙직하다가, 무인년에 과인(寡人)이 병으로 편치 못한 때를 당하여, 옛날의 애호(愛護)한 은혜는 돌아보지 아니하고 군사를 거느리고 내응하였으니, 배은 망덕한 것이 비할 데가 없다. 이무(李茂)는 비록 조온과 조영무와 비할 것은 아니나, 또한 과인에 의지하여 원종 공신(原從功臣)에 참예하였다. 이무는 본래 남은(南誾)·정도전(鄭道傳) 등과 좋아하며 항상 서로 모의를 하여 너희들을 무너뜨리고자 하였다. 무인년 변(變)에도 왕래하면서 반간(反間) 노릇을 행하며 중립을 지키면서 변을 관망하여 이기는 자를 따르려 하였다. 마침 너희들이 이겼기 때문에 와서 붙은 것이니, 이는 변(變)을 관망하는 불충한 사람이 아니냐? 그러나, 모두 정사 공신(定社功臣)의 열(列)에 두었으니, 만일 급하고 어려운 일이 있으면 무인년의 과인을 배반하던 일을 본받지 않겠는가! 너희들이 만일 나를 아비라고 한다면, 이 세 사람을 죄주어서 사직(社稷)의 장구한 계책을 도모하고, 후세의 불충한 무리를 경계하도록 하라."

세자가 돌아와 임금에게 고하니, 임금이 부득이 귀양보냈다.


대사헌 권근 등에게 일을 보도록 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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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命大司憲權近等視事。 初近等以監察不祗迎, 故不視事。

대사헌 권근(權近) 등에게 일을 보도록 명하였다. 처음에 권근 등은 감찰(監察)이 지영(祗迎)하지 않았기 때문에 일을 보지 않았었다.


문하부에서 요청, 곽충보 등 12인을 외방에 귀양보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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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門下府上言, 請竄郭忠輔等十二人于外, 從之。 疏曰:

竊謂芳幹, 稱兵構亂, 幾覆宗社, 罪在不宥, 幸賴殿下友愛之恩, 得全性命, 以至今日。 然其憤怨反側之情, 難可測也, 而其黨與郭忠輔、李忱、李伯溫、桓愉、薛崇、朴寅吉、金甫海、郭承祐、黃載、郭願、任天年、崔龍蘇等, 亦蒙聖恩, 皆得從便。 誠宜杜門屛跡, 悔罪自責, 思有以報聖德之萬一可也, 而泰然自恣, 不懲其惡, 或摳朋引類, 奔馳朝路, 或帶劍佩箭, 橫行村落, 不可不制也。 願殿下安不忘危, 治不忘亂, 令憲司將上項郭忠輔等十二人, 屛之遠方, 禁其出入, 以待自新, 以杜亂萌, 國家幸甚。

伯溫以親戚免。

문하부(門下府)에서 상언(上言)하여 곽충보(郭忠輔) 등 12인을 외방에 귀양보내자고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소(疏)는 이러하였다.

"가만히 생각건대, 방간이 군사를 일으켜서 난을 꾸며 거의 종사(宗社)를 전복시킬 뻔하였으니, 죄가 용서할 수 없사온데, 다행히 전하의 우애하시는 은혜를 입어서 성명(性命)을 보전하여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그의 분원(憤怨)과 반측(反側)의 정상은 헤아리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그 도당 곽충보(郭忠輔)·이침(李忱)·이백온(李伯溫)·환유(桓愉)·설숭(薛崇)·박인길(朴寅吉)·김보해(金甫海)·곽승우(郭承祐)·황재(黃載)·곽원(郭願)·임천년(任天年)·최용소(崔龍蘇) 등이 또한 성은(聖恩)을 입어서 모두 종편(從便)함을 얻었으니, 진실로 마땅히 문을 닫고 자취를 감추어, 죄를 뉘우치고 자책하여 성덕(聖德)의 만분의 일이라도 갚기를 생각하는 것이 가한데, 태연하게 방자히 굴며 그 죄악을 징계하지 않고, 혹은 벗과 동류(同類)들을 이끌고 조정의 길[朝路]에 달리며, 혹은 칼을 띠고 화살을 차고 촌락(村落)에 횡행하니, 제재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평안할 때 위태한 것을 잊지 말고 다스려질 때 어지러운 것을 잊지 마시와, 헌사(憲司)로 하여금 위의 곽충보 등 12인을 먼 지방에 추방하고 그 출입을 금하여, 스스로 새로워지기를 기다리고 난(亂)의 싹을 막으면, 국가에 심히 다행하겠습니다."

이백온(李伯溫)은 친척이므로 면하였다.


사헌부와 형조에서 이무, 조영무 등을 불러들이자고 청하니 윤허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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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省憲刑曹上言, 請召還李茂、趙英茂等, 不允。 兼大司憲權近、左散騎朴訔、刑曹典書呂稱, 交章上言:

賞有功罰有罪, 人主之大權, 而臨大事決大疑, 人臣之大節也。 人主以大權御下, 人臣以大節報上, 皆出乎至公而已。 霍光之廢昌邑, 狄仁傑之正廬陵, 此皆以大節報上, 而賞及後世者也。 向者, 南誾、鄭道傳, 以腹心大臣, 當太上王議儲之日, 不能建白大義, 以正嫡庶之分, 而乃阿諛順旨, 扶立幼孼, 稱之曰賢有德, 狐媚弄權, 陰謀不軌, 及至太上王不豫之時, 敢欲盡害嫡子, 挾其孤兒, 擅行威福, 以遂簒竊之謀, 社稷存亡之機, 正在瞬息。 幸賴天地宗社之靈, 中外臣民之望, 今永興府尹李茂、平壤尹趙英茂、參贊門下府事趙溫、完山侯李天祐等, 乃與二三大臣, 奮不顧身, 擧大義決大事, 而姦雄伏誅, 宗社再安。 太上王亦自悔悟, 以大位傳之殿下, 以正朝鮮萬世之本, 實茂等之力也。 其撥亂反正之功, 當不在霍光、仁傑之下矣。 故勒碑紀功, 建閣圖形, 誓以山河, 宥及永世, 其所以賞之者, 亦可謂至矣。 今者, 太上王殿下, 無故欲罪茂等, 擧國驚疑, 莫知其實。 此豈浸潤之譖, 有以間之歟! 不然, 太上王大公至正, 英明冠古, 不應以庶孽之故, 而反罪朝鮮社稷之臣也。 臣等未知茂等, 能使太上王艱難草創之業, 不歸於姦雄之手, 是爲罪乎? 忘身徇國, 以正嫡庶之分, 是爲罪乎? 撥亂反正, 以安社稷, 使殿下昆弟, 得有今日, 太上之業, 傳之萬世, 是爲罪乎? 今趙溫無故見逐, 趙英茂亦在於外, 在朝勳臣文武百僚, 莫不自危, 如臨不測之淵。 功臣解體, 衆心疑懼, 至於如此, 不審殿下, 將誰與爲國乎? 願殿下勿以苟順爲孝, 當以至誠幾諫, 以沮衆疑, 李茂、趙英茂, 宜卽召還于朝, 以安衆心。 如或太上王固執不改, 則請劾左右譖訴之人, 以明此非出於太上王之心也, 且以示殿下賞罰之至公。

上重違太上之意, 不從。 是日, 復交章上言:

臣等交章所論李茂、趙英茂、趙溫、李天祐, 當戊寅年鄭道傳、南誾等將害嫡子, 挾其幼孼, 謀傾社稷, 禍變不測之際, 乃能奮不顧身, 仗義決策, 殲除姦凶, 以明嫡庶之分, 得蒙太上王悔悟, 傳付國統, 歸于殿下, 以基朝鮮社稷億萬世(無彊)〔無疆〕之業。 其功甚大, 國人所共知也, 未嘗聞有可議之罪。 今者, 太上殿下, 欲罪茂等, 殿下孝誠不敢違命, 一朝以無罪, 斥逐趙溫等, 擧國臣民, 靡不驚疑, 故臣等交章, 請卽召還, 留中不下, 未蒙兪允。 是非不知溫等無罪, 但不欲傷太上之心耳。 臣等竊謂, 親有過擧, 子不可以不諫, 君有失德, 臣不可以不爭。 況我太上王寬仁明睿, 必不妄加譴責於有功無罪之臣, 是必有左右憸小之徒, 苟爲讒譖, 離間勳親, 欲逞姦兇之計, 以圖不利於社稷, 復有如道傳、南誾者焉, 將來之患, 甚可懼也。 臣等敢請速召李茂等, 皆還于朝, 以彰有功, 以明無罪, 又將太上王左右憸小之徒李得芬、張翼等輩, 收其職牒, 鞫問構讒謀害勳親之故, 以懲不軌, 永絶亂源, 不勝幸甚。

上亦不從。

사헌부(司憲府)와 형조에서 상언(上言)하여 이무(李茂)·조영무(趙英茂) 등을 소환하자고 청하니,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겸 대사헌 권근(權近)·좌산기(左散騎) 박은(朴訔)·형조 전서(刑曹典書) 여칭(呂稱)이 교장(交章)하여 상언(上言)하였다.

"공(功)이 있는 사람을 상주고 죄가 있는 사람을 벌주는 것은 인주(人主)의 큰 권세이고, 대사(大事)에 임하여 큰 의심을 결단하는 것은 인신(人臣)의 큰 절조입니다. 인주는 큰 권세로 아랫사람을 어거하고, 인신은 큰 절개로 윗사람에게 갚는 것이 모두 지극히 공정한 데에서 나올 뿐입니다. 곽광(霍光)[68]이 창읍왕(昌邑王)을 폐(廢)한 것과 적인걸(狄仁傑)[69]이 여릉왕(廬陵王)을 바로잡은 것은 모두 큰 절개로 윗사람에게 갚아서 상(賞)이 후세에 미친 것입니다. 지난날 남은(南誾)·정도전(鄭道傳)이 심복(心腹) 대신으로서, 태상왕이 세자를 세우자고 의논하던 날을 당하여 대의(大義)로 사뢰어서 적서(嫡庶)의 분수를 능히 바로잡지 못하고, 아첨하여 왕지(王旨)를 순순히 따라 어린 얼자(孽子)을 부축하여 세우고 칭송하기를, ‘어질고 덕이 있다.’ 하여, 여우처럼 호리고 권세를 희롱하여 몰래 불궤(不軌)한 짓을 꾀하였습니다. 태상왕이 병환으로 편치 못하신 때에 이르러 감히 적자(嫡子)를 모조리 해치고 고아(孤兒)를 끼고 마음대로 위복(威福)을 행하여 찬탈(簒奪)의 음모를 이루고자 하였으니, 사직(社稷) 존망(存亡)의 기틀이 정히 순식간(瞬息間)에 있었습니다. 다행히 천지(天地) 종사의 신령과 중외(中外) 신민의 여망에 힘입어서, 지금 영흥 부윤(永興府尹) 이무(李茂)·평양 윤(平壤尹) 조영무(趙英茂)·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 조온(趙溫)·완산후(完山侯) 이천우(李天祐) 등이 2, 3대신과 더불어 분연히 몸을 돌보지 않고 대의(大義)를 들어 대사(大事)를 결단하여, 간웅(姦雄)이 복주(伏誅)되고 종사가 다시 편안하여졌습니다. 태상왕도 또한 스스로 뉘우치고 깨달아 대위(大位)를 전하에게 전(傳)하여 조선(朝鮮) 만세의 근본을 바로잡은 것이니, 이는 실로 이무 등의 힘입니다. 그 발란(撥亂)하고 반정(反正)한 공은 마땅히 곽광(霍光)·적인걸(狄仁傑)의 아래에 있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비(碑)에 새겨 공을 기록하고, 각(閣)을 세워 형상을 그리고, 산하(山河)로 맹세하여 사유(赦宥)가 영원한 세대에 미치게 하였으니, 그 상(賞)을 준 것도 또한 지극하다 하겠습니다. 지금 태상왕 전하가 까닭없이 이무 등을 죄주려고 하니, 온 나라가 놀라고 의심하여 그 실상을 알지 못하여 합니다. 이것이 어찌 침윤(浸潤)의 참소로 이간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지 않다면, 태상왕이 대공(大公) 지정(至正)하고 영명(英明)하기가 예전에 없으시니, 서얼(庶孽)의 연고로 인하여 도리어 조선 사직의 신하를 죄주지는 않으실 것입니다.

신 등은 알지 못하거니와, 이무 등이 태상왕의 어렵게 창건하신 대업(大業)을 간웅(奸雄)의 손에 돌아가지 않게 한 것이, 이것이 죄입니까? 몸을 잊고 나라를 위하여 적서(嫡庶)의 분수를 바로잡은 것이, 이것이 죄입니까? 난을 평정하고 반정(反正)하여 사직을 편안하게 하고, 전하의 형제로 하여금 오늘이 있게 하고, 태상왕의 대업을 만세에 전하게 한 것이, 이것이 죄입니까? 지금 조온이 까닭없이 추방을 당하고, 조영무도 또한 외방에 있으니, 조정에 있는 훈신(勳臣)과 문무 백관이 스스로 위태롭게 여기지 않음이 없어 헤아릴 수 없는 못에 임한 것 같습니다. 공신이 해체하고, 여러 사람의 마음이 의심하고 두려워하는 것이 이와 같은 데에 이르면, 알지 못하거니와 전하께서는 장차 누구와 더불어 나라를 다스리겠습니까? 전하께서는 오로지 순종하는 것만으로 효도를 삼지 마시고 마땅히 지성으로 은미하게 간하여 여러 사람의 의심을 막고, 이무·조영무를 곧 조정에 소환하여 여러 사람의 마음을 평안하게 하소서. 만일 혹시라도 태상왕께서 고집하고 고치지 않으시면, 청컨대, 좌우의 참소한 사람을 논핵하여 이것이 태상왕의 마음에서 나온 것이 아닌 것을 밝히시고, 또 전하의 상벌이 지극히 공정한 것을 보이소서."

임금이 태상왕의 뜻을 어기기가 어려워 좇지 아니하였다. 이날 다시 교장(交章)하여 상언(上言)하였다.

"신 등이 교장(交章)하여 논한 바, 이무·조영무·조온·이천우는, 무인년에 정도전·남은 등이 장차 적자를 해치고, 어린 얼자(孽子)를 끼고서 사직을 기울어뜨리기를 꾀하여, 그 화변(禍變)이 불측한 때를 당하여 분연히 몸을 돌보지 않고 대의(大義)에 따라서 계책을 결단하여, 간흉(姦凶)들을 섬멸하고 적서(嫡庶)의 분수를 밝혔습니다. 이에 태상왕께서 뉘우치고 깨달으시어 국통(國統)을 전(傳)하여 전하에게 돌아오니, 조선 사직의 억만년 무궁한 대업을 터잡았습니다. 그 공이 심히 큰 것은 나라 사람들이 함께 아는 바입니다. 의논할 만한 죄가 있다는 것을 일찍이 듣지 못하였는데, 지금 태상 전하가 이무 등을 죄주고자 하시므로, 전하께서 효성으로 인하여 명령을 어기지 못하고 하루아침에 죄도 없이 조온 등을 추방하니, 온 나라 신민들이 놀라고 의심하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신 등이 교장(交章)하여 곧 소환하기를 청하였으나, 궁중에 머물러 두고 내리지 아니하시므로 유윤(兪允)을 얻지 못하였습니다. 이것은 조온의 무리가 무죄한 것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아니라, 다만 태상왕의 마음을 상하게 하지 않으려는 것입니다. 신 등은 생각건대, 어버이가 잘못하는 일이 있으면 자식이 간하지 않을 수 없고, 임금이 덕을 잃는 것이 있으면 신하가 간쟁(諫諍)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물며, 우리 태상왕께서 너그럽고 어질고 총명하고 예지(睿智)하시니, 반드시 공이 있고 죄가 없는 신하에게 망령되게 견책을 가하지는 않으셨을 것입니다. 이것은 반드시 좌우의 간사한 무리들이 구차하게 참소를 하여 훈친(勳親)을 이간하고, 간흉한 꾀를 부려 사직에 불리한 일을 도모하려는 것이니, 다시 정도전·남은과 같은 자가 있다면 장래의 환이 심히 두렵습니다. 신 등은 감히 청하건대, 속히 이무 등을 불러 모두 조정에 돌아오게 하여 공이 있는 것을 나타내고, 죄가 없는 것을 밝히며, 또 태상왕의 좌우의 간사한 무리 이득분(李得芬)·장익(張翼) 등은 그 직첩(職牒)을 거두고, 무함하고 참소하여 훈친(勳親)을 모해(謀害)한 까닭을 국문하여 불궤(不軌)한 것을 징계하고, 길이 난(亂)의 근원을 끊으시면, 다행함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임금이 또한 따르지 아니하였다.


좌정승 성석린, 우정승 민제가 문무 백관을 거느리고 태상전에 나아가 이무·조영무·조온 등을 변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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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左政丞成石璘、右政丞閔霽, 率文武百官, 詣太上殿。 初, 石璘、霽等, 詣闕啓云: “太上王以非罪, 譴逐功臣李茂ㆍ趙英茂ㆍ趙溫等, 文武百僚, 莫不驚疑觖望。 願召還于朝, 以安衆心。” 上亦不許。 石璘等與文武百僚, 上疏言:

爲治之道, 在明其賞罰。 有功不賞, 無罪見罰, 雖欲爲治, 不可得矣。 竊見李茂、趙英茂、趙溫等, 當戊寅年太上王不豫之時, 權姦秉政, 貪立幼孼, 謀害正嫡, 將傾社稷, 禍亂之變, 間不容髮, 而茂等與宗室大臣及忠義之士, 奮不顧身, 仗義定策, 克殲姦雄, 扶立嫡長, 載安宗社, 以基萬世(無彊)〔無疆〕之業, 其功甚大, 故嘗誓以帶礪, 宥及後昆。 頃者, 殿下以太上之命, 斥逐趙溫, 擧國臣民, 靡不驚疑, 今者, 又聞太上殿下, 欲加罪於李茂、趙英茂等, 殿下不敢違命, 乃逐茂等。 臺省、刑曹交章上請, 召還于朝, 以彰其有功, 以明其非罪, 且勸後來忠義之士, 以爲宗社萬世之計。 其論甚當, 宜卽兪允, 殿下重違太上之命, 留中不下。 夫茂等所建之功, 關於宗社萬世, 今所坐之事, 未審何事? 是有功而不見賞, 無罪而反見罰, 其於爲治之道何如, 其於宗社之計何如? 文武百僚莫不觖望。 臣等竊謂爲孝之道, 當以至誠感動, 匡救其失, 不宜苟且以順其旨, 故古人不以從令爲孝。 伏望殿下, 上體至誠匡救之孝, 下念爲治賞罰之公, 卽將臺省、刑曹交章所申, 依允施行。

上不能決。 臺諫、刑曹復詣闕切諫, 上使都承旨鄭矩, 齎三省所上書, 進太上王前白曰: “三省論李茂、趙英茂無罪, 耆老文武百僚, 亦請召還。 臣未知處決, 寢食未安, 惶恐悉深。 惟命是從, 伏惟裁下。” 太上王見三省疏, 益怒曰: “國人皆以寡人爲非, 予豈敢居於此乎? 吾將任意所往。” 於是, 石璘、霽等詣太上殿, 太上王謂石璘等曰: “卿等何爲來哉?” 石璘等對曰: “殿下近日, 以不肖一二臣之事, 至勞聖慮, 臣等是以來。” 太上王曰: “吾亦意其來耳。 吾欲見卿等, 言吾心事久矣。 兩政丞, 吾之同列宰相也, 其餘宰相, 皆吾麾下人也。 我家之事, 無不知之。 寡人幸賴祖宗之德、天命之集, 創始朝鮮, 卽位七年, 而傳之長子, 平生之事, 無復有憾矣。 戊寅之被戮弱子, 吾奚念哉! 皆天命也。 我若以喪其愛子, 失其寶位之故, 不顧社稷安危, 則證有上蒼。 李天祐本系甚微, 我承先父恩愛之志, 父子二人, 擢置宰相, 顧乃背我厚恩, 其於人道何如也?” 謂大司憲權近曰: “柳璥侍中妾孫之謀害本主, 反從賤役, 宰臣所知也。” 又曰: “趙溫者, 所得於父母者, 但皮肉耳。 其衣之食之, 立於朝端, 位至宰相, 得與開國之列, 皆我之使然; 英茂者, 自東北面侍衛軍, 擢爲牌頭, 位至宰相, 得與開國之列。 此三人者, 雖粉骨糜身, 豈足以報我之恩! 然皆小人也。 歲在戊寅, 我極不豫, 背我如棄弊屣, 溫與天祐, 率我甲士, 得與定社之列; 李茂者反間, 而亦與定社之列。 不顧君臣之大義, 惟利是求之人, 信之任之, 則大位誰得而不窺? 朝鮮之社稷, 其可久乎?” 指石璘、近而曰: “卿等今爲世名儒, 豈不知漢祖斬丁公, 以徇軍中, 而傳祚四百年乎? 國人皆以我爲恨其失大位而殺愛子, 故惡定社功臣, 然今予傳位於嫡長, 又立季子爲世子, 寧有所恨! 我不傳位, 則其將殺我而奪乎? 但以漢祖之心, 慮社稷萬世之計耳。 若茂等罪之釋之, 在汝君矣。” 遂取酒飮石璘等。 石璘等更不得一言而退。 臺省、刑曹, 復詣闕請允下臣等所上書, 上又不從。 郞舍等以不得言責, 皆上章辭職, 刑曹亦辭職, 上皆召令就職。

좌정승 성석린(成石璘)·우정승 민제(閔霽)가 문무 백관을 거느리고 태상전(太上殿)에 나아갔다. 처음에 성석린·민제 등이 예궐하여 아뢰었다.

"태상왕이 죄가 아닌 것으로 공신 이무(李茂)·조영무(趙英茂)·조온(趙溫) 등을 견책하여 내쫓으시니, 문무 백관이 놀라고 의심하여 실망하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 원하건대, 조정에 소환하여 여러 사람의 마음을 평안하게 하소서."

임금이 또한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성석린 등이 문무 백관과 더불어 상소(上疏)하여 말하였다.

"다스리는 도리는 그 상과 벌을 밝게 하는 데에 있으니, 공이 있어도 상을 주지 않고 죄가 없이도 벌을 당하면, 비록 다스리고자 하더라도 다스릴 수 없을 것입니다. 가만히 보건대, 이무·조영무·조온 등은, 무인년에 태상왕께서 편찮으실 때를 당하여 권간(權姦)들이 정치를 잡고 어린 얼자(孽子)를 세우기를 탐하고 정적(正嫡)을 모해(謀害)하여, 장차 사직을 기울어뜨리려 하였으므로, 화란(禍亂)의 변(變)이 털끝만큼도 용납할 사이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무 등이 종실 대신과 충의(忠義)의 사람들과 더불어 분연히 몸을 돌보지 아니하고 대의(大義)에 의하여 계책을 정하여, 간웅(姦雄)을 섬멸하고 적장(嫡長)을 부축하여 세워서, 종사를 평안히 하고 만세의 한없는 대업을 기초하였으니, 그 공이 심히 큽니다. 그러므로, 일찍이 대려(帶礪)로 맹세하고 사유(赦宥)가 후손에 미치게 하였습니다. 지난번에 전하가 태상왕의 명령이라 하여 조온을 추방하시니, 온 나라 신민이 놀라고 의심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지금 또 들으니, 태상 전하가 이무·조영무 등에게 죄를 가하고자 하시매, 전하가 감히 명령을 어기지 못하여 이무 등을 추방하셨다 하옵니다. 그러므로, 대성·형조에서 교장하여 청하기를, ‘조정에 소환하여 공이 있는 것을 나타내어 죄가 없는 것을 밝히고, 또 후세의 충의의 인사를 권려하여 종사 만세의 계책으로 삼자.’고 하였습니다. 그 의논이 심히 윤당하므로 곧 유윤하여야 할 것인데, 전하가 태상왕의 명령을 어기기 어려워 궁중에 머물러 두고 내리지 아니하였습니다. 대저 이무 등의 세운 공이 종사 만세에 관계되는데, 지금 죄를 받은 일이 무슨 일인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이것은 공이 있어도 상을 받지 못하고, 죄가 없이 도리어 벌을 받는 것이니, 그 다스리는 도리에 있어 어떠하며, 그 종사의 계책에 있어 어떠합니까? 문무 백관이 실망하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 신 등은 생각건대, 효도를 하는 도리는 마땅히 지성으로 감동시켜 그 과실을 바로잡아 고치는 것이요, 구차히 그 뜻만 순순히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옛사람은 명령을 좇는 것만으로 효도를 삼지 않았습니다.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위로 지성으로 광구(匡救)하는 효도를 본받으시고, 아래로 정치를 하는 데의 상벌의 공정함을 생각하시어, 곧 대성과 형조에서 교장(交章)하여 아뢴 것을 의윤(依允)하여 시행하소서."

임금이 결단하지 못하니, 대간과 형조가 다시 예궐하여 간절하게 간하였다. 임금이 도승지 정구(鄭矩)를 시켜 삼성(三省)에서 올리는 글을 가지고 태상왕의 앞에 나아가서 사뢰었다.

"삼성(三省)에서 이무·조영무의 무죄함을 논하고, 기로(耆老)와 문무 백관도 또한 소환하기를 청하니, 신이 처결할 바를 알지 못하여 침식(寢食)이 편치 못하고, 황공하기 그지없습니다. 오직 명령대로 좇겠으니, 엎드려 바라건대, 재하(裁下)하소서."

태상왕이 삼성(三省)의 소(疏)를 보고 더욱 노하여 말하기를,

"나라 사람들이 모두 과인(寡人)을 그르다고 하니, 내가 어떻게 여기에 있을 수 있겠는가? 나는 장차 가고 싶은 데로 가겠다."

하였다. 이에 성석린·민제 등이 태상전에 나아가니, 태상왕이 성석린 등에게 이르기를,

"경 등은 어찌하여 왔는가?"

하였다. 성석린 등이 대답하기를,

"전하께서 근일에 불초한 한두 신하의 일로써 성려(聖慮)를 쓰시기에 신 등이 이 때문에 왔습니다."

하니, 태상왕이 말하였다.

"나도 역시 그래서 온 줄 안다. 내가 경들을 보고 나의 심사(心事)를 말하고 싶은 지 오래였다. 두 정승은 나와 동렬(同列) 재상이고, 그 나머지 재상은 모두 나의 휘하 사람들이니, 내 집안 일을 알지 못하는 것이 없다. 과인이 다행히 조종(祖宗)의 덕과 천명(天命)의 모임에 힘입어서 조선(朝鮮)을 창시하고, 즉위한 지 7년만에 장자에게 전하였으니, 평생의 일에 다시 유감이 없다. 무인년에 피살된 어린 자식을 내가 어찌 생각하겠는가? 모두 천명(天命)이다. 내가 만일 사랑하는 자식을 잃고 그 보위(寶位)를 잃은 까닭으로 하여 사직의 안위(安危)를 돌보지 않았다면, 푸른 하늘이 증명할 것이다. 이천우(李天祐)는 본계(本系)가 심히 미천하다. 내가 선부(先父)의 은애(恩愛)하시던 뜻을 이어받아 부자 두 사람을 뽑아서 재상의 열에 두었는데, 도리어 내 후한 은혜를 배반하였으니, 인도(人道)에 있어 어떠한가?"

대사헌 권근(權近)에게 이르기를,

"유경(柳璥)[70] 시중(侍中)의 첩의 손자가 본주(本主)를 모해하다가 도리어 천역(賤役)이 된 것을 재신(宰臣)들은 알 것이다."

하고, 또 말하였다.

"조온이란 자는 부모에게서 받은 것이라곤 몸뚱이 하나뿐이다. 그 입고, 먹고, 조정[朝端]에 서서 벼슬이 재상에 이르러 개국 공신의 열에 참여한 것은 모두 내가 시키어 준 것이다. 조영무란 자는 동북면(東北面) 시위군(侍衛軍)에서 발탁하여 패두(牌頭)로 삼아, 벼슬이 재상에 이르고 개국 공신의 열에 참여하게 하였다. 이 세 사람은 비록 분골쇄신(粉骨碎身)하더라도 어떻게 내 은혜를 갚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모두 소인인지라, 무인년에 내가 몹시 편찮을 때에 나를 배반하기를 헌신짝 버리듯 하고, 조온과 이천우는 내 갑사(甲士)를 거느리고 정사(定社)의 열에 참여하였고, 이무란 자는 반간(反間)노릇하다가 또한 정사(定社)의 열에 참여하였다. 군신(君臣)의 대의(大義)를 돌보지 않고 오직 이익만 구하는 사람을 믿고 맡기면, 대위(大位)를 누가 엿보지 않겠는가? 조선의 사직이 오래 갈 수 있겠는가?"

성석린과 권근을 가리키며 말하였다.

"경들은 지금 세상의 명유(名儒)이니, 어찌 한(漢)나라 고조(高祖)가 정공(丁公)[71]을 목 베어 군중(軍中)에 돌리어서 나라의 운조(運祚)를 4백 년이나 전한 것을 알지 못하겠는가? 나라 사람들이 모두 나더러 ‘대위(大位)를 잃고, 사랑하는 자식이 죽은 것을 한(恨)하기 때문에 정사 공신(定社功臣)을 미워한다.’고 하지마는, 지금 내가 적장자(嫡長子)에게 전위하였고, 또 막내아들을 세워 세자를 삼았으니, 어찌 한이 있겠는가? 내가 전위하지 않았으면 장차 나를 죽이고 빼앗았을 것인가? 다만 한나라 고조(高祖)의 마음으로 사직의 만세 계책을 염려하는 것뿐이다. 이무 등을 죄주거나 석방하는 일 같은 것은 너희 임금에게 달려 있다."

드디어 술을 가져다가 성석린 등에게 마시게 하니, 성석린 등이 다시 말 한 마디도 못하고 물러나왔다. 대성(臺省)과 형조가 다시 예궐하여 그들이 올린 글을 윤하(允下)하기를 청하였으나, 임금이 또 좇지 아니하였다. 낭사(郞舍) 등이 언책(言責)을 다할 수 없다고 하여 모두 글장을 올려 사직하고, 형조가 또한 사직하니, 임금이 모두 불러서 직사에 나오게 하였다.


문하부에서 과전을 신고하여 넘겨받는 것을 규정대로 하기를 청하여 승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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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門下府請科田陳告遞受, 一依田制, 從之。 郞舍朴訔等言: “前朝之季, 紀綱陵夷, 田制大壞, 我太上王卽位之初, 立經陳紀, 正經界定田制, 以爲子孫萬世持守之法。 今殿下嗣服厥命, 當以太上之心爲心, 遵守勿失可也。 受科田者, 或犯罪或無後或科外餘田, 許令科田不足者, 新來從仕者, 陳告遞受, 已有成法, 故或有理合陳告之田, 給田司依例接狀, 將給公文也, 而往往撓法亂政之徒, 冒干特旨, 奪人已告之田, 以壞成法, 其不可一也。 人有依法陳告, 而殿下乃下特旨, 奪與他人, 是罔民而爭之也, 其不可二也。 且分田之法, 有司存焉。 有司謹守成法, 而殿下每下特旨, 以撓其法, 其不可三也。 願自今, 科田陳告遞受, 一依田制施行, 如有冒干內旨, 規奪他人陳告之田者, 以罔上壞法論罪, 以杜憸小撓亂之萌, 以固太上創垂之法, 幸甚。” 兪允, 但已施行事, 勿幷擧論。

문하부(門下府)에서 과전(科田)의 진고(陳告)하고 체수(遞受)하는 것을 한결같이 전제(田制)에 의하기를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낭사(郞舍) 박은(朴訔) 등이 말하였다.

"고려 말년에 기강이 해이하여져 전제(田制)가 크게 무너졌는데, 우리 태상왕께서 즉위하던 처음에 법(法)을 세우고 기강을 확립하여 경계(經界)를 바로잡고 전제(田制)를 정하여, 자손 만세에 특별히 지킬 법을 만들었습니다. 지금 전하가 천명(天命)을 이어받았으니 마땅히 태상왕의 마음을 본받아 준수하고 잃지 아니하는 것이 가합니다. 과전(科田)을 받은 자가 혹 범죄(犯罪)하거나, 혹 무후(無後)하거나, 혹 과전 외에 남는 전지가 있으면, 과전이 부족한 자나 새로 와서 종사(從仕)한 자로 하여금 진고(陳告)하여 체수(遞受)하게 하는 것을 허락한다는 것이 이미 이루어진 법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혹 사리에 진고(陳告)하는 것이 합당한 전지가 있으면, 급전사(給田司)에서 예(例)에 의하여 진고장(陳告狀)을 접수하고 곧 공문(公文)을 발급합니다. 그러나, 왕왕 법을 흔들고 정치를 어지럽히는 무리가 모람되게 특지(特旨)를 간청하여, 남의 이미 진고(陳告)한 전지를 빼앗아 이루어진 법을 무너뜨리니, 그 불가한 것의 한 가지요, 사람이 법에 의하여 진고하였는데도 전하가 특지(特旨)를 내려 빼앗아서 다른 사람에게 주니, 이것은 백성을 속여서 서로 다투게 하는 것이므로, 그 불가한 것의 두 가지요, 또 전지를 나누어 주는 법은 유사(有司)가 있어서, 유사가 삼가 이루어진 법을 준수(遵守)하는데, 전하가 매양 특지를 내려 그 법을 흔드니, 그 불가한 것의 세 가지입니다. 원하건대, 이제부터 과전(科田)을 진고하여 체수(遞受)하는 것을 한결같이 전제(田制)에 의하여 시행하고, 만일 내지(內旨)를 모람되게 간청하여 다른 사람의 진고한 전지를 빼앗으려고 도모하는 자가 있거든, 임금을 속이고 법을 무너뜨리는 것으로 논죄하여, 간사한 소인이 법을 흔들고 정치를 어지럽히는 싹을 막고, 태상왕의 창시하여 내려 주신 법을 굳건하게 하면, 심히 다행하겠습니다."

임금이 유윤(兪允)하고, 다만 이미 시행한 일들은 모두 거론하지 말도록 하였다.


권근·정탁·최유경 등의 관직을 바꾸고 문무관 3품이상에게 관교를 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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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以權近爲參贊門下府事兼司憲府大司憲, 鄭擢爲政堂文學, 崔有慶爲三司右使, 李至爲藝文春秋館太學士, 吉再爲奉常博士。 復賜文武官三品已上官敎。

권근(權近)으로 참찬문하부사 겸 사헌부 대사헌(參贊門下府事 兼司憲府大司憲)을, 정탁(鄭擢)으로 정당 문학(政堂文學)을, 최유경(崔有慶)으로 삼사 우사(三司右使)를, 이지(李至)로 예문춘추관 태학사(藝文春秋館太學士)를, 길재(吉再)로 봉상 박사(奉常博士)를 삼고, 다시 문무관(文武官) 3품(三品) 이상에게 관교(官敎)를 주었다.


대 사면령을 반포하고 편민 사의 13개 조를 발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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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御正殿, 頒降宥旨:

王若曰, 父子之親, 天性之至, 苟居繼體之位, 當極尊崇之禮。 惟我太上王, 以盛德隆功, 承先世積累之仁, 肇有家國, 以開萬世之基。 顧以菲德, 祗服明訓, 纘膺景命, 永思持守之艱, 惟恐不克負荷, 夙夜兢惕, 罔知所措。 已嘗謹與臣僚, 奉上尊號, 用光盛美, 昭示來今, 爰命攸司, 載稽典禮, 謹備冊寶, 於七月初六日己巳, 加上尊號曰啓運神武太上王, 以表德業之盛, 以副天人之心。 於戲! 旣立尊榮之典, 宜推渙汗之恩。 自建文二年七月初六日昧爽已前, 除謀叛大逆、殺祖父母父母、妻妾殺夫、奴婢殺主、蠱毒魘魅、謀故殺人、强盜外, 其餘罪狀已發覺未發覺, 已結正未結正, 咸宥除之。 所有便民事宜, 條列如左, 惟爾臣僚, 體予至懷。 一, 卽位之初, 頒降條畫, 謂於國體民生, 有所裨益, 中外官司, 視爲文具, 不盡心奉行, 實違共治之意。 京中司憲府、外方都觀察使, 嚴加考察, 其有奉行無遺, 灼有成效者, 具錄申聞, 以備擢用; 猥劣怠惰, 廢閣不行者, 痛懲其罪。 一, 己卯年以前各府州郡縣稅貢, 未滿本數當充者, 稱貸係官錢糧積年未還者, 耗損官物錢糧已曾追徵未滿本數者, 官府器皿破毁遺失未償者, 一皆蠲免, 義倉不在此限。 一, 凡有所犯人奴隷, 非其罪而被囚獄中, 致相染疾, 召怨傷和。 今後凡官府, 合囚奴隷, 止充徒役, 散置官府, 無令雜處重囚。 一, 凡民間負債, 其有貸者與者俱歿, 子孫只憑文契追徵者, 一皆痛禁。 一, 貧窮小民, 負債未還, 其有刦質子女, 役使積年, 或謀永以爲賤, 所在官司, 體察痛治。 一, 鰥寡孤獨老幼廢疾, 除有産業可以自養者外, 窮而不能自存者, 所在官司, 優加賑濟, 毋致失所。 一, 濱海之民, 幼弱子女, 被掠倭寇, 見放他州, 不能自還鄕里, 仍爲土人僕妾者, 所在官司, 就加覺察, 隨卽給引, 經由驛官, 廩給還本。 一, 婚嫁之禮, 要在及時。 其有良家之女, 或父母俱歿, 或貧乏無告, 年長失時者, 所在官司, 諭其族親, 使主婚事, 量宜助費, 以厚民生。 一, 窮乏人民, 其有父母在殯, 累年不克永葬者, 所在官司, 從宜助費, 剋日葬埋, 使之無憾。 一, 水陸軍官, 累有戰功, 未蒙職賞者, 錄其實效, 具名申聞。 一, 軍官歿於水陸征役者及奉使遠方隕命者, 錄其子孫敍用; 軍人戰亡者, 給復其家。 一, 外方敎授官、驛丞、鹽鐵場官, 積年不遷者, 仰都觀察使考其赴官年月, 所任勤慢, 呈報尙瑞司, 以憑黜陟, 如守令之例。 一, 在外品官、鄕吏, 有影占良民者, 限今年十月, 許令自首, 當使免罪。 過期不首, 爲人所告者, 坐以重罪。

정전(正殿)에 나아가서 유지(宥旨)를 반포하여 내렸다.

"부자 사이의 친근은 천성(天性)으로 지극하니, 진실로 계체(繼體)의 자리에 있으면 마땅히 존중하는 예를 극진히 하여야 한다. 우리 태상왕께서 성한 덕과 높은 공으로 선세(先世)의 쌓아 올린 인(仁)을 이어받아 비로소 국가를 차지하여 만세의 기업(基業)을 열으시었다. 돌아보건대, 내가 부덕한 몸으로서 밝은 교훈에 공경히 복종하여 큰 명(命)을 이어받으니, 길이 수성(守成)하기 어려운 것을 생각하고 오로지 능히 무거운 짐을 감내하지 못할까 두려워하여, 밤낮으로 조심하고 두려워하여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하겠다. 이미 일찍이 삼가 신료(臣僚)와 더불어 존호(尊號)를 받들어 올려서 성하고 아름다운 덕을 빛내어 내세(來世)와 금세(今世)에 밝게 보이고자 하여, 유사(攸司)에 명하여 전례(典禮)를 상고하여 삼가 옥책(玉冊)·금보(金寶)를 갖추어 7월 초6일 기사(己巳)에 존호를 더하여 올리기를, ‘계운 신무 태상왕(啓運神武太上王)’이라 하여 덕업(德業)의 성한 것을 표하여 천인(天人)의 마음에 부응(副應)하게 하였었다. 아아! 이미 존영(尊榮)의 예전(禮典)을 세웠으니, 마땅히 환한(渙汗)[72]의 은전을 베풀어야 하겠다. 건문(建文) 2년 7월 초6일 새벽 이전에 모반(謀叛) 대역(大逆)한 것, 조부모·부모를 죽인 것, 처첩이 남편을 죽인 것, 노비가 주인을 죽인 것, 고독(蠱毒)·염매(魘魅)한 것, 사람을 모살(謀殺)·고살(故殺)한 것, 강도질을 한 것을 제외하고, 그 나머지 죄상(罪狀)은 이미 발각되었거나 발각되지 않았거나, 이미 결정(結正)되었거나 결정되지 않았거나 다 용서하여 면제한다. 나라에서 가진 편민 사의(便民事宜)를 조목별로 나열하기를 다음과 같이 하니, 오로지 너희 신료들은 나의 지극한 생각을 몸받도록 하라.

1. 즉위하던 처음에 반포하여 내린 조획(條畫)이 국체(國體)와 민생(民生)에 도움이 있으리라고 생각하였는데, 중외(中外)의 관사(官司)에서 문구(文具)로만 여기고 마음을 다하여 받들어 행하지 않으니, 실로 함께 다스리는 뜻에 어긋난다. 경중(京中)에서는 사헌부(司憲府)가, 외방(外方)에서는 도관찰사(都觀察使)가 엄하게 고찰하여 빠짐 없이 봉행(奉行)하되, 현저하게 성과를 거둔 자는 갖추 기록하여 신문(申聞)해서 탁용(擢用)하는 데에 대비하고, 용렬하고 태만하여 버려두고 행하지 않은 자는 그 죄를 엄하게 징치하라.

1. 기묘년 이전의 각 부(府)·주(州)·군(郡)·현(縣)의 세공(稅貢)이 본수(本數)에 차지 못하여 충당해야 할 것과, 진대(賑貸)라 칭하면서 관가에 관계된 전량(錢糧)을 여러 해가 되어도 갚지 않은 것과, 관가의 물건과 전량을 모손(耗損)하여 이미 일찍이 추징(追徵)하기는 하였으나 본수(本數)에 차지 못한 것과, 관부의 기명(器皿)을 파손하거나 유실하여 보상하지 못한 것은 일체 모두 감면하되, 의창(義倉)만은 이 한계에 두지 아니한다.

1. 무릇 범죄한 사람의 노예가 그의 죄가 아니면서도 옥중에 갇히게 되는데, 서로 병에 전염되어서 원망을 부르고 화기를 상하니, 금후로는 무릇 관부(官府)에서 가두어야만 될 노예는 오직 도역(徒役)에만 충당시켜 관부에 흩어 두고, 중한 죄수와 섞여 있게 하지 말라.

1. 무릇 민간의 부채(負債)는, 빌어간 자와 빌려준 자가 모두 사망하였을 때, 자손이 문계(文契)에만 의거하여 추징하는 것을 일절 모두 엄금하라.

1. 빈궁한 소민(小民)이 빚을 지고 갚지 못하면, 그 자녀를 겁박해서 인질로 삼아 여러 해를 사역(使役)시켜, 혹 영구히 천인(賤人)을 만들기를 꾀하는 자가 있는데, 소재지 관사에서 자세히 살펴 엄중히 다스리라.

1. 환과 고독(鱞寡孤獨)[73]·노유(老幼)·폐질자(廢疾者) 가운데 산업(産業)이 있어 스스로 살아갈 수 있는 자를 제외하고, 궁하여 스스로 생존할 수 없는 자는 소재지 관사에서 우대하여 진휼 구제하여 살 곳을 잃지 말게 하라.

1. 바닷가에 사는 백성들의 유약(幼弱)한 자녀 가운데 왜구(倭寇)에게 사로잡혀 갔다가 다른 고을에 내버려져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고, 인하여 그 지방 사람의 종이나 첩(妾)이 된 자는, 소재지 관사에서 조사하고 살펴서 즉시 문인(文引)[74]을 발급하고, 경유하는 역(驛)과 관(官)에서도 식량을 주어 본고향에 돌아가게 하라.

1. 혼가(婚嫁)의 예는 요컨대 시기를 잃지 말아야 한다. 양가(良家)집 딸로 혹 부모가 모두 죽었거나 혹은 가난하여 고할 데도 없어, 나이가 장성하여 시기를 잃는 자는, 소재지 관사에서 그 족친에게 일러서 혼사(婚事)를 주장하게 하고, 적당히 헤아려 비용을 도와주어 민생(民生)을 후하게 하라.

1. 궁핍한 백성으로 부모가 초빈(草殯)에 있어 여러 해가 되어도 능히 영장(永葬)하지 못하는 자가 있거든, 소재지 관사에서 적당히 비용을 도와주어 기일을 엄수해서 매장하게 하여, 유감이 없게 하라.

1. 수륙의 군관(軍官)이 여러 번 전공이 있어도 벼슬과 상을 받지 못한 자는, 그 실지의 공효를 기록하고 이름을 갖추어 신문(申聞)하라.

1. 군관으로서 수륙의 전역(戰役)에 죽은 자나 먼 지방에 사신 갔다가 생명을 잃은 자는, 그 자손을 기록하여 서용(敍用)하게 하고, 군인으로서 전망(戰亡)한 자는 그 집을 복호(復戶)하여 주라.

1. 외방의 교수관(敎授官)·역승(驛丞)·염철장(鹽鐵場)의 관원이 여러 해가 되어도 승천(陞遷)하지 못한 자는 도관찰사(都觀察使)에게 고하여, 그 관직에 부임한 연월과 맡은 일의 부지런하고 게으른 것을 상고하여 상서사(尙瑞司)에 보고하고, 출척(黜陟)에 빙거하기를 수령(守令)의 예와 같이 하라.

1. 외방에 있는 품관 향리(品官鄕吏)[75]가 양민(良民)을 점탈(占奪)한 자가 있으면, 금년 10월까지 한하여 자수(自首)하게 허락하고 마땅히 죄를 면하게 할 것이요, 기한이 지나도록 자수하지 않고 남이 고하게 되는 자는 중한 죄로 처단하라."


장군들의 모임인 장군방을 혁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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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罷將軍房。 前朝舊制, 立將軍房, 有房主掌務之員, 有會坐回坐之禮。 其有新除將軍者, 則爲房主掌務者, 必考其族屬, 察其心行, 以行會坐回坐之禮, 然後新除者得行其任。 國初仍其制, 至是, 司謁李德時之子登, 拜將軍, 而房主朴東美, 掌務金成美以登係出內僚, 不行會坐之禮。 登妻, 乃太上王寵姬之女。 太上王聞之而怒, 上令憲府劾東美等, 遂罷其房。

장군방(將軍房)[76]을 혁파하였다. 고려의 옛 제도에 장군방을 세워 방주(房主)·장무(掌務)의 관원이 있고, 회좌회좌례(會坐回坐禮)[77]가 있어서, 새로 장군(將軍)에 제수된 자가 있으면, 그 방주와 장무가 반드시 그 족속(族屬)을 상고하고, 그 마음씨와 행실을 살피고 나서 회좌회좌례를 행한 연후에야, 새로 제수된 자가 그 임무를 행할 수 있었는데, 국초(國初)에도 그 제도를 인습하였었다. 이때에 이르러 사알(司謁) 이덕시(李德時)의 아들 이등(李登)이 장군이 되었는데, 방주(房主) 박동미(朴東美)와 장무(掌務) 김성미(金成美)가 이등의 계보(係譜)가 내료(內僚)에서 나왔다고 하여 회좌례(會坐禮)를 행하지 아니하였다. 이등의 아내는 태상왕의 총희(寵姬)의 딸이었다. 태상왕이 듣고 노하니, 임금이 헌사(憲司)로 하여금 박동미 등을 탄핵하여 드디어 그 방(房)을 혁파하였다.


사신을 동북면·서북면·풍해도에 관리를 나누어 보내 황충을 잡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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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分遣使臣于東ㆍ西北面、豐海道, 捕蝗。

사신을 동북면(東北面)과 서북면(西北面)과 풍해도(豐海道)에 나누어 보내어 황충을 잡았다.


덕수궁에 드나들며 잡된 말을 하고 다닌 전 삼사 좌복야 이염과 전 판사 이덕시를 춘주와 이천현에 귀양보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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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流前三司左僕射李恬于春州, 前判事李德時于利川縣。 恬與德時, 出入德壽宮, 好爲雜言。 司憲府聞之, 上疏請其欺君之罪, 上只流于外。

전 삼사 좌복야(三司左僕射) 이염(李恬)을 춘주(春州)에, 전 판사(判事) 이덕시(李德時)를 이천현(利川縣)에 귀양보냈다. 이염과 이덕시가 덕수궁(德壽宮)에 드나들며 잡된 말을 하기를 좋아하였다. 사헌부(司憲府)에서 듣고 소를 올려 그 임금을 속인 죄를 청하니, 임금이 다만 외방에 귀양보냈다.


이행으로 계림윤을 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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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以李行爲雞林尹。

이행(李行)으로 계림 윤(雞林尹)을 삼았다.


길재가 사직하고 돌아가다. 사신의 인물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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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吉再辭職而歸。 再仕辛朝爲門下注書, 歲己巳, 棄官歸善州, 奉養孀親, 鄕黨稱其孝。 世子在潛邸, 再嘗侍學于成均館。 一日, 世子與書筵官, 論遺逸之士, 乃曰: “吉再, 剛直人也。 我嘗同學, 不見久矣。” 正字田可植, 再同貫人也。 具言在家孝行之美, 世子喜, 下令三軍府移牒徵之。 再乘傳至京, 世子啓于上, 授奉常博士, 再不詣闕謝恩, 乃上書東宮曰:

所言,再於昔日, 得與邸下, 讀《詩》泮宮, 今之召臣, 不忘舊也。 然再於辛朝登科筮仕, 及王氏復位, 卽歸于鄕, 若將終身。 今者, 記舊徵召, 再欲上謁卽還, 從仕則非再志也。

世子曰: “子之乃綱常不易之道也, 義難奪志。 然召之者吾也, 官之者上也, 告辭於上可矣。” 再遂上書, 略曰:

臣本寒微, 仕於辛氏之朝, 擢第至門下注書。 臣聞女無二夫, 臣無二主。 乞放歸田里, 以遂臣不事二姓之志, 孝養老母, 以終餘年。

上覽而怪之曰: “此何人也?” 左右曰: “寒儒也。” 明日御經筵, 問權近曰: “吉再抗節不仕, 不識古有如此者, 何以處之?” 近對曰: “如是之人, 當請留之, 加以爵祿, 以勵後人, 請之而强去, 則不如使之自盡其心之爲愈也。 光武, 漢之賢主也, 而嚴光不仕。 士固有志, 不可奪也。” 上乃許歸本郡, 令復其家。

【史臣洪汝剛曰: “或以爲辛氏旣非正統, 注書亦非達官, 再宜仕於盛朝, 不須拘於小節。 愚謂忠臣不事二君, 烈女不更二夫。 辛氏雖僞, 旣委質以爲臣, 注書雖微, 亦從仕而食祿, 安得以僞朝微官, 而虧吾臣子之分乎? 且節義, 天地之常經, 莫不受之於有生之初矣, 然其誘於功利, 淫於爵祿, 不能皆有以全之也。 辛氏之亡已久, 無子孫之可托矣。 再也能爲舊君, 守其節義, 等功名於浮雲, 視爵祿於弊屣, 若將終身於草野, 亦可謂忠烈之士矣。”】

길재(吉再)가 사직하고 돌아갔다. 길재가 신씨(辛氏)[78] 조정에 벼슬하여 문하 주서(門下注書)가 되었었는데, 기사년에 벼슬을 버리고 선주(善州)[79]로 돌아가 홀어머니를 봉양하니, 향당(鄕黨)에서 그 효도를 칭송하였다. 세자(世子)가 잠저(潛邸)에 있을 때에, 길재가 일찍이 성균관(成均館)에서 같이 배웠었다. 하루는 세자가 서연관(書筵官)과 더불어 유일(遺逸)의 선비를 논하다가 말하기를,

"길재는 강직한 사람이다. 내가 일찍이 함께 배웠는데, 보지 못한 지 오래 되었다."

하니, 정자(正字) 전가식(田可植)이 길재와 같은 고향 사람인데, 길재가 집에 있으면서 효행하는 아름다움을 갖추 말하였다. 세자가 기뻐하여 삼군부(三軍府)에 영을 내려, 이첩(移牒)하여 그를 불렀었다. 길재가 역마를 타고 서울에 이르니, 세자가 임금에게 아뢰어 봉상 박사(奉常博士)를 제수하였다. 길재가 대궐에 나와 사은(辭恩)하지 아니하고, 동궁(東宮)에게 상서(上書)하였다.

"길재가 옛날에 저하(邸下)와 더불어 반궁(泮宮)[80]에서 《시경(詩經)》을 읽었었는데, 지금 신을 부른 것은 옛 정을 잊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나, 길재가 신씨(辛氏) 조정에 등과하여 벼슬하다가, 왕씨(王氏)[81]가 복위하자, 곧 고향에 돌아가서 장차 몸을 마치려 하였습니다. 지금 옛일을 기억하고 부르셨으니, 길재가 올라와서 뵙고 곧 돌아가려 하는 것이요, 벼슬에 종사하는 것은 길재의 뜻이 아닙니다."

세자가 말하기를,

"그대의 말하는 것은 바로 강상(綱常)의 바꿀 수 없는 도리이니, 의리상 뜻을 빼앗기는 어렵다. 그러나 부른 것은 나요, 벼슬을 시킨 것은 주상(主上)이니, 주상에게 사면을 고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하였다. 길재가 드디어 상서하였는데, 대략은 이러하였다.

"신이 본래 한미(寒微)한 사람으로 신씨(辛氏)의 조정에 벼슬하여, 과거에 뽑혀 문하 주서(門下注書)에 이르렀습니다. 신이 듣건대, ‘여자는 두 남편이 없고, 신하는 두 임금이 없다.’고 합니다. 빌건대, 놓아 보내 전리(田里)로 돌아가게 하여, 신의 두 성(姓)을 섬기지 않는 뜻을 이루게 하고, 효도로 늙은 어미를 봉양하게 하여 남은 여생을 마치게 하소서."

임금이 보고 괴이하게 여겨 말하기를,

"이것이 어떤 사람인가?"

하니, 좌우가 말하기를,

"한미한 유자(儒子)입니다."

하였다. 이튿날 경연(經筵)에 나아가서 권근(權近)에게 묻기를,

"길재(吉再)가 절개를 지키고 벼슬하지 않으니, 예전에 이런 사람이 있었는지 알지 못하겠다. 어떻게 처치할까?"

하니, 권근이 대답하였다.

"이런 사람은 마땅히 머물기를 청하여 작록(爵祿)을 더해 주어서 뒷사람을 권려하여야 합니다. 청하여도 억지로 간다면, 스스로 그 마음을 다하게 하는 것이 낫습니다. 광무제(光武帝)는 한(漢)나라의 어진 임금이지마는, 엄광(嚴光)[82]이 벼슬하지 않았습니다. 선비가 진실로 뜻이 있으면, 빼앗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임금이 이에 본군(本郡)으로 돌아가는 것을 허락하고, 그 집을 복호(復戶)하게 하였다.

사신 홍여강(洪汝剛)이 논하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신씨(辛氏)가 이미 정통(正統)이 아니요, 주서(注書)가 또한 현달한 관직이 아니니, 길재(吉再)가 마땅히 성조(盛朝)에 벼슬할 것이요, 작은 절개에 구애할 것이 아니라.’고 한다. 나는 생각하건대,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아니하고, 열녀(烈女)는 두 남편을 섬기지 아니한다 하니, 신씨(辛氏)가 비록 위조(僞朝)이나 이미 폐백을 바쳐 신하가 되었고, 주서(注書)가 비록 미관(微官)이나 또한 종사(從仕)하여 녹을 먹었으므로, 어떻게 위조(僞朝)와 미관(微官)이라 하여 나의 신자(臣子)된 분수를 이즈러뜨릴 수 있겠는가! 또 절의(節義)는 천지(天地)의 상경(常經)이어서, 삶이 있는 처음에 받지 않은 것이 없다. 그러나, 공리(功利)에 이끌리고 작록(爵祿)에 어두어서 모두 온전히 지키지 못한다. 신씨가 망한 지가 이미 오래이고, 자손 가운데 의탁할 만한 자도 없는데, 길재가 능히 옛 임금을 위하여 절의를 지켜, 공명을 뜬구름 같이 여기고, 작록을 헌신짝 같이 보아, 초야(草野)에서 몸을 마치려 하였으니, 또한 충렬한 선비라 하겠다.


이거이·이무·조영무·조온을 경외 종편하도록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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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命李居易、李茂、趙英茂、趙溫京外從便。 臺諫交章上言: “居易尙不悛改, 怨憤驕傲, 不宜從便。”

上令於近畿, 自願安置。

이거이(李居易)·이무(李茂)·조영무(趙英茂)·조온(趙溫)을 경외 종편(京外從便)하도록 하였다. 대간(臺諫)에서 교장(交章)하여 상언(上言)하였다.

"이거이가 아직도 개전(改悛)하지 않고 원망하고 교만하니, 종편(從便)하게 할 수 없습니다."

임금이 자원에 따라 안치하게 하였다.


7月 21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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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바람에 나무가 뽑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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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甲申/風雨拔木。

비바람에 나무가 뽑혔다.


7月 25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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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내려 함주의 순릉이 무너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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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戊子/雨。 咸州純陵崩。

비가 내려 함주(咸州)의 순릉(純陵)[83]이 무너졌다.


문하부의 건의로 천례가 서울안에서 말 타고 다니는 것을 금하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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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立賤隷騎馬之禁。 門下府郞舍上疏曰:

京都, 乃朝廷百官之所處, 禮樂文物之所在, 而四方之所取則者也。 前朝之季, 紀綱陵夷, 禮制先壞, 富賈豪商、公私賤隷之徒, 乘肥衣輕, 交錯於朝路, 朝廷百官之儀始卑, 尊卑貴賤之等不明, 式至于今, 其弊尙存, 良可惜也。 《易》曰: “上天下澤, 《履》, 君子以, 辨上下, 宅民志。” 伏惟特命有司, 別時散各品之儀表, 定工商賤隷之服色, 使尊卑貴賤之分, 秩然有序, 不相紊亂。 其工商賤隷牧竪樵童及孝服之人, 於京都內, 毋得乘馬騎牛, 如有犯令者, 所騎牛馬沒官, 決杖八十, 亦令朝士九品以上, 皆得捕獲, 毋或故縱, 其私奴僕所騎本主牛馬, 則止罰其奴, 不許沒官, 公私賤隷雖有職者, 毋得騎馬, 定爲恒式。 各殿差備內僚六品以上, 不在此限。

從之。

천례(賤隷)가 말을 타는 것을 금하는 법을 세웠다. 문하부(門下府) 낭사(郞舍)에서 상소하였다.

"서울은 조정 백관이 있는 곳이요, 예악 문물이 소재(所在)한 곳이어서, 사방이 본받는 곳입니다. 고려 말년에 기강이 해이하여져 예제(禮制)가 먼저 무너지니, 부고(富賈) 호상(豪商)과 공사(公私) 천례(賤隷)의 무리가 살찐 말을 타고 좋은 옷을 입고 조관이 다니는 길[朝路]에 서로 섞여 다녀, 조정 백관의 위의(威儀)가 비로소 낮아지고 존비 귀천(尊卑貴賤)의 등급이 밝지 못하게 되어, 지금에 이르러서도 그 폐단이 아직도 있으니, 참으로 가석한 일입니다. 《주역(周易)》에 말하기를, ‘위는 천(天)이고 아래는 택(澤)인 것이 이괘(履卦)이니, 군자(君子)가 그것을 써서 상하(上下)를 분별하고 백성의 뜻을 정(定)한다.’고 하였습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특별히 유사(有司)에 명하여 시직(時職)·산직(散職) 각품(各品)의 의표(儀表)를 구별하고, 공상(工商)·천례(賤隷)의 복색을 정하여, 존비 귀천의 분수로 하여금 정연(整然)하게 차서(次序)가 있어 서로 문란하지 못하게 할 것입니다. 공상·천례·목수(牧竪)·초동(樵童)과 상복(喪服) 입은 사람은, 서울 안에서 말을 타고 소를 타지 못하게 하며, 만일 영을 범하는 자가 있으면, 타고 있는 소와 말을 관가에 몰수하고, 장(杖) 80대를 때리며, 또한 조사(朝士) 9품(品) 이상으로 하여금 모두 잡아서 혹시라도 고의로 놓아주지 말게 하며, 그 사사 노복(奴僕)이 타고 있는 것이 본주인의 소와 말이면, 다만 그 종만 벌주고 관가에 몰수하지는 말며, 공사 천례는 비록 직책이 있는 자라도 말을 타지 못하게 하는 것으로 항구한 법식을 정하소서. 각전(各殿)의 차비(差備)와 내료(內僚) 6품(品)이상은 이 한계에 있지 않게 할 것입니다."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전에 평양성 쌓을 때의 죄를 물어 판삼사로 치사한 최영지를 해주에 귀양보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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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流判三司致仕崔永沚于海州。 初左散騎常侍朴訔等上疏言: “判三司致仕崔永沚, 築平壤城, 發先代陵墓古塚之石四百九十四。 請令攸司, 收其職牒, 鞫問其罪, 依律典刑。” 憲府亦上言以爲: “世代雖異, 君臣一也。 崔永沚爲西北面都巡問使, 築平壤城, 掘先代君王陵墓之石, 有悖於人道。 乞下攸司, 收其職牒, 鞫問不敬之罪。” 上謂永沚本武人, 不識義理, 止流海州。

판삼사(判三司)로 치사(致仕)한 최영지(崔永沚)를 해주(海州)에 귀양보냈다. 처음에 좌산기 상시(左散騎常侍) 박은(朴訔) 등이 상소하여 말하였다.

"판삼사로 치사한 최영지가 평양성(平壤城)을 쌓을 때에, 선대(先代) 능묘(陵墓) 고총(古塚)의 돌 4백 94개를 파냈으니, 청하건대, 유사(攸司)로 하여금 그 직첩을 회수하고, 그 죄를 국문하여 율에 의하여 형에 처하소서."

헌부(憲府)에서도 또한 상언(上言)하여 말하기를,

"세대는 비록 다르나 군신(君臣)은 한가지인데, 최영지가 서북면(西北面) 도순문사(都巡問使)가 되어, 평양성을 쌓을 때에 선대 군왕(君王) 능묘(陵墓)의 돌을 파냈으니, 인도(人道)에 어그러집니다. 빌건대, 유사(攸司)에 내려 그 직첩을 거두고, 불경죄(不敬罪)를 국문하소서."

임금이 말하기를,

"최영지는 본래 무인(武人)이므로 의리를 알지 못한다."

하고, 다만 해주로 귀양보냈다.


二年 八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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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月 1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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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이 사신을 보내 방물과 감자, 매화를 각각 한 분씩 바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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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癸巳〕/日本遣使來獻方物, 柑及梅花各一盆。

일본(日本)이 사신을 보내어 방물과 감자(柑子)·매화(梅花)를 각각 한 분(盆)씩 바쳤다.


평양백 조준을 순군옥에 가두었다가 석방. 무고한 조박과 권진을 귀양보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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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下平壤伯趙浚于巡軍獄, 旣而放之。 初, 慶尙道監司趙璞, 言於知陜州事權軫曰: “雞林府尹李居易, 與吾言曰: ‘吾悔信趙浚之言。’ 問曰: ‘何故?’ 居易曰: ‘浚當革私兵之時, 與我言: 「衛王室, 莫若兵强。」 予信之, 乃以不卽納牌記于三軍府, 獲罪, 以至今日。’” 軫拜諫議大夫, 以璞之言, 私自增益, 告于坐中。 於是, 憲臣權近、諫臣朴訔等, 交章上言浚與居易等之罪, 上曰: “浚豈有是言乎?” 留其狀。 近等更上書, 進闕固請, 於是下浚于獄, 命參贊門下府事李舒、巡軍萬戶李稷ㆍ尹抵ㆍ金承霔等推之。 浚以慷慨之性憤發, 但言: “臣無是言。” 涕泣而已。 知陜州事田時, 浚與居易之所信者也。 欲證浚等之罪, 遣吏捕之, 上欲令浚與居易、璞, 一處憑問。 近等請置各處鞫問, 上疑而怒曰: “豈有罪狀未著, 而遽加刑乎?” 令臺諫勿復言之, 卽命巡軍官吏, 執李居易、趙璞以來。 世子召抵曰: “卿知上之以卿爲巡軍萬戶乎?” 抵對曰: “臣本昏愚, 不習吏事。 今命臣以刑官之任, 罔知施措, 夙夜惶懼。” 世子曰: “卿本世族, 不拘小節, 不阿世態, 惟務寬平, 故命以刑官之任。” 以臺諫狀示之曰: “太上開國, 主上嗣位, 予以不肖爲世子, 以至今休, 皆浚之功也。 今忘前日之功, 不核虛實, 但信所司之狀鞫問, 則皇天上帝, 甚可畏也。 浚若有是言, 大有罪焉, 卿其往欽之。” 抵再拜而出。 右政丞閔霽密言於抵曰: “浚等欲謀害吾與崙, 而緣及世子。 今乃見囚, 不可不窮推也。” 臺省咸進闕庭, 更請遣委官于居易、璞之在處, 質問浚之所言, 上曰: “凡質問之事, 當置一處憑問。 豈可遣人以問!” 臺諫極爭, 命不視事, 各歸私第。 囚璞于巡軍問之, 璞之言, 與臺省疏意不同, 又囚軫問之, 軫之言, 亦與疏意異。 上大惡近等, 囚居易于巡軍, 與璞憑問。 居易曰: “吾不聞浚有是言也。” 璞面質曰: “君不言於雞林東軒乎?” 居易曰: “否。 君饋我二三杯, 然我心則異, 不醉也。 君在己卯, 貶于利川, 出爲慶尙道監司者, 以我父子故也。 吾與浚不改定社之盟。 浚雖有是言, 吾豈與君言乎?” 璞曰: “吾子愼言娶懷安公之女, 浚與之鞍馬, 吾出爲監司, 與之金帶。 然其心則向我不平。” 居易大言曰: “璞之言, 皆私恨也。 願諸公聞之。” 璞大有慙色。 放浚與居易, 各還其第, 貶璞于利川, 流軫于丑山島。

평양백(平壤伯) 조준(趙浚)을 순군옥(巡軍獄)에 가두었다가 조금 뒤에 석방하였다. 처음에 경상도 감사(慶尙道監司) 조박(趙璞)이 지합주사(知陜州事) 권진(權軫)에게 말하였었다.

"계림 부윤(雞林府尹) 이거이(李居易)가 내게 얘기하기를, ‘내가 조준의 말을 믿은 것을 후회한다.’ 하였다. ‘무슨 까닭이냐.’ 물으니, 이거이가 말하기를, ‘조준이 사병(私兵)을 혁파할 때를 당하여, 나와 말하기를, 「왕실을 호위하는 데는 군사가 강한 것 같은 것이 없다.」 하였다. 내가 그 말을 믿고서 패기(牌記)를 곧 삼군부(三軍府)에 바치지 않았다가 죄를 얻어 오늘에 이르렀다.’고 하였다."

권진이 간의 대부(諫議大夫)가 되어서 조박의 말을 사사로이 자기가 더 보태어 좌중(坐中)에 고하였다. 이에 헌신(憲臣) 권근(權近)과 간신(諫臣) 박은(朴訔) 등이 교장(交章)하여 상언(上言)해서 조준·이거이 등의 죄를 말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조준이 어찌 이런 말을 하였겠는가?"

하고, 그 소장을 머물러 두었다. 권근 등이 다시 상서(上書)하여 대궐에 나와 굳이 청하니, 이에 조준을 옥에 가두고, 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 이서(李舒)·순군 만호(巡軍萬戶) 이직(李稷)·윤저(尹抵)·김승주(金承霔) 등에게 명하여 추국(推鞫)하게 하니, 조준이 강개(慷慨)한 성품이므로 분이 나서,

"신은 그런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하고, 눈물을 흘리며 울기만 할 뿐이었다. 지합주사(知陜州事) 전시(田時)는 조준과 이거이가 믿는 사람이었다. 조준 등의 죄를 입증하려고 하여 서리(書吏)를 보내서 잡아 오고, 임금이 조준·이거이·조박을 한 곳에서 빙문(憑問)하게 하려고 하는데, 권근 등은 각곳에 두고 국문(鞫問)하기를 청하였다. 임금이 의심하여 노하기를,

"어찌 죄상이 나타나지 않았는데도 갑자기 형(刑)을 가할 수 있겠는가?"

하고, 대간(臺諫)에게 다시 말을 하지 못하도록 하고, 곧 순군 관리에게 명하여 이거이·조박을 잡아 왔다. 세자가 윤저(尹抵)를 불러 말하기를,

"경은 주상께서 경으로 순군 만호(巡軍萬戶)를 삼은 뜻을 알고 있는가?"

하니, 윤저가 대답하기를,

"신은 본래 혼매하고 어리석어 이사(吏事)를 익히지 못하였는데, 지금 신에게 형관의 임무를 명하시니, 조처해야 할 바를 알지 못하여 밤낮으로 황공하고 송구합니다."

하였다. 세자가 말하기를,

"경은 본래 세족(世族)이며, 작은 절조에 구애하지 않고, 세태(世態)에 아첨하지 않으며, 오직 너그럽고 공평한 것을 힘쓰기 때문에, 형관의 임무를 명한 것이다."

하고, 대간(臺諫)의 소장을 보이면서 말하기를,

"태상왕께서 개국하신 것과 주상께서 대위(大位)를 이으신 것과 불초한 내가 세자가 되어 지금의 아름다움에 이른 것이, 모두 조준의 공이다. 지금 전날의 공을 잊고 허실을 가리지 않고, 다만 유사(攸司)의 소장만 믿고 국문한다면, 황천 상제(皇天上帝)가 심히 두려울 것이다. 조준이 만일 이 말을 하였다면, 크게 죄가 있는 것이다. 경은 가서 조심하라."

하였다. 윤저가 재배하고 나오는데, 우정승 민제(閔霽)가 비밀히 윤저에게 말하기를,

"조준 등이 나와 하윤(河崙)을 해치고, 인연을 맺어 세자에게 미치려고 한다. 지금 잡혀 갇혔으니, 끝까지 추궁하지 않을 수 없다."

하였다. 대성(臺省)이 모두 대궐 뜰에 나와 다시 위관(委官)[84]을 이거이와 조박의 있는 곳에 보내어 조준의 말한 것을 질문하도록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무릇 질문하는 일은 마땅히 한 곳에 두고 빙문(憑問)하여야 할 것이지, 어찌 사람을 보내어 물을 수 있는가?"

하였다. 대간이 극력 간쟁(諫諍)하니, 임금이 일을 보지 못하도록 명하여 각각 사제(私第)로 돌려보내고, 조박을 순군옥에 가두고 물으니, 조박의 말이 대성(臺省)의 소장의 뜻과 같지 않았다. 또 권진(權軫)을 가두고 물으니, 권진의 말도 또한 소장의 뜻과는 달랐다. 임금이 권근 등을 크게 미워하여, 이거이를 순군옥에 가두고 조박과 빙문(憑問)하니, 이거이가 말하기를,

"나는 조준이 그런 말을 하는 것을 듣지 못하였다."

하니, 조박이 맞대고 질문하기를,

"그대가 계림(雞林) 동헌(東軒)에서 말하지 않았는가?"

하니, 이거이가 말하기를,

"말한 일이 없다. 그대가 나에게 술 두세 잔을 먹였지만, 내 마음은 달랐고 취하지 않았었다. 그대가 기묘년에 이천(利川)으로 폄출(貶出)되었다가 경상도 감사로 나간 것은 우리 부자 때문이었다. 내가 조준과 정사(定社)의 맹세를 바꾸지 않았으니, 조준이 비록 그런 말을 하였더라도 내가 어찌 그대와 얘기하겠는가!"

하였다. 조박이 말하기를,

"내 자식 조신언(趙愼言)이 회안공(懷安公)의 딸에게 장가들 때에, 조준이 안마(鞍馬)를 주었고, 내가 감사(監司)로 나갈 때에 금대(金帶)를 주었었다. 그러나 그 마음은 내게 향하여 불평이 있었다."

하니, 이거이가 큰 소리로 말하기를,

"조박의 말은 모두 사사 감정이다. 원하건대, 제공(諸公)들은 들어보시오."

하였다. 조박이 크게 부끄러워하는 빛이 있었다. 조준과 이거이를 석방하여 각각 그 집으로 돌려보내고, 조박은 이천(利川)에 폄출(貶出)하고, 권진은 축산도(丑山島)에 귀양보냈다.


예문춘추관 태학사 이지를 명나라 서울로 보내 성절을 축하하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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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遣藝文春秋館太學士李至, 如京師賀聖節。

예문춘추관(藝文春秋館) 태학사(太學士) 이지(李至)를 보내어, 명나라 서울에 가서 성절(聖節)을 하례하게 하였다.


전 전서 여칭과 사농시 경 강천주를 동북면에 보내 기민을 구제하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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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遣前典書呂稱、司農卿姜天霔於東北面, 發倉賑飢。

전 전서(典書) 여칭(呂稱)과 사농 경(司農卿) 강천주(姜天霔)를 동북면(東北面)에 보내어, 창고를 열어서 기민(飢民)을 진휼하였다.


8月 4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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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개가 중천에 나타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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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丙申/虹見中天。

무지개가 중천(中天)에 나타났다.


경연에서 첨서삼군부사 이첨이 《통감강목》을 진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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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御經筵。 簽書三軍府事李詹, 進講《通鑑綱目》。 上問於詹曰: “予欲覽古人詩, 如何?” 詹曰: “可。”

경연(經筵)에 나아가니, 첨서삼군부사(簽書三軍府事) 이첨(李詹)이 《통감강목(通鑑綱目)》을 진강하였다. 임금이 이첨에게 묻기를,

"내가 예전 사람의 시(詩)를 보고자 하는데 어떠한가?"

하니, 이첨이 말하기를,

"가합니다."

하였다.


최이·서유·맹사성·박습 등에게 관직을 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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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崔迤兼大司憲, 徐愈、孟思誠爲左右散騎, 朴習、李垠爲左右諫議, 金九德爲中丞。 臺省刑曹皆左遷, 左散騎常侍朴訔爲忠州牧使, 中丞安省爲甫州事, 刑曹典書呂稱爲淸州牧使, 侍史田理爲金海府使, 雜端朴軒爲樂安郡事。

최이(崔迤)로 겸 대사헌(兼大司憲)을, 서유(徐愈)·맹사성(孟思誠)으로 좌산기(左散騎)·우산기(右散騎)를, 박습(朴習)·이은(李垠)으로 좌간의(左諫議)·우간의(右諫議)를, 김구덕(金九德)으로 중승(中丞)을 삼고, 대성(臺省)·형조를 모두 좌천하여, 좌산기 상시(左散騎常侍) 박은(朴訔)은 충주 목사(忠州牧使)를, 중승(中丞) 안성(安省)은 보주사(甫州事)를, 형조 전서(刑曹典書) 여칭(呂稱)은 청주 목사(淸州牧使)를, 시사(侍史) 전이(田理)는 김해 부사(金海府使)를, 잡단(雜端) 박헌(朴軒)은 낙안 군사(樂安郡事)를 삼았다.


경상도 감사 전백영에게 궁시와 검갑을 하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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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賜慶尙道監司全伯英弓矢劍甲。

경상도 감사(慶尙道監司) 전백영(全伯英)에게 궁시(弓矢)와 검갑(劍甲)을 하사하였다.


도승지 정구가 거듭 요청하여 최도원으로 하여금 역마를 타고 근친하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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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都承旨鄭矩, 令崔道源乘馹覲親。 內侍右掌務崔道源之父, 在晋陽得疾, 道源求乘馹以去, 矩以啓, 上曰: “乃者, 尹夏以覲母病, 傳馹以去, 率妓橫行諸郡, 以犯憲綱。 自後朝士覲親者, 不許驛馬, 豈可偏給此人!” 矩再三請焉, 許之。

도승지(都承旨) 정구(鄭矩)가 최도원(崔道源)으로 하여금 역마를 타고 근친(覲親)하게 하였다. 내시 우장무(內侍右掌務) 최도원의 아비가 진양(晉陽)에 있으면서 병에 걸렸는데, 최도원이 역마를 타고 가기를 구(求)하니, 정구가 아뢰었었다. 임금이 말하기를,

"요전에 윤하(尹夏)가 어미 병을 보러 가는데 역마를 타고 갔으나, 기생을 데리고 여러 고을에 횡행(橫行)하여 법을 범하였었다. 그 뒤로부터 조사(朝士) 가운데 근친(覲親)하러 가는 자에게 역마를 허락하지 않았다. 어찌 이 사람에게만 치우쳐 줄 수 있겠는가?"

하였으나, 정구가 두세 번 청하였으므로, 허락하였다.


편문으로 나와 본궁에 가서 공사를 독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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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出自便門, 至本宮督役。

편문(便門)으로 나와서 본궁(本宮)에 이르러 역사를 감독하였다.


경연에서 동지사 이첨이 고시(古詩)를 익힐 것을 권하며 두시 300수를 뽑아 올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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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御經筵。 同知事李詹進曰: “頃上欲覽古詩。 爲人君者, 亦不可不習也。 昔漢高祖製《大風歌》, 武帝製《秋風詞》, 下及于隋煬帝, 亦好詞章。 然忌上人之才, 故殺薛道衡、王冑、鄭鼐。 抄《杜詩》百首, 蓋倣《詩》之三百篇也。 乞於經筵幷觀之。”

경연(經筵)에 나아가니, 동지사(同知事) 이첨(李詹)이 말하였다.

"지난번에 주상께서 고시(古詩)를 보고자 하시었는데, 인군 된 이가 또한 익히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옛날에 한(漢)나라 고조(高祖)가 대풍가(大風歌)를 지었고, 한나라 무제(武帝)가 추풍사(秋風詞)를 지었고, 아래로 수(隋)나라 양제(煬帝)에 내려와 또한 사장(詞章)을 좋아하였으나, 그러나, 남보다 뛰어나는 재주를 꺼려 고의로 설도형(薛道衡)·왕주(王胄)를 죽였습니다. 정내(鄭鼐)가 두시(杜詩) 3백 수(首)를 초출(抄出)하였는데, 대개 《시경(詩經)》 3백 편(篇)을 모방한 것입니다. 빌건대, 경연에서 아울러 보소서."


8月 14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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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루가 국자동에 들어와서 사람들이 때려 잡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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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丙午/獐入國子洞, 爲人所搏。

노루가 국자동(國子洞)에 들어와서, 사람들이 때려 잡았다.


세자가 제릉에 배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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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世子謁齊陵。

세자가 제릉(齊陵)에 배알(拜謁)하였다.


문하부에서 상소하여 내재상을 혁파하기를 청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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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門下府上疏, 請罷內宰相, 不允。 疏曰:

古之人君, 每當論事, 必因大臣而咨訪, 故嬖幸之臣, 不得以間之, 可爲後世之法也。 前朝之時, 主少國危, 權臣擅政, 其在闕內議事者, 謂之內宰樞, 凡所處置, 皆在掌握, 而都堂大臣不與聞焉, 殿下所親見也。 我太上王應天開國, 立經陳紀, 每與都堂大臣, 圖議政事, 而內相之名則未有也。 今殿下以兩府五六員, 置之於內, 以爲內相。 伏惟殿下鑑前朝之弊法, 遵太上之宏規, 革去內相, 垂法萬世。 其他宗親大小臣僚, 非有命召, 毋得擅入於內, 每坐正殿, 與世子都堂大臣, 講論治道。 如此則偏黨絶而公道明, 君臣合而政事修矣。

門下府又上疏, 請罷內相, 且請自今宗親臣僚, 非命召, 毋得擅入內, 以嚴宮禁, 兪允, 唯大小臣僚出入無禁。

문하부(門下府)에서 상소하여 내재상(內宰相)[85]을 혁파하기를 청하니,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소(疏)는 이러하였다.

"예전의 인군은 매양 일을 의논하는 때를 당하면 반드시 대신(大臣)을 통하여 고루 묻기 때문에, 총애를 받는 신하가 이간질을 할 수가 없었으니, 후세의 법이 될 만합니다. 고려 때에 임금은 어리고 나라는 위태해서, 권신(權臣)이 정사를 마음대로 하였는데, 궐내에 있으면서 일을 의논하는 자를 ‘내재추(內宰樞)’라 하여, 무릇 일을 처치하는 것이 모두 그 손아귀에 있었고, 도당(都堂) 대신은 참여해 듣지 못하였으니, 전하가 친히 보신 바입니다. 우리 태상왕께서 천명(天命)에 응하여 개국해서, 법을 세우고 기강을 베풀어서, 매양 도당 대신과 더불어 정사를 도모하고 의논하여, 내상의 이름은 있지 않았습니다. 지금 전하가 양부(兩府)의 5, 6관원을 궁내에 두어 내상(內相)을 삼으시니, 엎드려 바라건대, 전하는 고려의 폐법(弊法)을 거울삼으시고, 태상왕의 큰 법을 준수하시어, 내상을 혁파하여 없애서 만세에 법을 남길 것입니다. 기타 종친·대소 신료도 명소(命召)가 있지 않으면, 마음대로 궁내에 들어오지 못하게 할 것입니다. 매양 정전(正殿)에 앉아서 세자와 도당 대신과 더불어 치도를 강론할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편당(偏黨)이 끊어지고 공도(公道)가 밝아지며, 군신(君臣)이 화합하고 정사가 닦여질 것입니다."

문하부에서 또 상소(上疏)하여 내상을 혁파하기를 청하고, 또 이제부터 종친과 신료(臣僚)가 명소(命召)가 아니면, 마음대로 궐내에 들어오지 말게 하여 궁금(宮禁)을 엄하게 하기를 청하니, 유윤(兪允)하고, 오직 대소 신료의 출입은 금하지 말도록 하였다.


8月 19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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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엉이가 수창궁 동마루에 와서 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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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辛亥/鵂鶹來鳴壽昌宮屋脊。

부엉이가 수창궁(壽昌宮) 동(棟)마루에 와서 울었다.


8月 21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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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도·전라도·충청도에 큰 물이 지고 바람이 크게 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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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癸丑/慶尙、全羅、忠淸道大水大風。

경상도·전라도·충청도에 큰 물이 지고, 바람이 크게 불었다.


까마귀떼가 덕나동 밤나무에 모이기 때문에 중에게 《금강경》을 읽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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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群鴉集德那洞栗木, 邀僧一七, 令讀《金經》。

뭇까마귀가 덕나동(德那洞) 밤나무에 모이니, 중 일곱 사람을 데려다가 《금경(金經)》을 읽게 하였다.


임금이 세자와 더불어 덕수궁에 나아가 헌수하고 매우 즐기다가 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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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與世子詣德壽宮獻壽, 極歡而罷。 初太上王潛幸新菴寺, 世子親詣請還。 上及世子獻壽, 義安公和、左政丞成石璘、淸川伯李居仁、判承寧府事禹仁烈等, 皆以耆舊侍宴, 迭起爲壽。 酒酣, 太上王聯句云: “明月滿簾吾獨立。” 笑謂世子曰: “汝雖及第, 未易爲如此之句。” 又云: “山河依舊人何在?” 顧左右曰: “吾之此句, 有深意焉。” 上與世子起舞, 太上王召出寵妓巫峽兒, 與宴焉。 上賜表裏, 世子賜段一匹, 極歡而罷。

임금이 세자와 더불어 덕수궁(德壽宮)에 나가 헌수하고, 지극히 즐기다가 파(罷)하였다. 처음에 태상왕이 몰래 신암사(新菴寺)에 갔는데, 세자가 친히 나아가 환궁하기를 청하였었다. 임금과 세자가 헌수하니, 의안공(義安公) 이화(李和)·좌정승 성석린(成石璘)·청천백(淸川伯) 이거인(李居仁)·판승녕부사(判承寧府事) 우인렬(禹仁烈) 등이 모두 기구(耆舊) 대신으로 시연(侍宴)하였다. 번갈아 일어나 헌수하고 술이 취하니, 태상왕이 연귀(聯句)를 짓기를,

"밝은 달은 발에 가득한데 나 홀로 서 있네."

하고, 웃으면서 세자에게 말하기를,

"네가 비록 급제(及第)는 하였지만, 이런 글귀는 쉽게 짓지 못할 것이다."

하고, 또 이르기를,

"산하(山河)는 의구한데 인걸은 어디 있느뇨?"

하고, 좌우를 돌아보며 말하기를,

"나의 이 글귀에는 깊은 뜻이 있다."

하였다. 임금과 세자가 일어나 춤추니, 태상왕이 총애하는 기생 무협아(巫峽兒)를 불러 내어 잔치에 참여하게 하였다. 임금이 표리(表裏)를 하사하고, 세자가 단(段) 1필을 하사하고, 지극히 즐기다가 파하였다.


이튿날 임금과 세자가 덕수궁에 나아가 잔치를 베풀고 연구를 지어 창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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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翌日, 上與世子詣德壽宮設宴, 聯句唱和極歡。 太上王曰: “年雖七十心相應。” 上對曰: “夜已三更興不窮。” 成石璘、禹仁烈侍宴, 上起舞, 夜深乃罷。

이튿날 임금과 세자가 덕수궁(德壽宮)에 나아가 잔치를 베풀고, 연귀(聯句)를 지어 창화(唱和)하면서 지극히 즐기었다. 태상왕이 이르기를,

"나이는 비록 칠십이나 마음은 서로 응하네."

하니, 임금이 대답하기를,

"밤은 이미 삼경인데 흥은 끝이 없네."

하였다. 성석린(成石璘)·우인렬(禹仁烈)이 시연(侍宴)하였다. 임금이 일어나 춤추고, 밤이 깊어서 파하였다.


부엉이 때문에 중에게 정전에서 《금강경》을 읽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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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邀僧二七, 令讀《金經》於正殿, 以禳鵂鶹。

중 14인을 데려다가 정전(正殿)에서 《금경(金經)》을 읽게 하였으니, 부엉이 때문에 기양(祈禳)한 것이다.


사헌부에서 방간을 먼 지방에 옮겨 두기를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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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司憲府請移置芳幹於遐方, 不允。

사헌부(司憲府)에서 이방간(李芳幹)을 먼 지방에 옮겨 두기를 청하니,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사헌부에서 방간에 대해 또 상서하여 극력 진달하였으나 따르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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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司憲府又上書極陳, 不從。

사헌부에서 또 상서(上書)하여 극력 진달(陳達)하였으나, 따르지 아니하였다.


동·서부 학당의 생도를 순천사·미륵사에 수용했으나 중들의 반대로 내보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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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放東西部學堂生徒。 初, 設五部學堂, 未立黌舍, 故東部會學生於順天寺, 西部於(彌勤寺)〔彌勒寺〕。 兩寺僧以破染三寶啓之, 卽命罷學。

동·서부 학당(東西部學堂)의 생도를 내보냈다. 처음에 오부 학당(五部學堂)을 설치하고 횡사(黌舍)[86]를 세우지 못하였기 때문에, 동부(東部)에서는 학생을 순천사(順天寺)에 모으고, 서부(西部)에서는 미륵사(彌勒寺)에 모았는데, 두 절의 중이 삼보(三寶)[87]를 파괴하고 더럽힌다고 아뢰므로, 곧 학당을 없애도록 명하였다.


좌정승 성석린이 병으로 사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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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左政丞成石璘以疾辭。

좌정승 성석린(成石璘)이 병으로 사면하였다.


태상왕이 신암사를 중창할 것을 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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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太上王命重創新菴寺。

태상왕이 신암사(新菴寺)를 중창(重創)할 것을 명령하였다.


연경궁을 태상전에 소속시키니, 태상왕이 기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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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以延慶宮屬太上殿。 中官朴英文啓于太上殿, 太上喜, 賜英文馬一匹。

임금이 연경궁(延慶宮)을 태상전(太上殿)에 붙였다. 중관(中官) 박영문(朴英文)이 태상전에 아뢰니, 태상왕이 기뻐하여 박영문에게 말 1필을 하사하였다.


이달에 일본 준주 태수 원정이 말 2필을 바치고 잡혀 간 사람들을 돌려보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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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是月, 日本駿州太守源定, 使人獻馬二匹, 發還被擄人。 博多城承天禪寺住持誾公, 使人獻禮物, 求《藏經》。 又慈雲禪院住持天眞, 使人亦獻禮物, 發回被擄人口。

이달에 일본(日本) 준주 태수(駿州太守) 원정(源定)이 사람을 보내어 말 2필을 바치고, 잡혀 간 사람들을 돌려보냈다. 박다성(博多城) 승천선사(承天禪寺) 주지(住持) 은공(誾公)이 사람을 보내어 예물을 바치고 《대장경(大藏經)》을 청구하였고, 또 자운선원(慈雲禪院) 주지(住持) 천진(天眞)이 사람을 보내어 예물을 바치고, 잡혀간 인구(人口)를 돌려보냈다.


二年 九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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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月 1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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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도의 사미 영감이 사람을 시켜 말 6필을 바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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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壬戌〕/對馬島沙彌靈鑑使人獻馬六匹。

대마도(對馬島) 사미영감(沙彌靈鑑)이 사람을 시켜 말 6필을 바쳤다.


임금이 북문으로 본궁에 몰래 나아가 공사를 감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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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出自北門, 潛幸本宮, 監督營繕。

북문(北門)으로 나가서 몰래 본궁(本宮)에 거둥하여 영선(營繕)하는 것을 감독하였다.


양온동 안원의 집에 이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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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移御良醞洞安瑗第。

양온동(良醞洞) 안원(安瑗)의 집에 이어(移御)하였다.


9月 8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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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이 건성을 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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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己巳/月犯建星。

달이 건성(建星)을 범하였다.


성석린이 어머니가 늙었다고 사직하기를 비니 창녕백으로 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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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成石璘以母老, 乞辭甚切。 以石璘封昌寧伯, 李居易判門下府事, 閔霽左政丞, 河崙右政丞, 禹仁烈判三司事, 李茂判三軍府事, 李舒判承寧府事, 趙英茂門下侍郞贊成事, 趙溫三司左使, 鄭矩大司憲, 朴錫命都承旨。

성석린(成石璘)이 어머니가 늙었다고 하여 걸사(乞辭)하기를 심히 간절하게 하니, 성석린으로 창녕백(昌寧伯)을 봉하고, 이거이(李居易)로 판문하부사(判門下府事)를, 민제(閔霽)로 좌정승(左政丞)을, 하윤(河崙)으로 우정승(右政丞)을, 우인렬(禹仁烈)로 판삼사사(判三司事)를, 이무(李茂)로 판삼군부사(判三軍府事)를, 이서(李舒)로 판승녕부사(判承寧府事)를, 조영무(趙英茂)로 문하 시랑찬성사(門中侍郞贊成事)를, 조온(趙溫)으로 삼사 좌사(三司左使)를, 정구(鄭矩)로 대사헌(大司憲)을, 박석명(朴錫命)으로 도승지(都承旨)를 삼았다.


사헌부에서 녹봉 지급 문건에 착오를 일으킨 시사 신상을 탄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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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憲司劾侍史申商。 摠制辛克禮子, 年十一歲。 拜功臣都監錄事受祿, 憲司以幼未稱職, 還徵其祿。 時, 商錯誤文簿故也。

헌사(憲司)에서 시사(侍史) 신상(申商)을 탄핵하였다. 총제(摠制) 신극례(辛克禮)의 아들이 나이 11세인데, 공신 도감(功臣都監) 녹사(錄事)를 제수받아 녹을 받으니, 헌사에서 어려서 직책에 적당치 않다고 하여, 그 녹을 도로 징수하였다. 이때에 신상이 문부(文簿)를 착오하였기 때문이었다.


유운·도흥 등을 불러 대궐 뜰에서 격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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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召柳雲、都興等, 擊毬于殿庭。

유운(柳雲)·도흥(都興) 등을 불러 대궐 뜰에서 격구(擊毬)하였다.


수창궁 후원에 기르던 사슴을 매도에 놓아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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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放鹿于媒島。 嘗畜鹿于壽昌宮後苑, 至是放之。

사슴을 매도(媒島)에 놓아주었다. 일찍이 사슴을 수창궁(壽昌宮) 후원에서 길렀었는데, 이때에 와서 놓아주었다.


문하부에서 궁궐에 남아있는 갑사를 모두 삼군부에 돌려보내기를 청하니 그대로 따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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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門下府上疏, 請以甲士歸之三軍府, 從之。 疏曰:

殿下繼世守文, 期致太平。 頃以甲士送于三軍府, 而數十人猶守宮內, 帶佩凶器, 有乖儀仗之制。 伏望悉以甲士, 歸之三軍府, 以示守文之意。

兪允, 若有不豫色然。

문하부(門下府)에서 상소(上疏)하여 갑사(甲士)를 삼군부(三軍府)에 돌려보내기를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소(疏)는 이러하였다.

"전하가 대를 잇고 문(文)을 지켜 태평에 이르기를 기약하여, 지난번에 갑사(甲士)를 삼군부(三軍府)에 보내었는데, 수십 인이 아직도 궁내를 지키면서 흉기(凶器)를 차고 있으니, 의장(儀仗)의 제도에 어그러짐이 있습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갑사를 모조리 삼군부에 돌려보내 문(文)을 지키는 뜻을 보이소서."

유윤(兪允)은 하였으나, 좋아하지 않는 기색이 있는 것 같았다.


문하부 건의로 원종 공신들의 시위패를 혁파하여 모두 삼군부에 보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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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罷原從侍衛牌, 悉送于三軍府。 因門下府所啓也。

원종 시위패(原從侍衛牌)를 혁파하여 모두 삼군부에 보냈으니, 문하부(門下府)의 아뢴 것에 인함이었다.


상당후 이저를 불러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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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召還上黨侯李佇。

상당후(上黨侯) 이저(李佇)를 소환하였다.


이거이·이저·이무·조영무를 위해 후원 양청에 술을 베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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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置酒于後苑涼廳, 慰判門下李居易、上黨侯李佇、判三軍李茂、門下侍郞趙英茂也。 世子及義安公李和、完山侯李天祐、靑原侯(沈悰)〔沈淙〕、奉寧侯福根等皆侍宴。 史官金涉入侍, 上謂左承旨閔無疾曰: “彼何人歟?” 無疾曰: “史官也。” 都承旨朴錫命知上意, 目涉以出。 酒酣, 上起舞, 至夜乃罷。

후원(後苑) 양청(涼廳)에 술을 베풀었으니, 판문하(判門下) 이거이(李居易)·상당후(上黨侯) 이저(李佇)·판삼군(判三軍) 이무(李茂)·문하 시랑(門下侍郞) 조영무(趙英茂)를 위로함이었다. 세자와 의안공(義安公) 이화(李和)·완산후(完山侯) 이천우(李天祐)·청원후(靑原侯) 심종(沈淙)·봉녕후(奉寧侯) 이복근(李福根) 등이 모두 시연(侍宴)하였다. 사관(史官) 김섭(金涉)이 입시(入侍)하였는데, 임금이 좌승지(左承旨) 민무질(閔無疾)에게 이르기를,

"저건 무슨 사람인가?"

하니, 민무질이 말하기를,

"사관입니다."

하였다. 도승지(都承旨) 박석명(朴錫命)이 임금의 뜻을 알고 김섭에게 눈짓하여 나가게 하였다. 술이 취하니, 임금이 일어나 춤추고, 밤이 되어 파하였다.


배중륜에게 은대 한 개를 하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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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賜裵仲倫銀帶一腰。

배중륜(裵仲倫)에게 은대(銀帶) 1요(腰)를 하사하였다.


일찍이 왜구에게 잡혀갔던 중국 사녀(士女) 20여 명을 요동에 돌려보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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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送還中國士女二十餘名于遼東。 士女, 嘗爲倭所虜者也。

중국(中國) 사녀(士女) 20여 명을 요동(遼東)에 돌려보냈다. 사녀는 일찍이 왜구(倭寇)에게 잡혀 갔던 자들이었다.


9月 16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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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혹성이 태미 상장을 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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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丁丑/熒惑犯太微上將。

형혹성(熒惑星)이 태미(太微) 상장(上將)을 범하였다.


문하부 건의로 방간 부자를 익주에 옮겨 안치하고 쌀과 콩 각각 1백 50석을 하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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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移置芳幹父子于益州, 仍賜米菽各百五十石。 門下府上疏曰:

芳幹信憸邪之言, 實獲僭亂之罪。 當置極刑, 但以殿下友愛之情, 得保首領, 然近在畿甸之內, 儻或煽亂, 則無及矣。 伏惟斷以大義, 移置遠地, 俾不出入, 則殿下有保全之德, 彼亦享安榮之福, 豈不美哉!

上命將軍朴淳移置。

이방간(李芳幹) 부자를 익주(益州)에 옮겨 안치하고, 인하여 쌀·콩 각각 1백 50석을 하사하였다. 문하부(門下府)에서 상소하였다.

"방간이 간사한 소인의 말을 믿고 실로 참란(僭亂)한 죄를 범하였으니, 마땅히 극형에 처하여야 할 것인데, 다만 전하의 우애하시는 정으로 머리를 보전하였습니다. 그러나, 가까이 경기(京畿) 안에 있으니, 만일 혹시 난을 선동하는 일이 있으면 미칠 수 없을 것입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대의로 결단하여 먼 땅에 옮겨 두어서 출입하지 못하게 하면, 전하께서는 보전하는 덕이 있고, 저들도 또한 안영(安榮)의 복을 누릴 것이니, 어찌 아름답지 않겠습니까?"

임금이 장군(將軍) 박순(朴淳)에게 명하여 옮겨 안치하도록 하였다.


제주의 백백 태자가 환자(宦者)를 보내 말 3필과 금가락지를 바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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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濟州伯伯太子遣宦者, 獻馬三匹及金環。

제주(濟州)의 백백 태자(伯伯太子)[88]가 환자(宦者)를 보내어 말 3필과 금가락지를 바쳤다.


9月 19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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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의 돌이 벼락을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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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庚辰/震男山石。

남산(男山)의 돌이 벼락맞았다.


우인렬과 이문화를 명나라에 보내 신년 하례로 말 30필을 바치고 인신과 고명을 청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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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遣判三司事禹仁烈、簽書李文和, 如京師賀正, 獻馬三十匹, 兼請印誥。

판삼사사(判三司事) 우인렬(禹仁烈)과 첨서(簽書) 이문화(李文和)를 명나라 서울에 보내어 원정(元正)을 하례하고 말 30필을 바치게 하고, 겸하여 인신(印信)과 고명(誥命)을 청하게 하였다.


경연에서 이첨이 상림원에서 점탈한 평민의 땅이 많다고 하니, 돌려주라고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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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御經筵。 李詹進曰: “古昔帝王, 以上林苑地, 賜人造家, 史臣美之。 今上林苑, 多奪平民所居之地, 與古者賜人之意異矣。” 上嘉納, 命還其奪占之地。

경연(經筵)에 나아가니, 이첨(李詹)이 말하였다.

"예전의 제왕(帝王)은 상림원(上林苑)의 땅을 사람에게 주어 집을 짓게 하였으므로, 사신(史臣)이 아름답게 여겼습니다. 지금 상림원에서 평민(平民)의 사는 땅을 많이 빼앗으니, 예전에 사람에게 땅을 주던 뜻과는 다릅니다."

임금이 가납(嘉納)하고, 명하여 점탈(占奪)한 땅을 되돌려 주게 하였다.


요동의 정료위 사람 12명이 도망하여 와서 명나라 정세가 심각함을 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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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定遼衛人十二名逃來, (人)乃言: “王室大亂, 燕王乘勝長驅。”

정료위(定遼衛) 사람 12명이 도망하여 왔는데, 그 사람들이 말하였다.

"왕실(王室)이 크게 어지러워져서, 연왕(燕王)이 승승 장구(乘勝長驅)합니다."


화장사의 베 15필과 의창의 소금값에 마추어 바꾸어 주도록 호조에 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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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命戶曹受華藏寺布十五匹, 給義鹽稱其數。

호조에 명하여 화장사(華藏寺)의 포(布) 15필을 받고, 의염(義鹽)을 그 수량에 따라 주도록 하였다.


삼군부의 도사 현맹인과 무공들이 국학 생원들을 구타하였으나, 헌사에서도 탄핵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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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軍都事玄孟仁, 歐國學生員。 孟仁將祭纛於講武堂, 武工等欲宿明倫堂, 生員等以爲: “非武工所處”, 欲黜之, 武工反唇相詰, 至以拳歐生員。 生員等具告於孟仁, 孟仁以爲: “武工於祭, 不可闕者。” 反以生員宋殷, 脫冠投地, 嗾武工結縛, 歐而曳之。 兼大司成李詹、大司成趙庸等, 坐視不愧。 三館諸儒, 具其本末, 告諸憲司, 大司憲鄭矩, 亦不欲劾孟仁。 博士琴柔詣庸家告之, 庸執手曰: “庸, 趙浚之所擧, 足下亦其門生也。 今浚被譴, 且世子掌三軍, 而孟仁爲其僚佐, 不可抗也。”

삼군 도사(三軍都事) 현맹인(玄孟仁)이 국학(國學) 생원(生員)을 구타하였다. 현맹인이 장차 강무당(講武堂)에서 둑(纛)에 제사지내려 하니, 무공(武工)들이 명륜당(明倫堂)에서 자고자 하였다. 생원(生員)들이 말하기를,

"무공이 거처하는 곳이 아니다."

하여 내쫓으려 하니, 무공이 입을 삐쭉거리며 서로 힐난하여 생원을 주먹으로 때리기까지 하였다. 생원들이 현맹인에게 갖추 고하니, 현맹인이 말하기를,

"무공은 제사에 없을 수 없는 사람이다."

하고, 도리어 생원 송은(宋殷)을 갓을 벗겨서 땅에 집어 던지고, 무공을 사주(使嗾)하여 송은을 결박하여 때리고 질질 끌었다. 겸대사성(兼大司成) 이첨(李詹)과 대사성(大司成) 조용(趙庸) 등이 앉아서 보기만 하고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다. 삼관(三館)의 여러 유생(儒生)이 그 본말(本末)을 갖추어 헌사(憲司)에 고하니, 대사헌 정구(鄭矩)가 역시 현맹인을 탄핵하려 하지 않았다. 박사(博士) 금유(琴柔)가 조용의 집에 가서 고하니, 조용이 손을 잡고 말하였다.

"조용은 조준(趙浚)이 천거한 사람이고, 족하(足下)도 또한 그 문생(門生)입니다. 지금 조준이 견책을 당하고, 또 세자가 삼군(三軍)을 맡았는데, 현맹인은 그 요좌(僚佐)가 되니, 대항할 수는 없습니다."


二年 冬十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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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月 1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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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자가 갑사 수백 명을 거느리고 호곶에서 매를 놓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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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壬辰〕/世子率甲士數百, 放鷹于壺串。

세자가 갑사(甲士) 수백 명을 거느리고 호곶(壺串)에서 매를 놓았다.


10月 3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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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우가 시좌궁 북쪽에서 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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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甲午/狐鳴時坐宮北。

여우가 시좌궁(時坐宮) 북쪽에서 울었다.


유운 등을 불러서 격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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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召柳雲等擊毬。

유운(柳雲) 등을 불러서 격구(擊毬)하였다.


각도에 관리를 보내어 각처 절간의 노비를 수색하고 토호들을 적발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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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遣使各道, 推括各寺奴婢, 且詰諸州土豪。

사신을 각도에 보내어 각 절[寺]의 노비(奴婢)를 수색하고, 또 여러 고을의 토호(土豪)들을 문죄하였다.


경연에서 동지사 이첨과 유교·불교와 노자 및 신선도에 대해 문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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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御經筵。 問於同知事李詹曰: “老子與神仙之道, 可得聞歟?” 詹進曰: “臣昔以爲老與仙道無異。 今見《通鑑綱目》, 老子之道, 以虛無爲宗, 謂人生此世, 比之離家而行, 不拘生死遲速, 速還本處, 是任生死以反本爲貴。 仙以長生不老爲貴, 服餌求生, 不欲其死也。 釋道則有天堂地獄之說, 爲善者生天堂, 爲惡者墜地獄。 然人未見其果生天堂墜地獄也。” 上曰: “嘗聞儒道以爲: ‘人受陰陽二氣以生。’ 然則仙、老、釋之說, 與儒家孰是?” 詹曰: “吾道不在於杳冥昏默, 在乎事物上, 古之聖賢, 蓋嘗論之矣。 人受天地陰陽以生, 陰陽卽鬼神。 其生者神也, 其死者鬼也。 人之動靜呼吸, 日月盈虧, 草木開落, 莫非鬼神之理。” 上曰: “然則鬼神之理, 卽天地之理也。 人之死也, 其有精神乎? 且諺曰: ‘鬼神有降禍福與責取之說。’ 然乎?” 詹曰: “人之死也, 精氣未散, 則有責取之理。 然此非天地鬼神之正氣, 乃不正之氣也。” 上然之。

경연(經筵)에 나아가서 동지사(同知事) 이첨(李詹)에게 묻기를,

"노자(老子)와 신선(神仙)의 도를 말하여 줄 수 있겠는가?"

하니, 이첨이 말하였다.

"신이 옛날에는 생각하기를, ‘노자와 신선의 도가 다를 것이 없다.’고 여겼는데, 지금 《통감강목(通鑑綱目)》을 보니, 노자의 도는 허무(虛無)로 종지(宗旨)를 삼아서 말하기를, ‘사람이 이 세상에 난 것은, 비유하면 집을 떠나서 나다니는 것과 같으니, 생사(生死)의 더디고 빠른 것을 구애하지 말고 빨리 본곳으로 돌아가라.’ 하였으니, 이것은 생사를 맡겨 근본으로 돌아가는 것을 귀히 여기는 것이고, 신선은 오래 살고 늙지 않는 것을 귀히 여겨, 약을 먹고 살기를 구하고 죽으려 하지 않는 것입니다. 석씨(釋氏)의 도는 천당(天堂)·지옥(地獄)의 설(說)이 있는데, 착한 일을 한 자는 천당에서 살고, 악한 일을 한 자는 지옥에 떨어진다고 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과연 천당에 살고 지옥에 떨어지는 것을 보지는 못하였습니다."

임금이 말하기를,

"일찍이 들으니, 유도(儒道)에서는 사람이 음양(陰陽) 두 기운을 받아서 났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선도(仙道)·노자(老子)·석씨(釋氏)의 말과 유가(儒家)의 말은 어떤 것이 옳은가?"

하니, 이첨이 말하기를,

"유가의 도(道)는 묘명(杳冥)하고 혼묵(昏默)한 데에 있지 않고 사물(事物) 위에 있으니, 옛날 성현들이 대개 일찍이 논한 것입니다. 사람이 천지의 음양(陰陽)을 받아서 나는데, 음양이 곧 귀신(鬼神)입니다. 사는 것은 신(神)이고, 죽는 것은 귀(鬼)입니다. 사람의 동정(動靜) 호흡(呼吸)하는 것과 일월(日月)이 차고 이즈러지고 하는 것과 초목이 피고 떨어지고 하는 것은 귀신(鬼神)의 이치가 아닌 것이 없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그러면 귀신(鬼神)의 이치가 곧 천지(天地)의 이치로군! 사람이 죽으면 정신이 있는가? 또 속담에 말하기를, ‘귀신(鬼神)이 화복(禍福)을 내리고, 책(責)하고 취(取)한다.’는 말이 있는데, 그러한가?"

하니, 이첨이 말하기를,

"사람이 죽어서 정기(精氣)가 흩어지지 않는다면, 책(責)하고 취(取)하는 이치가 있겠으나, 이것은 천지 귀신의 정기(正氣)가 아니고 부정(不正)한 기운입니다."

하니, 임금이 그렇게 여겼다.


문하부에서 참소하고 아첨하는 자들을 없애고 술 마시는 것을 금하기를 청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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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門下府請去讒佞禁崇飮, 兪允。

문하부(門下府)에서 참소하고 아첨하는 것을 없애고, 술 마시는 것을 금하기를 청하니, 유윤(兪允)하였다.


평주 온천에 거둥하려 하니 낭사에서 폐단을 극력 진달하였으나 윤허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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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將幸平州溫井, 郞舍上疏, 極陳其弊, 不允。 上曰: “予有微疾, 爲浴而行, 非爲田也。 況四時之田, 古典所載, 予但一年一出耳。” 郞舍又上疏請止行幸。 其疏曰:

閱兵講武, 雖國家之常典, 畏天勤民, 實人主之大德。 當閒暇之時而不講武, 則武備弛; 當凶荒之時而不恤民, 則邦本危, 故善爲國者, 必審時之治亂、世之緩急而爲之。 今也禾穀不實, 民不聊生, 災怪屢興, 天之所以戒殿下者至矣。 彼道之民, 困於漕輓之致遠, 怨於收穫之失時, 必有疾首者矣。 伏惟姑停此行。

不允曰: “天災地怪, 予豈不戒! 但予有微疾, 不得已耳。”

장차 평주(平州) 온정(溫井)에 거둥하려 하니, 낭사(郞舍)에서 상소하여 그 폐단을 극력 진달하였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작은 병이 있어서 목욕하러 가는 것이지, 사냥을 위한 것은 아니다. 하물며, 사시(四時)의 사냥은 고전(古典)에 실려 있는데, 나는 다만 1년에 한 번 나가는 것뿐이다."

하였다. 낭사에서 또 상소하여 행행(行幸)하는 것을 중지하기를 청하였는데, 그 소(疏)는 이러하였다.

"군사를 사열하고 강무(講武)하는 것은 비록 국가의 정한 법이기는 하지만, 하늘을 두려워하고 백성에게 부지런한 것은 실로 인군의 큰 덕입니다. 한가한 때를 당하여 강무(講武)하지 않으면 무비(武備)가 풀리고, 흉년을 당할 때 백성을 구휼하지 않으면 나라의 근본이 위태로와집니다. 그러므로, 나라를 잘 다스리는 이는 반드시 때의 치란(治亂)과 세상의 완급(緩急)을 살펴서 하는 것입니다. 지금 화곡이 결실이 되지 않아서 백성들이 살아갈 수가 없고, 재앙(災殃)과 괴변(怪變)이 여러 번 일어나니, 하늘이 전하를 경계한 것이 지극합니다. 여러 도(道)의 백성들이 조운(漕運)하여 멀리 이르는 데에 피곤하고, 수확하는 것이 때를 잃는 데에 원망하여, 반드시 머리를 앓는 자가 있을 것입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우선 이번 행차를 정지하소서."

윤허하지 아니하고 말하였다.

"천재(天災)·지괴(地怪)를 내가 어찌 경계하지 않을까마는, 다만 내가 작은 병이 있으니 부득이하다."


10月 6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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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레하며 비가 내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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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丁酉/雷雨。

우레하고 비가 내렸다.


몰래 화장사에 가서 새로 만든 석가 삼존과 오백 나한을 구경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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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潛幸華藏寺。 以觀新造釋迦三尊、五百羅漢也。

몰래 화장사(華藏寺)에 가서 새로 만든 석가(釋迦) 삼존(三尊)과 오백 나한(五百羅漢)을 구경하였다.


10月 11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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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박이 내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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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壬寅/雨雹。

우박이 내렸다.


태상왕의 탄일이므로 경내의 이죄 이하와 남은·정도전의 당여를 용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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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宥境內二罪以下及南誾、鄭道傳黨與。 以太上王誕日也。

경내의 이죄(二罪) 이하와 남은(南誾)·정도전(鄭道傳)의 당여(黨與)를 용서하였으니, 태상왕의 탄일(誕日)인 때문이었다.


온천에 거둥하려 하므로 세자가 먼저 황교들에 머물면서 승여를 기다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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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將幸溫井, 世子先出, 次于黃橋野, 以待乘輿。

장차 온정(溫井)에 거둥하려 하므로, 세자가 먼저 나가 황교(黃橋) 들에 머물면서 승여(乘輿)를 기다렸다.


전부에 관한 법을 고치는 데 대한 불만으로 좌정승 민제가 병을 칭탁하여 사진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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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左政丞閔霽稱疾不仕。 先是, 右政丞河崙以爲: “我國田賦之法不均, 凡爲民戶, 或耕田多而服役者少, 或耕田少而服役者多。 自今以所耕多少, 定其賦役之數爲便。” 霽爭之曰: “法若是其苛, 民心離矣。 豈可行於今日乎?” 至是, 稱疾不仕。 崙令經歷李灌, 以請行是法啓, 事未施行, 霽歸咎於灌曰: “必待此人受罪, 然後出仕矣。”

좌정승 민제(閔霽)가 병을 칭탁하고 사진(仕進)하지 않았다. 이 앞서 우정승 하윤(河崙)이 말하였었다.

"우리 나라 전부(田賦)의 법은 고르지 못합니다. 무릇 민호(民戶)로 된 자가, 혹 전지를 경작하는 것은 많은데 복역(服役)하는 것이 적고, 혹 전지를 경작하는 것은 적은데 복역하는 것이 많습니다. 이제부터 경작하는 것의 많고 적은 것으로 그 부역(賦役)의 수를 정하는 것이 편하겠습니다."

민제가 다투어 말하였다.

"법이 이처럼 까다로우면 민심이 떠납니다. 어떻게 오늘날에 행할 수 있겠습니까?"

이때에 이르러 병을 칭탁하고 사진하지 아니하였다. 하윤이 경력(經歷) 이관(李灌)을 시켜 이 법을 행할 것을 청하여 아뢰었으나, 일이 아직 시행되지 않았는데, 민제가 이관에게 허물을 돌리어 말하였다.

"반드시 이 사람이 죄를 받은 뒤에야 출사(出仕)하겠다."


평주 온천에 거둥하는 길에 금교에 머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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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幸平州溫井, 次于金郊。

평주(平州) 온천(溫井)에 거둥하다가 금교(金郊)에 머물렀다.


10月 14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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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비가 내리고 천둥하고 번개가 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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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乙巳/大雨震電。

큰 비가 내리고, 천둥하고 번개하였다.


여우가 시좌궁 북쪽에서 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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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狐鳴時坐宮北。

여우가 시좌궁(時坐宮) 북쪽에서 울었다.


10月 15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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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박이 내리고 우레와 번개가 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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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丙午/雨雹雷電。

우박이 내리고, 우레하고 번개하였다.


온천에서 해주로 거둥하려 하니 문하부 등에서 이를 말렸으나 윤허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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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自溫井將幸海州, 門下府上疏止之, 不允。 疏曰:

殿下將幸平州溫井, 臣等因天地之變、民庶之苦, 再上封章, 請停是行, 殿下敎曰: “寡人本有微疾, 全爲沐浴治病, 非爲遊田。” 臣等以爲信然, 及其命駕, 歷遍山野, 不擇夷險, 馳射禽獸。 爲人上者, 患在欺罔其下。 又念殿下一身, 宗社之所依, 臣民之所仰。 所係非輕, 不可不自愼重, 而況天地屢示變怪, 其所以警殿下者深矣。 其或猛獸奔突於隘狹, 御馬顚蹶於坑坎, 則其危大矣。 伏望慮一身所係之重, 體皇天示變之意, 整頓車駕, 直行道路, 不復身親馳射, 實宗社臣民之福也。

司憲府亦上疏曰:

《詩》云: “敬天之怒, 無敢馳驅。” 又曰: “昊天曰明, 及爾游衍。” 聖人垂訓之意嚴矣。 古之帝王, 每遇災變, 側身修行, 所以敬天之怒, 而不敢逸也。 今歲災變之多, 念之可爲寒心。 誠宜守靜修德, 以答天意, 顧乃躬自遊獵, 馳射禽獸, 無所不至, 其敬天修省之意如何? 且山林坑坎馳驅之際, 設使馬失步驟, 則竊爲殿下危之。 伏望上念皇天之讉告, 下慮宗社之所係, 愼重厥躬, 毋爲自輕, 勑整法駕, 率行坦道, 以慰天人之心。

上之將幸海州也, 禮曹正郞鄭井、成均直講金時用, 上言不可西狩, 臺省亦皆進諫, 皆不允。

온천(溫井)에서 장차 해주(海州)로 거둥하려 하니, 문하부(門下府)에서 상소(上疏)하여 이를 말리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소(疏)는 이러하였다.

"전하께서 장차 평주(平州) 온천에 거둥하시려 하므로, 신 등이 천지(天地)의 변(變)과 민서(民庶)의 괴로움을 들어 두 번이나 봉장(封章)을 올려 행차를 정지하기를 청하였습니다. 전하께서 말씀하시기를, ‘과인이 본래 작은 병이 있으므로 목욕하여 병을 치료하기 위한 것이지, 놀고 사냥하기 위함이 아니다.’라고 하셨습니다. 신 등이 그렇게 믿었는데, 거가(車駕)를 명(命)함에 미쳐서는 산과 들에 돌아다니며 평탄하고 험한 것을 가리지 않고 새와 짐승을 달리면서 쏘니, 윗사람이 된 이는 근심이 아랫사람을 속이는 데에 있습니다. 또 생각하건대, 전하의 한 몸은 종사(宗社)가 의지하고 신민이 받드는 바이므로, 관계되는 것이 가볍지 않으니, 스스로 신중히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물며, 천지가 여러 번 변괴(變怪)를 보였으니, 전하에게 경계한 것이 깊습니다. 혹 맹수(猛獸)가 좁고 험한 곳에서 뛰쳐 나오거나, 타신 말이 구렁텅이에 넘어져 쓰러지거나 하면, 위태로움이 큽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한 몸에 매인 것이 중함을 생각하시고 황천(皇天)이 변을 보인 뜻을 생각하시어, 거가(車駕)를 정돈하여 도로(道路)로 곧게 행하고, 다시 몸소 친히 달리고 쏘지 않으시면, 실로 종사 신민(臣民)의 복이겠습니다."

사헌부(司憲府)에서 또한 상소하였다.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하늘의 노함을 공경하여 감히 달리고 몰지 말라.’ 하였고, 또 말하기를, ‘호천(昊天)이 밝아서 네가 유연(游衍)하는 데에까지 미친다.’ 하였으니, 성인이 훈계를 남긴 뜻이 엄합니다. 예전의 제왕이 매양 재변(災變)을 만나면 몸을 편안히 하지 못하고 행실을 닦은 것은, 하늘의 노여움을 공경하여 감히 안일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금년에 재변이 많은 것을 생각하면 선뜩한 일입니다. 진실로 마땅히 고요한 것을 지키고 덕을 닦아 하늘 뜻에 대답하여야 할 터인데, 도리어 몸소 스스로 놀고 사냥하여 새와 짐승을 달리면서 쏘는 등 못하는 일이 없으니, 하늘을 공경하여 수성(修省)하는 뜻에 어떠하겠습니까? 또 산림과 구렁텅이에 달리고 모는 사이에 만약 말이 제 걸음을 잃는다면, 전하를 위하여 위험스럽게 여깁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위로 황천의 견고(譴告)를 생각하고, 아래로 종사의 매인 것을 생각하여, 그 몸을 신중히 하여 스스로 가볍게 하지 마시고, 법가(法駕)를 정돈하여 평탄한 길로 행하시어, 하늘과 사람의 마음을 위로하소서."

임금이 장차 해주(海州)에 가려 하니, 예조 정랑(禮曹正郞) 정정(鄭井)과 성균 직강(成均直講) 김시용(金時用)이 서쪽으로 순행하는 것이 불가하다고 상언(上言)하고, 대성(臺省)에서 또한 모두 간하였으나, 다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해주의 쌀과 콩을 운반하여 시위 군사의 식량과 말먹이로 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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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運海州米菽, 給侍衛軍士人馬料。

해주(海州)의 쌀·콩을 운반하여 시위 군사의 식량과 말먹이로 주었다.


태상왕이 이방석·이제 등을 위해 신암사에서 크게 불사를 베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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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太上王爲芳碩、李濟等, 大設佛事於神巖寺, 德妃與貞嬪詣其寺觀之。 神巖寺幹事僧暴死, 太上王不悅而還。

태상왕이 이방석(李芳碩)·이제(李濟) 등을 위하여 신암사(神巖寺)에서 크게 불사(佛事)를 베풀었는데, 덕비(德妃)[89]와 정빈(貞嬪)[90]이 그 절에 나아가서 구경하였다. 신암사의 간사승(幹事僧)이 갑자기 죽으니, 태상왕이 좋지 않게 여겨 돌아왔다.


임금이 해주에서 환궁하여 곧 태상전에 나아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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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自海州還宮, 卽詣太上殿。

임금이 해주(海州)에서 환궁하여 곧 태상전(太上殿)에 나아갔다.


태상왕이 신도에 거둥하니 임금이 지송하고자 했으나 미치지 못하고 돌아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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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太上王幸新都, 上欲祗送于郊, 追至于古東大門, 不及而還。 太上王以夜四鼓動駕, 世子追及於碧蹄驛。 將還, 大將軍朴淳進曰: “太上王雖不使邸下從行, 至此遽還, 非臣子之心也。 淳聞太上王自新都, 將幸臺山。 若邸下從行, 則太上必不果而止, 否則跋履山川, 遠行臺山, 後必有悔。” 世子不聽。 太上王之行, 督出驛馬百三十匹, 驛吏未充其數, 頗有逃匿者。

태상왕이 신도(新都)에 거둥하니, 임금이 교외에서 지송(祗送)하고자 하여 쫓아가 옛 동대문(東大門)에 이르렀으나, 미치지 못하고 돌아왔다. 태상왕이 밤 사경(四更)에 거가(車駕)를 움직였는데, 세자가 뒤쫓아서 벽제역(碧蹄驛)에 이르렀다가 장차 돌아가려 하니, 대장군(大將軍) 박순(朴淳)이 말하였다.

"태상왕께서 비록 저하(邸下)로 하여금 따라 행하지 못하게 하였으나, 여기에까지 이르렀다가 갑자기 돌아가는 것은 신자(臣子)의 마음이 아닙니다. 박순은 듣건대, 태상왕께서 신도(新都)에서 장차 대산(臺山)에 거둥하신다는데, 만일 저하가 따라 행하면 태상께서 반드시 가시지 못하고 중지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산천을 발섭(跋涉)하여 멀리 대산에 가실 것이니, 뒤에 반드시 후회함이 있을 것입니다."

세자가 듣지 아니하였다. 태상왕의 행차에 역마(驛馬) 1백 30필을 독촉하여 차출하니, 역리(驛吏)가 그 수효를 채우지 못하여, 도망하여 숨는 자가 더러 있었다.


유구 국왕 찰도가 사신을 보내 방물을 바치고 또 왕세자에게 예물을 바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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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琉球國王察度, 遣使奉箋獻方物, 又獻禮物於王世子。 其國世子武寧, 亦於王世子獻禮物。 使者別以方物, 遺左右政丞閔霽、河崙, 皆不受。 傳敎曰: “琉球若以不義而來獻, 則予及世子, 亦皆不受, 彼遠涉而來, 推誠致聘。 今卿等郤之, 則彼必謂以何心而不受。 受而厚報可也。” 左右政丞對曰: “不可受於私第, 欲坐都堂, 受而分諸左右。 今命臣以受, 遂受焉。”

유구 국왕(琉球國王) 찰도(察度)가 사신을 보내어 전(箋)을 받들고 방물을 바치고, 또 왕세자(王世子)에게 예물을 바쳤다. 그 나라 세자(世子) 무령(武寧)이 또한 왕세자에게 예물을 바쳤다. 사자가 따로 방물을 좌·우 정승 민제(閔霽)·하윤(河崙)에게 보내니, 민제와 하윤이 모두 받지 않았다. 전교(傳敎)하기를,

"유구국이 만일 불의(不義)로써 와서 바쳤다면, 나와 세자도 받지 않았을 것이다. 저 사람들이 멀리 바다를 건너와서 성의로 빙례(聘禮)하는데, 지금 경들이 물리친다면, 저들이 반드시 ‘어떤 마음이 있어서 받지 않는다.’고 할 것이니, 받고서 후히 갚는 것이 가할 것이다."

하니, 좌·우 정승이 대답하기를,

"사사 집에서 받을 수 없으므로, 도당(都堂)에 앉아서 받아 좌우(左右)에게 나누어 주려고 한 것뿐입니다. 지금 신에게 받으라고 명령하시니 받겠습니다."

하고, 드디어 받았다.


10月 24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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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크게 내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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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乙卯/大雨。

비가 크게 내렸다.


태상왕이 정릉에 이르러 정근 법석을 베풀다. 오대산·낙산사 행차계획을 아무도 모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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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太上王至貞陵, 設精勤法席。 太上王脫衣施佛, 將幸臺山洛山, 國人不知乘輿所指。 郞舍上疏曰: “草創之主, 子孫之所宜法也。 今因佛事遠行于外, 實非貽謀之道。 以國君之父, 出入無時, 國人不知所之, 非體國子民之道也。 請遣首相及二三勳老, 道達國人之情, 請還車駕, 保安聖體, 以慰臣民之望。” 上曰: “太上之志, 已定矣。 雖使宰相請之, 何益!”

태상왕이 정릉(貞陵)에 이르러 정근 법석(精勤法席)을 베풀고, 태상왕이 옷을 벗어서 부처에게 시사(施捨)하였다. 장차 대산(臺山)·낙산(洛山)에 거둥하려 하니, 나라 사람들이 승여(乘輿)의 가는 곳을 알지 못하였다. 낭사(郞舍)에서 상소하였다.

"창업한 임금은 자손이 마땅히 본받는 바입니다. 지금 불사(佛事)로 인하여 멀리 외방에 행하시니, 실로 모유(謀猷)를 남기는 도가 아닙니다. 국군(國君)의 아버지로서 출입하는 것이 때가 없으므로, 나라 사람들이 가시는 곳을 알지 못하니, 나라를 통치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도가 아닙니다. 청하건대, 수상(首相)과 두세 훈로(勳老)를 보내어 나라 사람의 정을 진달해서 거가를 돌이키도록 청하여, 성체(聖體)를 보전하고 편안하게 하여 신민의 소망을 위로하소서."

임금이 말하기를,

"태상왕의 뜻이 이미 정하여졌으니, 비록 재상을 시켜 청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하였다.


10月 25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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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박이 내리다. 우레와 번개가 치고 무지개가 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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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丙辰/雨雹雷電虹見。

우박이 내리고, 우레하고 번개하며, 무지개가 보였다.


10月 26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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짙은 안개가 끼고 우레와 번개가 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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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丁巳/沈霧雷電。

짙은 안개가 끼고, 우레하고 번개하였다.


중 설오를 보내어 태상왕의 환가를 청하였으나 끝내 오대산으로 행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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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遣法王都僧統雪悟於新都, 請太上還。 雪悟不得請, 侍詣臺山。

법왕 도승통(法王都僧統) 설오(雪悟)를 신도(新都)에 보내어 태상왕의 환가(還駕)를 청하였는데, 설오가 청을 얻지 못하니, 모시고 대산(臺山)으로 갔다.


의정부에서 상소하여, 방간의 난과 관련 신상필벌의 법을 정하여 공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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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立賞功罰罪之法。 議政府上疏以爲:

賞功罰罪, 實爲國家之大典。 苟或失當, 無以勸懲。 往者, 芳幹陰結黨與, 謀害骨肉, 幾傾宗社, 禍在不測。 同知摠制李來, 徇義忘私, 首告其謀, 以致骨肉保全, 宗社載安, 其功重大。 宜以功臣賜號, 封君世襲, 賜田一百結、奴婢二十口, 用勸後人。 朴苞首謀讒構, 以生禍根。 雖有前功, 不足揜罪, 得免夷族, 其亦幸矣。 追削其爵, 錮其子孫, 功臣田民沒官, 以懲後人。 今後儻有如芳幹及朴苞者, 則知情首告者, 不論職秩高下, 賞依李來之例。 告者, 賤人則免賤許通, 直拜將軍, 犯人家産田民, 一皆賞給。 知情不首者, 不分首從, 竝置極刑, 父母兄弟妻子, 亦皆隨坐, 立爲定制, 以爲勸懲之門, 以杜禍亂之萌。

許之, 遂榜示于朝。

공을 상주고 죄를 벌주는 법을 세웠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상소하여 말하였다.

"공(功)을 상주고 죄(罪)를 벌주는 것은 실로 국가의 큰 법전이니, 만일 혹시라도 마땅함을 잃으면 권하고 징계할 수가 없습니다. 지난번에 이방간(李芳幹)이 가만히 당여(黨與)를 모아 골육(骨肉)을 해치기를 꾀해서, 거의 종사(宗社)를 기울어뜨리어 화가 불측한 데 있었는데, 동지총제(同知摠制) 이내(李來)가 의(義)를 따르고 사정을 잊고서 그 음모를 제일 먼저 고하여, 골육을 보전하고 종사를 평안하게 하였으니, 그 공이 중대합니다. 마땅히 공신으로 호를 주고 군(君)을 봉하여 세습하게 하고, 전지 1백 결(結)과 노비(奴婢) 20구(口)를 주어 뒷사람을 권할 것입니다. 박포(朴苞)는 음모를 시작하여 참소하고 얽어서 화근을 만들어 냈으니, 비록 전의 공(功)이 있으나 죄를 족히 가리울 수 없습니다. 삼족(三族)이 멸하는 것을 면한 것도 또한 다행한 일이니, 그 관작(官爵)을 추탈(追奪)하고, 그 자손을 금고(禁錮)하고, 공신의 전민(田民)을 관가에 몰수하여 뒷사람을 징계할 것입니다. 금후로 혹시 방간과 박포 같은 자가 있으면, 정상을 알아서 제일 먼저 고한 자는 직질(職秩)의 고하(高下)를 논하지 말고 이내(李來)의 예(例)에 의하여 상주고, 고한 자가 천인(賤人)이면, 천인을 면하고 허통(許通)[91]하여 바로 장군(將軍)을 제수하고, 범인의 가산(家産)과 전민(田民)을 모두 상으로 주고, 정상을 알고도 고하지 않은 자는 수범(首犯)과 종범(從犯)을 나누지 말고 아울러 극형에 처하고, 부모·형제·처자도 모두 따라 좌죄(坐罪)하게 하는 것으로 정한 법을 삼아서, 권징(勸懲)하는 문(門)을 삼고 화란(禍亂)의 싹을 막으소서."

임금이 윤허하고, 드디어 조정에 방(榜)을 붙여 고시(告示)하였다.


二年 十一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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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月 1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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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간의 난에 공이 있는 단양백 우현보에게 전지 70결을 하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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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辛酉〕/命賜田七十結于丹陽伯禹玄寶。 初芳幹謀作亂, 李來知之, 言於玄寶, 傳告于世子, 世子轉聞于上, 得以備患, 故有是命。

전지 70결(結)을 단양백(丹陽伯) 우현보(禹玄寶)에게 하사하였다. 처음에 이방간(李芳幹)이 난을 일으키려고 꾀할 때, 이내(李來)가 알고 우현보에게 말해서 세자에게 전하여 고하니, 세자가 임금에게 전문(傳聞)하여 환(患)을 방비하였다. 그러므로 이러한 명령이 있었던 것이다.


사헌부에서 노비 변정 도감의 일로 지제교 안노생·김첨·정정을 탄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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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司憲府劾知製敎安魯生、金瞻、鄭井。 初魯生等以口傳, 仕於奴婢辨定都監, 視事數日。 魯生等上言以爲: “載稽古典, 本院侍從之職, 掌詞命備顧問而已, 未嘗差任於吏守雜務。 前朝之季, 法制廢弛, 苟有新設都監, 每以詞臣兼之, 刀筆吏事, 靡所不爲。 今我國家, 設官分職, 一遵古制, 惟此一事, 尙循舊習, 非令典也。 伏望令臣等本職之外, 不許口傳吏務, 以復古制。” 上允。 司憲府以爲: “魯生等曾知差任吏務之不可, 不卽請辭, 仕於都監, 見其事冗, 乃欲規免, 上疏受判。” 遂劾之。

사헌부(司憲府)에서 지제교(知製敎) 안노생(安魯生)·김첨(金瞻)·정정(鄭井)을 탄핵하였다. 처음에 안노생 등이 구전(口傳)으로 노비 변정 도감(奴婢辨定都監)에 사진(仕進)하였는데, 일을 본 지 수일 만에 안노생 등이 상언(上言)하여 말하였다.

"고전(古典)을 상고하면, 본원(本院)은 시종(侍從)의 직책이므로 사명(詞命)을 맡고 고문(顧問)에 대비(待備)할 뿐이요, 일찍이 이수(吏守)의 잡무(雜務)를 맡기지 않았습니다. 고려 말년에 법제가 폐하고 해이하여져서, 신설(新設)한 도감(都監)이 있으면, 매양 사신(詞臣)으로 겸임하여 도필리(刀筆吏)[92]의 일을 하지 않은 것이 없었는데, 지금 우리 국가에서는 관사를 설치하고 직책을 나눈 것이 한결같이 고제를 따르고, 오직 이 한 가지 일만을 아직도 예전 습관을 따르니, 아름다운 법이 아닙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신 등으로 하여금 본직 외에는 구전(口傳)으로 이무(吏務)를 허락치 마시고, 예전 제도를 회복하소서."

임금이 윤허하였으나, 사헌부(司憲府)에서 말하기를,

"안노생 등이 일찍이 이무(吏務)를 차임(差任)한 것이 불가(不可)한 줄 알면서도 즉시 사임하기를 청하지 아니하고, 도감(都監)에 사진하여 그 일이 용잡(冗雜)한 것을 보고 그제서야 면하기를 꾀하고자 해서, 상소하여 수판(受判)하였습니다."

하고, 드디어 탄핵한 것이었다.


삼사 우사 이직을 대산에 보내 태상왕의 기거를 문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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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遣三司右使李稷詣臺山, 敬問太上起居。

삼사 우사(三司右使) 이직(李稷)을 보내어 대산(臺山)에 가서 태상왕의 기거(起居)를 문안하였다.


임금이 백관을 거느리고 성절을 하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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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率百官, 賀聖節。

임금이 백관을 거느리고 성절(聖節)을 하례하였다.


참판삼군부사 최운해를 음죽, 예문관 학사 송제대를 배주에 귀양보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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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流參判三軍府事崔雲海于陰竹, 藝文館學士宋齊岱于白州。 初雲海及齊岱, 自南京來, 宿瑞原郡, 郡守朴希茂, 不食根隨人, 雲海等怒, 歐希茂, 希茂卽告憲府。 憲府上書請罪以爲: “雲海、齊岱擅打守令, 而齊岱則猶知其不可, 終自禁止, 隨其輕重罪之。” 罷雲海職, 宥齊岱。 門下府以大司憲鄭矩、中丞金九德、侍史安騰、雜端李季拱, 論請雲海、齊岱等罪狀不公, 劾之, 遂請罪, 上曰: “前者, 憲司論二人罪狀, 齊岱稍輕, 故只罷雲海職。” 於是, 郞舍等劾矩等曲法不正之罪。 齊岱, 左政丞閔霽妻兄也。 詣闕上言: “雲海、齊岱同議, 歐打守令, 其罪一也, 今憲司鄭矩等, 論請其罪, 曲分輕重, 意實不公。 臣等是以劾憲司員矣。 願將雲海等依律斷罪。” 上乃流之。 世子聞之, 歎曰: “郞舍有人矣, 此事甚正大。 齊岱於予姻親, 左政丞妻兄。 憲司以此輕其罪, 非也。 雲海, 勇將也。 如有不虞, 當以禦侮, 然今貶外, 豈可輕宥! 如齊岱者, 雖竄海島, 不足惜也。”

참판삼군부사(參判三軍府事) 최운해(崔雲海)를 음죽(陰竹)에, 예문관 학사(藝文館學士) 송제대(宋齊岱)를 배주(白州)에 귀양보냈다. 처음에 최운해와 송제대가 남경(南京)으로부터 서원군(瑞原郡)에 와서 자는데, 군수 박희무(朴希茂)가 근수(根隨)하는 사람을 먹이지 않았었다. 최운해 등이 노하여 박희무를 구타하였다. 박희무가 곧 헌사(憲司)에 고하니, 헌사에서 상서(上書)하여 죄주기를 청해 말하기를,

"최운해와 송제대가 임의로 수령을 구타하였는데, 송제대는 오히려 불가한 것을 알고 마침내는 스스로 금지하였으니, 그 경중에 따라 죄주소서."

하였다. 최운해는 파직하고 송제대는 용서하였다. 문하부(門下府)에서 대사헌 정구(鄭矩)·중승(中丞) 김구덕(金九德)·시사(侍史) 안등(安騰)·잡단(雜端) 이계공(李季拱)이 최운해·송제대 등의 죄상을 논청(論請)한 것이 불공평하다고 하여 탄핵하고, 드디어 죄주기를 청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전자에 헌사(憲司)에서 두 사람의 죄상을 논한 것이 송제대가 조금 경하기 때문에, 다만 최운해만 파직한 것이다."

하였다. 이에 낭사(郞舍) 등이 정구 등의 법을 굽혀 공정치 못하게 한 죄를 탄핵하였다. 송제대는 좌정승 민제(閔霽)의 처형이었으나, 대궐에 나아가 상언(上言)하였다.

"최운해·송제대가 함께 의논하여 수령을 구타하였으니 그 죄가 동일한데, 지금 헌사(憲司) 정구(鄭矩) 등이 그 죄를 논청하는 데 사곡(邪曲)하게 경중을 나누었으니, 뜻이 실로 공정치 못합니다. 신 등은 이런 까닭으로 헌사의 관원을 탄핵한 것입니다. 원하건대, 최운해 등을 율에 의하여 죄를 처단하소서."

임금이 이에 귀양보냈다. 세자가 듣고 탄식하였다.

"낭사(郞舍)에 사람이 있구나! 이 일이 대단히 정대(正大)하다. 송제대는 나에게 인친(姻親)이고, 좌정승의 처형이다. 헌사에서 이 때문에 그 죄를 경하게 한 것은 잘못이다. 최운해는 용맹한 장수이다. 만일 불우의 변이 있으면 마땅히 어모(禦侮)를 하여야 할 터인데도, 지금 밖으로 폄출(貶黜)하였는데, 어찌 가볍게 용서할 수 있겠는가? 송제대 같은 자는 비록 바다의 섬에 귀양보내더라도 아까울 것이 없다."


11月 9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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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무리가 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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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己巳/日珥。

일이(日珥)의 현상이 있었다.


11月 10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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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가 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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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庚午/霧。

안개가 끼었다.


11月 11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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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이 왕세자에게 선위하다. 선위하는 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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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辛未/上禪位于王世子。 判三軍府事李茂奉敎書, 都承旨朴錫命奉國寶, 詣仁壽府上焉, 世子涕泣不受。 上傳旨世子曰: “予自幼好馳馬執弓, 未嘗學問, 卽位以來, 澤不及民, 災變荐至。 予雖兢惕, 末如之何。 世子自幼好學達理, 大有功德, 宜其代予。” 世子不獲已受之。 其敎書曰:

恭惟祖宗, 仁厚積德, 以集景命。 逮我神武太上王之肇興也, 王世子明炳幾先, 灼知天命, 首唱大義, 以建鴻業, 則我朝鮮開國, 惟世子之功是多, 故當初建儲之議, 物望咸歸。 不期權姦貪立幼孼, 將傾宗社, 天誘其衷, 建策戡定, 以安宗社, 則我朝鮮之再造, 亦惟世子之功是賴。 國於爾時, 已爲世子之有, 乃執沖謙, 申啓太上王, 謂予不穀居嫡之長, 俾命以位。 予辭不獲, 黽勉卽政, 于玆三年, 天意未允, 人心未孚, 蝗旱爲災, 妖孼荐至。 良由寡昧非德之致, 慄慄危懼, 俯仰有怍 矧予素纏風疾, 眩於萬機, 勞神應務, 恐致彌留, 思釋重負, 以付有德, 庶可以上答天心, 下慰輿望。 王世子, 稟剛明之德, 挺勇智之資。 仁義秉乎生知, 孝悌本乎至誠。 學問精於義理, 英謀合於變通。 固睿哲之離倫, 乃謙恭之彌謹。 早以濟世安民之量, 克成撥亂反正之功。 謳歌之所歸, 宗社之所賴。 惟賢惟德, 宜承大統, 爰命世子, 傳卽王位。 予將退歸私第, 優游怡養, 以保期頣。 於戲! 天人之情, 必付於有德; 宗社之統, 當傳於至親。 故世及以相承, 實古今之通義。 咨爾宗親耆老大小臣僚! 咸體予懷, 永保惟新之治。

參贊門下權近之製也。 遣左承旨李原, 告太上王以禪位之意, 太上王曰: “爲之不得, 不爲亦不得。 今已禪位, 復何言哉!”

임금이 왕세자(王世子)에게 선위(禪位)하였다. 판삼군부사(判三軍府事) 이무(李茂)는 교서(敎書)를 받들고, 도승지(都承旨) 박석명(朴錫命)은 국보(國寶)를 받들고 인수부(仁壽府)에 나아가서 올리니, 세자가 울면서 받지 않았다. 임금이 세자에게 전지(傳旨)하였다.

"내가 어려서부터 말 달리고 활 잡기를 좋아하여, 일찍이 학문을 하지 않았는데, 즉위한 이래로 혜택이 백성에게 미치지 못하고, 재앙과 변괴가 거듭 이르니, 내가 비록 조심하고 두려워하나 어찌할 수 없다. 세자는 어려서부터 배우기를 좋아하여 이치에 통달하고, 크게 공덕이 있으니, 마땅히 나를 대신하도록 하라."

세자가 부득이하여 수선(受禪)하였다. 그 교서(敎書)는 이러하였다.

"공손히 생각하건대, 조종(祖宗)께서 어질고 후하시므로 덕을 쌓아 큰 명(命)을 성취하고, 우리 ‘신무 태상왕(神武太上王)’이 처음 일어날 때에 미쳐, 왕세자(王世子)가 기선(幾先)에 밝아서 천명(天命)을 명확히 알고, 먼저 대의(大義)를 주창(主唱)하여 큰 기업(基業)을 세웠으니, 우리 조선(朝鮮)의 개국이 세자의 공이 많았다. 그러므로, 당초에 세자를 세우는 의논에서 물망이 모두 돌아갔는데, 뜻하지 않게도 권간(權姦)이 공을 탐하여 어린 얼자(孽子)를 세워 종사를 기울어뜨리려 하였다. 하늘이 그 충심(衷心)을 달래어 계책을 세워 감정(戡定)해서 종사를 편안히 하였으니, 우리 조선을 재조(再造)한 것도 또한 세자의 공에 힘입은 것이다. 나라는 이때에 이미 세자의 차지가 되었으나, 겸허(謙虛)를 고집하여 태상왕께 아뢰서 착하지 못한 내가 적장자(嫡長子)라 하여 즉위(卽位)하도록 명하게 하였다. 내가 사양하여도 되지 않아서 면강(勉强)하여 정사에 나간 지 지금 3년이 되었으나, 하늘 뜻이 허락하지 않고, 인심이 믿지 않아서, 황충과 가뭄이 재앙으로 되고, 요얼(妖孽)이 거듭 이르니, 진실로 과인[寡昧]의 부덕한 소치로 말미암은 것이므로, 무서워하고 두려워하여 하늘과 사람에게 부끄러움이 있다. 하물며 내가 본래 풍질(風疾)이 있어 만기(萬機)에 현란(眩亂)하니, 정신을 수고롭게 하여 정무에 응하면, 미류(彌留)에 이를까 두려웠다. 무거운 짐을 내놓아 덕 있는 사람에게 부탁해 볼까 생각하였으니, 거의 위로는 하늘 마음에 보답하고, 아래로는 여망(輿望)을 위로할 수 있을 것이다. 왕세자는 강명(剛明)한 덕을 품수(稟受)하고 용맹과 지략의 자질이 빼어났다. 인의(仁義)는 타고날 때부터 가졌고, 효제(孝悌)는 지성(至誠)에서 비롯되었다. 학문은 의리에 정(精)하고, 영명한 꾀는 변통(變通)에 합하였다. 진실로 예철(睿哲)하기가 무리에 뛰어나는데, 겸공(謙恭)하기를 더욱 부지런히 하였다. 일찍이 제세(濟世) 안민(安民)의 도량으로 능히 발란(撥亂) 반정(反正)의 공을 이루었다. 구가(謳歌)가 돌아가는 바요, 종사(宗社)가 의뢰하는 바이니, 어질고 덕 있는 사람이 마땅히 대통(大統)을 이어야 하겠다. 이제 세자에게 명하여 왕위(王位)를 전하여 즉위하게 한다. 나는 장차 물러나 사사 집에 돌아가서 한가롭게 놀고 편안히 봉양받으면서 백세(百歲)를 보전하겠다. 아아! 하늘과 사람의 정(情)은 반드시 덕 있는 사람에게 부탁하고, 종사의 대통(大統)은 마땅히 지친(至親)에게 전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부자 형제가 서로 잇는 것이 실로 고금의 통한 의리이다. 아아! 너희 종친(宗親)·기로(耆老)·대소 신료(大小臣僚)는 모두 내 뜻을 받아서 길이 유신(維新)의 정치를 보전하도록 하라."

참찬문하(參贊門下) 권근(權近)이 지은 것이다. 좌승지 이원(李原)을 보내어 태상왕에게 선위(禪位)할 뜻을 고하니, 태상왕이 말하였다.

"하라고도 할 수 없고, 하지 말라고도 할 수 없다. 이제 이미 선위하였으니 다시 무슨 말을 하겠는가!"


백관이 세자전에 나가서 하례를 행하니 받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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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百官詣世子殿行賀禮, 不受。

백관이 세자전(世子殿)에 나아가서 하례를 행하니, 받지 아니하였다.


11月 12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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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에서 백관을 거느리고 세자가 청정하기를 청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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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壬申/議政府率百官請世子聽政。

의정부(議政府)에서 백관을 거느리고 세자가 청정(聽政)하기를 청하였다.


11月 13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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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자가 수창궁에서 즉위하고 사면령을 반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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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癸酉/世子詣闕, 具朝服受命。 御輦至壽昌宮卽位, 受百官朝賀, 頒宥旨:

王若曰, 惟我啓運神武太上王承祖宗之積德, 得天人之協贊, 膺受景命, 奄有東方。 盛德神功, 宏規遠略, 以衍我朝鮮億萬世(無彊)〔無疆〕之祚, 而我上王, 以嫡以長, 祗承嚴命, 傳卽寶位, 勵精致治, 于玆三年。 頃者, 以無嫡嗣, 宜預建儲, 乃謂小子, 母弟之親, 且於開國定社之際, 與有微效, 冊爲世子, 付以監撫之任, 尙懼不堪, 每懷兢惕。 何圖今月十一日, 忽降敎旨, 乃命以位? 讓至再三, 成命莫回, 已於十三日癸酉, 卽位於壽昌宮。 顧惟眇末, 膺受大任, 慄慄危懼, 若涉淵(水)〔氷〕。 尙賴宗親宰輔、大小臣僚, 各虔爾心, 勉輔台德, 以匡不逮。 屬玆膺命之初, 宜布寬恩之典, 可宥竟內。 自建文二年十一月十三日昧爽以前, 除常赦所不原外, 已發覺未發覺, 已結正未結正, 咸宥除之, 敢以宥旨前事, 相告言者, 以其罪罪之。 於戲! 天地之德, 莫大於生物; 王者之德, 莫大於惠民。 位天人之兩間, 欲俯仰之無怍。 曰敬曰仁, 畏天勤民, 勉循玆道, 以克負荷。 惟爾臣民, 體予至懷。

세자가 예궐(詣闕)하여 조복을 갖추고 명(命)을 받고, 연(輦)을 타고 수창궁(壽昌宮)에 이르러 즉위(卽位)하였다. 백관의 조하(朝賀)를 받고 유지(宥旨)를 반포하였다. 왕은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 ‘계운 신무 태상왕(啓運神武太上王)’께서 조종(祖宗)의 쌓은 덕을 이어받고 천인(天人)의 협찬(協贊)을 얻어서, 크나큰 명(命)을 받고서 문득 동방(東方)을 차지하여, 성한 덕과 신통한 공과 큰 규모와 원대한 도략으로 우리 조선 억만년 무궁한 운조(運祚)를 이룩하였고, 우리 상왕(上王)께서는 적장자(嫡長子)로서 공경히 엄한 명(命)을 받고서 보위(寶位)에 즉위하여, 정신을 가다듬어 다스림을 이룬 지 이제 3년이다. 지난번에 적사(嫡嗣)가 없었으므로 미리 저부(儲副)를 세워야 한다고 하니, 이에 소자(小子)가 동모제(同母弟)의 지친(至親)이고, 또 개국(開國)하고 정사(定社)할 때 조그마한 공효가 있다 하여 나를 책봉해 세자를 삼고 감무(監撫)의 책임을 맡기었는데, 감내하지 못할까 두려워 매양 조심하고 송구한 마음을 품었다. 어찌 생각하였으랴! 이달 11일에 홀연히 교지(敎旨)를 내려 이에 즉위하도록 명하시었다. 두세 번을 사양하였으나 이루어진 명령을 돌이킬 수가 없어서, 이미 13일 계유(癸酉)에 수창궁에서 즉위하였다. 돌아보건대, 이 작은 몸이 대임(大任)을 응하여 받으니 무섭고 두려워서 깊은 물을 건너는 것과 같다. 종친(宗親)·재보(宰輔)·대소 신료(大小臣僚)에 의뢰하니, 각각 마음을 경건히 하여 힘써 내 덕을 도와 미치지 못하는 것을 바로잡도록 하라. 명에 응하는 처음을 당하여 마땅히 너그러운 은전(恩典)을 펴서 경내에 사유(赦宥)하여야 하겠다. 건문(建文) 2년 11월 13일 새벽 이전의 상사(常赦)에서 용서하지 못하는 것을 제외하고, 이미 발각되었거나 발각되지 않았거나, 이미 결정되었거나 결정되지 않았거나, 모두 용서하여 면제한다. 감히 유지(宥旨) 전의 일을 가지고 서로 고하여 말하는 자는 그 죄로 죄주겠다. 아아! 천지(天地)의 덕은 만물을 생산하는 것보다 더 큰 것이 없고, 왕자(王者)의 덕은 백성에게 은혜롭게 하는 것보다 더 큰 것이 없다. 하늘과 사람의 두 사이에 위치하여 위로 아래로 부끄러움이 없고자 하면, 공경하고 어질게 하여, 하늘을 두려워하고 백성에게 부지런히 하는 것이다. 힘써 이 도에 따라서 부하(負荷)된 임무를 수행하겠다. 너희 신민들은 나의 지극한 회포를 몸받도록 하라."


주상을 높여 상왕이라 하고, 상왕의 거처를 공안부, 중궁의 거처를 인녕부라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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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尊上爲上王, 立府曰恭安, 中宮府曰仁寧。 以閔霽爲驪興伯, 金士衡判門下府事, 李居易門下左政丞, 趙璞參贊門下府事, 鄭矩大司憲, 李伯剛淸平君, 金需判恭安府事, 李來藝文學士, 孟思誠左散騎, 金九德中丞。 夜二鼓, 還于楸洞本宮。

주상(主上)을 높여 상왕(上王)을 삼고, 부(府)를 세워 ‘공안부(恭安府)’라 하고, 중궁(中宮)의 부(府)를 ‘인녕부(仁寧府)’라 하였다. 민제(閔霽)로 여흥백(驪興伯)을, 김사형(金士衡)으로 판문하부사(判門下府事)를, 이거이(李居易)로 문하(門下) 좌정승을, 조박(趙璞)으로 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를, 정구(鄭矩)로 대사헌을, 이백강(李伯剛)으로 청평군(淸平君)을, 김수(金需)로 판공안부사(判恭安府事)를, 이내(李來)로 예문 학사(藝文學士)를, 맹사성(孟思誠)으로 좌산기(左散騎)를, 김구덕(金九德)으로 중승(中丞)을 삼았다. 밤 2경에 추동(楸洞)[93] 본궁(本宮)으로 돌아왔다.


각도의 관찰사·절제사·수령이 서울에 와서 진하하지 못하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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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令各道觀察使、節制使、守令等, 毋得赴京進賀。

각도의 관찰사·절제사·수령 등으로 하여금 서울에 와서 진하(進賀)하지 못하게 하였다.


인왕불을 내원당에 옮겨 안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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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移置仁王佛於內願堂。 仁王佛, 宦官等願佛也, 留置宮中久矣。 上卽位, 宦官等欲進其佛, 不納, 置于內願堂。

인왕불(仁王佛)을 내원당(內願堂)[94]에 옮겨 안치하였다. 인왕불은 환관들의 원불(願佛)인데, 궁중에 머물러 둔 지가 오래 되었다. 임금이 즉위하자 환관들이 그 부처를 바치고자 하니, 받아들이지 않고 내원당(內願堂)에 두었다.


첨서삼군부사 이문화를 명나라 서울에 보내 공마를 바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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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遣簽書三軍府事李文和, 如京師獻貢馬。

첨서삼군부사(簽書三軍府事) 이문화(李文和)를 보내어 명나라 서울에 가서 공마(貢馬)를 바쳤다.


여러 신하에게 아일마다 정사의 득실과 민생의 이해를 직접 계달하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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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敎群臣, 每於衙日, 政事得失, 民生利害, 皆直啓達。

여러 신하에게 전교하여 매양 아일(衙日)에 정사(政事)의 득실(得失)과 민생(民生)의 이해(利害)를 모두 직접 계달하게 하였다.


유사에 명하여 관복을 일체 비단으로 짓지말고 명주나 베를 쓰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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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命攸司所服之衣, 一除綾段, 皆用紬布。 上曰: “凡進衣裳, 必待予命, 勿令無時擅進。”

유사(攸司)에 명하여 입는 옷은 일체 능단(綾段)을 사용하지 말게 하고, 모두 주포(紬布)를 쓰게 하였다. 임금이 말하였다.

"무릇 의상(衣裳)을 바칠 때에는 반드시 내 명령을 기다리고, 때없이 마음대로 바치지 말라."


맹사성 등이 매일 경연 열고 인재를 공평히 등용할 것 등 5개 조목을 상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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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門下府郞舍孟思誠等以五事上言, 兪允。

一, 君心, 出治之源也。 心正, 則萬事隨以正, 心不正, 則衆欲得以肆。 然則有天下國家者, 可不思所以正其心乎? 萬機之治, 兆民之安, 莫非此心之所爲也。 故帝堯之德, 本於欽明, 而克致時雍之盛; 文王之德, 原於敬止, 而能成泰和之治。 臣等伏見, 殿下在東宮, 開書筵, 講《大學衍義》, 其於聖學, 已有緝熙之功。 伏惟殿下, 日御經筵, 講論道義, 益加存養省察之效, 則殿下之心, 光明正大, 事理之來, 是非不謬, 用舍之際, 賢愚不混, 嗜欲無自而撓, 讒諂無自而進。 然後朝廷百官, 莫敢不正, 而可以致太平之治也。 伏惟殿下宜潛心焉。 一, 人才, 致治之具也。 自古治亂之迹, 常必由之。 前朝之季, 權臣擅政, 視名器爲私物, 用舍顚倒, 士風委靡, 遂至於亡。 我朝應天開國, 一新法制, 用舍不可謂不當, 士風不可謂不美。 然而餘風未殄, 習以爲常, 廉恥之道不立, 奔競之風尙存, 士大夫不以趨事赴功爲意, 以阿意取媚爲事, 執政大臣亦以之而進退, 此實前朝之弊政也。 願自今, 凡於除拜之際, 自宰相至六品, 各擧所知, 錄其行實而公薦之, 尙瑞司考其薦之多少, 以補中外之職, 而阿附權貴者, 斥而不用, 亦令憲司糾察痛治, 其以私單子, 亂雜干請者, 尙瑞司以其單子, 悉送憲司, 以憑考劾。 如此則用舍當, 而士風正矣。 一, 宗親皆祖宗之裔, 不可與常人混也。 前朝盛時, 宗親儀衛, 皆有定制, 出入起居, 不敢輕擧, 所以示尊榮而別於群臣也。 今也以宗親之貴, 乘匹馬而行, 興居無節, 混於常人, 是豈殿下敦睦宗族, 同享富貴之義哉! 願令禮官, 參酌定制, 非有命召, 不敢輕出, 以示尊榮。 一, 侍衛陪從, 必擇正人, 所以杜干謁逢迎之弊也。 前朝之制, 司謁司鑰奉書局, 以內竪充之, 皆令給事宮中, 闒茸之徒, 不自謹愼, 肆行姦詭, 至有竊其宮內所需之費。 且微賤之徒, 豈可使親近於左右? 願自今, 將司謁司鑰奉書之官, 階爲七品, 以內侍別監廉謹端方者, 俾充其任, 則左右前後, 罔非正人, 宮禁淸矣。 一, 古者, 中丞一人, 每月繞行宮垣, 所以使姦倖知畏, 而嚴內外之分也。 願倣此制, 令監察一員, 每日輪番, 繞行宮禁, 凡有干謁之徒, 亂雜出入者, 盜竊宮內所需者, 悉皆糾察, 以嚴宮禁。

上許疏內首二條施行。

문하부(門下府) 낭사(郞舍) 맹사성(孟思誠) 등이 다섯 가지 일을 상언(上言)하니, 유윤(兪允)하였다.

"1. 임금의 마음은 다스림을 내는 근원입니다. 마음이 바르면 만사가 따라서 바르게 되고, 마음이 바르지 못하면 여러 사람의 욕심이 방사(放肆)하여집니다. 그러니 천하 국가를 가진 이가 그 마음을 바루기를 생각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만기(萬機)의 다스림과 억조 백성의 편안함이 이러한 마음의 소위(所爲)가 아닌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제요(帝堯)의 덕은 흠명(欽明)에 근본하여 능히 시옹(時雍)의 성함을 가져왔고, 문왕(文王)의 덕은 경지(敬止)에 근원하여 능히 태화(泰和)의 다스림을 이루었습니다. 신 등이 엎드려 보건대, 전하가 동궁에 계실 때에 서연(書筵)을 열어 《대학연의(大學衍義)》를 강론하였으니, 성학(聖學)에 이미 즙희(緝熙)[95]의 공이 있을 것입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전하께서 날마다 경연(經筵)에 납시어 도의를 강론해서 더욱 존양(存養) 성찰(省察)의 공효를 더하시면, 전하의 마음이 광명 정대하여져서 사리(事理)가 닥쳐 오더라도 시비(是非)가 잘못되지 않고, 용사(用舍)[96]할 즈음에 어질고 어리석은 사람이 섞이지 않고, 즐기고 욕심내는 것이 스스로 법을 흔들 수가 없고, 참소하고 아첨하는 것이 스스로 나올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런 뒤에야 조정 백관이 감히 바로잡혀지지 않음이 없어 태평의 정치를 이룰 수 있을 것이니, 엎드려 바라건대, 전하는 잠심(潛心)하소서.

1. 인재(人才)는 다스림에 이르는 도구이니, 옛부터 치란(治亂)의 자취가 항상 반드시 이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고려 말년에 권신이 정치를 마음대로 하여 명기(名器)를 사사 물건으로 보아, 용사(用舍)가 전도(顚倒)되어 선비의 기풍이 무너져서 드디어 망하는 데에 이르렀습니다. 우리 조정이 천명에 응하여 개국해서 법제를 일신하였으니, 용사(用舍)는 적당하지 않다고 할 수 없고, 선비의 기풍이 아름답지 않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나머지 기풍은 아직도 없어지지 않고 습관이 되어 범상한 것으로 여기니, 염치의 도가 서지 않고, 분경(奔競)의 풍습이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사대부(士大夫)들은 일을 맡아 공(功)을 이룰 것을 생각지 않고 뜻에 아첨하여 미쁘게 보일 것을 일삼으니, 정사를 잡은 대신도 또한 이것으로 진퇴(進退)를 시킵니다. 이것이 실로 고려 때의 폐정(弊政)입니다. 원하건대, 이제부터 무릇 벼슬을 제수할 즈음에 재상에서 6품에 이르기까지 각기 아는 사람을 천거하게 하여, 그 행실을 적어서 공천(公薦)하면, 상서사(尙瑞司)에서 그 천거의 많고 적은 것을 상고하여 중외(中外) 직책에 보직할 것입니다. 권귀(權貴)에게 아부하는 자는 배척하여 쓰지 말고, 또한 헌사(憲司)로 하여금 규찰하여 엄하게 다스리고, 사단자(私單子)를 가지고 난잡하게 간청하는 자는 상서사(尙瑞司)에서 그 단자를 모조리 헌사에 보내어 고핵(考劾)하는 데에 빙거하게 할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면, 용사(用舍)가 적당하여지고 선비의 기풍이 바로잡힐 것입니다.

1. 종친은 모두 조종의 후예이니, 일반 사람과 섞일 수는 없습니다. 고려가 번성할 때에는 종친의 의위(儀衛)가 모두 정한 제도가 있어서, 출입(出入)과 기거(起居)에 감히 경솔히 행동하지 못하였으니, 이는 존영(尊榮)한 것을 보여서 여러 신하들과 구별한 것이었습니다. 지금은 귀한 종친으로서 한 필의 말을 타고 다니며 출입과 기거가 절도가 없어서 일반 사람과 혼동하게 되니, 이것이 어찌 전하가 종족(宗族)을 돈목(敦睦)하게 하고 부귀를 함께 누리는 뜻이겠습니까? 원하건대, 예관(禮官)으로 하여금 참작하여 제도를 정하게 해서, 명소(命召)가 아니면 감히 가볍게 나오지 못하게 하여 존영(尊榮)한 것을 보이소서.

1. 시위(侍衛)와 배종(陪從)에 반드시 올바른 사람을 택하는 것은 간청(干請)과 봉영(逢迎)[97]의 폐단을 막자는 소이(所以)입니다. 고려 제도에 사알(司謁)·사약(司鑰)·봉서국(奉書局)을 내수(內竪)로 충당하여 모두 궁중에서 일하게 하니, 더럽고 어리석은 무리가 스스로 근신하지 않고, 함부로 간궤(姦詭)한 짓을 행하여, 심지어 궁내에서 쓰는 물자를 훔치기까지 하였습니다. 미천한 무리를 어찌 좌우에 친근하게 할 수 있겠습니까? 원하건대, 이제부터 사알·사약·봉서(奉書)의 관원은 계급을 7품으로 하여, 내시 별감(內侍別監) 가운데 청렴·근신하고 단아(端雅)·방정한 자로 그 임무에 충당하게 하면, 좌우 전후가 올바른 사람이 아닌 자가 없어서 궁금(宮禁)이 깨끗해질 것입니다.

1. 예전에는 중승(中丞) 한 사람이 매달 궁원(宮垣)을 돌게 하였으니, 간사하고 요행을 바라는 자로 하여금 두려워할 줄 알게 하고 내외(內外)의 분별을 엄하게 한 것입니다. 원하건대, 이 제도를 모방하여 감찰(監察) 1원(員)으로 하여금 매일 윤번으로 궁금(宮禁)을 돌아다니게 하여, 무릇 간청하는 무리로서 난잡하게 출입하는 자가 있거나 궁내에서 쓰는 것을 훔치는 자가 있으면, 모조리 규찰하여 궁금을 엄하게 하소서."

임금이 소(疏) 안의 첫머리 두 조목을 시행하도록 허락하였다.


정부와 예조에 귀신과 불사의 일을 없애도록 의논하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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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命政府及禮曹, 議除神佛之事。 上曰: “神佛之事, 我不敢知, 然其無驗, 亦甚明白, 有何益哉! 顧我太上王及上王, 皆崇信之, 雖不能盡革, 其參酌可除者以聞。”

정부와 예조에 명하여 귀신(鬼神)과 불사(佛事)의 일을 없애도록 의논하게 하였다. 임금이 말하였다.

"귀신과 부처의 일은 내가 감히 알지는 못하나, 징험이 없는 것이 또한 심히 명백하니,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러나 우리 태상왕과 상왕께서 모두 높이고 믿으시니, 비록 다 혁파하지는 못하더라도 없앨 만한 것을 참작하여 아뢰도록 하라."


사헌부에서 치도에 관한 11조목을 담은 상소를 올리니 윤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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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司憲府上疏十一條, 上允。 目曰敦孝悌、納(諫靜)〔諫諍〕、立紀綱、明賞罰、節財用、戒游畋、進忠直、去讒佞、崇儉素、重守令、毋輕宥, 辭意切至。

사헌부에서 소(疏) 열 한 조목을 올리었는데, 임금이 윤허하였다. 그 조목은 효제(孝悌)를 두텁게 하고, 간쟁(諫諍)을 받아들이고, 기강을 세우고, 상벌(賞罰)을 밝게 하고, 재용(財用)을 절약하고, 유전(遊畋)을 경계하고, 충직(忠直)한 사람을 등용하고, 참소하고 아첨하는 사람을 추방하고, 검소한 것을 숭상하고, 수령(守令)을 중하게 여기고, 가볍게 사유(赦宥)하지 말자는 것인데, 말 뜻이 간절하고 지극하였다.


상왕이 세자에게 전위한 것을 첨서삼군부사 이첨을 명나라에 보내 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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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王以傳位世子, 遣簽書三軍府事李詹, 如京師奏聞。

상왕(上王)이 세자에게 전위(傳位)한 까닭으로 첨서삼군부사(簽書三軍府事) 이첨(李詹)을 명나라 서울에 보내어 주문(奏聞)하게 하였다.


태상왕이 오대산에서 돌아오니 임금이 각사 1원씩 거느리고 장단의 마천에 가서 맞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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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太上王至自臺山, 上率各司一員, 幸長湍麻川以迎。 車駕至, 上詣幄次以見, 設享。 宗親及大臣侍宴, 迭起爲壽, 太上王懽甚, 夜分乃罷。 太上王夜五鼓動駕, 昧爽入松京, 上亦還京, 詣太上殿省候。 先是, 太上王常欲還都漢陽, 至是, 謂上曰: “汝兄欲還漢陽, 以慰我心, 其志已定, 汝能體予心乎?” 上對曰: “予何敢不從命乎!” 太上王賜酒。

태상왕이 대산(臺山)에서 이르니, 임금이 각사(各司)의 1원(員)을 거느리고 장단(長湍) 마천(麻川)에 거둥하여 맞이하였다. 거가(車駕)가 이르니, 임금이 악차(幄次)에 나가 뵙고 연향(宴享)을 베풀었다. 종친과 대신이 시연(侍宴)하였는데, 번갈아 일어나 수(壽)를 올리니, 태상왕이 즐거움이 심하여 밤이 된 뒤에야 파하였다. 태상왕이 밤 5경에 거가를 움직여 새벽에 송경(松京)에 들어왔다. 임금이 또한 서울에 돌아와서 태상전에 나아가 문안하였다. 이보다 먼저 태상왕이 항상 한양(漢陽)으로 환도하고자 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임금에게 이르기를,

"네 형은 한양에 환도하여 내 마음을 위로하고자 하였는데, 그 뜻이 이미 정하여졌었다. 네가 능히 내 뜻을 몸받겠느냐?"

하니, 임금이 대답하기를,

"제가 어찌 감히 명령을 따르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태상왕이 술을 주었다.


단양백 우현보의 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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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丹陽伯禹玄寶卒。 字原功, 忠淸丹陽人。 至正乙未, 中第入翰林, 自是歷揚淸要, 轉至門下右侍中。 歲癸亥, 以門下贊成事知貢擧, 時上登丙科第七。 歲壬申, 謫在雞林, 戊寅, 召還。 己卯, 授丹陽伯, 明年庚辰, 芳幹構亂, 門人李來知之, 以告玄寶, 玄寶卽遣子洪富于上之潛邸, 密告事機, 上得預備, 以定禍亂, 賜以推誠補祚功臣之號。 至是以病卒, 年六十八。 訃聞, 輟朝三日, 遣中官賜祭致賻, 及葬, 命用上等例。 諡忠靖。 子洪壽、洪富、洪康、洪得、洪命。

단양백(丹陽伯) 우현보(禹玄寶)가 졸(卒)하였다. 자(字)는 원공(原功)인데, 충청도 단양(丹陽) 사람이었다. 지정(至正) 을미년에 과거에 올라 한림(翰林)에 들어가서, 이때부터 청환 요직(淸宦要職)을 모두 거쳐 문하 우시중(門下右侍中)에 이르렀다. 계해년에 문하 찬성사(門下贊成事)로서 지공거(知貢擧)였는데, 그때에 임금이 병과(丙科) 제7위(第七位)로 등과(登科)하였다. 임신년에 계림(雞林)에 귀양가 있다가 무인년에 소환되고, 기묘년에 단양백(丹陽伯)을 하사받았다. 다음해 경진년에 이방간(李芳幹)이 난을 꾸미는데, 문인(門人) 이내(李來)가 알고 우현보에게 고하였다. 우현보가 곧 아들 우홍부(禹洪富)를 주상의 잠저(潛邸)에 보내어 사기(事機)를 밀고하였다. 주상이 미리 방비할 수 있었으므로, 화란을 평정한 뒤에 ‘추성 보조 공신(推誠補祚功臣)’의 호를 하사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병으로 졸(卒)하니, 나이 68세였다. 부음(訃音)이 들리니 조회를 3일 동안 정지하고, 중관(中官)을 보내어 사제(賜祭)하고 부의를 주었다. 장사에 미치어 상등례(上等例)를 쓰도록 명하고, 시호를 충정(忠靖)이라 하였다. 아들은 우홍수(禹洪壽)·우홍부(禹洪富)·우홍강(禹洪康)·우홍득(禹洪得)·우홍명(禹洪命)이다.


경연에서 《대학연의》를 잘 강의한 권근에게 음식을 대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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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御經筵。 知事權近進講《大學衍義》, 上講問甚詳。 近能辨析微旨, 上喜, 講畢饋之。

경연(經筵)에 나아가니, 지사(知事) 권근(權近)이 《대학연의(大學衍義)》를 진강(進講)하였다. 임금이 강문(講問)하기를 심히 자세히 하여도 권근이 능히 정미한 뜻을 변석(辨析)하였다. 임금이 기뻐하여 강론이 끝난 다음에 음식을 공궤(供饋)하였다.


문하부 평리 박자안을 명나라에 보내 임금이 습위한 것을 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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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以襲位, 遣門下評理朴子安, 如京師奏聞。

임금이 습위(襲位)한 까닭으로 문하 평리(門下評理) 박자안(朴子安)을 보내어 명나라 서울에 가서 주문(奏聞)하게 하였다.


덕수궁에 나아가 문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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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詣德壽宮問安。

임금이 덕수궁(德壽宮)에 나아가 문안하였다.


의정부에서 이내로 좌명 공신을 삼도록 청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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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議政府請以李來爲佐命功臣。

의정부(議政府)에서 이내(李來)로 좌명 공신(佐命功臣)을 삼도록 청하였다.


상의찬성사 강시가 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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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商議贊成事姜蓍卒。 贈諡恭穆。

상의찬성사(商議贊成事) 강시(姜蓍)가 졸(卒)하니, 시호를 공목(恭穆)이라 주었다.


동짓날이므로 수창궁에 거둥하여 하례를 행하고 백관의 조하를 받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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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至日, 上率群臣幸壽昌宮, 服袞冕行賀禮, 又受百官朝賀。 各道觀察使節制使獻方物。

동짓날이므로, 임금이 군신을 거느리고 수창궁(壽昌宮)에 거둥하여 곤복(袞服)을 입고 면류관(冕旒冠)을 쓰고 하례를 행하고, 또 백관의 조하(朝賀)를 받았다. 각도의 관찰사와 절제사가 방물(方物)을 바쳤다.


남이 훔친 소를 잡아 연회한 이조 의랑 윤목을 대흥에 귀양보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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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流吏曹議郞尹穆于大興。 初穆爲辨定都監副使, 同僚有被劾者, 都監欲備酒肉以慰之。 令史告穆曰: “肉未易得也。 請買牛以宰。” 穆許之, 乃人之所竊牛也。 被竊者以告, 憲司劾而流之。

이조 의랑(吏曹議郞) 윤목(尹穆)을 대흥(大興)에 귀양보냈다. 처음에 윤목이 변정 도감 부사(辨定都監 副使)가 되었는데, 동료 가운데 탄핵을 당한 사람이 있어, 도감(都監)에서 술과 고기를 준비하여 위로하고자 하였다. 영사(令史)가 윤목에게 고하기를,

"고기를 쉽게 얻을 수 없습니다."

하고, 소를 사서 잡기를 청하였으므로, 윤목이 허락하였는데, 그 소가 바로 남이 훔친 것이었다. 도둑맞은 자가 헌사(憲司)에 고하니, 탄핵하여 귀양보냈다.


개국 공신과 정사 공신이 상왕전에 헌수하고 이튿날 주상전에 헌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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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開國及定社功臣, 獻壽于上王殿, 翼日, 獻壽于主上殿。

개국 공신(開國功臣)과 정사 공신(定社功臣)이 상왕전(上王殿)에 헌수하고, 이튿날 주상전(主上殿)에 헌수하였다.


二年 十二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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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月 1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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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이 백관을 거느리고 상왕전에 나아가 옥책과 금보를 올리고 헌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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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辛卯〕/上率百官詣上王殿, 上冊寶, 仍獻壽。 其冊曰:

德敦親愛, 式著克讓之光; 禮合尊崇, 益虔强名之道。 玆遵彝典, 庸獻徽稱。 恭惟性稟溫文, 心全孝友。 承太上而卽政, 克綏厥猷; 保小子而盡仁, 乃命以位。 顧忝傳歸之緖, 惟懷報謝之悰。 臣不勝大願, 謹上尊號曰仁文恭睿上王。 伏惟殿下, 樂道優游, 凝神怡養, 俯諒由衷之願, 永膺多祉之祺。

太妃冊曰:

保佑恩隆, 母儀斯著。 尊崇禮備, 子道是殫。 庸擧彝章, 庶伸誠孝。 恭惟德妃殿下, 柔嘉稟性, 恭儉存心。 維德之行, 夙彰治內之美; 因心則友, 克篤展親之仁。 實賴慈庥, 獲叨洪緖。 欲表難名之德, 宜加歸美之稱。 臣不勝大願, 謹奉冊寶, 上尊號曰順德王太妃。 伏惟殿下, 勉循歡情, 誕膺顯號, 儷至人而多壽, 與一國而同休。

上王坐正殿受賀, 賜封執事官政丞李居易ㆍ河崙各馬一匹、段絹各一匹, 贊成事趙英茂、判三軍府事李茂、三司右僕射李稷與趙璞、趙珍、尹抵、金若采、尹子當, 皆賜段絹各一匹。 上獻壽在內, 公侯及政丞李居易等侍宴, 君臣皆起舞, 極懽而罷。

임금이 백관을 거느리고 상왕전에 나아가 옥책(玉冊)과 금보(金寶)를 올리고, 인하여 헌수하였다. 책문(冊文)은 이러하였다.

"덕은 친애(親愛)를 돈독하게 하여 능히 사양[克讓]하는 빛을 나타내셨으니, 예(禮)는 마땅히 존숭(尊崇)하여 더욱 강명(强名)하는 도를 경건(敬虔)히 하여야 하겠습니다. 이에 정한 법전에 따라서 아름다운 칭호를 드립니다. 공손히 생각하건대, 성품은 온화하고 아름다운 것을 품수(稟受)하고, 마음은 효도와 우애를 온전히 하셨습니다. 태상왕을 이어 정사에 나가서 그 모유(謀猷)를 편안하게 하였고, 소자(小子)를 보전하여 인애(仁愛)를 다해서 즉위(卽位)하도록 명하시었습니다. 그러나 전하여 돌려주는 통서(統緖)를 욕되게 하였으니, 오로지 갚고 사례하는 정성을 생각하였습니다. 신(臣)은 큰 소원을 이기지 못하여 삼가 존호를 올리기를, ‘인문 공예 상왕(仁文恭睿上王)’이라 합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도를 즐기고 한가로이 노시면서 정신을 가다듬고 편안히 기르실 것입니다. 충심에서 우러나온 소원을 굽어 생각하시고 길이 다복한 상서를 받으소서."

대비(大妃)의 책문은 이러하였다.

"보우(保佑)하시는 은혜가 높아 모의(母儀)가 나타났으니, 존숭하는 예를 갖추어 자도(子道)를 다합니다. 정해진 전장(典章)을 거행하여 성효(誠孝)를 펼까 합니다. 공손히 생각건대, 덕비(德妃) 전하는 부드럽고 아름다운 성품을 품수하시고, 공손하고 검소한 마음을 가지셨습니다. 덕행(德行)은 안을 다스리는 아름다움을 일찍 나타내시었고, 마음에서 나오는 우애는 친족에게 친교를 두텁게 하는 어짊을 돈독히 하셨습니다. 실로 자애스럽게 덮어주심을 힘입어서 큰 통서(統緖)를 욕되게 하였습니다. 이름하기 어려운 덕을 표하고자 하면, 마땅히 아름다움을 돌리는 칭호를 더하여야 하겠습니다. 신은 큰 소원을 이기지 못하여 삼가 옥책과 금보를 받들어 존호를 올리기를, ‘순덕 왕대비(順德王大妃)’라 합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즐거운 정을 힘써 따르시어 크게 빛나는 칭호에 응하시고, 지극한 사람을 짝하여 오래 수(壽)하셔서 한 나라와 더불어 아름다움을 함께 하소서."

상왕(上王)이 정전(正殿)에 앉아 하례를 받고, 책봉 집사관(冊封 執事官) 정승 이거이(李居易)·하윤(河崙)에게 각각 말 1필, 단(段)·견(絹) 각각 1필을 하사하고, 찬성사 조영무(趙英茂)·판삼군부사 이무(李茂)·삼사 우복야 이직(李稷)과 조박(趙璞)·조진(趙珍)·윤저(尹抵)·김약채(金若采)·윤자당(尹子當)에게 모두 단·견 각각 1필씩을 하사하였다. 임금이 안에서 헌수하였는데, 공후(公侯)와 정승 이거이(李居易) 등이 시연(侍宴)하고, 임금과 신하가 모두 일어나 춤추면서 지극히 즐거워하다가 파하였다.


궁궐에 숙직하면서 기생을 불러들이고 비판지를 내준 이조 좌랑 이승조를 귀양보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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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流吏曹佐郞李承祚。 承祚入直本曹, 招致上妓, 擅發批判紙以給, 議郞鄭渾等, 具狀移文憲司, 請罪流之。 承祚, 茂之子也。

이조 좌랑(吏曹佐郞) 이승조(李承祚)를 귀양보냈다. 이승조가 본조(本曹)에 입직(入直)하는데, 상기(上妓)를 초치(招致)하여 임의로 비판지(批判紙)[98]를 내어서 주었다. 의랑(議郞) 정혼(鄭渾) 등이 죄상을 갖추어 헌사(憲司)에 이문(移文)해서 죄주기를 청하여 귀양보냈다. 이승조는 이무(李茂)의 아들이었다.


갑사 2천 명을 다시 세워, 한번에 천명씩 각위에 보충하여 매년 교대하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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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復立甲士二千, 一千充諸衛之職, 一年相遞爲式。

다시 갑사(甲士) 2천 명을 세워, 1천 명을 여러 위(衛)의 직임에 충당하고, 1년씩 서로 교대하는 것으로 법식(法式)을 삼았다.


문하부의 상소로 분경을 금하지 않은 대사헌 정구, 중승 김구덕 등을 파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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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罷大司憲鄭矩、中丞金九德等職。 郞舍徐愈等上疏, 請大司憲鄭矩等罪曰:

人主作法於上, 人臣守法於下, 然後紀綱不紊, 而上下相安。 伏見前朝之季, 政在權臣, 奔競成風, 用舍顚倒。 至于盛朝, 民風士習, 猶未頓革。 臣等於卽位之初, 上疏請令憲司, 禁斷奔競, 以正士風, 卽蒙兪允, 已移文於憲司矣。 今也宰相百執事, 公然奔走, 聚會權門, 大司憲鄭矩、中丞金九德、侍史安騰、雜端李季拱等, 不卽禁止。 是將使奔競益熾, 權柄移於下也。 矩等曾不是慮, 不遵成法, 其廢閣敎旨, 罪莫大焉。 願將矩等, 收其職牒, 遠竄于外, 擇忠讜剛直不屈於勢者, 俾充憲司, 以振紀綱。

上謂左右曰: “前日省郞請鄭矩等罪, 予只令罷職, 更思之, 憲司之不奉職審矣。 門下府旣受敎移文, 則爲憲司計者, 當速出令, 禁其奔競, 稽留未行, 其受罪宜矣。 凡事虛心觀之, 可知曲直。 省郞所啓, 言順理正, 不可不聽。”

대사헌 정구(鄭矩)·중승(中丞) 김구덕(金九德) 등을 파직하였다. 낭사(郞舍) 서유(徐愈) 등이 상소하여 대사헌 정구 등의 죄를 청하였다.

"인주(人主)는 위에서 법을 만들고, 신하는 아래에서 법을 지킨 연후에, 기강이 문란하지 아니하고 위 아래가 서로 편안할 것입니다. 엎드려 보건대, 고려 말년에 정사가 권신(權臣)에게 있어 분경(奔競)하는 것이 풍습을 이루어, 용사(用舍)가 거꾸로 되었는데, 성조(盛朝)에 이르러서도 백성의 풍속과 선비의 습관이 오히려 완전히 고쳐지지 못하였습니다. 신 등이 즉위하시던 처음에 상소하여 헌사(憲司)로 하여금 분경(奔競)을 금하여 선비의 풍습을 바로잡기를 청해서 곧 유윤을 받고, 이미 헌사(憲司)에 이문(移文)하였습니다. 지금 재상(宰相) 백집사(百執事)가 공공연하게 분주(奔走)하여 권문(權門)에 모이는데, 대사헌 정구·중승 김구덕·시사 안등(安騰)·잡단 이계공(李季拱) 등이 곧 금지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장차 분경을 더욱 치열하게 하고, 권병(權柄)을 아래에 옮기게 하는 것입니다. 정구 등이 일찍이 이것을 생각지 않고 이루어진 법을 준수하지 않으니, 교지(敎旨)를 폐각(廢閣)한 것이 죄가 너무나 큽니다. 원하건대, 정구 등은 그 직첩을 거두어 멀리 외방에 귀양보내고, 충직(忠直)하고 강직(剛直)하여 세력에 굴하지 않는 자를 택해서 헌사(憲司)에 충당하여 기강을 진작하소서."

임금이 좌우에게 말하기를,

"전일에 성랑(省郞)이 정구 등의 죄를 청하기에 내가 다만 파직만 시켰는데, 다시 생각하니 헌사가 직책을 받들지 않은 것이 분명하다. 문하부(門下府)에서 수교(受敎)하여 이문(移文)하였으니 헌사로서는 마땅히 빨리 영을 내어 분경을 금하였어야 할 것인데, 머물러 두고 행하지 않았으니 죄를 받는 것이 마땅하다. 무릇 일은 마음을 공평하게 가지고 보면 곡직(曲直)을 알 수 있다. 성랑(省郞)의 아뢴 바가 말이 순하고 이치가 바르니 듣지 않을 수 없다."


순자비를 내려 김약채를 대사헌으로, 전순을 중승으로, 권희달을 대장군으로 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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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下循資批, 以金若采爲大司憲, 全順中丞, 權希達爲大將軍。 初, 希達扈駕長湍, 以私憤歐打同僚司禁一人, 憲司上章請罪, 命囚希達於巡軍, 至是宥之, 改授大將軍。

순자비(循資批)[99]를 내려, 김약채(金若采)로 대사헌을, 전순(全順)으로 중승(中丞)을, 권희달(權希達)로 대장군(大將軍)을 삼았다. 처음에 권희달이 장단(長湍)에 거가(車駕)를 호종(扈從)하였는데, 사사 분한(憤恨)으로 동료인 사금(司禁) 한 사람을 구타하였다. 헌사에서 글장을 올려 죄주기를 청하니, 명하여 권희달을 순군옥(巡軍獄)에 가두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용서하고 고쳐 대장군을 제수하였다.


사헌부와 문하부에서 번갈아 상소하여 권희달을 귀양보내기를 청했으나 파직만 시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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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司憲府大司憲金若采等上疏曰:

頃者, 權希達頑暴犯法, 本府遣吏以守, 希達於中夜, 被甲執兵, 打吏逃出。 本府上書請罪, 殿下命囚巡軍, 臣等謂殿下必痛懲其罪, 今乃改授大將軍。 臣等竊恐橫亂之臣, 無所懲矣。 伏望明正其罪, 竄逐于外。

特原之曰: “冬月繫獄, 今已十七日, 足以懲矣。 更勿擧論。” 憲府復上疏申請希達之罪, 當竄逐于外。 門下府亦上言:

賞罰, 政之大柄。 賞而不濫, 罰而不僭, 然後人得而勸懲, 此實人主之所當謹也。 頃者, 大將軍權希達, 狂暴犯法, 被甲執兵, 歐打憲司書吏。 憲司上書請罪, 殿下命囚巡軍, 臣等以爲殿下剛明之量, 必明正其罪, 以懲其惡。 伏覩今月十一日批, 以希達仍授大將軍, 使得罪在獄者, 反蒙爵賞, 臣等竊恐賞罰之法, 因此而濫矣。 希達恣行狂暴, 擅打司禁, 已爲大惡。 況當憲司守直, 歐打書吏, 被甲逃出? 未知希達以何心, 而至此極也。 請下憲司, 收其爵牒, 按律科罪。

疏上, 皆不允。

門下府再上疏曰:

希達狂暴犯法之事, 上章請罪, 殿下以十七日囚禁, 足以懲戒, 毋得擧論。 臣等惶恐隕越, 再瀆天聰。 臣等竊見, 《書》曰: “眚災肆赦, 怙終賊刑。” 此聖人所以垂戒後世之大訓也。 今希達擅打司禁, 又於守直之際, 被甲執兵, 歐打憲司之吏, 逃出橫行, 用意自恣, 不畏邦憲, 是怙終之甚者也。 豈以久囚懲戒, 爲足免哉! 況當卽位之初, 誠宜信賞必罰, 以定民志。 不可以一人, 廢萬世不易之大法也。 殿下若於希達, 屈法伸恩, 使免其罪, 臣等竊恐橫亂之徒, 將接踵而起矣。 伏望將希達, 特下攸司, 收其職牒, 按律科罪, 以正邦憲。

司憲府復上疏曰:

臣等聞, 法猶規矩, 爲天下國家者, 所共倚賴。 古先哲王, 固守三尺, 良以此也。 臣等以爲希達, 不惟縱逸, 而埋沒所司, 刦掠巷婦, 恣淫無度, 歐撻其妻, 陵慢其姑, 是其常事, 實乖人倫。 雖有呵禁之愎, 直宿之勞, 何足惜哉! 殿下寬宥之仁, 於希達則幸矣, 其乃人主設官立法之義何? 願殿下, 卽將希達, 竄逐于外, 以遂人臣爲殿下正紀綱明賞罰之望。 賞罰不明, 則紀綱不立, 而風俗不美矣。

上皆覽之, 但罷其職。

사헌부 대사헌 김약채(金若采) 등이 상소하였다.

"지난번에 권희달(權希達)이 완악(頑惡)하고 강포(强暴)하여 법을 범하였으므로, 본부(本府)에서 서리(書吏)를 보내어 지켰는데, 권희달이 밤중에 갑옷을 입고 병기를 가지고 서리를 구타하고 도망쳐 나갔습니다. 본부에서 상서(上書)하여 죄를 청하니, 전하가 명하여 순군옥(巡軍獄)에 가두었습니다. 신 등은 전하께서 반드시 그 죄를 엄격히 징치하시리라 여겼는데, 지금 고쳐 대장군을 제수하시니, 신 등은 횡포하고 난동하는 신하를 징계할 길이 없을까 두렵습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그 죄를 밝게 바루어 외방에 귀양보내소서."

임금이 특별히 용서하고 말하기를,

"겨울에 옥에 갇힌 지가 지금 이미 17일이나 되었으니, 족히 징계되었다. 다시는 거론하지 말라."

하였다. 헌부(憲府)에서 다시 상소(上疏)하여, 권희달의 죄는 마땅히 외방에 귀양보내야 된다고 거듭 청하였고, 문하부(門下府)에서 또한 상언(上言)하였다.

"상벌(賞罰)은 정사의 큰 권병(權柄)입니다. 상이 지나치지 않고 벌이 한도를 넘지 않은 연후에야, 사람을 권장하고 징계할 수 있는 것이니, 이것은 실로 인주(人主)가 마땅히 삼가야 할 일입니다. 지난번에 대장군 권희달이 광포(狂暴)하여 법을 범하고, 갑옷을 입고 병기를 가지고 헌사의 서리(書吏)를 구타하였습니다. 헌사에서 상서(上書)하여 죄를 청하니, 전하가 명하여 순군옥에 가두었습니다. 신 등은 생각하기를, 전하의 강명(剛明)하신 도량으로 반드시 그 죄를 명정(明正)하여 그 악(惡)한 것을 징치하시리라 여겼는데, 금월 11일에 비하(批下)하신 것을 엎드려 보니, 권희달을 그대로 대장군을 제수하시어, 득죄해 옥에 있는 자로 하여금 도리어 벼슬과 상을 받게 하였으니, 신 등은 상벌(賞罰)의 법이 이것으로 인하여 분수를 잃을까 두려워합니다. 권희달이 광포한 짓을 자행하여 사금(司禁)을 임의로 구타하였으니, 이미 큰 죄악을 저질렀는데, 하물며 헌사(憲司)에서 수직(守直)하는 때를 당하여 서리(書吏)를 구타하고 갑옷을 입고 도망하여 나갔으니, 권희달이 무슨 생각으로 이 지경에 이르렀는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청하건대, 헌사(憲司)에 내려 그 작첩(爵牒)을 거두고 율에 의하여 죄를 결단하소서."

소(疏)가 올라가니, 임금이 모두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문하부(門下府)에서 다시 상소하였다.

"권희달이 광포하여 법을 범한 일을, 글장을 올려 죄주기를 청하였는데, 전하께서 ‘17일 동안이나 구금(拘禁)하여 족히 징계하였으니 거론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신 등이 황공하고 마음이 간절하여 다시 천총(天聰)을 더럽힙니다. 신 등이 가만히 보건대, 《서경(書經)》에 말하기를, ‘과오나 실수는 용서하고, 믿는 것이 있어 다시 죄를 저지르는 것은 극형에 처한다.’ 하였으니, 이것은 성인이 후세에 경계를 남긴 큰 교훈입니다. 지금 권희달이 사금(司禁)을 마음대로 구타하고, 또 수직(守直)하는 즈음에 갑옷을 입고 병기를 가지고 헌사(憲司)의 서리(書吏)를 구타하고, 도망하여 나가서 횡행하며 제 마음대로 방자히 굴어 국법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세력을 믿고 다시 죄를 저지르는 것이니, 어찌 오래 가두어 징계한 것으로 족히 면할 수 있겠습니까? 하물며 즉위하신 처음을 당하여 진실로 마땅히 신상필벌(信賞必罰)하여 백성의 뜻을 정할 것이요, 한 사람 때문에 만세에 바꾸지 못할 큰 법을 폐할 것이 아닙니다. 전하께서 만일 권희달에게 법을 굽히고 은혜를 펴서 그 죄를 면하게 하시면, 신 등은 횡포하고 난동하는 무리가 장차 뒤따라 일어날까 두렵습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권희달을 특별히 유사(攸司)에 내려 그 직첩을 거두고, 율에 의하여 죄를 결단해서 나라 법을 바로잡으소서."

사헌부에서 다시 상소하였다.

"신 등은 들으니, 법은 규구(規矩)와 같아서 천하 국가를 다스리는 자가 함께 의뢰하는 것이니, 옛날의 어진 왕들이 삼척법(三尺法)[100]을 굳게 지킨 것이 진실로 이 때문입니다. 신 등이 생각하기를, 권희달이 방종하여 유사(攸司)를 능멸하였을 뿐만 아니라, 거리의 부녀자를 겁탈하여 방자하고 음란한 짓이 도수(度數)가 없고, 그 아내를 때리고 그 장모를 능욕하는 것이 그 상사(常事)이니, 실로 인륜(人倫)에 어그러집니다. 비록 가금(呵禁)의 어려움과 숙직의 수고가 있더라도 어찌 아낄 것이 있겠습니까? 전하의 너그럽게 용서하는 어지심이 권희달에게는 다행이지마는, 그 인주(人主)가 벼슬을 설치하고 법을 세운 뜻에 어떠하겠습니까?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곧 권희달을 외방에 귀양보내어, 인신(人臣)이 전하를 위해 기강을 바로잡고 상벌을 밝히려는 소망을 이루게 할 것입니다. 상벌이 밝지 아니하면, 기강이 서지 못하고, 풍속이 아름다와지지 못할 것입니다."

임금이 모두 보고 다만 파직만 시켰다.


재능 있는 군사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품계가 높은데 낮은 관직을 준 시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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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除軍士之有才者, 或因前職三品而授實職中郞將, 或四品而實職郞將, 其他別將散員皆然。 階高而授卑職, 自此始。

군사(軍士) 가운데 재주 있는 자에게 관직을 제수(除授)하였는데, 혹은 전직(前職) 3품(品)으로 인(因)하여 실직(實職) 중랑장(中郞將)을 주고, 혹은 전직 4품(品)으로 실직 낭장(郞將)을 주고, 기타 별장(別將)·산원(散員)도 모두 그리하였으니, 계급이 높은데도 낮은 직(職)을 주는 것이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하윤이 인재를 천거하는 데 전단하는 것을 이거이가 미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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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左政丞李居易、右政丞河崙等, 皆以判尙瑞司事在政房。 崙薦擧賢良, 居易惡其專, 退謂子佇曰: “薦人大事, 崙不與我議, 處之如何?” 佇曰: “宜啓於上。” 居易曰: “豈可爭之!”

좌정승 이거이(李居易)·우정승 하윤(河崙) 등이 모두 판상서사사(判尙瑞司事)로서 정방(政房)[101]에 있었는데, 하윤이 현량(賢良)을 천거하니, 이거이가 하윤의 전단하는 것을 미워하여 물러나와 아들 이저(李佇)에게 말하기를,

"사람을 천거하는 것은 큰 일인데, 하윤이 나와 의논하지 않으니, 어찌할꼬?"

하니, 이저가 말하기를,

"임금께 아뢰어야 합니다."

하였다. 이거이가 말하기를,

"다툴 것이 있겠느냐!"

하였다.


경연에서 환관이 정치에 참여하는 폐해에 대해 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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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御經筵, 讀《大學衍義》。 至趙高擅權曰: “宦官之設, 本爲使令於前也。 擧止習熟而已, 何可授以國柄乎?” 承旨朴信進曰: “古今人主, 豈不知其不可授以權柄也? 然宦官朝暮侍側, 專以阿諛苟容爲事, 人君若不能明察, 則必駸駸然墮於其術矣。 是故人君, 當以防微杜漸爲急。” 召內史李擔傳旨曰: “每當經筵, 諫官一人入侍, 如有過失, 直言不諱, 以輔台德。”

경연(經筵)에 나아가서 《대학연의(大學衍義)》를 읽다가, 조고(趙高)[102]가 권세를 천단(擅斷)한 데에 이르러 말하기를,

"환관을 설치한 것은 본래 앞에서 심부름시키기 위한 것이니, 행동거지가 익숙할 뿐이다. 어찌 나라 권세를 주겠는가?"

하였다. 승지(承旨) 박신(朴信)이 말하기를,

"고금의 인주(人主)가 어찌 권병(權柄)을 줄 수 없는 것을 알지 못하였겠습니까마는, 환관이 조석(朝夕)으로 옆에서 모시면서 오로지 아첨하여 구차히 용납하기를 일삼으니, 인군(人君)이 만일 밝게 살피지 않으면, 반드시 모르는 사이에 그 술책에 빠집니다. 이러한 까닭으로, 인군이 마땅히 기미를 막고 조짐을 막는 것을 급무로 삼아야 합니다."

하였다. 내사(內史) 이담(李擔)을 불러 전지(傳旨)하였다.

"매양 경연(經筵)에 당하면, 간관(諫官) 1인이 입시(入侍)케 하여, 만일 과실이 있거든 직언(直言)하여 꺼리지 말고 내 덕을 도우라."


12月 18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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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이 헌원성을 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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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戊申/月犯軒轅。

달이 헌원성(軒轅星)을 범하였다.


경연에서 기양에 대해 경연관과 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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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御經筵, 左散騎李復始入侍。 知經筵事成石璘, 進講《大學衍義》, 上曰: “人君致天災地怪, 便設祈禳, 於義如何?” 經筵官皆曰: “祈禳不可廢也。” 上曰: “予聞人事正於下, 則天氣順於上, 人事有不順, 則天氣亦從而有不順者矣。” 上又問曰: “昭格殿醮星之事, 靈異屢著, 不可忽也, 其餘淫祀, 去之如何?” 經筵官等對曰: “天子諸侯士庶人, 各有所祭之神。 天子然後祭天地, 諸侯然後祭山川。 今我國俗, 雖庶人亦皆祭山川, 禮當禁之。” 上曰: “今俗尙神, 而皆以爲非神之陰助, 無以安其生也。 若下禁令, 民不悅服, 反有怨咨。” 應敎金瞻對曰: “因古制立里社之法, 使民皆得祀焉, 則民皆悅從, 而淫祀亦將絶矣。”

경연(經筵)에 나아가니, 좌산기(左散騎) 이복(李復)이 비로소 입시(入侍)하였다. 지경연사(知經筵事) 성석린(成石璘)이 《대학연의(大學衍義)》를 진강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인군은 천재(天災)·지괴(地怪)가 이르면 곧 기양(祈禳)을 베푸는데, 의리에 어떠한가?"

하니, 경연관이 말하기를,

"기양(祈禳)은 폐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들으니, ‘사람의 일이 아래에서 바르게 되면, 하늘 기운이 위에서 순하여진다.’ 하니, 사람의 일이 순하지 못한 것이 있으면, 하늘 기운이 또한 따라서 불순할 것이다."

하고, 임금이 또 묻기를,

"소격전(昭格殿)[103]에서 별에 제사하는 일은 영이(靈異)한 것이 여러 번 나타났으니, 소홀히 할 수 없다. 그 나머지 음사(淫祀)[104]는 없애는 것이 어떠한가?"

하니, 경연관들이 대답하기를,

"천자(天子)·제후(諸侯)·사(士)·서인(庶人)이 각각 제사하는 신(神)이 있으니, 천자인 연후에 천지(天地)에 제사하고, 제후인 연후에 산천(山川)에 제사하는 것인데, 지금 우리 나라 풍속에 비록 서인(庶人)이라도 또한 모두 산천에 제사하니, 예로서는 마땅히 금하여야 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지금 풍속이 귀신을 숭상하여 모두 생각하기를, ‘신(神)의 음조(陰助)가 아니면 편안히 살 수 없다.’고 여기는데, 만일 금령(禁令)을 내리면, 백성이 기쁘게 복종하지 않고 도리어 원망을 할 것이다."

하였다. 응교(應敎) 김첨(金瞻)이 대답하였다.

"예전 제도에 따라 이사(里社)[105]의 법을 세워서, 백성들로 하여금 모두 제사하게 하면, 백성이 모두 기쁘게 따르고, 음사(淫祀)가 또한 장차 근절될 것입니다."


12月 19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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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성이 저성에 들어가고, 화성이 도수를 잃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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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己酉/木星入氐, 火星失度。 書雲注簿金子綏實封啓曰: “夜四更, 木星入氐, 火星失度。 氐, 天子之路寢, 休解之房也。 屬後宮, 屬女主。”

목성(木星)이 저성(氐星)에 들어가고, 화성(火星)이 도수(度數)를 잃었다. 서운 주부(書雲注簿) 김자수(金子綏)가 실봉(實封)하여 아뢰었다.

"밤 4경(四更)에 목성이 저성에 들어가고, 화성이 도수를 잃었습니다. 저성은 천자(天子)의 정침(正寢)이요, 휴해(休解)의 방(房)인데, 후궁(後宮)에 속하고 여주(女主)에 속합니다."


이무의 건의에 따라 처음으로 별시위를 두고, 사순·사의를 혁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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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初置別侍衛, 革司楯司衣。 司楯司衣等一千三百人, 以別牌朝士代(司循)〔司楯〕之任, 以內侍向上代司衣之任。 初, 判三軍府事李茂, 請罷司楯司衣, 屬三軍府, 選子弟有武才者, 號別侍衛, 分爲左右, 三分入直, 上坐正殿, 佩弓矢分立左右, 上曰: “卿言善矣。 何所聞歟?” 對曰: “朴文崇言於臣, 臣亦然之。” 上可其言而罷之。 命三軍府, 選子弟充別侍衛。

처음으로 별시위(別侍衛)를 두고, 사순(司楯)[106]·사의(司衣)[107]를 혁파하였다. 사순·사의 등이 1천 3백 인이었는데, 별패(別牌)·조사(朝士)로 사순의 임무를 대신하게 하고, 내시부(內侍府) 향상(向上)으로 사의의 임무를 대신하게 하였다. 처음에 판삼군부사(判三軍府事) 이무(李茂)가 청하기를,

"사순·사의를 혁파하여 삼군부에 소속시키고, 자제(子弟) 중에 무재(武才)가 있는 자를 선발하여 별시위(別侍衛)라 이름하고, 좌우(左右)로 나누어 삼분(三分)하여 입직(入直)하게 할 것입니다. 주상께서 정전(正殿)에 앉으시면, 활과 화살을 차고 좌우에 나누어 서게 하소서."

하므로, 임금이 말하기를,

"경의 말은 좋은데, 어디서 들었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박문숭(朴文崇)이 신에게 말하기에, 신도 그렇게 여겼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그 말을 옳게 여겨 사순·사의를 혁파하고, 삼군부에 명하여 자제를 뽑아 별시위(別侍衛)에 충당하게 하였다.


중궁의 투기때문에 경연청에 나와서 10여 일 동안 거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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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以中宮妬忌, 出御經筵廳十餘日。

중궁(中宮)의 투기(妬忌) 때문에 경연청(經筵廳)에 나와서 10여 일 동안 거처하였다.


전향할 때에는 마땅히 면복 입기를 대간이 청하니 임금이 윤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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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臺諫請傳香, 當御冕服, 上允。 上以紗帽團領傳香時, 臺諫皆具朝服, 乃進諫曰: “殿下爲宗廟擧事, 而不御冕服, 非禮也。” 上曰: “今日有疾失禮, 後當從其所言。”

대간(臺諫)이 전향(傳香)[108]할 때에는 마땅히 면복(冕服)을 입기를 청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임금이 사모(紗帽)·단령(團領)으로 전향할 때에, 대간은 모두 조복(朝服)을 갖추었다. 이에 간(諫)하기를,

"전하가 종묘(宗廟)를 위하여 일을 거행하면서, 면복을 입지 않는 것은 예가 아닙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오늘 병이 있어서 실례(失禮)하였다. 금후로는 말한 대로 하겠다."

하였다.


12月 21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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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성과 화성이 궤도를 잃고 저성 서남쪽에 있다. 임금이 전번에 성변을 보고하지 않은 일을 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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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辛亥/木、火二星失度, 在氐西南, 隔一尺許。 上謂左右曰: “先是, 木、火二星犯氐星, 現災異之象。 書雲觀不卽啓聞, 其廢職何也? 召致星變, 雖由否德, 然知有火災, 則予當行愼火之令矣。”

목성·화성 두 별이 도(度)를 잃고 저성(氐星) 서남쪽에 있었는데, 간격이 한 자쯤 되었다. 임금이 좌우에게 일렀다.

"이보다 먼저 목성·화성 두 별이 저성(氐星)을 범하여 재이(災異)의 상(象)을 나타내었는데, 서운관(書雲觀)에서 곧 계문(啓聞)하지 않았으니, 직사를 폐하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성변(星變)을 불러 일으키는 것은 비록 부덕(否德)한 것으로 말미암으나, 그러나, 화재가 있을 것을 알았으면, 내가 마땅히 불조심하라는 영을 내렸을 것이다."


임금이 덕수궁에 나아가 태상왕께 헌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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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詣德壽宮獻壽。 上詣太上殿, 太上王適幸神巖寺。 上遣義安公和、宦官李芬, 迎太上王, 還宮設享。 召太上王素所親信昌寧伯成石璘、淸川伯李居仁、判承樞府事李舒、判漢城崔有慶等侍宴。 石璘以下, 更相起舞, 聯句唱和, 極歡而罷。

임금이 덕수궁에 나아가 헌수하였다. 임금이 태상전에 나아가니, 태상왕이 마침 신암사(神巖寺)에 거둥하였었다. 임금이 의안공(義安公) 이화(李和)와 환관(宦官) 이분(李芬)을 보내어 태상왕을 맞아 환궁하여 연회를 베풀고, 태상왕이 본래 친하고 믿는 창녕백(昌寧伯) 성석린(成石璘)·청천백(淸川伯) 이거인(李居仁)·판승추부사(判承樞府事) 이서(李舒)·판한성(判漢城) 최유경(崔有慶) 등을 불러 시연(侍宴)하게 하였다. 성석린 이하가 교대하여 일어나 춤을 추고, 연귀(聯句)로 창화(唱和)하여 지극히 즐기다가 파하였다.


12月 22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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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이 목성이 있는 자리를 관통하여 지나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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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壬子/火星貫木星。

화성(火星)이 목성(木星)을 관통하였다.


수창궁이 화재를 당하다. 사관 노이가 사책을 건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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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壽昌宮災。 司鑰失火, 始于寢室, 延及大殿。 驪興伯閔霽、判門下金士衡、左政丞李居易、右政丞河崙, 皆會救火。 上驚懼曰: “宮闕已災, 無及於救矣, 毋令傷人。” 時史庫在壽昌宮內, 入直史官盧異開庫, 手出史冊焉。

수창궁(壽昌宮)[109]이 화재를 당하였다. 사약(司鑰)이 실화(失火)하여 침실(寢室)에서 시작해서 대전(大殿)에까지 불길이 미치었는데, 여흥백(驪興伯) 민제(閔霽)·판문하(判門下) 김사형(金士衡)·좌정승 이거이(李居易)·우정승 하윤(河崙)이 모두 모여 불을 구제하였다. 임금이 놀라고 두려워하여 말하기를,

"궁궐은 이미 불타서 구제할 수가 없으니, 사람이나 상하지 말게 하라."

하였다. 이때에 사고(史庫)가 수창궁 안에 있었는데, 입직하던 사관(史官) 노이(盧異)가 사고(史庫)를 열고 손수 사책(史冊)을 꺼내었다.


천도 문제를 의논하다. 서운관에 명하여 술수에 관한 그림이나 서적을 금하도록 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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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命禁術數圖籍, 議還漢都。 謂平壤伯趙浚、昌寧伯成石璘以下文臣十餘人曰: “不幸有災。 卿等按書雲觀秘密圖籍, 議遷都利害以聞。” 時論議紛紜未定, 右政丞河崙建議, 宜都毋岳, 上謂諸大臣曰: “今讖緯術數之言, 縱橫不止, 眩惑人心, 何以處之?” 諸宰相皆曰: “不可從也。” 大司憲金若采獨以爲可從, 上曰: “新都, 乃父王所創也。 何必別建都邑, 以勞民乎!” 遂命書雲觀, 藏術數地利之書。

술수(術數)에 관한 그림이나 서적을 금하도록 명하였다. 한양에 환도하기를 의논하는데, 평양백(平壤伯) 조준(趙浚)·창녕백(昌寧伯) 성석린(成石璘) 이하 문신(文臣) 10여 인에게 이르기를,

"불행히 화재가 있었으니, 경 등은 서운관(書雲觀)의 비밀 도적(祕密圖籍)을 상고하여 천도(遷都)의 이해를 의논해 아뢰도록 하라."

하니, 이때에 의논이 분운(紛紜)하여 정해지지 못하였는데, 우정승 하윤(河崙)이 건의하기를,

"마땅히 무악(毋岳)에 도읍하여야 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여러 대신들에게 이르기를,

"지금 참위(讖緯) 술수(術數)의 말이 이러쿵저러쿵 그치지 않아 인심을 현혹(眩惑)하게 하니, 어떻게 처리할까?"

하니, 여러 재상이 모두 말하기를,

"따를 수 없습니다."

하였으나, 대사헌(大司憲) 김약채(金若采)는 홀로 그대로 따라야 된다고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신도(新都)는 부왕께서 창건하신 것이니, 어찌 반드시 따로 도읍을 세워서 백성을 수고롭게 하겠는가?"

하고, 드디어 서운관에 명하여 술수(術數)·지리(地利)에 관한 서적을 감추도록 하였다.


지형조 정절과 형조 정랑 박고를 파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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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知刑曹鄭節、正郞朴翺罷。 初, 上詣太上殿, 至夜還宮, 右軍同知摠制洪恕, 侍衛至中路, 潛歸其家。 節等知之, 劾恕請罪, 憲司上言: “彈糾, 非刑曹之任也。 曾有判禁, 節等不此之顧, 乃敢劾恕, 以廢邦憲。 願將節、翺, 收其職牒, 竄逐于外, 以懲後日思出其位之徒。 且恕於下輦前, 自退私第, 有乖人臣敬上之禮。 罷其官爵, 以戒後日不謹其任之輩。” 但罷節、翺職。

지형조(知刑曹) 정절(鄭節)과 정랑(正郞) 박고(朴翺)를 파직하였다. 처음에 임금이 태상전(太上殿)에 나갔다가 밤이 되어 환궁하는데, 우군 동지총제(右軍同知摠制) 홍서(洪恕)가 시위하다가 중로에 이르러 몰래 그의 집으로 돌아갔다. 정절 등이 이를 알고 홍서를 탄핵하고 죄를 청하였다. 헌사(憲司)에서 상언(上言)하였다.

"규탄(糾彈)하는 것은 형조의 임무가 아닙니다. 일찍이 판지(判旨)로 금(禁)한 것이 있는데, 정절 등이 이것을 돌아보지 않고, 감히 홍서를 탄핵하여 나라의 법을 폐하였습니다. 원하건대, 정절과 박고에게 직첩을 거두고 외방에 귀양보내어, 후일의 제 자리를 벗어나기를 생각하는 무리를 징계하소서. 또 홍서는 연(輦)을 내리시기 전에 마음대로 자기 집으로 물러갔으니, 신하로서 임금을 공경하는 예에 어그러졌습니다. 그 관작(官爵)을 파면하여 후일의 그 책임을 삼가지 않는 무리를 경계하소서."

다만 정절과 박고만 파직시켰다.


예조에서 성변·재이에 따른 여러 가지 기도행사에 관해 상언하니, 불사(佛事)만을 혁파하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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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罷佛事。 禮曹上言:

竊見佛法始入中國以來, 歷代帝王或信或否, 未有災福之驗, 前朝之季, 崇信彌篤, 亦未蒙福。 乞中外寺社設行道場、法席、國卜、祈恩、年終、還願等事, 一皆停罷。 且祀神, 誠敬爲主。 黷于淫祀, 不如不祭。 願自今, 祀典所載名山大川, 一依《洪武禮制》, 盡誠致祭, 如國巫堂及紺嶽、德積等處, 發遣巫女司鑰, 非時祭祀, 一皆禁斷。

但令罷佛事。

불사(佛事)를 혁파하였다. 예조에서 상언(上言)하였다.

"가만히 보건대, 불법이 비로소 중국에 들어온 이래 역대 제왕(帝王)이 혹은 믿고 혹은 믿지 않았는데, 재앙과 복(福)의 징험이 없었습니다. 고려 말년에 숭상하여 믿기를 더욱 독실히 하였으나, 또한 복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빌건대, 중외(中外)의 사사(寺社)에서 베풀어 행하는 도량(道場)·법석(法席)·국복(國卜)·기은(祈恩)·연종 환원(年終還願) 등의 일을 일체 모두 정지하여 혁파하소서. 또 신(神)에게 제사하는 것은 정성과 공경이 주가 되는데, 음사(淫祀)에서 번독(煩黷)하는 것은 제사하지 않는 것만 같지 못합니다. 원하건대, 이제부터 사전(祀典)에 실려 있는 명산(名山)·대천(大川)은 한결같이 《홍무예제(洪武禮制)》에 의하여 정성을 다해 제사지내고, 국무당(國巫堂)과 감악(紺嶽)·덕적(德積) 등지에 무녀(巫女)와 사약(司鑰)을 보내어 때 아닌 때에 제사하는 것 같은 것은 일절 모두 금단하소서."

다만 불사(佛事)만 혁파하게 하였다.


중앙과 지방에 영을 내려 구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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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下敎求言:

王若曰, 蓋聞天人相與, 通達無間, 政失於下, 謫見於上。 災異之興, 實由人作, 天之讉告, 可不懼哉! 予以否德, 纘承丕緖, 夙夜軫念, 期至于治, 四方之廣, 萬務之煩, 豈能周知而無過! 比者, 雷雨失當, 星文示儆, 又於今月壬子, 壽昌宮失火。 咎至於斯, 痛自劾責。 動作失當而己德虧歟? 嬖寵得進而私謁行歟? 刑罰不信而人無勸懲歟? 用舍失宜而人材堙鬱歟? 抑享祀不潔而百神不歆歟? 賦徭不均而庶民怨咨歟? 姦邪撓法而獄滯冤訟歟? 豪猾肆兇而里有愁嘆歟? 此皆上干和氣, 以召災異者也。 欲修弭災之道, 宜求讜直之言。 凡寡人之闕失、左右之忠邪、政令之臧否、民生之利病, 救弊之術, 極陳無諱。 言而可採, 予則有賞, 說或不中, 亦不加罪。 咨爾中外大小臣僚、閑良、耆老, 各以所見, 實封條上。 尙其協心交儆, 勉修厥職, 補予不逮, 以副予畏天勤民之意。

교지(敎旨)를 내려 구언(求言)하였다. 왕은 이렇게 말하였다.

"대개 들으니, 하늘과 사람이 서로 더불어 통달(通達)하여 사이가 없으므로, 정사가 아래에서 잘못되면 꾸지람이 위에서 나타난다고 한다. 재이(災異)의 일어남이 실상은 사람으로 말미암아 생기는 것이니, 하늘의 견고(譴告)하는 것이 두렵지 않는가? 내가 부덕한 사람으로서 큰 통서(統緖)를 이어받아 밤낮으로 진념(軫念)하여 다스림에 이르기를 기약하나, 사방이 넓고 만무(萬務)가 번다하므로, 어떻게 두루 알아서 허물이 없을 수 있겠는가? 근자에 우레와 비가 적당한 시기를 잃고, 성문(星文)이 일깨움을 보였으며, 또 이달 22일에는 수창궁(壽昌宮)에 화재가 났었다. 허물이 여기에 이르니, 통렬히 스스로 책망한다. 동작(動作)이 마땅함을 잃어서 나의 덕이 이즈러졌는가? 폐총(嬖寵)이 나와서 사알(私謁)이 행해지는가? 형벌이 믿어지지 못하여 사람이 권하고 징계함이 없는가? 용사(用舍)에 적의(適宜)함을 잃어서 인재가 막혀 있는가? 또는 향사(享祀)가 정결하지 못하여 백신(百神)이 흠향하지 못하는가? 부역이 고르지 못하여 서민들이 원망하는가? 간사한 사람이 법을 흔들어서 옥에 원통한 송사가 지체되어 있는가? 호활(豪猾)한 자가 흉악함을 부리어 마을에 근심하고 탄식하는 것이 있는가? 이것이 모두 위로 화기를 범하여 재이(災異)를 부른 까닭이다. 재앙을 없애는 도를 닦고자 하면 마땅히 곧은 말을 구하여야 하겠다. 무릇 과인(寡人)의 잘못과 좌우의 충성하고 간사한 것과 정령(政令)의 잘되고 못된 것과 민생의 이해(利害)와 폐단을 구제할 방법을 극진히 말하여 숨기지 말라. 말이 채용할 만하면 내가 상을 주겠고, 말이 혹 맞지 않더라도 또한 죄를 가하지 않겠다. 아! 너희 중외(中外)의 대소 신료(大小臣僚)·한량(閑良)[110]·기로(耆老)는 각각 소견대로 실봉(實封)하여 조목조목 올리고, 마음을 합하여 서로 경계해서 그 직책을 힘써 닦아, 나의 미치지 못하는 것을 도와서, 나의 하늘을 두려워하고 백성에게 부지런한 뜻에 부응(副應)토록 하라."


임금이 군신을 거느리고 제릉에 제사지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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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率群臣, 祭齊陵。

임금이 군신(群臣)을 거느리고 제릉(齊陵)에 제사지냈다.


임금이 원유관과 강사포 차림으로 종묘의 향과 축을 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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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以遠遊冠、絳紗袍, 傳宗廟香祝, 侍臣皆具朝服。

임금이 원유관(遠遊冠)과 강사포(絳紗袍) 차림으로 종묘(宗廟)의 향(香)과 축(祝)을 전하니, 시신(侍臣)은 모두 조복(朝服)을 갖추었다.


동북면에 황충이 일어 사신을 보내 진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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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北面蝗, 遣使賑之。

동북면(東北面)에 황충이 일었으므로, 사신을 보내어 진휼하였다.


다음 날 하례를 받기 위해 옛 강안전에 거둥하여 그대로 머물러 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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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幸古康安殿仍宿。 以明日受賀正也。

옛 강안전(康安殿)에 거둥하여 그대로 머물러 잤으니, 명일에 하례(賀禮)를 받기 위함이었다.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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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우왕(禑王).
  2. 주(周)나라 때부터 설치한 천자의 스승. 천자가 부형(父兄)의 예로 대접하였는데, 삼로(三老)는 삼덕(三德: 正直·剛·柔)을 아는 자, 오경(五更)은 오사(五事:貌·音·視·聽·思)를 아는 자를 말함.
  3. 만물을 생성하는 금(金)·목(木)·수(水)·화(火)·토(土)의 5 원소(元素). 오행상생(五行相生)과 오행상극(五行相克)의 이치로 만물을 지배한다고 함.
  4. 사람이 항상 행(行)하여야 하는 5가지 바른 행실. 곧 인(仁)·의(儀)·예(禮)·지(智)·신(信). 또는 아버지의 의(義), 어머니의 자(慈), 형의 우(友), 동생의 공(恭), 아들의 효(孝)를 말함.
  5. 대간(臺諫)에서 새로 임명된 관원(官員)의 고신(告身)을 서경(署經)하여 내주던 일.
  6. 대간(臺諫)이 서경(署經)하여 예조(禮曹)에 내주던 공첩(公貼).
  7. 시호(諡號)
  8. 나라 제사에 소를 통채로 바치던 일. 원래 소·양·돼지를 아울러 바치는 것을 대뢰(大牢)라 하였으나, 뒤에 소만 바치는 것을 일컫게 됨. 태뢰(太牢).
  9. 중국 원(元)나라 순종(順宗) 지정 연간(至正年間)에 만든 법규. 고려 말에 우리 나라에 들어와 많은 참고가 되었음.
  10. 대가(大駕)나 군중(軍中)의 앞에 세우는 둑기(纛旗)에 지내던 제사.
  11. 몸종. 소사(小史).
  12. 세종.
  13. 옛날 한족(漢族)의 문명(文明)을 받지 못한 야만족(野蠻族)이 살던 양자강(楊子江)이남의 땅.
  14. 주(周)나라 태왕(太王)의 장자(長子). 나라를 동생 계력(季歷)에게 사양하고 만형(蠻荊)으로 들어갔음.
  15. 주(周)나라 태왕(太王)의 차자(次子). 형 태백(太伯)과 같이 만형(蠻荊)으로 들어갔음.
  16. 상당후 이저(李佇:뒤의 이백경(李伯卿)의 아우 이백강(李伯剛)을 말하는데, 그는 태종(太宗)의 맏딸 정순 공주(貞順公主)와 결혼하였음.
  17. 세자.
  18. 형제의 우의.
  19. 상(象:순임금의 아우)이 근심하면 순(舜)임금이 근심하고, 상이 기뻐하면 순임금이 기뻐하였다는 고사(故事)에서 나온 말.
  20. 주공(周公)이 관숙(管叔)을 대벽(大辟:死刑)에 처한 고사(故事)에서 나온 말.
  21. 뱀·지네·두꺼비 등의 독기(毒氣)가 든 음식을 남에게 몰래 먹여 복통·가슴앓이·토혈(吐血)·하혈(下血) 등의 증세를 일으켜 죽게 하는 것.
  22. 주문(呪文)이나 저술(詛術)로 남을 저주(詛呪)하여 죽게 만드는 것. 염(魘)은 사람의 형상을 만들어 놓고 쇠꼬챙이로 심장을 찌르고 눈을 후벼파고 손·발을 묶는 것이고, 매(魅)는 나무나 돌로 귀신을 만들어 놓고 저주를 비는 것임. 압승술(壓勝術)이라고도 함.
  23. 신덕 왕후(神德王后) 강씨(康氏).
  24. 국가에서 특별한 공신(功臣)에게 내려 주어 조세(租稅)를 거두어 쓰게 하던 제도. 대개 호수(戶數)를 지정해 주는 것이 상례임.
  25. 여자의 일. 곧 부엌일.
  26. 《시경(詩經)》 제풍(齊風)의 편명. 애공(哀公)이 황음(荒淫)하고 게을러서, 현비(賢妃)가 닭이 울어 조신(朝臣)들이 모이겠으니, 애공에게 어서 일어나라고 경계하였다는 고사(故事).
  27. 《시경》 주남(周南)의 편명. 문왕(文王)의 후비(后妃)가 인후(仁厚)하여, 그 자손이 번성하기를 빈 것임.
  28. 소나 말을 미리 길러서 국용(國用)에 이바지하던 관아.
  29. 임금이 신하를 거느리고 과녁[侯]에 활을 쏘던 일.
  30. 소문으로 듣고 그 사실을 조사하던 일. 사헌부에서 관리의 풍기에 관한 일이나 규문(閨門)의 음란에 관한 따위를 소문을 듣고 조사하여, 사실이면 이를 규리(糾理)하였음.
  31. 서울에 머물러 도성(都城)을 방비하던 군대의 장교.
  32. 유적(儒籍)에 든 유생(儒生)으로 편성된 시위패(侍衛牌).
  33. 하늘의 백성을 다스리는 조화. 곧 하늘을 대신하여 다스리는 임금이 정치.
  34. 주대(周代)의 6관(官)의 우두머리. 천관(天官)의 우두머리로 궁중(宮中)의 일을 맡아보던 총재(冢宰), 지관(地官)의 우두머리로 내정(內政)·교육(敎育)을 맡아보던 사도(使徒), 춘관(春官)의 우두머리로 제사·예악을 맡아보던 종백(宗伯), 하관(夏官)의 우두머리로 군사를 맡아보던 사마(司馬), 추관(秋官)의 우두머리로 사법·외교를 맡아보던 사구(司寇), 동관(冬官)의 우두머리로 영조(營造)·공작(工作)을 맡아보던 사공(司空)을 말함.
  35. 태상시(太常寺:典儀寺)·종정시(宗正寺:宗簿寺)·위위시(衛尉寺)·태복시(太僕寺:司僕寺)·예빈시(禮賓寺)·사농시(司農寺:典農寺).
  36. 태부감(太府監:內府寺)·소부감(小府監:小府寺)·장작감(將作監:繕工寺)·사재감(司宰監:司宰寺)·군기감(軍器監:司器寺)·사천감(司天監:書雲觀)·태의감(太醫監:典醫寺).
  37. 8품 산원(散員) 5인과 7품 별장(別將) 5인·6품 낭장(郞將) 5인.
  38. 1374년. 공민왕이 피살된 해.
  39. 《서경(書經)》.
  40. 옛날 중국의 보검(寶劍)의 하나.
  41. 춘추 시대 노(魯)나라의 권신(權臣) 맹손씨(孟孫氏)·숙손씨(叔孫氏)·계손씨(季孫氏).
  42. 춘추 시대 진(晉)나라의 권세를 잡았던 6족(族) 출신의 6경(卿). 곧 6족은 범씨(范氏)·중행씨(中行氏)·지씨(知氏)·조씨(趙氏)·위씨(魏氏)·한씨(韓氏)를 말함.
  43. 조선조 태조(太祖) 원년에 의흥 친군(義興親軍)을 통할하기 위해 설치한 관서. 태종(太宗) 3년에 삼군 도총제부(三軍都摠制府)로, 세조(世祖) 12년에 오위 도총부(五衛都摠府)로 개편하였음.
  44. 고려 때 삼성(三省)의 문관(文官)과 중추원(中樞院)의 무관(武官)이 같이 모여 나라의 중대한 일을 의논하던 일. 후일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로 되었음.
  45. 사병(私兵)에 소속한 군인들의 군적(軍籍)을 기록한 장부. 여말 선초에 사병을 거느린 자는 각기 따로 패기(牌記)를 가지고 있었음.
  46. 부처의 한 몸으로 중생(衆生)을 제도하기 위해 여러 가지로 나타내는 것.
  47. 천자(天子)와 제후(諸侯)의 맹약(盟約). 종(宗)은 천자(天子)를 뜻한다고 하는데, 일설(一說)에는 동종(同宗)을 뜻한다고 함.
  48. 형벌을 감(減)하여 주는 여덟 가지 조건. 《당률소의(唐律疏議)》에 의하면, 의친(議親)·의고(議故)·의현(議賢)·의능(議能)·의공(議功)·의귀(議貴)·의근(議勤)·의빈(議賓)이라고 함.
  49. 궁중을 숙위하던 갑사(甲士) 가운데 내전(內殿) 주위를 시위하던 군사. 동북면 출신으로 구성되었음.
  50. 삼국 시대 무장(武將). 위(魏)나라에 항복한 후 여러 번 무공(武功)을 세워 위나라 무제(武帝)로부터 명장(名將)이라는 칭찬을 받았음.
  51. 삼국 시대 위나라의 명신(名臣). 조조(曹操) 때 시중(侍中)에 오름. 뒤에 동정후(東亭侯)에 봉해졌음.
  52. 명(明)나라 초기에 만주 지방을 경략(經略)하기 위하여 요동(遼東)에 설치한 관서(官署). 뒤에 요동 도사(遼東都司)로 고쳤음.
  53. 송(宋)나라 신종(神宗) 때 정치가. 왕안석(王安石)에 의하여 발탁되었으나, 참지정사(參知政事) 태위(太尉)가 되어 왕안석을 배척하다가 외방으로 쫓겨 났음.
  54. 임금의 명령.
  55. 이름에 따라 실상을 책임지우는 것. 곧 그 자리에 있으면 책임을 진다는 뜻.
  56. 제갈량(諸葛亮).
  57. 삼국(三國) 시대 촉(蜀)나라의 정치가 장완(蔣琬)의 자(字). 제갈양(諸葛亮)이 천거하여 녹상서사(錄尙書事)가 되고, 뒤에 양정후(陽亭侯)에 봉해졌음.
  58. 삼국 시대 촉(蜀)나라의 정치가 비위(費褘)의 자(字). 태자 사인(太子舍人)·시중(侍中)·상서령(尙書令)을 지내고 뒤에 성향후(成鄕侯)에 봉해졌음.
  59. 나라에 재이(災異)가 있을 때, 임금이 근신하는 뜻으로 수라상의 음식 가짓수를 감(減)하던 일.
  60. 나라에 재이(災異)가 있거나 국상(國喪)이 있을 때 음악(音樂)을 철폐하던 일.
  61. 한(漢)나라 때 대궐 주위(周圍)에 세웠던 숙위군(宿衛君)의 여사(廬舍).
  62. 진(秦)나라 때 섬돌에 방패를 잡고 서던 관원(官員).
  63. 상급 관청에서 하급 관청에 보내던 공문서.
  64. 당(唐)나라 숙종(肅宗) 때의 환관(宦官). 본명은 정충(靜忠). 숙종의 총애를 받아 원수부 행군 사마(元帥府行軍司馬)가 되어 전횡하다가 대종(代宗) 때 피살되었음.
  65. 사헌부(司憲府)나 사간원(司諫院)의 관원이 일을 의논하기 위해 모두 모여 앉는 것.
  66. 관부(官府)의 하관(下官)이 상관(上官)의 행차를 나가서 맞이하던 예(禮).
  67. 휘(諱).
  68. 한(漢)나라의 명신(名臣). 대사마 대장군(大司馬大將軍)으로서 명제(明帝)와 선제(宣帝)를 20년간 받들었음.
  69. 당(唐)나라의 명신(名臣). 고종(高宗)과 무후(武后) 때 법(法)을 잘 다스리고 많은 인재를 발탁하였음.
  70. 고려 중엽의 공신(功臣). 고종(高宗) 때 최의(崔竩)를 죽이고 정권을 왕실에 반환, 추성 위사 공신(推誠衛社功臣)이 됨. 문장에 뛰어나 신종·희종·강종·고종의 4대 실록을 편찬하고, 그 문하에서 안향(安向)·이존비(李尊庇) 등의 인재를 배출함.
  71. 진말 한초(秦末漢初)의 사람. 이름은 고(固). 항우(項羽)의 무장(武將)으로서 한 고조(漢高祖)를 싸움터에서 살려 주었으나, 뒤에 한 고조가 천하를 평정하자 그의 불신(不臣)의 죄를 미워하여 죽였음.
  72. 땀이 나면 다시 되돌아 들어갈 수 없는 것 같이, 임금의 명령이 한번 나오면 다시 회수하지 못한다는 것.
  73. 늙고 아내가 없는 사람, 늙고 남편이 없는 사람, 어리며 부모가 없는 사람, 늙어서 자식이 없는 사람.
  74. 문계(文契).
  75. 벼슬을 가진 향리(鄕吏). 조선조 초엽에는 3품 당상관(堂上官) 이하에는 향리 출신을 임명하였으나, 뒤에는 지방의 토관(土官)에만 임명하였음.
  76. 여말 선초(麗末鮮初)에 장군(將軍) 이상이 모여 군사에 관한 일을 의논하던 곳. 고려 중방(重房)의 후신으로, 정종 2년에 폐지하였다가 태종(太宗) 6년에 호군방(護軍房)으로 다시 부활시켰음.
  77. 관원이 새로 임명되어 올 때, 그 관부의 방주(房主)와 장무(掌務)가 모여서 적임자인지의 여부를 의논하고, 또 찬성 여부를 서명하던 일.
  78. 우왕(禑王).
  79. 선산(善山).
  80. 성균관.
  81. 공양왕(恭讓王).
  82. 후한(後漢) 광무제(光武帝) 때 사람. 여요인(餘姚人). 광무제와 어려서 같이 공부하였는데, 광무제가 즉위하여 불렀으나, 사양하고 부춘산(富春山)에 숨어 살았음.
  83. 도조(度祖)의 비(妃) 경비(敬妃)의 능(陵).
  84. 죄인을 추국(推鞫)할 때, 의정 대신(議政大臣) 가운데서 임금이 임시로 뽑아서 임명하던 재판관.
  85. 궐내(闕內)에 있으면서 임금과 상시 국사를 의논하는 대신. 양부(兩府)에서 5, 6명의 대신을 뽑아서 궁내에 두었음. 내재추(內宰樞). 내상(內相).
  86. 교사(校舍).
  87. 불가(佛家)에서 불(佛)·법(法)·승(僧)을 가리키는 말.
  88. 고려 말에 제주(濟州)로 망명한 원나라 왕족. 원나라의 운남(雲南) 양왕(梁王)의 아들로, 1382년(우왕 8) 7월 탐라로 망명하였다. 이후 양왕의 자손들이 명에 의해 제주로 유배되자 그들과 같이 거처하였다.
  89. 정종 비(正宗妃) 김씨(金氏).
  90. 태종 빈(太宗嬪) 민씨(閔氏).
  91. 천인이 공(功)을 세우면, 천역(賤役)을 면해 주고 관리가 될 수 있도록 나라에서 허락해 주던 일. 이때 나라에서 허통첩(許通帖)을 발급하였음.
  92. 아전을 얕잡아 보고 이르는 말. 예전에 죽간(竹簡)에 기록된 글자를 아전들이 칼로 긁고 고치는 일을 한 까닭에 생긴 말.
  93. 가랫골.
  94. 대궐 안에 불도를 닦는 절, 또는 집. 내도량(內道場).
  95. 임금의 덕(德)이 계속하여 밝게 빛나는 모양. 《시경(詩經)》 대아편(大雅篇)에 문왕의 덕을 칭송한 말인데, 《시경집전(詩經集傳)》에서 즙(緝)은 계속한다[續]는 뜻이고, 희(熙)는 밝다[明]는 뜻이라 하였음.
  96. 임금이 사람을 쓰고 버리는 일.
  97. 뜻을 맞추는 것.
  98. 임금이 신하들의 상소(上疏)에 대하여 비답(批答)하는 글을 내릴 때 사용하는 종이. 최상급의 종이였음.
  99. 도목 정사(都目政事)를 거쳐 자급(資級)에 따라 관원을 임명할 때, 임금이 서명하여 내리던 관교(官敎).
  100. 옛날 중국에서 석 자 길이의 대쪽에 법률을 기록하였던 고사(故事)에서 나온 말.
  101. 여말 선초(麗末鮮初) 때에 정무(政務)를 행하던 곳. 고려 고종(高宗) 12년에 최이(崔怡)가 사저(私邸)에 처음 설치하였음. 정승 등이 모여서 전주(銓注) 등의 일을 보았음.
  102. 중국 진(秦)나라의 환관(宦官). 시황제(始皇帝)가 죽자, 호해(胡亥)를 2세 황제(二世皇帝)로 앉히고 온갖 횡포한 짓을 다 하였음.
  103. 조선조 때 도교(道敎)의 일월 성신(日月星辰)에게 제사지내던 전당(殿堂). 삼청전(三淸殿).
  104. 내력이 바르지 못한 사신(邪神)을 섬기고 제사지내던 일.
  105. 옛날 각 동리(洞里)마다 토지신(土地神)을 모시던 사당(祠堂). 주(周)나라 때에는 1백 가(家) 이상이면 사(社)를 세웠고, 진(秦)·한(漢) 이래에는 25가(家) 이상이면 사(社)를 세워 제사지냈음.
  106. 여말 선초(麗末鮮初) 때 성중관(成衆官)의 하나. 궁중에서 방패를 만드는 일을 맡아 보았음.
  107. 여말 선초 때 성중관(成衆官)의 하나. 상의원(尙衣院)에 속하여 옷을 만드는 일을 맡아 보았음.
  108. 나라의 제사를 지내게 될 때 임금이 제관(祭官)에게 직접 향(香)을 주던 일.
  109. 여말 선초(麗末鮮初)에 정전(正殿)으로 사용하던 궁궐. 공민왕 때 홍건적(紅巾賊)의 침입으로 연경궁(延慶宮)이 불타자, 처음으로 정전으로 사용하여, 그후 우왕·창왕·공양왕은 물론 조선조 태조 이성계(李成桂)도 여기에서 즉위하였음. 태종 4년에 실화(失火)로 완전히 불타, 한양으로 환도(還都)하였음.
  110. 호반(虎班) 출신으로 무과(武科)에 급제하지 못한 사람, 또는 벼슬을 하지 못한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