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독립의 당위성 외/나의 상해시대

나는 이와 같이 상해로 향하기 전에 중국 땅을 한 번 밟아본 일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그 전년인 1913년이다. 그때 생각에 중국으로 간다면 만주가 좋을까 남중국이 좋을까 함을 결정하기 위함이었다.

가본 결과 나는 이러한 결론을 얻었다.

서간도(만주) 일대로 말하면 토지가 광막하고 한편으로 러시아를 끼고 있어서 무슨 큰일이든지 일으킬 무대로는 좋지만 교통이 심히 불편하다. 그러기에 세계 대세를 따져볼 때는 장차 시국에 관심을 가진 자일진대 문화가 앞서고 인문이 개발되었고 또 교통이 편하여 책원지(策源地)로서 가장 값이 있는 상해 남경 등지가 좋으리라고 단정하였던 것이다.

이리하여 내 동생은 아메리카로 갈 때에 나는 행장을 꾸려가지고 곧장 남경으로 향하였던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어학을 모른다. 우선 영어와 중국어를 배워야 할 터인데……하고 오래 생각한 결과 미국 사람이 경영하는 남경 금릉대학에 입학하였으니 그때 내 나이 28세였다.

금릉대학의 일반 학생의 연령은 대개 20세로부터 22, 23에 달하였는데, 원래 나만한 학생은 나이 어린 학생 측에 끼어 지내기가 퍽 거북하고 잘 어울리지도 않지만은 나는 운동을 통하여 그네들과 잘 어울렸다.

운동이란 주로 육상경기와 야구였다. 조선에 있을 때부터 운동에만은 늘 마음에 두어 왔던 까닭으로 각종 경기에 자신이 있었다. 그러기에 나는 대표 팀에 들어가서 어린 학생들과 경기를 하였던 것이다. 그때 생각을 하면 실로 유쾌하다. 그러는 한편 중국의 새로 자라나는 신진청년들의 사상과 감정을 흡수하여 받아들이기에 힘썼다.

내가 금릉대학을 다니던 28, 29, 30살의 3년간은 가장 유쾌한 시일이었으니, 이렇게 이 나라 청년들과 어울려 노는 한편 주야로 필사적으로 공부를 하였다. 그래서 그렇게 어렵게 여겼던 영어와 중국어를 자유로 말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지만 3년이 지나도 나는 졸업증서를 못 받았다. 남경 금릉대학의 학제는 그 학교 소정의 모든 학과를 다 마쳐야 졸업증을 준다. 심지어 신학 같은 학과도 마쳐야 한다. 그렇지만 나는 그때 생각이 졸업증서 받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으니까 그저 입학은 영문과에 하여 가지고 영문학과 철학을 힘써 공부하였다.

학비는 내가 집 떠나갈 때에 돈을 조금 쥐고 나갔기 때문에 대학 기숙사에 들어 첫 해와 둘째 해는 과히 고생 없이 지내다가 제3년에 이르러는 학비가 없어서 부득이 학교에서 학비를 빌려 가지고 학교를 마쳤다. 이때 빌렸던 돈은 그 뒤 상해에 와서 취직하여서 곧 갚아버렸다.

그런데 금릉대학에 다닐 때 한 가지 잊혀지지 않는 일이 있다. 1915년에 대(大)연내각과 원세개 사이에 21개조약이 체결되었다.

그때는 세계대전 중이라 동양에서도 청도(靑島)에서 일독(日獨) 양국이 병화(兵火)를 바꾸고 있었다. 이때 금릉대학에서는 이 조약 반대의 첫 봉화를 들었다. 이것이 삽시간에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다.(중략) 그때 금릉대학생들은 일본과 싸움이 일어나면 의용군으로 나가겠다고 모두 준비하였다. 나도 학우들과 같이 의용군이 되려고 결심하였다. 그때 일은 퍽이나 파문이 많았 지만 대개 여기에서 그치기로 한다.

금릉대학을 마친 나는 곧 상해로 왔다. 그때 상해에 미국사람이 경영하는 협화서국이란 기관이 있었는데 나는 생활을 위하여 그곳에 고용으로 들어갔 다.

이 협화서국이라 함은 대개 여행권 없이 미국으로 가려는 사람이나 또는 사진결혼으로 미국으로 건너가려 하는 사람들을 미국 기선회사와 관계당국 에 교섭하여 주는 일종의 알선기관이었는데 매년 수백 명씩 지원자가 있어 일이 몹시 분주하였다.

(─《삼천리》, 1932년 10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