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국 (현진건)

사냥개들은 숲 속으로 뛰어 들어간다. 그 발자최는 멀리멀리 그윽이 그윽이 고요한 숲 속으로 사라진다.

오정 때나 되어 눈이 조금씩 녹아 나린다. 푸른 하늘에 뜬 흰 구름장은 햇발을 지고 번쩍인다. 이따금 큰 눈덩어리가 가지에서 미끄러 떨어져 부서지고 그 울림보담도 그 흩어지는 아름다움에 놀라기도 한다.

라펠 올브롬스키는 든든한 고목 등걸에 몸을 기대고 귀를 기울인다. 그는 제 백부 나제우스키를 따라 오늘 일찌거니 사냥을 나온 길이다.

문득 무서운 부르짖음이 숲을 뚫고 울렸다. 라펠은 사냥총을 바루잡고 그의 날카로운 눈길은 못을 치는 듯이 나무 사이에 박혔다.

“사냥개들이 쫓는구나.”

그는 혼자 중얼거렸다.

과연 개 짖는 소리는 점점 가까워 온다.

별안간 산 위에서 둔한 발소리가 난다. 나뭇가지가 흔들하며 눈보라가 칠 겨를도 없이 숲 사이에서 사슴 한 떼가 나타났다. 라펠은 총대를 제 뺨에 대고 앞선 사슴의 가슴을 겨누며 막 방아쇠를 잡아당기려는 찰나에 난데없는 눈덩이가 그의 팔에 떨어지며 그 서슬에 방아쇠가 찰깍 마른 소리가 나자 화약이 젖어 불이 붙지 않고 말았다. 깜짝하며 라펠은 눈을 부볐으나 때는 늦었다. 사슴 떼는 그 검은 발을 날쌔게 돌려 소나무 숲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어떻게 분한지 라펠은 총을 집어 던지고 눈 위에 주저앉아 울었다.

한 방의 총소리가 들린다. 또 한 방! 우레 같은 외침이 여기저기서 들린다. 라펠은 던진 총을 다시 집어 들고 아까 사슴 떼보담도 더 경쾌하게 솔밭으로 뛰어갔다.

제가 놓친 사슴을 백부 집에서 데리고 나온 카스파가 쏘아 넘어뜨린 것을 보았다.

라펠은 귀밑까지 붉어졌다.

카스파가 사슴을 끌고 백부 나제우스키가 있는 곳으로 올라가 보니 그는 암사슴 한 마리를 잡아서 배를 갈르고 있었다. 나제우스키는 카스파가 끌고 오는 큰 사슴을 보고 분명히 적의 있는 눈으로 화를 버럭 내며,

“이놈아, 나한테는 암사슴을 남기고 너는 수놈을 잡았단 말이냐!”

하고 야단을 친다.

집에 돌아오니 독일 사람 세무관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 독일 작자는 공순하나마 위엄있는 태도와 말씨로 나제우스키의 소유 토지와 소작인 수효를 조사할 것을 말하고 나종엔 연설조로,

“농무성 대신이 성명을 발표하시어 모든 지주에게 대하여 납세의 의무를 부과하게 하셨소. 작년 ─ 즉 1796년 1월에 벌써 교구의 목사로 하여금 이 법령에 관한 경고를 각 지주에게 통달한 줄 아는데 당신은 아직 그 통고문을 못 보셨습니까?”

“글쎄 그런 게 왔는지도 모르지요. 나는 종이에 쓴 것을 별로 주의를 하지 않으니까. 내가 종이라고 쓰는 것은 화약이나 탄환을 쌀 때뿐이니까…….”

어데까지 나제우스키는 빗먹어 나간다. 나중에는 카스파를 시켜 맞은 벽위에 걸려 있는 시계추에 트럼프의 ‘클럽A’ 한 장을 걸어 놓게 하고 독일 작자의 말은 들은 체 만 체 총을 쏘아 ‘클럽A’를 맞춰 떨어뜨리고 한다. 독일 작자는 신변에 위험을 느끼고 제 품속 깊이 감춰둔 단검을 만지작거리고 섰다. 살기 띤 긴장한 장면!

마츰내 세무관은 카스파 늙은이에게,

“내일 아츰 관내의 소작인 전부를 모아라. 정청의 통문을 읽어 드릴 터이다.”

라고 명령하였다.

나제우스키는 무서운 눈길로 카스파를 노려보며 침착한 목소리로,

“전령북을 이 동리가 떠나가도록 울려라. 다리 성한 놈들은 모조리 모이라 일러라. 알아 들었니! 이것은 내 명령이다. ‘톰’이란 놈이 내 고앙에 침입하려던 죄목으로 벌을 줘야겠다. 이 독일 관원님 눈 앞에서 참나무 곤장 백 개나 오십 개를 갈길 터이다!”

“분명히 일러두지만.”

독일 관리의 소리는 의외로 날카롭다.

“그건 안 될 말이오. 매를 때리는 것은 법률로 절금(絶禁)하오!”

나제우스키는 제 손으로 제 머리털을 뜯으며 범의 울음 같은 소리가, 막히고 비틀어진 목에서 흘러나온다. 말낱이 갈기갈기 찢어진 듯이 의미 없는 말이 그의 입술에서 떨어졌다.

그 이튿날 라펠은 백부의 집을 떠났다. 얼른 보니 마당에 모인 군중은 분에 타는 얼골과 이상하게 번쩍이는 눈초리로 독일 관리만 쳐다보고 있었다.

그는 무엇인지 억센 말로 설명하고 있는 모양.

“‘톰’이란 놈을 잡아내라.”

문득 나제우스키의 우렁찬 호통이 독일 관리의 설명을 중단시키고 말았다.

“북을 울려라.”

나제우스키의 호통이 다시금 들린다.

북소리는 이상한 흉조를 띠고 찬 하늘에 사무친다.

라펠의 썰매를 끄는 말들은 얼음길을 화살같이 달아난다.

폴란드(波蘭)에서는 겨울의 사육제(謝肉祭) 철이 되면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썰매대를 몰아 환락의 순례를 하는 풍습이 있다. 이 촌락의 향사관(鄕士館)에서 한 대가 떠나 이웃 마을 향사관을 불의에 습격하여 먹고 마시는 춤추고 노래하고 추태 광태를 함부로 부린 다음 다시 그 마을 사람들까지 휘몰아 또다시 그 옆 마을로 원정을 하는 법이란다. 이를 이른바 ‘크리그’라 한다.

오파토 산지로부터 비스출라 강엽 골짜기로 보리의 황금이 물결치는 세계에도 진기한 산드메리아 평야를, 시방 ‘크리그’의 한 대가 짓쳐간다. 장사진같이 뻗친 썰매는 삼십여대. 요란한 방울 소리, 말을 갈기는 채쪽 소리, 북과 피리 소리, 반공에 든 노랫가락. 수없는 횃불은 연기에 그은 황금색으로 밤세계를 누비질한다. 십리 장정에 뻗친 일행은 눈 쌓인 고원의 언덕길에 구불구불 구불거린다.

달은 찢어지게 밝고 서릿발은 차다.

눈 아래 펼쳐진 눈의 고랑은 얼음 같은 서릿발을 받아 무수한 새깃을 늘어놓은 듯 밀리는 바다의 파도와 같이 골짜기도 막아 버려 울타리고 집이고 눈의 홍수에 잠겼는데 다만 산기슭에 달라붙은 듯한 촌락의 모양이 거뭇거뭇 보일 뿐이다. 거기 가물가물 불빛이 어른거리는 것이 향사들의 관으로 큰 지붕이 달밤에 뚜렷하다. 눈구렁이고 어데이고 크리그는 유진무퇴다.

모든 사람의 마음에 행복이 부글부글 거품을 내며 끓어 오른다. 악대가 아뢰는 가지각색 곡조. 흥에 못 이겨 노래가 샘 솟듯. 맑고 가냘픈 여자의 목청. 굵고 탁한 사내의 소리가 한데 어울리매 문득 갖은 악기의 소리가 폭풍우같이 쏟아져 노랫가락쯤은 묻어버리고 만다.

라펠도 다른 젊은이와 함께 이 크리그에 참례하였다. 그는 난생 처음으로 아버지의 승락을 받아 이 행렬에 참례하였고 또 아버지의 사랑하는 바스카란 명마에 덩그렇게 올라 앉아 있었다. 바스카는 지금 세 살, 순혈 아라비아말을 아비로, 폴란드산 암말을 어미로 태어난 일물로 예민하고 영리하고 씩씩한 품은 세상에 그 짝을 구하기 어려우리라.

이 날 라펠의 행복은 끝이 없었다. 여러 군데서 마신 헝가리(匈牙利) 묵은 술은 얼큰하게 공상의 나래를 달아주어 의기가 자못 헌앙하다. 말은 눈보라 속을 닫는다. 그의 눈앞에 미끄러 나가는 썰매 위엔 두 여자가 있다.…… 한편은 낫살이 나는 듯, 유부녀인가 미망인인가. 그는 그렇다 하고 한편은 아직 애젊은 아가씨다. 라펠은 말을 달려 그 아가씨의 탄 썰매와 평행이 되었다. 자세히 보니 낫살이나 든 여자는 전에 한번 만나 춤까지 춘 일이 있으나 그 처녀는 처음 보는 이다. 그이는 별로 얼골을 가리우려고도 않는다. 라펠은 달빛에 그이의 눈을 본다. 그 양귀비꽃 같은 붉은 입술을 본다. 그 애젊은 육체에서 발산하는 그윽한 향내를 맡는다. 야릇하게도 심사는 황홀해진다. 라펠은 마술에 걸린 듯이 그 눈동자를 물끄러미 들여다볼 제 그 눈동자도 가늘게 웃음을 띠고 저를 마주 본다.

세상에 있을 것 같지도 않은 참된 기쁨에 넘치는 그 눈동자가 라펠의 왼몸을 휩싼다…….

만일 이 찰나에 요란한 노랫소리가 일어나지 않았던들 라펠은 말목을 부둥켜 안고 그 타는 듯한 입술에 말갈기에 부비었으리라. 여기저기서 주고받는 노래가 한창이다.

“당신은 소리도 못 해요? 우리들의 흥도 좀 풀어 주구려.”

이 때 별안간 낫살 든 여자는 라펠에게 말을 붙였다. 라펠은 허둥지둥 무에라 대꾸를 해야 옳을지 몰랐다.

“당신은 참 살풍경이로구려. 크리스를 무슨 초상 행렬로나 아시우?”

라펠은 귀밑과 목덜미가 한꺼번에 붉어졌으나 이 미인의 말을 탄할 생각은 꿈에도 없었다. 그 반대로 이 서슬에 그는 선득 몸을 날려 그들의 썰매에 옮겨 타고 말았다…….

일행의 앞엔 강이 닥쳤다. 강 얼음이 반 넘어 풀리어 썰매로 건너갈 수가 없어 근촌 농부를 푸는 수밖에 없었다. 일행은 강가에 모조리 모였다. 다시금 ‘마주르카’ 곡조가 울기 시작한다. 강을 건너게 될 때까지 한바탕 놀아 제치는 판. 잡담과 혼란과 시끄러운 환락의 소동이 또 일어났다. 절규, 방가, 난무, 음향 가운데 무서운 장난의 장면이 또 벌어진다. ‘토른’이란 무서운 짐승탈을 뒤집어 쓴 놀음에 그 아름다운 처녀 헬렌은 놀라 부르짖으며 맹목적으로 왼손을 벌려 라펠에게 매어 달린다. 그 찰나 본능적 충동으로 그는 헬렌을 꼭 껴안은 채 뒷걸음질을 쳤다. 이 순간에 두 넋은 한 지붕 아래 자라난 것 같은 친분으로 굳게굳게 한 뭉치가 되고 말았다.

“토른이 무서워요?”

라펠의 묻는 말.

“아니야요, 난. 주홍 같은 입을 벌리고 괜히 나를 놀라게 하려고.”

둘이 주고 받던 첫말.

농부를 풀어 중상을 주고 썰매를 떠매여 강을 건넜다. 강 건너서 또 한바탕 법석 뛴다 굴린다 춤춘다. 겨운 흥에 외투고 목도리고 제 갈 데로 가거라. 높이 든 횃불 아래 나부끼는 흰 소매, 화려한 웃옷, 혼란한 속옷, 번쩍이는 허리띠의 패물! 별이 소용돌이를 치는 듯 라펠은 헬렌과 춤을 춘다. 의기양양한 그는 마치 왕자나 된 듯. 그의 발 한번 디디고 놓는 것이 얼마나 멋갈있고 의젓한가. 그의 왼몸은 열정환자와 같이 피가 비등한다. 헬렌도 외투고 덧저고리고 다 벗어 던졌다. 뺨엔 붉은 피가 탄다. 그 눈은 횃불의 광채를 빨아들여 열화와 같다. 라펠은 다른 모든 세계를 잊었다. 그에겐 무도란 기쁨의 폭발, 행복의 육체적 표현, 무상쾌락의 소용돌이다.

그 일행은 마츰내 라펠의 집으로 들어갔다.

늙은 그의 아버지는 벌써 허리가 굽고 머리가 백발이 되었건만 옛 풍정을 못 잊어 손님의 관대에 아모 것도 아끼지 않았다. 좋은 술 좋은 안주 그야말로 주지육림이다. 진탕 먹고 진탕 뛰고 밤 밝는 줄도 몰랐다.

라펠도 취했다. 흥에 사랑에 행복에 술에. 그는 마지막으로 헬렌을 여자들 옷 곤쳐 입는 방에서 마주쳤다. 살짝 붉어지는 그 얼골! 이 세상에 이렇게 아름다운 것도 또 있을까? 그 붉은 빛이 이맛전으로부터 눈덩이 같은 흰자최를 남기고 사라져 가는 델리케이트한 저 빛을 보라. 로베리아꽃처럼 푸르고 명민한 저 눈자위를 보라.

그는 속살거렸다. 무엇을…….

여자는 어째야 옳을지 모르고 우두머니 서 있었다. 그는 다가들었다. 여자는 방에서 나가려고 몸을 움직이는 순간, 그는 여자의 손을 움켜쥐고 제 입술을 여자의 아름다운 머리칼에 누르고 말았다. 여자는 그윽한 외마디 소리를 치고 그를 밀치며 그양 나가 버렸다.

헬렌을 찾아 무도실로 다시 온 그는 문득 그의 눈앞에서 군중이 사라졌다. 흐늘흐늘 뼈가 모조리 녹아 나린 듯. 강렬한 술이 오른 것이다. 그의 어머니는 보다 못해 그의 귀에 입을 대고 애원하듯,

“라펠아 라펠아, 얼핏 가자. 아버지 눈에 띄면 큰일 난다…….”

아버지란 말에 무너지는 다리를 간신히 버티었으나 저를 일으키는 이가 어머니인 줄도 모르고 잠꼬대같이 속살거린다.

“말을 타고 갈 테요. 알아? 창을 세 번 뚜들길게! 하트의 창을.”

산드멜츠 학원 연구실에서 지금 라펠은 라틴시학(羅甸詩學)의 숙제를 풀지 못해 조바심을 한다. 일가 동생으로 한 학급에 다니는 크리스토퍼 세드로와 둘이서 아모리 생각을 해 보아도 숙제가 풀어질 서광조차 보이지 않았다.

라펠은 주먹으로 턱을 고이고 창 밖을 물끄러미 내다본다. 이슬비와 안개에 싸여 비스출라 강은 묵화를 쳐 놓은 듯이 떠 보인다. 마츰 어선 한 척이 물위를 지나간다. 라펠은 문득 배를 타 볼 생각이 났다. 그는 세드로와 같이 강가로 달려갔다. 빈 배 한 척을 발견하고 다짜고짜로 올라탔다. 어느덧 해는 저물어 검은 그림자가 물얼골을 덮는다.

수없는 얼음덩이가 쏜살같이, 또는 돌로 지은 집이 무너지듯이, 달겨들어 배는 비틀거린다. 사나운 물결에 나부끼는 배는 어느 결엔지 비스출라 강의 주류에 밀려나오고 말았다. 폭포같이 쏟아지는 무서운 울림 ─ 얼음덩이는 사정 없이 뱃전을 친다. 둘은 어쩔 줄 모르고 죽을 힘을 다해 저어 가다가 무엇인지 단단한 것이 닿인다. 두던과 강가에 잇닿은 빙판인 것을 더듬어 알 수 있었다. 둘은 아모튼지 두던으로 뛰어 올랐다. 얼음 위엔 오랜 장마로 물이 괴였다. 문득 라펠은 발부리가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그럴 겨를도 없이 파도가 그의 가슴을 치며 방향도 모를 곳에 밀어내었다. 그들은 얼음물 속에 몸을 잠그고 한참 허우적거리다가 간신히 빙판 위에 올라서면 그 얼음장도 또 꺼진다. 그들은 왼몸에 땀이 흐르면서도 치위에 떨었다. 의복은 모조리 젖어 척척하고 무거워 견딜 수 없었다. 그들은 빨가벗고 말았다. 그들은 달음질을 쳤다. 학원의 시계 울리는 소리에 반대 방향으로 학교에 돌아오게 된 것을 알았다. 이때에야 그들은 자기네가 발가숭이인 것을 깨달았다. 이 꼴을 하고 산드멜츠 거리를 지나가야만 될 일이 기가 막혔으나 담기슭 컴컴한 곳을 골라 그들의 기숙사로 돌아왔다. 조심조심 제 방으로 찾아갈 때 세드로가 교의를 차고 넘어지는 바람에 기숙사 안은 떠들썩하게 되었다. 갑자기 불이 켜지며 감독교수가 나타났다. 그는 촛불을 높이 들어 두 학생의 모양을 보았다. 빨가벗은 그 모양 ─ 게다가 전신에 흙투성이다. 교수는 하도 어이가 없어 한동안 입을 벌리고 다물 줄을 몰랐다.

그 이튿날 아츰에 라펠은 교수회에 불려갔다. 어젯밤 지낸 일에 대하여는 그는 이를 악물고 한 마디도 대꾸를 하지 않았다. 마츰내 그는 처벌하기로 작정이 되어 징벌계 주임의 체조 선생 필짐, 불 때는 소임의 마이케, 문 단속하는 소임 존 카피스트란 세 사람이 그에게 벌을 행하게 되었다. 그러나 남에게 벌을 받을 라펠이 아니었다. 단도와 주먹으로 세 사람을 찌르고 치고 차고, 나는 범같이 날뛰다가 교문을 박차고 멀리멀리 달아나 버렸다.

산드멜츠 학교에서 필경 퇴학 처분을 당한 라펠은 고향 ‘탈니니’ 촌락에서 신산한 그날 그날을 보내고 있었다. 아버지는 그의 얼골조차 보려고 하지 않고 최초의 2주일 가량은 손에 키스하는 것조차 허락지 않았다. 이 망나니는 조그마한 구석방에서 조석을 먹고 짚단 속에서 밤을 지내게 되었다. 주인 영감의 엄명으로 새벽 일찍이 하인들과 같이 일어나고, 갖은 귀찮은 일을 보게 된다. 소와 말 먹이를 감독하고 농노의 일하는 양을 돌본다.

매일 아츰 새벽녘에 가끔 만나기는 누이동생 소피에다. 이 누이하고나 몇 마디 말을 주고받는 것이 그에게 오직 하나 위로이었다. 이것도 아츰뿐이고 이때 이외에는 누이와 이야기조차 금한다. 그의 어머니라도, 이 라펠이란 가문을 더럽히고 망나니요 불명예를 끼친 놈에겐 말을 붙이지 못하는 법이다. 이 망나니에겐 조반으로 우유 한 보시기와 흰빵 껍질을 줄 뿐이고 그것도 그가 거처하는 토막에서 서서 먹고 일각을 지체치 못하고 들에 나가야 한다. 또 왼종일 마구간과 외양간과 고앙에서 지내게 되어 솜같이 피로한 그의 발은 짚 사이에서 허우적거린다.

저녁 때엔 그는 가만히 마구간에 들어가 제가 먹을 빵 한쪽을 암말 빠스카에게 준다. 이 말이야말로 그가 제 속사정을 일러 듣기는 오직 하나 벗이다. 그는 황홀한 듯이 이 말을 바라본다. 갸름하고 모양 좋은 두 발, 그 늘씬한 허리는 말 승냥이 같은 경쾌미가 있고 갈기는 길고 어깨엔 근육이 넘쳐 가슴패기에 혹처럼 살이 뭉툭하게 올랐다. 손바닥을 내밀면 어린애처럼 천진난만하게 춤을 추지마는 한번 성이 나면 고삐도 굴레도 아모 소용이 없다. 구름을 토하는 듯이 입을 크게 벌리고 개천이고 울타리고 할 것 없이 폭풍우같이 날뛰며 달아난다. 탄 사람의 잡아치는 고삐가 그의 입술을 깨트려도 그는 걸음을 멈추지 않는다.

3월 어느 날 밤.

요새는 아버지의 미움도 적이 풀려 라펠은 안방으로 드나들게 되었는데 아버지가 잠들기 전에 신문을 읽어 듣기는 소임을 맡았다. 궁벽한 촌인 탓에 매우 낡은 신문이로되 아버지는 시사에 관한 소식을 주린 듯이 들으려고 애를 쓴다.

잠이 들려는 눈치를 보면 라펠은 마치 자장가나 부르는 듯이 목소리를 떨어트린다. 그날 밤에도 교묘하게 아버지를 잠들게 한 뒤 그는 살그머니 마구간으로 갔다. 그는 빠스카를 끌어내었다. 눈 한번 깜짝할 사이에 그는 말에게 굴레를 씌우고 안장을 지웠다. 빠스카는 밖에 나오며 기쁜 듯이 코를 울리며 쇠다갈로 눈을 찬다. 라펠은 올라탔다. 빠스카는 보드라운 눈을 차면서 매질하는 듯한 회호리바람을 비스듬히 지나쳐 간다. 말과 기사는 마치 미친 듯이 눈 위를 지나쳐 간다. 대담스럽고 기쁜 급속도의 행진이다. 라펠은 기는 듯이 발목을 부둥켜안고 말귀에 입술을 대며 속살거렸다.

“얼핏 다려다 다오……. 얼핏.”

바람을 뚫고 일직선으로 그들은 맹진한다. 방향을 찾아 오른편으로 돌아 약 한 시간 가량 보통 달음질로 몰아갔다. 넓은 들판에서 그들은 걸음을 조금 느리게 하였다. 그는 지나친 피로에 숨이 막히고 말도 왼몸에 땀을 흘리고 피가 끓어 오른 까닭이다. 그는 마츰 길가에서 짚더미를 발견하고 말에게서 뛰어나려 마른풀 한 뭇을 빼어 말안장에 깔아 주고 짚더미를 의지간으로 하여 말을 쉬게 하고 자기도 말 배에 기대었다. 팔짱을 낀 채 그는 몽상에 잠기었다. 이 순간을 그는 얼마나 기다리고 바랐던가. 지금까지 수없는 꿈에 쫓기고 또 쫓기어 그를 예까지 데리고 온 것이 아닌가. 몽상은 뚜렷이 눈앞에 나타난다. 야릇하고 놀랠 만한 이 환영이여! 그는 그의 행복 그것이 있는 곳 가까이 왔다고 생각만 해도 벌써 끝없는 기쁨을 아니 느낄 수 없다. 그를 싸고도는 어둠이 사라나 진 듯이 지금 그의 눈동자는 분명히 제 사랑을 보고 있는 것이다. 그의 상상이 그려내었다느니보담 차라리 실물 이상의 실물이라 함이 옳을는지 모르리라. 그의 눈앞엔 촛불 밝은 방안, 그 차림차림, 그리고 그이, 그이의 행동거지도 낭랑한 그 목소리도……모다 보인다. 들린다. 그이가 보인다. 보인다느니보담 뚜렷한 아름다운 그이를 얼싸안고 있는 것이다. 실현된 꿈을 ─ 그의 혼 가운데 혼을 ─ 그의 생명을 천국의 아름다움에 빛나는 꽃을 그는 안고 있는 것이다. 그이가 그의 눈 앞에 찬란하게 번쩍인다. 이 밤의 어둠 속에 번쩍이는 흰 구름장이 나타나듯. 그 구름이 저절로 그이의 웃음으로 변한다. 이 환영은 저절로 미묘한 음악의 곡조를 일으키고, 그 곡조에 귀를 기울이매 그의 왼몸이 거룩한 혼이 되어 끝없는 공중으로 날아간다.

그는 다시금 말을 채쪽질한다. 그의 향하는 곳은 우거진 숲 속에 어른거리는 조그마한 불 그림자다. 어둠에 익은 그의 눈은 검은 건물의 모양을 알아보았다.

라펠은 말께 나려 가만가만히 걸어간다. 울타리를 넘어 마당에 들어섰다. 짝달막한 과목 위엔 솜모자를 뒤집어 쓴 듯이 눈이 쌓였다. 라펠은 몸을 꾸부리고 조심조심 가지 사이로 빠져 나간다. 마츰내 그의 더듬는 손은 문득 벽에 스쳤다. 왼몸이 기쁨에 떨린다. 이 벽이야말로 그 속에 그이의 육체를 담고 있는 벽이요 그 속에 그이는 고이고이 잠들었으리라.

하트의 모양으로 맨든 창살 속으로 흘러나온 불빛은 어둠 속의 눈 위에 희게 떨어지고, 나부끼는 눈덩이는 그 밝음 속에서 은가루를 뿌리는 듯이 소용돌이를 친다.

그는 필경 창 가까이 들어섰다. 여기 있다 ─ 그이가 여기 있다. 그와 두 발자욱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 헬렌이 있지 않은가 ─ 그이는 팔걸이 교의에 비스듬히 기대어 책을 읽는다. 조금 열린 입술, 투명할 듯한 이마에 라펠의 눈길은 붙은 채 떨어지지 않았다. 물끄러미 그 광경을 보고 있노라니 라펠은 어쩐지 지금 이 창 곁에서 그대로 죽어 사라질 듯하다. 이렇게 굳세고 튼튼한 청춘의 그가 몸 속 어데인지 숨을 모으는 듯하다. 보면 볼수록 그의 눈은 눈물에 흐린다. 별안간 그는 단단한 결심을 하고 팔을 들어 손끝으로 창을 세 번 뚜들겼다. 헬렌은 깜짝 놀란 듯 두 손을 벌린 채 뒤로 물러서면서 소리 나는 창을 본다. 라펠은 세 번 또 창을 두들겼다. 불은 꺼졌다.

가만가만히 라펠은 창에서 물러났다. 눈을 반쯤 감고 지금까지 밝던 방의 기억에 돌아가며 이 난생 처음으로 맛보는 황홀과 기쁨을 넋의 속속들이 들이마셨다. 맨 처음 그 불빛을 알아볼 때의 눈 앞이 아득한 놀램, 꿈결같이 찾아온 이 뜻밖의 행복 ─ 이것도 일순간에 사라지고 차디찬 눈 밤의 어둠이 그를 휩싸고 만다. 그리고 그 다음 순간엔 다시금 환영을 그려낸다…….

문득 침묵을 깨는 듯이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난다. 눈 속에 서서 이 소리를 들은 라펠의 가슴은 단도로 찌르는 듯하다. 큰일 났구나! 그는 하인들을 불러 일으키나 보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그의 몸속엔 사자와 같은 투지(鬪志)가 머리를 쳐든다. 그는 떠벅떠벅 걸어 나아갔다. 그는 이 세상에 아모 것도 무서운 것이 없었다. 그는 문간까지 다가들어 뚫어질 듯이 문을 노려본다. 그러자 그의 귀엔 바람의 흔들림보담도 더 가늘고 작은 속살거림이 들렸다. 눈이 두터운 담요같이 깔린 돌 층층대 위에 그림자같이 헬렌이 나타난다. 그이는 그의 곁으로 마치 몸뚱이가 없는 영혼과 같이 사랑 그것과 같이 나타난 것이다. 그리고 흐르는 듯이 그의 가슴에 몸을 던졌다. 손과 손을 굳게굳게 마주잡고 수그린 이마와 이마가 마주친다. 그리고 두 사람은 묵묵히 걸음을 옮긴다.

넘치는 사랑이 두 사람을 한 사람으로 뭉치고 두 심장은 어데까지 높이 뛴다. 녹아 붙은 두 사람의 넋과 몸에 눈보라는 더욱더욱 사납게 부딪힌다.

두 사람은 라일락 숲 그늘에 발을 멈췄다. 두 사람은 머리를 들었다. 두 입술은 한없는 키스에 맞붙고 말았다. 여자는 사라지는 듯한 소리로,

“당신은 정말 당신이신지? 정말 오셨구려.”

“정말 왔소.”

“말 타고?”

“그럼.”

“춤출 때 약속대로.”

“그럼.”

“말은 어데 있슈?”

“저 밖에 매두었어.”

“말뿐이야?”

“그래, 같이 가요.”

“못 가! ─ 가기는 암만해도 겁나.”

라펠은 목이 숙여졌다. 그의 입술은 또다시 저편의 뺨을 입술을 눈을 찾는다. 그리고도 미흡한 듯이 저편의 털목도리를 벗기고 드러난 보얀 가슴에 황급하게 입술을 대인다. 여자는 덤비는 그의 머리를 밀치며 가만히 그의 주린 듯한 입술이 닿이는 것을 막는 듯이 가는 소리로,

“아파요. 당신의 수염이.”

과연 이 사랑의 용사의 입술 위에는 수염이 났고, 그 수염 끝이 얼어 서리침처럼 되어 있었다. 그런 줄 모르는 그는,

“그럼 이담엘랑 깎고 오는 것이 좋겠군. 말갛게.”

“말갛게 뭘 깎아요?”

“수염을.”

“아냐.”

“아니라니 뭐야?”

“수염을 깎으면 싫어.”

“왜. 아까는 싫다고 하더니.”

“싫은 것은 얼음이 붙은 탓이야! - 아파요.”

둘은 소리를 내지 않고 속으로 웃었다. 라펠은 수염에 붙은 얼음을 녹여 말리고자 죽을 힘을 다 쓴다. 여자도 머리에 쓴 숄을 풀어 머리털로 수염 닦기에 바쁘다. 사내는 여자의 머리털 속에 입술을 묻는다. 꽃 속에 들어박힌 벌의 모양도 이러할 듯. 그의 팔찌에 안긴 것은 타는 처녀의 육체라느니 보담 구체화한 행복과 황홀의 산 물건이라 할까. 그는 행복과 황홀이 넘치는 흰 가슴에서 제 입술을 뗄 때엔 벌써 이지(理智)란 그림자도 남지 않았다. 그리고 또 한번 키스 ─ 이것이야말로 마지막 끝가는 키스로 하늘과 땅의 신비를 쥐어 뜯을 듯이 왼몸의 정열을 뭉쳐 이후엘랑 죽어도 좋다는 각오까지 하였는데 그보담 먼저 여자의 보드라운 팔뚝이 그의 목을 끌어당기며 타는 듯한 입술이 그의 입술을 찾아 달겨들며 훌쩍훌쩍 우는 듯한 한숨이 흘러나온다……. 문득 야경을 도는 하인의 울리는 경적에 그들은 깜짝 놀랐다.

헬렌은 또 한번 왼몸으로 꼭 그를 껴안으며 넋과 넋이 키스를 할 겨를도 없이 어느덧 어둠 속에 사라지고 말았다. 그이의 옷 소리와 발자최는 밤바람 울림 속에 잦아지고 말았다. 그러자 라펠의 귀에는 야경이 개를 내어 놓는 소리가 들렸다. 개들은 라펠 쪽으로 달아온다. 그는 나는 듯이 달아나 말 매어 둔 곳으로 달려와 집어 타자마자 빠스카는 쏜살같이 달리기 시작하였다.

바람과 싸우며 눈 쌓인 들판을 빠스카는 바람결보담도 더 빨리 달아났다. 캄캄한 밤중에 방향도 모르고 그들은 닫는 대로 달렸다. 개를 피한 그들은 들판에서 이리 떼를 만났다. 빠스카와 라펠은 이리 떼와 싸우다가 빠스카는 주인을 위해 필경 이리 떼에게 비장한 최후를 마쳤다. 라펠은 이리를 때려잡은 채 정신을 잃고 말았다.

라펠은 눈 오는 밤 애인을 찾아보고 야경에게 쫓기고 개에게 쫓기고 마지막엔 이리 떼에게 쫓겨 사랑하는 말을 죽이고 자기도 몇 번 이리 떼에게 물리며 찢기며 죽을 힘을 다해 이리를 때려잡았으나 그 자리에 혼절을 하고 말았다.

얼마 동안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헤매이다가 정신을 차리니 어떤 농부의 집에 구원되어 있는 제 몸을 발견하였다.

삼월, 사월! 오월도 벌써 반 넘어 지나 열어 놓은 창 안으로 봄 입김을 따라 새 노래도 숨어든다. 이 길고 긴 동안에 라펠은 몇 번을 죽을 고비에 섰다가 간신히 목숨을 건졌으되 살은 한 점도 없이 쭉 빠지고 여윈 얼골이 검게 타서 보기에도 무섭다. 육체의 쇠약은 차차 회복이 되건마는 그보담도 몇 곱절 정신의 고민이 머리를 쳐든다. 사랑하는 누이들의 입으로 흘려들으면 헬렌은 그날 밤에 생긴 일로 씻지 못할 누명을 쓰고 멀리멀리 쫓겨났다던가. 사랑은 길이길이 잃고 말았다는 느낌이 가슴을 물어뜯는다. 인제는 몸에 남은 상처가 애인의 기억을 불러일으킬 뿐이다. 이 번쩍이는 봄 아츰! 밤 샌 이후 벌써 다섯 시간 동안이나 그는 벽에서 벽으로 기대어 거닌다. 방바닥 위엔 점점이 떨어진 눈물 흔적이 얼룩얼룩하다. 이 생명 없는 눈물 흔적에 마조친 그의 눈은 마치 날카로운 칼로 찌르는 듯이 아프다. 그리고 그의 맘은 문득 질투로 변한다. 흙도 밉다. 돌도 밉다. 들도 밉다. 저편의 개천과 시내도 그 운명이 부러워서 견딜 수 없다. 어느 것을 보아도 아모 고민도 아모 감정도 없이 고요히 널려 있구나.

아버지는 벌써 그를 의절하고 말았다. 다만 상처와 병이 나을 때까지 이 농부의 집에 머물러 있게 하였을 뿐이다. 아버지는 분노가 끝이 없어 왼 집안 식구는 공포에 떤다. 식구들은 이전에도 이와 같은 비참한 광경이 있은 것을 생각하였다. 그것은 맏아들, 곧 라펠의 형이 집에서 쫓겨날 때 광경이다. 그때 맏아들은 육군 사관학교를 급비생(給費生)으로 졸업하고 돌아왔는데 그가 서울에서 얻어온 새로운 사상 문제 때문에 부자의 대충돌이 생겼다. 아버지는 역정이 머리끝까지 올라 채쪽을 걷어쥐고 무서운 얼골로 하인에게 불호령을 내려 맏아들을 매질하라 하였다. 혈기방장한 아들은 지지 않고 칼집에 손을 대었다. 그때 어머니와 누이들이 맨발로 뛰어들어 말렸는데 그 즉시로 맏아들은 집을 나가고 만 것이다. 라펠에게도 이 운명이 닥쳤다.

“엉덩이만 추스리게 되거든 어데든지 제 갈 데로 가라! 내 눈앞에 뵈지말라!”

는 추상 같은 호령이 내린 지 오래다. 마츰내 그 날은 왔다. 간신히 몸을 추스리게 된 라펠은 그날 아츰을 먹는 대로 집을 버려야 할 운명이다. 어머니의 맘으로 그를 지금 먼 숲 속에 산다는 형님에게 보내기로 되었다. 간신히 아버지를 달래어 라펠을 실어 보내려고 다 낡은 마차 한 대와 늙고 여윈 말 두 필을 얻을 수 있었다.

마차의 준비는 끝났다. 떠날 때는 되었다. 그는 눈을 닦고 뒤도 아니 돌아보고 나왔다. 어머니는 눈물을 머금고 문간까지 나와 아버지는 떠나는 때에도 보기 싫다시니 그대로 가라고 손짓으로 알리었다…….

늙고 병들고 뼈와 가죽이 한데 달라붙은 말들은 흔들흔들하는 헌 마차를 끌고 간신히 간신히 비틀비틀 움직이었다. 실길, 기름길, 벼롯길, 시원한 시냇가를 돌기도 하고 그윽한 골 속을 뚫기도 하고……. 라펠은 마부를 달래어 도는 길이로되 델슬라비야 ─ 제 사랑 헬렌의 집 옆을 거쳐 가기로 하였다. 눈 오던 그 밤과 달라 시방은 싹 돋는 봄들에 축축한 바람이 일렁거리고 노랑이 파랑이 길 옆의 풀꽃이 한창이다. 라펠의 눈엔 눈물이 가득히 고였다. 과거 미래 모든 생활은 뒤를 보나 앞을 보나 모든 것이 그 때 그 잊으랴 잊을 수 없는 한 순간의 기쁨과 떨림에 견주어 보면 아모런 빛도 값도 없는 것이다. 지금 지나치는 이 길이야말로 꿈 가운데 몇 백번 몇 천번 오락가락하였던고! 환영 속에 몇 번이나 그려 보았던고! 그러나 그대도록 그리운 이 길이었건만 인제는 이 길조차 희망에 잇닿은 길이 아니다. 수없는 인생의 비참한 길의 하나임을 생각하매 사랑은커녕 오직 죽음을 동경하는 정이 가슴을 누를 뿐이다. 저 멀리 그 집이 보인다. 그 뜰이 보인다. 저 창 바로 밑 화단 가운데 꺼지지 않을 정열의 빛을 보이며 새빨간 꽃이 타고 있다. 그가 환영에 그리는 그 창은 훤하게 열린 채 향기로운 봄바람에 나부끼는 듯, 저편에는 외얏 한 떨기가 땅 위에 축 늘어진 가지를 흔들거리며 옛 비밀을 말하는 듯.

마차는 갈 길을 재촉한다.

이틀 만에야 자기 형 피터 을브름스키가 사는 산정에 당도하였다.

그 형의 오직 하나 충복인 미지크의 인도로 형제는 오래간만에 서로 얼골을 대하였다. 형은 그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그의 얼골엔 동생을 만난 기쁨에 행복 그것과 같은 황홀한 표정이 나타났다. 부모의 안부, 누이동생들의 안부를 자세자세 물은 뒤에 라펠은 제가 집에서 쫓겨난 사실도 빼지 않고 이야기해 버렸다. 형도 집을 뛰어나온 이유를 설명해 들렸다.

“나는 학교 생활 중에 사상이 격변되었다. 책도 많이 보았고 책 중엔 어둔 밤에 횃불같이 번쩍이는 것이 있었다.……우리는 농민의 압박이든가 공공연하게 행하는 부정과 불의에 불같은 분노를 느꼈다. 당시 우리 학생은 남몰래 칼에 맹세하고 이 부정의를 때려 부시지 않으면 안 된다고 깊이 결심한 것이요, 폴란드(파란) 전 민족의 운명은 우리의 두 어깨에 달렸고 우리야말로 이 운명을 타개할 소임을 맡았다고 각오한 것이다. 그래 집에 돌아오자 아버지께 이 말씀을 여쭈었더니 그 벼락이야. 아버지는 내가 불공대천지원수로 아는 놈들하고 한편이 아니겠나. 아버지는 눈 앞의 권력 계급을 위하여 종 노릇을 하라고 호령호령하시지 않겠나. 나는 죽어도 싫다고 버티었더니 아버지는 나에게 참을 수 없는 모욕을 더하시지…… 그래…….”

“알아요. 알아요.”

라펠은 맞방망이를 쳤다.

“그래. 그때 나는 집을 빠져 나와 독일군을 토벌하는 군대에 몸을 던졌다. 독일 병정의 폭풍우 같은 탄환에 수없는 우리 동지는 쓰러졌다.……나도 거꾸러지고 말았다. 그 때 종졸로 있던 사람이 나를 안고 나와 내 목숨을 건져낸 것이다. 그 사람은 너도 보는 바와 같이 우리 집에 있는 미즈크란 사람이다.”

형의 집에서 고요한 세월이 얼마 동안 흘렀다. 유월 어느 날 점심을 마치고 형제끼리 막 사냥을 나가려 할 즈음에 문득 개가 짖었다. 이윽고 혼란한 마차 한 대가 닿으며 키가 후리후리한 귀인 한 분이 그 마차에서 뛰어나렸다.

“긴탈트 공(公)이다.”

피터 대위는 동생의 귀에 속살거렸다. 라펠은 놀란 듯이 이 귀인을 바라보며 입도 벌릴 수 없었다. 다만 공의 너그러운 옷과 번쩍이는 신에 눈이 붙고 떨어지지 않았다. 긴탈트 공은 왼 얼골에 웃음을 머금고 피터 대위와 따뜻한 악수를 하였다.

그들은 사관학교 시대의 동창이다. 그들은 학생 당년의 기염과 고향으로 돌아온 뒤의 사상의 변화와 주위 환경의 변천 등을 친우답게 이야기는 꼬리를 물고 그칠 줄을 몰랐다. 말말 끝에 공은 대위의 소원을 물었다. 대위의 두 눈은 불같이 번쩍이며,

“저를 전쟁으로부터 안고 온 사람은 전하의 신하요 전하의 영지에서 태어난 사람이올시다. 그는 지금 제 집에서 요리인 겸 하인 겸 있는 터인데 저는 그에게 감사한 뜻을 보이려고 해도 도모지 뜻대로 되지 않습니다그려…….”

긴탈트 공은 대위의 눈 속을 들여다보며,

“그러면 그 자를 해방……말하자면 그 자를 하인으로부터 추켜 올려 자네와 동등 지위……즉 귀족을 맨들어 달란 말인가?”

“전하, 제가 말하는 것은 그 사람 하나뿐이 아닙니다. 저는 왼 동리 모든 소작인을 건져내고 싶습니다. 그야말로 비참 막심한 불쌍한 가난뱅이들입니다. 제발 전하의 재산으로……이런 처지에 빠진 부역 농노(賦役農奴)를 구해 주십시오. 지금 제가 그 건의안의 초를 잡고 있는 중인데…….”

“그 문제 같으면야 자네가 나를 의심할 필요가 없잖은가. 나는 최대 속도로 소작농민 상태를 조사하라고 명령하였고 부역 제도를 폐지하고 자네 소원대로 지대제(地代制)를 시행해도 좋다고 생각하네.”

대위는 교의에서 일어나 공순하게 몸을 굽혀 공 전하의 발끝에 입술을 대었다. 그리고 대위는 몸을 채 일으키기도 전에,

“미지크! 미지크!”

하고 불렀다. 그의 눈은 크게 뜬 채 눈물이 가득 어리고 벌린 입엔 행복스런 웃음이 흘렀다. 미지크는 왔다. 두 팔을 딱 붙이고 기착의 자세로 왔다. 대위는 감격에 넘치는 소리로,

“오늘은 고마운 날이다. 전하께서……전하께서……용서를 하셨다. 농노의 해방을.”

미지크가 몸을 굽히고 두 팔로 공의 무릎을 안으려 할 때 별안간 긴탈트 공 전하는 팔 힘대로 하인을 떠다 밀쳤다. 공은 왼 얼골에 분노와 조소를 띠우고,

“나는 아첨은 대기(大忌)다! 오늘 찾아온 것은 자네들이 나에게 불어넣은 이 따위 되지 않은 사상에 대해서 근본적 미움을 보이려 온 것이다. 나는 자네들의 그런 보비위는 사갈보담 더 싫어한다. 그게 무슨 꼴이람! 만일 자네들이 참으로 내 친구일 것 같으면 내 맘속을 믿어 다고! 내가 원하는 것은 고매한 정신이다. 강철 같은 의지다.”

대위의 얼골엔 무서운 주름살이 물결치며 그 두 손은 기절한 듯이 옆구리로 헤엄친다.

“여보게, 자네 어데 아픈가? 옛 병이 또 도진 모양일세그려. 토론은 고만 두세.”

대위의 눈엔 광채도 사라졌다. 미친 듯한 떨림이 왼 몸을 뒤흔든다.

공도 놀라 대위의 얼골을 들여다보며,

“자네 건강이 회복된 때 다시 얘기하세.”

“인제……고만 말을 말아요. 전하.”

“말을 말아라.” 공은 앙다문 잇새로 한 마디 쏘고 교의에서 일어선다.

“그럼 자네에게도 각오가 있겠지. 자네 병이 불쌍타.”

“각오!”

대위는 우레같이 소리를 질렀다.

“병은 병이고 각오는 각오다. 미지크.”

“여보게, 몸을 주의하게. 단방에 죽으리.”

“죽거나 살거나 내 맘이다. 미지크! 권총 두 자루를 가져 와.”

그러자 대위의 머리는 교의에서 떨어졌다. 그 얼골빛은 석고(石膏)와 같이 핏기가 없다. 피를 토했는지 입술 언저리가 붉다. 이마엔 기름땀이 뜨고 온 몸은 부들부들 떤다. 눈엔 생기가 없고 눈자위가 먼 허공을 헤매는 듯 하다.

대위는 그 길로 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부모의 집에서 쫓겨나고 형 하나를 찾아왔던 라펠은 형마저 저승에 잃어버리고 갈 곳을 모르다가 긴탈트 공의 호의로 그의 궁전에 몸을 붙이게 되었다. 그 고색창연한 가운데에도 진선진미 휘황찬란 화려웅휘한 차림차림에 그는 멍할 뿐이었다. 아츰까지 늦잠을 자고 깬 그는 하인의 인도로 식당에 들어갔다. 번질번질하게 차린 신사들 틈바구니에서 그는 헌털뱅이 옷을 걸치고 그래도 비우 좋게 덥적대고 있었다.

그 중에도 더욱 그의 경이의 눈을 뜨게 한 것은 이 세상의 아닌 듯한 아름다운 여자의 한 축이었다. 올리브 빛 피부에 타는 듯한 옻칠 눈동자들! 그 중에도 뛰어나게 아름다운 아가씨 한 분 옆에 긴탈트 공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공의 좌우에는 공의 누이들이 늘어앉았는데 그 아가씨는 아직 십륙세 미만의 어린 색시이다.

그 머리는 물결치는 보리 이삭 모양으로 황금으로 빛나고 벽옥 같은 그 눈은 큼직하게 떠서 마치 푸른 하늘과 같다. 이따금 식탁을 흔드는 웃음의 물결, 그 물결 위에 그 아가씨의 애젊고 낭랑한 웃음소리가 구슬을 굴리는 듯 짓쳐가기도 한다. 옆엣 사람 설명으로 그 색씨는 긴탈트 공 전하의 제일 끝 누이로 엘리자베스 공주인 것을 알았다.

‘공주 엘리자베스!’

라펠은 감격에 넘치어 황홀하게 혼자 중얼거렸다.

연회가 끝날 때 공은 라펠에게 할 말이 있으니 내전으로 들어오란 분부를 내렸다. 그는 상노의 인도로 눈부신 전각을 지나고 또 지나 한 방에 인도되었다.

옆방에서 음악적 웃음소리가 울려온다. 그것은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웃음소리다. 공의 끝누이는 동무 몇과 봄 수풀의 종달새처럼 재깔거리며 라펠의 방 가까이 다가온다. 은방울 같은 공주의 웃음은 투명할 듯이 시원하다.

문득 공주는 문지방 위에 나타났다. 라펠은 허둥허둥 몸을 일으켜 산드메리야 학교식 절을 한죽이 올렸다. 공주는 누구를 기다리는 듯이 잠깐 망설이다가 아모도 오지 않은 것을 알자 발길을 돌렸다. 공주가 발길을 돌리는 그 순간에 그 입술엔 자못 정중하나마 왕자다운 도고한 미소가 떠도는 것을 보았다. 그와 같은 순간에 그는 공주의 한없이 어여쁜 목덜미, 델리케이트한 드러난 어깨, 금실처럼 가닥가닥 떠오르는 듯한 머리칼을 보았다. 그는 다짜고짜 달겨들어 저 금발을 움켜쥐고 몽창몽창 뜯고 싶다……. 눈앞에서 회술레를 돌리고 싶다.

이윽고 긴탈트 공은 나타났다. 그는 대위와 친히 지내던 이야기와 위대한 진리가 끝도 맺기 전에 거문고 줄과 같이 끊어진 것을 슬퍼하였다. 마지막으로 대위 생전에 공 전하가 뀌어 쓴 돈이 있다 하여 라펠로 하여금 의엿한 귀족의 차림을 갖추기에 넉넉한 돈주머니를 내주었다. 라펠은 물러갈 만한 때를 타서 정중하게 머리를 숙이고 전보다 틀이 잡힌 태도로 금빛 비단 돈주머니를 품에 품고 그 화려한 궁전의 복도를 지나며 감개 무량하게 발자최를 옮겼다.

엘리자베스 공주는 라펠에겐 경이다, 수수께끼다. 아모리 생각해 보아도 그 정체를 꼭 집어낼 수가 없다. 언제든지 그의 상상과는 딴판으로 쉴 새없이 변해 버린다. 어느 때엔 봄바람같이 화한 웃음을 짓다가도 어느 때엔 호수의 물얼골에 뜬 흰 구름의 그림자 모양으로 종용해진다. 대리석같이 싸늘한 공주의 몸을 쇠망치로 바수었으면 얼마나 속이 시원할까. 악어와 같은 사나운 키스로 대질렀으면 얼마나 어깨가 으쓱해질까.

팔월도 그믐이 가까워 가을 바람이 불기 시작할 때라 저녁 때면 의례히 말 달리는 놀이가 벌어진다. 라펠의 말은 언제든지 공주의 말 가까이 달렸다. 깊은 숲 속 무시무시한 골짜기로 들어갈 때 그는 몇 번이나 공주의 공포에 찡그린 얼골을 환영으로 그렸는지 모른다. 그러면 그는 얼마나 황홀한 기쁨으로 공주를 구해 내었을까. 그러나 그런 기회는 좀처럼 닥치지 않았다. 마상의 공주는 그야말로 여장부다. 평소의 보드랍고 어여뻤던 거동도 한 번 말 위에 올라앉으면 어데론지 사라지고 그 몸은 쇠같이 굳세고 번개처럼 날쌔다.

한 번은 먼 숲 속으로 말을 놓아 떠났다. 모든 기사는 뒤떨어졌다. 공주의 말만이 마치 총알 모양으로 울펑진펑한 길을 따라 그윽한 숲 속으로 달려들어 갔다. ‘위태하구나!’ 생각하자마자 라펠은 말을 몹시 채치며 그 뒤를 쫓았다. 라펠의 눈앞엔 물결같이 뛰노는 말의 엉덩이와 우단 모자 밑으로 새어서 나부끼는 금발이 어른거릴 뿐이었다. 그의 귓결엔 공주가 구원을 청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자 그는 앞뒤를 생각할 겨를도 없이 팔에 왼몸의 힘을 다 들여 말을 갈겨서 여남은 걸음에 공주의 말보담 앞선 뒤에 다시 돌쳐서서 공주의 말과 정면으로 마조 섰다. 이 순간에야말로 그의 눈의 손톱과 이빨로써 정면으로 공주를 나려 덮쳤다.

“말…… 말 안장이 벗겨져…….”

라고 공주는 크게 입을 벌린 채 폐가 찢어질 듯이 부르짖었다. 그 순간 그는 공주의 말고삐를 잡아 치매 두 말의 몸뚱이는 한데다 붙고 공주의 발과 그의 발이 불이 나도록 마조쳤다. 문득 그는 악마와 같은 충동을 걷잡을 새없이 몸을 굽혀 이 어여쁜 처녀를 두 팔 속에 움켜 안고 말았다. 그 찰나! 공주의 금발에는 지글지글 끓는 입술이 눌렸고 공주의 가슴과 팔은 그의 가슴에……. 그러나! 그러나! 그 서슬에 문득 그의 얼골엔 견딜 수 없는 따끔한 쓰라림이 지나간다. 공주는 번개같이 몸을 빼었다.

“무례한 놈!”

공주는 잇새로 이 외마디 소리를 치자 채찍으로 사정 없이 그의 두 눈언저리를 후려갈긴 것이다. 그는 눈앞이 캄캄해지며 귀가 찢어지는 듯이 울린다. 그는 말에서 떨어졌다.

라펠은 공주에게 혼이 난 뒤에도 궁정 출입을 계속하였으되 긴탈드 공이 멀리 여행을 떠난 뒤에는 꿩 떨어진 매가 되고 말았다.

긴탈드 공은 마음에 무슨 단단한 결심을 하였던지 홀연히 길을 떠나 이탈리아로 프랑스로 편력하면서 당시 나폴레옹 휘하에서 활동하는 파리 출생의 장군과 장교들을 만나 보고 심금을 풀어헤치어 원대한 계획을 꾸몄다.

라펠은 ‘크라코’에서 다시 학생 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는 긴탈드 공이 떠날 때 일년 동안의 숙박비, 수업료, 기타 학교비를 주고 간 덕분에 이번에야 어엿한 수업증서를 얻게 되었다. 그리고 대학원까지 뛰어들고 말았다. 그의 뒤를 보아주는 동창생 야림스키의 권고로 그는 주제넘게 철학을 공부 한답시고 밤이면 극장과 도박장을 휩쓸고 돌아다녔다. 그러다가 그의 오직 하나 후원자인 야림스키와 대수롭지 않은 일로 대판 싸움을 하게 되어 크라코에서도 배겨낼 수 없게 되었다.

그는 비위 좋게 고향으로 돌아왔다. 의절했던 그의 아버지도 인제야 성이 풀린 모양이었다. 그의 박람한 이야기를 듣고 이따금 늙은 눈에 웃음조차 띠우게 되었다. 더구나 그의 어머니와 그의 누이들은 얼마나 따뜻하게 반갑게 그를 맞아 준지 몰랐다. 더구나 누이 소피아는 도회지 이야기, 그 중에도 긴탈드 공 궁전 이야기를 미주알고주알 캐고묻고 또 물었다. 나종에는 라펠이 싫증이 날 지경이었다.

평화로우나 무미한 농촌 생활이 또 시작되었다. 뛰는 피를 억지로 누르고 라펠은 농촌에서 사 년이라는 긴 세월을 보냈다. 긴탈드 공이 외유를 마치고 돌아왔다는 소문을 듣고 그는 공에게 그야말로 만지장서를 올렸다. 겉 사연은 전날에 입은 많은 은혜와 호의에 대해 감사를 표한 것이나, 속살은 제 처지를 통절하게 호소한 것이었다. 그리고 날마다 답장 오기를 기다렸으나 몇 주일은 그대로 지나갔다. ‘왜 그런 편지를 하였을까!’하고 후회할 때쯤 해서 긴탈드 공의 편지는 날아왔다. 그것은 라펠에게 직접 온 것이 아니라 라펠의 아버지한테 온 것이었다. 공은 라펠을 자기 비서로 꼭 좀 써야 되겠으니 제발 청을 들어달라는 사연이다.

라펠은 아버지의 허락이 나자 공이 오라는 ‘와르소’ 궁전으로 뛰어갔다. 이 궁전은 시가지에서 멀리 떨어져 자못 으늑한 곳인데 옛날의 굉걸하던 흔적은 아즉 남았으나마 거칠 대로 거칠어 벽도 퇴락했고 쇠문에도 녹이 슬었다.

공은 놀랠 만치 변했다. 얼골은 검고 마르고 주름살이 많이 잡히고 눈은 광채를 잃었다. 말이 다 끝난 뒤에 공은 엄숙하게 일렀다.

“우리의 저술에 대해서 절대로 침묵을 지켜야 한다. 읽는 것도 얘기하는 것도 또는 행동도 엄비에 부쳐야 된다. 알아듣겠나? 자네는 누구에게도 이 비밀을 지켜야 된단 말이야.”

삼월 어느 치운 저녁 때 라펠은 긴탈드 공을 따라 한 썰매를 같이 타고 마조베카 거리의 ‘붉은 집’이란 비밀결사본부를 찾아갔다. 곰털 외투로 몸을 쌌건만 한열이 왕래하는 것처럼 그는 몸을 덜덜 떨었다. 그 집 대문을 지나 어둑한 길로 그는 들어섰다. 긴 복도에 등잔 한 개가 가물가물할 뿐 어둠속이나 별로 다름이 없다. 그 복도가 끝난 곳에 문이 있고 공이 그 문을 열어 조그마한 방에 라펠을 넣어두고 나가더니 이삼 분 후에 다시 돌아온 때는 검은 ‘프록 코트’에 단초를 모조리 끼우고 검정 양말, 쇠단초가 달린 구두를 신고 있었다.

둘은 덤덤히 텅 빈 캄캄한 방 두 개를 지나노라니 문득 문 하나가 벼락 치는 듯한 무서운 음향을 내며 확 열리자 라펠만 오직 홀로 남았는데 둥근 천장의 들창을 모조리 검정 포목으로 가린 어두컴컴한 방 속에 들었다. 거기는 검정 탁자가 한 개 놓였고 그 위에 백골 한 개, 백골 속에는 초 한 자루가 켜 있다. 좌우를 둘러보매 방구석에는 두개골, 요골, 손발의 뼈가 디굴디굴 구른다.

문득 바람벽이 찢어진 듯이 괴상한 빛이 번쩍하더니 지금까지 보이지 않던 검정 문이 소리 없이 열리며 그 빛 가운데 아까 긴탈드 공과 같은 차림새를 차린 사내 셋이 서 있다. 한복판에 선 사람이 서리 같은 칼을 빼들고 라펠의 앞으로 뚜벅뚜벅 다가오더니 친절하고 부드러운 폴란드(파란) 말로 늘어놓기 시작한다. 그 긴말 가운데 듣는 이의 가슴에 깊이 남도록 되풀이한 말은 ‘자신과 성실’, ‘가난한 이를 두호하라’, ‘절대 복종’, ‘고결’, ‘용기’, ‘침묵’ 등이다.

모든 의무를 혼신의 열성으로 이행하겠느냐, 물을 때 그는 승낙의 뜻을 보였다. 그 세 사람이 사라지고 다른 두 사람이 또 나타나 라펠의 눈을 두터운 수건으로 가리고 그의 옷을 모조리 벗겼다.

“단발마를 넘어라.”

장중한 소리가 외친다. 라펠은 제 몸이 두 사람 사이에 끼어 있는 것을 느꼈다. 제 앞에 선 사람이 칼끝을 제 가슴에 대고 있는 것을 짐작하였다. 아까 그 부드러운 소리와는 딴판으로 냉랭하고 악의를 품은 사나운 말조로,

“네가 바라는 것이 뭐냐?”

라고 묻는다.

“이 비밀결사에 들여 주시오.”

라펠은 대답하였다. 양편에 선 사람이 그를 밀어 몇 바퀴를 돌고 그의 고향, 그의 연령, 기어이 결사에 가입을 하겠느냐, 다만 호기심으로 온 것이 아니냐, 또는 우리의 비밀을 염탐하러 온 것이 아니냐는 등 다심하고 장중한 심문이 뒤를 이어 일어났다. 라펠은 일일이 긍정과 변명을 되풀이하였다. 몇 번 싸늘한 칼끝이 그의 심장에 닿았다. 어데를 오매 경건한 절을 시키고 어데엔 몸을 굽혀 기도하고 또는 무슨 큰 장애물이 있는 것처럼 다리를 높이 들어 뛰어넘기도 하였다. 뺨 곁에서 송진을 지글지글 태우는 데도 지났다. 꿇어앉히고 ‘컴퍼스’ 끝을 가슴에 대기도 하였다. 마지막에는 긴탈드 공의 친절하고 낭랑한 목소리로 맹세문을 읽는 소리가 들렸다. 라펠은 감격에 넘쳤다.

마츰내 결사의 수속은 끝났다. 최후로 이 결사의 좌장의 소리로,

“맹우 제군, 피 병을 가져 오오.”

한다.

한 장사의 손으로 ‘컴퍼스’의 끝을 가슴에 찌르며 소리 높게,

“성법과 진리와 민족의 이름으로 이를 행한다. 금광관(金光舘)이라는 이성 ‘요한네스’의 맹사에서.”

‘컴퍼스’의 끝은 세 번 가슴을 찔렀다. 이 외에도 여러 가지 수속을 밟아 라펠은 비밀결사의 연구생이 되었다.

성 ‘요하네스’ 축제일을 맞게 되자 ‘와르소’에 있는 각 비밀결사에서는 이 날에 의의 있는 사업을 일으키려고 여러 가지로 계획하다가 라펠이 가입한 금광관(金光舘)에서는 부인단체를 규합하여 남자와 같은 조직 밑에 일대 통일을 완성하기로 하였다.

뜻대로 대회 계획은 착착 진행되어 맹원들은 자못 긴장한 가운데 그 준비에 골몰하였다. 마츰내 그 날은 닥쳤다. 부인 비밀사원들도 일당에 모이게 되었다. 한 번 이 운동이 일어나자 이것을 좋은 기회로 새로 가입을 신청한 유지 여성도 많고, 또는 심심파적으로 결사에나 참여하여 활동하고 싶어하는 부인도 많았다.

이 대회 당일에도 새로 가입을 신청한 부인이 하나 있었다. 식이 얼마쯤 진행한 뒤에 회원의 찬성을 얻어 그 부인을 데려오게 되었다.

그 부인은 눈과 왼 얼골을 검정 수건으로 가리고 나타났다. 눈같이 흰 어깨 위에 떨어진 금발, 황홀하게 반쯤 열린 어린애 같은 입술, 제단의 구석구석에 놓인 여섯 개의 알코올 불은 거물거물 신비롭게 춤추어 이 아름다운 여자의 모양을 꿈결같이 떠오르게 한다. 라펠은 멍하게 그 여자를 바라보았다. 가슴은 점점 높이 뛴다. 그의 입술은 묵묵히 움직인다.

“……아아 저 금빛머리……아아 저 입술……입술……”

좌장은 여자에게,

“이름은?”

하고 물었다.

“제 이름은 ‘헬렌 드 비스’라고 합니다.”

라펠은 하마터면 외마디 소리를 칠 뻔하였다. 기쁨과 절망이 나뭇가지를 지쳐 가는 회호리바람 모양으로 그의 왼 몸을 뒤흔든다.

오랫동안 심문과 시련과 예절이 끝난 후 그 부인의 눈가린 수건은 벗겨졌다.

라펠의 눈엔 눈물안개가 끼였다. 이윽고 수건 벗은 그 얼골이 보인다. 숨도 끈치고 정도 끈친 듯이 싸늘한, 또는 미친 듯한 눈자위로 그는 그 얼골을 보았다. 그 시원한 눈동자, 눈썹의 곡선, 봄꽃보담도 더 향기로운 그 뺨! 좌장은 부드럽고 온화한 얼골빛을 띠우며 평화의 키스를 그 여자에게 주면서,

“용서할지어다. 이 평화의 키스를 주는 것을. 이것은 그대가 그대의 형제들과 자매에게 돌려주기 위한 것이니 곧 말과 악수로 이 키스를 모든 사람에게 갚을지어다.”

그는 마치 아름다운 그림자가 떠다니는 것처럼 조용하게 황홀하게 맹우들에게 키스를 주며 움직인다. 그의 내민 손은 봄눈이 떨어지는 것같이 보드랍게 맹우들의 손끝을 스쳐가며 그 입술로는 비밀암호 “Feix”라고 속살거린다. 이 말은 곧 결사를 의미하는 것이다. 이번에는 라펠이 맨 끝에 서 있는 줄로 옮아왔다. 그는 잠깐 망설이는 듯하다가 좌장의 명령대로 또 움직였다. 라펠의 앞까지 왔다. 그는 손을 늘여 라펠의 손목에 대다가 별안간 경건하게 얼골을 쳐든다. 왜 이분의 손이 떨리는가 이상히 여김인듯. 그 입술엔 아모 말도 흐르지 않았으되, 그 눈동자는 물끄러미 움직이지 않고 그 뺨엔 단번에 핏줄이 올랐다. 무너지려는 무릎은 겨우 버티었으나 어찔어찔 현기가 나는 듯. 그는 억지로 얼골을 바루고 가만히 미소를 띠우며,

“Feix.”

그 입술에서 소리가 나왔다. 몸이 또다시 떨리는 것을 검은 구름을 뚫고 나타나는 달의 번쩍임 같은 미소로 흐려 버렸다.

그의 입술은 라펠의 입술에 다가들어 황홀한 접촉으로 떨어졌다. 그 순간의 속살거림.

“……아, 하느님…….”

라펠과 헬렌은 모든 것을 버렸다.

두 사람은 외딴 촌 주막에서 만났다. 마차 한 대가 두 사람을 싣고 달밤의 기름길을 달린다. 신기루같이 떠오르는 산과 산! 그들의 행복은 거기서 기다리는 듯. 달로 꾸민 도회, 신비로운 산협, 속살거리는 숲그늘에 그들의 사랑의 꿈이 가장 깊게 진하게 서릴 줄이야!

두 사람은 서로 몸을 기댄다. 왼몸의 혈관에 불 같은 맥이 뛴다. 때때로 짤막한 이야기, 얼싸안는 말가락, 사라지는 듯한 목청.

두 애인의 세상을 떠난 외로운 모옥(茅屋)은 망망한 고원 한 구석에 서있다. 그 검은 지붕은 늙은 느티나무의 큰 가지로 덮였고 벽으로는 잣나무의 굵은 둥걸을 되는 대로 깎아 맨들어 마치 성벽과 같이 든든히 되었다. 그 중에도 명물은 굵은 못으로 쾅쾅 박은 무거운 문이다. 이 문이야말로 그들이 사람의 고리를 끊고 그 행복의 배를 저어 들어가는 항구의 관문이다. 얼마나 뜨거운 정열을 그 문은 채웠는가!

그 문의 빗장이 아츰마다 덜컹하고 열리는 그 소리는 또 얼마나 그들에게 거룩하고 사랑스러운 것인지 모르리라. 그 때엔 늙은 농부가 가져오는 것은 김이 무럭무럭 나는 끓인 우유, 귀리과자, 꿀, 딸기 등이다.

이 모옥 바루 앞에 목장과 같은 풀밭이 펼쳐져 있고 돌바닥에 흰 물결이 굽이치는 시내까지 딸렸다. 이 풀밭 주위에는 가지각색 돌들이 늘어서서 마치 얼룩 배암이 푸르고 흰 수놓은 옷을 입고 보금자리를 치든 듯. 해가 떠서 이 방안에 맨 처음 광선을 던질 때 나무의 속잎을 지나 들어오는 빛은 색유리창으로 새어드는 것보담 더 아름다워, 마디가 울퉁불퉁한 널쪽 벽에 이 세상에 다시 없는 아름다운 그림을 걸어준다. 애인들이 아츰에 첫눈을 뜨면 그들에게 보이는 것은 이 풀밭이요, 이 풀밭이야말로 그들에게 사랑의 동무다. 풀밭은 그들의 넋과 같이 변한다. 매일 한 풀밭이면서 매일 변하고 보면 볼수록 아름다워진다. 풀밭 가운데에서 바람도 거닌다. 구름도 나려와 춤춘다. 비 오는 날엔 물이 흰 이빨을 보이며 웃는다. 풀밭은 남으로 향해 슬며시 경사가 졌는데 싱싱한 이끼가 담요처럼 깔리고 여기저기 그윽한 소리를 내어 물이 못으로 고인다. 이 못 언저리엔 가지가지 풀꽃이 필 대로 피었다. 자줏빛 붉은 빛 파랑이 노랑이 이름 아는 것 이름 모를 것들이 제각기 피였다. 헬렌은 눈만 뜨면 풀밭으로 뛰어나온다. 꽃들은 의론이나 한듯이 헬렌에게 인사한다. 인사를 하면서 소리 없는 말을 이렇게 속살거린다. 우리는 몇 세기를 두고 아모도 보아주지 않고 추어주지 않아도 저절로 피었답니다. 당신이 애인과 이 풀밭에 오기 전 몇 천년 전부터 수 없는 여름 동안을 피고 지고 했답니다.

이 꽃의 가만한 속살거림을 헬렌은 잘 알 수 있었다. 끝없는 생명의 비밀을 깨달으며 헬렌은 한숨 짓고 꽃에 답례한다.

조각달이 서산에 걸리고 그 어슴푸레한 빛을 아끼는 듯이 어두운 땅 위에 던질 때 헬렌은 애인의 피곤한 팔 속에서 빠져 나와 몸을 창에 기대고 풀밭을 내다본다. 그럴 때엔 꽃들은 그예 시선을 피한다. 그 위를 슬쩍 덮은 장막은 이슬과 안개로 싸놓은 거미줄보담도 더 약하고 은은하다. 그 장막의 속까지 그예 가 보고 싶은 견딜 수 없는 욕망을 걷잡다 못해 헬렌은 맨발로 가만히 문을 열고 조심조심 이슬 나린 찬 돌 위를 밟는다. 고개 숙인 꽃들을 밟지 않으려고 주의주의하면서 꽃 위에 몸을 굽혀 가만가만히 쓰다듬고 어루만진다.

일기 좋은 식전꼭두엔 그들은 두 손을 맞붙잡고 산에서 산으로 거닌다. 시내 건너 물 마른 모래판에 발을 잠그고 숲 속으로 길을 헛들기도 하며 넘어진 나무등걸을 뛰어 넘기도 하고 얼키설키한 뿌리 사이를 기기도 하고 갈라진 바위 뿔다귀를 더위잡고 올라도 간다. 어떤 때엔 사람의 발자최가 일찍이 이르지 못한 층암 절벽의 꼭대기에서 서로 얼싸안고 깊은 잠에 떨어지기도 한다. 또는 같은 뿌리에서 뻗어난 두 가닥 소나무와 같이 서로 껴안은 채 끝없는 창공을 쳐다보기도 한다. 이런 높은 절정에 오르고 보면 그들은 땅 위의 모든 것이 하잘 것이 없고 제 육체까지도 초월해 버린다. 제 뼈와 살과 피가 모조리 제 허물같이 벗어버린다. 이 순간이야말로 그들의 행복의 절정이다. 이 현세의 경계선을 넘어서서 천국의 행복의 문이 열리는 듯. 그들의 사랑은 오누이와 같이 길이길이 깊어 가는 깨끗한 정열로 변해 버렸다.

그는 헬렌의 육체에 벌써 ‘계집’을 보지 않고 다만 영혼을 찾아낼 뿐이다. 물끄러미 서로 들여다볼 제 죽음의 세계까지 엿보는 듯하다. 아니다, 그들 자신이 벌써 죽음이 아닌가. 다만 이따끔 두 눈 속에서 입술에서, 이 땅 위의 육체를 통하여 깍지 낀 손을 통하여, 미소가 흐를 때에만 그제야 그들은 자기가 그 위에 누워 있는 바위의 한 부분도 아니요, 그들의 발아래 움직이는 구름의 한 부분도 아니요, 마치 쌍쌍이 떨어지는 두 줄기 폭포와 같이 아직 이 땅 위의 생물인 것을 알 따름이다.

그 날은 두 사람이 높은 산 옆에 큰 숲이 펼쳐져 있는 것을 나려다보는 동굴 입새에 가로누워 있었다. 이 동굴에는 바위의 들창이 있고 거기서 굽어보면 천길만길의 골 속을 그대로 빈틈 없이 일모지하(一眸之下)에 모을 수 있었다. 여기는 무시무시할 만치 험준한 절벽으로 석회석의 허늘허늘 무너지기 쉬운 봉오리가 뾰족한 탑같이 날카롭게 안개 낀 하늘에 대지르고, 아래는 어둡고 끝없는 굴이 되어 무저나락에 맞잇대었다. 애인들이 시방 누워 있는 동굴은 마치 거대한 바위의 가마 속같이 검고 둥근 바위의 천장이 있고 그 그늘에 쌓인 눈은 바위와 한빛으로 굳어졌으되 그래도 물은 스며 흘러 그 언저리가 축축하다.

뜨거운 햇발이 타는 듯이 두 사람을 못 견디게 굴 때엔 둘은 즐겁게 웃으며 굴 안으로 기어들어 영겁에 사라지지 않는 눈에 잔등이를 슬쩍 대고 태양을 비웃는 얼골찌를 한다. 그들은 그 통쾌한 시원한 맛을 폐 가득히 들어마시고 볕에 그을린 검은 얼골로 태양을 내다본다. 그들은 대지와 창공을 번갈아 보며 몇 시간이든지 그대로 지낸다. 게으른 눈초리로 그들은 산의 오정을 알으켜 주는 선구자를 맞는다. 그것은 번쩍이는 가느다란 구름이다. 오정 때가 되면 마치 가는 바람이 하늘하늘한 치마 주름을 누빈 듯이 설멍한 구름 가닥이 묵묵히 이 땅 위에 다시 없는 아름다운 골에서 봉우리를 향해 움직이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밤이 되어도 그곳을 떠나지 않았다. 어둑어둑해지자 동굴의 입새에 횃불을 태우고 항용 하듯이 두 사람은 외투 속에 들어가서 고단한 잠이 들고 말았다. 밤 샐 때쯤 하여 라펠은 야릇하게 무서운 느낌에 눌려 문득 무거운 잠에서 깨어 바위 위에서 몸을 일으키려 하였으나, 그 순간 몸을 움직일 수 없도록 결박해 놓은 것을 알았다. 오른손을 펴서 가슴속에 넣어둔 단검을 찾으려 하였으되 손이 도모지 움직이지 않는다. 그와 동시에 칼이 없어진 것도 깨달았다. 그는 땅바닥에 엎어진 대로 손은 팔과 팔목을, 발은 무릎과 발목을, 든든한 밧줄로 얼싸서 단단히 결박되어 있다. 그는 몸부림을 치며 이 사태를 알려고 할 때, 헬렌의 미친 듯이 부르짖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몸을 뒹굴리며 배암같이 서리를 쳐서 간신히 머리만을 쳐들 수 있었다. 타오르는 횃불 빛에 보이는 것은 칠팔 명의 산적이다. 그 도적놈들의 뾰족하고 높은 모자는 보기만 해도 무시무시하다. 한 놈은 여우 꼬리를 붙이고 한 놈은 제가 잡은 독수리 깃을 붙이고 한 놈은 이빨 붙은 곰의 악골, 또 한 놈은 이리의 어금니를 붙인 등 이 세상엔 그 무서운 꼴은 처음 보는 것이다.

라펠은 맹연히 몸을 일으켰으나 밧줄이 살을 씹고 들어가 뼈까지 뚝뚝 부서지는 소리를 낸다. 그의 눈엔 헬렌이 보인다. 산적들은 서로 다투며 그를 희롱한다. 라펠은 앓는 소리를 내었다. 그 소리는 마치 철봉과 같이 그의 가슴과 목을 뚫고 쏟아진다. 그의 머리는 사자와 같이 흔들리고 그의 눈은 눈방울이 튕겨 나오도록 이 광경을 노려본다. 헬렌은 절명의 외마디 소리를 친다.…… 그러자 라펠은 산적의 한 놈이 헬렌을 땅바닥에 거꾸러뜨리는 것을 보았다. 헬렌은 미친 듯이 맹연히 이빨로 싸운다. 산적의 손은 그의 웃옷을 찢고 속옷을 찢고 발가벗기고 마지막엔 라펠이 이 땅 위에서 차마 볼 수 없는 극흉극악한 짓을 한다. 라펠은 아귀와 같이 돌을 깨물고 분해 하며 그의 몸은 불길 속에 든 배암과 같이 꾸불거리며 손가락은 바위 뿔따귀를 쥐어뜯어 피투성이가 된다. 그럴 사이 무엇이 그의 등어리에 무겁게 걸터앉으며 그의 머리를 무서운 힘으로 바위 틈에 지질렀다. 인제 그는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게 되었다. 눈은 피투성이가 되어 불의 세계를 보는 듯하고 머리 속은 연기의 소용돌이에 그을리는 듯. 그래도 버르적거려 간신히 또 머리를 쳐든다. 헬렌이 보인다. 헬렌은 다시 그 다음 산적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미친 개처럼 날뛰며 그 산적도 맨 처음 놈처럼 헬렌을 거꾸러뜨리고 맹수와 같이……. 그러나 그때 라펠은 겨우 숨을 내 쉴 수 있었다. 반신 피투성이가 된 벌거벗은 헬렌은 내어민 바위 위에 뛰어오르더니 그 절벽에서 천 길의 골 속에 나는 새와 같이 뛰어나리고 말았다.

오랫동안 혼수상태에서 간신히 깨어난 라펠은 제 몸 위에 큼직한 산적의 외투가 덮여져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머리를 쳐들고 그 외투를 걷어쳐 보니 제 몸엔 당홍빛 바지에 혼란한 웃저고리까지 꼭 산적과 같이 입혀 놓았다. 그리고 그 옆엔 예리한 터키(土耳其) 단검과 든든한 벚나무 곤봉이 있었다. 그러나 그뿐인가, 산적은 이런 무기 외에 두 조각 빵과 한 덩이 산양 젖으로 맨든 치즈와 조그마한 병에 술까지 남겨 두었다. 더구나 놀란 것은 그의 머리와 팔에 붕대까지 감아 놓았다.

그는 일어나 보려 하였다. 그 자리를 움직이자마자 비로소 헬렌이 없구나! 하는 것을 절실히 느꼈다. 머리 위에서 큰 바위가 떨어진 듯이 슬픔의 큰 무게가 그의 존재를 덮어 누르고 그는 아모 저항도 없이 그대로 넘어져 찌그러드는 듯하였다.

그는 산으로 들로 단애로 절벽으로 시내로 숲 속으로 미친 듯이 뛰어다니며 헬렌을 찾았다. 복수의 일념에 왼몸을 태우며 산적의 발자최를 찾았다.

그러나 물론 다 헛일이었다. 그는 사람의 그림자조차 만나지 못하고 말았다. 밤이 되고 낮이 되었다. 해가 지고 달이 솟았다. 입술은 타고 목은 잠기고 가슴은 미쳐 나갈 듯이 펄떡거렸다. 그러나 애인과 원수의 종적은 가뭇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며칠 만에야 그는 사람을 만나기는 만났다. 그것은 열 세 사람의 군대이었다. 그가 산적의 차림을 한 것을 보고 군대는 그를 잡았다. 그는 감옥에 감금되는 몸이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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